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교육/교육의 이론과 실제/교 사/교사론
교육애
편집교육노동의 본질
편집敎育勞動-本質
교사는 교직에 종사하는 노동자이다. 그러나 "교사도 일반 노동자들처럼 자기의 노동력을 상품으로 팔고, 그 대상(大賞)으로서 임금을 얻기 위해 일하는 것이다"라고 해석해서는 안 된다.
오늘날 직업은 일반적으로 단순히 임금을 얻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교사 중에는 교직을 그처럼 생각하고 있는, 이른바 '월급쟁이 교사'들이 많이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월급쟁이 교사'가 본래의 모습일 수는 없다.
듀이가 <민주주의와 교육>중에서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오늘날 사회에서 최대의 악은, 한편에는 오직 이윤추구 밖에는 모르는 기업가가 있고, 다른 한편에는 단순히 임금을 목표로 자기의 노동력을 기업자에게 팔고, 기계처럼 일하고 있는 노동자가 존재하는 일이다. 오늘날 노동은 그것이 만들어 내는 것, 그 자체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임금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존재하는 데 불과하다. 그 결과 문화를 비속화·속악화(俗惡化)시키는 것, 심지어 인류생활을 파멸로 이끌어가는 것마저 대량으로 생산되고 있다. 여기에 현대의 무서운 위기가 있다.
노동이란 본래 사회 내지는 인류생활에 유용한 가치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 있는 것으로, 사리(私利)를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사람들이 노동의 이와 같은 본질에 눈을 뜨고, 사회나 인류에게 유용하고 가치있는 것을 생산하고, 혹은 그와 같은 것을 달성하기 위해 열심히 일하고, 또 모든 사람들이 서로 노력하여 인생을 보람있는 것으로 만드는 사회를 실현하는 것이 최대의 역사적 과제인 것이다.
만일 "교사도 또한 노동자이다"라는 명제(命題)가 그 존재이유를 갖는 것이라도, 그것은 "교사도 또한 임금을 목표로 하는 노동자이어도 좋다"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교사도 또한
노동자의 한 사람으로서, 직업노동의 보편적·상품화적 퇴폐경향 속에 놓여져 있음을 자각하고, 일반 노동자와 함께 그 경향에 대항하여 사회 혹은 인류의 생활에 유용한 가치를 만들어 내는 직업노동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라야 한다.
교사의 사명
편집敎師-使命
교육노동자인 교사는 사회에 대해서, 인류의 생활에 대해서, 특히 어떤 유용한 가치를 만들어 내며, 혹은 그 유용한 가치가 있는 것을 달성하기 위해 어떻게 노력해야 할 것인가. 그것은 말할 나위도 없이, 성장과정에 있는 젊은 세대의 지식기능을 발달시키고 인격을 형성하여, 그들을 국민생활의 향상, 민족의 발전, 인류의 진보에 공헌하게 할 수 있는 인간으로 끌어올리는 것이다. 이것이 교육노동자로서 교사의 사명이다. 교사의 교육노동은 이 사명의 달성을 위해 있는 것이며, 결코 그 이외의 것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교사가 이 교육노동의 본질에 눈을 뜨고, 그 사명의 달성을 위해 온 생명을 경주하게 될 때, 비로소 교육의 자율성(自律性)도 확립되며, 진실한 교육활동이 성립되는 것이다.
교육활동과 교육애
편집敎育活動-敎育愛
교육노동자인 교사의 사명은 성장과정에 있는 젊은 세대의 지식기능을 발달시키고 인격을 형성해서, 그들로 하여금 국민생활의 향상, 민족의 발전, 인류의 진보에 공헌하게 할 수 있는 인간으로 끌어올리는 일이며, 참다운 교육활동은 교사가 이 교육활동의 본질에 눈을 떠 그 사명의 달성을 위해 온 생명을 경주할 때 성립된다고 할 수 있다.
소크라테스의 교육활동과 교육애
편집Socrates-敎育活動-敎育愛
교사가 교육노동의 본질에 눈을 뜨고, 그 사명의 달성을 위해 전 생명을 기울일 수 있게 되려면, 교육애(敎育愛)라고 하는, 교육자의 정열의 발동으로 가능한 것이다.
서양 고대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교사였던 소크라테스의 경우만 보아도, 그는 잘 알려져 있듯이 사람들을 진리와 정의로 인도하고, 조국 아테네를 이기주의(利己主義)·개인주의로 인한 파멸에서 구하려고 그의 일생을 교육에 바쳤다. 그는 30년이라는 오랜 세월에 걸쳐, 아테네의 시가(市街)를 자기 가정처럼 여기고, 끊임없이 청년들과 접촉하며 이들과 격렬한 담론(談論)을 교환하고, 상대가 올바른 결론에 도달할 때까지 그들을 버리지 않고 그 지도에 온 정력을 경주하였다. 이와 같은 그의 열광적인 교육활동의 밑바닥에는 '소크라테스적 사랑', 즉 에로스(eros)라고 불리는 '뜨거운 심장'(정열)이 있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일생을 가리켜 '에로스의 희생자'라든가, '사랑의 기술 명인'이라든가 라는 말을 해 왔다고 전해진다. 이 에로스라는 말은 본래 당시의 그리스에 있어서 동성간의 애정을 표현하는 말에서 나온 것인데, 소크라테스는 이를 정신화(精神化)된 소년애(少年愛)란 뜻으로 사용했다. 고귀한 소년애는 마음의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사랑하는 자에 대한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그는 말하고 있다. 즉 젊은 세대를 염려하고 장래의 행복을 염원하며, 지적(知的)·도덕적 향상을 추구해 나가는 우애의 정신이 그가 말하는 에로스의 개념이었다. 이 에로스의 정열이 발동하는 곳에 그의 열광적인 교육활동이 성립될 수 있었던 것이다.
페스탈로치의 교육활동과 교육애
편집Pestalozzi-敎育活動-敎育愛
근세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교육자였던 페스탈로치에게서도 소크라테스와 같은 교육활동 및 교육애를 찾아 볼 수 있다. 페스탈로치가 '사랑의 사람'이며 '동정의 천재'였던 일, 그리고 그의 일생을 통해 그와 같은 풍성한 심정이 샘물처럼 솟아오르고, 이것이 격류(激流)가 되어 그로 하여금 사회적 해독의 제거와, 압박과 학대받는 가난한 민중구제의 기수(旗手)가 되게 하였다 함은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더욱이 그는 해독과 빈곤은 사람들의 도덕적·지적 빈곤이 존재하는 한 결코 제거할 수 없다는 것, 따라서 이를 근본적으로 구제(救濟)하기 위해서는 버림받은 빈아(貧兒)의 영혼 속에 잠자고 있는, 또한 애타게 개발을 기다리고 있는 인간의 여러 능력, 즉 지력(知力)·도덕력(道德力)·기술력을 발전시켜, 그들이 자활할 수 있는 자주적이고 독립적인 인격에까지 끌어올리는 도리밖에 없다고 생각하였다. 이 가난한 동포, 불행한 자녀들에 대한 무한한 사랑, 그리고 빈곤과 불행으로부터 탈출시켜 그들의 축복받는 장래와 행복을 위해 인간적인 여러 능력의 발전을 강력히 추구하는 사랑의 정열이, 그로 하여금 50년간의 교육적 일생을 통해 일관된 인격형성에의 불퇴전(不退轉)의 의지와 활동을 유지하게 한 것이다.이러한 페스탈로치의 사랑은 앞서 말한 소크테스의 에로스와 아주 동일하다고는 할 수 없다. 소크라테스는 사회에 정의와 진리가 행하여지게 될 것을 강력히 요구하는 데서 출발하였다. 그래서 그의 에로스는 마음의 아름다움과 그 고귀화(高貴化)를 추구하는 가치애적(價値愛的) 경향이 강한 것이었다. 이에 대해서 페스탈로치는 빈곤한 민중에의 동정, 불행한 어린이들에 대한 연민의 정으로부터 출발하였다. 그래서 그의 사랑은 희생적인 인격애적(人格愛的) 경향이 강한 것이며, 소크라테스의 에로스에 대해서 아가페(agape)라 불러도 좋은 것이었다. 그러나 사회에 정의와 진리가 행하여지기를 강력히 추구하여, 청년들을 지혜와 덕으로 인도하려던 소크라테스도, 그 때문에 또한 여러 젊은이들을 따뜻하게 포용하고, 그들에게 깊은 우정을 넣어주었으며, 그들을 위해 자기 생명을 전부 바쳤다. 한편 빈곤에 시달리는 민중에 대한 동정, 불행한 빈아(貧兒)에 대한 깊은 연민의 정에서 출발하여, 그들을 위해 한 몸을 바친 페스탈로치도, 민중에게 동정하고 가난한 어린이들의 장래의 행복을 염원하였기 때문에, 그들의 지적·도덕적·신체적 여러 능력의 발전을 강력히 추구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의 에로스도 단순히 가치적인 성격의 것이 아니라, 그와 동시에 희생적인 인격애의 요소도 포함하는 것이며, 페스탈로치의 사랑도 단순히 희생적인 인격애만이 아니라, 가치적인 요소도 포함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리하여 서양의 고대와 근세에 있어서 대표적인 두 교육자 소크라테스와 페스탈로치에서, 젊은 세대에 대한 한결 같은 희생애적인 아가페와, 그 지적·인격적인 향상을 추구하는 에로스가 결합된 독특한 정신이 나타났음을 알 수 있다. 이 아가페와 에로스가 결합된 것, 그것이 바로 교육애라는 것이다. 교사들이 진실로 이와 같은 교육애에 불타고, 오직 동포와 사회의 발전과 인류의 진보를 위해, 그리고 젊은 세대의 장래와 그 행복을 위해 그들의 인간형성에 일신을 바치게 될 때, 비로소 참되고 힘찬 교육활동이 성립되게 된다.
교사의 권위
편집권위주의와 자유주의
편집權威主義-自由主義
교육이란 교사와 학생과의 관계에서 성립되는 것이며, 따라서 교사와 학생이 어떻게 결합되어 있는가 하는 것이 교육의 성공여부에 결정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더욱이 교사와 학생과의 관계는, 그 관계를 만들어 내는 주도적(主導的)인 역할을 맡고 있는 교사가, 학생을 어떻게 파악하며, 어린이를 교육한다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느냐에 따라 규정되는 것이다.
권위주의 교육관
편집權威主義敎育觀
교사가 어린이를 파악하는 가장 오래된 파악방식은, 어린이란 본래 무지몽매(無知蒙昧)하고 사고가 발달하지 않은 존재여서, 교사가 관념·지식·사상 등을 가르쳐 규율이나 생활의 틀을 만들어줌으로써 비로소 인간답게 사고하고 행동할 수 있게 된다고 하는 파악방식이다.
어린이를 독자적으로 사고하고 뜻을 가지고 행동하는 인격적 주체로서가 아니라, 관념이나 지식 등을 기록하는 '백지(白紙:tabula rasa)', 사상을 넣어줄 용기(容器), 혹은 길들이고 조련(調練)시켜야 하는 동물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어린이를 이같이 파악하는 경우, 교사가 학생을 대하는 태도는 몹시 전제적이며, 강압적·권력적·지배적인 것이 특색이었다. 이러한 파악에 입각하여 학생들을 방치해 두면, 언제까지나 자진해서 지식을 추구하는 일은 없을 것이므로, 그들의 인간형성에 필요한 지식이나 관념·사상을 교사가 직접 강압적으로 넣어주어야 한다고 보았다. 또 그들을 자유롭게 방치해 두면 규율이 없어지고, 잘못을 범하며, 악(惡)에 빠지기 쉬우므로 교사가 잘 감독하고 지도해야만 한다. 그리고 만일 교사를 따르지 않을때에는 적발하여 심하게 다루며, 경우에 따라서는 엄중하게 처벌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교사의 태도를 권위주의 또는 관리주의(管理主義)라고 부르는 것인데, 교사가 그와 같은 태도도 임하면, 대부분의 경우 학생은 교사의 요구에 따라 자주적·능동적으로 활동할 수 없게 되고, 오히려 그 요구를 거절하거나 혹은 이에 반항하게 된다. 그리고 주입(注入)된 지식은 자아관여(自我關與;ego-involvement)가 되지 않는 것이어서, 기껏해야 말의 암기에 그칠 뿐, 생생하게 살아 있는 생산적·창조적인 학력(學力)은 되지 못한다. 또한 이렇게 배운 규율이나 생활형은 외면적·형식적이고 맹목적인 것에 불과하며 주체적·내면적·자각적인 것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자유주의 교육관
편집自由主義敎育觀
상술한 바와는 다른 자연주의적인 아동관(兒童觀)이 바로 그것이며, 이것은 18세기의 루소 이래 새로운 교육운동을 지배하여 온 사상이며, 여러 나라에서 채택한 교육사상이기도 하다.
여기에서는 본래 어린이들은 훌륭한 소질을 가지고 태어났으며, 그 소질은 어린이의 내부로부터의 자연적인 충동에 바탕을 둔, 자발활동을 통해서 자기발전을 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교육이란 이 자발활동에 의한 자기발전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어린이의 자연본성(自然本性)과 자연충동에 대한 무조건적인 긍정(肯定), 그 자발성과 자연성장에 대한 예정조화설적(豫定調和說的)인 낙천주의적 신앙 위에 서는 것으로서, 여기에서는 교사에 의한 지도가 원칙적으로 부정된다. '일체를 내부로부터'라고 하는 것이 원리이다. 학생들은 구속하지 않아도 자연적으로 성장·발달하며, 훌륭한 인간으로 성숙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를 취하는 교사 밑에서도 학생들이 만족할 만한 발달을 못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발달과 지도
편집發達-指導
만약 어린이들을 인격성·주체성이 없는 물건이나 동물처럼 생각하여, 학생들에게 지식을 강제로 주입시키거나, 혹은 학생들을 관리하고 단속하는 교사 밑에서도, 또한 어린이들의 자연본성을 주정주의적(主情主義的)으로 미화(美化)해서 파악하여, 어린이들이 마치 내부에서 자연적으로 성장하고 성숙하는 것처럼 생각해서 학생들을 방임하거나, 혹은 그들의 충동을 만족시키는 일에 힘쓰는 교사 밑에서도 학생의 학력발달과 인격의 형성을 기대하기 어렵다고 한다면, 교사는 어린이들을 어떻게 파악하고, 어떤 태도로 임해야 할 것인가.
인간의 정신적 기능, 인격의 내면적 특성은 오히려 자주적인 자기활동을 통해서만 발달하는 것이다. 사고하고 판단하고 결심하고 행위하는 능력이나 태도는, 스스로 판단하고 사고하고 결심하고 행위하는 것을 통해서만 발달한다. 자기활동이 없는 곳에 인간의 발달이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의 발달은 완전히 자기의 내부로부터 나오고, 자기의 내부에서만 발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외부적인 작용에 의해 큰 영향을 받게 되는 것이다. 물론 외부로부터의 작용이 송두리째 그대로 내부로 투사(投射)되고 쌓여서, 그 기계적인 결과로서 그 결과가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외적(外的)인 작용 중 자기의 내적 조건(內的條件), 즉 지적·신체적 발달수준이나 심적 특성(心的特性) 등과 맺어질 수 있는 것만이 받아들여지며, 그것이 자기활동에 영향을 주어 발달을 규정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학생들의 인격형성에 있어, 교사에 의한 지도가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갖는 것임을 나타내고 있다. 각 교과의 수업 및 교과외(敎科外) 활동에 있어서, 교사가 여러 학과의 지식이나 그 전달을 어떤 식으로 가르치는가에 따라, 학생들의 발달은 속도나 정도뿐만이 아니라, 질(質)이나 방향까지도 크게 좌우되는 것이다. 그래서 학생들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최고도로 발전시키려면, 학생들에게 무엇을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가에 대해 조직적이고 계획적인 지도가 있어야 하겠다.
여기에서 '지도'라고 하는 말은, 교사 쪽에서 지식을 강제로 주입하거나, 규율이나 생활의 틀을 강요 또는 통제하는 것이 아님은 물론이다. 그와 같은 방법으로는 학생들의 학력을 참되게 발달시키고 인격을 형성시키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앞서도 말했지만, 올바르게 학력을 발달시키고 인격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학생의 자주적인 자기활동을 개입시켜야 한다.
그래서 여러 학과의 지식이나 방법, 인간관계의 양식이나 행동양식의 학습을 지도한다고 하는 것은, 이를 획득하기 위한 학생의 자주적인 자기활동, 즉 사고 및 실천을 유발하고 조직하고 발전시키게 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또한 교사의 그 같은 지도가 없으면, 학력의 발달이나 인격형성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교사의 지도성과 권위
편집敎師-指導性-權威
교사가 학생으로 하여금 자주적인 자기활동을 하게 하고, 또 교사가 그런 식으로 지도를 할 때 비로소 효과적인 학습에의 자기활동이 성립되고, 바람직한 발달이 기대될 수 있다면, 교사는 학생들을 자기의 지도 밑에 복종시킬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없으면 교육은 불가능하다.
권력을 이용해서 강제하고 명령을 내리는 방법으로는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 그런 경우에는 학생은 교사의 명령을 받아들여 자발적인 활동을 하지 않고, 오히려 이를 거부하고 반항하게 되리라는 것은 앞에서 말한 바 있다.
이 경우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교사의 지도에 복종하도록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복종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학생의 자주적·능동적인 자기활동을 기대할 수가 없다.
학생들이 자진해서 교사를 따르게 되는 것은 교사를 존경하고 신뢰할 수 있는 때이다. 학생들은 자신이 존경하고 신뢰하는 교사의 지도에는 기꺼이 복종하고 그의 요구를 잘 받아들인다. 교사는 학생들에게 존경과 신뢰를 받음으로써 그들을 복종시킬 수 있는 정신적인 힘을 얻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존경·신뢰를 받음으로써 얻어진 상대를 자기의 지도 밑에 자발적으로 따르게 하는 정신적인 힘이 '교육적 권위'라고 불리는 것이며, 그와 같은 권위가 구현(具現)될 때, 교사는 학생의 자주적·능동적인 자기활동을 유발하여 조직하고 발전시키는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교사가 이러한 권위를 얻기 위해서는 상술한 바와 같이 학생으로부터 존경과 신뢰를 받음으로써 가능한 것인데, 또한 교사는 어떻게 해야만 존경과 신뢰를 받고, 그 권위를 보존 할 수 있는 것일까.
교사가 이런 권위를 얻기 위해서는 상술한 바와 같이 학생으로부터 존경과 신뢰를 받음으로써 가능한 것이다. 교사가 학생의 존경과 신뢰를 받을 수 있는 조건으로는 여러 가지 경우를 생각할 수 있겠지만, 우선 교사가 학생들의 편이 되어 진정으로 염려해 주며, 자신들의 장래와 행복을 위해서 힘을 써 준다는 확신을 줄 필요가 있다. 또한 교사의 지도로 자신들의 힘이 신장(伸張)되고, 자신들의 요구와 염원이 달성될 수 있다는 것을 실감하고, 확신을 가지게 되어야 한다. 결국 교사가 교육애적인 정열에 불타고, 학생지도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을 때, 더욱이 그 지도가 적절하고, 항상 학생의 학습목적을 효과적으로 달성시키며, 학생의 지적·인격적 발전을 확실하게 보장할 수 있게 될 때, 교사는 그들에게 신뢰와 존경을 받게 되며 권위를 얻어, 학생들에 대한 지도성(指導性)을 발휘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교육기술
편집敎育技術
교사에 의한 교육활동의 본질은 학습에 대한 학생의 자기활동을 유발하고, 조직하고, 발전시키도록 지도하는 데 있다. 또한 그 경우의 교육활동이 참된 지도성을 발휘하여 교육의 효과를 올리기 위해서는, 그 지도에 권위가 수반되어야 하며, 그리고 그 권위는 교사에 의한 지도가 학생들에 대한 순수한 교육애에서 출발함과 동시에, 학생의 지적·인격적 발전에 있어 유효적절할 때에 비로소 나타난다. 사실 교육애에 바탕을 둔 유효적절한 지도에 의해서만 참다운 교육활동이 성립되는 것이다.
교육기술의 필요성
편집敎育技術-必要性
교사에 의한 지도가 학생의 지적·인격적 발달에 실제로 유효 적절하기 위해선, 그 활동이 또한 기술화(技術化)될 필요가 있다. 기술은 보통 생산에 관계되며, 자연의 사물현상(事物現象)의 본질 내지는 사물현상 간의 법칙적 관계에 관한 지식에 바탕을 두어, 사물을 만드는 유효적절한 수단이나 수속(手續)을 고안해 내는 일 및 고안된 수단·수속을 말한다. 그러나 기술이란 생산의 경우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교육도 또한 인간을 형성하는 활동으로서, 수단이나 수속을 매개(媒介)로 해야 한다. 수단이나 수속이 없이는 인간에게 작용(作用)하고 인간을 형성할 수가 없다. 따라서 생산활동과 마찬가지로 교육활동도 기술화되어야 한다. 즉 여기에서도 교육이라는 사상(事象)을 성립시키는 여러 요인(要因)의 특질 및 그 여러 요인 간의 법칙적인 관계에 관한 과학적 지식에 바탕을 두어, 인간을 형성하고, 발달시키기 위한 유효적절한 수단이나 수속을 생각해 내고, 이에 의해 교육활동을 수행하도록 해야 한다.
교육기술과 생산기술의 차이
편집敎育技術-生産技術-差異
교육활동과 생산활동은 그것을 구성하는 요인 및 요인 간의 관계가 본질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기술화의 방법도 또한 달라진다. 따라서 그 활동에 종사하는 노동의 방법, 근무의 방법도 또한 달라져야만 한다.
우선 첫째로, 생산활동은 어느 일정한 도구(道具)나 기계에 의해 일정한 원료에서 일정한 물품을 만들어 내는 활동이다. 여기에서 기술이란 어떤 원료를 써서, 어떤 도구나 기계로, 어떤 작업과정을 거쳐, 어떤 물품을 만들어 내느냐 하는 수단·수속과 관련된다. 그런데 이 수단·수속이 전문기술자에 의해 일단 고안(考案)되면, 그것은 특정한 원료로부터 동일한 기계·도구, 동일한 작업공정(作業工程)에 의해, 동일한 규격의 물품을 만드는 과정으로서 고정시킬 수가 있다. 또한 그렇게 하는 것이 경제적으로도 득책(得策)이며, 사실 그렇게 이행되고 있다. 그러므로 일반 노동자는 설치된 일정한 기계나 도구에 의해, 일정화된 작업과정에 기계적으로 종사만 하면 된다.
그래서, 일반 생산노동자는 과학적인 지식이나 이론을 소유하고, 생산의 수단·수속을 스스로 연구해 나가는 전문기술자가 될 필요는 없고, 주어진 기계의 취급법, 일정한 작업과정인 다루는 방법을 터득하여, 노력(勞力)을 제공하는 직공이나 공원(工員)이면 족한 것이다.
그런데 교육활동은 어떤 특정한 과제나 목표를 가지고, 어느 특정한 수단·양식에 의해, 어느 발달수준(發達水準)에 있는 학생들에게 작용시킴으로써 수행되는 활동이다. 여기에서 기술을 과제·목표로 어떻게 설정하며, 어떠한 수단·수법·양식으로 학생들에게 어떻게 작용하여, 그들을 어떻게 형성해 나가느냐에 달린 것이지만, 이 과제·목표·수단·수법·양식 등은 생산의 경우에 있어서 수단·수속처럼 일단 전문가가 고안해 내면, 그는 이를 고정시켜 기계적으로 해 나가면 된다는 그러한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하면 교육활동의 대상인 학생은 생산대상인 물품과는 달리 인간이며, 살아 있는 개성적 존재인 것이다. 연령단계의 차이나 성별(性別)의 차이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같은 연령, 같은 성이라도 각기 다른 과거의 경험, 다른 지식이나 능력, 다른 경향(傾向)이나 가능성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한 사람 한 사람의 지식·능력·습숙(習熟)이 발달되어가는 행방을 살펴보면, 다만 그 속도가 다를 뿐만이 아니라, 그 발전상 또한 천차만별(千差萬別)이다. 같은 학년, 같은 시기에, 동일한 교재 동일한 방법으로 취급하여도, A학급과 B학급은 또 작년 학급과 금년 학급과는 아주 다른 반응을 보인다. 의욕적으로 물고 늘어질 때도 있으며, 전혀 활동을 하지 않을 때도 있다. 이러한 현상은 동일학급 내의 한 사람 한 사람의 학생 사이에서도 볼 수 있다.
그래서 만들어 준 교과과정표(敎科課程表)나 수업계획표(授業計劃表)가 아무리 세밀하고 훌륭하게 되어 있어도, 여기에만 의존하면 교육은 형식적으로 흐르기 쉽다. 교육에 있어서 교사는 그때마다 자기에게 주어진 학생의 내면(內面)을 깊이 관찰하고, 그가 가지고 있는 과거의 경험이나 능력·경향(傾向)·가능성을 확실하게 파악하고, 이와 관련시켜 그것을 변혁·발전시키기에 가장 유효적절한 과제·목표를 설정하고 교재를 선택·배열하여, 수업을 조직해 나가도록 해야만 한다. 따라서 교사는 이들 모든 것에 관한 과학적인 지식이나 이론을 가지고 있어, 이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전문적인 교육기술자(技術者)라야 하는 것이다.
둘째로, 일반적인 생산에 있어서는 물건을 만드는 수단은 도구나 기계와 같은 물질적 수단이다. 이 수단은 필요에 따라 타인으로부터 기성품을 받아, 취급법만을 배우면 누구나 곧 이를 유효하게 사용할 수 있다. 그런데 교육활동에서 이용되는 수단은, 언어·사상·과학·기술·예술·도덕과 같은, 문화재로 불리는 정신적 수단이다. 이 수단은 물질적 수단처럼 필요에 따라 타인에게서 기성품을 받아, 곧 사용할 수 있는 그러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상당한 시간과 노력을 들여, 자신의 힘으로 학습하고, 연구하고 수련하지 않고서는 손에 넣을 수 없는 것이다. 또한 그러한 과정을 거쳐 진실로 자기것을 만들고, 인격화(人格化)되어 있지 않으면 교육력을 발휘할 수 없는 것이다. 즉 단순히 빌려 온 것으로는 제 구실을 할 수가 없다.
저학년(低學年)에서 취급하는 교재는 매우 단순하고 초보적인 것이어서, 특별한 연구와 학습이 필요한 정도의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교재는 단순하고 초보적인 것이지만, 단순하고 초보적인 것을 다루는 경우에도 교사는 고도(高度)의 것을 넓고 깊게 연구하고 학습해야만 한다. 즉 그 초보적이고 단순한 것을 교수하고 학습시킴으로써, 학생 내부에 장래 진보될 최신의 과학·기술·예술 등의 지식과 능력을 발달시킬 수 있는 기초를 만들어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 교사는 최신의 과학·기술·예술 등에 관한 깊은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어, 그와 같은 견지에서 초보의 기초적인 사상(事象)을 취급하도록 해야 한다.
따라서, 이와 같은 전문학술에 대한 끊임없는 연수(硏修)가, 교사에 의한 교육활동을 기술화하고, 인간형성의 좋은 결과를 낳기 위한 불가결의 조건이 되는 것이다.
교사의 자질
편집교사의 자질
편집敎師-資質
교사의 자질이라고 하면, 얼핏 교사의 자격과 혼동하기 쉽다. 자격이란 법적으로 규정된 '교사자격증'을 가지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며, 자질이란 교사가 될 수 있는 어떤 인간적인 바탕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요컨대 교사의 자질이란 일정한 범주 속에 넣어 규정하기는 힘든 것이며, 교육작용(敎育作用)의 본질에서 자연적으로 유래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교사로서의 일반적 자질
편집敎師-一般的資質
(1) 계속 노력하는 교사 ― 대체로 교사가 될 수 있는 첫째 조건으로서 원만한 인격을 들고 있는데, 이 원만한 인격은 교사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어떤 인간에게도 적용되는 조건일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교사가 되기 위한 고유한 조건일 수는 없다. 더욱이 완전한 인격이란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은 아무리 노력을 해도 불완전하며, 원만성(圓滿性)이 결여된 것이 인간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원만한 인격이란 모든 인간이 지향해 나아가야 하는 하나의 이념일 뿐이다.
역설적(逆說的)으로 말하면, 이 이념을 향해 정진(精進)할 수 있는 인간, 이를 위해서 자신의 불완전성을 자각할 수 있는 인간, 그 인간 속에서 교사의 기초인 인간적인 특질을 찾아 볼 수 있는 것이다. 무지(無知)의 자각에 바탕을 두고 정진을 계속한 소크라테스(Socrates, B.C. 470-399)가 '영원한 교사'로 추앙되는 까닭도 거기에 있다.
(2) 어린이와 함께 사는 교사 ― 어린이와 함께 살 수 있는 교사는 한결같이 어린이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며, 어린이와 진지하게 모든 것을 같이 할 수 있는 사람이다. 교사가 어린이와 부딪쳐 나가는 활동장면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교재(敎材)의 논리를 내세워 부딪쳐 나가는 교과지도이며, 다른 하나는 지도내용을 자신의 체내에 넣어 두고, 몸소 부딪쳐 나가는 생활지도나 도덕지도의 장면이다. 이 두 가지 장면이 모두 성립되기 위해서는, 어린이를 사랑하고 좋아하며, 가르치고 키우는 기쁨을 느끼고, 어린이와 함께 살며, 어린이와 함께 성장하는 자질이 요청된다.
(3) 젊음과 총명성을 지닌 교사 ― 이를 위해서는 루소(Jean Jacques Rousseau, 1712-1778)가 <에밀> 속에서 말하고 있는 것과 같은 '젊음'과 '총명'을 찾아야 한다. 교사가 접촉하는 것이 어린이인 만큼, 교사는 항상 선각자로서 노성(老成)한, 혹은 노성한 듯한 자세를 보이기 쉽다. 말할 것도 없이 교사는 내성적 태도와 모범적 태도의 양면을 지니고 있어야 하는데, 이 모범적 태도란 노성한 도학자(道學者)와 같은 몸가짐을 해야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젊음이 있음으로 해서, 반대로 모범적 태도나 교육적 효과를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어린이와 함께 성장해 나가는 일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정신적 젊음이다. 어린이와 함께 꿈을 추구할 수 있는 자, 어린이에게 참된 공감(共感)을 느낄 수 있는 자, 어린이 앞에서 자신의 잘못을 고백(告白)할 수 있는 마음의 젊음을 지닌 자라야 한다.
그런데 젊음이란 때때로 무궤도(無軌道)와 착오를 낳기 쉽다. 젊으면 젊을수록 그 젊음을 인도하는 교육적 예지가 요구된다. 루소가 <에밀>의 교사는 "총명한 사람이라면 젊을수록 좋다"고 말하고 있는 것은 참으로 생각할 만한 문제이다. 즉 '젊음'에 '총명한 사람'이라는 조건이 붙어 있기 때문이다. 이 총명성이나 교육적 예지는 처음부터 '젊음'과 모순없이 병존(竝存)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나날의 경험이나 노력의 축적(蓄積)에 의해서 생겨나는 것이다. 그것은 나날의 교사생활을 통해서, 즉 교육적 감각을 작용시키면서 어린이와 함께 살아 나가는 동안에 발전되어 가는 것이며, 여기에서 어린이들의 창조성(創造性)도 발달되는 것이다.
수업에 있어서의 전문가적 자질
편집授業-專門家的資質
교사란 어린이를 지도하는 자이며, 그 가장 중요한 터전은 교실이다. 그래서, 교실에서 수업에 승부를 걸 수 있는 자질을 양성해 두어야만 한다. 교사에게 처음이자 마지막 보루는 교실이다. 교사가 교실에서의 수업을 위해서 산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전문가로서 살아 나가는 것이 되어야 한다.
바로 여기에 교육기술이 요청되는 것이다. 교육기술은 공장에서 물건을 대상으로 하는 생산기술, 동식물을 대상으로 하는 농업기술, 사물을 대상으로 하여 자기의 개성을 실현하는 예술가가 지니는 기술과도 다르다. 왜냐하면, 살아 있는 인간, 가치실현(價値實現)의 가능성을 지닌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서는 인간을 대상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서는 인간을 대상으로 하고 있는 듯이 보이는 의술(醫術)과도 다르다. 의사가 직접적으로 대상으로 하고 있는 것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질환(疾患) 그 자체이며, 그런 점에서 볼 때에는 그것도 일종의 사물에 불과하다.
이에 대해서 교사가 대상으로 하고 있는 어린이는 살아 있는 인간 그 자체이며, 살아 있는 한 무한한 발전을 계속할 어린이, 즉 개성(個性)을 지닌 인간으로서의 어린이인 것이다. 교육이라는 작용은 살아 있고 개성을 지닌 한 인간이, 살아 있는 개성을 형성해 나가고 있는 어린이와 대결함으로써 성립된다. 그래서 교육기술은 다른 어떤 기술과도 다른 다양성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통합(統合)된 기술이다.
이 기술은 교사라고 하는 전인격(全人格)으로부터 나오는 통합적이고 질적인 것에 의해 짙게 채색(彩色)되어야만 한다. 바로 여기에 교사에 대해서 개성이 풍부한 인간성이라는 자질이 요청되는 것이다. 물론 교육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최저(最低)의 공통된 '정석(定石)'이 있기는 하며, 또한 기본적인 원칙도 있지만 이것은 어느 정도 과학적으로 분석한 과학적 방법에 의해서 구해진다.
그러나 교육 내지는 수업이 참다운 성과를 얻을 수 있으려면, 이 정석에 맞추어진 초점 위에, 교사의 개성이 배어 나왔을 때, 즉 교사 자신의 방법이 탄생되었을 때이다. 이리하여 수업전문가로서의 교사의 자질을 갖추게 된다.
이상 논술한 교사로서의 자질은 모두 교사가 교사이기 전부터 하나의 인간적인 소질로서 가지고 있는 것이 바람직한 일인지는 모르나, 각 항목에서 이미 설명을 했듯이 미리 그 자질을 보유하고 있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교사가 어린이들과 함께 생활해 가는 동안에 교사 자신의 내부에서 스스로 형성되어 가는 성장·발전인 것이다. 교사의 소질은 어린이의 성장과 함께 신장을 계속한다.
예를 들어 교사는 특정적(特定的)인 단정된 전문직으로 출발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피나는 노력으로 전문직의 지위에까지 도달한다. 바로 이러한 점에 교육의 참다운 뜻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할 때 교사에게 요구되는 '자질 중의 자질'이라고 하는 것은, 교사가 항상 자기평가를 하고 자기진단을 하여, 자기개조를 해 나갈 수 있는 능력을 말하는 것이다.
교사의 윤리
편집교사와 학생간의 윤리
편집敎師-學生間-倫理
목적으로서의 학생
편집目的-學生
어린이 시절은 미성숙 시절이기 때문에, 후일을 위한 준비기간으로 보고 그 시절이 희생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과오는 어린이를 어른의 축소물로 보는 데서 오는 것이며, 성인이 목적이라면 어린이는 수단이라고 생각하는 데서 오는 것이다. 우리는 곧잘 인간의 존엄성을 거론하면서도 어린이의 본성에 어긋나는 일을 시키고, 그가 할 수 없는 일을 기대하고, 그가 실패하면 정신적·육체적으로 준엄한 벌을 주는 것이다. 교사는 이런 일을 해서는 안 된다.
개인차의 존중
편집個人差-尊重
민주사회의 특징은 개성의 존중에 있다. 그러므로 개성을 최고도로 발전시키는 것은 교수의 임무이다. 학교교육은 자칫하면 이와는 반대로 사람을 어느 틀에 박은 듯이 개성을 말살시키기 쉽다. 교사는 사회적 규범을 벗어나지 않는 범위에서 개개 학생의 개성의 발전을 북돋아주는 데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어린이를 자기가 그린 어떤 틀에 맞지 않는다고 불량아로 취급하는 것은 일종의 죄악인 것이다. 교과목에는 그 자체에 우열이 없건만 중요과목에만 노력하기를 바라고, 어느 학생이 자기의 소질에 맞는 방면에 노력하는 것을 저지하고 방해하는 경우가 있는 것은 납득할 수 없는 일이다.
현대사회는 구성원들이 각각 자기의 개성을 살리려고, 그것으로 고도로 분화된 사회에 봉사함으로써 보다 건전한 발달을 이룩할 수 있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생각을 달리하고, 취미가 같지 않고, 능력에 차이가 있는 것을 부정적 요소로 보지 말고 오히려 긍정적 요소로 보아야 한다.
공평과 편애
편집公平-偏愛
학생들은 어느 특정한 몇몇 어린이들에게 사랑을 주고 두둔하는 교사를 가장 싫어한다. 흔히 어버이가 어느 자녀에게만 편애하는 것이 좋지 않듯이, 교사는 어느 아동이나 다같이 사랑해 주고 도와주어야 한다는 것은 하나의 상식적 윤리이다. 그러나 편애(偏愛)의 현상이 상당히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소위 우등생은 귀여움을 받기 쉽고, 용모가 아름다운 어린이들이 또한 편애의 대상이 된다. 근래에는 학부형의 정치적·경제적·사회적 지위가 어린이들을 다루는 데 차별을 가져 오게 한다는 현상도 있다. 이것처럼 교권(敎權)을 상실시키기에 알맞는 위험스러운 것도 없다.
그러나 편애를 삼가는 것과 모든 어린이를 똑같이 취급하라는 것과는 같지 않다. 즉 공평이란 것이 어떤 학생이고 똑같이 취급하라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어느 어린이는 교사의 도움이나 사랑이 그다지 필요없는 데 반해서, 다른 어떤 어린이들은 절대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이다. 어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한 어린이는 교사에게서 사랑의 갈증을 채우려 한다. 저능아(低能兒)도 혼자서는 도저히 학교가 요구하는 부담을 감당할 수 없다. 즉, 어린이의 필요와 욕구에 따라서 적절한 지도를 하는 것이 교사의 임무이다. 퇴영적인 아동은 친구가 없기 쉬우니 교사가 친구노릇을 해 주고, 친구도 만들어 주는 데 노력해야 한다.
비밀의 엄수
편집秘密-嚴守
학생들은 어버이에게도 알리지 않는 스스로의 비밀을 존중하고 숭배하며, 또 이를 믿는 교사에게 말한다. 이 비밀은 교사에게만 알려드리는 것이지, 이것이 다른 학생이나 어버이에게까지도 알려지는 것은 싫어한다. 물론 비밀의 성질에 따라 다르겠으나, 학생의 건전한 성장·발달을 위해서나 공공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면, 이 비밀을 함부로 발표해서는 안 된다. 믿고 말한 비밀이 공개되면 학생은 배신당한 것으로 생각한다. 따라서 그 학생과 교사와의 인간관계는 부정적으로 변해지기 일쑤이다.
우리나라에도 카운셀링 제도가 생겼으나, 학생들이 응하기를 꺼리는 가장 큰 이유는 비밀보장에 대한 의심 때문이다. 학생들의 문제는 학습에 관한 것만이 아니라 사회적·정서적 문제도 많다. 그것도 반사회적인 양심에 거리끼는 일인줄 알면서도 어쩔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친우들이나 어버이에게 알리는 것을 꺼려한다. 교사는 이 방면에 대해 민감하고 또 수양이 되어 있어야 한다.
체벌보다 무서운 벌
편집體罰-罰
옛날에는 교사는 부모를 대신하여 매로 버릇을 가르쳤고, 서당(書堂)이라면 매를 든 스승을 연상할 정도였다. 오늘날에는 체벌을 금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근절되지 않고 있다. 체벌은 건전한 방법이 아니다. 왜냐하면 체벌을 받은 학생의 마음 속에는 교사가 기대하는 바와는 다른 반발현상이나 위축작용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체벌을 폐지한다고 하여 아동들을 벌하는 악풍(惡風)이 없어졌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눈으로 사람을 죽일 수도 있고, 입으로 힘을 못 쓰게 만들 수 있으며, 행동으로 압력을 내릴 길이 얼마든지 남아 있기 때문이다. 전혀 무시해 버리고 인간대접을 해 주지 않는 것같이 받는 사람으로 하여금 고통을 주는 벌은 없다. 타인 앞에서 모욕을 주고 빈정대는 등 가지가지 방법으로 학생을 괴롭혀 기를 죽이는 벌을 받느니보다는 차라리 체벌을 받는 것이 학생들에게는 더 나을 때가 많다.
솔선수범
편집率先垂範
무릇 지도자는 좋은 본보기를 보여주어야 한다. 교육자는 연소자를 지도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솔선수범이 더욱 필요하다. '선생님이 하시는데 어찌 우리가 그대로 있을 수 있느냐'라는 마음의 움직임이 그 교사의 지도력을 강화하는 것이며, 지도를 쉽게 할 수 있는 것이다.
노동뿐만이 아니라 예의범절(禮儀凡節), 창조적인 연구활동, 레크리에이션 등 모든 원리는 마찬가지이다. 솔선수범없이는 학생들을 지도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말뿐인 선생님'이라는 낙인이 찍히면 위선자(僞善者)의 대접을 받게 된다.
교직원 상호간의 윤리
편집敎職員相互間-倫理
교장과의 관계
편집校長-關係
교장도 교원임에 틀림이 없으나, 교장은 기관장으로 교사를 통솔하고 지도할 권리와 의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교장과 교사들과는 교사 상호간의 관계와는 다른 점이 있다. 이점을 악용하여 교사를 마치 하인(下人)과 같이 혹사하는 교장이 있는가 하면 '민주적 행정'을 오인하여 직원을 통솔하지 못하는 무능한 교장도 있다.
교장은 교사들의 인격을 충분히 존경해 주고, 교사의 창조성을 질식시키는 일이 없어야 한다. 교사의 모든 역량을 통합해 학교를 운영하는 것이 이상적이며, 학교행정에 효과를 얻을 수도 있다. 주종관계만을 심하게 따지면 교사들은 때때로 고의적으로 교장을 골탕먹이는 일도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또, 교장은 자기의 공을 세우기 위해서 교사들을 필요 이상으로 혹사해서는 안 된다. 민주적 교장이라면 공(功)은 교사들에게 돌리고 책임은 자기가 져야만 한다. 교사들은 흔히 교장을 비난하지만 교장은 교장의 입장이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교장은 학교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통할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교사들은 그를 중심으로 움직여 주어야 하고, 응분의 권위와 체면을 세워주어야 하는 것이다.
교사 상호간의 관계
편집敎師相互間-關係
같은 교사이기 때문에 서로 친밀감을 느끼면서도 '소인(小人)'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는 데서 오는 여러 가지 비윤리적인 일이 많다. 학생들 앞에서 동료 교사를 비평하거나 자신의 보신책(保身策)으로 학생을 분열시키거나, 자기와 사이가 나쁜 교사의 반이라 하여 그 반의 학생들을 소홀히 취급하거나 하는 등등의 사례가 있다.
개개인 교사들의 비윤리적인 행위로는, 다른 교사의 영전(榮轉)이나 명예를 방해하거나 손상시키기 위해 중상모략을 하는 등의 일도 있다. 또 신임교사가 부임하면 텃세를 하거나, 방어선이나 경계선을 치는 등의 일도 있다. 이런 모든 그릇된 풍조는 시정되어야 할 것이다.
교사와 시민간의 관계
편집敎師-市民間-關係
교사와 학부형간의 관계
편집敎師-學父兄間-關係
자녀들의 교육을 학교에 위탁하는 부모들이 가장 궁금히 생각하고 있는 것은, 학교에서 어떠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이다. 따라서, 평상시 수업과 다른 일이 생기면 곧 알려주어야 한다. 이 의무를 게을리하면 오해가 생기기도 한다. 특히 경제적인 문제가 따르면 여러 가지 억측이 생긴다. 집에 일찍 보내는 경우, 임시휴일의 경우라도 그 사유를 밝혀야 불평(不平)이 없어진다.
또 교사가 주의할 것은 학부형의 권력이나 금력에 아부하는 일이다. 이렇게 하면 교권(敎權)의 상실은 물론이고, 어버이들이 주고받는 이야기 가운데서 어린이들은 예민하게 교사의 사회적 지위나 인간으로서의 위엄성(威嚴性)을 판정한다.
일반사회인과의 관계
편집一般社會人-關係
우리 사회는 물론이고 세계 어느 곳에서나 교사에 대한 사회인의 기대는 윤리면이 가장 크다. 지식전달의 기대는 다음의 문제이다. 일반시민에게는 허용되는 행위가 교사에게는 금지되거나 제한되는 경우가 많다. 교사는 그가 봉사하는 지역사회의 관습을 잘 인식하고, 거기에 어긋나는 일이 없어야 한다. 교사는 또 윤리적으로 그 지역사회의 모델이 될 뿐만 아니라, 문화의 전달자로서, 나아가서는 문화의 창조자로서의 인적자원으로서 그 지역사회에 봉사해야 한다. 현대 학교는 지역사회학교를 지향하여 나가고 있으니, 학교가 지역사회 센터로서의 역할을 잘하기 위해서는 교사들이 그만한 준비를 해야 한다.
교직에 대한 윤리
편집敎職-對-倫理
교사는 모름지기 교직에 대해 긍지를 가져야 한다. 교직은 옛날부터 물질적 보수는 적은 곳이지만, 자라는 생명체의 천부(天賦)의 자질을 최고도로 발전시키는 책무를 가졌다는 데에 큰 의의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 교직에 있다는 사실을 감추려고까지 하는 교사가 있다. 이러한 교사는 자기의 성직(聖職)에 대해 스스로 모독을 하고 있는 것이다.
교직이 고귀한 전문직이면 여기에 따르는 윤리가 있건만, 때로는 배경을 이용하여 영전운동을 하거나 금력으로 매수를 하려는 경향마저 있다. 또 교과서 채택을 싸고 일어나는 불미스런 흥정이나, 연구물의 표절이나 복사를 하는 일도 있다. 또 교직을 적당한 직장이 생길 때까지의 징검다리로 이용하는 일도 있다. 이러한 태도로 교직에 임하고 있다는 것은 본인과 학생을 희생시키는 일이며, 신성한 교육계를 흐리게 하는 행위이다. 교직은 인간이 자라는 것을 보고 기뻐하고, 그를 도와주는 것을 사명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일하는 곳이다. 여기에는 물질로 계산할 수 없는 보수가 있다.
교사의 교양
편집교사의 교양
편집敎師-敎養
교사는 교육자·교직자 또는 교육노동자 등 여러 말로 불리고 있다. 따라서, 그와 같은 호칭에 나타나 있듯이, 교사가 취해야 할 자세나 교양에 관한 여러 가지 다른 견해가 나타나며, 교사의 교양에 관해서도 여러 가지 논의가 많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교육의 본질적 입장에서 생각하여 교사의 자세적 특질을 살펴보고 교사의 교양에 관한 고찰을 시도해 보기로 한다.
인간 형성자로서의 인간적 교양
편집人間形成者-人間的敎養
교육이란 말할 나위도 없이 인간을 형성하는 작용이다. 그리고 그 과정은 인간 대 인간의 관계에서 이루어진다. 슈프랑거(E. Spranger, 1882-1963)가 "교사란 언어의 최고 의미에 있어서, 인간의 형성자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진리라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이 인간형성에 있어서 가장 필요한 것은 넓은 교양과 인간성(人間性)의 구명(究明) 내지는 인간에 대한 깊은 애정이다. 교사는 인간 형성자로서 넓은 교양과 전인적(全人的)인 입장에서 사물을 보고 생각하는 힘을 양성해야만 한다. 옛날에는 교원 양성기관이 폐쇄주의(閉鎖主義)·형식주의 때문에 전혀 융통성이 없는 '사범형(師範型)'을 만들어 내고 있었음에 대해서 근대의 민주적·능률적인 교원양성제도가 개방주의(開放主義)의 이름 밑에 대학의 공통된 교양과정으로서 일반 교양을 중시하고 있는 것은 그만한 까닭이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따라서 교사는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으로서, 또한 현재의 역사·사회의 움직임에 관한 넓고 높은 견식(見識)과 교양을 몸에 지녀야만 한다. 또한 오늘날처럼 자연과학이 놀라울 정도로 발달하고, 한편으로는 자연과학의 힘 그 자체가 인류의 멸망을 초래할지 모르는 위기에 섰을 때는, 인간의 지식이 보편성에 입각한 양식으로 지탱되고, 또한 종교적인 것의 뒷받침이 꼭 필요하다고 느껴진다. 이러한 의미에서 현대의 교사는 넓고 깊은 시야에 입각한 교양을 지녀야 된다고 생각된다.
더욱이 인간 형성자로서의 교사는 인간성의 구명(究明), 인간성에 대한 경험이 풍부한 교양을 갖추고 있어야만 한다. 이를 위해서는 심리학이나 철학 등의 교양도 물론 필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결코 충분하다고 할 수 없다. 더욱 중요한 것은 문학적 교양, 예술적 교양의 수득(修得)이며, 이를 통해서 아주 풍부한 인간적인 체험을 갖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동양의 어느 작가는 "시인이란 인류의 교사"라고 말한 적이 있고, 또한 "인류 최고의 교육은 예술이다"라고 강조하였다. 교사로서는 마땅히 음미해 보아야 할 말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교양으로서의 교육학 강좌에는 동서고금의 유명한 고전(古典) 작품이 채택되는 경우가 많다.
한편, 더 나아가서 인간형성에 필요한 것은 사랑이다. 사랑이야말로 인간형성의 근본이라고 할 수 있다. 슈프랑거가 6개의 생활유형(生活類型) 중 교사의 이상적인 유형으로서 사회형(社會型)을 들고, 그 형의 중심에 '사랑'을 두고 있는 것은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다. 사랑에 있어서는 아가페적 사랑과 에로스적 사랑이 있는데, 전자는 종교애(宗敎愛),후자는 가치애(價値愛)이다. 교육자의 교양으로서는 진리사모(眞理思慕)·진리추구(眞理追求)의 태도와 함께, 아가페적인 종교적 교양이 필요하다. 실용주의자(實用主義者)인 듀이(J. Dewey) 마저도, 그의 <교육신조(敎育信條)>에서 "교사는 항상 진실의 신(神) 예고자, 진실의 신 나라로 인도하는 안내자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전문적 직업인으로서의 전문적 교양
편집專門的職業人-專門的 敎養
교육을 생활의 수단으로 하는 근대 직업인으로서의 교사는, 학교제도가 정비되기 시작한 근대에 와서 발생하였다. 오늘날 교사는 현대의 분업사회(分業社會)에서 하나의 전문직업인이다. 교사는 예부터 볼 수 있듯이, 부자상전적(父子相傳的)인 경제적 요소가 결여된 직업이 아니라, 교육 그 자체로 생활의 양식을 얻고, 평생의 직업으로 삼아온 것이다. 따라서, 근대사회의 전문직으로서 그 의의를 잘 인식하고, 여기에 필요한 과학적 지식과 전문적 기술을 습득해야만 된다. 전교과담임(全敎科擔任)과 1교과 담임간에는 교사의 교양에 있어서, 광협심천(廣狹深淺)한 현상이 나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만, 끊임없는 문화의 발전과 사회의 진운(進運)에 대처해 나가면서, 교사 자신도 끊임없이 학문에의 정열을 상실함이 없이 과제(課題)를 위해 노력·정진하는 태도가 필요하며, 또한 끊임없이 앞으로 발전하여 가는 교사만이 진실로 학생에게 좋은 교사가 될 수 있다. 교육사업의 결과는 다른 여러 사업처럼 단적(端的)·직접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비교적 단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입학시험의 결과 정도이다. 그 때문에 교사의 교양이 어느 한 쪽에만 편중(偏重)되어서는 안 된다.
정신기술자로서의 교직적 교양
편집精神技術者-敎職的敎養
교사란 이상 말한 것처럼 인간적 교양과 전문적 교양을 필요로 하는 것인데, 그 같은 교양을 교육실천면에서 충분히 살리기 위해서는 교육기술의 연구·수득이 필요하다. 그것은 인간형성에 있어서 정신기술자로서의 교양인 것이다. 위대한 교육자인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교육을 '산파술(産婆術)'이라고 불러, 기술로서의 교육을 주창한 것은 매우 뜻있는 일이다. 그러나 교사는 기술자라고 해도 다른 일반적인 기술자와는 다르다. 그것은 이른바 정신의 기술이어서, 그 대상은 정신적 존재이며, 그 자신 속에 의지의 자유를 가지되 내면적인 자기발전을 통해서 하나의 목적으로 향하는 살아 있는 인간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다른 기술에 있어서는, 그 대상이 목적이 없는 인과법칙적(因果法則的)인 자연물인 것과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으며, 바로 그곳에 교육기술의 특수성이 있고, 정신기술자로서 교사의 특별한 소양이 요구된다.
정신기술자로서의 교양에는 우선 교육심리학이라든가 교육사회학이라는 교육과학적 교양이 필요하다. 교육심리학은 학생의 발달단계에 맞추어 어떠한 교육방법을 가지고 행할 것이라는 방법기술을 나타낸 것이며, 교육사회학은 지역이나 집단의 학생을 어떤 방향으로 어떤 방법을 가지고 이끌어나갈 것이냐에 대해서 풍부한 교시(敎示)를 준다. 또한 교육원리나 교육사는 교육의 이론과 실제에 관해서 교육활동을 올바르게 추진하여 가는 방향을 지시해 줄 것이다. 교사는 이와 같은 교직적(敎職的) 교양에 대해서도 끊임없는 관심과 노력을 경주해야 할 것이다.
현대의 교육기술은 그 범위가 아주 넓으며 다종다양하다. 예를 들어 교육과정 편성기술, 학습지도, 생활지도의 기술, 학습효과를 판정하는 평가기술, 슬라이드, 라디오·텔레비전·영화·테이프 레코더 등의 과학적 지식 기능을 필요로 하는 일련의 시청각교재를 취급하는 기술, 더 나아가서는 그룹 다이내믹스(group dynamics)에 의거한 집단편성의 기술, 티칭 머신을 조작하는 기술 등, 현대의 교사는 이 방면의 교육기술적 교양을 갖추지 않으면 시대에서 낙오될 것이다. 그러나 이들 교육기술적 교양도 교사의 인간적 교양, 전문적 교양의 뒷받침 없이는 도저히 그 효과를 발휘할 수 없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요컨대 교사의 교양에는 인간적 교양·전문적 교양·교직적 교양의 3자가 삼위일체(三位一體)를 이루어, 3자가 서로 조화되고 그것들이 인격적으로 통일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다. 그러나 이것은 교육의 대상이 전교과(全敎科) 담당을 원칙으로 하는 초등학교 학생이냐, 혹은 교과담임을 원칙으로 하는 중학생·고등학생이냐에 따라, 그 3자의 비중에 스스로 경중(輕重)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