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미술/서양미술의 흐름/선사시대의 문명과 미술/고대 이집트의 미술

고대 이집트의 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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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代-美術

이집트 예술의 신(神) 프타는 본디 창조의 신이었다. 이 신이 창조한 질서는 모든 예술에 공통되어 건축도 회화(繪畵)도 조각도 그 근저(根底)에는 이 법칙이 흐르고 있었고, 특히 조형예술은 우주 만물의 조화에 합치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집트의 미술품은 우리가 말하는 현대의 미술작품은 아니다. 신전(神殿)은 '신의 영원한 집'이며, 회화는 현실세계를 재현하는 수단이며, 조각은 신이나 인간의 영혼이 깃들이는 곳이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집트 미술은 실효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다. 신이 정한 법칙이 있는 한 거기에는 엄연하고 일정한 형식이 성립하여 예술가의 개성은 훨씬 뒤로 물러선다. 이집트의 미술품이 일정한 양식을 고수하고 제작자의 이름이 표시되지 않는 까닭이다.

이집트의 미술활동의 역사는 모두 국왕의 보호 아래에 있었기 때문에 예술활동의 역사는 왕조 흥망의 역사와 일치한다. 미술 제작에 종사하는 자는 곧 국왕을 섬기는 관리였다.

다음에 연표(年表)를 표시해 본다.

선(先)왕조시대(先史時代)-기원전 3000년 이전.

초기 왕조시대(기원전 3000∼기원전 2778)-제1∼2왕조. 티스 시대라고도 한다.

고(古)왕국시대(기원전 2778∼기원전 2263)-제3∼6왕조. 피라미드 시대라고도 한다.

제1중간기(中間期=기원전 2263∼기원전 2160)-혼란기로 통일왕조 없음.

중(中)왕국시대(기원전 2160∼기원전 1785)-제11∼12왕조. 봉건시대.

제2중간기(기원전 1785∼기원전 1580)-혼란기로 통일왕조 없음.

신(新)왕국시대(기원전 1580∼기원전 1090)-제18왕조(기원전 1580∼기원전 1314), 제19왕조(기원전 1314∼기원전 1200), 제20왕조(기원전 1200∼기원전 1085)

말기(末期) 왕조시대(기원전 1085∼기원전 332)-제21∼30왕조 및 페르시아 시대부터 알렉산더 대왕 정복까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기원전 30년까지).

아마르나 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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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術

제18왕조 이크나톤 치하의 독특한 풍조와 미술인데 새로 도읍한 이크나톤의 현 지명인 아마르나(Amarna)를 따라 부르고 있다. 아톤신(神) 신앙의 종교개혁을 단행한 정신과 병행하여 예술계에도 종래의 고정화한 양식에서 탈출을 시도하여 조각과 회화에 개성을 존중하는 자연주의적 경향이 짙었다. 이집트 미술사상 매우 특이한 한 시기를 이룬 것이며, 이크나톤 자신에 의한 별종(別種)의 양식화라고도 생각된다.

건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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建築

이집트의 건축은 풍부한 석재(石材)를 사용한다. 처음에는 햇볕에 말린 벽돌이 주였으나 제2왕조 이후 왕릉(王陵=피라미드)과 신전(神殿)은 모두 석조로서 주로 석회암이고 요소에 화강암이 사용되었다. 왕궁과 주택은 왕조시대를 통하여 벽돌과 목재를 썼다. 석재는 아스완의 화강암과 투르의 석회암, 시르시라의 사암(砂岩), 하트느바의 알라바스터 등이 특히 유명하고 목재는 레바논의 삼나무를 즐겨 썼다.

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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神殿

선(先)왕조시대에 있어서 각 지방의 신전은 간단한 오두막을 짓는 식인 듯하였으나 왕조시대 초기부터 본격적인 건축이 되고 후에 석재를 주재로 하고 형식도 복잡하게 되어 '신의 전당'으로서 손색이 없게 되었다. 카르나크의 아멘 신전과 같은 거대한 건축도, 기본적으로 정면 입구의 탑문(塔門)과 중정(中庭), 전실(前室) 및 지성소(至聖所)로 되어 있고, 여기에 성지(聖地)와 나일강 수량계(水量計) 및 후기 왕조에는 특히 탄생전(誕生殿=만미시)이 부설되고 경내(境內)를 연와(煉瓦)벽으로 둘러쌌다. 탑문 앞에 왕조의 거상(巨像)과 오벨리스크가 각각 한 쌍씩 세워지고 벽면 전체에는 신에 대한 숭배와 왕의 업적을 표시하는 채색부조(彩色浮彫)가 되어 있으며 앞칸은 다주실(多柱室)로 되어 있다.

장제전(葬祭殿)은 특정한 왕의 장례와 제사를 위한 것으로서 신(新)왕국 시대에 성행하였으나 구조적으로는 일반신전과 큰 차이가 없다. 하트솁수트(제18왕조) 여왕의 장제전(데르 엘 바하리)은 테라스식(式)인데 특수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암굴 신전은 절벽을 이용하여 파서 만든 것으로 누비아의 아부심벨 신전(라메스 2세)이 대표적이다.

석주와 기둥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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石柱-

건축용 기둥에는 목재도 사용하였으나 현존하는 것은 모두 석재이다. 거의 모두가 식물을 모형으로 했는데 야자수형 기둥은 연 줄기 묶음의 기둥에 꽃의 봉오리나 활짝 핀 꽃의 기둥머리를 붙인 것이며 파피루스형 기둥도 그와 같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에 이르면 이러한 복합형도 열 종류가 있다. 주두에 하트홀 여신 얼굴의 주두를 붙인 것도 있다. 화강암·석회암·사암이 주로 사용되었고, 한개만으로 된 돌 기둥이나 드럼형(型)의 돌을 쌓아올린 기둥도 있고 비문(碑文)을 파서 채색한 경우도 있다.

오벨리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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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belisk

신전(神殿)의 탑문(塔門=퓌론) 앞에 좌우 일기(一基)마다 설치된, 약간 끝이 가는 4각형의 거대한 석주로, 끝은 4각추(四角錐)이며 기둥의 표면에는 히에로글리프비(碑)가 있다.

헬리오폴리스 태양신 숭배에서 기원한다고 말해진다. 통상적으로 아스완의 화강암을 끓어 낸 것으로서 하트솁수트 여왕의 것은 높이가 30m, 300t 이상에 달한다. 지금까지 50기(基) 이상이 침입자의 기념품으로 해외에 가지고 나가게 되어 원위치에 서 있는 것은 5기에 불과하다.

분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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墳墓

영혼 불멸을 믿었던 이집트 사람은 묘, 즉 영원한 집의 건축에 큰 관심을 기울였다. 선(先)왕조시대에는 원(圓) 또는 타원형의 수혈(竪穴)이었으나 제1왕조경부터 마스타바분(mastaba墳)이 출현하였다. 이것은 직 4각형 평면의 피라미드를 단두(斷頭)한 모양인데 기와나 석회암으로 만들어지고, 현실(玄室)은 지하에 두고 사당(祠堂)은 지상에 설치하였다. 초기 왕조의 묘도 이 형식이다. 사당의 방 벽면은 각종의 광경이 부조로 덮여 있으며, 맨 안쪽에 영혼이 출입하는 위문(僞門)을 만들어 두었다. 제3왕조부터는 거대한 피라미드가 왕묘(王墓)가 되어 제17왕조까지 답습되었다.

제18왕조로부터 왕묘는 인적이 드문 산중의 암굴분(岩窟墳)이 되고, 신전은 분리하여 장제전(葬祭殿)이 되었다. 귀족의 묘도 단애(斷崖)나 경사진 사면을 이용한 암굴분이 되어 입구 위쪽으로 피라미드를 구축한 예도 있다. 벽면은 회화 또는 부조로 덮여 있어 회화사(繪畵史) 연구의 귀중한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다. 왕묘의 경우에는 긴 종교문서 비문(碑文)을 새겨 두었다.

정중한 장례가 당시의 풍속이었기 때문에 부장품은 다량에 이르러 이집트 미술의 공급원이 되고 있다.

피라미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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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yramid

제3왕조부터 출현한 왕릉의 한 형식이다. 완성을 본 것은 제4왕조 쿠푸왕의, 높이 약 147m의 석축(石築)으로, 거대한 4각추형의 본체와 상·하 신전과 참도(參道) 등의 복합으로서 현실은 본체 내부나 또는 지하에 설치되어 있다.

중(中)왕국시대에는 석재 대신으로 햇볕에 말린 벽돌도 사용되었으며 신왕국시대 이후에는 귀족의 분묘에도 규모가 작은 것을 받아들여 나파타·메로에서의 왕묘 형식으로 이어져 갔고 로마에도 이것을 모방한 묘가 있다.

스핑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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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hinx

사자의 몸뚱이에 사람의 머리를 붙인 동물로 왕권의 상징, 선한 자의 보호신 역할을 하였다. 가장 오래되고 최대의 것은 제3왕조 카프라왕의 피라미드에 부설되어 있고, 길이 80m에 달하여 이것이 신왕국시대에는 하르마키스 신(地平線上의 호루스)으로서 숭배되었다. 카르나크 신전 등의 참도(參道) 양측의 스핑크스는 아몬 신의 신수(神獸)인 양의 머리를 붙여 '두 개의 지평선(영토)'의 수호신으로 하였다. 그리스 신화의 그것과는 전혀 다르다.

주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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住宅

이집트에서는 신전이나 묘는 석재이기 때문에 유적으로서 많이 남아 있으나 주택의 예는 적다. 이것은 건축 재료가 소멸되기 쉬운 볕에 말린 벽돌이나 나무 또는 갈대 등이었고 택지도 현대와 다름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마르나 유적이나 묘의 벽화, 그리고 가옥의 모형(부장품) 등으로 대략은 알 수 있다.

즉 대저택은 연와(벽돌)로 담을 둘러싼 정원에 못을 파고 수목(야자수나 시카모아)를 심었다. 건물은 이층으로 방이 열개 이상인 것도 있으며 원주(圓柱)가 있는 파브리크의 방으로 나누어져서 시중들의 방·부엌·욕실·변조 등이 부속되어 있었다. 가구는 침대·의자·작은 탁자·장궤(長櫃) 등이고 벽걸이와 일종의 양탄자 같은 것도 애호되었다. 창문은 천장 가까이에 작게 만들어져서 외부의 열을 차단하였다. 부지내에 성당(聖堂)을 세우고 담벼락에 연하여 가축의 우리나 사일로를 설치하였다. 일반의 가옥은 훨씬 간단하여 현대의 농가와 유사하고 이층집의 경우에는 아래층이 창고가 되어 있었다.

일반적으로 북쪽에 시원한 바람을 쏘일 테라스를 붙이고 있다. 묘를 파는 인부 등은 방이 이어달린 긴 집에 집단적으로 거주하였다.

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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繪畵

이집트 화가의 사명은 사물의 형태나 본성이나 특징을 묘사하는 일이어서 회화는 신이 정한 질서를 지킬 필요가 있었다. 현존하는 자료는 거의 모두가 묘의 벽화이고 그것은사자(使者)의 영원한 생명이 생활하기 위하여 묘실 내에 현세를 재현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부조(浮彫) 또한 마찬가지이다.

이집트 회화의 특징은 원근법의 결여와 물체 묘사에 있어서 측면도와 정면도의 혼용이다. 특히 인체에서 머리는 항상 측면이고 어깨와 몸통은 정면이며 허리에서 아래 부분은 다시 측면이 되고, 얼굴의 정면도는 예외였다. 동물은 기본적으로 측면이다. 이 형식은 왕조문화의 발생과 동시에 결정되었다. 벽화는 진흙 연와의 벽이나 바위 벽에 정제(精製)한 점토 또는 석고질(石膏質)의 모르타르를 바른 위에 그려진 것이었다.

이집트 회화사(繪畵史)의 성쇠는 정치적 번영의 역사와 일치한다. 선왕조시대에는 암벽화(岩壁畵)나 토기 표면의 장식이 있고 그 말기인 히에라콘폴리스 벽화에는 권력자의 도상(圖像,icon) 표현에 있어서 이집트 양식의 기초를 볼 수 있다. 초기왕조시대의 분묘에는 다채로운 기하학적 무늬가 있을 뿐 형상적인 회화는 볼 수 없다. 그러나 고왕국시대에는 <메이둠의 오리>(제4왕조)가 나왔다. 유례(類例)를 찾을 수 없는 것은 아마 진흙 연와벽이 파손되기 쉽고 작품의 대부분은 소멸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부조의 밑그림에는 볼 만한 것이 있었다.

중왕국시대의 회화는 베니하산의 암굴분(岩窟墳) 벽화에서 볼 수 있듯이 데생은 진보하지 않았으나 화려한 채색을 보였다. 신왕국시대, 특히 제18왕조는 황금기이다. 전반 토트메스 3세 시대까지는 전통적인 아르카이슴에서 벗어나지 못하였으나 후반에는 감수성이 풍부한 선과 정묘한 색채로 완성의 경지에 도달하였다. 나크트와 멘나의 묘에 있는 벽화(모두 그르나에 있음)는 이집트 회화 전성기를 보여 주는 좋은 예가 된다.

아마르나 양식은 조각만큼은 영향을 주지 않았다. 제19왕조에는 기교에 치우쳐 조방하게 되었고(데르 엘 마디나의 例), 제20왕조 이후에는 서서히 회화활동이 침체되어 겨우 파피루스 문서의 삽화 등에 그 전통을 남겼을 뿐이었다.

색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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色彩

안료(顔料)로서, 흑(黑)은 그을음, 청(靑)은 구리 계통의 유질(釉質)의 분말, 녹(綠)은 공작석(孔雀石)이나 녹색 글레이즈의 분말, 적(赤)은 자토, 황은 황토(黃土), 백은 석회 등이 사용되었다. 또 이집트인에게는 독특한 종교적 색채 상징관념이 있어서 각기의 색마다 특정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예를 들면 백은 기쁨, 흑은 재생(再生), 적은 악마, 황은 신성, 녹은 활력을 의미하여 그러한 법칙에 따라서 종교적인 공예품의 채색이 결정된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일반적인 회화는 화가가 관찰한 대로 자연스럽게 채색되었다.

부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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浮彫

수법에는 통상적으로 양각(陽刻)과 음각(陰刻)이 있다. 선(先)왕조시대에는 상아의 세공에도 보였지만 왕조시대에 들어서면 묘나 신전의 벽면에 그려졌다. 도상(圖像)의 표현법은 거의 회화와 같이 채색되었다. 제5왕조에 최고의 기술에 달하여 중왕국시대에는 그것을 답습하였으나 신왕국시대에는 궁정 아틀리에의 제작품을 제외하고는 조잡하게 이루어졌다. 신전에는 거대한 구도가 채용(採用)되어 그 외벽면(外壁面)에는 음각을 하였고 내면은 양각을 하였다. 사이스 시대에는 고왕국시대의 양식으로 돌아가려는 복고운동이 있었다.

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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彫刻

'생명의 모형을 만드는 사람'이라 불려지는 이집트 조각사(彫刻師)의 사명은 명제(命題)에 영원한 생명을 부여하도록 충실하게 조각하는 것이었다. 조각의 종류에는 신상(神像)·왕상·개인상·풍속상 및 동물상 등인데 묘에 안치된다든지 신전에 모셔 두었으며, 그 크기도 20m 이상의 거상(巨像)에서 몇 cm의 소상(小像)에 이르렀고, 돌·나무·금속·상아 등 다양한 재료가 사용되었다.

역사적으로 보면 선왕조시대에는 사람과 동물상 등의 토제(土製)나 상아 조각이 있었으나 유치한 것이었다. 그러나 석회암·화강암·편암(片岩) 등의 조각이 출현하여 이미 이집트 조각의 시조적(始祖的)인 모형이 형성되었다. 고왕국 시대는 조각 사상(史上)의 고전기로 되어 이집트 양식이 완성되었다. 제4왕조의 카프라왕의 섬록암상(閃綠岩像), 라호테프 부처상(夫妻像), 카이페르 목상(木像=村長像), 페피 1세 동상(銅像) 등이 대표작이다. 목상과 석회암상은 채색되어 있다. 형식은 입상(立像=直立 또는 왼발이 一步 전진한 자세)·의좌상(椅座像)·호좌서기상(胡座書記像) 등이 있고, 개인의 단신상(單身像) 외에 부부나 가족 군상도 있었다. 일반적으로 왕상은 신전에 두었고 일반인의 인물상은 묘의 세르다브에 안치되는 이른바 '카 상(像)'이었다. 옥안(玉顔)을 붙인 예도 많았다. 전체적으로 보아 사실적 기법에서 출발하였고 일종의 이상화(理想化)에 성공한 멤피스파(派)가 전성기를 이루었다.

중왕국시대에는 이것에 테베파의 사실주의가 가하여져서 특히 인물의 개성 표현이 특징이었고, 대표작은 제12왕조 제왕(諸王)의 초상(肖像)이다.

신왕국시대의 경향은 당초 제18왕조에 현저하게 이상화(理想化)되어 우아함이 가해졌으나 얼마간 유형적이었다. 그러나 신상과 석비(石碑)를 받드는 신형식이 출현하여 중왕국시대에 그 조형(祖型)을 보았던 안 바케(方形彫刻)가 더욱 형상화되었다. 제19왕조 이후는 왕상의 거대성이 증대되었으나(예를 들면 라메스 2세) 대체로 조잡·형식·추종에 빠져 버렸다. 이 사이의 이크나톤과 네페르티이트상을 절정으로 하는 아마르나 양식의 자연주의는 특이한 존재이다. 목조(木彫)에는 제 나라의 것과 남방의 흑단(黑檀), 레바논의 삼나무를 즐겨 썼다.

후기왕조시대에는 제25왕조에서의 사실주의의 부활, 제26왕조(사이스 왕조)의 고왕조시대 양식을 지향하는 복고 운동이 있었고, 한편 청동조각에 의한 인물상(예를 들면 타그셰트 여왕상) 외에 특히 소형의 주동신상(鑄銅神像)이 성행하고 목조(木彫)나 석조는 점차 쇠퇴하였다.

특정한 인물의 표현이 아닌 풍속상은, 고왕국시대에는 석조(石造)의 노동자나 시종의 상이 있었지만 중왕국시대 이후에는 생활의 각 분야를 표현한 채색 목조의 군집상이 발달하였다. 그러나 예술적인 것은 많지 않다.

우샤브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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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habti

미라형(形)의 소상(小像)으로 가슴에 모은 양손에 괭이를 잡고 등에 바구니를 지고 동부(胴部)에 <사자(死者)의 서(書)> 제6장의 일부가 쓰여진 조각이다. 이집트의 종교에는 죽은 사람은 오시리스신(神)이 지배하는 저 세상에서 농사를 짓지 않으면 안 되고 우샤브티는 그날그날의 노동을 사자를 대신해 하는 것으로 미라와 같이 부장(副葬)되었다. 파이안스·돌·나무·흙·구리 등으로 만들었고 정교하여 예술적인 것도 많다. 고대 이집트의 유품 가운데서 가장 일반적인 것의 하나이다.

석제 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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石製容器

실용·비실용을 불문하고 모든 종류의 용기로서 보급되었다. 가장 오래된 것은 신석기시대의 현무암 제품이고 선왕조시대 말기에는 많이 제작되어 난형(卵形)의 항아리가 일반적이며 석재는 석회암·알라바스터·편암(片岩)·화강암·각력암(角礫岩)·반암(斑岩) 등이 사용되었다. 제1왕조경부터 기형(器形)도 다양화하여 경도(硬度)가 높은 섬록암(閃綠岩)·석영(石英)·흑요석(黑曜石)도 사용되었다. 사카라의 제세르왕의 피라미드에서는 3천개 이상의 석제 용기가 발견되었다. 항아리나 병의 성형(成形)에는 드릴을 사용한 듯하다.

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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土器 이집트의 토기는 일반적으로 조잡한 제품이고 질이 좋은 것은 상(上)이집트에 한정되었다. 선왕조 시대에는 흑정토기(黑頂土器=블랙 톱)와 채문토기(彩紋土器=배와 동물의 무늬) 및 적·흑색 마연토기(磨硏土器) 등이 현저하였으며 녹로는 초기 왕조시대부터 사용되었다. 왕조시대에는 기술이 침체하고 문양은 단순 또는 소멸하여 실용기화됨으로써 파이안스에 그 주역을 넘겨 주게 되었다. 용기 외에 인물이나 동물에 흡사한 조형적인 것도 있다. 토기에 광택을 내는 방법은 기원전 4세기경부터 시작되었다.

파이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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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ience

이집트 파이안스는 유럽과는 달리 석영(石英) 분립(粉粒)을 성형한 태(胎)에 시유(施釉)한 것인데, 색은 적·황·흑 등도 있으나 터키석이나 유리석(瑠璃石=라피스 라즈리)을 모방한 청과 녹이 일반적이었다.

선왕조시대에 제작하기 시작하여 조세르왕의 피라미드 내부 벽면 타일과 같이 제3왕조경부터 성하게 만들어졌다. 제품은 비즈·부적(符籍)·소조각(小彫刻)·상안(象眼)·용기·장식품 등 여러 종류로 감청(紺靑)의 것은 이집샨블루로서 현재에도 애호가가 많다.

글라스 공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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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工藝

이집트에서는 귀석(貴石)의 대용으로 글라스(glass) 공예가 발달했기 때문에 투명한 글라스는 인기가 없었고 모두 색(色)글라스로 청·적·황·녹색이 애호되었다. 원료는 모두 이집트에 많은 석영 및 천연의 소다로 이미 선왕조시대부터 만들어져 신왕조시대 이후에 크게 발달하였다. 제품은 소형인 것이 많고 파상선문(波狀線紋)이 붙는 샌드코아(砂核法)로서 만든 향수병이 특징적이어서 수출된 것도 있다. 후기에는 파테 두 바르 제품도 출현하게 되었다.

금속 공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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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屬工藝

주류는, 전통적인 동제품으로 고왕조시대부터 기술이 발달하였으나 왕조시대를 거치면서 원료를 국외에 의존하게 되었다. 청동은 중왕국시대 이후 제련되었다. 동제품으로는 무기·이기(利器)·용기, 건축 부분품이나 가구·장신구 외에 조각에도 제6왕조 페피 1세의 주상(鑄像=부분적)과 같은 대형과, 말기왕조시대에는 소형(특히 神像)이 잘 만들어졌고 납형기법(蠟型技法)도 고도로 발전하였다. 제동(製銅) 공작 과정은 가끔 묘실의 벽화에서 볼 수 있다. 제철기술은 기원전 1000년경에 도입되었으나 보급되지 않았다.

귀금속 공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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貴金屬工藝

귀금속에는 금·은·엘렉트람이 있다. 금은 선왕조시대에 사용하기 시작하였고 왕조시대에는 태양신의 육체로서 성스럽게 여기게 되어 23금 정도의 것도 정련(精鍊)되었다. 제단, 신이나 왕의 상, 의장품(儀裝品)·장식품·부적 등의 재료가 되었으며 중왕국시대의 공작 기술은 최고에 달하였다.

은은 당초 금보다 희소가치(稀少價値)가 높았으며 엘렉트람은 양자의 합금으로 다량으로 제련되어 오벨리스크 표피(表皮)에도 사용하였다. 금은 상(上)이집트와 누비아에서 채취하고 은은 해외에서 수입한 듯하다.

보석 세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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寶石細工

장석(長石)·벽옥(碧玉)·홍옥(紅玉)·마노(瑪瑙)·녹주석(綠柱石)·유리석(琉璃石)·수정·터키석·석류석 등을 사용하였을 뿐 진짜 보석은 없었다. 중왕국시대에 최고의 기술에 달하여 신왕국시대 이후에 보급하였다. 귀금속과 같이 가공한 경우가 많고 옷깃 장식, 목걸이·팔찌·가락지, 장식대(裝飾帶), 가슴 장식, 부적 및 상안(象眼)의 조각(片) 등을 만들었다. 글라스나 파이안스의 대용품도 많다. 제1왕조 제르왕, 다하슐과 리쉬트 출토품(出土品=제12왕조), 투탕카멘왕의 것이 유명하다.

부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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符籍

마력을 가진다고 믿어진 소형의 조형물로 일상 패용(佩用)하거나, 미라를 감는 권포(卷布) 사이나 옷깃 장식에서 발견된다. 금·은·동·석제 등이 있었으나 파이안스제(製)가 일반적이다. 종류도 많고 그 의미가 확실하지 않은 것도 적지 않으나 <사자(死者)의 서(書)> 등 종교 문서에 명기된 경우도 있다. 안크는 생명, 파피루스주(柱)는 활력, 스카라브는 생성(生成), 제드주(柱)는 안정, 티트는 인스 여신의 가호, 우자트(호루스의 눈)는 사악한 귀신을 물리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되어 있다.

스카라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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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arab

스카라베우스 사크르는 곤충의 이름으로서 통상적으로 이 벌레를 본딴 소형의 조각을 가리킨다. 부적 또는 인장(印章)으로 사용되었고 아랫면은 평평하여 여기에 왕명·신명·공직명 또는 성문(聖文=hieroglyph)이 새겨져 있으며 왕의 기념적 사건(成婚式 따위)을 기록한 것도 있다. 또 스카라베(scarabee)는 '생성(生成=케펠)'을 상징하여 케프리신(Khepri神)이 되어 상승하는 태양을 의미하였으며 미라의 심장부에 놓여진 것도 있다. 파이안스·돌·동제품이 일반적이고 후세의 모조품도 많다.

목공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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木工藝

이집트에는 목재가 적었으나 목공 기술은 크게 발달하였다. 보통의 소형 제품은 토산의 시카모아와 아카시아를 사용하였고 대형·고귀한 것에는 레바논 삼나무를 사용하였다. 주로 가구를 만들었고 관(棺) 또는 조각도 만들었다. 가구는 고왕국시대에 있어서는 단순한 침대나 의자 정도였지만 신왕국시대부터 정교·화려하게 되어 보석상자와 함도 만들었다. 장식법은 채색 채문(彩紋), 보석류, 글라스·상아 등의 상감(象嵌)과 금도금 따위가 있다. 접합부는 촉엮음 또는 목침(木針)을 사용하였다.

상아 세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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象牙細工

이집트인들은 이미 선사시대부터 상아를 세공의 좋은 재료로 삼고 있었다. 원료는 누비아·푼트 그리고 아프리카 내륙지방에서 수입한 것인데 작은 함·팔찌·귀걸이·빗·비녀·거울·부채의 손잡이·화장품 용기와 부적 등 그 밖에 부조(浮彫)한 파넬, 가구나 기타 목공품의 상감용(象嵌用) 등 여러 갈래로 사용되었고, 작은 예이기는 하나 조각품도 있다(제4왕조 쿠푸왕 좌상). 부조로 판 상아는 가끔 적색과 흑색으로 착색한 것도 있다(투탕카멘왕 보물에 좋은 예가 있음).

직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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織物 왕조시대를 통하여 아마(亞麻)가 거의 유일한 원료로서 선왕조시대부터 짜여졌다. 일반적으로 평직기(平織機)가 있었고 신왕국시대 이후에는 수직기(垂織機)도 나오게 되었다. 옷감, 미라의 포대(包帶), 배의 범포(帆布), 침대 덮개를 만들었고 철직(綴織)의 기술도 발달하였다. 고급품은 흰색으로 얇고 정교한 마포이며 염색도 하여 인디고나 꼭두서니 같은 식물성 염료를 사용하였다. 목면(木綿)의 기록은 기원전 6세기에 있으나 코프트 시대에 보급되었으며 양모는 이집트인이 싫어하였다. 그리고 마포(麻布)는 수출한 것도 있었다.

투탕카멘왕 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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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寶物

1922년 왕가의 계곡에서 카터(H. Carter)가 발견한 그의 왕묘에서 부장품(副葬品)으로 나온 것이다. 그의 재위 기간(기원전 1354∼1345)이 짧았으나 그의 묘는 완전히 보존된 유일한 것이기도 하였다. 이 보물은 공예적 가치가 높고 금을 대량으로 사용한 점이 눈에 띈다. 특히 귀금속 공예(미라의 마스크 등), 보석류 세공, 목공예(침대나 의자), 상아 세공, 석제 용기 등이 주요한 것이었다. 그러나 귀금속 공예는 중왕국시대의 것이 더 우수한 것도 있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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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za

정확하게 말한다면 카이로 서연안(西沿岸)의 지명인데 보통 서쪽 10km의 유적지를 가리킨다. 즉 제4왕조 쿠푸·카프라·멘카우라 제왕(諸王)의 피라미드가 우뚝 서 있고, 그 주변에 신전과 스핑크스와 귀족의 묘(마스타바)가 무리를 이루고 있다. 오스트리아·미국·통일 아랍 등이 이를 조사하였다. 기자 묘의 부조는 사카라의 부조보다 떨어지나 카이로에서의 교통이 편리하여 관광객이 끊이지 않는다. 현재 스핑크스를 중심으로 손 에 르미에르를 실시하고 있다.

사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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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qqara

카이로 남방 25km 지점에 있는 지명이다. 초기 왕조의 왕묘을 비롯하여 제3왕조 제세르왕의 계단 피라미드, 피라미드텍스트가 있는 제5왕조 우니스왕의 피라미드, 부조의 정수(精髓)라고 하는 티(제5왕조)와 메렐카(제6왕조)의 마스타바 및 성우(聖牛)의 묘 세라페움 등이 있다.

또 나일강 쪽으로 고왕국시대의 수도 멤피스의 유적이 있고 야자수 사이 사이에 라메스 2세가 세운 프타흐 신전의 옛터와 그의 거상(巨像)이 있다.

아비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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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ydos

카이로 남방 약 550km 지점에 있는 지명. 초기 왕조의 왕묘와 신전이 세워져 있고, 고왕국시대에는 오시리스신(神) 신앙의 중심지였으며, 신왕국시대 말기에 걸쳐 이집트 각지로부터 성지(聖地) 순례자가 모여들어, 오시리스신에 바치는 신전과 개인의 묘가 구축되어 신의 가호를 기원하는 스테레(石碑)가 세워졌다. 신전에는 특히 유명한 제19왕조 세티 1세의 아름다운 부조와 채색이 잘 보존되어 있다. 여기에서 출토된 석비와 우샤브티 등은 방대한 수에 이른다.

테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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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bes

현재의 룩소르 일대의 옛 이름이다. 이 지방은 제11왕조와 제18왕조 이후 왕국의 수도로 되었다. 나일강을 끼고 동·서로 나뉘어 동쪽은 국가 수호신이 된 아멘신의 신전과 시민을 중심으로 하였고, 서쪽은 국왕과 왕족의 능과 묘 그리고 장제전(葬祭殿) 및 귀족의 묘와 같은 사후의 세계가 중심이 되었다. 그러나 서쪽에도 왕궁이 있었던 적이 있다(아멘호테프 3세, 라메스 3세 등).

아멘 신전은 카르나크가 본전(本殿)이고 룩소르가 부전(副殿)인데 역대의 왕이 계속 덧붙여 건축하였기 때문에 거대한 규모가 되었다. 서쪽 '왕가의 계곡'과 '왕비의 계곡'은 신왕국시대 왕족의 '영원한 집'으로 계획된 것인데 대개의 것은 즉시 도굴당하였다. '귀족의 묘'는 미려한 벽면으로 애호가를 매혹시키고 있다. 데르 엘 바하리(하트솁수트 여왕)와 메디네트 하부(라메스 3세)의 신전은 각각 개성이 있는 대표적 건축이다.

누비아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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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遺跡

아스완부터 제4카타락트 부근까지의 지역을 누비아(Nubia)라고 한다. 고래로 아프리카 내륙부와 이집트에 중개무역을 하는 사람이 많았고, 또 이 지방은 금의 다량 산출로 역대 이집트 국왕은 누비아를 자기 세력하에 두었으며 여러 곳에 신전과 성채(城砦)를 구축하였다. 아부심벨 신전과 부헨성(城)이 그 대표적 유적이고 북누비아의 전유적지가 아스완 댐의 건설로 수몰(水沒)되기 때문에, 유네스코가 중심이 되어 세계 40개국의 협력에 의해서 해체 이동 등을 하여 구제되었다.

아부심벨 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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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神殿

제19왕조 라메스 2세가 아스완의 남방 300km 지점에 만든 암굴 신전(岩窟神殿)으로 누비아에서 최고의 유적이다. 대신전은 태양신 라하라크티 등에, 또 소신전은 하트홀 여신에게 바친 것이었다. 특히 대신전 전면에 있는 왕의 거상(巨像)은 높이가 20m 이상이나 되고 내부의 벽면에는 카데시의 전투 등의 부조가 있다. 아스완 댐 건설로 인하여 수몰되게 되는 것을 세계 각국의 협력에 의해 약 3천600백만 달러의 비용을 들여 구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