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적서편(史的序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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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약 일천구백칠십년 전 아시아(亞細亞)의 중심이 되는 지나(支那)땅에는 여러 왕조(王朝)를 거치어서 전한 말엽(前漢末葉)―원시적 생활을 벗어나서 이제는 꽤 고등한 문화생활을 경영하고 있는 시절이었다.

그의 영토는, 서편으로는 파밀고원(高原)까지 교통로가 뚫리고, 동편으로는 뻗고 뻗어서 지금의 한반도의 대동강 유역에 해당하는 지대에 낙랑군(樂浪郡)을 두게까지 되었다. 그때에 압록강 상류 고구려현(高句麗縣)에서 고주몽(高朱蒙)이라 하는 청년을 임금으로 삼아가지고 한 개 새로운 나라가 일어났다. 민족 계통으로는 한(韓)족이었다. 그 발상지의 이름을 따서 나라 이름을 '고구려'라 하였다. 날쌔고 총민한 민족으로서 그의 영토는 차차 넓어가서, 어느덧 압록강 유역 전부를 영토에 집어넣어 한(韓)나라 본토와 낙랑군의 연락을 끊은 뒤에 낙랑군까지 삼켜버리고, 남으로 뻗어서는 한강 유역까지 내려가고, 동으로는 지금의 북한의 전부와 간도(間島)지방과 동시베리아까지 강역 안에 넣고, 북으로는 송화강을 넘고 지금의 신경(新京)·농안(農安) 둥지가 전부 고구려 영역이요, 서쪽으로는 요하(遼河)를 지나서까지―사실에 있어서 동방의 대제국을 이루었었다. 지나에서는 전한(前韓)을 지나서 후한(後漢)·위(魏)·진(晋)·송(宋)·남북조(南北朝)·수(隋)·당(唐),―무릇 왕조가 바뀌기를 칠팔회나 거듭할 동안, 위연(魏然)이 반도의 북부와 만주에 점거하여, 동진(東進)하려는 지나의 세력에 방호벽이 되어 문화와 국위(國威)가 아우른 대제국이 되어 있었다. 이 고구려의 지족(支族)으로, 지금의 한반도의 서남쪽 지역을 점거하고 있던 나라로 백제(百濟)가 되었다. 북쪽에서 고구려가 흥기하는 것과 거의 때를 같이하여(지금의 한반도의 동남쪽 지역에) 신라(新羅)가 일어났다.

인간세계에 종주(宗主)로 자인하고 있는 지나에서는, 자기 나라에서는 그 사이 여러 번을 왕조(王朝)가 바뀌었으나 동쪽에 웅거해 있는 세 나라―고구려와 백제와 신라―에 대하여 종주권(宗主權)을 갖고 싶은 야욕만은 어느 왕조를 물론하고 단념하여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워낙 고구려의 힘이 세기 때문에, 누차 고구려를 건드려보았으나 그 몇 번을 실패의 역사만 거듭할뿐더러, 도리어 고구려에게 정벌을 당하고 영토를 침식당할 따름이었다. 신라와 배제는 위치상 고구려를 거쳐서야 갈 수 있느니만큼, 고구려를 거꾸러뜨리지 못하고는 역시 건드릴 수가 없었다. 고구려는 지나에게 대하여는 커다란 암종이었다.

이렇듯 고구려와 지나의 쟁패전 칠백년―수(隋)나라는 고구려 정벌 실패가 동기가 되어서 드디어 나라까지 넘어지고 당(唐)나라가 섰다.

당나라는 무력만으로 고구려를 거꾸러뜨릴 수가 도저히 없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먼저 신라와 접근을 하였다. 신라는 나라가 미약하기 때문에 늘 고구려며 백제에게 협위(脅威)를 받던 터이라, 당나라가 악수를 청할 때에 흔연(欣然)히 응하였다. 그리고 고구려가 서쪽으로 육로(陸路)만 경계하고 있을 동안 몰래 해로(海路)로 대군을 신라로 옮겨서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이 일거에 백제의 도성을 무찔렀다.

북쪽은 고구려에게 보호를 받고 있고, 서와 남은 바다요, 동쪽은 약국(弱國) 신라며 가락 등 밖에 없는지라 안심하고 있던 백제는, 이 나·당 연합군의 일격에 사직(社稷)은 드디어 넘어지고, 국왕은 잡혀서 당나라고 가고, 당나라의 굶주린 군사들의 욕을 피하기 위하여 많은 궁녀들은 벼랑(후일 '낙화암'이라 일컫는)에서 사자수[泗?水]에 떨어져 죽고, 백제의 구역(舊域)에는 당나라가 도독부(都督府)를 두었다.

신라는 인적(隣敵)을 깨뚤기 위하여서는 당나라의 정삭(正朔)을 받들기조차 주저하지 않았다. 이제는 당나라는 동이(東夷)중에 신라와 백제를 호령하게 되었으매, 남은 자는 고구려 하나 밖에는 없었다. 당나라는 신라에 호령하여 일변 남쪽에서 군사와 군량을 나누어서 고구려이 남쪽을 엄습(掩襲)하는 동시에 서북쪽으로는 이적(李勣)등에게 대군을 인솔케 하여 고구려를 남북에서 쳤다.

고구려도 드디어 망하였다.

백제도 망하고 고구려도 망하고―이 반도와 그 북부의 접속지인 요하(遼河) 이동엔 국체를 갖춘 자는 오직 신라 한가 남아서, 동으로는 바다를 건너서 일본과 교제를 하며, 서쪽로는 당나에 경의를 표하고 있었다.

이백 수십년 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출발(出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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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독(都督)영감 계신가?"

여기는 신라국의 관할인 광주 도독부(光州都督府)를 주관하는 도독의 사택이었다. 말위(馬上)에는 한 여남은쯤 난 소년이 타고 있고, 그 소년에 배종(陪從)해온 시종이 이댁 하인을 불러서 통지를 한다.

"네이 계시옵니다."

"부엿(扶餘)댁 도련님 견훤(甄萱)아기께서 영감께 잠깐 뵈옵겠다고 여쭙게."

"네이."

하인은 들어갔다. 하인이 들어간 동안, 소년은 말에서 내려 아무 표정도 없는 얼굴로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들어갔던 하인이 나왔다.

"들어옵시랍니다."

"음―."

배종하여 온 시종이며 하인배들은 중대문 밖에 멈추어두고 소년은 혼자서 사랑으로 들어갔다. 도독은 댓돌 위에까지 나와서 이 소년 귀인을 맞았다.

주객(主客)은 사랑에 마주앉았다. 견헌의 인사가 끝난뒤에 용건(用件)이 화두(話頭)에 오르게 되었다.

"어떻게 왕림하셨습니까?"

"네, 다르이 아니라 부여 웅진(熊律) 방면에 약 일삭(一朔) 한하고 길을 좀 떠나야겠는데 그 증단(證單)을 한 장 해줍시사고 왔습니다."

신라와 당나라가 연합하여 백제를 무찌르고, 임금 의자왕(義慈王)을 당나라고 잡아간 뒤에 공식으로는 백제는 망한 셈이었다. 그러나 의자왕이 당나라로 잡혀간 뒤에는 태자 융(隆)이며 백제국민들이 이리저리 쫓겨다니면서 백제 복벽(復?)운동을 끊임없이 하였고, 그때 일본에 가있던 백제 왕자 풍(豊) 등도 또한 귀국하여 칭왕(稱王)을 하며 백제 재건에 퍽이나 노력하였다. 그 때문에 백제 구역(舊域)을 관할하는 당나라 도독이며 그 뒤를 맡은 신라관원들은 백제 왕족의 거래를 엄중히 단속하고, 관할 구역이 다른 곳으로 가려면 반드시 그곳 도독의 증단(證單)을 가져야만 통과 혹은 통행케 하였다.

백제 망한 지 이백수십년―지금은 그럴 필요를 느끼지 않지만, 제도가 그냥 남아 있느니만큼, 백제 왕족들은 여행을 하려면 반드시 증단을 도독에게 받는 것이다.

백제 왕족으로―더우기 태자 융(隆)의 정통갈래의 팔대손인 부여 아자개(扶餘阿慈介―백제 시조 온조(溫祚)왕이 부여 계통이니만큼 성씨를 부여라 하였다)의 아들인 견훤(甄萱)은 그의 거주하는 광주 이외에 가려면 신라 관원의 증단이 필요하다.

"어느분이 가시렵니까?"

"시생(侍生)이―."

도독은 뜻않고 소년을 바라보았다. 여남은 살난 소년이 몸소 웅진·부여 등지를 간다는 것이 너무도 과한 일이므로….

소년은 도독의 눈이 자기에게 부어져 있는지 어떤지 전혀 무관심한 듯한 얼굴이었다. 소년이라 보기 힘든 억센 이마며 눈이며 입이며 얼굴 전면―무엇을 생각하는지 혹은 아무 생각도 없이 앉았는지, 명랑한 편보다 오히려 음울한 편에 가까운 얼굴로 뚱하니 않아서 자연적으로 마주 보이는 담벼락을 바라보고 있다.

"용무(用務)는?"

"성묘(省墓)차올씨다."

"혼자 가십니까, 혹은 문중 동행하실 분이라도 계십니까?"

"환자 갑니다."

"혼자서 어떻게…?"

"이 밝은 세상에 혼잣길이 무서울 것이 있습니까? 도둑을 만나면 호령해서 쫓고, 호랑이를 만나면 쏘(射)고―아무 염려 마십쇼."

염려가 아니라 기이하여 물은 것이다.

때는 신라 경문왕(景文王) 십사년 을미(乙未), 당나라로 따지자면 건부(乾符) 이년, 지금으로부터 약 천삼십여년 전―아직 여름이라기에는 이르고 봄이라기는 좀 늦은 절기였다.

도독은 잠시 더 소년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좀 있다 하인을 도독부로 보내시면 해두었다가 드리지요."

하고 쾌히 승낙하였다. 사실에 있어서 증단이니 무엇이니 하는 건 지금은 단지 제도가 그냥 있으니 그냥 시행하는 것이지, 엄하지도 않고, 언제든 '해줍시사'하면 내어주는 것이었다.

"그럼 조금 있다가 하인을 보내오리다."

하고 소년은 그 자리를 일어섰다.

아직 도독이 공청에 나가지 않고 자댁에 있는 대였으니까, 시각으로 보자면 조반 직후쯤이었다.

견훤이 하인을 도독부에 보내서 증단을 찾아온 것은 낮이 거의 된 때였다. 견훤은 증단을 가지고 아버지가 거처하는 사랑으로 들어갔다.

혼자 앉아서 무슨 책을 읽고 있던 아버지는 견훤이 들어오는 것을 한 순간 쳐다보고 다시 눈을 책에 부었다. 그 맞은 편에 견훤은 가 앉았다. 그리고 말 대신으로 아버지의 앞으로 증단을 내밀었다.

아버지는 힐끗 증단을 보았다. 그리고 다시 눈을 책으로 돌리면서 물었다.

"어디 가려느냐?"

"네?"

"어디를?"

견훤은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침묵….

"아버님!"

잠시 뒤에야 찾았다. 아버지는 그냥 책에서 눈을 떼지 않는다.

"응?"

"아버님! 저 집에 비장해 두신 품칼을 제게 주세요."

아버지는 홱 하니 눈을 책에서 들었다. 적지아니 놀란 모양이었다. 아들의 얼굴은 표정이 없다. 무슨 일(기쁜 일 슬픈 일 놀라운 일을 막론하고)을 만날지라도 무표정한 얼굴은 지금도 여전하였다.

"그것은 왜?"

아들은 대답 대신으로 눈으로 증단을 가리켰다. 그러나 증단이 설명하는 바는 단지, 성묘차로 웅진, 부여 방면으로 부여융(扶餘隆)의 직손(直孫) 견훤(당년 九세)이 약일삭 한하고 돌아온다는 것을 말할 뿐이요, 증단을 발행한 연월일은 오늘―상지(上之) 십사년 을미 사월십일―로 되어 있을 뿐이었다. 아버지는 다시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성묘에 품칼은 무얼하느냐?"

"아버님!"

견훤의 목소리는 지극히 작았다.

"다시 시하에 돌아올 날이 있을지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아버지는 한참을 아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들의 말을 알아들었다.

"오오, 나서려느냐?"

아버지의 목소리도 아들이나 일반으로 듣기 힘들도록 작았다.

"그래 언제 떠나려느냐?"

"내일 동트기 전에 떠나겠습니다."

"수하(手下)는 누구를 데리고!"

"혼자서 떠나겠습니다."

"네 힘이 넉넉할 듯싶으냐?"

"모르겠습니다. 장차 기르겠습니다. 십년, 이십년, 오십년―한(恨)을 품고 넘어지든가 백제국을 재건하든가 둘 중에 한 가지의 끝장을 보고야 말겠습니다."

아버지는 머리를 숙으렸다. 한참을 감개무량한 듯이 잠자코 있었다.

"야, 너까지 아홉 대(代)째로다. 대대로 벼르기만 했다. 네 대에 비로소 길을 떠라는구나, 떠나라! 성공해라. 하늘 아래 너 하난 줄 굳데 믿어라. 너보다 높은 이는 하늘 하나―온 천하가 네 아랫사람이라는 신념을 굳게 가져라. 너를 호령할 자는 하늘밖에 없으시다. 알겠느냐?"

"네 알겠습니다."

"부자의 연(緣)도 오늘로 끝이로다. 이후 언제든 견훤(甄萱)의 손으로 백제국이 재건되었다는 소문이 들리면, 이 늙은 애비가 요행 죽지 않고 살아 있다면 그때 네 발아래 가서 꿇어 절하마. 너와 내가 군신지간(君臣之間)이 되기 전에는 다시 애비를 만날 생각을 하지 말아라."

"저도 그 생각이올씨다. 장차 그 품칼로 신라 임금을 자진(自盡)케 하고, 제 수하 장졸로 신라 궁실 비빈(妃嬪)들을 욕보여서 열대 조상님 의자왕과 낙화암의 원수를 눈앞에 갚기 전에는 다시 아버님을 뵙지 않겠습니다."

"음, 밤에 제성대(帝星臺)에서 제사나 드리고 그리고는 떠나거라."

아버지는 벽장을 열었다. 무슨 커다란 궤짝을 꺼내었다. 단단히 잠근 쇠를 열고 뚜껑을 들치매, 그 안에는 또 궤짝이 들어 있었다. 이렇게 하기를 사오중(重)―맨 마지막에는 비단으로 싼 무슨 물건이 하나 나왔다. 겉을 싼 비단 보자기를 펴니까, 그 속에서 나온 것은 금과 은으로 장식한 한 개 품칼이었다.

아버지 아자개(阿慈介)는 조심 조심히 칼날을 자루에서 뽑았다. 명공(名工)이 만든 칼인 모양으로서 번쩍 광채가 난다. 견훤도 뜻하지 않고 한걸음 무릎으로 앞으로 다가앉았다.

한참을 그 칼을 굽어보고 있을 동안 아자개의 눈에서는 커다란 눈물이 한 방울 두 방울 떨어졌다. 평생에 무표정한 견훤의 눈에도 눈물이 한거풀 보였다.

"이 칼로 목을 찌르시고…."

―지금으로부터 이백 수십년 전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이 밀물같이 백제 서울 부여로 몰려 들어와서 이를 맞아 싸우다 싸우다 못해 임금 의자(義慈)는 당나라로 잡혀간 뒤, 태자 융(隆)이 백제의 잔민들을 모아갖고 고국복벽 운동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 잔당의 세력이 신라와 당나라의 합친 힘을 도저히 당할 수가 없었다. 융은 신라 임금(태종 춘추왕)과 장군 김유신(金庾信)의 앞에 사로잡히어 나아갔다. 얼마나 욕을 보았으랴!

"죽어라!"

"자진(自盡)해라."

망국왕에게 대한 승리자의 명령으로 스스로 찼던 품칼을 뽑아 자기 목숨을 끊을 때 얼마나 그 한이 컸으랴!

"자, 이 칼을 물려받아라. 이후 요행 일이 뜻대로 되는 날이라도 결코 신라 임금을 난군 중에 잃지 말아라. 네 눈 앞에서 이 칼로 자진케 해라. 원힌이 크다. 원한이 크면 보수도 크나니라. 나라와―생명과―음―."

아버지가 다시 싸서 주는(원한 큰) 품칼을 견훤은 받아 몸에 간직하였다. 그런 뒤에 아버지에게서 물러나왔다.

아버지 아자개는 아들이 내일 성묘차로 길떠난다는 뜻을 집안 사람들에게 알리었다. 그러나 떠나는 진의(眞意)는 제 아내에게조차 말하지 않았다. 말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못한 것이었다. 말하지 못할 종류의 것이었다.

내일 길떠난다 하지만 견훤은 아무 준비도 않고 있었다. 단지 자기가 사랑하여 타던 준총을 하인에게 명하여 잘 씻기와 잘 먹이기와 가장 든든한 안장을 메우기를 명한 다음, 자기는 여전히 다른 말을 타고 벌에 나가서 달리며 쏘며 진일을 보냈다. 다시 돌아올 기약이 없는 길을 떠나려는 사람이라고는 볼 수가 없었다.

그날 고스란히 밤은 깊어갔다.

초열흘, 꽤 이지러진 달은 고요히 잠든 누리를 비쳐주고 있었다.

이 광주의 북쪽을 마치 병풍같이 두른 언덕에도 어둠침침한 달빛은 고요히 내려비추고 있다.

깊어가는 밤―자시(子時, 밤 十二時)―축시(丑時, 새벽 一時).

흙으로 된 그 언덕에 광주 정북쪽으로 연한 중턱쯤 한 커다란 바위가 있다. 높이가 한 길쯤, 남북이 열 자쯤, 동서가 이십 척쯤 되는 깍은 듯이 네모난 바위로서, 대체 그 바위가 본시부터 거기 있었는지, 누가 거기 옮겨다 놓은 것인지 모르지만, 흙으로 된 이 언덕에 그러한 바위가 천연적으로 있다 하는 것도 곧 머리를 끄덕이기 힘든 일이었다. 그렇다고 그 작지 않은 바위를 인력으로는 도저히 옮길 수가 없겠는지라 역시 천연적으로 있는 것이라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그 바위는 누구가 명명(命名)하였는지는 모르지만 '제성대(帝星臺)'라 불리웠다.

빈틈없이 어둠침침히 비취는 달빛은 이 제성대에도 내려비취어서 이슬머금은 바위는 가까이서 보면 여기저기 푸르게 번뜩인다.

첫여름의 밤이었다. 벌써 수렁에서 까고 나온 벌레들의 소리가 여기저기서 애연스럽다고 형용하리만큼 간간히 들렸다.

문득 저편 언덕 밑에 사람의 그림자가 어둠침침한 달빛 아래 나타났다. 하나가 아니요 둘이었다. 하나는 크로 하나는 작은 폼이 어른과 아이인 듯싶었다.

벌레소리가 그 두 사람의 통과함을 따라서 일변 잦고 일변 일었다. 그러한 가운데를 묶묶히 걸어서 그들은 제성대 앞에까지 이르렀다.

과연 어른과 아이였다. 어른은 아자개였다. 아이는 견훤이었다.

제성대 앞에까지 이른 그들은 손에 들고 온 보자기를 잔디밭에 내려놓고 폈다. 주(酒)·과(菓)·포(脯)의 간단한 제찬이었다.

준비해가지고 온 비로 제성대를 깨끗이 쓴 뒤에 그들은 비로소 입을 열었다.

"아버님!"

"음, 지성으로!"

부자지간의 대화는 이것뿐―다시 말이 끊어졌다.

가묘(家廟)에도 하직을 하고 나왔다. 장차 꾸미려는 커다란 일을 이 이름이 상서로운 제성대에 빌고 출발하려는 것이었다.

"아버님, 이 뒤 성공하는 날이 있다 하면 이 대(臺)에서 첫 잔치를 열겠읍니다."

"그런 좋은 날이 오면, 그때까지 그냥 수(壽)가 있다면 이 늙은 머리를 제일 먼저 네 앞에 숙으려 절하마."

빌기를 다하고 언덕을 내려오매 (단지 성묘차로 떠나는 줄 아는)하인은 말에 노자를 듬뿍히 실어 한길에 등대하고 있었다.

견훤은 말에 올랐다.

"아버님 안녕히 계세요."

"오냐, 몸성히 가거라. 몸 성하지 못하면 아무 일도 다 틀리느니라."

말은 우렁찬 숨을 쉬었다. 견훤이 고삐를 약간 느꿀 때에 말은 긔 힘있는 다리를 뚜거덕 뚜거덕 북쪽을 향하여 옮겼다.

마상의 손년은 다시 뒤를 안돌아보고 천천히 말을 몰았다. 그의 뒷모양을 바라보는 아버지는 아들의 양이 온전히 어둠침침한 가운데로 사라지기까지 마치 거기 못박아 놓은 사람같이 서서 전송하고 있었다. 마음으로는 한없이 한없이 아들의 장래를 축복하였다. 예사 사람이 마음내지 못할 거대한 일을 감행하고자 떠나는 아들의 장래를….

견훤은 광자땅을 벗어나서는 신라 관원의 증단도 찢어버렸다. 서로 다 얼굴을 아는 광주이니 증단도 쓸데있지만 다른 곳에 가서는 아주 쓸데없는 종잇조각일 뿐더러, 그 종이가 어떻게 남의 눈에 띄어 신분이 알리면 도리어 귀찮기 때문이었다.

낡은 온갖 겨레를 다 벗어버리고 단지 의자왕의 제십대손이라는 관념 하나만을 가지고 목적 관철에 힘쓰자, 불행 성공하기 전에 넘어지는 날엔 한 개 길가의 주검이 될 것이요, 오행 일이 바로 되면 넓게는 백제왕국의 재건이요, 개인적으로는 임금의 신분을 취득하여 천만세까지 누리고 또 누리자.

수일 후에 견훤의 모양은, 부여 사자수[泗?水]가에 나타났다. 거기서 고로(古老)를 하나 붙들어가지고, 전해내려오는 백제 망국의 전말이며 낙화암의 비극 전설을 들었다.

굽어보면 용용(溶溶)히 흐르는 사자수는 이백젼 전 그날도 오늘과 같이 말없이 흘렀으리라. 말없이 흐르는 저 물에 몸을 던진 삼천궁녀의 원한은 지금 어디 쌓여 있나!

몸을 빼쳐 물에 던진 죽음의 원한도 원한이려니와, 미쳐 빼치지 못하여 굶주린 당나라와 신라 장졸에게 욕보고 죽은 그 원한과 억분은 또 얼마나 하였으랴!

이를 설명하는 백제유민인 고로(古老)의 눈물이 흐를 때, 욕본다는 의의에는 분명한 해석을 못 내렸지만, 견훤의 무표정한 얼굴에서도 드디어 눈물이 나왔다.

온갖 사물(事物)이며 이치(理致)에 대하여 인식·판단등의 힘이 매우 조숙(早熟)한 견훤은 당시(이백여년 전)에 여기와 및 이 근처를 무대로 하여 일어났을 참극들을 서언히 머리에 그려볼 수가 있었다. 당나라와 신라 군사들에게 불타버린 옛날의 대궐 터에 그냥 남아 있는 주춧돌이며 깨어진 기왓장에서 옛날의 웅대함과 강성함을 엿볼 수가 있느니만큼, 의자왕이 한낱 죄인같이 묶이어 당나라 서울로 갈 때의 광경이 더욱 눈물겨웠다.

견훤은 말을 타고 진일을 백제의 옛터를 돌아다니며 조상의 위업을 상상하여보고 조상의 패망을 통고하였다.

그날 밤을 성내에서 묵은 뒤에 이튿날 해뜰 때쯤은 견훤의 모양은 벌써 부여에서 수십리 밖 벌판으로 말을 달리고 있었다.

'이 소년왕손에게 대한 사상(史上) 기록은 매우 모호하다. 그의 출생에 대하여서도 어떤 책에는 상주 가은현(尙州加恩縣)에 사는 농부 아자개의 아들이라 하였으며, 다른 어떤 기록에는 광주(光州)에 사는 부잣집 딸이 자의동자(紫衣童子)로 화한 지렁이(?蚓)와 밀통해 낳은 바란 아주 고약한 것까지 있다. 짐작컨대 그의 이름이 진헌(여기선 교과서에 준해'견훤'이라 했음〓編輯者註)이라 발음이 지렁이와 흡사하므로 어렸을 때 아이들끼리의 별명이 지렁이었었는지도 모른다. 하여간 후일 기록을 남긴 사람이 다 신라의 계통 사람이라 견훤에게 호의를 가질 자는 없었으므로 그의 위대한 백제 복벽(復?)운동을 한낱 도둑행사로 곡필(曲筆)했을 것이다.'

부여에 들려서 고국의 멸망을 통곡한 후에 방랑의 길에 오른 견훤은 그로부터 십여일 뒤에 지리산맥(智異山脈)이 험준한 골짜기를 헤매고 있었다.

말은 명마, 기수도 또한 명기수인 이 좋은 컴비는 험한 산로를 평지인 듯 그냥 말에 탄 채로 올라가며 내려가며 방황하고 있는 것이었다.

시간을 기다리는 차였다. 험하기로 험하려니와 수풀과 고목이 우거진 이 산간에 절간이라도 없는가 하고 찾는 중이었다. 절간이 있다 하여도 보이지 않을 것이다. 저녁짓는 연기가 하늘로 올라가야 그 아래 절간이나 인가가 있는 줄을 알 것이다. 저녁짓는 시간을 기다리면서 한 걸음 두 걸음 더 기이 들어가는 것이었다.

깍아세운 듯이 산이 높은지라 해는 벌써 산 뒤로 숨은지가 오래다. 그러나 좀체 저녁 연기가 오르지를 않는다.

"빈 산인가?"

이만큼 큰 골짜기에 절간 하나, 암자 하나, 인가 하나가 없을까? 일이 실패할지라도 낙망할 줄을 모르는 천성을 타고난 이 소년은 그냥 그대로 앞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이윽고 한 줄기 보였다. 우거진 나무숲 위로 곧추, 단 한 줄기의 연기가 하늘로 뻗히고 있다.

목적하였던 바를 발견하였지만 소년은 그다지 반기는 듯도 않았다. 말머리를 그쪽으로 돌렸다.

과연 좋은 말이었다. 깍아세운 듯한 절벽을 올라 뛰고 혹은 더듬으며, 말은 주인이 고삐를 돌리는 대로 서슴지 않고 올라갔다. 소년도 말안장에, 마치 평지에 앉은 듯 까딱없이 앉아 있다.

거기까지 이르러보니 단 한 간의 암자였다. 암주는 백발―이라기보다 머리털은 전혀 없고 흰 수염을 기다랗게 느리운 늙은 중이었다. 노승은 말발소리를 듣고 저녁짓던 손을 멈추고 기이한 듯이(차차 가까이 노는) 소년과 말을 바라보았다.

견훤은 입속으로 혀를 찼다. 벌써 기대에 어그러지는 모양이었다. 견훤은 말에서 내려서 고삐를 끌고 가까이 갔다. 먼저 입을 열었다.

"이 심산까지 웬 아이냐?"

"'웬 분이오니까?' 해 보시지요."

노승의 얼굴에 잠시 당황한 기색이 나타났다. 그 뒤에는 미소―

"그래 웬 분이 오니까?"

"어진 스승을 뵈려 다니는 구도소년(求道少年)이 올씨다."

"빈도(貧道)에게 도를 구할 생각은 없소이까?"

"스님께 구할 바는 오늘 저녁과 내일 아침의 반염과 오늘 하룻밤을 지낼 자리 뿐이올씨다."

"어렵잖은 일이니, 구하는 대로 해드릴 터이지만, 맹수(猛獸)에게 밤새 말을 물어가지 말라는 부탁은 아마 벌써 하셨겠지요?"

"맹수가 있습니까?"

"허어, 아직 연천(年淺)하시군, 맹수가 이런 험산에 살지 않으면 어디서 삽니까?"

"그럼 말도 암실 안에서 밤을 지내도록 한 가지 더 구합니다."

"자리가 좁을 걸요."

"나 잘 자리에 말을 세우고 내가 말 아래서 자면 그 자리가 아니오니까?"

노승은 잠시 소년의 얼굴을 우러러보았다.

"도령을 가르칠 만한 높은 스승은 구하기 힘드오리다."

드디어 항복하였다.

"도령의 구하는 도은 어떤 도이오니까?"

"왕자지도(王者之道)―그 외에 잡술(雜術)로 병법·무술―소년답지 않게 식량이 크오니 닷 되만 더 끓여 주십시오. 말은 넉넉히 먹였으니 생각 마시고. 자 비룡(飛龍―말 이름)아, 우리는 먼저 들어가자."

견훤은 말을 끌고 암자 안으로 들어가서 웃목에 말을 세우고 자기는 말의 배 아래 들어가 앉았다.

"너는 오늘밤 서서 지내야겠구!"

배 아래서 손을 덜어 말의 가슴을 두드려 주매, 말은 기쁜 듯이 코를 벌룩거리었다.

사월에서 오월로 유월로 칠월로―향간에서 이름난 학자의 문을 두드리며 고덕의 칭송이 높은 도승을 찾으며, 또는 이름없이 숨어서 도를 닦는 고사를 찾으며, 산으로 평지로 견훤의 무정처한 방랑은 그냥 계속되었다.

그 칠월에 국상이 났다. 신라 경문왕이 승하를 한 것이었다.

그의 방랑의 길이 더듬고 또 더듬어서 동수(桐藪)까지 이른 때였다.

좌우 편으로 산을 끼고, 가운데는 개천이 흐르는―험준하다 할 수는 없지만 평평하다고도 할 수 없는 골짜기에서 여전히 좋은 스승을 찾아 돌아다니던 견훤은, 여름날 더위에 덜민 말을 씻기 위하여 개천가로 내려갔다.

개천에서 자기도 멱감고 말도 씻겨서, 더위를 식히고 있던 견훤은 문득 이 개천 상류에서 흘러내려오는 산채(山菜)를 보았다 우연히 개천에 흘러든 것이 아니었다. 뒤따라 내려오는 품이 분명히 상류에서 누가 산채를 씻고 있는 것이었다.

견훤은 산채의 주인을 알아보고 싶었다. 벗었던 옷을 다시 주어 입고 내렸던 안장을 다시 메우고, 다시 말에 올라서 상류 쪽으로 찾아 더듬었다.

얼마 올라가지 않아서 견훤은 산채 주인을 만났다. 상좌 아이였다. 새빨갛게 깎은 머리를 여름날 햇빛에 반짝이며 개천가에 앉아서 산채를 씻고 있는 것이었다.

견훤은 말에서 내려 말을 끌고 차차 가까이 갔다. 처음엔 개천의 물소리 때문에 말 발자취소리를 못들었는지 상좌는 견훤이 꽤 가까이까지 이른 때야 비로소 머리를 뒤로 들어 보았다.

열 살이 약간 넘을 듯하였다. 애꾸눈이었다.

애꾸눈이 상좌는 견훤에게 그다지 호기심을 안 일으킨 모양이었다. 이런 산간에 이런 소년이 단 혼자서 말을 타고 들어온다는 것이 누구에게든 호기심을 일으킬 만한 일인데, 이 애꾸눈이는 그다지 호기심도 안 일으킨 모양으로, 다시 머리를 앞으로 씻던 산채를 그냥 씻는다.

견훤도 걸음을 멈추고 우두커니 서버렸다. 고삐를 잡은채 태평무사한 사람과 같이―그것은 어떻게보면 상좌가 산채 다 씻기를 기다리는 듯도 해보이고, 어떻게 보면 길가다가 잠시 선 채로 다리쉼을 하는 듯도 하였다.

기이한 광경이었다. 산채 씻던 소년 중은 뒤에 사림이 온 것을 분명히 보았건만 저 할 일만 하고 있고, 말 끌고 온 소년은 상좌를 목적하고 왔을 것이지만 상좌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듯이 서 있고, 산에서는 뻑꾸기만 연하여 울고, 소남 끝에는 바람이 불고….

이윽고 상좌는 산채를 다 씻었다. 씻어서는 소쿠리에 담아가지고 물이 뚝뚝 흐르는 것을 옆에 끼고 돌아섰다. 거기서는 외발자국 길이 있는데, 그 길에 견훤이 말고삐를 잡고 서 있는 것이었다. 상좌는 그리로 향하여 왔다. 자기가 오노라면 견훤이 당연히 비켜줄 줄로 믿는 듯이….

상좌는 견훤에게서 세 발자국 떨어진 곳에 와서 섰다.

서서는 견훤은 보지 않고 그의 애꾸눈으로 견훤의 말을 기웃이 보았다.

"거 말 참 좋다."

드디어 입을 열었다. 견훤이 즉시로 응하였다.

"눈이 절반이라 보기도 절반만 보이는 모양이군. 사람은 안보이고 말만 보이느냐?"

상좌는 힐끗 견훤을 보았다.

"음 사람도 좋군!"

"눈 만으로도 너보다야 곱이나 낫겠지."

이 두 번이나 자기의 병신 눈에 대하여 조롱을 받은 소년상좌는 꽤 성이 난 모양이었다. 또다시 힐끗 견훤을 보았다. 단 한 개의 눈이 노여움으로 불붙었다.

"이자식!"

물이 뚝뚝 흐르는 산채 소쿠리를 그 자리에 놓았다.

"그래 눈 얘기는 왜 두 번씩이나 한단말이냐!"

견훤은 싱그레 웃었다.

"원망을 하려면 너의 부모님께나, 그렇지 않거든 하나님께 해라."

와락

덤벼드는 애꾸는이와 막아내는 견훤과―두 소년의 격투는 거기서 맹렬히 시작되었다.

힘이 비슷비슷하였다. 힘이 비슷한지라 싸움도 비슷하였다. 그러나 비슷하다고는 하지만 둘이 다 좀체의 어른으로도 당키 힘든 힘인 듯 싶었다. 두 소년의 싸움 때문에 부러져나가는 나무며 굴러나가는 돌맹이로 보아서 둘이 다 좀체의 힘이 아니었다. 견훤이 타고온 말은 한 걸음 물러서서 주인의 싸움은 본체만체 저의 꼴만 뜯어먹고 있었다.

둘이 다 기진맥진하여 이젠 더 싸움을 계속하지 못하게 되어서야 싸움은 끝이 났다. 그러나 어느 편이 항복을 하여 끝난 것은 아니었다.

"그자식 제법일세."

넘어져 글려내려가다가 바위에 걸려서 그 바위를 의지하며 비슬비슬 일어서면서 다시 덤벼들 준비를 하며 이렇게 중얼거리는 애꾸눈이에게 견훤이 다시 한번 눈을 들추어,

"이자식, 다시 덤벼들다가는 성한 눈조차 버린다. 이젠 그만둬라."

씨근거리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 이 싸움의 마지막이었다.

"또 눈?"

"왜 남달리 병신 눈을 가지랬느냐?"

"요것을!"

"좀체 요것이 아니란다."

이리하여 완력 싸움은 다시 말 싸움으로 변하였다.

"넌 대체 어디 물건이냐?"

"너는 대체 어디 물건이냐?"

서로 물었다.

"나 말이나? 나는 저 말(견훤이 자기가 타고 온 말)온 데서 오신 분이다."

"나는 너희같은 구린내나는 농군과 달라, 적어두―적어두―."

뒷말을 못한다.

"적어두 어떻단 말이냐?"

"적어두 근본이 다르느니라. 야, 그래두 내 평생 처음읻, 너만한 자식은. 하니깐, 함께 우리 저리가서 저녁이나 한 끼 먹구 가거라. 하룻밤 자겠다면 자리도 빌려 주마."

"불감청이언정일세"

절간이라는 절, 암자라는 암자를 모조리 찾아 다니는 견훤이다. 이의(異義)가 있을 리가 없었다.

가는 길에 이렇게 물어보매,

"그만하면 열(劣)한 편은 아니지."

애꾸눈이의 대답은 이러하였다.

애꾸눈이의 이름은 선종(善宗)이요, 절 이름은 동화사(桐華寺)라 하였다.

선종의 말을 듣자면 자기가 이 절에 와 있는 것은 대저 임시요, 언제든지 좋은 곳이 있으면 다시 그리로 달려갈 생각이라 한다.

견훤은 그의 말에 대꾸만 하면서 말을 끌고 그의 뒤를 투들투들한 산길을 골라짚으면서 따라갔다.

아까 싸울 때에 주먹에 맞고 바위에 부딪고 하여 모두 붓고 부르트고 한 얼굴을 서로 바라보고 고소(苦笑) 하면서 아까와는 달리 의좋게 절에까지 갔다.

절에서 견훤은 먼저 선종의 신분을 알아보고 싶었다.

아까 싸울 때에 말말곁에나마 '근본이 다르노라'고 장담하던 선종의 신분을 알아보고 싶었다.

당년에는 과연 좀 색다른 근본의 주인이 민간에도 꽤 많았다. 백제와 고구려가 모두 칠팔백년간을 누리다가 망하였으니, 그 갈래로도 적지 않은 자손들이 민간에 헤어져 있을 것이었다. 가락(駕洛)국이며 그 밖의 작은 나라들의 왕손들도 지금은 전부 민간에 내려 있을 것이었다.

근 천년간을 누려 내려온 신라에도 박(朴)·석(昔)·금(金) 세 가지 성의 왕손들이 민간에 내린 자도 적지 않을 것이었다. 그러면 이 선종은 어떤 근본을 가진 소년이길래 자기는 근본이 다르노라고 호언(豪言)을 하고 있을까?

틈을 엿보아 견훤은 선종을 데리고 뒷산 으슥한 곳으로 갔다. 가서 알아보매 이 애꾸눈의 과거는 대략 이러하였다.

애꾸눈의 아버지는 이번에 세상 떠난 경문왕이었다.

경문왕도 본시 원갈래의 임금이 아니었다. 한낱 왕족이었다.

경문왕의 전왕인 헌안(憲安)왕은 아드님이 없고 그 대신 따님 두 분이 있었다. 그때 경문왕은 한낱 왕족으로 화랑(花郞)으로 있었으며 이름을 응렴(應廉, 或 應兼)이라 하였다.

응렴화랑이 국내 순시(國內巡視)를 하고 돌아왔을 때, 임금은 응렴을 위하여 임해전(臨海殿)에서 잔치를 열었다. 그리고 그때 (응렴은 당년 열다섯 살 났다)임금은,

"그래 그새 순시할 동안 네가 보고 좋다고 생각한 것이 무엇이?"

고 물어보았다. 응렴은,

"소신이 본중, 세 가지 좋은 것이 있었읍니다. 첫째로는 높은 집 자제가 건방지지 않은 것이옵고, 둘째로는 가멸은 사람이 사치하지 않은 것이옵고, 세째로는 세도가문에 교기 있지 않은 것이었읍니다."

고 복주(伏奏)하였다. 왕은 이 대답이 너무도 기특하므로 사랑스러워서, 당신에게 공주가 두 분이 있는데 마음대로 취하면 부마(駙馬)를 삼으마 허락하였다.

이 기꺼운 윤허(允許)를 듣고 돌아온 응렴화랑은 자기의 낭도(郎徒)들에게 그 소식을 전하였다. 그러니까 낭도중에 범교사(範敎師)라는 낭도가 응렴화랑에게 대하여, 그러면 두 공주 중에 어느 공주를 취하시겠느냐고 묻는다.

이것은 당찮은 질문이었다. 맏공주는 자색이 아름답지 못하고 괄괄하여 마치 사내와 같았다. 어차피 공주를 취하는 이상에는 자색이 아름다운 버금 공주를 취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응렴은 범교사에게 그대로 말하였다. 그랬더니 의외에도 범교사는 머리를 가로 젓는다.

"안됩니다. 맏공주를 취하십쇼."

"왜?"

"글쎄, 소인의 말씀을 들으십쇼. 그러면 장차 세 가지 좋은 일이 생기리다."

범교사는 응렴의 많은 낭도 중에 지혜 많기로 이름난 사람이었다. 이 범교사가 버쩍 우기므로 응렴은 부득이 맏공주를 택하기로 하였다.

응렴화랑이 왕의 맏사위 된 지 석 달만에 왕이 승하하였다. 왕에게는 아드님이 없었다. 윙위(王位)는 맏사위되는 응렬에게로 굴러왔다.

응렴이 드디어 신라왕이 되었다.

그때 범교사가 신왕께 달려와서 하례를 드렸다.

"전에 폐하 잠룡(潛龍) 시대에, 소신이 일찌기 세 가지 좋은 일이 있겠다고 하지 않았읍니까? 지금 그 세가지를 다 이루었사오니, 첫째 상공주를 맞으셨기 때문에 대행왕을 안심하시게 하셨고, 둘째 상공주를 맞으셨기에 오늘 이 높은 위에 오르셨고, 세째 지금 천승의 위에 계시오매 이전에 흠모하시던 버금공주도 어의(御意) 하나에 달렸읍니다."

왕은 즉위한 후에 작은 공주까지 제이 왕후로 맞았다.

그러나 이 임금에게는 아직도 사랑의 불만이 있었다. 이전 화랑 시대에 서로 사랑하던 처녀가 있었다. 임금은 그 처녀까지 부인으로 대궐로 맞아들이었다.

이전에 임금이 버금공주만 맞은 때에는 제일 왕후는 제이 왕후만 투기하였다. 투기의 대상이 그 하나 밖에 없었으므로…. 그런데 지금 웬 뚱딴지 민간에서 처녀 하나를 구하여 올리고보니, 이제는 제일·제이 두 왕후가 한편이 되어 성세를 합하여 새로 맞은 민간 색시에게 대항하게 되었다.

하늘은 이 사건을 더욱 복잡하게 하느라고 민간 색시의 몸에서 왕자까지 생기게 하였다.

제일·제이 두 왕후의 질투는 더욱 불타오르게 되었다. 더구나 임금이 그 새 왕자를 사랑하는 것을 볼 때에 당신네들의 지위까지 염려되어 더 근심스러웠다. 그래서 생각해낸 꾀가 일관(日官)을 시켜서 임금께 '그 왕자가 그냥 살아 있다가는 신라 사직이 위태롭다'고 모함을 하게 되었다.

임금은 종체 믿지 않았다. 그러나 일관·왕후·대신―연하여 같은 말을 하매 마지막에는 안 믿을 수가 없었다.

왕은 군사를 시켜서 그 민간색시와 및 그의 몸에서 탄생한 왕자를 죽이라고 분부하였다. 왕명을 받잡고 온 군사들에게 색시는 죽었다. 그러나 왕자는 왕자의 유모가 몰래 미리 빼낸 덕에 생명만은 부지되었다. 생명은 어떻게 보존되었지만 너무 서두르느라고 그만 실수하여 오른편 눈을 손까락으로 다쳐서 애꾸눈이가 되었다.

그 애꾸눈이 왕자가 즉 이 동화사의 상좌 선종이었다.

자기의 신분을 다 이야기하고 난 선종은 그 단 한 개의 눈을 들어서 견훤을 쳐다보았다.

"어떠냐? 그래 세상이 세상일 것같으면 너같은 것들과는 상종이나 할 신분이냐?"

견훤은 여전히 무표정하다.

"그렇지 세상이 세상일 것같으면 너같은 것은 벌써 십여전 전에 송장이 되어서 지금쯤은 해골도 남아 있지 않을 테니까, 상종이 다 뭐냐?"

견훤의 대답은 이것이었다.

이 대답에는 선종도 깜짝 놀란 모양이었다. 잠시를 퀭하니 견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래 왕자(王子) 자리 떼이구 중이나 되려구 왔으냐?"

견훤은 잠시 뒤에 다시 물었다.

"중? 눈깔이 둘이라도 쓸데없는 눈깔이로구나? 내가 끝까지 중으로 지낼 듯싶으냐?"

"그럼 지장(知庄)이냐?"

선종은 머리를 저었다.

"도독(都督)이냐?"

선종은 역시 머리를 저었다.

재상이나 화랑도 아니었다.

"신라왕―."

선종의 목적한 엉뚱한 야망은 이것이었다. 견훤은 탄식하였다.

"세상을 절반 밖에 못보는 네 치하(治下)에 있는 백성이야말로 가련하겠다."

그런 뒤에 한참 머리를 숙이고 손에 든 채찍으로 땅에 모슨 글을 쓰고 있던 견훤은 머리를 약간 들었다.

"야, 선종아."

"?"

"중 노릇이나 그냥해라."

"듣기 싫다."

"네게는 과해."

"듣기 싫어."

"이봐라. 네가 초대면인 내게다가―누구인지, 신분이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고 내게다가 네 신분을 다 이야기했지? 뿐더러 네 희망까지도 말했지? 내가 만약 웅실의 누구든가 화랑이든가 하면 단박에 이 칼이…."

하면서 견훤은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품칼을 비죽이 내어보였다.

"벌써 네 목덜미에 박혔을 게 아니냐? 너는 경망해 대망(大望)을 품을 자격이 없어. 중 노릇이나 끝까지 해라. 도승이 되면 그것도 다행이지만 그것도 어떨는지."

"요 배라먹을."

"자, 내려가자. 내 이담에 연(輦)을 타고 너의 절을 찾을 테니 그때 허리 부러지지 않게 조심해서 절해 맞아라."

"에끼."

두 소년은 일어섰다.

어느덧 소년들이 앉았던 산쪽은 벌써 햇볕이 없고 건너산만 비취고 있다.

봉우리에서 봉우리를 나는 새….

그 밤, 견훤은 선종과 한방에서 잤다.

자리에 들자 견훤은 곧 잠이 들었다. 그러나 한참 들었다가 곁에서 무엇이 바스락거리므로 깨어 보매, 선종이 일어나서 가만히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견훤은 그다지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뒷간에라도 가거니 하였다. 그러나 선종은 나가서는 꽤 한참을 지나서도 돌아오지 않는다.

기다리는 바람에 정신이 쇄락하여지고 정신이 쇄락해진 바람에 잠이 깨었다. 깨어서 한참이나 기다려도 선종은 돌아오지 않으므로, 혹은 이 절에서는 이런 밤중에 무슨 하는 일이라고 있는가 하여 다시 잠을 청하여 잤다.

이튿날 아침에 깨니까 절에서 무엇이 두런거린다.

"달아났어."

"그럴 녀석이야."

"남의 말까지 훔쳐가지고."

적지 않이 두런거리므로 나가서 알아보니, 선종이 어젯밤에 없어졌다는 것이었다. 뿐만아니라 견훤의 타고 온 말을 훔쳐 타고 달아났다는 것이었다.

중들은 견훤에게로 와서 연방 선종에게 대한 비평을 한다. 본시부터 좋지 못하던 애로서 중들과도 매일 싸움으로 일삼고 도둑질깨나 넉넉히 할 녀석이라고 떠들썩하였다.

견훤은 잠잠이 돌아섰다.

말을 잃은 것이 애석하였다. 망아지 적부터 손수 길렀다. 본시 종자도 좋거니와 망아지 적부터 손수 길렀으니만큼 깊은 정이 배인 말이다.

三·四년간을 손수 씻고 먹이고 닦던 말을 잃어버린 건훤의 얼굴은 여전히 무표정하였으나 마음으로는 적지 않이 쓸쓸하였다.

"병신 고운 데 없읍니다."

자기들에겐 책이 없는 일이지만 이렇게 미안한 듯이 말하는 중들에게 대답도 않고 견훤은 방으로 들어왔다.

견훤은 내심 혀를 찼다. 말을 잃은 것이 딱하였다.

앞으로 얼마나 더 가야 될지 알 수 없는 표랑의 길을 더듬는 몸으로 좋은 말은 반드시 있어야 할 것이었다. 몸에 지니고 나온 황금이 적잖으니 아무런 말이든 사자면 사지 못할 바는 아니지만 산간험로를 평지와 같이 걸어줄 명마는 구하기 힘들 것이다. 뿐더러 구하기 쉽고 어려움은 둘째로하고 비록 짐승이나마 망아지적부터 길러온 정의도 적지 않다.

"망할 녀석, 대망(大望)은커녕 쥐뿔도 못가질 녀석이다."

온 김에 이 절의 주지(住持)의 인품도 한번 보아야 할 것이다. 선종의 말을 듣건대 열(劣)한 편은 아니라 하니 열하지 않으면 얼마나 고덕한 승일까?

말 도둑맞은 조상을 하면서 들여다주는 조반을 먹고 견훤은 주지를 만나러 나섰다. 견훤은 주지를 만나지 않았다. 만나러 그 방 앞에까지 가매 안에서는 주지의 밥투정하는 소리가 들려나오는 것이었다.

힘들다.―힘들다. 사람 구하기가 과연 힘들다. 견훤은 어린 마음에 연해 탄식하였다. 한 사람의 스승을 구하기가 이렇듯 힘드니. 장차 적지 않은 협력자는 어떻게 구하나?

이 골짜기는 이제는 더 들어가야 절도 없고 암자도 없고 인가도 없다 한다. 그러면 인제는 다시 여기서 발을 돌이켜서 들어온 길을 도로 나가야 하나? 여기서 인가까지 가자면 하룻길이 넉넉히 된다. 말을 도둑맞았으니 이제부터는 걸어서 다닐밖에는 도리가 없었다.

견훤은 하룻밤 묵은 사례를 한 뒤에 절을 나섰다.

도선사(道詵師)

편집

절기로 따지자면 팔월 중순―가만히 앉아 있기에는 춥지도 덥지도 않은 가장 좋은 절기였다. 그러나 길을 걷기에는 아직 꽤 더웠다. 잃어버린 말이 무척이도 그리웠다.

그렇게 그립던 말을 견훤은 얼마 안가서 도로 찾았다. 견훤도 내심 혹은 그런 일이 생기지나 않을까 하였지만, 말은 자기의 주인이 아닌 애꾸눈이 소년의 명령에 복종을 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처음엔 얼결에 가자는 대로 가줬지만 아무리 가도 제 주인은 나서지 않고 새 사람이 그냥 등에 타고 있는지라 드디어 이를 거부한 모양이었다. 어떤 산모퉁이를 돌아설 때 견훤은 저 맞은 편에서 이쪽으로 향하여 맥없이 걸어오는 자기의 비룡(飛龍―말 이름)을 발견하였다. 무슨 일에 직면하든지 표정이 변해 본 일이 없는 견훤도 이때만은 환희로 말미암아 얼굴이 한순간 번득였다.

"비룡아!"

뜻하지 않고 손을 들고 고함쳤다.

주인을 잃고 맥없이 뚜거덕 뚜거덕 오던 비룡은 이 소리를 알아들었다. 발을 멈추었다. 귀가 뾰쪽 하늘로 향하였다. 맞은 편에서 자기를 향하여 고함치는 주인을 드디어 발견하였다.

호홍 비룡도 한번 소리높여 울었다. 그 다음 순간은 그야말로 비룡같이 주인에게로 향해 달려왔다. 바위·돌뿌리·구렁텅이가 모두 비룡에게는 평지인 듯하였다. 한번 발을 구른 비룡은 그 다음 순간에 어느덧 주인의 앞에까지 이르렀다. 그리고는 반갑기 한량 없다는 듯이 그의 기다란 얼굴을 숙여서 소년의 어깨에 베어대었다.

잃어던 애마를 다시 찾은 견훤도 잠시는 너무 반가워서 말의 잘기만 쓰다듬고 있다가,

"자, 또 수고를 해라."

하고는 몸을 날려서 안장에 올라가 앉았다.

그날 날이 거의 저물어서 견훤은 선종을 만났다. 저편 앞에 가는 소년의 뒷맵시가 선종인 것을 알아보고 견훤은 말의 속력을 좀 돋구어서 쫓아갈 때 앞서 가던 선종은 말굽소리를 듣고 필시 견훤이라 짐작하고 곁길로 몸을 숨기려 하였다. 그러나 견훤의 속력은 숨으려는 선종을 숨도록 버려두지 않았다. 어느덧 도리어 몇 걸음 앞섰다. 말에서 내렸다.

마주선 견훤과 선종. 선종이 그만 싱겁게 웃었다. 애꾸눈인 한쪽 눈만으로 씩하니 웃은 뒤에,

"저렇게 잘 가는 놈이 아침에는 그렇게도 안갔담."

하면서 말을 넘겨보았다.

"병신 고운 데 없다구 게다가 도둑질까지? 숨기는 왜 숨으렸느냐?"

"면목 없으니깐 숨지."

"목(目)은 본시부터 절반이 아니냐. 대체 몇 리나 타고 왔느냐?"

"한 이십리 왔을까? 그 다음은 어디 영 갈래야지. 딱 버티고 서더니 그 뒤에는 움쩍을 않겠지. 나두 그만하면 꽤 타는 편인데 이놈만은 어쩔 수가 없어. 내려서 끌어두 보구, 채찍으로 때려두 보구 했지만 어쩔 도리가 없더구나. 그래서 할 수 없이 그 뒤는 걸었지 쓰지두 못할 말 때문에 애만 썼다."

"도둑놈에게도 핑계는 있구나. 야 어서 길이나 가자. 어제 보니깐 좀 더 내려가야 인가가 있더라. 어둡기 전에 인가까지는 가야지."

가벼이 몸을 날려 말에게 오르는 견훤의 모양을 선종은 부러운 듯이 쳐다보았다.

"나도 뒤에 좀 태워주려므나."

견훤은 굽어보았다. 굽어서 선봉의 표정을 보고 뒤에 타기를 승낙하였다.

말은 소년 둘을 등에 태우고 벼랑길을 아래로 아래로 내려갔다.

날이 꽤 어두워서야 두 소년은 인가에 까지 이르렀다. 위로는 동화사까지가 하룻길이요, 아래로는 주막까지가 하룻길이 되는 이 단 한집의 인가는 때때로 동화사에 왕래하는 사람의 편의를 보아주기 위하여 빈방이 하나 있었다. 이 근처의 산 일대가 모두 동화사의 소유로서, 이 인가는 말하자면 동화사의 산지기나 일반이었다.

그날 밤 자리에 나란히하여 누은 두 소년은 창을 열고 팔월 중순의 쇄락한 달을 우러러보며, 제각기 제 심회에 잠겨 있었다.

"야, 견훤아!"

이윽고 선종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응?"

"나는 이름을 고치리고 작정을 했다."

"뭐라구?"

"궁예(弓裔)라고."

"왜?"

"좋지 않으냐? 궁예라. 남아(男兒) 세상에 나서 왜 하필 지저분하게 선종(善宗)이란 말이냐. 동화사 밥덕대스님이 지어준 이름이다. 선종이 다 뭐야. 궁예라. 궁예라. 이제부터는 궁예라고 불러다고."

"궁예야!"

"왜?"

"…."

"왜 그래?"

"불러 달라기에 불렀지, 뭐가 있을 게 뭐냐?"

"그러면 이번은 폐하 하고 한번 불러보렴."

"폐하? 말도둑 폐하가 어디 있드냐? 적괴나 되리라."

이 말을 내어던지고는 선종―궁예가 무엇이라 중얼거리는 것을 귀곁으로 넘기며, 견훤은 다시 달을 우러렀다.

해는 낮의 주인이요, 달은 밤의 주인이다. 그러나 해는 일그러짐 없이 언제까지든 내내 밝게 비취나, 달은 왜 그렇지 못하여 빛나면서도 어둡고 또한 중순에는 차(滿)되 그믐에는 없어지나? 대체 음(陰)이라 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런 방면으로 밀려가던 그의 생각은 홱하니 전환을 하며, 지금 자기의 곁에 누어서, 같이 달을 우러러보고 있는 애꾸눈이 소년의 신상에 미쳤다.

이 병신소년에게는 온 세상이 원수이다. 단 한사람 원수 아니면 그의 어머니는 그가 어렸을 때 그 아버님되는 경문왕에게 죽인 바 되었으니, 그 뒤는 이 세상이 죄다 병신소년에게는 원수이다. 월전에 세상 떠난 경문왕은 이 병신소년의 친 아버님이라 하지만, 당신의 아들이 병신으로나마 살아 있는 줄 알기만 하면 즉시로 잡아죽이기를 주저하지 않을 원수다. 지금 임금은 이 소년에게는 이복형님이라 하지만 역시 서로 죽이길 사양잖을 원수지간이다. 제일 태우·이복누이·조카들―그의 혈족이라는 혈족, 친족이라는 친족 어느 한 사람이 소년의 편이 되어 줄 사람이 없다. 이 세상에 요렇게도 개밥의 도토리와 같이 외따로이 삐어져 나온 사람도 있을까.

이 병신소년은 장차 자기의 힘만 자라면 대궐로 뛰쳐들어가서 한바탕 서둘러대고 운이 좋으면 왕위까지도 누리어보려고 한다.

그러나 사람됨이 경망하였다. 그런 야망을 품기에는 너무도 가벼웠다.

지금 견훤은 자기가 노리고 있는 것도 신라 임금의 목숨이다. 그러나 자기는 결코 신라 사직에는 손대지 않으리라. 자기의 조상이 신라 임금에게 욕보고 죽인 바 되었으니, 그 품갚음으로 신라 임금의 목숨을 엿보는 것이지, 남의 일천년 사직에야 왜 손을 대어서 몇 백만 생령으로 하여금 원한 머금은 백성이 되게 하랴.

만약 자기의 이러한 꿈같은 야심이 성공이 되는 날, 우연히도 지금 자기의 곁에 누워있는 애꾸눈이소년도 성공을 하여, 자기의 눈앞에서 애걸을 하고 있는 신라 임금이 이 애꾸눈이의 후신(後身)이라 하면?

견훤은 자기의 공상이 너무도 허망한 대로 날개를 뻗어가므로 그만 스스로 고소(苦笑)하고 그 공상을 내어던졌다. 그런 뒤에 잠을 청하려고 눈을 감았다.

"선종―아니 궁예야. 오늘 밤엘랑 아예 말 훔칠 생각을 내지 말아라. 공연한 헛 애만 쓰느니라. 서늘하다. 문 닫아라. 난 졸린다. 먼저 자리다."

견훤은 모로 돌아누으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나도 자겠다."

궁예는 일어나 문을 닫고 다시 자리에 들었다.

잠시 뒤에 견훤은 소년답지 않게 우렁차게 코를 골면서 잠이 들었다. 이 코고는 소리에 궁예는 잠을 들 수가 없어서 연방 견훤을 흔들고 하였다. 그러나 흔드는 그 순간만 콧소리가 멎을 뿐이지 흔들기를 멈추면 다시 시작이 되고 하였다.

궁예는 새벽녘에 가서 겨우 잠이 들었다.

밝는 날 두 소년은 어제 저녁과 같이 한말에 함께 타고 다시 길을 떠났다. 오늘저녁 주막거리까지 가서, 거기서 남으로 가든 북으로 가든 혹은 그냥 동행을 하든 결정하기로 하였다.

걸어서 하룻길을 말로 가매 그들은 흥그러웠다. 가다가는 말에서 내려서 혹은 씨름도 하고, 혹은 멱도 감으며 흥그러이 내려갔다.

이렇게 내려가면 그들은 이상한 물건 하나를 발견하였다. 고삐를 잡은 견훤이 발견하고 궁예에게 가리킨 것이었다.

처음에는 짐승으로 보았다. 소름이 온 몸으로 쪽 돋았다. 안장에 찬 활을 벗기려고 서둘렀다. 그러면서 자세히 보매 짐승이 아니었다.

사람이었다. 발가숭이 사람이었다. 몸에 한 올의 실도 감지 않는 진정한 발가숭이―머리털도 반반히 깎였으니 혹은 중일까?

가까이 이르렀다. 너무도 해괴하므로 두 소년은 말도 못하고 굽어 보았다. 중[僧]은 자기가 이렇듯 발가벗고 다니는 것이 아무 부자연할 일이 없다는 듯이 태연히 소년들을 쳐다보았다.

서로 어긋났다. 서로 등지게 되었다. 그때였다. 중[僧]이 돌아섰다.

"아나 이애."

소년을 불렸다.

궁예가 먼저 돌아보았다. 견훤도 말을 세우며 돌아보았다.

"이애들아. 좀들 내려라."

그렇게 명할 권리라도 잡은 듯한 당당한 명령이었다.

사리에 어그러진 명령이었으나 웬 까닭인지 가슴에 탁 울렸다. 견훤이 먼저 말에서 내렸다. 뒤따라 궁예도 내렸다.

"너희들 점심 있느냐?"

말에서 내린 소년들에게 향하여 중[僧]의 두 번째 말이 이것이었다.

궁예는 힐끗 견훤을 보았다. 견훤이 대답하였다.

"우리 둘이 먹을 게 있읍니다."

"너희 둘이 먹을 걸 나까지 셋이서 먹자. 저 개천가로 가지고 가자. 에이 시장한걸."

중[僧]은 이렇게 말한 뒤에는 소년들이 따라올 것을 굳게 믿는 듯이 뒤도 안돌아보고 개천으로 내려간다. 아닌게 아니라, 견훤은 말을 끌고 뒤를 따랐다. 궁예도 애꾸진 눈으로 앞을 겨냥하면서 따라갔다.

세 사람은 개천가에 자리를 잡았다.

"어어. 이렇게 많이 먹는가! 아이들의 점심이 한 말 밥이로구나."

견훤이 내어놓은 점심을 중[僧]은 눈을 둥그렇게 하고 보았다. 사실 상상하기 힘들만큼 굉장한 분량이었다.

소년측에서는 견훤이 먼저 입을 열었다―

"옷은 평생에 안입으십니까?"

"왜? 입지. 아침에도 입고 길을 떠났는데, 너무 덥기에 오다가 벗어버리고 말았다."

"그러면 저녁 서늘할 때는 어떻게 하십니까?"

"그 때쯤은 동화사지기이네 집에 들면 속인의 옷이나마 얻어 입지."

중이었다. 견훤이 다시 물었다.

"그럼 스님은 동화사로 가십니까?"

"음. 거기서 월동(越冬)이나 할까 하고…."

"존함은?"

"'도선(道詵)'이라고 약간 유명하니라."

―견훤은 몸을 떨었다. 가슴이 뛰놀았다. 도선사(道詵師)의 도승(道僧)으로서의 높은 이름을 곳곳에서 들었다. 그러나 어느 절에 주지로 있는 것이 아니고, 오늘은 여기, 내일은 저기로 표랑하는 승이라, 좀체 만날 수가 없었다. 높은 스승을 구하여 돌아다니는 견훤은 처처에서 듣는 이 도선사의 이름에 한번 만나고 싶은 생각은 늘 있던 바였다. 뜻하지 않고 여기서 만난 이 발가숭이 중―그가 도선사였다. 처음 서로 길이 어긋나며 '아나 얘야' 하고 부를 때에 그 소리가 가슴에 뭉클하였다. 좀체의 사람에게 머리를 숙일 줄 모르던 견훤 자기가, 뜻하지 않고 그에게 머리를 숙이고 그의 당치않은 온갖 명령에 전후를 살핌없이 복종하였다.

그의 눈에는 세상만사가 모두 도의로 보이는 모양이었다. 아무리 무인심산(無人深山)이기로서니 그래도 어쩌다가 사람을 만날지도 모를 일이거늘, 그렇게도 발가숭이로 길을 갈 수 있겠으며, 덥다고 옷을 벗었으면 그 옷을 하다못해 꾸려 들고라도 갈 것이지 귀찮다고 길가에 버리고 장차 도착되는 곳에서 새로이 얻어 입을 뱃장 등등으로 보더라도 좀체의 인물이 아니었다.

선문(禪門)에 들고자 스승을 구하는 바가 아닌 견훤으로선 단지 고승(高僧)일지라도 만족하지 못하다. 이러한 도선과 같은 활달한 도승에게서 먼저 인간도를 배워야 할 것이다. 견훤은 잠시 이 도선의 문에 들고자 마음먹었다.

곁의 궁예를 보았다. 좀 경망하기는 하나 역시 색다른 야심을 품고 있는 궁예라 궁예의 심정도 알아보고 싶었다. 궁예 역시 슬금슬금 도선을 쳐다보는 품이 자기와 같은 생각을 품은 듯이 보였다.

세 사람은 점심을 달게 끝내었다.

"스님, 그렇게 길가시다가 아낙네라도 만나시면 어떻게 하십니까?"

"만나면 만났지 무슨 일이 있으랴?"

"스님이 피하십니까, 아낙네가 피합니까?"

"내가 왜 피하랴. 아낙네가 피하고 싶으면 피하고 피하기 싫으면 그만둘 테지."

이때 궁예가 말틈에 끼어들었다.

"스님. 제 관상을 좀 봐주십시요."

도선은 승으로 뿐 아니라 음양오행지술이며 온갖 잡술에도 통한 이로 이름이 놓았다. 절간에 몸을 붙이고 있었으니만큼 익히 도선사의 성화를 들었던 모양이었다.

도선은 궁예의 얼굴을 보지고 않고 한마디로 해석을 내렸다.

"대적(大賊)은 되리라."

이번은 견훤,

"저는 어떻습니까?"

고 물어보았다.

"너도 대적이니라."

"대적 밖에는 못되리까? 저 애―궁예라는 애와의 우열(優劣)은?"

"눈깔이 하나이 더 있으니 조금 나을까? 대적 이상은 이상은―."

도선은 눈을 굴려 견훤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견훤은 자기의 무표정한 얼굴을 정면으로 향하였다.

한참을 견훤의 얼굴을 들여다본 뒤에야 도선은 비로소 대답하였다.

"자식 복이 없어서 대적 이상은 좀 어디 힘들까부다. 가석한 일이로군."

"그 액을 면할 수가 없으리까?"

"자식은 부모에게 속한 것이니깐 전혀 네게 달렸지."

"스님 다니신 중에 산수는 어디가 좋습더이까?"

"송악(松岳)이 좋더라."

송악? 송악이면 고구려의 구역(舊域)이다. 견훤의 듣고 싶은 바는 백제 구역 중의 좋은 곳이다. 그러나 쉽사리 입밖에 내어 묻기 힘든 말이다. 견훤은 주저하였다.

말 사투리 등으로서 도선사는 이 소년의 마음을 알아챈 모양이었다. 빙긋이 웃으면서,

"서남방에는, 웅진·부여보다 완산주(完山州)가 승하더라."

견훤은 잠시를 생각하여본 뒤에 다시 입을 열었다.

"스님, 저는 높으신 스승을 뵙고자 천하를 편주하던 터이올씨다. 스님 문하에 잠시 두어주실 수가 없겠읍니까?"

"승이 되려느냐?"

"아니올씨다. 속인으로 종사하겠읍니다마는 스님의 높으신 덕행과 학문을 백분의 일이나마 물려받고자…."

"정주(定住)가 없는 나를 어떻게?"

"따라다니겠읍니다."

"승이 속인을 무에라고 데리고 다니겠느냐?"

"스님도 그런 일이 구애되십니까?"

도선사는 대답 대신으로 소리높여 웃고 말았다. 반승낙은 된 셈이었다.

"그럼 동화사로 가시려면 모시고 가겠읍니다."

"유명은 하지만 가르칠 것은 아무것도 없는 알무식장이니라. 그런 줄 알고 따라오려면 따라오고 마음대로 해라."

"그럼 모시겠읍니다."

"어허, 점심 맛있게 잘 먹었군. 짐스러워 짐까지 내버리고도 인간이라 시장증이 나더니…. 저물기 전에 산지기네 집까지 가야지…."

도선사는 몸을 일으켰다.

여기 흥미 있는 것은 궁예의 태도다. 동화사에서는 인심도 잃었거니와 거기서 일단 도망해 나왔던 그로서 다시 돌아가기도 열적을 것이다. 도선사를 좇으려나? 혹은 저 갈길을 새로이 개척하여 찾으려나?

견훤이 물어보았다.

"넌 어쩌려느냐? 난 스님 따라 동화사로 갈텐데."

궁예는 그의 단 하나의 눈을 감았다.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첫째로는 이름 높은 이 스승을 놓지기가 싫을 것이다.

둘째로는 정체 모를 이 백마의 소년 견훤이 입문을 하는데 자기만이 떨어진다는 것도 싫을 것이다.

그러나 도망해 나온 동화사로야 어찌 다시 돌아가랴. 더우기 그는 도화사의 상좌라 동화사로 돌아가면 동화사 부처를 섬겨야 할 신분이다.

한참을 그의 단 하나의 눈을 감고 생각을 한 뒤에 드디어 눈을 떴다.

"나는 밥덕대스님 다시 만나기 싫어서 그냥 내려가련다."

"그럼 여기서 작별이로다."

"음. 스님 저는 여기서 하직하겠읍니다. 견훤이도 잘 자거라."

"장래 성공하여라."

여기서 궁예는 등지고 돌아섰다.

견훤은 도선사에게 가까이 갔다.

"스님 말에 오르십시오."

"싫다. 말을 타면 서느러워. 걸음을 걸아야 한다. 네나 타거라."

"저도 걸어갑지요."

이리하여 벌거숭이 중과 소년과 말―이런 기괴한 일행은 다시 산길을 더듬어 올라가기 시작하였다.

"스님도 사투리로 보아서 백제십니다 그려."

올라가는 길에 견훤은 이렇게 물어보았다.

"나 말이냐? 나야 천하의 도선이지. 백제는 무엇이고 신라는 무엇이냐?"

"스님은 당나라에 오래 가 계셨다지요?"

"얼마간 있었느니라."

"그 곳에 이인(異人)이 많습더이까?"

"에쿠. 넘어질 번했다. 음, 워낙 바닥이 넓은 데라서 편력하노라면 이인도 적지 않게 만나겠더라."

"스님의 도덕이며 음양술도 당나라에서 닦으셨읍니까?"

"담벽에게 배웠나니라."

"네?"

기이한 대답에 견훤은 눈을 크게 하였다.

"면벽(面壁)하고 명상해서 체득했느니라."

"스님이 여태까지 만나신 분 가운데 어느분이 가장 덕이 높으십더이까?"

"나보다 이상되는 이를 찾다 찾다 못했으니 아마 내가 으뜸이리라."

"지혜는?"

"그역 마찬가지니라."

길이 험한지라 땅바닥만 굽어살피면서 길을 가던 견훤은, 문득 머리를 들어서 눈앞을 보았다. 자기의 눈앞에 걸어가는 이 벌거숭이의 인물―오십이 조금 지났을 만한 중늙은이의 승―그는 스스로 지혜와 덕이 가장 으뜸되는 사람이라고 장담한다. 아지까지의 소입여 년의 생애의 대부분을 산천편답으로 보낸 그는 이 고르지 못한 길을 마치 평지인 듯이, 발바닥에 눈이라도 있는지 굽어보지도 않고 활개치며 간다. 그의 넓다란 벌거벗은 등판을 멀건히 바라보며 가는 동안 십여보 이내에 견훤은 돌뿌리를 차고, 세 번 절룩하였다. 그러면서도 견훤은 한참을 그 넓은 등판에서 눈을 떼지 못하였다.

이번에는 도선이 먼저 물었다.

"너는 대체 무슨 도둑질을 하려느냐?"

"글쎄올씨다. 저는 아직 도둑질할 생각은 없는데요."

"요놈, 앙큼스럽게. 바른 대로 말을 할 것이지."

"글쎄올씨다. 잃었던 물건을 어디 힘자라면 찾아나 볼까 할 따름이올씨다."

"그럼 너는 부여씨(扶餘氏)냐? 에쿠쿠. 길이 적잖게 험한걸."

"땅을 좀 보시지요."

도선의 질문에 대답하기 싫은 견훤은 이렇게 딴 말로 돌려버렸다. 도선도 그것을 추궁하지 않았다.

"땅을 굽어봐? 저런 좋은 산수를 보지 않고 땅바닥을 보아?"

"땅은 산수가 아닙니까?"

"요놈. 말대답질은 제법일다."

"스님, 제 말씀에 대답을 못하셨으니까, 천하 제일 지혜자는 저올씨다. 스님은 제이위로 떨어지셨읍니다."

"하하하하."

이것으로 일단의 대화는 끊어졌다. 벌거숭이와 소년과 말―이 기괴한 일행은 다시 묵묵히 길을 걸었다.

"아까 그녀석은 무엇이냐. 그 애꾸눈이 말이로다."

"동화사 상좌로 있다가 환속하겠다고 달아나는 녀석이올씨다. 상좌 적에는 이름이 선종(善宗)이고 환속한 뒤에는 궁예(弓裔)라는…."

"좀 무엄한 말이지만 내 그녀석과 신통히도 모습이 같이를 보았기에 말이로다."

"누구오니까?"

흥미와 호기심을 일이키는 말이다. 더우기 경어(敬語)를 써서 말하는 것이 더 마음끌렸다.

"두 분 모두 보았는데 저번 승하하신 임금님과, 또 한 분은 그때 태자로 계시다가 지금 등극하신 임금님―그 부자분이 꼭 모습이 한모습인데 무엄한 말이지만 애꾸―뭐라? 궁예? 그 녀석이 꼭―더우기 지금 새 임금님과 한판에 박은 듯하단 말이지. 눈 하나가 병신일 따름이지."

견훤은 한순간 숨을 죽였다. 궁예가 스스로 자기의 신상을 마할 대에라도 그 말을 온전히 안 믿었던 바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또한 절면적으로 믿었던 바도 아니었다. 거저 지나가는 말을 듣는 쯤으로 들어두었던 것이었다. 그랬더니 지금 이 도선사의 말을 들으니까 과연 그가 경문왕의 낙윤(落胤)이라는 것이 사실인 모양이다. 그러면 그의 그 앙칼진 마음으로 언제든 한번 신라 궁실을 소란케는 하여볼 거이다.

그러나 그런 내막까지를 도선사에게 피력할 필요를 느끼지 않은 견훤은 단지 지나가는 말인 듯이,

"그 녀석이 어떻게 그 분과 모습이 같을까요?"

하여 두었다.

"글쎄 말이로다. 내 오며오며 지금까지 생각했는데 필유곡절(必有曲折)이야."

"…."

또 이야기는 끊어졌다.

이 기괴한 일행이 산간의 단 한 집인 등화사 산지기의 집까지 이른 것은 날이 꽤 어두어서였다.

저녁 뒤, 뜰에서 달구경들을 하며 즐기고 있던 이집 딸이며 며누리는 질겁을 하며 도망쳤다.

도선은 이곳도 여러 번 지난 일이 있는 모양으로 집 주인은 잘 알았다. 도선은 집주인을 불러내어 옷 한벌을 징수하여 입었다.

"스님께 작겠읍니다."

"작으나 크나."

그런 것에 구애될 도선이 아니었다.

그날 밤을 그 집에서 묵고 이튿날 일찌기 길을 떠났다.

가다가 차차 더워오니까 먼저 웃옷만 벗어서 던지려다가 생각난 들이 말 잔등에 던지고, 한참 더 가다가 더 더워오니까 이번은 아래옷을 벗어서 말 잔등에 던지고―이리하여 또 벌거숭이가 되었다.

이른 저녁때쯤 동화사에 도착하였다. 동화사에서 오리쯤되는 곳에서 견훤이 성화시켜서 위아래 옷을 입게 하였다.

불문의 격식이 어떠한지는 모르지만, 먼저 한 상좌가 도선사를 보고 달려와서 합장배례를 한 뒤에 도로 들어가서 절에 알린 모양이었다. 주지 이하가 모두 달려나와서 그것은 마치 국왕을 맞는 신하들과 같이 엄숙하게 절하여 맞았다. 도선사는 속인의 복색을 한 채로 흉허물 없는 사람같이,

"여기서 대밭(竹林)이나 거닐면서 월동을 하러 왔읍니다."

고 한다.

"얼마든지 계십시오."

본당 저쪽으로 남향하여 외따로이 암자 하나가 있었다. 이 가을과 겨울을 도선사와 견훤은 그 암자에서 지내기로 하였다.

"그 소년은 웬 소년이오니까?"

주지가 이렇게 물을 때 도선은,

"빈도의 제자외다."

고 간단히 치워버렸다.

견훤은 아무것도 하는 일이 없었다. 도선께 배우자고 따라왔지만 수일 동안은 아무것도 묻는 일도 없고, 도선도 아무것도 가르치는 바도 없이 무위(無爲)히 보냈다.

승도들의 생활―견훤 자기네의 생활과는 아주 딴판인 이 기괴하고도 경건스러운 생활을 관찰하며, 혹은 뒤 대밭에 가서 대를 깎아 활과 살을 만들기를 연습하며, 혹은 벼랑턱 낭떠러지등을 말을 달리며, 또는 승려들과 어울려서 가을의 시들어가는 산채따기등등으로 수일간을 보냈다.

그 어떤날 견훤은 암자 안에서 조용히 스승과 마주 앉을 기회를 얻었다.

"스님."

"?"

"저는 스님께 배우고자 스님 문하에 들었읍니다."

"그래."

"첫째로 배우고 싶은 것은 왕자(王者)의 길이올씨다."

도선은 그윽히 눈을 들었다. 잠시를 견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런 뒤에 입을 열었다.

"왕자의 길이란 말하자면 대적(大賊)의 길 말이지. 지금 천하에 주인 없는 땅이 없는데, 왕자의 길은 배워 무얼하느냐?"

"잃었던 것을 찾으려고 그럽니다."

"그러면 너는 사실 부여씨(扶餘氏)란 말이냐?"

"…"

아니랄 수도 없었다. 그렇달 수도 없었다. 잠잠하여 버렸다.

"네가 만약 부여씨일 것 같으면 왜 부여씨의 발상지인 아리나레(鴨綠)를 넘어서서 천하를 엿볼 꿈을 못꾸고 요 근처에서만 배회하느냐?"

"그것은 고구려가 아니오니까?"

"이백년 전 조상이나, 일천년 전 조상이나, 조상이야 일반이니라. 일천년 전 조상이 한 갈래는 아리나렐 넘어서 천하를 엿볼 도안, 한 갈래는 겨우 요구석에서 요모양으로 지나다가 쓰러진단 말이냐? 어차피 저도 쓰러는 졌지만."

승답지 않은 말이었다. 천하를 삼킬 듯한 이 기개에 견훤은 단지 멍멍히 스승의 얼굴을 우러를 따름이었다.

"하다 못해 송악(松岳)으로나마 가라 해도 그도 못할 콩알만한 간을 가지고 왕자의 길은 배워 무얼하느냐. 송악에 자리잡고 남으로 이천리, 북으로 이천리―천하는 못되나마 동방(東邦)은 전부―그만 뱃심도 못가지고서…. 송악에 왕기(王氣)가 보이더라. 송악 오백년…오백년이면 짧지 않지. 중원의 주이된 자 누구 오백년 누린 자 있더냐?"

나오는 말말이 모두가 승답지 않은 호쾌한 말이었다. 견훤이 비로소 입을 열었다.

"스님, 송악이 그렇듯 좋습더니까?"

"음, 오백년 왕기는 보이더라."

"백제는 칠백년을 누렸는데 오백―."

말하려는 것을 스승이 끊었다.

"욕심이 과하면 못써. 신라 일천년, 백제 칠백년, 고구려 칠백년―백제와 신라는 뒤에서 고구려가 막아 주었기에 그만큼 누렸지, 한(漢)·수(隋)·당(唐)의 힘을 스스로 막았을 듯싶으냐? 고구려 칠백년은 놀라운 왕기니라. 천하의 주인된 자로도 삼백년?사백년이 으뜸이요, 단 백년 미만이 수두룩하지 않느냐?"

견훤은 잠시 입을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스님 일전에 말씀하신 그 완산주는 어떻습니까?"

"완산주?"

도선은 머리를 기웃거렸다. 잠시 생각하는 듯이 눈을 감았다가 떴다.

"완산은 미약하더니라. 제성대(帝星臺)가 광주에 있고 왕기가 완산주에 있어 서로 갈렸으니 미약할 밖에 있느냐?"

"참 제성대는 무엇이오니까?"

"제성대는 융태자(隆太子) 칭왕시(稱王時)에 하늘에서 날아 내렸느니라. 그때 융태자가 광주에 도읍만 하셨더면 백제사직은 그냥 보전이 될 것을…. 가석한 일이나 운명을 어찌랴."

조석으로 보고 놀고 하던 그 바위가 그런 바위던가. 과 가석한 일이었다.

"그럼 스님, 제성대를 많은 인력을 들어 완산주에 옮겨다 놓으면 어떻게 되리까?"

"아이다운 말이로다. 인력으로 그 바위를 어떻게 옮긴단 말이냐."

완산주는 미약하다 한다. 미약하다는 것은 '없다'는 것과는 뜻이 전혀 다르다. 미약하게라도 있기만 하면 미약하던 것이 장차 강하게 될 날도 있을 것이 아닌가. 아니 도대체 산수음양설이란 것부터가 얼마나 믿을 것인가. 용기와 희망으로 빛나는 손녀의 마음은 스승의 그런 깨침 아래서도 광휘 있는 장래를 몽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도 내심 견훤의 어린 마음을 기껍게 한 것은 자기는 스승을 바로 만났다 하는 점이었다. 단지 석제자(釋弟子)로 고덕한 사람을 만났더면 혹은 불시의 학문을 배웠을지 모른다. 공제자(孔弟子) 역시 마찬가지다. 자기는 단지 그러한 도덕적 학문을 배우고자 수도(修道)의 길을 떠난 바가 아니다.

지금 자기가 섬기는 스승은, 비록 그의 적(籍)은 불문(佛門)에 있다 할지라도 그의 학문은 세상 만반사에 통하였다. 불제자라 하나 그의 마음은 또한 쾌활호탕하고 불규하여 천하 제일이다 라고 자칭하는 자신의 말에 과연 부끄러울 데가 없었다.

그날의 이야기는 그 뒤에 다른 승이 들어오기 때문에 흐지부지하여 버렸다. 그러나 견훤은 마음에 무슨 적지않은 물건을 얻은 듯한 느낌으로 매우 무거웠다.

가을이 가고 남국에도 첫눈이 내렸다.

남국의 눈―더구나 첫눈치고는 놀랍게 많이 내렸다. 이날 견훤은 활을 들고 토끼사냥을 나섰다.

스승께는 사냥을 꺼리어서 스승이 법당에 예배간 틈에 몰래 나가려 하였다. 그랬는데 몰래 하려는 일에는 반드시 고장이 나는 법이라 법당에 돌아오던 스승과 막 암자를 나서려던 견훤이 딱 마주쳤다.

"어디 가느냐?"

"네."

"어디?"

하릴없었다. 등에는 살통을 지고 어깨에는 활을 메었 견훤은 머리를 숙으릴 따름이었다.

"사냥 가누나?"

"네."

"무슨 사냥이냐?"

"토끼사냥이올씨다."

"음. 많이 잡아 오너라. 오래간만에 맛있는 저녁 먹어볼까?"

"스님도 잡수세요?"

"암, 먹잖구."

간단하였다.

"아, 살생한 것을…."

스승은 빙긋 웃었다.

"아니니라. 부처께서 경계하신 것은 남살(濫殺)이지, 거저 살생이 아니니라. 사람을 죽인다든가, 혹은 농사에 긴히 쓰는 소나, 물건 운반에 쓰이는 말같은 것을 죽이는 것은 잘못이지만 토끼같은 것은 호랑이나 삵이나 사람에게 잡혀먹히기 위해서 세상에 태어난 게니까 먹는 것이 옳으니라. 많이 잡아다 맛있는 저녁을 먹어 보자."

한 뒤에는 그냥 휘 암자안으로 들어가버렸다.

지나보면 지날수록 불규호탕한 성격을 나타내는 스승의 뒷모양을 멀거니 바라다보다가 문이 닫힌 뒤에야 견훤은 골짜기로 향하였다.

너덧 살부터 벌써 활쏘기를 연습한 그는 나이가 나이라 강궁(强弓)은 당할 수가 없지만 작은 활이면 거의 백발백중이었다. 낮 전으로 여섯 마리의 토끼를 잡아가지고 돌아올 수가 있었다.

점심에 스승은 토끼고기를 맛있는 듯이 뜯으며 이런 말을 하였다.

"작은 것을 아는 자는 큰 것을 모르는 법이니라. 벼룩·모기는 사람의 피를 빨아먹고 살지. 사람의 몸에서 피가 연방 생겨나지 않으면 벼룩·모기한테 다 빨려 피가 말라서 죽어버릴 것이다. 그런 해로운 생물(生物)까지도 생물이라 해서 살생하지 못한다면 이는 작은 것만 알고 큰 것은 모르는 사람의 말이니라. 토끼나 닭이나 해물(海物)들을 먹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런 것들은 먹히기 위해서 세상에 태어난 것이니까 그것을 먹는 것이 왜 죄악이 되겠느냐? 부처께서 경계하신 것은 남살이지 거저 다 죽이지 말라는 바가 아니로다. 후인(後人)이 그것을 잘못 해석한 따름이지."

그런 뒤에는 잠시 고기를 뜯고 말을 이었다.

"네가 얼마 전에 물은 일이 있지? 왕자의 길을 배우고 싶다고. 왕자의 길도 그게니라. 살생을 금했다고 다 죽이지 말라는 것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백성을 사랑해야 한다고 덮어놓고 사랑해서는 안돼. 왕자는 백성을 애(愛)하여서는 못쓰느니라. 휼(恤)해야지. 애민(愛民)은 목민자(牧民者)의 할 일이요, 왕자(王者)는 휼민(恤民)을 해야 하는 법이니라."

견훤은 고기먹던 손을 멈추고서 스승의 입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스승은 이 말만 한 뒤에는 다시 고기먹기에 여념이 없었다. 여섯 마리의 토끼를 사제 단 두 사람이서 굳은 뼈만 남기고는 홀짝 다 먹어버렸다.

이튿날 또 사냥을 나가려고 주섬주섬 할 때에 스승이,

"또 사냥이냐?"

하고 물었다.

"네."

"어디, 나도 가서 구경이나 할까?"

하더니 견훤의 뒤를 따라나왔다.

너멋 골짜기에는 과연 토끼가 많았다. 심산 중에 잡는 사람 없이 자유로이 번식되었으니만큼, 우글우글하였다. 사제 두 사람의 모양이 어떤 바위 위에 나타나자 사면에서 토끼들이 구멍으로 향하여 달아나는 것이 보였다.

견훤은 이 가운데서 숨지 않고 있는 놈이 한 마리라도 없는가고 활에 살을 먹여가지고 살폈다, 있었다, 한마리. 귀를 오똑 세우고 이편에서 움찔하기만 하면 달아나려고 잔뜩 벼르고 있다.

스승도 그 토끼름 발견하였다.

"생금(生擒)할 재간은 없느냐?"

견훤은 지세와 위치를 살펴보았다. 토끼가 바야흐로 뛰려는 방향으로 저편 아래 커다란 바위가 하나 있고, 그 바위 아래 구멍이 있고, 거기서 그 토끼까지 사이에 발자국이 있었다. 거리고 보아서 바위에서 토끼까지의 거리나 바위에서 견훤 자기까지의 거리나 비슷비슷하였다. 견훤은 스승에게 대답하였다.

"생금할 수 있읍니다."

"어디?"

견훤은 활과 살을 땅에 가만히 놓았다. 그런 뒤에 토끼가 목적한 방향으로 뛰게 하기 위하여 한번 고함을 지르며 발을 굴렀다. 이편에서 먼저 바위의 구멍으로 향하여 가면 토끼는 다른 데로 달아날 염려가 있으므로―. 과연 토끼는 일사천리의 기세로 제 구멍을 향해 달아난다. 그 방향을 분명히 본 뒤에 견훤도 전 속력으로 구멍을 향하여 달려갔다.

견훤은 구멍 바로 앞에서 토끼에게 뒤미쳤다. 몸을 날려서 엎어지며 한손으로는 구멍을 막으며, 오른손으로는 토끼를 잡았다.

버둥거리는 토끼의 귀를 잡아가지고 돌아오매 스승은 빙긋이 웃으면서,

"토끼잡는 지혜와 재간은 제법인걸. 사(射)는 어떠하냐?"

한다.

"사도 힘이 부족하니 강궁은 못 쏘나마 보통 활은 제법입지요."

"어디?"

활의 시험이다. 견훤은 토끼를 구럭에 잡아넣고 활과 살을 들고 일어섰다. 그리고 어디 또 토끼가 없는가고 살폈다. 그때에 다행히(불행일까) 꿩 한마리가 하늘을 날아가는 그림자가 휙 하니 눈위에 비쳤다.

견훤은 머리를 번쩍 들었다. 공중의 꿩을 발견하는 순간 살은 그리로 향하여 날아갔다. 스승이 알아채고 그리고 머리를 들었을 땐 살에 꿰인 꿩은 사선(斜線)을 그리면서 건너편 언덕 눈속에 떨어져 박혔다.

"졸재(卒材)는 넉넉하다."

"장재(將材)도 못되고 겨우 졸재입니까?"

"일군지장(一軍之將)은 되리라."

"그렇지만 스님, 저같은 백면(白面)으로 큰 자리를 엿보는 자는 졸에서 장으로 장에서 왕으로 이런 길을 밟아야 하지 않겠읍니까?"

"그 말 한 마디에 장재의 싹이 보인다. 전일 만났던 궁예라나 하는 그애도 보아하니 제속으로는 무슨 적잖은 야욕을 품은 듯하지만 장재가 안뵈어. 백면이 장을 건너뛰어 어디를 올라가겠느냐? 과즉 장이요, 그렇지 못하면 졸이니라."

―그날도 토끼 여섯 마리와 꿩 한 마리를 낮 전에 잡아가지고 돌아오게 되었다.

그 겨울을 도선사와 견훤의 사제는 동화사에 꾹 박혀서 보냈다.

겨울 동안에 견훤이 배운 바가 적지 않았다.

배운다 하더라도 무슨 강론을 하듯 그렇게 가르치는 것이 아니었다. 기회 있을 때마다 그 기회를 붙들어가지고 한 마디씩으로 깨쳐주는―그 천금으로도 바꿀 수 없는 귀한 가르침을 견훤은 가슴을 뛰놀리며 귀를 기울이고 들어서 모두 가슴에다가 아로새겨 두었다.

도선사의 학문은 무진장인 듯싶었다.

전문인 불교는 물론이었다. 유학(儒學)에도 조예가 꽤 깊었다. 도학(道學)도 적지 않이 연구한 모양이었다. 그 위에 온갖 잡학(雜學)에도 통하지 못하는 게 없는 듯하였다.

이러한 종합적 대지식이 정렬되어 튀어져나오는 한 마디 한 마디라, 그것은 과연 금으로도 바꿀 수 없는 귀하고 거룩한 말이었다. 한창 총명할 나이의 견훤이라 들은 것은 잊어버리지 않고 가슴깊이 새겨두곤 하였다.

긴 겨울도 지났다.

눈녹은 물이 개천으로 좔좔 소리치며 흐를 때에, 도선사와 견훤의 사제는 동화사를 떠나서 다시 표랑의 길을 밟았다.

길을 가면서도 만나는 사물, 당하는 경우 등에 따라서 도선사는 한 마디 한 마디씩으로 그의 지식을 견훤에게 전수(傳授)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혹은 여기서 하루이틀, 혹은 저기서 두석달, 혹은 십여일―그야말로 아무 목적도 없는 진정한 표랑이었다.

이 무정처·무목적한 표랑에 있어서 견훤이 부산물(副産物)로 얻은 것은 지리(地理)에 대한 지식이었다. 장차 어떠한 환경 아래서 어떠한 길을 돌아다닐지 예측도 할 수 없는 견훤은 이 신라와 배제를 두고 무른 메주 밟듯 돌아다니는 여행에서 적지 않은 지식을 얻었다.

견훤은 만 사년간을 도선사에 사사하였다. 그리고 열셋나는 해 가을에 스승께 하직을 하였다.

"야, 인제는 내 지식의 알맹이만은 대개 들려준 듯싶다. 이제 남은 것은 겉껍질 뿐…. 그밖에, 병법·창술·검술 등은 내 모르는 바로다. 참, 당나라엔 창술·검술 등의 달인(達人)이 간간 있더라만…."

이런 말을 들은 것이 그해 여름이었다. 그러나 그새 사년간에 든 정이 차마 곧 하직할 수가 없어서 석 달을 더 모시고 다니다가 광주 자기의 고향 근처에 이르러서 드디어 하직하였다.

온갖 것을 초월한 듯하던 스승도 인정만은 초월하질 못한 모양이었다. 묵연히 자기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잠시를 묵묵히 있다가야 입을 열었다.

"음, 최후에 네게 들려주고 싶은 말은 다른 것이 아니라 상학상(相學上) 네게는 자식 복이 없어. 자식이 안 태어나거나 태어나면 불초자거나. 전일 너하구 완산주를 지날 때도 알려 주었거니와 완산주에는 왕기(王氣)가 부족해. 네게 자식 복이 부족한 점과 아울러 생각하면 그것이 걱정스럽다. 게다가 송악의 왕기가 너무 강하던걸."

마지막 일러주는 이 경계를 명심해 들으며 스승의 축복을 받고 드디어 견훤은 스승을 하직하였다.

여기서 자기 집이 하룻길이 못된다. 그러나 일찌기 떠날 때에 아버지에게서,

"내가 네게 임금으로 절하게 되기 전에는 다시 만날 생각을 말아라."

고 엄교를 들은 그는 멀리 자기 집으로 뻗은 대로(大路)를 바라보면서 자기는 협로로 빗서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바라던 바 높은 스승을 만나서 마음의 다짐은 하였다. 인제부터는 몸의 다짐이었다. 창술·검술·병법 등등, 스승의 말한 바 장재(將材)로서의 다짐이 필요하다.

"졸(卒)에서 장(將)으로 장에서―."

이제는 체격이 제법 완강하여진 견훤은 노경(老境)에 들어서는 애마 비룡의 위에 비껴타고 가을 높은 하늘을 우러러보며 호쾌히 웃었다.

기우는 일천년(一千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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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선사(道詵師)에게서 마음의 길으 닦고 스승께 하직을 하고 홀로이 떠난 견훤은, 이제는 졸(卒)과 장(將)으로서의 무력적(武力的) 힘을 닦으러 다시금 말을 채찍하여 무정처한 길을 더듬었다.

본시 체격이 과인한 위에 마술과 궁술에는 벌써 그다지 축박할 데가 없을만한 실력이 있지만, 검술·창술·이며 나아가서는 병법 등에 아직도 앞길이 망연하였다.

고구려 없어지고, 백제 없어지고, 신라 일천년의 사직도 흔들리기 시작한 이때라, 이곳 저곳에 효웅들이 들끓어 소란하기 짝없는 시절이었다. 산간이나 혹은 궁곡에 몇 천명씩의 부하를 모아가지고 조련하며 큰 끔을 꾸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견훤은 이러한 데로 찾아다니며 일변 자기의 무술을 닦으며, 일변 이 방면의 높은 스승을 구하느라고 애썼다.

이렇게 돌아다니는 동안 태백산 줄기 어떤 절간에서 견훤은 우연히 궁예와 해후(邂逅)할 기회를 얻었다. 동수산 줄기에서 서로 동서로 나누인 뒤에 견훤 자기는 목적하였던 바 높은 스승을 만나서 적지 않은 도를 닦았지만, 궁예는 그때의 그 모양대로 역시 선종(善宗)이라는 이름으로 한개의 왁살스러운 중으로서 이 절에 몸을 의탁하고 있는 것이었다.

"세상사가 뜻대로 되지를 않는구나."

"그렇게 모두다 뜻대로 되려면 못살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간단한 탄식으로 거기서 또 다시 작별하였다.

신라의 천지를 무술을 닦으며 돌아다니던 견훤은 신라 천지선는 자기보다 늪은 재주를 가진 사람을 발견하지를 못하여 생각을 달리 먹고 당나라로 건너가기로 하였다.

천하의 중원이라 하고 또한 워낙 그 바닥이 넓은 당나라에는 좀 색다른 사람도 있을 것이다 당나라 천하로 돌아다니며 좀 높은 재간을 가진 사람을 찾아보자. 이리하여 견훤은 아직 소년의 몸으로서 멀리 수학하려고 그의 몸을 바다에 띄웠다.

우리는 견훤이 당나라로 건너가서 그의 목적한 바 병법?무술 등을 수도하는 동안 잠시 눈을 돌이켜서 당년의 신라의 정국을 살펴보기로 하자.

견훤이 처음에 제 집을 떠나서 수도의 길에 오른 그 해 여름에 승하한 임금은 경문왕이었다.

경문왕에게는 제일 왕후·제이 왕후―이렇게 두 분의 왕후가 있었다. 그 가운데 제일 왕후는 재상 위홍(魏弘)과 특별한 사이가 되었다. 위홍은 야심이 만만한 위에 탐욕이 세고, 그 위에 또 특별히 여인을 호리는 천재를 가진 사람이었다. 이 특별한 재간을 이용하여 왕후에게 가까이 나아간 것이었다. 경문왕이 삼십세 내외의 청춘으로 승하한데 대해서도 말썽이 적지 않았다.

제일 왕후에게는 아드님이 한 분, 따님이 한 분, 이렇게 남매의 소생이 있었다. 제이 왕후에게는 아드님이 한 분 있었다. 경문왕이 승하하자 두 왕후는 각각 당신 소생의 아드님을 보위에 올리고자 맹렬한 운동을 하였다. 그러자 제일 왕후의 뜻으로 당시 상대등(가장 높은 대신)으로 있던 위진이 파직되고 외홍이 그 대신 상대등이 되었다.

이제는 제일 왕후의 지위는 반석과 같이 되었다. 그의 아드님은 임금이 되었다. 사랑하는 사람은 대재상이었다.

임금(후일 헌강왕(憲康王)이라 한 분이다)은 현철한 분이었다.

임금은 위홍을 믿지 않았다. 위홍을 파직시키려고도 여러번 하여보았다. 그러나 태후의 세력을 배경으로 삼은 위홍의 당당한 권력은 임금으로도 좀체로 어찌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위홍의 빚어내는 난정 때문에 신라의 천지는 여간 어지럽지가 않았다.

당시의 신라의 판국은 동쪽과 서쪽과 남쪽은 바다로서 한계를 삼았으니까 분명하였지만, 북쪽의 경계선은 아주 모호하였다.

옛날 고구려 경계선은 남으론 한수(지금의 경성〓서울근처)까지, 서쪽으론 만리장성까지, 동과 북으론 모호하나 북으로 흥안령까지, 동으로 바다까지 쯤이었다.

고구려가 망한 뒤에는 아리나레(압록강) 이서의 고구려의 구역에는(대부분이) 고구려 유민들로 조직된 발해국(渤海國)이 섰다. 고구려 구역의 동부에는 여진(女眞)족이 웅거해 있었다.

신라의 북부 국경선은 지금의 서울 혹은 개성 근처까지였다. 압록강 이남 신라국경 이북은 이곳 저곳 성(城)이 있고, 그 성안의 호족(豪族)들이 성주(城主)가 되어 백성을 다스렸지, 어느 국가에 소속되지 않았다.

신라의 북부 국경선에 연(沿)하여 있는 성들도 어떤 때는 신라 조정의 호령에 복종할 때도 있고, 또한 자기네 마음에 틀리면 마음대로 반기(叛旗)들기를 주저하지 않았으매, 신라 조정에서도 어디까지가 자기네 국경인지 똑똑히 몰랐다.

더우기 신라의 정치가 차차 난맥이 되어가매, 나날이 반기를 드는 성이 많아져서 국경선은 날로 줄어들었다.

임금은 위로는 태후와, 아래로는 상대등 위홍의 틈에 끼어서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상대등 위홍은 위로 태후의 신임만 잃지 않고, 일변 뇌물을 받으며 많은 처첩들을 거느리고 일신상의 부귀영화나 도모하였지 국경을 돌아보지 않았다.

게다가 조정에 직속된 군대는 그 수효도 얼마 되지 않거니와 여러 해 문약(文弱)에 흐르는 동안 군대의 실력을 잃었다. 조정에 심복하는 주(洲)가 없는 바는 아니지만 조정에서 이렇다 하는 지휘가 없는 위에 그 군대조차 보잘것 없는지라, 반기(叛旗)를 드는 주며 성에 대하여 아무런 방책도 쓸 수가 없었다.

사실 일천명의 심복 군사만 가진 사람이면 누구든 한 군사를 꺾이지 않고 온 신라를 엎을 수가 있을만큼, 당년의 신라는 아래는 군사가 없고 위에는 장수와 대신이 잆었다.

이 위홍의 천권(擅權) 아래 어지러운 몇 해가 지났다.

이렇게 지나는 동안 어느틈에 위홍은 제이 왕후와 가깝게 되었다. 위홍이 먼저 손을 쳤는지 모르지만 위홍의 입장으로 보자면(이미 말한 바와 같이) 그 자색(姿色)의 점으로도 제이 왕후가 나았거니와, 차차 늙어가는 제일 왕후보다 아직 그래도 청춘미를 유지하고 있는 제이 왕후가 나았을 것이다.

위홍이 제이 왕후와 가깝게 되었다는 풍문이 대궐 이구석 저구석에서 궁녀들의 입으로 수군거릴 때, 임금은 보수(寶壽) 이십오세라는 한창 청춘으로 갑자기 승하하였다.

제일 왕후는 승하한 임금의 친누이되는 당신의 따님으로써 보위를 계승케 하여 그냥 당신의 지위와 권세를 유지하고 하였다.

제이 왕후는 당신 소생의 아드님(승하한 임금의 이복 아우)으로 보위를 계승케 하여 여태까지 제일 왕후에게 눌려오던 당신의 세력을 펴보려 하였다.

이 계쟁(繼爭)을 조정할 실력을 가진 사람은 재상 위홍이었다. 위홍은 현재 제이 왕후와 가까이 지내느니만큼 제이 왕후의 몸에서 난 왕자를 추대하기로 주청하여 제이 왕후의 소원이 이루어지었다. 이 신왕이 즉 정강왕(定康王)이었다.

정강왕이 즉위를 하였다.

아이가 자라서 어른이 되는 법이라, 이 신왕이 즉위할 때쯤은(지금까지 어린애로 봐오던) 제일 왕후 소생의 따님이 어느덧 무르익은 훌륭한 처녀가 되었다.

경문왕 승하한 이래 십여 년간을 대궐을 자기집삼아 묵고 먹고 하던 위홍이라, 아직 이 공주를 어린애로만 여겨 두었다.

그 어느날, 그날도 역시 대궐에서 제이 태후와 함께 조반을 먹던 위홍은 맞은편 문 열린 틈으로 웬 커다란 처녀가 지나가는 것을 발견하였다.

문틈으로 보인 바라 단 한 순간이었다. 위홍은 그 처녀가 이편쪽 활짝 열어젖힌 문앞으로 지나갈 때에 누구인지 자세히 보리라고 하고 그편을 주의하였다.

처녀는 그(열어젖힌) 문앞으로 지나갔다. 다른 사람이 아니었다. 공주였다.

어느 틈에 저렇게도 컸는가. 호색한(好色漢) 위홍의 눈은 공주의 뒷 모양이 안보이게 되기까지 눈을 가늘게 하고 바라보았다.

얼마 뒤에는 위홍은 어느덧 공주에게 가까이 되었다 과연 이 방면에는 놀라운 천재였다.

또 얼마 지나지 않아서 신왕은 등극한 지 만 일년만에 갑자기 승하하였다. 그리고 공주가 여왕(女王)으로 신라에 군림하게 되었다. 즉 진성(眞聖) 여왕이었다.

제일 태후는 당신 몸에서 난 공주가 임금이 되었는지라 다시 위홍이 당신에게로 돌아오고 권세와 권력이 당신에게 다시 이를 줄 믿고 기대하다가, 어떤 궁녀에게 위홍이 신왕(제일 태후의 따님)의 방에서 신왕과 함께 조반을 나눈다는 말을 듣고 상기할 듯이 놀랐다. 그러나 임금과 재상과의 합친 세력에는 태후의 권력으로도, 또는 어머니로서의 권병으로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젊은 여왕과 탐욕센 재상과의 합작 정치―이 아래 눌린 백성이야 말로 '도탄(塗炭)'쯤의 형용사로는 형용하지 못할 참혹한 경황이었다.

일천년 사직이라는 대하(大河)는 이제는 더 버틸 수 없이 기울였다.

졸장(卒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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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강왕(憲康王) 십년 춘삼월.―용용(溶溶)한 바다에야 춘색(春色)이 어디 따로이 있고 추색(秋色)이 어디 따로이 있으랴만, 그래도 그럴새라 해서 그런지 일망무제(一望無際)한 바다에도 봄이 이른 양하여 떠오르는 수증기조차 부우옇게 보인다.

사면의 눈 다하는 곳 수평선 밖에는 서하나 보이지 않는 무연한 봄의 바다를 한 척의 배가 서에서 동으로 돛에는 바람을 잔뜩 받고 도해(渡海)를 하고 있었다.

당나라에서 신라로 향하여 가는 배였다. 좀 더 적절히 말하자면 신라로 가는 당나라 사신(史臣)이 탄 배였다.

정사(正使)·부사(副使)며 그 수원(隨員)·보호무관(保護武官) 등 외에, 당나라 상고(商賈) 몇 사람이 관원에게 뇌물하고 신라에 장사 차로 가는 것이 있었고, 그 밖에는 웬 소년으로 보자면 소년이요 청년으로 보자면 청년이요, 또 어떤 때의 표정으로 보자면 중년으로도 볼 수가 있는 정체 모를 사람이 있었다.

이 인물은 이 배에 태울 의무가 있어서 태운 바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또한 뇌물을 맏고 태운 바도 아니었다. 사실 억지에 못이겨 태운 것이었다.

처음에는 말로 거절하였다. 그 다음에는 완력으로 물리쳐 보았다. 마지막에는 무력을 사용하여까지 격퇴하려 하였으나, 이 괴인물은 당해 낼 수가 앖어서 할 수 없이 태운 것이었다.

태운 뒤에도 음식이라든가 거실 등에 대하여 아무도 간섭하지 않고 방임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런 것을 꺼리지 않았다. 먹고 싶을 때면 정사(正使)의 받고 앉은 상에라도 마주 가 앉아서 서슴지 않고 먹었다. 밤에는 아무데서나 자기의 자고 싶은 곳에 가서 잤다.

배에서는 귀찮은 존재였다. 그러나 어찔할 도리가 없는 존재였다.

누런 빛을 다분히 띄기 때문에 이름까지 황해(黃海)라 불리우는 이 바다도 하늘이 너무도 맑고 파란지라 그 영향을 받아서 꽤 파랗게 빛나는 좋은 날씨였다.

이 당나라 사신이 탄 배의 귀찮은 존재로 되어 있는 괴상한 인물은 배 나난을 팔꿈치로 짚고 일망무제의 봄바다를 무심히 바라보고 있다.

그와 꼭 등진 반대쪽 난간에는 당나라의 부사(副使)가 역시 팔꿈치로 깊고 망연히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부사는 나이가 스물칠팔쯤 났을까, 삽십 미만의 젊은 사람이었다.

시각으로 말하자면 점심 직후쯤. 내려비치는 볕이 가장 따사로울 때이지만 봄이라 하되 바다의 봄은 꽤 서늘하였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선창 안에 들어가 있는데, 이 두 사람만이 하나는 남쪽을 향하고 하나는 북쪽을 향하여 망연히 수평선을 바라보고 있다.

이윽고 그 괴인물이 몸을 돌이켰다. 발을 떼어 부사의 곁으로 왔다. 거기서 부사와 나란히하여 섰다.

배 안에서 꺼리는 인물이 곁에 왔으므로 부사는 피하려는 눈치였다. 몸을 움직이려 하였다.

그때에 괴인물이 입을 열었다.

"당신 신라 사람이지요?"

분명한 한족(韓族)의 말로 이렇게 물었다.

이 질문을 받은 부사는 당황해하는 것이 분명하였다.

"그렇지요? 내가 잘못보지야 않았겠지요? 신라 사람이지요?"

재차의 질문, 이 두번째의 질문에 부사는 하릴없다는 듯이,

"그래, 그렇지만―."

당나라 말로 대답하였다. 반말이었다. 그것은 당연한 일로서 한쪽은 상국(上國)의 사성(使星)이요, 다른쪽은 번방(藩邦) 신민인데다가, 나이로 따지더라도 한쪽은 근 삼십이요, 다른쪽은 이십 미만이니 반말을 하고 반말을 받는 것은 무리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괴인물은 반말 받기가 역한 모양이었다.

"우리 상례(相禮)로 대합시다. 노형이 당사(唐使)면 나는 무엇인지 알겠소? 좌우간 인사나 합시다. 나는 견훤(甄萱)이라는 백제사람이요. 노형은?"

부사능 이 말에 약간 놀라는 빛이 보였다. 그리고 이번에는 비교적 순순히 대답하였다. 역시 당나라 말로….

"나는 최치원(崔致遠)이라는 신라 사량부(沙梁部)사람이요."

"아 노혀이 최어사(崔御史)시오? 성화(聲華)는 이곳 저곳서 들었읍니다."

괴인물은 견훤이었다.

병법·무술 등에 대한 수업을 쌓으려고 당나라로 건너간지 오륙년, 그새 얻은 바도 적지 않지만 또한 그것을 자세히 검분하면 그다지 신통한 것도 얻지 못하였다. 이름난 사람, 혹은 숨은 사람들을 적지 않게 찾아보았지만 월등하게 뛰어난 스승을 발견하지 못하고 "면벽연구(面壁硏究)"를 가장 높은 이상으로 삼던 은사인 도선사의 주장을 통절히 다시금 느끼며 실망의 발을 도로 고국으로 돌이키는 즈음이었다.

완숙되고 또 완숙된 체격이었다. 산더미같은 그의 몸집이 배 이쪽으로 옮아가면 배가 그 편으로 기울어질까 근심되리만큼 훌륭하였다.

견훤은 그 몸집에 어울리는 마치 바위와 같은 얼굴을 천천히 돌려서 최치원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병법?무술 등에 대하여 출군자(出群者)를 찾아보고자 여기 저기 다닐 동안 간간 최치원의 이름을 들은 일이 있으므로 어떻게 생긴 사람인가를 좀 유심히 보고자 하여서였다.

그러나 최치원에게서 단지 한낱 신경질인 야윈 표정밖에는 발견하지를 못한 견훤은 다시 얼굴을 바다로 돌려버렸다. 장차 함께 천하를 도모할 꾀를 의논할 벗이 필요한 견훤에게는 단지 한낱 재사(才士)는 그다지 슬 데가 없었다. 다시 바다로 눈을 돌리며 견훤이 말을 계속하였다.

"그러면 노형은 신라 말을 잊으셨겠군요, 아마?"

"그렇지요. 내가 열두살에 상국(上國)에 들어가서 지금이 스물여덟살―십육년간을 신라 말은 한 번도 들어보지도 못하고 해보지도 못했으니까…."

치원은 약간 자긍하는 듯한 태도로 역시 당나라 말로 대답하였다.

"그런데 노형의 소문도 나는 일찌기 들은 일이 있는데요."

견훤은 이 말에 한순간 치원을 보았다.

"허어, 내 소문? 내가 무슨 인물이길래 내 소문이 노형의 귀까지 더럽히겠소?"

"노형은 여유(汝遊)선행을 아시지요?"

"잠깐 사사(師事)해 본 일이 있읍니다."

"그 여유선생을 이번에 황조(皇朝)에서 군사(軍師)로 모셔왔는데, 여선생이 그런 말을 하더군요. 신라 소년으로 견훤이라는 신동(神童)이 있는데, 불출세의 장략(將略)을 가진 소년으로 장차 반드시 크게 되리라고…. 그런 말을 들었는데 우연히 여기서 만나게 되니 참 기쁘외다. 그만한 재략이 있으시면 왜 상국에 그냥 머물러서 공을 세워 귀히 되지 않고 귀향을 하시오?"

견훤은 한참을 한없이 한없이 수평선만 바라보았다. 그런 뒤에 일을 비로소 열었다.

"당나라 조정에선 여유선생을 얼마만큼이나 재략을 가진 분으로 봅니까?"

"근래에 쉽지 않은 군사(軍師)의 재율이라고 명성이 자자합니다."

"흐음."

견훤은 탄식하였다. 견훤의 본 바 여유선생은 그다지 높이 평가(評價)할 인물이 아니었다. 속에는 그다지 아는 것이 없이 혼자서 아노라고 떠드는 것이 여유선생의 특기였다. 그러한 여유선생에게 "신동"이라는 칭찬을 받은 것조차가 스스로 창피하고 부끄러웠다. 그렇거늘 당나라 조정에서는 그다지도 여유선생 따위를 높이 보는가. 이것만으로도 당나라에 인물이 없다는 점을 알 수가 있었다.

"최선생은 장차 귀국하였다가 도로 당으로 건너가시렵니까? 혹은 본국에 그냥 계시렵니까?"

"그것은 그때 보아야지요. 황상의 어명이 급하면 모르거니와 사향의 정도 간절하오이다."

견훤은 머리를 숙였다. 여러 가지의 생각이 오락가락 하였다. 좀 엉뚱한 생각을 품고 있느니만큼 가지가지로 생각은 뻗어나갔다.

처음 이 배에 올라서 당나라 사신 중 부사가 분명히 신라 사람의 체격인 것을 알아내자 견훤은 부사를 조용히 만나서 따져볼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신라 사람으로 당나라에 벼슬해 더우기 본국에 사신으로 가게까지 된 사람이면 상당한 조예가 있을 사람이다. 더욱이 그 연령으로 보아서 삼십 미만에 그만한 지위를 획득하였다는 것은 그의 재능을 넉넉히 증명하는 바이다. 지금 딴 꿈을 꾸고 있는 견훤으로서는 걸출 협력자를 품안에 품을 필요가 있다. 그래서 조용히 만날 기회를 엿보고 있던 것이었다.

그러나 급기야 만나서 가까이서 그 얼굴을 보고, 그 음성을 듣고, 표정의 움직임을 보고, 말―주의주장 등을 듣고보니, 상상하였던 바와는 딴판이었다. 한개의 재사, 문필지재(文筆之才)만을 가졌지, 별다는 웅략이며 정치적 주의를 못가진 사람이었다. 인물이 없는 당나라 조정에서는 긴히 쓸지 모르겠고 이미 이룩한 곳에서는 문필의 임(任) 따윈 당해낼지 모르지만, 자기의 협력자로는 그다지 긴하지 않았다.

몇 마디 더 객담을 사귀었다. 그런 뒤에는 제각기 갈라졌다.

견훤은 배가 첫번 포구에 닿은 곳에서 내렸다.

오래간만에 보는 고국 산천이며 의복·풍습 등은 웬만한 일엔 감동할 줄 모르는 견훤의 마음도 꽤 움직여 놓았다.

시국은 차차 더 어지러워가서 오늘은 어느 주(洲)가 반하였다, 어제는 어느 성이 반하였다 하고 연방 들리는 상서롭지 못한 소문에, 백성들은 전전긍긍(戰戰兢兢)히 그 날의 해가 무사히 서산으로 넘기만 바라고 지내는 중이었다.

시국이 이러하니 야망에 불붙은 견훤의 마음은 차차 조급하여 왔다.

어떤 수단으로써 일을 착수하나?

도당을 모을까?

도당을 모아서 한개의 적지 않은 세력이 된 뒤에 성을 치고 주를 삼켜서 자기의 목적을 이루나?

이렇게 주저하면서 달을 보내고, 달을 보내는 동안 그해도 어언간 넘어갔다.

그 해를 견훤은 거의 완산주(完山州)에서 보냈다. 일찌기 은사 도선에게서 백제 구역 중에는 완산주가 가장 가합하더란 말을 들은 견훤은 완산주의 어떤 한적한 집에 주인을 정하고, 무위의 그날 그날을 단지 벌에 나가서 말달리며, 활쏘며, 무술다짐으로 보내고 있었다.

지금 그가 타는 말은 이전 처음 길떠날 때 타고 나섰던 비룡(飛龍)의 손자로서 좋은 암말을 구하여 얻은 것이었다. 망아지 적부터 견훤의 손에 길들인 그 말은 그 한아비에게 지지 않는 명마였다.

새해의 정월이 지나고, 이월이 지나고 춘삼월, 견훤이 당나라에서 돌아온 만 일년 뒤였다.

어떤날 견훤은 역시 말을 달리어 벌에 나갔다. 벌에서 춘색(春色)에 유혹된 견훤은 차차 더듬어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산간으로 들어갔다.

한참을 가다가 문득 갈증(渴症)을 느꼈다. 말도 보니 목 마른 듯하였다. 견훤은 눈을 들어 살피었다. 어디 샘물이나 개천이 없나하여―. 그러나 불행이 그 근처에는 샘물도 개천도 보이지 않았다.

"물없는 산이 있담."

견훤은 혀를 찼다. 아까 온 길을 회상하여보아도 개천이나 샘물은 본 기억이 없었다. 그래서 더 앞으로 나아가기로 하였다.

한참을 더 나아갔다. 가면서 살피느라니까 저쪽 앞쪽에 인가가 두 채 보였다. 사람이 살면 반드시 물이 있을 것이다. 과연 거기까지 이르러 보매 우물이 하나 있었다.

견훤은 말에서 내려 말을 끌고 우물로 갔다. 꽤 깊은 우물이었다. 그런데 불행히 두레박이 없었다. 얕기나 하면 어떻게 변통이라도 하련만 깊은 우물이라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래서 인가에 두레박을 빌리러 가려 하였다.

막 인가로 가려고 머리를 들 때였다. 인가의 대문이 열리며 처녀 하나이 머리에 동이를 이고 두레박을 들고 나왔다. 나왔으나 우물에 웬 아지 못할 사내가 있으므로 대문 밖에서 그냥 머뭇머뭇하여 버린다.

견훤은 처녀를 보았다. 십팔세 가량의 한참 피려는 꽃이었다. 얼굴이 그렇게 신통히 예쁜 편은 아니었다. 예쁘다기보다―잘 생겼다기보다―기품이 있었다. 얼굴에, 몸 태도에, 자세에, 어디가 어떻다고 꼬집어 설명할 수 없는 기품이 역력히 나타나 있었다.

견훤은 잠시 목마름도 잊고 남이 보면 뻔뻔스럽다고 쑥스러울 만큼 처녀의 위아래를 보고 있었다. 그런 뒤에야 비로소 말을 걸었다.

"두레박을 잠깐 빌려수시오."

뚝스러운 어조였다.

거기 대해 처녀는 미소하며 대답한다.

"제가 떠 드리지요."

"말도 좀 먹여야겠는데요."

"말에게도 주지요."

처녀는 다시 집으로 들어갔다. 이번 나올 때는 사람이 먹을 그릇과 말이 먹을 그릇을 가지고 나왔다. 그리고 우물로 와서 익은 솜씨로 물을 길어 먼저 견훤에게 주고, 그 다음에 말에게 주고, 그런 뒤에 자기 동이에 물을 채웠다.

"잘 먹었으니다."

"다 잡수셨거들랑 그릇은 그냥 두고 가세요."

그런 뒤에 처녀는 동이를 이고 두레박을 들고 자기의 집으로 돌아갔다. 그 돌아갈 동안 견훤은 망연히 처녀의 뒷모양을 바라보고 서있었다. 뒷모양으로도 기품이 매우 높았다.

이튿날 벌에 나갔던 견훤은 자기로도 똑똑히 의식을 못하면서 그 산간을 찾아들어갔다. 그리고 진일을 처녀의 집 근처에 배회하면서 처녀에게 물도 몇 번 얻어먹고―이렇게 하루를 보내었다.

또 그 이튿날도 또 그 이튿날도 같은 일이 연해 번복되었다.

견훤은 스스로 자기의 양심과 마음보를 꾸짖고 물어보고 하였다. 단 한 가지의 굳은 결심으로 아홉살에 아버지께 하직하고 나온 이래 십년간 닦은 그 결심이 흔들림이나 받지 않았는가 하고 스스로 자기를 의심도 하여보았다.

그러나 이 일에 한해서는 아무리 스스로 꾸짖고 의심하고 해보았지만 조금도 양심에 부끄러운 그림자가 없었다.

한 십여일간을 싱겁게 번복하고 있던 견훤은 드디어 결심하고 처녀의 아버지를 찾아보았다.

오십이 좀 남짓한 점잖은 사람이었다. 나날이 어지러워가는 세태를 꺼리어서 산간에 숨은 사람인 듯하였다.

마주 앉아서 뚝하니 견훤이 내어던진 첫말이 이것이었다.

"노인장을 오늘 찾아뵈온 것은 다름 아니라 제가 이댁 사위가 되고 싶어서외다."

노인은 이 무식한 간청에 비교적 놀라지도 않고 잠시를 견훤의 인물을 건너보다가 입을 열었다.

"내 딸을 보았소?"

"예, 한 십여일간 매일!"

"그래 마음에 드오?"

"들기에 오늘 이렇듯 찾아오게까지 되었읍니다."

"당신 가문(家門)은?"

"똑똑히 어떤 집안이라 말씀드리기는 좀 어렵지만 아무데를 내놓아 누구와 대할지라도 결코 부끄러울 데가 없는 훌륭한 가문이올씨다."

"양친은 다 생존해 계시오?"

견훤은 머리를 숙였다. 한 순간 암담한 기분이 그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십년 전에는 생존해 계셨는데 그 이후는 알 길이 없읍니다."

노인은 약간 놀라는 기색이었다.

"그럼 양친께서 어디를 가셔서 생사불명이요? 혹은 당신이 십년전에 집에서 나와서 다시 돌아가지 않았소?"

"제가 나왔읍니다. 아버님께 맹세를 하였읍니다. 목적한 바의 일이 성취되기 전에는 다시 뵙지 왆겠다고, 아버님께서도 그렇게 엄명하셨읍니다. 그 뒤 간간 고향 근처를 지나다닌 일도 있읍니다만 집에는 들리지 않았읍니다."

"참 장하군. 그래 목적한 일이 성취되어가오?"

"모르겠읍니다. 어떤 때는 곧 눈 앞에 이른 듯도 합니다만 어떤 때는 가암해서 스스로도 판단할 수 없읍니다."

"그만큼 굳은 결심이니 그 목적이 무엇인지는 묻지 않는 편이 온당하겠지. 그러면 내 딸의 의향도 알아보아야겠으니 언제 다시 오오."

"당장 이 즉석에서 물어주시면 어떨는지요?"

노인은 고소(苦笑)하였다.

"꽤 급한 모양이군."

그리고 하인을 불러서 연꽃을 이방으로 보내라 명하였다. '연꽃'이 그 딸의 이름인 듯하였다.

견훤은 연꽃이란 그 이름이 과연 처녀의 기품과 적합하다고 생각하였다. 모란이나 장미같이 고운 맛은 없으나 기품높기 연꽃과 같다 생각하였다.

이윽고 처녀가 들어왔다. 들어오다가 견훤을 보고 한순간 놀라는 표정이었다.

"거기 앉아라."

아버지가 지시하는 곳에 처녀는 단정히 가서 앉았다.

"야, 너 이 젊은이를 아느냐?"

처녀는 얼굴이 도홍색이 되었다.

"대답을 해라. 아느냐?"

"네."

가느다란 대답이었다.

"다름이 아니라 이 젊은이가 너를 아내로 맞겠다고 청이로구나, 네 의향은 어떠냐?"

처녀는 푹 머리를 숙이고 더욱 얼굴을 붉힐 뿐 대답은 하지 못했다.

노인은 한번 더 처녀에게 의향을 물어보았다. 그리고도 대답을 못듣고는 이번은 견훤에게 말하였다.

"여보소 젊은이 수일간을 참으소. 여자가 시집간다는 것은 자기의 일생의 운명을 결정하는 중대한 일이여. 그런 중대한 일을 즉석에서 결정하고 대답하라는 것은 좀 경망스러운 일이니까, 집으로 돌아가서 기다리오. 이삼일 후에 다시 오면 그때 내 대답을 들어두었다가 전할 테니."

이 사리 당연한 말에 견훤도 더 고집을 부릴 수가 없었다. 섭섭하다는 느낌을 그다지 느껴보지 못한 견훤은 여기서 매우 섭섭한 느낌을 가지면서 저물어가는 하늘을 우러르며 말을 채찍질하여 집으로 돌아왔다.

그 뒤 삼사일간을 견훤은 매우 초조하게 지냈다. 날이 밝으면 장차 저녁때까지 짧지 않은 온종일을 보내기가 한심스러웠다. 날이 기울면 밤에 잠이 오지 않을지가 근심스러웠다.

이것은 전혀 견훤의 생전 처음으로 느끼는 감정이었다. 괴로우면서도 어디인지 상쾌하고 즐거운 감정이었다. 새날이 오는 것이 한없이 그리우면서도 그 진일을 보내기가 끔찍하였다.

다시 그 근처를 배회하기가 쑥스러웠다. 벌에 나가기도 염증이 났다. 진일을 집에서 몸을 이리 뒤치고 저리 뒤치며 딩굴었다. 집 주인조차 이 돌변한 견훤의 태도에 놀란 모양이었다.

견훤도 일찌기 누구한테 들어본 일도 없고 경험하여본 일도 없는 감정이라, 어찌하여야 할지 알지를 못하였다.

이렇듯 삼사일을 지낸 뒤에 드디어 승낙이 났다.

"자네."

하게 하였다.

"자네에게 불초한 딸을 부탁하네."

장차 그의 목적하였던 엉뚱한 꿈이 성취되는 날은 얼마나 기쁠는지 모르지만 아직까지 인간 만사에 그다지 감정에 큰 움직임을 받아보지 못한 견훤은 이 말 한마디에는 감격하였다.

수일 후 성례를 하였다.

완산주에 한적한 곳을 골라서 집 한채를 장만하고 신접살림살이를 시작했다. 남녀 비복도 몇 명 구해 들였다.

그 해 칠월에 임금이 승하를 하였다. 상서롭지 못한 소문은 국내에 쫙 퍼져서 여기서도 수근수근 저기서도 수근수근 자못 형세 불온하였다.

―지금까지 제일 태후와 좋게 지내던 상대등 위홍이 제일 태후에게 염증이 나서 제이 태후에게 돌아붙으면서 제일 태후 소생의 현황을 시(弑)하고 제이 태후 소생의(승하한 임금의 이복 동생인)왕제를 추대한다―이것이 민간에 떠돌아다니는 이야기였다.

아니나 다를까 현재 승하한 임금에게는 (서자이나마)왕지가 있었고, 궁실에서는 적서(嫡庶)를 그다지 따지지 않는 데도 불구하고 왕자가 위에 오르지를 못하고 왕제(王弟)가 등극하였다.

궁실에 이런 어지러운 일이 있는 동안에 변방에는 더욱 도둑이 창궐하여 이제는 신라 조정에서 호령하는 호령에 복종하는 지방은 옛날 가락(駕洛)·임나(任那) 등의 나라가 있을 때의 영역보다도 좁으면 좁았지 넓달 수는 없게 되었다.

강역이 좁아졌으니만큼 세공(歲貢)이 안 들어오매 호령에 복종하는 지역 안의 백석에게 대한 학정(虐政)이 더욱 심하였다. 더우기 위홍이 재상으로 앉아 사사로이 먹는 것이 많으매, 왕실은 조그마한 비용까지도 곤난을 겪는 때가 있었다. 그런 형편이라 호령 듣는 지역 안의 세공 독촉은 형언할 수가 없도록 심하였다.

그러는 일방, 조정에서는 부득이 군졸을 널리 모집하였다. 양병(養兵)도 비용이 걸리는 노릇이라, 위홍 개인의 입장으로 보자면 그런데 들어가는 비용까지라도 자기가 삼켜버리고 싶었지만 이제는 더 손을 놓고 방관할 수가 없게 되었다.

방(榜)은 전국에 나붙었다. 군졸의 녹봉을 후히 준다는 조건 아래서 전국에서 군졸을 모집하기로 하였다.

이 방은 완산주에도 네거리마다 붙었다.

어떤 날 밖에 나갔다가 네거리에 붙은 이 방을 보고 돌아온 견훤은 묵묵히 한참을 생각하였다.

자기의 목적을 달하기 위하여 도당을 모을까고도 그새 꽤 많이 생각도 하여보고 연구도 하여보았다. 그러나 그것이 조체의 일이 아니었다.

처음 오륙의 둥지를 얻어가지고 산채에 숨어서 행인의 재물을 엄습하며 간간 씀즉한 인물은 잡아올리며―이렇게 차차 세력을 느리노라면 혹은 힘깨나 쓰는 자들이 스스로 찾아도 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노릇을 하여 한개의 세력―한개의 국가와 대항할 세력을 혀성하려면 이것은 지난(至難)한 일이다. 끝끝내 강도질이나 하여먹다가 죽기가 십상팔구이다.

그래서 그는 선뜻 거기 아직도 착수를 못하고 있던 것이었다.

오늘날 신라 조정에서는 군졸을 모집한다 한다. 자기가 만약 여기응모를 한다 하면, 이 오합지중(烏合之衆)에서 자기는 삽시간에 승차를 할만한 자신이 있다. 그리하여 자기 수하의 군졸의 수효가 어떤 정도까지 늘어간다면?

자기의 수하에서 자기가 몸소 기른 군졸이면 그 하나가 넉넉히 다른 군졸 열명은 당해낼 것이다. 수하에 천명만 수하에 천명만! 이 천명이면 신라군졸 만명을 넉넉히 당해낼 것이요, 만명만 가졌으면 신라 천지는 한 번 넉넉히 뒤집어 놓을 것이다.

녹봉(祿俸)은 신라 조정에서 내어주고, 그 기른 군졸은 자기가 쓰고…. 꿩먹고 알까지 먹는다 하지만 이렇듯 꿩과 알이 겸한 자가 어디 다시 쉬우랴.

견훤은 드디어 종군하기로 작정하였다.

그때는 그이 새 아내는 태중으로 벌써 남에게 감출 수 없도록 배가 부른 때였다.

그 뜻을 아내에게 말하매 아내는 묵묵히 순종할 따름이었다. 단지,

"신라에 종군을 하세요?"

단지 한마디뿐이었다.

집이 가멸은 지라, 생활을 위하여 종군하는 바도 아니었다. 가문을 낯추고, 단란한 가정을 버리고, 사랑하는 아내를 그냥 두고, 장차 너덧달이면 세상에 고함칠 어린 애의 출생도 보지 않고 군졸이 되겠다는 것은 어느 모로 뜯어보아도 그렇다 할 곳이 없었다. 그러나 그의 새 아내는 남편을 굳게 믿거니 아무 딴 말이 없었다.

"대장부의 하시는 일에 아녀자가 어찌 주둥이를 끼우리까? 다만…."

눈물을 머금었다.

"이…이…."

자기의 배를 굽어보았다.

"아, 참 그것. 그것이 계집애로 나오거든 당신 마음대로 이름을 지으시오. 요행 사내가 나오거든 신검(神劍)이라 이름지으시오."

"그리하오리다. 다른 것이야 먹을 것 넉넉하니 걱정 있으오리까만 무슨 남겨둘 부탁이라도 없으신지요?"

"당신이 잘 알아차려 하니 내게 무슨 별다른 부탁이 있겠소?"

이리하여 간단히 집을 나섰다.

견훤의 입영 생활은 시작되었다.

가을에 입영하여 겨울을 지나 봄에 이르기 까지, 특별한 교련이라든가 하는 것이 없었다. 군대도 해이(解弛)되고 규칙이 문란하니만큼 일정한 교련방식이라든가 생활규칙이라든가 하는 것이 없이―.

상관은 자고 깨서 술먹고 가환을 부려먹기로만 일삼고 하관은 고누뜨기, 싸움질하기만 일삼고 하여 군대의 규칙이라든가 군대의 생활이라든가 하는 것이 없었다. 간간 군졸들을 이끌고 벌에 나가서 활쏘기 연습을 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놀이삼아 하는 것으로서 상관은 술이나 마시고 군졸들은 제멋대로 쏘며 놀며 할 뿐이었다.

이런 군대면 십만 백만이 있을지라도 오합지중일 따름으로서 아무데도 쓸 데가 없었다.

이러한 무규칙하고 문란한 가운데에서 견훤은 어떻게든 약간한 지반이라도 잡아가지고 그 지반을 기초삼아 차차 확대시켜 보려고 갖은 애를 다 쓰고, 정신 바짝 차리고, 한 기회를 놓지지 않으려 하였다.

어떤 봄날이었다.

그날도 교외에서 습사회(習射會)가 있었다.

그날 군졸 틈에 섞여서 자기 차례를 기다리고 있을 때에, 문득 하늘에 기러기가 한마리 긴 소리로 울면서 날아갔다. 상관도 그것을 쳐다보았다.

견훤은 순간을 유예하지 않고 활을 들었다. 당겼다가 놓은 순간 활을 떠난 살은 어김없이 하늘을 나는 기러기의 가슴에 가 박혔다. 가슴에 살을 맞은 기러기는 한 번 하늘을 핑 돌고는 사선(斜線)을 그으며 땅을 향하며 떨어져 내려갔다.

견훤은 몸을 날려서 비룡의 위에 올라앉았다. 사선을 그으며 벌 저 편 끝으로 떨어지는 기러기를 견훤은 말을 나는듯이 달려가서 그 기러기가 땅에 떨어지기 전에 받아 잡았다.

그 기러기를 가지고 돌아온 견훤은 그것을 상관에게 바쳤다.

"변변하지 못하지만 안주견훤은 그것을 상관에求??"

거기 대하여 상관은 입이 터졌다.

"그놈 장할씨구."

이리하여 견훤은 일개 군졸에서 소두(小頭―군졸 일백명을 지휘하는 두목)가 되었다.

소두에서 중두(中頭―이백명 두목)로, 중두에서 대두(大頭―오백명 두목)로 승차될 동안, 작년 칠월에서 국상이 난 만 일년 뒤인 금년 칠월에 새 임금이 또 승하를 하였다.

또 여러가지의 풍설은 민간에 떠돌아다녔다. 제일 태후에게서 제이 태후에게로 옮았던 상대등 위홍은 중노인(中老人) 제이 태후에게도 염증이 생겨서 제일 태후 소생의 공주와 어울렸다 하는 것이었다. 그러고 공주와 어울리기 때문에 지금 이 임금을 시(弑)하고 공주를 여왕으로 모시게 하였다 하는 것이었다.

과연 공주가 즉위하였다.

위홍은 제집에 나오는 일이 쉽지 않고 대내에서 먹고 자고 했다. 뿐 아니라 새 여왕이 즉위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위홍이 갑자기 변사를 하였는데, 여왕은 다른 각 대신의 반대를 억압하고 위홍에게 혜성대왕(惠成大王)이라는 시호(諡號)를 바치키로 하고, 그 장례에 있어서도 임금의 예식에 빙거하기를 엄명하였다.

대두까지는 간신히 기어올라갔다. 하지만, 그래도 아직까지 시골 군대서만 돌아다니던 견훤은 이 여왕 제이년에 경군(京軍)으로 뽑혀서 서울로 옮라갔다.

"비장(裨將―副將軍)한 자리."

이것을 목표로 견훤은 서울에서도 잠시도 마음을 놓지 않고 노력하였다.

서울은 그래도 시골보다는 안목이 높았다. 비록 그 품명은 대두라는 얕은 자리지만 출중한 그의 무예는 여러 눈에 띄고 여러 입에 오르내렸다. 그러나 그의 출신이 백제라 하는 점 때문에 좀체 승차가 되지를 않았다.

이렇게 불우의 세월을 한동안 보내다가 겨우 조금 두드러진 자리를 하나 얻어잡게 되었다. 서남쪽 해변이 너무도 소란스러우나 서울에서는 거리가 멀 뿐더러 거기 보낼만한 적당한 무장이 없어서 견훤을 변방장(邊防將)으로 승차를 시켜서 그리고 보낸 것이었다.

가는 길에 견훤은 자기의 집에 들려보았다. 맏아들 신검(神劍)은 견훤이 완산주의 병졸로 있을 동안에 출생하였다. 둘째가 그때 태중이었다.

무표정하고 왁살스럽고 커다란 견훤의 얼굴은 어른으로도 초대면에는 무시무시한 느낌을 받지 않을 수가 없다. 그 무표정한 얼굴이 그대로 어린 자식을 움켜 쳐들 때는, 약간 미소가 나타났다. 어린애도 이 왁살스러운 얼굴을 무서워하지도 않고, 생글생글 웃으면서 제 아버지를 쳐다본다.

"자식 복이 없느니라."

일찌기 스승 도선사에게서 이런 훈계를 들은 견훤은 지금 자기의 눈앞에서 생글거리며 해득거리는 어린애를 굽어보면서 스승의 그 말뜻을 생각하여보았다.

지금 눈앞에 두 아들이 생글거리고 있는지라, 자식이 없겠다는 말은 뜻이 서지를 않는다.

그러면 자식이 크도록 자라지를 못하겠단 말인가? 혹은 어리석겠다는 말인가?

사람의 수(壽)는 알 수 없는 것이로되, 이 아이는 건강하였다. 의외의 불행만 생기지 않으면 요사(夭死)할 것 같지는 않았다. 더우기 지금 둘이나 있고 둘이 다 건강하니 그 중 하나인들 구해지지 않으랴!

둘째 문제도 거리가 되지 않았다. 아무리 어버이가 자식을 보는 눈에는 에누리가 있다 하되, 둘 다 아직 갓난 애나마 총명하게 생긴 편이지 결코 어리석게 보이지는 않았다.

두 아이를 한 팔에 하나씩 껴안고 얼르면서 견훤은 옛날 스승이 자기에게 들려준 말을 속으로 여러번 되풀이하여 보았다. 그리고 제 아내에게 향하여,

"여보, 내가 따로이 말하지 않을지라도 어련히 하겠소마는, 나없는 동안 더욱 이 애들을 잘 가꾸어서 무엇보다도 든든한 애가 되게 하오. 결코 방심하지 마시오."

신신부탁을 하였다.

둘째는 양검(良劍)이라 이름지었다.

견훤은 이틀을 자기 집에서 묵었다.

그의 야망은 차차 성공의 길을 곧추 더듬어 나아가는 듯 하였다 지금까진 소위 오백명의 두목이라 하지만 상관의 지휘 아래서 자기는 중간의 기계적인 역할을 한데 지나지 못하였다. 이제 자기의 손 아래는 자기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천명의 군졸이 생긴다. 자기 위에는 자기를 지휘할 상관이 없다.

손아래 군졸을 잘 심복케 하여 이것을 토대로 삼아 장차 자기의 길을 닦아 나아가자.

병법?무술에 스스로도 이 천하에 자기를 대항할 자 쉽지 않으리라는 자신을 가진만큼, 이제 손아래 들게 된 일천의 군사를 잘 어루만질 자신이 넉넉하였다. 이 일천의 군사가 장차 백만의 백성을 위무할 토대가 될 것인가?

"어리둥둥 내 자식아!"

그의 체통이며 표정에는 당초에 어울리지 않는 이런 소리를 하며 속으로는 차차 성취의 길을 더듬는 듯한 느낌의 환희를 금하지 못하였다.

일개 병졸로 출발하여 말석이나마 장수의 한 자리를 점령한 따위의 일은 그의 커다란 야망에 비기건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이에 간섭하는 상관이 없는 지위에 올라 장차 이것을 토대로 하리라 생각할 때에, 비록 이 얕은 자리나마 그다지 불만스런 자리도 아니었다.

오래간만에 처자를 만나보는 반가움과 아울러 이 야욕의 성취의 길이 트여나가는 듯한 점까지 겹쳐 견훤의 마음은 흡족하고 또 흡족하였다.

이틀을 자기 집에서 묵고 임지(任地)로 향하여 떠나갈 때에, 비록 석별(惜別)의 섭섭한 정은 있다 할지라도 희망의 환희는 넉넉히 그 석별(惜別)의 슬픔을 삭이고도 남을 만한 것이었다.

장왕(將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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짙어가는 가을 날.

천하가 추색에 잠겼다. 세상이 어지러우니 추색은 더욱 추색다웠다.

봄을 보고(報告)하고 여름을 장식한 뒤에 가을이 되면 모두 자취를 감추는 나비건만, 그래도 어디 남아 있었는지 한쌍 뜰에서 팔팔 희롱을 하면서 날아다닌다.

다른 데로는 갈 줄을 모르는 나비인 모양이었다. 언제부터 있었는지 조반 직후에 내다보니 그때부터 희롱하면서 날아다니던 것이 해가 중천에 오르고 낮이 되고 하여도 그냥 딴 데로 갈 줄을 모르고 높이 올랐다 낮추 날았다 하면서 뜰에서만 논다.

비절(非節)에 나비가 온다는 것은 당시에 긴한 손님이 올 징조로 해석되고 있었다.

때는 진성여왕(眞聖女王)이 선 지도 이미 오년, 당나라 소종(昭宗) 경복(京福) 원년이었다.

견훤의 나이 스물 다섯―보통 예사사람으로 따지자면 여간 기분이 침울할 때에도 얼굴에는 어디엔지 청춘다운 활기가 보이고, 행동·동작에 민첩함이 보일 연령이었다. 그러에도 불구하고 견훤의 얼굴은 언제든 침울하고 무표정하였다. 그에게 가까이 시중드는 장졸들은 몇 번을 벌써 뜰에서 노니는 나비를 보고 오늘 기꺼운 손님이 오리라고 상관인 견훤에게 여쭈었다. 그러나 견훤은 머리 한번 끄덕이어 보지 않고 그냥 침울한 얼굴로 앉아 있는 것이었다.

근래 그의 머리에 걸려서 그를 성가시게 하는 문제가 있었다.

"궁예(弓裔)가 동(動)하기 시작했다."

이 문제가 그를 시끄럽게 한 것이었다.

금년 연하여 변방의 토호(土豪) 혹은 무장들이 반기(叛旗)를 드는 가운데, 북원(北原)에는 또한 양길(梁吉)이라는 토호가 반기를 들고 일어섰다. 그 양길의 부하 장수 가운데 궁예가 있었다. 궁예를 시켜서 주천(酒泉―지금의 寧越) 등지를 습격케 하였다. 궁예는 양길의 손아래에서 떠나서 양길의 군사를 잘 무마하여 자기에게 심복케하고, 양길의 지휘로써 습격하여 얻은 주천 등지를 자기의 세력권내로 하고, 양길의 세력하에서도 독립하였다.

양길에서 투신하기 전에 궁예는 기훤(箕萱)에게 투신하였다. 기훤은 죽주(竹州)에서 또한 반기를 들고 신라 조정에서 독립한 한 지대(地帶)의 수령 노릇을 하고 있던 토호였다. 그러나 반복무쌍한 궁예는 오래 기훤에게 심복해 있지 않고 곧 양길에게로 간 것이었다.

물론 아직 미미한 세력이라 스스로 일컫는 칭호도 없거니와, 군졸로 말할지라도 양길에게서 받은 약간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는 지금 거기서 군졸들과 고초를 같이 겪으며 인심을 모으며 일변으로 연방 군졸을 뽑아들인다.

이것이 견훤으로 하여금 더 침울케 한 것이었다. 동수산 산록에서 장차 누가 먼저 되는가 농삼아 내기하고 작별한 지 십여년, 자기는 훌륭한 스승을 구해 일방으로 도를 닦고, 잡술이나 연습하고자 돌아다닐 때에 아직도 하잘것 없는 한 개 중으로 박혀있던 그가 지금은 벌써 차차 세력을 확장하고 있는데, 자기는 그냥 신라의 한 변방장으로 이곳에 묻혀 있단 말인가!

변방장이라 하나 인물 없는 신라에서는 지금 장수를 추리라면 조정에서도 견훤으로서 으뜸을 삼으리만큼 그 사이의 무공은 컸다. 신라의 동남북 사면 어느 곳이든 서울서 좀 거리가 먼 덴 반적이 웅거하지 않은 곳이 없지만, 견훤이 지키는 서남방만은 오직 평온하고 누구 감히 머리를 들려는 자가 없다. 이것은 전혀 견훤의 세력의 덕으로서 조정에서도 그것을 몰라보는 바가 아니다. 그러나 견훤의 바라는 바는 그만 따위의 것이 아니었다.

궁예에게까지 뒤떨어진 자기의 현재를 생각하니, 가뜩이나 침울한 그의 얼굴이 더욱 침울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나비가 예언한 바 진객은 다른 사람이 아니었다.

왕사(王使)였다. 국방에 관해서 의논할 일이 있으니 서울로 좀 올라오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나라 조정에서 부르는 것이 아니고 임금이 직접 부른다는 것이었다.

그날 저녁 왕사(王使)를 위해 연회가 있었고, 연회 뒤에 각각 술에 취하여 제곳으로 돌아가서 잘 때에 견훤은 치소로 원노(元奴)를 불렀다. 원노는 백제 후예로서 본시는 이 서남면 방부의 한 종졸이었다.

그러나 그 무용(武勇)에도 남에게 앞섰거니와 입이 무겁고, 사람됨이 충직하고 순후한 위 더우기 지혜가 비상한 것이 어느덧 견훤의 눈에 띄어 뽑아올려서 참모로 삼고, 견훤 자기가 일이라도 바쁜 때는 견훤의 대리로까지 일보는 심복이었다.

입이 무거운 견훤과 역시 입이 무거운 원노가 마주앉았다. 좀체 이야기가 나올 듯싶지 않았다. 차차 깊어가는 가을밤에 두 사람은 말없이 마주앉아 있을 뿐이었다.

드디어 견훤이 먼저 입을 열었다.

"차행(此行)이 약하(若何)오?"

이즈음 경박한 신라 조사(朝士)며 유식계급들이 즐겨쓰는 투였다. 원노가 대답하였다.

"물론 아시겠지만 변방에 일어나는 반도(叛徒)들을 조정에서는 어찌할 수가 없어서 그 분부를 하려 함이겠지요."

"그렇겠지."

"그러면 소인 생각으로는 이렇게 하셨으면 좋을 줄 믿습니다. 즉 빈손으로 가실 수도 없고, 그렇다고 이곳 군졸을 전부 인솔하고 가셨다가는 도리어 세상을 경동시킬 염려가 있겠읍니다. 그러니까 이곳 장졸 중에서 가장 용맹 있고 믿음직한 자 백여명만 뽑아 인솔하시고 상경하시면 아마 나라에서도 군졸 얼마를 내려 주시겠지요. 이곳 군졸로서 나라 군졸을 견제케 하시면서 진군하시면 오합지중인 반장·반졸들은 얼마이고 염려가 없을 것이고, 그 중에서 또한 추려내면 심복 군졸 수천명은 쉽게 손에 들줄 압니다. 오천명의 심복 군졸만 가지면 천하에 두려울 자 어디 있으리까?"

"자네 의견이 내 뜻과 꼭 같으니."

견훤은 간단히 결론하였다.

남이 보자면 서남방 변방장을 전근시켜서 반적 토벌장으로 돌린다는 것이 그다지 큰 일도 아니요 별다른 일도 아니다. 그러나 견훤의 입장에서 보자면 적지 않은 일이다. 지금 남들은 이곳 저곳서 일어서서 대성(大成)은 못했으나마 한 성(城)이나 주(州)는 점거하고 호령을 하고 있는데, 자기는 조정의 명령으로 이곳에 정배오다시피 하여 생애상 중대한 타개책을 강구하지 않으면 안될 이때에 조정에서 이런 좋은 기회를 내려주는 것이었다.

그날 밤 꽤 깊도록 견훤은 원노와 협의를 하여 용맹 있고도 심복되는 장졸을 수십명을 선출하였다. 그러나 용맹과 충성을 아우른 군졸 백여명 선출은 갑자기 하기 어려운 노릇이었다. 며칠을 눈두어보아야 할 것이다.

왕사는 사흘 뒤에 돌려보내되, 그 왕사에게 견훤은 자기가 입경할 날짜를 미리 알려두기로 하였다. 닷새 동안 습진(習陣)을 하여 군졸을 선출하여 왕사 뒤를 따르기로 하고, 왕사에게 도중 각 역(驛)에 향군을 명해 두기를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원노와 의논을 끝내고 원로를 그의 처소로 돌려보내며 견훤은 뒤따라 대청에 까지 나섰다.

가을 맑은 하늘에는 임자년 살별이 꼬리를 길게 뻗히고 있다. 길한 징조냐? 흉한 징조냐? 무위의 수개년을 보낸 뒤에 지금 바야흐로 타개(打開)의 첫걸음을 내어밟으려할 때에 하늘에서 응하여 주는 저 징조는 내 장래를 지시함인가, 혹은 어느 다른 일이 이 세상 한 모퉁이에서 생겨남인가? 나의 길을 지시함이라 할진대는, 길(吉)에 응하는 징조인가? 혹은 흉에 응하는 징조인가?

댓돌 위에서 뒷짐을 지고 견훤은 무표정한 얼굴로 하늘을 한없이 한없이 우려보고 있었다.

"오늘 견훤이가 입경한다지요?"

"오늘 저녁에 온답니다."

대궐 서쪽 널따란 빈터에는 양지(陽地)를 찾아 여기 한 무리, 저기 한 무리, 젊은이 떼 늙은이 떼들이, 혹은 한담들을 하고 혹은 바둑을 두며 이 소란한 세월을 한가로이 보내고 있었다.

그 가운데 한 늙은이 패에서 이런 화제(話題)가 나왔다.

"구름을 피우고 불을 얼게 하고 날아다니고 하는 재주가 있다지요?"

"그렇답니다."

그 말에 돌아앉았던 노인이 참견을 한다.

"몸집도 얼마나 큰지 말은 타지를 못해서 용종(龍種)을 따로 기른답니다. 그러나 조화를 부릴 때는 콩알만하게도 돼서 부장(副將)의 주머니속에 들어다니기도 한다나요."

"그런 장수를 왜 변방장으로 보내 두었었을까?"

"글쎄. 나라에서 하는 일이 어디 일같은 게 하나나 있읍디까? 위에서는 당신네들 재미나게 지내시느라구 그런 장수가 있는지 나라가 어지러운지 온통 모르고 지내셨지요."

"정말 그런 훌륭한 장순지 누가 안압디까? 소문만한 것이 있는걸 보질 못했소이다. 넙적다리 보면 뭘 봤다는 세상에서, 힘깨나 쓰고 활깨나 쏘면 어쩌니 저쩌니 하지."

"아니 이번 견훤이는 정말 그렇대."

"정말, 뭐이 좀 나와서 세상을 휘둘러서 바로 펴 주어야지 이게야 밤낮 두선거려서 안심이 되지 않아 어디 살겠소이까? 하기는 살만큼 살기는 했지만."

이 구석뿐이 아니라, 서울 집집의 모퉁이 모퉁이마다 사람 두세명씩만 모인 곳이면 견훤이 이야기에 꽃이 피었다. 그리고 견훤이가 들어올 길에는 일찍부터 사람들이 자리를 다투어 지키고, 조정에서는 마치 상국 높은 사신이라도 맞이하 듯이 길을 모두 청결히 하고, 왕 대신으로 조카가 조정 고관들을 인솔하고 남교(南郊)에까지 마중을 나갔다.

이보다 앞서 견훤이 임지(任地)를 떠나기 전날, 제이 왕사(王使)가 이르러 견훤에게 비장(裨將)의 직을 주었다.

제사대 비룡(飛龍)의 등에 높이 앉아 백여명 장졸을 인솔하고 서울로 향하여 행군을 할 때, 그의 표정은 여전히 침울 일색 밖에는 없었으나 마음으로는 약간의 환희와 자유를 느꼈다. 장차 이 장졸로 근위대를 삼고 한나라에 군림할 날의 전초(前哨)와 같아서 그의 좀체 동하지 않는 감정도 약간 동하였다.

서울 가까이까지 이르매 마중나온 귀인들이 마중의 잔치까지 베풀고 기다리고 있었다.

견훤은 잔치가 달갑지 않았다. 그러나 군졸들을 위하여 잠시 교외에 기다려가지고 저녁때에야 성내에 들어왔다.

성내에는 한 영(營)을 비어가지고 견훤의 장졸들을 유숙케 하고, 견훤은 한 행궁을 쓰게 하도록 마련해 두었다. 그러나 견훤은 장졸들과 기거를 같이하겠다고 이 전례가 없는 융숭한 대우를 초라히 거절하였다.

견훤이 장졸들과 함께 영에 들어 자리잡을 겨를도 없이 대궐에서는 또 사자가 와서, 저녁에 왕의 사연(賜宴)에 오라는 분부였다.

"피곤해서 일찌기 자겠다고 여쭈어 주시오."

이것이 견훤의 대답이었다.

임금의 영광스러운 잔치에 안가는 법도 없거니와, 왕의 사연을 거절한다는 무례도 또한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것을 그대로 임금께 회보할 수도 없고, 다른 적절한 구실을 발견할 수도 없어서 입장이 곤난하게 된 사자는 다시 견훤에게 꼭 사연에 참석하기를 간청하여 보았다. 거기에 대하여 견훤은 잠시를 사자의 얼굴을 보다가,

"나는 한번 한 말을 번복할 줄 모르오."

할 뿐 외면하여 버렸다.

피곤하다고 왕의 연석에도 참례를 않은 견훤의 영에서는, 견훤이 자기의 장졸들에게 그 사이의 길걸이에 대한 위로의 잔치가 열려서 밤이 꽤 깊도록 그 동네를 소란케 하였다.

이튿날 아침, 조반을 먹은 곧 뒤에 견훤은 사람을 대궐로 보내서 인제 참내하겠읍니다고 예통하게 하였다.

시각이 견훤에게는 조반 후이나, 대궐에서는 밤중으로 여길 시각이었다. 밤늦게 잔치가 있고, 동틀 녘이 되어 겨우 자리에 드는 대궐의 습속으로 보자면 지금은 꼭 한밤중이었다.

어제는 임금의 분부로 오라하되 오지 않고, 오늘은 한밤중에 참내하겠다 라는 이 야인(野人)―그러나 이번에 견훤을 부른 것은 조정이 아니고 임금의 친명이었으니만큼 대신들의 의견 뿐으로 물리칠 수가 없어서 궁중에 통하였다.

궁중에서도 난처하였다. 어제 '참내 못하겠읍니다'고 할 때는 임금의 노여움이 지극하여 평생 다시 견훤을 부르지 않을 듯하였다. 그러나 임금의 성격이 괴벽하여 정심이 없느니 만큼 지금 임금의 뜻을 묻지 않고 견훤을 물리쳤다가는 또한 어떠한 꾸중이 나올지, 견훤을 물리치기도 어렵게 되어, 늙은 여관 두 사람이 의논을 한 결과 침전문을 방긋이 열고 엿보아 요행으로 임금이 깨어 계시면 이 일을 여쭙고, 그렇지 않으면 견훤에게 조금 기다려서 참내하라고 말하리라고 침전문 앞으로 갔다.

침전을 지키는 여관에게 작은 소리로 사세를 설명하였다. 그리고 침전 문을 한치쯤 열어주기를 빌었다.

그때였다.

"견훤이 참내했느냐?"

침전안에서의 여왕의 음성이었다. 벌써부터 깨어서 여관들의 의논을 대강 들은 모양이었다. 여관들은 뜻하지 않고 그자리에 부복하였다.

"네이."

한결같이 대답이 나왔다.

"소싯물 가져오너라. 만나리라. 충위각(忠衛閣)으로 모시어라."

"아직 참내한 바가 아니오라, 지금 참내하겠노라고 하옵니다."

"소시 준비하여라."

"네이."

임금은 황황히 일어났다.

그것은 마치 시정(市井)의 아녀배가 정랑을 맞으려는 태도와도 흡사히, 임금은 화장을 아름다이 하고 여왕으로서의 정장(正裝)을 피하고 여인으로서의 가장 화려한 옷을 택하여 입었다.

그런 뒤에 견훤의 입궐을 기다렸다.

임금은 충위각에서 견훤을 보았다.

다른 대신은 부르지 않고 두 아리따운 소년이 칼을 받들고 임금 좌우에 모시고, 저편 뒤에는 사관(史官)이 초일기(初日記)와 붓을 가지고 기다리고 있는 가운데서 견훤은 난생 처음으로 부복례(俯伏禮)를 하였다. 그러면서도 순간의 틈을 얻어 임금을 우러러보았다.

외신(外臣)을 만남에 대관이나 근신 이외에는 발을 들이고서야 보는 격심임에도 불구하고 임금은 이 초대면의 젊은 무장을 대함에, 정전(正殿)에서 부르지를 않고 편전(便殿)에서 더우기 발까지도 걷고, 삼중 방석위에 당시의 여인의 보통 앉는 습속을 따라 한 무릎을 세우고 그 무릎에 한팔을 얹고 양손을 맞잡고 앉아서 맞았다. 왕관·정장 모두 걷어 치우고 한개 젊은 여인으로서 견훤을 본것이었다.

그 앞에 부복하면서 순간의 틈으로 임금을 우러러 보매 스물 대여섯쯤 되었을 춘추로서 남향하여 앉은지라 남창에서 비치는 빛을 가득이 받은 얼굴은 만월과 같이 실하였다. 그러나 그 눈가에 흐르는 미소에는 다분히 음란한 빛이 있었다. 연지를 많이 찍은 그 입도 적지 않게 음기가 보였다.

"먼 길에 피곤하시겠소."

간단한 말이나마 음성이 매우 낭랑하였고 발음이 여간 부드럽지 않았다.

"소신은 본시 피곤한 줄을 모르는 위인이올씨다."

엊저녁 이 임금의 사연에 '피곤해서 못가겠노라'고 한 그의 입에서 나온 대답이 이것이었다.

"들으니 웅략이 아주 비범하시다구. 봐하니 아직 연치도 많지 못한 듯한데 어느 겨를에 그렇듯 수업을 하셨수?"

한두 마디의 대화 뿐으로 벌써 대인응대에 능한 이 임금의 본질을 알아볼 수가 있었다.

"무능 무재한 소신이로소이다. 남아 십오세 대장부라 하옵는데, 대장부된 지 십년에 겨우 성주께 헛소문이 들려 비장(裨將―副將軍)이라는 감당키 힘드는 소임을 맡게 되었읍니다."

"그럼 올에 스물다섯이요?"

"쓸데없는 나이만 적지않이 먹었읍니다."

"나보다 한살 아래로군."

임금은 스물여섯이었다. 그러나 그 대인교제에 능한 점으로 보아서는 사십 이상의 중년녀라고도 볼 수 있는 반면에 고생을 모르고 지난 위에 화장에 능한지라 이십 미만의 처녀같이 보일 때도 있었다.

"참 고향이 어디시라구?"

"상주 가은현(尙州加恩縣)이올씨다. 대대로 농사를 지어먹던 천한 백성의 자손이로소이다."

견훤은 순간의 기지(機智)로 거짓말을 하였다. 지금 생애의 국면을 타개하려는 첫걸음에서 백제라는 점이 탈로가 되면 여태까지 노력이 허사이기 때문이다.

"거짓말이겠지. 농군집 자손이 아닌데. 게다가 백제 사투리가 많고."

임금은 벌써 십년의 친구인 듯이 농담쪼로 응하였다.

견훤은 가슴이 선뜻하여 임금을 쳐다 보았다. 그리고 임금이 그다지 개의치 않은데 안심하였다.

"영암(靈岩) 도선사(道善師)의 문하에 오래 있있기 때문에 백제 사투리가 있읍니다."

견훤도 이만큼 치워 버렸다.

그다지 긴하지 않은 이야기가 잠시를 더 계속된 뒤에야 임금은 비로소 견훤에게 이번 부른 까닭을 말하였다.

견훤이 예측하였던 바와 같은 일이었다. 지금 도둑무리가 사방에 일어서 국가기강(國家紀綱)을 어지럽게 하며, 그 중에도 양길이며 궁예같은 거대한 자까지 있어서 이를 진압하고자 하나, 조정에는 그럴만한 실력을 가진 장수가 없어서 견훤을 불렀다는 것이며, 그 사이 견훤이 서남방을 지키고 있었으므로 그곳은 안온하였다는 치하며, 서남방도 중요하지만 국가로서 두통거리되는 것은 북방에 웅거하고, 단지 웅거해 있을 뿐 아니라 나날이 국도(國都) 가까이 침범해 들어오는 비도들이니 잠시 서남방을 비워두고라도 북방을 먼저 진압하여야겠다는 것이며, 지금 나라의 군사가 부족하여 일천명 군사 밖에는 내어주지 못하겠으나 견훤이면 이 적은 군사로도 넉넉히 도둑들을 토평할 줄로 굳게 믿는다는 말을 임금은 그 흐르는 듯한 말솜씨로 일변 견훤을 올려추켜가면서 설명하였다.

국가에 큰 걱정인데 이 문제를 근심스럽지도 않은 듯이 명랑한 솜씨로 설명하는 자초지종을 견훤은 묵묵히 들었다.

궁예 토벌?

양길 토벌?

그 따위는 견훤은 생각지도 않았다. 지금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천여명의 장졸을 인솔하고, 공공히 가고 싶은 곳에 가고, 치고 싶은 곳을 치며, 공공히 군졸을 모집할 수 있는 권한이 자기의 손안에 들어오려 한다.

신라왕의 이름을 가탁(假託)하여 신라서 군졸을 모집하여 신라의 성을 치고, 가는 곳마다 그곳 성주(城主) 도독(都督)에게 향군(嚮軍)을 명하고, 무기(武器)를 징발하고…. 이리하여 왕명을 배경으로 백제 복벽(復?)을 도모한다.

생각컨대 이런 희극이 어디 있으며 이런 비극이 어디 있을까?

평생을 침울한 얼굴 밖에는 하여보지 못한 견훤의 얼굴에 이때에 비로소 잠깐이나마 침울한 그림자가 사라지고, 그 대신 보통 얼굴이 되었다가 그 뒤를 따라 어렴풋한 미소가 나타났다.

그러나 그의 얼굴에는 미소가 어울리지 않는다. 미소가 나타나매 그야말로 싱거운 얼굴이 된다. 한 순가 고자(宦者)와 같은 얼굴이 되었다가 다시 보통 얼굴로 되었다가 또 다시 침울한 얼굴로 그런 뒤에 입을 열었다.

"양장(良將)이 위에 있으면 용졸(勇卒)이 되기는 사양하지 않겠읍니다만 장(將)이 되긴 소신이 감당하지 못할 바로소이다."

"양장의 아래서 용졸이 될 수 있으면 양군(良軍)의 아래에선 용장(勇將)이 되겠지. 내 양군이 될 테니 내아래서 용장이 되시오."

말로는 도저히 이 임금을 당할 수가 없었다.

"용장까지는 되겠읍니다마는 지(智)없는 용(勇)을 무엇에 쓰오리까?"

"용(勇)없는 지(智)는 또한 무엇에 쓰리요. 내 굳게 믿고 맡기는 바니 사양하지 마시오."

"성은을 보답할 길이 없음을 한탄하옵니다."

이리하여 이것으로써 이 문제는 일단락을 맺았다.

견훤이 퇴궐을 하려 하매, 임금은 오늘 저녁 다시 견훤을 위하여 잔치를 열겠으니 오늘은 사양 못하리라는 말과, 그다지 바쁘지 않으면 저녁잔치까지 정청에 나가 대신들과 시국에 관한 상황이나 의논하며 기다리란 분부를 내렸다.

"오늘 또 사양하겠다면 저녁까지 결박지워 이 방에 가두어 두겠소."

임금은 견훤에게 대하여 이런 농담까지 하였다.

거기 대하여 견훤은 자기는 지금 백여명 장졸의 두령이니 야연(夜宴) 때까지 그냥 대궐에 머물러 있기가 민망스러운 뜻을 아뢰고, 일단 나갔다가 다시 저녁에 참내하기로 하고 대궐을 물러나왔다.

밤에 견훤은 임금의 연회에 참례하였다. 전혀 견훤을 위한 연회인지, 다른 대신은 한 사람도 없었다.

더욱이 기괴한 것은 여악(女樂)·여령(女伶)·여무(女舞) 등이 일체 없고, 계집의 대신으로 모두 열두세 살로 부터 열일곱씩난 미소년들을 쓰는 점이었다.

"오늘 이 잔치는 특별히 경을 위해서 푼은 것이니 마음껏 노시고 마음껏 취하시오. 군신지간이라는 생각을 버리고 좋은 친구하고 대작(對酌)하는 마음으로 어렵게 아는 생각이 없도록 놉시다."

이런 분부가 없을지라도 다른 사람이 없는 잔치니 전혀 견훤을 위한 잔치라는 것은 재삼 말할 필요도 없다.

먼저 임금이 옥배(꽤 큼직한)를 들었다. 모시던 소년이 금주전자에 든 술을 가득히 부었다.

임금은 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소년들의 부르는 노래와 음악이 들리는 중에 임금은 단숨에 절반만큼 들여마셨다. 그런 뒤에 잔을 입에서 떼고, 살그미 눈을 들어 견훤을 건너다보았다.

"자, 내 절반을 마신 잔을 비장께 드리노니 사양하지 말고 자시오."

잔을 내어밀었다.

모시던 소년 가운데 하나가 빨리 그 잔을 받아서 견훤에게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양손으로 받혀 견훤에게 잔을 권하였다.

이것은 물론 임금이 신하를 중하게 여겨서 그 뜻을 술잔으로 표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젊은 여왕으로서 젊은 장수에게는 마땅히 삼가서 이런 일까지는 피하여야 할 것이었다. 견훤은 눈을 들어서 여왕을 쳐다보았다. 여왕의 표정―그것은 임금이 신하를 사랑하는 표정이라기보다 오히려 단지 한낱 젊은 여인의 표정일 따름이었다.

"황공무지로소이다."

견훤은 여왕의 남긴 반잔 술을 받아 마셨다. 그리고 잔을 소년을 주어 여왕께 올리려 하였다.

그때에 임금이 말하였다.

"군주가 신하를 중히 여겨 한잔 술을 나누어 마셨거든, 신하는 군주께 그만한 충성을 못가졌소?"

견훤은 또 한번 힐끗 여왕을 쳐다보았다. 휘황히 켜놓은 촛불 아래 짙은 색채의 옷으로 장식한 여와의 자태는 오히려 요염한 편에 가까웠다. 이미 처녀 시절부터 재상 위홍(魏弘)을 가까이 하였고, 등극한 뒤―더우기 위홍이 죽은 뒤에는 수 없는 미소년이며 젊은 재상을 가까이 한 이 여왕은, 임금으로서의 위의(威義)보다도 여인으로서의 애교를 더 풍부히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견훤은 내밀었던 잔을 도로 옴쳤다. 그것을 기다린 듯이 소년이 잔에 술을 부었다. 견훤은 그 잔을 들어 절반쯤만 마셨다. 그런 뒤에,

"더러운 잔이옵니다마는 성군을 사모하는 정으로."

하면서 기다리는 소년에게 내어맡겼다.

이리하여 한잔의 술은 교환되었다.

그 뒤에도 혹은 절반씩, 혹은 제각기, 이렇게 연방 술잔은 오르내렸다.

임금은 술이 억배였다. 얼마를 마셔도 취기는 얼굴에도 눈에도 혀끝에도 나타나 보이는 일이 없었다. 받아도 또 받아도 그냥 한없는 주량이었다.

"어디 검무를 한번 추어보시오."

이윽고 임금은 견훤엑 분부하였다. 그러나 그런 방면에는 소양이 없는 견훤은 검무를 출줄 몰랐다. 그래서 그 뜻으로아뢰었다. 그랬더니 그럼 아무것이나 아는 것으로 추라 한다.

"우아(優雅)한 놀이를 모르는 무변(武邊)이오라 아무것도 아는 바가 없읍니다."

사실대로 아뢰었다. 그랬더니 임금이,

"그럼 내가 처용(處容)의 춤을 추어 볼 터이니 서툴다고 너무 웃지 마시오."

하고 몸을 일으켰다.

처용의 춤이라는 것은 지금으로부터 한 십여년 전 이 여왕의 오라버님되는 헌강왕(憲康王) 때에, 헌강왕이 학성(鶴城)에 거둥하였다가 거기서 만난 처용(處容)이라는 사람이 꾸며내었던 춤이었다. 헌강왕은 그때 처용을 대궐로 데리고 돌아와서 대궐에 묵혀두고 궁인들에게 가무를 연습케 하였으므로, 당시 열너덧살의 공주―지금의 영왕은 가무에 꽤 능하였다.

소년들이 울리는 요량한 음악에 어울리어 나비와 같이 넘나노는 여왕의 자태는 선녀(仙女)라기보다 기녀(妓女)에 가까웠다.

펄럭이는 소매, 휘감도는 치마, 그 속에서 움직이는 풍만한 육체 등을 견훤은 취안을 들어 우러러보고 있었다.

한바탕 춤을 추고난 여왕은 피곤한 듯이 자리에 돌아와 앉았다.

"자, 또 다라라. 좀 더 마셔야겠다."

또 술을 청했다.

"비장 어디 나하고 내깃술을 하여볼까?"

"신하가 무슨 일이든 어찌 임금을 이기오리까?"

"여자의 주량(酒量)이 어찌 남자, 더욱―장수를 대적하겠소마는 좌우간 해봅시다."

드디어 군신간(君臣間)에 술내기까지 시작이 되었다.

어느때쯤인지는 모르나 견훤은 깊은 잠에서 깨었다.

먼저 코를 찌르는 향내를 느꼈다. 동시에 갈증을 느끼면서 눈을 떴다.

휘황한 촛불이 보였다. 그와 함께 눈에 뜨인 것은?

그의 얼굴에서 다섯치도 되지 못하는 가까운 거리에 웬 여인의 얼굴이 있었다.

한순간에 견훤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 것은 세일 수없는 무수한 생각이었다.

첫째로는 자기는 완산주 자기 집에 있고, 지금 보이는 여인은 자기 자기의 아내라는 생각이었다.

그 다음으로는 지금 자기는 어떤 창기의 집에 누워 있거니 하는 생각이었다.

웬 여인인가 하는 생각도 있었다.

자기는 임소(任所)를 떠나서 서울에 와 있거니 하는 생각도 났다.

대궐의 잔치도 생각났다.

그 밖에도 여러 가지의 생각이 한순간 사이에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술기운 때문에 아직도 눈의 촛점(焦點)이 맞지 않으므로 한쪽 눈을 잔뜩 찡그리며 머리를 뒤로 더 물리고 다시 여인의 얼굴을 보았다.

웬만한 일에 놀랄 줄을 모르는 견훤이로되 여기서는 너무도 놀라서 가슴까지 서늘하였다.

여왕이었다. 여왕이 견훤과 한자리에 누워서 만면에 미소를 띠고 견훤의 놀라는 양을 보는 것이었다.

견훤은 몸을 일으커려 하였다. 그러나 여왕의 팔이 그를 못 일어나게 하였다.

대궐에서 보통 일어나는 시각 오정에야 견훤은 일어나서 아침상도 여왕과 함께 하고, 자기의 영으로 돌아온 것은 미시(未時)도 지나서였다.

돌아와 보매 영에서는 원노(元奴) 이하의 말졸(末卒)에 이르기까지 모두 무장을 하고 살기가 등등하여 마치 당장 어디 습격이라도 가려는 군대인 듯하다.

그들은 견훤을 경희(警喜)하며 맞았다. 사연을 알아보매, 그들은 견훤이 대궐에 들어가서 나오지 않으므로 조금 더 기다려보아 대궐로 습격을 가려던 중이라 한다.

밤 사이에도 여러번 대궐로 갔었다고 한다. 대궐에서는 매번 아직 연회중이라 하므로 하릴없이 그냥 돌아오고 하였는데, 다섯번째인가 여섯번째인가 갔을 때는 '취해서 그냥 대궐에서 주무신다'는 것이었다. 매우 의심쩍었다. 아무리 취하였다 할지라도 대궐에서 재운다는 것도 이상하였거니와 견훤도 대궐서 그냥 잘 사람이 아니었다. 매우 의심스럽기는 하나 좌우간 날이 밝기까지 기다려보기로 하고 밝은 뒤에 곧 대궐로 사령을 보냈더니, 아직 기침하지 않았다 하며 대궐에선 오시(午時)나 되어야 기침(起寢)을 하니까, 기침하여 조반까지 자시고 퇴궐하자면 적어도 미시(未時)는 지내야 되리라 하므로, 지금 모두들 무장을 하고 신시(申時)까지만 기다렸다가 그때까지도 안돌아오면 견훤의 신상에 무슨 불길한 일이 있는 것으로 인정하고 대궐로 달려가서 살아 있으면 구출(救出)하고, 벌써 해를 입었으면 복수를 하리라고 벼르던 중이라한다.

견훤은 자기의 지난밤에 지난 일과, 자기 부하들의 근심을 대조하여 생각해보고 속으로 고소(苦笑)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견훤은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체력(體力)이 과인한 그로도 피로함을 느꼈다. 곤한 몸을 무겁게 자리에 주저앉히며 안석에 몸을 기대었다.

가지가지의 생각이 그의 머리속을 오락가락 하였다. 이백 수십년 전, 나라가 깨어지고 종사가 무너지는 날 견훤 자기의 직계조상(直系祖上)인 의자왕(義慈王)이 멀리 당나라로 잡혀가고, 그의 비빈이며 궁녀들은 신라와 당나라 장졸들에게 갖은 욕을 다보고 용용히 흐르는 사자수[泗?水]를 향하여 낙화암에서 몸을 던져 목숨까지 끊었다.

그 원수를 그때의 비극에 지지 않게 참혹하게 갚으려고 나선 자기다.

그때의 그 비극의 피해자의 직계 후손인 자기와, 그때의 승리자의 직계 후손인 여왕과의 기괴한 인연은 이를 욕보였다고 볼 것인가? 혹은 욕보았다고 볼 것인가?

이번의 일은 이백여년 전의 그날의 일과는 아무 관련도 없는 것으로서, 여왕의 측으로 볼지라도 일상 다반사(茶飯事)의 하나에 지나지 못하는 일이요, 자기와 측으로 볼지라도 지나가는 오입에 지나지 못한다. 자기의 본래의 계획, 본래의 목적은 아직 뚜껑도 열리지 않은 채로 곱다랗게 그냥 남아 있다.

먼저 국가와 종사의 회복을 보아야 할 것이다.

다음에는 분명히 저쪽에서 치가 떨리게 인식될 만한 커다란 욕을 저쪽에게 내려부어주어야 할 것이다. 천만대까지도 잊지 못할 큰 수치를 내려주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지금 받는 이 치욕은 분명히 이백여년 전에 자기네의 조상이 백제의 조상에게 내려준 그 품갚음이라는 점도 똑똑히 인식시켜 주어야 할 것이다.

오늘의 이 일은 내게 있어서도 욕을 준 것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저쪽에 있어서도 욕을 본 일이 아니로다. 서로서로의 임시적 쾌락, 임시적 흥취에 지나지 못한다.

피곤한 몸을 안석에 기대고서 이러한 생각에 잠겨 있던 견훤은 그냥 피곤한 다리를 길게 뻗고 드러누워 버렸다.

다음 순간에는 집이 떠나갈 듯이 코를 고는 소리가 들렸다.

견훤은 한참을 푹 자고나서 저녁을 먹고 원노 등을 방에 불러가지고 한참 한담들을 할 즈음 대궐에서 또 야연이 있으니 들어오라는 전령이 왔다.

견훤은 서슴지 않고 일어났다.

"내 염려는 아주 말게. 혼장인들 백명은 당해낼 테니, 무슨 일을 만나면 한바탕 소란도 없이야 변을 겪겠나? 오늘도 입궐하면 혹은 밝는 날에야 돌아올는지도 모르겠으니 아주 마음놓고들 자게."

막하 장병들에게 이런 부탁을 남기고서, 대궐에서 인도하는 불에 길을 살피며 비룡을 타고 시위졸 두 명만 데리고 또 대궐로 향하였다.

임금은 이상히도 이 음침하고 애교 없고, 예절 없고 말이 적고 (임금이 묻는 말에 대답은 잘하지만 자진하여 말을 꺼내는 일이 적었다), 어떻게 자진해 말을 한다는 것이 그것은 도리어 감정날 말이나 툭하고…. 상갓집(喪家) 조객(吊客)이라고나 하는 편이 격에 맞을 이 뭉퉁한 사나이에게 몹시 마음이 끌린 모양이었다.

이 임금이 공주 적부터 가까이 한 위홍(魏弘)을 빼놓고는 한 사나이를 두 번 본 일이 없었다. 미소년과 젊은 재상을 적지않이 가까이 하였지만 모두가 한결같이 단 하루였다. 단 하루를 본 뒤에는 벼슬을 주거나 혹은 벼슬을 돋구어주거나 할뿐, 그 뒤에는 다시 부르는 일이 없었다.

그렇던 임금이, 교제상으로나, 미적(美的)으로나, 아첨하는 점으로나, 흥취로나, 아무 점으로도 보잘것 없는 이 견훤을 위하여 매일 야연을 열었다. 그리고는 이튿날이라야 내보냈다.

본시 견훤을 임소(任所)에서 부르기는, 중대하고 시급한 임무를 맡기기 위해서였다. 하루바삐 도로 길을 떠내보내어야 할 사람이었다. 그 위에 변방의 흉보(凶報)는 나날이 급하였다. 하루가 바쁘고 한시가 바쁜 형세였다. 웬만한 사정이 있더라도 그 사정을 끊고 떠내보내야 할 사람이었다.

게다가 대신들의 재촉도 나날이 심해갔다. 대신들도 하루 이틀은 가만 있었지만 닷새가 되고 열흘이 되고 하여도 임금은 야연에만 생각을 두고 변방 어지러운 것을 잊은 듯이 있으매, 재촉이 차차 노골화해가고, 심해가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질투심까지도 섞인 감정이었겠지만 이 임금의 총애를 한몸에 사고 자기의 책임이며 할 일은 잊은 듯이 있는 뭉퉁한 사나이를 조정에서는 한결같이 증오의 눈으로 보았다.

임금이 견훤을 장군으로 승직을 시키자는 의논을 꺼내었을 때, 온 조정은 들고일어나서, "서남방을 잘 지킨 공으로 비장(裨將)으로 승직시킨 지 날짜도 얼마 안 되거니와 그 뒤 세운 공도 없사오니 또 이 위에 승직시킬 연유가 없읍니다."

고 반대를 한 것은 순전히 견훤에게 대한 증오심에서 나온 바였다.

견훤으로 보자면 임금의 총애도 별로히 신통하게 기쁜 일이 아니었다. 온 조정의 증오도 별로히 두렵거나 싫거나 한 바도 아니었다. 모두가 단지 일시적 희롱이요 유희일 따름이었다. 좀 더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그사이 한동안 독신 생활을 했기 때문에 좀 과(過)히 적축(積蓄)되었던 정력을 처치하는 놀이일 따름이었다.

이렇듯 보는 사람에 따라서 견해를 달리하는 이 일이 거의 한달이나 계속되었다. 이제는 견훤도 염증이 나서 중지하여버릴까 생각하는 그 어느날이었다.

드디어 임금은 재상들에게 졌다. 하릴없이 견훤에게 군사 일천명을 주어서 떠내보내기로 하였다.

그 동안, 경군(京軍) 전부를 서교(西郊)에 불러 견훤이 직접 지휘를 하여 사흘 동안은 습진(習陣)을 하였다. 그리고 그 가운데서 견훤이 직접 일천명을 골라 뽑아서 따로 영에 두고 매일 맹연습을 시켜왔다. 낮전에는 원노가 지휘하고, 낟뒤에는 견훤이 퇴궐하여 지휘하고, 이리하여 본시 이만명의 경군 중에서 뽑은 일천명인데다가 반삭남아를 맹연습을 시킨건 만큼 꽤 정예한 군사가 되었다.

이 정군 천여명을 거느리고 길떠나기로 된 전날밤 꽤 늦도록 견훤은 자리에 들지 않았다. 남은 것은 새벽 동틀녘에 길떠난다고 임금께도 하직하고 그새 사귄 재상들과도 작별을 하였는지라 이제는 길떠나기 전에 한잠 잘 일밖에는 남은 일이 없었다.

길떠난 뒤에는?…

길떠난 뒤에는 성공의 탑을 향하여 일로 매진할 뿐이로다. 웬만한 킅 고장만 생기지 않으면 자기의 전도를 막을 자 없다.

일이 이렇듯 순순히―저절로 펴 나아갈 줄은 꿈에도 바라지 못했던 바이다.

신라 임금의 명령을 받아 공공히 하는 행군이라, 어느 곳을 갈지라도 약탈이라는 행동을 하지 않고도 군기를 징발할 수 있고, 미리 전령 한 사람만 보내두면 어느 곳을 갈지라도 벌써 장졸(將卒)의 먹을 것이 준비되어 있을 것이고, 장졸의 잘 곳이 작정되어 있을 것이다.

이러한 향응을 받으며 백제의 구역(舊域)까지만 간 뒤에는 자기의 행동은 천하에 자유이다. 그 뒤부터는 가식(假飾)할 필요도 없고 신라 왕명을 가탁할 필요도 없다. 정정당당히 천하에 내놓고 백제군사를 모집하고 백제군의 향응을 명할 뿐이다.

먼저 아버님의 계신 무진주(武珍州―光州)로 달려가자. 아버님?어머님은 건재하신가? 어머님은 혹 모르시는지도 모르지만 아버님으로서 아직 생존해 계시다면 얼마나 오늘이 올 것을 기다리렸을까!

아홉살에 집을 떠나 지금까지 뵌 일이 없는 부모의 생각이, 일이 급기야 이만큼 되고보니 그립기 한량없다. 아직까진 일이 되기 전에는 다시 못뵈올 부모라고 단념을 하였으매, 오직 성사의 일로로 학문과 무예를 닦는 데만 애를 썼지, 그다지 그리운 줄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천우요 신조였다. 막연히 바라보던 이 꿈 갑자기―너무도 갑자기 그의 앞에 탁 나타났다. 천우가 있고 신조가 있어서 오늘날 이만큼 된 일인지라, 이 일이 장차 역전(逆轉)된다든가 불성공한다든가 하는 변이 생기지나 않을까 하는 비관적 방면은 생각하여 보려고도 않았고 그럴 필요도 느끼지 않았다.

그가 그의 몸을 커다랗게 자리 위에 내어던질 때는 그의 입에서는 마치 맹수의 부르짖음과도 비슷한 홍소(哄笑)가 터져나왔다.

"하하하하, 하하하하, 아아하하하하."

철든 이래로 아직 소리내어 웃어본 일이 없는 견훤의 이 처음낸 홍소성은, 그새 안웃은 것을 한꺼번에 봉창을 하려는 듯이 온방―뿐 아니라 온 영(營)을 더릉더릉 울렸다.

견훤이 이전에 임소에서 데리고 온 군졸까지 합하여 일천 일백여명의 군졸을 아직 날이 밝기 전에 서교에 모아 이를 십일대에 나누어서 십일대장(隊長)에게 맡기고, 아침 해가 불끈 동녘 성 위로 보이기 비롯할 때에 행군은 시작되었다.

원노가 분주히 돌아가며 대를 나누기도 하고 대장에게 맡기기도 할 동안, 견훤은 비룡에 몸을 싣고 차라 밝아오는 성두(城頭)를 감개무량히 바라보고 있었다.

한 가지의 큰 일은 이제는 성사된 것이나 일반이다.

그러나 그 뒤에도 중대한 일이 하나 남아 있다. 사사원수를 갚는다는 일도 견훤 개인으로서는 중대한 일이 아닌가?

지금 보고 있는 저 성두. 지금은 그 성두를 신라의 한 비장의 자격으로 바라보고 있다. 지금 신라의 한 비장으로서 저 성두와 작별한 뒤에는, 언제 다시 바라볼 기회가 생길까? 지금 이곳을 떠나서는 자기는 백제 국왕의 자격으로서야 저 성두를 보게 될 것이다. 그날이야말로 자기 집안의 사사원수를 자기의 눈앞에서 갚게 되는 날이다.

그날이 언제나 이르려는가?

백제왕국의 재건은 지금은 성사된 것이나 일반이다. 그러나 그 후백제국(後百濟)이 국력이 충실되고 군대가 완비되고, 사직이 튼튼해져서 장차 이곳까지 넉넉히 정벌하여 들어오리만큼 자리잡히려면 적지 않은 세월이 걸리고 적지 않은 공력이 들어야 한다. 그것이 모두 마음대로 되어 두번째 저 성두를 우러러볼 날―그날을 얼른 예측하기 힘들다.

집을 떠난 지 십륙년 간, 지금까지 그냥 몸에 지녀 내놓아보지를 않은 품칼을 높이 들고 신라 임금에게 그 칼로 자결하기를 명할 날, 그날은 과연 예측하기 힘들다.

견훤은 품안으로 손을 넣어 몸에 지닌 품칼을 만져보았다. 자기의 체온에 다뜻이 녹은 품칼의 자루가 손에 잡힌다.

"너도 네 원한을 풀날이 반드시 있겠지. 천우와 신조가 있는데 안될 일이 무엇이랴!"

그날이 이르러서 이곳으로 대군을 이끌고 격하여 올 때에 그냥 지금의 여왕이 신라 임금으로 군림하여 있다면? 견훤은 내심 고소하였다. 그런 싱거운 일은 다시 없을 것이다.

이런 생각에 잠겨 있을 때에 원노가 와서 분대(分隊)가 끝났음을 보고하였다.

견훤은 원노와 말머리를 나란히해가지고 분대한 양을 순시하였다. 제법 나무랄 데가 없었다. 원노도 이만하면 한 가지의 중임은 넉넉히 맡길 만하였다.

"잘 되었네!"

견훤이 드디어 칭찬하였다.

"그럼 이젠 행군합지요?"

"그러지."

두 명의 소라군과 두 명의 기수가 앞서고, 그 뒤를 참장 두 사람이 말타고 따르고, 또 그 뒤에 견훤이 원노와 나란히하여 따르고, 그 다음에 참장 몇 사람이 말타고 따르고, 그 뒤부터가 제일대는 기병대(騎兵隊)요, 나머지 열대는 보병대(步兵隊)로서 모두 승마한 대장의 지휘 아래 정연히 행군을 시작하였다.

차차 높이 오르는 해를 등지고 규율이 정연하게 행군하는 이 열한대의 장졸은, 행인들이며 길가의 사람들의 눈을 둥그렇게 만들고도 남았다. 비록 수효로는 그다지 대군(大軍)은 못되나마 그 새 늘 퇴폐하고 규율없는 신라의 장졸들만 보아오던 그들의 눈에는 이 규율 정연한 군대가 유달리 보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발걸음소리까지도 듣기 상쾌하게 보조맞추어 행군하는 장졸들을 견훤은 무표정한 얼굴이지만 기꺼운 듯이 간간 돌아보곤 하였다.

서으로 서으로 이틀을 행군하였다.

견훤은 사졸이 피곤하여 행렬에 낙오라도 생길 것을 근심하여 하루에 육십리를 한하여 행군하였다. 이렇게 이틀을 행군하면서 가을 맑은 공기를 마음껏 들여마시며 웅대한 대자연에 접촉할 동안, 견훤은 자기의 계획에 착오가 있었음을 깨달았다.

지금 자기가 거느린 군졸은 비록 정예한 군졸이라 하나 그 거지반이 신라인으로 조직된 자이다. 이것을 이끌고 백제영역에 들어가서 백제 재건을 선언하다가는 잘못하면 군졸 모집이 완성되기 전에 인솔군의 동요가 일어날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되면 만사가 수포로 돌아간다.

장차 모집할 백제군졸이 지금 인솔한 신라군졸보다 수효로나, 세력으로나, 실력으로나 훨씬 더 강하게 된 뒤에 비로소 백제 재건을 선언하여야 할 것이다. 이것이 착오의 첫째였다.

둘째로는 자기에게는 장차 얼마간을 양병할 재정이 없다. 백제영역에 들어서서 백제 재건을 선언하면 사면에서 의연(義捐)하는 재정이 몰려들려니 하는 정도로 생각하여 두었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하건대, 백제 재건의 선언을 신중히 해야 할 처지에 있으매 당분간의 양병의 재정이 지극히 곤난하다. 게다가 백제의 옛터는 그새 오랫동안 탐관오리의 학정 아래 빨린 바 되어 가난하였다. 일천년 사직을 누려온 신라의 고을들은 가멸은 곳이 많았다. 왕의 명으로 공공히 행군하는 이상은, 가멸은 신라 땅에서 힘자라는 한 거둬가지고 백제로 향하는 것이 순로다.

서울을 떠난 지 이틀만에 견훤은 임금께 글을 올렸다.

지금 양질·궁예의 무리는 약탈을 마음대로 하여 재정의 궁핍(窮乏)을 느끼지 않거니와, 소신은 오직 충성된 군졸 일천 명밖에는 없사오니 상께서 부읍에 하명하셔서 얼마의 금은을 나누어주게 하시면 감사하겠나이다.

간곡한 인사와 함께 이런 뜻의 글을 임금께 올렸다. 그날부터 견훤의 거느린 열한대 장졸은 지금까지 향하던 길을 버리고 남방으로 대우회(大迂廻)를 개시하였다.

길을 고쳐서 멀리 서남방으로 우회행군을 하는 견훤은 이르는 곳마다 향토군을 불러 앞세우고, 날카로운 병졸을 뽑아들이고, 정예한 무기를 걷거두 들이어서 차차 무적정병(無敵精兵)을 이룩하면서 멀리 지리산(智異山)을 남으로 휘돌아 백제 구역(舊域)에 발을 돌이킨 때는, 견훤과 원노(甄萱·元奴)등의 뜻으로 개편(改編)되고 재편된 병졸의 총수효는 오천여명, 그 병기(兵器)의 수효는 이 오천여 명의 병사가 쓰고쓱 또 써서 얼마를 남용할지라도 충분할 만큼 되었다.

이 정비된 대군을 인솔하고 차차 백제의 옛터를 깊이 들어갈 동안 서로 모르는 사이에나마 마음으로 깊이 통함이 있었든지, 순전한 백제 계통의 정예(精銳)한 군졸이 나날이 늘어갔다.

지난 한동안은 신라 서울에 묵으면서 신라 여왕과 지내던 음락의 생활이 견훤의 마음을 간지럽게 하였다.

그 뒤 한동안은 나날이 늘어가는 군졸과 병기를 보면서 일종의 긍지를 느끼었다.

지금은 그런 감정은 다 없어지고 아직 채 성사되지 않은 일을 다 성사되었다고 느끼는 무거운 감정에 잠겨서, 웬만한 일에는 사람으로서의 감동을 모르는 그로서도 스스로 일어나는 감동을 억눌러보려고 코를 킁킁 울려보는 때가 적지 않았다.

궁예(弓裔)라는 이름이 견훤에게 있어서는 결코 잊히지 않는 자였다. 처음 동화사(桐華寺) 상노로서 외딴 꿈을 꾸고 있던 애꾸눈이 소년으로서의 궁예는, 그 이튿날 낮뒤 한겻과 또 그이튿날 아침 한겻을 함께 지난데 불과하였다. 그 뒤에 자기는 도선사(道詵師)를 만나서 왕자의 길―말하자면 가장 경건한 사람의 길을 수년간 수업을 한 후, 이번에는 무장으로서의 수업을 닦으려 사방을 편답할 새, 태백산의 어떤 절에서 또 단 한저녁을 그와 함께 지낼 기회를 얻었다.

말하자면 만 이틀이 될까말까하는 교제였다. 그러나 견훤은 지금이라도 눈만 감으면 넉넉히 숱한 풍상을 겪고 났을 그의 면용을 넉넉히 짐작하였다.

그때 견훤은 궁예와 더불어 장차 누구가 먼저 성공을 할까에 대하여 내기를 둔 일이 있었다.

돌아보건대 그때로부터 지금까지가 십년 미만―자기는 자기의 해석대로 일을 진행시켜 지금은 벌써 오천여명의 수령이요, 자기를 호령할 자 이 천하에 없고, 한번 자기가 결심만 하면 그다지 작지 않은 한 나라의 임금이 될 것이요, 이것을 막을 자 세상에 없었다.

그러나 궁예는도 아직 멀었다. 장자는커녕 궁예의 수령되는 양길조차 한개 난적(亂敵)에 지나지 못할 뿐 아무 명색도 붙일 수가 없다. 게다가 주인 없는 땅인 고구려의 옛터에나 자리잡으려면 쉬운 일일 것인데, 무슨 까닭으로인지 당당한 주인이 있는 땅인 신라를 누르려 하고 있다. 힘든 일을 시작하려는 양길의 부하되는 궁예는 장차 양길의 손에서 벗어나서 자기의 자리를 잡기 전에는 내내 남의 아랫사람밖에는 되지 못할 것이다.

자기는 지위가 태산같다고 믿는 견훤은 이 옛날의 친구가 가긍하였다.

자기의 정예한 대군은 지금도 끊임없이 진군을 하며 진군과 동시에 수효며 정예가 늘어갈 뿐이로다. 내일이면 능히 무진주(武珍州―光州의 一部)를 멀리 바라볼 것이며, 모레면 그의 대군은 능히 무진주에 입성할 것이다. 무진주에 입성을 한 뒤에는?

그날 진중에 자리잡은 원노(元奴)며 그 밖 몇몇 신임하는 장수들을 불러 앞에 놓고, 인제 모레 될 일에 대해서 구체안을 의논하였다.

의논을 개시하기 전에 견훤은 지필(紙筆)을 들었다. 그리고 두어자 그적거리었다.

옛날 친구 궁예여러! 그립지 아니한가?

그대는 머미를 베라. 머리가 무슨 쓸데가 있는가?

양길없이 자립(自立)하지 못할 그대 아니거니 왜 머리위에 딴 관을 쓰고 있는가?

남으로 뻗어서 그대 단 한사람의 원수를 갚으려는 작은 마음을 버리라. 서북으로는 아비없이 방황하는 넓은 땅과 많은 백성이 있나니, 왜 하필 주인있는 좁은 땅으로 작은 원수를 갚으러 가는가?

머리를 베어라.

서북으로 뻗으라.

옛날 친구여, 그립지 아니한가?

우리 한번 자웅(雌雄)을 겨루어보자꾸나.

왜 그런지 옛날 친구를 결코 잊을 수 없는 견훤은 펴지 한장을 써 책상 서랍에 밀어넣어 밝는 날 발빠른 군졸로 궁예의 진에 보내게 하고, 그 편지가 궁예의 손에 들 때쯤은 자기는 무진주에 들어가서 공히의 호왕(呼王)을 하리라 하는 것이었다.

백제 국왕의 즉위의식(卽位儀式)에 관한 서류 등은 견훤이 어려서 익히 보고 읽은 바요, 이것은 이미 원노 등에게 가르쳐 둔 바라 그다지 많은 의논이 있을 것이 없었다.

다만 유사 이래로 한 나라에 없지 못할 몇 가지의 조건이 견훤에게서 내렸다.

첫째는 나라가 서고 임금까지 생긴 뒤에도 국호(國號)를 아직 좀 그냥 버려두자는 것이었다.

둘째는 당분간(즉 국호를 세우기 전까지)은 모든 관직을 베풀지 말자 하는 것이었다. 지금 이곳에 이를 때까지 견훤의 놀라운 눈으로 적지 않은 인물들을, 혹은 군졸 중에서, 혹은 길가는 길가에서 추려서 따로이 데리고 왔다. 그 사람 중에서 때와 경우에 의지하여 국왕인 견훤이 임시임시로 몇 사람씩을 뽑아 사무를 맡기지, 결코 당분간은 관직과 직책 등을 전임시키지 말자 하는 것이었다.

즉 이 새 나라에는 임금과 장수와 졸병과―그 박에는 백성이 있을 뿐 국호도 없고 관직도 없는 기괴한 나라이었다. 그러나 견훤의 명에는 절대로 복종하는 그들이라, 조금인들 마음 굽히거나 돌릴 사람들이 아니었다.

의식의 마당은 제성대(帝星臺) 앞으로 하기로 하였다.

이튿날 예에 의지하여 일찌기 몸을 일으킨 견훤은 종졸의 떠다바치는 소싯물에 시원히 얼굴과 입을 닦고 진옥밖에 나섰다.

맑은 공기는 그의 건강한 폐와 피를 더욱 깨끗이 하는 듯하였다. 동남녘 쪽으로는 아직 채 떠오르지 못한 해가 노을만 불그스름히 비취고 있었다.

"아아, 장할씨고! 쾌할씨고!"

폐로 힘껏 들여 마셨다가 토하는 이 포함성은 마치 맹수의 부르짖음과도 비슷하였다. 얼굴에는 여전한 무표정이 있으나, 이 포함성의 의의는 그의 마음을 넉넉히 나타내었다.

눈을 둘러보면 그가 아직 어렸을 때 제일세(第一世) 비룡(飛龍〓말의 이름)을 달려서 때때로 나와본 일도 있는 곳이었다. 근 이십년 전 그의 아버지의 슬하를 떠나서 밟은 길이 아니었던가!

오늘밤 가보리라. 아직 생존해 계신가? 그때 떠날 때는 아버지를 신하로 굽어보기 전에는 다시 뵙지 않겠다 맹세를 하였으나, 일이 이미 다 성취되었음에 만약 아직 생존해 계시기만 한다면 인자(人子)로서 다시 한번 더 뵈온들 그것이 사체에 무엇이 그다지 어그러지랴!

그 날은 군졸 육천여 명을 속보대(速步隊) 삼천, 완보대 삼천으로 나누어서 각각 한 책임자로 인솔케 하여 떠내보내었다. 속보대는 먼저 가서 무진주룰 점령하고 제성대를 닦고 씻고, 완보대는 뒤를 따라가서 속보대의 뒤를 이어 명일의 즉위에 거침이 없이 전부 준비하여 두려 함이었다.

이렇게 갈라보내고 견훤은 길을 따로 빗섰다.

속보대에서는 견훤이 완보대를 인솔한 줄 알고, 완보대에서는 복보대를 인솔한 줄 알았다.

직통로를 군대에게 내준 견훤은 천천히 말을 돌려서 딴길로 들었다. 부모댁을 초저녁에 다시 한번 찾아보려는 마음으로서였다.

멀리 큰 길은 적지 않은 군졸의 통행 때문에 돌개바람의 자취 모양으로 새뽀얀 먼지가 길게 뻗으면서 전진을 한다.

그와 병행한 협로로 들어서 그 먼지의 행렬을 바라보는 것도 적지않게 유쾌하였다.

이리하여 멀리 완보대와 병행을 하여 황혼에 제성대를 멀리 바라보니, 예기하였던 바와 같이 그 대는 벌써 견훤의 군졸의 점령한 바되고, 제성대는 속보대와 완보대가 방금 그 소제등을 교체하는 중이었다.

그것을 먼 눈으로 보면서 견훤이 광주부내까지 이른 때는 이미 날은 새까맣게 어두운 뒤였다.

견훤은 일직선으로 아버지의 집으로 달려갔다. 달려갈 때의 마음은 단 한 가지 생존해 계십사 하는 마음 뿐이었다.

말에 능한 그가 마치 말에서 떨어지듯이 하면서 뛰어내려 아버지의 집 대문을 박차매, 대문은 잠겼는지 딱 발을 멈췄다.

"야, 문 열어라!"

고함을 지르며 박찰 때는 대문짝은 쪼개지며 널리 열렸다.

그러나 그때는 벌써 첫번 벼락에 무기를 준비한 하인들이 문안에 쭉 벌려선 때였다.

"두 분 어른 다 생존해 계시냐?"

아홉살에 집을 떠나서 십칠팔 년이라 이 말을 갑자기 알아들을 하인이 없었다.

"누구…."

"요?"라 할지 "냐?"라 할지 알 수 없어서 하인들이 망설일 동안, 이 대문간의 소란을 먼저 알아챈 사람은 견훤의 아버지 아자개였다.

"오오, 견훤이냐? 어서 들어오너라."

이 말에 하인들은 비로소 이 젊은이의 정체를 알아내고 황급히 인사를 드렸다.

"오, 잘들 있었느냐?"

하인들의 인사에 간단한 대답을 하면서 중대문 안에 썩 들어서서 아버지의 계실 사당 댓돌에 올라섰다.

"아버님, 여기시오니까?"

"오냐, 어서 들어오너라."

견훤은 문을 열고 문안에 들어섰다. 아자개(阿玆介)노인은 몸을 장침에 의지한 채 일으키지 못하고, 노인의 등뒤에서는 시동(侍童)이 가만가만 노인의 다리를 주무르고 있었다. 노쇠함이 분명히 노인의 온몸에 나타나 있었다.

"아버님, 하명을 어기었읍니다. 한번 더 소자로서 아버님을 불러모시고자 떠날 때의 하명을 어기었읍니다."

"나도 그때 그렇게 명하기는 하였지만 다시 한번 아비로서 너를 보고, 그 이튿날 임금으로 다시 우러르고 싶었다. 잘했다, 잘했다."

"아버님 떠난 지 이십년, 아직 보잘만한 일을 하나도 한 것이 없읍니다."

"아니로다, 내 이미 아는 바로다. 오늘 낮의 소란도 너의 병졸의 한 일이지? 누은 몸이라 일어나 나가보지는 못하였으나 귀로 들리는 바로서 내 아들이 하는 바 아니면 반드시 포악이 섞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성만 비위 놓고 다른 성을 약탈하려 갈 것이로다. 더우기 제성대를 닦는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너의 모와 함께 한참을 너무 기뻐서 울었구나!"

"참 어머니께서도 건재하시지요?"

"덜난 아비보다, 성해서 매일 제성대에 축원을 드리고 너 잘되게만 해 달라도 빈다. 벌써 세상을 모르고 자리라."

"아버님, 떠날 때도 하직하지 못하고 떠난 불효자라 지금 잠깐 들어가서 뵙고 나오겠읍니다."

"음, 얼른 다시 나오너라."

오래 못본 자식을 어머님께 인사 여쭙는 시간이나마 아끼는 늙은 아버지였다.

견훤은 안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어머님 계시던 방으로 성큼성큼 들어섰다.

"어머님, 견훤이 돌아왔읍니다."

돌려놓았던 솟대를 바로 놓으며 웅장한 음성으로 이렇게 찾을 때에 곁에 시침하던 계집종들이 먼저 깨어서 이불 속에서 흩어진 옷을 어쩔 줄을 모르고 야단일 적에 견훤은 두 번째,

"어머님, 불효자 견훤이 돌아왔읍니다."

고 고하였다.

이 웅장한 소리는 어머니의 깊이 든 잠도 종내 깨쳤다.

"이게 무슨 소리냐?"

"어머님, 견훤이가 돌아왔읍니다."

"견훤이가? 어디 왔어?"

"네, 왔읍니다."

"아이구 왔으면 어서 들어오려므나. 죽기 전 다시 못볼 줄 알았던 내가 살아서 보다니 어서 들어오래라."

눈을 비비면서도 아직 정신을 못차리는 모양이었다. 그러는 동안 시침하던 계집하인들은 몸을 단속하고 일어나 자기네 이부자리를 걷어치우고 젊은 상전께 인사를 드렸다.

"어머님, 얼른 정신을 차리시고 저를 보세요. 어른이 됐읍니다."

"무얼? 들어왔느냐?"

어머니는 머리맡 명주수건을 집어 눈을 씻으면서, 이불을 젖히며 일어났다. 일어나 보매 눈앞에는 금빛이 휘황스런 장군복을 입은 거대한 인물이 앉아 있는 것이었다.

한순간 노부인은 눈이 퀭했다. 제아무리 장발하였다 할지라도 스무살 안팍의 소년쯤으로 상상하였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눈을 다시 비비매 어디 의심할 바 있으랴! 어렸을 때의 모습도 모습이려니와, 또는 이 청년의 아버지요 노부인의 남편되는 이의 스물 예닐곱살 때의 모습과 한판에 박아놓은 것을….

아들을 분명히 아들이라 알아본 뒤에는 노부인은 일장의 희극을 연출하였다.

"아이구, 네가 과연 견훤이로구나!"

와락 달려들며 통곡하면서 이렇게 부르짖은 노부인은 다시 덜컥 아들을 놓으면서,

"너라고 해도 괜찮을는지…."

일찌기 남편에게서, "이 뒤 다시 만날 때는 나랏님이라고 불러모시지 않으면 안되리라."고 말을 들었던 것이었다.

"너라고 불러주십쇼. 녀석이라고도 불러주십쇼. 오늘까지올씨다. 내일부터는 못됩니다."

이 천생이 무표정한 줄 알았던 장한(壯漢)의 입에서는 마치 춘풍에 녹는 눈과 같이 화기애애한 미소가 끊임없이 흘렀다.

이때 사랑에서는 하인이 들어와서 왜 어서 나오지 않느냐는 재촉이었다. 그러나 어머니 또한 아들을 놓으려 하지 않았다.

"못 나가리라. 오늘밤은 내 곁을 못 떠나리라."

"어머님, 전들 왜 십칠팔 년만에 뵈옵는 어머님을 끝끝내 모시고 싶지 않사오리까마는 수족을 못쓰는 아버님께서 부르십니다. 어머님, 사랑으로 나가십시다. 아버님 처소로 나가십니다. 어렸을 때 천만번 저를 업어주신 그 은공의 천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하고자 제가 어머님을 업어 모실 터이니 사랑으로 아버님께로 나가십시다."

이 한두 마디의 문답이 있을 동안 사랑에서는 또한 아들을 부르는 전령이 들어왔다.

"어머님, 자 업으십시다."

"나는 아직 튼튼하다마는 어디 그 넓은 등판에 업혀보자."

견훤은 어머니를 등에 업고 사랑으로 나갔다.

아들에게 업히어 나온 자기의 늙은 아내를 보고 아자개 노인도 슬며시 부러워진 모양이었다. 부인이 내려서 미처 무슨 말을 꺼내기 전에 아들을 쳐다보면서,

"야, 나도 한번 업어주련?"

하고 청을 대었다. 아들은 선선히 승낙하였다.

"아, 소원이시라면 얼마이고 사양하리까마는 혹 기동하시기 때문에 더 탈이 나서 영향이 없으실는지요?"

"네게 업혀보면 탈이 나으면 나았지 더 나쁘게 된단 웬말이냐?"

"그럼 얼마고 업어올리리다."

견훤은 아버지의 앞은 데가 닿지지 않도록 조심조심히 업었다.

"자, 어디로 가오리까?"

"웃칸 아랫칸으로 왔다갔다 하자꾸나 정처가 있느냐."

가정단란의 아름답고도 우스꽝스러운 놀이는 한참을 계속하였다. 그동안 아들의 등에 업힌 노인과, 그것을 쳐다보고 앉았는 늙은 아내는 이 아들이 나간 뒤에 얼마나 근심하고 걱정하며 축수하던 이야기를 순서를 캐어내려오면서 주고받았다.

이렇게 업고 왔다갔다 하기를 얼마에 아버지도 얼마큼 아들의 생각을 하였음인지 드디어,

"자, 인제는 팔 아플라, 내려놓아라."

하였다.

"아니올씨다. 얼마이고 업어드리오리다. 제 이 팔이 아버님쯤이야 한달 두달을 업을지언정 움쩍이나 하오리까? 눕고 싶으시면 모르시되 그렇지 않으시면 얼마이고 업어드리지요. 더우기 내일부터는 이런 흉허물 없는 놀이도 좀 하기 어려운 터에…."

"내가 눕고 싶기도 하다."

견훤은 아버지를 아랫목에 곱게 내려놓았다. 내려놓으면서 아버지는 아직도 팔에는 적지안히 남아 있는 온력을 다하여 아들의 등판을 쾅 두드렸다.

"네 등판 튼튼도 하다. 삼국(三國)을 다 올려 놓을지라도 움쩍도 않을 것 같구나."

"글세올시다."

이 가족단란의 마당에까지 저편 북쪽의 제성대의 역사소리는 간간 바람결에 들려왔다. 이 소기라 들려올 때마다 사람들의 얼굴에는 감출 수 없는 희열의 표정이 스치고 지나가고 하였다. 더우기 견훤의 양친이 그러하였다.

오늘 제성대에 새 임금이 등극한다는 소문은 어떻게 퍼졌는지 광주·무진주 일원은 물론이요, 꽤 먼곳 사람까지 새벽부터 구름같이 모여들었다. 모여들어서는 놀랬다. 그들은 아직까지 이와같이 많은 군대가, 이처럼 정비되어 이와같은 광채섬섬한 창검을 들고 마치 깍아세운 사람인듯이 새벽부터 움찍도 않고 정렬하여 있는 장관을 본 일이 없었다. 더우기 광주 부대의 사람들은 오늘 즉위하는 사람이 즉 백제임금의 몇 대째인지의 직계장손(直系長孫)이라는 것을 짐작하므로 더욱 마음이 흡족하여 이 존귀한 의식을 구경하고자 모여든 것이었다.

이윽고 소라수의 한미다 소라성과 함께 제성대 좌우편에서는 옛날 백제의 요란한 음악소리가 울리기 시작하였다. 지금까지 꽂아세운 듯하던 병졸들의 창검도 한 순간 움직이며 더욱 정제된다.

제성대의 요란한 음악소리 때문에 못들은 사람도 있지만 음악은 여기서 뿐이 아니었다. 굵은 백사(白砂)로 한벌 쭉 깐 한길 저쪽 편에서도 요란한 음악수들의 음악과 함께 쌍줄로 한줄에 기수(旗手) 다섯 명씩이 서고, 그 뒤에는 여러 장군·부장군·무관들이, 장군은 말을 타고 문관은 남여(藍輿)를 타고 따르고, 그 다음에 새 임금 견훤으로서 백제고제의 즉위식용의 옷으로 장식하고(목과 소매끝과 목변두리에 금실·은실로 수좋은)젊고도 건강한 위세로 역시 애마의 비룡(飛龍)에 높이 비끼고, 마졸 열여섯명이 앞뒤에서 권마성(勸馬聲)을 치며, 그 뒤는 역시 장군과 무관의 일행이 있고, 나중에는 친위병 이백명이 은수놓은 융복에 긴창 비끼고 말을 타고 따른다.

한 사람 두 사람이 눈을 그리고 돌리자, 온 군중의 눈은 모두 그리고 돌아갓다. 그러나 제성대를 좌우로 호위하여 벌여선 군졸들은 고개는커녕 눈하나 돌리는 자가 없었다.

새 임금의 노부는 좌우편의 군졸들의 높이 창을 쳐드는 인사로 마중되어, 악사·기수·친위졸·마부 등은 군졸의 행렬로 들어가고, 임금과 여러 장군들은 제성대 뒤에 임시로 지은 휴게소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잠시는 요량한 음악만 들리었다.

이윽고 음악도 그쳤다. 이것을 기회로 한 늠름한 장수가 막 뒤로부터 나타나 즉위의 축문을 읽었다.

그 축문이 끝나자 동편쪽 군졸들에게서는 일제히,

"우리나라 만만세하옵소서."

하는 고창(高唱)이 들렸다. 그러매 거기 화하는 듯이 서편쪽 군졸들에게서 일제히,

"우리임금 만만세하옵소서."

하는 고창이 들렸다.

그런 디에는 양쪽 군졸이 일제히,

"우리나라 만만세하옵소서. 우리 임금 만만세하옵소서!"

하는 고창이 들렸다. 이 고창에는 구경하러 왔던 백성들도 자기도 모르게 같은 소리로 아울러 주었다.

그러자 다시 요란히 울리는 음악성 가운데, 백성들이 그렇게도 보고자 하던 임금이 한편에는 문관, 한편에는 장군의 부액(扶腋)을 받고 엄숙히 그의 자태를 나타내었다. 그러고 천천히 이미 설치된 옥좌로 올라가서 그의 널따른 얼굴을 들어, 한번 죽 백성을 훑어 본 뒤에 사례의 뜻으로인지 양손을 마주잡은 채 소매를 한번 높이 쳐들었다가 내렸다.

이 새 임금을 환호하는 소리는 구경왔던 무리들 사이에 벽력같이 일어났다.

"만세!"

"천추!"

"무강!"

어지러히 일어나는 이런 환호성은 단지 구경 왔으니 불러주어라 하는 뜻이 것이 아니었다. 이 젊고 면적 넓은 새 임금에게서 그들은 장차 베풀어질 각색 좋은 시정이며 시설이며를 넉넉히 꿰뚫어본 때문이었다.

이리하여 견훤의 건설한 새나라는 성립이 되었다. 무명국이요, 무명왕이었으나 그 근린(近隣)의 온 환영 아래서 생겨난 것이었다.

때는 신라 진성여왕 오년이요, 당날로 보자면 소왕(昭王) 경복(景福) 원년이었다.

새 나라는 드디어 성립이 되었다. 무명의 나라이요, 무명의 임금이었다. 그러나 이 이름없는 나라를 누구든 이름없다 보지 않았다. 그 나라의 주인이 백제이 옛 주인의 후예(後裔)요, 그 땅이 백제의 옛 땅이며, 그 백성이 또한 백제 옛 땅의 백성이니, 아무리 나라의 이름이 없다할지라도 무명국이라고는 결코 못할 것이었다.

더우기 그 뒤 행정정책을 보면 견훤은 단지 제성대 앞에 새로 세운 대궐에서 양병과 순민에만 힘쓰는 듯하였다. 그러나 나날이 백제의 옛 땅의 성주들은 인부를 갖다 바치고 신라의 녹작을 사양하고, 만약 그렇지 못한 곳이 있으면 사람을 보내어 그렇게 하기를 종용하는 것이었다.

이러하기를 구년간 드디어 여기는 이백수십년 전에 소멸되었던 덩어리와 같은 덩어리가 생겨났다.

이동안 견훤은 양친을 다 잃었고, 비빈(妃嬪)을 몇 명 두어서 여러 명의 자식을 더 두었으며, 인생으로서의 가장 성년기를 맞이하였다.

이렇게 되었을 때에 그는 천천히 대군을 인솔하고 북진(北進)을 개시하였다. 목적하는 곳은 완산주(完山州)였다.

완산주에 이르러서 비로소 국호를 발표하고, 관직을 분설하고 하여 당당한 한개 국가로서 당나라와 신라에 대하고자 함이었다.

궁예(弓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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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훤이 이러한 길을 더듬어서 견훤 자기의 큰 목적이요 겸하여 백제 수백만 백성의 목적을 착착 이룩할 동안, 그의 단 이틀 미만의 친구이나 또한 서로 영구히 잊지 못할 친구인 궁예(弓裔)는 어떠한 길을 밟았나?

소년 시절에 견훤과 한날 한시에 좋은 스승인 도선(道詵)을 만났었으나, 기지 있는 견훤에게 스승을 독점당한 뒤, 그는 하릴없이 홀로 떠나서 승문(僧門)에 일찌기 적을 두었으니만큼 이 승방 저 명찰로 찾아 돌아다니며 인생의 갖은 험로를 여지없이 밟으면서도 한가지의 독한 마음뿐은 그래도 없이할 수가 없었다.

눈이 하나 병신이요 그 위에 또한 그의 유년 시기의 생장이 불구적(한 나라의 왕자로 태어나서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를 수 없고 도리어 원수로 여기어야 하였고, 얼굴도 알기 전에 어머니를 불행한 환경 아래서 잃었으며, 갓나서부터 철들기까지 애꾸눈이라는 별명이 그의 겨에서 떠나본 일이 없었으며)이었더니만큼 그의 마음도 또한 세상을 그렇게 보았으며, 세상을 저주할 것으로 보았고, 사람이라 하는 것은 모두 자기를 미워하고 자기에게 적대하는 것으로 보았다.

몸은 승도(僧徒)라 하나―그리고 또한 승문에서 배운바 온갖 학문 '선지식(善知識)'이 모두 다 좋고 옳은 말이고, 그대로 좇을 수만 있기만 하다면 극락세계라는 건 불지식을 좇기만 하면 딴곳까지 안가고 이곳에서 이루어질 것이라 믿기우기는 하였다.

그러나 그의 성격이 이미 삐뚤어진 이상 아무리 그 도의 진실성을 믿는다고 할지라도 행동까지 그 도의 명하는 대로 행할 수가 없었다.

몸은 승도로되, 몰래 승방을 벗어나서는 속계에 내려와 술을 먹고 계집을 희롱하고 싸움을 하기가 일수였다. 법사에게까지 반항하는 일이 자주 있었다.

이러한 때에 신라의 정세는 나날이 어지러워가고 각처에는 도둑이 봉궐하여 제각기 장군 호를 칭하며 영지(領地)를 넓히며 야단법석이었다.

일이 차차 이렇게 전개되매 울근거리는 궁예는 이제는 그냥 승방에 숨어서 목탁을 두드리며 염불이나 외우고 있을 수가 없게 되었다.

어떤날 밤 드디어 궁예는 법문을 벗어버렸다.

당시 창궐한 도둑 중에 가장 유명한 자가 기훤(箕萱)과 양길(梁吉) 두 사람이 있었다.

궁예는 먼저 기훤을 찾아갔다. 그러나 기훤은 스스로 자기 힘을 믿을 뿐 결코 남을 용납할 만한 인물이 못되었다. 세상에 대한 무서운 반항심과, 무서운 손아귀힘을 가진 줄 모르는 기훤은 궁예를 소홀히 대접하였다.

이 사람을 알아볼 줄 모르는 기훤의 아래에서 몇 달을 울분한 생활을 한 나머지 궁예는 기훤을 박차고 양길에게로 돌아붙었다.

양길은 기훤과 달라 궁예를 후히 대접하고, 모든 일을 그와 의논하고, 그의 의견을 듣고야 일을 결정하였다. 다시 말하자면 궁예는 양길에게 돌아붙은 뒤 불출 수일에 양길의 가장 신임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이때 견훤에게서 (참으로 오랫동안 잊어버렸던 친구다) '머리를 베어라, 즉 왜 수령 아래 아장(亞將)으로 지내려느냐?'하는 조롱을 받는 동시에, 견훤은 북원으로 또 사람을 보내서 양길에게 비장(裨將)의 직을 내려주었다.

이렇게 되매 궁예는 옛날의 친구인 견훤의 비장의 부하가 되게 되었다.

성미가 울그락불그락하는 궁예는 이 조롱이 매우 마음에 거슬렸다.

"건방지게!"

왈칵 결이 난 궁예는 양길의 군사 중에서 눈치보아 자기에게 붙을 만한 자들을 눈여겨 접쳐 두었다. 그리고 양길의 진중에서 차차 궁예파라 하는 것을 비밀리에 조직하여 나갔다.

이렇게 지내기를 이년간―남의 진중에서 둑질하듯하는 노름이라 마음대로 빨리 되지를 않아서, 그로부터 이년을 지나서야 겨우 삼천 오백이란 수효를 얻게 되었다.

이미 양길의 신임은 사고 있는 터이라, 이 세력 유지가 된 뒤에 비로소 양길에게 청하여 명주(溟州)를 공격하가 하였다. 그리고 그 승낙을 얻어가지고는 자기가 눈여겨 두었던 군졸 삼천 오백명을 인솔하고 즉시로 명주를 공격하려 떠났다.

무인지경과 같이 명주를 함락시킨 뒤에는 군졸을 나누어 열두 대로 하고 몸소 사졸들과 동고동락하면서 약탈을 금하고 인심수습에 크게 노력하였다.

성미가 괄괄스런 궁예로서는 참기 힘든 일이 많았다. 그러나 일찌기 불문(佛門)에 적(籍)을 두었었던 만큼, 이제 조금이라도 실수를 하면 대사가 틀려나갈 것임을 알고 결을 참고 성을 삭이며 군심과 민심을 제법 크게 샀다.

머리를 베었다. 견훤의 말마따나―.

더우기 자기의 이전의 주인은(마음으로 받았건 안받았건) 한낱 견훤의 비장에 지나지 못하는데, 궁예 자기는 그 동안 애사애민한 덕택으로 자기 사졸이며 백성들에게 자연히 장군호(號)를 받게쯤 되었다.

양길은 궁예가 차차 자기를 반하려는 듯한 형세를 보고 거듭 궁예에게 돌아오기를 명했으나 이 명에 복종하지 않으매, 노염을 내어 책망하고 벌령(罰令)까지 내렸다.

그러나 이제는 훨씬 세력이 더한 궁예는 양길 따위는 손톱눈같이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군사를 움직이어 철원·금성(鐵原·金城) 등 십여성을 격파하였다.

신라의 영역 중 구백제에 속하는 자는 나날이 견훤에게 잠식(蠶食)되어 들어가는 일면에, 옛날 고구려의 남방일대는 차차 궁예에게 잠식되어 그이 세력은 차차 패서도(浿西道)로도 뻗어나가서 지금의 신라 영역은 옛날 삼국정립(三國鼎立)시대의 신라보다도 약간 부족하게 되었다.

이 궁예의 막하(幕下) 가운데 송악(松岳)사람으로 왕융(王隆)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적절히 말하자면 신라가 이미 고구려를 없이하였으나, 송악 이북은 신라의 왕위(王威)가 미치지 못하여 제각기 제재 간대로 그 지방의 세력가가 스스로 서서 성주(城主) 혹은 도독(都督)을 자칭하고 있었으니, 왕융도 또한 그러한 사람의 하나이었다. 이 왕융은 궁예의 세력이 차차 뻗어오자 자기의 힘으로는 궁예를 도저히 대적 못할 것을 알아채고 재빨리 송악을 들어서 궁예에게 바친 것이었다. 궁예는 이것을 고맙게 본다는 뜻으로 왕융의 맏아들 왕건(王建)을 송악의 성주(城主)로 삼아 성을 쌓게 하고 백성을 다스리게 하였다 (왕건의 나이는 그때 갓 스무살이었다).

왕건의 아버지 왕융에겐 또한 금성태수(金城太守)를 봉하였다.

신라의 여왕은 이 어지러워가고 바야흐로 쓰러져가는 사직(社稷)에 자포자기가 되어 더욱 술을 마시고 더욱 황음한 행동을 거듭하였다. 이 여왕에게 있어서 잊혀지지 않는 사나이가 둘이 있었다. 하나는 이 여왕이 왕매(王妹)시대에 아낌없이 자기의 처녀를 내맡긴 당년의 재상 위홍(魏弘)이었다. 위홍은 이미 죽은 사람이니 아무리 잊혀지지 않는다 할지라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또 하나의 사나이는 지금 한창 무명국의 무명왕으로서 나날이 세력이 높아가는 견훤이었다.

견훤은 말하자면 지금 이 여왕이 통어(通御)하는 국가에 대하여는 커다란 원수이요. 무서운 협위(脅威)였다. 그러나 여왕은 조금도 견훤이 원수같지 않고 한개 여인으로서 지극히 사모하는 한 사나이일 뿐이었다. 이것은 차마 여왕으로서 입밖에 낼 수가 없어서 그렇지, 무명국 무명왕을 호하는 견훤으로서 염치 걷어치고 신라에게 두 나라의 합병을 요구한다고 하면 여왕은 도리어 그를 승낙하고, 두 나라가 합친 이 새나라에 '왕'과 '왕비'의 자격으로서 견훤과 함께 지나고 싶었다.

밉지 않은 사람을 원수로 보아야 하고, 또 원수로 대하기 때문에 나날이 병력적(兵力的) 협위까지 느끼지 않으면 안되는 지금의 처지가 괴롭고 썼다.

한개 여인으로서의 고통과 한 나라의 임금으로서의 고통 이것은 그에게 있어서는 과도한 것이었다. 재위 십년간 술과 사내희롱으로 일삼는 이 임금의 행동은 남이 얼른 보기에는 호화롭고 인간으로서의 열락(悅樂)은 한 없으리라고 치기 쉬우나, 사실에 있어서는 나날이 늘어가는 고통을 나날이 끄기 위하여 하는 것이지 결코 열락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이런 괴로운 가운데서 위(位)에 있기 십년간―날이 가면 갈수록 더욱 더 커가는 고통에, 드디어는 견딜 수 없어 그는 자기의 조카되는 요(嶢―헌강왕의 서자)에게 위를 전하고 자기는 은퇴하여 임금으로서의 번민만은 벗어버렸다. 견훤이 무명국왕을 호(號)한 지 육년째되는 해였다.

유월에 여왕이 은퇴하고 새 임금이 등극한 그 벽두―칠월에 궁예는 패서도(浿西道)와 한산주(漢山州) 관내의 삼십여 성을 또 집어삼켰다. 이 주인없는 모든 성은 궁예의 군사가 이르면 싸우지 않고 성문을 넓게 열어 맞고 하였다.

궁예의 옛날 상관(上官)인 양길(梁吉)은 아직도 궁예를 자기의 막하쯤으로 여기고 있었는데, 궁예는 제 뜻만으로 사면으로 영지를 개척하여 나가는 것이 괘씸하여 글로 책망하고 말로 책망하다 못해서 마지막에는 군사를 들어 궁예를 토벌하여 보았으나, 이것은 도리어 자기의 무력함만 드러내고 자기의 멸망만 재촉하는데 지나지 못하였다.

이러한 일이 있은 뒤에 궁예는 송악군으로 도읍을 옮겼다.

왕·왕·왕(王·王·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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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악에 왕기(王氣)가 있더니라."

일찌기 귀에 굳은 살이 박이도록 스승인 도선사에게서 이런 말을 들은 견훤은 무엇보다도 급히 백제의 재건을 끝내고, 그 뒤에 북진(北進)하여 송악까지 들어삼켜 왕기 빛나는 곳에서 삼한을 통일하고, 일이 잘되면 거기서 더욱 서진하여 천하의 중원까지라도 엿보려는 엉뚱한 꿈을 꾸고 있던 터에, 궁예가 송악에 도읍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랐다.

이제는 유예하고 주저할 띠가 아니었다. 궁예가 송악에서 도읍하였다 하되 아직 호왕(號王)하지 않고 장군으로서 도읍한 것이니 아직도 '빼앗겼다'고는 볼 수가 없지만, 언제 어느날 호황할지 모르는 일이라 일을 더디할 수 없었다. 그래서 즉시로 대군을 움직여 차차 완산주(完山州)로 향하였다.

무명국 무명왕으로 무진주에 도읍한지 구년―장차 완산주에 정식으로 도읍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견훤은 미리 완산주에는 대궐이며 모든 관아를 지어 두었던 것이었다. 그런지라 무진주의 백성들은 얼마만큼 그것을 반대하였으나 구백제의 백성들은 모두 장차 완순주가 정식으로 서울이 될 것을 의심 않고 믿고 있었다. 견훤의 대군이 북진을 개시할 때, 온 백제 백성들은 가까운 장래에 나라에 이름이 생기고 비로소 완전한 나라가 성립되리라고 힘껏 믿고 있어서 그날이 이르기를 기다렸다.

그것은 과연 헛된 기대가 아니었다. 전완산주의 굉장한 만세성 아래 견훤이 완산주에 들어와서, 이미 충분히 준비되어 있던 대궐로 들어가서 용상에 그의 커다란 몸집을 올려놓을 그 시각쯤해서 옛날 백제의 온 영역에는 일제히 꼭 같은 방(榜)이 나붙었다. 입경할 날짜를 미리 추상하여 한날 한시에 온 나라에 같은 방이 나붙도록 미리 준비하였던 것이었다. 그 방은 대략 이런 것이었다.

―옛날 자서여(子胥餘)가 부여(扶餘)를 중단(中斷)하고 부여의 중앙인 평양에 도읍한 뒤, 자서여의 세력이 미치고 못하는 남방에는 마한(馬韓)이 먼저 서고, 진한(辰韓)·변한(卞韓)이 뒤에 섰다.

부여의 후예(後裔) 고주몽(高朱蒙)이 일어나서 옛날 자서여에게 잃었던 국토를 회복하고 국호를 고구려라 정할새 고주몽의 아우되는 우리 조상 온조(溫祖)는 마한 땅에서 백제국을 세우고, 혁거세(赫居世)는 진한(辰韓) 땅에 신라국을 세우고, 금수로(金首露)는 변한(卞韓) 땅에 가락국(駕洛國)을 세웠다.

후일 신라는 무명지사(無名之師)를 여러 번 일으켰으나 보잘것 없는 힘으로는 우리나라를 감히 움직이지 못하고, 드디어 비겁하게도 당나라를 상국(上國)으로 섬기기를 맹세하고 당나라의 병력(兵力)을 빌어서 전세(傳世) 칠백년의 우리나라 사직을 종내 꺾고야 말았다.

뉘 아니 울었으랴! 뉘 아니 비분히 생각하였으랴!

짐 비록 덕(德)없다 할지라도 위로는 신령의 도움과 아래로는 백만 백성의 힘과 정성을 얻어 의자왕(義慈王)의 숙분(宿憤)을 풀고, 겸하여 하늘 없이 헤매던 너희들의 괴로운 정경을 풀어주고자 하노니, 짐이 덕없다고 책망만 하고 있지 말고 나와서 짐과 힘을 함께 하여 거룩하고 굳센 아름다운 나라를 회복하자꾸나.

기쁘지 아니하냐. 춤이 저절로 추어지지 않느냐? 나라 이름도 새로이 지을 것 없이 후백제(後百濟)라 하기로 하자. 관직도 옛날의 제도에 약간(옛날 미비하였던 것만) 수정을 하고 새로이 당나라를 흉내내는 등 창피한 일을 피하자. 자! 백성들아, 짐과 함께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며 기꺼워하자.

한날 한시에 온 백제에 같은 방이 나붙으니 기다리고 기다리던 방이라 온 나라는 물끓듯하였다.

장사하던 사람은 가겟문을 닫고, 농사하던 사람은 보습을 둘러메치고, 남녀노소를 물론하고 우리의 새 나라와 새 임금을 축하하는 잔치, 만세성…서로 벙글거리는 얼굴, 가만 있을래야 가만 있을 수 없어 이 친구 저 동무를 찾아 달려 돌아다니는 젊은이 떼, 감격에 참지 못하여 느끼고 혹은 통곡하는 노인네들, 사당에 들어가서 이 기꺼운 소식을 눈물로 조상께 아뢰는 이, 이 날을 보지 못하고 일찍 떠난 조부모나 부모나 혼은 형제 자식들 때문에 가슴을 두드리는 사람들…. 아아 이 거대한 감격 아래는 표현방식도 가지가지로 철모르는 짐승이며 산천초목까지도 기꺼워하는 듯하였다.

백제가 망한 지도 적지 않은 날짜가 흘렀는지라, 이 땅안에는 신라 사람도 꽤 들어와 있었다. 그들에게는 물론 이 사건은 그다지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불만을 표시했다가는 봉변을 당할 것이 물론이고, 설혹 불만은커녕 오불관언(吾不關言)의 태도를 취할지라도 욕이 돌아오지 않을까 하여 마음에 없는 춤을 추며, 마음에 없는 기쁜 표정을 얼굴에 장식하는 등 이런 희극까지도 생기었다.

서울의 밤은 차차 깊어갔다. 밤이 깊어가면 깊어갈수록 밝기는 차차 더 밝아가고, 이 새 나라이요 겸하여 옛나라인 백제의 장래를 축하하는 소리는 땅에 사무치고 하늘에 울리어서 불야성(不夜城)의 환희는 더 높아가고, 거기 폭죽(爆竹)이 터지는 소리까지 어울려서, 귀로만 듣자면 전장(戰場)인 듯싶기도 하고, 눈으로만 보자면 대화(大火)인 듯싶기도 하였다. 대궐은 겹겹이 백성들이 둘러싸고 새 임금의 거룩한 양자며 웅대한 말을 보고 듣자고 야단들이었다.

대궐에서도 그날 등극연에 연하여 또 야연이 있었다.

미리부터 예정되어 있다가 오늘 등극 직후에 발령(發令)된 백관은 반서를 따라서 좌정하고, 기녀(妓女)?악공들의 울리는 유명한 백제아악(百濟雅樂)에 펄럭이는 깃소매도 우아하게 야연은 차차 깊어갔다.

이날의 주인공 신왕 견훤―평생에 소리내어 크게 웃을 줄 모르고 평생에 무표정한 그의 얼굴….

오늘이야 설사 웃지 않으랴! 오늘이야 설사 만면에 환희의 표정이 나타나지 않으랴! 새로이 정식으로 벼슬을 띤 그의 문무관들은 오래 섬겼으나 아직 이 주인에게서 볼 수가 없는 웃음의 표정을 퍽이나 기다렸다.

새 임금 견훤도 웃고 즐기고 하여 오랫동안 당신과 함께 쓴 일 단 일을 겪어오던 이 동무들에게 기꺼운 표정을 나타내어 그들로 하여금 더욱 기쁘게 하여주려는 마음으로 연석에 참례하였다.

그러나 웬일인지 기쁜 얼굴을 하여보려면 그의 표정은 더욱 음침하여지고, 홍소(哄笑)를 하여보려면 그의 목에서는 전혀 소리가 나오지도 않았다. 기꺼운 표정을 하여 보려고 몇 번 해본 노릇이 모두 고소(苦笑)가 되어 버렸다.

왜?

복잡미묘한 여러 가지의 사정이 그의 가슴에 얽히고 서리어서 그의 마음은 더욱 음침한 편으로 흘러나려가는 것이었다. 오늘날의 이 일을 준비하고자 아홉살이라는 소년의 몸으로 집을 뛰쳐나온 이래, 춘풍추우 이십오성상 서른 서너덧이라는 한창 장년기에 드디어 성공의 보탑 위에 올라서기는 하였다. 이십 오년간을 애쓴 결과가 오늘날 성공의 보탑 위에 올라서고 그 위 아직 춘추 풍부한 몸이요, 더우기 오늘까지의 그의 밟은 길이 마치 하늘이 내신 사람인 듯한 걸음을 실수하지 않고 헛길 들지 않고 오늘날 이자리까지 일직선으로 올라온―이 너무도 행운인 점이 도리어 장차에 대한 위구심(危懼心)을 일으키게 하였다.

국가적 복수는 이미 하였다. 하나, 개인적―즉 신라의 선조가 백제의 선조에게 대하여 한 야비하고 참담한 행동에 대한 복수를 반드시 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의 이 자리만으로 만족할 수 없고, 동벌(東伐) 또 동벌의 싸움이 그냥 계속되고, 그런 일이 계속되느니만큼 그새 오래 신라의 학정 아래 시달린 백성들을 자기 또한 시달리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이 매우 괴로웠다. 오래 신라의 난정 아래 시달린 백성들은 목마른 자가 물을 기다리듯, 이 새 임금 아래서 평화한 세월을 보내기를 얼마나 기다리랴! 내가 사랑하고 내가 궁휼(矜恤)히 여겨야 할 이 백성들을 그냥 병란의 고역 중에서 헤매게 하여야 할 일이 진실로 마음 아팠다.

궁예의 송악 점령도 또한 그의 마음을 무겁게 하였다. 궁예 따위가 제아무리 서둘지라도 철원·명주(鐵原·溟洲) 근방에서 휘돌다가 장차 내가 정식으로 국가를 세운 뒤에 일충하여서 송악을 점령하고 패서도로 뻗어나아가면, 그때는 궁예는 저절로 내 품안으로 들어와서 내 지휘를 빌게 될 것쯤(사실 견훤이 부모의 고향인 광주가 그리워서 그냥 광주에서 꾸물거렸지 손빨리 완산주로 뻗어나가서 도읍을 정하고 일로 북진하면 무주공성(無主空城)인 서북지방 전부는 꼬리를 이어 그의 품아래 들어왔을 것이다)으로 믿고 있었다. 그런데 자기가 광주에서 꾸물거리는 동안 궁예는 어느 틈에 서쪽으로 뻗어 나아가서 송악까지 궁예의 손아래 들어가 버렸다. 주인없는 시대 같으면 게까지 가면 저절로 점령될 것이지만 궁예의 손아래 먼저 들어간 이상은 상당한 곤난을 겪지 않고는 송악은 내 손아래 들기 힘들 것이다.

왜 그런지 궁예를 밉게 보기는 싫지만 송악 탈취를 위해서는 궁예와 정면으로 싸우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밉게 안보이는 사람과 싸우는 것도 가슴이 뻐근하는 일인데다가, 또한 그와 싸우기 위하여 상당히 백성들을 괴롭힐 생각을 하니 공연히 광주에서 오랜 세월을 보낸 것이 후회막급이었다.

"너는 자식 복이 적다."

일찌기 은사 도선(恩師道詵)에게서 이런 말을 들은 신왕은, 그 말을 자식을 못 낳으리라는 말로 해석할지, 자식을 낳는다 할지라도 불초자라는 뜻으로 해석할지 미상하여 많은 비빈을 두었다. 몸이 건장한 그는 이 적지 않은 비빈의 몸에서 적지 않은 자식을 보았다. 그랬는데도 불구하고 스승의 예언은 현재까지도 잊혀지지 않아 마음놓이는 일이 아니었다. 평생 정력 다 들여 이룩한 이 후백제가 자기 일대로 다시 소멸된다 하면 지하의 조상을 대할 면목이 어디 있으랴!

이 축하의 경사스러운 연회장에서도 신왕의 가슴은 얽히고 얽히어서 술만 연하여 들이키고 들이키고 하였다.

이런 복잡미묘한 감정 때문에 더욱 침울하여가는 신왕의 마음을 알 까닭이 없는 백성들은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모르고 차차차차 수효가 더 늘어가면서, 이 새 임금의 면용과 음성을 단 한번 단 한마디라도 들어보자고 야단법석이었다.

음침한 얼굴로 연방 술만 들이키고 있던 신왕은 그가 백성들을 사랑하느니만큼 당신 마음이 아무리 무겁다 할지라도 이 백성들의 첫소원 하나는 들어주기로 하였다.

대궐 삼문 누상(樓上)에는 어명에 의지하여 휘황히 촛불이 켜졌다. 당신을 보고싶어 하는 뭇 백성에게 충분히 보이기 위하여서였다.

연희는 그냥 계속시키고, 신왕은 시종 문관·무관 단 두 사람씩만 데리고 누상으로 나갔다.

좌우편에서 부액을 하였는지라 백성들은 첫 눈에 벌써 어느분이 새 임금인지를 알았다. 동시 가까이 나오려는 물결같은 움직임이며, 남의 앞에 막아섰다는 타매성(唾罵性)이며, 임금의 면용을 감히 우러르지를 못하고 소리내어 쿨썩거리는 무리들의 소란 때문에 잠시는 전체가 정제되지 못하고 어지러웠다.

"여러분!"

삼군을 호령하던 신왕의 웅장한 음성은 웅―하니 소란한 백성들 위로 울리어 나갔다. 동시에 그 요란스럽던 소란은 즉시로 끊어지고 겹겹이 싸인 수만명 군중은 바삭소리 하나 내지 않고 귀를 기울였다. 그들에게 신왕의 굵은 음성은 퍼져나갔다.

"여러분! 우리는 이제는 우리의 조선(祖先)께도 부끄럼없이 지하에 뵈올 수가 있게 되었읍니다. 그러나 과인(寡人)은 여러분께 대하여서 미안한 말씀 두어마디를 아니 할 수가 없어서 이 때문에 여러분께 대해서도 아주 거북하오이다. 첫째로는 과인 본시 무덕하고 우매해서…."

'아니올씨다, 아니 씨다!'의 부정사(不定辭)가 백성들 가운데서 만뢰(萬雷)와 같이 일어날 동안 신왕의 웅대한 음성은 더욱 크게 울리었다.

"여러분의 기대에 어그러지기가 쉬울 테니 이 우매를 우매라 마시고 힘을 같이하여 도와주시기를 바랍니다."

노인들의 감격의 울음소리, 젊은이들의 만세소리 가운데서 신왕의 웅장한 음성은 그냥 계속되었다.

"또 한가지는 우리는 오늘날의 이 자리만으로 만족할 수가 없다고 봅니다. 동으로 천년사직의 신라가 그냥 있으매, 이것은 우리들의 커다란 협위(脅威)라 상당한 방책을 써야 할 것이고, 서북으로 궁예가 나날이 세력과 힘을 돋구니 이 또한 묵시(默視)하였다가는 우리나라의 사직이 위험한질, 이를 위해서는 당분간 부국강병책을 쓰지 않을 수 없고, 부국강병책을 쓰는 동안은 백성들은 그냥 도탄의 괴로움을 맛보지 않을 수 없으니, 이 두 가지의 일 때문에 오늘 비록 기쁜 날을 맞이하였다 하나 과인이 여러분께 대해서 부끄러이 여기는바…."

내 나라를 위해서 약간 쓴맛을 본다고 한들 그것을 어찌 도탄의 괴로움이라 하오리까, 하는 뜻의 부르짖음이 사면 팔방에서 벌집 쑤신 것처럼 울리었다.

과인의 뜻과 마음이 이러하니 끝끝내 버리지 말고 과인을 도와서 전백제 시대의 찬란한 국가에 지지 않는 빛나는 나라를 세우자는 뜻으로 첫 훈시를 끝내고, 부액을 받고 다락을 내려올 동안 백성들의 환호성과 느끼는 소리는 하늘을 찌를 듯이 울리어서, 신왕이 다시 연석에 돌아오고 연석의 흥취가 다시 돌아설 때까지 한없이 끝없이 대궐 밖에 울리고 울리었다.

이리하여 후백제 건국의 제일야(第一夜)는 환희와 감격 가운데서 넘어갔다.

때는 신라 효공왕(孝恭王) 삼년―당나라로 보자면 소종(昭宗) 광화(光化) 삼년, 이 신왕이 무명국을 세우고 무명왕이 된 지 제구년째였다.

신라 효공왕(孝恭) 제사년, 견훤이 칭왕(稱王)한지 십년째, 후백제 건국 제이년, 당나라 소종(昭宗) 천부(天復) 원년―개천으로 흐르는 샘물조차 우글우글 끓어오르는 듯한 무더운 여름날이었다.

개골산(皆骨山)의 이 봉우리 저 봉우리를 근원삼아 흘러내리는 몇 줄기의 샘물이 합쳐서 자그마한 시내를 이루고, 왼쪽으로는 꽤 경사가 가파른 메곁을 낀 소로(小路)에 불타는 듯한 뜨거운 돌맹이들이 널려 있는 것을 골라 짚으면서 말을 천천히 앞으로 거니는 두 사람―말머리가 약간 앞선 사람은 자칭 대장군 궁예(弓裔)요, 궁예의 말보다 약간 말머리가 뒤져서 나란히 하여 배종하는 사람은 궁예의 막료 왕융(王隆)이었다.

"개같은 놈의 날씨로군, 이렇게 더운 법이 어디 있나?"

험상궂은 얼굴에서 한편쪽만 번득이는 눈을 잔뜩 찌프리고 이 무더운 날씨를 투정하는 것은 궁예였다. 이 대장군에게 여러 해째 붙어서 자기 일신의 지위를 튼튼히 하여가는 방식을 체득한 왕융은 얼굴에 아첨하는 듯한 미소를 나타내며 상관의 의견에 동의하였다.

"그렇습니다. 아니, 개만도 못합니다. 개는 이렇게 무식하게 날씨를 덥게 하지 않습니다."

"그렇지, 그럼 돼지같을까?"

"글쎄올씨다. 돼지보다 어리석은 것은 인간 세상엔 없으니 비유하자면 돼지에게나 비기지만 사실로는 돼지보다도 더 무식합니다."

"암, 그렇지, 그렇지!"

궁예는 여전히 눈턱은 찌프렸지만 이 왕융의 말이 매우 비위에 맞는 듯이 한번 코를 힘있게 울렸다. 그런 뒤에는 이 개보다도 돼지보다도 무식하게 무더운 날씨를 벌하는 의미인지, 채찍을 높이 들어 궁중에 소리나게 한번 휘두른 뒤엔, 지금까지 하던 이야기를 계속하라는 뜻인 듯이,

"그래서―?"

하고는 한 순간 왕융을 돌아보았다.

"네이. 같은 말씀을 몇 번씩 번복합니다마는 천리(天理)라는 것은 쉬지를 않고 순환해서 같은 곳에 멈추어 있지 않는 것이 아니오니까? 옛날 삼국이 정립(鼎立)해 있다가 한때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때의 형세로 보자면 억만년까지라도 쇠하는 날이 없을 것 같았지만, 겨우 이백년 뒤에 신라는 도리어 예전 신라보다도 작게 되었읍니다. 이백년 전에 없어졌던 백제도 다시 섰읍니다. 그런데 삼국 당시에 가장 강하고 웅대하던 고구려가 지금 무주의 공지(無主空地)로 남아 있으니, 이것이 천의(天意)오리까? 장군으로 보올지라도 장군의 위에 임금이 없으시니, 임금이나 한가지로 뵈올 수가 있지만, 임금으로 뵙자면 또한 영역(領域)이 없으시니, 임금도 아니시요 장군도 아니시요 그저…."

뒷말이 약간 하기 거북하였다. 적괴(賊魁)라 하고 싶었다. 임금도 아니요 장군도 아니면서도 군사를 거느리고 주인 없는 땅에 웅거해 있으니 말하자면 적괴이었다. 왕융은 이 '적괴'라는 명예롭지 못한 칭호를 상관에게 불어넣어 궁예의 마음을 격동케 하여 궁예로 하여금 간섭하는 이 없는 땅에 임금으로 서게 하고 싶었다. 임금의 아래서는 정부의 수뇌자까지 올라갈 수가 있으나, 장군의 아래서는 가장 높이 올라간대야 비장이었다. 더우기 궁예에게는 옛날 양질의 막하 때부터의 심복 무장이 많으므로, 중도에 궁예에게 붙은 왕융같은 사람은 잘해야 한 곳 성주(城主) 이상은 올라가기 힘들었다. 이미 장년 시기를 지난 왕융, 자기만이면 한낱 성주로 종시한단들 무슨 여한이 있으랴만 자기의 아들 왕건(王建)의 장래를 위해서는 궁예를 왕위에까지 올리지 않으면 부족한 느낌이 있다. 무(武)에 익지 못한 대신 모사(謀士)로 혀끝으로 궁예에게 얼마만큼의 신임을 얻은 왕융은 궁예에 마음의 임금이 되고 싶은 생각이 일도록 간간 건드려도 보고 충동 내지 격동도 시켜보았다. 오늘도 또한 궁예와 단 둘이 길을 갈 기회를 얻어서 예의 공작을 하는 즈음이었다.

―당신은 지금 비록 자칭 대장군이라 하기는 하나 사실에 있어서는 임금도 아니요 장군도 아니요 한낱 적괴에 지나지 못하오―

이말 한마디를 내놓고 탁 궁예에게 내던지기만 하면 올똑밸이 센 궁예의 마음을 적지않이 격통시킬 것이요, 격동만 되면 대개는 일이 성사된 듯은 하지만,―그 한마디가 힘들었다. 이 성미가 조급하고 조야(粗野)한 상관의 일시적 흥분 때문에 대수롭지 않은 일로 그의 칼의 녹으로 화한 사람의 수효가 왕융의 아는 바 만으로도 꽤 많았다.

마지막 말 한마디를 내지 못하여 주저하는 왕융에게 궁예가,

"그럼 적괴란 말이지?"

탁 내어던졌다.

왕융은 가슴이 서늘하였다. 온몸·사지·머리털까지 주하였다. 칼소리가 당장 나며 자기 머리가 떨어지는 줄로 알았다. 본능적으로 말고삐를 낚우며 목을 움칠 때 별안간 칼소가 쟁그렁하니 나며,

"에익!"

궁예의 노호하는 소리가 들렸다.

왕융이 말에서 떨어지지 않은 것이 오히려 기적이었다. 몸이 쏠리며 거의 낙마할 번했다. 어떻게 낙마도 않고 도리어 말에 바로 앉았는지는 스스로도 기적이었다. 정녕코 목이 잘리거나 허리가 두 동강이에 난 줄로 알았었는데 그렇지도 않고 몸을 말에 바로할 때에, 왕융은 이 기적을 의아히 여기며 눈으로 관을 힐끗 보았다. 동시에 이 눈치빠른 모사는 상관의 아까의 노호성과 말소리가 왕융 자기에게 대한 노염 때문이 아니고 궁예 자신에게 대한 노염이었음을 알았다. 궁예는 노염을 참거나 감출 줄을 모르는 사람이었다. 남에게 대하여 노염이 나면 그 사람의 목이나 허리에 칼을 보내고, 자기 자신에게 대하여 노열이 나면 자기의 칼을 한번 쟁그렁하고 스스로 자기를 욕하여 그 노염을 풀고야 마는 사람이었다. 그(궁예)의 유년 시기에 그의 위를 넘어간 몸쓸 폭풍우 때문에 받은 뇌(腦)의 고장이, 그의 소년 시기를 무사히 지내고 청년 시기도 무사히 지냈으나, 청년과 장년의 중간 시기인 지금에 와서 때때로 발작으로 일어나서 좀 심한 때는 미친 사람같은 광태까지도 발휘하고 하였다.

자기 자신을 한번 힘있게 책망하고난 궁예는 그의 성한 한편 눈만 번뜩이며 잠시를 말없이 앞으로 가다가 이번은 발작적인 홍소(哄笑)를 하였다.

"하하하하. 신라의 왕자가―왕자가―하하하, 고구려의 임금이 되어? 좋지 좋아. 하지만 야 왕융아. 아니 여보게 비장. 여보소 왕장군! 후고구려보다 후신라(後新羅)는 어떨까? 후신라가 아니라 신(新)신라, 지(支)신라는 어떨까? 하필 후고구려래야 할까?"

이제는 다시 제정신을 수습하여 모사로서의 자신을 회복한 왕융은 여기서 또한마디 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옛날 고구려의 왕자는 남(南)으로 내려서 백제의 시조가 되지 않았읍니까? 신라 왕자는 후고구려 시조가 되신단들 무엇이 괴이하오리까?"

궁예는 대답지 않았다. 대답 없는 궁예를 태운 채 말은 그냥 천천히 몇 걸음 나아갔다. 몇 걸음 가서야 궁예가 대답하였다.

"내가 후고구려이 임금이 되는 게 자네에게 가장 큰 소원인가?"

"그렇습니다."

"그밖에 그 이상 더 없는가?"

"그밖에는 장군께서 천만세나 수(壽)를 누리시고 복을 누리십사 할 뿐이올씨다."

"또―?"

왕융은 의아하였다. 한순간 궁예를 바라보았다. 임금이 되고―복과 수를 한없이 누리고―축복과 아첨에 있어서 이 이상 무슨 말을 더하랴. 더 할만한 적당한 말이 없었다. 술을 많이 드십사고? 미녀를 많이 고르십사고? 이런 말은 모두 "복 많이"에 포함되는 말이었다. 더 아첨할 말이 생각나지 않아서 의아히 쳐다볼 때에 궁예의 독촉이 나왔다.

"또 있을 테지?"

애꾸눈을 번뜩이며 이렇게 물을 때는 일종의 강문(强問)이었다.

"그 이상 그 이상 가장 중한 소망이 있을 테지?"

"글쎄올씨다."

"자네가 나 훌륭히 되기를 바라는 것은 날 위해서가 아니라 자네 자식을 위해설 텐데…."

가슴에 바로맞았다. 조롱하는지 험책하는지 구별하기 힘드는 험상궂은 눈이 왕융의 얼굴에 부어질 때 왕융은 뜻하지 않고 몸서리쳤다.

"나더러 임금이 되라지 말고, 자네 자식을 임금을 시키게나. 빈 땅은 많겠다, 사람놈―뛰어난 놈은 적겠다. 지렁이(甄萱)들 또래도 다 임금되는 판에 왕건(王建)이 임금되지 말라는 법도 없겠지."

여전히 조롱인지 진정인지 알아듣기 힘든 말에 왕융은 할말이 없어서 묵묵히 따라갔다.

그날밤 왕융은 왕융으로서 아까 낮의 공작이 전혀 실패였었는가 혹은 전진(前進)의 도중이었었는가 연구하느라고 잠들지 못하고 이리저리 뒤채는 동안, 왕융의 상관 궁예는 또한 자기의 진로(進路)를 생각하느라고 잠들지 못하고 이리저리 뒤채고 있었다.

"임금이 되어라!"

이것은 비단 오늘 왕융에게서 처음 들은 진언(進言)이 아니었다. 그 새에도 그의 막료 부장들이 기회만 있으면 꾸준히 진언하여 오던 바였다. '사람'이란 것에서 '욕심'이란 것을 제외하면 무게가 절반이 된다는 속담만도 있거니와, 사람중에서도 특별히 욕심과 심술을 더 많이 타고난 궁예는 부하들의 권고가 아니라도 그런 양심쯤은 벌써부터 품고 있었다. 더우기 견훤이 임금이 된다, 누구가 장차 태수가 된다, 법썩할 때는 자기도 하루바삐 임금이 되지 않았다가는 영 기회를 놓질 성싶어서 마음이 설레는 때도 없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궁예로하여금 덜컥 임금이 되게 하지 않는 까닭은 단 한가지였다. 즉 궁예에게는 신라의 사직이 탐스러웠다. 새로이 나라를 세운다든가, 후고구려의 시조가 된다든가 하려면 벌써 그의 실력이 넉넉하였지만, 궁예에겐 그래도 신라의 사직이 그리웠다. 새 나라를 세워가지고 그 새 나라로써 신라를 정복할 정복자의 지위로 신라에 군림(君臨)하는 것조차 싫었다. 내가 신라의 왕손이매 정정당당히 내 자리에 내가 오르는 형식으로 오르고도 싶었다.

이런 조금 색다른 야심이 있기 때문에 궁예는 그의 실력이 넉넉히 한 나라의 임금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고, 그의 차지한 땅이 한 나라의 강력으로서 부끄러움이 없으되, 그냥 임금될 생각은 하지 않고 신라의 형세만 엿보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자 일년·이년하여 십년에 가까운 날짜가 흘렀으나 신라에서는 물론 궁예에게 '와서 임금이 되어줍시사.'청하지도 않고, 궁예의 마음대로 저절로 신라 임금이 될 기회도 이르지 않고, 궁예는 궁예대로 신라는 신라대로, 그냥 대립해 있을 때에 궁예는 은근히 내심 등이 닳았다.

게다가 소위 후백제라 하고 일어난 견훤의 나라가 그 마음보를 알 수가 없었다. 물론 신라에 반기(叛旗)를 들고 일어선 나라이니 신라와는 원수지간일 것이다. 더우기 신라·견훤·궁예, 이렇게 삼각관계로 보자면 궁예와 견훤은 단 하룻밤 사이의 동무이지만 웬일인지 서로 마음으로 밉게 여기면서도 친애하게 여기는―영구히 서로 잊지 못할 사이요, 신라로 말하자면 궁예에게도 원수요, 견훤에게도 원수였다.

그러면 만약 궁예가 신라를 정벌하면 견훤은 당연히 궁예를 도와서 신라를 같이 쳐야 하거나, 적어도 방관적(傍觀的) 태도에 그쳐야 할 것이다. 그런데 아직까지의 전례로 보자면 궁예가 신라와 싸우는 일이 있으면 견훤은 궁예의 앞길을 막아서 신라를 보호하여 주든가, 혼은 자진하여서 궁예와 정면으로 싸우는 일까지도 있었다. 하여간 궁예의 편을 들어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렇다고 또한 견훤은 철두철미 신라를 도와주고 보호하여 주는가하면 그렇지도 않은 것이, 견훤 자신은 연방 신라의 변경(邊境)을 빼앗기도 하며 치기도 하여 신라를 괴롭게 하였다. 말하자면 신라를 자기 혼자서 성화시키기 위하여 남에게는 건드리지 못하게 하는 셈이었다.

견훤과 궁예의 사이는 의가 좋은지 나쁜지 자기네끼리도 알 수 없었다. 일이 신라에 관한 한 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싸웠다. 그러나 다른 일에는 서로 싸우다가도 양보하고 다투다가도 헤지고 하였다.

지금의 궁예의 실력으로 보자면 군사를 이끌고 궁중 신라 서울로 들어가 대궐에 들어 용상(龍床) 위에 앉는다한들, 신라의 관민(官民 중에는 이를 막거나 항거하지 않을 일을 뚱딴지 견훤이 간섭을 한다.

다른 것 다 싫고 단지 신라임금 한 자리를 탐내는 궁예에게 대하여, 신라 왕실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궁예는 그렇게 믿는다) 견훤이 간섭을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견훤을 상대로 싸우자 하니 궁예의 힘으로 견훤을 이길 자신이 없었다. 급기 싸워보면 혹은 이길는지도 모르지만 꼭 이기겠다는 자신은 없었다. 이 자신 없는 노릇을 서뿔리 시작하였다가 일이 실패에 돌아가는 날에는 궁예는 신라와 동시에 견훤까지도 적수로 상대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것은 즉 궁예 자신의 몰락을 뜻함으로써, 신라왕은커녕 새 나라를 세울 가망조차 없이 아주 옛날 절간의 선종(善宗) 시대로 돌아가는 일이다.

견훤이 마음보를 어떻게 먹었는지 이것은 똑똑히 알 수 없으되, 궁예 자기가 신라와 싸우기만 해도(지금까지 친근히 지내던 견훤이가) 홱 돌아서서 신라편을 돕고 하니, 자기가 만일 신라왕이 되고자하면 기를 써서 거기 반대할 것은 정한 이치다.

그러면 견훤이 있는 동안은 자긴 신라 임금이 되기 매우 어렵다. 아니 견훤이 있는 동안이라기보다 견훤이 '세력 있는 동안'은 매우 어렵다. 견훤의 힘이 꺾이든가, 견훤이 죽든가, 혼은 자기의 힘이 견훤의 힘보다 더하여지든가 세가지 중의 한 가지라도 되기 전에는 자기는 신라 임금은 되기 힘들다.

그러나 그 세 가지라는 것이 또한 다 힘든 것으로서, 지금 한창 뻗어오르는 견훤의 힘이 벌써 꺾이기도 쉽지 않을 일이요, 자기의 힘이 견훤보다 나아지기도 매우 어려운 일이요, 인명은 재천이라 하지만 시퍼렇게 살아있는 사람을 죽기를 기다린다는 것은 어려움을 지나쳐 더욱 어리석은 노릇이다.

이렇게 따져보면 궁예는 새 나라를 세우고 스스로 거기에서 임금이 될 수는 있을지언정, 신라 임금은 도저히 될 가망이 없었다.

아까 낮에 왕융에게 임금되기를 제촉받을 때에 궁예는 표면으로는 왕융의 의견을 비웃어 버렸지만, 내심으로는 이즈음 늘 그 문제 때문에 켕기어 오던 터이라 몹시 가슴이 무거워졌다.

"아무 임금이나 임금이 될까?"

사실 사위(四圍)의 정세로 보아 임금이 되려면 지금 되어야지, 이 기회를 놓지면 좀 힘들 것 같았다. '신라 임금'이 될 기회만 기다리고 천년 만년하고 있다가는 영 궁예장군으로 끝나지 '대왕'칭호는 들어보지도 못할 염려도 없지 않았다.

단군(檀君)이 대륙 동쪽 끝에 자리를 잡고 같은 언어를 쓰는 민족을 모두 모아 한 국가를 이룩한 뒤, 숱한 변천을 겪고 또 겪어서 삼국 정립(鼎立) 시대까지 이르렀다가, 삼국 중에가장 작은 나라인 신라가 당나라의 힘을 빌어서 먼저 백제를 없이하고, 뒤에 고구려를 없이한 뒤에는 단군의 당시와 비기자면 아주 형지가 없게 되었다.

신라는 삼국을 통일하였다 자칭하지만, 통일한 것이 아니라 백제와 고구려의 두 나라를 없이한 뿐이었다. 백제의 구역(舊域)의 일부분은 혹은 신라의 왕권(王權)이 미쳤는지도 모르지만―그리고 또 구고려의 구역(舊域)의 최남단(最南端)의 일부분은 역시 신라의 왕권이 미쳤는지도 모르지만, 그 밖의 땅―더우기 고구려의 구역의 전부는 신라의 아주 치지도외(置之度外)였다.

고구려는 본시 서로는 요하(遼河) 썩 너머까지, 북으로는 흥안령(興安嶺)까지, 동으로는 바다까지, 남으로는 한수(漢水)너머까지가 그 강역이었다. 그런데 신라가 당나라의 힘을 빌어 고구려를 멸한 뒤에는 보통 상식으로 생각하자면 고구려의 옛날 강토를 신라가 관리하고 다스리고 하였음즉하다. 그러나 사실에 있어서는 그렇지 못하고 신라는 옛날부터의 자기네의 강토를 그것이나마 간신히 관리하였지, 고구려의 옛 강토까지 힘이 및지를 못하였다. 임금을 잃은 고구려의 옛 강토의 남쪽(압록강 이남)은 그곳그곳의 토호들이, 혹은 성주라 혹은 도둑이라 자청하여 백성들을 다스리고 관활하고 하였다.

옛날 고구려의 강역의 중요한 부분이며, 겸하여 고구려 문화의 중심지인 압록강 이북은 발해국(渤海國)이라는 새 나라이었다. 임금도 고구려의 후인(後人)이었다. 백성도 (신라에게 망한)고구려의 유민(遺民)이었다. 방역(邦域)도 남쪽 약간을 제하고는 고구려의 옛 땅이었다.

말하자면 고구려는 그 강토의 남쪽을 약간 잃었을 뿐 국호(國號)만 고치고 그냥 존속하여 온 것이었다.

신라는 삼국을 통일하였다라고 외치고 싶으리만큼 고구려의 정통을 이은 발해를 후고구려라 보지 않고, 압록강 이남의 주인 없이 남아 있는 약간의 땅을 고구려의 옛터라 일컫고, 그 땅에 임금이 없는 것을 다행히 여겨 그 지역을 고구려의 구역(舊域)이요 신라의 새 영토라 공칭(公稱)하고 있었다.

그런지라 신라의 삼국통일이라는 것은, 사실에 있어서는 당나라의 힘을 빌어 백제를 없이하고 고구려를 없이하기는 하였으나, 국토(國土)는 서쪽으로 그것도 일시적으로 약간 늘었을 뿐이지 통일한 보람은 하나도 없었다.

이러하던 것을 서쪽은 도로 후백제 견훤에게 빼앗기고 나니, 이제는 주인없는 북쪽 하나를 내 강토라고 버티고 있는 것에 불과하였다.

그 주인없는 땅을 신라는 '내 강토'라고 버티고 있으나, 또한 그곳을 현재 관할하고 다스리고 있는 지방지방의 토호들은 자기네의 땅으로 여기고 있고, 궁예나 양길이같은 무리들은 또한 자기네의 강토이거니 하고 버티고 있다.

사실 신라가 힘만 든든하면 그 땅은 당연히 신라에 권속될 땅이요, 지금 제 땅이라고 버티고 있는 토호들은 잘 해야 지방관, 못하면 모역(謀逆)을 몰려서 죽을 무리이며, 양길·궁예 따위는 목숨이 천개라도 붙어나지 못할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도리어 궁예같은 사람은 빈 땅의 주인노릇보다도 신라의 종사를 엿보는 형편으로 신라 일천년의 사직도 이제는 뿌리까지 흔들리어 걷잡을 수가 없이 되었다. 궁예는 신라사직을 엿보았다. 자기가 신라의 왕손이거니 자기는 당연히 엿볼 만한 권리가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뚱딴지 견훤이 나서서 이를 방해하여 귀찮게 구는 것이다.

하릴없이 궁예는 '신라임금'이란 자기의 본시의 목적을 내버리고 거저 임금이 되었다.

"예전 신라는 당나라에 청병하여 고구려를 멸하고 평양 서울을 쑥밭을 만들었다. 내 이를 괘씸히 여겨 동지들을 모아 고구려의 원수를 오늘날 갚았노라."

마치 수천년전에 견훤이 완산주에서 즉위할 때에 한 선언과 비슷한 포고를 하고 드디어 임금이 되었다.

이리하여 이 반도에는 삼백년 전과 같이 또 삼국이 정립(鼎立)을 하게 되었다. 삼백년 전과 다른 점은 삼백년 전은 북으로는 흥안령까지, 서쪽으로는 요서(遼西)까지가 삼국의 강역이었었는데, 지금은 북으로는 아직 미분명하지만 잘해야 압록강이요, 대륙에 연접하였던 북쪽이 없어지니만큼 서쪽으로는 어디할 것 없이 황해바다가 한계(限界)였다. 요 땅안에 임금이 셋이 생기고 따라서 나라가 셋이 생기게 되었다. 원칙상으로 보자면 나라가 셋이 있어서 임금도 셋이 있어야 할 것이지만, 이 땅에는 임금이 셋이 생기기 위하여 나라가 셋이 섰다.

신라 서울은 후일 경주(慶州)라 일컫은 그 자리였다.

후백제의 서울은 완산주(完山州)였다.

궁예는 아직 나라 이름도 없었다. 서울이라고 정한 곳도 없었다. 명주(溟州) 땅에서 임금이라 불리고 있으나 대궐이라고도 따로 없이, 어느 나라 임금이란 호도 없이 막료며 백성들에게 '나랏님'이란 칭호로 불리고 있었다. 나라 이름도 없느니만큼 강토의 경계(境界)도 미분명하였다. 남쪽이며 서쪽으로는 신라와 후백제가 있으니 국경선이 있음직하나, 그것조차 분명하지 못하였다. 그곳 성주(城主)가 신라에 붙을지 후백제에 붙을지 성주의 마음에 따라서 이동이 되는 국경선이라, 국경선 근처의 땅은 임금도 똑똑히 어느 나라에 소속되는지 몰랐다.

궁예의 나라의 북쪽 국경선은 더욱 모호하였다. 고구려의 뒤를 이어서 일어난 발해국은 동서와 북은 옛날 고구려의 국경선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지만, 남쪽으로 반도로 내려오면서는 신라와 이렇다 저렇다 하기가 귀찮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내 나라이라고 밝힌 적이 없었다. 외국과의 관계로 부득이 밝혀야 되게 될 때는 압록강까지를 발해국이라 하였다. 그러나 압록강 이남 청천강(淸川江)도 넘어서 대동강 유역 근처까지도 스스로 발해국에 속한 지방이라고 일컬은 곳이 많았으며, 표면으로는 신라가 무서워서 신라 땅인 체하지만 내심으로는 발해에 심복해 있던 지방이 반도(半島)에도 꽤 남쪽가지도 있었다. 물론 옛날 고구려의 관계로 고구려가 비록 망하였다 하나, 고구려의 뒤를 이은 발해국이라 고구려의 유민들은 발해를 사모하는 마음이 많았다. 그런 지역(地域) 안에 궁예가 비록 표면으로는 '후고구려'를 자칭하며 건국하였다 하나, 정통(正統) 후고구려로 발해국이 있으니 고구려 유민들이 궁예에게(마치 백제의 유민들이 견훤에게 심복하듯이) 곧 심복할 까닭이 없었다. 궁예의 힘, 궁예의 병력(兵力)이 미치는 데까지는 궁예의 판도 안에 들어왔지만, 궁예의 힘이 자라지 못하는 곳은 궁예의 나라이 아니요, 일단 궁예의 병력에 궁예의 판도안에 들었던 땅도 기회만 있으면 궁예의 판도에서 벗어나곤 하였다. 그런지라 궁예의 나라의 북쪽 국경선은 어디까지인지 매우 모호하였다. 궁예 자신도 똑똑히 알지 못하였다.

그로부터 사년 뒤 나라 이름을 마진(摩震)이라 정하고(신라제도에 의하여), 벼슬을 베풀며 철원(鐵原)을 서울로 정하고 대궐을 지어 이듬 해에 이 새 대궐에 옮아서 거기서 정사를 볼 때까지도 북쪽 국경선은 여전 모호하여 압록강 유역 근처까지인지 대동강유역 근처까지인지, 혹은 더 남쪽인지 알 수가 없었다. 짐작도 안갔다. 그 북쪽의 경계선은 어디까지건 좌우간 마진(摩震)국도 또한 신라며 후백제와 더불어 이 반도에 선 한개 국가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그리고 궁예는 마진국의 국왕임에도 틀림이 없었다.

신라의 왕자로 태어나서 일전하여서는 이름없는 촌아이로 떨어졌다가 재전(再轉)하면서도 절간의 소년승으로―삼전하면서는 무인(武人)으로―사전하면서는 마진국의 시조(始祖)로―아직 그의 나이 사십 미만에 과연 파란 중첩한 생애였다.

왕자(王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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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날 계속되는 비가 그쳤다. 그리고 꽤 누런 빛을 띤 해가 동녘하늘에서 솟아올랐다.

우주(宇宙)는 방금 만들어놓은 듯이 깨끗하였다. 모랫기가 많이 섞인 흙이라 비는 뒤가 없이 잦아버리고, 군데군데 물이 고여 있으므로 비온 뒤인줄 짐작이 가지 그렇지만 않다면 비온 것 같지도 않고 다만 우주를 방금 만들어놓은 듯 새롭고 정갈할 따름이었다.

"참 깨끗한 날이구려."

"네이. 일기도 청명하려니와 강산이 더욱 깨끗하오이다."

"강산도 깨끗하려니와 내 마음은 더욱 맑고 밝으오."

"천추 만세하옵소서."

만추(晩秋)의 금산사(金山寺) 역내―늙은 솔들이 볕을 가리워서 평생에 해를 보기 힘든 길을 후백제 국왕 견훤과 금산사 주지(住持) 일허사(一墟師)가 거닐고 있었다. 금산사는 후백제 왕실의 원당(願堂)으로 절간에 어소침전(御所寢殿) 등이며 배종 시신들의 기거할 곳까지 다 구비되어 행궁(行宮)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리고 임금은 노부도 없이 단 혼자 이곳까지 말을 달려와서 일허사와 하루를 보내고 환궁하는 일도 자주 있었다. 그리고 또한 그러니만큼 임금(견훤)과 일허사와의 사이는 군신지간이라기보다 친구지간에 가까웠다.

"천추만세하라지만 그것은 사람의 바라지 못할 일…."

"허허허허―대왕께서도 못 바라시는 일이 계십니까? 그러면 백추천세하옵소서."

"그것 역시 바라지 못하겠소."

"그것조차 못바라시오니까. 사람이란 백 밖에 가망이 없을지라도 욕심은 만(萬)까지 내어야 하는 법, 대왕께서는 어찌 그리 과욕(寡慾)하시오니까?"

"불도(佛道)에서도 그렇게 욕심을 기릅니까?"

"욕을 금하였지만 인성(人性)이 본시 욕으로 된 것이오라 아무리 금하온들 어찌 뿌리까지 뽑으오리까? 소승으로 뵈올지라도 무간지옥(無間地獄)을 면하기 어려운 악도(惡徒)이옵지만, 마음으로는 부처 되기를 바라오니 인성(人性)에서 욕심은 도저히 못 뽑사오리다."

"흠…."

임금은 머리를 숙였다. 노사(老師)의 이 말이 그의 본심에서 나온 말인지 혹은 예에 의지한 풍간(諷諫)인지 알수 없었다. 머리를 숙이며 발아래를 보니, 거기에는 개미가 길게 행렬을 지어 어디로인지 행진을 한다. 임금은 성큼 개미줄을 넘어섰다. 그리고 다시 머리를 들었다.

"대사,―말씀이 백밖에 가망이 없는 인이라도 욕심만은 만까지 내는 법이라 하지만, 백밖에 가망이 없으면 역시 욕심도 백만큼만 내어두어야지 그렇지 않았다가는 실망은 욕심의 천곱 만곱이나 되는구려."

"그렇게 과욕하시니 그럼 백추백세나 하옵소서."

"그렇지, 인간오십이라 하며 인간칠십고래희라 하지만 이것은 너무 과(寡)욕한 말이요, 칠십까지는 보통이요 백살을 넘기는 사람도 간간 있으니 백살쯤으로 해두는 것이 과부족없이 꼭 좋겠지."

왕도 미소하였다. 일허사도 미소하였다.

"참 대왕께서는 마진국 임금을 일찍부터 아셨지요?"

"네, 어렸을 적에 단 이틀을 함께 지낸 일이 있소이다."

"욕심이 세십니다."

"왜?"

"천추만세는커녕. 십만추백만세로 축수를 하지 않으면 크게 노염을 내실 겝니다."

임금은 한순간 발을 멈추고 눈을 감았다. 벌써 삼십년전 어린 시절에 동수산(桐藪山) 어구 산지기네 집 건넌방에 그와 나란히 하여 누워서, 열어젖힌 문으로 달을 우러러보며 그 애꾸눈이 소년과 이야기하던 한 장면이 문득 머리에 떠올랐다.

"야 나는 이름 고치련다."

"뭐라구?"

"궁예라구."

"그건 왜?"

"좋지 않으냐? 궁예라, 궁예라. 오죽 좋으냐? 선종이 다 뭐냐. 이제부터는 궁예라구 불러다고."

아아, 당년, 같은 방에 누워서 같은 달을 우러러보며, 그러면서도 제각기 제 꿈을 따로 품고 인생의 행로를 개척하기 위하여 밝은 날은 동서로 서로 손을 나누려던 두 소년―그 사이에 숱한 파란과 숱한 곡절을 겪고―그러는 동안에 생면만 그냥 유지된 것도 기적인데, 당년의 두 소년이 오늘날 한결같이 또한 제각기 한 나라를 세우고 임금이 되었다 하는 것은 고금에 둘도 없는 기적인 동시에 당사자로 보자면 과연 감개무량하였다.

"욕심은 꽤 세지."

"한때 소승의 문하에 드신 때도 있읍니다."

"호오, 대사와도 사제지분이 있읍니까? 부처의 도가 성(性)에 맞지 않을 터인데 불제자(佛弟子)노릇도 꽤 오래 했을걸요. 원래 말도둑이었지요, 어렸을 때 내 말을 훔쳐 타고 뛰다가 말이 가지를 않아서 잡혔는걸요."

"허허허허."

"하하하하."

"마적왕(馬賊王)이라 국호를 마진국이라 했나보옵니다."

"하하하하하."

잡담을 주고 받는 동안 임금과 노승은 솔밭길을 벗어나사 풀밭에 나섰다.

임금의 본시의 목적은 솔밭 산보에 있지 않고, 이 풀밭―들에 있었다. 역시 금산사 경내(境內)인 이 꽤 넓은 풀밭은 후백제 왕실의 연무장(鍊武場)이었다. 서울 교외에도 연무장이 없는 바가 아니었지만, 말을 달리기에, 활을 연습하기에, 창칼을 쓰기에 습진(習陣)을 하기에, 꼭 알맞은 벌과 언덕과 골짜기가 서울 교외보다 여기가 나은지라, 여기 무어소(撫御所)를 두고 왕자들은 대개 여기까지 와서 연무를 하는 것이었다. 오늘도 왕자들과 무장이며 소년무사들의 비공식 무술경기가 있는 날이라, 임금은 그것을 보러 일허사와 한담을 하며 이리로 거닐어온 것이었다. 임금이 이르렀을 때는 궁술경기(弓術競技)가 한참 벌어진 때였다.

무술경기를 하기 위하여 금산사에 행행한 것이 아니요, 금산사에 행행한 기회에(마침 무예에 익은 장수도 몇 삶 배종하였으므로) 열린 비공식 경기이니만큼 배관(拜觀)하는 대신도 얼마가 안되고, 금산사의 중들이며 그 근방의 백성들이 멀리서 구경을 하는 외에는 직접 경기에 참가한 무장과 근시(近侍) 몇 명과 왕비·궁녀 등등뿐이었다.

일허사와 함께 솔밭에서 연무장으로 나선 임금은 임금을 위하여 마련한 옥좌로 가지를 않고 솔밭에서 연무장에 들어서는 참에 놓여 있는 꽤 큼직한 나무토막 위에 걸터 앉았다. 그리고 일허사에게도 앉으라는 뜻으로 자리를 얼마 비워주며 눈으로 자리를 가리켰다. 일허사는 서슴지 않고 임금의 지시하는 자리에 임금과 나란히해서 앉았다. 때는 마침 큰 소년들의 경기는 끝이 나고, 네째왕자 금강(金剛)과 그 동년배의 소년들의 경기가 시작되려는 즈음이었다.

임금은 잠시 경기 준비에 분망한 소년들을 바라보다가 머리를 일허사에게로 돌렸다.

"대사!"

"네이?"

"저 애―저 금강(金剛)을 어떻게 보십니까?"

"어떻게라시는 것은 어떤 의미로 이온지요?"

"인품이 말이외다."

"왕자다우신 소년이시옵니다."

"왕자란 놈자(者)짜 말씀이요? 아들자(子)짜 말씀이요?"

"물론 아들자짜 왕자 말씀이옵니다."

"놈자짜 왕자답지는 못할까?"

"태자 계시오매 어찌 놈자짜 왕자다우시오리까? 그랬다가는 왕실의 재변이옵고 국가의 화근이 아니오니까?"

"글쎄…?"

임금은 그의 커다란 머리를 가슴에 묻었다. 무표정한 그의 얼굴이라 어떤 감정이 그의 가슴에 왕래하는지 알수 없지만 무엇을 깊이 생각하는 것만은 분명하였다.

잠시 뒤에야 임금은 도로 얼굴을 들었다.

"대사!"

"네이?"

"승에게는 좀 당찮은 질문이지만 여기 여인이 하나 있다 칩시다. 그 여인이 김가와 가까이해서 애를 하나 낳았다 합시다. 그 뒤에 그 여인이 박가한테 시집을 가면 전에 낳은 애가 김가일까, 박가일까?"

"물론 애는 김가의 씨니 김가이옵지요."

"승도 그런건 아는구먼, 하하하."

"허허허허, 승은 부모없이 났답니까?"

"그럼 여인의 맏애는 김가라 치고, 내 또 한가지 물어볼 테니 대답해 보시오."

"그러오리다."

"여기 한 사람이 있어서 처음에은 평민이던 사람이 후일 좋은 세월을 만나서 임금이 되었다 합시다. 그런데 그 사람이 평민이던 시절에도 아이가 있었고, 임금이 된 뒤에도 도 아이를 낳았다 치면 평민 때에 낳은 아이도 왕자일까?"

"그야…."

딱 막혔다.

왕자일까?

평민일까?

대답하기 어려운 문제였다.

왕자라 하자니 평민의 아들이 어찌해서 왕자일까?

왕자 아니라 하자니 현재 임금인 사람의 아들이 어찌해서 평민일까?

더우기 이 임금(후백제 임금 견훤)에게 대해서는 더 대답하기가 힘든 말이었다. 이 임금은 근본은 백제 왕실의 후예라 하나, 신라로 보자면 한 평민의 집안이었다.

신라의 한 평민이 자수로 성국하여 후백제의 임금이 되었다.

이 임금에게는 이전 평민 시대에 낳은 아들이 셋이나 된다. 신검(神劒)·양검(良劒)·용검(龍劒)등 세 아들은 본시 왕자로서 출생한 바가 아니었다. 견훤이라 하는 한낱 신라 평민의 아들로 태어난 것이다. 그것이 오늘날 그의 아버지 견훤이 후백제의 임금이 된 덕에 왕자라는 존칭을 받게 된 것이다.

이러한 반면을 가진 이 임금에게 대하여 '왕자'에 대한 해석을 갑자기 내리기는 지난(至難)한 일이었다. '그야―'할 뿐 일허사는 말의 뒤를 잇지 못하고 잠시 입술만 음찔음찔하다가 그냥 입을 다물어버리고 말았다.

"그야… 어떻다는 말씀이요?"

임금은 뒤를 재촉하였다. 그러나 일허사는,

"글쎄―올씨다."

하고는 역시 대답은 못하였다.

잠시 말이 끊어졌다. 눈을 들어 바라보매 저편쪽에서는 경기가 시작된 모양으로서 방금 어떤 소년이 활을 쏜 뒤를 이어 이 임금의 네째 왕자인 금강(金剛)이 활을 시위를 당겨 바야흐로 줄을 놓으려는 즈음이었다.

임금은 일허사에게 던진 질문의 대답을 더 채근 재촉하질

않고 주의(注意)를 소년왕자에게 부었다.

소년답지 않은 큰 활에 살을 먹여가지고 부러질 듯이 잔뜩 줄을 다릴 때는 소년의 얼굴에 도는 홍조(紅潮)가 임금이 앉아 있는 곳에서도 알아볼 수가 있었다.

순간이었다. 살이 활을 떠나는 수간만 소년 왕자는 살에 주의(注意)를 가하였다. 그 힘?속력?방향 등에 틀림이 없었던가 하고 주의한 모양이었다. 그 순간 뒤에는 그 살이 그 힘에 그 속력에 그 방향에 그 풍세(風勢)면 당연히 과녁에 적중(適中)될 것을 깊이 믿는 듯이 다시는 과녁쪽은 보지도 않고 돌아서서 고요히 자기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살은 소년이 그 굳은 자신(自信)에 굴복을 하는 듯이 퍽 소리를 내면서 과녁 한본판에 들어 박히고 꼬리도 흔들지 못하였다.

이편에서 그 모양을 바라보고 있던 부왕은 머리를 고요히 일허사에게로 돌렸다.

"대사!"

"네이?"

대답은 하였다. 그러나 방금 본 바 아들자짜보다 놈자짜로 왕자다운 소년의 모양이 눈에 어릿거려, 임금에게서 또 평민의 아들과 임금의 아들 타령이 나올까보아 가슴이 조마조마하였다.

"놈자짜 왕자답지 않소?"

과연 그 타령이었다.

"글세올씨다. 태자 계시오니 어찌 주장하여야할지 모르겠읍니다."

"대사, 내가 비록 이전 백제 왕실의 후예나마 고약한 세태에 신라에 신사(臣仕)할 때에 낳은 자식이 신검·양검·용검 등 세 아이. 박가에게 시집간 여인이 김가에게 받은 아이와 같아서 왕자라기는 약간 꺼리는 바이 있소이다. 저 금강은 내게로 보자면 네째 아들이지만 후백제 왕실에서는 가장 먼저난 왕자외다. 내 집안의 네째 자식이라 해서 국가의 원자(元子)를 지손(支孫)으로 홀대(忽待)하면 나조차 국가의 죄인이 안될까?"

말이란 이리로 붙이면 이렇게 되고 저리고 붙이면 저렇게 되는 것이다. 사실 임금이 마음으로 네째 아들을 가장 사랑하니 이런 이론이 성립되는 것이다. 위로 신검·양검·용검의 세아들도 결코 미워하는 바가 아니었다.

"자식 복이 적으리라."

일찌기 은사 도선(道詵)에게서 이런 상서롭지 못한 예언을 들은 당년의 견훤―지금의 임금은 일찍부터 몹시 자식을 그리워하였다.

그가 장가를 들어서 신검을 낳고, 뒤이어 양검·용검을 낳았다. 스승에게서 자식 복이 적으리란 예언을 들었기 때문에 은근히 걱정하는 그는, 이 뜻밖에 얻은 자식을 끔찍히 귀여워하였다. 자식 복이 적으리라던 자기에게 이렇듯 뒤이어 자식이 생기니, 혹은 일찍 잃지나 않을까 하여 이 방면으로도 몹시 마음을 쓰며, 그가 공무(公務)로 밖에 있을 때에도 늘 집에 남긴 자식들의 안부를 근심하였다.

자식들도 또한 그다지 남에게 부끄러울 자식들이 아니었다. 몸도 모두 튼튼하였다.

"자식 복이 적으리라."

이 예언만은 틀리리라. 스승도 모르는 일이 있구나. 이만큼 여겨 두었다.

드디어 오래 바라던 백제 재건에 성공하였다. 그 뒤에 또 아들을 낳았다. 그 뒤에 낳은 아드은 제 형들보다 인품이며 골격이며 풍채며 어느 점으로든 승하였다. 형들도 떨어지는 아이가 아니지만 동생이 더욱 나았다.

여기서 그의 새로운 이론이 생겨난 것이다.

"임금이 낳은 아들이 왕자이지, 아무리 임금의 아들이라도 그가 아직 평민 시대에 낳은 아들이면 왕자가 아니다."

이런 이론은 순전히 제사 왕자 금강 때문에 생겨난 것이었다.

"대사, 그래 내 말이 그른 데가 있소이까?"

"글쎄올씨다."

여전히 찬성을 못하겠다는 일허사의 태도는 임금에게는 약간 불만하기는 하였으나, 그렇다고 일허를 힘있게 나무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저편 쪽에서는 오늘의 가장 좋은 성적을 보인 사람은 금강왕자라고 욱적하고 있을 동안, 이편에서는 임금과 일허사와의 사이에 기괴한 무거운 침묵이 계속되었다.

비 뒤에 맑게 씻기운 풀밭. 우짖는 벌레소리조차 임금의 귀에는 금강왕자를 찬미하는 것처럼 보였다.

말타기·창 칼쓰기, 온갖 경기에 있어서 금강왕자는 사실 발군(拔群)의 역량을 보였다. 그와 동년배의 소년들에게는 같은 축이 될 것이 아니라, 웃길 아이들과 섞여도 도리어 금강이 썩 나올 듯하였다.

"후백제 만만세하리로다."

아버지 임금의 마음은 여간 흡족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면서도 이 아버지로 하여금 일변으로 근심되게 한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세상 사람의 마음은 일허사와 같은 편이 더 많으리라는 점이었다. 아니 적절히 말하자면 임금 자기의 마음과 같은 사람이 오히려 적을 것이요, 임금의 맏아들을 즉 국가의 맏아들로 그릇(??) 생각하는 사람이 많으리라는 점이었다. 일허사는커녕 임금 자기의 아내 즉 왕비조차가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요, 신검·양검·용검 등 세 형제는 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며, 더우기 기괴한 것은, 금강 당자까지도, 자기는 지금은 왕자이요 장래에는 왕제가 될―말하자면 한 왕족이지 자기의 형들은 평민 견훤의 아들이요, 자기부터가 비로소 왕자라고는 결코 생각도 않거니와, 그렇게 일러주어도 믿지도 않을 것이었다.

"아아, 기쁘고도 근심되는 일이로구나."

그러나 이런 문제는 먼 장차에는 저절로 잘 해결이 될 것이다. 이미 백제 재건의 대사업이 성취되었으며, '자식복이 적으리라'던 스승의 예언에 반하여, 도리어 자식이 많은 위에 모두 남부끄럽지 않은 자식일 뿐더러 놀라운 걸출까지 있으니 무엇을 근심하랴!

건강이 있고, 부귀가 있고, 후손이 부지런한 위에 평생의 대목적까지 성취하고 보일보(步一步) 더욱 튼튼히 하여 나아가니까 사소한 근심, 약간한 우려가 무엇이랴!

그날 저녁 배종(陪從)해 온 신하들과 간단한 저녁잔치를 할때, 평생에 무표정한 얼굴이니 여전히 표정은 없으나마, 그래도 빛나는 일면이 어디에인지 보여서 배식하는 신하들의 마음으로 하여금 더욱 흥겹게 하였다.

동에는 신라, 서에는 후백제, 북에는 마진―이 반도위에 세 나라가 가지런히 선 가운데, 신라는 일천년 사직이 지금 한참 위태로워, 어느날에 어떤 일이 생길지 예측도 할 수 없이 암담한 기분 아래 잠겨있고, 마진은 아직 자리 잡히지 못한 나라로 용이 될지 뱀이 될지 예측도 할수 없는 데다가, 임금 궁예의 성격이 너무 괴벽하고 신하에 아직 화(和)가 부족하니 완성한 나라로 보기는 부족한 느낌이 없지 않고, 오직 후백제는 신흥 기분이 무럭무럭 자라는 듯한 기미가 가장 강하고 그 위에 자식 역시 아비의 기업을 잃지 않을 듯 모두가 제 한몫은 당할 만한 것 같으니 지금 형편으로 보아서는 후백제 혼자서 최후까지 남아서 반도의 패권(覇權)을 잡을 것 같았다.

그러니만큼 그 임금의 긍지(矜持)도 여간한 것이 아니었다.

재차정립(再次鼎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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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임없이 흐르는 세월의 물결에 따라서 이 반도 위에 다시 세워진 세 개의 나라도 끊임없이 움직였다.

신라는 그 내부적(內部的)으로는 왕조끼리의 알력이라든지, 왕실과 귀족 사이의 알력이라든지, 귀족과 평민 새의 알력이라든지, 모두 적지 않은 내분을 품고 있지만, 그러나 일천년이라는 긴 사직의 전통이 있고, 전통이 끼친 바의 문화가 있어서, 이 반도의 동남방을 점거한 하나의 큰 나라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그러나 너무도 층층의 알력이 심하기 때문에 내부적으로 어찌하여야 할지 차배를 차리기가 힘든 위에, 이 늙은 나라에 대하여 간단(間斷)없이 침략의 손을 뻗히는 신흥 후백제며 마진의 성화에 견디어 낼 수가 없었다.

최신흥 마진국은 아직 자리잡히지 않은 나라로서 일직선으로 몇번 정벌을 거듭한 열매로서 선적영토(線的領土)는 있었으나, 면적적(面積的)으로는 어디까지가 마진국의 영토라고 말할 수가 도저히 없었다. 그런데다가 임금 궁예의 성질이 병신(애꾸눈)답게 괴벽하고 광폭스러우니 만큼 표면이 임금의 위력에 눌리어 있는 문무관리들 사이에도 딴 뜻을 품고 있는 사람이 꽤 많았다. 게다가 이 임금이 정벌하여 마진국의 영역인 듯이 생각하고 있는 평양·안주 등지도, 내심 도리어 고구려의 정통을 밟은 발해국(渤海國)을 사모하고 발해국 사신이 늘 압록강을 넘어 왕래를 하고 하매 궁예의 영토라기는 약간 힘들었다.

가장 자리잡힌 것이 견훤의 후백제였다. 후백제는 대승적(大乘的)으로는 동하지 않고 부국강병책(富國强兵策)에만 힘썼다. 그리고 소승적(小乘的)으로는 고구려의 옛 땅과 신라를 조금씩 침략하여 영토 넓히기에 위주(爲主)하였다. 그 영토는 궁예와 같이 선적(線的)으로 정벌하여서 얻은 말이 아니고, 과거 칠백여년간을 누려온 백제의 구역(舊域)은 물론, 국경선 근처에 새로 얻은 땅까지 합치어 이전의 백제보다도 더 크리만큼 되었다. 임금이 옛날 백제 왕실의 직계요, 백성 또한 옛 백제의 후손으로, 더우기 신라의 난정(亂政) 때문에 허덕이던 백성들이니만큼 단결이 굳었다.

고구려의 옛 터는 지금의 강원도 전부와 경기도 전부 및 충청도의 북부까지를 남쪽 국경선으로 삼고, 북으로는 지금의 만주국의 전부이며, 원정의 발길은 때때로 당나라의 간담(肝膽)을 서늘케 하고 하였다. 그러다가 나?당(羅唐) 연합군의 남북으로서 협공(挾攻)에 망한 바 된 뒤에는 고구려인들로 즉시 발해국이란 새 나라를 조직하였다. 그러나 고구려 시대에 비기어서 성세가, 여지없이 줄어서 북쪽과 서쪽으로는 그냥 옛날의 국경선을 유지하였지만, 동쪽은 바다까지를 가지 못하고 중도에 흐지부지하여버리고, 남쪽 역시 압록강으로 한계를 삼고 그 이남은 거진(巨鎭)에 때때로 사신들의 왕래가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발해 건국 삼백년 뒤에 그란(契丹)에게 망한바 되고, 그때는 이 반도에는 마진(뒤의 태봉)의 뒤를 받아 왕건(王建―송악사람이니 옛날의 고구려인의 후예다)이 고려(고구려의 후신)국을 일으키고 삼한 통일의 기운이 바야흐로 농후할 때에, (이미 망국인이 된) 발해국 왕족이며 귀족이며 선비·백성들이 육속(陸續)하여 고려에 귀화하고, 압록강 이남의 고구려 옛 터는 한군사를 삭이지 않고 제절로 고려의 판도 안에 들어오고, 고구려의 옛 터에 대부분을 차지하였던 압록강 이북의 땅은 고구려의 토착민(土着民)과 그란 족속과 여진(女眞)족속들 외에 몽고도 한몫 끼고 뒤에는 한족(漢族)도 한몫 끼고 하여 오늘날의 만주족(滿洲族)이라는 것을 이룩하였다.

이렇듯 고구려의 몸뚱이는 잃어버리고, 발해가운데서도 몇 선(線)만 겨우 차지한 궁예의 이룩한 나라가 국호를 태봉(泰封)이라 다시 고치고, 후백제는 여전히 부국강병책을 쓰는 일방, 호시탐탐(虎視耽耽) 동쪽과 북쪽을 엿보는 동안, 일천년 사직의 신라에서는 또 임금이 승하하였다.

견훤이 철든 이래, 신라에서 임금이 승하하기가 벌써 경문·헌강·정강·진성·효공(景文·憲康·定康·眞聖·孝恭)의 다섯 임금째다. 수가 모두 단명해 청년 혹은 소년시기에 승하하는 것이었다. 너무도 단명한 임금만 계속 되므로 임금 승하랄 때마다 조야에서는 모두 의혹의 눈으로 보기도 하고, 수근거리기도 하였다.

이 승하한 임금의 뒤를 받아 왕위에 오른 이가 신덕(神德)왕이었다. 진성왕은 이 나라를 이룩한 박혁거세의 후예였다. 그러나 박씨는 벌써 칠백여 년전 아달라(阿達羅)임금 때부터 왕위 계승권에서 미끄러지고, 그 뒤 한동안은 금(金)씨와 석(昔)씨가 교체로 왕위에 오르다가, 오백오십년 전 나밀(奈密)왕 때부터 왕위 계승권은 금씨에게 독점되어 효공왕 때까지 반천년간을 누려온 것이, 지금 홀연히 또다시 박씨의 후손의 손으로 들어간 것이었다.

백성들도 욱적하였다. 이런 기괴한 기밀에 참례치 못한 대신들도 청천의 벽력인 괴변에 욱적하였다. 금씨 왕족이 조야에 수두룩하거늘 무슨 까닭으로 오십년 전에 왕권에서 물러난 박씨의 후예를 새삼스럽게 끌어내었는지 적지않은 말썽을 일으켰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 사이 너무도 오랜 기간을 난정과 학정 아래서 지냈으매, 임금의 계통이나 바꾸면 좀 나을까 하는 희망도 없지 않을지라, 이 변혁에 대하여서도 서로 수근거리기는 하였지만 폭동이라든가 반항이라든가 하는 것은 전혀 없었다.

온 조야가 불안 가운데서도 약간의 희망을 품고 있던 이 임금도 무위(無爲)한 왕 생애(王生涯)를 단 오년간 보낸 뒤에는 또 승하하였다. 그리고 승하한 임금의 태자가 새 임금으로 오르게 되었다. 즉 경명왕(景明王)이었다.

송악왕기(松嶽王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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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은 없으나 맑은 날의 밤이었다. 새카만 하늘에는 별들이 총총히 박혀서 명멸(明滅)하며 여름날(六월)에 쉽지 않은 이 맑은 날씨를 찬송하고 있었다.

후백제 완산주의 새 대궐―새 대궐이라 하나 벌써 세운 지 이십년으로서, 기둥의 송진냄새도 이젠 가시고 주춧돌도 그새 적지않은 승강에 얼마만큼 닳은 대궐―이 대궐 침전 대청에 의자를 놓게 하고 좌정하여 있는 장대한 인물 즉, 이전에는 견훤이라 불리던 이 나라의 임금이었다.

궁녀 두 명이 좌우편에서 기다란 자루가 달린 부채로써 임금에게 부치고 있다.

상쾌한 듯 또는 무심한 듯, 묵묵히 의자 위에 걸터앉아 하늘의 한편쪽만 얼빠진 듯이 바라보고 있던 임금은, 한참 뒤에 귀찮은 듯이 몸을 일으켰다.

"이 의자를 저리로 좀 옮겨라."

대청 앞턱으로 바싹 내놓으라는 것이었다. 궁녀는 임금이 지시하는 자리로 의자를 옮겨놓았다.

임금은 옮겨 놓은 자리로 가서 다시 걸터앉았다. 그리고 다시 지금까지 쳐다보던 방향의 하늘을 우러렀다. 그러나 옮겨놓은 자리가 역시 마음에 안드는 모양으로 의자를 음찔음찔하여 약간 더 오른 쪽으로 옮겼다. 그리고 다시 하늘을 우러렀다.

임금이 자리를 잡기를 기다려 다시 말없이 부채질을 시작하려는 궁녀에게,

"저 등불을 꺼라."

다시 영이 내렸다.

대청을 휘황히 밝게 하던 뭇 촛불을 다 끈 뒤에 임금은 여전히 묵묵히 앉아서 하늘만 우러르고, 궁녀들은 여전히 부채질만 하고 있었다.

잠시의 시간이 또 침묵 중에 흘렀다. 그 뒤 임금은 무엇에 깜짝 놀라며 몸까지 한번 흠칫한 뒤에, 이번은 몸을 잔뜩 앞으로, 머리는 더욱 앞으로 내밀고 그냥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바라보고 있는 하늘에서 지랑성(地狼星)이 커다랗게 번득이고 있었다.

그 광채 휘황해서 근처의 별들이 빛도 못내던 지랑성이 갑자기 흐려지기 시작하였다. 임금이 놀란 것은 이것 때문이었다.

―눈에 먼지가 들거나 눈물이 끼었나. 임금은 품에서 수건을 꺼내어 눈을 닦고 다시 보았다. 그러나 흐려지기뿐 아니라 가속도로 더욱더욱 어두워가서, 지금은 보통의 별이나 다름이 없이 되었다. 하늘의 괴변은 이것뿐으로 그치지 않았다. 지랑성의 곁에 아직까지 보이지도 않던 한개의 별이 불끈 솟아 올라서 가속도로 광휘(光輝)를 내기 시작하였다. 얼른 보자면 지랑성에서 없어져가는 광휘가 이 샛별로 옮아가는 듯하였다.

그것을 여전한 무표정한 얼굴로 우러러보던 임금은 잠시 뒤에,

"아!"

작은 부르짖음까지 내며 의자에서 몸까지 약간 일으켰다. 그때는 지금까지 희미하게나마 제자리에 걸려있던 지랑성은 커다랗게 고형을 그리면서 멀리 중천 밖으로 떨어졌다. 동시에 샛별은 이제는 달과 같이 혁혁한 빛을 내기 시작하였다.

임금은 탄식하였다. 그리고 다시 의자 위에 몸을 던졌다.

"아아, 지랑성이 떨어졌다. 궁예(弓裔)몰락이로구나!"

―같은 시대의 불길을 타고 일어난 두 괴걸(怪傑)! 그 가운데 자기는 원하던 바와 같이 백제 재건에 성공하고, 또 바야흐로 부국강병책도 열매가 좋아 제 이단의 길로 발을 내어디디려 하는데, 자기보다도 후에 일어섰던 궁예가 칭왕 십팔년, 마진국 임금으로, 또다시 배통국 임금으로, 그나마 튼튼한 영토도 아직 가져보지 못하고 불안한 왕생애를 보내다가 벌써 몰락이냐.

그러나 마음에 켕기는 것은, 새로 나타나서 혁혁한 광휘를 발하는 샛별은 누구냐? 고구려 왕실 후예의 고국회복 운동이냐? 태봉국 신하 중의 반역 행동이냐? 혹은 무명적괴(無名賊魁)의 신흥이냐?

그 어느 것이든 간에 궁예의 몰락이라 하는 점은 이 임금에게 적지않이 섭섭한 일이었다. 어린 시절에 동수산 기슭에서 단 이틀을 같이 지낸 애꾸눈이 소년이니 긴 인연도 아니다. 또한 그의 인물에 대해서든지 성격에 대하여서는 행동에 대하여서든 임금은 한번도 옳게 여기거나 찬성하는 마음이 생겨본 적이 없었다. 사업상으로도 늘 그를 방해해 왔고, 밉게 봐 왔고, 불측하다 보아왔다.

그러나 그러는 가운데서도 옛날 어린 시절의 동수산 단 이틀밤의 인연이 어떻게 맺혔는지, 방해를 하면서도 성공을 축수하였고, 밉게 보면서도 동정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상대자의 급작스런 몰락이라, 놀랄 줄 모르는 임금도 적잖게 놀랐고 마음이 뒤숭숭하였다.

이제는 하늘을 우러를만한 흥미를 느끼지 않은 임금은, 의자에 몸을 기대고 눈을 고요히 감은 채 궁녀를 불렀다.

"야!"

"예이!"

"원장군 입직했는지 알아보아라."

"예이."

사뿐사뿐히 물러가는 궁녀 몸을 움직일 때마다 피어오르는 향내와 체취도 이 임금에게는 아무 감동도 주지는 못하였다. 눈을 감은 채 무표정한 얼굴로 한쪽에서만 부치는 부채에 수염을 너울거리며 묵묵히 회보를 기다렸다.

이윽고 궁녀의 회보가 이르렀다. 오늘이 입직일이매 당연한 일이지만 원장군(원노)은 입직하여 있다, 하는 것이었다.

"음, 이리로 부른다고…. 그러구…."

이번은 부채질에 여념이 없는 궁녀쪽을 향하였다.

"너는 불을 켜고 내 자리를 해라."

궁녀 하나는 밖으로 나가고, 하나는 일변 불을 켜노라 일변 옥좌를 정하노라 가벼운 발소리로 돌아갈 동안, 임금은 비단치마가 마루에 쓸리는 상쾌한 소리를 들으면서 고요히 앉아 있었다.

임금이 옥좌에 좌정하고 앉았던 의자도 치운 때쯤 원노는 뜰아래 등대하였다.

임금은 궁녀들을 물러나가라 한 뒤에, 뜰아래 원노에게

"좀 올라오시오."

하였다. 원노는 황공하다는 뜻으로 절을 한번 더할 뿐이었다. 원노에게 있어서는 이 임금은 삽십년간(처음 수년간은 상관으로서, 그 뒤 이십팔년간은 임금으로서)을 가까이 모신 분이지만, 만나면 만나는 때마다 한결같이 위포를 느끼고 존경의 염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지금 임금은 침전에서 그를 부르고 더우기 대청에 오르기까지 허락―아니 도리어 명―을 하지만 원노로서는 단지 황공무지하여 머리를 조아릴 뿐이었다.

"내 좀 의논할 일이 있어서 여기까지 청했는데 좀 올라오시오."

이런 말이 임금에게서 세 번이나 나온 뒤에야 비로소 원노는 층계를 올랐다. 그러나 대청 문안에 딱 비껴서서 읍하고 말았다.

"좀 가까이…."

원노는 한 걸음 나아갔다.

"좀 더 가까이."

또 단 한걸음.

"삼군을 호령해서 백만대적을 무찔러야 할 대장군의 간이 왜 그다지도 작담…. 열 걸음만 더 가까이."

여기서 열 걸음만 더 나아가면 임금 위에 덮엎이거나, 적어도 임금의 무릎 위에 앉게 된다. 원노는 발을 좀 잘게 내디뎌 열 걸음을 나아갔다. 꼭 임금의 두 걸음 앞에 가서 읍하고 섰다.

"자, 앉으시오."

원노는 고요히 꿇어앉았다.

원노가 자리를 잡은 뒤에, 임금은 잠시 다시 눈을 감고 무엇을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원노는 다시 황공한 듯이 임금과 마주 꿇어앉아 있었다.

이윽고 임금이 먼저 입을 열었다.

"원장군! 태봉국이 망했구료."

깜짝 놀란다. 뜻하지 않고 임금을 우러렀다. 그 얼굴을 향하여 임금은 또다시 퍼부었다.

"궁예가 망했구료!"

"나랏님. 그게 무슨…."

"내 알 길이 있어서 알았는데…."

"그럼 과연 궁예의 태봉이 망한 것이 사실이오니까?"

"사실인 모양이외다."

"누구에게 망했읍니까, 언제 망했읍니까?"

궁예에게 대한 임금의 심경―미워하면서도 채 미워할 수없는 마음을 잘 아는 원노는 지금까지의 적수 궁예가 몰락했다는데도 기꺼운 표정도 없이, 그렇다고 슬퍼하는 기색도 없이 단지 놀라운 얼굴로 물었다.

"망하기는 오늘 망한 것 같은데, 자 누구에에게 망했는지…."

오늘 망했다 한다. 천리상거(相距)인 이곳에서 궁예가 오늘 망한 것을 어떻게 벌써 알았을까? 그것을 알았으면 누구에게 망한 것까지도 암직한데….

"아까 천문을 보니까…."

이전 도선사(道詵師)에게서 천문에 대해서도 꽤 깊이까지 배운 임금임을 원노도 잘 안다.

"만약 궁예가 망하고, 궁예를 망케 한 사람이 궁예의 신하라 하면 왕건(王建)이 아닐까 하옵니다."

임금은 눈을 번쩍 들었다. 무표정한 얼굴이지만 눈을 번쩍 들고 굽어볼 때에 원노는 등골로 흐르는 소름을 느꼈다.

임금은 잠시 원노를 굽어보다가,

"어째서?"

하고 물었다.

"왕건은 비록 태봉의 무장이라 하나, 머리 뒤통에 툭 두드러진 반골(反骨)은 감추지 못합니다."

"장할씨구. 우리 원장군!"

임금도 그것이 미심하지 않은 바가 아니었다.

몇 번 싸우는 마당에서 상적자(相敵者)로서 잠깐잠깐 본 바에 지나지 못하지만, 이 임금이 본 왕건은 여러 가지의 점으로 비범한 사람이었다.

첫째로 삼군을 운용하는데 있어서 비범한 기술을 가진 사람이었다. 처음 궁예의 비장으로 이 임금과 전장에 상대하였을 때 임금은, 이 소년 비장을 우습게 보았다가 하마터면 그에게 사로잡히는 욕까지 볼번하고 겨우 작은 배를 얻어타고 간신히 도망하였다. 그 뒤부터는 깔보지 않고 상당한 경계심으로 대하고 하였지만, 자칫 마음 놓았다가는 낭패할 번한 여러 번 쌓았다.

이 장수는 또한 장재(將材)만 가진 것이 아니라 인심을 무마하는데 놀라운 수완을 보이고 하였다. 한번 그의 손아귀에 든 성이나 주는, 그만 그에게 심복하여버려서 좀체 다시 다른 데 추파를 하지 않는다.

그러한 몇 가지의 점을 보고, 임금은 그를 자기의 품안에 넣어볼까도 하였으나, 원노의 말마따나 뒤통수의 반골(反骨)과 그 위에 상재 혹은 왕재(相, 王才)를 보고 견훤은 욕심을 내어던졌던 것이었다.

"양호유환(養虎遺患)이 아닐까?"

궁예를 위하여 은근히 근심도 하였다.

오늘 궁예의 몰락과 새 사람의 출현에 있어서 첫째로 의심해야 할 사람은 과연 왕건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금은 단지 너무도 궁예의 몰락이 급작스런 일이라, 놀라기에 과하여 그런 점은 생각할 여지도 없었다. 그러나 원노의 말을 듣고보니 과연 그럴 듯하였다.

"원장군! 짐작은 바로 왕건에게로 가나 그래도 확실한 일은 아니니, 염탐군을 철원에 보내서 상세히 알아오도록 내일 동이 트자 떠나도록 오늘밤 안으로 전부 지휘해 두시오."

"그리하오리다."

"임금의 자격은 부족하지만 그래도 적적할쎄그려."

"…."

임금은 원노를 퇴출케 하였다.

원노가 물러나간 뒤에 임금은 천천히 문으로 나와서 문지방을 잡고, 지금(약간 동쪽하늘에서) 찬연히 빛나는 샛별을 한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임금이 비밀히 보낸 염탐군이 아직 돌아오기 전에 그곳에서 온 상고(商賈)에게서 비교적 상세한 내용을 알게 되었다. 거기 의지하건대 대략 이러하였다.

궁예는 나라 이름을 태봉이라 고치고 스스로 자기를 미륵불(彌勒佛)이라 일컬으면서부터는 광태(狂態)가 더욱 심해가다가 금년에 들어서는 더욱 중하여졌다. 그러는 중 장군 왕건이 무슨 일로인지 몰래 자주 왕후(궁예 아내)에게 드나드는 것이 발각이 난 때는, 궁예는 이는 필시 왕건이 왕후와 사통함이라 하고 왕후는 악형을 가하여 참살(斬殺)하였다. 그 왕비의 몸에서 난 왕자까지도 수상하다 하여 죽여버렸다 임금의 공연한 노여움 때문에 목숨을 잃은 신하들도 수두룩하였다.

신하들도 사실 전전긍긍(戰戰兢兢)하였다. 상식으로 판단할 수 없는 임금인지라, 언제 어떠한 명이 튀어져나올는지 예측도 할 수 없는 바였다. 이렇게 전전긍긍한 세월을 보내는 동안, 왕건을 수령삼아 그 아래 홍유·배현경·복지겸·신숭겸(洪儒·裵玄慶·卜智謙·申崇謙) 등의 장병 사이에는 차차 딴길로 뻗어가는 운동이 비밀리에 진전되었다. 그러다가 금년(일전) 드디어 궁예를 위(位)에서 내몰고 왕건이 즉위하여 나라 이름을 고려(高麗)라 하고 천수(天授)라 건원(建元)하였다.

이리하여 궁예는 처음 군사를 일으킨 지 이십팔년, 왕위에 있은 지 십팔년으로 후손도 남기지 못하고 망했다.

임금(후백제왕) 견훤은 상고(商賈)를 불러서 몸소 그 전말을 다 들었다.

"이신벌군(以臣伐君)이라."

상고와 시신들을 물리고 홀로히 안석에 기대 앉으며 임금은 뜻하지 않고 이렇게 중얼거렸다.

"고려(高麗)라, 고려라!"

때려라! 임금은 군사를 좀더 정련(精鍊)시켜서 왕건이 이룩한 고려를 정벌하기로 결심하였다. 이신벌군이라는 도덕적 문제보다도 궁예의 몰락에 일종의 동정을 일으킨 임금은, 이신벌군을 죄목삼아 고려국을 정벌하기로 하였다.

그러면서도 이 임금으로 하여금 왕건의 지혜를 탄복케한 것은, 하고많은 좋은 국호(國號) 가운데서 고려라는 칭호를 끌어낸 왕건의 기지(機智)였다.

궁예가 옛날 칭왕을 할 때, 고구려 유민의 인심을 사고자,

"고구려를 재건하여 신라에 원수를 갚겠노라."

고 선언하였다. 그러나 신라의 왕자인 궁예가 세운 나라이요, 게다가 나라 이름까지도 고구려와는 아무 연락이 안되는 '마진' 혹은 '태봉'이라 하였으니, 고구려의 유민이 이 궁예의 나라를 고구려 재건으로 볼 까닭이 없었다.

왕건은 나라를 세우며 즉시 국호를 '고려'라 하였다. 누가 보아도 고구려의 후신(後身)이었다. 게다가 왕건의 집안이 고구려의 유민이었다. 고구려의 유민이 군사를 일으켜 새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고구려라 했으니, 이것은 틀림이 없는 고구려의 후신이었다.

압록강 이남의 주인이 없어서 쩔쩔매던 고구려 유민들은 모두다 이 왕건의 날개 아래로 모여들 것이었다. 압록강 건너서도 고려를 사모하여서 돌라붙을 고을이 적지 않을 것이었다.

과거 전장(戰場)에서 왕건의 용병(用兵)을 보았고, 인심무마술(人心撫摩術)을 본 일이 있는 견훤 임금은 여기서 또한 놀랄 만한 그의 용기와 기지를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고려국이 선 그해로 평양은 내부(內附)가 되었다. 고려 조정에서는 즉시로 이 내부된 평양에 대도호부(大都護府)를 두고, 그 사이의 황폐를 보충하기 위하여 황주·봉주 (지금 봉산)·해주 등지에서 사람을 추려서 평양에 이민을 시켰다. 그리고 평양을 서경(西京)이라 일컫고, 임금의 당제(堂弟)되는 식렴(式廉)을 대도호사로 삼아서 서경을 지키고, 평양 이북의 고구려 옛 터를 관리하게 하였다. 압록강 이남의 땅은 어느덧 대도호부의 관할 아래 고려국에 귀순(歸順)하였다.

후백제 임금 견훤은, 이 새로 일어난 고려국의 놀라운 팽창력(膨脹力)에 일종의 외포(畏怖)까지 느꼈다.

서북으로는 압록강까지가 어느덧 그 영토가 되고, 동북으로는 백두산을 주봉(主峰)으로 한 산악지대까지, 남쪽으로는 옛날 고구려의 국경선과 대차(大差)가 없도록 그의 판도(版圖)에 들게 되었다. 이 반도 위에 정립(鼎立)한 세 나라의 도합 면적의 三분의 二가 어느덧 고려의 손아래 들어갔다. 나머지 三분의 一을 신라와 후백제가 동서로 나누어 가졌다.

그위에 만약 장차 발해국과의 합동이 성립되는 날에는 옛날에 지지 않는 동방 대제국을 건설하여 다시 중원(中原)과 축록(逐鹿)을 할 날이 없으리라고 어찌 단정할 것인가!

이런 점을 보고 이런 점을 생각할 때에 문득 회상되는 것은, 옛날 은사 도선(恩師道詵)이 이 임금의 소년 시절에 누누히 들려준 훈계였다. 그 훈계….

"이백년 전 조상(백제)이나 일천년 전 조상(고구려)이나 조상이기는 일반이니라. 일천년 전 조상이 압록강 너머서 천하를 엿볼 동안, 한 갈래는 겨우 요구석에서 요모양으로 지내다가 쓰러진단 말이냐. 하기는 저도 쓰러는졌지만."

또 가로되,

"하다못해 송악(松嶽)으로나마 가라 해도 그도 못할 콩알 만한 간을 가지고서 왕자(王子)의 길은 배와 무얼하느냐? 송악에 자리잡고, 남으로 이천리 북으로 이천리―천하는 못되나마 동방은 전부. ―그만한 배짱도 못가지고서…. 송악에 왕기(王氣)가 보이더라. 송악 오백년―오백년이면 짧지 않지. 중원의 주인된 자 누구 오백년 누린 자가 있더냐?"

또 가로되,

"신라 천년, 백제 칠백년, 고구려 칠백년―백제와 신라는 북쪽에서 고구려가 막아줬기에 그만큼이나 누렸지, 한·수·당(漢·隨·唐)의 힘을 스스로 막았을 듯싶으냐? 고구려 칠백년은 놀라운 왕기(王氣)니라. 천하의 주인된 자로도 삼백년·사백년이 으뜸이요, 단 백년 이만이 수두룩하지 않으냐?"

이 마디 마디, 뼈에 울리는 절절(切切)한 말씀. ―근조(近祖) 백제를 버리고 북쪽으로 올라가서 원조(遠祖) 고구려를 재건하라. 압록강을 넘어서서 옛날 고구려 터를 회복하고 서남쪽으로 중원을 엿보든가, 송악에 도읍하고 삼한을 통일하여서 큰 기업을 세우든가 하라던 말씀을 저버린 바는 아니지만, 그래도 원조보다는 근조가 그리워, 우선 이곳에 도읍하고 큰일을 서서히 엿보려 하였는데, 왕건이라는 뚱딴지 인물이 곁길에서 뛰어나온 것은 분하고도 역한 일이었다.

궁예 따위는 이 임금에게는 우스웠다.

"대적(大賊)이나 되리라."

이렇게 예언한 도선사의 말도 있지만, 이 임금의 본 궁예도, 큰뜻을 이루고 그것을 끝까지 볼 만한 인품은 못되었다. 그러니만큼 궁예가 북방에 그냥 웅거해 있는 동안은 마음놓고 이곳에서 실력만 기를 수가 있었다.

군사와 농사와 산업으로 후백제가 착착 부국강병책에 성공하여, 이제는 군사를 움직여도 넉넉할만큼 된 후백제 건궁 이십팔년. 신라 경명왕 이년, 고려 태조 이년, 기묘년에 놀라운 소식이 이 후백제 임금의 귀에 들어왔다.

"고려가 도읍을 송악으로 옮기고 개주(開州)라 부르게 되었다."

하는 것이었다.

은사 도선이 사십여년 전에 예언한 바,

"송악에 왕기가 보이더니라."

하던 그 송악까지도 벌써 왕건의 손에 들어갔다.

"완산주의 왕기는 희박하니라."

백제의 옛터이니 임시로나마 완산주에 도읍을 정하고 서서히 힘을 길러 동벌(東伐)과 북벌(北伐)에 성공한 뒤에 송악으로 옮기리라 하던 희망조차 이제는 끊어졌다.

천인(天人)인가! 고려왕의 하는 일이 너무도 귀신같고 민첩하므로 견훤왕은 망연히 바라볼밖에는 도리가 없었다. 임금이 아직까지 오십여년 생애에 느껴보지 못한 압박감과 공포감을 이 소년왕에게 차차 무겁게 느끼어갔다.

동시에 임금은 급속히 국가의 중대한 문제를 해결짓기로 결심하였다.

첫째로 전국의 정예를 몰아 번갯불같이 신라 서울을 무찔러서 이백여 년전 부여의 원수를 눈앞에 갚고, 그 전승(戰勝)의 세력으로써 일로 송악에 직입(直入)하여, 새나라를 온전히 힘 기르기 전에 멸하고, 자기가 송악으로 도읍을 옮긴다―

이렇게 하면 스승의 훈계―남으로 이천리, 북으로 이천리의 주인이요, 겸하여 동방의 맹주는 되는 것이다.

오백여 년간 신라 사직의 주인이던 금씨를 버리고, 칠백년 전의 왕족의 후예인 박씨를 추대한 문죄(問罪)가 신라 정벌의 표면 기치였다.

이신벌군(以臣伐君)이라는 것이 신흥 고려 정벌의 표면기치였다.

이리하여 이 정벌의 준비에 분망한 동안에 그해도 어느덧 넘어가고 이듬해가 이르렀다.

문죄의 사(問罪의 師)

편집

취군 나팔소리에 어리어 대궐 밖 넓은 마당에 어지러이 들리는 인마의 소리에 스스로 만족을 느끼며, 후백제 임금 견훤은 따르는 신하도 없이 홀로 큰 창을 비껴들고, 뭇 전각을 뒤로 돌아 후원에 나섰다. 그 후원 북쪽은 높은 담으로 막혀 있고, 그 담의 협문을 나서면 거기는 역시 대궐의 비원(秘苑)으로서 울창한 송림과 숲과 바위와 샘물 등등이 대자연 그대로 남아 있고, 바위틈 나무등걸 아래는. 여우며 토끼며 혼은 이리·늑대 등의 맹수까지도 여기저기 자기네의 삶을 영위하고 있다. 이 일각에서 나서 자라고, 새끼치고, 늙어죽고 하는 짐승들이었다.

누구에게 구경시키려고 꾸민 동산이 아닌지라, 외발자국 길도 없었다. 때는 바야흐로 구월 하순―웬만한 나무며 풀은 거의 낙엽지고 마르고 하여, 발딛는 맛도 푸근푸근하였다.

임금은 협문을 나서서 이 만추(晩秋)의 동산을 찾아들었다. 임금의 건장한 신체는 벌써 오십도 넘고, 육십줄을 바라보는 나이건만, 흰털·주름살같은 것은 하나도 없고, 푸근푸근한 낙엽을 통하여서까지 대지에 쿵쿵 울리는 걸음걸이는 어느 젊은이도 따를 수 없었다. 마치 바위와 같이 건장한 체격에 어울리지 않는 듯이 있다면, 그것은 그의 두 눈이었다. 젊었을 때부터 그랬지만 표정다운 표정을 나타내본 일이 없는 그의 두 눈은, 언제든 '세상에 피곤한 늙은이의 눈'과 같았다. 그러나 이것은 피상적 관찰에 지나지 못하였다. 피곤한 듯, 내려덮이는 듯, 얼른 보기에는 천하만사에 무관심한 듯이 보이는 그의 눈이었으나, 그것은 그의 눈까풀이 그에게 이런 표정을 자아내는 것이지, 그 일견 피곤한 듯이 보이는 눈까풀 아래에 숨어 있는 눈동자는 놀랍도록 위압력이 있었다.

임금은 창을 오른손에 자고, 발에 걸리는 넝쿨들을 창끝으로 끊어가면서 한 걸음 두 걸음 차차 깊은 데로 찾아 들어갔다. 이렇게 얼마를 들어가다가 우거진 송림이 약간 트이고 양지가 드는 어떤 커다란 바위 앞에 서서 바위틈을 들여다보았다. 바위 앞에는, 짐승의 뼈같은 것이 수두룩히 널려 있고, 바위 아래있는 구멍으로는 짐승의 드나든 발자국이 어지러히 있었다.

"늑댄가, 여운가?"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뒷걸음쳐 물러섰다. 동자(瞳子)를 절반 덮었던 눈꺼풀도 약간 들렸다. 창자루를 오른편 옆구리에 꼭 끼고 왼손까지 내밀어 받혀잡고, 창끝을 구멍으로 견주었다.

한 순간, 두 순간―그 구멍 속에서는 짐승의 고통하는 신음성이 차차 들리기 시작하였다. 한 마리만이 아니라 너덧 마리의 부르짖음이었다.

신음성은 차차 커갔다. 쿵쿵 공중거리까지 하는 모양이었다.

잠시 움직임없이 창끝을 구멍으로 돌리고 있던 임금은 한번 고함치며 창을 홱 나꾸었다. 동시에 그것은 마치 지남석(指南石)에 끌리는 쇠와 같이 한 마리의 이리가 데구르 구을러 구멍 밖으로 나와서 벌렁 너머진 채 발버둥질을 몇 번 하다가, 죽었는지 기절했는지 잠잠해버렸다.

이렇게 크고 작은 이리 다섯 마리를 구멍에서 끌어내었다. 다섯 마리의 이리가 가지런히 구멍 밖에 네 활개를 펴고 너머져 있는 꼬락서니를 자시 굽어본 뒤에, 임금은 창자루를 다가서 창날을 눈앞에 높이 들고 검분하였다.

가을 누르칙칙한 볕 아래서도 창연히 빛나는 그 창날은 지금까지 연습에, 혹은 전장(戰場)에―적잖은 피까지 발랐으나, 한점의 흐림없고 바늘끝만큼이라도 이지러진데가 없다. 명공(名工)이 갈아낸 명창(名槍)―지금 바야흐로 이 창은 이백여 년전에 자기의 조상에게 가하여진 커다란 수치를 '눈은 눈으로 코는 코로'갚으러 길떠나려 한다.

최후의 맹연습까지 마친 일만의 장정은 지금 대궐 밖에서, 어서 '우리 나랏님'의 영자(英姿)를 보고자 기다리고 있다.

"신라로, 신라로!"

문죄의 사(問罪의 師)의 대진군(大津軍)의 막은 바야흐로 열리려 한다. 때때로 바람결에 여기까지도 들려오는 대궐 밖의 인마성(人馬聲)은 임금의 출어(出御)를 재촉하는 듯하였다.

잠시 창끝을 들여다보며 귀로는 인마성을 듣고 있는 동안, 이 임금의 얼굴에서는 얻어보기 힘든 미소의 그림자까지 나타났다.

"한동안 쉬었지만 손도 무디지 않았구나!"

혼자 중얼거리며 임금은 대궐쪽으로 향하여 돌아섰다.

대궐에는 임금의 백마 '비룡'이 등대되어 있었다. 백마에 높이 앉아 창을 비껴들고, 시종 몇 명을 뒤에 달고 중문 밖으로 나서매, 임금의 출어를 보도하는 소라수(小螺手)의 소라성이 천지가 뒤집힐 듯이 울린다. 임금은 고요히 머리를 끄덕이며 대궐 밖에 나섰다.

일만명의 정병은 열 대로 나뉘어서 각각 한 사람의 비장이 인솔하고 있고, 그 앞엔 친위대가 정렬로 서 있고, 맨 앞에는 고급 막료며 모장(謨將)들이 마상에서 임금의 출어를 기다리고 있다가, 임금이 궐 밖에 나서자 창과 칼을 높이 들어 성수의 만만세와 종사(宗社)의 만만세를 외쳤다. 온 일면에 번뜩이는 창과 칼―만만세를 부르짖는 고함성―산이 떠나갈 듯 해가 갈라질 듯, 후백제 창건이래 처음 보는 장관(壯觀)이었다.

임금은 그들과 마주 말을 멈추었다.

잠시 전까지 산이 떠나갈 듯이 외치던 만세성도 가라앉고 쥐죽은 듯이 고요한 일만 장병의 맞은편에 말을 고요히 멈춘 뒤에, 임금은 눈을 들어서 왼편에서 비롯하여 오른편까지 한 번 쭉 둘러보았다. 스물두세 살에서 서른 살까지―정병 중에서도 정병만 추려낸 이 일만 군졸은, 또한 나이가 나이인지라 꼭 새 아내를 맞이하여 즐거운 살림살이의 첫걸음을 내어디뎠을 청년이었다. 그러나 지금 바야흐로 싸움의 길에 나아감에 임해 조금이라도 주저하거나 근심하는 기색이 없었다. 나라를 위하여, 나라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목숨을 바친단들 무엇이 아까우랴! 신라로, 신라로! 긴장된 일만쌍의 눈은, 경애하는 '우리의 나랏님'에게로 집중되었다. 이 열정으로 충혈까지 된 일만쌍의 눈을 받고, 임금의 표정은 여전히 무관심한 듯하였지만―좌우 눈가로는 두 줄기 눈물이 쭈루룩 흘렀다.

"여러분!"

임금의 우렁찬 음성이었다. 공중에 불던 가을바람조차 멈춘 듯, 천하는 고요하여졌다. 그 가운데서 임금의 둘째말이 울리어나갔다.

"오늘 이 기쁜 날을 축복하세."

와아! 울려나가는 함성, 쟁그렁거리는 쇳소리, 번뜩이는 창과 칼!

"자, 신라로 영광의 길을 떠나세."

와아! 뒤를 잇는 함성!

그날 오정경, 신라 문죄를 표면 기치로 삼은 백제의 일만 정에는 임금 친솔하에 동으로 동으로 진군하였다. 길가, 길거리마다 남녀노유의 백성들은 술과 고기를 가지고 나와서 이 명예의 장졸들을 향응하였다.

"꼭 이겨주세요."

"조선(祖先)의 원수를 꼭 갚아주세요."

이 길가의 백성들의 끓는 성의에 장졸의 의기는 하늘을 찌를 둣하였다. 덥지 않고 춥지 않은 좋은 절기에, 일만 장졸의 밟는 힘있는 발자국에 대지는 굴복하는 듯이 널따랗게 길을 틔어주었다. 그 가운데를 보일보(步一步) 더욱 힘있게 나아가는 백제의 대군….

때는 후백제 이십년(견훤이 칭왕한 지 이십구년), 신라 경명왕(景明王) 삼년, 고려태조 천수(天授) 삼년, 한땅(漢城)에는 후량 말제(後粱末帝) 정명(貞明)오년 경진(庚辰) 구월 하순이었다.

이 백제의 대군이 추수 뒤의 기름진 평원을 건너고 준령(峻嶺)을 넘고 하여 백제의 국경선을 지나서 신라 땅을 밟은 것은 시월도 열흘경이나 되어서였다.

반항하는 군민(軍民)도 만나지 못하여 마치 내땅인 듯이 진군을 계속하여 대량(大量)성하에까지 이르렀다. 그리고 일지군은 잽싸게 우회(迂廻)하여 구사(仇史)성하로 돌아갔다. 이 대량과 구사의 두 성은 신라 방위의 중요지점으로 물론 상당한 반항이 있으리라 보았다.

그런데 급기야 이르러보니 성주 이하 성을 지킬 장졸은 어느덧 모두 재빠르게 도망쳐버리고 백성들만 어찌할 바를 모르고 망설이고 있는 것이었다.

"무고한 백성들을 애호하라!"

"부녀자를 건드리지 말라!"

엄격한 백제의 군률에 지배 받는 백제 군졸들은 행렬도 어지럽힘이 없이 두 성을 무난히 접수하였다.

대량성의 성주 아문(衙門)을 임시 시어소(時御所)로 삼고, 임금은 거기서 신라 경문왕에게 대하여 이성위왕(異姓爲王)에 대한 문죄사를 보내기로 하였다.

"후백제의 임금은 신라국왕 및 신라조정에 역성위왕(易姓位王)의 죄를 묻노라. 본시 신라국을 세운 시조가 박씨인 것이야 뉘 모르랴만, 왕위는 박씨만이 계승한 것이 아니라, 박씨와 석(昔)씨가 교체하여 계승해 오다가 지금으로부터 칠백년 전에는 박씨는 아주 종사(宗社)에서 물러나고, 그 뒤는 석씨와 금(金)씨가 교체하여 종사를 계승, 거금 오백오십년 전부터는 금씨만이 종사를 계승하여 지금까지 이르렀도다 박씨와 석씨가 교체하여 왕위를 계승할 동안은, 아직 국가라 하는 체재를 갖추지 못한 촌락촌락의 덩어리더니, 금씨가 왕권을 잡은 이후에 비로소 남으로 가락·임나 등을 멸하고, 서와 북으로는 백제와 고구려에 국경을 다투어 비로소 한개의 국가를 이룩하였으니, 계림(鷄林)의 주인은 혹 왈 박씨일는지 모르지만, 신라의 주인은 금씨임이 분명하도다. 후일 당나라와 연합하여 백제를 멸하고 고구려를 멸하여 천하에 용명을 떨치고 신라 있음을 밝힌 자 또한 금씨 아니더뇨? 신라를 이룩하고 신라를 크게 한자 이 모두 금씨거늘 향자 효공왕 승하 후에 수많은 금씨 왕족이 조야에 널려 있거늘 하필 계림시조 박혁거세의 천년 후 후손을 모셔다가 위에 오르게 함은 이 무슨 뜻이뇨? 짐(朕)은 그대나라의 속사정을 모르는도다. 따라서 상세한 까닭은 알 수 없지만, 반드시 무슨 곡절이 있을지라, 짐은 이웃나라의 주인으로 앉아서 곁나라에 생긴 이런 망칙한 일을 방임하면, 그를 본딴 재화가 언제 짐의 위에도 미칠지 난측이라, 가슴이 송구하고 머리털이 스스로 일어서 묵시하려야 할 수 없어 지금 문죄의 대군을 이끌고 왔노라. 그대 만약 전죄를 뉘우치고 짐의 군문에 항복을 하고 퇴위를 하면, 짐은 더 추궁않으려니와, 그렇지 않으면 계림은 한덩어리 불탄ㅎ??지 흙으로 화할지라, 잘 생각하고 깊이 궁구(窮究)하여 처사에 그릇됨이 없도록 하기를 바라노라."

이러한 문죄의 군항(勸降)을 겸한 장서를 신라 임금에게 보냈다.

그사이 보름 동안을 이곳까지 행진해온 장졸의 피곤을 수일간 대량·구사 두 성에서 쉬어가지고 다시 전진하기로 하였다.

엿새 동안을 쉬었다. 처음 一, 二일간은 장졸들은 그동안의 피곤 때문에 지금의 안식을 즐겨 누렸지만, 사흘이 지나고 나흘이 지남에 따라, 혈기방장(血氣方壯)한 그들은 이 안일(安逸)에만 잠겨 있을 수가 없었다. 고양이는 쥐많은 고장에 놓아주어야 기뻐하는 것이요 혈기의 장졸은 전진으로 싸우러 보내야 만족해 하는 것이다. 군중에는 차차 어서 진군하자는 요망이 높아갔다.

엿새 뒤에 임금도 드디어 문죄진군의 거보(巨步)를 다시 내어딛기로 하였다. 이미 점령한 두 성에는 각 이백명씩의 군졸을 남겨서 신라 병정의 역습이라든가 신라인의 폭동을 누르게 하고, 나머지 일만대군은 국왕의 친솔하에 진례군(進禮郡)을 향하여 우렁찬 걸음을 내어디디었다.

멀리 진례군에 피는 연기가 보이리만큼 가까이 이른 때였다. 밝는 날 진례군 함락의 즐거운 꿈을 고이 덮어두고 그들은 오늘밤 여기서 야영을 하기로 하였다.

그날밤 임금의 막 안에는 주요한 장수 몇 명이 임금을 중심으로 둘러앉아서 이제 치려는 진례군의 공략(改略)방식을 의논하고 있었다. 임금은 조는지 깨었는지, 두 팔을 겻고 눈을 감은 채 무심한 태도로 앉아 있었다. 그 앞에서 장수들은 갑론을박(甲論乙駁)으로, 제각기 자기의 용병법을 자랑하고 있었다. 때는 바야흐로 해(亥)시!

어느 틈에인지 모른다. 버썩하는 소리에 장수들이 펄떡 정신을 차릴 찰라 임금은 일어서서 천정에 걸린 작은 활과 게다가 살 두 개까지 뽑아 들었다. 이게 웬일인가고 놀랄 시간의 여유도 주지 않고 어느덧 임금의 활에서는 살이 날아갔다. 막을 꿰뚫고서 밖으로…. 한 대, 두 대. 동시에 막 밖에서는,

"악!"

하는 사람의 비명성과 동시에 땅에 사람 넘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임금은 다시 고요히 앉았다.

"누가 나가서 끌어들이오."

졸음오는 소리로 이렇게 분부한 뒤에는 다시 눈을 감아버렸다.

장수 두 사람이 횃불을 커가지고 나가보았다. 웬 괴한이 양 넓적다리에 살 하나씩을 받다 뛰지도 못하고 앉은걸음으로 도망하는 즈음이었다.

장수들은 그 괴한의 뒷덜미를 끌고 진문 밖에 가져다 꿇여놓았다. 그리고 기거서 복명하였다.

"괴한 잡아다 대령하왔읍니다."

임금은 들었는지 못들었는지, 잠시를 더 눈을 감은 채 가만히 있다가 한순간 눈을 약간 뜨고 괴한을 본 뒤에 다시 감아버렸다. 잠시 침묵….

"월장군!"

임금의 부름이었다.

"네이."

"저 고려인을…."

"저게 고려인이오니까!"

물음에 대해서는 대답지 않고 임금은 자기의 말을 계속 하였다.

"고려인을 저편으로 끌고가서 토사를 받아보시오. 실토를 않거든 박살을 해도 무관하오."

고려인이라 한 명확한 지적과, 박살을 해도 좋다는 말에 괴한은 거지반 제 혼을 잃어버린 모양이었다. 몸을 사시나무와 같이 와들와들 떨기 시작하였다.

원노는 군졸을 불러서 그 괴한을 끌어 저편으로 들어갔다.

진례군 공략의 토의가 흐지부지하여 버렸다. 모두들 멍하니, 원장군이 어떤 토사를 받아가지고 돌아오는지 기다릴 따름이었다.

반각경(半刻頃)이나 지나서야 원노가 들어왔다. 얼굴에 수심이 가득하였다.

원노의 가져온 보고는 이러하였다.

―이번 백제에서 문죄의 군사를 보낸다는 소식을 듣고 신라왕은 아찬 금율(阿粲金律)을 고려에 보내어 고려왕에게 구원병을 청했다. 원대한 야망을 품고 있던 고려왕은, 이 기회에 신라에엑 은혜를 팔아두려고 친히 정병을 이끌고 백제군의 측면을 교란할 작정으로 전속력으로 남하(南下)하여 지금 여기서 칠십리 밖에 밤을 지나고, 밝는 날은 백제군의 뒤를 엄습하려 달려오는 것이다. 그 괴한은 백제의 군정을 알아보러 보낸 고려군의 염탐이었다.

"그래 그 염탐군은?"

"목을 베어버렸읍니다."

잘했다는 말도 엇이 임금은 눈을 감은 채 입가지 다물어 버렸다.

한참 흐르는 침묵. 그 뒤에 임금이 입을 열었다.

"다들 가서 주무시우."

명일의 진례 공격은? 고려군에 대응할 방략은? 여러가지의 '??'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임금은 퇴출을 명하는 것이었다. 하릴없이 장수들이 (그냥 눈을 감고 있는) 임금께 절하고 물러갈 때에 임금은 혼잣말같이 중얼거렸다.

"더벅머리 아이놈이…."

그날밤 이 임금으로는 평생 처음 겪는 일이지만 좀체 잠이 못들었다. 기침소리 부시럭거리는 소리만 연하여 내었다. 자시(子時) 경에 대량성(大良城)에 주둔시켰던 백제군의 한 사람이 말을 달려와서 아뢴 바에 의지하건대, 염탐군의 토사가 조금도 에누리없는 정말이었다.

이튿날 동틀 때에 임금은 고등막료 전부와 열대(隊) 비장을 모두 진 밖에 불렀다. 아무리 나국(南國)이라 하지만 첫겨울의 새벽은 꽤 싸늘하였다. 왕명으로 잠자리에서 뛰쳐나온 장수들은 살을 꿰는 산들바람에 몸을 약간씩 떨면서 임금의 출어를 기다렸다.

이윽고 임금도 진문 밖에 나섰다. 장료들의 드리는 아침 문안도 받는둥 마든둥, 눈을 감고 잠시 서 있었다.

드디어 말이 나왔다.

"오늘 회군(回軍)합시다."

청천의 벽력이었다. 무슨 일인지는 알 수 없었다.

임금은 눈을 약간 떠서 원노를 불러가지고는, 어젯밤의 괴변을 말하라 하였다. 그 분부대로 원노는 어젯밤 괴한 출현에 관한 전말을 장수들한테 들려주었다. 그러나 그렇다기로서니 회군까지야 할 필요를 느끼지 않은 원노는, 뒤를 임금께 밀고 자기는 물러섰다.

"그렇기로서니 회군까지야 왜 하겠읍니까?"

이것이 장군들의 일치된 의견이었다. 임금은 탄식하였다.

"그럼 계림으로 직입을 하잔말이요? 그랬다가는 뒷길이 끊기는 것도 큰 변이거니와 텅빈 본국(本國)을 어떻게 하겠소?"

"고려군을 영격(迎擊)하옵시다."

"잊지 마시오. 우리 군사의 하늘을 찌를 듯한 의기는 계림정벌 때문이오. 지금 계림정벌을 홱 그만두고 고려군사를 영격하자 하면 지금의 예봉이 그냥 유지될 듯싶소? 풀이 꺾이지 않을 것 같소? 군심이 해이(解弛)되면 승부는 벌써 결정되는 법…."

"…."

"여러분의 충의야 모르는 바 아니지만, 더우기 예까지 왔다가…두 성까지 얻었다가 그것조차 내버리고 희군을 한다는 것은, 남아(男兒)의 차마 하지 못할 일이지만, 천의(天意)이미 그리된 것을 어찌하겠소? 후일을 기다립시다. 후일을…. 내 몰랐소. 신라왕이 이리를 피하고자 호랑이에게 몸을 던질 줄은…."

그리고는 가(可)하다 대답을 듣기도 귀찮은 듯이, 몸을 안으로 돌이키었다. 돌이키면서 혼자 중얼거리는 말―

"코흘리개 임금과 더벅머리 아이놈…."

그리고는 성가신 듯이 기침을 한 번 하고 안으로 천천히 발을 옮겼다.

겨울 불그스름한 해가 동편 하늘에 겨우 모양을 나타낸 때는 백제군에서는 회군의 준비를 다 끝내었다.

싸움에는 패하지 않았지만 전략에 패한 백제군은 맥없는 걸음걸이로써 국경선으로 국경선으로 후퇴를 하였다. 그리고 국경선을 넘어서서는 국경 가까운 열 고을에 이 군졸들을 나누어두어 장차의 기회를 기다리게 하고, 임금은 막료들과 친위병 수백며명만을 데리고 서울로 돌아왔다.

대군을 인솔하고 대량·구사(大良·仇史) 등지까지 진공을 하다가 고려 왕건의 군사 때문에 도로 퇴군을 한 이래 임금 견훤은 앙앙불락(怏怏不樂)하였다.

본시 무표정하고 침울한 얼굴이매 표정이 더 음침하다든가 한 바는 아니었지만 식량(食糧)이 전보다 줄고 잠도 전만 못하게 되었다.

벌써 귀밑에 희뜩희뜩한 털이 약간 보이게 되었다. 완장한 체격이매 몸집이 눈에 보이게 약하여진 듯하지는 않았지만, 어디라고 지적하기는 힘드나 그림자 엷어가는 것은 감출 수가 없었다.

왕건(王建)의 출현과 송도 도읍 등등에서 벌써 마음의 위협을 느끼던 차에, 이번 신라 정벌에 왕건이 또한 곁들이를 하여 일을 중도에 깨뜨려버린 것은 이 임금의 마음을 더욱 어둡게 하였다.

"송경에 왕기(王氣)가 보이더니라."

이젠 벌써 근 오십년 전의 아득한 옛날 은사 도선(道詵)이 들려주던 이 말이 마치 환상(幻像)과 같이 늘 그의 머리에 상기되곤 하였다.

싸우지도 않고 패전하여 돌아온 이래, 후백제는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속전즉결(速戰卽決) 주의로, 한숨에 신라를 무찌르고, 그 여세(餘勢)로써 신흥 고려까지 둘러엎어버려서, 이 반도의 팻권(覇權)을 혼자 잡아보려던 계획이 깨어진 이후, 후백제는 한동안 양병(養兵)에만 힘쓰고 은인자중(隱忍自重)하였다.

주의하여 살피건대, 고려는 호시탐탐이 백제의 빈틈만 엿보고 있었다. 만약 감시의 눈을 잠시라도 게을리하고, 한눈을 파는 기회만 있으면 고려병은 즉시 백제를 침략하고자….

이런 정세 아래니 백제는 그의 방략을 고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전에는 경기(輕騎)로써 먼저 신라를 무찌르고, 그 여세로써 고려를 엎을 방략이었지만, 그것이 약간 힘들게 된 지금에는 전략을 고쳐서, 동쪽으로 신라에 대해서는 견제의 의미로 시위만 하여 두고, 일로 고려를 먼저 엎어놓으면 힘없는 신라는 절로 백제의 손아래서 놀아날 것이었다.

먼젓 번 대량·구사 등지 정벌에서 돌아온 군사들은 그냥 신라와의 국경 가까이 멈추어 두어, 신라를 견제하는 일방 국내에서는 고려 정벌을 위한 정예군을 조련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이리하여 일년, 이년, 삼년, 사년….

사년이라는 준비의 날짜를 지나서, 신라의 경명왕 칠년(견훤왕은 벌써 쉰여덟이었다) 여름이었다.

숙명적으로 단명(短命)한 운명을 타고난 신라 왕실이라 신라 임금은 재위 겨우 칠년으로 그해 첫여름부터 시름시름 앓기 시작한 것이 아주 위중하게 까지 되었다. 아무리 나라 정사가 어지러웠지만 국왕의 중환에 온 국내는 수심이 가득하였다. 더우기 임금의 재위 기간이 모두 너무도 짧기 때문에, 임금께 환후가 있으면 반드시 국상을 예기하여야 하는 습관이 들어 있는 신라라, 민심이 두선두선하며 최후의 불길한 일을 모두들 예기하고 있었다.

이렇듯 신라는 국내적으로 불행한 일이 있어서 다른 일은 돌볼 여유가 없는 기회를 타서, 백제에서는 시험적으로 왕자 신검과 양검(神劒·良劒)에게 약간의 군사를 맡겨 고려의 조물군(曹勿郡)의 허실을 엿보게 하였다.

고려군의 허실과 군심 등을 등떠보기 위하여 조물군까지 진군하였던 백제왕자의 군은 얼맛동안 서로 대치하고 있다가 짐짓 패한 체하고 그냥 퇴군해버렸다. 그러나 그동안 고려의 군심이 짐작이 갔다. 이 시험공략에서 퇴근한 뒤에, 백제는 은인자중하는 체하면서 극비밀리에 동원(動員)을 하였다.

환후 중하던 신라 임금은 그 여름을 넘기지 못하고 승하하였다. 그리고 승하한 임금의 친동생 위응(魏膺)이 새 임금으로 등극하였다. 즉 경애왕(景哀王)이었다.

신라에선 새 임금이 등극을 하며 승하한 임금의 인산을 치르며 할 동안, 견훤은 이 기회에 고려와의 국경방면으로, 일변 병기를 나르며 대군을 집결시키며, 싸움 준비에 열중하였다.

백제에서는 아무리 비밀히 하느라 하는 일이로되, 이런 큰 동병이 끝까지 비밀히 될 수가 없었다. 소문은 어느덧 고려까지 이르러서, 고려왕은 기선(機先)을 제하기 위해, 지금 한창 백제에서는 준비에 분망한 동안 고려장군 유금필(庾黔弼)을 정서대장군(征西大將軍)으로 삼아 앞서 백제 정벌차로 떠나게 하고, 뒤이어 임금도 몸소 대군을 이끌고 유장군의 뒤를 따랐다.

백제와 고려의 군사(유금필의 인솔한)는 연산진(燕山鎭)에서 전초전(前哨戰)이 있었다. 그리고 고려임금의 친솔한 주력군은 조물군까지 이르러서 거기서 백제임금의 친솔한 대군과 마주쳐서 여기서 큰 회전(會戰)은 벌어지게 되었다.

장구(長驅) 송경에서부터 여기까지 달려온 고려의 군사는 아직 피곤이 삭지 않은 위에 진형(陣形)도 정제되지를 못하였다. 그 대신 백제의 장졸은 미리부터 정밀한 계획 아래서 진군하여 왔을 뿐더러, 더우기 작년의 시험공략에 있어서 이 근방의 지리며 지세를 상세히 연구하여 두었더니만큼 빈틈이 없었다. 그런 형태로서 양군은 대치(對峙)하였다.

고려군에서는 이만 눈치를 짐작하였기 때문에 할 수만 있으면 수일간의 휴식 기간을 얻고 싶었다. 휴식을 하며 그동안 피곤도 풀고 진형도 정제하고 싶었다.

그런데 대치되자 그날 저녁으로 백제군은 총공격을 시작하였다.

군사 피곤한 위에 진형조차 정제되지 못하였던 고려군은 백제군의 날카로운 군세를 당할 수가 없었다. 개전 즉시로 고려군의 동익(東翼)은 무너져나갔다. 그리고 중앙과 서익이 간신히 무너지지만 않고 지탱하여 나아갈 동안, 요행 날이 어두워서 휴전상태에 들어갔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서익도 백제군의 포위권 안에 들어서 한시각만 해가 더 길었더면 고려군의 전면적 참패는 면하지 못했을 것이요, 오늘은 오행 날이 어둡기 때문에 참패는 면하였다 하나, 밝는 날에는 엊저녁에 받을 번한 참패를 피할 도리가 없게 되었다. 말하자면 날이 어두운 것은 겨우 고려군으로서 참패를 하루 늦추어준 것뿐이지 형세의 호전(好轉)은 바랄 바가 없었다.

교교(皎皎)히 밝은 달밤이었다.

시월 중순―맑게 개인 하늘에는 만월이 이 전장(戰場)을 내려비취고 있다.

백제 종군에서는 작년에 이곳에 시험공략을 왔던 신검과 양검을 중심으로 백제 장정들이 둘러앉아서 밝는 날의 공격방략을 의논하고 있었다. 고려의 진세가 갖춰지기 전에 공격을 하려고 저녁부터 공격한 것이 불행히 날이 어둡기 때문에 장사(長蛇)를 놓진 백제군은, 비록 오늘은 놓쳤지만 아까의 공격으로 고려전군의 의기를 꺾어 놓았으므로, 밝는 날은 약간의 노력만 하면 고려전군을 잔멸시킬 만한 자신이 있었다. 고려 중앙군은 고려임금 왕건이 직접 지휘하고 있느니만큼 그래도 좀 버틸 수 있을 것이나, 서익은 함성만 질러도 난군판이 될 것이고, 난군판이 된 서군을 포위태세를 취하면서 중앙으로 몰고 들어가면, 중앙 역시 함께 뒤섞이어 어지러워질 것이고, 그럴 때에 이곳 중앙의 정예로 직충(直衝)하면 고려군은 전멸을 면하지 못할 것이고, 혹은 국왕까지도 사로잡은 기회가 있을는지도 모를 것이라―이러한 전략을 세운 뒤에, 서익 공격에 주력하기 위해서 오늘의 승리자인 동익군을 밤 동안에 몰래 중앙의 뒤를 우회(迂?)시켜 서익으로 돌렸다.

장령들이 이런 의논을 하고 있는 동안 임금 견훤은 홀로히 몸을 빼서 진영 밖으로 나왔다. 이번 싸움을 전승(全勝)으로 본 임금은 장령들의 의논을 귀담아들을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아무 꾀도 베풀지 않고, 밝는 날 단지 백제군에서 함성만 요란히 지를지라도 고려군은 무너져나갈만큼 군심이 쇠한 것은, 이 임금의 삼십여년의 군인생활로서 넉넉히 추측이 갔다.―달도 밝기도 하군!

비교적 마음이 흥구러웠다. 고려 임금 왕건에게 대하여 까닭없이 품던 위압감도 줄어, 오늘 밤만 지나면 밝는 날은 모든 일이 해결된다. 잘되면 혹은 고려 임금을 사로잡거나 군문에 항복을 받거나 학 될 것이요, 불행 놓진다손치더라도, 이 격앙(激昻)된 장졸을 인솔하고 송경까지 쫓아가서 무찌르면 고려는 수족을 쓸 틈이 없이 잔멸될 것이다. 전자이든 후자이든 고려는 이젠 이 임금의 눈에는 잔멸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요행히 고려 임금을 사로잡거나 항복받게 된다면 그때는 전승군(戰勝軍)의 여세로 발을 돌이켜 계림으로 향할 것이다.

송악에 왕기가 있더라는 스승(도선)의 말에 응하려는 듯이, 왕건이 송악에 도읍을 한 그 이래 때때로 폭풍우와 같이 이 임금의 마음을 엄습하는 불안도 바야흐로 소멸되려는 듯하였다.

가벼운 기분으로 진영 밖을 나선 임금은, 지금 동익(東翼)에서 서익으로 이동하는 군마의 어지러운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오늘의 전장(戰場)이요, 겸하여 승전한 곳인 북벌동군영(北伐東軍營)으로 천천히 말을 몰았다. 이 임금의 적지않은 왕자 중에 가장 사랑하는 네째 왕자 금강(金剛)이 동군 영솔장이었다.

아까 저녁때의 격전장(激戰場)이었던 곳은 벌써 백제군에게 점령된 바 되어 달빛 아래 무데기무데기로 고려군의 송장이며 중상자들이 쓰러져 있고, 백제의 진영은 썩 북쪽―고려 중앙군이 진치고 있는 조물(曹勿)의 곧 성하(城下)였다. 고려 임금의 진영인 조물성은 남쪽으로는 곧 눈앞에 백제 임금 견훤의 중앙군과 맞섰고, 동쪽으론 동쪽을 방호할 동익군이 전멸을 당하고 금강왕자의 백제 동익군에게 압축을 받고 있는 것이었다. 고려군은 동쪽과 남쪽을 백제군에게 에워싸이고, 서쪽은 간신히 서익(西翼)으로 버티고 있으나 몇 시간이나 버틸 수 있을는지 불안하기 짝이 없고, 북쪽으로 겨우 장차 송악으로 도망칠 길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견훤왕은 이곳저곳에서 울리는 중상한 고려군졸의 맥없는 신음성에 눈쌀을 찌푸리고 처참한 전상을 건너서 금강왕자의 진옥까지 이르렀다.

뜻하지 않은 임금의 임어에 놀라서 맞은 종졸에게 말을 맡기고 진옥안으로 들어서니, 금강왕자는 마침 매부되는 영규(英規)장군과 마주 앉아서 소박한 안주로 대작(對酌)을 하고 있다가 부왕의 임어에 창황히 일어나서 영접하였다.

"야반에―나라님께서는…?"

창황히 맞은 처남 매부에게 임금은 고요히 머리를 끄덕이고 아들이 비켜주는 정면 의자에 가서 앉았다.

"전승장군을 보러 왔니라."

얼른거리는 횃불 속에서 그들의 젊고 씩씩한 얼굴을, 맞은 편에 읍하고 서 있는 사랑하는 아들과 사위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볼 때, 임금의 마음은 매우 흡족하였다.

"소신등의 공이 아니오라, 오로지 우리 나랏님의 신위의 덕이로소이다."

당신의 아들과 사위가 대작하고 있던 큰 잔을 들어서 술을 따르려는 아들을 임금은 손을 내밀러 말리고 손수 한잔 그득히 부어 들이켰다.

"내일은 왕모(王某)를 결박지어 끌어와야 할 터인데, 어떠냐? 너희들 침이 안넘어가느냐?"

마음이 가볍기 때문에 농담이라도 한 마디 하고 싶어서 던져보는 말이었다. 뚱하여 해학(諧謔)과 농에는 어울리지 않는 이 임금의 근래의 걸작이었다.

왕자는 한순간 매부를 보았다. 매부도 처남을 보았다. 영규장군이 입을 열었다.

"나랏님! 밝는 날로 결승이 나리까?"

임금은 눈을 들어 사위를 보았다. 무슨 당찮은 말을 하느냐는 듯하였다. 금강왕자가 말을 끼었다.

"아버님! 동군·중군·서군 중에 내일 아침싸움에 나갈 자는 뒤로 움쳐서 편안히 밤을 쉬게 하옵고, 각 군에서 한 이백명씩을 따로 뽑으와 고려 진영에 접근한 곳에서 한식경에 한참씩을 함성을 지르며 시석(矢石)을 날려보내고 해서, 고려군으로 하여금 이밤을 딸각 새게 하면 내일아침 싸움에 퍽 유리할까 하옵니다."

임금은 방금 사위에게 던졌던 것과 꼭같은 눈을 아들에게 던졌다. 그것은 또 무슨 말이냐는 뜻이었다.

"좌우간 앉아라. 너희들의 이야기가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다. 양춘(陽春)을 만난 빙설(氷雪)에 화력(火力)까지 가해서 무엇하랴."

"글쎄올씨다."

"야!"

임금은 눈을 굴려 아들과 사위를 한번 둘러보았다. 오늘 저녁으로 고려군을 전멸시킬 기개를 가지고 싸움을 시작한 그들이 설사 전멸은 못시켰을망정, 밝는날의 재기(再起)는 엄두도 못낼만큼 큰 타격을 주어 동군은 전멸, 서군은 반멸 중앙군 혼자 겨우 잔명(殘命)을 보전하고 있는 패잔(敗殘) 고려군에 대하여 너무도 신중한 태도를 취하려는 두 젊은이의 마음을 알 수가 없었다.

"너희들 무슨 낌새라도 맡았느냐? 내버려두어도 자멸할 고려군에게 헛된 힘을 보탤 필요가 어디 있느냐? 좌우간 앉아라. 앉아서 이야기해 보아라."

젊은이들이 고려군에 대하여 신중한 태도를 취하려는 것은 아래와 같은 근거에서였다.

첫째, 고려군이 비교적 평정하다 하는 점이었다. 회전(會戰) 순간에 동군은 전멸당하고, 서군은 백제군에게 포위되고, 중앙군도 동쪽과 남쪽으로 포위된 형태 아래 있는 고려군이라, 밝는 날 다시 백제의 공격을 받기만 하면 전멸―적어도 참패는 면하지 못할 것이다. 이건 명백한 사실이다. 그런 형편이면 반드시 이 밤은 고려군 전체가 낭패와 동요가 있어야 할 것이다. 어지러히 수선거리고 낭패해 돌아가고, 일변 퇴각, 일변 도망…패망군이 연출하여야 할 추태가 보여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려군은 무슨 심산이라도 있는 것인지 평정하게 '잔멸'의 전날밤을 보내는 것이었다. 이것이 좀 신중히 생각하여야 할 일이다.

둘째로, 병력의 다수였다. 고려군은 이번 원정에 임금 왕건의 친솔군만이 일만명이 있다. 거기 반하여 백제군은 삼군 도합해서 겨우 삼천명이었다. 고려군은 먼 길을 온 위에 진형도 채 정비되기 전에 정예(精銳)한 백제군의 공격을 받아 참패를 하였거니와, 오늘 한밤을 지낼 동안 어떻게 될지 예측을 허락지 않는 터라, 아까 싸움에서 무려 이천명은 꺾어놓았지만 팔천명의 고려군은 그냥 남아 있다. 백제는 비록 한 군사도 꺾이지 않았으나, 수효로써 八대三이다. 특별히 유리한 조건 아래서가 아니면 실수 없으리라고 보증할 수 없다.

이러한 평편 아래 또 한가지 꺼림칙한 일이 있다. 아까 전장에서 사로잡은 한사람의 포로가 하는 말에 의지하건대 이번 싸움에 정서대장군(征西大將軍)으로 임금보다 앞서 팔천명의 대군을 인솔하고 더나서 연산진으로 돈 유금필(庾黔弼) 장군의 군사가 오늘 이 조물에서 왕의 직솔군(直率軍)과 합세를 하기로 되어 있었다 한다. 그런데 어떤 착오가 났음인지 유장군의 군사는 오늘 조물땅에 도달하지 못했다. 오늘 이르지 못했다 할지라도 밝는 날엔 이곳까지 도달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고려군은 합계 일만육천이라는―백제군의 오백 이상의 병력이 된다. 그위에 조물성내에는 수천석의 군량(軍糧)이 있고 병기의 준비도 충분하다 하는 것이었다.

정병으로 급히 습격하여 속전속승(速戰速勝)을 전술로 삼는 백제군에 있어서는, 싸움이오래 끌릴수록 매우 불리한 일이다. 그러나 저쪽은 군량·병기가 넉넉한데다가 병력도 오배 이상의 대군이니, 그 대군이 (꽤 견고한) 조물성내에 농성을 하여버리면 속전속승은 지난(至難)한 일이고, 싸움이 오래 끌리면 군사 적은 자가 패하기가 십상팔구다.

그러니까 속전속승을 위해서는, (아직 피곤이 삭지 못하고 진형도 정비되지 못한데다 아까 받은 상처가 아직도 아플 동안) 오늘 밤새도록 위협을 주고 피곤을 주고 불안을 주어서 시달리고 시달린 뒤에 동트자 (유장군의 군사가 합세하기 전에)거대한 일격을 가하자 하는 것이었다.

따는 적절한 전략이었다. 그 의견은 드디어 채용이 되었다. 백제군에서는 밤새도록 연하여 함성이 나고 시석(矢石)이 고려진으로 날아갔다. 가뜩이나 피곤한데다가 전패까지 겹쳐서 상심한 고려군은 밤새도록 백제군에게 시달리고 시달린 끝에 이제는 겁만 잔뜩 집어먹고 전의(戰意)는 전혀 없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분요(紛擾) 중에서도 고려 임금의 침착한 지위로서 새벽 동틀 때쯤은 골의 서익군(西翼軍)도 어름어름 어느덧 조물성안으로 잠겨버렸다.

아침핵 불그스레 동녘하늘에 떠오를 즈음에 유장군의 인솔한 팔천의 고려군도 조물성까지 도달하였다. 그러나 이 군사 역시 강행군(强行軍)을 하여 새벽에 겨우 이곳까지 득달하기는 하였지만, 정예한 백제군을 대적할 기력이 있을 까닭이 없었다. 동·남·서 삼면이 벌써 백제군에게 포위당하고 겨우 한쪽만 남은 북문으로 유장군의 군사도 성내로 피신을 하여버렸다.

속전속승의 백제 전술은 실패하였다. 밤새도록 시달리기만 하다가 동틀녘 일거하여 고려 서익을 몰아 성안으로 들이몰려 성안으로 몰려 들어가는 고려군과 함께 성안에 돌입하려던 백제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서익군(고려의)을 교묘히 조금씩 조금씩 이동시켜 성내로 끌어들이기 때문에 백제군에서는, 아직 고려의 서익군이 그냥 성밖에 있는 줄만 알았다. 그러나 급기 날이 밝고보니 고려군은 겨우 수백명이 서익 진지(陣地)에 남아 있을 뿐이고 대부대는 벌써 성안으로 들어가버렸다. 성문은 굳데 잠겨졌다. 백제군은 (전사하기를 각오한) 몇백 명의 고려군만을 잔멸시키고 닭쫓던 개 모양으로 굳게 잠긴 성문만 원망스러이 바라볼 뿐이었다.

싸움은 교착상태(膠着狀態)에 들어갔다.

유장군의 군사의 뒷꼬리까지 완전히 성내로 들어간 때쯤하여 백제군은 완전히 동서남북으로 조물성을 에워쌌다. 그러나 워낙 축성(築城)이 견고하고 성내에는 충분한 군량이며 우물이며, 그밖에 식료품등이 넉넉히 준비되어 있는 데다가 군사 넉넉하고 병기 충분하니, 좀체 함락이 될 까닭이 없었다.

백제에서는 연방 싸움을 돋구어보았다. 짐짓 물러간 체하여보기도 하였다. 성문이 단 한 순간이라도 열리기만 하면 그 밖에 매복했던 군사가 돌입을 하려고 온갖 계획을 다 써보았다. 그러나 고려군사는 성문에는 절대로 손을 대어보지 않았다.

백제군에서 성을 넘어서라도 들어가려고 하면, 고려측은 살(矢)의 소낙비를 내려서 도저히 넘을 수가 없었다.

이제는 조물성내에 먹을 것이 떨어지도록 지구전(持久戰)으로 나아갈밖에는 도리가 업었다. 그러나 적은 군사로서 많은 군사를 포위하고 오래 끈다는 것은 매우 불리한 일이었다.

더우기 임금이며 왕자 이하 두드러진 장수는 거의 다 여기 모여 있고 나라가 비어 있는지라, 나라를 오래 비어둔다는 것도 곤난하였다.

일이 딱하게 되었다.

매일 세 때 끼니밖에는 할일이 없기 때문에 흥덩흥덩 무위(無爲)의 날을 보내는 동안, 군대도 차차 규율이 해이(解弛)되어 갈 뿐 아니라, 겨울이 눈앞에 임박했는데, 거처며 의복 등도 겨울을 막을 준비가 없으니 이것도 딱한 일이었다.

싸움에는 이겼다. 결정적 승리까지는 못얻었지만 형세상 이긴 편이었다. 그러나 이기고 그 다음도 이기고, 그런 뒤에 무조건하고 다시 도망친다는 기괴한 희극이 연출될지도 모르는 형편이었다.

임금에서 졸병에 이르기까지 연일 하품으로 세월을 보냈다.

첫눈이 내렸다. 굉장히 많이 쌓였다. 밤부터 시작하여 이튿날 새벽까지 너덧 치나 되게 두껍게 내리고는 개였다.

천지를 씻은 듯한 눈이 부신 쇄락(灑落)한 아침에 임금(백제)은 진옥 밖에 의자를 내어놓게 하고 음침한 얼굴로 걸터앉아 있었다. 왕자며 장령들도 모두 임금의 주위에 의자를 놓고 둘러앉아 있었다.

매일 하는 일과였다. 무슨 의논하는 일도 없이, 한심스레 조물성쪽을 간간 바라볼 뿐, 묵묵히 있을 뿐이었다. 할일이 없어서 단지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였다.

처음 한동안은 행여 성문 열리는 기회라도 있을까 하여 문 밖에 매복병을 두었었지만, 지금은 그것조차 그만두었다. 성문은 백제군이 완전히 물러가거나 그렇지 않으면 성안의 양식이 떨어지거나, 둘 중에 한 가지의 결과가 생기기 전에는 열리지 않을 것을 이제는 요해(了解)하였다.

"한심한 놈들이올씨다."

"싸움마당에서 싸움을 피하는 겁쟁이놈들이올씨다."

"공명(孔明)의 고지(古智)를 본받아 치마라도 보내야지, 사내놈의 행사오니까?"

장병들이 한 마디씩 제각기 불평을 말하는 것을 임금은 그냥 묵묵히 듣고 있을 뿐이었다.

입을 얽어맨 듯 잠자코 앉아서 무거운 눈초리를 조물성쪽으로 노리고 있던 임금은 눈을 조금 크게 떴다. 차차 눈에 힘을 주는 것이 분명하였다. 머리까지 좀 들었다.

"저게 뭘까?"

드디어 입까지 열렸다.

조물성을 등지고 임금께로 향하여 앉았던 장병들은 임금의 이 말에 일제히 임금이 턱으로 가리키는 편을 보았다.

남문(南門)이었다. 어느 틈에 문이 열렸다가 닫혔는지 모른다. 하여간 성안에서 나온 것이 분명한 한 떼의 인마가 이리로 향하여 오는 것이었다.

맨 앞에는 기수(旗手) 두 명이 기를 높이 받들고 도보(徒步)로 오고, 그 뒤에는 홍포(紅袍)를 입은 사람이 수레를 타고 양손으로는 서간(書簡)을 높이 들고, 그 뒤에는 호위장(護衛將)인 듯한 사람이 열 사람 두 줄로 줄지어 말에 타고…이런 일행이 남문에서 이 백제 진으로 향해 오는 것이었다.

백제 장령들은 처음은 머리만 뒤로 돌이켰다가, 이 광경을 보고 모두들 임금께 비켜서 그리고 향하여 돌아섰다.

물론 고려임금이 백제임금께 보내는 사신(使臣)인 것은 틀림이 없었다. 홍포를 입었으매 왕족이거나 대신이거나 좌우간 얕은 신분은 아니었다.

모두들 의혹의 눈을 그리로 던졌다.

이 의혹의 주시(注視) 가운데서 고려 사신 일행은 백제 임금의 좌어(座御)한 곳에서 백보쯤되는 곳까지 와서, 수레와 말에서 내렸다. 그리고 정사(正使)가 맨 앞에 서과 그 좌우편으로 비스드히 기수가 달리고, 그 뒤에 장령들이 서서, 먼저 거기서 국궁(鞠躬)하여 절하고, 그런 뒤에는 정사는 간찰(簡札)을 높이 든 채 허리를 굽히고 배종원들을 달고 차라 백제왕의 진옥으로 가까이 왔다.

사신은 삼십보 거리까지 이르렀다. 거기서 발을 멈추었다.

"고려국 사신 왕신(王信)으로 아뢰오."

국궁하고 자기의 신분과 이름을 아뢰었다.

백제측에서는 원노(元奴)가 행렬에서 나아갔다. 그리고 고려 사신에게 의하여 답례하였다.

"대 백제국 대장군 원노라 하오. 전장에 문신(文臣)이 어떤 사명을 띠셨소?"

"고려국 군주폐하께서 대 백제국 대 군주폐하께 친서를 봉접하고자 진중임을 무릅쓰고 왔소이다."

원노는 자기네의 임금을 돌아보았다. 임금은 받아오라는 뜻으로 머리를 끄덕이었다.

고려왕에게서 백제왕에게로 온 편지는 화친을 비는 글이었다.

거기는 과장(誇張)이며 허휘가 없고, 자기 나라를 자랑하는 말귀가 없는 대신 백제에게 아첨하는 비룩한 말도 없이 사실을 사실대로 지적하고 화친을 청하는 것이었다.

첫째로, 고려왕은 지금 조물성내에 구냘이 얼마 남지 않아서 오래 더 성을 지탱하기가 어려운 점을 지적하는 동시에, 또한 백제군 역시 군심이 해이하여 고려군이 성을 나와서 응전할지라도 이를 격파할만한 힘이 빠졌음을 지적하였고, 둘째로, 자기도 나라를 오래 비워두어서 마음이 아니놓인다는 말과 함께 백제도 또한 그러리라는 것을 지적하였고,

세째로는, 백제와 고려는 본시 아무 은원(恩怨)도 없이 서로 침략하여, 빼앗겼다 빼앗았다 하는 것은, 국탕과 인력을 헛되이 소모하는데 지나지 못하는 점을 지적했고,―그런 형편이니 지금 서로 호미난방(虎尾難放)격인 싸움을 중지하고 친하게 지나자는 말과, 그 정거로서 지금 사신(使臣)으로 간 왕신(王信)은 고려왕 자기의 당제(堂弟)이니 볼모(人質)를 맡으시고, 백제서도 또한 한 사람의 볼모를 보내주셔서 신의에 다짐을 두어주시면 이 이상 영광이 다시 없겠다는 뜻으로 글을 마치었다.

그날저녁 고려사신 왕신은 백제 진중에 멈치어둔 채로, 백제측에서는 어전회의(御前會議)가 열렸다.

사실 지리지리했다. 조물성하에 대치한 지 한 달 미만이었다. 그러나 싸움도 않고 닭쌈하듯 서로 겨루고만 있는 한 달은 지리지리하기 한량 없었다. 더구나 불편하고 부자유한 야영(夜營) 생활의 한 달은 이제 더 견디기 힘들었다.

고려측에서도 벌써 진퇴유곡(進退維谷)의 상태인 것은 짐작이 아니가는 바가 아니었다. 그러나 고려의 궁서(窮鼠)가 달려들 때에 이를 때려부수기는커녕 떨쳐버릴 기운이라도 있는지가 매우 의심쩍을 만한 처지라, 이 화친제의를 물리칠 수가 없었다.

어전회의의 결과 고려의 제의(提議)에 좇기로 결정이 되었다.

고려왕에게서 백제왕에게로 볼모로 왔던 왕신은 이튿날 다시 자기네의 임금께로(백제왕의 답서를 가지고) 돌아갔다. 백제왕의 답서는 대략 이런 것이었다.

첫째로, 볼모 교환을 승낙하여 왕신을 볼모로 받는 동시에, 견훤의 생질되는 진호(眞虎)를 고려에 볼모로 보내고, 둘째로, 고려가 이번 백제를 침노한 것은 무명의 사(無名師)이지만, 백제가 고려에 출병하였던 것은, 이전에 고령왕이 궁예의 신하로서 이신벌군(以臣伐君)을 한 행사에 대한 문제사(問罪師)니까, 거기에 대한 답변을 들을 것,

이번 무명의 사슬 일으켰던 일에 대한 사죄의 뜻으로 거서(居西)등 이십여 성(城)을 백제에게 할양(割讓)할 것, 등등이었다.

고려왕은 다시 왕신의 편에 국서를 백제왕에게 보냈다. 거서(居西)등 이십여 성은 진정(進呈)하겠다는 말과, 문죄(問罪)의 건에 대해서는 어의에 부(副)하도록 할 터이니 한번 서로 봄이 좋을 듯하다는 뜻을 말하고, 더우기 친목을 도모키 위해서라도 두 나라 임금이 한 좌석에서 가슴을 풀어헤치고 회포를 교환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서, 명일 오정께 약소하나마 조물성내에서 잔치를 한번 열고 용안을 우러러보고 싶다는 뜻을 전하였다.

여기 대하여 몇몇 장령은 "신하로서 임금을 친 반목무쌍(反目無雙)하고 무도무의(無道無義)한 고려왕을 성내에서 만나는 것은 위험합니다."고 반대도 하였으나, 견훤왕은 잔치에 임하기로 승낙하였다.

백제 임금은 노부도 없이 마치 대궐후원이라도 거니는 것 같은 간단한 행차로 조물성 고려왕의 잔치에 임하였다. 네째 왕자 금강과 장군 원노와 시종장(侍從將) 단 세 사람이 배행(陪行)할 뿐이었다.

이 너무도 간단한 길신가리에 고려 군인은 눈을 크게 하였다. 말에서 내리는 이 군신(君臣) 네 사람을 고려왕은 뜰아래 영접하였다.

"보잘것 없는 곳에 왕림하셔서 영광 이 위에 없겠읍니다."

허리를 굽혀 인사하는 고려왕에게 백제왕도 상례를 하고 고려 시종의 안내로 연석에 들었다.

동향하여 고려왕, 서향하여 백제왕의 자리가 금일월 병풍을 등지고 잡혀 있었다. 신하들은 조금 떨어져 앉게 되고, 술을 따르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기 위하여 여령(女伶) 몇 명이 연석 뒤에 대령하고 있었다.

그것은 흥미 있는 대조였다. 늘 얼굴과 입가에 웃음을 머금고, 시재 무슨 이야기가 나오려고 입술에 맺혀 있는 듯한 고려왕 왕건과, 음침하고 무표정한 커다란 얼굴에 입을 꽉 봉하고 태산같이 주저앉아 있는 백제왕―이 정반대의 두 임금은 한상에 마주 앉았다.

공인(工人)이 울리는 요량한 음악에 어리어 여령의 따르는 술은 두 임금의 잔에 찼다.

백제왕이 먼저 말없이 잔을 들이켰다. 그것을 보면서 함께 잔을 든 고려왕은 술을 입술에 약간 바르기만 할 뿐 두로 잔을 놓았다.

"주석(酒席)이 무르익기 전에 대왕께서 과인(寡人)을 힐책(詰責)하신 건에 대하여 한 마디 변명하겠읍니다."

"?"

백제왕은 눈을 굴려서 고려왕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대왕께서는 과인이 고려국을 창업한 것을 태봉(궁예의 세웠던 나라)국에 반역했다고 보시는 듯하오이다마는 그것은 오해라고 생각합니다. 태봉국 창업주는 본시 신라의 왕손으로 따로 태봉국을 세우신 것은 대왕께서도 아시는 바와 마찬가지고, 과인이 한때 태봉국에 신사(臣仕)한 일이 있은 것도 아시는 바와 마찬가지올씨다만, 후에 과인이 고려국을 창업한 것은 과인 본시 고구려의 후인으로 조국을 재건한 것이지, 태봉국을 둘러엎고 태봉국을 반역해서 태봉국 전왕을 손위(遜位)시키고 과인이 태봉국 왕위를 찬탈(簒奪)한 것이 아니올씨다. 과인은 과인대로 고려국의 창업주가 되고, 태봉국은 태봉국대로 무간섭하려고 했었는데, 태봉국 군주께서는 스스로 겁을 잡수시고 피난을 가시다가 토민에게 해를 보신 것이옵지, 과인의 아랑곳할 바 아니올씨다. 전혀 근본이 다른 것을 대왕께서는 과인을 힐책하시오니 민망할 따름이로소이다."

백제왕은 이 변명을 한마디도 의견을 끼지 않고 묵묵히 들었다. 이론은 성립된다. 그러나 그것은 궤변이라 보기 때문에 백제왕은 대답없이 다시 술잔을 들었다.

고려왕은 매우 다변하였다. 그의 얇은 입술을 쉴새없이 놀려가면서, 백제 용병의 귀신같음을 찬송하고, 신라 역대의 난정을 비웃고 옛날 고구려와 백제가 같은 부여씨(扶餘)의 갈래에서 두 나라를 이룩하고 동남방의 약국 신라를 지도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제 또다시 힘을 아울러 신라를 지도하자는 말이며, 또는 발해(渤海)·그란(契丹)·후당(後唐) 등등 국제적으로, 델리케잍한 입장에 있는 부여 계통은 힘을 아울러서 이 중압(重壓)에 대항하여야겠다는 말이며…, 입을 꾹 봉하고 있는 백제왕의 몫까지 혼자 맡은 듯이 입을 닫힐 때가 없었다.

고려왕이 많은 말로써 연석을 흥성스럽게 할 동안, 백제왕은 거의 침묵을 지켰다. 단지 한 번 발해국의 이야기가 났을 적에 한 마디 끼어보았다.

"대왕의 창업하신 고려국과 발해국과는 관계가 어떻게 됩니까?"

"특별한 관계는 없읍니다. 고구려 왕실이 무너진 뒤에 나라 없는 고구려 백성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부득불 발해라는 새나라가 생겨났지만, 과인이 이룩한 고려국은 고구려 왕국의 정통 후계자올씨다."

"고려가 고구려의 정통 후계자면 왜 압록강을 넘어서서 발해를 병합(倂合)하고 국내성(國內城)이나 환도성(丸都城)에 서울을 정하여 서쪽으로 중원(中原)을 넘겨다 볼 생각을 못하고,―하다못해 고구려 말년의 도읍지인 평양에라도 도읍을 정하여 남북으로 웅시(雄視)하지 못하고, 맨 남단(南端) 송악에 도읍을 정하셨수?"

이것은 지금부터 오십년 전 이 임금의 스승되는 도선이 이 임금에게 내린 격려사(激勵辭)였다. 고려가 송악에 정도(定都)를 하기 때문에 늘 일말(一抹)의 불안을 느끼는 백제왕은 오십년 전의 스승의 말을 인용하여 고려왕의 마음을 등떠본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깊은 속사정을 모르는 고려왕은 아주 가볍게 이 말을 다루었다.

"송악은 과인의 고향이오라 구정(舊情)을 버리기 어려워 임시로 송악에 정도했읍지만, 장차 기초 든든해지는 날은 이도(移都)를 할까 합니다."

어서 그렇게 되과저 백제왕은 축수하였다.

황혼이 거의 되어서 백제왕은 조물성을 나섰다. 고령왕은 백제왕의 귀어(歸御)에 친위병 백명을 시켜 호위케 하였다.

이날의 잔치에 있어서 백제왕이 본 바, 고려왕은 요컨대 지혜많고 재간 많은 사람으로서, 만약 장래에도 전장에서 그와 대할 기회가 있으면 무엇보다도 잔재간을 피울 기회를 엄밀히 방지하며, 일변 정면으로 중압을 가하면 손쓰지 못하고 물러갈 사람이라 보았다. 백제가 신라를 칠 때마다 고려에서 곁들이를 드는 것은 백제가 미워서 그러는 것도 아니요, 신라에 특별한 호의를 가진 바도 아니요, 단지 신라에 은혜를 팔아서 장차 필요한 시기에 '은혜의 값'을 톡톡히 받아내려는 복선(伏線)으로 보았다.

그 이듬해 (후당 천성 원년) 고구려의 후신인 발해는 드디어 그란(契丹)에게 면함을 받았다. 전국(傳國) 이백이십팔년―조국 고구려를 잃은 뒤에 발해국을 세워서 몸을 의탁하고 있던 고구려 유민들은, 두 번째 나라를 잃고 그래도 핏줄 끌리는 국가를 찾아가느라고, 혹은 삼사백명씩, 혹은 일이천명씩, 간혹은 몇 가족씩이 집단이 되어 꼬리를 이어 압록강을 건너 신흥 고려국에 몸을 의탁하였다. 압록강 이남의 고구려 옛터는 그 사이 이백여년간을 주인없는 땅으로 지내왔었고, 왕건의 고려국이 창업된 뒤에도, 고려국은 남쪽으로 백제와 신라와만 겨누느라고 여전히 무주공성(無主空城)으로 남아 있던 거칠은 땅에는 차차 (옛날의 고구려 유민이요, 그 뒤 발해국 유민이던) 백성들이 들어차서, 인연(人烟)이 끊였던 땅에는 다시 밭갈고 베짜고, 장사하는 사람들의 흥성스러운 소리에 고구려의 시대를 재현한 듯하였다. 그러고 이 종줏권(宗主權)이 명확하지 않던 광대한 지역은 발해 유민들이 고구려에 투신코자 들어와서 거주하는 까닭으로 저절로 고려국의 영역(領域)이 되어버렸다.

발해국이 망한 덕에 저절로 국토와 백성이 고려는 마치 아침해와 같이 찬연히 이 반도 위에 빛났다.

그 여름, 불행히도 작년에 고려에 볼모로 와 있던 백제왕의 생질 진호(眞虎)가 죽었다.

백제에서는 이것은 필시 고려에서 죽인 것이리라 하여, 백제에 볼모로 가 있던 (고려왕의 당제되는) 왕신(王信)을 죽였다. 그리고 고려를 무신(無信)하다 하여 곧 동병(動兵)하여 웅진(熊津) 방면으로 진출시켰다.

그러나, 그 사이 몇 번 겪어본 바 백제 군병의 정예함을 잘 아는 고려에서는 응전하지 않고 성문을 굳게 닫고 오로지 지키기에만 힘썼다.

함한 반 오백년(含恨半五百年)

편집

"아유, 아이구우!"

이불 밖으로 손이 나왔다. 그 손은 답답한 듯이 입까지 가리웠던 이불을 가슴 위에까지 젖혔다. 그런 뒤에는 손을 더듬어서 자리 곁에 놓인 명주수건을 끌어다가 얼굴의 땀을 씻었다.

"답답하시오니까?"

"음, 밀수를."

궁녀가 갖다바치는 밀수를 임금(백제)은 두어모금 달갑게 마셨다.

"내가 누운 지 엿새째지?"

"네…."

임금은 눈을 감았다. 무릎에서 넓적다리로 걸치어, 후루루, 후루루, 한순간씩 교체되어 쏘았다 멎었다 한다. 놀랍게 야윈 것을 스스로 알 수가 있었다.

엿새 전이었다. 제 십대 비룡(飛龍―말이름)을 타고 대궐 후원을 새벽 산책을 하고 있었다. 후원 연못가였다.

그때―임금은 자기가 어떻게 낙마(落馬)하였는지 모른다. 낙마하여 연못에 굴러빠졌다.

낙마할 때 오른편 무릎뼈를 삐었다. 이월 그믐 찬 못물에 빠져 고뿔이 들었다.

그 이래 엿새 동안 임금은 혼수상태에서 잠깐 깨었다가는 다시 혼수상태로 빠지고 또다시 빠지고 이렇게 지냈다.

달리는 말에서 떨어진 것도 아니었다. 말이 무엇에 놀라서 올라뛴 것도 아니었다. 오륙세부터 근 육십년간을 말잔등에서 자란 이 임금은, 설사 닫는 말이 아니라 한번 거꾸로 뛰는 말에서라도 떨어질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아주 온화히 걷는 말에서 떨어진 것이었다.

설사 떨어진다 하더라도 내 몸을 다치게 떨어지도록 서툴지도 않았다. 그런데 무릎 뼈를 이렇듯 다친 것이었다.

설사 떨어져서 무릎을 다치고 못에 빠졌기로서니, 빠진 다음 순간 곧 헤어나왔으니, 이 무쇠와 같이 완강한 체격의 주인이 이렇듯 호된 고뿔에 걸린다는 것도 예사롭지 못한 일이었다.

이것이 모두 나이의 탓이라 보았다. 금년(경애왕 三년 고려 건국 十년)에 예순 하나―환갑이었다.

"내가 늙었느냐?"

마음만은 아직 삽십청년이었다. 몸도 변한 듯싶지 않았다. 그러나 아직 그 원기 그대로 있으나, 그래도 환갑늙은이로서의 부주의·방심이 있었기에 이런 실수를 한 것이었다. 누운 지 엿새, 다리를 다쳤는지라 일어나지 못하고, 호된 고뿔에 들렸는지라 열기(熱氣)로 정신을 잃고 하는 중에도, 이 임금에게 가장 괴로운 것은 몸의 아픔보다도 마음의 아픔이었다. 늙어오는 것을 분명히 알면서부터 그의 마음은 차차 초조하였다.

아득한 옛날 아홉 살의 소년의 몸으로서 아버지께 두가지의 커다란 맹세를 하고 집을 떠났다.

하나는 쓰러진 백제국의 재건이었다. 또 하나는 조상 의자왕과 백제 삼천후궁의 원한을 '눈은 눈으로 귀는 귀로' 갚으려는 복수의 염이었다.

그 중에 하나는 이미 성공하여 후백제 창업도 벌써 삼십륙년이다.

그러나 피묻은 비수를 다시 새로운 피로 물들이려는 복수는 아직 그 단서도 트지 못하였다.

늙어가는 몸, 아직 하지 못한 사업, 이번 낙마에서 통절히 자기의 늙음을 자각한 임금은 이 심통 때문에 병도 좀체 차도가 보이지 않았다.

이번에 굳게 결심하였다. 이번 병이 완쾌되기만 하면 무엇보다도 그 계획 성취를 위하여 전력을 다하려고….

움직일 수 없는 하반신(下半身) 때문에 자리에서 일지도 못하고 누운 채 임금은 때때로 품칼을 꺼내어 뽑아봤다. 약간한 광선이라도 받기만 하면 찬연히 도로 빛을 반사하는 명도(名刀)! 그 광휘의 이면에는 속일 수 없는 가문의 원한의 픽 발려 있는 것이었다.

이월 그믐에서 삼월 그믐, 사월 그믐…, 이렇게 임금은 만 두 달을 다리를 자율히 쓰지 못하였다. 젊은 시절 같으면 그만 낙만쯤은(애당초 낙마부터 않겠지만) 불과 며칠이면 전쾌가 될 것이었다. 그런 것이 두 달이나 걸리고도 지금도 걸음걸이에 새큰거리는 감각을 느끼면서 임금은 근심을 넘어서서 도리어 공포감까지 받았다. 늙음이란 것이 무서운 것임을 더욱 절실히 느꼈다.

이번 일어나서는 지금은 이제는 더 꿈질거리고 있지 못할 것임을 알았다. 나이 벌써 환갑, 여생이 얼마 없으니 그냥 꿈질거리다가는 기회를 영 놓칠 근심도 없지 않았다.

제 일세 비룡(飛龍)을 조상으로 사고, 좋은 암말에 짝하여 낳고 개량하고 한 명마가 오십여년간에 지금 전국 각 영에 나뉘어 기르는 것이 사오천 마리가 된다. 그 가운데서 금년 다섯 살된 것으로, 가슴 퍼지고 엉덩이 드높고 다리 날쌘 것 오백여 마리를 추려서 서울로 가져오게 하였다.

전국 각 영문에 영을 내려서, 기·사·창·검(騎·射·槍·劒)에 아울러 능(能)한 자 오백 명을 경영(京營)으로 뽑아올렸다.

금산사(金山寺) 경내에 훈련청(訓練廳)을 두고, 무사 오백 명과 말 오백 마리가 식숙(食宿)할 사옥을 급히 지었다.

그해 오월 중순부터 맹훈련을 시작하였다. 이름은 직예대(直隸隊)라 하였다. 임금이 몸소 훈련을 시켰다.

본시부터 무술에 능한 자들에다가 명마까지 제공되고보니, 그것은 무예 연습이라기보다 곡예(曲藝) 연습인 듯한 감이 없지 않았다. 무연(無緣)한 넓은 연무장에 한일짜(一)로 금그은 드이 줄지어선 기마무사(騎馬武士)!

그것은 사람의 기술과 말의 기술이 합쳐진 신기(神技)였다. 오백의 인마(人馬)가 한일짜로 횡대(橫隊)를 지어 달릴지라도 한자의 나듦이 없이 그냥 한일짜대로 횡렬로 나아간다. 한번 임금의 호령이 내리면 오백 머리의 말 위에 있던 오백 무사 말등에서 사라진 듯이 없어지고 어느덧 말배에 내려가 붙어 있는 것이었다.

비호(飛虎)같이 닫는 이 말의 등에서 저 말의 등으로 마치 평지인 듯이 걸어다니는 그들―.

닫는 말에서 창을 한번 두르며 땅위에 기던 조그만 벌레라도 꿰어올리는 그들―.

닫는 말에서 하늘 나는 새라도 맞혀 떨구는 그들―.

명마에 명지휘자에 명기수! 이 세 가지의 겸비(兼備)는 이 단 오백명을 가지고라도 오만의 적군과도 넉넉히 대항할 만하였다.

금산사 경내(境內) 연무장에서는 임금의 지휘 아래서 직예대(直隸隊)가 맹연습을 하는 동안, 서울 동교에서는 이만명의 군졸들이 원노(元奴) 장군의 지휘 아래서 습진·습사·습창(習陣·習射·習槍)을 닦기에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악에 받힌 듯한 연습이었다.

오월에서 유월·칠월·팔월―찌는 듯한 더위로 모르는 듯이, 삼만의 보병과 오백의 직예 기병대는 새벽 동틀녘부터 연습을 시작하여 저녁 해가 기울어서야 영(營)으로 돌아오곤 하여다.

이해 팔월 그믐날은 이 임금의 환갑날이었다.

후백제 시조의 환갑―후백제의 백성된 자 그 누가 이날을 축하하지 않을 자 있으랴! 신라의 중압(重壓) 아래서 신음하던 백성들을 구원해 낸 민족적 영웅 견훤대왕의 일생의 한 번인 환갑잔치 날이었다.

임금은 당연히 전 국민에게 이날을 축하해달라도 요구할 권리가 있었고, 백성된 자는 또한 당연한 의무로서 이날을 축하하여야 할 것이다.

이 경사스러운 날을 기약하여 동부와 북부로 향하여 대진군을 시작할 계획이었다. 지금 맹연습을 하는 이만의 보병대에서 정예한 분자(精銳分子) 일만명만 추려서 지리산을 휘돌아 동북으로 고려의 영토를 진공(進攻)하고, 고려로 하여금 이곳에 주의를 가해 다른 곳의 방비에 손을 펼 여유를 주지 않고, 임금은 직예 기병대를 친솔하고 원대에서 갈라져서 일로 계림을 직충해서, 신라건 고려건 손쓸 틈이 없이 신라 서울을 함락시켜 이백 육십년 전에 낙화암에서 백제 왕실이 받은 수치를 도로 고대로 신라 왕실에 품갚음하려는 것이었다.

신라에서 고려에 청병을 하고, 고려는 원병을 보내고, 그럴 여가가 없게 하기 위해서는 쾌속력(快速力)을 가진 군대로 한숨에 계림을 무찔러야 할 것이다. 그럴 필요상 지금 맹연습을 하고 있는 직예 기병대는 없지 못할 존재이다.

여름 석양에 오백 자루의 창검이 연무장에서 번쩍이는 광경은, 장쾌를 넘어서서 장엄하였다. 나의 손발같이 뜻대로 움직이는 직예대를 지휘하면서, 임금은 때때로 입가에 떠오르는 미소를 금하지 못하였다.

눈은 눈으로

견훤왕의 친솔한 오백마병(馬兵)은 중도에서 한 번도 저항을 받아 보지 않고 일로 계림성으로 향하였다. 군졸 일만명은 원노장군 인솔 아래 근품성(近品城)에서 고려군의 방해를 막고 있기로 되었다.

가는 중도에서 견훤왕은 신라 정부에서 고려에 구원병을 청하였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러나 그런 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지금 청한 고려 군사가 올 때쯤은 백제측에서는 할일을 다 끝내고 제 이단의 길로 나아갈 때일 것이다.

무고한 백성을 해하지 말 것.

부녀자를 농락하지 말 것.

재물을 약탈하지 말 것.

군규를 엄히 지킬 것.

신라 서울이 눈앞에 보일 때 견훤임금은 이와 같이 군대에 엄히 분부한 뒤에 한 군사의 저항도 받지 않고 서울로 들어갔다.

대궐까지 점령하였다. 그러나 불행히 신라 임금은 대궐에 있지 않았다. 이 국난의 때임에도 불구하고 신라 임금은 비빈들을 거느리고 포석정(鮑石亭)에 나아가서 놀이를 하고 있던 것이었다.

인솔하고 온 오백명 직예 중에서 삼백명은 서울을 비하기 위해서 거리마다 배치하고, 이백명만 끌고 대궐까지 달려들었다가 신라왕을 만나지 못한 견훤왕은, 말에서 내리지도 않은 채로 네째 왕자 금강을 불렀다.

"서울은 네가 맡아라. 상세한 일은 내가 알아 할 터이니 더 말하지 않는다."

"아버님은?"

"포석정으로 한시가 바쁘다."

과연 한시가 바쁘다. 신라 임금은 대궐에 있을 것으로 알고 다른 준비는 없이 달려왔는데, 지금 포석정에 나갔다 하니 한시바삐 포석정으로 달려가서 이번은 놓치지 않아야 할 것이다. 이번 포석정에서 놓쳐버려서 그 행방을 찾느라고 방황할 동안 고려의 구원병이 이르면 또 일은 틀려나간다. 차차 늙어오면서 마음도 차차 조급하여오는 견훤왕은, 자기의 생전에 자기의 손으로 감행하여야 할 대복수를 이번 기회를 놓치면 영 다시 기회가 올 듯싶지 않아서 이 기회는 결코 놓치고 싶지 않았다.

"알았읍니다."

"음, 그럼―"

견훤왕은 아직도 씨근거리는 병마 비룡의 머리를 돌려서 대궐 안에 정렬하여 있는 수병 이백명에게로 갔다. 그리고 거기서 백명을 떼어가지고, 뒷일은 금강왕자에게 부탁한 뒤에 포석정으로 향하였다.

그러나 견훤왕이 수하 백명을 데리고 포석정으로 달려온 때에 신라왕은 포석정에도 있지 않았다. 백제 군사가 이리로 달려온다는 비보에 신라왕의 잔치는 난장판이 되고, 임금은 망지소조(芒知所措)하여 비빈들을 거느리고 성남 이궁(城南離宮)으로 몸을 숨긴 때였다.

견훤왕은 포석정에서 다시 이궁으로 신라왕을 추격하였다.

울고 부르짖는 비빈 궁녀들! 그 가운데를 동남서북으로 돌아가는 백제 마병들! 이궁으로 피하였던 신라왕 이하 비빈이며 신라 시종들은 한 사람도 빼놓지 않고 백제군에게 포로가 되었다.

낙화암 삼백년(洛花巖三百年)

편집

"이백 칠십년이로소이다. 오늘 신라 임금을 영전에 대령하였읍니다. 얼마나 기다리셨읍니까?"

이궁 대청에 제단을 묻고, 이번의 필승을 예기하고 본국에서부터 모시고 나온 의자왕(義慈王)과 융태자(隆太子)의 위패(位牌)를 모시어 그 앞에 허리를 굽히고 절하는 사람은 견훤왕이었다.

아직까지 사람 앞에 숙여본 일이 없는 반백의 머리를 숙이고 견훤왕은 잠시를 영전에 오늘의 경사를 봉고(奉告)하였다.

이윽고 제사가 끝난 뒤에 견훤왕은 피어오르는 향로 뒤에 안치하였던 품칼(護身刀)을 도로 들고 의자에 돌아와 앉았다. 앉으면서 슬그머니 품칼을 뽑아보았다. 중추(仲秋) 명랑한 일기 아래서 찬연히 빛나는 그 품칼! 삼백년전에 견훤왕 당신의 조상―백제 최후의 태자 융(隆)의 원한에 사무친 선혈을 바라본 이래, 지금까지 고이고이 비장되어 오던 이 유서깊은 명도는, 지금 삼백년을 지나서 다시 한개의 피를 보려 한다. 과거에 이 칼을 권한 사람의 삼백년 뒤 후계자에게, 과거 이 칼로 목숨을 끊은 사람의 삼백년 후 후손에, 옛날과 정반대의 입자으로 이 칼을 권하려 하는 것이다. 피를 피로―삼백년간 쌓이고 쌓인 원한을 바야흐로 갚으려는 것이다.

명랑한 일기 아래 찬연히 빛나는 명도를 잠시 굽어볼 동안, 이 임금의 얼굴에는 과거 육십년간을 나타내본 일이 없는 감격에 사무친 표정이 나타나 있었다.

만감(萬感)이 뒤섞이어 가슴에 일었다. 아득한 옛날, 아홉 살의 소년 때에 두 가지의 커다란 맹세를 아버님께 여쭙고 집을 떠난 이 임금이었다.

일, 백제국을 재건할 것.

일, 피를 피로―의자왕과 융태자의 피의 희생을 피로 갚고, 낙화암의 욕을 꼭 그와 같은 방식으로 욕으로 갚을 것.

이런 두 가지의 큰 목적 아래, 사람으로서의 온갖 환락과 즐거움과 안일을 피하고 행동한지 오십여년, 그 첫째 목적인 백제 재건은 벌써 수십년 전에 성공하였지만, 아직까지 적당한 기회를 못잡았던 제 이의 목적―복수도 바야흐로 눈앞에 전개되려는 것이다.

단지 신라왕실을 둘러엎고 신라국을 없이하기나 하려면 과거에도 그만 기회는 여러 번 있었다. 그러나 그 기회를 매번 피하여 왔던 것이다. 왜?

피는 피로―삼백년 전에 견훤왕의 조상 융태자가, 신라와 당나라의 임금이며 장졸 앞에 포로의 몸으로 끌려나가서 무수한 곤욕을 본 뒤에, 그들의 강박(强迫)아래 스스로 자기의 목숨을 자기의 칼로 끊은 전대미문(前代未聞)의 치욕과, 백제 삼천궁녀가 신라와 당나라의 굶주린 장졸들에게 사람이 받지 못할 욕을 보고, 사자수(泗?水)에 몸을 던져서 자결한 이 두 가지의 비극을 충분히 저쪽에게 다시 인식시키고 보복하리라는 생각으로, 다른 평범한 기회는 모두 그냥 내버려둔 것이었다.

한참을 감개무량한 얼굴로 칼을 굽어보고 있다가, 견훤왕은 칼을 집에 꽂아서 앞의 호상에 놓고 눈을 들었다.

"야, 이리 오너라."

시종을 불렀다.

시종이 달려와 당 아래 읍하고 섰다.

"장졸에게 후히 주효(酒肴)를 주었느냐?"

"분부대로 하였읍니다."

"만취토록 먹여라. 또 이나라 나랏님은 어디 모셨느냐!"

"결박지어 광에 모셨읍니다."

임금은 손을 들었다. 손으로 자리를 가리켰다.

"여기, 이 대청 위에 돗자리를 하나 펴고, 나랏님과 왕비를 이리 모셔오너라. 음, 술과 큰 잔과 안주도 좀 가져 오너라."

분부대로 자리가 되고 주안이 나온 뒤에, 신라 임금과 왕비가 결박진 채로 끌리어 왔다.

견훤왕은 신라임금 내외분이 앞에 오기까지, 눈을 굳게 감고 양팔을 걷고 머리를 푹 가슴에 묻고 있었다.

"대령하였읍니다."

신라왕 내외를 끌고온 시종이 이렇게 여쭌 뒤에도 잠시를 더 있다가야 임금은 그의 커다란 얼굴을 들었다. 눈을 들어 건너보았다.

겨우 청년기에 든 젊은 신라왕은 공포로서 결박진 몸을 우들우들 떨고 있었다. 신라왕고 나란히해 선 왕비도 다만 떨기만 하고 머리를 숙이고 서 있었다.

견훤왕은 처음 신라왕을 보고, 그 뒤에, 한참을 왕비의 숙으리고 있는 흰 이마와 흰 콧마루를 바라보았다.

"결박을 끄르고 너는 물러가거라."

시종에게의 명령이었다.

결박도 끄르고 시종도 물러간 뒤에 견훤왕은 비로소 몸을 좀 움직였다. 허리를 앞으로 펴며 손을 앞으로 내어밀었다. 다음 순간 양손을 앞으로 읍하고 서 있던 왕비는 그 두 손을 한꺼번에 견훤왕에게 잡히고 앞으로 끌려왔다.

견훤왕은 와비를 움켜당겨서 덜컥하니 왕비를 자기의 무릎에 앉혔다. 그리고는 몸을 틀어서 와들와들 떠는 왕비의 얼굴을 덜여다보았다.

"신라 나랏님, 유약(柔弱)한 당신께는 넘치는 미녀외다. 자."

바싹 끌어당겼다. 털 많은 얼굴을 보드라운 뺨에 한참 비비었다. 눈을 치뜨고 신라왕을 보매, 공포와 분노로써 얼굴이 백지장같이 희게 되어 와들와들 떨고 있는 것이었다.

견훤왕은 호상의 술잔을 집었다.

"자, 한잔 따르시오."

그러나, 왕비는 몸만 사시나무같이 떨고 있을 뿐이었다.

잠시 잔을 들고 기다리다가 견훤왕은 약간 얼굴빛을 고쳤다.

"자, 따르시오. 옛날 진성여왕도 나를 위해 술을 따랐소이다."

음성을 높인 바는 아니었으나 이 임금의 명령구조에는 사람이 감히 거역지 못할 힘이 있었다. 왕비는 마지못해 주전자를 들어 술을 따랐다.

견훤왕은 잔을 들어 단숨에 들이켰다. 그런 뒤에 이번은 잔을 신라왕에게 내밀었다.

"당신 지아비님께도 한잔 드리시우."

신라왕 한순간 주저하고 잔을 받아 왕비의 따르는 술을 받아마셨다.

잔은 서너번 견훤왕과 신라왕과 왕비 사이에 왔다갔다 하였다. 당신네들의 목전에 어떤 운명이 임박해 있는지 알지 못하는 신라왕과 왕비는, 공포 가운데 서로 이 정복자의 비위를 거슬리지 않아서 장래의 안전을 도모하려고 그의 명령에 고요히 복종한 것이었다.

몇 잔의 술이 왔다갔다 한 뒤에 견훤왕은 잔을 놓았다. 그리고 당신의 무릎 위에 있는 신라왕비를 가벼이 들어서 곁 걸상에 옮겨 놓았다.

"자아."

몸까지 일으켰다.

"여기서 절을 하시오."

가리키는 곳은 의자왕과 융태자의 위패를 모신 제단이었다. 신라왕이 그 까닭을 몰라서 주저할 때에 견훤왕은 사유를 설명하였다.

"신라 태종 무열왕께 비참한 최후를 보신 백제 최후의 임금 의자왕과 융태자의 위패외다. 신라왕통의 후계자로 마땅히 사죄를 합시오."

이 한 마디로써 신라왕은 당신의 몸 위에 이를 운명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잠시 멎었던 듯싶던 전율이 다시 시작되었다. 무릎조차 바로 세우기 힘들도록 와들와들 떨었다. 그러다가 드디어 덥석 주저앉아버렸다. 돌아보매 왕비도 창백하게 되어 떨고 있었다.

견훤왕은 하릴없이 허리를 굽히고 팔을 펴서 신라왕의 어깨를 움켜잡아 일으켰다. 그리고 오른손으로 왕비와 팔목을 잡았다.

"갑시다. 사죄를 합시오."

끌고 위패 앞에 이르렀다.

떨리는 몸으로 신라왕 내외분이 간신히 백제 위패에 네번을 절하고 돌아설 때는 견훤왕은 오른손에 벌써 원한(怨恨) 큰 품칼을 뽑아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자결을 합시오."

간신히 몸을 돌이키던 신라왕 내외분은 다시 덜컥 주저앉았다.

"대왕님, 살려 줍시오."

모기소리와 같은 떨리는 작은 소리가 나왔다.

그러나 그만 애걸에 마음을 돌이킬 견훤왕이 아니었다.

"자결합시오. 거룩한 이 칼이 욕되지 않도록 깨끗이 자결합시오."

"살려줍시오."

"에익, 더러운!"

견훤왕은 발을 울렸다. 쾅 하는 소리 아래서 견훤왕의 노호성이 들렸다.

"체면을 보아 군졸들의 창끝에 최후를 보지 않도록 대접해 주었거늘 살려 달라?"

견훤왕은 칼을 높이 들었다. 그 칼을 내려치매 칼은 퍽 소리를 내며 신라왕의 무릎 앞에 박혔다.

"어서 깨끗이 자결을 합시오."

넓은 뜰에 새짐승 하나 얼른하지 않는데 대청 위에서는 신라왕 내외분과 견훤왕의 사이에 긴장된 비극은 전개되어갔다.

절체절명의 경우에서 신라왕도 이제는 단념을 한 모양이었다. 떨리는 손으로 칼을 뽑아들었다. 설명하기 어려운 괴로운 표정으로 한순간 왕비를 돌아보았다. 그런 뒤에는 칼을 가슴에 대고 앞으로 거꾸러졌다.

견훤왕은 신라왕이 아주 움직이지 않게 되기까지 고요히 굽어보고 있다가, 그 뒤에 눈을 굴려서 왕비쪽을 보았다. 보면서 왕비를 어떻게 처치할까고 잠시 주저하였다.

그 주저하는 기색에 왕비는 일루의 희망을 붙인 모양이었다. 벌써 시체가 된 지아비님께 외면을 하고 눈을 굳게 감고 있던 왕비가 그 눈을 떴다 애원하는 표정으로 견훤왕을 쳐다보았다.

견훤왕은 외면하였다. 몸을 떨었다.

"살아서 욕을 보이느니 지아비님의 뒤를 좇읍시오."

왕비가 다시 몸을 꼬으며 애원하였다.

"대왕님! 소녀는 강박에 못이겨 신라왕실에 출가했읍니다. 소녀는…."

여자라는 무기를 이용항 모진 생명을 도모하려는 이 태도에 견훤왕은 종내 분통이 터졌다.

"그럼 군졸들에게 내어 맡길까?"

"대왕님!"

"그렇찮으면 어서 지아비님의 뒤를 좇읍시오."

드디어 제이의 희생도 실행되었다.

피묻은 칼을 제단 위에 모시고 그 앞에 읍하고 설 때는 견훤왕은 오래 벼르던 일이 성취되었으매 당연히 기쁘고 통쾌할 것이지만, 그 반대로 도리어 무겁고 고로운 감정이 그의 가슴을 덮었다.

두 희생자의 가슴에서 흐르는 피를 밟고 서서 잠시 묵도를 한 뒤에 임금은 의자에 돌아와 앉았다. 그리고 스스로 어지럽고 무거운 감정을 식히기 위하여 몇 잔의 술을 거듭 마셨다.

"야아, 이리오너라."

달려오는 시종.

"술을 가져오너라. 그리고 궁첩(宮妾)은 몇 명이나 붙들었느냐?"

"열일곱 명이올씨다."

"이리로 끌어내라."

다시 술이 준비되고, 신라왕실의 빈첩이며 궁녀들이 뜰아래 결박진 채 등대되었다. 그 가운데서 한 궁녀의 결박을 끌러서 불러올려 술을 따르게 하였다.

또 부어라, 또 부어라, 하여 열 잔 스무 잔―임금은 안주도 들지 않고 연해 술만 수십배를 들이켰다.

이윽고 취기가 약간 돌게 된 때에 임금은 취안을 비로소 들었다. 가슴에 맺혔던 덩어리를 한꺼번에 토하는 듯이 커다랗게 숨을 내쉬었다.

계상에 자기네들의 임금과 왕비의 시체를 보고, 장차 자기네들 위에 어떤 운염이 내릴지 공포로 기다리고 있는 궁녀들을 잠시 굽어보았다. 굽어볼 동안에 이 임금의 얼굴에는 쓰디쓴 미소가 나타났다. 돌아보아 시종을 불렀다.

"야, 군졸들은 만취(滿醉)를 했느냐?"

"잘 먹었으니까 취하였을 줄 아옵니다."

"이 뜰로 불러들여라. 군졸 백명에게 계집 열일곱―짝맞지 않으나 마음껏 즐기란다고. 어떤 일이라도 무관하니 이 내 눈앞에서 행하라고. 알겠느냐?"

"네이, 알겠습니다."

시종은 이 기괴한 분부에 미소하며 물러갔다. 임금은 지금까지 술을 붓고 있던 궁녀까지 끌어내리게 하였다.

이 뜰은 드디어 수라장이 되었다. 부르짖는 소리, 구원을 청하는 비명―그 가운데 굶주린 이리가 고기에 달려드는 듯한 신음성, 노호성(怒號聲),―사람의 세상에서의 가장 비참하고 더러운 활극은 이 뜰에서 전개되었다.

임금은 어지러운 소리와 광경을 안주삼아 혼자서 연하여 술을 들이켰다. 삼백년 전 부여의 백제궁전에서 전개되었던 활극 앞에 비로소 차차차차 통쾌감을 느끼기 시작하였다.

"아아하하하하."

드디어 터져나왔다. 음침한 얼굴 아래서 터져 나온 이 홍소성(哄笑聲)

"으아하하하하하. 으하하하."

그것은 마치 심산의 포효성(咆哮聲)과도 같은 우렁차고 음침한 홍소성이, 뜰안의 온갖 어지럽고 비참한 부르짖음을 누르며 그 위로 퍼져나갔다. 오늘날을 얻기 위하여 그 사이 수십년간을 감춰두었던 웃음주머니를 탁 열어헤친 듯이 그칠 줄을 모르고 뒤이어 뒤이어 폭발되었다.

"으아하하하. 으아하하하하."

이 홍소성 아래서 열일곱 명의 여인을 둘러싼 백 명의 군졸은 선후를 다투면서 자기네들의 취기(醉氣)를 마음껏 풀었다.

그날밤은 임금은 백명의 군졸과 함께 이궁에서 보냈다. 그리고 이튿날 성안으로 다시 들어왔다.

노번 좌우에서 부르짖는 백제 군졸들의 환호성을 들으면서 신라대궐에까지 이르러보니 신라 대궐은 마치 백제 대궐인 듯 백제의 기치가 번쩍이고 빈 용상(龍床)은 백제왕이 이르기를 기다리고 있고, 좌우에는 백제 장수들이 지키고 있는 것이었다. 백제 장수들의 뒤에 절반 얼혼이 나가서 서있던 신라 대신들은 마치 제나라의 임금을 맞듯 견훤왕을 절하여 맞았다.

이 성내 보안의 책임을 맡았던 금강왕자가 장수들 가운데서 나아와서 부왕께 절을 하였다.

"당부했던 일을 바로 되는 모양이냐?"

이 질문에 대하여 왕자는 복주(伏奏)하였다.

"네이. 신라 재상들과 어제저녁 의논한 결과, 금씨(金氏)종중에서 문성왕(文聖王)의 후손되는 이속 금부(金傅)가 가장 덕이 있고 인망이 높아서 왕자(王者)로서 일천년 신라 종사를 받들기에 가합하다아옵기로 그 분을 모셔오기로 했읍니다."

박씨 임금을 폐하고 금씨 임금을 다시 모셔오기로 한 것이다.

"그밖에 별다른 일응 없었느냐."

"별다는 일은 없읍니다마는, 약간 귀찮은 잉링 생길듯하옵니다."

"무에냐?"

"국군이 근품성(近品城)을 공략할 때에 고려장군 공훤(公萱)이 일만장병을 인솔하고 근품성을 구원할 차로 떠난 것은 이미 아시는 바읍지만, 이 나라 선황이 고려왕께 구원병을 칭한 그 군사가 불일 올 듯싶습니다."

임금은 잠시 머리를 숙이고 생각하였다.

"괜찮겠지. 근품성 싸움에 우리 군병의 사기(士氣)가 몹시 세었으니까 고려군 몇 만명이 온단들 염려 없으리라."

"염려 없을 줄은 아옵니다. 그렇지만 사기 왕성한 이 기회를 타서 고려군을 반경하면 저를 전멸시킬 수 있을는지도 모르겠읍니다."

"잘 생각해보자."

그 수완과 역량을 믿는 왕자이매 여러 가지 캐어물을 필요도 없이 일이 뜻대로 진섭되었을 것으로 보았다.

견훤왕은 새로 신라 왕위에 오르게된 신라 신왕을 위하여 당신은 백제 장졸들을 인솔하오 다른 곳을 행궁으로 정하고 그리고 나왔다.

수일간을 더 신라 서울에 묵었다. 백제의 손으로 신라왕위에 오르게 된 신왕 금부의 즉위식도 거침없이 끝이 났다. 견훤왕은 적(敵)의 입장으로서가 아니요 우호국의 왕의 입장으로서 그 즉위식에도 참례하였다. 견훤왕은 신라 서울에 있을 동안의 모든 절차를 금강왕자에게 일임하고 당신은 고요히 그것을 관찰하였다. 아직 혈기의 청년인 금강왕자이었지만 모든 일을 지휘하고 진섭시킴에 일호의 착오며 실수도 없이 정확하고 정밀하게 처리하여 나가는 것이었다.

이 능수있는 처리를 임금은 만족한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금강왕자(金剛王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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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신왕의 즉위식도 성대히 마친 며칠 뒤, 어떤 상쾌한 아침이었다.

견훤왕이 소시를 끝낼 때쯤하여 금강왕자가 문안을 들어왔다.

부왕께 문안을 드린 뒤에 왕자는 좀 머뭇머뭇하다가,

"고려왕이 오천정기를 인솔하고 공훤(公萱)의 일만군사와 합세를 해가지고 공산(公山)으로 온답니다."

고 하였다.

미리 예기하였던 일이라 견훤왕은 그다지 놀라지도 않았다.

"어디서 들은 소문이냐?"

"소문이 아니오라 어제저녁 원노장군에게서 첩자가 왔읍니다."

"그래서?"

"네이. 그래서 아버님께는 오늘 원노장군의 본진으로 행행합시사고 여쭈려고 그럽니다."

"너는?"

"소자는 오백직예를 이끌고 고려군을 전멸시키려고 어젯밤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보았읍니다."

"그래서?"

"방책은 섰읍니다."

"음!"

부왕은 캐어묻지 않았다. 어려서는 한개 무인(武人)으로―자라서는 한개 장재(將才)로 희대(稀代)의 천품을 발휘하는 이 왕자의 하는 일이라, 의심없이 그를 신뢰한 것이었다. 더우기 요즈음은 차차 장재(將才)도 지나서 더 위대한 역량이 간간 엿보이는지라 이 왕자에게 유난히 촉망을 붙이고 있는 즈음이니 더 간섭할 필요가 없었다.

"오백만으로 넉넉할 듯싶으냐?"

"아마 되겠읍지요."

왕자는 젊음과 용기로 빛나는 얼굴에 적이 미소를 띠고 부왕을 우러러 보았다.

"다만 원장군께 부탁해서 그물코를 단단히 죄어 소자가 몰아오는 고기 새끼들을 새지 않도록만 해주십시오."

"그러마."

그날 낮 견훤왕은 신라 임금 이하 문무백관이며 사민들의 전송을 받으면서 신라 서울을 떠났다.

돌아보건대 며칠 동안을 신라 서울에서 겪고 행한 일등은 이 임금에게 있어서는 영원히 기념되는 일이었다. 이 화려한 무대―육십년 생애에 골똘하게도 벼르던 커다란 사업을 틀림없이 마감하고 성공자의 지위로써 이 도시를 떠남에, 그의 무표정한 눈에도 엷은 눈물 그림자까지 보였다.

언제 다시 이 도시를 찾을 기회가 있을까, 옛날 한때는 신라에 모집된 한 군졸로 이 도시에 처음 발을 들여놓았고 그 다음은 진성여왕의 부름으로 호국군의 통솔자로 두번째 찾았고, 이번의 세 번째는 상대국의 임금으로 삼백년 전의 복수자로 보도(寶刀)를 높이 들고 이 도시를 찾았던 것이다. 이 도시에서 행할 일은 이제는 남음이 없으니 다시 여기를 찾을 기회는 좀체 없을 것이었다.

금강왕자는 아침결에 벌써 떠내보내고, 시종과 수병 몇 사람만 데리고 신라의 온갖 계급의 전송을 받으며 떠난 견훤왕은 교외(郊外)에 나가서도 수레에서 몇 번을 돌아보고 하였다.

수레를 몰아서 공산(公山―大丘) 원노장군의 진영까지 이른 때는 그 이튿날 아침이었다.

원장군은 임금을 맞아서 군대에 대한 보고와 명령을 물었다.

지금 고려의 일만 오천이란 대군이 맞은 편에 와서 연방 싸움을 돋우고 있지만,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하라는 왕명을 받지 못하여 주저하던 중이었다.

마주 나아가서 이를 격멸하여야 할지, 그냥 현세를 보지하여 단지 고려군의 진격만 막고 있어야 할지, 임금의 재단을 받지 못하여 소극적으로 응전만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곳까지도 벌써 신라 서울의 대 승리의 첩보가 이르러서 군심은 앙등되어 여기서도 오백직예대에 지지 않는 공을 세워야 하겠다고 펄펄 날뛰는 장졸들을 원장군은 간신히 억압하고 임금의 차분이 어서 내리기를 기다리고 있던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 이 앙등된 군심으로 보자면, 고려 일만 오천의 군사쯤은 삽시간에 전멸시킬 수 있으리라는 의견까지 첨부하였다.

견훤왕은 잠잠히 들은 뒤에,

일, 지금 집단진(集團陳)을 치고 있는 것을 고치어서 장사진(長蛇陳)으로 만들고, 고려군사가 한사람일지라도 우리 진을 지나서까지 남진서진(南進西進)을 못하도록 막고 있을 것.

일, 장차 무슨 이변이 생겨서 고려군의 진영이 혼란된 때는 장사진의 머리와 고리를 급속히 북진(北進)시켜서 고려 전군을 포위하고 이를 전멸시키도록 빈틈없이 준비해 둘 것.

이 두 가지의 대책을 분부한 뒤에 잠시 몸을 쉬려 준비된 침소에 들었다.

이곳 백제의 장졸은 한 사람도 금강왕자가 인솔한 오백군병을 본 사람이 없다 한다. 생각컨대 왕자는 수하병을 인솔하고 이 두 나라 군사가 대치하고 있는 근처를 멀리 우회(迂廻)하여 고려군의 등뒤로 돌아가는 모양이었다.

왕자의 재략도 짐작하거니와 또는 몸소 지휘하고 훈련한 오백명의 직예대의 실력도 넉넉히 짐작하는 임금이, 이번 싸움에 작은 노력으로 큰 성과를 얻으려는 왕자의 전략을 추측하고 그 전략이 성공될 것을 예상하였다.

일전에는 신라 서울에서 오십년간을 벼르던 일을 성취했고, 또 여기서 눈앞에 고려군 전멸을 예상할 수 있는 견훤왕은 가슴에 벅차게 뻗히는 듯한 환희를 느끼면서 피곤한 몸을 기다랗게 폈다.

한참 실컷 들었던 견훤왕은 적잖게 소란스러운 소리에 놀라서 깨였다. 깨면서 들으니, 밖에서는 인마의 소리가 어지러히 나고 일변 호령하며 일변 지휘하는 소리가 천지를 진동할 듯이 요란스러웠다.

옷을 입은 채 잠들었던 임금은 그냥 밖으로 뒤어나가 보았다.

나가면서 먼저 눈에 띈 것이 건너쪽의 고려진이었다. 일만오천의 대 집단으로 한데 뭉켜있던 고려군이 벌판에 쪽 헤어졌다. 뿐만 아니라 우왕좌왕(右往左往) 장수는 장수대로 군졸은 군졸대로 밟으며 밟히며 무서운 수라장을 이루고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로 한 장수에게 인솔된 수백명의 마병이 벌에 흩어진 고려군의 복판을 가르며 이쪽 백제진을 향하여 전속력으로 달려오는 것이었다.

이 마병에게 가운데를 끊긴 고려 일만 오천의 장졸은 저절로 동군과 서군으로 나뉘어져서 동근은 더욱 동쪽으로, 서군은 더욱 서쪽으로, 마병의 철기를 피하려고 밟으며 밟우며 뭉키어서 돌아간다.

말발로 고려군을 무찌르며 이리로 달려오는 청년장수의 용감스러운 태도를 임금은 한순 탄상(歎賞)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런 뒤에 눈을 돌려서 백제진을 둘러보았다.

아까까지도 온안(穩顔)에 미소를 띄우고 왕께 군략을 의논하던 원노장군은 마상에 높이 앉아서 삼군을 호령하고 있고, 명령을 받은 막료들은 동으로 서로 책무를 다하려 말을 달려 돌아다니고, 백제 장사진의 머리와 꼬리는 어느덧 전진 또 전진하여 기다란 곡선을 그리며, 동서로 나뉜 고려군은 벌써 백제 장사진의 포위망 안에 거진 들어서 북쪽에 약간 아직 큰 구멍이 있을 뿐이었다.

그 때였다. 백제 마병에게서 한번 높은 함성이 들렸다. 견훤왕이 그쪽으로 머리를 돌릴 때는 지금까지 이리로 향해 오던 마병들이 일제히 머리를 서쪽으로 돌렸다. 그리고 그리고 돌진을 시작하였다.

보매 고려진에서 한 수레가 달려나와서 아직 조금 빈틈이 보이는 북쪽으로 향하여 도망가는 것이었다 백제 마병들은 그 수렐ㄹ 향하여 일제히 돌격하였다.

견훤왕은 그 수레가 고려왕의 것이라 직각하였다.

"아아아!"

늙은 마음에도 긴장과 흥분이 가속도로 더하여 왔다. 지금 고려왕은 이 진에서 벗어날 틈이 없다. 고려왕이 지금 향하고 달아나는 그 빈틈은 고려왕이 그곳가지 가기 전에 벌써 포위가 완전히 될 것이다. 뿐더러 기 빈틈이 채 막히기 앟는다 하더라도 재빠른 백제 마병들은 장차 오백보를 나아가지 않아서 완전히 고려왕의 수레에 뒤미칠 것이고, 이 용감스러운 마병들은 뒤미친 고려왕을 결코 놓지거나 잃어버리지 않을 것이다.

일전에 신라를 손아귀에 넣고 그 감격이 아직 삭기도 전에 지금 최대강적인 고려왕이 또한 손안에 들어오려 한다. 한순간의 틈을 내어 원노장군을 돌아보니, 지금까지 장졸을 호령하고 있던 노장군도 어느덧 이 사실을 발견하고 자기의 책임이며 직무까지도 잊어버리고 멍하니 고려왕의 수레와 그 뒤를 쫓는 백제 직예대들을 바라보고 있다.

드디어 뒤미쳤다. 동시에 고려왕의 수레는 백제 마병의 말발에 채어 전복되었다. 왁하니 마병들이 그 수레를 포위하였다. 마병들의 머리 위로 창끝만 햇빛에 반사하여 반짝반짝 무수한 빛을 내었다.

그러나 이때 견훤은 이상한 현상을 발견하였다. 고려왕의 수레가 마병들에게 밟히어 전복되면 제일 먼저 지휘장인 왕자가 그리고 달려가서 고려왕의 머리를 창끝에 들어야 할 것이었다. 그러나 왕자는 수레가 전복되는 순간 달리던 말을 탁 멈추었다. 다른 데를 살폈다. 그러다가 맹렬히 단신 말을 달려서 다른 곳으로 향하였다.

왕자가 말을 달려 향하는 곳은 이 전장의 맨북쪽―백제의 장사진이 아직 채 막지 못하여 약간 빈틈이 있는 그 구멍이었다. 그 구멍으로는 말탄 고려의 패잔군 삼사십명이 새어빠져 포위진 밖으로 벗어나서 도망가는 중이었다.

"아!"

견훤왕도 뜻하지 않고 부르짖었다. 패잔의 고려군? 그렇다 외형은 패잔의 고려군이었다. 그러나 괴기한 점은, 그 수십명의 고려군은 중앙의 한사람을 호위하여가지고 그 사람을 보호하면서 백제의 포위군을 벗어서 도망가는 것이었다.

견훤왕은 실망의 부르짖음을 내었다. 수레를 타고 도망하는 체하다가 백제 마병에게 잡히어 죽은 사람은 가왕(假王)임이 분명하였다. 지금 백제 포위진을 벗어나서 북으로 도망치는 수십명의 가마(騎馬) 고려 패잔병(?)이야말로 고려왕의 일행일 것이다. 가왕으로 백제군의 눈을 속이고 고려왕은 그틈에 변복을 하고 도망하는 것이었다.

지금 그 점을 알아채고, 그리고 쫓아가는 사람은 왕자 단 한 사람뿐이었다. 다른 백제군들은 고려왕까지 잡았다고 환호를 하며 포위진 안의 고려군만 향하여 맹공을 가하는 것이었다.

패잔군으로 가장한 고려왕의 일행과 금강왕자의 사이의 간격은 상당히 컸다. 필연코 뒤미치지 못하고 동수(桐藪) 숲에서 종적을 잃어버릴 것이다.

분하었다. 방략은 완전하였거늘 조그만 부주의 때문에 큰 고기를 놓쳤다.

뿐더러 오늘의 수훈자(殊勳者) 금강왕자가 누구보다도 먼저(부왕보다도) 고려왕의 탈출을 알아채고 추격까지 하였거든 실패하고 돌아오면 섭섭해 할 것을 생각하니 더 애연하였다.

"용을 잡은 것을 축하드리옵니다."

어느틈에 원노장군이 곁에 와서 축하를 드렸다. 그러나 임금은, 망연히 건너쪽―이젠 벌서 고려군 수십명의 일행은 안보이게 되고 왕자만이 까마득히 단신(單身) 그들을 추격하여 가는 양만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왕자까지도 안보이게 된 때에 임금은 기다랗게 한숨지었다.

"왕자가 돌아온 뒤에 회보를 봅시다."

탄식과 함께 왕은 이렇게 말하였다.

그날의 싸움은 공전(空前)의 승리였었다. 단 오백명의 직예대가 그 넓은 벌판에 퍼져 놓으매,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벌판에는 온통 마병 천지인 듯하였다. 그런 가운데 백제 포위진은 점점 좁혀서 고려군을 압박하고, 이 그믈안의 고려군은 동남서북으로 달리는 백제 마병에게 전멸이 되었다. 일만오천의 대군에서 살아 도망친 사람은 근근 수십명뿐이고 그 나머지는 전멸을 하였다. 공산(公山)의 평원은 시산혈해(屍山血海)를 이루고 아규비환(阿鼻叫喚)의 처참한 광경은 눈으로 차마 보기가 어려울 지경이었다.

그런 가운데서 잡아낸 고려 포로의 공술(供述)로써, 아까 수레에서 죽은 사람은 고려왕이 아닌 것이 판명되었다.

신숭겸(申崇謙)이었다. 일찌기 태봉왕 궁예를 섬기다가 지금의 고려왕 당년의 왕건(王建)에게 돌아붙어서 새 나라를 이룩하고 왕건(王建)을 추대한 고려공신이었다. 모습이 고려왕과 비슷하므로 이 위난(危難)의 때에 자진하여 고려왕으로 가장을 하고 백제 군사를 유인하여 자기를 죽이게 하고, 그 틈에 자기의 임금이 도망할 기회를 지어준 것이었다.

이 말을 들은 견훤은 숙연히 머리를 숙였다.

"장하다. 쾌하다! 적이지만 훌륭하다. 후히 장사지내게 하라."

금강왕자는 그날 밤이 꽤 어두워서야 처연히 돌아왔다.

"아버님! 면목없읍니다."

스스로 낙담함임지, 부왕께 사죄함인지, 풀없이 왕자가 부왕께 절할 때에 견훤왕은 왕자를 위로하였다.

"아니로다. 천운이지 사람의 힘으론 무가내하였나니라. 고려가 아직 망할 운이 아니기에 그런 불의의 일이 생겨났더니라. 도리어 그런 어지러운 가운데서도 왕의 진가(眞假)를 알아본 눈이 칭찬할 만하다."

"네이. 그때 고려 진중에서 수레를 잡았는데, 수레의 사람이 진정한 고려왕이면 고려 군중에 그래도 좀 유다른 동요가 있을 것이온데 그런 기색이 보이지 않기에 가왕으로 알았읍니다."

"그런 경우에 그런 판단을 내릴 여유가 계신 것이 신인이 아니오니까?"

다른 장수가 곁에서 곁들이를 하였다.

견훤왕은 입은 봉한 채 머리만 커다랗게 끄덕이었다.

이번의 출사(出師)는 후백제국으로 적지않게 자부심을 갖게 하였다.

백제의 어버이들이 자식들에게 그 자식들이 또 제 자식들에게 그새 삼백년간을 눈물을 흘리며 전하여내려오던 낙화암의 참극의 복수도 시원히 갚았다.

북방의 신흥강국 고려와 간패를 사귀어 본 적이 그사이도 여러 번이었으나 일승일패로써 자웅(雌雄)을 결하지 못하였는데, 이번 전쟁의 결과로 이제는 자기네가 고려국보다 강하든 자신을 넉넉히 가지게 되었다.

국가적으로 이만한 충동을 받음과 동시에 견훤왕은 또한 개인적으로 이번 전쟁의 결과를 보고 마음깊이 작정한 바가 있었다.

일찌기 일허사(一墟師)에게 대해서도 당신의 네째아들 금강이 아들 자(子)가 아니고, 놈 자(者)자 왕자(王者)답다고 말하고 또한 금강왕자의 위로 있는 세 왕자 신검·양검·용검(神劒·良劒·龍劒)은 당신이 아직 임금이 되기전에 낳은 아들이니 왕자(王子)가 아니요, 금강(金剛)이 비로소 임금된 후의 아들이니까 이야말로 태자라고 하여, 당신의 뜻이 금강왕자에게 있다는 점을 나타내어 둔 일이 있느니만큼, 이 왕자에게 유다른 촉망을 품고 있던 임금은 이번의 신라 서울 정복과 고려군 정벌에서 이 왕자의 세운 공을 보고 또 이 왕자의 일처리하는 수완을 보고는, 드디어 마음속에 결정적으로 금강을 태자로 세우기로 작정하였다.

온 나라의 환호성 아래 원정군은 무보(武步) 당당히 고국에 개선(凱旋)하였다. 이 개선과 동시에 금강왕자의 세운 공도 본국에까지 알리어져서 온 국민의 신망도 이 왕자에게로 집중되었다.

"우리 임금 만만세하옵소서. 금강왕자 만만세하옵소서."

국민들은 소리를 높여서 환호하였다.

이 전승의 축하기분에 한동안 국내는 어찔하였다.

이 기분도 얼마만큼 가라앉고 국민들은 다시 각각 생업에 정진을 시작하게 된 평화로운 어떤날, 견훤왕은 내전에서 왕비와 한담을 하던 끝에, 드디어 금강왕자를 태자로 책립할 의향을 말해보았다. 왕비도 다른 왕자들보다 유달리 금강왕자를 총애하느니만큼 이의가 없을 것으로 믿기 때문이었다.

그랬더니 왕비는 댓바람 반대를 하는 것이었다.

"부녀자가 큰일엔 간섭하지 않느다 합지만 이 일은 가사에도 관계되는 일이오니 첩의 의견도 버리지 마십시요. 금강이가장 뛰어난 줄은 첩도 모르는 바가 아닙지만 순서를 바꾸어 재하자(在下者)가 위로 올라가면 본시의 재상자(在上者)가 원한품은 법이옵니다."

임금은 이 반대에 대하여 이전에 일허사에게 한 말과 같은 말로써 왕비의 의견을 꺾으려 하여 보았다.

―어떤 여인이 김가와 가까이해서 아들을 낳았다. 그러니까 그 아이도 물론 김가일 것이다. 그 뒤 그 여인은 박가에게 시집을 갔다. 박가에게 시집을 갔다고 이전 김가와의 사이에 난 아이도 박가가 될까?

―마찬가지로, 임금이 이전 임금되기 전에도 아들이 있었다 하면, 그 아들이 '왕자'일까, '평민의 아들'일까? 왕되기 전에 낳은 아들은 마치 시집가기 전에 김가와 어울려서 낳은 아들이나 일반이니 왕자가 아닐 것이다. 왕자가 아닌 사람이 어찌 태자가 될까? 금강부터가 비로소 왕자이니 금강이 태자가 되는 것이 마땅하다.

이전에 이런 말을 일허사에게 하매, 그때 일허사는 거기 대다을 못하였다. 그러나 왕비는 그 비유가 옳지 않음을 지적하였다.

"말씀은 그렇습지만 그와 이와는 다르지 않을까 생각하옵니다. 김가가 김갓 적에 아들을 낳고 그 뒤 박가의 집에(자식을 데리고) 양을 들어 사자(嗣子)가 되었다 하오면, 양들기 전에 낳은 자식이라고 박씨문의 봉사손이 안되리까? 집안에 장유(長幼)의 질서가 깨지오면 집안이 불화케 될 것이옵고, 나라에 질서가 깨지오면 나라가 어지럽게 되지 않을까―어리석은 소견엔 그렇게 보입니다."

이 이치 옳은 의견에 임금은 더 억누를 수가 없었다. 이 심세의 청춘 때에 서로 만나서, 무명의 공자로서, 신라의 군졸로서 올라가서는 신라 변방장에서 다시 일전하여 비장을, 그 뒤 뛰어올라서는 후백제의 시조로―파란 많은 이 임금의 배우자로 사십년간을 고초와 영광을 같이 받아오면서 가장 슬기롭고 가장 정미롭게 내조하여 온 이 왕비는, 과거에도 이 임금이 감당하기 어려워서 용기꺾이려는 일이 있으면 고요히 남편을 격려하였고, 처사 잘못하는 듯한 일이 있으면 겸손한 태도로 그릇됨을 깨쳐주어서 이 임금으로 하여금 오늘날의 훌륭한 제왕의 자리에 오르게 함에 숨은 공이 적지 않았다.

그런지라, 국사며 군사에 관해서도 임금은 때때로 왕비의 의견을 듣고 참고하기를 즐겨하고, 웬만한 의견이면 당신의 마음을 굽히고라도 한일이 많았다. 그리고 임금이 당신의 뜻을 죽이고 왕비의 의견대로 행한 일들을 모두 돌아보건대 그다지 잘못된 일이 없었다.

그런지리 웬만한 일이면 왕비의 의견을 물리치지를 않았다.

그러나 이 일에 관해서 뿐은 왕비의 의견을 좇기가 어려웠다. 사사로운 정의, 사사로운 의리로 보자면 김가?박가의 양자 문제까지 들추지 않고라도 와이의 의견이 조금도 틀린 일이 없다. 그러나 국가의 대계로 볼 때에 그렇게 간단히 처리할 문제가 못되었다.

창업(創業)의 어려움과 창업 성공의 영화는 거듭 말할 필요도 없이 누구나 아는 바다. 그러나 이 국가 창업이라는 위대한 일을 고정시키는 제 이대의 현 불현에 있다. 제계대(諸系代)가 현하지 못하면 평생의 대업도 한 대로 망하고 말 것이니, 그것은 진(秦)나라의 위대한 창업도 겨우 한 대밖에는 누리지 못한 것을 볼지라도 알 수 있다.

지금 당신이 이룩한 이 대업―굽어보건대 당신 위의 세 왕자도 그다지 열(劣)한 편은 아니다. 그러나 위의 세 왕자보다 월등을 훌륭한 금강왕자가 있으니, 부모의 욕심으로는 창업주의 욕심으로든 이 현인에게 뒤를 맡기고 싶었다. 구가 건설에 가장 중추(中軸)되는 기초 공사를 가히 믿고 맡길 만한 왕자에게 맡기고 싶었다. 거기는 사사의 애정보다도 세상 보통 의리보다도, 천만년 백제 사직의 사활(死活)의 중대한 문제가 있는 것이다.

인정상, 혹은 형이 자리를 빼앗기고 동생이 태자가 된다 하면 불평도 있을 것이고 불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가만히 고찰하자면 위의 세 왕자도 그다지 열한 편은 아니니, 언제 조용하고 좋은 기회에 불러서 국가 대계를 설명하여 납득시키면 안될 것도 아니다.

이만큼 마음먹고, 임금은 왕비와는 다시 이 문제에 대해서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 대신 한번은 조용히 원노장군에게 같은 의논을 하여 본 일이 있었다.

이 임금이, 이전 신라의 변방장으로 있을 때부터 한결같이 충성을 바치는 오랜 친구에게 그 의논을 하여 보매 원장군은 그의 온안(溫顔)을 가슴에 깊이 묻고 한참을 생각한 뒤에야 비로소 대답하였다.

"전하 우(優)와 열(劣)의 구별이 있으면 장(長)과 유(幼)의 구별도 있지 않을까 하옵니다."

"장자(長者) 우(優)하지 못하고 유자(幼者) 열(劣)하지 않으면 어떻게 하여야겠소?"

그러오면 장자로써 윗자리에 거(居)케 하옵고 우자(優者)로써 장자를 협력케 하오면 장(長)에 우(優)가 겸케 되지 않을까 하옵니다."

말하자면 맏왕자로 태자를 삼고 금강왕자로 협력케 하자는 뜻이었다. 임금은 역시 머리를 가로 저었다.

"장자가 장위(長位)에 거하면 우자(優者)의 의견이 용납되기 어렵겠지."

이만큼으로 하여 원노와의 의논을 끊어버리고 말았다.

금강왕자를 태자로 책립하고자 하는 생각은 이 임금의 마음에 깊이 자리잡은 바라, 누구의 의견이 어떠하든간에 변하지를 않았다. 의리보다도 애정보다도 순서보다도 무엇보다도 국가 만년의 대계로 보아서 다른 관념은 모두 무시하기로 한 것이다.

네째 왕자 금강에게 대한 감시와 관찰로 차차 더하여갔다. 반드시 임금 당신이 직재(直裁)하여야 할 일이 아닌 것은 대개로 금강왕자로 하여금 대리케 하였다.

춘추 벌써 예순 하나에서 예순 둘로―인생의 노년기에 들어선 이 임금은 백제유민 삼백년의 갈망이요, 당신 오십여년의 고심의 결정(苦心의 結晶)이 오늘날의 대업을 고정시킬 후계자를 훈련시키기 위하여 온갖 방면으로 그의 힘을 길러주고 수완을 북돋아주었다.

아직 정식으로 태자로 책봉하지 않고 정식으로 발표하지 않은 뿐이었다. 아직 좋은 기회를 못얻어서 형 왕자들을 납득시킬 틈이 없었으니까 지금 섣불리 발표하였다가는 혹은 더러운 암투가 일어날 것을 근심한 때문이었다.

공산(公山)의 대회전에서 고려군을 전멸시키고 하마터면 고려 임금까지도 잡을 번한 압도적 승리를 한 뒤에, 백제에서는 누차 고려의 변방을 징벌하였다.

이 여러 번의 전쟁에 견훤왕은 그강왕자의 장략(將略)을 관찰하며 겸하여 더욱 북돋아주기 위해서, 삼군운용이 전권을 금강왕자에게 일임하였다. 그리고 당신은 약간의 친위병에게 호위되어, 후진에서 관전(觀戰)만 하고 있었다.

이 전쟁 때에 가장 뚜렷이 눈에 뜨이는 것은 고려군의 소질이 연전보다 훨씬 훌륭하게 된 점이었다. 고려국이 차차 기초가 잡히면서부터는, 옛날 고구려의 낡은 터요, 그 뒤 주인없는 땅으로 발해국(고구려의 후신)에 근친하던(압록강 이남의) 땅이 모두 신흥 고려국으로 돌라붙는다. 이 땅의 백성들은 부여(扶餘)이 한 옛날부터 말타기와 활쏘기로 소문높던 종족이라, 그 피를 물려받은 이 후손들은 그새 오랫동안 비록 나라없는 백성으로 지냈으나 선천적으로 물려받는 호기호사(好騎好射)의 기질과 날쎈 체질은, 과시 표강한 종족이었다. 이 종족들이 고려에 달라붙으면서 군병들을 많이 고려에 보내었는지라, 지금의 고려군사는 여전히 고려군과는 대상부동이었다.

이러한 정예한 고려군사와 대전을 하지만,금강왕자는 정공(正攻)·기습(奇襲)·허격(虛擊) 등 가지가지의 병법을 임기응변(臨機應變)으로 자유로 써서, 언제든 고려군을 격파하였다.

신흥국이요, 강토가 아직 불완전한 위에 더우기 '송경천도(松京遷都)'·'남으로 이천리, 북으로 이천리'라는 제이의 야망을 품고 있는 후백제라, 그 나라의 임금은 단지 왕재(王才)가 반드시 필요하였다.

견훤왕은 당신의 네째 왕자 금강의 고금(古今)에 쉽지 않은 장애에 내심 퍽이나 흡족하였다. 단지 맏아들로 태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장차 이 왕자를 태자로 봉하려면 약간의 귀찮은 문제가 생길 것만이 성가시었다.

―선사 도선(先師道詵)이 일찍 자식복이 없겠다 하시더니 그것은 이를 가리키심이었던가! 아아, 너는 왜 맏으로 태어나지 못하였느냐? 귀찮은 문제로다!

용감하고 슬기로운 금강을 바라보며 견훤왕은 때때로 탄식하였다.

자식복(子息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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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훤왕이 직예대(直隸隊) 오백명을 친솔하고 신라 서울에 직입하여 반오백년 전의 낙화암의 원수를 갚은 지도 어언간 팔년이라는 날짜가 흘렀다.

이 임금 예순하옵살―홋아홉 살에 아버지 아자개(阿慈介)의 슬하를 하직할 때에 하였던 두가지의 커다란 맹세―하나는 이백년 전에 망한 백제를 자기의 손으로 재건할 것이요, 또 하나는 그때 수치와 원한을 머금고 낙화암에서 백마강으로 몸을 던져 죽은 망국 삼천 궁녀의 원수를 갚을 것―두 가지가 다 성취되고도 이미 팔년이다. 인제 남은 일은 일껏 공들여 쌓은 탑을 잘 보존할 후계자를 선택(選擇)하는 일이었다.

임금은 눈주어보고 주의하고 한 끝에 네째왕자 금강(金剛)을 골라내었다. 처음 얼맛동안은 확정하지 못한 일이라 임금 혼자서 마음먹고 주의만 하고 있었지만, 세월이 흐르는 동안 어느덧 차라 임금이 이 의사도 노골적으로 되어가고, 노골적으로 되어감에 따라서 다른 사람들도 눈치채게 되었다.

대궐 이하 온 대신이며 백성들 사이까지도 이 나라의 왕통을 이을 이는 네째왕자 금강이라는 점을 막연하나마 짐작하게쯤 되었다.

그때에 맏 왕자 신검이 홀로 아버님 앞을 모시고 있었고, 둘째 왕자 양검은 강주도독(康州都督)으로, 세째 왕자 용검은 무주도독(武州都督)으로 각각 소임을 맡아가 있던 때였다.

신라의 굴레를 벗어나서 스스로 나라를 세우고 자기네끼리 자기네의 나라를 조리하는지도 이미 사십사년, 신라 경순왕(敬順王) 팔년, 고려 태조 십팔년 후당노왕(後唐路王) 청태(淸泰) 이년 봄도 거의 다 간 삼월이었다.

백제 서울 완산주의 교외 여기저기에 탐춘(探春)의 무리들이 한 패씩 한패씩 모여앉아서 술을 기울이며 가는 봄을 조상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 좀 한쪽으로 떨어져서 외따른 곳에 세 사람 패거리에 탐춘객 한 떼가 있었다.

온갖 행색이며 차림이 표면으로는 분명 탐춘객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단지 탐춘을 하러 나온 것이 아니요, 탐춘을 핑계삼아 여기서 무슨 의논을 하러 나온 모양으로, 앞에 술잔은 있으나 잔을 기울이는 일도 없이 이야기에 골몰하고 있었다.

상좌에 앉은 사람은 임금의 맏아드님인 신검왕자였ㄷ. 왕자라 하면 언뜻 청소년으로 생각키우나 벌써 오십의 중노인으로 비교적 호인다운 기색이 얼굴에 넘쳐 있었다.

왕자의 왼편에 앉은 사람은 이손(伊飡)·능환(能奐)이었다. 야심과 권모(權謀)가 얼굴에까지 넘쳐 있었다.

오른편에 있는 사람은 파진손 영순(英順)이었다.

두 사람은 한결같이 임금이 제 사왕자 금강에게 전위(傳位)를 하려는데 반대의 의향을 품은 사람으로서, 억세고 괄괄한 임금이라, 표면 그 의향은 나타내지 못하나 이면으로는 늘 그 뜻을 품고 자기네끼리는 불평을 하소연하고 하던 것이었다. 그들은 무슨 특별히 금강왕자에게 불만이나 불평을 품는 것이 아니고, 단지 맏왕자 신검과는 학우(學友)요, 여태까지의 오십년 생애를 이상한 인연으로 전장에서는 같은 진에 있게 되고, 평화 때에도 역시 신검왕자의 아래 있게 되어 오랜 인연으로 서로 정이 깊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이날 신검왕자를 모시고 겉으로는 탐춘하는 체하고 여기 온 것도 좀 유다른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 것이었다.

이즈음 임금의 건강이 좋지 못하다. 벌써 춘추 예순아홉이매 인간칠십 고래희라는 칠십이 다 된 춘추라, 보통 사람 같으면 벌써 기거동작도 힘들게 되었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보통 이상의 건강체를 가지고 있는 이 임금이라, 보통 때에는 아직 장년(壯年) 남자나 일반인 듯하였다. 자각적(自覺的)으로는 어떨지 알 수 없지만 남보기에는 적어도 그러하였다.

그러나 차차 병이 잦아갔다. 이전에는 좀체 병앓는 일이 없었는데, 차차 나이가 많악면서 그런 일이 늘어갔다. 근년에 이르러서는 더욱 잦아갔다. 잦아가는 동시에 한 번 누으면 누워 있는 기간이 길고 괴로워하는 정도가 심하여갔다. 체력이 쇠하여가는 것이 분명하였다.

이번에 누워서는 꽤 탈이 중하였다. 동시에 근시(近侍)의 전하는 말에 의지하건대 원로대신들과 누차 태자책립에 대한 중요한 회의가 비밀히 열렸다 하는 것이었다.

임금의 보수(寶壽)가 이만하면 무론 벌써 태자의 책립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월차책립(越次冊立)이라는 델리케잍한 문제가 있기 때문에 아직까지 그냥 밀어오던 것이었다.

이번 환후가 좀 심상하지 않으매 임금은 이 기회에 그 사이 오래 끌고 오던 문제를 해결코자 하였다.

이 임금의 오십년간의 내조자요 겸하여 동지요 격려자이던 왕비는, 수년 전에 임금을 환자 남겨두고 저 세상으로 갔다. 만약 왕비만 생존하였더면 왕비의 의견이 임금께는 가장 참고거리가 되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왕비 이미 가고, 홀로 남은 임금에게는 의리와 이치로써 임금을 설복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 대신들은 대개는 임금의 뜻에 무조건 하고 승복(承服)하였다. 몇몇 인정을 아는 대신들은 사리를 들어서,

"맏왕자를 세자로 책립하옵고 금강왕자로 보좌를 하도록 하옵시다."

고 여쭈었지만 일단 굳게 먹은 임금의 뜻은 꺾기가 힘들었다.

이리하여 누차 병상의 임금과 원로대신들과의 비밀회의가 거듭되었다. 이런 낌새를 챈 능환과 영순의 두 재상은 자기네가 심복하는 신검왕자로 하여금 보위(寶位)에 오르게 하도록 그 의논을 하러 오늘 왕자를 모시도 탐춘하러 나온 체하고 여기를 나온 것이었다.

"나도 그만큼은 짐작은 하지만 나랏님의 뜻이 그러신데야 어쩔 도리가 있겠나?" 능환과 영순의 의견을 들은 뒤에 신검왕자의 대답이 이것이었다.

신검왕자는 그다지 야심이 크지 않은 사람이었다. 지금 누리고 있는 이상의 부귀가 욕심나지 않았다. 아버님이 임금이거나 아우가 임금이거나 자기의 지금의 부귀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리고 또 이만하면 넉넉하였다. 지금 나이가 오십에 더 영화를 얻는다면 몇 해나 누릴 것인가. 더우기 능환과 영순 등 의견으로 보자면, 더한 영화를 얻기 위해서는 아버님을 어디다가 감금을 해야 하고, 네째 동생의 목숨을 해하여야 하고, 그 밖에도 반항하는 생명을 적지 않게 해하여야 할 것이다. 그다지 욕심나지도 않는 것을 그런 악착한 일까지 해서 빼앗으면 무엇하랴!

왕자의 마음은 이러하나 영순과 능환은 그렇지 못하였다. 물론 첫째로 이 일이 성공되면 자기네는 그 공으로 더 높은 지위에 앉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도 더 악이 받혀서 이 일을 성공시켜야 할 내력은 직접 그들의 생명에 관련되기 때문이었다. 만약 지금처럼 속마음으로만 그런 생각을 품고 있었으면 괜찮지만, 일단 입밖에 낸 이상에는 성공 못하면 역적이다. 역적에 몰리지 않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공을 해야 한다.

"그렇지 않습니다."

영순이 우선 반대하였다.

"만약 왕자께서 먼저 일을 행하지 않으시면 양검왕자나 용검왕자가 행하실 것이올씨다. 맏왕자께서 왕위를 이으신다면 이는 천리(天理)오라 당연한 일이오니, 온 백성들이 기꺼워할 것이올씨다. 도 만약 금강왕자께서 승위(承位)하신다면 이 또한 나랏님의 뜻이오니 백성들이 불평을 품기도 덜할 것이올씨다. 그러나 양검이나 용검왕자께서 승위하신다면 나라가 크게 어지러워질 터이오니, 그렇게 되오면 왕자께서는 죄송한 말씀이오나 종사(宗社)의 죄인이 되지 않사오리까?"

이 영순의 말을 능환이 뒤를 받는다.

"옳습니다. 일보 그르치면 종사의 죄인이 될 것이오다. 게다가 더우기 유의하셔야 할 것은 다름이 아니오라, 지금 나랏님께서 하오시려는 일은 너무 연로(年老)하시기 때문에 좀―그―망령이 나시기 때문이 아닌가하옵니다. 한 집안의 가업이든 한 나라의 존좌(尊座)이든간에 맏(毘)되는 이가 계승하는 것은 하늘이 내신 법이온데, 무슨 까닭에 월차(越次)를 합시려는지 망령으로밖에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더우기 우리 전하와 같으신 영특한 분을 두시고 왜 월차를 하시겠읍니까? 망령이올씨다."

말로 누구에게 지지 않을 두 사람이었다. 한점 이치에 이그러진 데가 없다.

"글쎄?"

"글쎄가 무에오니까? 고래로 국가나 가문의 흥망성쇠(興亡盛衰)가 대개 글쎄라는 데서 나왔읍니다. 마음 단단히 잠숫고 단숨에 하실 일에 글쎄가 무에니까? 이손(伊飡), 그렇지 않소?"

"그렇다 뿐이리까?"

그러나 왕자는 유예미결(猶豫未決)하였다. 이 왕자의 천성이 무슨 일에든 단호성(斷乎性)이 없었다. 그리고 그 점을 미흡히 생각하기 때문에 임금은 왕위를 이 맏왕자에게 물려주기를 꺼리는 바였다.

데리고 온 시종들은 멀리서 따로 음식을 나누게 하고, 이 근처에는 잡인은 얼씬도 못하게 한 뒤에 신검왕자와 두 재상은 거의 날이 기울도록 의논하였다.

멀리서 남보기에는 보통 술을 나누는 듯하였으나 정작으로는 가장 비밀한 의논이 진섭이 된 것이었다.

저녁대가 거의 되어서야 신검왕자에게서는 이런 말이 나왔다.

"그럼 대체 일을 어떻게 해야겠소? 나랏님은 지금 환후는 계시지만 서울에 무사히 계시구, 양검과 용검에게 두 의논을 해야겠는데 그 사람들은 강주·무주 등에 갈려가 있구."

"그건 거리가 안됩니다. 금강왕자께 선위(禪位)를 하시는 건 양검·용검 두 왕자분도 찬성 안하실 일이니깐 오늘로라도 급사(急使)를 보내면 모레면 서울로 오시게 될 것이고, 오시기만 하면 합의가 되시리다."

"금강은?"

"자객(刺客)을 보내옵시다."

"나랏님은?"

"환후 평유(平癒)의 기도를 올리자고 금산사(金山寺)로 모시고 갔다가 그냥 별궁에 모셔두고 날쌘 무사로 지키게 하면 탈이 없을 줄로 믿읍니다."

"그렇게 일이 다 순순히 잘될 것같소?"

"저는 직예대(直隸隊) 오백명의 대장이올씨다."

능환의 대답이 이것이었다. 영순도 능환에게 지지 않았다.

"젊은 장수들은 모두 저와 막역지교(莫逆之交)일 뿐더러 제일 왕자의 승위를 바라는 무리들이올씨다."

"글쎄?"

"곧 결행하옵시다."

"글쎄?"

"글쎄가 아니올씨다. 때는 급하옵니다. 하루를 더디하였다가는 대사가 결정되면 그 뒤는 무가내하(無可奈何)올씨다. 이 즉석에서 그렇게 하도록 작정하고 지금부터 일에 착수하도록 하십시다."

"그럼 일에 실수 없도록만 하시오."

이리하여 견훤왕 오십년간 노력의 결정인 후백제국은 왕의 계승 문제로 트집이 가기 시작하였다.

부왕의 환후가 범상하지 않다고 이것을 근심하여 강주도독으로 가 있던 둘째 왕자 양검과 무주도독으로 가 있던 세째 왕자 용검이 같은 날 서울에 도착하였다. 입경하여서는 즉시로 부왕의 병석 앞에 나아갔다.

세상에 떨어진 이래 칠십년간의 전 생애를 무인(武人)으로 지내온 이 늙은 임금은, 춘추 과하고 병환 중함에도 불구하고 난란(爛爛)히 빛나는 눈을 들어서 오래간만에 보는 두 아들을 쳐다보았다.

"앉거라."

"환후 좀 어떠시오니까?"

"아직 십년은 염려 말아라. 너희들 백성이나 잘 다스리느냐?"

놀라운 원기였다. 좀 별다른 야심을 마음에 품은 두 왕자는 가슴이 적지아니 두근거렸다.

"네. 스스로는 잘 다스리로나로 생각합니다마는!"

"마는? 마는 어떻단 말이냐! 스스로의 생각과는 다르나니라 아아, 나도 이젠 늙었다."

손을 이불 밖으로 꺼내었다. 나무등걸같이 확살스러운 팔은 그래도 늙은 탓인지 시룩시룩 주름이 잡혔다.

임금은 말없이 한참을 자기의 팔을 들여다보았다. 보다가 쓸쓸한 듯이 미소하였다.

"제 한몫 본 판이다."

자탄성(自歎聲)이었다.

두 왕자는 스스로 자기네를 보았다. 인생 오십―어떻게 보면 초로(初老)라 할 수도 있지만, 어떻게 보면 아직 장년이다. 그러나 인생의 말년인 이 늙은 아버지와 비교하여 자기네는 얼마나 부족하고 미약하고 어린애답고 보잘것 없는가!

인사의 말씀을 여쭌 뒤에, 물러나가라는 아버지의 윤허(允許)를 듣고 어전을 물러나올 때는, 이 왕자들은 아버지의 의사에 거역하는 일에 적지 않은 공포심까지 품게끔 되었다.

이 서울에 모인 세 왕자가 상의한 결과라는 뜻으로, 부왕께 금산사에 행행(行幸)하여 환후 평유의 기도를 올리자고 주청(奏請)할 때에, 늙은 임금은 웃으면서 이를 허락하였다.

병든 임금을 위하여 특별히 와거(臥車)까지 만들고, 장중한 노부로써 임금은 제일왕비 탄생의 네 왕자와, 제사왕비 탄생의 막내왕자 능애(能艾)와 후궁 세 명과 시위 장졸 삼십명이라는 것이 전혀 맏왕자 신검에게 소속된 사람들만인 줄은 임금은 꿈에도 몰랐다.

미리 정갈히 닦아둔 별궁에 임금은 들었다. 그날 밤을 그 별궁에서 보냈다.

밤을 지내고 이튿날, 이날부터 환후 평유의 기도가 있을 날이었다.

그날 아침 임금이 눈을 뜨자마자, 시위 장수 한 명이 무슨 커다란 소반을 하나 가져다가 여관(女官)에게 전한다.

여관은 그것을 공손히 받아다가 임금 앞에 놓았다. 비단 보자기로 덮이어 있었다.

임금은 무심코 그 보자기를 들쳤다. 들치다가 깜짝 놀라면서 떨쳐버렸다. 떨쳐버렸다가 다시 보자기를 들쳐 치웠다.

웬만한 일에 놀랄 줄을 모르는 이 임금도 여지없이 놀랐다. 앓아누웠던 몸을 펄떡 일으켰다. 일으키고는 소반을 굽어보았다.

소반에 놓인 물건은 사람의 머리였다. 보통 사람의 머리라도 이 임금은 그다지 놀랄 사람이 아니었다. 그 소반에 담긴 머리는 네째 왕자 금강의 것이었다. 틀림이 없었다. 처음에 보자기를 해쳐보니 사람의 머리가 소반에 담겨 왔기 때문이었다. 다음에 펄떡 일어난 것은 사람의 머리가 금강왕자의 것이라는 것을 인식했기 때문이었다.

임금께 소반을 바치고 물러나가던 궁녀도, 임금이 너무도 놀라는 기수에 몸을 돌이켰다.

돌이키고 소반위의 괴변을 보았다. 예사 보통의 괴변이었더면 궁녀는 기절을 했거나 커다란 부르짖음을 내었거나 했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 일이 너무도 경악할 일이니만큼 다만 외마디 소리를 빽 지르고는 흐늘흐늘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드디어 임금의 눈이 노여움으로 불붙었다. 비칠비칠 무릎을 세웠다.

"야아!"

아무도 대답이 없었다.

"야아, 아무도 없느냐?"

전각이 드렁드렁 울렸다. 뜰에는 시위 장수들이 물론 서 있다. 그러나 아무도 대답도 없을 뿐더러 돌아보지도 않는다.

"야아, 귀먹었느냐?"

다시 고함을 쳤다. 이때야 꽤 가까운 데서 말소리가 났다. 말소리라도 임금의 부름에 대한 대답이 아니었다.

"여보게 동관, 폐주(廢主)가 누구를 부르는 모양일쎄."

"음. 그런가보이."

"어디 누구를 불렀나, 동관 좀 알아보게."

"그럼세."

곧 문밖에 서 있던 모양이었다. 돌아서는 소리와 동시에 문이 열렸다.

"누구를 부르셨수?"

몸에는 갑옷, 손에는 창―어마어마한 무장이었다.

동시에 임금은 모든 일을 눈치채었다. 단지 누구의 짓인가 의문일 뿐이었다.

"누구의 짓이냐?"

"신검왕자께서 중망(衆望)에 의지해서 오늘 등극하오십니다."

"신검이?"

자식복이 없으리라. 아아, 스승의 명찰(明察)이여! 임금은 눈을 홱 돌려버렸다.

만약 이런 짓까지 해서라도 위에 오르고 싶으면 왜 그 뜻을 아비에게 분명히 알리지 못하였느냐? 어리석은 녀석아. 내가 다스리기 사십여년, 인제는 그만하면 꽤 튼튼히 자리잡힌 국가이매 과히 어리석은 사람만 아니면 넉넉히 나라경영을 하여갈 수 있다.

이 새나라 창업주의 적심(赤心)으로써 더욱 튼튼하고 굳센 나라를 만들려는 욕심이 있기에 후계자를 고르던 것이다. 좋은 임금을 모시어 더욱 기름진 나라가 되게 하려기에 애도 쓰고 노심도 하던 것이다. 아무가 임금이 될지라도 국가유지가 될 만한 기초는 인제는 섰다.

그러나 이렇듯 쟁탈전이 있고, 쟁탈에 의지해서 왕위가 변동이 된다면 이 나라의 속이 뻔히 외국에게 비치어 보이는 것이 아니냐? 나라의 추악한 꼴이 신라에게는 얼마나 보일지라도 걱정이 없으나, 호시탐탐(虎視耽耽)히 기회만 엿보고 있는 신흥 고려에겐 손톱눈 만한 틈이라도 보여서는 되지 않을 것이다. 틈만 안보이면 저쪽에서도 먼저 이쪽을 건드릴 용기는 없을 것이나, 일단 틈을 보인 이상은 인제는 다시 감출 수 없는 바다.

온조(溫祚)대왕 건국하신 이후 칠백년 뒤에 한 번 신라에게 꺾이었던 사직을 이백여년간을 벼르고 벼르던 끝에 당신 평생의 힘으로 다시 세웠던 바를, 또다시 덜난 아들때문에 잃는단 말이냐!

신왕 등극을 축하하는 불제(佛祭)의 소리가 은은히 이 별궁에 울려올 동안, 견훤은 몸의 아픔도 잊어버리고 일어나 앉아서 방바닥을 두드리며 통곡하고 있었다.

견훤왕의 눈에는, 후백제국은 인제는 망한 나라로 보였다. 거저 곱다랗게 신검왕자에게 전위만 했더라도 더 훌륭하게는 못되었을망정, 이렇듯 추태를 폭로하기까지에는 이르지 않을 것을, 일을 그릇하기 때문에 인제는 고려에게 망한 나라로 보였다. 견훤왕이 통곡한 것은 당신이 유금(幽禁)된 것보다도, 금강왕자 피살된 것보다도, 국가의 파멸을 눈앞에 보기 때문이었다.

신검왕자 등극은 비교적 순순히 일이 되었다. 금강왕자와의 몇몇 늙은 대신이 희생된 외에는 조금의 동요도 없이 성공되었다. 비교적 호인물이었더니만큼 인심을 그다지 잃지 않았다.

노호(老虎)

편집

신왕은 아버님을 금산사 이궁에 감금하고도 아드님으로서의 도리는 다하였다.

환후 평유의 기도를 금산사에서 올리도록 하는 한편, 고명한 의원을 보내어서 모시게 하고, 일용물품이며 거기에 부자유가 없도록 하게 하였다. 다만 가시를 엄중히 하여 자유로이 벗어나지만 못하게 하였다.

이러한 환경 가운데서 처음의 격노(激怒)와 흥분이 삭으면서 부터는 견훤왕은 무엇보다도, 이런 부자유한 호나경 가운데서도 나라에 유리한 방략을 강구(講究)하고 있었다.

첫째로, 신왕과 당신과의 사이가 나쁘지 않다는 것을 애써 남에게 나타내려 하였다. 신왕께 왕위를 전한 것은 절반은 당신의 뜻이라는 듯한 태도를 취하였다.

신왕이 매일 보내는 문안사에게도 각별히 신왕의 안부를 묻고 하였다.

정치상의 의견도 늘 신왕과 교환하고 하였다.

말하자면, 당신이 위(位)에서 쫓겨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밝혀서 다른 나라의 엿보는 눈을 얼마만큼이라도 피하기 위해서다.

이런 용의(用意)의 덕인지는 모르지만 정변이 있은 두서너달 뒤까지도 아무 별고없이 지내게 되었다.

그해 여름 무더운 어떤 날이었다. 그날 견훤왕은 이제는 그다지 적의(敵意)도 보이지 않는 시위장수며 시종비복들에게도 후히 음식을 내리고, 당신도 입이 당기어 저녁을 많이 자시고 그냥 음식에 취하였는지 잠이 들어버렸다.

그때 들었던 그 잠에서 견훤왕이 깬 것능 이튿날 해도 꽤 높이 오른 때였다.

먼저 사위(四圍)가 이전과 다름을 직각하였다. 그 다음은 모시는 사람들이 궁인들이 아니요 낯선 무사들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 사람들은 견훤왕이 잠깨는 기수에 일제히 허리를 굽혀서 경의를 표하였다.

"여기가 어디냐?"

견훤왕이 이렇게 물었다.

"함상(艦上)이올씨다."

"무얼?" 견훤왕은 반사적으로 몸을 절반쯤 일으켰다.

"너희는 누구냐?"

"고려 지존(至尊)의 어명으로 대왕을 모셔가옵는 시종들이올씨다."

이 견훤왕이 몇 달 전 신검왕자의 반역을 당하였을 때와 같은 정도로 생전에 보기 쉽지 않은 경악(驚愕)이었ㄷ.

벌떡 몸을 일으켰다. 일으켜서 벌거벗은 맨몸으로 한참을 말없이 앉아서 사지만 떨고 있었다.

그럴 동안에 침착함이 생겼다. 생기면서 다시 몸을 굽혔다.

일찌기 본 바, 고려 임금의 눈―그것은 예사 보통의 눈이 아니었다. '덕(德)'으로는 모르지만 '재(才)'로는 천하에 당할 자 없을 것이다. 견훤왕 당신이 그 사이 마음을 억지로 눌러가면서 맏아드님인 신왕과 의좋게 지내는 듯이 꾸미던 그 냄새도 고려임금으로서는 뻔히 꿰어보았을 거이다. 그리고 오늘날 이 거조(擧措)가 있었을 것이다.

고려임금의 정략을 보아 지금 당신을 고려로 데려간다 할지라도 푸대접을 한다든가 하지는 않을 것이다. 있는 재간 없는 재간 다하여 당신을 환대(歡待)할 것이다. 왜? 아직 백제의 온 인심이 견훤왕 당신에게 모여 있으니까…. 그리하여 장차 천천히 백제를 이반시키고 부자간을 이반시키고 하여 가장 치기 쉽게 된 시기에야 비로소 동병(動兵)을 할 것이다.

지금 신라라는 나라는 손가락 하나만 대어도 넉넉히 쓰러질만큼 미약한 존재이다.

백제는 지금 비록 온 나라가 신왕께 복종한다 하나 열복(悅服)이 아니요 심복(心腹)이 아닌 이상, 언제 어디서 누가 무슨 일을 내기만 하면 벌의 둥지 쑤시어 놓은 것같이 될 나라이다.

오직 가장 후에 일어난 고려 혼자가 반도 위의 가장 강한 나라이다.

"송악에 도읍하여 남으로 이천리 북으로 삼천리!"

아아, 스승의 이 선견을 저버리고 더우기 '자식복이 적으리라'던 그 예언까지도 저버리고 자기는 왜 그다지도 안심을 느끼고 불안을 모르고 있었던가?

자리에 다시 누은 견훤왕은 표면으로는 태평한 듯이 가식(假飾)하였지만 속으로 통곡하고 또 통곡하였다. 당신 일대의 대사업이 곱다랗게 무너져 나가는 것을 분명히 그릭 확실히 눈앞에 보기 때문이었다.

고려왕은 견훤을 마치 친 숙부나 맞는 듯이 표면 기뻐서 맞았다.

나이가 아저씨뻘이라 하여 상부(尙父)로 삼고, 부름에 있어서도,

"아저씨."

하든가, 그렇지 않으면,

"대왕님."

이라 하였다.

벼슬을 백관(百官)의 위에 두고 거처할 궁궐까지 주고, 식읍(食邑)으로 양주(楊洲)를 주었다.

말하자면 견훤왕은 고려에 있어서도 (정치상 권력과 세력을 제하고는) 고려왕에 버금가는 가장 존귀한 사람이었다. 금산사에 유금되어 있을 때부터 견훤왕께서 종들던 남녀비복이 고려 서울까지 와서 시중들고 일찌기 백제 장수로 고려에 잡혀 왔던 신강(信康)이 호위사로 있게 되었고―뿐더러 견훤왕의 사위되는 영규(英規)장군이 자기의 아내와 의논하여 현왕(現王)을 배반하고 옛왕을 외국에 찾아와서 늙고 외로운 옛 임금을 위로하고 있었다.

이것이 견훤왕에게는 적지않이 위로되었다. 마음에 생각하는 것은 오직 국사뿐이라 하되, 그래도 사람인 이상 인정의 움직임이 없을 수 없었다. 게다가 춘추가 칠십이니 사람 그리울 때가 넉넉히 되었다. 그 아들에게까지 모두 모함을 받고 평생 사업의 붕괴(崩壞)를 본 견훤왕에게는 딸과 딸의 남편과의 인적(人的) 위로라는 것이 적지 않게 마음을 움직이게 하였다.

이리하여 견훤왕은 칠십의 노구(老軀)를 외국 서울에서 보내고 있었다.

그해 시월에 또한가지 중대한 시국상의 변화가 생겼다.

일천년 사직의 신라가 드디어 거꾸러졌다. 한개의 군사도 쓰지 않았다. 몇명이 외교사(外交使)가 신라로 가서 세 치 혀를 놀려서 달래고 위협하는데에 드디어 일천년 신라 종사(宗社)의 주인은 사직을 고려에게 내어 맡긴 것이다.

견훤왕은 이 말을 듣고도 단지 입맛을 다시고 아무 비평도 가하지 않았다.

이번 고려에 일천년 신라 사직을 들어바친 임금인 금부(金傅)는 일찌기 견훤왕 당신의 네째 왕자(지금은 저 세상에 가 있는 사람이다)가 골라낸 사람이었다. 그리고 견훤왕 당신의 입회 아래서 즉위를 한 사람이었다.

장차 백제가 힘이 자라서 신라를 삼킬 수가 있다면, 그때야말로 이 임금(金傅)이면 손쉽게 신라왕관을 들어바치리라는 기대 아래서 골라 내었던 그 굼부왕이 왕관을 벗어서 바친 곳은 백제가 아니고 고려였다.

웃자 하니 너무도 비극적이요, 울자 하니 너무도 희극적이다. 지금 돌아보아 너무도 눈이 밝았던 금강왕자의 안목을 탄복하기 보다 먼저 운명의 기괴함에 탄식할 따름이었다.

그때 금부왕 즉위식에 참례한 일이 있던 영규장군도 이 소식을 듣고 침통한 얼굴로 옛 임금이요, 겸하여 장인되는 견훤왕을 찾아 들어왔다.

"대왕님, 웃지도 못할 노읏이올씨다."

"세상사 다 그렇지, 할 수 있는가?"

"장차 물론 이리로(서울로) 데려오겠습지요?"

"그렇겠지."

"그때의 그 꼴을…."

그러나 견훤왕은 웃지도 않고 쓴 얼굴을 하고 머리를 돌리고 말았다.

며칠 뒤 신라왕 금부는 나라는 고려에 바치고 비빈·궁녀며 보화들을 지니고 고려 서울로 왔다. 고려왕은 이를 맞아서 맏딸 낙랑공주로 짝지워서 유화궁(柳花宮)에 거처하게 하고, 계림을 경주(慶州)라 이름 고치고, 경주읍을 금부의 식읍(食邑)으로 하고, 낙랑정승으로 삼아 위를 태자에 두었다.

이제 이 반도 땅에는, 오분의 사를 차지한 신흥(新興) 고려국과 오분의 일을 차지한 (견훤의 맏아들이 이은) 후백제의 두 나라만이 남았다.

직접 정치에 관여하지 못하는지라 그 내막은 똑똑히 알수 없으나, 견훤왕에게는 고려 조정에서 늘 백제문제로 머리를 앓는 것만은 알 수가 있었다.

비록 늙은 호랑이는 이곳에 감금해 두었다 하나, 그 호랑이가 이른바 혈기의 백제혼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신라가이 녹록히 손안에 들어오지 않을 것이다.

어차피 집어삼켜야 하겠는데, 곱다랗게 삼키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무력(武力)을 사용핮니 이것도 아직 미지수였다. 이곳에 와 있는 견훤왕이 백제에 그냥 있다면 감히 엄두도 내지를 못할 것이다. 그러니만큼 견훤왕을 이곳에 잡아 왔다고 하여 얼마나 만만하게 되었을지 이것도 짐작이 가지 않는다.

다만 견훤와잉 선두에 서서 역자(逆子)를 친다는 명목으로 백제를 쳐들어 가면 문제없이 백제는 잔멸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새도 여러번 떠본 바이지만, 견훤왕은 이제라도 고려를 치는 군사에는 선군장이 될 수 있어도 비록 역자(逆子)라 할지언정 백제는 고목 한떨기를 공연히 꺾지 않을 것이다. 백제를 치는 선봉장(先鋒將)으로 견훤왕을 내세우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이 의미로, 백제 공략(攻略)에 견훤왕은 도저히 이용하지 못할 인물이었다.

견훤왕은 이런 가운데서 고려 조야의 융숭한 대접만 받으면서 한가하고 무위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삼한통일(三韓統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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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년이라는 날짜가 고요히 흘러갔다.

견훤왕이 금산사에서 마주(魔酒)에 취하여 고려에 사로 잡힌 바 되어 고려 서울로 온 지 만 일년이 지난 고려태조 십구년 유월이었다.

고려는 드디어 최후의 움직임을 시작하였다. 작년 가을에 피를 보지 않고 신라를 병합하여 이 반도의 오분의 사라 하는 대부분의 영토를 차지하고 있지만 아직 서남쪽에 남아 있는 백제마저 삼켜 버러지 않으면 완전한 통일자가 되지를 못한다.

신라를 합병하기 때문에 한때 수선거리던 동요도 이제는 멎었다. 그 대신 백제 신왕은 견훤왕 같은 대영웅은 못 되었지만, 그래도 비범한 인물이니만큼 한때 꽤 움찔거리던 것도 인제는 잦고, 백제도 차차 안돈이 되어가려 한다. 온전히 안돈되기 전에 백제를 엎어버려야 고려로서는 안심을 할 수가 있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이해 유월 드디어 백제정벌의 대군을 일으키게 된 것이었다.

대군을 떠나보내기에 앞서 고려왕은 조용히 견훤왕을 찾았다. 그 의견을 따져보기 위해서였다.

"상부(尙父)께서는 후백제왕이 꽤씸하시겠지요?"

고려왕은 이렇게 먼저 따져보기 위해서였다.

"네. 꽤씸합니다."

"그렇겠읍기 지금 과인이 대병을 보내서 백제를 응징(膺懲)해서 상부의 한을 풀어 드리고자 합니다."

"…."

견훤왕은 깜짝 놀랐다. 놀라서 고려왕의 얼굴을 보았다.

보고 내심 몸서리쳤다. 지금 싱글싱글 웃어가면서 이런 말을 하는 고려왕이지만, 이것은 즉 백제는 인제는 전멸입니다. 하는 뜻을 알리어서 견훤왕이 내심을 살펴보자는 것임에 틀임이 없었다.

언제든 이날이 이를 줄은 꼭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르고 보니 가슴이 떨렸다.

"대왕님!"

고려왕을 불렀다.

"네?"

그러나 할말이 있으랴? 국가의 대사라, 사정으로 돌이킬 바가 아니었다. 늙은 눈에 눈물을 어리어 가지고 묵묵히 고려왕을 쳐다볼 따름이었다.

이것은 국사라 고려왕도 마음 돌이킬 바도 아니요 생각 다시 먹을 일도 아니지만, 그래도 마음에 측은하였다. 당신을 우러러보는 견훤왕의 눈을 피하면서 작은 소리로 말하였다.

"이번 과인도 출진을 하는데, 상부께서도 함께 나가셔서 과인의 용군(用軍)에 지도를 해 주십시오."

"…."

그 뒤에는 서로 할말이 없어서 묵묵히 있었다.

한참 뒤에 다시 견훤왕이 찾았다.

"대왕님."

"네?"

"아들은 거역했지만 자기가 이룩한 보탑을 미워 못합니다. 이게 천리외다."

그 한참을 말없이 더 앉아 있다가 고려왕은 대궐로 돌아갔다.

그날 밤 견훤왕은 밤새도록 소리없이 울었다. 이미 정한 운명이지만 눈앞에 이르니 가슴이 저리었다. 더우기 자기이 평생 공을 다 들이어 쌓은 탑이 지금 무너지는데 자기는 그것을 붙드는데 일호(一毫)의 힘도 가할 수 없고 도리어 무너뜨리는 편에 붙어서 방관하지 않을수가 없는 운명이 더우기 애달팠다. 베개에서 물을 짜낼 수가 있도록 수없이 눈물을 흘렸다.

일격에 백제를 부숴 반도를 통일하려는 고려에서는 국력을 모두 이 싸움에 아낌없이 쏟았다.

태자와 장군 박술희(朴述熙)로 하여금 보병?기병 일만을 인솔하고 천안부(天安府)로 가게하였다. 뒤이어 임금 당신도 상부 견훤왕이며 막료며 삼군을 친솔하고 천안에 합세하였다. 거기서 합세를 하여 일선군(一善郡)으로 나아가서 백제 신왕의 친솔군과 대치(對峙)를 하게 된 것이었다.

고려 각 장령(將領)의 인솔한 바 좌군·우군·중군·원군(援軍)의 사군을 합한 보병?기병의 총세는 칠만팔천여인으로서 과거 신라가 끌어들였던 당나라군사 이외에는 이 반도에 이런 많은 군사가 동원되어 본 일이 없었다.

이제는 반도에서 북부는 본시부터의 영토요, 동남부 신라는 제풀에 들어왔으니, 한군데 남은 백제만 넘겨놓으면 이 반도의 유일의 주인이었다. 그 땅을 지키던 호랑이까지 이미 없으니, 한숨에 무찔러낼 심산이었다.

전쟁은 시작되었다. 유월에 동병(動兵)을 시작하여 구월도 그믐이매 석 달 이상 지났다. 백제에서도 고려의 대군을 막으려고 온 군사를 일선군으로 모았다.

군사쓰기를 귀신같이 하고 고려 왕에게 대하여―그것도 고려왕이 온 국력을 함께 모아가지고 나오거늘, 여기 정면으로 대하려는 맏아드님의 용맹를 보고 견훤왕은 길이 탄식하였다.

금강왕자였더면 결코 이런 전략은 쓰지 않았을 것이다. 정예안 일부대만 고려군과 대하게 하고 나머지는 각각 고을에 나누어두어서 그곳을 지키게 할 것이다. 지금 온 나라의 군사를 일선군으로 모았으니, 이 군사만 꺾이는 날이면 백제국은 저절로 없어지지 않는가. 아아, 어리석은 아들아. 백제는 망하였다. 백제는 망하였다. 오십여년간을 군인 생활을 한 견훤왕은 두 나라 진형(陣形)을 바라보고 탄식하였다.

한소리 높이 울리는 북소리에 시작된 전쟁은, 불과 수일에 끝이 났다. 백제군의 전멸이었다. 황산(黃山)으로 탄현(炭峴)으로 참패하여 쫓겨가는 백제군을 따라가면서 전멸을 시켰다. 국내에는 이미 군사없이 비었었는지라, 겁먹고 쫓겨가다가 신라군에게 죽는 백제군 이외에는 군사라고는 없었다.

이리하여 백제라는 나라는 삽시간에 온 나라가 신라군의 철기에 유린된 바 되고, 일껏 견훤왕의 애써 일으켰던 후백제국은 건국 겨우 사십오년만에 신흥 고려에게 망한바 되었다.

후백제 임금 신검왕이며, 그 아우인 양검이며, 용검이며 대신들은 대개 고려군에게 항복을 하여 겨우 잔명을 보전하려 하였다.

그러나 고려왕은, 이런 인물들을 그냥 남겨두었다가는 후일 화근이 되리라고 하여 막하에 명하여 모두 참(斬)하여버렸다. 다만 신검왕 하나 겨우, 상부 견훤왕에게 대한 인사로 본다든지, 또는 국왕에 대한 대접으로 본다든지 참하기를 면하였다.

고려의 개선군이 백제를 멸하고 돌아오는 길에 황산(黃山)까지 이른 때였다.

고려 군졸들은 들에 영(營)을 치고 임금과 고관들은 어떤 절에서 하루를 묵게 되었다.

그때 견훤왕은 고려왕의 특허로 처음으로 신검왕을 만날 기회를 얻었다.

웃칸 문이 열리고 초연히 들어오는 모양을 아버님되는 견훤왕이 쳐다보지도 않고 한참을 그냥 머리를 숙으리고 있었다.

아드님도 들어선 채 읍하고 한참을 말없이 서 있었다.

이윽고 아버님이 비로소 먼저 입을 열었다.

"네 죄를 알겠느냐?"

아드님이 대답하였다. 힘없는 작은 대답이었다.

"용서를 바랄 수도 없는 죄올씨다."

또 침묵….

또 아버님이 먼저 입을 열었다.

"네 패전을 보고는 그자리에서 죽을 몸이었지만 네게 이말 한마디를 들려주고 싶어서 그냥 살아 기다렸다."

"아버님!"

"자, 물러가거라, 할말은 했다."

"아버님, 단 한 말씀."

"할말은 벌써 했다."

할일이 없었다. 아드님은 그냥 측은히 아버님의 방에서 물러나왔다.

그날 견훤왕은 저녁상도 받지 않고 그냥 물렸다. 존귀한 포로(捕虜)인 전백제왕 신검도 저녁상을 받지 않았다.

이튿날 아침 존귀한 포로 신검왕을 지키던 군사가 신검왕이 스스로 칼을 빼어 당신의 목숨을 끊은 것을 발견하고 깜짝 놀라서, 일변 임금께 이 일을 아뢰는 일방, 상부(尙父)께도 알리려고 달려가 보매, 상부 견훤왕도 자리에 누워서 고요히 잠자는 듯 그의 칠십년 생애를 마감하였다.

백제를 재건하기 윟여 이 세상에 나왔다가, 그 백제가 망한 뒤에, 망하게한 책임자를 벌(罰)까지 하고는 인제는 이 세상에 할 잔무(殘務)가 없으므로 갈 세상으로 돌아간 것이었다.

이래(以來) 일천년, 다시 백제를 재건하려는 사람도 없었고, 할 필요를 느낀 사람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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