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안동 네거리에서 남산을 바라보고 한참 내려가면 베전 병문 큰길이라. 좌우에 저자하는 사람들이 조석으로 물을 뿌리고 비질을 하여 인절미를 굴려도 검불 하나 아니 묻을 것 같으나, 그 많은 사람, 그 많은 마소가 밟고 오고 밟고 가면 몇 시 아니 되어 길바닥이 도로 지저분하여져서 바람이 기척만 있어도 행인이 눈을 뜰 수가 없는데, 바람도 여러 가지라. 삼사월 길고 긴 날 꽃 재촉하는 동풍도 있고, 오뉴월 삼복 중에 비 장만하는 남풍도 있고, 팔월 생량할 때 서리 오려는 동북풍과 시월 동짓달에 눈 몰아오는 북새도 있으니, 이 여러 가지 바람은 절기를 따라 으레 불고, 으레 그치는 고로 사람들이 부는 것을 보아도 놀라지 아니하고, 그치는 것을 보아도 희한히 여길 것이 없지마는, 이날 베전 병문에서 불던 바람은 동풍도 아니요, 남풍도 아니요, 서풍 북풍이 모두 아니요, 어디로조차 오는 방면이 없이 길바닥 한가운데에서 먼지가 솔솔솔 일어나더니, 뱅뱅뱅 돌아가며 점점 언저리가 커져 도래멍석만하여 정신차려 볼 수가 없이 팽팽팽 돌며 자리를 뚝 떨어지며, 어떠한 사람 하나를 겹겹이 싸고 돌아가니 갓귀영자가 쑥 빠지며 머리에 썼던 제모립이 정월 대보름날 구머리장군 연 떠나가듯 삼 마장은 가서 떨어진다.

그 사람이 두 손으로 눈을 썩썩 비비고 입 속에 들어간 먼지를 테테 뱉으며,

"에, 바람도 몹시 분다. 정신을 차릴 수가 없지. 내 갓은 어디로 날려 갔을까? 어, 저기 가 있네."

하더니, 한 손으로 탕건을 상투째 아울러 껴붙들고 분주히 쫓아가 갓을 집어 들더니, 조끼에서 저사(紵紗) 수건을 내어 툭툭 털어 쓰고 가는데, 그때 마침 장옷 쓴 계집 하나가 그 광경을 목도하고 그 사람의 얼굴을 넌짓 보더니, 장옷 앞자락으로 제 얼굴을 얼핏 가리고 행랑 뒷골로 들어가더라.

중부 다방골은 장안 한복판에 있어, 자래로 부자 많이 살기로 유명한 곳이라. 집집마다 바깥 대문은 개구멍만하여 남산골 딸깍샌님의 집 같아도 중대문 안을 썩 들어서면 고루거각(高樓巨閣)에 분벽사창(粉壁紗窓)이 조요하니, 이는 북촌 세력 있는 토호재상(土豪宰相)에게 재물을 빼앗길까 엄살 겸 흉부리는 계교러라.

그 중에 함진해라 하는 집은 형세가 남의 밑에 아니 들어, 남노비에 기구 있게 지내는 터인데, 한갓 자손복이 없어 낳기는 펄쩍해도 기르기는 하나도 못 하다가, 그 부인 최씨가 삼취(三娶)로 들어와 아들 하나를 낳아 놓고 몸이 큰 체하여 집안에 죽젓개질을 할 대로 하며, 그 남편까지도 손톱 반머리만치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마음에 있는 일이면 옳고 그르고 눈을 기어 가면서라도, 직성이 해토(解土) 머리에 얼음 풀어지듯 하게 하여 보고야 말더라.

최씨의 친정은 노돌이라. 그 동리 풍속이 재래로 제일 숭상하는 것은, 존대하여 말하자면 만신이요, 마구 말하자면 무당(巫堂)이라 하는, 남의 집 망해 주며, 날 불한당(不汗黨)질하는 것들을 남자들은 누이님 아주머니, 여인들은 형님 어머니 하여 가며 개화(開化) 전 시대에 칙사(勅使) 대접하듯 하여 봄 가을이면 으레 찰떡 치고 메떡 치고 쇠머리 북어쾌를 월수 일수 얻어서라도 기어이 장만하여 철무리 큰 굿을 하여야 세상일이 다 잘될 줄 아는 동리니, 최씨가 어려서부터 보고 듣고 자란 것이 그뿐이러니, 시집을 와서도 그 버릇을 버리지 못하고 어디가 뜨끔만 하면 무꾸리질이요, 남편이 이틀만 아니 들어와 자도 살풀이하기라. 어디 새로 난 무당이 있다든지, 신통한 점쟁이가 있다면 남편 모르게 가도 보고 청해다도 보아 놓고 메를 올리라든가, 기도를 하라든가, 무당의 입이나 점쟁이 입에서 뚝 떨어지기가 무섭게 거행을 하니, 이는 최씨 부인이 무당이나 점쟁이를 위하여 그리하는 바가 아니라, 자기 생각에는 사람의 일동일정(一動一靜)으로 죽고 사는 일까지라도 귀신의 농락으로만, 물 부어 샐 틈 없이 꼭 믿고 정신을 못 차려 그러는 것이러라.

장사(壯士) 나자 용마(龍馬)가 난다고 함진해 집에 능청스럽게 거짓말 잘하고 염치없이 도둑질 잘하는 안잠자는 노파 하나가 있어, 저의 마님의 눈치를 보아 비위를 슬슬 맞춰 가며 전후 심부름은 도맡아하는데 천행으로 최씨 부인이 태기가 있어 아들 하나를 낳으니 노파가 신이 열 길이나 나서,

"마님, 마님의 정성이 지극하시더니 칠성님이 돌보셔 삼신(三神) 행차가 계시게 하셨습니다. 에그, 아기가 범연한가, 떡두꺼비 같은 귀동자지. 오냐, 무쇠 목숨에 돌끈 달아 수명 장수 하여라."

그 아이가 거적자리에 떨어진 이후로 무슨 귀신이 그리 많이 덤비던지 삼 일 안부터 빌고 위하는 것이 모두 귀신이라. 겨우 돌 지나 걸음발 타는 아이가 돈은 제 몸뚱이보다 몇십 갑절이 더 들었더라.

그런데 그 아이에게 펄쩍 잘 덤비는 여귀(女鬼) 둘이 있으니, 최씨 마음에 죽지 아니하였고 살아 있어 그 지경이면 다갱이에서부터 발목까지 아드등 깨물어 먹고라도 싶지마는, 죽어 귀신이 된 까닭으로 미운 마음은 어디로 가고 무서운 생각이 더럭 나며, 무서운 생각이 너무 나서 위하고 달래는 일이 생겨 행담(行擔)과 고리짝에다 치마저고리를 담아서 둔 방축 머리에 줄남생이같이 위해 앉혔으니 그 귀신은 도깨비도 아니요, 두억시니도 아니요, 못다 먹고 못다 쓰고, 함씨 집에 인연이 미진(未盡)하여 원통히 세상 버린 초취(初娶) 부인 이씨와 재취(再娶) 부인 박씨라. 사람이 죽어 귀신이 되어 산 사람에게 침노한다는 말이 본래 요사스러운 무녀(巫女)의 입에서 지어낸 말이라. 적이나 현철한 부인이야 침혹(沈惑)할 리가 있으리요마는, 최씨는 지각이 어떻게 없던지 노파와 무녀의 꾸며내는 말을 열 되들이 정말로만 알고 그 아들이 돌림 감기만 들어도 이씨 여귀, 설사 한 번만 해도 박씨 여귀, 피륙과 전곡(錢穀)을 아까운 줄 모르고 무당 점쟁이 집으로 물 퍼붓듯 보내다가, 고삐가 길면 디딘다더니 함진해가 대강 짐작을 하고 최씨더러 훈계를 하는데, 본래 함진해의 위인은 무능하지마는 선부형 문견으로 그같이 요사한 일이 별로 없던 가정이라.

"여보, 무당 판수라 하는 것은 다 쓸데없는 것이외다. 저희들이 무엇을 알며, 귀신이라 하는 것이 더구나 허무치 아니하오? 누가 눈으로 보았소? 설혹 귀신이 있기로 나의 전마누라가 둘이 다 생시에 심덕(心德)이 극히 착하던 사람인데 죽어졌기로 무슨 침탈(侵奪)을 하겠소? 다시는 이씨니 박씨니 하는 부당한 말을 곧이듣지 마오."

"죽은 마누라를 저렇게 위하시려면 똥구멍이라도 불어서 아무쪼록 살려 데리고 해로하시지, 남을 왜 데려다 성가시게 하시오? 누가 이씨 박씨의 귀신이 무던하지 아니하다오? 무던한 것이 탈이지. 귀신은 귀하답시고 한 번 만져만 보아도 산 사람의 병이 된다오. 인제는 아무가 앓든지 죽든지 나는 도무지 상관치 말리다. 걱정 마시오."

이 모양으로 몰지각하게 폭백하니 함진해가 어이없어 좋은 말로 타이르고 사랑으로 나간 후에 최씨가 전취 부인들이 살아 곁에 있는 듯이 강짜가 나서,

"할멈, 영감 말씀 좀 들어 보게. 아무리 사내 양반이기로 생각이 어쩌면 그렇게 들어가나?"

"영감께서 신귀가 그렇게 어두시답니다. 딱도 하시지, 돌아가신 마님 역성을 그렇게 하실 것 무엇 있나? 마님, 영감께서 돌아가신 두 마님과 금실이 아주 찰떡 근원이시더랍니다. 아무리 그러셨기로 누가 그 마님들을 옥추경(玉樞經)이나 읽어 무쇠 두멍에 가두었나? 떠받들어 위하시기밖에 더 어떻게 하시라고?"

"여보게, 염려 말게. 저년들 무서워 천금같이 귀한 자식을 기르며 두고두고 그 성화를 받을까? 내일 모레 영감께서 송산 산소에 다니러 가시면 산역을 시키느라고 여러 날 되신다데. 세차게 경 잘하는 장님 대여섯 불러 오게. 자네 말마따나 옥추경을 지독하게 읽어 움도 싹도 없게 가두어 버리겠네."

"에그, 너무나 잘 생각하셨습니다. 조금 박절하지만, 두고두고 성가스럽게 구는데, 시원하게 처치하여 버리시지. 아무리 귀신이기로 심사를 바로 가지지 아니하고 살아 계신 양반에게 말만 이르니 박절할 것도 없습니다."

"장안에 어디 있는 장님이 그중 영한구? 이 근처 돌팔이 장님들은 쓸데없어."

"아무렴, 그렇고말고요. 돌팔이 장님은 무엇에 쓰게요? 제까짓 것들이 그 귀신을 가두기커녕 범접이나 해보겠습니까, 덧들이기나 하지. 장님은 복차다리 사는 정장님이 아주 제일이라고들 하여요."

"그러면 그 장님을 불러다 일을 하여 보세."

약속을 단단히 하고 손가락을 꼽아 기다리다가 그 남편이 길을 떠난 후 경을 며칠을 읽었던지 이씨 여귀, 박씨 여귀 잡아 가두는 양을 눈으로 현연히 보는 듯이 최씨 마음에 시원 상쾌하여 누워 자는 그 아들의 등을 뚝뚝 두드리며 말도 못 하는 아이더러 알아들을 듯이 이야기를 한다.

"만득아, 시원하지? 만득아, 상쾌하지? 너의 전 어머니 귀신들을 다 가두어 버려서 다시 못 오게 하였다. 으응, 어머니는 그까짓 것들이 네게 무슨 어머니? 죽은 고혼이라도 어머니 노래를 들어 보려면 그까지로 행세를 했을까? 만득아, 그렇지, 응응. 인제는 앓지 말고 잘 자라서 어미의 애쓴 본의 있게 하여라, 응응. 에그, 그것이야 엄전하게 잘도 자지."

하며 입을 뺨에다 대고 쭉쭉거리는데, 안잠 마누라는 곁에 앉아 최씨의 말하는 대로 어릿광대같이,

"그렇고말고, 마님 말씀이 꼭 옳으시지. 어머니 노릇을 하려면 그까지로 행실을 했겠습니까?"

만득이 볼기짝을 저도 뚜덕뚜덕하며,

"아가, 어머니 말씀을 다 들었니? 이 다음에 어머니께 효성스러운 자손 되고 할멈도 늙게 호강시켜 다고."

가장 만득의 나이 장성하여 말을 아니 듣는 듯이 최씨가 꾸지람을 옳게 한다.

"오, 이놈, 어미의 애쓴 본의 없이 뜻을 거스르든지 할멈의 길러 준 공 모르고 잘살게 아니하여 주어 보아라. 내 솜씨에 못 배길라."

이 모양으로 주거니받거니 지각 반점 없이 지껄여 가며, 대원수(大元帥)

가 되어 십만 대병을 거느리고 적국을 한 북소리에 쳐 없앤 후 개선가(凱旋歌)나 부른 듯이, 날마다 둘이 모여 앉으면 그 노래 부르기로 세월을 보내더라.

연때가 맞느라고 하루 빤한 날 없이 잔병치레로 유명한 만득이가 경 읽은 이후로는 안질 한 번 안 앓고 잘 자라니, 최씨 마음에 정장님은 천신만 싶어 만득의 먹고 입는 일동일정을 모두 그 지휘하는 대로 남의 집 음식도 아니 먹이고, 색다른 천 끝도 아니 입혀, 본래 구기(拘忌)가 한 바리에 실을 짝이 없던 터에 얼마쯤 가입을 하였는데 그 명목이 썩 많으니,

세간 놓는 데 손보기
음식 보면 고수레하기
새 그릇 사면 쑥으로 뜨기
쥐구멍을 막아도 토왕(土王) 보기
닭을 잡아도 터주에 빌기
까마귀만 울어도 살풀이하기
족제비만 나와도 고사 지내기

이와 같이 제반 악징을 다 부리는데 정안수 그릇은 장독대에 떠날 때가 없고, 공양미 쌀박은 어느 산에 아니 가는 곳이 없으며, 심지어 대소가(大小家) 사이에 상변(喪變)이 있으면 백 일씩 통치 아니하기는 예사로 하더라.

우리나라에 의학이 발달 못 되어 비명(非命)에 죽는 병이 여러 가지로되 제일 무서운 병은 천연두(天然痘)라. 사람마다 으레 면하지 못하고 한 번씩은 겪어 고운 얼굴이 찍어매기도 하며, 눈이나 귀에 병신도 되고, 종신지질(終身之疾) 해소도 얻을 뿐더러, 열에 다섯은 살지를 못하는 고로 속담에 '역질 아니한 자식은 자식으로 믿지 말라'는 말까지 있은즉, 그 위험함이 다시 비할 데 없더니, 서양 의학자가 발명한 우두법(牛痘法)을 배워 온 후로 천연두를 예방하여 인력으로 능히 위태함을 모면하게 되었건마는, 누가 만득이도 우두를 넣어 주라 권하는 자 있으면 최씨는 열 스무 길 뛰며 손을 홰홰 내어젓고,

"우리집에 와서 그대 말 하지도 마오. 우두라 하는 것이 다 무엇인가? 그까짓 것으로 호구별성(戶口別星)을 못 오시게 하겠군. 우두 한 아이들이 역질(疫疾)을 하면 별성 박대한 벌역으로 더구나 중하게 한답디다. 나는 아무 때든지 마마께서 우리 만득에게 전좌하시면 손발 정히 씻고 정성을 지극하게 들이어서 열사흘이 되거든 장안에 한골 나가는 만신을 청하고, 입담 좋은 마부나 불러 삼현육각(三絃六角)에 배송(拜送) 한 번을 쩍지게 내어 볼 터이오. 우리가 형세가 없소? 기구가 모자라오?"

하며 사람마다 올까 봐 겁이 나고 피해 가는 역질을, 어서 오기를 눈이 감도록 고대하더니, 함씨의 집안이 결딴이 나려는지 최씨의 소원이 성취가 되려는지 별안간에 만득의 전신이 부집 달 듯하며 정신을 모르고 앓는데 뽀얀 물 한 술 아니 먹고 늘어졌으니, 외눈의 부처같이 그 아들을 애지중지하는 함진해가 오죽하리요. 김주부를 청하여라, 오별제를 불러라 하여 맥도 보이고 화제도 내어, 연방 약을 지어다 어서 달여 먹이라 당부를 하니, 함진해 듣고 보는 데는 상하노소(上下老少) 물론하고 분주히 약을 쉴새없이 달이는 체하다가, 함진해만 사랑으로 나가면 그 약은 간다 보아라 하고 귀신 노래만 부르는데, 그렁저렁 삼 일이 지나더니, 녹두 같은 천연두가 자두지족(自頭至足)에 빈틈없이 발반(發斑)이 되었는데, 붉은 반은 조금도 없고 배꽃 이겨 붙인 듯하더니, 팔구 일이 되면서 먹장 갈아 끼얹은 듯이 흑함(黑陷)이 되며 숨결이 턱에 닿았더라. 역질이라는 병은 다른 병과 달라, 증세를 보아 가며 약 한 첩에 죽을 것이 사는 수도 있고, 중한 것이 경해도 질 터이어늘, 최씨는 약은 비상(砒霜)국만치 여기고 밤낮 들고 돌아다니는 것이 동의 정안수뿐이니 이는 자식을 아편이나 양잿물을 타 먹이지 아니하였다뿐이지, 그 죽도록 한 일은 조금도 다를 것이 없어, 불쌍한 만득이가 지각 없는 어미를 만나 필경 세상을 버렸더라. 아무라도 자식 죽어 설워 아니할 이는 없으려니와 최씨는 설움이 나도 썩 수선스럽게 배포를 차리는데,

"그것이 그 모양으로 덧없이 죽을 줄이야 어찌 알아…… 인간은 몰라도 무슨 부정이 들었던 것이지…… 허구한 날 눈에 밟혀 어찌 사나…… 한이나 없게 큰 굿을 해보았더면 좋을걸. 영감이 하도 고집을 하니까 마음에 있는 노릇을 해볼 수나 있어야지…… 제가 좋은 곳으로나 가게 용산 나아가서 지노귀새남이나 하여 주어야……."

그 다음에는 목을 놓아 울어 대는데 노파는 덩달아 울며,

"마님, 그만 그치십시오. 암만 우시면 한번 길이 달라졌는데 다시 살아옵니까? 마님 말과 같이 새남이나 하여 저승길이나 열어 주시지. 그렇지만 마마에 간 아이는 진배송을 내어야 이 다음에 낳는 자손도 길하답니다."

"자네 말이 옳은 말일세. 나도 번연히 알면서 미처 생각지 못했네그려. 여보게, 우리 단골더러 진배송을 한번 좀 잘 내달라고 불러주게. 영감도 생각이 계시겠지. 고집 세우다 일을 저질러 놓고 또 무엇이라 하시겠나? 내가 죽더라도 하고 말 터이니 그 염려는 말고 어서 가보게."

노파가 살판이나 만난 듯이 겅둥겅둥 뛰어 대묘골 모퉁이로 감돌아들더니 조그마한 평대문집으로 서슴지 아니하고 들어가며,

"만신 계십니까? 만신 계셔요?"

안방문이 펄덕 열리며 얼굴에 아양이 다락다락하는 여인이 끼웃이 내어다보며,

"이게 누구시오? 어서 오시오."

하며 손목을 다정히 끌고 안방으로 들어가더니,

"그 댁 아기가 구태나 멀리 갔다구려. 나는 벌써부터 그럴 줄 알면서도 박절히 바로 말을 못 했소. 그래, 어찌해 오셨소? 자리걷이를 하신다고 나를 불러오라십드니이까?"

"자리걷이가 아니라 진배송을 내신다고 제구를 다 차려 가지고 내일로 오시라고 하십디다."

하며 앞뒤를 끼웃끼웃 둘러보며,

"누구 들을 사람이나 없소?"

"아무도 없소. 걱정 말고 세상 없는 말이라도 다 하시오."

"만신…… 지금 세상에 상전의 빨래를 해도 발뒤꿈치가 희다 하는데, 이런 판에 좀 먹지 못하고 어느 때 먹소? 나 하라는 대로만 다 하고 보면 전 천이나 잘 떼어먹을 터이오."

"아무렴, 먹는 것은 어디로 갔든지 마누라님 지휘를 내가 아니 들으며, 또 돈이 생기기로 내가 마누라님을 모르는 체하겠소? 그대 말은 하나마나 무슨 일이오? 이야기나 하시구려."

노파가 앞으로 다가앉으며 만득이 병중에 하던 말과 찾던 것을 낱낱이 형용하여 이르고 무어라 무어라 한동안 지껄이더니,

"꼭 되지 아니했소? 그렇게만 하고 보면 세상 없는 사람도 깜짝 반하지."

"아니 될 말이오. 그 모양으로 어설프게 해서 큰 돈을 먹어 보겠소? 별말 말고 내 말대로 합시다."

"아무렇게 하든지 일만 잘하구려."

"내야 사흘이 멀다 하고 그 댁에를 북 드나들듯 하였으니 세상 없이 영절스러운 말을 하기로 누가 믿겠소? 마누라님도 아마 아실걸. 저 국수당 아래 있는 김씨 만신이 배송 잘 내기로 소문나지 아니했소? 지금으로 내가 그 만신을 가보고 전후 부탁을 단단히 할 것이니 마누라님은 댁으로 가서 마님을 뵈옵고 곧이들으시도록 꾸며 대구려."

"옳소, 그것 참 되었소. 그 만신 소문을 우리 마님도 들으시고 그러지 아니해도 일상 한번 불러 보시든지 가보신다고 하시면서도 혹 단골이 노여워하면 어찌하리 하시고 계신 터인데, 당신이 천거하더라고 여쭙기만 하면 얼마쯤 좋아하실 것이오. 마님께서 기다리실 터이니까 나는 어서 가야 하겠소. 김만신 집에를 즉시 가보시오."

하고 두어 걸음 나아가다가 다시 돌아서며,

"김씨 만신이 좋기는 하오마는, 나와는 생소하니 다 알아서 부탁하여 주시오."

"그만만 해도 다 알아듣소. 염려 말고 어서 가시오."

이 모양으로 별순검(別巡檢) 변쓰듯 끝만 따 수작을 하고 노파의 마음이 든든하여 집으로 돌아오더니 최씨를 보고 언구럭을 피우는데,

"마님, 다녀왔습니다. 아마 대단히 기다리셨을 것이오. 얼른 다녀온다는 것이 그렇게 되었습니다."

"늙은 사람 행보가 자연 그렇지. 그에서 더 속히 올 수 있나? 그래, 단골더러 내일 오라고 일렀나?"

"단골이 오는 것이 다 무엇입시오? 제가 앓아서 거진 죽게 되었는데요."

"그러면 어떻게 한단 말인가?"

"마님, 일상 말씀하시던 국수당 만신이 하도 소문이 났기에 지금 가서 내일로 일을 맞추고 왔습니다."

"국수당 만신이라니, 금방울 말인가?"

"네네, 금방울이올시다."

금방울의 별호 해제를 들으면 요절 아니할 사람이 없으니, 얼굴이 누르퉁퉁하여 금빛 같다고 금이라 한 것도 아니요, 키가 작아 떼굴떼굴 굴러다니는 것이 방울 같다고 방울이라 한 것도 아니라. 그 무당의 입에서 떨어지는 말이 길흉간 쇠소리가 나게 맞는다고 소리나는 쇠로 별호를 지을 터인데 쇠에 소리나는 것이 하고 많지마는 종로 인경이라 하자니 너무 투미하고, 징이나 꽹과리라 하자니 너무 상스러워, 아담하고 어여쁜 방울이라 하였는데, 방울 중에도 납방울 시우쇠방울 은방울 여러 가지 방울이 있으되, 썩 상등으로 대접하느라고 금방울이라 하였으니, 금이라는 것은 쇠 중에 일등 될 뿐 아니라 그 무당의 성이 김가니, 김은 즉 금이라고 이뜻 저뜻 모두 취하여 금방울이라 하였더라.

금방울의 소문이 어떻게 났던지 남북촌 굵직굵직한 집에서 단골 아니 정한 집이 없어, 한 달 삼십 일, 하루 열두 시, 어느 날 어느 때에 두 군데, 세 군데 으레 부르러 와, 몸뚱이가 종잇장 같으면 이리저리 찢어지고 말았을 터이러라. 원래 무당이라 하는 것은 보기 좋게 춤이나 잘 추고 목청 좋게 소리나 잘 하고 수다스럽게 지껄이기나 잘 하면 명예를 절로 얻어 예 간다 제 간다 하는 법인데, 금방울이는 한때 해먹고 살라고 하느님이 점지해 내셨던지 그 여러 가지에 한 가지 남의 밑에 아니 들 뿐더러 남의 눈치 잘 채우고, 남의 말 넘겨짚기 잘 하고, 아양 능청 온갖 재주를 구비하였는데, 함진해 마누라의 무당 좋아한다는 소문을 듣고 어떻게 하면 한번 어울려들어 그 집 세간을 훌쭉하도록 빨아먹을꼬 하고 아라사 피득 황제가 동양 제국을 경영하듯 하던 차에, 함진해 집에서 부른다는 말을 듣고 다른 볼일을 다 제쳐 놓고 다방골로 내려와 함씨 집 안방으로 들어오며 첫대 앙큼스러운 거짓말 한 번을 내어놓는데, 최씨는 아들 참척(慘慽)을 보고 설우니 원통하니 하는 중에도 금방울의 말이 어떻게 재미가 있는지 오줌을 잘곰잘곰 쌀 지경이라.

"세상에 이상한 일도 있어라. 예 없던 신그릇에서 방울이 딸딸 울며, 두 어깨에 짐이 잔뜩 실리더니, 제 집에 뫼신 호구 아기씨께서 인도를 하시기에 꿈결인지 잠결인지 한곳에를 가보았더니, 집 모양이든지 방 안 세간 놓인 것까지 영락없이 댁일세. 신통도 해라."

최씨는 미처 대답도 하기 전에 노파가 한번 더 초를 쳐서 찰떡 반죽하듯 한다.

"꿈도 영검하셔라. 만신이 댁과는 적지 아니한 연분이시구려. 마님께서는 그런 현몽하신 바는 없으셔도 일상 마음이 절로 키어서 만신을 보시고 싶다 하셨다오."

"만신의 나이 손아래일 듯하니 처음 보아도 서어하지 않도록 하게 하겠네. 지금 할멈도 말했지마는 어찌해 그런지 일상 만신이 보고 싶더니 좋은 일에 청해 오지 못하고. 에구에구…… 팔자 사나워 열 소경의 한 막대 같은 자식을 죽이어 궂은 일에 청하였네그려. 에구에구…… 끔찍스러운 일을 보고 모진 목숨이 살아 있기는 그 자식의 저승길도 맑혀 주려니와 더러운 욕심이 무슨 낙을 다시 볼까 하지, 에구에구……."

하더니 노파를 부른다.

"할멈, 어서 배송 제구를 차려 놓고 사랑에 나아가 영감께 내 말로 여쭙게."

"제구는 어제 다 장만한 것을 또다시 차릴 것이 있습니까마는 영감께 무엇이라고 여쭈랍시오? 걱정이나 듣게요?"

"걱정은 무슨 걱정을 하신단 말인가? 내 말대로 이렇게 여쭙게. 역질에 죽은 아이를 진배송을 아니 내어 주면 원귀(寃鬼)가 되어 다시 환토를 못할 뿐더러, 이 다음에 낳는 아기께도 길하지 못한 일이 생긴다니, 그것이 참말이나 거짓말이나 알고서야 그대로 있을 수 없습니다. 자세 자세 여쭙되, 처음에 걱정 좀 하신다고 멀찍이 돌아서지 말고 알아들으시도록 말씀을 하게. 그래서 정 아니 들으신대도 나는 그래도 시작하겠네."

노파가 사랑으로 나아가 한나절을 서서 핀잔을 먹어 가며 어떻게 중언부언하였던지 함진해가 슬며시 못 이기는 체하고 드러누우니, 이는 노파의 말솜씨가 소진장의(蘇秦張儀) 같아 속아넘어간 것도 아니요, 이치가 그러한 듯하여 어기지 못하리라 한 것도 아니라. 어리석은 생각에 자기 마누라 뜻을 너무 거스르다가 감정이 더럭 나면 집안에 화기를 잃을 지경이라 하여 혼자말로,

"계집이라는 것은 편성(偏性)이라, 옳고 그르고 너무 억제하게 되면 저 잘못하는 것은 모르고 야속한 생각만 날 터이요, 또 요사이 몹쓸 경상을 보고 울며불며 하는 터이요, 나 역시 아무 경황 없어 세상사가 귀치 않다."

하고 할멈의 말을 잠잠히 듣다가,

"아무 짓이든지 하고 싶은 대로 하라게그려. 말리지 아니하네."

노파가 그 말 한마디를 듣더니 엉덩이춤이 절로 나서 열 걸음을 한 걸음에 뛰어들어오며,

"마님, 인제는 걱정 마옵시오. 영감께서 허락을 하셨습니다. 만신, 마음 턱 놓고 징, 장구 울려 가며 진배송이나마 산배송 다름없이 마님속이 시원하시게 잘 지내 주오."

금방울이 신옷을 내어 입고 장단을 맞추어 춤 한바탕을 늘어지게 추다가 매암 한번을 뺑뺑 돌며, 왼손에 들었던 방울을 쩔레쩔레 흔들더니 숨 한번을 오려논의 새 쫓듯 위이 쉬고서 공수를 주되, 호구별성이 금방 온 듯이 최씨를 불러 세우고 수죄를 하는데, 세상 부정 모두 돌아다 함진해 집에다 퍼부은 듯이 주워섬긴다.

"어허, 괘씸하다! 최씨 계주(季主)야, 네 죄를 네 모를까? 별성 행차를 몰라보고 물로 들어 수살(水殺) 부정(不淨), 불로 들어 화살(火殺) 부정, 거리 거리 성화 부정, 아침저녁 주왕 부정, 사람 죽어 상문 부정, 그릇 깨져 악살 부정, 쇠털같이 숱한 부정을 아니 범한 것이 없구나. 앉아서 삼천리요, 서서는 구만리라. 너의 인간은 몰라도 내야 어찌 속을쏘냐. 어허, 괘씸하다! 네 죄를 생각거든 네 아들 데려간 것을 원통타 말아라."

이때 최씨와 노파는 번차례로 나서서 손바닥을 마주 대어 가슴 앞에 높이 들고 썩썩 비비면서 입담이 매우 좋게 비는데,

"허하고 사합시사. 인간이라 하는 것이 쇠술로 밥을 먹어 아무것도 모릅니다. 여러 가지 부정을 다 쓸어 버려서 함씨 가중을 참기름같이 맑혀 줍소사. 입은 덕도 많삽거니와 새로 새 덕을 입혀 주사, 죽은 자식은 연화대(蓮花臺)로 인도해 주시고 새로 낳는 자손을 수명 장수하게 점지해 줍시사."

금방울이 또 한번 춤을 추다 여전히 매암을 돌며 휘이 휘 소리를 하더니 황주 봉산 세청 미나리 곡조같이 노랑목을 연해 넣어 가며 넋두리가 나오는데 최씨 마음에는,

'아마 만득이 넋이 돌아왔거니.'

싶어 제가 살아오나 다름없이 소원의 일이나 물어 보고 원통한 말이나 들어 보겠다고 하고 바싹바싹 들어서더니, 천만뜻밖에 다시 오려니 생각도 아니 하였던 귀신이 왔더라.

금방울의 두 눈에는 눈물이 더벅더벅 떨어지며,

"에그, 나 돌아왔소. 내가 이 집에 인연지고 시운진 내오. 에그, 할멈, 나를 몰라보겠나? 아, 삼 년 석 달 병들어 누웠을 때 단잠을 못다 자며 지성으로 구완해 주던 자네 은공, 죽은 넋이라도 못 잊겠네, 에. 침방에 있는 반닫이 안에 나 시집 올 때 가지고 온 은반상이 있으니 변변치 않으나, 그것이나 갖다가 내 생각 하여 가며 받아 먹게, 에. 에그, 원통해라, 아! 정도 남다르고 의도 남다르더니 한번 죽어지니까 속절이 없고나, 아."

이때 구경하는 집안 식구들이 제각기 수군거리는데 어떤 계집은,

"여보 형님 형님, 저게 누구의 넋이 들었소? 아마 재취 마님이지."

어떤 계집은,

"아닐세, 은반상 해가지고 오셨다는 것을 들어 보게. 초취 마님이신 가 뵈. 이별제 댁이 부자로 사시는 때문에 그 마님 시집 오실 제 퍽 많이 가지고 오셨다데. 재취 마님 친정은 억척 가난하여서 이 댁에서 안팎을 싸오셨는데 은반상이 다 무엇인가? 질그릇도 못 가져왔다네."

어떤 계집은,

"아주머니 말씀이 옳소. 영감 마님과 금실도 초취 마님이 계셨지. 재취 마님과는 나무 공이 등 맞춘 것같이 삼 년이나 사시며 말 한 마디 재미있게 해보셨소?"

그 중의 한 계집은 여러 사람의 이야기하는 것을 한편으로 들어 가며 행주치마 자락을 접어 들고 두 눈에는 샘 솟듯 나오는 눈물을 이리 씻고 저리 씻고 흑흑 느껴 우는데, 이때의 최씨는 눈꼬리가 실쭉하여 아무 말도 아니하고 섰다가 혀를 툭툭 차며,

"저렇게 원통한 것을 누가 죽으라고 고사를 지냈나? 이년 삼랑아, 보기 싫다. 너는 죽은 사람만 밤낮 못 잊어 아이 때부터 드난을 했나니, 무던한 심덕을 못 잊겠나니 하며, 산 나는 쓴 외 보듯 하는 터이니 공연히 소요스럽게 울고 섰지 말고 저렇게 왔을 때에 아주 따라가려무나. 할멈, 나가서 영감 여쭙게, 귀신이 보고 싶다네. 그 소원이야 못 풀어 주겠나?"

함진해가 집안에서 똥땅거리는 것이 듣기 싫어 의관을 내려 입고 친구집에 가서 바둑이나 두다 오려고 막 나서다가 할멈이 나와 큰 마누라의 혼이 들어와 청한다는 말을 듣고 속종으로,

'이런 미친 무당년도 있나? 여인들을 속이다 못하여 나까지 속여 보려고. 대관절 그년의 거동을 구경이나 해보아, 정 요사스럽거든 당장 내어 쫓으리라.'

하고 노파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오며,

"우리 죽은 마누라가 어디 왔어, 응?"

그 말이 채 그치기 전에 넋두리하던 무당이 마주 나오며 대성통곡하더니, 함진해의 입이 딱 벌어지며 혀가 홰홰 내둘리게 수작이 나온다.

"에그 영감, 나를 몰라보오, 오? 아무리 유명(幽明)이 달라졌기로 어쩌면 그다지 무정하오, 오? 나 병들었을 때에 무엇이라고 하셨소, 오? 십 년 동거하던 정을 버리고 왜 죽으려 드느냐고 저기 저 창 밑에서 더운 눈물을 더벅더벅 떨어뜨리시던 양을 보고 죽는 나의 뼈가 아프며 눈을 못 감겠더니, 이 눈이 꺼지지 않고 살이 썩지도 않아 밤낮 열나흘 경을 읽어 구천응원이 호통을 하고 소거백마가 선봉이 되어 앞뒤에다 금사진을 치고 움도 싹도 없이 잡아 가두려 하였으니, 아무리 영감이 하신 일은 아니시나 인정에 어찌 모르는 체하오, 오? 간신히 자취를 숨겨 이 집을 떠날 제 원통하고 분한 생각 어느 날 어느 때에 잊히겠소, 오? 이집 저집 엿보며 수수밥 조죽 사발로 고픈 배를 채우면서 그 동안 세월을 보내던 내오, 오."

그때 겨시로 왔던 무당이 별안간 손뼉을 치며 넋두리가 또 나오는데,

"에그, 나도 돌아왔소. 이팔청춘에 뒷방 마누라가 되어 긴 한숨 짜른 탄식으로 평생을 마치던 박씨 내오, 오. 여보 영감, 그리를 마오. 살아서 박대하고 죽어서도 미워하여 밝은 세상을 보지도 못하게 경을 읽어 가두려 드오, 오. 에그, 지원극통해라, 아!"

하더니, 그 다음부터는 둘이 병창(竝唱)을 하여 흑흑 느껴 가며,

"우리 둘이 전후취(前後娶)로 영감께 들어와 생전에는 서로 보지도 못했으나 고혼은 남과 달라, 아. 손목을 마주잡고 설운 눈물이 마를 날 없이 전전걸식(轉轉乞食) 다니다가 칠월 보름날 사시초(巳時初)에 베전 병문에서 영감을 만나 이씨 나는 동남풍이 되고, 박씨 나는 서북풍이 되어 두 바람이 모여 회오리바람이 되었소, 오. 영감의 가시는 길을 에워싸고 이리 돌고, 저리 돌고, 감돌고 푸돌며 지접(止接)할 곳을 두루 찾더니 영감 쓰신 제모립이 둥둥 떠나가 일 마장 밖에 가 떨어지기에 우리가 그 갓에 은신을 했더랬소, 오. 그 길로 영감을 따라 집에를 돌아온 지 보름이 다 되도록 국내 장내 맡기만 했지, 떡 한 덩이 못 얻어먹었소, 오. 여보아라 최씨야, 우리를 그렇게 박대하고 무사할 줄 알았더냐! 네 자식 데려간 것을 원통타 마라아. 별성 마마께 호소하고 네 자식을 잡아 왔다아."

상하 노소 여인들이 서로 수군수군하며,

"에그, 저것 보아. 초취 재취 두 마님이 모두 오셨네. 그런데 그게 무슨 소릴까? 영감더러 하는 말씀이 이상도 하지. 그러니까 댁 아기를 그 마님이 데려갔구려. 누가 그대 뜻이나 했을까? 경 읽어 가두면 다시 세상에 못 나오는 줄 알았더니 경도 쓸데없어."

이 모양으로 공론이 불일한데 이씨 박씨의 죽은 넋이 함진해의 산 넋을 다 빼갔던지 함진해가 금방울의 입만 물끄러미 건너다보고 두 눈에 눈물이 핑 돌며,

"허허, 무당도 헛것이 아니로군. 내가 베전 병문에서 회오리바람을 만난 것을 집안 사람도 본 이가 없고 아무더러도 이야기한 적도 없는데 여합부절로 말하는 양을 본즉 귀신이라는 것이 있기는 있는걸."

하고 최씨더러 책망을 하는데 함진해 생각에는 예사로 하는 말이지마는 최씨 듣기에는 죽은 마누라 역성이 시퍼런 것 같더라.

"집안에서 나만 쌀쌀 기이고 못 할 짓이 없었군. 아무리 죽은 사람이기로 내 가속 되기는 일반인데, 어느 틈에 옥추경을 읽어 가두려 들었던고? 마음을 그렇게 독하게 쓰고서야 자식을 보전할 수가 있나?"

혀를 뚝뚝 차며 할멈 이하 여러 계집종을 흘겨보며,

"이년들, 아무리 마님이 시키기로, 내게는 한마디 고하는 년이 없고, 네 이년들, 견디어 보아라. 차후에 무슨 변이 또 있으면 그제는 한 매에 깡그리 때려 죽일 터이다. 너희년쯤 죽이면 귀양밖에 더 가겠느냐?"

최씨는 자기 남편의 하는 양을 보고 옥니가 뽀도독뽀도독 갈리며 강열이 바싹 치밀지만 부지중에 소원성취된 일 한 가지가 있어, 분한 줄도 모르고 설운 줄도 모르고 도리어 빌붙느라고 골몰중이니, 그 성취된 소원은 별것이 아니라 자기 남편이 무당이라면 열스무 길씩 뛰더니, 넋두리 한바탕에 고집 세던 응어리가 확 풀어지며 깜짝 반하는 모양이라. 인제는 쉬쉬할 것 없이 펼쳐 내어 놓고 할 노릇을 한껏 해보겠다 하고 목소리를 서늘하게 눅여 가며,

"영감, 내가 다 잘못한 일인데 하인들 걱정하실 것 있소? 집안에 우환이 하도 떠나지 아니하기에 그러면 나을까 하고 지각 없는 일을 했었구려. 그러기에 여편네지. 그렇지 아니하면 여편네라고 하겠소? 이 다음부터는 집안만 편안하다면 이씨 박씨 두 귀신을 내 등에 업어 모시기라도 하리다."

함진해의 위인이 이단(異端)을 물리치고 오도(吾道)를 존숭하는 도학군자(道學君子)라든지 원소(原素)를 궁구하여 물질(物質)을 분석하는 물리박사 같으면 물 같은 심계가 휘저어도 흐려지지 아니할 것이요, 산 같은 지조가 흔들어도 빠지지 아니할 터이지마는, 여간 주워들은 문견으로 점잖은 모양을 강작(强作)하여 무당 판수를 반대하던 것이, 첫째는 남이 흉볼까 함이요, 둘째는 인색에서 나옴이라. 실상은 의심이 믿음보다 많아 귀신이 있는 듯도 하고, 없는 듯도 하던 차에, 없는 증거는 보지 못하고 있는 증거는 확실히 본 듯싶어서, 어서어서 회사를 발기하든지 학교를 설립하든지, 고금이나 보조를 청구하면 당장 굶고 벗는 듯이 엄살을 더럭더럭 하여 가며 한푼 돈내기를 떨던 규모가, 별안간에 어찌 그리 희떠워졌는지 싸고 싸두었던 이전 찾아 벼 작전해 온 돈을 아까운 줄 모르고 펄쩍 날라다 별비를 써가며 무당 하는 대로 시행을 하는데, 눈치빠른 금방울이는 함진해의 하는 거동을 보고 새록새록 별소리를 다 지어내어 번연히 제 입으로 말을 하여 제 욕심을 채우면서도 저는 아무 상관 없는 듯이,

"이씨가 노자를 달라 한다.
박씨가 의복차를 달라 한다.
당집을 짓고 위해 달라.
달거리로 굿해 달라."

하여 당장에도 빼앗고 싶은 대로 빼앗고 이 다음까지 두고두고 우려먹을 거리까지 장만하는데, 거죽 인심을 푹 얻어 놓아야 아무 중병이 아니 나겠다 하고 만득이 넋두리를 대미처 하며 나 업어 준 공으로 할멈은 무엇을 주고, 젖 먹여 준 공으로 유모는 무엇무엇을 주고, 삼랑이 은단이는 이것저것을 차례로 주라고, 어머니 아버지를 연해 불러 가며 부탁을 하여 파산선고(罷産宣告)당한 집의 판심하나 다름없이 집어내려 들더라.

싸리말 짚오쟁이에 홍양산수팔연을 갖추어 입담 좋은 마부놈이 마부타령을 거드럭거려 하며 호구별성을 모시고 나가는데, 그림자나 흔적도 없는 치행에 찾는 것이 어찌 그리 많은지 형형색색으로 섬길 수 없는 중, 대은전쾌를 지어 말원앙을 달아라, 세백목필을 채어 마혁을 달아라, 마량을 달라, 대갈갑을 달라, 요기차 신발차 등속의 달라는 소리가 한끈에 줄줄 이었더라.

그전에는 최씨가 안잠 마누라를 데리고 역적 모의하듯 그대 소문이 날세라, 그대 눈치가 보일세라 하여 가며 집안 망할 짓을 하더니, 인제는 도리어 자기 남편이 알지 못할까 봐 겁을 내고 함진해는 그런 말 듣기가 무섭게 내 집에 쓰던 돈이 없으면 남에게 빚을 내어다라도 그 시행은 하고야 마는데, 장안 만호 집집마다 날 곧 밝으면 개문하니 만복래(開門萬福來)로 떡떡 열어 젖혀, 가까운 친척이나 정다운 친구들이 나오기도 하고 들어가기도 하건마는, 밤이나 낮이나 잠시 아니 열어 놓고 안으로 빗장을 굳게 질러 적적히 닫아 두는 대문은 함진해 집이라. 그 집 대문을 왜 그렇게 닫아 두었는고 하니, 매삭 초하루 보름으로 고사도 지내고, 기도도 하느라고 부정한 사람이 내왕할까 염려하여 대문 주초 앞에 황토를 삼태로 퍼부어 두고 좌우 설주에 청솔가지를 날마다 꽂아 두건마는 그 사정 모르는 사람은 종종 들어오는 고로, 그 폐단을 없이하느라 그 문을 아주 닫은 것이더라.

하루는 황혼이 될락말락하여 대문에서 벼락치는 소리가 나며 노파가 들어오더니, 최씨 입에서 사북 개천 같은 욕설이 나오는데,

"그 양반이 왜 그리 성가시게 굴어? 그것 참 심상치 아니한 심사야. 죽어서 꽁지벌레밖에 안 될걸. 그 모양이니까 나이 사십이 불원하도록 초사 하나 못 얻어 하고 비렁뱅이 꼴로 돌아다니지. 남 잘사는 것이 자기 못사는 것보다 더 배가 아픈 것이로군."

"왜 그 상제님이 남이십니까? 남도 아니신데 그러시니까 딱하시지요."

"일가 못 된 것은 남만도 못하다네. 친형인가, 친아우인가? 사촌부터야 남이나 질 것이 무엇인가? 에그, 나는 일가도 귀치 않고 당내도 성가스러워. 모두 일본이나 아라사로 떠나가기나 했으면 이꼴 저꼴 아니 보겠네."

함진해는 영문도 모르고 저녁밥을 먹으러 들어오다가 그 광경을 보고,

"왜 누가 어찌했길래 그리하오? 떠들지 않고는 말을 못 하오? 요란스럽소."

"누구는 누구야요? 진위 상제님인지 누구인지, 날송장을 주무른 지가 석 달 열흘도 못 되고서 아무리 대소가기로 무엇 하러 와서 대문이 닫혔으면 고만이지, 발길로 박차고 들어올 것이 무엇이란 말이오? 번연히 알며 심사 부리는 것이지. 에그, 이 노릇을 어떻게 하나! 두 달 반이나 들인 공이 나무아미타불이 또 되었지. 삼신맞이를 하려면 번번이 이렇게 재앙이 드니, 우리 팔자에 자식이 아니 태었는지 삼신 제왕이 아무리 점지하시려니 이 모양으로 인간 부정이 있으니까 괘씸히 보시지 아니할 수가 있나?"

함진해가 입맛을 쩍쩍 다시고 남 듣게 말은 아니해도 속종으로는 부인의 말을 조금도 반대가 없이 자기 사촌을 긴치 않게 여겨서,

"사람도, 지각날 나이 되었건만, 응! 글자가 그만치 똑똑하여 각색사리를 알 만한 것이 술곧 먹으면 방정을 떨어! 어, 방정을 떨면 제 집에서나 떨지, 내 집에까지 와서 왜?"

입맛을 또 한번 쩍쩍 다시고 앉았다가 소리를 버럭 질러,

"삼랑아, 네 나가서 보아라, 작은댁 상제님인지 누구인지 갔나, 그저 있나? 그저 있거든 내서 들어오지 말고 냉큼 가라 하더라고 일러라."

삼랑이가 대답을 하고 중문간에를 막 나가는데 상제 하나가 추포중단에 새 방립(方笠)을 푹 숙여 쓰고 휘적휘적 들어오다가 삼랑이를 보고,

"영감 어디 계시냐?"

"아낙에 계신데, 밖에 상제님 오셨다는 말씀을 들으시고 들어오실 것 없이 바로 가시라 하셔요."

"들어오지 말라고, 들어오지 말라고? 왜 들어오지 말라고?"

하며 삼랑이 말은 다시 대꾸도 아니하고 바로 안마루 위에를 썩 올라서며,

"형님!"

한마디를 부르더니 대성통곡을 드러내 놓으니, 함진해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으며 어기가 질려 아무 말도 못 하고, 최씨는 독이 바싹 나서 아랫목에 앉았는 채 내어다보지도 아니하고 악만 바락바락 쓴다.

"왜, 와서 울어요? 왜 와서 울어요? 멀쩡한 집안에 왜 와서 울어요? 우리집에서도 초상난 줄 아시오? 아무리 대소가간이기로 깃옷을 입고 구태여 들어오실 것이 무엇이오?"

이 모양으로 수숙간 체통은 조금도 없이 무지막지하게 말을 하니, 전 같으면 함진해가 자기 부인을 적지않이 나무라고, 사촌의 우는 것을 좋은 말로 만류하였을 터이지마는, 사람의 심장이 변하기로 어쩌면 그렇게 변하였는지, 사촌이라도 친형제나 다름없이 자별하던 우애를 꿈에도 생각지 아니하고 영창을 메붙이며,

"이놈아, 내 집에 와서 울 곡절이 무엇이냐? 설우면 네 집 상청에서나 울지. 나이 사십이 불원한 것이 방갓귀를 쳐뜨리고 돌아다니며 먹을 것만 여겨 술만 퍼먹고 주정은 내게 와 해? 나는 네 주정받이 하는 사람이냐?"

그 상제의 선친은 곧 진해의 작은삼촌 함지평이라. 육십지년이 되도록 분호를 아니하고 백씨와 일문(一門) 동거하여 화기가 더럭더럭 하였고, 백씨 돌아간 뒤에도 그 조카 함일덕의 공부도 시키고 살림 뒷배도 보아 주느라고 곁집을 사들고 하루도 몇 번씩 큰 집에 와서 대소사 분별을 하여 주더니, 최씨가 삼취 질부로 들어온 후로 열 가지 일이면 아홉 가지는 뜻에 맞지 아니하여 한두 번 이르고 나무라다 점점 의만 상할 지경이라, 차라리 멀찍이 가서 살아 눈에 보고 귀에 듣지 아니하려고 진위로 낙향하였더니, 수토가 불복하여 그렇던지 우연히 병이 들어, 장근 삼 년에 신접살이 변변치 못한 재산이 여지없이 탕패할 뿐더러, 필경 백약이 무효하였는데, 그 아들 일청은 성품이 경직하여 사리에 조금이라도 온당치 아니한 것을 보면 듣는 사람이 싫어하든지 미워하든지 도무지 고기 아니하고 바른말을 푹푹 하는 터이라. 그 사촌의 심정이 변하여 범백처사(凡百處事)하는 양을 보고 부화가 열 길씩은 부풀어 올라오지마는, 자기 부친이 집안에 화기가 손상할까 하여 매양 만류함을 거역하기 어려워 꿀떡꿀떡하고 지내더니, 급상(急喪)을 당한 후 부고를 전인(專人)하여 보냈더니, 그 부고를 받아들이지도 아니하고 대문 밖에서 도로 쫓아 보내며, 상가를 통치 아니할 일이 있으니 아무리 박절하여도 백일이 지난 후라야 내려오겠다 말로만 일러 보내고, 초종(初終) 장례를 다 지내고 졸곡(卒哭)까지 지내도록 현영이 없는지라, 일청이 분한 생각대로 하면 성복(成服) 안이라도 뛰어올라가 손위 사촌이라 할 것 없이 한바탕 들었다 놓고 싶지마는, 행세하는 처지에 초상 상제가 상청을 떠날 수도 없고, 그러느라면 남에게 일문이 불목(不睦)하다는 비소도 받을 터이라, 참고 또 참아, 누가 종씨는 어찌하여 아니 내려오느냐 하게 되면 신병이 위중하니, 먼 곳에 출입을 했느니, 별별 소리를 다 꾸며 대어, 아무쪼록 뒤덮어 가며 그렁저렁 졸곡을 지낸 후에 질문 한번을 단단히 해보려고 벼르고 별러 올라왔더니, 자기 사촌의 집 대문을 닫아걸고, 천호만호(千呼萬呼)하여도 알고 그리했든지, 모르고 그리했든지 도무지 대답이 없다가, 노파가 마침 붉은 함지에 노란 식지를 덮어 머리에 이고 나오다가 자기를 보고 깜짝 놀라며,

"상제님, 무엇 하러 오셨습니까? 댁에 아기를 비시느라고 칠성 기우를 하시는데 백일이 한 보름밖에 아니 남았습니다. 들어가시지 말고 달이나 가시거든 올라오십시오."

하고 생면부지(生面不知) 과객 따돌리듯 하려 드니 함상인이 분이 날 대로 나서,

"무엇이 어쩌고 어찌해? 칠성 기우를 하기에 그렇지, 팔성 기우쯤 했드면 천일 부정을 볼 뻔했네그려. 부정은 누가 똥칠하고 다닌다던가? 자네가 명색이 무엇인데 누구더러 가거라 오거라, 어어, 아니꼬워."

노파가 최씨의 세줄만 믿고 함상인을 터진 꽈리만치도 못 알고 훌뿌릴 대로 훌뿌려 인사 도리가 조금도 없이,

"늙은 사람더러 아니꼽다고? 초상 상제가 부정하지 안하면 무엇이 부정한고? 양반은 법도 없나? 큰댁에서 자손이 없어 기우를 한다면 들어오라고 하신대도 도로 가실 터인데, 들어오시지 말라는데 부득부득 우기실 것이 무엇인고? 생각대로 합시오구려. 우리게 상관이 있습니까?"

다시는 말해 볼 새 없이 안으로 들어가니, 함상인이 본래 성미가 괄괄한 터에 그 구박을 당하매 어찌 기가 막히지 아니하리요. 자기 종씨를 들어가 보고 가슴에 서려 담아 두었던 책망도 절절이 하고, 노파의 분풀이도 시원하게 하려 들었더니, 입 쩍 한마디 해볼 새 없이 최씨의 악쓰는 소리를 듣고 설움이 북받쳐 올라오니, 이는 상제 몸이 되어 망극한 생각이 새로이 나는 것도 아니요, 자기가 박대를 받아 원통코 분해서 그리하는 것도 아니라. 수십 대 상전하여 오던 대종가가 최씨 수중에 망하는 일이 지원절통(至寃絶痛)하여 인사여부 할 새 없이 마룻바닥을 주먹으로 치며 대성통곡을 드러내어 놓은 것이라.

한참을 울다가 최씨의 포달 부리는 것을 듣고 분나는 대로 하면 다갱이가 깨지도록 적벽대전(赤壁大戰)이라도 할 터이나, 차마 수숙간 체통을 아니 볼 수 없어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다가 그 사촌의 만불근리하게 꾸짖는 말을 듣더니 최씨에게 할 말까지 한데 얼뜨려 말대답이 나온다.

"형님 마음이 변하셨소, 본래 그러시오? 내 아버지는 형님의 작은아버지시요, 형님 아버지는 내 큰아버지신데, 내 아버지 돌아가신데 졸곡이 다 지나도록 영연일곡(靈筵一哭)을 안 하오? 큰아버지 돌아가셨을 때에는 내가 철몰랐소마는, 만일 지금같이 장성하여서 현영을 안 하게 되면 형님 생각에 매우 잘한다 하실 터이오? 기도는 무슨 기도요? 기도를 하면 인사 도리도 없소? 펄쩍 기도 잘하는 집 잘되는 것 못 보았소."

함진해는 양심이 과히 없던 사람은 아니라, 손아래 사촌일지언정 바른말을 하니 무엇이라 대답할 말 없이 못 들은 체하고 있는데 최씨가 혀를 툭툭 차고 벌떡 일어나더니 자기 남편을 흘겨보며,

"에, 무능도 하오. 손아래 사람이 저 모양으로 할 말, 못 할 말 함부로 해도 꾸지람 한마디 못 하고 무슨 큰 죄나 지었소? 아니 할 말로 죽을 죄를 지었더라도 형은 형이지."

하며 영창문을 메어 붙이고 마주 나오더니,

"여보 상제님, 무엇을 잘못했다고 수죄를 하러 오셨소? 상제님은 삼사 형제씩 아들을 두었으니까 시들한가 보오마는 우리는 자식이 없으니까 아니 날 생각이 없어 기도를 하오. 무슨 기도인지 시원히 좀 아시려오? 왜 우리가 기도를 하여서 당신의 층층이 자라는 아들 장가를 못 들이겠소? 사내 양반이 악담은 어따 대고 하오?"

"내가 누구더러 악담을 했더란 말씀이오? 그렇게 하시지를 말으십시오, 아무리 분정지도에 하시는 말씀이라도."

"그러면 악담이 아니고 덕담이오? 번연히 우리가 기도를 하는데 기도하는 집 잘되는 것 못 보았다구? 잘되지 못 하면 망한다는 말이구려? 사촌도 이만저만이지, 누대봉사(累代奉祀)하는 종가 사촌인데, 종가가 망하면 무슨 차례 갈 것이나 있을 줄 아나 보구려. 망해도 내 집 나 망하는 것을 걱정할 것 없이 당신네 집이나 어서 흥해 보시오. 빈말이나 참말이나 종손 낳기를 빈다 하니, 없는 정성이 남과 같이 들이지는 못할지언정 중단자락을 휘두르고 훼방을 노러 오셨소?"

이 모양으로 함상인이 미처 대답할 새 없이 물 퍼붓듯 하더니 그 자리에 펄썩 주저앉아 들입다 울어 내니, 편협하고 배우지 못한 부인네가 마음에 맞지 아니한 일이 있으면 제 독살을 못 이기어 쪽쪽 울기는 흔히 하는 버릇이지마는, 최씨는 능청 한 가지를 가입하여, 자기 남편이 감동하도록 하느라고 갖은 사설을 하여 가며 자탄가(自嘆歌)로 울더라.

"팔자를 어떻게 못 타고 나서 이 모양인가! 으으으. 떡두꺼비 같은 자식을 잡아먹고 청승궂게 살아 있어서, 어어어. 눈먼 자식이라도 하나 점지하실까 하고 정성을 들여 보쟀더니, 이이이. 무슨 대천지 원수로 그것조차 방망이를 드누, 으으으. 인제는 사촌도 다 알아보고 대소가도 다 알아보았소, 어어어. 우리 만득이도 저 모양으로 총부리들을 대어서 죽었지, 이이이이."

치는 시어미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고 사설하는 최씨보다 곁에서 그만 그치라고 권하는 노파가 더 가통하다.

"마님 마님, 그치십시오. 분하고 원통하시면 어쩌십니까, 남도 아니시고 집안간이신데. 그리하시는 양반이 그르시지. 당하신 마님이야 잘못하시는 것이 무엇 계십니까? 마님 마님, 그만 그치십시오."

하더니 가장 사리를 저 혼자 아는 체하고 마루로 나와 함상인을 보고,

"사랑으로 나아가십시오. 점점 마님 분만 돋우지 말으시고, 재하자는 유구무언(有口無言)이랍니다. 상제님 잘하신 것도 없지마는, 아무리 잘하셨기로 형수마님이 저렇게 하시는데 어찌하십니까? 마님 말씀이 한마디도 틀리신 것이 없습니다. 어서어서 나아가십시오."

일청이가 울던 눈을 딱 걷어붙이고 대청 들보가 뜰뜰 울리게 소리를 질러,

"어, 아니꼬워! 그 꼴은 더 못 보겠구. 늙은것이 안잠을 자러 돌아단기면 마음을 올곧게 먹어 주인집이 잘되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전후 요사스러운 말은 모두 지어내어 남의 집을 결딴을 내려고, 무엇이 어쩌고 어찌해? 마님 분돋움을 내가 해? 재하자는 유구무언이야? 이를테면 나의 행실을 가르치는 모양인가? 한 매에 죽이고도 죄가 남을 것 같으니."

함상인이 쓰레발 같은 짚신을 집어 부시럭부시럭 신으며,

"형님, 나는 가오. 인제 가면 어느 때 또 뵈러 올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말이 나오니, 잘잘못은 고사하고 가깝지 아니한 길에 올라온 사촌이니, 아무라도 하루를 묵어 가라든지, 그렇지 못하면 밥이라도 먹고 가라 할 터인데, 무안해 그렇든지 얘기가 질려 그렇든지 함진해는 달다 쓰다 말이 도무지 없이 내어 밀어 보지도 아니하고 있더라.

사람의 집 재산은 물레바퀴같이 빙빙 돌아다니는 것이라. 이 집에 없어지면 저 집에 생기고, 저 집에 없어지면 이 집에 생겨서 있다가 없어지기도 쉽고, 없다가 있기도 쉬워 변화 번복을 이루 측량하기 어려운 것이라.

함씨의 집안 대청에 금방울 소리가 딸랑딸랑 한차례 난 이후로 몇 사람은 못살게 되고 몇 사람은 생수가 났는데, 그 서슬에 해토머리에 눈 사라지듯 없어져 가는 것은 함진해의 재산이라.

못살게 된 사람은 누구누구인고 하니, 첫째는 함상인이니, 함상인이 그 모양으로 다녀간 후로 최씨의 미워하는 마음이 대천지 원수보다 못지 아니하여, 자기 남편에게 없는 말 있는 말을 하려 들어, 저의 부친 유언으로 해마다 주던 돈 몇천 냥, 벼 기십 석을 다시는 주지 아니할 뿐더러, 진위 땅에 있던 농막(農幕)까지 다른 곳으로 이매하여 농사도 지어 먹지 못하게 하니, 신꼴망태 쏟아 놓은 것 같은 층층이 자라는 자녀들은 모두 밥주머니요, 다산한 부인의 벌통 같은 뱃속은 쓴것 단것을 물론하고 들여라 들여라 하는데, 졸지에 생맥이 뚝 끊어지니, 성품은 남보다 급한 함상인이 어찌 기가 막히지 아니하리요. 열 번 죽어도 자기 사촌의 집에는 다시 발길 들여 놓기가 싫어 허리띠를 바싹바싹 졸라매어 가며 지직닢도 매고 짚신 켤레도 삼아, 쌀되 나뭇짐을 주변하여 하루 한때 죽물을 흐려 가고, 둘째는 박유모니, 박유모는 함진해 돌 전부터 젖을 먹여 길러 낸 공으로 그 이웃에다 집을 장만해 주고 일동일정을 대어 주니 나이 육십여 세가 되도록 걱정 없이 지내니, 남들이 말하기를, 함진해는 박유모의 젖이 아니면 살지 못하였을 것이요, 박유모는 함진해의 시량(柴糧)이 아니면 살지 못하겠으니, 천지간 보복지리가 신통하다고들 하더니, 신통이 변하여 절통이 되느라고 함상인이 최씨에게 구박을 받고 쫓겨나올 때에 늙은 마음에 너무 가엾어서 자기 집으로 청해 들여 좋은 말로 위로하고 장국 한 상을 대접하여 보냈더니, 박유모의 바른말이 듣기 싫어 소리 없는 총이 있으면 탕 놓아 죽이고 싶어하는 안잠 마누라가 그 일을 알고 증연부익을 하여 무엇이라고 얽어 넘겼던지 하루라도 아니 오면 하인을 보내 불러다 보고, 감기나 체증으로 조금만 편치 않다면 몸소 가서 문병하던 함진해가, 별안간에 괘씸하니 괴악하니 하는 무정지책으로 눈앞에 뵈지 말라 일절 거절하고, 다시는 나무 한 가지 양식 한 움큼 대어 주지 아니하니, 남의 농사는 잘 짓고 내 농사는 잘못하듯, 함진해는 잘 길러 주면서 자기 자식은 기르지 못할 근력 없는 소경 늙은이가 끈 떨어진 뒤웅이 모양으로 삼척 냉돌에 뱃가죽이 등뒤에 가 붙어, 오늘 내일 간 어서 죽기만 기다리고 있더라. 그러면 생수난 사람들은 누구들인고 하니, 첫째는 금방울이라. 베전 병문에서 회오리바람에 함진해 갓 벗겨지는 것을 넌짓 보고 그 눈에 뜨이지 아니하려고 행랑 뒷골로 돌아온 후로 어쩌면 함씨 집 쇠를 먹어 볼꼬 하다가, 대묘골 무당의 인도로 함씨 집에를 다니며 앙큼하고 알랑스러운 수단으로 그날부터 회오리바람을 두고두고 쇠옹두리 우리듯 하여 먹는데 별별 기묘한 방법이 다 있어, 삼국시절 적벽강 싸움에 방덕 선생이 조조를 속여 연환계로 팔십만 대군을 깨치듯 금방울은 함씨 내외를 속여 정탐 수단으로 누거만(累巨萬) 재산을 탈취하는데, 그 내외의 웃고 찡그리는 것까지 전보를 놓은 듯이 금방울의 귀에 들어오면, 금방울은 귀신이 집어 대는 듯이 일호(一毫) 차착(差錯) 없이 말을 번번이 하니, 함진해는 쥐에게 파먹히는 닭 모양으로 오장을 빼어 가도 알지 못하고, 영하니 신통하니 하여 가며 자기 정신을 자기들이 차리지 못할 만치 되었는데, 제일 큰 문제는 아들 비는 일이라. 돈을 쳐들이고 쌀을 퍼주어 가며 보름 기도니, 한 달 기도니 하여 이웃집에서 닭 한 마리만 잡아먹고 누가 손가락 하나만 베도 부정이 들어 효험이 없겠다 하고 번번이 다시 시작을 시키다가, 다시는 핑계 될 말은 없고 기도만 마치면 태기 있기를 날마다 기다릴 것이요, 태기가 요행 있으면 좋으려니와, 만일 없고 보면 헛일을 했느니, 영치 않으니 하여 본색이 탄로될 터이니 무엇으로 탈을 잡을꼬 하고 별 궁리를 모두 하다가 함상인 다녀간 소식을 듣더니, 얼씨구 좋다 하고 상문 부정을 연해 쳐들어 살풀이를 해도 여간해서는 아무 일도 아니 되겠다 칭탁하고, 또 한차례를 빼앗아 먹는데, 함씨의 집 광 속 뒤주 속에 있는 오곡 백곡은 제 양식이나 다름없고, 함씨의 집 장 속 반닫이 속에 있는 능라금수(綾羅錦繡)는 제 의복이나 다름없으며, 그 지차에는 노파 삼랑 등이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살판이 났는데, 최씨 부인 앞에서는 질고 갠 날 없이 양반의 일 하느라고 죽을 힘을 다 들이는 체하여 특별 행하가 물 퍼붓듯 나오도록 낚아 내고, 금방울에게는 우리가 아니면 네 일이 아니 되리라고 생색과 공치사를 연해 하여 열에 두셋씩은 으레 떼어먹어 행랑방 구석으로 돌아다니던 것들이 뒷구멍으로 집과 세간을 제각기 떡 벌어지게 장만했더라. 말 많은 집안의 장맛이 쓰다고, 구기 몹시 하고 무당 좋아하는 집안은 우환질고(憂患疾苦)가 으레 떠나지 아니하는 이치라.

함진해 내외가 번차례로 앓아, 하루 빤한 날이 별로 없어 푸닥거리성주받이를 아무리 펄쩍 하여도 아무 효험이 없으니 최씨도 넋이 풀리고 금방울도 무안하여, 다시 무슨 일을 시킬 염치가 없으니, 그렇다고 그만두고 보면 함씨의 재물을 다시 구경도 못 해볼 터이라, 한 가지 새 의견을 내어 나머지까지 마저 훑어 내는 바람에 함씨의 조상 뼈다귀가 낱낱이 놀아나더라.

사람마다 한 가지 흉은 없기가 어려우되, 전라도 낙안 사는 임지관이라 하는 사람은 제반 악증을 모두 겸하여, 세상 없는 사람이라도 그자에게 들어 속아넘어가지 않는 이가 없으므로, 제 것이 한푼 없어도 호의호식(好衣好食)하고 경향으로 출몰하며 남 속이는 재주를 한두 가지만 품은 것이 아니라. 의술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면 의원(醫員) 행세도 하고, 음양술수(陰陽術數)를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면 이인(異人) 자처도 하고, 산리에 고혹(蠱惑)한 사람을 만나면 지관(地官) 노릇도 하여, 어리석고 무식한 무리를 쫓아다니며 후려 넘기는데 외양도 번번하고 글자도 무식지 않고, 구변도 썩 좋은지라, 대저 마름쇠로 상하 삼판에 어디를 가든지 곁자리가 비지 아니하는 유명한 자이라. 서울 와 주인을 정하되, 장안 만호 하고많은 집에 장과 국이 맞느라고 금방울의 이웃집에다 정하고 있으니, 유유상종(類類相從)으로 자연 친숙하여 남매지의(男妹之義)를 맺어, 누이님, 오빠 하며 정의가 매우 두터운 터이라. 못 할 말, 할 말 분간할 것 없이 속에 있는 회포를 의논할 만치 되었는데, 하루는 임지관을 청하여 한나절을 무어라 쑥덕공론을 하더니 임지관이 그날로 행장을 차려 주인을 떠나가더라.

함진해가 여러 날 최씨의 병구완을 하다가 자기도 성치 못한 몸에 자연 피곤하여 사랑에 나와 정신없이 누웠더니, 노파가 창 밖에 와서 근심이 뚝뚝 듣는 말소리로,

"영감마님, 주무십니까?"

함진해가 깜짝 놀라며,

"왜 그러나, 마님 병이 더하신가?"

"아니올시다. 놀라지 마십시오. 제가 아니 할 생각이 없어서 국수당 만신을 청해 조상대를 내려 보니까 이상스러운 말이 나서 영감께 여쭙니다."

"무슨 이상한 말이 있더란 말인가? 무당의 소리도 인제는 듣기 싫어."

"댁에 위로할 귀신은 위로도 하고, 퇴송할 귀신은 퇴송도 하였으니 우환 걱정이 다시는 없을 터인데, 한 가지 조상의 산소가 잘못 들으셔서 화패가 자주 있다고, 고명한 지관을 찾아 하루바삐 면례(緬禮)를 하면 곧 효험을 보겠다 하여요."

"이 사람, 쓸데없는 말 고만두게. 고명한 지관이 어디 있다던가? 내가 몇십 년 구산에 금정(金井) 하나 바로 놓는 자를 만나 보지도 못했네."

"만신에게 한 번 더 속아 보실 작정 하시고 들어오셔서 물어 보십시오. 정성이 간곡하면 천하명풍을 만나리라고 공수를 줍디다."

"정성 정성, 내가 무당의 말 듣기 전에 명풍을 만나려고 정성도 적지않이 들여 보았네마는, 다 쓸데없데. 그러나 허허실수로 한번 물어나 보세."

하고 귀밑에 옥관자를 붙이고 제왈 점잖다 하는 위인이 남부끄러운 줄도 그다지 모르던지 노파의 궁둥이를 줄줄 따라 들어와 금방울 앞에 가 납신 앉으며,

"그래, 우리집 우환이 산화로 그러해? 그 말이 어지간하기는 한걸. 세상에 똑똑한 지관을 만날 수 없어 선대감 내외분 산소부터 내 마음에 일상 미흡하건마는 그대로 뫼셔 두었는걸. 어떻게 하면 도선이 무학이 같은 명풍을 만날꼬? 시키는 대로 정성은 내가 드리지."

금방울이 백지로 한허리를 질끈 맨 청솔가지를 바른손으로 잡고 쌀모판에다 한참 딱딱 그루박으며 엮어 대는 듯이 무어라고 주워섬기더니 상큼하게 쪼그리고 앉으며 두 손 끝을 싹싹 비비고,

"에그, 이상도 해라. 영감께서 이런 말을 들으시면 제가 지어내는 줄 아시겠네."

"무엇이 그리 이상해? 대관절 어떻게 하면 만나겠나, 그것이나 물어 보라니까."

"글쎄 그 말씀이올시다. 알 수는 없지마는 신의 말씀이 하도 정녕하게 집어 낸 듯이 일러주시니 시험하여 보십시오. 내일 정오 십이시에 무학재 고개를 넘어가면 산겨드락 소나무 밑에서 어떠한 사람이 돌을 베고 잘 것이니, 그 사람에게 정성을 잘 들여 보시라고 공수를 주셨습니다. 하도 이상하니까 제 입으로 말을 하면서도 지내 보지 않고 장담할 수 없습니다. 아무렇든지요, 밤만 지내면 즉 내일이니, 잠시 떠나시기 어려우셔도 영감께서 손수 가보시든지 정 겨를이 없으면 친신한 사람을 보내어 보십시오."

"그 시에 가면 정녕 그런 사람이 있을까? 명산을 얻어 쓰려면서 다른 사람을 보내서 될 수가 있나? 내가 친히 가 정성을 들여야 할 것이지."

하더니 탈것 두 채를 마침 준비하였다가, 그 시간을 맞추어 무학재로 향하는데, 새문 밖에를 나서 이전 경기 감영 모퉁이를 돌아서더니 함진해가 눈을 연해 씻으며 독립문을 향하고 맞은편 산 근처 푸르스름한 나무 밑이라고는 하나 내어 놓지 아니하고 이리저리 아무리 살펴보며 가도 사람이라고는 나무꾼 하나 볼 수 없는지라, 속중으로,

'허허, 또 속았구. 번연히 무당이란 것이 헛것인 줄 짐작하면서 집안에서 하도 떠들기에 고집을 못 할 뿐 아니라, 어떤 말은 여합부절로 맞기도 하니까 전수히 아니 믿을 수 없어 오늘도 여기를 나오는 길인데.'

하며 무학재를 막 넘어서니까 남산 한 허리에서 연기가 물씬 나며 오포 놓는 소리가 귀가 딱 맞치게 탕 한번 나는데, 길 위 산비탈 아래 소나무 한 주가 우뚝 섰고 그 밑에 어떤 사람 하나가 갓을 벗어 나뭇가지에 걸고, 겉옷자락으로 얼굴을 덮고 모로 누워 잠이 곤히 들었는지라. 함진해가 반색을 하여 인력거에서 내려 곁에 가 가만히 앉아 행여나 잠을 놀라 깨울세라, 기침도 크게 못 하고 있는데, 한 식경은 되어 잠을 깨는 모양같이 기지개 한번을 켜더니, 다시 돌아누워 잠이 또 드는지라, 아무 말도 못 하고 석양이 다 되도록 그대로 기다리고 있다가, 그자가 부시시 일어나 두 손으로 눈을 썩썩 비비고 입맛을 쩍쩍 다시며 거들떠보지도 아니하는 것을 보고, 함진해가 공손히 앞에 가 꿇어앉으며 구상전이나 만난 듯이 자기 몸을 훨쩍 쳐뜨려 수작을 붙인다.

"이왕 일차도 뵈온 적이 없습니다. 기운이 안녕하십니까?"

그자는 못 들은 체하고 눈을 내리깔고…… 그리할수록 함진해는 말소리를 나직이 하여 가며,

"문안 다동 사는 함일덕이올시다."

그자는 여전히 못 들은 체하고…… 이같이 한 시 동안은 있더니 그자가 눈살을 잔뜩 찡그리고,

"응, 괴상한고! 응, 누가 긴치 않게 일러주었노?"

그 말을 들으니 함진해 생각에 제갈량(諸葛亮)이나 만난 듯이,

'옳다, 인제야 내 소원을 성취하겠다. 천행으로 이 사람을 만나기는 했지마는 조금이라도 내 성의가 부족하면 아니 될 터이니까…….'

하고서 다시 일어나 절을 코가 깨어지게 하며,

"제가 여러 십 년을 두고 한번 뵈옵기를 주야 응축하였습니다마는, 종시 정성이 부족하여 오늘이야 뵈옵니다. 타실 것을 미리 등대하였으니 누추하시나마 제 집으로 행차하시기를 바랍니다."

그자가 함진해를 물끄러미 보다가 허허 웃으며,

"할 일 없소. 벌써 이 지경이 된 터에 박절히 대접할 수 있소? 그러나 댁 소원이 집안 질고나 없고 슬하에 귀자(貴子)나 낳을 명당 한 곳을 얻으려 하지 않소?"

함진해의 혀가 절로 내둘리며 유공불급(猶恐不及)하게,

"네, 다른 소원은 아무것도 없고, 그 두 가지 뿐이올시다. 선친의 묘소를 흉지에다 뫼셔 화패가 비상합니다. 자식 되어 제 화패는 고사하고 부모 백골이 불안하시니 일시가 민망하오이다."

"내 역시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으니까 별도리가 있소? 그나저나 오늘은 피곤하여 잠도 더 자야 하겠고, 볼일도 있어 못 가겠으니 내일 이맘때 동대문 밖 관왕묘 앞으로 나오되 아무도 데리지 말고 댁 혼자 오시오. 나는 누워 자겠고. 어서 들어가시오."

하며 돌을 다시 베고 드러눕더니 코를 드르렁드르렁 고는지라. 함진해가 다시 말 한마디 붙여 보지 못하고 집으로 들어와, 이튿날 오정이 될락말락하여 단장 하나만 짚고 홀로 동관왕묘를 나아가느라니 자연 십여 분 동안이 늦었는지라, 그자가 벌써 와 앉았다가 함진해를 보고 정색하여 말하되,

"점잖은 사람과 상약(相約)을 하였으면 시간을 어기지 않는 일이 당연하거늘 어찌하여 인제 오느뇨?"

"시간을 대어 오느라는 것이 조금 늦어서 오래 기다리셨을 듯하오니 죄송만만하도소이다."

"오늘은 늦었으니 내일 다시 오정에 삼각산 백운대 밑으로 오라."

하고 뒤도 아니 돌아보고 왕십리를 향하고 가거늘, 함씨가 더욱 조민(燥悶)하여 집으로 들어오는 길로 금방울을 청하여 소경사를 이르고,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문의를 한즉, 금방울이 손으로 왼편 턱을 괴고 눈만 깜짝깜짝하고 있다가,

"에그, 영감마님, 일이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명풍의 손을 비시려면서 예단(禮單) 한 가지 없이 그대로 가보시니까 정성이 부족하다 하여 터의를 얼른 하지 아니하는 것인가 보오이다. 내일은 다만 백지 한 장이라도 정성껏 폐백을 하시고 청해 보십시오."

"옳지, 그 말이 근리하군. 내가 까마니 잊고서 빈손으로 연일 단겼으니 그 양반이 오죽 미거히 여겼을라구. 폐백을 아니하면 모르거니와, 백지 한 권이 다 무엇이야? 그도 형세가 헐수할수없으면 용혹무괴(容或無怪)어니와 내 처지에야 그럴 수가 있나? 하불실 일이백 원 가량은 폐백을 하여야지."

"에고, 영감, 잘 생각하셨습니다. 산소를 잘 모시어 댁내에 우환이 없으시고 겸하여 만금(萬金) 귀동자 아기를 낳으시면 그까짓 일이백 원이 무엇이오니이까? 일이천 원도 아까우실 것 없지."

제삼일 되던 날은 함진해가 지폐 이백 원을 정한 백지에 싸고 싸서 조끼에 집어넣고 개동군령의 집에서 떠나 창의문을 나서서 인력거는 돌려보내고, 메투리에 들메를 단단히 하여 천리 만리나 갈 듯이 차림이 대단하더니, 조지서 언덕을 채 못 가서 숨이 턱에 닿아서 헐떡헐떡하며 펄쩍 해만 치어다보고 오정이 지날까 봐 겁을 더럭더럭 내어 발이 부르터 터지도록 비지땀을 흘리며 골몰히 북한을 바라보고 올라가는데, 문수암으로 들어가는 어귀를 채 못 미쳐서 어떤 자가 앞을 막아 썩 나서며 전후좌우를 휘휘 둘러보고 소매 속에서 육혈포를 내어 들더니, 함진해 턱밑에다 바싹 대고,

"이놈, 목숨을 아끼거든 지체 말고 위아래 의복을 썩 벗어라!"

함진해가 수족을 사시나무 떨듯 하며,

"네, 벗겠습니다. 벗을 때 벗더라도 제 말 한마디만 들으십시오. 제 집 내환이 위중하여 약을 구하러 급히 가는 길이오니 특별히 용서해 주시면 적지 않은 적선이올시다. 이 의복은 입던 추한 것이올시다. 내일 이곳으로 다시 오시면 입으실 만한 의복을 몇 벌이든지 말씀하시는 대로 갖다 드리오리다."

그자가 눈을 부라리며,

"이놈아 잔소리가 무슨 잔소리야! 진작 벗지 못하고?"

하며 당장 육혈포 방아쇠를 잡아당길 모양이니 의복말고 더한 것이라도 다 내어 놀 판이라. 다시는 말 한마디 앙탈도 못 하고 윗옷부터 차례로 벗어 주니, 그자가 저 입었던 옷을 앞에다 턱 던지며,

"너는 이것이나 입고 가거라."

하고서 함진해 의복을 제 것같이 척척 입으며 조끼 속에 손을 썩 집어넣어 보더니 아무 말도 아니하고 산 속으로 들어가는지라. 함진해가 기가 막혀 그놈의 의복을 집어 입으니 당장에 더러운 살은 감추겠으나 한 가지 큰 걱정이 지폐 잃어버린 것이라. 가도 오도 못 하고 그 자리에 끌로 판 듯이 서서 입맛을 쩍쩍 다시며 혼자말로,

"이 노릇을 어찌하면 좋은가? 집으로 돌아갔다 오는 수도 없고, 빈 손 들고 그대로 가자기도 딱하지. 가기로 그가 오지 말라고 할 리는 없지마는, 여북 무심한 사람으로 여길라고? 해는 점점 오정이 되어 오고 여기까지 왔던 일이 원통하니, 아무려나 신지에를 가보는 일이 옳지. 가보고 소경력 사정이나 이야기를 하여 내 정성이나 알도록 하여 보겠다."

하고 꿩 튀기러 다니는 사냥꾼 모양으로 단상투 바람, 동저고리 바람으로 어슬렁어슬렁 올라가며, 행세하는 터에 아는 사람을 만나면 어찌하리 싶어 얼굴이 절로 화끈거려 발등만 굽어보고 걸음을 걷다가, 목이 어찌 마른지 물을 좀 먹으려고 샘물 나는 곳을 찾아 바른편 산골짜기 안 바위 밑으로 내려가더니 별안간에 주춤 서며 두 손길을 마주잡고 공손한 목소리로,

"여기 앉아 계십니까? 오늘도 시간이 늦어 아마 오래 기다리셨지요?"

"……"

"아무쪼록 일찍 오자고 새벽밥을 먹고 떠났더니, 정성이 부족함이런지, 거진 다 와서 도적을 만나 변변치 아니한 정을 표하고자 돈 백 원이나 가지고 오던 것과 관망의복까지 몰수히 빼앗겼으나, 점잖은 양반과 상약을 한 터에 실신할 도리는 없고 분주히 오느라는 것이 이렇게 늦었습니다."

"가이없는 일이오. 횡래지액(橫來之厄)도 산화소치가 아니라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도 늦었으니 내일 오정에는 좀 가까이 세검정 연무대 앞으로 오시오. 나는 총총하여 가겠소."

하더니 횡행히 가는지라. 함진해가 억지로 만류할 수 없어, 문수암을 찾아 들어가서 보교를 얻어 타고 집으로 돌아와 노름꾼의 등단같이 돈 이백 원을 다시 변통하여 가지고 이튿날 열시가 채 못 되어 연무대 앞에 와 그자 오기를 고대하더니, 오정이 막 되었는데 그자가 한북문 통한 길로 올라오며 허허 웃고,

"오늘은 매우 일찍 오셨소구려."

"여러 번 실기를 하여 대단히 불안하오이다."

하며 말끝에 조끼에서 무엇을 꺼내어 두 손으로 받들어 주며,

"이것이 변변치 아니하나 주용에나 보태서 쓰시옵소서."

그자가 펴보지도 아니하고 집어넣으며,

"그것은 무엇을 가져 오셨소? 아니 받으면 섭섭히 여기실 터이니까 받기는 받소. 나는 번거하여 이목이 수다한 데는 재미없으니 댁으로 같이 들어갈 것 없이 댁 근처 조용히 있을 주인 한곳을 정해 주시오."

함진해가 유공불급하여,

"네, 그는 어렵지 아니합니다. 내 집도 과히 번거하지는 아니하지마는 아주 절간같이 조용한 집이 있으니 그리로 가 계시게 하지요."

사주인을 하고많은 집에 하필 안잠 마누라 집에다 정하고, 삼시 사시로 만반진수를 차려 먹이며 아침저녁으로 대령을 하여 정성을 무진 들이며 지관의 입만 쳐다보는데, 임지관은 어쩌면 그렇게 묵중한지, 열 마디 묻는 말에 한 마디를 썩 시원하게 대답을 아니하니, 그 속이 천 길인지 만 길인지, 어여뻐하는지 미워하는지, 알고 그러는지 모르고 그러는지 도무지 아는 수 없으니, 그리할수록 함진해는 목이 밭아 애를 더럭더럭 쓰며 감히 구산하러 가자는 말을 못 하고 자기 집 사정이 일시 민망한 이야기만 시시로 하더니 하루는,

"여보 주인장, 산 구경하러 아니 가보시려오? 신산도 잡으려니와 구산부터 가보십시다. 선장 산소가 어디 계시오?"

"네, 친산이 멀지 아니합니다. 양주 송산인데 불과 오십 리라, 넉넉히 되단겨라도 오시지요."

하며 그 말을 얻어들은 김에 분주히 치행을 차릴새 장독교 두 채에 건장한 교군 두 패를 지르고, 마른 찬합, 진 찬합과 약주병 소주병을 짐에 지워 뒤딸리고 동소문 밖으로 썩 나서니, 앞에는 함진해요, 뒤에는 임지관이라. 함진해 마음에는,

'이번 길에 천하대지를 정녕 얻어 자기 친산을 면례할 터이니 우환걱정은 다시 염려할 것 없이 만당자손도 게 있고 부귀공명도 게 있고 게 있으려니.'

하여 한없이 기꺼워 혼자 앉았든지 누구를 보든지 웃음이 절로 나와 빙글빙글하고, 임지관 마음에는,

'어떻게 말을 잘하면, 내 말을 꼭 곧이듣고 조약돌밭을 갈아쳐도 다시 없는 명당으로 알아 불일내로 면례를 시킬꼬. 제 아비 이상으로 몇 대 무덤을 차례로 면례를 시켜 놓았으면 부지중에 내 평생 먹고 살 거리는 넉넉히 생기리라.'

하여 금방울과 안잠 마누라의 전하던 함씨 집 전후 내력을 곰곰 생각하더라. 얼마를 왔던지 장독교를 내려놓으며, 함진해가 먼저 나오더니 임지관더러,

"인제 나의 친산이 멀지 아니합니다. 찬찬히 걸어가시면 어떠하실는지요?"

"그리해 봅시다."

하며 염낭을 부시럭부시럭 끄르고 지남철을 꺼내더니 손바닥 위에 반듯이 놓고 사면으로 돌아보며 입 속에 말을 넣고 중얼중얼하더니,

"영감, 주룡(主龍)으로 먼저 올라가십시다. 산세는 매우 해롭지 아니하여 뵈오마는."

하면서 이리도 가서 보고 저리도 가서 보다가 눈살을 연해 찡그리고 분상(墳上) 앞으로 오더니, 펄썩 앉으며 잔디를 꾹꾹 눌러 평편하게 한 후에 지남철을 내려놓고 자오(子五)를 바로맞히더니,

"영감, 이 산소 쓴 지 몇 해나 되었소? 이 산소 모시고 화패가 비상하였겠소."

"산소 모신 지 지금 열두 해에 화패는 이루 측량하여 말할 수 없습니다."

"가만히 계시오. 내 소견껏 말을 할 것이니 과히 착오나 없나 들어 보시오."

하더니 얼음에 배 밀듯 내려 섬기는데, 함진해는 입에 침이 없이 칭찬을 한다.

"산지라 하는 것은 복 있는 사람이 길지를 만난다(福人逢吉地)하였지마는, 산리를 알지 못하고 보면 번번이 이런 자리에다 쓰기 쉽것다. 태조봉이 음양취기(陰陽聚氣)를 하여야 손세가 장원하지, 그렇지 않고 독양(獨陽)이나 독음(獨陰)이 되어 사람의 부부 교합지 못한 것 같으면 자손을 둘 수 없는데, 이 산소가 독양 독음으로 행룡을 하였고, 안산에 식루사(拭淚砂)가 있으니 참척을 번번이 보셨을 것이요, 과협(過峽)은 잘되지 못하였으나 좌우에 창고봉(倉庫峯)이 저러하니 가세는 풍부하시겠소마는 과두수( 頭水)가 있으니 얼마 아니 되어 손해가 적지 아니할 것이요, 황천수(黃泉水)가 비쳤으니 변상(變喪)이 답지하겠소."

"과연 이 산소 모시고 자식놈 여럿을 참척 보고, 상처를 두 번이나 하고, 재산으로 말해도 부지중에 손해가 적지 않았어요."

"허허, 그러하시리다. 이 산소는 더 볼 것 없거니와 선왕장 산소는 어디 계신가요?"

"예서 멀지 아니합니다. 이리 오십시오."

하며 임지관을 인도하여 두어 고동이를 넘어가더니 손을 들어 가리키며,

"저기 보이는 산소가 나의 조부모 합폄으로 모신 곳이올시다."

"네, 그러하시오니이까?"

하고서 쇠를 또 내어 들고 자세 살펴보더니,

"이 산소도 매우 합당치 못한걸. 용이라 하는 것이 역수를 하여야 생룡이라 하거늘 순수도곡에 골육수(骨肉水)가 과당하고 또 주엽산 큰 맥이 졸지에 뚝 떨어져 앞에 공읍사(拱揖砂)가 없고, 장단이 부제하여 여기도 쓸 만하고 저기도 쓸 만하니, 이는 허화(虛花)라. 모르는 사람 보기에는 좋을 듯하나 용진호퇴(龍進虎退)하여야 할 터인데, 용호가 저같이 상충(相衝)하니 대소가가 불목할 것이요, 청룡이 많을 다자로 되었으니 자손은 번성하겠소마는 제일절이 저함하였으니 종손은 얼마 아니 가서 절대(絶代)가 되는 장손 과격이오. 영감 댁 작은댁이 어디 사는지 영감 댁은 자손이 없어도 그 댁에는 자손들이 선선하겠소."

"그 말씀이 꼭 옳으십니다. 나는 자식을 낳으면 죽어도, 내 사촌은 아들을 사형제나 두었는데 모두 감기 한 번 아니 앓고 잘 자랍니다."

"그러하리다. 대원 한 산소는 모르겠소마는 이 두 분상 산소는 시각이 바쁘게 면례를 하여야 하겠소."

함진해가 임지관의 말에 어떻게 혹하던지 팥으로 메주를 쑨대도 꼭 곧이들을 만치 되어, 그 다음부터 임지관더러 말을 하자면, 선생님 선생님 하여 극공극경(極恭極敬)하기를 한층 더 심하더라.

"선생님, 선생님께서 이같이 박복한 위인을 아시기가 불찰이시올시다. 아무쪼록 불쌍히 보셔서 화패나 다시 없을 자리를 지시하여 주옵소서."

"글쎄요, 무엇을 아나요? 어떻든지 차차 봅시다."

"이 도곡 안이 과히 좁지는 아니한데 혹 쓸 만한 자리가 없을까요? 좀 살펴보시면 어떨는지요."

"이 도곡에 산지(山地)가 무엇이오? 벌써 다 보았소. 영감이 산리(山理)를 모르니까 그 말 하기도 쉬우나, 말을 들어 보면 짐작이 나서리다. 대지는 용종요리락(大地龍從腰裡落)하여 여기횡전작성곽(餘氣橫纏作城郭)이라 하니, 큰 자리는 용이 장산 허리에서 뚝 떨어져서 남저지 기운이 가로 둘러 성곽 모양이 된다 하였거늘, 이 산 내맥(來脈)을 볼작시면 뇌두에 성신(星辰)이 없고 본신에 향응(向應)이 없어 늘어진 덩굴도 같고, 족은 지룡도 같으니, 이는 곧 천룡(賤龍) 직룡(直龍)이라, 아무리 속안(俗眼)에는 쓸 만한 듯하여도 기실은 한 곳도 된 데가 없으니 그대 생각은 하지도 마시오."

"그러면 우리 국내가 진위 땅에도 있습니다. 그리로나 가보실까요?"

"여기니 저기니 할 것 없소. 영감의 정성이 저러하시니 말이오마는, 내가 이왕에 한 자리 보아 둔 곳이 있는데, 웬만하면 아니 내어놓자 하였더니……."

하며 그 다음 말은 아니하고 우물우물 흉증을 부리니, 남 보기에는 가장 천하명당을 보아 두고 내어놓기를 아까워 주저하는 것 같은지라, 함씨가 궁금증이 나서,

"너무나 감격무지하오이다. 그 자리가 어디오니이까?"

"차차 아시지요. 급하실 것 있소?"

함씨가 임지관을 데리고 자기 집으로 돌아와 묏자리 일러주기만 바라고 날마다 정성을 들이는데 임지관은 쿨쿨 낮잠만 자고 그대 수작이 일절 없더라.

이때 노파는 무슨 통신을 하는지, 하루 몇 번씩 금방울의 집에 북 나들듯 하고, 금방울은 무슨 계교를 꾸미는지 고양 땅에를 삼사 차 오르내리더라. 하루는,

"영감, 산구경 가십시다."

"어디로 가시렵니까?"

"어디든지 나 가자는 대로만 가십시다."

하며 곁의 사람 듣기 알맞을 만하게 혼자말로,

"가보아야 좋기는 좋지마는 좀체 성력(誠力)에 그런 자리를 써볼까?"

함진해는 그 말을 넌짓 듣고 가장 못 들은 체하며 자기 속으로 독장수 셈치듯,

'임지관이 칭찬을 저렇게 할 제는 대지가 분명한데 아마 산주가 있어, 투장(偸葬) 외에는 할 수가 없는 것이거나 논둑 밭둑 같은 데 혈이 맺혀 범상한 눈에 대수롭지 않게 보이어서 성력이 조금 부족하면 쓰지 못하리라 하는 말인 듯하나, 내가 그만 성력은 있으니 성력 모자라 못 써볼라구? 유주산(有主山)이거든 돈을 주고 사보고, 정 아니 팔면 투장인들 못 할 것 있으며, 논밭두렁말고 물구덩이에다 장사를 지내라 해도 손톱만치도 서슴지 않고 써볼 터이야.'

하며 임지관의 시키는 대로 죽장망혜(竹杖芒鞋)에 가자는 대로 고양 땅을 다다르니, 여겨 보면 매부의 밥그릇이 높다고, 대지 명당이 이 근처에 있으려니 여겨 보니 산세도 별로 탈태하여 뵈고 수세(水勢)도 별로 명랑하여 임지관의 눈치만 살피는데, 임지관이 높직한 산상으로 올라가 펄쩍 주저앉으며,

"영감, 다리 아프지 아니하시오? 인제는 다 왔소. 이리 와 앉아 저것 좀 보시오."

함진해가 그 곁으로 다가앉으며,

"무엇을 보라고 하십니까?"

임지관이 오른 손가락을 꼿꼿이 펴들고 가리키며,

"저기 연기나는 데 보이지 아니합니까?"

"네, 저 축동나무가 시퍼렇게 들어선 데 말씀이오니까?"

"옳소, 그 동리 이름은 덕은리라 하는 대촌인데, 또 이편으로 보이는 산은 마둔리 뒷봉이오."

"선생님께서 고양 지명을 어찌 그렇게 역력히 아십니까?"

"우리나라 심산 도중에 용세나 좋은 곳이면 내 발길 아니 들여놓은 데가 없었소. 그러나 정혈에를 내려가 보았으면 좋겠소마는, 산주에게 의심을 받을 뿐더러, 대단한 강척이라 당장 모다깃매를 당하고 쫓겨갈 터이니 멀찍이서 보기나 하시오."

하며 이리저리 가리키며 입에 침이 없이 포장을 하는데, 그 자리에 면례 곧 하고 보면 당대 발복(發福)에 자손이 만당하여 금관자 옥관자가 삼태로 퍼부을 듯하더라.

"이 산 형곡은 옥녀탄금형(玉女彈琴形)이니 당국은 옥녀체요, 안산은 거문고체라. 저기 보이는 봉은 장고사(長鼓砂)요, 여기 우뚝한 봉은 단소사(短簫砂)요, 전후좌우는 금장격(錦帳格)이며, 자좌오향(子坐午向)에 신득진파(申得辰破)이니 신자진삼 합격이요, 혈은 횡접와(橫接窩)체에 포전이 매우 좋으니 자손이 대단히 번성할 터이오. 자, 더 보실 것 없이 이 자리에 선장 산소를 모셔 볼 경륜을 해보시오."

"어떻게 하면 그 자리를 얻어 쓰겠습니까? 선생님 지휘대로 하겠습니다."

"영감이 하실 탓이지, 나는 별수가 있소? 그러나 내가 연전에 이 산판을 보고 하도 욕심이 나서 산 임자가 누구인지는 탐문하여 보았소."

"산주가 어디 사는 누구인가요?"

"마둔리 윗동리 사는 최생원 집이라는데, 대소가 수십 집이 모두 연장접옥(連墻接屋)하여 자작일촌(自作一村)으로 산다 하옵디다. 그런데 그 여러 집 사람들이 모두 불초하여, 남이 홀만히 볼 수 없으나 형세는 한 집도 조석 분명히 먹는 자가 없다 합디다."

"가세가 그렇게 간구(艱苟)하면 산지를 팔라면 말을 들을까요?"

"그 역시 나더러 물을 것 아니라, 오늘은 도로 가셨다가 내일 모레간 몸소 내려와 산주를 찾아보시고 간곡히 말씀을 해보시오. 그 자리 하나만 사면 그 국내에 또 비봉귀소형(飛鳳歸巢形) 한 자리가 있으니, 그것도 마저 사서 왕장(王丈) 산소를 면례해 보십시다."

그 산 안에 명당이 한 곳뿐 아니요, 또 한 곳이 있단 말을 듣고 함진해가 불 같은 욕심이 어떻게 치미는지, 산주가 팔기 곧 하면 자기 든 집재 세산재 먼 곳에 있는 외장까지 모두 주고 벌건 몸뚱이가 한데로 나앉더라도 기어이 사서 써볼 생각이라.

평생에 오 리 밖을 걸어다녀 보지 못한 터에 평지도 아니고 등산까지 하여 가며 사오십 리를 왕환(往還)하였으니 다리도 아플 것이요, 피곤도 할 것인데, 그 이튿날 밝기를 기다려 시골서 귀물로 알 만한 물종을 각가지로 장만해서 두어 바리 실리고 고양 길을 발행하는데, 임지관이 무엇이라고 두어 마디 이르니까 함진해가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옳소, 선생님 말씀이 옳소. 그렇게 해보지요. 위선하여 하는 일에 무엇이 어려울 것 있소?"

하더니 하인을 시키어 공석 한 잎을 둘둘 말아 장독교 뒤채 위에 매달아 가지고 떠나가더라.

세상 사람 사는 것이 천태만상이라. 열 집이면 열 집이 다 다르고, 백 집이면 백 집이 다 달라서 잘살기로 말하여도 여러 백천 층이요, 못살기로 말해도 여러 백천 층이라. 잘사는 부자로 첫째 되기도 극난하지마는, 못사는 빈호로 첫째 되기도 역시 드문 터인데, 고양 사는 옥여 최생원은 고양 안에는 고사 물론하고 대한 십삼도 안에 둘째 가라면 원통하다 할 만한 간난이라. 그 중에 누대 상전(相傳)하여 오는 선영은 있어, 해마다 솔포기가 푸르스름하면 모조리 싹싹 깎아 팔아먹더니, 산이라 하는 것은 큰 나무가 들어서서 뿌리가 얽히지 아니하면 사태가 나며 토피가 으레 벗는 법이라.

다음부터는 풋나뭇짐씩 뜯어 생활하던 길도 없어지고 다만 돈 백이라도 주고 뫼 한 장 쓰겠다면 유공불급하여 쇤네 쇤네 하여 가며 팔아먹는 터이나, 그런 일이 어찌 날마다 있고 달마다 있으리요. 두수없이 꼭 굶어 죽게 되어 이웃집 도끼를 빌려 가지고 깎아 먹던 솔그루 썩은 고자등걸을 캐어 지고 서울로 갔다 팔기로 생애를 하느라고 금방울의 집에다 단골을 정하고 하루 걸러큼 다녀 매우 숙친한 까닭으로 저의 집 지내는 사정을 낱낱이 말하고 나뭇값 외에 쌀되 돈관을 얻어다 먹고 지내매, 금방울의 분부라면 거역지 못하는 법이, 칙령이라면 너무 과도하고 황송한 말이지마는, 본고을 원의 지령만은 착실하더라. 하루는 나뭇짐을 지고 들어오니까, 요지선녀(瑤池仙女)같이 쳐다보고 지내던 금방울이가 반색을 하여 반기며 안으로 잡담지하고 들어오라 하더니,

"에그, 당신은 양반이시고 나는 여염사람이지마는, 여러 해 친하여 숭허물 없는 터에 관계 있습니까? 우리 인제는 의남매를 정하십시다. 오빠, 전에는 체통을 보시느라고 설면히 굴으셨지마는, 어서 신발을 끄르고 방으로 들어오시오. 추우시기는 좀 하시겠소? 구시월 막새바람에 홑것을 그저 입고. 여보게 부엌어멈, 밥숭늉 좀 덥게 데우고, 새로 해넣은 솜바지 좀 놓아 가져오게. 오빠, 편히 앉으셔서 어한 좀 하시오."

이 모양으로 예 없던 정이 물 퍼붓듯 쏟아지니, 최생원이 웬 영문인지 알지를 못하고 쭈뼛쭈뼛하다가 간신히 입을 벌려,

"나 같은 시골사람더러 남매를 정하시자는 것도 황송한데, 무엇을 이렇게 차려 주십니까?"

금방울이 깔깔 웃으며,

"에그, 오빠도 망녕이셔라. 손아래 누이더러 황송이 다 무엇이고, 존대가 다 무엇이야요? 인저는 허소를 하십시오."

"허소는 차차 하면 못 합니까? 누이님이 이처럼 하시니 내 마음은 어떻다 할 길 없소."

"생애에 바쁘신데 어서 내려가시오. 내일쯤 오빠 사시는 구경도 할 겸, 언니 상회례도 할 겸 내가 내려가겠습니다."

"누이님께서 오실 수가 있습니까? 우리 마누라를 데리고 올라오지요."

"아우 되어 내가 먼저 가뵈어야 도리상에 당연하지요. 걱정 말고 내려가시오."

하며 나뭇값 외에 돈 몇백 냥을 집어 주며,

"이것 변변치 않으나, 신발이나 한 켤레 사다가 우리 언니 드리시오."

최생원이 재삼 사양하다가 마지못하여 받아 가지고 나오다가 선혜창 장에 들어가, 쌀도 좀 팔고 반찬거리도 약간 장만하여 가지고 자기 집으로 내려와 일변 집안을 정히 쓸고 지직잎 방석낱을 이웃집에 가 얻어다 깔고, 자기 아낙더러, 새둥우리 같은 머리도 가리어 쓰다듬고 보병 것이나마 부유스름하게 새것을 갈아입으라 한 후 계란낱 닭마리를 삶고 끓여 놓고 눈이 감도록 고대하더니, 거무하에 유사 사인교 한 채가 떠들어오며 금방울이 나오더니 최생원과 인사를 한 후 최생원의 마누라를 가리키며,

"오빠, 이 어른이 우리 언니시오? 처음 뵈오니까 누구신지 몰라뵈었습니다."

하고 날아갈 듯이 절을 하며 교군꾼을 부르더니 피륙낱 담배근을 주엄주엄 내어다가 앞에다 놓으며,

"모처럼 오며 빈손 들고 오기가 섭섭해서 변변치 아니하나마 정이나 표하고자 가져왔습니다, 언니……."

최생원의 아낙은 본래 촌 생장으로 금방울을 보니 요지에서 선녀가 내려온 듯싶어 정신이 휘둥그런 중 석새베 입던 몸에 고운 필목을 보고 순뜨지 먹던 입에 지네발 같은 서초를 보니 입이 저절로 벌어져서, 자기 딴은 인사 대답을 썩 도저히 한다는 것이 귀동대동 구석이 어울리지 아니하게 지껄이건마는 금방울은 모두 쓸어덮고 없는 정이 있는 듯이 수문수답(隨問隨答)을 하다가 최생원을 돌아보며,

"오빠, 시골 구경을 별로 못 했더니 서울처럼 갑갑하지 아니하고 시원해서 좋소. 동산에나 올라가 구경 좀 합시다."

"봄과 달라 꽃 한 가지 없고 구경하실 것이 무엇 있나요? 아무려나, 찬찬히 가보십시다. 그렇지만 누이님같이 가만히 들어앉으셨던 터에 다리가 아프셔서 단기시겠습니까?"

"가보아서 다리가 아프면 도로 내려오지. 누가 삯 받고 가는 길이오?"

하며 최생원은 앞을 서고, 마누라와 금방울이 뒤에 따라 뒷동산으로 올라가는데 최생원 내외의 생각에는,

'서울서 꼭 갇혀 들어앉았다가 여북 갑갑하여 저리 할라구? 경치는 별로 없지마는 바람이나 시원히 쏘이게 김판서 댁 묘소로, 이과장 집 산소로 골고루 구경을 시키리라.'

하고, 금방울의 생각에는,

'최가의 국내가 얼마나 되노? 이놈을 잘 삶아 함진해에게 팔게 하였으면 저도 돈 천이나 착실히 얻어먹고 우리도 전 만이나 툭툭이 갖다 쓰겠다.'

하며 이 고동이 저 고동이 구경하다가,

"오빠, 댁 국내는 어디요? 아마 매우 넓지, 해마다 나무 베어다 파시는 것을 짐작하건대."

"얼마 되지 못합니다. 우리집 뒤에서부터 저기 보이는 사태가 허연 고동이까지올시다."

"에그, 산이나마 넉넉히 있어 나무장사라도 하시는 줄 여겼구려. 얼마 되지도 못하고 그나마 토피가 모두 벗어 나무인들 어디 있소? 그까짓 것 두시면 무엇을 하오? 뉘게 돈 천이나 받고 팔아 말바리나 사매고 삯이나 팔아먹지."

"뫼장 쓸 만한 곳은 이왕 다 팔아먹고 지금 남저지는 애총 하나 묻을 만한 곳이 없으니 누가 사야 하지요."

"그 걱정은 말고 내려갑시다. 내 좋은 획책을 하여 볼 것이니."

"아무려나, 누이님 덕택만 바랍니다."

금방울이 최생원 집으로 내려와 무엇이라고 쥐도 못 듣게 수군대더니 그 길로 떠나 올라간 뒤로, 최생원이 축일(逐日) 금방울의 집에를 드나들고, 금방울도 수삼차를 최생원의 집에 다녀가더니, 최생원이 자기 마누라도 모르게 정밤중이면 뒷동산에를 슬며시 다녀 내려오더라.

하루는 동리집 개들이 법석으로 짖으며 최생원 집에 이상스러운 일이 났으니, 향곡(鄕曲) 풍속에 말탄 사람 하나만 지나가도 남녀노소가 너나없이 나서서 구경을 하는 법이어늘, 하물며 이 집에는 난데없는 행차 하나가 기구 있게 들어오더니, 사립문 앞에다 공석을 깔고 금옥탕창한 점잖은 양반이 엎드려 대죄를 하니, 보는 사람마다 곡절을 모르고 눈들이 둥그래서 쑥덕공론이 분분한데, 최생원이 먼지가 케케 앉은 관을 툭툭 털어 쓰고 나오며,

"이거, 웬 양반이 남의 집 문 앞에 와서 이 모양을 하시오? 이 양반 뉘 집을 찾아왔소?"

그 사람이 머리를 땅에 조으며,

"네, 댁에를 왔습니다. 이놈은 천지간에 죄가 많은 놈이라, 하해 같은 덕을 입어 그 죄를 면하고자 이처럼 석고대죄(席藁待罪)를 합니다."

최생원이 허허 웃으며,

"이 양반아, 댁 죄는 무슨 죄며 내 덕은 무슨 덕이란 말이오? 암만해도 댁에서 병풍상성(病風喪性)을 하였나 보오. 대관절 댁이 누구시오?"

"네, 서울 다동 사는 함일덕이올시다."

"네, 그러하시오? 나는 성은 최가고, 자는 옥여요. 무슨 일로 찾아계십더니이까?"

"네, 다름이 아니라, 친산을 잘못 쓰고 화패가 비상하와서 장풍향양하여 백골이나 평안한 곳을 얻어 쓸까 합니다."

"댁이 댁 산소 면례하기를 생면부지 모르는 나를 보고 이리할 일이 무엇이오, 그 아니 이상한가?"

"이렇게 댁에 와서 대죄하는 것은 당신 말씀 한마디만 듣기를 바랍니다."

"내게 들을 말이 무슨 말이오? 나를 도선(道詵)이나 무학(無學)이 같은 지관으로 아시오? 여보, 나는 본래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무식쟁이라 답산가 한 구절 외우지 못하오. 여보, 댁이 잘못 찾아 계신가 보오."

"아무리 미거하기로 잘못 찾아뵈옵고 말씀할 리가 있습니까? 다름이 아니라 댁 선영 국내 안에……."

그 다음 말이 다 나오기 전에 최생원이 눈이 실룩하여지고 콧방울이 벌룽벌룽하며 부썩 도실러 앉더니,

"그래서요, 어서 말하시오."

"일석지지만 빌려 주시면 친산을 면례하고 동산소하여 지내겠습니다."

최생원이 벌떡 일어서며 주먹을 도실러 쥐고 꿩 채려는 보라매 눈 같이 함진해를 노려보며,

"허, 이놈, 별놈 났다! 내가 이 모양으로 구차히 사니까 얼만큼 넘보고 와서, 무엇이 어쩌고 어찌해? 묏자리를 빌려 동산소를 해? 이따위 놈은 당장에 두 다리를 몽창 분질러 놓아야 이까짓 행위를 못 하지."

하더니 울장 한 가지를 보기 좋게 뚝딱 꺾어 들고 서슬 있게 달려드니, 함진해의 하인들이 당장 보기에 저희 상전에게 화색이 박두한지라, 제각기 대들어 최생원의 매 든 팔을 붙들다가 다갱이도 터지고, 함진해를 가려서다가 엉덩이도 쥐어질리니 분한 생각대로 하면 동나뭇단 같은 최생원 하나야 발길 몇 번이면 저승 구경을 당장에 시키겠지마는, 상전의 낯을 보아 차마 못 하고,

"생원님 생원님, 너무 진노하지 마십시오. 산소 자리를 아니 드리면 고만이지, 이처럼 하실 것 있습니까?"

최생원이 하인의 말 대답은 하지도 아니하고 함진해만 벼른다.

"오 이놈, 기구도 좋은 놈이니까, 하인놈들을 성군작당(成群作黨)하여 데리고 와서, 나같이 잔약한 사람을 업수이여기는구나. 이놈, 너 한 놈 때려 죽이고 나 죽었으면 고만이다."

하고 울장 가지를 함부로 내두르는 바람에 사인교는 진가루가 되고, 말리러 덤비던 하인들은 오강 편싸움에 태곰보 들어온 모양으로 분주히 쫓겨 도망을 하는데, 부지중에 함진해도 당장 화색이 박두하니까 쫓겨나왔더라. 매맞은 하인들이 분함을 서로 이기지 못하여 구석구석 욕설이 나온다.

"제미를 할거, 팔자가 사나우니까 별 작자의 매를 다 맞아 보았구. 그자가 명색이 무엇이야? 다갱이에 넉가래집 같은 관을 뒤집어쓰고, 형조사령이 지나갔나? 매질을 함부로 하게. 우리 댁 영감 낯을 보니까 참고 참아 쫓겨왔지그려. 그까짓 위인을 내 발길로 보기 좋게 한 번만 복장을 질렀으면 개구리새끼 나가자빠지듯 할 것이, 가만히 내버려두니까 제 세상만 여겨서 눈에 뵈는 게 없나 본데."

"여보게, 가만 내버려두게. 아래위를 훑어보니까, 그자가 꼴 보니 나무장사로 생애하는 위인인데, 이번에는 영감을 뫼셨으니까 하릴없이 참고 들어가지마는, 아무 때든지 문안서 한 번만 우리 눈에 걸리라게. 당장에 할아버지를 부르게 주릿대를 메워 놓을 것이니."

한참 이 모양으로 지저귀는 것을 함진해가 듣고 그중에도 행여나 최생원을 건드려 자기 경륜을 와해되게 할까 겁이 나서 하인을 꾸짖기도 하고 달래기도 한다.

"이놈들, 그것이 무슨 소리니? 너희들이 그 양반을 함부로 대접하고 보면 내 손에 죽고 남지 못하리라. 그 양반이 시골 살아 촌스러워 보이니까 너희들이 넘보고 그리나 보구나. 이놈들아, 그 양반 대접하는 것이 곧 나를 대접하는 일체인데, 무엇을 어찌고 어찌해? 상놈이 양반의 매 좀 맞은 것이 그리 원통하냐? 그 매는 너희를 때린 매가 아니요, 즉 나를 때린 것인데, 나는 아무 말도 못 하는 것을 번연히 보며 함부로 떠드느냐? 다시 이놈들 무엇이라고 했다가는 한 매에 죽으리라!"

이 모양으로 천둥같이 을러 데리고 서울로 올라와 임지관더러 소경력 풍파를 일일이 이야기한 후 주사야탁(晝思夜度)으로 성화만 하더니, 며칠 아니 되어 어떠한 의표(儀表)도 선명하고 위인도 진걸한 듯한 사람 하나가 찾아 들어와 함진해를 보고 인사를 통한다.

"주인장이 누구시오니이까?"

함진해가 아무리 살펴보아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

"네, 내가 주인이오. 웬 양반이신데 무슨 사로 찾아 계시오?"

"네, 나는 고양 읍내 사는 강서방이올시다. 다름아니라 댁에 임생원이라 하시는 양반이 오셔서 유하십니까?"

"네, 그 양반이 계시지요. 어찌하여 찾으시오? 그 양반을 본래 친하시던가요?"

"매우 친좁게 지냅니다."

"그러면 거기 좀 앉아 기다리시오."

하고 한달음에 안잠 마누라 집으로 가서 임지관더러 그 말을 전하니, 임씨가 입맛을 쩍쩍 다시며 괴탄을 무수히 한다.

"응, 긴치 아니한 사람, 또 무엇 하러 여기까지 찾아왔노? 내 행색을 일껏 감추려 하여도 필경은 소문이 또 났으니 여기도 오래 있지 못하겠구."

함진해를 건너다보며,

"영감 댁 일은 잘될 듯하오. 지금 온 그 사람이 고양 일읍에서는 권도가 매우 좋아서 그만 주선을 할 만합니다. 기왕 온 사람을 어쩔수 있소? 이리로 부르시오."

"네, 그리하오리다. 선생님이 말씀을 하시니 말이지, 나는 친산 면례할 일로 어찌 속이 타는지 밤이면 잠을 잘 못 잡니다. 그 사람이 기위 권도가 매우 있다 하오니, 이 말씀 아니기로 어련하실 바는 아니시나, 아무쪼록 되도록 부탁을 하여 주십시오. 산지값은 얼마를 주든지 다과를 교계치 아니합니다."

"어디 봅시다. 그러나 이런 일을 데면데면히 하다가는 또 이번에 영감이 다녀오신 모양같이 될 것이니 단단히 하시오."

"내가 아무리 단단히 하고 싶으나 될 수가 있습니까? 선생님께서 하실 탓이지."

"내야 영감 일에 범연하겠소마는 내 부탁 다르고 영감의 간청 다르지 아니하오? 그 사람도 내 손에 친산을 얻어 쓰고 우연히 없던 아들을 낳은 후로 자기 딴은 감사히 여겨 저 모양으로 찾아오는 터이니까 영감의 사정 말을 부탁 곧 하게 되면 자기 힘 자라는 대로는 하겠으나, 매양 그런 일을 하자면 빈손 들고는 도저히 아니 될 것이니, 그 사람이 가세가 매우 간구하여 일 주선하기가 역시 곤란하리다. 어떻든지 나는 힘껏 할 것이니, 영감이 그 다음 일은 알아서 처치하시오."

"그는 염려 마십시오. 제 일 제가 하려면 무엇을 아끼겠습니까?"

하며 나아가더니 강씨를 인도하여 데리고 오는데, 처음에는 그렇게 설만히 수작을 하더니, 별안간 한없이 공근하고 관곡한지라, 강씨가 뒤를 따라오며 혼자말로,

'옳지, 인저는 네가 착실히 낚시에 걸렸다. 농익은 연감 모양같이 홀쭉하도록 빨려 보아라. 대체 우리 아주머니 모계(謨計)는 초한(楚漢) 때 진평이만은 착실한걸. 국과 장이 맞느라고 임지관은 어디서 그리 마침 생겼던고!'

하고 그대 사색을 싹도 보이지 아니하고 천연스럽게 따라 들어오더니 임지관 앞에 가 절을 코가 깨어지게 한 번 하고 곁으로 비켜서 공손히 꿇어앉으며,

"그 동안 기체 어떠합시오니까?"

"허어, 자네인가? 예를 어찌 알고 찾아왔노? 그래, 댁내가 평안하시고 자제도 잘 자라나? 아마 컸을걸."

"올해 다섯 살이올시다. 그놈이 기질도 튼튼하고 외양도 똑똑하여 남의 열 자식 불지 아니합니다. 그놈을 볼 때마다 임생원장 덕택은 머리를 베어 신을 삼아도 못다 갚겠다고 저희 내외가 말씀을 합니다."

"실없은 사람이로세. 자네 댁 복력으로 그런 자손을 두었지, 내 덕이 다 무엇인가? 설혹 자네 말같이 면례를 잘하고 자손을 낳았다 한대도 역시 자네 댁 복력으로 내 말을 곧이들었지, 내 아무리 가르치기로 자네가 믿지 아니하면 되겠나, 허허허…… 여보게, 지나간 일은 쓸데없이 말할 것 없네. 그러지 아니하여도 내가 자네를 좀 보면 하였더니 다행하게 마침 잘 왔네."

강씨가 생시치미를 뚝 떼고,

"왜 무슨 부탁하실 말씀이 계십니까? 세상 없는 일이기로 임생원장께서 하시는 말씀이야 봉행치 아니하겠습니까?"

"자네 덕은리 근처 사는 최서방들과 친분이 있나?"

"네, 그 근처에 최씨들이 여러 집인데 한 고을에 사는 고로 모두 면분은 있지마는, 그 최씨의 종손 되는 옥여 최서방과는 못 할 말을 다 할 만치 친숙히 지냅니다."

"옳지, 내가 말하는 사람이 즉 옥여 최서방일세. 여보게, 이 주인장이 형세도 남불지 아니하고, 공명도 할 만치 하였건마는, 자네 댁일과 같이 흉지(凶地)에 친산을 쓰고 독한 참척을 여러 번 보아 슬하에 자제가 없을 뿐더러, 우환이 개일 날이 없어, 아무것도 모르는 나를 이같이 조르시네그려. 차마 괄시할 수 없어, 큰 화패는 없을 듯한지라, 한 곳을 보아 드렸는데, 즉 최여옥의 국내 안일세. 자네도 동병상련(同病相憐)이 아니라 할 수 없으니 주인장 말씀을 들어 보아 힘을 다하여 주선 좀 해드리게."

"내 일이 되고 아니 되기는 노형 주선에 달렸습니다."

"천만의 말씀이오, 일의 성불성은 모르겠습니다마는 저 어른 부탁도 계시고 어련하겠습니까? 그러나 그 사람의 성미가 너무 끌끌하고 고집이 있어 섣불리 개구(開口)를 했다가는 뺨이나 실컷 맞고 돌아설 터이니 웬만하시거든 파의(罷議)를 하시고 다른 곳을 구해 보시는 것이 좋을 듯하오이다."

"그 사람 성미는 나도 대강 짐작합니다마는 불고 염치하고 이처럼 말씀을 하오니 아무리 어려우셔도 힘써 주시오. 산값은 얼마를 달라 하든지 교계할 것 없소. 여북하여 선영을 파는데, 후한 편으로 하는 것이 옳지 않소? 노형만 하셔도 예서 고양 가는 길에 아무리 철로는 있지마는 가깝지 아니한 터에 여러 번 오르내리실 터이요, 그러느라면 하루 이틀 아니 될 터인데 댁 가사도 낭패가 적지않이 되실지라, 우선 돈 천이나 드릴 것이니 내왕 노자도 하시고 쌀섬이나 팔아 댁에 두시고 내 일을 전심하여 좀 보아 주시오."

함진해가 그같이 말하면서 지폐 한 뭉치를 내어 주니 강씨가 재삼 사양하며,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돈이 다 무엇이야요? 아직 될는지는 모릅니다마는, 그만 일을 보아 드리기가 무엇이 힘이 든다고 이처럼 말씀하십니까?"

하며 받지를 아니하니, 임지관이 가장 사리대로 말하는 체하고,

"여보게, 고집 말고 받아 넣게. 주인장이 정으로 주시는 것을 아니 받아 쓰겠나? 어서 받아 가지고 내려가 일 주선이나 잘해 보게."

강씨가 말에 못 이기는 체하고 집어넣더니 그 길로 떠나갔다가 수삼 일 후에 다시 오더니,

"바람에 돌 붙여 보도 못 할러라, 삶은 호박에 이도 아니 들러라."

하여 함씨의 마음을 불단 가마에 엿 졸이듯 바작바작 졸인 후에 몇 차례를 왔다갔다하며 애를 쓰는 모양을 보이더니, 한번은 올라와서 태산이나 져다 주는 듯이 덕색을 더러 내며,

"에구, 어렵기도 어렵다. 이렇게 힘들 줄이야 누가 알아? 영감, 어서 면례하실 택일이나 하시오. 이번에야 최서방의 허락을 받았소. 허락은 받았지만 한 가지가 내 소료보다는 대상부동한걸이오."

"불안하오, 내 일로 해서 너무 고생을 하셔서. 그런데 산주의 응락을 받으셨다며 무엇이 소료에 틀린다 하시오?"

"다른 것이 아니라 산 값을 엄청나게 달라 하니, 나는 기가 막혀 선뜻 대답을 못 하고 왔습니다."

"얼마나 달라길래 그리하시오?"

"그 사람 말이 그 자리가 자래로 유명하여 팔라 조르는 사람이 비일비재(非一非再)인데 십오만 냥까지 주마 하는 것을 팔지 아니하였거니와, 자네가 괄시할 수 없는 터에 이처럼 한즉 그 값이면 팔겠다 하니, 나도 아다시피 다른 사람이 주마는 값을 감하여 말할 수 없고, 영감 의향을 알지 못하여 말씀을 듣자고 왔습니다."

"걱정 마시오. 내 형세가 전만은 못하지마는, 십오만 냥쯤이야 주선 못 하겠소? 어서 그대로 약조를 하시고 이 다음 파수에 돈을 치르게 하시오."

하고 십오만 냥 어음을 써서 주니, 강씨가 받아 척척 접어 염낭에 넣고 가더니 그 이튿날 산주의 약조서(約條書)를 받아 왔더라.

함진해가 면례 택일을 임지관더러 보아 달라 하여 일변으로 구산을 돋으며 일변으로 신산을 작광(作壙)하는데, 역꾼들이 별안간에 괭이가래를 집어던지고 좍 돌아서서, 이상하니, 야릇하니, 처음 보았느니, 알 수 없는 것이니, 뒤떠들더니 광중 속에서 난데없는 돌함 하나를 얻어 내었는데, 함진해가 정구한 처소에서 조상식을 지내다가 그 소문을 듣고 상식상을 물릴 여부 없이 한달음에 올라가 돌함을 구경한즉 크기가 단천 담배 서랍만한데 뚜에를 무쇠물로 끓여 부어 단단히 봉하였는지라, 강철 끌 몇 채를 가져오라 하여 이에를 조아 내고 열어 보니 홍공단(紅貢緞) 한 조각에 금으로 글씨를 썼으되 전면에는,

'옥녀탄금형 십대장상에 백자천손지지 함씨 입장.'

후면에는,

'모년 모월 모일 옥룡자소점(玉龍子所點).'

이라 하였거늘 그날 회장(會葬)하러 온 사람이라, 구경하러 온 사람이라, 역꾼과 집안 하인 병하여 근 백 명이 한마디씩이라도 다 떠들며 참 대지니, 과연 명당이니 하는데, 함진해는 어떻게 좋던지 돌함을 품에 품고 임지관 앞에 가서 백번 천번 절을 하며,

"선생님 덕택에 과연 명혈을 얻었습니다. 선생님은 참 신안(神眼)이올시다. 이 비기(秘記) 좀 보십시오."

임지관이 비기를 받아 우두커니 보다가 픽 웃으며,

"그것이 그다지 희한하시오? 나는 별로 아는 것도 없이 맹자직문(盲者直門)으로 우중한 일이지만, 영감 댁 복력이 거룩하여 몇백 년 전에 옥룡전자가 벌써 비결까지 묻었으니, 나 아니기로 댁에서 쓰지 못할 리가 있소? 아무려나, 영감 댁 복력이 대단하시오. 이왕 명혈을 쓰신 끝에 선왕장 산소를 마저 면례하시오."

"그다뿐이오니이까? 향일에 말씀하시던 비봉귀소형을 마저 가르쳐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와 같이 정성을 들여 가며 간곡히 물어, 강씨를 사이에 또 놓고 몇십만 냥을 주고 샀던지, 급급히 택일을 하여 면례 한 장을 마저 한 뒤에, 임지관이 종적 노출이 되어 오래 유련하지 못하겠다 하고 굳이 말려도 듣지 아니하고 떠나가는지라. 수로금 몇만 금을 경보로 내어놓으니 임지관이 가장 청렴한 체하고 무수히 퇴각하다가 마지못하여 받는 모양으로 짐에 넣더니, 배행(陪行)하러 보내는 하인을 도로 쫓고 정처(定處)와 거주를 물어도 대답이 없이 표연히 가더라.

함진해가 그 후로는 부인의 병세도 차차 낫고, 귀동자를 올 아니면 내년에는 낳을 줄로 태산같이 믿고 기다리더니, 공든 탑이 무너지고, 믿는 나무에 곰이 핀다고, 부인의 병은 더욱 별증(別症)이 생겨, 한 다리 한 팔 못 쓰는 반신불수가 되어 말하는 송장이 되었고, 그 고생을 다 하느라니 함진해는 나이 융로(隆老)한 터는 아니나 근력범절이 칠십 노인이나 다름없이 되었는데, 저 강도와 아귀보다 더한 요악간휼(妖惡奸譎)한 금방울이 그 모양으로 속여먹고도 오히려 부족하던지 한 가지 흉계를 또 부려서 근력 없는 함진해가 수각이 황망한 지경을 당하였더라.

하루는 어떠한 자가 불문곡직하고 주인을 찾으며 들어오더니 시비를 내어 놓으니, 이는 다른 사단이 아니라, 그자가 고양 최씨의 도종손이라 자칭하고 산송을 일으키려는 것이라, 최가의 위인도 똑똑하고 구변도 썩 좋아 함진해는 한 마디쯤 말을 하면, 최가는 열 마디씩 쥐어박아 말을 한다.

"여보, 댁에서는 세력도 좋고, 형세도 부자니까 잔핍한 사람을 업수이여기고 남의 누대 분묘 내룡견갑(來龍肩甲) 좌립구견지지(坐立俱見之地)에 호기 있게 뫼를 썼나 보오마는, 그 지경을 당한 사람도 오장육부가 다 있소."

"여보, 댁이 누구시오? 나도 천금 같은 돈을 주고 산주에게 사서 썼소."

"산주, 산주, 산주가 누구란 말이오?"

"네, 고양 최씨의 종손 되는 옥여 최서방에게 샀소. 댁이 무슨 상관으로 이리하시오?"

"우리 최가에 옥여라고는 당초에 없을 뿐 아니라, 산하에 사는 일가들은 모두 우리집 지파(支派)요, 수십 대 봉사하는 종손은 나의 집인데 십여 년 전에 호중으로 낙향하였다가 금년에야 비로소 성묘를 온 터이오. 댁에서 사지 말고 세상 없는 일을 했더라도 당장 파내고야 배기리다. 댁에서 아니 파면 내 손으로라도 파 굴리고 말 터이니 알아 하시오."

하고 최씨 집 내력과 파계(派系)를 역력히 말하며 돌서슬같이 으르는 바람에 함진해가 겁이 더럭 나서 좋은 말로 어루만지며 뒷손으로 사람을 급히 보내어 옥여를 찾으니, 벌써 솔가(率家) 도주하여 영향도 없는지라,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고, 정소를 하든지 재판을 하기는 이 다음 일이요, 당장 친산에 사굴을 당할 터이니까 생각다 못하여 하릴없이 산값을 재징으로 물어주더라. 상말로, 파리한 개 무엇 베고 무엇 베니 남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일체로 패해 가는 세간을 이리 빼앗기고 저리 빼앗기고 나니, 남는 것이라고는 새앙쥐 볼가심할 것도 없게 되어, 그렇지 아니하게 먹고 입고 지내던 함진해가 삼순구식(三旬九食)을 못 면하고 누대 제사에 궐향(闕享)을 번번이 하니, 타성들이 듣고 보아도 그 집안 그 지경 된 것을 가이없으니, 그래 싸니, 다만 한마디씩이라도 흉볼 겸, 걱정할 겸 하거든, 하물며 원근족(遠近族) 함씨의 종중에서야 수십 대 종가가 결딴이 났으니 어찌 남의 일 보듯 하고 있으리요. 팔도 함씨 대종회(大宗會)를 열고 관자수대로 모여드는데, 이때 함일청이는 그 사촌의 집에를 일절 발을 끊어 다시 현영을 아니하고 다만 치산을 알뜰히 하여 형세도 점점 나아지고, 아들 삼형제를 열심으로 가르쳐 남부러워 아니하고 지내는 터이나, 다만 마음에 계련되어 잊히지 못하는 바는 경성 큰집 일이라, 자기는 아니 갈 법해도 서울 인편 곧 있으면 종종 소식을 탐지한즉, 듣는 말이 다 한심하고 기막힌 일뿐이러니, 하루는 종회하는 통문이 서울에서 내려왔는지라, 곰곰 생각한즉,

'아무리 사촌이라도 타인보다도 더 미워 다시 대면을 말자 작정을 하였지마는, 팔도 일가가 모두 총회를 하는데 내 도리에 아니 가볼 수 없다.'

하고 그 길로 떠나, 성중을 들어서서 다방골 모퉁이를 돌아드니 해포 그리던 사촌을 만날 터인즉 얼마쯤 반가운 마음이 날 터인데, 반갑기는 고사하고 눈물만 절로 나니, 그 사정을 모르는 사람 보기에는 심상히 여기겠으나 이 사람의 중심에는 여러 가지 철천지한(徹天之恨)이 가득하더라.

'저기 보이는 집이 우리 사촌의 집이 아닌가? 어쩌면 저 모양으로 동퇴서락이 되었노? 우리 큰아버지 당년이 엊그제 같은데, 그때는 저 집이 분벽사창이 영롱하던, 다동 바닥에 제일 갑제러니! 집이 저 지경이 되었을 제야 그 집안 범절이야 더구나 오죽할까? 에그, 우리 조부께서 머나먼 북경을 문턱 드나들듯 하시며 알뜰살뜰 모으신 세간을 그 형님이 장가 한번을 잘못 들더니 걷잡을 새 없이 저 모양으로 망하였지, 집안에 가까이 단기던 정직한 사람은 모두 거절을 하고, 천하의 교악망측한 연놈들만 집에다 붙이어 억지로 결딴이 나도록 심장을 두었으니 무슨 별수로 저 모양이 아니 될꼬. 안잠 하인년이 그저 있는지, 제일 그년 보기 싫어 어찌 들어가노? 에라, 이탓 저탓 해 무엇하리! 대관절 우리 형님이 글러 그렇게 되었지.'

하며 손수건을 내어 눈물 흔적을 씻고 대문을 들어서니 문 위에 엄나무 가시와 좌우 주초 앞에 황토가 여전히 있는지라, 그같이 비창하던 마음이 졸지에 변하여 눈에서 쌍심지가 올라오며 가슴에서 불덩어리가 벌꺽벌꺽 올라온다.

'이왕 결딴난 집안을 어찌할 수는 없지만 이 모양으로 흥와조산(興訛造 )을 하는 연놈을 깡그리 대매에 때려 죽여 분풀이나 실컷 하겠다. 오, 어떤 연놈이든지 걸려만 들어 보아라. 내 손에 못 배기리라.'

하며 사랑 앞에를 썩 들어서니, 대부 족장 형제 조카 손항 되는 여러 일가 사람들이 가득 모여 앉았다가 분분히 인사를 하는데, 정작 자기 사촌은 볼 수가 없는지라, 마음에 당황하여 좌우를 돌아보고,

"여보, 우리 형님은 어디 가셨길래 아니 계시오?"

그중 항렬 높은 자가 일청을 불러 앞에 세우고 준절히 꾸짖는다.

"네가 그 말 하기가 부끄럽지 아니하냐? 네 사촌이 아무리 지각없이 집안을 결딴내기로 너는 그만 지각이 있는 사람이 종형제간에 절적을 하고, 조상의 제사 참사(參祀)까지 몇 해를 아니하다가, 우리가 이 모양으로 종회를 하니까 그제야 올라와서 무엇이 어찌고 어찌해? 우리 형님이 어디로 가셨어? 주축이 일반이다. 집안이 그 모양으로 불목하고 무슨 일이 되겠느냐?"

그 곁에 앉았던 노인 하나가 분연히 나앉으며,

"여보 형님, 그 말씀 마시오. 그 사람이 무슨 잘못한 일이 있다고 그리하시오? 이것저것이 모두 진해의 잘못이지, 저 사람은 저 할 도리를 다했습니다."

먼저 말하던 노인이 징을 내며,

"자네는 무엇을 가지고 저 사람의 과실이 없다 하노?"

"형님, 그렇게 말씀하시기도 용혹무괴오마는, 내 말씀을 자세 듣고 무정지책(無情之責)을 너무 말으시오."

하며 소년 일가 하나를 부르더니, 편지 한 뭉치를 가져다가 조좌 중에 내어 놓고 축조(逐條)하여 설명을 하는데 그 편지는 별사람의 편지가 아니라, 함일청이 그 종씨의 하는 일마다 소문을 듣고 깨닫도록 인편 곧 있으면 변명을 하여 간곡히 한 편지라. 그 어리석고 미련한 함진해는 그럴수록 자기 사촌을 돈목(敦睦)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편지 올 적마다 큰집이 아니 되도록 훼방을 하거니 여겨 원수치부를 한층씩 더하던 것이라. 그 편지의 연월을 맞춰 차례차례 보아 내려가는데 자자(字字)마다 간절하고 구구(句句)마다 곡진(曲盡)하여 목석이라도 감동할 만하니 최초에 한 편지 사연에 하였으되,

무릇 나라의 진보가 되지 못함은 풍속이 미혹함에 생기나니, 슬프다! 우리 황인종의 지혜도 백인종만 못지 아니하거늘, 어쩌다 오늘날 이같이 조잔 멸망 지경에 이르렀나뇨? 반드시 연고가 있을지니다. 우리 동양으로 말하면 당우 이래로 하늘을 공경하며 귀신에게 제 지냄은 불과 일시에 백성의 뜻을 단속하기 위함이러니, 요괴한 선비들이 오행의 의론을 창설하여 길흉화복을 스스로 부른다 하므로, 재앙과 상서의 허탄한 말이 대치하여 점점 심할수록 요악한 말을 주작한지라. 일로조차 천지 귀신이 주고 빼앗으며, 죽고 사는 권리를 실상으로 조종하여 순히 하면 길하고, 거스르면 흉한 줄로 미혹하여 이에 밝음을 버리고 어두움을 구하며, 사람을 내어 놓고 귀신을 위하여 무녀(巫女)와 판수가 능히 재앙을 사라지게 하고 복을 맞아 오는 줄 여겨, 한 사람, 두 사람으로부터 거세가 본받아, 적게 한 집만 멸망할 뿐 아니라, 크게 나라까지 쇠약게 하나니, 이는 곧 억만 명 황인종의 금일 참혹한 형상을 당한 소이연이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형장은 무식한 자의 미혹하는 상태를 거울하사, 간악 요괴한 무리를 일절 물리치시고, 서양 사람의 실지를 밟아 일절 귀신 등의 요괴한 말을 한 비에 쓸어 버려, 하늘도 가히 측량하며, 바다도 가히 건너며, 산도 가히 뚫으며, 만물도 가히 알며, 백사도 가히 지을 마음을 두시면, 비단 형장의 한 댁만 부지하실 뿐 아니라, 나라도 가히 강케 하며, 동포도 가히 보존하리이다.

그 다음에 보낸 편지에 또 하였으되,

슬프다, 형장이시어! 형장의 처지를 생각하시옵소서. 형장은 우리 일문 중 십여 대 종손이시니 큰집의 동량이나 일반이라. 그 동량이 썩어지면 큰집이 무너짐은 면치 못할 사세라. 형장의 미혹하심은 전일에 올린 바 글에 누누이 말씀하였으니 다시 논란할 바 없거니와, 날로 들리는 소식이 더욱 놀랍고 원통하와 이같이 다시 말씀하나니다. 착한 사람을 가까이 하며, 악한 무리를 멀리함은 성인(聖人)의 훈계요, 공을 상 주고 죄를 벌함은 가법(家法)의 정당함이어늘, 이제 형장은 이와 같이 아니하여 무육하던 유모의 공을 저버려 그 착함을 모르시고, 간휼한 할미의 죄를 깨닫지 못하여 그 악함을 친신하시니 어찌 가도(家道)가 쇠색함을 면하오며, 또 산지라 하는 것은 조상의 백골로 하여금 풍우에 폭로치 아니하고 땅 속에 깊이 편안히 계시게 함이 도리에 온당함이어늘, 풍수의 무거한 말을 곧이듣고 자기의 영귀(榮貴)와 자손의 복록(福祿)을 희망하여 안장한 백골을 파가지고 대지명당을 찾아다니니 대지명당이 어디 있으며, 조상의 백골이 어찌 자손의 영귀와 복록을 얻어 주리요? 만일 그와 같은

이치가 있을진대, 아무 데나 매장지를 한곳에 정하고 백골을 단취하는 서양 사람은 모두 멸종(滅種) 빈한하겠거늘, 오늘날 그 번식 부강함이 산지로 종사하는 우리나라에 비할 바 아님은 어쩐 연고이며, 만일 지관이라 하는 자가 대지명당을 능히 알아, 남에게 가르칠 재주가 있고 보면, 어찌하여 저의 할아비를 묻지 아니하고 그같이 빈곤히 지냄을 면치 못하여 타인만 가르쳐 주리요? 이는 허탄한 말을 주작하여 남의 재물을 도적함이어늘, 어찌 이같이 고혹하사 산소를 차례로 면례코자 하시나니까? 종제의 위인이 불초하므로 말을 버리지 마시고 급히 깨달으사, 유모를 도로 부르시고 할미를 축출하며 지관을 거절하사 면례를 파의하압소서.

그 끝에 열 가지 잠언(箴言)을 기록하였으되,

일, 쓸데 있는 글을 많이 읽고 무익한 일을 짓지 말으소서.
이, 사람 구원하기는 의원만한 이 없고, 세상을 혹게 하기는 무녀 같은 것이 없나이다.
삼, 사람을 사귀매 양증 있는 자를 취하고 음증 있는 자를 취치 마옵소서.
사, 광명한 세계에는 다만 실상만 있고 허황한 지경은 없사외다.
오, 세계에 신선이 있으면 진시황(秦始皇)과 한무제(漢武帝)가 가히 죽지 아니하였으리이다.
육, 사람을 능히 섬기지 못하거든 어찌 능히 귀신을 섬기며, 산 사람도 모르며, 어찌 능히 죽은 자를 알리요? 귀신과 죽음은 성인의 말씀치 아니한 바니, 성인이 아니하신 말을 내가 지어내면 성인을 배반함이니다.
칠, 굿하고 경 읽음을, 자기는 당연한 놀이마당으로 여겨도, 지식 있는 사람 보기에는 혼암세계로 아나이다.
구, 산을 뚫고 길 내기를 풍수에 구애가 될지면, 외국에는 철도가 낙역하고 광산이 허다하건만, 어찌하여 국세(國勢)가 저같이 흥왕하뇨? 풍수가 어찌 동양에는 행하고 서양에는 행치 아니하오리까?
십, 사람의 품은 마음을 가히 측량키 어려워 얼굴과는 관계가 없거늘, 상을 보고 마음을 안다 하니, 진실로 술사(術師)의 사람 속이는 말이니다.

보기를 다하매 그 많은 일가들이 칭찬하지 않는 자가 없는데, 그 중에 그 편지 가져오라던 노인 함만호는 진해 집 이웃에 있어, 그 집의 국이 끓고 장이 끓는 것을 모를 것이 없이 다 아는 터인데, 진해의 하는 일이 마음에 해괴하건마는, 아무리 일가간이기로 소불간친(疏不間親)으로 내외간사를 말하기 어려워서, 다만 대체로 한두 번 권고한 후 다시는 개구도 아니하고 이따금 가서, 진해의 망측한 거동만 구경하더니, 어리석은 진해는 일문 대소가(一門大小家)들이 다 절적(絶跡)을 하는데, 이 노인은 가장 자기를 친절히 여겨 종종 찾아오거니 하여,

"만호 아저씨, 만호 아저씨."

하며 일청의 편지 올 적마다 펴보이며,

"이놈이, 소위 형은 갱참(坑塹)에 집어넣어 그른 사람으로 돌리고, 저는 지식이 고명(高明)한 정대(正大)한 사람인 체하여 이따위 편지를 하나니마나니."

하고 찢어 내어 버리는 것을, 함만호는 뜻이 깊은 사람이라 속마음으로,

'종형제간에 어쩌면 저같이 청탁(淸濁)이 현수(懸殊)한고? 대순(大舜)과 상(象)이도 있고, 도척(盜拓)이와 유하혜(柳下惠)도 있다 하지마는, 저 사람이야말로 상이와 도척이보다 못지 아니하도다. 내가 저 편지를 간수하여 두었다, 이 다음에 일청의 발명거리를 삼으리라.'

하고 슬며시 주섬주섬 집어 모아, 이리저리 이에를 맞추어, 튼튼한 종이로 배접을 하여 두었던 것이라. 이번 종회를 발기하기도 함만호가 문장(門長)을 일부러 여러 번 가보고 통문을 놓은 것인데, 그 종회(宗會)한 주지(主旨)는 큰 조목(條目) 세 가지가 있으니,

제일은, 진해의 양자(養子)를 일청의 아들로 정하여 누대 종통(宗統)을 잇고자 함이요,
제이는, 진해의 그르고 일청의 바름을 종중에 공포하여 선악의 사실을 포폄(褒貶)코자 함이요,
제삼은, 형제의 불목함을 없게 하여 문내에 화기가 다시 생기게 하고자 함이라.

그날 함진해는 자기 일로 종회한다는 말을 듣고 여러 일가 보기에 얼굴이 뜨뜻하여 내환으로 의원을 보러 간다 청탁하고 안잠 할미의 집을 치우고 들어앉아 연해 소식만 탐지하더니, 처음에 자기 사촌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문장이 호령하더란 말을 듣고, 무슨 원수가 그다지 깊던지 마음에 시원 상쾌하다가, 만호가 편지 뭉치를 내어 놓고 일장 설명하더니, 만좌가 모두 칭찬하더라는 기별을 듣고서는 분함을 견디지 못하여 잔부끄럼은 간다 보아라 하고, 그 길로 바로 자기 사랑으로 들어오며, 문장 이하로 여러 일가에게만 인사를 하고, 마주 나오며 절하는 일청은 본 체도 아니하며 등을 지고 돌아앉으니, 일청이가 기가 막혀 더운 눈물이 더벅더벅 떨어지며 아무 말 없이 섰으니, 이는 자기 종형을 오래간만에 만나 반가운 눈물도 아니요, 자기 종형의 눈에 나서 원통하여 나오는 눈물도 아니라. 옛말에 '오십에 사십구년의 그름을 안다(五十知四十九年之非)' 하였거늘, 자기 종형은 오십이 다 되도록 회개를 그저 못 하였으니 집안일을 다시 바랄 여지가 없겠다 싶은 생각이 불현듯이 나서 우는 일이러라.

"여보게 진해, 내 말 듣게. 사람의 집안이 화목한 연후에 만사가 성취되는 법이어늘, 자네 연기가 노성한 터에 제가(齊家)를 그같이 불목히 하고 가사가 일패도지(一敗塗地)치 아니하겠나? 옛 성인의 말씀에, '독한 약이 입에 괴로우나 병에는 이롭고, 충성된 말이 귀에는 거스르나 행실에는 이롭다' 하였거늘, 자네는 어찌하여 충성된 말로 간하는 것을 청종치 아니할 뿐외라, 간하는 사촌을 구수(仇讐)같이 여기니 실로 한심한 일이로세."

"집안의 불목한 것이 저놈의 죄이지, 나는 아무 잘못한 일이 없습니다. 저놈이 내 집에 절족한 지 우금 몇 해에 우리 아버지 할아버지 산소를 차례로 면례를 하여도 제 집에 자빠져 현영도 아니하고, 집안에 우환이 그렇게 심하여도 어떠냐 말 한마디 물어 본 적 없고, 아니꼽게 편지자로 수죄 비스름하게 논란을 하여 보냈으니, 저 하는 대로 하면 어느 지경까지든지 분풀이를 못 할 바 아니나, 남의 청문(廳聞)을 위하여 참고 참는 나더러 꾸지람을 하시니 너무 원통하오이다."

"허허, 이 사람, 가위 고집불통일세. 저 사람이 자네를 미워서 간하는 말과 편지를 하였겠나? 아무쪼록 자네가 잡류배(雜類輩) 꼬임에 빠지지 말고 가도를 바르게 하도록 함이어늘, 자네는 그 뜻을 알지 못하고 도리어 구축하며 미워하였으니, 자네가 잘못이지 무엇인고?"

함진해가 다시 개구할 겨를이 없이, 당초에 그 삼촌 돌아가서 삼 년이 지나도록 영영 일곡도 아니한 일로부터, 일청 온 것을 부정하다고 구축하여 쫓던 일과 일청의 일반 병작도 못 해먹게 전답 팔아 가던 일과, 무육한 유모를 일청이 밥 먹였다고 박대하며, 요사한 무당년을 소개하여 제반 악증을 다하던 노파를 신임한 일까지, 임가의 허황한 말에 속고 조상의 백골을 천동한 일까지, 조목조목 수죄를 한 후, 일청의 편지를 내어 놓고 구절마다 들어 타이르고, 설명을 어찌 감동할 만치 하였던지, 진해가 처음에는 일일이 자기가 잘못한 것이 없다고 반대하던 위인이라서, 고개를 푹 숙이고 아무 말 없이 듣다가 자취 없는 눈물이 옷깃을 적시며 한숨만 자초아 쉬더라.

문장이 종회의 처리할 사건을 차례로 가부표(可否票)를 받아 종다수(從多數) 취결하는데,

"우리 문중 제일 소중한 바는 종통인데, 지금 진해의 연기는 오십지년이 되었으며 종부의 연기는 아직 단산지경은 아니나, 그러나 다년 중병에 반신불수가 되어 다시 생산할 여망이 없은즉, 불가불 입후(立後)를 하여야 누대 향화를 그치지 아니할 터인데, 당내에 항렬 닿는 아이가 없으면 원근족을 불계하고 지취 동성(同性)으로 아무 일가의 자식이고 소목만 맞으면 데려오겠지만, 진해의 사촌, 일청의 맏아들 종표가 비단 당내만 될 뿐 아니라 위인이 준수하니, 부재다언(不在多言)하고 그 아이로 정하는 것이 어떠한고?"

여러 일가가 일시에 한마디 말로,

"가하오이다."

문장이 또 한 문제를 제출하되,

"지금 진해의 연기는 과히 늙지는 아니하였으나, 다년 포병으로 가위 정신 상실자라 할 만한즉, 도저히 가사를 처리할 수 없고, 데려올종표는 아직 미성년한 아이인즉, 불가불 뒤보아 주는 사람(後見人)이 있어야, 패한 가세를 회복기는 이 다음 일이어니와, 목전의 봉제사(奉祭祀) 접빈객(接賓客)을 할 터인즉, 그 자격에 합당한 사람 하나를 천거하시오."

이때에 함만호가 썩 나앉으며,

"그 사람은 별로 구할 것 없이, 내 생각에는 일청이 외에는 그 소임을 맡길 사람이 다시 없을 듯하오이다."

문장이 여러 사람에게 가부를 물으니 또한 일구동성(一口同聲)으로 만호의 말을 찬성하는지라, 문장이 진해를 돌아보며,

"자네는 어제 잘못한 것을 깨달아 이제는 옳게 함을 생각할 뿐더러 일동일정을 자네 사촌에게 위임하고 불목히 지내지 말아야 가정을 보존할 것이니 아무쪼록 종중 공의(公議)를 위반치 말기를 믿으며, 만일 일향 회개치 아니하고 악인을 가까이하여, 오늘 회의 결정한 일이 헛일이 되면, 그제는 종벌(宗罰)을 크게 당하리니 조심하소."

또 일청을 부르더니,

"자네의 종가 위하는 직심은 이미 듣고 보아 아는 일이어니와, 여러 해 절적한 일은 잘못함이 아니라 할 수 없으니, 자네 사촌만 야속타 말고 지금 회의 가결된 일과 같이 내일 내로 즉시 종표를 데려다 종가에 바치고, 자네도 반이(搬移)하여 올라와, 한집에 있어 대소사의 치산을 전담 극력하여 누대 향화를 잘 받들도록 하소."

함진해가 전일 같으면 반대를 해도 여간이 아닐 것이요, 고집을 세워도 어지간치 아니할 터이로되, 본래 천성은 과히 악한 사람이 아니요, 무식한 부인과 간특한 하속에게 고혹한 바 되어 인사 정신을 못 차렸더니 문중 공론을 듣고 자기 신세를 생각한즉, 지난 일은 잘했든지 못했든지 말못되어 가는 가세에, 우환질고는 그칠 날이 없는데, 수하에 자질간 대신 수고하여 줄 사람이라고는 그림자 하나 없은즉, 양자는 불역지전(不易之典)하여야 할 것이요, 양자를 하자면 집안 아이 내어 놓고 원촌(遠寸)에 데려올 수도 없으며, 데려온대도 내 집이 전 세월 같지 않아, 한없는 진구덥을 치르고 배겨 있을 자식이 없을 것이니, 종중 회의에 못 이기는 체하고 종표를 양자하여 제 아비 시켜 뒷배를 보아 주게 하면, 줄어든 각사가 더 줄어질 여지는 없을 것이요, 제 부자가 아무 짓을 하기로 우리 내외 죽기 전 병구완과 먹도록 입도록이야 아니 하여 줄 수 없으니, 핑계 김에 잘되었다 하고 외양으로 천연스럽게 대답을 한다.

"종중 처결이 그러하시니, 무엇이라도 거역할 가망이 있습니까? 오늘부터라도 가사를 다 쓸어 맡기겠습니다."

"그렇지, 고마운 말일세. 주역(周易)에 불원복(不遠復)이라 하였으니, 자네를 두고 한 말일세. 사람이 누가 허물이 없겠나마는, 자네같이 오래지 아니하여 회복하는 자가 어데 또 있겠나? 허허, 인제는 우리 종가집을 위하여 하례할 만한 일일세."

하며 일청더러,

"자네 종씨 말은 저러하니 자네 말도 좀 들어 보세."

"종의도 이 같으시고, 종형의 뜻도 저러시니, 어찌 군말씀을 하오리까마는, 저 같은 위인이 열이기로 어찌 종형 하나를 따르겠습니까? 그러나 만일 형이 시키는 말 곧 있으면 정성껏 거행하겠습니다."

"자, 그러고 보면 장황히 더 의논할 것 없이 이 길로 자네가 떠나 내려가 종표를 데리고 올라오소. 아무리 급해도 그 아이 의복이라도 빨아 입혀야 할 터인즉, 자연 수일 지체는 될 것이니 오늘 내일 모레, 오늘까지 닷새 동안이면 하루 가고, 하루 오고 넉넉히 되겠네. 그날은 우리가 또 한번 다시 모여야 하겠네."

하며 일변 일청을 재촉하여 발행케 하고, 일변 진해를 다시 당부한 후 이 다음 다시 모이기로 문장 이하가 각각 헤어져 가더라.

여러 함씨들이 종표의 올라올 승시하여 일제히 모여 예를 행케 하고 내당에 들여보내어, 최씨 부인에게 모자지례로 뵈옵는데, 이때 최씨는 병은 아무리 깊었더라도 그 병이 부집 죄듯 왜깍지깍 세상 모르고 앓는 증세가 아니라, 시난고난 앓는 중 중풍이 되어 반신불수로 똥오줌을 받내되, 정신은 참기름송이 같아, 귀로 듣고 눈으로 보고 입으로 말까지는 하는 터이라, 일청이가 그 아들을 데리고 들어오는 양을 본즉, 눈꼬리가 창아곱패 되듯 하며, 앞니가 보도독보도독 갈리건마는, 일문 대종중이 모여 하는 일이요, 또 자기가 그 처신이 되었으니, 무엇이라고 말 한마디 할 수 없어, 다만 어금니 빠진 표범과 발톱 부러진 매와 같이, 할퀴며 물지는 못하고 속으로만 노리며 으르렁대어, 종표가 어머니 어머니 하며, 앞에 와 어리대는 것을 대답 한마디 없이 거들떠도 아니 보니 속담에, '병든 나무에 좀나기가 쉽다'고 자기의 소생도 아니요, 양자로 데려온 아이를 그 모양으로 냉대하니, 의리 모르는 노파 등속이 종회 이후에는 어엿이 나덤벙이지는 못해도 여전히 최부인에게는 왕래통신이 은근하여, 종표의 험담을 빗발치듯 담아 부으니 최씨는 더구나 미워하여 날로 구박이 자심하건마는, 종표는 일정한 정성을 변치 아니하고 똥오줌을 손수 받내며 조금도 어려운 기색이 없어, 밤낮 옷끈을 끄르지 아니하고 단잠을 잘 줄 모르며, 진해에게 혼정신성(昏定晨省)과 최씨에게 시탕(侍湯) 범절이 목석이라도 감동할 만하더라.

본래 사람의 염량 후박(厚薄)은 병중에 알기 쉬운 고로 말 한마디에 야속한 마음도 잘 나고, 고마운 생각도 잘 나는 법이라. 최씨가 종표 부자를 구수같이 미워하던 그 마음이 차차 감해지고, 감사하고 기특한 생각이 차차 더해지니, 이는 자기 일신이 괴롭고 아픈 중 맑은 정신이 들 적마다 오장에서 절로 솟아나오는 생각이라.

'에구 다리야, 에구 팔이야, 일신을 마음대로 놀리지 못하니 똥오줌을 마음대로 눌 수가 있나! 세상에 모를 것은 사람의 마음이다. 내게 단것 쓴것 다 얻어먹던 것들은 웃느라고 문병 한 번 없지. 그것들은 오히려 예사지만, 안잠 할미로 말하면 제 죽기 전에는 나를 배반치 못할 터이어늘, 똥 한 번 오줌 한 번을 치우려면 군말이 한두 마디가 아니요, 그나마 목이 터지도록 열스무 번 불러야 겨우 눈살을 잡고 마지못하여 오니, 살지무석(殺之無惜)하고 의리부동한 것도 있다. 에구구 팔다리야, 종표는 기특도 하지. 제가 내게 무슨 정이 들었다고 어린것이 더럽고 괴로운 줄도 모르고 단잠을 아니 자고 잠시를 떠나지 아니하니 그 아니 신통한가! 에그, 집안이 어쩌면 그렇게 되었던지 돈냥 될 것은 모두 전당을 잡혀 먹고, 약 한 첩 지어 먹자 해도 일푼 도리 없더니, 시사촌께서 와 계신 후로는 그 걱정 저 걱정 도무지 모르고 지내지. 내가 내 일을 생각해도 벌역을 받아 병신 되어 싸지 않은가! 남의 말만 곧이듣고 내 집안 양반을 괄시하였으니.'

하여 하루 이틀 지나갈수록 세상 짓이 다 헛일을 한 듯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더욱 깊어 가더라.

최씨 부인의 병이 감세가 있을 때가 되었든지, 약을 바로 쓰고 조섭을 잘해 그렇든지, 기거 동작을 도무지 못 하던 몸이라서 능히 일어나서 능히 앉으며, 지팡이를 짚고 방문 밖에도 나서 보니, 자기 생각에도 희한하고 다행하여, 이것이 다 시사촌의 구원과 종표의 정성으로 효험을 보았거니 싶어 없던 인정이 물 퍼붓듯 하는데,

"종표야, 날이 선선하다. 핫옷을 갈아입어라. 내 병으로 해서 잠도 못 자며 고생을 하더니, 네 얼굴이 처음 올 때보다 반쪽이 되었구나. 시장하겠다. 점심 먹어라. 병구완도 하려니와 성한 사람도 기운을 차려야지. 삼랑아, 도련님 진지 차려 드려라."

"저는 배고프지 아니합니다. 약 잡수신 지 한참 되어 다 내리셨겠으니 진지 끓인 것을 좀 잡수셔야지, 속이 너무 비셔서 못 씁니다."

"너 먹는 것을 보아야 내가 먹지, 너 아니 먹으면 나도 아니 먹겠다."

하며 자애가 오장에서 우러나오니, 세상에 남의 집에 출가하여 그 집을 장도감 만드는 부인이 하고많은데, 열에 아홉은 소견이 편협지 아니하면 심술이 대단하여, 한번 고집을 내어 놓으면 관머리에서 은정 소리가 땅땅 나기 전에는 다시 변통을 못 하건마는, 최부인은 고집을 내면 암소 곧달음으로 고삐 잡아당길 새 없이, 하고 싶은 일을 실컷 하고야 말면서도, 전후 사리는 멀쩡하여 잘잘못을 짐작 못 하던 터가 아니라, 한번 마음이 바로잡히기 시작하더니, 본래 무던하던 부인보다 오히려 못지 아니하여 처사에 유지함이 상등(上等)사회에 참례할 만하다.

하루는 자기 남편과 시사촌과 사촌동서와 종표까지 한자리에 모여앉은 좌상에서 최씨 부인의 발론으로, 종표를 중학교에 입학게 하여, 사오 년 만에 졸업한 후에 다시 법률전문학교에 보내어 공부를 시키는데, 생양정 부모의 정성도 도저하지마는, 종표의 열심이 어찌 대단하던지 시험마다 만점을 얻어 최우등으로 졸업을 하니, 함종표의 명예가 사회상에 현자하여 만장공천(滿場公薦)으로 평리원 판사를 하였는데, 그때 마침 우리나라 정치를 쇄신하여, 음양 술객과 무복(巫卜) 잡류배를 일병 포박(捕縛)하여 차례로 신문하는 중에 하루는 부녀 일명을 잡아들여 오거늘 종표의 내심으로,

'저 계집도 사람은 일반인데, 무슨 노릇을 못 해서 혹세무민(惑世誣民)하는 무녀 노릇을 하다가 이 지경을 당하노? 우리집에서도 아마 이따위 년에게 속고 패가를 했을 것이니 아무 때든지 그년만 붙들고 보면 대매에 쳐죽여 첫째로 우리집 설분(雪憤)도 하고, 둘째로 세상 사람에 후일 경계를 하리라.'

하는데 잡혀 들어오던 무녀가 신문장에를 당도하더니, 그 똘똘하고 살기가 다락다락하던 위인이 별안간에 얼굴빛이 사상(死相)이 되어 목소리를 벌벌 떨며 자초행위를 개개 승복(承服)하되,

"의신을 장하에 죽이신대도 어디 가 한가하오리까마는 죽을 때 죽사와도 한마디 아뢰올 말씀이 있습니다. 의신의 무녀 노릇 하압기는 다름이 아니라, 생애가 어려워 마지못해 하는 일인데, 한때 얻어먹고 살라고 우중으로 말마디가 신통히 맞사와 살면서 이 소문을 듣고 부르오니, 속담에 굿들은 무당이라고, 부르는 곳마다 가서 정성껏 큰 굿도 하여 주고, 푸념도 하여 준 죄밖에 다른 죄는 없습니다."

종표의 말소리가 본래 기걸하여 예사로 하는 말도 천장이 드르렁드르렁 울리는 터이라, 그 무녀의 말이 막 그치자 가래침 한번을 칵 배앝고,

"네 말 듣거라. 세상에 무슨 생애를 못 해먹어 요사한 말을 주작하여 사람을 속여 전곡(錢穀)을 도적하고 패가망신까지 시키노?"

"의신이 무녀 된 이후로 남북촌에 단골댁이 허구 많으셔도 불행히 다동 함진해 댁에서 그 댁 운수로 패가를 하셨지, 그 외에는 한 댁도 형세가 늘면 늘었지 줄으신 댁은 없사온대, 이처럼 분부를 하시니 하정에 억울하오이다."

함판사가 함진해 댁이라는 말을 들으니,

'옳다, 이년이 우리집 결딴내던 년이로구나. 불문곡직하고 당장 그대로 엎어 놓고 난장으로 죽이고 싶지마는, 법률 배운 사람이 미개한 시대에 행하던 남형(濫刑)을 행할 수 없고 중률이나 쓰자면 그년의 전후 죄상을 명백히 공초케 하여야 옳것다.'

하고 한 손 눙치며,

"네 말 같으면 남북촌 여러 단골집이 모두 네 공효로 형세를 부지한 모양 같고나. 그러면 네 단골 되기는 일반인데, 함진해 댁에서는 어찌하여 독이 패가를 하셨어?"

"녜, 아뢰기 죄만하오나, 그 댁은 그러하실밖에 수가 없으시지요. 그 댁 마님께서 귀신이라면 사족을 못 쓰시는데 좌우에서 거행하는 하인이라고는 깡그리 불한당년이올시다. 의신은 구복(口腹)이 원수라, 그 댁 하인의 시키는 대로 할 따름이지, 한 가지 의신의 계교로 속인 일은 없습니다."

"네 몸에 형벌을 아니 당하려거든, 그년들이 네게 와 시키던 말도 낱낱이 고하려니와, 너의 간교로 그 댁 속이던 일을 내가 이미 알고 있으니 잔말말고 고하렷다."

"그 댁 하인의 다른 것들은 다만 심부름만 하였지요마는 그 댁에서 안잠자는 노파가 그 댁 일을 무이어 자주장하다시피 하는데, 하루는 의신의 집에를 와서 그 댁 아기 죽은데 진배송을 내어 달라 하며, 그 댁 세세한 일을 모두 가르쳐 의신더러 알아맞히는 모양을 하여 별비가 얼마가 나든지 반분하자 하압기 말씀이야 바로 하압지, 무녀 되어서 그런 자리를 내어 놓고 무엇을 먹고 사옵니까? 그러하오나 마침 의신이 신병이 있사와 부득이하여 저의 동무를 천거하였삽더니 그럴 줄이야 누가 알았습니까? 그년이 천하에 간특하고 의리부동한 년이라, 의신의 그 댁 단골까지 빼앗아 제가 차지하고 흥화조산을 못 할 짓이 없이 하였습니다. 당초에 그 댁 영감께서 베전 병문에서 회오리 바람을 만나시는 것을 마침 지나다 제 눈으로 보고 앙큼한 마음으로 아무 때든지 그 댁 일을 한 번만 맡아 보면 귀신이 집어 댄 듯이 말을 하여 깜짝 반하게 하리라 한 것은 아무도 몰랐더니, 그년이 그 방법을 행할 뿐 아니라, 안잠 할미를 부동하여 세소한 일까지 미리 알고 가장 영한 체하여, 그 댁 재물을 빼앗아먹다 못하여 나중에는 임가라 하는 놈과 흉계를 내어, 그놈을 지관 행세를 시켜 비기를 써다 미리 고양 땅에 묻고, 그 영감을 감쪽같이 속여넘겨 여러 만금을 도적하여 먹으면서도 의신에게는 이렇다 말 한마디 없었사오니, 하늘이 내려다보시지, 의신은 그 댁 일에 일호도 죄가 없습니다."

"그러면 너는 어디 살고, 그년은 어디 있으며, 명칭은 무엇이라 하고 그년의 비밀한 계교를 어찌 알았뇨?"

"의신은 묘동 사압기로 묘동집이라고 남들이 부르압고, 국수당 무당은 성이 김가라고 그렇게 별호를 지었는지, 금방울이 금방울이 하고 모르는 사람이 없사오며, 그 비밀한 일은 그 댁에 가까이 단기는 하인들이 그년의 소위가 괘씸하여 의신 곧 보면 이야기를 하압기로 들었습니다."

함판사가 듣기를 다하고 사령을 명하여 금방울과 임지관을 성화같이 잡아들이라 분부하니, 묘동이 다시 고하되,

"동류의 일을 아무쪼록 덮어 가는 것이 서로 친하던 본의오나, 그년이 의신의 생애를 앗아 가지고 그 댁을 못살게 하온 일이 너무 분하고 가이없어 이 말씀이지, 그년이 바람 높은 기색을 미리 알아채고 동대문 안 양사골 제 아주미 집 건넌방 속에 임가와 같이 된장독에 풋고추 백히듯 꼭 들이백혀 있습니다. 그년을 잡으시랴 하면 제 집에는 보내 보실 것도 없이, 이 길로 양사골로 사령을 보내셔야 잡으십니다. 그년의 벗바리가 어찌 좋은지 사면에 벌레줄같이 늘어서 있어, 몇 시간만 지체가 되면 이 소문을 다 듣고 달아날 터이올시다."

판사가 사령에게 엄밀히 분부하여 양사동으로 보내더니, 거무하에 연놈을 항새족새하여 잡아들였는데, 신문 한 번도 하기 전에 예서제서 청촉(請囑)이 빗발같이 쏟아져 들어오는지라, 판사가 한편 귀로 듣는 족족 한편 귀로 흘리며 속마음으로,

'아따, 이년의 세력이 어지간치 않다. 이왕으로 말하면, 북묘 진령군만은 하고, 근일로 말하면 삼청동 수련이만은 착실한걸. 네 아무리 청질을 해도 내가 이왕 법관 모양으로 협잡하는 터이 아니니, 무엇이 고기되어 법을 굽혀 가며 호락호락히 청 들을 내냐! 이년, 정신없는 년, 내가 누구인 줄 알고 이따위 버르장이를 하느냐? 매 한 개라도 더 맞아 보아라!'

하고 서리같이 호령을 하여 족불리지로 잡아들여, 형구를 갖추어 놓고 천둥같이 으르며 일장 신문을 하는데, 금방울같이 안차고 다라지고 겁없는 인물도 불이 어찌 되든지 말끝마다,

"죽을 혼이 들어서 그리했으니 상덕을 입어 살아지이다!"

소리를 연해 하여 가며 전후 정절을 개개 승복하니, 임가 역시 발명무지라, 다만 고개를 푹 숙이고 살기만 발원하더라. 판사가 일변 고양군에 발훈(發訓)하여 최옥여를 마저 압상하여 일장 문초한 후 세 죄인을 모두 한기신(限己身) 징역으로 선고하고 자기 집에 돌아와 생양정 부모께 그 사실을 고하고서, 당장 노파와 삼랑들을 불러 세우더니,

"너희들의 죄상은 열 번 죽어도 남을 터이나 십분 용서하는 것이니, 댁 문하에 다시 발그림자도 하지 말고 이 길로 나아가되, 다른 집에 가서라도 그런 행실을 하여 내게 입렴 곧 되고 보면 그때 가서는 죽어도 한가 말렷다."

이 모양으로 호령을 하여 두 년을 축출하니, 최씨 부인이 그 아들 보기도 얼굴이 뜨뜻하여, 그 사지 어금니같이 아끼던 수하친병이 이 지경이 되어도 말 한마디 두호하여 주지 못하고, 오직 아들의 뜻대로만 백사 만사를 좇는데, 벽장 다락 구석에 위해 앉혔던 제석 삼신 호구 궁웅 말명 여귀 등 각색 명목과 터주 성주 등물을 모두 쓸어내다 마당 가운데에 쌓아 놓고 성냥 한 가지를 드윽 그어 불을 질러 태워 버리고, 다시 구기라고는 손톱 반머리만치도 아니 보는데, 그 뒤로는 그같이 번할 날이 없이 우환이 잦던 집안 식구가 돌림감기 한 번을 아니 앓고, 아이들이 나면 젖주럽도 없이 숙성하게 잘 자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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