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사회 I·문화재/문 화 재/중요 문화재/광주광역시

증심사 편집

證心寺

광주광역시 동구 운림동 무등산 서쪽 기슭에 있는 사찰. 대한불교조계종 제21교구 본사인 송광사의 말사이다. 9세기 중엽에 철감선사(澈鑑禪師)가 창건하였고, 1094년(선종 11) 혜조국사(慧照國師)가 중수하였으며, 1443년(세종 25) 전라도관찰사 김오(金傲)가 자신의 녹봉으로 중창하였다. 그 뒤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자 1609년(광해군 1) 석경(釋經)·수장(修裝)·도광(道光) 등의 선사들이 중창하였고, 그 뒤에도 중수를 거듭하다가 1951년 50여 명의 무장공비들에 의하여 대부분의 건물이 불타버렸으며, 1970년에 크게 증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오백전(五百殿)·명부전(冥府殿)·회심당(繪心堂)·학산장서각(鶴山藏書閣)·요사채 등이 있다.

원효사 편집

元曉寺

광주광역시 북구 금곡동 무등산에 있는 사찰. 대한불교조계종 제21교구 본사인 송광사의 말사이다. 절 주변에는 무명의 고려시대 묘탑을 비롯하여 조선 중기의 회운당부도(會雲堂浮屠) 등이 산재되어 있다. 이 중 부도는 높이 2m이고 4각 지대석(地臺石) 위의 4우(隅)에 신장(神將)을 세운 중대석을 놓고 그 위에 연화대로 받쳐진 탑신을 얹고 있는데, 옥개는 8각으로 각 마루에는 용·거북·비둘기 등의 동물들이 조각되어 있다. 이 절에서 무등산의 정상 쪽으로 골짜기를 넘은 곳에 의상대(義湘臺)라는 매우 수려한 바위 봉우리가 있으며, 그 아래에는 의상토굴이 있다.

충장사 편집

忠壯祠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김덕령(金德齡) 장군을 모신 사당. 김덕령 장군의 본관은 광산, 시호는 충장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담양부사와 장성현감의 천거로 종군 명령이 내려졌으며, 전주의 광해분조로부터 익호 장군의 군호를 받았다. 1594년 선전관이 된 후, 권율(權慄)의 휘하에서 의병장 곽재우(郭再祐)와 협력하여, 여러 차례 왜병을 격파하였다. 충청도의 이몽학(李夢鶴) 반란을 토벌하려다가 이미 진압되자 도중에 회군하였는데, 이몽학과 내통하였다는 무고로 체포·구금되었다. 혹독한 고문으로 인한 장독(杖毒)으로 옥사하였다. 1661년(현종 2) 신원되어 관작이 복구되고, 1668년 병조참의(參議)에 추증되었다. 1678년(숙종 4) 벽진서원에 제향되었고, 영조 때 의열사에 형 덕홍, 아우 덕보와 병향 되었다. 1974년 광주 충장사를 복원하여 충훈을 추모하고 있다.

광주읍성 유허 편집

- 光州邑城遺墟

문화재자료 제20호. 광주 읍성터는 1992년 4월 전라남도청 주차장을 만들기 위하여 부지정리를 하던 중 확인된 유적으로 지적도상에도 그 흔적이 나타나고 있다. 1879년 간행된 『광주읍지』에는 석축 둘레가 8,253척, 높이 9척이며 성안에 1백 개의 우물과 여첩(女堞)이 있으며, 못은 지금은 없어지고 성문으로 서원(瑞元 동), 광리(光利 서), 진남(鎭南 남), 공북(拱北 북)의 4문이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1904년 광주 읍성의 인구는 1만 명 내외였으며, 성은 그때까지 잘 남아 있었다. 1931년 기록에는 관찰부(觀察府)가 무덕전(武德殿) 자리에 있었음을 밝히고 있다.읍성의 철거는 1909년 일본군이 한말 의병항쟁을 탄압하면서 시작되었고, 그 자리에는 도로가 개설되어 일본인 신시가지가 형성되었는데 오늘날 충장로 2, 3가이다. 동헌 등 조선시대 광주읍성 관아가 있었던 전라남도청은 고려 초기 무진년명석등(시유형문화재 제5호) 등의 유물로 보아 원래는 절터였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 읍성은 조선시대 이후에 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현재는 성벽과 관련된 돌들과 흙으로 된 둑만 일부 남아 있는데 확인된 성벽의 높이는 1.9m이다.

취가정 편집

醉歌亭

광주광역시 충효동 광주호 옆 성안마을 뒷동산 동쪽에 있는 정자다. 1890년 김덕령 장군의 후손 난실 김만식과 친족들이 충장공의 성장지에 지었다. 그 후 1950년 6·25 동란으로 불타버린 것을 난실의 후손인 김희준과 친족들이 1955년에 중건하였다. 이 정자의 이름을 취가정이라 부른 것은 권필의 꿈에 억울하게 죽은 김덕령 장군이 술에 취해 나타나 서로 시를 나누었는데 외로운 혼을 달래기 위한 「취시가」를 읊은 데서 유래된다.

환벽당 편집

環碧堂

식영정 건너 광주호 상류 청계천가의 충효동 쪽 언덕 위에 있다. 높다랗게 자리잡은 이 정자는 사촌(沙村) 김윤제(金允悌 1501~1572)가 지은 정자다. 당호는 신잠(申潛)이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