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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굴 제국과 유럽 세력의 인도 진출〔槪說〕 편집

16세기 후반 악바르 대제(大帝)부터 17세기 후반 아우랑제브 황제에 이르는 기간은 무굴 제국의 최성기(最盛期)였다. 악바르 다음 자한기르를 거쳐, 샤 쟈한 황제 때에는 재정 수입도 최대였고, 영토는 데칸 남부까지 확대되었다. 면포(綿布)나 인디고의 생산·수출도 성대(盛大)하였고, 지배층의 사치를 타고 상업도시가 각지에 번영하였으며, 수도 아그라는 영국인으로부터 ‘세계 최대의 도시’라 불리었다. 그 부력(富力)으로 타지 마할 등 호화로운 궁전과 사원이 건조되었고, 페르시아식 미니어처의 전통을 잇는 무굴의 회화(繪畵)는 궁정의 보호하에 힌두교적 미니어처로, 라지푸트 회화는 라지푸트 제후 밑에서 발달, 인도 이슬람 문화의 전성기를 맞이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번영의 그늘에서 농민은 화폐 경제의 침투와, ‘모래에서 기름을 짠다’는 중세(重稅)로 괴로워하고 있었다. 아우랑제브 황제 때 제국 영토는 가장 컸으나 농촌의 황폐는 계속되었고 농민의 저항은 격화되었다. 황제의 힌두교 탄압 정책은 무굴 지배의 지주(支柱)였던 라지프트 제후를 이반(離反)시켜, 18세기에는 마라타 동맹·시크교도의 반항이 점차 격화되어, 제국의 통일은 급속도로 무너져갔다. 이때 포르투갈에 대체하여 진출한 프랑스·영국은 제후의 할거(割據)·항쟁(抗爭)을 이용하여 위치를 굳히면서 서로 패권을 다투게 되었다.

샤 쟈한 편집

Shah Jahan (1592

1666, 재위 1627 1666) 무굴 제국의 제5대 황제. 자한기르 황제의 셋째 아들. 경쟁자인 형제를 죽이고, 1627년 즉위. 데칸 고원까지 영토를 확대했으며, 제실(帝室)의 연간 수입은 2억 2천만 루피에 달했다고 한다. 타지 마할 묘(廟)를 비롯하여 호사(豪奢)를 극한 궁전·사원 등을 지었다. 문학과 미술도 융성하였고, 그의 치세는 제국의 최성기에 해당된다. 그동안 농민의 강제노동은 강화되었으며, 중세(重稅)·기근(饑饉) 등으로 농민의 궁핍은 더해갔다.

아그라 편집

Agra

인도 북부 우타르프라데시주에 있는 도시로 야무나강 기슭의 평야지대에 자리잡고 있다. 악바르에서 아우랑제브의 치세(治世) 동안 때때로 무굴제국의 수도가 된 일이 있는 아그라는 요새왕궁(要塞王宮)과 타지마할 등의 우수한 무굴 건축·미술의 유적이 다수 현존되고 있다. 영국의 인도 지배 시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갠지스강 유역 서단(西端)의 교통·상업의 중심지이다.

타지마할 묘 편집

-廟 Tj Mahal

인도의 아그라 시(市) 동남 교외 야무나강 우안(右岸)에 있는 묘묘(墓廟). 무굴 제국(帝國) 제5대 샤 자한이 그의 애비(愛妃) 문타즈 마할을 위해 국가의 재정을 기울게 할 만한 거대한 비용을 쏟아, 명장(名匠)·재료를 국내는 물론 멀리 바그다드, 사마르칸트 등지에까지 구하여 1632년부터 완성되는 1653년까지 20년의 세월을 소비하여, 극사극치(極奢極侈)의 표본처럼 세워진 묘이다. 화려한 화문(花紋)을 조각한 단정한 백대리석 건축과 그의 정원은 무굴 미술(美術) 최성기의 전형으로서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타지마할이란 말은 ‘왕궁(王宮)의 왕관(王冠)’이란 뜻으로 애비(愛妃)에게 주어진 이름이다.

아우랑제브 황제 편집

-皇帝 Aurangzeb (1618

1707, 재위 1658

1707)

무굴 제국의 제6대 황제. 샤 쟈한의 셋째 아들. 1636년 데칸 태수(太守)가 되어 농업의 장려에 힘쓰고 유능한 페르시아인의 징세관(徵稅官)을 등용하여 데칸사상 획기적인 새 세제를 펴는 데 성공하였다. 1657년 부왕인 샤 자한의 와병(臥病) 소식을 듣고 형제와 왕위 싸움을 벌여 1658년 부왕을 유폐(幽閉)시키고, 다른 왕자를 살해하고서 왕위에 올랐다.

50년의 치세 중 최초의 20년간은 주로 북인도 통치에 진력하고 본부(本部)와 서북부의 국경에서 전쟁이 있었던 것 외에는 비교적 평화로웠다. 무굴 제왕(諸王) 중에서 최초의 엄격한 정통파 이슬람교도였던 이 왕은 이교도를 이슬람교로 개종시키는 것을 하늘에서 부여받은 의무로 믿고 열심히 이를 실천에 옮겼다. 악바르에 의하여 일시 폐지되었던 비(非)이슬람교도에게 과하던 인두세(人頭稅)를 부활시킴으로써, 농민의 반란이나 시크교도의 반란이 일어나고 또 무굴왕조의 동맹자로서의 공로가 있었던 라지푸트족의 이반(離反)을 초래하였다. 1681년 이후는 데칸에 발흥한 마라타족을 복종시키려고 스스로 대군을 이끌고 원정하였으나 게릴라전에 애를 먹고 퇴각하여 그 땅에서 89세로 사망하였다. 악바르에 다음가는 위대한 군주로서 최대판도를 실현하였으나 동시에 몰락의 징조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시크교 편집

-敎 Sikhism

16세기 초에 인도의 펀자브 지방을 중심으로 이슬람의 영향을 받아 힌두교에서 파생한 절충적(折衝的) 종교. 개조(開祖) 나나크(1469∼1539)는 라호르 근처에서 출생했으며, 하급 카스트의 카트리 출신이다. 30세 경에 신의 계시를 받아 전도생활에 들어가 널리 인도 각지를 순회하면서 힌두, 이슬람 설교자들과 종교 문답을 벌이고, 또 메카를 순례하고 만년에는 고향에 정주하여 포교활동에 전심하였다. 그의 교의(敎義)는 이슬람의 알라에 가까운 유일신에 귀의하여 신에 대한 사랑과 현세의 선행(善行)으로만 인간은 구제된다고 믿는 것이다. 힌두교의 번잡한 카스트, 미신, 종교 의식을 배격하고, 인간의 절대 평등을 주장하였기 때문에 신도 중에는 하급 카스트 출신이 많고 개창자의 지위는 구루의 칭호를 갖고 후계자에게 계승되었다. 그 경전(經典)은 그란트라 불리는데, 개조 나나크를 비롯하여 구루들의 언행록을 집성한 것이다. 제6대 구루 무렵부터 무굴왕조의 지배에 대한 저항운동을 활발히 전개하여, 교단은 민족주의자, 불평분자, 비적(匪賊)들을 흡수하여 군사적 집단의 양상을 띠고 항시 무굴 황제와 충돌하였다. 초기의 평화로운 자세를 잃고 점차 전투적 색채를 짙게 띠어 이슬람교와는 멀어져 18세기 중엽에는 불법단체로 몰려 소멸의 위기까지 처했으나 곧 세력을 회복하고, 란지트 싱을 수장(首長)으로 받들어 교단의 재통일에 성공하였다. 펀자브 지방을 근거지로 하여 서유럽식 군대를 편성하여 영국세력과 항쟁하였고, 1845년 시크 전쟁이 발발되기도 하였으나, 1849년 영국의 지배에 굴복하였다.

마라타 동맹 편집

-同盟 Martha Confederacy

데칸 고원 서부의 마라타족 제후의 연합 국가. 마라타란 고대의 마하라시트라가 전와(轉訛)된 것. 17세기 전반 시바지가 최초의 왕의 되고 아우랑제브 황제와 투쟁했다. 농민을 포함시킨 군은 표한(剽悍)하고 군기(軍紀)가 엄정했으며, 그의 정책도 하류 카스트를

보호했다고 한다. 3대째부터 재상(페슈와)이 실권을 잡았는데 2대 재상 바라지라오를 거쳐 3대 재상 바라지라오 때 가장 성했으며, 펀자브·벵골 지방으로 진출, 델리를 점령했으나 1761년 파니파트 전쟁에서 아프가니스탄의 아흐마드 샤 두라니에게 패하여 인도 통일은 되지 않았다. 이후 내분으로 약체화되긴 했으나 영국 지배에 완강히 저항했다.

영국의 동인도회사 편집

英國-東印度會社 East India Company1600년 레반트 상인을 중심으로 설립되어, 엘리자베스로부터 동인도 무역의 독점권을 받았다. 처음에는 일항해(一航海)마다의 개별적 기업제(企業制)였는데, 점차 그 폐해가 나타나 1613년 합자(合資) 기업제를 채택함과 동시에 영속적인 조직이 되었다. 1656년의 크롬웰의 개조(改組)가 있은 뒤에 찰스 2세 시대에 근대적 주식회사로서 확립되었다. 회사의 활동은 17세기에는 아프리카에서 일본에까지 미쳤는데, 주요한 것은 향료무역이었다. 그러나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와 격렬한 투쟁을 벌인 결과 이에 패배하여 17세기말까지는 인도 반도로 후퇴하게 되어, 인도 서안을 근거지로 삼아 봄베이로부터 캘커타에 이르는 해안선을 지배하에 두었다. 그로부터 회사는 인도의 면직물 수입을 주요사업으로 하게 되고, 이를 확보하기 위하여 원주민 생산자에게 경제외적(經濟外的) 강제를 가하였다. 회사는 단순한 기업에 그치지 않고, 내륙(內陸)지방에 대한 토지와 주민의 지배를 확대하고, 1765년 지세(地稅)로 대표되는 벵골지방의 조세 징수권을 무굴 황제로부터 양도받음을 계기로 벵골의 토지 소유자가 되어 인도의 정치권력자·영토지배자로의 길을 걷게 되었다. 1680년대 국왕이 회사에 대하여 징병권, 사관임명권, 교전권(交戰權) 등을 부여함으로써 보강되었고, 경쟁상대인 신동인도 회사의 합병, 클라이브에 의한 프랑스 동인도회사의 타파 등을 거쳐, 18세기 중엽에는 인도에서의 전체적 지위가 확립되었다. 그러나 본국에서는 회사의 전제와 독점이 비난의 대상이 되어 인도의 행정은 점차 본국 의회의 감독하에 들어갔다. 1814년의 인도 무역의 독점 폐지, 차(茶) 무역의 독점 폐지, 인도 회사령(會社領)의 국왕에의 이양으로 그 사명은 사실상 종결되고, 1858년의 세포이의 반란을 계기로 인도 통치의 기능을 모두 빅토리아 여왕에게 헌납하고 회사는 해산했다.

프랑스의 동인도회사 편집

-東印度會社

1604년에 설립되었고 1664년 콜베르에 의하여 재편성되어, 인도 동해안의 찬데르나고르, 퐁디세리를 근거지로 하여 세력을 확대했다. 오스트리아 계승 전쟁 때에는 뒤플렉스의 지휘 아래 영국을 압도, 지배지의 인구는 3천만에 달했다. 뒤플렉스 소환 후 7년전쟁 때에는 원조한 토후(土侯)가 영국에 패하여(플라시의 전투) 이후 세력을 잃고 1796년에 해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