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금융·경영/부문관리의 이론과 실제/독일의 경영학/과학적 사경제학과 사경제적 기술론
과학적 사경제학
편집科學的私經濟學
사경제학의 과학화에의 길은 바이어만과 쇠니츠에 의하여 개척되었다. 그의 저서 『과학적 사경제학의 기초와 체계화』(Grundlegung und Systematik einer wissenschaftlichen Privatwirtschaftslehre)를 통하여 이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의 과학적 사경제학의 구상은 분명히 의지구조설에 뒷받침되고 있다. 하나의 학문이 독자성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경험대상이 인간의 사고에 의하여 인식되고 가공됨으로써 통일적인 인식체계를 갖출 수 있기 때문이다. 동일한 경험대상은 그것을 포착하는 인식목적이 달라짐으로써 여러 가지 다른 학문의 대상이 된다.
인식목적은 인간의 사고에 의하여 구성되는 것이지만, 이 구성된 개념을 매개로 하여 경험대상을 인식할 때 각각의 학문 고유의 인식대상이 얻어진다. 그들은 합리적인 목적의식을 지닌 방법론적 가설로서의 '경제인(經濟人)'을 경제주체로서 전제하고, 개인주의적인 사회관 위에 체계를 세운 고전파 이론을 높이 평가하고, 이에 의지해서 과학적 사경제학에 고유의 인식목적을 구성하고 있다. '경제인'은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사적 행위를 하는 경제주체로서 현실에 구체화될 수 있다. 이 경제주체가 영리경제이며 영리경제가 행하는 사적 행위, 즉 일정한 수익을 획득하는 활동이 과학적 사경제학의 인식목적이다.
이러한 사적행위의 성과는 자본가적 기업가의 주관적 표현인 수익성(收益性:Rentabilitat) ― 선택의 원리 ― 에 의해서 판단된다. 이리하여 사경제학은 수익성의 개념을 그의 고유한 기본개념으로 한 조립된 경제학이며, 인식을 자기 목적으로 하는 이론과학이다. 그들은 상업학자들에 의해서 주장된 기술론(technische Lehre)을 외부로부터 주어진 개별기업의 수익성의 증가를 달성하기 위한 온갖 가능한 경제적 처리와 책략(策略)의 기술적인 학문에 불과하며 비과학적이라고 비판한다. 또한 기술론 선택에 평가(Werten)를 가하여 실천에 역점을 두는 것은 과학이 아니며, 인식을 자기목적으로 하는 존재의 논리, 즉 순수과학을 주장하고 있다.
사경제적 기술론
편집私經濟的 技術論
상술한 바와 같은 비판은 특히 슈말렌바흐를 향한 것이었다. 루도비치·로이크스 등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는 슈말렌바흐는 유명한 논문 「기술론으로서의 사경제학」(Die Privatwirtschaftslehre als Kunstlehre)에서 즉각 이것에 대하여 반론을 제기하여, 독일 경영학사상 최초의 방법논쟁이 벌어졌다. 사경제학의 중심적 과제는 경제적 가치를 최소한도로 하고, 어떻게 하면 최대의 경제적 성과를 올릴 수가 있는가라는 이른바 경제원칙을 객관적으로 정확하게 인식하는 데에 있다. 그것은 이윤목적에 대한 수단의 연구로 좁혀지는 것이지만, 이러한 기술론이 단지 기업가에 대해서 주어지는 처방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다. '평가한다'는 것으로서 과학과 기술론을 구별하는 것은 피상적이며, 어떠한 연구방법이 보다 큰 성과를 가져오는가가 이 문제를 판정하는 데 열쇠가 된다.
사경제적 기술론의 결정적인 이점은 실천을 통해서 그 명제의 옳음을 확증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 그리고 기술론이 활동적으로, 또 보다 목적의식적으로 연구되며, 이에 뜻을 둔 연구자의 대부분은 실천가이므로 사경제적 과학이 처리할 수 없는 자료를 발굴한다는 점에서 그 우월성이 강조되고 있다. 그러나 슈말렌바흐는 사경제적 과학을 부정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존재의 인식을 높이 평가하고 있기까지 한다. 그의 경우에 문제는 이들 학문의 유효성에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슈말렌바흐의 견해에는 셰어가 찬성하며, 제1기의 연구를 형성했던 당시의 니클리슈나 슈미트는 바이어만·쇠니츠의 과학적 사경제학을 변호하고 있다.
학문 선택의 원리가 수익성·생산성·경제성의 어느 것인가, 또 사경제학의 경제학에 대한 관계 등의 문제가 쟁점으로서 등장해 오지만, 당시의 슈말렌바흐의 경우 이에 충분히 답하고 있지 않다. 그것은 때의 경과와 더불어 분명하게 되어 가는 것이다. 그 뒤 제1차 세계대전에 의해서 연구가 당분간 중단되지만, 전후 경제의 혼란과 그 재건이라는 문제에 직면하여 독일 경제학은 급속한 발전을 하게 된다. 이 전후의 10년간에 슈말렌바흐는 『원가계산』(Selbstkostenrechnung)에서나 『동적(動的) 대차대조표』(Dynamische Bilanz)에서 사경제적(私經濟的) 기술론에 있어서의 연구대상은 공통경제의 한 기관으로서의 경제적 경영이며, 그 선택원리는 공동경제적 생산성(gemeinwirtschaftliche Produktivit
t)임을 명확하게 하고, 차츰 그 모습을 바꿔간다. 그리고 『원가계산』에 있어서 경제적 처리의 합목적성을 대상으로 하는 것과 같은 경영경제적 사고는, 기본적으로는 국민경제적 사고방식과는 구분되는 것으로 간주하고, 사경제적 기술론 ― 이 단계에 와서는 경영경제학(Betriebswirtschaftslehre)이라 칭한다 ― 과 국민경제학과의 관계를 분명히 하고 있다.
규범적 경영경제학
편집(니클리슈 경영경제학)
規範的經營經濟學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제2차 세계대전까지의 20년간의 전반기에 이르러 이른바 경영경제학이라고 불리게 된 사경제적 기술론(私經濟的技術論)은 빛나는 성과를 거두었고, 이 명칭은 점차로 보급되어 후반에서는 니클리슈 경영경제학이 완성되었다. 니클리슈 경영경제학은 그 발전으로 미루어 일반적으로 1기·2기·3기로 구분된다. 그 1기(期)를 대표하는 저술은 『상업의 사경제학으로서의 일반상인적 경영론』이며, 여기서 사경제학이 개별경제(Einzelwirtschaft), 상업경영의 지휘자의 관점에서 형성되는 순수과학임을 설파하고 있다. 상업경영을 목적은 영리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따라서 수익성의 원리가 이 학문의 인식 대상을 결정하는 셈이지만, 이 경우 수익성에 있어서 일치하는 한의 경제성이 고려되고 있다는 데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논거를 통하여 바이어만·쇠니츠의 과학적 사경제학을 변호한 사실은 이미 기술한 바와 같다. 그후 10년을 지나서 제1차 세계대전 후 제1기를 대표하는 이 저서는 개정되어 5판(版)·6판으로 간행되고 있으며, 『경제적 경영론』(Wirtschaftliche Betriebslehere)이 그것이다. 이 저서가 니클리슈 경영경제학 2기(期)를 대표하는 것이다. 그의 관심은 배급의 문제로부터 생산의 문제로 옮겨져 가장 합리적인 욕구를 충당하기 위한 생산의 문제가 중심이 되기에 이르렀다.
이리하여 수익성의 원리에 대신하여 경제성의 원리가 중심개념을 이루게 되었고, 경영경제학의 중심과제는 기업에서 경영으로 대체되고 있다. 제3기에 들어서서 그의 경영경제학은 완성된다. 그 대표적인 저작은 제7판 『경영경제』(Die Betriebswirtschaft )이다. 거기에서는 경영경제학의 대상은 경영이며, 수익획득을 목적으로 하는 사경제(기업)는 부정되고 단순한 경험적 소재에 불과하며, 공동경제성(Gemeinwirtschaftlichkeit)인 경제성의 원리에 따라서 경영을 문제로 삼고 있다. 경영은 욕구충당을 위한 가치를 생산하기 위하여 갖추어진 공동체이다. 이 공동체에 대해서는 1920년 발간된 『전진의 길, 조직론』(Der Wegaufw
rts! Organisation)에 있어서 상세히 논술되고 있다.
물질이 유기적으로 생명체를 형성하고 있는 것처럼 인간도 유기체로서의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는데, 이 인간의 공동생활은 3개의 법칙에 의하여 형성·유지되고 있다. 자유(自由)의 법칙, 형성(形成)의 법칙, 유지(維持)의 법칙이 그것이다. 자유의 법칙이 근본적인 법칙이며, 인간은 양심에 의해서 자기의 존재를 자각하는 한 자유이며, 또한 전체의 부분을 소속 의식을 지닐 수가 있다. 전체이자 부분이라는 사실이 공동체(유기체)의 이정표이다. 형성의 법칙과 유지의 법칙은 이의 파생적인 법칙이다. 형성의 법칙은 일체와 및 지체화(肢體化)의 법칙으로도 불리고, 일체화·지체화의 어느 편인가 중점을 둔 공동체를 형성한다면 불균형을 초래, 붕괴하기 쉬우므로 양자의 조화를 강조하는 공동체 형성에 관한 법칙이다. 유지의 법칙은 공동체의 목적달성이 동시에 개개인(肢體)을 만족시킬 수 있다는 공동체 계속에 관한 법칙이다
이러한 조직원리가 뒷받침되어 경영개념은 공동체로서의 성격을 갖추게 되는 것이나, 이미 기술한 경제성의 원리에 따라서 비로소 문제가 되는 것이므로 이 원리의 해명이 니클리슈 경영경제학의 체계를 알기 위하여 중요한 뜻을 지니게 된다. 경제성은 형성 및 유지의 법칙이 경영경제적 생산과정에 지배받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는 경영경제적 생산과정을 가치순환의 과정으로서 포착하고 있으며, 그 과정은 (1) 내부적 가치순환(innerer Wertumlauf), (2) 외부적 가치순환(ausserner Wertumlauf)으로 구분되고 있다. 내부적 가치순환은 개시가치(Anfangswerten) ― 원료, 부재료, 소모가치(공장설비 등), 이용가치(토지 등), 경영구성원이 아닌 제3자의 급부(자본의 제공) ― 의 경영과정에의 유입으로부터 시작한다. 이에 경영급부(Betriebsleistung), 즉 경영체 구성원의 전급부(全給付)가 부가되고 그리고 경영과정에서 유출되어 이에 대하는 대가의 환류(還流)로서 가치의 순환은 끝난다. 이 경우 경영급부에 대한 대가, 즉 경영성과(Betriebsertrag)=매출액-원가(외부로부터의 조달에 대한 지출)이다. 이 경영성과에서 임금·봉급이 분배되는 것이다. 외부적 가치순환은 내부적 가치순환의 최종단계, 즉 성과분배의 과정에 결합된다.
경영성과의 분배를 받아들인 사람은 집안 살림을 위한 재화 구입에 이를 충당하든가 기업에의 투자에 사용할 것이다. 이리하여 전체 경제를 관류하는 가치순환이 성립되고, 가계와 기업의 생활을 분업적으로 가능케 한다. 경영에 있어서 성과분배의 문제가 전체 경제의 가치순환에 주는 영향은 극히 큰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또 이 성과분배의 문제가 형성 및 유지의 법칙에 연관하여 오는 것이다. 공정한 분배만이 공동체 이념을 실현하는 열쇠가 되기 때문이다. 경영경제적 생산과정이 행해져서 생긴 결과에 대한 대가의 환류가 경영급부와 경영성과의 일치, 즉, 공정한 분배라는 형태로 나타난다면 지체(肢體)와 통일체는 조화가 이루어지고, 공동체는 유지된다. 그러나 공정한 분배의 기준은 존재하지 않으므로 윤리적 규범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다. 니클리슈 경영경제학의 대상은 경영이며 공동체의 이념에 뒷받침된 조직이지만, 이 경영은 가치순환을 통하여 생명을 얻을 수 있다. 경영경제학은 이 경영에 있어서의 가치순환이라는 고유의 문제를 갖고 있으므로 국민경제학에 대해서 병존하는 것이다. 이리하여 이 체계 속에 규범적 성격이 포함되어 있으므로 니클리슈 경영경제학은 규범적 경영경제학이라고 불리고 있다.
리거의 사경제학
편집Rieger-私經濟學
니클리슈 경영경제학을 둘러싸고 새로운 논쟁, 즉 제2차 방법논쟁이 전개 되기에 이르렀는데, 그 발화점은 리거의 『사경제학 입문』(Einfuhrung in die Privatwirtschaftslehre)에서 찾을 수 있다. 그가 주장하는 과학의 방법론적 기준은 바이어만·쇠니츠의 과학적 사경제학으로의 복귀를 의미하는 것이지만, 바로 그 사실 때문에 이 책은 매우 유명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기준 속에서 완성된 그의 기업이론은 바이어만·쇠니츠의 이론과는 현저하게 다르다. 바이어만·쇠니츠는 사경제학에 고유한 인식목적, 즉 수익성의 원리를 확인하고 그에 의해서 학문의 영역을 주장하고 있고, 기업의 본질구명을 자기목적으로 하는 기업이론을 사색하는 것이다.
경제라는 것은 개별경제가 목적의식적으로 전체의 유기적 연관 속에 화폐를 매개로 하여 끼워넣는 것을 의미한다. 그 중심점에서는 사경제가 기업이다. 경영은 경제를 하기 위한 수단이며 기업의 기술적 기초에 불과하므로 사경제학의 대상은 되지 않는다. 기업의 본질적인 이정표는 이윤의 추구이다. 이윤추구는 화폐수익을 얻는 것이며, 따라서 기업은 화폐수익을 얻기 위한 구성체이다. 이리하여 사경제학의 선택의 원리가 수익성이라는 것도 된다. 기업이 전체 경제의 1개 단위임은 말할 것도 없다. 전체경제는 자본주의의 경제이다. 따라서 기업은 자본주의와 운명을 같이 하는 역사적 존재이다. 이러한 관접에서 사경제학기업 그 자체를 대상으로 하고 있어서 기업경제학이라고 불리는데, 사회경제학에 포함되는 특수경제학으로서의 지위가 부여된다.
리거 사경제학은 분명하게 바이어만·쇠니츠가 주장하는 것과 같은 실천적인 평가를 행하지 않는 순수과학을 지향하고 있다. 따라서 슈말렌바흐가 주장하는 기술론이나 응용과학에 반대하는 것이다. 또 슈말렌바흐가 경영을 경제적 크기라고 한 데 대해 리거 사경제학에서는 이미 논술한 것처럼 경영은 경제의 수단에 불과할 뿐이며 통일적인 개념으로서의 경영의 경제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리하여 통일적인 경영경제학도 부정된다. 자본주의하에서는 경제활동을 하는 전형적인 주체는 기업(사경제학의 대상)이다. 기업은 수익획득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므로 사경제학에 있어서의 선택원리를 수익성에 찾았다. 리거가 생산성·경제성은 물론 공동경제성을 격렬하게 비난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기업이 경제적 활동을 하고 있는 한 수익성에서 눈을 돌릴 수는 없고 또 그것이 유일한 원리이기 때문이다.
리거에 대한 비판
편집Rieger-批判
이러한 리거의 비판에 대하여 잇달아 반비판(反批判)이 나타났다. 특히 지버·쇤플루크·프라이저·퇸두리(H. T
ndury)·울리히 등이 이 논쟁에 참가했다. 지버는 수익성의 원리에 찬동하면서 리거의 순수과학설에 반대하고, 경영경제학의 최종목적은 실천적인 경제수행에 대한 도표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사고방식은 슈말렌바흐적이며, 이에 울리히가 동조하고 있다. 니클리슈 학파(學派)의 쇤플루크는 경영경제학을 경제기술학으로서 기초지을 수는 있어도 그것으로 인하여 아무런 과학도, 경제화학도 성립될 수 없다 하여 이 의견에 반대했다. 이 견해는 니클리슈 1기의 주장과 동일한 논거에 의하고 있으며, 대체로 퇸두리가 그에 일치하고 있다. 나아가 그는 리거의 이론구조에 비판의 눈을 돌려서 리거가 마르크스(M. Marx)의 자본주의적 화폐경제의 기본공식 G-W-G′-W′-G″의 내용을 요약하여 G-G′-G″로 하고, 화폐사고적 일면성을 강조하여 이 공식에 의하여 해결될 수 없는 모든 것을 사경제학의 영역에서 제외하고 있다 하여 그 시야가 좁음을 비난하고 있다.
리거의 경우 이윤은 화폐적 차액임은 말할 것도 없다. 이러한 원칙에 의해서는 경영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결국 리거의 잘못은 19세기의 자본주의를 그의 경험적 기초에 두었다는 데에 있다. 프라이저도 이러한 리거 비판의 진영에 가담하고 있다. 방향을 바꾸어 니클리슈에 대해서 고찰해 보자면, 마르크스의 자본주의적 화폐경제의 기본공식rm G-W-G prime- rm W`prime- rm G″ 는 rm W-W`prime 의 관계로 요약되며, 이것이 과학적 인식의 초점이 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경영경제만이 존재하며 전체 경제는 제외되고, 경영경제학과 국민경제학은 구별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이러한 리거와 니클리슈에 대한 이해를 통하여 점차로 기업과 경영, 수익성과 경제성과의 관련에서 새로운 경영경제의 개념을 도출(導出), 이 학문을 경제학임과 동시에 사회학으로 확립시키려고 의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