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동양사상/한국의 사상/조선전기의 사상/조선전기의 정치사상
조선전기의 정치사상〔槪說〕
편집조선조 (1392∼1910)는근세적 관인국가(官人國家) 단계에 해당된다. 관인국가는 조선조의 새로운 지배계층이던 양반(文班·武班)이 중심이 되어 중세 귀족국가(고려)를 근대적 민족국가로 발전시키려는 소위 근세적 산물이었다. 한국적 근세를 대표하는 조선조의 정치사상은 ① 유교적 통치 이데올로기에 의한 현실적인 국시(國是)의 확립 ② 군주정치와 관인(官人)간의 기능을 더욱 조정, 기능화시킨 여론과 입헌(入憲)중심의 소위 사림정치(士林政治) ③ 중앙집권적 군주정치의 제도화로 나타난 통일국가적 요소와 이민족(異民族)의 침략에 저항하기 위한 민족 자존의식(自存意識) 등의 결합으로 이어지는 민족주의 사상 등으로 요약된다. 따라서 14세기말 태조 이성계(李成桂)에 의한 건국이념의 확립, 그것을 제도화시킨 각종 입법(<경국대전>등 법률 체제 확립) 및 국경개념의 확정과 대외관계의 안정(대명 관계) 등으로 조선조의 통치질서가 확립되어 가던 그 초기에서부터 출발하여 그것이 양차에 걸친 이민족의 침략과 그 대내적 모순의 심화로 새로운 정치적 유신(維新)이 불가피하게 되던 17세기말 (숙종조)까지 약 3백년이 그 전기(前期)에 해당한다. 천명을 다하지 못한 여말의 군주로부터 선양의 형식으로 정권을 물려받은 이성계는 그 혁명의 정당성을 민심귀복(民心歸服)과 같은 유교적 명분론에서 찾으려는 데에서부터 그 건국이념이 성립되었다. 따라서 그 건국이념에 표시된 배불숭유(排佛崇儒)는 신·구 정치세력의 교체 및 새로운 왕조 건설에 유교가 활용될 수 있었던 그 이론적 기능성 때문이었으며 이소사대(以小事大)는 여말 이래로 피폐된 국력 위에서 그 대외관계를 안정시킴으로써 살아남으려는 현실적 이유 때문이었다. 그것은 그대로 회군(위화도)의 명분이기도 하였다. 이런 점에서 건국초 국호(國號) 문제에서도 새 왕조에 대한 국가적 승인을 대외적으로 확보하여야 한다는 현실적 이유와 국명(國名)을 굳이 단군 후예(고조선)임을 강조하여 조선(朝鮮)으로 하였다는 민족적 요인이 발견될 수 있다. 그것은 그대로 초기 이래의 대외 관계를 안정시켜온 소위 시대질서에도 연결되는 것이니 즉 조선시대는 건국초 명에 의한 국가적 승인 및 임란 때 내원(來援)과 같은 조선조의 자존(自存)에 기여한 명(明)의 구체적 우호에 기인하였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유교적 통치이념을 가장 잘 구현시켰다는 세종(世宗)대에서는 언어정책과 여론정치에 의한 민족적 일체감의 형성 및 국경개념의 확정에 의한 민족의 주체성 등 그 민주성(民主性)과 자주성이 꽃필 수 있었다. 거기서 여론에 의한 민본정치의 표본으로서 청백리(淸白吏)인 황희(黃喜)와 문신 변계량(卞季良) 등이 나왔다. 이같이 군주와 관인 그리고 관인 상호간의 견제와 균형 위에서 이루어지던 관인정치의 민주적 사상은 모든 통치는 법률과 관례 양자를 합하여, 성헌(成憲)에 의해서만 가능한다는 입법주의와. 모든 정치는 넓은 언로(言路)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여론정치로 제도화되어 왔다. 그것이 <경국대전(經國大典)>을 비롯한 방대한 율령체제(律令體制)의 완성으로 나타났고 또 상소(上疎)와 언관(言官)제도와 같은 언로정책(言路政策)에서는 모든 관인들의 의견을 정책결정 과정에 흡수하기 위한 백관 윤대제(百官輪大制-문종 때부터)로 나타났다. 이렇게 엄격한 입법제도와 여론정치사상은 더욱 조화 발전하여 국왕의 권력도 그것이 성헌(成憲)과 여론에 어긋날 때는 교체할 수 있다는 반정사상(撥亂反正의 약어)이 나타났고 법률도 오래 되어 폐가 생기면 백성을 위하여 바꾸어야 한다는 경장론(更張論)으로 발전하였다. 전자의 예는 중종대의 반정공신 성희안(成希顔)에서, 후자의 예는 율곡 이이(李珥)의 진보적인 정치론에서 각각 발견된다. 이 같이 관인국가를 제도화시켜준 유교적 통치이념 속에서도 한민족이 지켜온 민족주의적 명맥은 여전히 그 근세국가 발전 에너지의 하나로서 계승 발전되어 왔다. 원래 자기(韓民族)의 존립이라는 주체적 목적을 위하여 활용된 유교이념이었기 때문에 그것은 이민족의 침략 앞에서 자기를 지키려는 조선조 민족주의 사상을 강화하고 체계화하는 가치와 논리로 심화되어 갔다. 그것이 임란이라는 민족적 위기 앞에서 유림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민족운동으로서 의병운동의 사상적 지주였던 것이다. 이때 의병운동은 대외적인 민족운동과 대내적인 왕조질서 강화라는 조선조 정치사상의 2중적 성숙과정을 의미한다. 이같은 민족주의 정신으로 인하여 청(淸)이 무력으로 국가적 불평등을 강요하여 오던 호란(丁卯胡亂, 丙子胡亂) 앞에서는 실리를 살려 최명길(崔鳴吉)과 같이 주화론(主和論)을 주장하는 이도 있었으나 그 대부분은 힘의 열세 속에서도 주전론이란 대열로 뭉쳐 끝까지 이민족에 대한 항쟁을 벌였던 것이다. 따라서 명(明)과 제휴하면서까지 대청(對淸)적 대항쟁을 끝까지 계속하였던 임경업(林慶業)의 사상 등은 결코 단순한 사명(事明)의식만이 아니요 사실은 민족적 모순을 극복하기 위하여 모든 수단을 다 강구하였던 조선조 민족의식의 철저한 표현이다. 이같은 대 이민족 항쟁의식은 청(淸)과의 불평등이 제도화된(1637) 후에도 계속되어 효종의 북벌책 등도 더욱 심화되었다. 청(淸)에 의하여 강요된 국가적 불평 등을 춘추정신(春秋精神)과 같은 국제도의론(國際道義論)으로 비판하면서 그 막강한 적을 향해 자기의 자주역량을 겨루어 보려 하였던 북벌사상(宋時烈 中心)은 그대로 민족의식과 역사의식이 하나로 결합되어 발휘된 조선조 중기 자주적 정치사상의 중요한 한 봉우리였다.
태조 이성계의 정치사상
편집太祖李成桂-政治思想
고려왕조를 끝맺고 조선을 개국시킨 내조의 행적에서 그 사상을 간추려 보면 (1) 유교 특히 정주학을 정치의 이념으로 하여 보다 강력한 전제왕국을 이룩한다. (2) 그러기 위해서는 불교를 억압하고, 정치에의 관여를 금한다. (3) 백성을 끝없는 내우외환(內憂外患)으로부터 구해내고 국가를 안보하기 위해서는 이웃 나라에 대하여 사대교린(事大交隣) 정책을 취한다. (4) 가능한 한 외척·환관·무인의 세력을 견제하고 왕권을 공고히 하기 위하여 문치(文治)정책을 우선시킨다. (5) 구세력을 일소하고 일대 혁신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제도·볍령·교육을 새로 정비해야 한다 등을 들 수 있다. 즉 그는 중국의 송태조(宋太祖)와 비슷한 상황 속에서 그와 유사한 구상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조선 민족주의의 전개
편집朝鮮民族主義-展開
사대주의가 정책으로 정립된 조선시대에 있어서도 민족자주의 사상은 간간이 나타나 그 명맥이 보전되었다. 조선전기에 나타난 민족주의의 명맥을 보면 다음과 같다. (1) 고려는 개국초부터 단군(檀君)·기자(箕子)에 대한 봉사(奉祀)를 평양에서 실시하였고 특히 태조 때의 조박(趙璞)은 단군을 '동방시수명지주(東方始受命之主)'라고 하였으며, 태종 때에는 하륜(河崙)의 건의에 따라 단군을 '우리 동방의 시조'라고하여 기자와 같은 사묘(祠廟)에 합사(合祀)하였다. (2) 태종 16년(1416)에 변계량(卞季良)은 사대주의자들의 제천(祭天) 반대를 반박하는 이유로 "우리나라는 단군이 시조이고, 그는 하늘에서 내려왔으니 우리나라는 결코 중국 천자가 분봉(分封)한 땅이 아니다"라고 주장하였다. (3) 세종은 단군의 사당을 기자(箕子)사당에서 독립해서 설치하였고, 여기에 동명왕(東明王)을 합사하였으며, 한글을 창제하여 문화적인 독립을 추진하였다. (4) 임진왜란 때 이순신(李舜臣)은 명의 제독(提督) 진린(陳璘)과 함계 작전하면서도 그를 설복시켜 간섭과 탈선을 견제하였다. (5) 효종은 호란(胡亂) 의 치욕을 씻고자 북벌(北伐)을 계획하였으나 일찍 죽음으로써 좌절되었다. (6)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에 각지에서 의병(義兵)이 일어나 적을 무찔렀고 이들의 무용담(武勇談)이 뒤에 민족주의적인 성격의 문학작품으로 나타났다. (7) 실학(實學) 운동이 일어나면서 일부 학자들은 주체적인 각성에 의해 민족사와 민족문화 연구에 몰두하였다.
조선의 사대주의 정책
편집朝鮮-事大主義政策
'사대(事大)'를 국시로 한 조선시대에 사대주의는 처음에 일부 정주학자들에 의하여 정립되었지만, 뒤에는 국책(國策)으로 설정되어 대륙세력의 변동이 있을 때나 국난을 당할 때마다 교조적(敎條的)인 광신(狂信)으로 강화되어 갔다. 이제 그 경과를 간단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태조는 개국 후에 혁명정권의 승인을 명에 호소하였고, 국호제정에도 결정권을 명태조에게 넘겼다. (2) 이후 역대 군왕은 명의 책봉을 받고, 그 연호를 따랐으며 주요대사를 그들에게 자문하였다. (3) 왕계변무(王係辨誣) 문제가 200년간 끌어서 해결되었다. (4) 임진왜란 당시 명의 원군(援軍)을 청할 때, 당황한 나머지 선조(宣祖)는 명나라 영토로의 내부(內附)까지 제안하였다. (4) 임진왜란 이후에 명(明)에 대한 사대모화(事大慕華)사상은 더욱 짙어져서 재조번방(再造藩邦)의 은(恩)으로 알았고, 명·청 교체 이후에도 배명(拜明)사상은 더욱 굳어졌다. (5) 국내정치에 있어 당쟁(黨爭)이 격화되면서 사대주의는 당론(黨論)의 명분으로도 나타났다. (6) 효종(孝宗)이 북벌(北伐)을 준비할 때 당쟁에서 밀려난 김자점(金自點) 등은 청(淸)에 왕이 북벌을 계획하고, 청의 연호를 쓰지 않았다고 밀고(密告)하여 국제 문제를 일으킨 적이 있다.
세종의 정치사상
편집世宗-政治思想
15세기의 성군(聖君)으로 이름 높은 세종의 치적(治績)을 종합해 보면 대략 다음 몇 가지의 사상적 특징을 찾아낼 수 있다. (1) 유교적 왕도정치(王道政治)의 구현을 목표로 하고 인(仁)·의(義)·예(禮)·지(智)와 중용지도(中庸之道)를 신념으로 하였다. (2) 민족국가, 민족문화의 실현을 사명으로 하여 우리나라의 고유한 전통을 탐구 보존케 하고 국문자(國文字)를 제정하였다. (3) 정치에 있어서 비합리적인 요소를 과감히 숙정(肅正)하고, 합리적인 제도·의례·가치의 체계를 확립하였다. (4) 창조정신과 주체적 탐구욕을 계발하여 민족문화의 황금시대를 이룩하였다. (5) 국경지대에 6진(六鎭)과 4군(四郡)을 설치하고, 대마도를 정벌하여 적극적인 국방정책(國防政策)을 확립하였다. (6) 종파적(宗派的)인 교설(敎說)이나 주장에 대하여 중립적인 태도를 견지하여 상호공존케 하고, 종교의 지말(枝末)적인 폐해는 단속하되 순수한 핵심은 오히려 보호하였다. (7) 인권존중을 위하여 남형(濫刑)·사형(私刑)·태형(笞刑)을 금하고, 사형죄에 대하여는 3심제(三審制)를 실시하였다. (8) 인사행정(人事行政)의 개선책으로 도천법(道薦法), 백관 윤대법(百官輪對法), 수령 임기제(守令任期制)를 실시하였다. 요컨대 그는 우리나라 역사상 보기 드문 성왕(聖王)이었고, 당시의 동양적인 풍토 속에서 가장 뛰어난 계몽군주(啓蒙君主)였다고 할 수 있다.
반정사상
편집反正思想
동양적인 혁명사상. 즉 '나쁜 임금을 폐하고 좋은 임금을 세운다'는 뜻의 반정(反正)은 혁명세력이 성공하였을 때 자기들의 처사를 합리화하는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유교의 왕도사상이 지배한 조선시대에는 유학자들 간에 이러한 사상이 나타나 '충성'과 모순되지 않는 의거(義擧)의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1506년에 폭군 연산군(燕山君)을 추방하고, 중종(中宗)을 옹립한 것을 중종반정(中宗反正)이라고 하고, 1623년에 광해군(光海君)을 폐하고, 인조(仁祖)를 옹립하니 인조반정(人祖反正)이라 하였다. 이 반정에 있어서는 바로 신하들이 주역이 되어 군왕을 폐립하였다는 것, 다음에 추대된 왕 역시 왕실 중의 1인으로 사직(社稷)은 그대로 보전된다는 것, 일단 폐위된 전왕(前王)은 군(君)으로 강봉(降封)되고, 왕호가 회복되지 않았다. 중종반정(中宗反正)에는 성희안(成希顔)·박원종(朴元宗) 등이, 인조반정에는 김유·이귀(李貴) 등이 주역이 되어 공신(功臣)의 칭호를 받았다.
지치주의
편집至治主義
조선 중종 대 조광조(趙光祖) 등 사림파(士林派) 유학자들의 정치사상. 유교의 사상과 이념을 정치·경제·교육 등 모든 분야에서 실제로 실현하여 요순(堯舜)시대와 같은 태평성세(太平盛世)를 이룩해 보겠다는 이상주의적, 급진주의적 정치사상으로 이를 지지한 사람들은 스스로 시국을 담당하여 치군택민(致君澤民)을 수행하기 위하여 성현을 본받아 인심을 바르게 하고, 선(善)을 좋아하고 악(惡)을 미워하며, 군자(君子)를 친하고 소인(小人)을 멀리하여, 군신상하가 지성(至誠)으로 합심함을 신조(信條)로 삼았다.
조광조
편집趙光祖 (1482-1519)
조선 중종 때의 학자·정치가. 유교에 입각한 '지치주의(至致主義)'라는 정치이념을 내세워 이상국(理想國)을 실현해 보려다가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좌절당하였다. 자는 효직(孝直), 호는 정암(靜庵). 14세 때 김굉필(金宏弼) 문하에서 성리학 연구에 힘써 사림파의 영수가 되었다. 중종 10년 과거에 급제하여 왕의 신임을 얻고, 입시(入侍)할 때마다 "도의를 숭상하고, 인심을 바로 잡으며, 성현을 본받아 지치(至致)를 일으킬 것" 등을 역설하였다. 그가 왕에게 충고한 말과 치적을 통해 그의 사상을 살펴보면, (1) 신하는 왕에게 직언(直言)해야 하고, 왕은 이것을 존중하여야 한다. (2) 정치가 잘 되려면 우선 왕의 마음이 바르게 되어 있어야 한다. (3) 정치의 대본은 유교 특히 성리학이니 이에 반하는 불교·도교·도참비기 등을 금해야 한다. (4) 정치를 잘 하려면 인재등용이 제일 중요하니 현량과(賢良科)를 두어 천거시취제(薦擧試取制)를 실시한다. (5) 도학(道學)을 일으키기 위해서 교육제도를 개혁하고, 가례(家禮)와 향약을 보급시킨다는 것 등이다. 이러한 그의 정치사상은 너무도 급진적이어서 보수적인 구세력의 반발을 사서 결국 실패하고 말았으나, 이후 조선 정치에 있어서 하나의 귀감(龜鑑)으로 추앙되었다.
이황의 정치사상
편집李滉-政治思想
조선 전기의 대학자 이황은 학문에만 전심하고 정치문제에 대하여는 별로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국왕에게 올린 수차의 상소(上疏)와 68세 때 선조(宣祖)께 올린 <무진6조소(戊辰六條疏)>, 동료 학자들과 교환한 서신 속에는 그의 정치적인 소신이 몇 가지 나타나 있으니 (1) 탐관오리(貪官汚吏)를 징계하는 것이 급선무이다. (2) 왜사(倭使)를 잘 다루어 후환이 없도록 하자. (3) 남북으로 환란이 곧 닥칠 터인데 아무런 대책도 없으니 걱정이다. (4)
국왕은 인·효(人孝)를 다하여 심신을 닦고 하늘의 뜻을 받들어야 한다. (5) 붕당의 폐해는 왕이 사람을 분별 못하고 정언(正言)과 간언(幹言)을 구분치 못하는 데서 시작된다. (6) 이것을 막기 위해서는 대소귀천(大小貴賤)을 막론하고 누구에게나 진언(進言)할 기회를 주고, 설사 진언한 내용이 법에 저촉된다 하여도 벌해서는 안 된다는 것 등이다.
이이의 정치사상
편집李珥-政治思想
조선 선조 때의 대학자 이이(李珥)는 이황과는 달리 작자의 철학사상을 현실 속에 구현하기 위하여 적극적으로 국정(國政)에 참여하였고, 국사(國事)에 임하여 정치문제에 접할 때마다 자기의 소신과 이론을 밝혀 <3책소(三策疏)> <동호문답(東湖問答)> <6책소(六策疏)> <만언소(萬言疏)> <6조방략(六條方略)> <시무6조(時務六條)> <시폐소(時弊疏)> 등의 저술을 남겼다. 이들을 통하여 그의 정치사상의 특징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정치> 정치에는 왕도(王道)와 패도(覇道)가 있는바, 성군(聖君)은 왕도를 따라 ① 정심(正心)으로 근본을 삼고, ② 현사(賢士)를 써 조정을 맑게 하며, ③ 백성을 편안하게 하여 나라의 근본을 공고하게 해야 한다. (2) <군왕(君王)> 군주로는 중국의 2제3왕(二帝三王)이 이상적인 군주이며, 나쁜 군주로는 욕심이 많아 자멸하는 폭군(暴君), 뜻은 있지만 간언(奸言)·간신(奸臣)에게 우롱당해 망하는 혼군(昏君), 우유부단한 용군(庸君)이 있으니, 임금이 재주가 뛰어나 호걸을 잘 거느리거나. 재주는 없어도 현자(賢者)를 잘 임용하면 좋은 군주가 될 수 있다. (3) <신하> 좋은 신하에는 ① 대신(大臣), ② 충신(忠臣), ③ 간신(幹臣)의 셋이 있으니, 대신이 있으면 태평성세가 되고, 충신이 있으면 망할 염려가 없으며, 간신에게 대임(大任)은 맡기지 못한다. (4) <언론(言論)> 언제 누구에게나 시폐(時弊)를 말할 자유를 주어 옳은 것이면 구악을 혁신하기를 주저해선 안 된다. (5) <양병(養兵)> 10년 내에 큰 환란이 있을 터이니 군사를 양성하여 서울에 2만, 각도에 1만씩을 주둔시키고 6개월마다 교대로 서울을 지키게 하되, 사변이 있을 때에는 그 10만을 합하여 나라를 지키도록 하라. (6) <국시(國是)> 민심의 동향이 공론(公論)으로 나타난 것이 국시(國是)이니 몇몇 개인이 유혹하고 위협하기 위해서 내세우는 그런 것이 아니다. (7) <민생(民生)> 백성은 먹는 것을 하늘로 삼으니, 먹을 것이 없으면 백성도 없어지고, 백성이 없으면 나라도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우선 백성들로 하여금 잘 먹을 수 있게 해야 한다. (8) <붕당(朋黨)> 동서(東西)로 갈리어 논쟁하나 어느 쪽은 모두 옳고, 어느 쪽은 모두 그를 수는 없다. 동·서로 갈리면 인재를 얻기 힘드니 당파를 초월해서 서로 아끼고 협력해야 한다. (9) <경장(更張)> 구폐(舊弊)를 혁신해야만 나라를 구할 수 있다. 그러나 조광조(趙光祖)처럼 졸속주의(拙速主義)를 취해서는 안 되고 점진적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이것들을 종합해 볼 때 이이는 그의 경륜(經綸)을 펼치는 데 실제로 성공하지는 못하였지만 그의 정치사상은 당시로서 탁월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임경업
편집林慶業 (1594-1646)
조선의 명장(名將). 자는 영백(英伯), 호는 고송(孤松). 무장(武將)으로 봉직(奉職) 중에 철저히 친명배청(親明排淸)하였다. 1618년에 무과(武科)에 급제, 1633년 청북 방어사(淸北防禦使)겸 영변부사(寧邊府使)로서 백마산성(白馬山城)·의주성(義州城)을 수축하고 명나라의 반도(叛徒) 공유덕(孔有德) 등의 반란을 토벌하여 명나라로부터 총병(總兵) 벼슬을 받았다.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백마산성에서 역전(力戰), 적의 진로를 차단하였다. 강화(講和)가 맺어진 후, 청(淸)은 명군(明軍)을 섬멸코자 출병을 강권(强勸)하니 1640년 임경업은 주사상장(舟師上將)에 발탁되어 조전(助戰)하게 되었다. 그러나 임경업은 백방(百方)으로 청(淸)의 계획을 저해(沮害)하기 위하여 명(明)에 밀사(密使)를 보내고, 명과의 교전(交戰)중에도 피해를 피차 최소한으로 줄이게 하고, 강화파였던 영의정 최명길(崔明吉)이 명(明)나라에 보내는 밀서(密書)를 전달하게 도왔다. 청나라가 이 사실을 탐지하고 최명길과 함께 임경업을 체포하여 심양(瀋陽)에 압송(押送)토록 했다. 임경업은 도중에 금교역(金郊驛)에서 임경업은 탈출하여 1643년 명나라에 해로(海路)로 망명했다. 명군의 총병(總兵)으로 청나라 공격에 나섰으나 포로가 되어 끝내 굴복치 않다가 조선에 압송된 후, 심기원(沈器遠)의 모반사건에 관련혐의로 김자점의 명을 받은 형리(刑吏)에 의하여 장살(杖殺)되었다. 1697년 복관(復官)되고 시호는 충민(忠愍)이다.
이수광
편집(1563-1628)
조선중기의 학자, 실학의 선구자. 자는 윤경(潤卿), 호는 지봉(芝峰). 선조18년 과거에 급제, 동왕 25년 임진왜란 때 황간(黃澗)전투에 참가했다. 부교리(副校理), 대사헌(大司憲), 명나라 파견 진위사(陳慰使), 예조참판(禮曹參判) 등을 지냈으나, 광해군 5년에 계축옥사(癸丑獄事)가 일어나 사직(辭職)하고 두문불출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도승지(都承旨)에 기용, 홍문관 제학 등을 거쳐 인조(仁祖)에게 만언소(萬言疏)를 올려 <시무책(時務策)>을 논하였다. 인조 5년 정묘호란을 겪고 이듬해 이조판서가 되었다. 그는 임진왜란을 전후해 수차 명나라에 왕래, 당시 명에 와 있던 마테오리치(Matteo Ricci)의 <천주실의(天主實義)> <중우론(重友論)> 및 유변, 심인기의 <속이담(續耳潭)>을 얻어와서 1614년 <지봉유설(芝峰類說)>을 간행, 우리나라 최초로 천주교와 서양문물을 소개하였다. 영의정에 추증, 시호를 문간(文間)이라고 하였다. 이밖의 저서로 <지봉집(芝峰集)>이 있다.
그는 양차 전란을 체험하고 위정자의 무능과 기존제도, 기존사상에 대한 회의를 가져 각 방면에 걸쳐 날카로운 비판을 전개한 바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실심(失心)으로 실정(實政)을 하고, 실공(實功)으로 실효(實效)를 얻고, 생각마다 실사(實事)를 생각하여 모두 실사(實事)이면 성취되지 않는 것이 없다. (2) 쇄국정책은 어리석은 것이니 폐지하고 외국과 통상의 문호를 개방해야 한다. (3) 기자·위만·한무제가 점령한 땅도 우리나라의 일부에 지나지 않고, 공손도(公孫度)가 점령한 곳은 요동지방이니 우리가 중국의 지배를 받은 적은 없으며 사대주의는 배격되어야 한다. (4) 임진왜란 때 조정의 당파싸움으로 무정부 상태였는데, 나라를 구한 것은 의병(義兵)과 국민의 애국심, 그리고 이순신(李舜臣)의 전공(戰功)이었다. (5) 화폐를 사용하면 재정은 풍족해질 것이고, 평소에 군량미를 저축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균전제(均田制)와 절용(節用)을 해야 한다. (6) 우리나라 유학자들이 하나의 학파, 즉 주자학에만 편중하여 맹목적으로 추종하니 이는 편협한 짓이다. 경서(經書) 강독에만 치우친 독경주의에 의한 인재등용은 많은 폐단을 가져온다. (7) 백성은 임금의 하늘이니, 그들을 속여선 안 된다. 임금이라도 인심을 못 얻으면 필부가 되고 만다. (8) 사·농·공·상(士農工商)이 각각 그 직업에 안착한 후에야 민심이 안정되고 국가가 안정된다. (9) 백성은 양육해야지 착취해서는 안 된다. (10) 문학은 특권층의 소일거리가 아니라 백성들의 생활적 요구를 반영해야 한다. (11) 사람들은 누구나 고유한 특성을 가지고 있는 만큼 그 본래의 특성을 지켜야 하며, 그 특성을 버리고 남을 흉내내면 도리어 해괴망측한 꼴이 된다. 요컨대 그는 정치·경제·사회·문학·과학 등 전 영역에 걸쳐 참으로 놀라운 혁명적인 사상을 전개한 대사상가였다.
芝峰類說 조선 중기의 실학자 이수광의 저서. 고서(古文)·고문(古聞)에서 고실(古實)·기사(奇事)·일문(逸聞) 등 3,435항목을 뽑아 부문별로 수록하고, 간간이 저자의 의견을 붙인 일종의 백과전서. 그는 이 책속에서 백성은 임금의 하늘이라는 민본사상(民本思想)을 전제하고, 당시의 정치·문화를 날카롭게 비판하면서 문호개방론, 사실주의 문학론, 주자학비판, 서양문물 소개 등을 기술하여 실학운동의 효시(嚆矢)가 되었다. 20권 10책 25부문으로 광해군 6년(1614)에 완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