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이 오면/현해탄

달밤에 현해탄(玄海灘)을 건느며
갑판 위에서 바다를 내려다보니
몇해 전 이 바다 어복(魚腹)에 생목숨을 던진
청춘(靑春) 남녀(男女)의 얼굴이 환등(幻燈) 같이 떠오른다.
값 비싼 오뇌(懊惱)에 백랍(白蠟)같이 창백(蒼白)한 인테리의 얼굴
허영(虛榮)에 찌들어 여류(女流)예술가(藝術家)의 풀어 헤친 머리털,
서로 얼싸안고 물우에서 소용도리를 한다.

바다우에 바람이 일고 물결은 거칠어진다,
우국지사(憂國志士)의 한숨은 저 바람에 몇번이나 스치고
그들의 불타는 가슴 속에서 졸아 붙는 눈물은
몇번이나 비에 섞여 이 바다우에 뿌렸던가
그 동안에 얼마나 수(數) 많은 물건너 사람들은
「인생도처유청산(人生到處有靑山)」을 부르며 새땅으로 건너 왔던가.

갑판(甲板)위에 섰자니 시름이 겨워
선실(船室)로 내려가니 「만열도항(漫熱渡航)」의 백의군(白衣群)이다.
발가락을 억지로 째어 다비를 꾀고
상투 자른 자리에 벙거지를 뒤집어 쓴 꼴
먹다가 버린 벤또밥을 엉금엉금 기어다니며
강아지처럼 핥아 먹는 어린것들!

동포(同胞)의 꼴을 똑바루 볼수 없어
다시금 갑판(甲板)위로 뛰어 올라서
물속에 시선(視線)을 잠그고 맥(脈) 없이 섰자니
달빛에 명경(明鏡)같은 현해탄(玄海灘) 우에
조선(朝鮮)의 얼굴이 떠오른다!
너무나 또렷하게 조선(朝鮮)의 얼굴이 떠오른다.
눈 둘곳없어 마음 붙일곳 없어
이슥하도록 하늘의 별수(數)만 세노라.

19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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