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동양사상/동양의 사상/동양의 고대 교육사상/춘추전국시대의 교육

춘추전국시대의 교육 편집

春秋戰國時代-敎育

춘추전국(B.C.722-222)시대에 이르러 중국 사회는 큰 변혁을 일으켰다. 주(周)나라 왕실이 쇠약해짐으로써 중앙집권체제는 무너지고, 각지에서 군웅(群雄)이 할거(割據)함으로써 사회는 극도의 혼란 속에 빠졌다. 인구의 증가, 민족의 대이동, 정전제도(井田制度)의 붕괴 등은 봉건체제(封建體制)를 파괴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제후(諸侯)들의 세력신장은 전쟁을 발발케 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따라서 전통문화는 지배력을 상실하고, 새로운 사상의 태동을 요구하는 환경이 조성되었다.

지식과 교육을 독점했던 귀족계급의 몰락은 사학의 발흥을 촉진하고 관학의 붕괴를 초래했고, 몰락한 귀족들은 민간에 흩어져 교육을 생업으로 삼았던 것이다. 또한 제후들은 자기 세력의 확대를 위해 유능한 지식인을 요구하였고, 이러한 요구는 사학의 발전을 자극하였다. 더욱이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추구하는 군웅(群雄)들에 의해 변방지역이 개척됨에 따라 한족(漢族)은 이민족(異民族)의 문화와 접촉하게 되고 새로운 경험을 축적하였다. 따라서 한문화권(漢文化圈)은 확대되고 사회의 의식수준이 높아졌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새로운 지식인들이 배출되어 당시 사회의 혼란을 타개하기 위해 자기들의 사상을 적극적으로 표현했다. 제자백가(諸子百家)는 이들 지식인의 대표자들이며, 유가(儒家)·도가(道家)·묵가(墨家)는 그중 가장 뛰어난 3대학파이다.

유가의 교육사상 편집

儒家-敎育思想

유가란 공자(孔子)를 대표로 하는 학파를 지칭하지만 공자 이전에도 유자(儒者)는 있었다. <설문(說文)>에 의하면 '유(儒)'는 '술사(術士)'를 일컫는다. '술사'란 6예(禮·樂·射·御·書·數)를 익히고 가르치는 선비들이다. 공자 이전에 유자의 지위는 그다지 높지 않았으나 공자와 그 제자들의 등장으로 당시의 사회에 대한 영향력이 크게 신장되었다. <한서 예문지(漢書藝文志)>에 의하면 유가는 사도(司徒)의 관리 출신들이다. 사도는 주나라 때 교육을 담당했었다. 유자(儒者)들이 교육을 생업으로 삼고, 유가(儒家)가 자기의 이상을 실현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으로 교육을 이용했음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것을 성(性)이라 하고, 성에 따르는 것을 도(道)라 하고, 도를 닦는 것을 교(敎)라고 한다(天命之謂性率性之謂道 修道之謂敎)"(<中庸>)는 말은 유가의 교육관을 표현한다. 유가는 인간 본성의 회복을 교(敎)라고 생각한다. <대학(大學)>에서도 "명덕(明德)을 밝히고, 인민을 사랑하며, 지선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大學之道 在明明德 在親民 在止於至善)"이라고 말하여 대학교육이 인간 본성의 천명으로부터 출발해야 함을 강조한다.

유가의 교육목적 편집

儒家-敎育目的

유가의 교육목적은 인간의 본성인 인(仁)을 밝혀 실천하는 데 있다. 인(仁)이란 "인간이 인간되는 원리(人之所以爲人之理)"(<孟子>盡心下 朱子註)로서 금수(禽獸)와 구별되는 인간만이 본래 가진 특성이다. <논어(論語)>는 '인'을 밝히고 실천하는 방법을 다양하게 토론하고 있는데, '인'이란 개념을 일의적(一義的)으로 해석하지 않고, 공자 자신도 "인한 사람(仁者)"으로 자처하기를 허용치 않을 정도로 이상시(理想視)하고 있다. 공자는 모든 사람이 '인'을 지향할 것을 요구하지만, 그 이상이 지나치게 추상적일까 두려워 그보다 구체적인 군자(君子)의 인격을 제시한다. 군자는 소인(小人)의 대립개념으로 춘추전국시대 이전에는 통치자를 지칭하였으나 <논어>에서는 훌륭한 인격의 소유자를 말한다. 군자와 소인은 지식의 습득이 많은가 적은가에 의해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인가 비도덕적인가에 따라 구별된다. "군자는 의에 밝고 소인은 이욕에 밝다(君子喩於義 小人喩於利)"(論語>顔淵)는 말은 공자가 도덕적 교육을 중시하였음을 표현하는 것이다. 유가는 인간을 도덕적으로 훈련하여 군자 또는 성인의 경지로 승화(昇華)시킬 것을 교육의 목적으로 삼고 있다.

유가의 교육재료 편집

儒家-敎育材料

유가의 교육재료는 6예(六藝)이다. 그러나 6예가 주나라 때의 '예(禮)·악(樂)·사(射)·어(御)·서(書)·수(數)'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주나라 때의 '예악'은 인격훈련을 위한 것이고, '사어'는 군사교육이며, '서수'는 실용생활교육이다. 그러나 공자에 이르러 6예는 6경(六經;詩·書·禮·樂·周易·春秋)을 의미하게 되었다. <시경(詩經)>은 가사(歌詞) 또는 문학교재이고, <서경(書經)>은 어학 및 심리학에 관한 교재이고, <악경(樂經)>은 음악·체육에 관한 교재이며, <주역(周易)>은 철학에 관한 교재이다. 그러나 공자가 6경만으로 제자들을 교육한 것은 아니었다. 주나라 때의 사어(射御)도 군사교육적 측면에서가 아니라 체력단련과 덕성훈련의 측면에서 강조되고 있다. 또한 공자가 강변에서, "흐르는 것은 이와 같구나! 주야를 가리지 않는다(逝者如斯夫 不舍書夜)"(<論語>)라고 말한 것은 때와 장소에 따라 그에 알맞는 교육을 실시하는 인재시교(因材施敎)의 정신을 표현한다.

유가의 교육방법 편집

儒家-敎育方法

유가 교육은 ① 인격감화, ② 계발식(啓發式), ③ 개성존중을 중시한다. "알려고 애쓰면서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 아니거든 열어주지 말 것이요, 말로 표현하려고 애쓰면서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이 아니거든 밝혀주지 말 것이며, 한 모퉁이를 들어 보이어서 나머지 세 모퉁이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되풀이해서 가르치지 않는다"(<논어> 述而篇)는 말은 현대교육학의 계발법과 상합(相合)한다. 유가는 덕행을 지식의 습득보다 중시하므로 인격 감화를 언교(言敎)보다 중시한다. "나는 말을 하지 않으려 한다(予欲無言)"(<論語 陽貨篇)는 말이나 "너희들은 내가 숨기고 너희들에게 말하지 않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나는 사실 숨긴 것이란 하나도 없다. 내가 한 일은 하나도 공개하지 않은 것이 없고, 너희들이 보고 들은 그대로가 곧 나이다(二三子者以我爲隱乎 吾無隱乎爾 吾無行而不與二三子者 是丘也)"(<論語> 述而篇)라고 한 것은 인격 감화를 중시하는 공자의 정신을 표현한다. 유가는 또한 개인의 성격과 환경에 따라 교육하는 인재시교(因材施敎)의 교육방법을 쓴다. 공자가 효(孝)에 대해 물은 제자들에 대해서 그 사람의 개성과 자질(資質)에 따라 각각 답변을 달리 한 것이나, 인(仁)에 대해서도 사람에 따라 다르게 해석해 준 것은 개성을 존중하는 교육방법을 쓴 때문이다.

공자의 교육사상 편집

孔子-敎育思想

공자(B.C. 551-479)의 이름은 구(丘)이고 자는 중니(仲尼)라고 하였다. 그는 노국(魯國) 사람으로 숙량흘(叔梁紇)의 아들이다. 그는 15세에 학문 탐구에 뜻을 두고 배울 점이 있는 사람이라면 귀천을 가리지 않고 찾아가 배움을 청하였다. 이처럼 노력 정진한 결과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기 시작하였고, 점차 나이가 들면서 많은 제자들이 그에게 배움을 청하였다. 공자는 실천적인 교육가인 동시에 정치가이다. 그는 교육자생활 이외에 노국의 사공(司空)과 사구(司寇)라는 벼슬을 지낸 일도 있다. 그러나 뒷날 그의 정치적 이상이 실현되지 않게 되어 B.C. 497년 노나라를 떠나 위(衛)나라로 갔고, 이로부터 13년 동안 열국(列國)를 주유하였으나, 끝내 이상을 실현하지 못하고 노나라에 돌아와 교육에 종사하였다. 그가 일생 동안 얻은 제자는 3천여 명이나 되며, 6예(六藝)에 정통한 제자는 72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공자의 학설과 언행은 그의 제자들이 지은 <논어(論語)>에 기록되어 있다. 공자는 당시 사회의 혼란을 극복하기 위해 무엇보다 교육을 중시하였고, "배우는 일에 싫증내는 일 없고, 가르치는 일에 피곤할 줄 모르는(學而不厭 誨人不倦)"(<論語> 述而篇) 교육자였다. 공자는 도덕교육을 가장 중요시하였다. "공자는 문·행·충·신 4가지로써 교육한다(子以四敎 文行忠信)"(<論語> 述而篇)는 말 중 문(文)을 제외하면 모두 덕성에 관한 것이다. '문'은 시·서·예·악(詩書禮樂)등 전적(典籍)을 가르치고, '행'은 역행(力行)을 말하며, 또 '충'과 '신'은 품성의 훈련에 속한다. 공자는 지식·행위·품성의 3가지를 중시하지만, 그 중에도 품성의 훈련을 근본으로 본다. "실천하고 남은 힘이 있으면 문을 배운다(行有餘力 則以學文)"(<論語> 學而篇)는 말은 공자가 지식의 습득보다 실천을 중시함을 표현한다. 그의 교육사상은 인(仁)의 자각과 실천이라는 도덕철학과 밀접하게 관련돼 있으며, 군자·성인과 같은 완전 인격의 소유자를 양성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맹자의 교육사상 편집

孟子-敎育思想

맹자(B.C.372-289)의 이름은 가(軻)이고 자는 자여(子輿)로서, 전국시대 추(鄒)라는 곳에서 태어났다. 그는 공자의 학설을 계승하여 더욱 발전시켰다. 그의 교육사상은 성선설(性善說)에 근거하고 있다. 성선설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의 마음에 인·의·예·지(仁義禮智)라는 선단(善端)이 있다고 보는 견해이다. 그러므로 그의 교육목적은 인간의 본성을 확충하여 요순(堯舜)과 같은 성인이 되는 데 있었다. 교육목적·교재 등은 공자의 견해에 따르고 있으나, 교육방법에 있어서는 ① 능동교육, ② 양성(養性), ③ 변론식 교수법등을 강조한다. 그는 인간에게는 누구나 선단(善端)이 있다고 믿으며, 교육은 마땅히 개개인의 자연본성에 따라 개개인의 자연본성에 따라 베풀어서, 점차 바른 궤도로 향하도록 하여야 하며, 강제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는 "적시에 내린 비가 만물을 촉촉히 적시면 만물이 저절로 무럭무럭 자라듯 해야 한다(如時雨化之者)"(<孟子> 盡心篇)고 말한다. 능동적 교육이란 이처럼 피교육자의 자발성을 계발시키는 것을 말한다. 맹자는 또한 성선설에 근거하여 '존선거악(存善去惡)'을 주장했다. 존선거악은 대체(大體)인 인간의 본성에 따라서, 소체(小體)인 후천적 욕망을 버리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그는 욕망을 버리는 훈련을 쌓음으로써 본성을 함양할 수 있다고 믿었으며, 이것이 곧 양성(養性)이라는 것이다. 맹자는 또한 남들과 토론하기를 좋아하고, 그의 교수법은 변론식 방법이 주가 되었다.

순자의 교육사상 편집

筍子-敎育思想

순자(B.C.298-238)의 이름은 황(況)이고 자는 경(卿)이며, 전국시대 조(趙)나라의 사람이다. 그의 교육 사상 중 목적·교재 등은 공자·맹자와 대동소이하나, 인성(人性)은 악하다고 보고 인간 기질의 변화를 강조했다. 또한 그는 제천(制天)과 인위(人爲)를 강조하고 적선(積善)을 주장했다. 즉 적선공부(積善工夫)에 노력함으로써 요순과 같은 성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인성이 악하다고 보고, 양지양능(良知良能)과 같은 맹자의 주장을 반대했다. 그래서 그는 인성의 선악이 환경의 양렬(良劣)에 크게 좌우된다고 믿고 환경을 매우 중시했다.

묵자의 교육사상 편집

墨子-敎育思想

묵자(B.C. 479-381)의 이름은 적(翟)이고, 춘추시대 노(魯)나라 사람으로, 묵가(墨家)의 대표자이다. 그의 생몰 연대는 미상이나 대략 공자와 같은 시대로 알려져 있다. 묵자는 중국 고대의 실용주의자로서, 사실에 대해 아무런 도움이 없는 추상적 지식을 반대한다. 눈으로 볼 수 있고, 귀로 들을 수 있으며, 사실에 부합하는 것만을 지식으로 보며, 모든 사람이 보고 들을 수 있어야만 그 진실성을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인의도덕도 실제행위에 적합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무익한 것이라고 말한다. 어떻게 해야 실제행위에 부합하는지를 알 수 있는가에 대해 그는 3표법(三表法)을 제시한다. '3표법'이란 이론의 진위판단을 ① 본지자(本之者), ② 원지자(原之者), ③ 용지자(用之者)의 3표준에 의거하는 것이다. '본지자'는 천지(天志)와 선왕의 행적에 의한 입론(立論)이고, '원지자'는 선왕의 서적과 백성의 관찰에 의해 검증하는 입론이며, '용지자'는 그 이론이 인민의 이익에 얼마나 도움이 되었는가에 따라 검증하는 것이다. 묵자에 있어 천지(天志)와 선왕의 행적은 인민의 이익과 관련되어 있다.

따라서 그의 '3표법'은 인민의 이익에 부합되는가를 실증적으로 검토하는 것이다. 실증은 귀와 눈으로 듣고 보는 것, 즉 관찰에 의해 입증하는 것이다. "비용을 증가하여 외관을 아름답게 하지만, 인민에 대해 실제로 아무런 이익도 보탬도 없는 일은 성왕이 하는 짓이 아니다"(<墨子> 節用 中)는 말이나 "인한 사람은 천하인의 이익을 증진하고, 천하인을 해롭게 하는 것을 제거토록 행위한다(仁之事者 務求興天下之利 除天下之害)"(<非樂上>)는 말은 묵자가 공리주의자(功利主義者)임을 표현한다.

그는 대중의 이익에 부합하는 것은 반드시 실시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래서 그는 환경의 요구에 적합한 지식이 진지(眞知)라고 주장하고, 대중의 이익에 부합되는 행위는 옳은 것이며, 마땅히 그러한 것을 실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실천과 실용, 그리고 역행(力行)을 중시하는 교육가라고 할 수 있다.

묵자의 교재 편집

墨者-敎材

묵자는 주대의 6예(禮·樂·射·御 ·書·數)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에 있었다. 그는 '사어(射御)'는 일종의 직업에 속하는 것이므로 학문으로부터 분리시켜야 한다고 주장하고, 그것을 전쟁의 목적으로서가 아니라 신체를 단련하고 품행을 도야하는 데 사용하는 것은 찬성했다. <예악(禮樂)>에 있어서는 유가의 번례(繁禮)의 폐해를 통박하지만, 덕행을 닦는 교재로 삼는 것은 반대하지 않는다. '서수(書數)'는 일종의 기하학·물리학으로 발전되어, 제자들을 가르치는 중요한 교재가 된 것 같다. <묵경(墨經)>은 이러한 기하학·물리학에 관한 많은 서술을 하고 있다. 그 밖에 묵자는 <시경>과 <서경> <열국춘추> 등을 교재로 사용하였다.

도가의 교육사상 편집

道家-敎育思想

도가란 노자(老子)와 장자(莊子)를 대표로 하는 학파를 말한다. 유가와 묵가의 노국(魯國)을 중심으로 한 북방계 지식인들인 데 반하여, 도가는 초(楚)나라를 중심으로 한 남방계 지식인들이었다. 상(商)나라 시대에는 초나라가 당시 문화의 중심지였으나, 호경(鎬京)이 융인(戎人)들에 의해 함락됨으로써 한문화(漢文化)의 중심지는 동북지방의 노나라로 옮겨졌다.

따라서 초인(楚人)들은 춘추시대에 이르러 문화의 중심권에서 탈락하고 초지(楚地)는 군웅(群雄)의 전쟁터로 변했다. 고도의 문화의식을 가진 초인들은 전쟁의 참화를 목격하고, 현실에 대한 부정적인 관념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유가와 묵가가 적극적으로 사회의 개선에 노력한 데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고, 철저한 자기 개조에 의한 달관적(達觀的)인 인생관을 갖는다. 따라서 도가는 환경 개조보다 개인의 개조를 더욱 중시하고, 타인을 교육하는 것보다 자기 인격의 완성에 주력했다.

노자의 교육사상 편집

老子-敎育思想

노자의 생존 연대는 미상이나, 그의 저서 <노자도덕경(老子道德經)>에 의해 그의 사상을 엿볼 수 있다. 노자는 우주의 본체를 도(道)라 하고, 도가 분화되어 사물에 내재(內在)한 것을 덕(德)이라 한다. 인간은 '도'로부터 주어졌고, '도' 속에서 살며, '도'로 회귀한다고 한다. 인간에 내재한 것은 덕이고, 이러한 덕을 체득하여 함께 사는 것을 '동어덕(同於德)'이라 한다. 노자에 있어 도는 덕(德)의 체(體)이고, 덕은 도의 용(用)이므로 '동어덕'은 곧 '동어도(同於道)'이다. 노자는 인간에게 주어진 덕을 체득하여 도와 함게 사는 것을 구학(求學)의 목적으로 삼는다.

노자는 도를 체득하려는 공부를 위도(爲道)라 하고, 지식을 추구하는 것을 위학(爲學)이라 한다. '위학'은 외계사물(外界事物)에 대한 지식을 말하고, '위도'는 자기의 본성을 깨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그는 "위학은 끊임없이 지식을 축적하는 것이고, 위도는 끊임없이 욕망과 사려를 제거하는 것(爲學日益 爲道日損)"(<老子> 48章)이라고 말했다.

그는 지식과 욕망을 제거하여 무(無)의 경지에 이를 때 밝은 지혜가 드러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는 지식의 추구보다 본성을 깨치는 예지(叡智)를 중시하며,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시시각각 '치허(致虛)' '수정(守靜)'의 수양공부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자의 교육사상 편집

莊子-敎育思想

장자(B.C.369-286)의 이름은 주(周)이고, 전국(戰國)중엽의 초나라 사람이다. 그는 노자사상을 계승·발전시켜 <장자(莊子)> 33편을 남겼다. 장자는 유학(儒學)이나 묵학(墨學)으로는 당시의 사상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고 비판하고, '내성외왕(內聖外王)'의 도술(道術)을 표방했다. '내성'은 자기 인격의 완성을 말하고 '외왕'은 타인을 감화(感化)시키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도술을 체득하여 실천하는 이를 천인(天人) 또는 성인(聖人)이라 한다. 장자에 있어 교육의 목적은 이러한 인격을 창조하는 데 있다.

장자는 노자의 위도(爲道)사상을 발전시켜 지식의 추구를 외치(外馳)로 보고, 외치하면 할수록 본성을 깨치는 길과는 멀어진다고 보았다. 본성은 향외추구(向外追求)로서가 아니라 향내추구(向內追求)로서만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향내추구를 '본래의 세계로의 회귀(復其初)'라 하며, 그 방법으로 심재(心齋)·좌망(坐忘) 등의 수양공부를 제시한다. 이러한 수양공부는 선학(禪學)의 '불립문자직지인심(不立文字直指人心)'과 같은 돈오(頓悟)를 거쳐 완성되며, 그러한 경지에서 주객합일(主客合一)의 경지를 체험한다고 하였다.

장자는 자기 인격의 완성을 추구하는 방법에 관하여는 적극적인 진술을 하고 있으나, 타인을 감화시키는 측면은 소극적으로 다루었다. 따라서 그의 교육사상은 시교(施敎)의 방법을 소홀히 취급하고 구도(求道)의 측면을 강조한다.

한비자의 교육사상 편집

韓非子-敎育思想

한비자는 한국의 공자(公子)로서 기원전 3세기 사람이다. 그는 이사(李斯)와 함께 순자(荀子)에게 수학하였으며, '형명법술(刑名法術)'의 학문을 좋아한 법가(法家)의 대표자이다. 진시황(秦始皇)은 한비자의 저서를 읽고 감탄한 나머지, 병력으로 한나라를 공격하여 그를 내놓게 하였다. 진시황은 그를 크게 등용하려 했으나 이사가 모함하여 옥중에서 죽었다. 한비자는 교육의 목적이 인민의 준법정신을 기르는 데 있다고 주장했다. 교육의 방법 역시 엄격한 법으로 학생을 훈련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계발식(啓發式) 교육을 찬성하지 않았다. 그는 또한 지식이 실용과 시의(時宜)에 부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유가의 인의(仁義)는 지나치게 추상적이라고 반대했다. 그는 농업과 병법에 관한 교육을 강조하는데, 이것은 법가(法家)의 실리주의사상의 출발점이 된다.

<李 康 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