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동양사상/한국의 사상/한국의 현대사상/한국의 현대 사회사상

한국의 현대 사회사상〔槪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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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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勞動運動

일제 하에서는 농민운동보다 노동운동이 활기를 띠었다. 일본의 공업자본의 진출로 공장 노동자의 수가 늘어남에 따라, 1923년부터는 전국 각지에서 직업별 노동조합의 결성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이리하여 노동자들은 각종 노동단체를 통해 일제의 가혹한 수탈에 대항하여 싸웠다. 이를테면 1930년대의 부산 방직공장 노동자의 파업,

흥남 질소비료공장 노동자의 파업, 함흥 제사공장 노동자의 파업 등이 그것이다. 이와 같은 노동운동은 3·1운동 후부터 국내에서 받아들이기 시작한 사회주의(社會主義) 사상의 영향을 적지 않게 받은 것이었으나, 그 목표는 계급 투쟁운동보다 반제(反帝) 항일운동에 집약된 것이었다.

형평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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衡平運動

우리나라의 전통적 사회계층은 주로 신분(身分)에 의해 결정되었으며, 이에 따라 사회 활동의 영역이 결정되었다. 이전의 동학혁명(東學革命)과 갑오경장(甲午更張) 때에는 시정 목표의 하나로 천민계급 등에 대한 면천(免賤)의 조처가 취해졌으나, 우리 사회의 오랫동안 누적되어 온 사회 신분은 이러한 개혁의 요구로만은 쉽게 고칠 수 없었다. 그러다가 우리 사회에 있어서 평등사회(平等社會)를 이룩하기 위한 계급 해방운동의 봉화는 백정 해방운동(白丁解放運動)으로부터 시작하여 올랐다. 1923년 4월 진주(晋州)에서 강상호(姜相鎬)·신현수(申鉉壽)·장지필(張志弼)·이학찬(李學贊)·천석구(千錫九) 등이 창립위원이 되어, 백정(白丁) 계급을 규합하여 조직한 형평사(衡平社)가 그것이다. 형평사를 조직한 그 직접적인 동기는, 당시 진주 백정 이학찬(李學贊)이 자기 아들을 수차에 걸쳐 학교에 입학시키려고 노력했으나, 백정이란 신분 때문에 학부형과 학교의 거부로 실패한 데서 기인했던 것이다. 이에 분개한 이학찬은 동지 수명과 같이 형평운동의 횃불을 높이 들게 되었다. 그러나 진주 형평사 총본부는 지도층에 분쟁이 일어나, 장지필 일파는 1924년 4월 진주 총본부와 분열하여 서울 도염동(都染洞)에 형평사 혁신동맹(革新同盟)을 설치한 후, 진주측과 대항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다가 동년 8월 15일 대전(大田)에서 전국 형평사 통일대회를 개최하여, 양파의 감정을 일소하고 통일기관으로 형평사 중앙총본부를 서울에 설치할 것을 가결하고 사무소를 서울 관철동(貫鐵洞)에 두게 되었다. 이로부터 형평운동은 급속히 진전 확대되어 갔다. 지방순회원의 파견으로 사원(社員)의 자가 계몽에 힘쓰는 한편, 형평여성동맹 등의 별동대(別動隊)를 조직하였으며, 야학의 개설로 자제들의 교양에도 힘썼다. 이와 같이 1923년 4월 진주에서 계급해방운동으로 횃불이 올려진 형평운동은 천민계급의 백정들이 진보적인 사상가들의 지도를 받아, 우리 사회의 낡은 봉건유제(封建遺制)의 인습 타파와 아울러 인권옹호에 크게 이바지하게 되었다. 이러한 백정들의 차별 철폐와 해방을 위한 사회운동은 우리사회가 근대화하는 하나의 길이 되기도 하였다.

학생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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學生運動

우리가 광무개혁기(光武改革期)에 신교육운동(新敎育運動)을 전개하여 나갈 무렵, 뜻하지 않은 것이 군국(軍國) 일본의 침략이었다. 여기에 학생운동은 자연히 구국운동(救國運動)에 따른 민족의 의식적 핵심으로 일관되었다. 한말(韓末)이래 교육을 통한 국권회복이라는 한결같은 민족적 염원이 한 세대를 지난 일제치하 36년간에도 계속되었는데, 처음으로 학생들에 의하여 조직성을 갖고 제국주의 식민지 정책에 대항하여 독립운동을 일으킨 것이 1919년 3·1운동이었다. 학생들의 시위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3·1운동은 일제(日帝)에게는 반일운동(反日運動)이었고, 우리에게는 처음으로 민족주의(民族主義)을 개화(開化)시킨 것이며, 또한 독립된 민족으로서의 자결(自決)의 권리를 부르짖은 것이다. 이런 점에서 3·1운동은 우리나라 학생운동의 전통을 세웠다. 학생들은 3·1운동의 소중한 정신적 유산을 계승하여, 이로부터 7년후에는 6·10만세 운동(1926)을 일으켰다. 이 정신은 다시 3년후에 이른바 광주학생운동으로 발현(發現)하게 되었고, 그후에는 문자보급운동(Vnarod) 등으로 나타났다. 4·19의거(義擧)의 정신도 여기에서 나왔다고 볼 수 있다. 한편 3·1운동을 계기로 학생들은 구심적인 단체의 필요성을 느꼈다. 이에 학생들은 1920년 5월에 조직된 조선학생대회를 모체로 하여, 1923년 2월 9일에 조선학생회(朝鮮學生會) 창립총회를 개최했다. 이때 채택된 강령은 ① 조선 학생 자체의 당면한 문제는 학생 스스로 해결한다. ② 학생상호간의 선도와 친목을 기한다. ③ 학술을 연마하고 풍기를 바로잡아 가자는 것이었다. 당시 정치적 목적을 표방할 수 없었던 그들로서는 이러한 강령으로써 민족적 의식을 표현한 것이다. 실은 항일적 민족주의가 그 근본이었다. 이 무렵에는 사회주의적(社會主義的) 경향을 가진 학생 단체들로 조직되었는데 그 중요한 단체는 1924년에 조직된 조선학생과학연구회(朝鮮學生科學硏究會)였다. 이 역시 사회과학 연구의 보급과 아울러 학생으로서의 항일운동이 그 목표였다. 당시 학생운동은 대체로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의 두 진영으로 나뉘어 사상적으로는 대립하는 상태에 있었으나, 반제(反帝) 항일운동에 있어서는 그 보조를 같이 하였다. 이는 6·10만세 운동때, 학생 단체로서 주동적인 역할을 한 것이 조선학생과학연구회였음을 봄으로도 알 수 있다.

청소년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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靑少年運動

일제하에서의 청소년 운동은 삼일운동 직후부터 시작되었다. 서울·진주·광주(光州)·안변(安邊) 등지에서 소년회(少年會)가 생겼다. 그러나 본격적인 소년운동을 들고 나선 곳은 1921년에 방정환(方定煥)이 창립한 천도교 소년회(天道敎少年會)이다. 도쿄에서 아동문제를 연구해 온 방정환의 귀국 첫 소리는 '어린이도 사람이다'는 것이었다. 그 후, 그는 1923년 3월에 소년 잡지 <어린이>를 창간했다. 그리고 그의 노력으로 이 해 5월 1일에는 제1회 '어린이 날'기념식이 거행되었다. 이 때, 청소년 운동의 다른 한 양상으로 보이 스카우트(Boy Scout)운동도 전개되었는데, 이는 중앙고보(中央高普)의 체조교사 조철호(趙喆鎬)가 1922년 10월 '소년척후단(少年斥候團)'을 조직함으로써 시작된 것이다. 보다 넓은 세계를 알고, 보다 높은 이상(理想)을 가지며, 보다 나은 내일의 조국과 세계를 이룩하자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한편 1923년 3월에는 동경(東京) 방정환 집에서 '색동회'가 창립되었다. 이는 아동문제 연구 단체로 출발한 것이다. 당시 <색동회>의 동인(同人)은 방정환을 중심으로 윤극영(尹克榮)·마해송(馬海松)·조재호(曹在浩)·정인섭(鄭寅燮)·이헌구(李軒求) 등 동경(東京) 유학생들이었다. 1931년 방정환이 죽은 뒤로는 정순철(鄭淳哲)·윤석중(尹石重)이 이 회를 지켜 나갔다.

여성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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女性運動

우리나라 여성운동도 한말(韓末) 개화운동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1899년 조직된 여우회(女友會)와 여자교육회(女子敎育會) 등이 그것이다. 이들 단체는 축첩반대운동과 뜻 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여학교를 세우도록 활동했다. 그러나 3·1운동 이전까지, 여성의 활동은 극히 수줍고 소극적인 태도를 취했다. 물론 남자들과 같이 식탁에도 앉지 않았다. 그런데 3·1운동이 일어났을 때, 가장 특이한 현상은 여학생들의 활동이었다. 남으로는 부산 일신여학교(日新女學校)로부터 북으로는 성진 보신여학교(普信女學校)에 이르기까지 남학생 못지 않게 만세 시위를 벌였다는 점이다. 더욱 이들 여학생들은 파리 평화회의(平和會義)에 호소문까지 보내었고, 이화여학교(梨花女學校)의 유관순(柳寬順)은 잔 다르크(Jeanne d'arc)와 같은 순교자 역할을 하였다. 여고사로는 천안 양대여학교(良垈女學校)의 임영신(任永信), 마산 의신여학교(義信女學校)의 박순천(朴順天), 평양 숭의여학교(崇義女學校)의 김마리아의 투쟁이 이름 높았다. 3·1운동을 계기로 여성들의 의식이 크게 성장했다고 볼 수 있다. 여성은 이제 더 이상 약자가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 셈이다. 이에 따라 점차 애국적 여성상이 부각되어 가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에서 여성들이 집단운동으로 참여한 것은 1919년 10월에 조직된 대한민국 애국부인회이다. 이는 혈성단 애국부인회(血誠團 愛國婦人會)와 대조선 독립 애국부인회(大朝鮮愛國婦人會)가 합류하여 결성된 것으로, 그 회원들은 당시 여성으로서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대한민국 애국부인회는 여성들의 민족운동단체였기 때문에 여성들도 독립운동 자금마련에 한몫 거들었다. 그리고 여성동지에 대한 원호, 여성해방운동 등 여권운동도 전개해 나갔다. 그 후 1927년 5월에는 신간회(新幹會)의 자매 단체로 김활란(金活蘭)·유영준(柳英俊)·유각경(兪珏卿)·정칠성(丁七星)·최은희(崔恩喜) 등이 근우회(槿友會)를 창립했다. 이 근우회는 여성들의 복지사업을 전개하기 위하여 전국에 100개 이상의 지부를 둘 만큼 뻗어 갔지만 일제(日帝)의 탄압이 심해 불과 2년만에 해산당했다. 해방될 때까지 살아남은 단체는 절제회, 간호협회, 조산협회 정도였다. 여성이 국민이란 의식을 가졌던 것은 해방 이후부터이다.

조선청년총동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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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靑年總同盟

1924년 일제하에서 220여 개의 사회주의 계통의 청년단체가 주축이 되어 결성한 청년단체연합회다. 장덕수(張德秀)·오상근(吳祥根)·박일병(朴一秉) 등 뜻있는 청년지도자들은 모든 청년단체의 통합을 구상하여 '조선청년회연합회'를 결성하였는데, 22년 제3회 정기대회에서 김삭국(金思國)·이영(李英)·한신교(韓愼敎) 등을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자들이 탈퇴하여 각지의 좌경 청년단체를 규합하고, '전조선청년당대회'를 열어 사회주의 단체들의 결속을 다짐하였다. 한편, 24년에는 소위 무산계급의 청년단체를 총규합한다는 '신흥청년동맹'이라는 것이 조직되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전기 조선청년연합회 산하의 서울청년회의 중심인물인 김삭국·최창익·이영 등이 전국의 청년단체를 규합, '조선청년총동맹'결성을 주창하였다. 당시 이것은 그 취지에서 어떤 청년단체도 거부할 명분이 없었기 때문에, 사회주의 계통뿐만 아니라 민족진영 계통의 단체도 함께 참여하게 되었고, 신흥청년동맹도 가담하여 24년 4월 '조선청년총동맹'이 결성되었다. 그 후 1년이 지난 1925년 4월 박헌영 일파가 '조선공산당'을 조직하고 공산주의 청년단체인 '고려공산청년회'를 조직하면서 사회주의 청년단체와 공산주의 청년단체가 분립하게 되었는데, 1925년 11월 신의주의 공산청년단체인 '신만청년회(新滿靑年會)'사건을 계기로 점차 검거와 탄압이 가해지기 시작하여 결국 조선청년총동맹도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형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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衡平社

1923년 4월 25일, 백정들이 계급타파를 위해 전개한 형평운동의 단체, 진주(晋州)에서 이학찬(李學贊)·장지필(張志弼)등 80여명이 모여 형평사 연맹을 조직하고 대략 다음과 같은 내용의 취지서를 발표하였다. ① 공평(公平)은 사회의 근본이고, 애정은 인류의 본령이다. ② 계급을 타파하고 <백정>이라는 모욕적인 칭호를 폐지한다. ③ 교육을 장려하고 참다운 인간으로서 생활하련다. ④ 직업에는 귀천이 없고 백정도 동격의 한국 민족이다. 그 후 이 운동은 남북 양파로 분열되었다가 1924년 8월 15일에 통합하여 <조선형평사 중앙총본부>를 결성하고, 1928년 4월 제6차 대회에서 대략 다음과 같은 내용의 강령을 발표하였다. ① 우리는 경제적 조건을 필요로 한 인권해방을 근본 사명으로 한다. ② 우리는 일반 사회단체와 공동제휴하여 합리적 사회건설을 기한다. ③ 우리는 당면한 실제적 이익을 추구하여 자신의 훈련, 교양을 기한다. 끝으로 민족운동 또는 계급운동으로의 전환을 암시하고, 피혁회사(皮革會社) 등의 무역업을 협력 경영하겠다고 나섰다. 그러나 곧 일제의 박해를 받아 대동사(大同社)로 개칭되었다가 유명무실해졌다.

광주학생운동의 이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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光州學生運動-理念

1929년 11월 광주(光州)에서 일어나 전국적으로 번져간 일제식민지 교육에 대한 반대운동은 선언문(宣言文)에서 경찰권 침입반대, 교우회자치권 획득, 한국인 본위의 교육, 학문의 자유를 주장하였고, 민중들에게 죽음을 초월한 투쟁, 경찰망철퇴, 집회·결사·출판의 자유, 관제단체의 해산 등을 호소했으며, 슬로건으로는 <약소민족해방만세> <제국주의 타도만세> <피압박민족만세> <무산계급혁명만세> 등을 내세웠다. 요컨대 광주학생운동은 1920년대 당시 유행한 사회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기는 하였지만 역시 주목적은 식민지교육에 대한 항거와 민족교육의 쟁취, 한국민족의 독립운동이었다.

이상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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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商在(1850-1927)

사회운동가·종교인·정치가. 본관은 한산(韓山) 충남 서천(舒川) 사람. 자는 계호(季皓), 호는 월남(月南). 고종 4년(1867) 과거에 응시하였다가 낙방하고, 당시 승지(承旨)였던 박정양(朴定陽)을 알게 되어 10여 년 동안 그의 집에서 문객(門客) 으로 기거하면서 세계의 대세와 나라의 움직임을 파악하였다. 고종 18년(1881) 박정양이 홍영식(洪英植)·김옥균(金玉均) 등과 함께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으로 일본을 시찰하러 갔을 때 그의 수행원으로 동행하였다가, 귀국 후 홍영식의 주선으로 우정국주사(郵政局主事)가 되었으나, 갑신정변(甲申政變)의 실패로 개화파가 세력을 잃게 되자 사직하고 낙향하였다. 고종 24년(1887) 박정양이 초대 주미공사(駐美公使)로 임명되자 공사관서기로 그를 수행하여 미국에 건너갔으나 청나라의 압력으로 이듬해 귀국하였다. 그 후 고종 31년(1894) 갑오경장(甲午更張)으로 정부기구가 개편되자, 우부승지(右副承旨)를 거쳐 학무아문참의(學務衙門參議)로 학무국장(學務局長)을 겸임하면서 신교육령을 반포하고, 사범학교·중학교·소학교·외국어학교를 설립하였다. 이듬해 학부참사관(學部參事官)·법부참사관(法部參事官)을 거쳐 외국어학교 교장, 내각총서(內閣總書) 및 중추원 일등외관(中樞院一等議官) 등을 역임하였다. 한편 서재필(徐載弼) 등과 독립협회를 조직, 부회장에 취임하여 만민공동회(萬民公同會)를 개최하다가 잠시 투옥되기도 하였다. 광무(光武) 6년(1902) 개혁당 사건으로 체포되어 복역중 그리스도교에 입교하였으며, 출옥 후 융희(隆熙) 2년(1908)에는 황성기독교청년회(皇城基督敎靑年會:YMCA) 종교부 총무 및 교육부장을 겸임, 선교와 청년운동에 투신하였다. 1921년 조선교육협회(朝鮮敎育協會) 회장에 취임하였고,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열린 만국 기독교청년연합회에 한국 대표로 참석하였으며, 23년 소년연합척후대(少年聯合斥候隊;보이 스카우트) 초대 총재를 지냈다. 24년 조선일보사 사장에 취임하였고 27년 신간회(新幹會) 초대 회장을 맡았다. 그가 사망하자 장례는 우리나라 최초로 사회장으로 치러졌다. 62년 건국공로훈장 복장(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문자보급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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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字普及運動

1931년부터 193년까지 언론기관이 주관하고 학생들이 주역이 되어 벌인 국어보급운동. 이중 조선일보사(朝鮮日報社)에서 한 것을 문자보급반(文字普及班)운동, 동아일보사(東亞日報社)에서 한 것을 '브나로드(Vnarod)운동'이라고 하고, 이와 때를 같이하여 동아일보사가 주관하고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회원들의 참여로 행해진 것으로 조선어강습회(朝鮮語講習會)가 있다. 학생들이 방학을 이용하여 시골에 내려가 문맹퇴치교육과 위생강연 등으로 봉사활동을 하게 하는 운동으로, 중학 상급반과 전문학생이 참가하여 전국적인 붐을 일으켰다. 1933년에는 브나로드 운동이 학생계몽운동으로 개칭되어 더욱 강화되었고, 조선어 강습회도 활발하게 전개되어 일종의 민족우동으로 발전하는 듯하였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좌절되고 말았다.

브나로드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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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narod 運動

1931년에 동아일보사가 주관하여 시작된 학생계몽운동. '브나로드'는 러시아어로 '민중에게로'라는 말. 19세기 러시아의 지식계급들이 농민·노동자에게로 들어가 몸소 체험을 하고 지도도 하던 운동을 가리키는 것으로 여기서 '민중에게로'라는 뜻을 취하여 운동명칭을 삼은 것이다. 이 운동은 글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글을 주고, 또 위생지식이 없는 이에게는 위생지식을 주는 것을 취지로 하고 '조선문강습(朝鮮文講習)'과 '숫자강습(數字講習)'을 맡은 학생계몽대(學生啓蒙隊)와, 기행·일기·풍물·고향통신·생활체험 등을 취재하는 학생기자대의 3대(隊)로 구성되었다. 언론기관의 적극적인 후원을 받아 진행된 이 계몽운동은 당시에 민족의식을 일깨우는 데 크게 공헌하였고, 1933년에는 학생계몽운동으로 개칭되어 광범위한 농촌계몽운동·사회운동으로까지 발전되었다가 1934년에 일제의 강력한 탄압으로 중지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소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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少年會

1919년 봄에 서울·안변(安邊)·광주(光州)·진주(晋州) 등지에서 조직된 소년운동단체. 특히 진주소년회의 강민진(姜敏鎭) 등은 만세운동까지 일으켜 16·17세의 소년 다수가 검거·투옥되기도 하였다.

방정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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方定煥 (1899∼1931)

아동문학가. 호는 소파(小波), 서울출신. 보성(普成)보통학교, 미동(美洞)보통학교, 선린(善隣)상업학교, 보성전문학교 등에서 수학하고 잡지 편집을 맡아보다가 3·1운동 때 <독립신문>을 등사하여 배부하다가 체포되었다. 이 해에 석방되어 일본 도요(東洋)대학 문학과에 들어가 아동문학에 전심, 1921년 여름방학 때 귀국하여 천도교소년회를 조직하고, '어린이에 대한 고운말 쓰기 운동'을 벌였다. 다음해 동화집 <사랑의 선물>을 발행하고 잡지 <어린이>를 창간했으며 유학생 손진태(孫晋泰) 등과 색동회를 조직하고, 5월 1일 첫 어린이날로 정하였다. 1924년에는 전국소년지도자대회를 개최하여 어린이 단체의 단합을 시도하고, 이듬해에는 소년운동협회(少年運動協會)를 결성하였다. 1927년 조선소년총동맹(朝鮮少年總同盟)의 발족으로 사회주의적인 색채를 띠자 일선에서 은퇴, 개인으로 활동하였다. 1928년에는 처음으로 세계아동미술전람회를 개최하였고 잡지 <혜성(慧星)>을 발간하였으나 지병으로 사망하였다. 1957년 그를 기념하기 위해 <소파상(小波賞)>이 제정되어 지금도 존속하고 있다.

조선어학회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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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語學會事件

일제가 국학연구의 탄압책으로 조선어학회의

관계자를 사회주의자로 몰아 대대적으로 투옥한 사건이다. 1942년 8월 함흥 영생(永生)고등학교 학생이 검거되고 그 증인으로서 과거 이들 학생의 은사였던 조선어학회 회원 정태진(丁泰鎭)이 잡히면서 10월에는 조선어학회를 관련시켜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함흥경찰서는 이윤재(李允宰)·최현배(崔鉉培)·이희승(李熙昇)·장지영(張志映)·이중화(李重華)·정인승(鄭寅承)·이석린(李錫麟)·이병기(李秉岐)·김선기(金善琪)·이만규(李萬珪)·이은상(李殷相)·정인섭(鄭寅燮)·안재홍(安在鴻) 등을 검거하였다. 이들은 홍원(洪原)경찰서의 유치장에서 1년 동안 갖은 야마적인 고문의 시달림을 받은 끝에 '학술단체를 가장하여 국체(國體) 변혁을 도모한 독립운동단체'라는 죄명으로 기소되어 함흥 검사국으로 넘어갔다. 그 밖에도 어학회를 물심으로 도와 준 50여 명이 증인신문으로 시달림을 받았다. 한편, 함흥 검사국에서는 이윤재·한징·최현배·이희승·정태진·이극로·이중화·김양수·김도연·김법린·이인·장현식 등 13명만 공판에 회부하고 나머지는 석방하였는데, 판결 전에 이윤재·한징이 심한 고문과 기한(飢寒)으로 옥사하였으며, 나머지 11명은 각각 6년에서 2년까지의 징역판결을 받았으며, 장현식은 무죄로 석방되었다. 나머지 인사들은 항소(抗訴) 중에 광복을 맞아 석방되었다.

소년 척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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少年斥候團

1922년 10월에 조직된 소년운동단체. 중앙학교 교사 조철호가 소년들을 모아 훈련을 시키다가 1924년 3월에 YMCA 내의 보이스카우트단과 합동하여 소년척후단 조선총연맹을 조직하였다. 뒤에 YMCA의 정성채(鄭聖采) 등과 손잡고 국제연맹 사무국에 등록하니 일본소년연맹과는 다른, 독립한 국제적 단위를 이루었다. 이 단체의 이념은 "개체의 신장과 유용한 재기(才技)를 길러서 사회공공에 봉사한다"는 것으로 민족정신 고취와 군사훈련 실시에 목표를 두었다.

조철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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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喆鎬 (1890∼1941)

소년운동가·독립운동가.

한말(韓末)에 무관학교(武官學校)를 거쳐 일본 육사(陸士)를 졸업하고 중위(中尉)임관, 오산(五山)학교 교사를 지낸 후 1914년 상해로 망명했다가 체포되었다. 그후 중앙고보(中央高普) 교사를 거쳐 북경에서 열린 극동 잼보리(極東 Jamboree)에 한국대표로 참석하였다. 이를 계기로 소년운동에 투신하여 1922년에 소년척후단을 조직, 보이스카우트운동을 하다가 6·10만세 운동 참가와

조선소년군(朝鮮少年軍) 해산으로 2차 투옥되었다. 출옥 후 1940년 보성전문학교 강사를 지냈다.

색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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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會

1922년 일본 동경에서 한국 유학생들이 조직한 한국 최초의 어린이 운동 단체. 동인(同人)은 방정환(方定煥)·마해송(馬海松)·윤극영(尹克榮)·정순철(鄭淳喆)·손진태(孫晋泰)·조재호(曹在浩)·고한승(高漢承)·진장섭(秦長燮) 등이다. 1923년에는 방정환의 주관으로 기관지 <어린이>를 발간, 많은 동요와 동화를 실어 새로운 사조(思潮)를 소개하였다. 1931년 방정환이 죽은 후로는 정순철·윤석중 등이 이 회를 지켜 나갔다.

대한민국 애국부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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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韓民國愛國婦人會

1919년 6월 조직된 독립운동 여성단체. 1919년 3월 주로 3·1운동으로 투옥된 사람들의 옥중 차입을 위하여 오현주(吳玄洲)·이정숙(李貞淑) 등의 여인들이 조직한 혈성단애국부인회(血誠團愛國婦人會)와 그해 4월에 최숙자(崔淑子)·김원경(金元慶)·김희열(金熙烈) 등이 조직한 대조선 독립애국부인회(大朝鮮獨立愛國婦人會)가 합류하여 대한민국 애국부인회라 개칭 통합하였다. 목표를 입옥자(入獄者) 구호에서 여성들의 민족운동에의 참가로 범위를 넓혔고, 새로이 총재(總裁)에 오현관(吳玄觀), 부총재에 김희열, 회장에 오현주 등을 선출하고 전국에 지부(支部)를 설치하기로 하여 평양·개성·대구·진주·부산·마산·목포·전주·광주(光州) 등지에 각각 지부를 두고 독립운동 자금을 갹출하여 상해임시정부에 송금하였다. 그해 9월, 정신여학교(貞信女學校) 교장인 미국 선교사 미스 딘(Miss Dean)집에서, 출옥한 김마리아(金瑪利亞), 황애시덕(黃愛施德) 양인의 출옥 축하회가 끝난 다음, 총회를 열어 본부규칙 등을 제정 통과시키고 새로 회장에 김마리아, 총무에 황애시덕 등을 선출하였다. 그해 10월 독립운동 자금 2,000원을 상해에 있는 임시정부에 보내니, 이 일이 발각되어 회장인 김마리아를 비롯하여 많은 사람이 투옥되고 회는 자연 해산되었다. 그러나 뒤를 이은 여러 여성단체의 귀감(龜鑑)이 되었다.

근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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槿友會

1927년 5월에 창립된 여성단체, 1927년 1월 남성측이 대동단결하여 신간회(新幹會)를 결성하니, 여성측도 이와 보조를 같이하여 민족주의 진영에서 유영준(劉英俊)·김활란(金活蘭)·유각경(兪珏卿)·최은희(崔恩喜) 등이 참가하고 사회주의 진영에서 황신덕(黃信德)·박원희(朴元熙)·정종명(鄭鍾鳴)·조원숙(趙元淑) 등이 참가하여 종로 중앙 청년회관에서 창립총회를 열고 단일전선(單一戰線)을 표방하는 투쟁단체를 결성하였다.

김약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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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躍淵 (1868∼1942)

독립운동가·교육자. 호는 규암(圭巖). 함북 회령(會寧)출신. 오삼열(吳三烈)의 문인(門人). 1899년 간도명동(間島明洞)으로 이사, 토지를 사들여 한인(韓人) 집단부락을 설정하고, 규암재(圭巖齋)를 설립하여 교육사업에 종사했다. 1908년 명동서숙(明洞書塾)을 설립, 숙감(塾監)이 되고, 이듬해 기독교에 입교하여 명동교회를 세웠다. 1917년 간도 한교들을 위한 간민 교육회(墾民敎育會)를 만들어 회장으로 활약하고 이듬해 교포들의 단결을 호소하여 간민회(墾民會)라는 동포들의 자활운동단체를 조직했다. 1919년 블라디보스토크를 방문, 여운형(呂運亨)·이동휘(李東揮) 등을 찾아가 독립운동단체의 연합전선을 시도했다. 임시정부의 초청으로 상해로 가다가 중국 관헌에 체포되어 2년 동안 연금되었고, 석방된 후 교육사업에 헌신했다. 1929년 평양신학교(平壤神學校)를 졸업, 이듬해에 장로회 목사가 되었으며 만년(晩年)엔 전도사업에 힘썼다.

김활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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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活蘭 (1899∼1970)

여성운동가·교육자. 본명은 기득(己得). 호는 우월(又月). 세례명은 헬렌. 인천(仁川)태생. 1918년 이화학당(梨花學堂) 졸업. 1931년 컬럼비아 대학에서 여성으로서 한국최초의 철학박사 학위를 받음. 1939년 이화여전의 교장에 취임. 1945년 독립촉성부인회(獨立促成婦人會)를 조직하여 당시의 신탁통치에 반대하는 운동을 일으켰다. 해방후 이화여자대학 총장·유엔 총회의 한국대표를 역임, 막사이사이 공익부문상을 수상했고, 한국의 여성교육에 일생동안 헌신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