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되리라고 배워 온 것이 세 살 때부터 버릇이었나이다. 그렇다고 이 버릇을 팔십까지 지킨다고는 아예 말하지도 않습니다. 그야 지금 내 눈앞에 얼마나 기쁘고 훌륭하고 착한 것이 있을지도 모르면서 그대로 자꾸만 살아가는 판이니 어쩌면 눈이 아슬아슬하고 몸서리나고 악한 일인들 없다고 하겠습니까? 차라리 그것은 그 악한 맛에 또는 빛에 매력을 느끼고 도취되어 갈는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도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된다면 그 또한 어머님의 가르침을 저버리지 않은 방편이라고 하오리까?

딴은 내 일찍이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되려고 마음먹어 본 열 다섯 애기시절은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의 도(道)를 다 배웠다고 스스로 들떠서 남의 입으로부터 '교동(驕童)'이란 기롱(譏弄)까지도 면치 못하였건마는 어쩐지 이 시절이 되면 마음 한편이 허전하고 무엇이 모자라는 것만 같아 발길은 저절로 내 동리 강가로만 가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누구나 그곳에 무슨 약속한 사람이라도 있었구나 하고 생각을 하면 그것은 여간 잘못된 생각이 아닙니다. 본래 내 동리란 곳은 겨우 한 백여 호나 될락 말락한 곳, 모두가 내 집안이 대대로 지켜 온 이 땅에는 말도 아니고 글도 아닌 무서운 규모가 우리들을 키워 주었습니다.

지금 내가 생각해 보아도 우습기도 하나 그때쯤은 으레히 그런 것이라고 생각한 것은 내 동리 동편에 왕모성(王母城)이라고 고려 공민왕이 그 모후(母后)를 뫼시고 몽진(蒙塵)하신 옛 성터로서 아직도 성지(城址)가 있지마는 대개 우리 동리에 해가 뜰 때는 이 성 위에서 뜨는 것이었고, 해가 지는 곳은 쌍봉(雙峯)이라는 전혀 수정암으로 된 두봉이 있어서 그 사이로 해가 넘어가는 것이었는데, 그렇게 해가 지면 우리가 자랄 때는 집안 어른을 뵈러 가도 떳떳이 '등롱(燈籠)'에 황촉불을 켜서 용(龍)이나 분이(粉伊)들을 들리고 다닌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홀로 강가에 나갔을 때는 그곳에는 어화(漁火)조차 사라진 것을 보아도 내가 만날 만한 사람이 없었다는 것을 변명할 것도 없거니와 해가 떠서 넘어간 그 바로 밑에는 낙동강이 흘러가는 것이었습니다. 낙동강이라면 모두들 오── 네 고장은 그 무서운 홍수로 이름난 거기냐 하고 경멸하면 그것은 낙동강을 모르는 말이로소이다. 낙동강이라면 태백산 속에도 황지천천(黃地穿泉)에서 멍석말이처럼 솟아나는 그 샘물의 이상을 모른대도 고이할 바는 아니오나 김해, 구포까지 칠백 리를 흘러가는 동안에 이 골물이 졸졸 저 골 물이 콸콸 열에 열 두골 물이 한 데로 합수쳐 천방져 지방져 저 건너 병풍석 꽝꽝 마주쳐 흐르다가 그 위에 여름 장마가 지면 하류에 큰물이 나나, 그에 따르는 폐단쯤은 있을 법도 한 일이오매 문죄를 한다면 여름 장마를 할 일이지 애꿎은 낙동강이 무슨 죄오리까? 하지만 이것도 죄라면 나는 죄와 함께 자라난 것이오리까. 그래서 눈물지우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면 그 또한 내 회오(悔悟)할 바 없으랴. 하지만 내 고장이란 낙동강가에는 그 하이얀 조각돌이 일면으로 깔리고, 그곳에서 나는 홀로 앉아 내일 아침 화단에 갖다 놓을 차디찬 괴석들을 주으면서 그 강물 소리를 듣는 것이었습니다. 봄날 새벽에 유수를 섞어서 쩡쩡 소리를 내며 흐르는 소리가 청렬한 품품 좋고 여름 큰물이 내릴 때 왕양(汪洋)한 기상도 그럴 듯하지만 무엇이 어떻다해도 하늘보다 푸른 물이 심연을 지날 때는 빙빙 맴을 돌고 여울을 지나자면 소낙비를 모는 소리가 나고 다시 경사가 낮은 곳을 지날 때는 서늘한 가을로부터 내 옷깃을 날리고 저 아래로 내려가면서는 큰 바위를 때려 천병만마를 달리는 형세로 자꾸만 갔습니다. 흘러 흘러서……. 그때 나는 그 물소리를 따라 어디든지 가고 싶은 마음을 참을 수 없어 동해를 건넜고, 어느 사이<플루타크 영웅전>도 읽고, <시저>나 <나폴레옹>을 다 읽은 때는 모두 가을이었습니다마는 눈물이 무엇입니까, 얼마 안 있어 국화가 만발한 화단도 나는 잃었고 내 요람도 고목에 걸린 거미줄처럼 날려 보냈나이다.

그리고 나는 지주(蜘蛛:거미)가 되었나이다. 누가 지주를 천재라고 하였나이까? 그놈은 사람이 보이지 않는 동안 그 작은 날파리나 부드러운 나비 나래를 말아 올리고도 모른척하고 창공을 쳐다보는 것은 위선자입니다. 그놈을 제법 황혼의 세스토프라는 말은 더욱 빈말입니다. 그 주제에 사색을 통일하려는 듯한 얼굴은 멀쩡한 배덕자입니다. 두고 보시오. 그놈은 제 들어갈 구멍을 보살피는 게 아마 바람결을 꺼리는 겝니다. 하늘이 푸르지 않습니까.

그래서 어느 암혈(岩穴)에라도 들어가면 한겨울 동안을 두고 무엇을 생각하리라고 믿어집니까? 거미라도 방안에 사는 거미들은 아침 일찌거니 기어나오면 그 집에서는 그날 반가운 소식을 듣는다고 기뻐한 것은 우리 고장의 풍속이었나이다. 그래서 나의 어머니께서는 우리 형제들 가운데 누가 여행을 했을 때나 객지에 있을 때면 으레 이 아침 거미가 기어 나오기를 기다렸다고 하신 말씀을 우리가 제법 장성한 때에 알았습니다마는, 지금은 우리 집 안사랑에 아침 거미가 기어나온다 해도 나의 늙으신 어머니께서는 당연히 믿지 않으셔야 옳을 것은 아시면서도 그래도 마음 한편에 행여나 어느 자식이 편지를 부칠는지 하고 바라실 것을 아는 나는 아무 말 없이 담배를 피워 무는 버릇이 늘었나이다. 담배는 이전에는 궐련을 피우는 것이 버릇이었으나, 요즘은 일을 할 때 반드시 손에 빼드는 것이 성가시고 해서 어느 날 길가에서 사 가지고 온 골통대를 피우는 것입니다. 그것을 피워 물면 그놈의 연기가 아주 천간산(淺間山)의 분연(噴煙)에다 비한단 말이겠습니까? 그야 나에게는 '폼베이 최후의 날'같이도 생각이 되옵니다.

그것은 과연 그러하오리다. 나에게는 진정코 최후를 맞이할 세계가 머리의 한편에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타오르는 순간 나는 얼마나 기쁘고 몸이 가벼우리까? 그러나 이 웃음의 표정은 여기에 다 쓰지는 않겠나이다. 다만 나 혼자 옅은 미소를 하였다고 생각을 해두지요, 그러나 이럴 때는 벌써 나 자신은 로마에 불을 지르고 가만히 앉아서 그 타오르는 광경을 보는 폭군 네로인지도 모릅니다. 그 거미줄같이 정교한 시가(市街)! 대리석 원주! 극장! 또는 벽화! 이 모든 것들이 타오르는 것을 보는 네로의 마음은 얼마나 통쾌하오리까? 로마가 일어난 것은 하루아침 일이 아니라, 한 말을 들으면 망하기 위하여 헐고 부릇나고 한 로마에 불을 지르고 그 찬란한 문화를 검은 오동 마차에 실어 장지(葬地)로 보내면서 호곡하는 인민들을 보는 네로! 초가삼간이 다 타도 그놈 빈대 죽는 맛이 좋다고 하는 사람의 마음과 같이 통쾌하지 않았을까!

지금 내 머리 속에 타고 있는 내 집은 그 속에 은촛대도 있고 훌륭한 현액(懸額)도 있기는 하나 너무도 고가(古家)라 빈대가 많기로 유명한 집이었나이다.

이 집은 그나마 한쪽이 기울어서 어느 때 어떻게 쓰러질는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나폴레옹이 우리 집을 쳐들어오면 나는 그것을 모스코같이 불을 지를 집이어늘, 그놈의 빈대란 흡혈귀를 전멸한다면 나는 내 집에 불을 싸지르고 로마를 태워 버린 네로가 되오리다.

이렇게 생각하는 동안 그 골통대의 담배가 모두 싸늘한 재로 화하고, 찬바람이 옷소매에 기어들 때 나는 거리로 나옵니다. 거리에는 사람들도 한산하여지고 차차로 가로등이 켜지는 까닭입니다. 까짓껏 가로등이라면 전기회사에서 하는 장난에 틀림이 없으나 그것은 살아 있는 거리의 비애입니다. 그 내력을 들어보시오. 그도 벌써 5년 전 옛일입니다. C라는 젊은 친구와 내가 바로 이 시절에 이 등불이 켜질 때면 이 거리를 걸어다녔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밤에 그를 시골로 보낸 것도 이 거리의 등불 밑이 아니겠습니까. 그 후 몇 달을 지나고 나에게 온 그의 편지에서 일 절을 써 보겠나이다.

- 내려와서 한 달 동안은 집안을 망친 놈이란 죄명을 쓰고 하루 한시도 지낼 수가 없었소. 우리 구사(廐舍)에 매여 있는 종모우(種牡牛)와 같이 아무리 생각해도 살수는 없었소. 그래서 나는 선영(先塋)이 있는 산중에 들어온 것이오. 이 산중에는 나무가 많아서 이것을 채벌하면 나는 지금 이곳에서 숯을 굽겠소. 그러나 내가 숯을 굽는다고 돈을 번다는 생각은 조금도 없소. 다만 내 홀로 이 산속에서 숯가마에 불을 싸지르고 그놈이 타오르는 것을 보기만 해도 이때까지 아무에게나 호소할 곳 없던 내 가슴속 앙앙한 울분이 한 반은 풀리는 듯하고, 복수를 한 때와도 같고 - 하던 친구가 마침내 그 아내와 사이가 둥글지 못하고 다시 서울로 와서 그 숯가마에 불을 지르고 타오를 때 통쾌하던 얘기를 몇 번이나 이 거리를 다니며 되풀이를 할 때면 해 뜻 없는 가을 날씨에 거리의 등불이 켜지곤 하였건만 지금엔 그조차 불에 살아서 그 조그마한 오동합(梧桐盒)에 뼈만 담아 고산(故山)으로 보낸 것도 3년이 넘고 나 홀로 이 거리를 가면서 가을 바람에 옷깃을 날리건마는 그래도 눈물지지 않는 건 장자(長者)의 풍토일까?

거리의 상공에는 별이 빛나는 밤이었소. 밤이라도 캄캄한 한밤중은 별들의 낱수가 훨씬 더 많이 보이는 것이지마는 우리 서울 하늘에는 더구나 가을밤 서울 하늘에는 너무나 깨끗이 갠 하늘이라 별조차 낱수가 그다지 많지는 않아서 하이네가 본다면 황금 사북을 흩어 놓은 듯하다고 감탄할는지도 모르겠소. 그러나 하이네는 하이네고 나는 나이지 사람마다 제대로 한 가지의 긍지가 있는 것을 왜 우리 서울의 가을 하늘 밑에서 울거나 웃거나, 슬픈 일이 있거나 기쁜 일이 있거나 우리는 모두 이 하늘만을 쳐다보고 부르짖은 것이 아니겠소. 그 모든 것이 내 지나간 시절의 자랑이었으니 이제 새삼스레 뉘우칠 바도 없소.

하기야 서울도 예전 같으면 아라비아의 전설에나 나올 듯한 도시이었기에 해외에서 다른 나라 사람들을 만나면 서울의 자랑을 무척도 하였겠지마는 오늘의 서울은 아주 그 모습을 볼 수가 없는 것이오. 거리를 나서면 어느 집이라도 으레 지금(地金)을 판다거나 산다거나 금광을 어쩐다는 간판들이 쭉 내리 붙어서 이것은 세계를 처음 여행하는 사람에게는 우리의 서울과 알래스카의 위치를 의심쩍게 할는지 모르겠소. 그래서 사실인즉 내 마음에 간직해 온 서울의 자랑도 이제는 그 밑천을 잃어버린 셈이오. 그러나 아직 얼마 동안 저 하늘만은 잃어버릴 염려는 없는 것이오. 그러기에 나는 서울의 하늘을 사랑하고 그 밑에서 일어났다는 사라지는 일들을 모두 기억해 두었다가는 때로는 그 기억에 먼지를 덮어두는 일이 있소.

앞날을 생각하는 것은 그 일이 대수롭지 않아도 언젠가 마음 한구석에 바라는 것이나 있겠지마는 무엇 사람의 마음을 쓸쓸하게 하려는 것도 아니라오. 누구나 20이란 시절엔 가을밤 깊도록 금서(禁書)를 읽던 밤이 있으리다. 그러나 나는 그때 무슨 까닭에 야금술(冶金術)에 관한 서적을 읽어 본 일이 있었나이다.

그때 나를 담당한 Y교수는 동경에서 문학을 공부한 사람으로 그의 작품에 <안작>이란 것이 있었습니다. 그 내용이란 건 글씨의 안품을 능구렁이 같은 상인들이 시골 놈팡이 졸부를 붙들어 놓고 능청맞게 팔아먹는 것인데, 그 독후감을 이야기했더니 그는 좋아라고 나를 붙들고 자기의 의견을 말한 뒤 고도(古都)의 가을 바람이 한층 낙막(落寞)한 자금성(紫金城)을 끼고 돌면서 고서와 골동품에 대한 이야기와 역대 중국의 비명(碑銘)에 대한 지식을 가르쳐 준 것이 인연이 되어 나는 그의 연구실을 자주 드나들게 되었나이다. 그 뒤에도 나는 Y교수를 만나면 내가 잘 알아듣지도 못하고 사실은 알고 싶지도 않은 고고학에 관한 이야기까지도 들려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높은 지식은 내가 애써 배우려하지 않은 것이라 지금에 기억되지 않는 것은 죄 될 바도 없지마는 그가 문학을 닦았고 문학을 가르치면서도 야금학에 깊은 조예(造詣)가 있었다는 것은 지금 생각해 보아도 끔찍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가 그 야금학에 통한 이야기는 나에게 들려주지 않았으므로 일부러 묻는 것도 쑥스럽고 해서 자제하던 차에 나와 한 반에 있는 B에게 물어보았더니 B는 한참 말이 없이 빙그레 웃다가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Y교수는 야금학을 학술상으로만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그 집에는 대장간보다도 더 복잡한 연장이 갖추어져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해서 무엇 하는거냐고 물으면 안금을 만든다고 말을 하고는 쓸쓸히 웃기에, 안금은 만들어 무엇을 하느냐고 물으면 돼지 목에 진주를 걸어 주는 것을 네가 아느냐고 하고는 화를 버럭 내기에, 무슨 말인지도 모르고 겁도 나고 해서 그만 아무 말도 못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 가을부터 여가만 있으면 턱없이 야금학(冶金學)에 관한 책을 보는 버릇을 가졌던 것입니다.

그러나 애달픈 일로는 속담에 칼은 10년을 갈면 바늘이 된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 바늘로 문구멍을 뚫어 놓았던들 그놈 코끼리란 놈이 내 방으로 기어 들어오는 것을 보기나 할 게 아닙니까? 사람이 야금에 관한 책을 봐서 안금을 만들어 보지 못하고, 칼을 갈아서 바늘을 만들지 못한 내 생애? 시골 촌 접장을 불러 물으면 "서검공허40년(書劍空虛四十年)" 운운하고 풍자를 할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가을에도 저녁으로 책사(서점)에 돌아다니면서 묵은 책을 뒤져보고 했으나 어쩐지 그 Y교수의 애교도 없는 큰 얼굴이 앞을 가려서 종시 책도 보지 못하고, 다듬이 소리만 요란한 동리 어구를 돌아오면 진주들은 먼 바다 속에서 꿈을 꾸는지 별들이 내 머리 위에서 그것을 지킬 때 나는 침실로 들어가기로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별들을 쳐다보고서 잠이 들면 나는 꿈을 보는 것입니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 그것은 어느 해 가을이었나이다. 그 해 가을 우리 동리에는 무슨 큰 변이 났다고 해서 모두들 산중으로 자기 집 선영(先塋)이 있는 곳이나 또는 농장(農庄)이 있는 곳으로 피난을 가는 것이었고, 그때 나도 업혀서 피난을 갔었는데 그것이 아마 지금 생각하면 평생에 처음 되는 여행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피난가는 길이었던 만큼 포스랍지는(풍족하지는) 못하였고 나의 기억에 어렴풋이 남아 있는 것이라야 우리가 간 그 집 뒤에 감나무가 있어서 감이 조롱조롱 열리고 첫서리를 기다리느라고 탐스럽게 붉었던 것입니다. 누구나 다 시골에 있어 본 사람이면 한 번씩은 경험한 일이리다마는 요즘 서리가 오려고 하면 처마끝으로 왕벌들이 날아들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 벌들 중에도 어떤 놈은 높다랗게 날아와서는 감나무 제일 높은 가지 끝에 병든 잎사귀를 그 예리한 바늘 끝으로 꼭꼭 찔러 보고는 멀리 금선(琴線)을 죽 그으면 날아가는 것입니다. 그때 나는 그 벌을 잡아 달라고 나를 업고 다니던 돌이를 조르고 악을 악을 쓰고 울기만 하면 그래도 악이 풀리고 속이 시원하여졌으며, 어른들이 나를 달래려고 온갖 유밀과(油蜜果)가 나의 미끼로 나왔겠지마는, 지금이야 울 수도 없는 악을 쓸 곳도 없고 하니 그저 꿈속에나 소-로-의 삼림 속을 헤매는 것이었나이다.

그러던 것이 일전 내가 집을 얻은 곳은 산 위의 조그마한, 잘 말하면 양관(洋館)이 온통 소나무 숲 속에 싸여 있는 곳입니다. 집을 찾아오던 그날 석양에 어디서 날아온 놈인지 굵다란 왕벌이란 놈이 어디서 날아왔는지 윙 소리를 내면서 처마 끝에 왔다가는 바로 정문 앞에 있는 활엽수를 한번 휙 돌아서 잎사귀 하나를 애처롭게 건드려 놓고는 기다란 줄을 그리며 날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다소 과분한 집인 것을 알면서도 그 집에 있기로 하였습니다. 그래 들어놓고 보니, 전후좌우가 모두 삼림이고 고요하기 짝이 없으며, 바람이 불어 솔솔이 파도가 이는 듯하고 그러면 집안은 더욱 고요해지는 것입니다. 그나마 바람뿐이오리까?

지난 밤에 사 말고 비가 오는 것이고 빗소리 솔잎 사이를 새서 듣는 것이란 무슨 바늘과 같이 마음속을 기어드는 것이었나이다. 괴테가 말한 산상의 정적(靜寂)이란 이런 것이 아닐지도 모르는 것이지요. 베개 속을 들어가면 어느덧 바람이 비조차 몰고 가고 작은 시냇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리고, 벌레들이 제각기 딴 해음(諧音)으로 읊조리면 벌써 밤도 무던히 깊어졌는가 봐. 멀리서 달려가며 나던 포오키 차의 궤도를 가는 소음도 다 끊어지고 얼마 되지 않아서 다시 아침이 오고 나는 거리로 나오기를 마치 먼길을 떠나듯 합니다. 그리고 해가 져서 다시 집으로 돌아오면 행길에서 내 집이 8백 미터의 거리밖에는 되지 않고 걸어 15분에 닿을 수 있다 셈쳐도 그 동안이 그다지 가까운 것도 아니고 까마득한 것만은 그래도 나에게는 그것이 멀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물론 다 같은 동안이라도 활엽수가 울창할 때는 그곳이 가깝다가도 낙엽이 떨어지고 앙상한 가지만 남았을 때는 훨씬 더 멀어지는 것이 보통이고 서운한 마음도 생기련만 항상 푸를 수 있는 소나무가 빽빽이 둘러선 내 집은 정말 그렇지 않다손치더라도 별달리 나에게 가까운 것이 한 개의 방편도 되옵니다. 그야 만산홍엽(滿山紅葉)이 잦아지는 것도 곱기야 하다 한들 어느 때나 푸를 수만 있는 소나무도 영원의 고집쟁이를 흉볼 리는 없으리라. 오렌지와 같은 열매가 없다는 게나 야래향(夜來香)같은 꽃이 없다고 해도 내 마음의 기쁨도 맛볼 때가 있을지 모릅니다.

이런 생각을 되풀이하며 걷는 15분 동안에 내 손 한쪽은 포켓 속에서 쇳대를 만지작거려 봅니다. 이놈만 있으면 나는 무슨 큰 비밀을 찾아낼 듯한 믿음이 있는 까닭이었나이다. 그러나 지금은 나는 그 쇳대를 내 집에 있는 동무에게 맡겼나이다. 그것은 내 지금에 별다른 믿음을 갖지 못한다 해도 소나무가 우거진 그 속에서 가을 기운을 마셔 보고 머리 속을 서늘케만 하면 내 염원을 다 채워 줄 수가 있는 까닭입니다. 행여 어느 밤에 이 삼림의 요정들이 찾아와서 나에게 놀기를 청하면 나는 즐겨서 그들에게 얘기를 할 것이고, 그들은 내 얘기를 슬픈 꿈같이 듣고는 새벽이 되면 별과 함께 하나씩 하나씩 사라질 것입니다. 그리하는 동안에 사실은 나의 꿈도 깨어지고 내 사랑하는 푸른 지평선도 잃어지는 것입니다. 나의 잃어진 지평선이란 게야 무엇 상글리라와 같은 허망한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금년 봄 일입니다. 내가 남방의 어느 화전민 부락을 찾아갔던 것입니다. 해발 3천 피트, 태양과 매우 가까운 곳이었나이다. 돌과 돌이 쌓여 오르고 바위와 바위가 거듭 놓여 칡과 등(藤)이 겨우 얽어매 놓은 그 위에 이 재에도 한 집, 저 등에도 한 집 건너다 보고 부르던 대답할 곳을 찾아가려면 그 긴 골짜기를 내려가서 다시 10리나 올라가는 길! 그곳에서 차조, 메조를 짓고 감자를 심고, 묏돌과 싸워 가며 살아가는 생명이 바람 속에 흔들리는 등불과 같던 것을 나는 다시 회억(回憶)해 보는 것입니다.

지구가 생겨서 몇 억만 년 사이 모진 풍상에 겨우 풍화작용으로 모래가 되고 그 위에 푸른 매태와 이끼가 덮인 이 척토(瘠土)에 '생명의 기원'의 원형 같은 그곳의 노주민(老注民)들과 한데 살면서 태양과 친히 회화를 하는 것으로 심심풀이를 하고 살아가며 온갖 고독이나 비애를 맛볼지라도, '시 한 편'만 부끄럽지 않게 쓰면 될 것을 그래 이것이 무엇이겠소. 날에 날마다 거리를 나가는 내 눈동자는 사람들의 얼굴을 향하여 고양이 눈깔처럼 하루에 몇 번씩 변해지는 것이오. 아무리 거슬리는 꼴을 보아도 얼굴에 드러내지 않는지 않는다는 것이 군자의 도량이라고 해서 사랑하는 것은 아니오. 그 군자란 말속에 얼마나한 무책임과 무관심이 반죽이 되어 있는 것을 알고는 있는 것이오.

그러나 시인의 감정이란 얼마나 빠르고 복잡하다는 것을 세상치들이 모르는 것뿐이오. 내가 들개에게 길을 비켜 줄 수 있는 겸양을 보는 사람이 없다고 해도 정면으로 달려드는 표범을 겁내서는 한 발자국이라도 물러서지 않으려는 내 길을 사랑할 뿐이오. 그렇소이다. 내 길을 사랑하는 마음, 그것은 나 자신에 희생을 요구하는 노력이오. 이래서 나는 내 기백을 키우고 길러서 금강심(金剛心)에서 나오는 내 시를 쓸지언정 유언은 쓰지 않겠소. 그래서 쓰지 못하면 죽어 광석이 되어 내가 묻힌 척토(瘠土)를 향기롭게 못한다한들 누가 말하리오. 무릇 유언라는 것을 쓴다는 것은 80을 살고도 가을을 경험하지 못한 속배(俗輩)들이 하는 일이오. 그래서 나는 이 가을에도 아예 유언을 쓰려고는 하지 않소. 다만 나에게는 행동의 연속만이 있을 따름이오, 행동은 말이 아니고, 나에게는 시를 생각한다는 것도 행동이 되는 까닭이오. 그런데 이 행동이란 것이 있기 위해서는 나에게 무한히 넓은 공간이 필요로 되어야 하련마는 숫벼룩이 꿇어앉을 만한 땅도 가지지 못한 내라, 그런 화려한 필자를 가지지 못한 덕에 나는 방안에서 혼자 곰처럼 뒹굴어 보는 것이오. 이래서 내 가을은 다 지나가고 뒤뜰에 황화(黃化) 한 포기가 피어있으니 어느 동무가 술 한 병 들고 오면 그 꽃을 따서 저 술 한잔에도 흩어주고 나도 한잔 마셔 보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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