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문화·민속/한국의 연극/한국의 신극/신극의 배우

신극의 배우〔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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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劇-俳優〔槪說〕

연극에 있어서 배우가 차지하는 비중은 '연극은 배우 예술이다'라는 말로 짐작할 수가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 신극에 있어서 그 배우를 양성하기 위한 교육기관이나 그들 나름대로의 계통적인 수련이 전무했었음은 바로 한국 신극이 지니는 취약성과 후진성을 말해주는 증거일 수도 있다.

그 첫째 원인은 배우에 대한 사회적인 인식과 평가가 매우 낮았다는 점이다. 봉건사회시대부터 광대(廣大)라는 칭호로 불리어 왔고, 신파극 시대만 해도 미천한 계층이나 화류계 출신의 여성들이 배우로 등장했기 때문에 연극배우가 일반인으로부터 천대를 받아 왔음은 하나의 숙명이라고 할 수도 있다. 특히 그들의 교육수준은 보잘것이 없는데다가 사생활이 문란했으므로 어떤 예술적으로 승화된 세계보다는 차라리 유흥을 위주로 하는 계층으로 밖에 대우를 받지 못했었다. 그러나 1920년대에 토월회(土月會)가 조직되고 1930년대에 들어와 극예술연구회(劇藝術硏究會)가 발족되었는바, 이들의 모두가 외국 유학생이며, 당대의 지식계급이라는 점에서 확실히 파격적이며, 혁신적인 사실이 아닐 수 없었다. 박승희(朴勝喜), 박진(朴珍), 김팔봉(金八峰) 등은 바로 토월회 멤버였고, 서항석(徐恒錫), 이하윤(異河潤), 이헌구(李軒求), 유치진(柳致眞), 모윤숙(毛允淑) 등은 극예술 연구회의 동인이고 보면 누가 보더라도 당시에 있어서는 시대의 첨단을 가는 지식인이었으며 상류층의 인사들이었다.

그러나 막상 이들이 연극을 상연하는 단계에 이르러서 부딪치게 되는 난관은 바로 배우였다. 어떤 이념이든 문학론이든 인생관이든간에 그것을 무대 위에서 표현하고 관객에게 직접 보여주는 구실은 배우이지 이들 지식인 자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간혹 그들 자신이 무대에 오르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들은 어디까지나 연극 애호가(愛好家)이며 아마추어이지 전문적인 배우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들의 난관은 더 크고 높았다.

바꾸어 말해서 하나의 이념으로 맺어진 동인의식은 고매하다 할지라도 성공적인 무대를 창조하기 위해선 다소 지적수준이 낮다 할지라도 그것을 묵인하는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여자배우의 경우는 양가의 규수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으니, 초기 신극의 여배우는 대개가 연극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고, 그것은 임기응변으로 찾아다 세운 배우였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본격적으로 신극운동을 펼친 집단은 학생예술좌(學生藝術座)임을 밝히지 않을 수가 없다. 학생예술좌는 도쿄유학생 중에서도 연극을 전공하는 유학생들로써 구성된 연극전문 집단이었고, 이 구성원의 주도적 인물이 배우였으니, 즉 이해랑(李海浪), 김동원(金東園) 등은 바로 그때의 동인들이었다. 이들은 '쓰키지 소극장(築地小劇場)'에 드나들면서 신극을 배웠고 거기에서 얻은 지식을 한국인 학생 스스로가 만들어보자는 의욕으로 뭉쳐진 최초의 연극전문극단이자 최초의 신극배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동기가 되어, 고국에 돌아와서도 연극 공연을 했고, 국내 학생극을 직접·간접으로 지도하고 육성한 것도 모두가 유학생들이었다. 이화삼(李化三), 장서언(張瑞彦), 박상익(朴商翊) 등의 배우와 박동근(朴東根), 주영섭(朱永涉), 윤준섭(尹駿燮), 이진순(李眞淳) 등 연출자가 모두 이 시기에 두각을 나타낸 사람들이다.

따라서 신극의 배우가 종래의 신파극 배우보다 지적 수준이 높았고, 그들 나름대로 일본에서 계통있는 전문 교육을 받았다는 점에서는 월등하게 유리한 조건을 갖춘 셈이었다. 광대도 장이도 아닌 예술가로서의 긍지와 개척정신으로 충만된 초창기 신극 배우들의 용기는 확실히 고무적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일단 학업을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오자 연극계의 반응은 매우 거칠고 억세었다. 그것은 그 당시 상업주의 연극의 총본산인 동양극장(東洋劇場)을 중심으로 한 신파극 배우들의 적대감과 질시와 경계심이었다. 외국에서 신극을 공부했다는 무명의 학생배우와 10여년을 일선 무대에서 다지면서 고정관객을 가지고 있는 신파배우 황철(黃澈), 심영(沈影) 등은 한편으로는 적대시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은근히 경계했다. 같은 연기자이면서도 신파극은 외형적인 과장과 유형적인 연기로 관객을 피부적으로 자극하는 표현법을 썼다면 이들 신극배우들은 이른바 '리얼리즘' 연기의 원전(原典)인 '스타니슬라프스키 시스템'에 의한 내면적 연기를 주장하였다.

이때 이 두 개의 배우술을 판단해야 할 사람은 바로 국내의 관객이었다. 자연주의 초기 소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최루성 비극(催淚性悲劇)만을 연극으로 알고 있던 국내 관중이 내면적 연기를 내세우는 유학생 연기를 이해할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예술로는 이겼을지 모르지만 흥행면에서는 참패를 봐야 했고, 게다가 일제 말기의 군국주의 정책이 마침내 예술적인 연극보다는 일제의 국책 수행을 위한 어용연극을 강조하는 마당에서 지식인의 연극 참여는 매우 어려웠다. 그래서 잠시 무대를 떠나야 했던 일도 신극 배우의 잊을 수가 없는 비극이라 하겠다.

8·15광복이 되자 모든 예술계가 그러하듯 연극계도 '이데올로기'의 와중에서 헤어나지 못했으나 좌익연극의 총본영(總本營)인 연극동맹(演劇同盟)은 대다수의 극작가·연출가·배우를 흡수했고, 오직 극예술협회만이 우익진영의 집합체가 되었다. 유치진(柳致眞), 이해랑(李海浪), 박상익(朴商翊), 이화삼(李化三), 윤방일(尹芳一), 김동원(金東園), 오사량(吳史良) 등이 바로 그 중추 인물들이었다. 이들은 그 후 신극협회(新劇協會)로 개칭하여, 주로 번역극을 상연함으로써 한국 신극의 명맥을 이어온 유일한 인맥(人脈)이 되었다.

6·25전쟁 후 모든 배우들이 영화계로 전향했을 때도 신협(新協)은 연극을 계속했고, 신협의 연극이 한국의 연극을 대변하는 것 같은 인상을 주게 된 것은, 바로 한국의 신극배우가 그 곳에 모여 있었기 때문이다. 박암(朴巖), 조항(趙恒), 황정순(黃貞順), 장민호(張民虎), 백성희(白星姬) 등은 모두 여기에서 대성한 신극배우들이다. 그러나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새 시대의 젊고 유능한 극단의 출현과 함께 이제는 신극도 신극 배우도 아닌 한국의 현대연극이 어느 때보다도 활발하게 고개를 내밀었다. 그들은 모두가 대학에서 수학한 지식인이며 동시에 연기자로서 새로운 이미지와 선망을 관객들에게 뿌려 주고 있었으니, 김성옥(金成玉), 김동훈(金東勳), 오현경(吳鉉京), 전운(田雲), 나옥주(羅玉珠), 박정자(朴正子), 여운계(呂運計) 등은 한국의 신극을 이어나갔던 새 시대의 배우였다고 하겠다.

<車 凡 錫>

변기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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卞基鍾 (1895-1977)

연기자. 본명 변창규(卞昌圭). 서울 출생. 1911년에 가톨릭 계통의 계성학교고등과를 졸업. 18살에 신파극단인 '유일단(唯一團)'에 가입하여 연극배우로 극계에 투신했다. 1914년에는 '조선문예단(朝鮮文藝團)'의 창립동인이 되었으며, 이후 '예성좌(藝星座)'(1916), '신극좌(新劇座)'(1918년)의 창립동인으로 활약했다. 1924년에는 '조선극우회(朝鮮劇友會)', 1926년에 '조선연극사(朝鮮演劇舍)' 등을 직접 운영했다. '동양극장' 설립 후에는 동양극장 전속극단인 '청춘좌(靑春座)'의 대표에 피임되었다. 광복 후에도 '자유극장(自由劇場)' '상록극회(常綠劇會)' '극협(劇協)' '자유극회(自由劇會)' '민극(民劇)' 등 여러 극단을 조직하기도 했다. 예술원 회원, 서울시 문화위원, 한국무대예술원 부원장, 한국연극협회 이사, '국립극단' 단장 등을 역임. 그는 77년 별세하기까지 '국립극단' 단원으로 활약한 최연로 연기자였다.

고설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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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雪峰 (1913-2001)

연기자. 서울 출생. 본명은 고진섭(高鎭燮). 동명(東明)중학교를 졸업. 1940년을 전후해서 동양극장(東洋劇場) 소속의 극단 '청춘좌(靑春座)'를 비롯해, 극단 '아랑(阿娘)' '신청년' '민극(民劇)' '신협' 등을 거쳐 현재 '국립극단'에 소속되어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는 연기자이다. 1950년대에는 영화에 출연하기도 했다. 1960년대에 들어와서는 연로한 나이에도 불구하고 연극활동에만 종사하고 연극협회 이사로서 후진양성에 정열을 쏟았다. 1940년에 <과부>로서 출발, <성길사한(成吉思汗)> <행복의 계시>(1943), <삼대(三代)>(1944), <새벽길>(1945), <원술랑>(1950), <목격자>(1953), <시라노 드 베르즈라크>(1958), <대수양>(1959), <마을의 봉팔이> <여당원>(1961), <젊음의 찬가>(1962) 등 '국립극단'의 30여회 공연에 거의 출연하다시피 하여 한국적 리얼리즘 연극의 연기부분에 크게 기여한 연기자이다.

박상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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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商翊 (1915- ) 연기자. 서울 출생. 연희전문학교 문과 졸업. 1935년 20세 때 '극예술연구회' 부설 '실험무대(實驗舞臺)'에 입회한 후 1938년에 중간극을 표방하는 '중앙무대(中央舞臺)'에 들어갔다가 동양극장 전속극단에, 1942년에 '현대극장'에, 1945년에 '자유극장'을 거쳐 '신협'에서 연기활동을 계속하고 1960년대에는 연극협회 이사로 활약하기도 하였다. 그는 영화계에서도 유명한 배우로 여러 편에 출연하여 희극적 연기를 담당했고, 연극에서는 초년기에 비하여 장년기 후에는 점차 희극배우로서의 성격을 굳혔다. 출연 작품으로는 <어둠의 힘> <신앙과 고향>(1936), <무료치병술> <풍년가> <자매>(1937), <카추샤> <촌선생> <홍루몽> <구원의 애인>(1938), <장한몽>(1940), <대추나무> <소> <마리우스>(1943), <쾌걸 윙> <자명고>(1945), <맹진사댁 경사>(1949), <햄릿> <오셀로> <인생차압>(1952),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금삼의 피>(1956), <한강은 흐른다>(1959), <죄와 벌>(1960) 외 다수가 있다.

김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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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東園 (1916- ) 연기자. 서울 출생. 본명은 김동혁(金東赫). 니혼(日本) 대학 예술과 졸업. '극예술연구회'의 후신격이 되는 극단 '극연좌(劇硏座)'에서 연기활동을 시작, 해방 후의 '극협(劇協)'을 거쳐 '신협'의 창립동인으로, 1972년까지 연극협회 부이사장으로 활약해 오고 있다. 또한 영화분야에도 중진역할을 맡아온 영화계의 베테랑이며, 100여 편의 작품에 출연했다. 그러나 1936년 유치진 작 <소>에 출연한 이래 무대연기면에서 그의 예술이 평가받아 왔다. 출연작품으로는 <춘향전>(1938), <부활>(1941), <오셀로>(1951), <맥베스>(1952), <빌헬름 텔> <줄리어스 시저>(1953),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1956), <한강은 흐른다>(1959) 등이 있다. 특히 1962년 극단 '드라마센터'의 창립 공연 작품인 <햄릿>에서 햄릿역으로 1970년 극단 '신협'과 독일문화원이 주최한 괴테의 <파우스트>에서 주역을 맡아 세련된 연기를 보여주었으며, 한국 신극 보급에 지대한 공헌을 해 왔다. 현재 연극협회 고문으로 있다.

강계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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姜桂植 (1917- ) 연기자. 충남 아산(牙山) 출생. 1942년 당시 조선연극협회 산하 국민연극연구소를 수료하고, 1943년 극단 '현대극장(現代劇場)'에서 연기활동을 시작하였다. 광복 후에는 1947년에 극단 '청포도(靑葡萄)'와 1948년 극단 '민예(民藝)'에 들어가 활동했다. 1950년도에는 '신협(新協)'에 들어가 활동했다. 1950년도에는 '신협(新協)'을 경유 현재는 '국립극단(國立劇團)'에 소속되어 있으며, 한국연극협회 고문으로도 있다. 한때 영화에 출연하여 연극 영화계를 주름잡던 배우였다. 출연작품으로는 1943년에 유치진 작 <대추나무>로 시작, <춘향전>(1944), <에밀레종>(1945), <낙화암>(1946), <초원의 제전>(1947), <카추샤> <젊은 그들>(1948), <원술랑>(1950), <한강은 흐른다>(1954), <신앙과 고향>(1956), <세일즈맨의 죽음>(1957), <죄와 벌>(1958), <대수양(大首陽)>(1959), <젊음의 찬가> 등 다수가 있다.

강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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康昶秀(1919-2003)

연기자. 함남 홍원(洪原) 출생. 본명은 강경찬(康慶燦). 중국 신경(新京) 대학원을 졸업, 당시에는 학식있는 연기자였다. 1942년에 극단 '성군(星群)'에 들어간 것이 연기생활의 처음으로 1948년에 '대중극회(大衆劇會)', 1949년에 '예도(藝都)', 1952년에 극단 '극협(劇協)'에 입회했다. 전쟁기간 중 부산·대구를 순회하였고, 1954년에는 극단 '자유극회'를 경유, 1960년도 이후 '국립극단'에 소속되어 왔다. 출연작품으로 <산돼지>(1942), <산불>(1945), <마인의 비밀>(1947), <지옥과 인생>(1948), <청춘역>(1950), <무영탑>(1952), <인생차압>(1956), <시라노 드 베르즈라크>(1958), <대수양(大首陽)>(1959), <분노의 계절>(1960), <마을의 봉팔이> <여당원>(1961) 등 다수가 있다. 1980년대 미국 뉴저지주로 이민하며 신상옥.최은희씨 등 미국에 거주하는 연극.영화 원로등과 지속적인 교류하였으며, 후배들의 미국공연을 다수 관람 및 격려하는 등 열정을 보였다.

장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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張民虎 (1924- )

연기자. 황해도 재령(載寧) 출생. 명신(明新)중학교 졸업. 1945년 극단 '예술무대'에 입단, 1948년 '청춘극회'의 창립동인이었다. 1947년에 중앙방송국 전속 성우로 입사, 1958년에는 제1회 방송문화연기상을 탈 만큼 낭독에는 특유한 자기소리를 갖고 있는 방송 연기자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연극에서는 <햄릿> <오셀로> <원술랑> <줄리어스 시저> <한강은 흐른다> <죄와 벌> <안네 프랑크의 일기> <밤으로의 긴 여로> 등 수십편에 걸쳐 저력있는 연기를 과시, 한국연극의 과묵한 무대 연기자로 각광을 받고 있다. 1966년에 국립극단장, 1967년에 연극협회 부이사장에 피선, 영화에도 다수 출연했다. 현재 연극배우협회 이사.

오사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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吳史良 (1925- ) 연기자·연출가. 평남 평양 출생. 본명은 오영봉(吳永鳳).

경성음악학교 졸업. 1945년에 극단 '극협'에 입단, 1947년에는 '신협', 1949년에는 '제작극회(制作劇會)'의 창립동인으로 연기생활을 시작했다. 출연작품은 <애국자>(1946), <별>(1947), <마의태자>(1949) 등이 있다. 그러나 서울 중앙방송국이 개국되자 성우(聲優)로 들어갔다가 전란시에는 부산방송국 제작과장을 역임하며 연출을 담당, 방송인으로 일하기도 했다. 1962년 극단 '드라마센터'의 창립공연 <햄릿>에 출연하고, <포기와 베스>등에도 출연했다. 그는 극장 사무국장직을 맡기도 했으며, 연극 아카데미 학생에게 연출지도를 하고, 연극협회 부이사장직에 피임되었다. 연극연출가·연기자·방송인 등을 겸하면서 다양한 활동을 벌이고 있으며 현재 서울예전 교수로 있다.

백성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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白星姬(1925- ) 연기자. 서울 출생. 동덕여고 중퇴. 1942년 15세 되는 나이에 극단 '현대극장'에 입단, 1950년 '신협'에 들어간 이후 400여 편에 출연, 한국의 여배우로서 가장 많은 작품에 출연한 셈이다. 일정한 역만 하지 않고 어떠한 역도 할 수 있는 무대 연기자로서의 자질을 충분히 갖추고 있다. 해방 전과 해방 후에 걸쳐 연극에만 전념한 여배우로는 처음이며, 5월문예상(1회)·한국연극상(1회·8회)·3·1연극상(2회)·동아연극상(3회)·한국연극인기상(8회) 등을 받았다. 대표적 출연작품은 <욕망이란 이름의 전차> <다이얼 M을 돌려라> <신앙과 고향> <딸들 자유연애를 구가하다> <엄마의 모습> <마을의 봉팔이> <심야의 고백> <환상살인> <달집> <산불> 등이 있다.

최명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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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明洙 (1928- ) 연기자. 전남 목포 출생. 조선대학교 문과를 졸업한 후 여중학교 교원으로 있다가 1956년 '제작극회' 동인이었으며, 1960년에는 연극협의회에 참여했다. 또 1963년 극단 '민중극장'의 창립동인이었다. <공상도시>(1956), <불모지>(1957), <묵살된 사람들> <돌개바람>(1958), <유리동물원>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1959), <젊음의 찬가>(1962), <민중극장>의 창립공연 작품인 <달걀> <도적들의 무도회> <따라지의 향연> <뜻대로 하세요> <토끼와 포수> <연인 안나> <국물 있사옵니다> 등에 출연, 경쾌한 대사법을 발휘하여 누구나 좋아할 매력을 지닌 연기자이다. 동아방송에 성우로 재직했으며 한때 수편의 영화에 출연한 적도 있다.

강효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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姜孝實 (1930-1997)

연기자. 평양(平壤) 출생. 중학교를 졸업. 극단 '신협'에서부터 무대생활을 시작하였으나 영화에도 수십 편에 출연했다. 그러나 그 개성적이고 독특한 연기는 무대배우로서 각광을 받았으며, 1960년대에는 극단 '산하(山河)'에서 연기활동을 하였다. 대표작으로는 차범석 작 <열대어(熱帶魚)>, 베른슈타인의 <키부츠의 처녀>(1972)가 있다. 특히 자기 개성을 발휘한 작품으로는 극단 '드라마센터'의 <루브(Luv)>에 신구·민승원과 출연한 것으로서 열연을 보여 주었다.

양광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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梁廣南 (1933-2009) 연기자. 경남 거제(巨濟) 출생. 부산대학교 졸업. 미국에서 연극 석사학위를 받아 귀국, 중앙대학교 연극영화학과 창설에 주도적 역할을 했다. 현재 중앙대 명예교수로 있다. 1962년 극단 '드라마센터' 창립공연 작품인 <햄릿>에 호레이쇼 역으로 연기자로서의 첫 출발을 하였고, 1963년에 이근삼(李根三)·김정옥(金正鈺) 등과 더불어서 극단 '민중(民衆)극장'을 창립하였다. 민중극장 첫공연인 마르소 작 <달걀>에 출연하였고, 이어 장 아누이 작 <도적들의 무도회>(1963), 박조열 작 <토끼와 포수>(1964), 그리고 <뜻대로 하세요> <연인 안나>에선 연기자와 연출을 겸하기도 하였다.

오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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吳鉉京 (1936- )

배우. 서울 출생. 서울고교를 거쳐 연세대 국문과를 졸업. 고교 시절부터 연극 활동을 하기 시작한 그는 제1회 전국 중고교 연극경연대회 참가작품 <사육신>에 출연함으로써 데뷔했다. 대학시절부터 많은 작품에 출연한 그는 60년대의 기수로 등장한 극단 '실험극장'의 창립동인으로 지금에 이르고 있다. 희극적 마스크와 재치 넘치는 연기자로서 주로 희극의 주인공으로 많이 등장하지만 비극에도 능하며, 모든 작품을 소화해낼 수 있는 만능 연기자이다. 그가 주연한 작품은 <세일즈맨의 죽음> <화니> <피가로의 결혼> <맹진사댁 경사> <메테오> <허생전(許生傳)> <오셀로> <동천홍(東天紅)> <무익조(無翼鳥)> <너도 먹고 물러나라> <밤으로의 긴 여로> <일요일의 불청객> <기적을 파는 백화점> 등 수없이 많다.

김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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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東勳 (1939-1996)

배우·연출가. 서울 출생. 경기(京畿)고교를 거쳐 서울대학 미학과를 졸업. 대학시절부터 연기와 연출을 시작한 그는 '실험극장'의 창립멤버이며 60년대 연기자의 주역이었다. 용모에 있어서나 정확한 발성, 지성과 감성 등을 고루 갖춘 만능 연기자인 그는 '실험극장' 대표를 지냈다. 연극 경영에도 뛰어난 그가 주연한 대표작으로서는 데뷔작 <아들을 위하여>(서울대학)를 비롯하여 <포기와 베스> <다리에서의 조망> <안도라> <무익조(無翼鳥)> <세일즈맨의 죽음> <롤러스케이트를 타는 오뚝이> <심판(審判)> <에쿠우스> <햄릿> <피가로의 결혼> 등 수십편이 있고 연출작품으로서 <오셀로> <피가로의 결혼> 등이 있다.

함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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咸賢鎭 (1940-1977)

배우. 서울 출생. 서울고교를 거쳐 중앙대학 연극영화과를 졸업했다. 극단 '산울림'의 멤버로서 주로 '산울림'의 공연에서 주역을 많이 맡았다. 연극을 하는 틈틈이 다방, 의상실 등도 경영한 그는 여러 가지 면에서 다재다능한 배우였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만혼을 한 후 이란의 수도 테헤란에서 분신 자살했다.

그가 출연한 주요작품은 <이층의 사나이> <대머리 여가수> <리어왕> <한꺼번에 두 주인을> <따라지의 향연> <고도를 기다리며> <비시에서 일어난 일> <꽃피는 체리> <뎀웨이터> <우정> <햇빛 밝은 아침> <해녀 뭍에 오르다> <가위 바위 보> <건강진단(健康診斷)> <블랙 코미디> 등이고, 여러 편에 단역으로 출연했다. 매우 예민한 감성을 지닌 배우로서 희비극에 모두 알맞은 연기자였다.

추송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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秋松雄 (1941-1985)

배우. 경남 고성 출생. 부산공고와 중앙대학 연극영화과 졸업. 1963년 극단 '민중극장' 창립공연 때 <달걀>로 데뷔한 이래 80여편의 작품에서 주 ·조연을 하였다. 극단 '가교(架橋)'와 '광장(廣場)' 창립동인이기도 한 그는 '자유극장' 소속이었다.

두 번에 걸쳐 동아연극상 남우주연상을 탄 그는 독특한 마스크와 발성 등 천부적 재능으로 무슨 역이든 자기화해서 표현한다. 여러 가지 조건에서 희극에 적합한 그는 오버액션으로 가끔 비난도 받았다. 77년도에는 모노드라마 <빨간 피터의 고백>으로 전국을 누비며 관객 6만을 동원하는 이적(異蹟)을 낳기도 했다. 그가 출연한 주요 작품으로서는 <토끼와 포수> <꿀맛> <흑인 창녀를 위한 고백> <타이피스트>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랴> <슬픈 카페의 노래> 등이 있다.

여운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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呂運計 (1940- )

여배우. 서울 출생. 고려대학 국문과 시절부터 대학극의 여자 주역으로서 활약하기 시작했다. '실험극장'의 동인으로서 주로 실험극장이 공연하는 작품에서 여자 주역으로 활약했다. 70년대부터는 텔레비전에 많이 출연하고 연극에는 가끔 등장한다. 데뷔 작품인 대학극 <성화(聖火)> 외에 주연한 주요작품은 <다리에서의 조망> <안티고네> <맥베스> <우리읍내> <무익조(無翼鳥)> <맹진사댁 경사> <세일즈맨의 죽음> <밤으로의 긴 여로> <포기와 베스> <여름과 연기, 그리고 바람>등이다. 무슨 역이든지 소화해서 자기 스타일로 만드는 능란한 연기자다. 현재 실험극장 소속으로 있다.

박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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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正子 (1942- ) 여배우. 서울 출생. 이화여대 신문학과를 거쳐 연극계에 발을 들여놓은 박정자의 데뷔작은 <악령(惡靈)>. 극단 '자유극장' 소속으로서 그가 출연한 주요작품은 <따라지의 향연(饗宴)> <해녀 뭍에 오르다> <살인 환상곡> <마리우스> <사자(死者)의 훈장> <슬픈 카페의 노래> <흑인 창녀를 위한 고백>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랴> <부부연습> 등이며, 그 외에도 30여 편이 있다. 매우 강렬하고 열정적이며 지적인 여배우로서 '자유극장'의 대표적 여자 연기자이다.

이승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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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勝玉 (1943- )

여배우. 충남 공주 출생으로 동덕여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극단 '동인극장'의 <악령(惡靈)>을 통해 데뷔한 그는 여인극장의 중추적 멤버이다. 그가 출연한 주요작품으로서는 <알바의 집> <물리학자들> <기적을 만든 사람들> <올훼> <꽃바람> <지난 여름 갑자기> <페드라> <장난꾸러기 유령> 등이 있다. 온화한 분위기와 정확한 대사로 매우 안정된 연기를 보여주며 평범한 아내, 차분한 여인역으로 적합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