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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파비 왕조와 우즈베크족〔槪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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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초에 티무르 왕조의 쇠퇴에 편승하여 이란에서는 사파비 왕조가 독립하였고 중앙아시아에서는 우즈베크족이 보하라 한국(汗國)과 히바 한국을 연이어 세웠다.

사파비 왕조의 성립은 사만 왕조와 부와이 왕조 멸망 후 오랫동안 이민족에게 빼앗겼던 이란 민족의 자국(自國) 지배의 회복을 의미했다. 이 왕조는 시아파(派)를 채용하여 정통파의 오스만 투르크와 격렬하게 대립했고, 또한 동북 국경에 있어서도 정통파를 따른 우즈베크족과 싸움을 반복했다.

사파비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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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朝

사파비가(Safavi 家)의 이스마일(재위 1502

1524)을 시조로 하는 이란의 왕조(1502

1736). 이스마일은 시아파 제7대 이맘의 자손으로서 1502년 아제르바이잔의 아크 큔르(Ak-Koyunli:白羊) 왕조를 꺾고, 타브리즈에서 독립했다. 그 후 메소포타미아에서 아프가니스탄에 이르는 지역을 통일했다. 그는 아라비아어풍의 술탄 칭호를 배척하고 페르시아어의 존칭 ‘샤’를 사용하였으며, 또 12 이맘 파(派)를 국교로 정하는 등 이민족 지배에서 벗어난 이란 민족주의를 강조하였다. 시아파를 지도정신으로 하는 이 왕조는 무굴왕조나 우즈베크 여러 한국(汗國) 또는 수니파(派)의 오스만 투르크와 대항하게 되어 투르크의 침입을 받아 천도하였다.

그러나 아바스 대제가 나오자 최성기를 맞이하였다. 그는 영국인의 지도로 군제(軍制) 개혁을 단행하고,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광대한 실지(失地)를 탈환하였다. 또 내정에도 빛나는 치적(治績)을 올려 수도 이스파한의 장려함은 유럽 세계에까지 소문이 퍼졌다. 아바스 대제의 사후 다시 오스만 제국의 침입을 받고, 또 1722년에는 아프간족에게 수도를 점령당함으로써 사실상 멸망하였으나 왕통(王統)은 11대 1736년까지 존속되었다.

사파비 왕조 시대에는 네덜란드, 프랑스, 영국 등 여러 나라가 페르시아의 비단을 얻고 오스만 제국에 대하여 공동전선을 펴기 위하여 친분관계를 맺었다. 또한 인도 동쪽의 식민지와의 연락을 확보하기 위하여 다투어 우호관계를 맺었다.

보하라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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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汗國 Bokhr

부하라라고도 한다. 킵차크 한국 바투의 아우 샤이바니의 자손인 샤이바니칸(재위 1505

1510)이 우즈베크족을 이끌고 트란스옥시아나에 건국했다. 수도는 일정하지 않았으나 보하라가 대체로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이름으로 불린다.

샤이바니칸이 창시한 샤이바니 왕조(1505

1599)는 16세기 후반에 번영했는데, 사파비 왕조의 공격을 받고 쇠퇴하여 아스트라 왕조(1599

1785)에 대치되었다. 이 왕조는 17세기 전반이 최성기였으며, 18세기 후반에 멸망하고 만기트 왕조(1785

1920)가 성립되었다. 19세기가 되자 러시아의 세력이 진출하여 사마르칸트 지방을 빼앗기고 1868년 그 보호국이 되었다. 1920년 소비에트 정권에 의해서 소멸되었다.

히바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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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汗國 Khiva

우즈베크족이 세운 3한국의 하나. 16세기초부터 20세기까지 아랄해 남쪽, 아무다리야 하류지역을 차지하고 있었다. 고래로 호라즘이라 불리던 지역이다. 16세기초에 보하라 한국의 샤이바니가 이곳에서도 티무르 왕조의 지배권을 빼앗았으나 뒤에 페르시아의 영역이 되었다. 그러나 1515년 샤이바니 왕조계의 일바르스가 자립하여 건국하였다. 처음에는 수도가 호라즘 고래의 주요 도시 우르겐지였으나, 17세기초 히바로 옮겼다. 17세기까지는 보하라 한국의 침략도 받았으나 투르크 이슬람 문화의 번영도 있었다. 18세기에는 국내의 군벌과 외적에 시달렸으며, 한때 페르시아의 지배도 받았다. 19세기에 들어가 알라쿨리칸이 중앙아시아 전역에서 패권을 잡은 일도 있었지만, 1873년 러시아의 보호국이 되고, 1920년 소비에트 정권하에서 폐지되어 호라즘 공화국이 설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