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금융·경영/종합경영의 기초지식/경영형태의 발전/한국의 전통적 경영형태
한국의 전통적 경영형태
편집韓國-傳統的經營形態
한국의 전통적인 경영형태는 역사적으로 보면 1900년대를 기점으로 하여 그 이전, 즉 구한말(舊韓末)까지의 상업 경영형태를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보부상(褓負商)제도·객주(客主)제도·공장(工匠)·도고(都庫)·개성상인 등을 중심으로 한 전근대적 경영형태를 들 수 있다.
보부상
편집褓負商
보부상이란 봇짐장수(褓商)와 등짐장수(負商)를 말한다. 이들은 모두 행상인이란 뜻으로서, 전자는 포목·관구(冠具)·유기(鍮器)·연죽(烟竹)·갓·붓·먹 등의 물품을, 후자는 목기(木器)·담배·건어(乾魚)·소금 등의 물품을 취급, 대(隊)를 이루어 각지의 개시일(開市日)에 따라 소매행위를 하는 일종의 순회상인(巡廻商人)이다.
보부상은 조선 초기에 태조 이성계(太祖 李成桂)가 8도에 임방(任房:보부상 집회소)을 설치, 보부상 단체 조직을 허락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하나, 그 이전에도 보부상은 존재하였고, 조선조에 이르러 위정당국의 보호를 받게 된 것으로 보인다.
보부상단(褓負商團)은 병자호란(丙子胡亂)·임진왜란 때에는 운반으로써, 1866년 프랑스함대의 침입시에는 통신으로 공을 세웠고, 그 후에 보부청(褓負廳)을 설치, 전국적인 체계를 확립하게 되었는데, 이처럼 조직이 크게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① 이들의 업무가 서민생활과 민첩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점, ② 단결이 잘 되었다는 데 있다. 즉, 보부상의 상행위는 필수품을 취급했기 때문에 민중생활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었고, 그들의 조직은 서구의 길드(guild)처럼 일종의 불문율(不文律)이 있어 거래행위에 있어 이것이 철저히 지켜졌고, 단원간에 정신적 결탁이 맺어져 상부상조했던 것이다. 더욱이 이들은 시장관리(市場管理), 시장세(市場稅) 징수의 특권마저 지니고 있어 보부상단은 유통기관으로서 독점적 위치를 차지했고, 당시의 유통경제를 지배했다.
보부상대의 조직은 중앙기관으로 보부청(뒤에 惠商局·商工局·商務社)이 설치되어 있고, 여기에서 전국에 산재한 부부상들을 관할·지도했다. 이는 근대적 상업자본의 형성과 함께 몰락하게 된 우리나라 전통적 상인조직이라 하겠다.
객주제도
편집客主制度
객주제도란 14세기 중엽 영국의 양모업(羊毛業) 부문에서 발달됐던 푸팅 아웃 시스템(putting out system:先貸制度)과 같은 형태로서 조선시대에 발달된 우리나라의 중요한 상업·금융기관의 하나이다. 이것은 생산자로부터 소비자에게 이르는 상품의 유통과정이 복잡해짐에 따라, 즉 상품시장의 확대수요량측정이 곤란해짐에 따라 발생하는 일종의 중개업(仲介業)이라 하겠다.
객주(客主)의 업무는 상품의 매매가 주가 되지만, 창고업·위탁판매업·운수업의 업무를 비롯하여 오늘날의 은행 업무와 비슷한 일도 하였고, 하주(荷主)에 대한 숙박업도 겸하였다. 다시 말해서 객주는 생산자나 상인들의 화물을 받아들이고, 그들의 위탁에 따라 매매를 알선, 그 구전(口錢)을 받았으며, 화물 위탁자나 이것을 살 사람에게 화물을 담보로 대금(代金)의 체당(替當)이나 자금융통을 해주었다. 이때 토지·가옥 등의 부동산을 담보로 하는 경우도 없지 않았으나 신용대부(信用貸付)가 일반적이었다.
객주제도의 특색은 화물거래·대금체당(替當)·자금융통 등을 할 경우 어음을 발행하거나 인수하고, 이것으로써 원격지간(遠隔地間)의 재화·금전의 결재를 대행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객주의 환표(換票)의 사용은 교통이 불편했던 당시의 사정을 고려할 때 여각(旅閣)이나 지방 상인들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 밖에도 하주의 자금 또는 왕실·양반 등을 위하여 예금을 취급한 객주는 이와 같은 업무를 통하여 거대한 상업자본의 축적이 가능하였는데, 조선 말기(1876년 강화조약 체결 이후)에는 외국무역을 담당, 외국상인과 교섭을 벌여 외국상품의 판매에 중개역할을 하였다.
또한 외국상품의 유입(流入)에 따라 객주들은 객주회(客主會 또는 傳物會)를 조직, 서양의 길드(guild)적 동업조합으로서의 기능을 발휘하기도 했는데, 인천과 부산에 25개의 객주를 설치(1890년), 화물의 도매업과 창고보관업·운수업 등을 맡아보다가 1930년대에 이르러 없어졌다.
독일에서 발달한 페를라크 시스템(Verlages system), 프랑스의 객주업(commandite industrielle)과 비슷하다.
공장
편집工匠
고려시대의 공장
편집高麗時代-工匠
본래 수공업에 종사하던 공인(工人 또는 匠人)은 고려·조선조에 수공업자로 전환하게 되었는데, 고려시대에는 세습제로서 정부직영하에 각종 수공업장(手工業場)이 설치되어, 여기서 정부 감독하에 각종 물품을 제작, 국가의 수요를 충당했다. 이 관영공장(官營工匠)을 지휘·감독하는 관서로는 ① 토목·건축을 담당하는 선공장(繕工匠), ② 각종 병기(兵器) 제작을 담당하는 병기시(兵器寺), ③ 각종 장신구의 제작을 관리하는 공조서(供造署), ④ 금은 세공품 제작을 관리하는 장야서(掌冶暑), ⑤ 세공 잡품(雜品)의 제작을 담당하는 도교서(都校暑), ⑥ 각종 염료(染料)의 제조와 염색작업을 담당하는 도렴서(都染署), ⑦ 직물 제조를 담당하는 잡직서(雜織署), ⑧ 궁정의 특수견직물 수요를 담당하는 액정국(掖庭局), ⑨ 왕실 어용(御用)의 거마를 장리(掌理), 각종 마구(馬具)·차바퀴 제조를 담당하는 봉거서(奉車署) 등이 있었다.
위의 각 관서에는 관인이 배치되어 국가의 수요에 따라 물품을 제작케 했는데, 물품제작을 맡는 장인들의 기술적 지도체제로서 지유승지(指諭承旨)·행수대장(行首大匠) 등의 계층이 있어 물품제작의 기술면을 지휘·감독하였다.
이러한 조직은 제작되는 물품의 종류에 따라 조직되던 신라시대의 조직과는 달리 국가의 용도에 따라 분류되었으며, 노동급부조직(勞動給付組織)에 있어서도 노예적 노동급부에 의존하던 신라시대와는 달라 고려시대 장인의 노동 급부는 임노동적(賃勞動的) 성격을 띠었다.
조선시대의 공장
편집朝鮮時代-工匠
조선조의 공장은 관영(官營) 공업의 범주에 속하여 경공장(京工匠:중앙)과 외공장(外工匠:지방)을 설치, 예속된 장인을 중심으로 편성되었으며, 중앙과 지방 관부(官府)의 공업적 수요를 충당하였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의하면, 공장을 보유하는 중앙의 관아(官衙)로는 공조(工曹)·봉상시(奉常寺)를 비롯하여 30여 개의 관사가 있었으며, 모두 작업을 할 수 있는 수공업장을 가지고 있었다(129種 2,841人). 이에 대하여 각 도·부(府)·읍에 소속된 외공장(外工匠)은 경기 153, 충청 564, 경상 1,129, 전라 775, 강원 225, 황해 221, 영안(永安:지금의 함경남북도 지방) 180, 평안 214로서 장인은 모두 3,361명이었으며, 종별은 약 27종이었다. 외공장에서 제작하는 수공품의 종류가 적었던 것은 경공장에 제공되는 원료품·반제품 외에는 지방 관아 및 일반 민수(民需)에 꼭 필요한 것만 제작해야 한다는 제약이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조에서 고려시대와는 달리 관영공업에 소속된 장인은 원칙적으로 노예적 노동급부를 담당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관영공업의 책임을 완수하면 이른바 자기경영(自己經營)에 종사할 수 있었다. 즉, 공역(公役)의 의무를 담당하는 외에 자기경영을 하는 대신 이에 대해서 국가는 공장세(工匠稅)를 징수함으로써 장인은 자유로운 독립수공업자로서 생산분야를 담당할 수 있게 된 것이며 이것은 노동급부양식의 퇴조현상을 의미한다.
그러나 조선조 중기에 이르면 대부분의 장인은 자기경영에 종사, 국가의 공업적 수요는 장인세·시장교환에 의존하게 되는데, 이에 따라 장인의 생산·판매는 독점적 경향마저 띠게 되었다.
개성상인
편집開城商人
송도상인(松都商人) 또는 송방(松房)이라고도 하는데, 객주(客主)·도상(都商)·거간(居間)·산상(散商:小賣商에 해당함)·장꾼(場軍) 등이 있으며, 상업 사용인으로서는 수사환(首使喚)·사환·차인(差人) 등이 있다.
고려조의 수도였던 개성은 조선조 초기의 천도(遷都)와 함께 종래의 시장거래 및 상설점포(常設店鋪)의 영업은 갑자기 쇠미해졌고, 더욱이 개성출신이라 하여 조정의 외면을 당하게 되자 상업으로서의 입신을 강구, 행상(行商)을 시작한 데서 개성상인이 대두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들의 경제지식 및 상업거래상의 활동은 대단하여 마침내는 상권(商權)의 전국지배까지 발전하였다.
개성상인의 특징은 선천적 근면성과 예민성 그리고 성실성과 단결성을 들 수 있다. 이들의 조직은 상인 밑에 수사환(首使喚)·사환·차인(差人)으로 되어 있으며, 도제(徒弟)에 해당하는 사환은 품성과 환경에 대해 유력한 인사의 보증을 필요로 하였다. 사환은 수습기간(대체로 5년 정도)에는 무보수로 봉사하면서 상거래를 배우며, 이것이 끝나면 수사환이 되어 상인, 즉 고용자로부터 거의 무이자(無利子)로 소자본의 융자를 받아 상인으로서 독립, 지방행상으로 출발하여 자본을 축적, 완전한 상인이 된다. 이렇게 해서 개성상인 상호간의 유기적인 관계가 이루어지고, 이것은 그들 특유한 장부조직과 함께 상권 지배의 원동력이 되었다.
개성상인의 장부조직
편집開城商人-帳簿組織
조선조의 가장 강력한 상인으로 등장한 개성상인은 그들 특유의 부기법을 사용하였는데, 이를 개성부기 또는 4괘송도치부(四罫松都治簿)라 한다. 개성부기는 그 체계가 단순한 것도 있으나, 장부조직이 비교적 분화되어 초일기·봉차록(捧次錄)·봉차장책(捧次帳冊)·시재책(時在冊)·각 인물출입기(各人物出入記) 등을 갖추고 있는 것도 있다.
개성부기의 기원에 대해서는 역사적 확증은 없으나 당시의 여러 가지 사정으로 보아 서구의 복식부기 기원보다 오래 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복식부기의 발달은 동서(東西)에 있어 행상·교역 및 원격지거래에 따른 출장자(出張者)·대리자의 회계처리, 출자자와 영업주(營業主)가 분리된 경우 등에 나타난 것인데, 개성상인은 이른바 행상·객주·도상(都商) 등이 그 중심이 되었던 것이다. 4괘송도치부(四罫松都治簿)는 개성부기 가운데 가장 발달된 것으로 이것을 가리켜 개성부기라고도 한다.
개성부기의 중심구상으로서의 4괘(四罫)는 ① 봉차(捧次) 는 다른 곳에서 가져오는 뜻이며, 기장(記帳)에 있어서는 '方'이라는 문자로 사용된다. ② 환상(還上)은 다시 들어오는 뜻, ③ 급차(給次)는 준 사람의 뜻으로, '入'이라는 문자로 표시되며, ④ 환급(還給)은 불출(拂出), 즉 서양부기의 차변(借邊)과 대변(貸邊)의 뜻이 되는데, 이들 표시는 각기 별개의 일기장을 갖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