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문화·민속/한국의 연극/판 소 리/판소리의 명창

판소리의 명창〔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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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名唱〔槪說〕

판소리의 최고 문헌은 유진한(柳振漢, 1711∼1791)의 <만화집(晩華集)>에 실린 <춘향가>이다. 판소리 명창의 최고인은 송만재(宋晩載)의 <관우희(觀優戱)>에 나타난 우춘대(禹春大)·권삼득(權三得)·모흥갑(牟興甲)과 <갑신완문(甲申完文)>에 나타난 하은담(河殷潭) 등으로, 근세조선의 영조·정조 때의 사람들이다. 우춘대·하은담 이전에도 판소리의 명창이 있었을 것이나, 문헌으로만 남아 있거나 구전되지 않고 있다. 순조 때는 뛰어난 명창들이 나와서 판소리에 여러 가지 조를 구성하고 더늠을 형성시켰는데 권삼득·황해천(黃海天)·송흥록(宋興祿)·방만춘(方萬春)·염계달(廉季達)·모흥갑·김계철(金啓喆)·고소관(高素寬)·신만엽(申萬葉)·송광록(宋光祿)·주덕기(朱德基) 등을 들 수 있다. 이 중에 여덟을 골라서 8명창(八名唱)이라 부른다. 이들 명창들의 이름은 신재효(申在孝)의 <광대가(廣大歌)>에도 보인다. 이 무렵부터는 소리에 중점을 두는 '소리광대'가 나타나서 '아니리'에 중점을 두는 재래의 '아니리 광대'와 구별되었던 것 같다.

철종·고종 초기는 판소리의 전성기에 해당한다. 박유전(朴裕全)·박만순(朴萬順)·이날치(李捺治)·김세종(金世宗)·송우룡(宋雨龍)·정창업(丁昌業)·정춘풍(鄭春風)·김창록(金昌祿)·장자백(張子伯)·김찬업(金贊業)·이창윤(李昌允) 등 기라성 같은 명창들이 나와서 판소리를 고도의 예술적인 경지로 이끌어 놓았다. 이들은 사사관계와 지역적인 지연관계에 의하여 여러 유파를 형성하였는데 이들 중에 여덟을 골라서 후기 8명창이라 부르기도 한다.

고종 말기와 일정 초기는 판소리의 결실기인데 한편으로는 원각사 이후 창극이 성행하게 되자 판소리는 반대로 쇠운(衰運)이 싹트기 시작하였다. 각 지방의 명창들이 서로 왕래하므로 판소리의 유파는 차츰 그 특색을 잃어 갔다. 이 시기에 활약한 명창들은 박기홍(朴基洪)·김창환(金昌煥)·김채만(金采萬)·송만갑(宋萬甲)·이동백(李東伯)·유공렬(柳公烈)·전도성(全道成)·김창룡(金昌龍)·유성준(劉成俊)·정정렬(丁貞烈) 등을 들 수 있다. 이들 명창에서 다섯을 골라 5명창이라 부른다. 5명창의 바로 뒤에는 장판개(張判介)·이선유(李善有)·김정문(金正文)·박중근(朴重根)·공창식(孔昌植)·이화중선(李花中仙)·임방울(林芳蔚)·강장원(姜章沅) 등이 활약했다. 이들은 조선성악연구회를 중심으로 크게 활약하였으나 창극에 휩쓸리고 서양음악에 밀려, 판소리는 후퇴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후대의 명창으로는 박녹주(朴綠珠)·김연수(金演洙)·정광수(丁珖秀)·김여란(金如蘭)·박초월(朴草月)·김소희(金素姬)·박봉술(朴鳳述)·박동진(朴東鎭)·박귀희(朴貴姬)·정권진(鄭權鎭)·한애순(韓愛順)·장영찬(張泳贊) 등이 있다. 이들은 사라져 가는 판소리를 부흥하고자 노력하고 있으나 정부와 사회의 적절한 대책이 없다면 사라져 버릴 위기에 직면했다.

그래서 이 중 박녹주·김연수·정광수·김여란·김소희·박귀희·정권진은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李 輔 亨>

하한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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河漢潭

조선왕조 숙종·영조 때의 명창(名唱). 판소리 가창(歌唱)의 시조(始祖)로 알려져 있으며 출생지 및 그에 관한 주변은 미상이다. 다만 옛날 가객(歌客)들이 판소리를 가창(歌唱)할 때 소리풀이(역대 가객의 이름을 연대적으로 엮어 부르는 형식)를 하는 중에 그의 이름이 처음에 나오고 있다.

권삼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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權三得

조선왕조 영조·정조 때의 명창(名唱). 전북 익산(益山) 출신. 8명창의 제1인자. 향반(鄕班) 출신으로 어렸을 때부터 판소리에 남다른 취미를 갖고 정진한 바 있다. 가문(家門)의 반대를 무릅쓰고 판소리계에 투신하여 마침내 명창의 지위에 오른 사람이다. 판소리의 유파(流派)로는 동편제 가객(東便制歌客)으로서 덜렁제(制)를 개발하였고 특장(特長)은 <흥부가>이다.

송흥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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宋興祿

조선왕조 순조·헌종·철종 등 3대에 걸친 명창(名唱). 전북 운봉(雲峰) 출신. 8명창의 한 사람이며 가왕(歌王)의 칭호를 받은 바 있다. 동편제 가객(東便制歌客)으로, 특장(特長)은 <적벽가(赤壁歌)>와 <춘향가(春香歌)>이다. 그의 매부인 명창 김성옥(金成玉)과 함께 판소리에서 처음으로 진양조(판소리에서 제일 느린 가락)를 개발, 특히 세도가(勢道家)인 김병기(金炳冀)의 총애를 받고 '호풍환우(呼風喚雨) 송흥록'이란 별호로 불리었다.

염계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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廉季達

조선왕조 순조·헌종·철종 등 3대에 걸친 명창(名唱). 경기도 여주(驪州) 출신. 8명창의 한 사람. 어려서 가세가 빈곤하여 절에서 유리걸식(流離乞食)하며 판소리 공부에 전념하였다. 명창으로 이름이 높아지자 헌종의 어전(御前)에서 가창(歌唱)하여 동지직(同知職)을 제수(除授)받았다. 특장(特長)은 <흥부가(興夫歌)>이며, 유파(流派)에서 경제(京制)를 개발하였다.

모흥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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牟興甲

조선왕조 순조·헌종·철종 등 3조에 걸친 명창(名唱). 경기도 진위(振威) 출신. 8명창의 한 사람. 송흥록(宋興祿)·염계달(廉季達)과 어깨를 같이한 명창이다. 그가 평안 감사의 초청으로 연광정(練光亭)에서 가창한 광경을 그린 판소리 가창도(歌唱圖)는 지금도 서울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특장(特長)은 <적벽가(赤壁歌)>이며 <춘향전>의 <이별가>에서는 모흥갑 제(制)가 아직도 전승되고 있다.

방만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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方萬春

조선왕조 순조(純祖) 때의 명창(名唱). 충남 해미(海美) 출신으로 당대에 이름높던 명창. 11세 때 해미의 일락사(日落寺)에 들어가서 10년동안 판소리를 전공하였다. 갑자기 목이 막히어 절망한 나머지 절의 기둥을 부둥켜안고 전신의 힘을 다하여 소리를 지르니, 절이 무너지는 듯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는 일화가 있다. 특장(特長)은 <적벽가(赤壁歌)>와 <심청가(沈淸歌)>이며, 아귀성음으로 유명하다.

고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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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素寬

조선왕조 순조·헌종·철종 등 3대에 걸친 명창(名唱). 충남 해미(海美) 출신. 8명창의 한 사람. 명창 중에서 성음(聲音)이 미려(美麗)하고 학문과 견식이 해박한 것으로 뛰어났으며 판소리 가창(歌唱)을 즉흥적으로 능숙하게 작사한 것으로 유명하다. <춘향전>의 <사랑가>에서 고소관제가 전승되고 있다.

김성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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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成玉

조선왕조 순조(純祖) 때의 명창(名唱). 충남 강경(江景) 출신. 송흥록(宋興祿)과 함께 진양조(판소리에서 제일 느린가락)를 개발한 명창이다. 오랫동안 병석에 누웠을 때 문병온 송흥록과 주고 받은 노래형식의 말이 진양조가 되었다.

송광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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宋光祿

조선왕조 헌종(憲宗) 때의 명창(名唱). 전북 운봉(雲峰) 출신. 명창 송흥록(宋興祿)의 동생이다. 처음에는 형인 송흥록의 고수(鼓手)였으나 고수가 푸대접을 받는 데 분발하여 명창이 되었다. 특장(特長)은 <춘향가(春香歌)>이며 판소리 평론(評論)으로도 유명하다.

주덕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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朱德基

조선왕조의 순조·헌종·철종 등 3조에 걸친 명창(名唱). 전남 창평(昌平) 출신. 판소리 동편제(東便制)의 순수파이다. 가세가 빈곤하여 풍찬노숙(風餐露宿)으로 전전하며 일가를 이루었다. 특장(特長)은 <적벽가(赤壁歌)>이며 '벌목정정(伐木丁丁) 주덕기(朱德基)'라는 별호를 가졌다. 그는 동편제 가객(東便制歌客)이지만 그의 동생인 주상환(朱祥煥)은 서편제 가객(西便制歌客)으로 대조적이다.

김계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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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啓喆

조선왕조 순조·헌종·철종 등 3대에 걸친 명창(名唱). 충남 출신으로 8명창의 한 사람. 특장(特長)은 <심청가(沈淸歌)>이며 판소리 유파(流派)에서 석화제라는 소유파(小流派)를 개발하였다. 석화제는 지금도 가야금 병창제(竝唱制)로 활용하고 있다.

신만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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申萬葉

조선왕조 순조·헌종·철종 등 3대에 걸친 명창(名唱). 전북 여산(礪山) 출신으로 8명창의 한 사람. 서편제 가객(西便制歌客)으로 성음이 부드럽고 아름다워서 '사풍세우(斜風細雨) 신만엽(申萬葉)'이란 별호를 가졌다. 특장(特長)은 <수궁가(水宮歌)>와 <심청가(沈淸歌)>이다.

박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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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裕全

조선왕조 헌종·철종·고종 등 3대에 걸친 명창(名唱). 전북 순창(淳昌) 출신. 8명창의 한 사람. 서편제 가객(西便制歌客)의 수령격으로 성대가 미려하고 품위가 탁월하여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총애를 받았으며, 무과(武科)에도 급제하였다. 눈 하나가 없어 대원군이 오수경(검은 안경)을 주었다고 한다. 말년에 전남 보성군 강산(全南寶城郡岡山)에서 여생을 보내며 판소리에서 강산제(江山制)라는 큰 유파(流派)를 개발하였다.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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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萬順

조선왕조 헌종·철종·고종 등 3조에 걸친 명창(名唱). 전북 고부(古阜) 출신. 송흥록(宋興祿)의 직계 명창이다. 세도가(勢道家)인 김병기(金炳冀)의 총애를 받다가 김병기가 실권되자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초청에도 응하지 않고 절개를 지킨 것으로 유명하다. 특장(特長)은 <춘향전>의 <옥중가(獄中歌)>이다.

김세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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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世宗

조선왕조 헌종·철종·고종 등 3대에 걸친 명창(名唱). 전남 담양(潭陽) 출신. 서편제(西便制)의 거장이다. 박유전(朴裕全)의 직계로 성량이 거대하고 기법이 출중하여 당대 제1인자였으며 <춘향가>로 대원군의 총애를 받았다.

이날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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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捺治

조선왕조 헌종·철종·고종 등 3대에 걸친 명창. 전남 동복(同福) 출신. 서편제의 거장이다. 박유전(朴裕全)의 직계로 성량이 거대하고 기법이 출중하여 나팔(喇叭)소리와 새소리는 실음(實音) 그대로를 방불케 한 것이 특색이다. 서편제 판소리 유파에서 반드림제를 개발하였고 특장은 <심청가(沈淸歌)>이다.

정춘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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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春風

조선왕조 철종·고종 때의 명창(名唱). 충청도 유가(儒家)의 출신으로 한학(漢學)에 조예가 깊었고 진사과(進士科)에도 급제했다. 판소리에서의 특장(特長)은 단가(短歌)였고 판소리 문장에 많은 개발과 영향을 주었다.

한송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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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松鶴

조선왕조 철종·고종 때의 명창(名唱). 경기도 수원 출신. 당대의 명창이며 판소리 유파(流派)에서 중고제(中高制)를 개발하였다.

김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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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定根

조선왕조 철종·고종 때의 명창(名唱). 충남 강경(江景) 출신. 진양조를 창시한 김성옥(金成玉)의 대를 잇는 아들이며 근세 5명창의 한 사람인 김창룡(金昌龍)의 선친이다. 판소리에서 중고제(中高制)를 정립하였고 특장(特長)은 <무숙이타령(武叔-打令)>이다.

정창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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丁昌業

조선왕조 철종·고종 때의 명창(名唱)이다. 명창 김창환(金昌煥)과 송만갑(宋萬甲)의 스승이며 특장(特長)은 <심청가(沈淸歌)>이다.

장자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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張子伯

조선왕조 철종·고종 때의 명창(名唱). 전북 순창(淳昌) 출신의 동편제(東便制) 명창이며, 명창 김세종(金世宗)의 직계이다. 미남으로 성대가 풍부하며 특장(特長)은 <춘향가>이다.

김창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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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昌煥

조선왕조 고종·순종 때의 명창이다. 전남 나주(羅州) 출신. 근세 5명창의 한 사람. 이날치(李捺治)의 직계로 서편제(西便制)의 법통을 이어받았으며, 판소리에서 <흥부가(興夫歌)>의 <제비 노정기(路程記)>를 작곡하였다. 원각사(圓覺社)의 주석(主席)이며, 순종의 총애를 받아 의관직(議官職)을 제수받았다.

박기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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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基洪

조선왕조 고종·순종 때의 명창(名唱). 경남 함양(咸陽) 출신. 판소리에서 동편제의 거두(巨頭)였으며, 한쪽 눈이 없었다. 유학자이며 명창이었던 정춘풍(鄭春風)의 문하생으로 학식이 풍부하고 창법이론(唱法理論)에 정통하였다. 특장(特長)은 <적벽가(赤壁歌)>이다.

송만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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宋萬甲 (1865∼1939)

조선왕조 고종 때의 명창(名唱). 전남 구례(求禮) 출신. 근세 5명창의 한 사람. 명창 송흥록(宋興祿)의 종손이고 송우룡(宋雨龍)의 사자(嗣子)로 동편제(東便制) 명문의 출신이다. 판소리에서 동편제에만 구애받지 않고 경기도 향토음악제인 경제(京制)를 많이 활용하였다. 이것이 가문에서 문제가 되어 할명(割名)을 당하였다. 원각사(圓覺社)의 간부였으며 조선성악연구회(朝鮮聲樂硏究會)를 창립하였고, 감찰직(監察職)을 제수받았다. 특장(特長)은 <춘향가(春香歌)>와 <흥부가(興夫歌)>이다.

유성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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劉成俊

조선왕조 고종 때의 명창. 전북 남원(南原) 출신으로 동편제(東便制)의 명창이다. 명창 정춘풍(鄭春風)·김세종(金世宗)의 문하생으로서 판소리의 특장(特長)은 <수궁가(水宮歌)>이다.

이동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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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東伯 (1866∼1947)

충남 비인(庇仁) 출신. 근세 5명창의 한 사람. 중고제(中高制)의 명창이던 김정근(金定根)의 문하생이지만 그는 동편제(東便制) 속에 속하였다. 체구가 당당하고 가객으로 품위(品位)가 있어서 상류사회에서 인기를 독차지하였으며 고종(高宗)의 총애를 받아 통정대부직(通政大夫職)을 제수받았다. 원각사(圓覺社)와 조선성악연구회(朝鮮聲樂硏究會)의 간부를 지냈다. 판소리에서는 <적벽가(赤壁歌)>가 특장(特長)이다.

김창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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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昌龍 (1871∼1935)

조선왕조 고종 때의 명창(名唱). 충남 서천(舒川) 출신으로 근세 5명창의 한 사람. 명창 김정근(金定根)의 대를 잇는 아들이며, 풍부한 성량으로 중고제(中高制)의 명창이다. 연흥사(延興社)·조선성악연구회(朝鮮聲樂硏究會)의 간부를 역임했다. 특장(特長)은 <심청가(沈淸歌)>이다.

정정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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丁貞烈 (1875∼1938)

조선왕조 고종 때의 명창(名唱). 전북 익산(益山) 출신으로 근세 5명창의 한 사람. 서편제(西便制)의 명창. 이날치(李捺治)의 문하생으로 충청도 신곡사(神谷寺)에서 10년동안 혼자 연마하였다. 조선성악연구회(朝鮮聲樂硏究會)의 간부이며 판소리 특장(特長)은 <춘향가>이다. 동생인 정원섭(丁元燮)은 당대의 명고(名鼓)로 유명하였다.

이선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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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善有

조선왕조 고종 때의 명창(名唱). 경남 진주(晋州) 출신으로 판소리 동편제(東便制)의 정통파이며, 송우룡(宋雨龍)과 김세종(金世宗)에게서 판소리를 전수받았다. 그의 저서로 <판소리 5가집(五歌集)>이 남아있다.

이화중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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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花中仙 (1898∼1943)

여류명창(女流名唱). 부산(釜山) 출신으로 근세 여류 명창의 최고봉을 장식하였다. 5명창의 한 사람인 송만갑(宋萬甲)에게서 판소리를 공부하여 여류(女流)로서 일가를 완성하였다. 그의 고운 목청은 전무후무한 것으로 일세를 풍미하였으며, 수많은 음반(音盤)이 남겨져 있다. 특장(特長)은 <적벽가(赤壁歌)>와 <춘향가(春香歌)>이다.

임방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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林芳蔚 (1905∼1961)

근대의 명창. 전남 송정리(松汀里) 출신으로 서편제 가객(西便制歌客)이다. 어려서 가세가 빈곤하여 판소리 수도에 숱한 고난을 겪으면서도 명창 공창식(孔昌植)·유성준(劉聖俊)에게 사사(師事)하고, 전남의 거상(巨商)인 남국일(南國逸)에게서 경제적 후원을 얻어 판소리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일본에서 <쑥대머리>와 <호남가(湖南歌)>를 취입한 음반(音盤)은 당시에 100만매가 팔렸다고 한다. 서편제 중 특히 단계면조에 능하였다. 그의 장례는 한국국악사상 처음으로 국악예술인장(國樂藝術人葬)으로 치러졌다.

한성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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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成俊 (1875∼1941)

충남 홍성(洪城) 출신. 우리나라에서 명고수(名鼓手)로 최고봉을 누렸다. 무용에도 조예가 깊어 승무(僧舞)·태평무(太平舞) 등을 정립하였으며, 국내에서 처음으로 민속무용학원을 설립했다.

오태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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吳太石 (1895∼1953)

가야금병창(伽倻琴竝唱)의 대가. 전남 낙안(樂安) 출신. 처음에는 판소리를 공부하다가 전환하여 가야금병창의 대가가 되어, 전통적인 석화제(制) 위에 오태석 제(制)를 개발하였다. 경향(京鄕)에서 그의 대중적인 인기는 판소리보다 오히려 높았으며 수많은 음반(音盤)이 아직도 남아 있다.

박녹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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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綠珠 (1904∼1979)

호는 춘미(春眉). 경북 선산(善山) 출신. 어려서 박기홍(朴基洪)에게서 판소리를 배웠고 20여세 때 송만갑(宋萬甲)에게 사사했다. 협률사(協律社)에서 활약하다가 남원에 내려가 김정문(金正文)에게 <흥보가(興甫歌)>를 배웠고 김창환(金昌煥)에게 <흥보가> 중 <제비노정기>를 배웠다. 정정렬(丁貞烈)에게서 <춘향가(春香歌)>를 배웠다. 조선성악연구회·조선창극단·대한국악원 등 판소리계의 일선에서 활약하여 왔다. <흥보가> <춘향가>에 장(長)하고 <춘향가>는 무형문화재 제5호로 지정되었다. 동편제의 꿋꿋한 창법을 간직하고 있다. 판소리 보존연구회 회장 역임.

김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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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演洙 (1907∼1974)

호는 동초(東初), 전남 고흥(高興) 출신. 중학교를 졸업하고 20세 때까지 한학을 공부하다가송만갑에게 판소리를 사사하였다. 정정렬에게 <춘향가>를, 유성준에게 <수궁가>를, 정응민에게 <심청가>를 사사하였다. 조선성악연구회·창극회·조선 창극단 등 판소리와 창극계에서 활약하여 왔다. <춘향가>는 무형문화재 제5호로 지정되었다. 사설의 발음이 명확하고 아니리에 능하다. 저서로 <창본춘향가(唱本春香歌)>가 있다. 국립국극단 단장 역임.

김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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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如蘭 (1907∼1983)

본명은 분칠(粉七), 호는 향곡(香谷), 전북 고창(高敞) 출신. 어려서 가곡(歌曲)과 기악을 배우고 정정렬(丁貞烈)의 문하에 들어가서 <춘향가>를 사사했다. 정정렬 소리제를 가장 정통으로 계승하고 있다. <춘향가>로 무형문화재 제5호로 지정되었다. 그의 발림은 고풍(古風)의 자태를 지니고 있다. 판소리 보존연구회 고문을 지냈다.

정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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丁珖秀 (1909∼?)

전남 광주(光州) 출신. 철종·고종 때의 명창 정창업(丁昌業)의 손자이다. 김창환(金昌煥)에게 <춘향가>를 사사했고 이동백에게 <적벽가>를, 유성준에게 <수궁가>를 사사했다. 전판(全版)은 아니지만 김창환 제 <춘향가>를 보유하고 있는 것은 희귀한 일이다. <춘향가>로 무형문화재 제5호로 지정되었다. 판소리 보존연구회 부회장 역임.

박초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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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初月 (1917∼1983)

본명은 삼순(三順),호는 미산(眉山), 전남 승주(昇州) 출신. 송만갑·오수암(吳壽岩)에게서 판소리를 사사했다. 여성국극동지사(女性國劇同志社)·여성국극동호회(女性國劇同好會)에서 창극운동에 종사했다. <춘향가>로 무형문화재 제5호로 지정되었다. 그의 소리는 송만갑의 소리제에 맛있는 성음을 가미한 것이다. 국립국극단 단원, 판소리보존연구회 부회장 역임.

김소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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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素姬 (1917∼1995)

본명 순옥(順玉), 호는 만정(晩汀), 전북 고창(高敞) 출신. 송만갑·정정렬·박동실에게 판소리를 사사받았다. 조선성악연구회·화랑창극단(花郞唱劇團) 등에서 판소리와 창극으로 활약하였다. <춘향가>로 무형문화재 제5호로 지정되었다. 고운 음색과 명확한 창법으로 구미 공연에서 찬탄을 받았다. 국립국극단 단원, 판소리 보존연구회 상임이사를 지냈다.

박동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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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東鎭 (1918∼2003)

충남 대덕(大德) 출신. 조학진(曹學珍)·박지홍(朴枝洪)에게 판소리를 사사했다. 국립국악원 국악사로 근무하면서 [춘향가] 전판 독창회를 비롯하여, [춘향가] [흥보가] [수궁가] [적벽가] 등 5마당의 독창회를 각각 개최하고, [배비장전] [변강쇠전]을 복원·작곡하여 독창회를 갖는 등 많은 활약을 하고 있다. 현재 국립국극단 단원, 판소리보존연구회 회원으로 활동했다.

박봉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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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鳳述 (1921∼1989)

전남 구례(求禮) 출신. 송만갑·박봉래(朴奉來)에게 판소리를 교육받았다. 그의 출신지가 구례이고 스승이 송만갑인만큼 동편제 소리를 가장 정통으로 부른다고 할 수 있다. <적벽가>와 <수궁가>에 장하다. 동일창극단(東一唱劇團)·순흥창극단(順興唱劇團) 등 창극에도 종사했으나 역시 판소리에 장하다. 현재 판소리 보존연구회 회원.

박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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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貴姬 (1921∼1993)

본명 오계화(吳桂花), 호는 향사(香史). 경북 대구(大邱) 출신. 유성준(劉成俊)에게 판소리를, 강태홍(姜太弘)에게 가야금 병창(伽倻琴竝唱)을 사사했다. 동일창극단(東一唱劇團)·여성국극동지회(女性國劇同志會) 등에서 창극운동으로 활약했고 파리민속예술제 등 국제공연을 많이 가졌다. 가야금병창으로 무형문화재 제23호로 지정되었다. 국악예술학교 이사장, 국립국극단단원, 판소리 보존회 재무 이사 역임.

한승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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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承鎬

전남 고흥(高興) 출신. 어려서 송만갑(宋萬甲)에게 판소리를 사사했고 김채만(金采萬) 제 판소리에 심취하여 박동실·박화섭 등에게 판소리를 가르쳐 주었다. 서편제 김채만 제의 판소리를 비교적 보유한 것으로 이색적인 존재이다. 판소리의 독특한 성음과 너름새로 관중을 이끄는 특기가 있다. 신작곡 <역사가(歷史歌)>로 유명하다.

정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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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權鎭 (1924∼1987)

전남 보성(寶城) 출신. 어려서 정응민(鄭應珉)에게 강산제 판소리를 교육받아서 강산제 판소리의 가장 뚜렷한 보유자이다. 강산제는 박유전(朴裕全)의 소리제로서, 정재근(鄭在根)·정응민에게 전해졌던 것이다. <심청가> <춘향가> <수궁가> <적벽가>를 보유하고 있으며 <심청가>로 무형문화재 제36호로 지정되었다. 박봉술과 더불어 고제 판소리의 보유자로 꼽히고 있다. 국악예술학교 교사, 국립극단 단원, 판소리 보존연구회 회원 역임.

장영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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張泳贊 (1927∼?)

전북 순창(淳昌) 출신. 근세의 명창 장판개(張判介)가 그의 아버지이다. 어려서 조상선(趙相善)에게 배우고 뒤에 정응민(鄭應珉)에게서 배워 강산제 보유자가 되었다. <심청가>가 장기이다. 국극사(國劇社) 등에서 창극에도 재주를 보였다. 판소리로 전국 국악경연대회를 비롯하여 몇 개의 상을 받은 바 있다.

조상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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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相賢 (1938∼ )

전남 출신. 어려서부터 정응민(鄭應珉)에게 판소리를 배우게 되었으며, 뒤에 정권진(鄭權鎭)에게 사사했다. <심청가>에 장하며 웅대한 성량으로 촉망을 받았다. 현재 국립국극단 단원, 판소리보존연구회 회원.

<李 輔 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