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사/인류 문화의 시작/그리스도교의 성립/파르티아 왕국과 사산 왕조 페르시아

파르티아 왕국과 사산 왕조 페르시아〔槪說〕 편집

기원전 1세기 후반 이래 잠시 평온한 상태를 계속해온 파르티아와 로마도 1세기 후반에 이르면 또다시 격심한 항쟁을 시작하게 된다.파르티아는 로마의 공격으로 여러 번 수도 크테시폰을 침범당했을 뿐만 아니라 동방 국경에서는 대월지(大月氏)를 이어 새로 일어난 쿠샨 왕국의 위협에도 곤란을 당했다. 아르사케스 왕조 최후의 황제 아르타비누스 5세는 로마군을 니시비스에서 격파시켰지만 그 후 사산 왕조의 아르다시르 1세와 싸워 패하고 왕은 전사했다. 아르다시르는 기원전 226년 크테시폰을 함락시켜 새로운 왕조의 기초를 확립했다.사산 왕조 페르시아는 고대 페르시아 제국의 부흥을 목표로 한 민족국가로, 조로아스터교를 국교로 하여 강력한 중앙 권력 아래 국내 봉건 귀족을 억제하고, 잘 훈련된 정규군을 사용하여 대외로 진출, 문화 세계를 로마와 양분하는 강국으로 발전했다. 사산 왕조 초기의 대외 발전은 특히 아르다시르 1세의 아들 샤푸르 1세에 의해 행하여졌다. 그는 동쪽의 쿠샨 왕조, 서쪽의 로마를 격파하여 중앙아시아에서 아르메니아, 메소포타미아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통합하여 페르시아의 위세를 동서에 떨쳤던 것이다.

사산 왕조 편집

-王朝

226년 아르다시르 1세가 창건하고 651년 아라비아인(人)에게 멸망한 페르시아 왕조. 그 이름은 아르다시르의 조부로 이스타흐르의 제사(祭司)였던 사산(Sasan)에서 유래한다. 이스타흐르는 고대 페르시아 제국의 수도 페르세폴리스의 바로 곁에 있으며, 사산 왕조는 아케메네스 왕조의 정통 상속자에게 임명되었다. 따라서 이 왕조는 고대 페르시아의 아케메네스 왕조의 중세적 재흥(再興)을 나타냄과 동시에 배화교의 이념을 기반으로 하는 신정국가(神政國家)의 성격을 띠며, 이란 민족의 전통적 실력을 가장 잘 발휘한 시대로 평가받는다.초기의 기본 정책 방침은 파르티아 체제의 답습이었고, 그 후에도 지방분권 체제가 뿌리 깊게 존속하고 있었다. 언어는 아람어 외에 그리스어도 쓰였지만, 왕족에서 서민에 이르는 페르시아인들은 현재 페르시아어에 맥을 잇는 팔레비어를 썼다.국가체제가 잘 정비되어 후세의 무굴제국과 이슬람 국가에 의해 계승되어, 호스로 1세 때는 전대(前代)에 이룬 토지대장의 정비를 토대로 인두세(人頭稅)와 지조(地租)의 조세제도를 새로 제정, 이후 여러 나라에 의해 채택, 실시되었다. 또한 호스로 1세 때 비잔틴 제국의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아테네 학림(學林)을 폐쇄시킨 후, 신(新)플라톤파의 그리스 학자가 내조(來朝)하여 호스로 1세의 보호를 받았다. 이 왕조에서의 철학과 과학의 유행은 이슬람 세계의 학문진흥에 매개적인 역할을 하였다.사산왕조의 황제는 시리아 기술자를 이주시켜 도시건설을 하였기 때문에, 중개교역과 수공예품 생산이 발달했다. 종교는 조로아스터교가 국교가 되어 아베스타 경전이 성립되었다.아르다시르 1세의 아들 샤푸르 1세 때 로마를 격파하고, 국세는 크게 발전했다. 6세기 호스로 1세 시대가 최성기이고, 손자 호스로 2세는 이집트까지 세력을 확대했다. 그러나 대외 전쟁에 의한 국력 소모가 현저하여 그 후 왕권은 급속히 쇠퇴했다. 최후의 황제 야즈데게르드 3세는 신흥 이슬람 세력과의 싸움에 패하고, 651년 왕조는 멸망했다.

샤푸르 1세 편집

-世 Shahpuhr Ⅰ(재위 241

272)

사산 왕조 제2대의 왕. 즉위할 때부터 대외정책에 적극적이어서 동방에서는 쿠샨 왕국을 쳐서 페르시아 종주권을 인정시키고, 서쪽에서는 로마군과 세 차례 싸워 세 번 다 승리하였다. 특히 260년 에데사 부근의 싸움에서는 로마 황제 발레리아누스를 잡아 전승 기념의 부조(浮彫)를 여러 곳에 새기게 했다. 또 다수의 로마인 포로를 써서 제국내의 토목사업을 사방에 일으켰다. 국내에서는 제국의 재조직을 완성하고, 또 세계 종교로서의 마니교(敎)를 보호했다.

마니교 편집

-敎

파르티아인(人) 마니(Mnin, 216

277)가 창시하였다. 조로아스터교·불교·그리스도교 등의 사상을 받아들여 2원론적 세계관을 가진 구제종교. 샤푸르 1세의 보호를 받아 발전했지만 바흐람 1세의 시대에 박해를 받고 마니는 살해되었다. 그 후 마니교는 페르시아에서 동서 양(兩)세계에 전파되어, 고대 말기에서 중세 초기에 이르는 동안 세계적 종교로서 한때 크게 번영했다. 서쪽에서는 로마제국으로 유입했으며, 동쪽에서는 위구르를 통해 당대(唐代)의 중국에도 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