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사/중세 유럽과 아시아/봉건제도와 이슬람 문화/유럽의 봉건제도

유럽의 봉건제도〔槪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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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세기경부터 프랑스에서 시작하여 전유럽으로 퍼져 간 사회 체제이며, 시민혁명에 의하여 극복된다. 봉건사회의 기초는 장원제(莊園制)와 농노제이며 이 지배자간의 주종관계를 레헨 제도라고 한다. 봉건제도는 로마의 노예제도와 게르만, 슬라브 민족의 씨족제도의 해체 위에 성립된다. 봉건사회의 기본 계급인 영주와 농노는 일반적으로 로마의 노예 소유 계급(自由人·市民) 혹은 씨족제 사회의 기본 대중인 자유인의 내부에서 발생하는 계급 분화의 결과로 나타난다. 즉 로마에서는 노예제도가 한계점에 도달함으로써 자유인은 일부 대(大)토지 소유자와 다수의 콜로누스로 분열하였고, 씨족제도 사회에서는 귀족과 몰락 농민으로 분열했으며, 이들 콜로누스나 몰락 농민의 자손이 농노가 된다.고전고대(古典古代)에 비하여 봉건사회는 비상업적·농업적·자급자족적인 사회라고 일컬어진다. 그러나 고대의 상업이 직접 생산자와는 상관없는 사치품 무역인 데 대하여, 봉건제도하의 상업은 보다 일상적인 화폐경제의 발전에 관련되는 것이었다.봉건제도에서는 지배자 계급이 국왕→제후→하급 영주→기사라고 하는 피라미드 형태의 정치 질서를 구성하고, 그 정점에 위치한 국왕은 항상 통일의 방향을 바라지만 경제의 지방적·자급적인 성격 때문에 제후·영주의 독립 경향이 강하고, 실질적으로는 지방분권이 봉건사회의 특징 중 하나로 되어 있다. 지방분권화 경향은 노르만인의 침입에 의해서도 촉진되었다. 그들은 배로 자유로이 하천을 항해하여 중앙군(中央軍)이 없는 곳에 상륙했으므로 이들과 싸우려면 지방호족 밑에 뭉쳐서 도시와 성채(城砦)를 발달시키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유럽 봉건제도의 또 하나의 특색은 그리스도교이다. 즉 교회는 스스로 교황→대사교→사교→사제라는 신분 질서를 가지고 광대한 영지를 소유하여 그 자체가 바로 봉건사회를 형성하는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교의 교리 그 자체가 신분 질서의 유지를 도모하는 정신적인 기둥이었다. 때문에 유럽의 반(反)봉건 투쟁은 가톨릭에 대한 이단이라는 외관을 가졌던 것이다.

레헨 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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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制度

군주가 가신(家臣)에게 주는 봉토(封土)를 레헨(Lehnen)이라 하며, 이 레헨을 매개로 하여 성립하는 군신(君臣)간의 보호 충성 관계를 레헨 제도라고 한다. 이와 같은 지배계급 내부의 관계는 교통과 화폐경제가 아직 발달하지 못했을 때 주로 농업에 기초를 둔 광대한 영토를 통일하여 지배할 수 있는 중앙집권적인 관료기구가 존재하지 못하고, 영토를 분할하여 일부분을 신하에게 주고, 그 대가로 군사 의무를 중심으로 하는 충성을 요구하는 간접 통치가 취해졌기 때문에 발생한다. 또 군주의 가신도 마찬가지로 레헨을 매개로 하급 가신을 거느리고, 그에 대해서는 스스로 주군이 된다. 이런 관계가 반복되어 국왕으로부터 가장 하급 영주, 즉 기사에 이르기까지 봉건 영주 계급이 레헨 제도에 의하여 위에서 아래로 연결되는 것이다. 초기에는 어디까지나 자유로운 개인으로서의 주군과 자유로운 개인으로서의 가신 사이에 체결된 개인적인 계약 관계였으며, 한쪽이 계약을 위반하면 다른 쪽도 계약에 구속을 받지 않았고, 또 두 사람 이상의 영주로부터 레헨을 받을 수도 있었다. 레헨은 엄밀히 따지면 토지를 주는 것이 아니라 빌려주는 것이며, 소유권은 주군에게 있다. 따라서 한쪽이 죽으면 계약은 무효가 되고 레헨인 토지는 소유자(주군이 사망했을 때에는 그 후계자)에게 반환되는 것이며, 가신의 세습적인 영지는 아니다. 그러나 주군이 토지를 소유하고 있어서 그것을 레헨으로 신하에게 준 경우도 있지만, 원래 그 지방의 호족인 자에게 형식상 일단 토지를 차출시켜서 그것을 다시 같은 사람에게 줌으로써 군신 관계를 만든 경우도 많으며, 가신이 죽으면 그 아들이 새로 계약을 맺는다고 해도 그것은 형식에 지나지 않고 점차 레헨은 세습화하고, 따라서 가신도 가문으로서의 전통적으로 주군(主君, 主家)에게 봉사하게 된다.

봉건 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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封建諸侯

봉건 영주는 경제적 기초가 자급자족적이고 교통도 발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많든 적든 독립 경향을 갖게 되지만, 큰 것은 형식상으로는 국왕의 가신이면서 스스로 많은 가신을 두고 사실상의 독립 국가를 이루었다. 이러한 봉건영주를 제후라고 한다. 제후는 오래된 많은 부족적인 통합체 위에 군림하는 수장적인 성격이 강하다. 왕권이 발달하지 못했을 경우에는, 일부 제후는 왕의 영토보다도 넓은 지역을 지배하고 있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많은 제후가 강력한 힘을 가지게 되면 나라는 봉건적 분열상태로 빠지게 된다.

기사

騎士 Knight

봉건 영주의 최하층 계급. 농민이 따르는 토지를 레헨으로 받고 주군을 따라 종군하며, 가신을 가지고 있지 않다. 기사적 영주는 두 가지 기원을 가지고 있다. (1) 봉건제도 이전의 사회에서 전쟁은 자유인 모두를 병사로 하지만, 개인적인 목적을 위해서는 특정한 개인의 주변에 계약에 의하여 종사(從士)가 모인다. 이들은 자유인이면서 지도자에게 부양된다. (2) 또 한편 생산력이 발전한 결과 자유인의 내부에 발생하던 빈부의 차가 증대하여 자유인 전체를 지배 계급과 피지배 계급으로 분열시킨다. 이 두 가지의 종사(從事)와 지배층으로 구성된 기사는 일반 민중에 대한 군사력을 독점했다. 이전 프랑크의 재상 찰스 마르텔이 에스파냐로부터 침입하는 사라센 기병에 대항하기 위해서 종래의 보병 제도에서 기사 제도로 군사 체제를 바꾸고, 자력으로 기마와 무장을 할 수 있게 교회령을 몰수해서 기사에게 준 것이 봉건 제도의 기원이라고 전해졌지만 오늘날 이 견해는 후퇴하고 있다.기사가 되려면 7세에 성주(城主)의 시동(侍童)이 되어 예의·종교·음악 등을 배우고, 14세에 종사(從士)가 되어 무술경기(武術競技)에 출전하기도 하였다. 21∼23세에 처음으로 기사가 되며 서임의식(敍任儀式) 때에 입는 적(赤)·백(白) ·흑(黑) 삼색의 상의(上衣)는 서양 무사도의 상징이었다. 즉 적(赤)은 군주와 교회에 바치는 선혈(鮮血)을, 백(白)은 청정(淸淨)을, 흑(黑)은 죽음을 뜻하였다. 용기·정의·예절, 신(神)에 대한 경건(敬虔)과 헌신(獻身) 등은 기사도의 정신이었으며, 특히 귀부인에 대한 헌신과 기사의 무용(武勇)은 물론이고 염치(廉恥)와 절도(節度)의 덕도 길렀다. 중세문학작품에 기사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그러나 14세기 이후, 기사의 군사적 가치의 저하(低下)와 농병(農兵) 또는 용병(傭兵)의 증대에 의해 그 존재가치를 잃었으며, 특히 화폐경제의 발달에 의한 장원(莊園)붕괴와 함께 몰락하였다. 다만, 영국의 경우에는 대부분이 그대로 지주화(地主化)하여 절대주의(絶對主義) 기구(機構)의 번병(藩屛)이 되었다.

기사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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騎士文學

중세 봉건사회의 기사(騎士)의 생활을 취급한 문학. 그 작자는 일반적으로 기사이지만, 왕후(王侯)·교직자(敎職者)나 시민 등도 있다. 프랑스에서 생겨나서 독일 등 전유럽에 퍼졌다. 프랑스에서는 11∼12세기에 발달되었으며, 13세기에는 쇠퇴하였다. 그 쇠퇴의 원인은 도시의 발달과 시민정신의 대두 때문이었다. 프랑스의 기사문학은 남방에서는 서정시, 북방에서는 서사시로 나타났다. 전자는 11세기부터 나타나 12세기에 성행하게 되었다. 그 작자를 트루바두르(음유시인)라고 부르며, 기사의 연애가 중심 테마이다. 후자는 같은 무렵 먼저 무훈시(武勳詩)로서 나타났다. 그것은 봉건사회의 무사의 싸움, 국왕과 신하 사이의 충성·반역 등 살벌한 면을 읊었다. 그런데 12세기부터 같은 북방에서 싸움의 세계보다 사랑의 세계를 취급한 서사시가 나타났다. 그러나 13세기에는 이 사랑은 크리스트교적이 되어 사랑을 위한 기사의 모험이 신앙을 위한 모험으로 변화되었다. 그러다가 시민정신의 대두로 몰락되었다. 귀족을 멸시하고 여성의 공유(共有)를 읊은 「장미 이야기」 제2부는 기사의 쇠퇴를 나타낸 것이다. 한편 독일의 기사문학은 프랑스의 영향을 받아 12세기에 발전되었다. 그 특색도 같으나, 독일의 기사는 대부분이 부자유 신분이었다. 「니벨룽겐의 노래」는 독일의 독자적인 서사시이다.

장원 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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莊園制度

봉건 제도하에서 일정한 토지를 소유하는 영주가 예속되어 있는 농민을 토지에 묶어 행한 경영으로, 봉건사회의 일반적인 경제적 기초라고 한다. 8세기경부터 전개되었고 보통 ‘고전 장원’이 그 근원적인 형태라고 불린다. 고전 장원은 농민의 보유지(소유권은 없지만 이용권을 갖는 토지)와 영주의 경영지로 나누어진다. 경지의 소유권은 모두 영주에게 있고, 농민은 지대(地代, 借地料)로서 영주 영지에서 일한다(賦役). 영주 직영지에 있어서의 노동력으로서는 이외에 영주가 거느리는 노예, 지역과 시대에 따라서는 임금 노동자나 계절 노동자도 있었다. 영주가 독점적으로 토지를 소유하게 되는 경로는 상급영주·국왕으로부터의 레헨 수여, 몰락 소농민의 기부 등 여러 가지이지만, 어느 경우든 그 토지는 이전부터 농민이 경작하였으며, 촌락을 형성하고 있었다. 따라서 농민은 어느 정도, 영주가 누구냐에 관계 없이 자기들의 촌락공동체를 가지고 있었다. 촌락공동체와 장원(Manor)은 반드시 일치하지 않으며, 오히려 하나의 촌락이 여러 사람의 영주에게 분할 소유되는 일이 많고, 한편으로 영주는 그와 같은 장원을 각지에 분산하여 소유하고 있었다. 영주들은 후에 각지에 분산된 장원을 교환 정리하여 한곳에 집중시켜, 한 지역 전체를 지배하게 된다. 고전 장원은 화폐경제의 발전에 따라 큰 변동을 일으킨다. 일반적으로 영주 직영지가 농민 보유지로 분할되고, 지대는 생산물이나 화폐로 지불되는 ‘순수 장원’으로 변모해 가는데, 반대로 영주가 직영지 경영을 강화하고 부역(賦役)을 강화하여 생산물을 시장에 내놓는 경우도 있다.

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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領主

봉건적 토지 소유자. 영주가 된 자는 게르만·슬라브의 귀족, 구(舊)로마 귀족, 수도원, 교회 등이고 최대의 영주는 왕 그리고 로마 교황이다. 봉건적인 토지 소유자가 근대적 토지 소유자와 다른 것은, 토지에 대한 소유권이 단순한 소유에 한정되지 않고, 그 공간(空間)에 대한 지배권까지도 의미하는 것이다. 즉, 영주는 그 장원에 관한 한 상급 지배권이 미치지 않는 권리를 가지며 과세되지 않고(不輪不入權), 경찰·재판권을 갖는다. 유럽 봉건 영주 가운데 특히 주의해야 할 것은 수도원인데, 적극적으로 개간하였고, 기부로 영토를 넓혔다. 수도원은 로마 교황에 직속되기 때문에, 각국 국왕은 자국 내에 스스로 손을 댈 수 없는 광대한 경작지를 가지게 되어, 유럽 중세의 전개에 중대한 영향을 주었다.

농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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農奴

장원 농민을 농노라 한다. 농노는 노예와 달라 경작지를 보유하고, 농구를 소유하며, 자기 생계는 스스로 영위했지만, 자본제하의 소작인과는 달라서 토지에 긴박(緊縛)되어 신분적으로나 인격적으로 영주에 종속되어 있었다. 그들은 부역 외에 도로·교량을 개수(改修)할 의무, 교회에 생산물의 10분의 1을 바치는 10분의 1세를 부활하고, 혼인이나 사망에 대해서까지도 과세되는 등 비참한 생활을 영위했다. 압제에 대한 그들의 투쟁·봉기는 중세 전체를 통해 곳곳에서 되풀이되는데 대개의 경우 승리한 후의 전망이 없었고, 전국적인 연관을 갖출 수 없었기 때문에 각개 격파되었다.

결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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結婚稅

농노가 다른 장원영주(莊園領主)의 지배하에 있는 농노와 결혼하는 경우 영주에 납부하는 일정치 않은 공조(貢租). 주로 결혼하여 장원을 나가는 여자들만이 지불한다. 농노의 결혼은 영주의 노동력 상실을 뜻하는 것으로, 이에 대한 손해 배상으로 약간의 금액을 지불케 한 것이다. 따라서 같은 장원내에서의 농노의 결혼에는 이것이 필요하지 않았다. 이 결혼세는 농노해방과 더불어 소멸되었다.

부역(노동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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賦役(勞動地代)

부역이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정치적 지배자에 대한 피지배자의 노동급부(勞動給付)로 보는 광의의 해석과 봉건지대(封建地代)의 한 형태인 노동지대(勞動地代)로 보는 협의의 해석이 있는데, 서양에서는 후자를 택했고, 동양에서는 전자를 택했다. 농노가 영주(領主)의 직영지(直營地)에서 부역이라는 형태로 잉여노동(剩餘勞動)을 경제외강제(經濟外强制)에 의하여 바치는 지대는 일반적으로 농경부역(農耕賦役)·운반부역(運搬賦役)·잡역(雜役)으로 구분된다. 부역의 기간은 계절에 따라 구분된다. 겨울 부역(賦役)에서 농노는 주(週)에 3일간은 가내노동(家內勞動), 여름 부역에서는 농경의 제초(除草), 가을 부역에서는 주에 4∼5일 동안 수확에 종사하였다. 서유럽에서는 장원제도(莊園制度)의 붕괴와 더불어 소멸하여 생산지대(生産地代)로 전화(轉化)되어 갔으나, 동유럽에서는 근세까지 존속했다.

중세의 촌락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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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世-村落共同體

장원은 영주측에서 본 농업경영체이며, 농민의 생활 기초인 촌(村)과는 일치하지 않는다. 촌락공동체는 씨족제 사회까지 소급되는 것으로서 경작지의 소유 자체가 개인에 의해서가 아니라 공동체 전체로서 행하여졌다. 중세의 촌락공동체에서는 벌써 경작지는 사유화되었지만 농민의 경작지는 이웃 농민의 경작지와 혼재(混在)하기 때문에, 자기 경작지에 가기 위해서는 타인의 경작지를 통과해야 하며, 개개인의 노동은 불가능하여 경작·파종·제초·수확은 모두 함께 행해지고, 또 공동 경작이 행하여졌다. 이러한 공동작업·일제작업은 공동체가 결정했다. 이것은 필요하기도 한 반면, 자유로운 개인의 발전을 억제시키는 역할도 했다. 경작지의 주위에는 삼림·목초지로 이루어진 공동 이용 지역이 있고, 농민은 여기에서 땔감·목재·목초를 채취하고 방목을 행하였다. 또 촌락공동체는 영주 지배의 확립 후에 발생했다고 하는 견해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