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동양사상/한국의 사상/조선전기의 사상/조선전기의 사상〔槪說〕
여조(麗朝)가 붕괴하고 조선왕조가 성립되는 과정에서 사상적 전환의 현저한 계기를 이룬 것은 배불숭유운동(排佛崇儒運動)이었다. 신라시대에 융성하였던 불교는 고려에 계승되었으나 사상적으로는 점차 쇠퇴했다. 여말(麗末)에 이르러서는 구복적(求福的) 불사(佛事)와 전답재물의 공납이 성행하여 사원의 재력(財力)은 과도하게 비대해졌으며 이로 인한 국가재정의 궁핍과 전제(田制)의 문란은 내부로부터 새로운 이념과 개혁을 요구하게 되었다. 원래 고려 때에는 유(儒)·불(佛)·도(道) 3교가 교섭하여 갈등을 빚지 않았다. 당시의 유학은 사장(詞章)에는 능한 반면 경학(經學)에는 깊은 연구가 별로 없었다.(大抵以聲律爲尙 而於經學未甚工 視其文章 彷彿唐之餘弊云:<고려도경(高麗圖經>). 그러나 여말에 이르러 비로소 성균관의 유학자들을 중심으로 주자학이 수용되어 합리적이고 윤리적인 사상으로서 대두하여 새로운 학풍을 이루게 되었다. 여기서 여말 선초(麗鮮末初)의 배불숭유운동에는 이색(李穡)·정몽주(鄭蒙周)에 있어서와 같이 불교의 유폐(流弊)를 지적하고 인간생활의 상도(尙道)로서 유교를 높일 것을 주장하는 온건한 태도와 정도전(鄭道傳)의 <불씨잡변(佛氏雜辨)> <심기리편(心氣理篇)> <삼봉집>, 권근(權近)의 <주역천견록(周易淺見錄)>등에서와 같이 주자학적 입장에서 불교 교단(敎團)의 폐단 뿐만 아니라 교리 자체를 논리적으로 변척(辨斥)하는 태도를 볼 수 있다. 그리고 조선왕조는 건국과 더불어 친명정책(親明政策), 전제개혁 등 내외의 정치적·사회적 요구에 따라 구(舊)제도의 배경을 이루고 있던 불교를 배척하였고, 유교사상을 통치이념으로 받아들여 새로운 질서의 근거를 삼았다. 이 시대의 유학자들 가운데는 정몽주·길재 등 절의(節義)를 지켜 신왕조에 협력하지 않는 입장과 정도전·하륜(河崙)·권근 등 이태조(李太朝)를 도와, 국전(國典)의 제정과 기본정책의 결정을 통하여 유교사상을 조선왕조의 이념으로 확립시키는데 진력하는 입장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태조에서 태종(太宗)에 이르는 동안에는 유교사상에 입각한 시정(施政)으로 정치적 안정을 이루었고, 성종(成宗)시대에는 문물제도가 확립되고 유교사상이 서민에까지 보급됨으로써 조선왕조 5백년의 기반이 이루어졌다. 유교사상이 널리 보급되고 학문적인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 배경으로는 서적의 인쇄와 보급을 들 수 있다. 1403년에 계미자(癸未字)가 주조된 후 갑인자(甲寅字, 1434)·을해자(乙亥字, 1455)등 성종 때까지 수차에 걸쳐 동과 연(鉛)으로 활자를 개조하였다. 이리하여 유교경전과<삼국사기(三國史記)> <고려사(高麗史)> 등 사서(史書)와 언해(諺解)경서·일반 교과서 등 문(文)·사(史)·철(哲)에 관한 서적을 다량으로 인쇄하여 각 도에 광포(廣布)함으로써 교육과 학풍을 크게 진작시켰다. 세종(世宗)은 1420년에 집현전을 궁중에 설치하여 유학을 연마(硏磨)하게 하고 학자를 우대하여 조선전기의 유교사상이 학술적으로 심화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또한 세종은 훈민정음을 창제하여 민족문화에 획기적인 업적을 이루었던 것이다. 유교는 여말 이래 불교와 대립하였으며, 또한 조선 개국초기로부터는 도교를 억제하여 여대로부터 내려오던 도교적인 초례소(醮禮所)를 폐지하고 소격전(昭格殿)만을 남겼다. 이언적(李彦迪)의 <서망재망기당무극태극설(書忘齋忘機堂無極太極說)>은 성리학의 입장에서 도가사상을 비판하였으며, 중종(中宗) 때에는 조광조(趙光祖)의 진언(進言)으로 소격서(昭格署)가 폐지되었다. 조선의 유학은 불교배척에서 나아가 도교를 거척(去斥)하는 가운데 점차로 주자학적 정통성을 강화하여 갔던 것이다. 여말 이래 유학자 가운데 조선왕조에 협조하지 않고 절의를 지킨 길재(吉在)는 정몽주를 계승하여 산림속에서 교학(敎學)에 전념하였다. 의리학(義理學)의 학풍을 세운 이 사림(士林)의 후계자들은 도학의 의리정신을 내세워 관료정치인이나 사장학파(詞章學派)와 대립하게 되었다. 세조(世租)의 찬위(簒位) 이후 이를 지지한 훈구세력(勳舊勢力)에 대하여 단종(端宗)에 절의를 지킨 사육신·생육신을 비롯한 재야(在野)의 사림은 사상적인 대립세력을 형성하게 되었던 것이다. 성종(成宗) 이후 관계에 진출한 신진 사림은 훈구세력에 대하여 비판적 태도를 취하여 반목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김일손(金馹孫)의 사초(史草:金宗直의 <吊義帝文>를 기회로 훈구세력은 왕권을 빌어 사림을 제거하는 사화(士禍)를 일으켰다. 무오사화(戊午士禍)를 발단으로 한 갑자(甲子)·기묘(己卯)·을사(乙巳)의 4대사화는 수많은 사류(士類)의 희생을 빚었거니와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조광조(趙光祖) 등과 같은 인물들은 도학의 주류를 형성하였고 대부분이 문묘에 배향(配享)되었다. 4대사화 이후 사류(士類)에게는 정치를 통하여 유교의 이상을 실현하려는 것보다 산림에서 학문에 전념하는 풍조가 일어났으며, 이론적이고 사색적인 학풍이 초성되었으며 조선 성리학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그 가운데서도 이황(李滉)과 이이(李珥)는 조선유학의 쌍벽을 이루었으며 후세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이 시기에 들어온 양명학(陽明學)은 이단시되어 배척되었으며 공공연한 연구활동이 불가하였다. 조선의 성리학은 자연이나 우주의 문제보다 인간의 내면적 성정(性情)과 도덕적 가치의 문제를 추구한 것이 그 특징이다. 퇴계와 기대승(奇大升) 및 율곡과 성혼(成渾)의 4단 7정(四端七情)에 관한 논변을 통하여 이기성정론(理氣性情論)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또한 내면적 도덕원리인 인성론(人性論)은 송익필(宋翼弼)·김장생(金長生) 등에 의하여 유교의 행위규범인 예설(禮說)로 발전하였다. 선조 대에 들어와 정치적 불안과 거듭되는 병란(兵亂)으로 인하여 집권층 내부에는 점차 분열·대립의 현상이 심각하게 전개되었으며. 훈구와 사림의 대립뿐만 아니라 유교이념 및 정책상의 대립 등이 얽혀 당쟁(黨爭)이 치열하게 나타났다. 그러나 이러한 당쟁 속에서도 유교의 정통과 의리를 밝히려는 도학(道學)정신은 면면하게 계승되었다. 임진왜란이란 위기를 맞아 이순신(李舜臣)이 보인 충렬(忠烈)정신과 사림의 조헌(趙憲)이 승(僧) 영규(靈圭)와 합세하여 의병을 일으켜 순국한 7백 의사총(義士塚)의 충의(忠義)정신에서 그러한 것이 잘 타타난다. 이 정신은 호란 때의 김상헌(金尙憲) 등과 척화(斥和) 3학사(三學士)에 있어서나 후기 효종(孝宗) 때의 송시열(宋時烈) 등에 계승되어 한국사상사에 있어서 충절(忠節)과 자주의 의리정신으로 계승·발휘되었던 것이다. 불교는 세종 때에 선(禪)·교(敎) 양종으로 통합되고, 성종 때까지 무수한 사찰이 폐거(廢去)되며, 사전(寺田)과 노비가 몰수되는 등 유교정책의 강화와 더불어 침체되었던 것이다. 무학(無學)의 제자 득통(得通)은 불교의 자체 정화를 주창하였으며(<현정론(顯正論)>), 보우(普雨)가 문정왕후(文貞王后)의 비호를 받아 교세(敎勢) 만회를 도모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임란 때 승병(僧兵)을 일으켜 국위(國威)를 구하는데 참여한 서산대사(西山大師) 휴정(休靜)과 사명대사(泗溟大師) 유정(惟政)은 선·교 대립의 통일을 통한 불교의 중흥에 노력하였으며, 휴정의 <선가귀감(禪家龜鑑)>은 일본 불교의 임제종(臨濟宗) 성립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처럼 조선의 불교는 시대조류에 따라 잠세(潛勢)로 산간에서 수련을 하게 되었으나 도맥(道脈)은 끊이지 않고 전해 내려왔다. 조선 전기의 주류를 이룬 유교사상은 <경제 6전(經濟六典)>(太祖時), <경국대전(經國大典)>(世宗·成宗間) 등 치국(治國)의 기본법전을 제정하게 하였으며, 이 법전의 정신은 멀리 <주례(周禮)>의 6관(六官)제도와 가까이는 명률(明律)에 준거(準據)하였다. <대명률(大明律)>에 보이는 10악(惡) 중에서 불충죄(不忠罪:謀反·謨大逆 등)와 불효죄(不孝·不睦 등)가 가장 큰 죄악으로 중시(重視)되었으며, 이 충효사상은 개인윤리나 사회윤리에 있어서 핵심이 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