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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문화〔槪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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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세계의 조숙 지대라 할 수 있는 이오니아(소아시아 연안)에는 재빨리 서정시가 나타났는데 최초의 학문적 사색도 기원전 6세기에 이 지방에서 비롯되었다. 그 첫번째가 탈레스(전 640?

전 546?), 계속해서 아낙시만드로스(전 611

전 546?), 아낙시메네스(전 585?

전 528?) 등, 끝으로 헤라클레이토스(전 500?). 그들의 관심은 세계의 물질적 구성의 원리, 즉 시원형질(始源形質)은 무엇인가라는 의문이었다. 그 결과 ‘물(탈레스)’, ‘무한자(無限者:어떤 무규정한 것, 아낙시만드로스)’, ‘공기(아낙시메네스)’ 등 사변(思辨)에 대한 답변은 여러 가지인데 어느 것이나 자연을 물리적으로 모색하고 있으므로 그들을 이오니아의 자연철학자라고 부른다. 이오니아의 학문적 최성기는 이 때까지이다. 왜냐하면, 그 곳이 페르시아 전쟁의 소란한 전쟁터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며, 예를 들어 피타고라스(전 582?

전 497/6) 등이 서쪽 대(大)그리스 식민지(남이탈리아·엘레아)에 옮겨, 이후 얼마 동안 그곳이 학문의 중심지가 된 것이다(엘레아파).페르시아 전쟁의 쾌승은 그리스인의 문화 창조에 있어 가장 큰 영향을 끼쳤다. 이를 계기로 철학이 문학·예술상 크게 변화를 보인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그리스인의 관심의 중심이 신화에서 그리고 자연에서 탈피하여 모두 인간 그 자체에 집중한 것이다. 대승리는 그들에게 인간의 능력과 의지에 대해 자신을 주고, 이것이 ‘인간 관심의 문화’ 창조에 대한 충동이 되었다. 그리하여 전후(戰後) 이 곳에 찬란한 ‘고전기’가 시작된다. 이것이 오늘날 우러러보는 그리스 문화인 것이다. 중심지는 또다시 이동하여 이번에는 페르시아 전쟁을 승리로 이끈 아테네가 다음 세대의 기수가 된 것이다.철학哲學

철학은 이미 자연에 대한 관심을 잃어버리고, 인간 철학 즉 시민적 윤리의 학문이 되었다. 더구나 민주정치의 근본은 변론 능력이 필수이고, 그 사회적 요청 때문에 변론·논리를 교수하는 ‘소피스트’들이 배출, 세상에 이름을 날렸다. 그들은 교묘한 변론을 으뜸으로 삼고서 흰 것을 검다고, 말로 상대방을 설득하는 ‘묘기(妙技)’를 전문으로 하여 진리의 탐구를 잊어버렸다(오늘날 소피스트[Sophist], 즉 궤변가라는 의미는 여기에서 나왔다). 이 한심스러운 풍조를 바로잡으려고 몸을 바쳐서 지선(至善)을 설파하며 실천한 사람이 소크라테스이다. 스승의 유훈을 서술한 플라톤의 데이아로고이는 또 그리스 문학의 백미(白眉)이지만 이데아론 철학은 미완성 체계이면서도 그렇기 때문에 가장 아름답고, 그리스 철학 최고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제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지식을 집대성·체계화하여 학문으로 분류한 업적의 양적(量的)인 크기 때문에 학문의 조직자로서 후세에 커다란 영향을 남겼다.문학文學

문학 부문에서는 먼저 연극(드라마)이다. 제전에 있어 신악(神樂)의 경연(競演)인 「산양(山羊)의 노래」(「비극」은 오늘날 유럽어로부터의 의역)는 전쟁 후 마라톤의 용사 아이스킬로스를 얻어 일약 최고조에 달했다. 다음 소포클레스·에우리피데스(Euripides)를 거치는 반세기는 그리스 극문학상 압권이다. 제목이나 소재는 신화와 전설에서 따왔으며, 3자를 그 공통의 「3부작」의 테마, 아트레우스가(家)(오레스테스 그 외)·라부다코스가(家)(오이디푸스 그 외)의 각 애사(哀史)에 주는 신의론(神義論)의 태도로부터 비교하면, 아이스킬로스는 신들의 섭리와 인간 정의 사이의 모순을 모순으로서 그대로 표현하고 그 대신에 신들의 장대함과 불가지성, 심판의 무서움을 강조한다. 관객들은 단순히 그 장대함과 모순의 긴장에 압도당해 버린다(셰익스피어의 비극 작품은 그에게서 큰 영향을 받고 있다). 소포클레스는 신의론적 모순을 애써서 줄거리에서 빼버리고 섭리와 정의의 양자 조화를 이룩하려 했다. 그러므로 이야기 자체는 하잘것 없었으나 관객은 오히려 긴장감 없는 안도감과, 조화·원만함을 좋아했었다고 전한다. 섭리와 정의의 상호 모순에 제일 정열을 쏟은 사람은 작가 에우리피데스였다. 그는 예술가로서 아마도 가장 예민하게 문제 의식과 비판을 함께 다루어 나갔다. 그는 신에 대한 회의를 정면으로 적나라하게 밝히고 그 결과를 수습하지 못한 채 드라마를 끝낸다. 신들은 부정되고, 인물은 영웅다움을 잃고, 그 부조화, 암담한 고뇌, 비관주의는 아테네 시민들이 즐겨하지 않았다. 현대에서 그의 사상성과 혁신성에 공명(共鳴)하여 보다 높은 평가를 추증(追贈)하고 있는 형편인 것이다.산문散文

산문에서는 헤로도토스, 투키디데스의 「역사」가 중요하다. 전자는 대승리의 감격을 가지고 재미있게 페르시아 전쟁을, 후자는 ‘용이하지 않은’ 중대 인식(重大認識)으로부터 냉철하게 그 당시 교전중이었던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서술했다. 헤로도토스는 오늘날 전해 오는 완전한 사서(史書)의 효시이므로 ‘역사의 아버지’라고 불리지만, 필치는 단순해서 모든 호기심을 끌 듯한 이야기들을 모아 읽을거리로는 즐길 수 있으나, 반드시 엄밀하지는 않다. 그에 반해서 투키디데스의 작품은 의식적으로 흥미 본위를 배제하고, 확실·정확·객관적이므로 사학사상(史學史上) 그 의의는 오히려 높게 평가된다.희극喜劇

희극은 그리스어의 코모이데이아라는 어휘 그대로 원뜻은 ‘시골 연극’이었지만, 대천재(大天才) 아리스토파네스에 의해 면목이 일신되었다. ‘비극’이 국영 연극임에 대해서 이쪽은 사적(私的) 연예. 그러나 그 주장은 정치·사회의 풍자에 있으며, 해학(諧謔)이나 야유 속에 위장시켜 교묘하게 높으신 어른을 골탕먹이며 세상을 비판하는 등 여간 멋있지 않다. 말씨도 똑떨어진다. 과연 고대의 저널리스트. 착상도 기발하여 부인들의 성적(性的) 파업에 의해 남성들을 굴복시켜 전쟁을 중지시켜 보자는 「여자의 평화」 기타, 에로가 노골적이고 현금의 번역자를 당황하게 만드는 천한 결말도 많지만, 얼빠진 듯이 보이나 건강하고 또 반전(反戰)·반속물(反俗物) 근성의 백본(back bone)은 의연하게 흐르고 있다. 여러 희극 작가 중 혼자 유달리 뛰어났었다.미술美術

미술면에서의 특색은 그리스에서 항아리 그림 외에는 회화(繪畵) 예술이 없었고, 미술이라고 하면 모두 조형미술(조각·건축)뿐이다. 고전기에는 피다아스(Phidias:아크로폴리스에 『파르테논』 축조), 폴리클리투스(조각, 아르고스)가 나와 균형·조화를 자랑하는 그리스 미술의 황금 시대를 이루었다. 특히, 도리스식 신전의 극치를 나타내는 파르테논 신전은 조영(造營)은 조각가 페이디아스의 총감독하에, 설계는 익티노스, 공사는 카리쿠라테스에 의해 진행되었다. 신전의 안정된 비례와 장중함은 고전 그리스 시대 정신의 집대성이라 할 수 있다.후자에는 합리적으로 인체미의 표준을 산정(算定)한 저서 『규범』이 있다.

소포클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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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phokles (전 496∼전 406)

그리스 최대의 비극 시인. 아테네의 부유한 기사의 아들로 태어나 아버지 소필로스(Sophilos)로부터 음악교육을 받았으며 기원전 468년 디오니소스제(祭)의 비극 경연에서 선배인 아이스킬로스(Aiskhylos)를 물리쳐 명성을 떨쳤다. 한때엔 정치생활에 들어가 요직을 여러 번 역임하고 또 해군 제독으로서 활약한 바도 있어 그의 뛰어난 재질, 미모와 함께 아테네의 우상이 되고 시민으로부터 큰 사랑을 받았다. 그는 극에 있어서 3부극(三部劇)을 폐지하고, 합창대원을 늘리는 등 극의 단순성을 극복하였으며 치밀한 구성, 완벽한 기교 등으로 비극을 완성시켰다. 비극·송가·비가(悲歌)·잠언 등 123편의 작품을 썼다고 하나 현존하는 것은 7편뿐이다.

투키디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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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ucydides

(전 460?∼전 395?)

그리스 아테네의 역사가. 펠로폰네소스(Peloponnesos) 전쟁에 종군, 전쟁 중에 암피폴리스(Amphipolis)의 구원이 늦었다고 실각되어 망명. 후에 아테네에서 암살당하였다고 전한다. 엄정한 비판 정신과 통찰력을 가졌으며, 실용적 역사 서술의 비조이다. 저서로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사』가 있다.

헤로도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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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rodotos (전 484?∼전 425?)

그리스의 역사가, 여행가(旅行家). 역사의 아버지라고 일컫는다. 소(小)아시아 출신인데, 후에 아테네 시민이 되었다. 페르시아 전쟁을 주체(主體)로 하여 오리엔트(Orient) 여러 나라의 역사·풍토·전설과 그리스의 여러 폴리스(polis)의 역사를 서술(敍述)해서 이야기식 역사의 전형(典型)을 이루었다. 저서로는 『역사』가 있다.

파르테논 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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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神殿 Parthenon

그리스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 언덕에 있던 도리아식의 신전. 기원전 479년 페르시아인이 파괴한 옛 신전 자리에 아테네인이 아테네의 수호여신 아테나에게 바친 것으로, 도리아식 신전의 완성의 극치를 나타내는 신전이다. 당시의 건축가인 피디아스와 그의 제자들에 의하여 건축과 장식 조각이 이룩되었다. 기원전 447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기원전 438년에 완공하였다. 1687년 투르크의 공격으로 많이 파괴되었고, 1801년 조각의 대부분은 대영 박물관에 옮겨져 보관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