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사/인류 문화의 시작/그리스도교의 성립/후한제국의 붕괴

후한제국의 붕괴〔槪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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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망(王莽) 말년에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는데, 한실(漢室)의 혈통을 이은 남양(南陽:허난성 남부)의 호족 유수(劉秀)는, 남양과 하북의 호족들의 지지를 받아, 적미(赤眉) 등의 농민 반란군이나 다른 호족군을 진압하고 25년 뤄양에 도읍을 정하여 제위에 올라, 광무제(光武帝), 한제국(漢帝國)의 부활을 선언했다. 이로써 후한제국이 성립된 것이다. 광무제는 전한의 여러 제도를 규범으로 하여 내정의 정비에 힘을 기울여 정국의 안정을 회복했다. 남(南)흉노를 예속시키고, 동북의 오환(烏桓)·선비(鮮卑)에 대한 방위를 굳히고, 남쪽의 여러 민족을 평정하였으며, 서쪽의 강(羌)족을 쳤다.후한은 4대 화제(和帝) 때까지는 국력이 충실하여 흉노를 격퇴하고 서역을 복종시켜서 동서의 교통로를 확보했다. 그러나 2세기에 들어서 유약(幼弱)한 황제가 계속된 것이 원인이 되어 조정에서의 환관(宦官)·외척(外戚)의 힘이 강해졌고, 특히 유가적 교양을 갖춘 청류기절(淸流氣節)의 학자들이 이에 대항하는 등, 국가 중추부에 있어서의 통일성이 무너지기 시작하였고, 국가는 일반 농민들의 생활과 생산 활동을 보장하는 기능을 잃어갔다. 또한 각지의 호적들은 전한(前漢)에 비해 더욱 토지 겸병(兼倂)을 심하게 하여 일반 농민을 압박했다. 불안정한 상태에 놓이게 된 농민들 사이에는 태평도(太平道), 오두미도(五斗米道) 등의 주술적(呪術的) 민간신앙이 침투하여 마침내 184년에는 이들 종교에 의해서 단결한 농민들에 의한 황건(黃巾)의 난이 일어났다.이 주류 세력은 그해 안에 평정되었지만, 이후 각지의 지방관리·호족들은 제각기 무장 자립하여, 후한제국은 와해의 징조를 더해 갔다. 이러한 때에 황건의 난 진압에 공을 세운 조조(曹操)는, 한실을 옹호하여 화북을 누르고 위왕(魏王)에 봉해져 위세를 떨쳤다. 그의 아들 조비(曹丕)는 220년에 헌제(獻帝)를 위협하여 선양(禪讓)을 받았고, 이로써 후한은 멸망하고 위(魏)·오(吳)·촉(蜀)이 정립(鼎立)하는 3국시대로 들어간다.

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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後漢

중국의 통일 왕조. 왕망(王莽)에 의해 찬탈된 전한(前漢)을 유수(劉秀, 光武帝)가 25년에 부활시킨 나라. 이후220년까지 14대에 이르렀다. 도읍은 뤄양(洛陽). 장안에 도읍한 전한을 서한(西漢)이라고 하는 데 대해 동한(東漢)이라고도 한다.

왕망의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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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莽-新

전한 원제(元帝)의 황후 왕씨의 일족이었던 왕망(전 44

후 23)은, 기원전 16년 신도후(新都侯)에 봉해졌고, 기원전 8년에는 38세에 재상에 해당하는 대사마(大司馬)에 임명되었다. 다음의 애제(哀帝)의 재위 중에는 벼슬을 사퇴하고 봉국(封國)인 신도(新都)로 은퇴하였으나, 애제가 죽자 왕태후(王太后)의 부름을 받아 기원전 1년에는 9세의 평제(平帝)를 세워 다시 대사마에 복직하고, 딸을 왕후로 세워 점차 정치의 실권을 수중에 넣기 시작했다.왕망은 태학(太學)을 확장하여 유학이 크게 일어나도록 함과 동시에 학자 유흠(劉歆) 등을 심복으로 삼고 참위설(讖緯說)을 이용함으로써 갖가지 천하의 신망을 모으기에 힘썼으며, 그 결과 천자에게 글을 올려 그의 덕을 칭송하는 자가 48만여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왕망은 기원후 5년에는 평제를 독살해 버리고, 선제(宣帝)의 현손으로서 2세밖에 안된 어린 영(?)을 즉위시키고 자신은 가황제(假皇帝)라고 일컬었다. 3년 동안 여러 가지의 서조(瑞兆)를 만들어 내더니, 마침내는 참위설에 있어서는 천의(天意)로서 절대적 권위를 가지고 있는 부명(符命)을 받았다고 하고, 한(漢) 왕조의 운명은 끝났다고 하면서 어린애인 영을 물리치고 스스로 진짜 천자가 되어 왕조를 창건했다. 때는 기원후 8년이며, 이에 전한왕조(前漢王朝)는 멸망하고 신도후(新都侯)라는 이름을 따서 신(新)이라고 하는 왕조가 출현하게 되었다. 그는 극단적인 유가사상의 신봉자이며 현실을 무시하고 유가경전에 있는 그대로의 정치를 행하려 했다.유교를 신봉하는 왕망이 이상으로 삼은 과거의 인물은 다름 아닌 주공(周公)이었다. 그래서 신왕조가 성립하자 그는 주공이 제정했다고 하는 『주례(周禮)』의 제도를 표본으로 삼고 『주례』의 이상사회를 재현하려고 각종의 개혁에 착수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주목되는 것은 토지제도를 포함한 사회정책이다. 이 개혁은 천하의 전지(田地)를 왕전(王田), 노비를 사속(私屬)이라 하여 다같이 매매를 금지하고, 남자가 8명 이하인 집에서 1정(井) 이상의 전지를 소유한 자는 초과분을 친족이나, 향촌의 전지를 갖지 못한 자에게 나누어 줄 것을 명령한 것이다. 왕전이니 1정이니 하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주대(周代)의 정전법(井田法)을 모방한 것이다.이 개혁은 대토지 소유자의 맹렬한 저항을 야기시켜 수년 후에는 왕전의 매매를 허용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그 당시의 농민은 관료나 호족(豪族), 상인 등의 겸병으로 말미암아 토지를 잃어 노비로 전락하는 자가 많았으며, 농민반란이 각지에서 발생하고 있었다. 왕망은 이같은 현실을 『주례』에 준해서 구제하려고 했던 것이다.그러나 왕망의 개혁은 전체적으로는 그 당시의 객관적 정세를 분명히 확인하지 못하고, 오로지 유교의 복고주의적인 사상에 의거하여 개혁을 추진해 나갔기 때문에 효과를 거둘 수 없었다. 특히 폭넓은 관제(官制)의 개혁이라든지 관명(官名)이나 지명의 명칭 변경은 행정의 원활성이 없어서 관민이 다같이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또한 무제(武帝) 이래의 통화(通貨)인 5수전(五銖錢)을 폐지하고 금, 은, 동, 거북의 등딱지, 조가비 등 도합 28종이나 되는 화폐를 발행하고 정부가 시장의 매매를 관리하려 하여 상품의 유통을 저해하는 등 경제면에서도 큰 혼란을 불러 일으켰다.화폐제도·관제·지방행정에 대해서도 현실을 무시한 개변이 많아 사회적 대혼란을 초래했던 그의 정치는 각지에 반란이 일어나고, 마침내 23년 왕망은 살해되고 신(新)나라는 멸망했다.

적미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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赤眉-亂

18년 지금의 산둥성에서 번숭(樊崇)이나 역자도(力子都) 등을 지도자로 하여 일어난 반(反)왕망의 농민 반란이다(18

27). 그들은 왕망의 실정(失政)하에서 몰락유망(沒落流亡)을 강요당한 농민들로서, 눈썹을 붉게 칠한 것으로 자기편의 표지를 삼았다. 서쪽으로 진격하면서 수십만 명으로 늘어나 25년에는 한실(漢室)의 혈통을 이은 소년 유분자(劉盆子)를 황제로 내세워 장안을 함락시켰다. 그러나 이와 같은 농민 세력은 호족들이 용인할 수 없는 것이었으므로 유수(劉秀, 光武帝·後漢始祖) 등의 세력과 대결하게 되어 27년 마침내 항복하였다.

광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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光武帝(劉秀) (전 5

후 57, 재위 25

57)후한의 초대 황제. 전한 고조(高祖)의 9대손(九代孫)이다. 광무제의 선조는 전한의 경제(景帝)의 황자(皇子)에서 갈라져 나온 황족으로서 원래는 춘릉(春陵)에 봉지(封地)를 얻어 살고 있다가 기원전 40년경에 남양군(南陽郡) 채양현(蔡陽縣)에 이주해 온 호족인 대지주였다. 또한 남양의 유씨는 명문으로서 사회의 상층부에 있었으며, 수많은 지방 토착의 호족과 복잡한 인척관계를 맺어 강하고 굳은 일대 호족사회를 구성하고 있었다. 광무제가 성공한 원인은 한 제국의 재흥을 목표로 삼아 이와같은 호족지주 집단의 절대적인 지원을 얻었기 때문이며, 후한정권이 호족지주(豪族地主)들의 연합정권이라고 일컬어지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러나 이같은 사실은 동시에 후한(後漢) 정부의 정치방침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왕망은 말년에 형인 유백승(劉伯升)과 기타 남양의 호족들과 함께 군사를 일으켰다. 처음에는 같이 반(反)왕망을 기치로 일어선 유현(劉玄:23년에 更始帝라 칭했으나 25년 赤眉軍에 격파당함)의 부하로서 화북 지방의 통치를 위임받았으나 그 때 농민 반란군을 진압, 그들을 자기의 병력으로 재편성하였고 또 화북 호족의 지원을 얻는 데 성공하였다. 25년 스스로 황제의 위에 올라 뤄양(洛陽)에 도읍하여 한제국을 부활시켜 후한 초대의 황제가 되었다.광무제는 국내의 통치에 임하여, 우선 왕망의 모든 정책을 모조리 폐지하고 전한의 제도를 복구했다. 행정의 규모를 되도록 축소하여 낭비를 없애고, 오로지 생산력의 회복과 민심의 안정에 힘을 기울였다. 그런 까닭에 병제개혁을 단행하여 징병제도를 폐지하고 병사를 고향으로 돌려보내어 농경에만 오로지 마음을 쓰게 하였고, 또한 검지(檢地)를 실시하여 전조(田租)의 부담을 공평하게 하거나 전조를 경감하는 등의 정책을 시행했다.광무제는 또한 대토지 소유자와 농민 사이의 빈부의 격차가 빚어내는 사회불안을 완화하기 위해서 일찍부터 노비(奴婢)에 대한 대우 개선을 명령하기도 하고, 노비의 해방령(解放令)을 발포하기도 했다.

그러나 노비의 매매를 금지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않았으며, 또한 전한 이래의 현안(懸案)이었던 토지소유의 제한 등에는 전혀 손을 대지 않았다.광무제는 또한 호족의 세력이 증대됨에 따라 지방의 독립성이 높아진 데 대항하기 위해서 중앙정부의 강화를 도모했다. 즉 전한의 무제(武帝) 이래 재상 대신 천자의 비서인 상서(尙書)의 지위가 점차로 무거워진 것을 더욱더 추진하여 상서령(尙書令)이 항상 천자의 좌우에서 정치의 기밀에 관여하게 되었다는 것, 징병제를 대신하는 것으로서 전문적인 군대를 설치하여 병비(兵備)를 강화한 것 등이 주목된다.외교면에서는 남(南) 흉노를 예속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또한 청년시절에 장안(長安)에 유학하여 유학(儒學)의 교양을 익힌 바 있던 광무제는 유학을 장려하고 뤄양(洛陽)에 태학(太學)을 세워 수많은 유생을 양성함과 아울러 관리의 등용(登用)에는 덕행이 높고 절조(節操)가 굳은 자를 가려뽑기도 했다. 효렴제(孝廉制)를 특히 중시했기 때문에 유교는 깊이 정치 속에 스며들어 예교(禮敎)를 존중하는 유교국가가 실현되기에 이르렀다. 노(魯)국의 공자묘의 조영을 비롯하여, 각지에 학교를 세웠다. 이러한 것은 호족사회의 성숙과 함께 명절(名節)을 존중하는 후한의 사풍(士風)의 형성에 한 요소로서 작용했다.

뤄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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洛陽

후한의 도읍. 허난성 뤄하(洛河)의 북쪽에 위치한다. 이 주변에는 양사오(仰韶)·룽산기(龍山期)의 유적도 발견되고 있으므로 오래 전부터 취락(聚落)이 형성되어 있었다고 생각된다. 기원전 720년 주(周)의 평왕(平王)은 견융(犬戎)에게 쫓겨 산시(陝西)의 후이징(鎬京)에서 이곳으로 도읍을 옮겼다. 25년, 후한은 이곳을 도읍으로 하였는데 이후는 위(魏)·서진(西晉) 등의 도읍이 되었다. 당대(唐代)에는 경제도시로서 번영했으나, 안사(安史)의 난 이후 쇠퇴했다. 현재는 인구 약 60만이다.

서역 지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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西域支配

광무제(光武帝) 때에 흉노는 남북으로 분열되어, 남흉노는 후한에 항복했으나, 북흉노는 서역을 지배하고, 여러 번 중국 북변에 침입해 왔다. 이 때문에 국내 체제도 어느 정도 정비된 2대 명제(明帝) 때가 되자, 후한은 적극 정책으로 전환, 두고(竇固)로 하여금 톈산(天山)의 동쪽에서 북흉노를 치게 했다. 그러나 북흉노를 누르기 위해서는 서역을 지배해야 했으므로, 두고는 반초(班超)를 서역에 파견했다. 반초는 선선(敾善)·우전(于?)을 복종시킨 것을 비롯하여 카스피해(海) 이동의 동서 투르키스탄의 도시국가 전부를 후한에 예속시켰다. 더욱이 그는 부하인 감영(甘英)을 대진국(大秦國)에 파견하려고 하는 등

후한의 세력을 서쪽에 크게 선양시켜 서역을 누르고, 동서 문화 교류의 길을 확보했다. 서역과의 연락이 끊긴 북흉노는 오르콘 강가로 물러났지만, 화제(和帝)가 두헌(竇憲)을 파견하여 이를 격파시키자 북흉노는 멀리 서쪽으로 달아났다. 북흉노의 서주(西走)는 4세기에 시작되는 게르만 민족 대이동의 계기가 된 것으로 생각된다.

반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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班超 (32

102)

후한의 서역 지배에 공적이 큰 무장(武將). 『한서(漢書)』의 저자인 반고(班固)의 동생. 그는 변설에 능하고, 또한 학자 집안에서 자라났기 때문에 수많은 서적을 섭렵했다고 한다. 명제·장제(章帝)를 섬겨 30여 년을 서역에서 임무를 수행하였다.형과 누이가 문장가였음에 비해 그는 무예를 익혔으며, 두고(竇固)를 따라 흉노족 토벌에 나서 큰 공을 세웠다. 또한, 타클라마칸 사막 근처의 오아시스 국가들을 정벌, 서역으로 가는 길을 다시 열어 군사마(軍司馬)를 거쳐 91년 그곳 도호(都護)가 되었다. 그곳에서 30여년간 주둔, 그의 위세는 파마르 지방의 동서에까지 미쳤으며, 대월지(大月氏)의 군대를 격파하였다.부하 감영(甘英)을 대진국에 보내려 했지만 감영은 중도에서 되돌아오지 않으면 안되었다. 반초가 노년이 되어 뤄양에 징환(徵還)된 후는 아들 반용(班勇)이 대신 서역 경영의 임무를 담당했다.그러나 그 후에는 인재를 얻지 못하여 서역 제국은 후한에서 이탈했다.

두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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竇太后(?∼97)

후한 장제(章帝)의 황후. 광무제의 권신 두융의 증손녀. 77년 장제의 비(妃)가 되고, 다음 해에 황후로 책립되었다. 장제의 사후 자식이 없어, 양귀인(梁貴人)이 낳은 황자 화제(和帝)를 세우고, 황태후로서 섭정, 일족은 외척(外戚)으로서 권세를 누렸다. 두헌이 화제를 암살하려다가 실패한 후에도 여전히 정무를 장악했다.

두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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竇憲 (?

92)

후한 사람. 북흉노 토벌에 공이 있다. 3대 장제(章帝)의 두(竇)황후의 오빠. 4대 화제 때 외척의 지위를 믿고, 아우들과 함께 멋대로 전횡(專橫)을 일삼아 죄가 되었다. 이를 면하기 위해 북흉노 토벌을 지원했다. 당시 북흉노는 서역을 잃고 오르콘 강가로 물러나 있었는데, 두헌은 89년·91년의 두 번에 걸쳐 남흉노와 협력하여 고비 사막을 넘어 이것을 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북흉노는 멀리 서쪽으로 달아나 이후 후한을 괴롭히는 일이 없어졌다. 그는 이 공에 의해 조정내에 큰 힘을 얻어, 92년에는 화제(和帝)를 암살하려고 했지만 발각되어 사사(賜死)당했다.

감영의 대진국 파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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甘英-大秦國派遣

감영은 반초의 부하이다. 생몰년은 불명. 1세기 말, 안식국(安息國, 파르티아)을 지나 대진국에 보내어졌다. 그러나 조지(條支)에 이르러 대해(大海)에 막혀 이를 건너지 못하고 되돌아옴으로써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그가 가려고 했던 대진국에 대해서는, 로마 본토, 로마령 오리엔트, 아라비아 등 여러 설이 있다. 조지는 페르시아만 부근으로 간주된다.

대진왕 안돈의 사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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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秦王安敦-使臣

환제(桓帝)시대 166년에 대진왕 안돈(로마제국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의 사신이라 칭하는 자가 현재의 베트남을 거쳐 중국에 와서 상아·코뿔소 뿔 등 남해의 산물을 바쳤다. 당시 로마는 중국의 비단을 진귀하게 여겼지만 비단 무역은 안식(파르티아) 상인의 수중에 있었다. 남해를 거쳐 온 이 사신의 목적은 안식인을 제쳐놓고 직접 비단 무역을 하려고 한 것으로 생각된다.

외척과 환관의 진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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外戚-宦官-進出

후한은 외교면에서의 화려함에 반하여 국내에서는 화제(和帝) 이후가 되자 점차로 쇠퇴의 징후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 원인의 하나는 화제를 이은 황제가 어린 나이에 즉위하고, 게다가 모두 단명으로 끝나버린 탓으로 어머니인 황태후(皇太后)가 섭정이 되어 정치의 실권이 외척의 손에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황제가 성인이 되어 외척의 간섭을 배제하려고 하자, 측근인 환관(宦官)의 힘을 빌지 않으면 안 되었으며, 이에 외척 대신에 환관의 전권(專權)을 허용하게 된다. 후한의 후반기는 이와 같은 외척과 환관과의 정쟁(政爭)의 되풀이였다.후한의 외척으로서 가장 강대했던 것은 양기(梁冀)이다. 그는 순제(順帝)의 양황후(梁皇后)의 오빠로서 권력을 마음대로 휘둘러 충제(?帝), 질제(質帝), 환제(桓帝) 등 3대에 걸쳐 20년 가까이 정치를 농단(壟斷)했다. 그 사이 한 집안에서 3인의 황후, 7인의 제후, 6인의 귀인(貴人), 2인의 대장군 외에 57명의 고급관료를 배출했다고 한다.환제는 양기의 여동생을 황후로 맞아들였으나 이전부터 양기의 전횡(專橫)을 증오하여, 그 세력을 일소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때마침 159년에 양황후가 죽은 것을 좋은 기회로 삼아, 환관인 선초 등에게 협력을 구하여 군사를 일으켜 양기의 저택을 에워싼 다음, 대장군의 인수(印綬)를 빼앗고 양기를 자살하게 만들었다. 이 사건으로 양씨 일족은 모조리 주살(誅殺)되고, 그에 따르는 숙청으로 인하여 조정은 텅 비게 되었다고 한다.이리하여 양씨의 외척의 화(禍)는 제거되었지만, 그 대신 환관의 진출을 허용하게 되었다. 양기 타도에 공훈을 세웠던 환관 일족과 그들에게 아첨하는 탐욕스런 관리는 중앙관계(中央官界)뿐만 아니라 지방관(地方官)까지 독점하여 뇌물을 탐내고 온갖 수단을 다하여 가렴주구(苛斂誅求)를 제멋대로 행하였다.

환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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宦官

거세(去勢)된 남자로서 동양 여러 나라의 궁전에서 사역(使役)되었다. 후한은 당·명나라와 함께 환관이 정치상 큰 해를 준 시대이다. 화제가 환관 정중(鄭衆) 등의 힘에 의해 외척 두씨(竇氏)를 주살하였을 때부터 그들의 힘이 커졌다. 그 후 등태후(鄧太后)가 정국을 좌우하게 되자, 환관을 통해서 정령(政令)이 전달되게 되었으므로 더욱 힘이 커졌다. 또한 궁정 내분의 와중에 즉위한 안제(安帝)는 환관에 힘입는 바가 컸기 때문에 환관의 세력은 더욱 증대했다. 환제(桓帝)·영제(靈帝) 시대가 되자 이 세력은 청류기절(淸流氣節)의 사대부(士大夫)를 당인(黨人)이라 이름붙여 금고주륙(禁錮誅戮)하여, 소위 당고(黨錮)의 옥(獄)을 일으켜서 제국의 질서 와해의 중요한 원인을 만들었다.

당고의 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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黨錮-獄

166년 환관 일파는 환제(桓帝)를 충동질하여 환관 공격의 급선봉인 청류당의 이응(李膺) 등 2백 여 명을 붙잡아 투옥했다. 그러나 재판이 시작되었을 때 청류당은 저마다 입을 모아 환관의 죄상을 폭로하는 법정진술을 택했다. 이에 불리를 자초하지나 않을까 두려워한 환관은 외척의 두무(竇武) 등이 상주하여 간(諫)한 것을 기회로 삼아 당인(黨人)을 방문하여 향리로 돌려보내되 금고(禁錮) 처분을 내렸다. 이것을 당고(黨錮)의 옥(獄)이라고 한다.환제 다음에 12세의 영제(靈帝:재위 167∼189)가 즉위하자 두태후(竇太后)가 섭정이 되어 외척의 두무가 실권을 잡았다. 두무는 당인의 금고를 해제하여 그들 청류당에 속한 사람들을 등용함과 동시에 그들과 결탁하여 환관을 일소하려고 했다. 그러나 사전에 계획이 누설되어 도리어 환관의 반격을 받아 패배했다. 두무는 자살하고, 이응 등의 당인은 또다시 붙잡혔다. 이 때 죽음을 당한 자는 1백 여 명이요, 사죄(死罪), 유죄(流罪), 금고(禁錮)의 처분을 받은 자는 6백 명에서 7백 명이나 되었다. 169년의 일이었는데, 이 제2회의 당고에 의해서 청류당은 철저하게 탄압을 받아 해체되었으며, 환관의 전제가 확립되었다. 2회에 걸친 당고의 옥은 진(秦)의 시황제의 분서갱유(焚書坑儒)에 필적하는 사상 탄압인데, 유교국가를 표방하는 후한왕조로서는 참으로 자살행위와도 같은 것이었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마침내 황건(黃巾)의 난(亂)이 일어나 제국(帝國)의 토대를 뒤흔들어 제국을 파멸로 몰아넣게 된다.

황건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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黃巾-亂

호족 지주에 의한 토지겸병의 위기에 끊임없이 직면해 있던 농민은 외척이나 환관의 전횡으로 인하여 부패한 정치 밑에서 한층 더 곤궁을 당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는 미신적인 민간신앙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현세구제(現世救濟)의 종교가 유행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추세였다.영제(靈帝) 때에 거록(鋸鹿)의 장각(張角)은 스스로 대현량사(大賢良師)라 호를 짓고 황천(黃天)의 신(神)의 사자(使者)라고 일컬으면서 병으로 고통을 겪는 사람들의 치료를 하기 시작했다. 장각은 스스로 아홉 마디(九節)가 나 있는 지팡이를 짚고 설교하고 다녔는데, 170년대 초 무렵부터는 제자를 사방에 파견하여 포교(布敎)에 힘썼다.이같은 교리는 빈곤 속에서 질병에의 공포와 불안을 품고 있던 민중의 마음을 사로잡아, 10여 년 사이에 화북(華北)의 동반부로부터 양쯔강(揚子江) 유역에 걸쳐 수십만 명의 신도를 얻어 일대 교단(敎團)으로 성장했다. 이 교단이 태평도(太平道)라고 일컬어지는 것이다. 태평도는 주술(呪術)에 의한 요병(療病)을 중심으로 하고, 한대(漢代)에 유행한 참위설(讖緯說)·음양5행설 등과 잡다한 민간 신앙을 가미하고 다시 도가(道家)의 설로 윤색한 것이다.장각은 이 신도들을 36개의 방(方)으로 조직했는데, 이 조직은 빈민의 반(反)권력적인 성격과 결합하여 군사적인 조직이 되기도 했다. 즉, 장각은 천공장군(天公將軍)이라 호를 지어 최고위에 앉고, 2명의 제자 중에서 장보(張寶)는 지공장군(地公將軍), 장량(張梁)은 인공장군(人公將軍)이라 일컬었으며, 1만 명 전후의 신도로 이루어지는 방(方)의 책임자로는 장각의 제자가 선출되었는데, 그들은 신도로부터는 사(師:스승)라 불림과 동시에 방은 그대로 장군이름으로 불렸다. 이러한 태평도는 후한 정부로서는 커다란 위협이었다. 정부는 탄압책을 강구하여 해산명령을 내렸으나, 이것은 도리어 신도의 단결과 교단의 조직을 강화시키고, 반(反) 권력적인 성격을 강화시켜 주는 결과가 되었다. 장각은 한제국(漢帝國)의 창천(蒼天) 대신 황천(黃天)의 세상을 실현해야 한다고 하면서 민중을 선동하여 60년 주기(周期)가 새로이 시작되는 갑자년(甲子年)인 184년의 3월 5일을 기해서 봉기하려고 했다.그러나 궐기할 날짜를 눈앞에 두고 계획이 누설되어 정부의 탐색의 손길이 뻗쳤기 때문에 장각은 갑자기 예정을 변경하여 2월에 일제히 봉기하여 순식간에 전국 각지에서 대반란이 일어났다. 36방(方)의 신도들은 황천을 상징하는 황색 두건을 표지로 삼았던 데서 이 반란을 ‘황건의 난’이라고 부르고 있다.영제(靈帝)는 외척의 하진(何進)을 대장군으로 삼아 수도 뤄양(洛陽)의 수비를 굳게 함과 동시에 황보숭(皇甫崇)과 주준(朱雋)을 장군으로 삼아 허난성(河南省)의 동부, 남부의 황건군을 토벌하게 하고 또한 노식(盧植)을 장군으로 삼아 황건군의 본거지인 허난성의 동북부에서 허베이성(河北省) 방면으로 출격하게 했다. 그리고 황건 봉기의 다음 달에는 당인(黨人)과 황건의 연합을 두려워하여 당고(黨錮)의 옥(獄)을 해제하고 인심을 장악하려 힘썼다. 때마침 그 해의 가을에 장각(張角)은 병사하고, 이어서 장량(張梁), 장보(張寶)도 전사하는 바람에 봉기한 지 1년도 지나지 않아서 황건의 주력은 괴멸해 버렸다.그러나 황건이 완전히 소탕되지는 않았다. 188년이 되자 황건과도 관계 있는 백파(白波)의 적(賊)이 산시(山西)에서 일어나고, 산둥(山東) 방면에서는 칭조우(淸州)와 쉬조우(徐州)의 황건이 연달아 맹위를 떨쳐 전국을 전란과 무질서 상태에 빠뜨렸다.

북방민족의 중국이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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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方民族-中國移住

전한(前漢)과 후한(後漢)을 합쳐 4백 년이나 계속된 한(漢) 왕조는 조정을 좀먹는 외척과 환관(宦官)의 횡포, 지방을 휩쓴 황건적(黃巾賊)을 비롯한 여러 반란으로 인해 붕괴되었다. 이 한 제국의 멸망과정은 유럽에 있어서의 로마제국의 멸망과 비슷한 양상을 드러냈다. 로마 제국을 멸망으로 이끈 가장 큰 원인은 게르만 민족의 침입이었는데, 한 제국의 멸망에도 북방 유목민족의 침입이 큰 역할을 담당했다. 북방민족의 주력은 흉노(匈奴)였다. 흉노는 아시아 역사상 최초의 유목 기마(騎馬)민족 국가로서 몽골 고원에서 패권을 잡았었다. 그러나 기원전 2세기 후반에 한 무제(武帝)의 토벌을 받은 이후 쇠퇴의 길을 걷다가 1세기 반경 후한 광무제(光武帝)의 중국 통일기에 남북으로 분열되고 말았다. 이 가운데서 남흉노(南匈奴)의 일축왕(日逐王)이 후한에 투항하자, 광무제는 이들을 만리장성 남쪽에 이주시켜 북변 방위를 담당케 했다. 북방민족의 중국 이주는 어느 시대에나 다소 있었던 일이었으나, 후한 광무제에 의한 남흉노의 장성 이남 이주는 결과적으로 한 제국을 멸망으로 이끈 원인이 되었다.장성 이남에 이주한 남흉노는 얼마 후 산시성(山西省) 중부 이북으로 다시 이주했다. 그들은 여기서 그들 자신의 선우(單于)를 받들고, 예전의 부족적 체제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한의 지방행정구분인 군현(郡縣)과는 별도의 자치적 존재를 유지해 나갔다. 그리고 이들 중의 일부는 차차 한의 군대에도 가담하게 되었다.이 지방은 한의 행정구분상 병주(幷州)에 소속되어 있었는데, 후한 말기의 병주 한군(漢軍)에는 이민족의 기병, 즉 호기(胡騎)가 많고 그 용맹성이 전국에 이름을 떨쳤다. 병주의 동쪽은 기주(冀州)이고 서쪽은 양주(?州)였는데 이 두 주에서도 북방 유목민족을 군대로 받아들였다. 특히 양주에는 저(?)·강(羌) 등 티베트계 민족이 많이 섞여 있었다.한편, 후한 왕조는 원소(袁紹) 등이 환관 수천 명을 죽인 이후로 세력이 약화되어 명목상의 존재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군웅할거와 한의 멸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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群雄割據-漢-滅亡

정부는 이미 혼란을 수습할 능력을 완전히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외척과 환관이 여전히 정쟁(政爭)을 되풀이 하고 있었다. 189년에 영제(靈帝)가 죽자 소제(少帝)가 즉위하고 어머니인 하태후(何太后)가 섭정이 되어 그 오빠인 하진(何進)이 실권을 잡았다.하진은 금군(禁軍)의 장군인 원소(袁紹)와 짜고서 환관주멸(宦官誅滅)의 계획을 세운 다음, 이에 찬성하지 않는 하태후를 협박하기 위해서 강족(羌族)을 평정하여 공을 세우고 산시(山西) 방면에서 강력한 군대를 거느리고 있던 병주목(幷州牧) 동탁(董卓)에게 수도에 들어올 것을 요청했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된 환관은 하태후의 명령이라고 속여 하진을 입궐하게 하고 이를 죽여버렸기 때문에, 원소와 사촌동생인 원술(袁術)은 금군의 군사를 거느리고 궁정에 난입하여 환관 2천 여 명을 모조리 죽였다. 그리하여 후한의 정권을 제멋대로 휘두르고 있던 환관은 외척과 함께 그 숨통이 끊어지게 되었던 것이다.그후에 수도에 쳐들어온 동탁은 원소 대신 수도를 제압하고 소제를 폐하여 그 동생인 헌제(獻帝)를 옹립하고서 온갖 포학한 짓을 다했다. 그 당시, 지방의 호족(豪族)들은 저마다 자기 방위를 위해서 일족들로 구성된 낭당(郎黨)을 무장시켜 무력집단을 만들어 가고 있었으며, 나아가서는 이와 같은 무력집단을 규합하는 군웅(群雄)이 대두하기 시작했다. 뤄양(洛陽)을 버리고 허베이(河北)로 달아난 원소, 원술, 위(魏) 나라의 창건자 조조(曹操) 등은 그 대표자이다.그들 군웅은 동탁의 횡포에 관한 소식을 듣자, 동탁 주멸을 목표로 삼고 원소를 맹주(盟主)로 삼아 일제히 군사를 일으켰다. 공포감에 떨게 된 동탁은 장안(長安)으로 천도(遷都)를 강행했는데, 그때 그는 군사들로 하여금 대대적인 약탈을 자행하게 했으며, 궁전이나 시가에 불을 지르게 했다. 2백 년 문화의 도읍지 뤄양은 이리하여 무참하게도 잿더미로 돌아가고 말았다. 장안으로 달아난 동탁은 이 곳에서도 제멋대로 포학한 짓을 하다가 마침내 부하의 손에 걸려 죽음을 당했으며, 장안의 시가도 동탁의 부하에 의해서 폐허가 되고 말았다.동탁의 죽음으로 인하여 목표를 잃어버린 군웅은 얼마 안 가서 각지에서 할거하여 천하의 패권을 노리고 격렬한 싸움을 전개하게 된다. 이와 같은 군웅할거 속에서 헌제는, 이미 황제라는 것은 이름뿐이고, 실제로는 군웅의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30년 후인 220년, 조조의 아들 조비(曹丕)에게 나라를 내주게 되어, 이에 전후 4백 년에 걸친, 중국에서 가장 오래 간 왕조(王朝) 한제국은 전란 속에서 그 막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