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밤/중편
<1>
편집아아 무서운 죄악의 그 날 밤! 왜 내가 그런 일을 하였던가…….
불의의 그림자는 오래도록 영식의 가슴에 머물러 있어, 그를 고민케 하였다. 순결, 신성, 그것이 모두 지금의 영식에게 전혀 헛문자였다. 자신에도 의외인 그날 밤의 행사가, 그 찰나까지 그를 존귀히 알고 믿고 또 위하던 신성의 보옥을 소호의 여지도 없이 깨뜨려 버린 것이다. 시커먼 먹으로 함부로 흐려 버린 것이다.
어째서 그런 나답지 않은 마음이 생겼을까……. 어떻게 내게 그런 야비한 짓을 할 마음이 생겼었을까…… 기어코 나는 비열한 자이고 말았다. 하등류(下等類)였다.
농담 잘하는 김 군이,
“흥, 그 피아노의 녹신녹신한 섬섬 옥수를 턱 잡고……. 흥 참 행복자일세.”
하며 비웃는 편보다도 부러운 듯이 떠들 적에 자기는 농담인 것도 잊고, 몹시 그를 천시하였다. 저런 사람이 이성을 접하면 반드시 그 손목을 잡고 별별 추행을 하리라 추상하고 내심으로 그가 자기의 벗임을 잊은 것같이,
“에이! 더러운 놈.”
하였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남자들이 이렇게 모이면 여자의 소문을 이렇게하고, 이런 야비한 소리를 하면서 웃고 떠드는 줄 알면, 그런 여자가 남자를 어떻게 생각을 할꼬……하고 일종 가벼운 공포를 느꼈다.
어느 때는 여럿이 모인 틈에서, 남자들은 모이면 여자의 이야기를 저렇게 태연히 떠드는데, 나는 너무도 남자로서는 약한 것이 아닐까 하고 의심도 하였다. 그런데 그 날 밤에 한하여선 내가 그게 웬일이었을까? 세상에 그 일이 들춰날 때에 사람들은 얼마나 야만시할까. 얼마나 비열한 자라고 치소할까……. 그렇게 되는 날 나는 무슨 낯을 들고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세상에는 영구한 비밀이 없다 하는데 이 일에 한하여 영구히 드러나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을까. 아아 ── 남이 알게 되는 날 어떻게 무슨 낯을 들란말이냐. 남은 그만두고 우선 집에서부터 어쩌랴 ──. 영식은 그런 일을 생각할수록 머리가 무겁고, 희미해지고, 앞일이 아득하였다. 그는 때때로 그 고민 속에서 헤어나오고자 하였다.
지나간 일은 다시 좌우치 못할 것이거니와 선후책으로야 종전의 결심대로 자기가 허에게 말로나, 편지로나 말한 그대로 학교를 마치기 전에 지금 약혼 중인 것을 파혼을 하고, 허와 자기와의 결혼을 부모가 허락하시도록 주선하면 그만이라 하였다. 비밀이야 허와 내가 입 밖에 내지 아니하는 이상, 결코 발로될 리는 없을 것이라 하였다. 그래서 이런 생각으로 자기를 심한 번민 중에서 구해내려 하였다. 그러나 아무래도 피하지 못할 절대 책임과 어떻게든지 허의 일신 일생을 잘 주선하여야 할 절대 의무를 싫거나 좋거나 짊어지게 되었음을 생각할 때에는 무엇인지 무겁고 캄캄한 느낌이 머리를 흐리고 흐리고 하였다.
이상한 일로는 자기가 약혼한 것이 아닌 이상 반드시 결혼, 동거해야 할 의무는 없다 하여, 그와 파혼을 하고 허와의 결혼에 허락을 얻도록 하리라던 결심이 약해진 것이다. 그것이 새로운 심려였다. 지금의 자기에게는 그렇게 하는 수밖에는 조금도 다른 길이 없는데, 아무리 애를 태워도 완엄한 부모의 앞에서 그런 말이 나올 것 같지 않았다. ‘지금 젊은 애들은 하나도 쓸 놈 없더라.’ 그렇지 않으면 ‘부모의 말 안 듣고는 되는 놈이 없느리라.’ 늘 이런 말씀을 하던 것이 지금 와서는 더 어렵고 무겁게 울렸다.
“왜 이녀석아, 하라는 공부는 아니하고 동네 여학생을 쫓아다니니? 벌써 색시를 정해 놓고 학비까지 대어 주는데 색시 집에서 들으면 좋아하겠다. 왜 그 하는 일 없이 트레머리에 모양이나 내고 예수교 같은 데로 사내나 후리러 다니는 년을 왜 쫓아다니니? 아니긴 무엇이 아니야. 편지질을 밤낮 한다는데 너의 애비가 그런 줄 알아보아라. 너를 지금 철석같이 믿고 있는데, 네가 트레머리한 계집애하고 맞붙어 다니는 줄 알면 가만 둘 듯 싶으냐”
하고, 어디서 누구에게 들은셨는지, 조모님이 이렇게 하시는 말씀에 그는 너무나 의외의 일에 놀랐다.
“누가 그래요?”
“누군 누구야. 저 이웃집 형이 보았다더라. 밤이 이슥했는데, 네가 그 계집애하고 나란히 서서 아래 덕국 공관(독일 영사관) 골목에서 나오더라드구나. 미장가 전 녀석이 그게 무슨 짓이냐. 그년은 무슨 계집이길래 남의 집 장가갈 신랑을 꼬여 가지고, 밤새도록 끌고 다니니……. 너 이 다음에 또 그런 소리가 들려 보아라. 네 아비에게 일러서 아주 집에를 못 들어오게 하든지, 방에다 꼭 가두고 나가지를 못하게 하든지 할 테니…….”
“누가 그런 보지 못한 소리를 잘 해요. 윗집 형은 왜 일수나 잘 받으러 다니라지, 제 뒤 쫓아다니래요? 본 소리 못 본 소리를 모두 어른께 여쭙고…….” 하고는 벌떡 일어나서 옆에서, 옷 꿰매시던 모친이 무엇이라고 말씀을 하는데 듣지도 아니하고 밖으로 나왔다. 다만,
“저런 녀석 보게!”
하는 조모님의 소리만 뒤로 흘려 들었다. 그 후에도 조모님과 모친은 자주 그런 말씀을 하였다. 그럴 적마다 영식이는 밖으로 나와서 친구의 집을 찾아가서 늦도록 놀다가 돌아왔다. 집에서 그런 소리를 듣고 불쾌하여 나온 영식이는 친구 틈에 가서 자네는 행복자일세. 처복이 좋으이 하거나, 혹은 흥, 두 음악가가 턱 결혼을 해가지고 양옥집 하나 조그마하게 짓고, 조석으로 내외가 하나는 피아노 타고, 하나는 사현금 타고…… 그런 팔자가 어디있냐……, 하고 부러운 듯 조롱하는 소리에 도리어 위안을 얻는다. 그리고, 집에 들어가면 전보다 더 몇 갑절 부친의 눈이 무서웠다. 혹시 그 일을 벌써 알고 계시지나 아니한가 싶어 방금 그 말씀을 꺼내시지나 아니하는가 하여 될 수 있는 대로 부친의 앞을 피하였다. 그럴수록 번민은 점점 더해 가고 집 안에 있는 것이 전혀 뜨거운 냄비에 콩 볶는 것 같았다. 세상 아무 곳을 향하고 찾아도 자기의 번민을 알고 동정하여 줄 사람은 허 한 사람밖에 없었다.
그는 지금 어떻게 지내는가……. 그 밤 후 영 ── 3주일째 되도록 만나지아니한 영식이는 허의 일이 몹시 궁금하였다. 친구들이 일요일 오후에 와서,
“자네 오늘 왜 예배보러 아니 왔었나. 허가 몹시 자네를 찾데.”
하는 걸 보면, 그는 그 후에도 예배당에는 여전히 잘 다니는 것이었다. 그러나 자기는 만나서 어찌하나 , 무어라 할까 하여 공연히 마음이 조이고 가슴 뛰어서 일체 가지도 않았다. 편지도 무어라고 어떻게 쓸는지 몰라 영영 아니하고, 3주일째 되도록 그대로 있었다. 허는 지금 어떻게 지내나…….
몹시 금시에 가 보고 싶도록 궁금했다.
3주일째 지나고, 그 다음 월요일 아침에 책보를 끼고 대문을 나서다가 우편 배달부와 맞닥뜨렸다. 그 손에 들린 분홍빛 양봉투를 보고, 그는 벌써 허에게서 오는 것인 줄 알았다. 배달을 받은 것은 봉투 외에 조그마한 소포도 있었다. 소포도 허에게서 온 것이었다. 이상하여 소포를 먼저 펴 보니까. 《나의 화환》이라는 서양 시(詩)의 어여쁜 책이었다. 길을 가면서 편지를 뜯었다. 무어라고 쓰기가 거북하여 이때껏 아니하였는데 그는 무어라고 썼을까 하여 궁금하였다. 보니까, 내용은 길어도, 그 밤에 관한 것은 그림자도 보이지 아니하고, 그 전의 편지와 별로 다르지 아니하였다. 오늘 아침 예배에도 안 오셨기에 궁금해서……, 라는 구절은 있었다. 아무 소리도 쓰여 있지 아니해서, 그는 마음이 놓였다. 딴은 그에 관한 일은 조금도 쓰지 말고 모른 체하고 평상시같이 썼으면 그만일 것이다 하였다.
<2>
편집그 다음 일요일이었다. 영식이는 오래간만에 예배 참례를 하고 왔다. 예배시간 전에 사무실에서 허와 맞닥뜨렸을 때, 그는 전력을 다하여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차리고 잠시 인사만 하였다. 그래도 남이 보는데 얼굴이 붉지나 않았던가 하여 염려되었다. 허는 아주 태연하여 보였다. 그의 그렇게 태연한 태도가 도리어 기뻤었다. 인사는 극히 평범하게 끝났다. 아무도 그 곳에 있던 다른 사람들이 그 이상 두 사람의 관계를 아는 이는 없었다. 거기 섰는 허가 이미 처녀가 아님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생각하던 것보다 퍽 평범하게 쉽게 일없이 허와 만났고, 헤어지고 예배도 무사히 보고하여 영식이 마음은 저으기 편하여졌다. 허와 그의 친구, 조가 나란히 무슨 이야기인지 속살대며 예배당 문 밖 어귀에서 꺾이는 것을 보고 나서 영식은 김과 임을 사랑으로 들여보내며,
“내 옷 벗고 나옴세.”
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웬일인지, 오늘은 부친이 이 때까지 집에 계시다.
자기 방인 아랫방으로 들어가서 옷을 벗고 다시 사랑으로 나가는데,
“영식아!”
하고 부친이 부르시므로,
“예.”
하고, 대청으로 향하였다.
“이리 올라오너라.”
무슨 일일까. 가슴을 두근거리며, 마루 위로 올라가 섰다. 두려운 부친의 눈이 얼굴을 몹시 보더니,
“너 거기 앉아서 이것 좀 읽어라. 무슨 소리인지.”
하고 내미시는 것을 보니까, 의외의 그것은 허에게서 온 편지였다. 몸이 오싹하였다. 머리가 쭈삣하였다.
무슨 벽력이 내리려는가. 그는 벌써 고개를 들 힘이 없었다. 두 손길을 마주잡고 머뭇머뭇하고 있었다.
“왜 안 읽어.”
뇌성같이 부친의 음성은 울렸다. 영식은 깜짝 놀랐다. 부친의 말씀은 계속 되었다.
“하라는 공부는 아니하고, 밤낮없이 돌아다니며 계집질이나 하고, 이놈 누구냐, 이 편지한 계집이 누구냐, 뉘 딸이냐 말해라. 혼처까지 정해 놓고 얼마 안 있어 장가를 갈 놈이 학교에 다닙네 하고 계집질이나 하고……. 누구야, 그게 뉘 딸이냐 말해라 이 놈. 일전부터 그런 말이 들리더라만 그래도 그놈이야 아직 어린 놈이 설마 하였더니, 아까 웬 다홍빛 편지가 오기에 무엇인가 하고 보니까, 이놈아 그게 모두 무슨 소리냐, 사모하는 건 다 무어고 사랑이란 다 무어야. 공부 아니하고, 그런 것 배우라디? 이번 일요일에는 꼭 오시라고? 왜 네가 없어 예수를 못 믿겠다더냐? 가지고 오너라. 편지 온 것 다 가져와 어서.”
영식이는 지금 어떻게 해야 좋을지를 몰랐다. 파혼이야기도 지금 해야겠고, 허와의 이야기도 지금 해야 될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계집이니, 무어니 하고 머리에서부터 잡된 명사를 붙이니, 어떻게 그런 말을 꺼내다가는 어느 지경까지 갈는지 몰라서, 이리도 저리도 못하고 다만 머리와 가슴이 무겁고 캄캄할 뿐이었다.
“가져와!”
또 뇌성같이 울렸다.
“왜 가만히 섰어. 안 들리니? 어서 가져와. 계집에게서 온 건 다 가져오너라.”
영식이는 이리도 저리도 하는 수 없으니, 에이 하고 아주 말을 내려 하였다. 그 때 안방 미닫이 문을 반쯤 닫고 앉으신 조모님이,
“가져오너라. 어른의 화만 돕지 말고. 못 가져 올게 무어 있니, 이 다음부터만 안 그랬으면 그만이지.”
하신다. 말씀이 끝나자,
“그래도 섰을 터이냐?”
날카롭게 부친의 음성이 울렸다.
“아니야요.. 그렇게 나쁜 여자는 아닙니다.”
“무얼 어째?”
하는, 날카로운 음성에 영식이는 또 쭈뼜하였다.
“한다할수록…… 이놈! 부모 앞에서 그 계집 자랑을 할 테냐? 나쁜 년이 아냐? 나쁜 년이 아니면 왜 남의 집 사내 보고 편지질을 하니. 무어 사랑이야, 사모한다는 건 무어냐. 이놈 부모가 꾸짖으면 다소곳하고 듣는 게 아니라 나쁜 여자는 아니야? 어디서 그런 것을 배웠니. 그렇게 그 계집이 못 잊히면 나가거라. 나가서 그 계집하고 살든지 말든지 나는 그런 꼴 안 본다. 그게 자식이냐 무어냐? 나가 ──. 섰지 말고 어서 나가거라. 편지 다 짊어지고 나가.”
점점 큰일 났다 생각하였다. 그러나 사랑에 김과 임이 있을 생각을 하니까, 속이 더욱 좁아든다. 부친의 음성이 크면 클수록 자기 가슴을 칼로 베는 것 같았다. 더구나 김이 들으면 금방 조가 알고, 조가 알면 반드시 허의 귀에도 들어갈 터인데……, 하고 걱정을 하고 섰다.
“나가, 어서 보기 싫다.”
음성은 점점 커졌다. 이제는 돼가는 대로 될 밖에 없다고 결단하고 섰을 때에, 도리어 나가라는 소리는 무섭지 않으나 다만 밖에 섰는 김과 임이 들을걸 하고 그래서 이 말이 허에게까지 갈 일이 걱정된다. 말 좋아하는 김이 밖에서 이 말을 죄다 듣고 가서 여럿이 모인 데서 가장 잘 아는 듯이 부친의 음성을 그대로 흉내를 내면서 떠들 일, 조에게 전하여 허가 듣고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등을 생각하고 섰다. 젊은 남녀가 손에 손목을 잡고, 도망가는 양도 눈에 보이는 듯 생각된다. 이대로 안 나가면 등을 밀어 내 보내시지 않으려나 생각도 난다. 지금쯤 조모님이 말려 주시련마는……. 하여도진다. 이 요란한 중에도 잠시 꿈 속 같이 공상이 드는데 또,
“어서 나가.”
하고 뇌성같이 울려서 깜박 깨었다.
“이애야, 사랑으로 가거라. 행여 이담에는 그런 년하고 상종하지 말고…….”
조모님의 부드러운 음성이 성인의 말씀같이 들렸다.
조모님은 다시 부친을 보시고,
“이제 그만두어라. 저도 그만하면 정신을 차리겠지…….”
하심에 부친은 잠자코 계신다.. 그래도 곧 나갈 수가 없어 가만히 섰었더니 조모님께서,
“어서 나가, 그리고 서서 화만 돕지 말고 어서.”
하시므로, 슬금슬금 내려가 사랑으로 나갔다.
사랑에는 어느 틈에 갔는지 김과 임은 있지 아니하였다.
그 후 며칠이 되지 못하여 그의 동무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허에게서 편지 자주 오던 일, 그로 인하여 부친의 노염을 사서 내어 쫓길 뻔한 일을 낱낱이 알고 있었다.
“에끼 이 사람, 그렇게 편지 왕래까지 하면서 겉으론 혼자 점잖은 체한단말인가?”
보는 대로 이런 말을 하지마는, 그런 소리 듣는 것쯤은 영식에게 아무렇지도 않았다. 아주 평범하게,
“아는 사람에게 편지하기로 점잖지 않을 게 무언가.”
할 뿐이었다. 그런 후부터는 어쩐 일인지 그네의 비웃는 듯한 농담이 좀 적어졌다. 그러나, 그런 일은 영식이 마음에 아무 관계 없었다. 요사이 영식의 머리와 마음은 학교 주소로 온 허의 편지에,
“영식 씨를 위하여 제가 희생자가 되어, 영구히 홀로 울밖에 없을까 봅니다.”
한 구절로 가득 찼었다. 김이 조에게, 조가 허에게 말을 옮겨 간 것이 눈에 보이는 듯하였다. 조가 전하는 말을 듣고 이미 처녀도 아닌 그가 얼마나 놀라고 얼마나 가슴이 쓰렸을까. 잡년이니 나쁜 년이니 한 소리를 그대로 옳겼으리라. 설마 면대해서야 그렇게 전했으랴. 아니아니 여자끼리 만나서,
“에그 막 뉘 딸이냐, 어떤 잡년이냐고 별별 욕을 다하더랍니다.”
하였을 것이다. 그렇다. 분명히 그랬을 것이다. 그런 소리를 듣고, 오죽이나 분하였을까. 오죽이나 속이 상하였을까……. 그 소리를 듣고 사흘 낮 사흘 밤이나 잠을 안 자고 울었다 한다. 자기의 일신이 영식 씨에게서 멀리 떨어져 가지 아니하면 영식 씨의 학문도 일신도 전 생활이 파괴되고, 세상에 소문만 나쁘게 퍼질 대로 퍼지겠고……. 아무리 잠을 안 자고 생각하여도 자기가 울면서라도 영식 씨를 위하여 멀리 떨어져 가기 않으면 안 되겠다 한다. 그리고 그것은 자기 일생의 전 희생이라고 한다. 영구히 영구히 홀로 있어 이 때까지 주신 영식 씨의 사진과 편지를 읽으면서 늙겠다 한다.
이 쓸쓸한 세상에서 끝끝내 외로이 영식 씨를 그리워하다가 죽겠다 한다.
그 중의 서너 곳 글자 획이 잉크가 부옇게 풀어진 것을 보면 분명히 그가 쓰면서 울던 눈물 자국이었다……. 아아 정숙 씨!…… 그는 허공을 쳐다보고 불렀다. 편지 쥔 손이 주먹으로 쥐어져서 바르르 떨릴 때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벌써 가을인가 싶은 따뜻한 오후, 해가 서천에 기울고 서대문 감옥의 굴뚝에서 검은 연기가 느리게 흐르고 있었다.
<3>
편집9월도 벌써 그믐이 가까워서 아침저녁으로는 저으기 산들산들한 맛을 알게 되었다.
하늘도 시원스럽게 개여, 구름 한 점 없이 따뜻한 토요일 오후 3시쯤이다.
금화산(金華山) 뒤 능으로 가는 좁다란 길 옆 잔디밭에 아까부터 온 영식이가 앉아서 허가 오기를 기다리는즉 시간을 어기지 않고 산밑 과수원 사잇길로 걸어 그가 왔다. 다른 때같이 얼굴이 붉어지거나 하지도 않았다.
“퍽 기다리셨지요.”
“아니요. 온 지 얼마 안 됩니다.”
서양 사람처럼 처음 반가워하는 품은 악수나 할 것 같았으나 이렇게 간단한 문답으로 인사는 대신되었다. 그리고는 예정이나 했던 것처럼 영식이가 앞을 서서 능으로 가는 송림 사이의 꼬불꼬불한 작은 길로 걸으면서,
“오시다가 누구 만나지 않으셨어요”
하니까.
“네 ──. 냉동 신작로에 오다가 전도사를 만나 보고는 아무도 안 만났어요…….”
하면서, 뒤를 따라 걸었다. 크지도 깊지도 않은 솔밭을 이리저리 길따라 꼬불꼬불 걸으며, 두 사람은 솔밭 밖으로 나왔다. 거기에는 일본인이 식목을 하면서 무슨 나무인지 한 자 길이쯤 되는 묘목이 보기좋게 나란히 심겨 있었다. 여기서 편편한 길대로 가면 애우개 너머 굴레방다리로 가는 줄을 영식이는 뻔히 알았다. 그리고, 그 중간에 부인네 많이 모이는 빨래터가 있는 줄도 알았다. 이 날도 방망이질 타닥타닥하는 소리가 멀리 울려 들렸다. 영식이는 그 길을 피하여 묘목 사잇길로 걸어 수직하는 일본 집 앞을 지나 그 끝 솔밭으로 들어갔다. 허는 그대로 뒤를 따랐다. 이윽고 두 사람은 송림 속 일광이 새어 들어오는 곳, 풀 위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벌써 그 너머는 애우개로 통한 양화도(楊花渡)로 가는 길이고, 저 언덕 끝으로 서강(西江) 와우산(臥牛山) 머리가 보였다. 손수건을 펴고, 그 위에 앉아서 허는,
“참 많이 왔어요.”
하였다.
“네 꽤 멀리 왔습니다. 요 너머가 양화도 가는 길이고, 저기 보이는 게 와우산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앞 저기로 넘어가면 연희 전문 학교가 있습니다.”
잠시 잠잠하다가 허가 자기 구두코를 내려다보면서,
“그런데 요새는 말씀을 덜 하셔요?”
하였다.
“집에서요? 요새는 학교에만 갔다 와서는 별로 나오지 아니하니까요. 감시를 퍽 몹시 하시지만 편지도 오는 것 없고, 밤에도 아니 나오고 하니까 아무 말씀 없습니다. 퍽 염려되셨지요?”
“댁에서 그러셔서 어떻하면 좋아요.”
또 잠깐 잠잠하였다. 그러나, 곧 다시 계속되어 피차에 서로 매일 밤 속을 태우는 이야기가 한참 동안이나 길게 설파되었다. 그러나, 어제까지 편지를 써 보낸 그 말을 되풀이한 것밖에 아무 새 말이 없었다.
“댁에서는 편지 자주 오는 것을 의심 아니하십니까”
하고, 잊었던 것을 새로 기억한 듯이 새삼스럽게 물었다.
“네, 집에서는 그리 의심 아니하셔요. 전에 학교에 다디던 동무에게서도 늘 오고, 서양 부인에게서도 자주 오고 하니까요…….”
“그렇기만 하면 다행입니다.”
“그렇지만 요새는 집에서도…….”
“네? 댁에서도…… 무엇이야요”
“오늘 뵈오면 말씀하려고 편지로도 아니 여쭈었어요.”
“네 ── 괜찮습니다. 무어야요, 아셨습니까?”
“아 ── 니요.”
하고는 무슨 말을 하려는지 퍽 머뭇머뭇하다가 고개가 조금 더 숙어지면서,
“저어 혼처가 났다고 하셔요.”
무엇에 눌린 것처럼 한참이나 둘이 다 잠잠하였다. 잠잠히 허의 수그린 트레머리를 보던 영식이는 돌연히 여러 가지 이상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오오 시집을 자꾸 가라고 하시니까 어쩔 수 없이 가야겠다는 말을 하려는구나 생각하였다. 오오 인제 생각하니까, 나를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여 멀리 떨어지겠다는 소리도 오늘 이 소리를 하려고 전제로 한 말이로구나 생각하였다 고개를 수그리고 아주 . 약한 자인 것처럼 풀없이 앉았는 꼴이 밉게 보였다. 전후 머리를 한데 모아다 머리 뒤로 비비튼 꼴도 미웠다. 그 트레뭉치에 빗 꽂은 것도 몹시 미웠다. 그 밤 이후 일종의 죄악의 공포를 느끼는 그가 어느 때는 고민하다가, 에그 그가 다른 곳으로 시집이나 슬쩍 갔으면 아무 일 없이 시원하겠다는 생각도 한 때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 자기 앞에서 혼처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한없이 밉다. 그 때 고민 고민하던 끝에 그런 생각이 날 때에 그래도 자기는 즉시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죄악이다 하고, 그 마음을 없이하였었다. 아아 그런데 지금 허는 혼처가 있으니까, 그 곳으로 가겠다고 생각을 한단 말이다.
아아 여자의 마음은 알 수 없었다. 한데 모아 비비틀어 놓은, 그 머리같이 갈래가 많구나, 알 수가 없구나, 하였다. 고개를 숙이고 잠자코 있는 것이 더욱 밉다. 그러나, 어쨌던 소리나 시원히 들으려고 전력을 다하여 은근히,
“그래 그리 시집을 가시렵니까?”
“네.”
하고는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로 앉아서 대답하고 다시 말을 이어,
“미국 갔다 왔는데 서른한 살이나 되었대요. 자기는 아내를 천천히 얻으려도 그 노모가 하나 있는데 병객이어서 오래 못 살겠으니까 올해 안으로 며느리를 보게 하라고 해서 혼인을 속히 해야 할 터인데 하필 저를 늘 보았다고 저하고 결혼을 하자고 한 대요…….”
“그래 어떻게 하시렵니까?”
묻고는 그를 노린다. 간다면 손찌검이라도 할 것같이 그의 눈은 노기에 찼다. 허는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로,
“가긴 어디로 가요. 아버지께서는 그가 상당한 인격자이고, 또 그처럼 내게 말을 하는데 싫다는 수도 없거니와 너도 여태 돌아만 다녔지 살림살이를 보고 배운 게 없는데, 그런 이가 구혼하니 그런 다행한 일이 어디 있느냐.”
고 하시고, 어머니께서는,
“그가 인물도 잘 나고 미국에서 돈도 좀 모아 가지고 왔으니, 살림이 구차하지도 않을 터이고, 또 그가 외국까지 다녀왔으니까, 아내를 위해 줄 줄도 알 테고, 그런 좋은 데가 어디 있느냐고 가라고 자꾸 하시지만…….”
“그런데 어떻게 안 가십니까?”
그의 눈의 노기는 그대로 풀어지지 않았다.
“그러시거나 말거나 나만 안 가면 그만이지요. 끌어 가겠어요?”
“왜 안 간대요. 무슨 핑계로요?”
“핑계야 핑계댈 게 어디 있어요?”
“그럼 어떻게 안 간다나요?”
“싫으니까 안 간다지요.”
“왜 무엇이 싫테요?”
“그냥 싫으니까 안 가겠다고 안 가면 그만이지요.”
어느 틈엔지 영식의 눈에 분기는 사라지고 그 눈도 풀없이 아래를 향하였다.
영식이는 겨우 마음이 놓였다. 심중으로 ‘고맙습니다’ 하였다. 그 손목을 꼭 쥐고 ‘아! 나의 정숙(貞淑) 씨 감사합니다!’하고 싶었다. 역시 신성하여 보였다. 자기의 마음을 그에 비하여 보고, 몹시 자신이 동요가 심한 것을 부끄러워하였다.
“저도 집에서 무어라 하시거나 영(永) 그리로는 가지 않으렵니다.”
“그러노라니 댁내에 풍파만 일어나고 오죽합니까?”
하면서 고개를 겨우 조금 든다. 그 동안에 시간이 퍽 지난 것 같아서 해가 꽤 기운 것을 알았다. 머리 위에 솔잎이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잠시 조용한 틈에 빨래 소리는 멀리 여기까지 들렸다. 어디서인지, 누구인지 휘파람 부는 소리가 나므로 주의하니까 표박가(漂迫歌)였다. 본즉, 저 아래 묘포 옆으로 양복 입은 학생 하나가 책보를 끼고 가는 것이 보였다. 아마 연희전문 학교 학생이 돌아가는 것인가보다 생각하고 안심하였다. 표박가의 휘파람 소리는 그 학생이 안 보이게 된 뒤에도 들려왔다. 영식이는 다시 자기 일을 생각하였다. 공부나 한 뒤 같으면 아무 데를 가더라도……, 생각하였다. 새삼스럽게 표박가를 또 생각하였다. 눈 오는 벌판으로 애인의 손목을 잡고, 노래를 부르며 표박하는 철인 ‘후에어쟈’를 생각하였다. 그리고, 그 뒤에는 자기와 허가 끝없는 벌판으로 표박가를 부르며 흘러 돌아다니는 모양이 눈에 보였다. 아아, 졸업만 한 후였다면……, 생각할 때에 잠잠히 있던 허가 한숨을 쉬더니 맞잡고 있던 손으로 옆의 풀 한 줌을 뜯으면서,
“에에 ──, 아주 사람 없는 아무도 없는, 먼데 가서 살았으면 좋겠어요.”
하였다. 영식이는 의미 있게 들었는지,
“아무 데구 가는 거야 무엇이 어려워요? 가기야 쉽지만 가서는 어떻게 합니까”
하였다. 허는 한참이나 잠잠히 있다가 웃는 소리같이,
“세상에 돈 없이 사는 나라 없나요?”
하였다. 영식이도 픽 웃었다. 몹시 그윽히 쓸쓸한 웃음이었다.
벌써 얼마 아니 있어 해는 질 것 같았다. 어디서 생겼는지 없던 구름이 조그마하게 저쪽 얕은 곳을 흐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