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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현대 경제사상〔槪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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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의 사회과학이 도입 소개된 것은 1890년대 초부터이다. 1895년에 발간된 유길준(兪吉濬)의 <서유견문(西遊見聞)>은 그 책의 이름이 일종의 여행기이나 그 내용은 서구에서 발달한 근대학문, 특히 정치학·경제학·법률학 등을 상세히 소개한 것이다. 그후 광무(光武)·융희(隆熙) 연간에 들어와서도 서구 사회과학은 활발하게 도입되었으며 이 시기에는 약간의 저서가 국내에서도 서술 간행되었다. 융희 2년에 보문사(普文社)에서 발행된 <최신경제학(最新經濟學)>은 오늘날까지 알려진 바로는 한국인이 저술한 최초의 경제학 서적이다. 이 책은 박승희·주정균(朱定均)의 공저(共著)로서, 주정균은 당시 보성전문학교의 교수(敎授)로 있었다. 이 책은 물론 교과서로 서술된 것이며, 이 때에 애덤 스미스의 경제이론과 산업혁명론이 강조 소개되었다. 구한말 및 일제 초기에는 다수의 청년들이 일본을 비롯한 해외 제국(諸國)에 유학했으며 그들에 의하여 서구의 경제학 및 경제사상이 한국에 널리 소개되었다. 특히 3·1운동 이후의 계몽운동의 전개와 더불어 현대 경제사상은 지식층뿐만 아니라 대중 속에도 침투되어 갔던 것이다. 마르크스의 사회주의 경제사상이 대중 속에 파고 들어간 것도 이 시기부터였고 역사학파의 국민경제사상이 일부 지식층에 의하여 강조되기도 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사상의 뒷받침을 받으면서 1920년을 전후하여 경제적 민족주의 운동이 전개되었다. 경제적 민족주의운동은 사회의 각층에 여러 가지 양상으로 전개된다.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의 거상(巨商), 지방의 대지주층에서 근대적 회사기업의 설립 붐이 일어난 것을 그 첫째 예로서 들 수 있다. 만포은행(萬浦銀行)·대구은행(大邱銀行)·호남은행(湖南銀行) 등 민족계 지방 금융기관, 경성방직(京城紡織)·동양염직(東洋染織) 등 근대적 공장공업, 태창무역(泰昌貿易)·백산무역(白山貿易) 등 대상사(大商社)·기업회사들의 발달된 이들 거상과 대지주의 근대기업에 대한 각성의 소산이었다. 경제적 민족주의운동은 군소 상인 및 일반 서민층의 경제적 진출로서도 전개된다. 평양을 중심으로 한 고무공업 및 메리야스 공업, 부산·목포·군산·인천·원산·청진 등 항도를 위시한 물산(物産)집합소에 설립된 창고업·운수업, 지방도읍에서 볼 수 있는 군소상회의 설립 등 1920년대 이후의 서민출신의 기업활동은 괄목할 만한 바가 있었다. 이러한 군소 기업의 발생은 민중이 전통적인 생활의식에서 근대적 경제의식으로 전환했음을 단적으로 표현해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920년대 이후 지주·상인 및 서민층의 경제의식 속에는 영국의 고전파 경제사상이 그 밑바닥을 이루고 있었던 모양이다. 경제적 민족주의는 민중운동의 전개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1920년대 초부터 시작된 물산장려운동(物産奬勵運動) 및 1920년대 중기에 나타난 협동조합운동(協同組合運動) 등은 그 두드러진 예라고 할 수 있겠다. 조선물산장려운동은 기독청년회 등 청년회 발의(發議)로 시작되었으나 그것은 민중의 호응을 얻어 곧 전국적인 국민운동으로 전개되었으며, 이 운동은 민족 기업건설운동과 직접적인 관련을 갖는 것이었다. 제1차 대전후 대거 진출하는 일제의 자본 침투에 대항하여 민족 기업의 발생을 보게 되었는 바, 일제의 대자본에 억눌려 열세에서 허덕이던 민족자본을 보호 육성하는 것이 물산장려운동의 본뜻이었던 것이다. 협동조합운동은 일제 독점자본의 횡포를 막아내려는 민중의 자활(自活)운동이며, 소비자가 단결한 자기방위 운동으로 전개된 것이다. 일제의 식민지관청인 조선총독부는 일제의 독점자본을 옹호하고, 민족자본에 대한 횡포와 소비대중의 생활위협을 거의 방임하고 있었던 터이므로 물산장려운동과 협동조합운동은 민중의 생존투쟁으로 전개된 것이었다. 이와 같은 민중의 자기방위운동은 역사학파의 국민경제이론 도입에 의해 뒷받침되었다고 할 수 있다. 경제적 민족주의는 또 반제(反帝)투쟁으로 전개되었다. 1920년대 중기부터 나타나는 농민의 소작쟁의 및 공장노동자의 임금투쟁은 일제 독점자본에 대항하는 민족적 반제운동이었던 것이다. 농민의 소작쟁의는 3남의 곡창지대에서 특히 일인농장의 소작인층에서 더욱 치열하게 나타났던 것이다. 동양척식회사(東洋拓殖會社)를 비롯한 일인 식민회사에 소속된 소작인의 쟁의는 농민의 생존투쟁인 동시에 일제의 식민지 농업정책에 대한 반제투쟁의 성격을 분명히 갖고 전개된 두드러진 예라고 할 수 있다. 노동자의 임금투쟁 역시 1920년대의 후반기 이래 더욱 격심하게 전개된다. 광산 및 공장노동자들은 조직적인 파업을 일으키면서 반제국주의의 표어 밑에서 민족해방 연합전선을 결성(結成)한 것이다. 이와 같이 경제적 민족주의는 1920년대 이후 사회의 상층계급에서는 민족기업 건설 및 육성을 목표삼았고, 사회의 하층계급에서는 반제, 반식민지정책을 목표로 생존투쟁을 전개해 온 것이다. 지식층의 경제사상과 민중의 경제의식은 일제 지배하에서는 이렇게 하여 일치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물산장려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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物産奬勵運動

1920년 8월부터 일어나기 시작한 경제적 민족운동. 3·1운동 후 국내의 민족운동은 교육·문화와 산업진흥으로 민족실력을 배양하여 독립을 달성하려는 실력양성과 물산장려운동으로 나타났다. 이 물산장려운동은 경제적으로 민족자립경제 확립에 그 목표를 두고 있었다. 그리하여 일제의 식민지수탈 경제가 한국에 발붙이지 못하게 함으로써 경제적으로 한국이 일제의 예속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소비절약, 일제품 배척, 토산품(土産品) 장려 등의 운동이 전개되었다. 이 운동은 비록 인도의 간디가 창도한 토산품 장려·영국상품 불매 운동에서 자극을 받았으나 그 추세는 대단히 자발적이었다. 이 운동은 동아일보 등 언론의 지원에 의해 일어났다. 1921년 조선인 산업대회, 1923년 조선물산장려운동은 동아일보의 후원으로 개최된 것이며, 물산장려운동을 목적으로 하는 결사단체로 전국적 조직을 가진 것으로는 조선물산장려회, 토산애용부인회, 절제회, 금연단주단(禁煙斷酒團)이 있었고, 서울에 물산장려주식회사, 평양에 조선물산장려회, 자작회(自作會)가 있었다. 이 운동은 처음 평양에서 조만식(曹晩植)·김성업(金性業)·김동원(金東元)·오윤선(吳胤善) 등 71인이 발기인이 되어 그 취지를 천명하였다. 조선물산을 장려하는 취지는 조선의 경제가 부흥하고 사회가 발달하여 실업자가 구제되고 근검한 풍조와 용감성을 배양하며 무엇보다도 본화(本貨)를 애용함으로써 배외심(拜外心)을 없애게 한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여기에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이 운동은 일화(日貨)·외화(外貨) 배척운동이 아니라 물산애용 장려운동이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한국인 산품(産品)을 장려하여 이를 애용케 하는 소극적·간접적 방법을 취한 데에 의의가 있었다.

협동조합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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協同組合運動

일제하 민족운동의 일환으로 전개된 경제적 운동. 우리나라의 협동조합운동은 1920년대 이후 소비조합운동에서 시작된다. 즉 1920년 5월 15일 목포에서 조직된 목포소비조합을 필두로 하여 전국적으로 이 운동이 파급되어, 서울에는 조선노동공제회의 부속기관으로서 1921년 6월 15일에 소비조합이 조직되었다. 당시 우리나라의 사회운동계에는 노농(勞農), 청소년운동이 치열할 때였으므로 소비조합도 그에 따라 점차 각지에 파급되어 갔는데, 이것이 본격적으로 전국적인 운동이 된 것은 1925년대 일본에서 돌아온 유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사회운동의 일부분으로 경향 각지에 협동조합의 조직과 선전에 힘쓴 데서 비롯되었다. 1927년에는 함창(咸昌)·상주(尙州) 등지를 위시해서 각처에 협동조합이 설치되었다. 1928년 봄 서울에서 전진한(錢鎭漢)을 위원장으로 한 협동조합운동사 본부가 조직되면서 이 운동은 더욱 활기를 띠게 되었다. 당시의 이 운동은 노동운동과 밀접한 관련을 가져 상당한 발전을 보이고 있었으나, 일제의 가혹한 탄압으로 질식할 수밖에 없었다. 이 때에는 또 종교 계통의 협동조합운동도 자못 활발하였는데 천도교 계통, 기독교 계통의 운동은 그 영향이 적지 않았다. 일제하의 이 운동은 민족운동의 성격을 강하게 띠어 일제 관헌의 감시를 끊임없이 받고 있었으며, 그러한 여건하에서는 대규모의 조직과 자금을 필요로 하는 생산조합이라든가 신용조합의 형태를 취하기가 곤란하여 그와 같은 소비조합 형태로 발전한 것으로 보여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