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미술/서양미술의 흐름/선사시대의 문명과 미술/메소포타미아의 미술

수메르-아카드의 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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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術

메소포타미아라는 말은 그리스 말로 '강의 사이'라는 의미로서,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에 끼어 있는 비옥한 충적층대(沖積層帶)를 가리키고 있었다. 인류 문화가 발생한 땅으로 이집트의 나일강 유역, 인도의 인더스강 유역과 더불어 기원전 5000년에는 원시농경생활이 상류 지역에서 영위되고 있었다. 그러나 S. N. 크레마가 <역사는 수메르에서 시작한다> 라고 한 그의 저서의 제목처럼 메소포타미아에는 조직적인 도시문화가 이루어졌으며, 조형활동에 있어서 그들(메소포타미아인이라는 종족은 없고 수메르인이 그 트레거(하역자)로서 등장한다)의 미의식(美意識)이 뚜렷한 형태로서 표현되게 된 것은 수메르인에서 비롯하였다. 수메르인이 남메소포타미아의, 비옥하지만 거주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습윤지(濕潤地)에 막대한 노동력을 모아서(여기서 원시 농경 촌락의 소수 인원으로부터 많은 사람을 필요로 하는 도시로 발전하였고, 제사 집행자가 대중을 지배하고 간척이나 개간사업을 진척시켰다) 키시·우루크·우루와 같은 도시를 이룩하였다. 도시 형성이 그대로 왕조나 지배자의 거주지가 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기원전 2900년경부터 제2의 지배민족인 셈족의 사르곤왕이 아카드(Akkad) 왕국을 세워(기원전 2350) 기원전 2100년경에 고(古)바빌론 왕조가 성립한 시기를 초기왕조시대라 부르고 있다. 따라서 초기왕조는 수메르인과 셈인이 세운 아카드 왕조를 포함하여 그들의 미술활동을 개관하고자 한다.

수메르-아카드의 건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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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建築

건축의 유구는 키시·우르·우루크 등 수메르인이 만든 도시가 있으나, 예컨대 키시 궁전의 예와 같이 햇볕에 말린 벽돌과 이긴 흙의 벽이 있고 중정(中庭)의 둘레에 원주(円柱)를 세운 회랑(廻廊)이 둘러져 있는 플랜과, 원주가 특별한 형(型)의 햇볕에 말린 벽돌로 되어 있다는 것, 벽에 동물이나 사람의 형태를 조개껍질을 사용한 상감(象嵌)장식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신전 건축은 보통 주택의 플랜을 확대하고 호화롭게 한 것인데 직사각형인 중전의 한구석에 있는 소실(小室)에서 예배소로 통하는 가늘고 긴 형식으로 신좌(神座)·공양대(供養臺)·관전용(灌奠用)의 수반(水盤) 등을 설비하고 있다. 지상의 유적과 더불어 초기왕조를 대표하는 것은 우르의 왕묘인데 호화롭고 현란한 금과 부장품, 많은 공예 유품의 발굴은 세계를 놀라게 하였다. 묘실은 석회암의 조석(粗石)에 점토를 보충해 벽을 만들고 석회암 또는 소성연와(燒成煉瓦)를 사용하여 까치발 천장, 궁륭천장(穹隆天障), 원통천장(円筒天障)을 만들었고 그 기술의 진보는 후세에 여러 가지 영향을 주었다. 또 연와의 형식은 직사각형인 평평한 것으로부터 한편은 평평하지만 한편은 불룩한 철형(凸型)의 연와로 변하여 수메르인이 애호한 형식으로서 주목되고 있다. 아카드 시대의 제왕(諸王)은 외적의 토벌과 반란 진압에 쫓기어 건축 유물을 거의 남기지 않았다.

수메르-아카드의 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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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彫刻

조각 유품에 대하여 수메르인의 조소 유품(遺品)은 적다. 남메소포타미아에는 석재가 나오지 않아서 석조(石彫)는 제작되지 않고 멀리서 가지고 온 석재로 만든 신상(神像) 내지는 왕의 육신 대신으로 신전에 놓여진 예배자상(禮拜者像)도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그들의 조형 의욕이 충분히 발휘되지 못하고 그 기술 습득과 연마할 기회의 혜택을 받지 못하였다. 카파제·텔·아스말·아슈르 등지에서 발굴된 조상(彫像)은 양손을 명치 부분에다 댄 직립상(直立像)으로 상감(象嵌)을 한 이상하게 큰 눈, 곱슬곱슬하고 긴 구레나룻을 단 것이 특색이다. 오히려 아카드 시대의 나람 신의 전승비나 사르곤왕의 두부라 일컫는 청동제의 우수한 작품 <마니스투수왕 입상(立像)>, <구데아 좌상(坐像)> 등 조소에 대한 관조와 조형 기법의 각 단계마다 진보한 작품을 계속 만들었다. 특히 인체의 사진적(寫眞的) 관조가 일변한 것을 알 수 있다.

수메르-아카드의 공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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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工藝

공예유품은 우르 왕묘에서 출토된 유품에 의하여 그 당시 얼마나 공예 감각과 기술이 뛰어났는지를 알 수 있다. 종류는 금공품(金工品=메스 카람두그의 儀式用 투구와 슈브 아드 왕비의 머리장식과 영락, 귀 장식 등이 대표작품), 패각 세공(貝殼細工=예컨대 軍旗의 측면에 象嵌技法으로 貝殼, 라피스 라스리, 赤色石灰岩을 사용하여 인물의 朝貢行列이나 歡樂遊飮圖 등이 표현된 예나, 리라·하프의 흉부의 모자이크 등이 대표적인 예)을 중심으로 단금(鍛金)·조금 주금(彫金鑄金)·금립 금선 세공(金粒金線細工) 등 모든 기술을 구사하여 우수한 공예 작품을 만들어냈다. 이와 같이 공예 감각은 메소포타미아 미술 가운데 일관하여 흘러서 건축 세부·조소·회화의 각 분야에서 살려져서 독특한 미술 작품을 창조해 갔다. 물론 초기왕조의 미술은 메소포타미아 미술의 고졸기(古拙期)라 하여도 무방하여, 그후 앗시리아 미술의 고전기를 좋든 나쁘든 간에 준비하고 있었던 시대였다고 할 수 있다.

고대 바빌로니아의 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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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代-美術

바빌로니아 왕조시대의 미술은 함무라비왕이 도읍한 바빌론이 아시리아 제국의 센나케리브왕에 의하여 파괴되었기 때문에 당시의 미술활동을 알아볼 작품을 잃었다. 오히려 남메소포타미아 지방의 우르·가파제의 유적과 또 도시국가인 마리의 유품에서 그 시대의 미술을 더듬어보는 편이 편리하다.

고대 바빌로니아의 건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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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代-建築

건축 유적으로서 유프라테스 하반(河畔)의 우르와 중부 유프라테스 하반에 있는 도시국가인 마리를 들 수 있다. 우르의 도시 유적은 신전을 신역(神域)에 모은 형식을 취하지 않고 넓은 지역에 분산해 있는 플랜을 가지고 있었다. 신전 건축으로서는 닌갈 여신을 모신 신전이 주목되며, 240㎡의 부지를 두꺼운 벽으로 둘러싼 경내에는 예배용 제단과 외정(外庭), 제사를 지내는 내진(內陣)과 내정(內庭)을 중심으로 한 신전과 소예배전 및 제사자(祭司者)의 주택 등이 격벽(隔壁)으로 구획되어 있고, 더구나 배수구와 포장한 바닥을 설치하여 수메르 신전 건축의 전통을 잘 전해주고 있다. 일반 주택은 무계획하게 세워져 규모와 방수도 일정치 않다. 발굴에 의하여 이층집의 주택과 빵집·요리점·대장간 등이 발견되었다. 마리의 도시 유적은 1933년에 우연히 발견되어 그 후 조직적인 발굴로서 많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당시의 도시계획은 지상 지배자 권위가 강화되었던 경향을 반영하여 신전 건축보다 궁전의 규모가 컸다. 특히 마리의 대왕궁은 220실(室)로 되어 그 계획은 크레타의 라비린토스의 영향을 받아 미로(迷路)를 구성하고 있다. 벽이 두껍게 포장된 궁전은 타일을 붙인 방과 창고, 2만4천장의 점토판(粘土板)을 소장한 도서관, 프레스코의 대벽화 등이 발견되었다. 신전 건축에는 이스타르 신전, 닌쿠르사그 신전, 다곤 신전과 지구라트의 기단(基壇) 등이 있었는데 거의 함무라비왕에 의하여 파괴되었다. 일반 주택도 안뜰을 둘러싼 가늘고 긴 방의 형식으로 혼잡하게 구성되어 그 자연발생적 성격을 반영하고 있다.

고대 바빌로니아의 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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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代-彫刻

조소(彫塑) 유품은 우르 출토의 <닌갈 여신 의상(倚像)>과 테라코타제(製)의 이슈타르신, 외눈박이인 괴물을 죽이는 신상 등 부조(浮彫)한 유품에서 특색을 볼 수 있다. <닌갈 여신 의상>은 환조(丸彫)인데 인간의 자태를 훌륭하게 포착한 모델링을 찾을 수 있고 두발이나 머리핀, 섬세한 케이프의 표현, 자세를 바로 하고 양손을 가슴에 잡은 조형 등 수메르시대에 비긴다면 각별한 진보를 엿볼 수 있다. 마리의 유적에서도 신이나 왕 그리고 제사계급(製司階級) 사람들을 환조한 조각과 청동제 사자, 부조의 여신상 등 일품이 많이 발견되었다. 이 중에 다곤 신전에서 출토된 청동제 사자의 상반신은 눈을 돌의 상감으로 하였고 치졸하나 억센 조형 가운데에 이 동물의 특징을 잘 포착한 조형이 인상적이다. 또 <풍요(豊饒) 여신 입상>의 석회암제 환조의 상은 자연에 가까운 프로포션과 사실(寫實)에 입각하여 표현된 온화한 표정 등이 주안점이 되고 있으며, 양손에 가진 앨비얼러스형 항아리는 그 속에서 대좌(台座) 밑의 구멍을 통하여 실제로 물을 뿜어낸 구조라고 생각되어 기술 기교가 진보한 양상을 알 수 있다. 이 외에 기원전 2000년경 왕위에 오른 함무라비가 만든(본디는 시파르에 세워졌으나 12세기 엘람왕(Elam 王) 쉬트루크나훈테에 의해 약탈당하여 수사로 옮겨지고 수사에서 출토되었다) 함무라비 법전(法典) 정상부의 태양신 샤마슈와 함무라비의 부조상으로 수사에서 출토된 섬록암제(閃綠岩製)의 함무라비왕의 두부(?) 등 유품이 있다. 구데아 모자를 쓴 채 표현되어 인간의 모습을 정확하게 포착한 왕의 조형은 뛰어난 것이다. 특히 함무라비왕 두부라고 전해지는 작품은 위엄과 풍격이 넘쳐 셈족풍(風)의 구레나룻과 표정에 노쇠한 그늘을 보여 날카로운 개성 묘사가 매력있다.

고대 바빌로니아의 회화 및 공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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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代-繪畵-工藝

이시대의 회화는 마리 왕국의 프레스코 벽화로서 대표된다. 마리왕 짐리림이 지모신(地母神) 이슈타르로부터 왕권을 수수(授受)하는 그림과 희생봉정도(犧牲奉呈圖) 등 측면 관조(觀照)를 주로 한 조형의 특색을 보여 주며 서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벽화로서 의의가 크다. 이 외에 옹기의 채화(彩畵) 동물도 흥미가 있다. 공예품으로서는 테라코타 신상, 예배자의 상, 거기에 향로·술잔·접시 등의 제기(祭器)와 실린더실(圓筒印章) 등이 발견되고 있다.

앗시리아의 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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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術

서아시아에서 강대한 군사력과 피정복 민족에 대한 참혹·무참한 압정(壓政)으로 광대한 영토에 군림하여 세계제국의 양상을 가진 앗시리아는 기원전 9세기의 전반부터 기원전 6세기 후반까지 350년간에 걸쳐 활동하였다. 그 지리적 조건과 정복한 영토와 민족이 다채로워 이집트·아나톨리아·시리아·서방(西方)이란의 특색 있는 문화미술을 흡수하여 대성하였기 때문에 그때까지의 바빌로니아 문화와는 상당히 다른 미술 유산을 남기고 있다.

앗시리아의 건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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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建築

건축으로서는 앗시리아제국 역대의 왕들이 만든 아슈르·님루드(카라크)·두르 샤르루킨·니네베 등 북부 메소포타미아 지방에 산재한 도성(都城) 유적의 발굴을 통하여 그 모습을 찾아 더듬어본다. 앗시리아의 발상지 아슈르는 아누·아다드 양신의 합사형식(合祀形式)의 신전과, 왕궁이 도성의 북부에 정비되어 왕권의 확대와 전정(專政)에 의한 신장(伸張)과 더불어 왕이 거처하는 왕궁이 도시의 중심지에 위치하는 변화의 과정을 잘 보여 주고 있다. 도성의 성벽은 유례없이 높이 솟고 두꺼워 기원전 706년 구축된 두르 샤르루킨성의 경우 두께가 28m에 이르고 있다. 군사 방위태세의 강화는 피압박 민족의 참혹한 취급에서 오는 불안한 시대상을 반영하여 도시 계획에서도 그 영향을 찾아볼 수 있다. 성문에서 성문으로 가는 가로는 마치 골목처럼 만곡(灣曲)과 교차의 형식을 취하여 조망(眺望)을 방해하고 있다. 건물의 기초에는 북메소포타미아산(産)의 석재를 풍부하게 사용하고 가옥은 볕에 말린 벽돌이나 목재를 사용하였으며, 내부 장식의 요벽(腰壁)이나 입구에 앨러배스터제(製)나 동석제(凍石製)로 부조한 화장판이 끼워져 있었다. 도성내의 일반 주택은 웅대·화려한 궁전과 신전에 비하여 빈약하고 검소한 것으로 천막생활까지 했다는 것을 카라크의 테메노스 부근의 발굴로 알려졌다. 귀족의 저택은 중정(中庭)을 중심으로 방이 사방에 만들어지는 형식을 취하고 그것을 복잡하게 짠 것이 궁전 건물이었다. 아슈르 나시르 팔 2세가 세운 카라크의 테메노스 궁전은 사무를 취급하는 장소, 옥좌를 포함한 의식 알현(謁見)의 방, 거실 등 세 형식의 건축으로 나뉘어 있다. 이에 대해 두르 샤르루킨의 사르곤 2세의 궁전은 양간(陽乾) 연와를 중심으로 석재와 소성연와로 구축한 높은 기단(基壇) 위에 구축되어 저택의 건축 형식과 상당히 다른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홀과 계단의 결합 형식과 중정(中庭)의 배치 등에 특색을 볼 수 있는 한편, 소아시아와 시리아 방면에서 발견되는 독특한 궁전 형식인 비트 히라니 양식을 채용하였으며 그 후 앗시리아 건축 양식의 기본이 되었다. 신전 건축은 궁전 건축에 부속되고 있는 경우가 많아 측면 출입 양식의 지붕과 전실(前室) 다음에 깊숙한 내진(內陣)을 설치하여 거기에 벽감(壁龕)이 만들어져 있다. 성탑 지구라트는 4단 내지 6단의 정방형 또는 장방형의 탑을 쌓아올린 고탑형식(高塔形式)이 되어 멀리서도 바라볼 수 있다.

앗시리아의 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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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彫刻

앗시리아 미술에서 정수(精髓)는 조소(彫塑)의 유품이라 하겠다. 단독적인 환조(丸彫)의 상은 적지만 건축 내부의 요벽(腰壁)에 부조한 장식을 가득 메운 것이라든지 외문(外門)이나 내정 입구에 놓여진 유익인면사자상(有翼人面獅子像)의 수호신 등 뛰어난 유품이 많다. 님루드에서 출토된 석회암으로 만든 <아슈르 나시르 팔 2세 상>은 얼마 안 되는 앗시리아 환조의 상으로는 완벽한 유품인데 두부도 작고 육체를 관조(觀照)한 점도 미숙하지만 앗시리아인에 있어서는 왕자의 이상미(理想美)를 위엄에 넘치고 당당한 자태로써 발휘하였으며, 당시 왕자의 의장 풍속이 모조(毛彫)로 세밀하게 표현되어 있고 또 명문(銘文)을 흉부에 전각(鐫刻)하고 있는 등 역사적인 자료의 가치도 많은 작품이다.

이러한 환조의 상에 대하여 이 시대에 부조한 유품은 우수한 기술로 세련된 조형 감각과 관조가 투철한 사실적(寫實的) 능력을 가지고 뛰어난 작품을 많이 만들어냈다. 입구에 사자상을 배치하는 전통은 오래 되었고, 아나톨리아 고원이나 시리아에서 그러하였다. 건물에 딸린 문 입구의 수호신의 표현 형식은 히타이트에서 시리아를 거쳐 들어온 영향의 자취라 생각된다. 그러나 앗시리아 유익인면수신(有翼人面獸身)의 수호신상은 조형 감각과 표현 형식의 고도한 예술성으로 히타이트 미술을 훨씬 능가하여 현저한 간격을 보여 주고 있다. 특히 인면(人面)에 깊이 팬 눈과 코, 그리고 왕관과 장식풍인 말린 머리카락과 구레나룻 등, 날개가 날카로운 끌로서 파낸 명쾌하게 의장화(意匠化)한 조형과 어울려 감상의 요점이 되고 있다. 조형상에서 재미있는 것은 유제류(有蹄類)의 다리 가운데 앞다리 세개를 표현하려 정면이나 측면으로 보아 부자연스럽지 않게 만들어져 앗시리아인의 특유한 합리적인 관조가 작용하고 있는 점에 주목할 가치가 있다. 이 수호신은 두르 샤르루킨 궁정 입구에서도 발견됐으나 이것은 더욱 조형 표현의 기교와 관조가 진전, 세부까지의 의장화나 추상성이 고도화하여 우수한 작품임을 알 수 있다. 이런 조형은 페르시아 아케메네스 시대로 계승되어서 페르세폴리스 왕궁에서도 그 유품을 찾아볼 수 있다. 부조의 유품에는 표현 형식과 주제를 다룬 방식으로 전·후 2기로 나눌 수가 있다. 님루드 북서(北西)에 위치한 왕궁에서 출토된 종교 의식도(儀式圖)나 제전도(祭典圖)는 하나의 작품으로서 완결된 구도이며 인간에게 이익과 풍요를 가지고 오는 성수(聖樹)가 운하의 물과 칠엽(七葉)의 파메트식(式)인 대추야자수(棗椰子樹)를 중심으로 하여서 의장화되어, 거기에 화분(花粉)을 수정(受精)하는 조두유익신상(鳥頭有翼神像)을 표현하고 있다.

특히 좌우에 왕과 시종을 그린 예도 있다. 그에 대하여 님루드의 서북 궁전의 옥좌(玉座) 사이의 남쪽 벽에 있는 전투도(戰鬪圖)와 동물 수렵도의 부조는 연속 설화(說話) 표현 형식으로 만들어져 있다. 전자는 벽면 가득히 큰 성수와 인물 및 신상을 상호(相互) 배치하여 장식의 의도(意圖)와 종교의식의 중대함을 암시하고 있는 데에 대하여 수렵도나 전투도도 왼편에서 오른편으로 활동적인 장면을 생생하게 전개해 나간다. 더욱이 수목과 하천의 세밀한 묘사와 성벽이나 배경 무대의 극명(克明)한 표현도 볼 수 있다. 아슈르바니 아플리 2세 때는 이들 전투도와 수렵도는 구성상 화면이 단절되지 않고 두루마리식의 전개를 보여 주며, 특히 때는 다르지만 같은 화면으로 엮은 설화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니네베의 아슈르바니 아플리 궁전 S실(室)의 <사자 사냥>은 그 좋은 예가 된다. 이들 부조 화면의 특색은 인간의 근육과 자태의 정확한 조형, 세부에 이르기까지의 공예 감각이 넘치는 세밀한 표현, 그리고 동물의 형태와 표정까지 극명하고 박력있게 표현한 묘사력 등을 들지 않을 수 없다. 어쨌든 앗시리아 부조 미술은 고대 서아시아 미술에 있어서 정점(頂點)을 차지하고 있으며 메소포타미아 고전 조각의 전형(典型)이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앗시리아의 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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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繪畵

회화 유품은 벽면의 극히 작은 것에 불과하며, 티글라트 필레세르 3세가 건립한 시리아의 텔 발시프 궁전의 벽화의 단편과 두르 샤르루킨의 사르곤 2세 옥좌 사이의 벽화 등이 유명하다. 앗시리아 공예의 대표적인 것은 상아 세공인데 시리아-이집트 양식을 답습한 작품으로 앗시리아 공예품이라 생각되는 유익신상(有翼神像)과 수렵도, 그리고 님루드에서 출토된 <앗시리아의 모나리자>라 불리는 귀부인의 마스크와 침대 장식의 성수 등 뛰어난 작품이 있다. 또 채유연와(彩釉煉瓦)나 채유도기 따위와 청동제품과 글라스 기구 등 당시에 있어서 세계제국적(世界帝國的)인 성격을 보여, 여러 지방에서의 헌납품과 작가와 공예인들이 들어오게 된 것을 암시하고 있다.

신바빌로니아의 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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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美術

앗시리아제국(帝國)의 말기, 막료의 한 사람인 나보폴라사르는 바빌론에서 기병(起兵), 그후 독립하게 되어 메소포타미아와 패권을 다투어(기원전 626) 탄생한 것이 신바빌로니아 왕조이다. 네부카드네자르 2세를 중심으로 약 70년의 짧은 기간이었으나 함무라비왕 시대의 바빌로니아를 계승한 후계자로서 메소포타미아 문화를 부흥시켰고, 셈족 최후의 왕조로서 미술사적 의의도 크다.

신바빌로니아의 건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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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建築

건축 유적은 고(古) 바빌로니아 시대의 우르와 볼시파 등지가 왕조 창시자인 나보폴라사르와 네부카드네자르 2세에 의하여 재건되었다. 볼시파는 수도의 중심부에 나부·나나·신 세 신전과 지구라트를 세웠고 길은 기준에 정한 방향으로 닦았으며 사방 1.5km의 주위에 호(濠)를 파는 도시계획이었다. 이러한 형식은 앗시리아 도시와 전혀 다른 것이다. 그러나 이 시대의 대표적인 도시 유적은 바빌론일 것이다. 플랜은 거의 4각형인데 중앙에 유프라테스강이 남북으로 뚫려 흐르고 그 왼편 강가, 즉 도시의 중심이 되는 지점에 최고신(最高神)인 마르두크 신전과 바벨탑으로 유명한 지구라트를 포함한 신역(神域)이 있는데, 이것은 전통적인 형식을 답습한 것이다. 왕궁과 부속된 요새(要塞) 건축은 북단 중앙부를 차지하고 있다. 왕궁은 중정(中庭)에 연속하는 구성으로 전체적인 플랜은 장방형이었다. 이 성채(城砦)의 동북 구석진 곳에 아치 천장을 가진 다수의 협소한 방이 있는데 이것은 헤로도투스 이래의 유명한 옥상정원(屋上庭園)의 하부구조라 생각되고 있다. 지구라트는 한 변이 90m, 높이 90m에 이를 만큼 거대하고, 마르두크 신전은 각각 80m와 85m의 규모이며, 특히 금박(金箔)으로 장식한 예배소의 호화로움으로 미루어 당시의 신전이 얼마나 웅장하였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길은 왕궁 앞에서 남북으로 마르두크 신전까지의 개선도로(凱旋道路)와 여기에 90도로 교차하는, 성역에서 나온 마르두크 가로는 주요한 도로로서 규칙 바른 형식이었다.

신바빌로니아의 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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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彫刻

조각의 유품은 마르두크·아파르·잇디냐의 경계석(境界石), 바빌론 출토인 인간을 밟고 선 사자의 미완성 석조 외에 채유연와(彩釉煉瓦) 부조가 대부분이다. 앗시리아 미술의 부조로 실내의 요벽(腰壁)을 장식한 것처럼 바빌론에서는 대로의 양측과 문·성벽을 이용하여 채유연와로써 로제트 무늬의 띠와 사자·황소, 마르두크신의 성수(聖獸)인 드래건(恐龍) 등을 부조로 표현하고 있다. 짙은 벽청색(碧靑色)의 벽면에 제법 사실적(寫實的)인 조형 감각으로 포착한 걸어가는 동물을, 황색 신체에 적색의 갈기, 백색의 육신에 황색의 갈기라는 식으로 배색한 사자와 드래건을 표현하고 있다. 이슈타르 문(門)만 하여도 575마리의 동물이 행렬하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연와로 동물을 표현하는 방법은 서아시아의 전통적 공예 수법의 하나로 모자이크 기법의 응용이라 여겨지나 이후의 3채유(彩釉)의 기원과 관련하여 중요성을 시사하고 있다.

신바빌로니아의 공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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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工藝

공예의 유품으로서 바빌론에서 출토된 청동제의 용수(龍首)와 벽옥(碧玉)이나 마노(瑪瑙)와 옥수(玉髓)를 비롯한 보석, 많은 원통인장(圓筒印章), 타원형의 스탬프 인장 등이 있다. 원통인장에는 종교의식을 표현한 것, 왕의 알현 광경과 시종들의 모습, 전투 장면 등이 엷은 부조로 표현되어 있다. 이러한 조형 감각은 유연한 균제가 취해진 자태로 인간의 모습이나 동물을 포착하여 앗시리아 시대의 것보다 상당히 진보된 점이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