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8일.

자기는 안 가겠다고 몇 번이나 말씀했으나 들은 체 만 체하시고, 부친께서 그와 상의하여(상의보다도 그가 하자는 대로) 혼인은 그 날로 정하셨다고, 허의 편지를 받은 영식은 벌써 가슴이 무엇에 쫓기는 것 같았다.

암만하면 그 날 혼인이 될 줄 아나? 하고 언뜻 이런 소리도 하였으나, 그래도 책상 위에 걸린 일력을 떼어 들고 11월 18일 날짜를 찾아보아졌다. 목요일이었다. 벌써 오늘이 11월 5일! 이제 2주일도 남지 못했다.

어떻게 해야 좋을까, 이것은 벌써부터 속을 태워 오던 생각이지마는 이제는 이제는 우리 집에서만 허락한 대도 소용이 없이 되었다. 지금 와서는 오직 도망! 그것밖에 취할 길이 없이 되었다. 그러나, 지금 어떻게 도망갈 꾀가 있나……, 어디로 가서 어떻게 살아갈 수가 있을까……, 생각할수록 가슴만 뻐개질 것같이 무겁고 답답할 뿐이고, 졸업만 한 뒤였다면……, 하는 소리만 한숨과 함께 덧없이 반복되었다.

다음 다음 날 일요일에는 다른 때보다도 빨리 예배당에서 허를 기다렸으나, 웬일인지 그는 영 오지 않았다. 웬일일까…… 하는 생각이 영식이 가슴을 더 번민케 하였다. 속을 썩이어서 집에 파묻혀 있는가, 혼인 때까지 그 부모가 내보내지를 아니하나? 그는 집에서는 지금 혼인 준비에 분망하렸다. 아아, 그 속에 파묻혀 있어서 허가 오죽이나 가슴이 타랴. 별별 궁리를 다 하여서, 내 편지만 고대하고 있을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허의 사진을 책상 위에 들고 앉은 그의 머리에는 거번(去番)에 금화산 뒤 능림 속에서 둘이 이야기하던, 그 모양이 떠돈다. 속상하는 듯이 옆의 풀 한 줌을북 뜯어서,

“아주 먼 ── 사람 없는 데가 가서 살았으면 좋겠어요.”

하던 그 태도가 눈에 보이고, 그 말 소리가 귀에 들리는 것 같다. 너그럽지 못한 여자의 속을 그렇게 태우는 그가 지금 얼마나 나의 무능을 탄식하고 있을까……. 그까짓 주변 하나를 이겨 내지 못하는 남자! 자기가 스스로 생각한 이 소리가 영식의 마음을 더 괴롭게 조였다.

주변없는 사나이! 이 소리로 더 마음을 울리고, 끓이고, 태우고 하는 영식이는 두 번째나 부친의 문갑을 열고 한성 은행(漢城銀行)의 통장과 소절수책(小切手冊)을 주물렀으나, 부친의 허리띠에 달린 염낭[囊] 속에 들어 있는 인장을 어쩌지 못하여 만질 때마다 낙심하였다. 그것도 틀렸다! 하고 절망의 소리를 발할 때 그의 머리는 벌써 단말마(斷末魔)에 미쳤다.

벌써 겨우 1주일 남았다. 파멸의 날이 절박해 왔다. 고민 고민하다가 영식이는 에에 얼른 시집이나 가 버렸으면, 이런 생각까지 하였다. 그러나 그러나 그 날 밤의 일을 언뜻 생각할 때에 그는 몸이 쭈뼛하였다.

죄악이다! 그의 머리는 이 전기에 찔려 떨렸다. 아아 어떻게 할까……. 주변없는 남자! 이 소리는 또 그를 몰아세웠다. 어떠한 수단으로든지 이 주일 안에 처단을 하여야 한다. 어떠한 희생을 바치든지…….

단말마에 미친 그는 기어코 윗집 백부의 철궤를 생각하였다. 집어만 가지고 달아나서 자세한 상서를 드리면 그만이지, 설마 나를 고발을 하려고……. 그 집에 가면 사랑 전당포에도 돈궤가 있고, 안방에도 철궤가 있다.

기회를 엿보아 틈만 있으면……, 하고 이렇게 생각을 정하니까, 마음이 조금 덜 무거운 것 같다.


전부터 자주 가지는 않았지마는 허와의 일을 그 집 사촌 형이 조모님께 여쭈었다는 뒤부터는 같은 모화관(慕華館) 한 동리건마는 일체 가지 아니하던터이라, 이제 새삼스럽게 가는 것도 우습고 이상하지마는 그래도 어쩌는 수없어 다만 사촌 형만을 피하기 위하여 매일 저녁 때 가까워서 그가 일수 받으러 나가고 없을 때에 갔다. 백부는,

“공부하느라고 그 새 한 번도 아니 왔니?”

하시고 백모는,

“아이구, 너 오래간만에 보겠구나, 그런데 얼굴이 왜 그렇게 못 됐니”

하시는 말씀을 들을 때에 저절로 주춤하기도 하였으나 가족답게 친척다운 친하고 사랑스런 맛을 그윽히 느꼈다. 누구보다도 모든 일에 동정까지 해주실 것 같다. 그러나 잠자코만 있었다.

“이 닭을 언제 사 오셨어요? 그놈 큰데요. 얼마씩이나 주셨어요? 새벽엔 잘 울어요? 여기는 고양이가 오지 않아요? 아랫집에는 고양이가 어떻게 많은지……, 그 대신 쥐는 적어요.”

하고, 마음에 없는 소리를 애써 늘어놓으며 기회를 엿보기를 2∼3일째 하였다. 그러나, 전당포에는 서사가 잠시도 떠나지를 않고, 안에는 백부가 출입을 일체 아니하시고 하여 틈이 없었다. 그러나 2∼3일 더 틈을 보면 기회가 있겠지 하고 그리 낙심하지 않았다.

놀러 갈 겨를이 없어서 별로 가지도 않았지만 한 번 큰집에 가는 길에 동무를 만나서 그와 함께 늘 모여 노는 사랑에 가니까, 장난 좋아하는 김이 빙글빙글 웃으면서 곡조도 잘 모르는 장한몽가(長恨夢歌)를 말까지 고쳐 가지고,


인왕산 밑 성길을 산보하는

최영식과 허정숙의 양인이로다.

둘이 함께 산보함도 오늘뿐이요…….


하는 것을 옆에 있던 다른 사람들이 김을 보고, 눈을 흘기며 혀를 차는 얼굴에는 그윽히 자기에게 동정하는 빛이 보였다. 그 기색을 본 뒤로는 자기 몸이 갑자기 더 애처롭고 심산하게 생각되었다. 매일 기회를 보지만, 기회는 이때껏 얻지 못하고 허의 혼인은 내일 모레로 닥쳐왔다. 너무 근심을 하고 속을 태운 탓인지, 머리가 띵하고 소변이 순하지를 않아 무슨 병증 같기도 하여 염려되었다. 벌써 모레인데 이제는 모두 허사다……. 낙담 실망!

기진 역진하여 이제는 다시 어찌할 힘도 없이 늘어진 영식이가 해질녘에 집에를 들어가니까, 사랑 많으신 조모님과 모친께서 근심하시며,

“이 애야, 네가 요새 왜 밥도 잘 안 먹고 얼굴이 저렇게 못 되어 가니…….”

하시는 말씀을 듣고, 가슴이 벌꺽 터질 것 같고, 어느덧 눈물이 가득히 고여서 대답도 아니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부모가 너무 완엄하셔서 일생의 대사를 어린 몸이 저 혼자 이때껏 애를 쓰고 다닌 일을 생각지 못했고, 부모가 너무나 야속하였다. 그런 생각을 하노라니, 벌써 눈물이 흘러서 옷자락에 떨어지므로 그대로 자기 방으로 돌아왔다.

그 밤에 자리에 누워서 내가 이대로 죽으면……, 생각이 나서 한없이 부모의 일이 야속하여 자꾸 울었다.


영식이는 번민하는 대로, 허는 자기 집에 있는 채로 기어코 혼인날은 왔다.

어떻게 되려노……, 허가 그냥 갈 터인가……. 허가 신부복을 입고 그 자동차를 그냥 탈 터인가, 그리고 예배당에를 가서 그 층계를 밟고 목사의 앞에 나가서……, 아아 하나님과 주님 앞에 맹세를 드릴 터인가. 처녀도 아닌 몸이, 아아 죄악이다. 열이 오를 대로 오른 그는 학교에도 아니 가고 중얼거렸다. 그가 갈 터인가, 처녀 아닌 그가 잠자코 갈 터인가, 신부복을 입을 터인가, 뜻없는 남자와 백년을 살겠다고 주(主) 앞에 맹세를 드릴 터인가.

그 때 목사가 일반을 향하여, ‘여러분, 오늘 이 두 사람이 결혼을 하는 데 대하여 이의를 말씀하실 분이 계십니까’ 하고, 물을 때 오오 그 때 아아 그 때 내가 가서, ‘있소.’하면, 어찌될 터인가.

“그 신부는 이 몸 나와 모든 형식보다도 실제로 결혼한 지가 오래였소.”

하면, 어찌될 터인가? 그럼 허가 어쩔라노 ──.

아아 그래도 안 입으리라. 강제에 어쩔 수 없으면? 그러면 자살? 아아 허가 자살을 하여 ──, 아아 어찌되려노, 그가 자살을 하고 내가 따라 죽고, 그러면 고집을 세우던 부모들이 후회를 하겠지. 저 좋아하는 사람하고 혼인을 해줄걸, 공연히 우겼지 하고 울겠지……. 그는 벌떡 일어나 옷은 두루마기 그대로 모자만 집어 얹고 집을 나섰다. 어디를 갈 곳도 없이 그는 어슬렁어슬렁 감영(監營) 앞에 이르렀다. 덮어놓고 문 안 들어가는 전차에 올라탔다.

전차가 새문턱을 지날 때에, 오늘은 이 곳 예배당에서 예식을 한다니까 이 길로 자동차가 다니리라 생각하면서 정동길을 보았다. 그 길에는 서양 부인 두 사람이 걸어오는 이뿐이고 아무것도 없었다. 차가 흥화문(興化門) 긴 담을 지날 때 비로소 영식이는 어디를 갈까 생각하였다. 연극장에나 갈까 하였으나, 목요일이니까 낮 흥행이 없었다. 차가 광화문 앞을 지날 때, 본정희락관(本町喜樂館)에 매일 낮 흥행이 있는 것을 깨닫고 바로 황금정에 가서 내려 본정을 꿰뚫고 희락관으로 들어갔다. 연속사진(連續寫眞), 일본 구극(日本舊劇) 등을 좋은지 언짢은지 알지도 못하고 멀거니 앉아 그래도 끝까지 보았다. 오후 4시까지 잠시 번민을 잊고 있다가 다시 밖으로 나와 가슴 쓰린 번민을 또 할 생각을 하니까 몹시 덧없었다. 그러니, 이번에는 도리어 오늘 혼인 일이 몹시 궁금하여서 바로 집으로 나왔다. 그러니, 어디 누구에게 오늘 소식을 들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알게 되겠지 ── 하고, 집에 들어가니까 의외에 허에게서 편지가 와 있었다. 심히 이상하여 급히 뜯어 본즉 연필로, 암만해도 인간의 일을 조종하는 운명의 실줄이 매어 있는가 봅니다. 필경에 주님도, 부모도, 세상도 모두 속이고 허위와 죄악의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뜻아닌 생활에 끌려가는 이 몸이 무슨 행복과 무슨 안락을 바라겠습니까, 며칠이나 살는지 세상을 떠날 그 날까지, 귀하를 그리워하다 죽겠사오며, 영원히 남이 될 귀하에게 일생에 마지막 드리는 붓이오나 쓸 틈도 없었고, 눈물이 종이를 적시어 길게 쓰지 못하옵고, 오직 지옥의 생활로 들어가는 몸이 오직 한 구절 ‘괴테’의 시를 드리고 갑니다.

그나마 넉넉히 피할 수 있는 길을 부모의 억제로 희생이 되오니 더욱 애통합니다.


희생의 고기[肉]는 여기 있도다,

그것은 양도 아니고

아아! 그것이 인육의 희생일 줄이야!


마지막 당신의 CS 상


거듭 그 밤에 배달된 신문에 신랑 신부라 하고 신랑과 허의 사진이 나란히 났었다.


그 뒤부터는 영식이는 거의 실신한 사람이었다. 늘 눈에 보이는 것이 월암(月岩) 바위 위의 그 날 밤 일이었다. 아아 그는 처녀는 아니었다.

그래도 지금은 시집을 가서……, 남편을 섬기고……. 영식이는 그 뒤, 자리에 누워서 고민할 때에 언뜻 이런 일을 생각하였다. 말로는 희생이니 무어니 하여도 기실은 싫단 말 없이 간 것이 아닐까……. 미국에서 나온 이!

저네들 일부 여자가 자유의 나라라고 아메리카 천지를 동경하는 것도 사실이고, 이상의 남편을 미국 유학생에 구하려는 것도 숨기지 못할 사실이었다. 아아 허도 그 한 사람이 아니었을까! 아아 싫단 말 없이 갔다! 아니 아니 지금 여자가 모두 그래도 허에 한해서는 아니다. 분명히 그렇지 않다.

그것은 내가 믿는다. 희생이었다! 희생이었다! 매일 매야 이것으로 헤매었으나, 이 날까지 어느 편이 그 옳은 관찰인지 알지 못했다.

그는 얼빠진 꼴로 길을 걷는다. 부드럽고, 희고, 곱던 얼굴은 얄미운 편에 가깝게 누렇고 말랐다. 무슨 중병을 치르고 난 사람 같았다. 그는 길을 걷는다. 무엇 잃어버린 사람같이…… 그리고 길로 가다가 차에서나 길에서나 여자가 지나가는 것을 본다. 볼 때마다 잠시 잊었던 그 날 밤의 일이 생각난다. 아아 저 여자도 다 여자인 이상 반드시 비밀이 있다. 저렇게 허처럼 태연히 지나간다. 그러나, 그에게 비밀의 죄악이 없다고 무얼로 변명을 하느냐, 무얼로 증명을 하느냐. 아이 저기 또 여자 하나가 온다. 이 세상이 넓다 하기로 그 누가 저 여자의 신성을 증명할 자냐. 아아 비밀이다. 세상은 비밀이다.

그의 이 관념은 나날이 도를 가하여 간다. 그 날 밤의 일이 눈에서 사라지지를 않았다.

그 다음 일요일의 오정 때, 문 안 가는 차에 그는 탔다. 그 차가 새문턱을 지날 때, 정동 예배당에서 나온 이인지 트레머리한 여자와 중산모(中山帽) 쓴 이가 많이 기다리다가 모두 올라 탔다. 그 중에 가장 새 양복 입은 신사 하나와 그 앞에 새 옷 입은 여자 하나, 그가 허고 허의 남편이었다. 영식이는 쭈뼛하였다. 머리가 화끈화끈하고 가슴이 울렁울렁하였다. 뒤미쳐 그 뒤 신사가 차표 두 장을 내어미는 것을 보고, 그는 참다 못하여 고개를 돌렸다. 이윽고 자리를 잡아 앉은 허가 영식이를 보았다. 영식이 역시 가슴을 울렁거리면서도 고개는 또 그 부인을 향하였다. 할 수 없는 듯이, 그러나 태연히 허가 반쯤 일어나 고개를 굽혀 인사하였다. 이것 저것 생각할 사이도 없이 무의식적으로 모자 끝에 손을 대고 고개를 잠시 굽혔다. 그리고는 저편에서 어쩌거나 더 볼 용기도 없이 고개를 돌리고 아주 무심하게 일없이 앉았다가, 차가 흥화문 앞에 쉬일 적에 그는 급히 뛰어내렸다. 차가 저만큼 지난 후에 그는 달아나는 차를 바라보며, 아아 그는 역시 부인이었다! 하였다. 그는 다시 걸었다. 걸어서 도로 새문 밖을 향하였다. 그는 또 중얼거렸다.

그가 흔히 전에 처녀가 아니었었던 줄을 누가 아느냐, 남편도 모른다. 그의 부모도 모른다. 아무도 모른다. 여자의 비밀을 누구라서 알 것이냐, 그 밤에 떴던 그 별이 말을 아니하는 이상, 그 천공이 말을 아니하는 이상, 땅이 말을 아니하는 이상, 누구라 그 비밀을 알 자이냐. 정부의 비밀은 샐 때가 있다. 궁내성(宮內省)의 비밀은 알 수가 있다. 그러나, 여자의 비밀을 누구라 알 수가 있느냐. 아아 저기 여자가 온다. 점잖은 여자다. 쪽을 지었으니 남편 있는 여자다. 그러나 그 이상의 비밀을 누가 아느냐.

중얼거리면서 그는 금화산 길을 향하였다. 산에는 별이 따뜻하지만 그래도 산상이라 바람이 차다. 그는 털썩 주저앉았다. 눈 앞에 내려다보이는 경성시가를 보고, 아! 비밀의 세상에 무엇을 안다고 와글와글하는가……. 바둑돌같이 늘어놓인 지붕, 저것이 모두 죄악이 숨은 집이다. 모두 비밀의 소굴이다! 아아 세상의 여자, 그의 신성을 누구라 말하느냐, 그의 무죄를 누구라 증명하느냐. 집에서는 나의 혼처를 정해 놓았다. 내년 봄에 혼인을 하라한다. 그렇지만 그 여자의 일을 누가 아느냐? 입고, 먹고, 학교에 다니는 것은 그 부모가 알겠지, 그러나 어떻게 그 이상의 일을 부모는 아느냐. 그가 어느 때 어느 날 어떤 곳에서 어떤 청년, 어떤 연인하고 어떻고……, 아아 여자의 비밀을 누구라 아느냐? 하늘과 땅, 별과 등불, 그것이 허도 그런 것을……, 허도 비밀은 있는 것을……, 아아 허는 처녀가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 시집에서 잘 산다 . 그의 비밀을 세상은 모른다. 세상은 속는다. 여자 있는 곳에 반드시 죄는 따른다. 천국 천국하여도 만일 여자가 있으면 반드시 거기도 죄악은 있다. 아아 여자 없는 곳, 그 곳이 천국일 것이다.

그 후 4시 쯤 뒤, 해 저물 때, 실심한 영식의 몸은 인천의 인적 드문 바닷가 모래 위로 털썩 엎드려서 희고 고운 모래 위에 허정숙 석자를 쓰고는 지우고, 지우고는 쓰고 있었다.

그는 아까 인천 정거장 매점에서 봉함 엽서 한 장을 사서, 가장 친한 친우인 임에게 이렇게 써 보냈다.

‘임 군! 오랫동안 폐도 많이 끼쳤고, 실례도 많이 하였소이다. 그러나, 나는 지금 인천 해변에서 먼 길을 떠나려 하오. 어디든지 자꾸 가려고, 천국이 보일 때까지, 여자 없는 죄 없는 세상이 보이기까지 자꾸 가려오. 모든 것을 그대로 두고 그냥 떠나가오. 내내 평안히 계시기 바라고 마지막 이 붓을 놉니다.’


마지막 날 세상을 가려는

최영식(崔英植)


그는 이윽고 벌떡 일어섰다. 바다 저 어귀에 어디로 가는 배인지 돛단배가 표연(飄然)히 떠 있다. 아아 저 배를 타고 먼 ─ 먼 ─ 곳으로 갔으면 끝없이 자꾸자꾸 가 보았으면…… 하였다. 그러나, 즉시 아니 아니 아무리 간대도 이 지구에는 여자 없는 나라는 없다. 아아 이 세상에는 죄악 없는 나라는 없다.

그는 부르짖는 소리가 처량하게 흘렀다. 그는 고개를 돌려 시가를 바라보았다. 해가 막 저물어 세상이 조금씩 어두워 간다. 어느 틈에 그의 눈이 젖어 있었다.

해는 아주 저물었다. 그는 한 걸음 한 걸음 바다를 향하고 걷는다. 바위라도 삼킬 듯한 큰 물결이 자꾸 그의 앞으로 밀려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