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사/근대 유럽과 아시아/남북전쟁과 제국주의의 발전/이탈리아의 통일

이탈리아의 통일〔槪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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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이래 분열을 계속하던 이탈리아에서도 19세기에는 민족 통일의 움직임이 강해졌다. 1848년의 혁명에서 청년 이탈리아당은 자유로운 이탈리아 공화국 건설을 목표로 활약하였으며, 사르데냐의 왕(王)인 카를로 알베르토가 통일전쟁을 일으켰으나 오스트리아군에게 제압돼 실패했다. 이로부터 통일의 주도권은 사르데냐의 신왕(新王)인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밑에서 재상(宰相)이 된 카부르에게 옮겨졌다. 카부르는 산업을 육성하여 국력의 강화를 꾀하였고, 크림 전쟁에 출병하여 프랑스의 지지를 얻었다. 사르데냐는 1859년에 나폴레옹 3세의 후원을 얻어서 오스트리아와 싸워 롬바르디아를 획득하고 나아가서 중부 이탈리아를 병합하였다. 한편 청년 이탈리아당의 가리발디는 나폴리 왕국을 정복하여 사르데냐의 왕(王)에게 헌상을 하였다. 이렇게 하여 1861년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를 초대 왕으로 하는 이탈리아 왕국이 성립되었다. 이어 1866년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간의 전쟁을 계기로 베네치아를 병합하고, 1870년 프로이센과 프랑스간의 전쟁에 편승해서 교황령(敎皇領)을 점령함으로써 이탈리아 통일을 완성하였다.

이탈리아 통일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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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統一戰爭

이탈리아의 국가통일과정에서 생긴 대외전쟁(對外戰爭). 「제1차(1848∼1849)」 1848년 밀라노에서 일어난 폭동(暴動)과 오스트리아 3월혁명을 계기로 사르데냐 왕 카를로 알베르토를 중심으로 통일전쟁이 일어났다. 그러나 교황 피우스 9세, 토스카나 대공(大公), 나폴리 왕 등의 비협력으로 오스트리아 군에게 압도되어 밀라노는 함락되고, 베네치아도 굴복, 알베르토왕 자신도 대패하여 퇴위하고, 왕자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가 즉위하였다. 「제2차(1859∼1860)」 완전 실패한 것 같던 제1차 전쟁도 이탈리아 국민에게 반성의 시기를 주어, 급진적 공화주의와 온건 왕당파간의 화합이 이루어지자, 사르데냐의 현실적인 정책에 의하여 점점 국제적 지위를 쌓아올리던 중, 1859년 나폴레옹 3세의 원조를 얻은 카보우르는 오스트리아를 격파하였다. 그러나 프랑스가 태도를 돌변하여 오스트리아와 빌라프랑카 화약을 맺음으로써 통일전쟁은 중도에 좌절되고, 이탈리아는 롬바르디아를 얻는 데 그쳤다. 그러나 다음 해 이탈리아인은 혼자 힘으로 중·남부 지방에서 통일전쟁을 한 결과, 사르데냐는 베네치아 지방, 나폴리 왕국, 교회령을 제외한 이탈리아를 통일할 수 있었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빅토르 에마누엘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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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 Vittorio Emanuele (1820

1878)

사르데냐의 왕(1849

1861)이며 최초의 이탈리아 국왕(1861∼1878). 1848∼1849년의 대(對)오스트리아전(戰)의 결과 퇴위한 부왕(父王) 카를로 알베르토(비토리오 에마누엘레 1세의 종제)의 뒤를 이어 즉위. 카보우르를 등용하여 재정 경제의 개혁을 단행하고 오스트리아의 보수적 공세를 피하고, 이탈리아 통일과 근대화에의 기초를 세웠다. 안으로는 진보적 헌법에 충실함과 동시에 밖으로는 영국, 프랑스와 협조하여 크림전쟁에 출병하여 국제적인 발언권을 강화하고, 또 1859년 나폴레옹 3세로 하여금 오스트리아를 공격하게 하여 롬바르디아를 얻었다. 가리발디의 천인대(千人隊:붉은 셔츠단)의 협력에 의한 시칠리아, 나폴리 등의 합체(合體)로써, 반도가 거의 통일되어, 1861년 3월 토리노의 제1회 이탈리아 의회에서 이탈리아 국왕의 칭호를 받았다. 같은 해에 카보우르가 사거(死去)한 타격에도 불구하고, 도로 정비, 화폐 개주(改鑄), 십일세(稅)의 폐지 등 국민의 복지증강에 힘쓰고, 1866년 오스트리아를 대패시켜 베네치아를 할양시키고, 1870년 로마를 점령하여 이탈리아 통일을 완성함으로써 국부(國父) 또는 성실왕(誠實王)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었다.

카보우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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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millo Benso Cavour (1810

1861)

이탈리아의 정치가. 외교관. 피에몬테의 명문출신으로서 토리노에서 출생. 토리노사관 학교를 수석(首席)으로 졸업, 1832년까지 군대생활을 하였다. 그 후 영국에 유학, 그 입헌정치에 감화되어 토리노에서 「리소르지멘토(Risorgimento)」지(誌)를 발간, 온건한 입헌주의를 창조함과 동시에 농지개혁과 영국식 산업계획의 도입에도 정력을 쏟아, 1848년 신헌법 제정하의 왕국의회에 선출되었고, 또 농상상(農商相)·해상(海相)·재무상을 역임하여, 자기의 이상을 교육제도의 개선·우정사업(郵政事業)·철도의 개설 등에 반영시켰다. 1852년 총리가 되어 외교문제에 몰두, 우선 크림전쟁에 개입하여 1856년의 파리조약을 유리하게 인도하였고, 1859년 오스트리아와의 관계가 긴박해지자 나폴레옹 3세와 밀약을 맺고, 이듬해 프랑스·이탈리아 연합군을 조직하여 오스트리아를 격파하고, 롬바르디아, 토스카나, 파르마를 획득하였다. 그러나 나폴레옹 3세의 배신으로 인한 빌라프랑카의 화약(和約)으로 베네치아 획득에 실패한 책임을 지고 1859년 7월 사직하였다가, 그 이듬해 수상으로 재임되었다. 가리발디의 시칠리아, 나폴리의 정복을 교묘히 조작하고, 니스와 사보이를 프랑스에 할양하고 이를 회유하여, 베네치아, 로마를 제외한 중·남부를 통일하였으나, 완전한 국가통일을 보기 직전에 독신으로 죽었다.

마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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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useppe Mazzini (1805∼1872)

이탈리아의 혁명가(革命家), 정치가(政治家), 저작가(著作家). 제노바 대학에서 법률을 공부하고 변호사가 되었다. 낭만주의와 고(古)로마 공화국에 대한 동경(憧憬)의 일념으로 오스트리아의 압정(壓政)으로부터의 해방과 조국통일(祖國統一)을 목적으로 하는 혁명운동에 가담했다. 처음에는 문학활동(文學活動)만을 하였으나, 1830년 카르보나리당(黨)에 가입, 중요한 지위를 맡았다. 1830년 반란기도죄(反亂企圖罪)로 체포되었다가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되었다. 후에 마르세유에 망명, 카르보나리 운동의 결점을 반성하고, 신(神)에 대한 신앙과 인간성에 대한 신뢰를 기조(基調)로 하는 일반 대중에 의한 혁명(革命) 운동을 일으키기 위해 청년(靑年) 이탈리아당(黨)을 결성하고, 그 기관지(機關誌)를 통해 애국심을 고무하는 한편 혁명운동을 지도하였다. 동지 3천 명과 함께 사보이 진출(進出)을 기도했으나 실패하고 도망하여 스위스에서 유럽 청년당(靑年黨)을 결성하였다. 1837년 영국으로 건너가 해방운동(解放運動)에 전념, 1848년 밀라노 혁명(革命)에 참가하고 다음 해 토스카나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로마 공화국의 삼두정치(三頭政治)의 한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로마 공화국이 백일 만에 궤멸되자 재차 런던에 망명하였다. 이후 카보우르의 사르데냐 중심의 왕당적(王黨的) 현실정책(現實政策)이 독립운동의 주류(主流)가 되어, 그의 영향력은 차츰 줄어졌으나 저작(著作)에 의한 공화국통일(共和國統一)에 노력하였다.

가리발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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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useppe Garibaldi (1807

1882)

이탈리아의 애국자. 니스에서 출생. 마치니가 이끄는 청년 이탈리아당에 참가하였다가 1836년 남아메리카로 가서 브라질 혁명군에 투신하여 유명해졌다. 1848년 오스트리아의 지배에 대한 조국 궐기의 소식을 듣고 귀국, 의용군을 조직하여 로마에 입성해서 임시정부를 원조하여 30일간 저항(抵抗)하다가 실패하여 미국으로 건너갔다. 1854년 다시 귀국한 후 1859년에는 사르데냐 해방전쟁에서 활약하였고, 나폴레옹 3세의 니스, 사보이 할양 요구에 대항하여 저항했다. 이어 천인대(千人隊)를 인솔하고, 제노바를 출항하여 시칠리아 섬의 팔레르모를 점령하고, 다시 본토에 상륙하여 나폴리를 점거하였다. 그의 공화주의 경향을 경계하던 카보우르도 남하를 개시하여 충돌의 위기가 닥쳤으나, 가리발디가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에게 남이탈리아를 헌상(獻上)함으로써 이탈리아 통일이 이루어졌다. 그 후 공화주의자인 그는 매사에 왕국 정부와 충돌하는 한편, 1866년에는 오스트리아군과 싸웠고, 또 교황군, 프랑스군과 싸워 패배하였다. 1870년에는 프랑스군에 들어가 프로이센군과 싸웠다. 그는 이탈리아 의회에 의석을 차지하고 있었으나, 정치생활보다도 혁명운동 및 군사활동에 분주하였는데, 그의 애국적 생애는 이탈리아인의 신화로 되어 있다.

이탈리아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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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國

1861년 사르데냐의 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에게 제1회 이탈리아 국회가 이탈리아 왕의 칭호를 바침으로써 성립되었다. 또한 1866년에는 베네치아를, 1870년에는 로마를 병합하여 통일을 완성하고, 1871년 이후 로마를 수도로 정하였다. 통일 후의 이탈리아는 경제 발달이 부진하였으며, 또한 국력은 약하고 국내의 정정(政情)도 안정되지 못하였으나, 어쨌든 영국에 가까운 의회제도 국가로서 발전하여 유럽 열강의 대열에 섰다.

이탈리아의 미수복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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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未收復地

18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때 전장(戰場)에서는 패했으나 프로이센에 가담한 대가로 베네치아 지방의 병합에 성공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베네치아 전성기의 영토를 회복한 것은 되지 못하였으며, 이탈리아어(語) 인구가 많은 트리에스테치로르가 제외되었으므로 오스트리아로부터 탈환된 영토는 불충분한 것이었다고 생각하였다. 이것을 이탈리아의 미수복지라고 부르며, 이탈리아인(人)의 불만이 뿌리깊이 박혀, 제1차 세계대전 후까지도 오스트리아와의 대립이 계속되었다.

교황령 점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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敎皇領占領

중부 이탈리아에 있는 교황령의 병합은 이탈리아 통일에 있어 최후의 커다란 과제였다. 여기에는 1849년 이래 프랑스군이 주둔하고 있었으나 1870년에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이 발발하여 프랑스군이 철수하는 틈을 타서, 이탈리아 정부가 무력으로 점령하였다.

정부는 교황 피우스 9세에 대해 속권(俗權)을 포기하고 이탈리아 왕국에 합병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거부당하였기 때문에, 주민투표를 하여 교황령을 병합시켰다. 다음해에 로마는 이탈리아 왕국의 수도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