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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리스의 쇠퇴〔槪說〕
편집기원전 431년, 이제까지 대립만을 지켜오던 아테네 맹주의 델로스 동맹 대 스파르타 맹주의 펠로폰네소스 동맹(스파르타, 코린토스 등의 여러 폴리스가 아테네의 움직임에 저항하여 스파르타를 맹주로 하고 맺은 반(反)아테네 공수동맹)이 개전(開戰) 이후 약 30년간 그리스 전역을 휩쓸고, 겨우 끝났을 때는 황폐함이 비길 데 없어 회복할 방법이 없을 것 같아 보였다. 아테네는 개전했을 때 우세했으면서도 2년 후 예기치 않은 질병 페스트와 유능한 지도자 페리클레스를 잃고 전세가 역전되었다. 그간 국부적인 승리에 따라 강화를 맺을 기회가 있었으면서도 모두 놓쳤으며, 기원전 404년 스파르타에 항복하였다(펠로폰네소스 전쟁). 이 대전의 특색은 일국 대 일국의 싸움이 아니고 폴리스 연합 대 폴리스 연합이라는 국제전쟁의 성격을 띠고 있었던, 말하자면 세계 전쟁의 폴리스판(版)이었다. 그런만큼 전화가 미친 곳은 피해가 막대하였다. 그러나 그보다는 폴리스 세계의 정정(政情) 불안과 모든 모순이 일시에 드러나서 또다시 전쟁을 초래, 기원전 371년 레우크트라의 일전(一戰)에서 패권은 테베(Thebai)로 옮겨졌다. 에파메이논다스(전 420?
전 362:테베의 장군)의 새로운 전법에 의한 우익철추(右翼鐵追)의 밀집진형(密集陣形)이 효과를 나타낸 결과이며, 이 전법은 후에 북방 마케도니아군에 의해 답습된다.그간 불온한 것은 동방의 대제국 페르시아의 동정이었다. 벌써 펠로폰네소스 전쟁 중에 스파르타는――하필이면 아테네에서의 교만한 망명자 알키비아데스의 헌책(獻策)에 의해――자기 함대의 급양 자금을 페르시아에서 원조받는(전 412년 여름의 원조조약), 그리스 민족에 대한 배반 행위를 하면서 전쟁을 했는데, 폴리스 세계는 페르시아에 의해 얕보여져 이 때부터 금력에 의한 페르시아의 내란 개입이라는 간단하지 않은 사태가 일어났다. 전란에 의한 토지의 황폐·집중과 중견시민의 몰락, 끝없는 정쟁(政爭)과 망명의 반복――이들은 폴리스의 시민사회를 근저로부터 파헤쳐버려 시민군(市民軍) 체제의 붕괴를 초래하게 되지만――이와 같은 사태는 따로 임금(賃金)을 목적으로 하는 용병들을 대량으로 만들어 냈다. 그들은 필요에 따라 어느 곳에서나 싸웠으며, 페르시아 대왕이나 사트라프에게도 사용되는 자가 부지기수였다(크세노폰의 『퇴각행』 등). 페르시아로서는 폴리스 세계의 분열 항쟁만이 목적이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한쪽에서는 스파르타와 통하고, 동시에 아테네, 테베, 기타를 경제 원조하는 등 폴리스 사이의 전란을 조장하고(예를 들면 코린트 전쟁. 전 395
전 386), 교묘하게 조정하여 그 결과인 ‘안탈키다스(스파르타 장군) 화평조약’에 있어서는 페르시아 대왕의 칙명에 그리스인끼리의 전투가 정전되는 식의 어이없는 종말이 되었다. 그 결과 소아시아 연안의 그리스의 여러 폴리스는 완전히 페르시아 영토화가 되었다. 오래 끌었던 아테네 대 스파르타의 항쟁은 이것으로 끝이 났지만 그 때문에 교묘하게도 ‘대왕의 평화’라 불리고 있다.닥쳐오는 페르시아의 위험을 누구보다도 빨리 꿰뚫어 보고 세상에 알린 것은, 유명하지는 않지만 아테네 시정의 정치평론가 이소크라테스(전 436
전 338)이다. 그는 벌써 기원전 380년의 올림푸스 『파네기리코스(大祭演說)』에서 그리스 본토의 여러 폴리스의 분립 항쟁을 즉시 정지하고, 연맹하여 동방의 적 페르시아를 치도록 할 것을 웅변으로 호소했지만 채택되지 않았으며, 또다시 여러 공개 변론에서 북방 마케도니아의 영주 필리포스에게 기대하도록 역설했다. 이에 반하여 보수주의에 투철한 변론가 데모스테네스(전 384
전 322)는 폴리스의 자유를 고집하여 반(反)마케도니아를 부르짖고, 페르시아에 발탁해서라도 마케도니아와 전선의 형성을 실현시켰다. 예부터 전해진 필리포스 혹평은 이 비장한 애국적 웅변가에게 과오를 범하게 한 것이다. 그리스 세계는 벌써 혼자 힘만으로는 회복할 수 없는 병폐 때문에 자멸 직전의 상태였던 것이다. 기원전 338년 8월 2일, 중부 그리스·케로네아의 일전으로 모든 것이 끝났다. 이날 서둘러 조잡하게 편성된 그리스 연합군이 정예 마케도니아군에게 어이없이 궤멸, 도시국가(폴리스) 그리스는 마침내 그 역사를 끝맺는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편집-戰爭
기원전 431∼404년에 아테네 진영과 스파르타 진영 사이에 일어난 전쟁. 아테네는 델로스 동맹을 아테네 제국으로 변용시킴으로써 세력을 강화하려 했다. 아테네는 동맹 가입이 자유라는 원칙을 인정하지 않고, 때에 따라서는 동맹을 이탈한 폴리스를 무력으로 재가맹시키기도 했다. 그후 아테네는 일관되게 민주 정체를 지지하며, 때로는 무력으로 이를 강요하며 주둔 부대를 파견하기도 했다. 외부로부터 강요된 민주 정체는 결국 민주파로부터도 혐오를 받는 결과가 되어 과두파의 반발을 야기시켰다. 아테네의 권세와 예술적·문화적 발전이 절정에 달해 아테네는 동맹시에 대해 최대의 내정간섭을 했다.이와 같은 정세는 동맹시뿐만 아니라, 아테네에 위협을 느끼고 있던 독립된 폴리스에게서도 불안과 원한을 사게 되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코린토스로서, 그들은 식민시(植民市)의 대부분을 서쪽에 갖고 있었기 때문에 아테네의 해상진출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 결국 아테네는 코린토스의 식민지에 내정간섭을 시작하였고, 메가라에게는 델로스 동맹의 항구와 시장에서의 추방을 요구하여 불만을 품게 만들었다.아테네를 중심으로 한 델로스 동맹에 대항하여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코린토스와 메가라 등의 여러 폴리스는 스파르타를 맹주로 하여 펠로폰네소스 동맹을 맺고 아테네와의 전쟁을 결의하였다. 충돌의 불가피함을 깨달은 아테네의 지도자 페리클레스는 농성전술(籠城戰術)을 택하여 스파르타 왕 아르키다모스가 이끄는 육군과의 정면 충돌을 피하여 적보다 더 우세한 아테네 함대로써 교통로를 차단하여 적의 연안지대를 유린했다. 그러나 뜻하지 않은 사태가 발생하여 계획은 좌절되었다. 인구가 과밀한 아테네에 질병, 즉 페스트가 발생하여 군대로까지 번졌던 것이다. 시 전체의 분노에 희생이 된 페리클레스는, 독직(瀆職)으로 규탄되어 벌금형을 선고받고 파면되기에 이르렀다. 페리클레스는 이듬해 재선되었으나, 그 해에 질병에 감염되어 사망하고 말았다. 페리클레스가 죽은 뒤 적당한 후계자가 없었기 때문에 당쟁이 재연되었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전쟁 수행에도 악영향을 끼쳤다.제국지배를 포기할 수 없었던 아테네는 급진적인 민중지도자로 악명 높은 클레온에 의해 전쟁이 계속되었다. 클레온은 민중을 조종하여 독재정치를 자행하는 중우 정치를 행하였다.클레온과 스파르타의 장군 브라시다스는 기원전 422년 안티폴리스 전(戰)에서 함께 전사하였고, 이듬해 니키아스의 평화조약이 체결되어 전쟁이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이 평화조약은 지속되지 못한 채, 아테네는 아르키아데스의 확대정책으로 시칠리아 원정을 시도하였는데, 스파르타가 이를 간섭하여 무참히 패하였다. 제국 지배가 백지화된 아테네는 기원전 405년 아이고스포타미전투에서 패하여 제해권(制海權)을 완전히 상실, 델로스 동맹도시들은 점차 아테네로부터 떨어져가 이듬해 스파르타에 항복하였다. 아테네는 함선을 스파르타에게 인도하고 델로스 동맹을 해체하였다. 이후 아테네는 그리스의 정치·경제의 중심지가 아닌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