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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의 통일〔槪說〕
편집앵글로색슨인은 몇 개의 소왕국으로 나누어져 있었으나, 일시적으로는 한 나라가 다른 소왕국의 반(半)독립을 인정하면서, 이들에게 종주권을 행사하는 수가 있었다. 9세기 초부터 웨섹스가 이 종주권을 장악했지만, 다른 소왕국의 독립은 방해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 때부터 데인인의 침입이 격렬하여 웨섹스를 제외한 앵글로색슨의 여러 왕국은 모두 멸망하고, 템스강 이북의 데인로(Danelaw)를 중심으로 하는 데인인과 잉글랜드의 서남부 웨섹스 왕국이 서로 다투게 되었다. 처음에는 웨섹스 측이 열세로 런던도 빼앗겼지만 앨프레드 대왕 이후, 앵글로색슨인은 공세로 나가 차차 데인인 지역을 회복하고 에델스턴(Ethelstan)왕 때 처음으로 전잉글랜드 왕으로 호칭했다. 더욱이 에드가왕 때 데인로 지방의 데인인에게 자치를 인정했다고는 하나, 잉글랜드 왕국의 일원이라는 것을 서약시켜 앵글로색슨인과 데인인의 융합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10세기 말부터 또다시 데인인의 습격이 격심해지고, 오늘날의 잉글랜드의 기초를 형성하는 데는 1066년의 노르만 정복을 거치지 않으면 안된다.
에그버트의 통일(앵글로색슨 왕국)
편집-統一(-王國)
에그버트(Egbert, 770?
839?)는 802년 웨섹스 왕이 되고, 당시 잉글랜드에서 종주권을 가졌던 머셔국을 부수고 종주권을 얻었다. 이것은 아직 앵글로색슨의 통일은 아니었지만, 후에 잉글랜드를 통일하면서 데인인의 세력을 축출한 웨섹스 왕가에 의한 종주권의 확립이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앨프레드 대왕
편집-大王 Alfred the Great (849
899?)
에그버트의 손자. 영·프 해협의 북부에서는 9세기초의 수십년 간에 앵글로색슨인의 왕국 중에서 웨섹스 왕국이 에그버트 왕 치하에 전국을 통일했다. 그러나 이 통일국가는 9세기 반경에 런던, 캔터베리, 요크를 공격하여 전 영토를 황폐하게 만든 데인인의 바이킹에 의해서 멸망되었다. 에그버트 왕의 계승자 앨프레드 대왕은 패배를 거듭한 후 바이킹에 결정적으로 승리하여 그들을 그리스도교로 개종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후세에 데인로(데인人의 移住地)라고 불리게 되는 잉글랜드의 북동부 일대의 지역을 바이킹이 영유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앨프레드 대왕은 행정적으로는 왕국을 주(州), 군(郡), 10인조(十人組)로 분할했고, 군사적으로는 수많은 성채를 세우고 해군과 육군을 확대하면서 왕국의 조직화를 추진해갔다. 그는 재판 조직을 정비하고 관습법을 집대성하여 단일 법전을 편찬했다. 그는 또 훌륭한 문화인이기도 하여 교육·학예를 융성시키고 스스로 라틴어의 여러 문헌을 앵글로색슨어로 번역했다.베다와 그 밖의 크리스트 교부(敎父)들의 저작을 번역하였으며 보에티우스 등 고전작가들을 민중들에게 소개하기도 했다. 사후에는 전설시가(傳說詩歌)의 주인공이 되었다. 그의 계승자들은 앨프레드가 착수한 일을 완성하여 데인로 전역을 복종시키는 데 성공했으나, 그 대신 이 지역의 백(伯)의 권한을 확대했기 때문에 일종의 봉건화의 단서(端緖)를 열게 되었다. 그중 에드가는 처음으로 영국왕의 칭호를 얻었다. 그의 지배가 미친 곳은 예로부터 앵글로색슨의 영역이었던 섬의 중부 및 동부 지역으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웨일스도 독립해 있었다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그에게 종속되어 있었다. 교회가 행한 영국 제도(諸島)에서의 여러 가지 활동은 효과를 거두었다. 아일랜드에서는 전통을 가진 수도원 제도를 중심으로 하여, 또한 영국에서는 때로 왕의 보호를 받는 조직화된 사제들에 의해서 활동이 추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