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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연극〔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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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學演劇〔槪說〕

대학연극의 개화 大學演劇-開花

8·15광복은 우리 민족에게 정치·경제·외교·국방 등 모든 면에서 자유를 되찾아주는 동시에 문화·예술면에서도 자유로운 활동을 가져다 주었다. 그 중에서도 언어의 예술인 연극계에는 활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특히 일제 때에 진학을 포기하고 사회 각층에서 활동하던 연로한 연극학도들에 의한 대학극의 재건은 눈부실 정도였다. 서울대학은 김기영, 박암, 전두남, 김수희. 김정섭, 이병윤 등을 중심으로 대학극장(大學劇場) 또는 고려예술좌(高麗藝術座)를 조직하여 주로 번역극에 정열을 쏟았고, 고려대학교 역시 최창봉, 최재덕, 조일환, 이상직, 이수열 등이 연극부를 재건(再建)하여 <알트 하이델베르크> <아큐정전(阿Q正傳)> 등을 상연했으며, 연세대학은 박성호, 차범석, 신태민 등을 중심으로 역시 활발히 움직였다. 그리고 혜화전문(惠化專門)이었던 동국대학도 조성하, 조효경과 한재수, 맹후빈이 각각 학생극운동을 전개했고 중앙보육의 후신인 중앙대학도 박현숙, 최무룡, 조창준이 새로이 연극부를 조직, 활동을 개시했다. 한편 오랜 전통을 가진 세브란스 의과대학의 강준상은 김재전 등을 규합, 역시 연극활동의 일선에서 활약했다.

1948년 12월 고려대학교의 김경옥은 최창봉, 이수열 등과 손을 잡고 숀 오케이시 작 <쥬노와 공작>을 전 국립극장인 명동의 시공관(市公館)에서 상연하여 대성황을 이루면서, 그때까지 좌익학생들이 장악했던 학생극계에 커다란 전환점을 마련했다. 그들은 새로이 대학극연맹(大學劇聯盟)을 조직했다.

그러다가 1949년 제1회 전국 남녀 대학연극 경연대회가 개최되어 서울대학교의 <베니스의 상인>, 고려대학교의 피란델로 작 <천치(天痴)>, 연세대학교의 소포클레스 작 <오이디푸스 왕>, 중앙대학교의 <비오는 산골>, 동국대학교의 창작극, 정치대학의 <정직한 사기한>, 숙명여자대학의 <춘향전> 등이 경연을 벌여 수석입선에는 고려대학교의 <천치>, 연기상으로는 김경옥, 박현숙, 김정섭, 신귀환, 신태민 등이 수상했다. 이들은 지금 극단의 중견으로 극작·평론 등 부문에서 활동하고 있다.

6·25전쟁 후의 학생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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六·二五戰爭後-學生劇

경연대회에 참가했던 사립대학 멤버들은 대회가 끝나자 별도로 대학극회를 조직, 미국문화관(舊 미도파 옆)에서 몇 차례의 시연회(試演會)를 가지다가 6·25를 맞이했으며, 그들은 전란 이후 1956년 제작극회(制作劇會)를 조직하여 현대극을 표방하고 나섰다. 그것은 선언에서도 밝혔듯이 신협(新協)의 근대극적 공연에 항거하는 젊은이들의 정열의 뭉침이었다. 이때 역시 각 대학에서는 그들의 선배들의 지도하에 학생극 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했던바, 고려대학의 최상현, 나영세, 김성옥, 독고중훈, 여운계, 박규채 등과 서울대학의 김의경, 허규, 이낙훈, 김동훈, 이순재 등 현역 TV탤런트들이 대부분이었고, 이들은 나중에 실험극장(實驗劇場)의 멤버가 되었다.

4·19 이후의 학생극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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四·一九以後-學生劇界

1960년 4·19 이후 5·16 군사정변이 일어나고 그때 극단도 재정비되었는데, 이때 탄생한 것이 실험극장(實驗劇場)이다. 실험극장은 김의경(金義卿)이 주동이 되고, 허규, 이낙훈, 김동훈, 이순재 등과 나영세, 여운계, 김성옥 등이 가담, 신진들의 대동단결체인 연극연구단체로 출발하여 60년대 후반과 70년대 전반에 신극단체의 대표적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50년대 중반기에는 중앙대학과 동국대학, 한양대학에 연극영화과가 신설되고, 서라벌예대의 연극과와 더불어 연극 연구생의 교육에 이바지했다.

한편 해외에 나가 연극을 공부한 이근삼, 김정옥, 양광남, 양동군 등이 귀국하여 한국연극계에 신풍을 도입한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사실이다.

그리고 서울사대 교수이며, 제작극회 멤버인 이두현(李杜鉉)은 가면극을 연구하는 한편 <한국신극사연구(韓國新劇史硏究)>를 펴내었고, 고대(高大)의 여석기 교수와 연대의 오화섭 교수는 학생극을 지도하면서 일선에서 연극평론 활동을 하고 있다.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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評論家

학생극 출신 내지는 학생 또는 교수들이 이론을 연구함으로써 평론에 있어서도 신경지가 개척되기 시작했다. 여석기·오화섭 교수와 더불어 김경옥·김의경·이근삼·김정옥 등이 주로 평론에 종사하며, 우리 현대극과 학생극의 지표를 설정하는 데 공헌했다.

과거에 학생극계에서 활동하던 사람들은 지금 몇 갈래의 산맥을 이루면서 사회 각층에서 활약하고 있다. 서라벌예대 계통은 지방의 극계에서 활동하고 고려대학 계통은 신문사나 방송국의 관리직에서 그리고 서울대학 계통은 TV탤런트와 영화계에서 나머지는 각각 단독적으로 활동하였다.

<金 京 鈺>

극예술협회와 동우회순회연극단의 공연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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劇藝術協會-同友會巡回演劇團-公演活動

1920년 봄 도쿄 유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한국 최초의 학생극운동단체인 '극예술협회'를 발족하였다.

이때의 주요 멤버들은 김우진(金祐鎭)·조명희(趙明熙)·유춘섭(柳春燮)·진장섭(秦長燮)·홍해성(洪海星)·고한승(高漢承)·손봉원(孫奉元)·조춘광(趙春光)·김영팔(金永八)·최승일(崔承一) 등 20여 명이며, 이들은 매주 토요일마다 모여 외국의 고전 및 근대작품들을 연구하고 토의하였다. 극예술협회는 도쿄에 유학중인 고학생과 노동자들의 모임인 '동우회(同友會)'와 더불어 하기순회연극단을 조직, 조명희의 <김영일(金英一)의 사(死)>(3막 4장), 홍난파(洪蘭波) 소설의 각색인 <최후의 악수>(2막), 던세니 작·김우진 번역 <찬란한 문>과 그 밖에 윤심덕(尹心悳)·한기주(韓琦柱) 등의 독주와 독창을 넣어, 그 해 7월 9일부터 8월 18일까지 약 한달동안 부산·김해·마산·경주·대구·목포·서울·평양·원산 등지에서 공연하였다. 이들 작품의 공연 이후 일본경찰과 지방경찰의 검열과 탄압으로 학생극의 수난기가 시작되었다.

1910년대의 신파극(新派劇)에서부터 20년대의 신극운동, 즉 근대극으로의 과도기에 전국을 순회공연한 이들 동우연극단의 '새로운 연극'은 학생극다운 청신한 연극이었으며, 또 한국 신극운동을 추진시킨 선구적인 의의를 갖는 운동이었다.

1923년에 동우회가 발전적으로 해체됨과 동시에 '형설회(螢雪會)'가 생겼고, '극협(劇協)'도 개편·강화되어 '형설회 하기순회연극단'을 조직, '회의 기숙사를 증축하기 위함'이라는 위장된 목적을 가지고 민중에게 조국과 시대를 알리고자 하였는 바 후에 왜경의 취체에서 피할 길이 없었다. '형설회 순회연극단'은 최초에는 창작극만을 상연한다는 조건하에 6월 9일 도쿄 스루가다이(駿河臺) 불교회관에서 시연회(試演會)를 갖고, 7월 6일부터 8월 1일까지 동우회의 경우와 거의 같은 경로로 남북한을 돌면서 많은 공연을 가졌다.

고학생 갈돕회의 공연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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苦學生-會-公演活動

1922년 7월 5일부터 8월 9일까지 도쿄 고학생 '갈돕회' 순회극단이 남북한과 간도(間島)까지 순연(巡演)하였으며, 레퍼토리는 학생들의 창작극 위주였다. 이규송(李奎宋) 작 비극 <선구자의 보수(報酬)>(2막), 이수창(李壽昌) 작 사회극 <신생의 서광>(2막), 희극 <철권제재(鐵拳制裁)>(2막) 등이 그것이다. 한편 국내의 고학생 갈돕회는 1920년 12월에 고학생들을 돕기 위한 연극공연을 한 바 있고 1921년 2월과 7-8월 전국순회공연을 하였다. 레퍼토리는 비극 <운명>과 정극(正劇) <빈곤자의 무리> <승리>, 희극 <유언> 등으로 윤백남·이기세 등의 지도를 받고 국내 기성극단의 레퍼토리를 상연하였음이 도쿄 유학생의 연극과 대조되는 점이다.

송경학우회의 공연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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松京學友會-公演活動

'송경학우회'는 '극예술협회'의 멤버인 고한승(高漢承) 등 개성출신 도쿄 유학생들로 조직되었다. 이들은 1921년 7월 27일부터 29일까지 '개성좌'에서 임영빈(林英彬) 작 <백파(白波)의 울음> <과거의 죄인> <불쌍한 사람들> 등을 공연했으며 출연자는 김흥옥(金興玉)·공진태(孔鎭泰)·진장섭 등이었다. <백파의 울음>은 고학생의 죽음을 다룬 면에서, 음악연주를 곁들인 것 등 동우극단과 많은 유사점을 가졌다. 1923년 11월 24일·25일 양일에는 조춘광 작 <개성(個性) 눈뜬 뒤>, 번역 가극 <집시의 부인> <알트 하이델베르크>를 공연하였다. 이때에 마해송·김영팔이 찬조출연하였다. 이 '송경학우회'의 연극은 개성에만 국한되었으나 이기세(李基世) 이래의 지방적 전통 위에 선 향토적 학생운동의 대표적 존재였다고 하겠다.

1920년대 말기의 학교연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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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九二○年代末期-學校演劇20년대 초기의 순회학생극이 신극운동의 선구적인 공연활동이었다면, 20년대 말기의 고보 및 전문학교의 연극은 30년대의 신극을 예시한 느낌이 있다. 이 시기의 학교연극은 이화여고보(梨花女高普)·이화여전(梨花女專)·정신여학교(貞信女學校)·보성전문(普成專門)·연희전문(延禧專門) 등에서 주도해 나갔는데 그 공연활동을 보면 1927년 2월 이화여고보에서 메테를링크의 <파랑새>를, 12월에 이화여전에서는 쇼의 <성 조운>을 연학년(延學年)의 지도로 상연했으며, 이때의 주연은 박은혜(朴恩惠)였다. 1928년 2월 이화여고보에서 '희극의 석(夕)'을 주최, 아나톨 프랑스의 <벙어리 여자와 결혼한 남자>와 던세니의 <나르마의 7신(神)>을 상연했고 정신여학교에서는 9월에 체페크의 <곤충의 생활>을 연학년의 연출로 상연했으며, 보성전문·연희전문학교 등이 연극 콩쿠르를 한 바 있다. 1929년 10월 세브란스 의전(醫專)에서는 <분극(分劇)의 밤>을 개최하여, 1학년은 <여권신장>, 2학년은 <박명(薄命)>, 3학년은 <패배자의 설움>, 4학년은 <정조> 등의 단막극 경연대회를 가졌다. 1930년 이화여고보에서는 홍해성(洪海星) 연출로 체호프의 <벚꽃동산>을 상연하였는데, 진정한 신극의 도래를 예고하는 소리는 이 <벚꽃동산>에서 어린 학생들에 의해 메아리쳤다.

전문학교의 연극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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專門學校-演劇活動

1920년대의 학생극이 기존 연극계에 공헌을 한 점은 연극에 있어서 전문인을 배출시켰다는 점이다. 그러나 20년대의 학생극은 대학연극이라고 하기에는 여러 가지로 곤란한 점이 있으니, 그 이유는 당시는 전문학교와 고보가 초창기의 학교연극을 함께 싹트게 한 맹아기(萌芽期)였기 때문이다.

본격적인 대학연극(당시에는 전문학교의 연극)은 1930년대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즉 이 시기에는 보성전문·연희전문·이화여전·경성보육학교 등에서 활발한 공연활동을 벌여 대학연극을 정착시켜 갔다. 당시의 공연활동을 보면 다음과 같다. 1931년에는 연희전문 문우회(文友會) 연극부에서 톨스토이의 <어둠의 힘>을, 이화여전 학생기청(學生基靑)에서 셰익스피어의 <페트루키오와 캐트리나>를, 경성보육 녹양회에서 정인섭의 <사람늑대>와 오토뮤라의 <하차(荷車)>를, 보성전문 연극부에서 타아링의 <삼등수병 마르틴>을, 연희전문 문우회 연극부에서 골드워디의 <정의>를 공연했다. 또 1933년에는 중전(中專) 북악회(北岳會)에서 한스 작스의 <바보 치료>, 조용만(趙容萬)의 <가보세>, 오닐의 <고래>를, 연희전문 문우회 연극부에서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나>, 이화여전 이보(梨保)에서 몰레이의 <목요일과 저녁>을, 보성전문 연극부에서 고리키의 <밤주막>을 상연했다. 1934년에는 세브란스의전 연극부에서 위트 포겔의 <누가 제일 바보냐>, 슈니츨러의 <최후의 가면>을 여자의학강습소 교우회에서 주더만의 <명예>를, 경성여자기독청년회에서 입센의 <유령>을 공연했고, 1935년에는 연희전문 문우회 연극부에서 셰리프의 <여로의 끝>을 공연했다. 한편 이화여전에서는 1930년 이래 해마다 영어극을 상연했고, 1942년 8월에는 소위 '국어극(國語劇)'까지 상연했다. 1936년 이후부터는 급박해 가던 시국의 추이에 따라 학원에서의 연극공연이 전혀 불가능해지고 1940년에는 경성법정학교에서 두 차례 '모의 재판극'이라는 것을 한 적이 있을 뿐이다.

도쿄학생예술좌의 공연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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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京學生藝術座-公演活動1934년 6월 박동근(朴東根)·김진수(金鎭壽)·황순원(黃順元)·김영수(金永壽)·김동원(金東園)·김일영(金一英)·허남실(許南實)·주영섭(朱永涉)·마완영(馬完英) 등 열다섯 명이 모여 '동경학생예술좌'를 창립하였다. 도쿄극단에서 적극적으로 연극수업의 길을 밟아, 장차 귀국하여 연극을 통해 민족의 얼을 되찾으려 한 '도쿄학생예술좌'의 레퍼토리는 1935년 6월 4일 쓰키지 소극장(築地小劇場)에서의 창립공연작품인 <소>, 주영섭의 <나루>, 제2회 공연작품인 유치진(柳致眞) 각색 <춘향전>(1937. 6), 제3회 공연작품인 오닐의 <막(幕)>을 3집까지 발간하였다. 1939년에는 70여 명이란 회원이 이 '예술좌'를 거쳤고, 귀국한 회원들이 '극연좌(劇硏座)' 등 기타 연극계에 투신하여 자못 그 장래가 기대되었으나 1939년 8월 연극을 통하여 좌익사상을 고취했다는 명목으로 일경은 '도쿄학생예술좌'의 관계자들을 검거하였다. 이때 주영섭·마완영·박동근·이서향(李曙鄕) 등이 기소되었다. 1940년 3월 8개월의 영어생활(囹圄生活)에서 풀려나온 박동근은 그 해 9월 일본에 건너가 '예술좌'를 해체하고 말았다. 이리하여 1920년대의 초기 학생극으로 시작된 신극운동은 1940년대의 암흑기를 앞두고 '학생예술좌'사건으로 종막을 고하고 말았다.

대학극 경연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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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學劇競演大會

해방 후에서 6·25전쟁까지의 학생극은 좌우익의 대립과 그 소용돌이 속에 휩쓸린 채 방향을 잡지 못하고 흔들리고 있었다. 일제에 대한 저항의식과 모순된 사회제도 및 그 인습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몸부림, 여기에 자본의 횡포에 대한 고발의지가 복합되어 새로운 시대를 형성시키려던 대학연극의 주제가 광복 후의 전란기를 맞아 그 맥이 단절되고, 오히려 자유로이 제공된 무대마저 채우지 못한 채 50년대를 넘어가게 되었다. 이에 앞서 1949년 한국연극학회 주최로 제1회 전국남녀대학 연극경연대회가 시도되었으나 실패하였다. 전란이 지나간 1954년 11월에 이 경연대회는 다시 열렸는데 이때의 참가대학과 작품은 서울대학의 <지하실>, 고려대학의 <상하의 집>, 중앙대학의 <피의 조류>, 숙명여대의 <분수령>, 근화여대의 <청춘의 조국과 더불어>, 충남대학의 <4남매>, 동국대학의 <산골>, 서라벌예대의 <나상(裸像)> 등이었다. 1955년 12월 제3회 경연대회에서 유치진 작 <푸른 성인>을 공연하였는데, 단체특상에 동국대학, 장려상에 충남대학이 수상되었다. 그러나 1957년 유치진 작 <왜 싸워>는 문교부의 명령으로 공연이 중지되고 말았다.

연극경연대회와 함께 50년대 중반기에는 몇몇 대학에 연극영화학과가 개설되어 연극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계기가 되었고 급기야는 전 연극인의 대다수를 학생극 출신의 연기자가 담당하게 되는 등 대학연극의 비중이 한국의 연극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그러나 한국의 대학연극은 본질적으로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으니, 공연작품의 대부분이 번역물이라는 점, 기성연출가의 지도, 취미예술적이고 서구 취향적인 면 등이 시정되지 않는 한 진정한 '한국의 대학연극'은 수립되기 힘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