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녀의 소묘
1
편집“기왕 올 테면 나 있을 제 오게. 뭔, 그렇게 어색해할 거야 있는가? 오래간만에 친구 찾아오는 셈 치면 그만이지. 하기야 그런 일이 없었다기로니 친구 찾아 강남도 간다는데 친구 찾아 천리쯤 오기로서니 그게 그리 망발될게야 없잖은가?”
이러한 편지를 받고 나니 그도 그럼직했다. 지난 가을부터 “갑네, 갑네.”하고도 초라니 대상 물리듯 미뤄온 데는 물론 15원이라는 차비가 그의 생활로 보아 엄두가 안 난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보다도 벌써 여러 번째 A가 한번 놀러 오라고 졸라대다시피 해도 “응응.” 코대답만 해오던 그로서, 너를 기다리는 여성이 있다고 한다고 신이 나서 달려간다는 것도 쑥스러워 솔깃하면서도 이때껏 미뤄온 것이다.
“뭘, 가보게나그려. 오래간만에 친구도 만나보것다. 청초한 미인이 기다리것다… 밑져야 본전 아닌가. 그런 중에도 정성스런 애독자렷다…”
훈이가 올라왔다가 A의 편지를 보고는 이렇게 충동이었다. 그때도 귀가 솔깃하게 들리는 것을 꿀꺽 참았다.
훈이 말마따나 여러 해 만에 만나는 친구요, 거기다가 자기의 작품을 모조리 읽은 한 여성이 기다린다는 것이 제가 쓴 것에 대한 정당한 평가는 그만 두고라도 듣기 싫은 소리는 아니었다. 작품을 감상할 만한 여성이라면 첫째 자기의 작품 같은 것에 정력을 허비하지 않을 게고 그동안에 쓴 것을 모아둔 스크랩을 꺼내어 이삼십 개 되는 그 작품들을 읽던 때의 그 여인의 심경을 상상해보다가 얼굴이 화끈한 적까지 있으면서도 그 여성을 한번 보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는 것은 아니다.
“A하구두 오래간만이구, H에 찾아가면 한둘쯤은 반색할 사람도 있는 터고, 하기야 서울서 구나 시골 가서 구나 같은 놈이야 별수가 있나…”
그는 이렇게 이번 여행을 합리화시켜도 보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로 하여금 결단을 내리게 한 것은 요새 며칠째 삼각형으로 일그러진 주인 여편네의 상판이었다. 지난 가을에 적선동 하숙을 쫓겨났을 때는 돈십원이나 생긴 것이 있어서 아주 희떱게 선금을 내놓아서 그 바람에 군소리 없던 주인 여편네가 한 달 두 달 소 외양 밑자리 모양으로 깔아가기만 하는 것을 보고는 된불이나게 채치기 시작한다. 더욱이 낯선 친구들이 며칠돌이로 그의 뒤를 수소문하는 데 겁을 버쩍 집어먹은 모양이다.
오랜 밥값도 못 되는데다가 전후 다섯 달 동안에 갓난애 오줌 싸듯이 짤꼼짤꼼 몇푼 주고는 이 달 접어들면서는 그나마도 시치미를 뗐다.
그래도 신문사에 가 있는 장편소설이 팔린다는 바람에 눈치만 슬슬 보던 주인은 그것도 싹수가 노란 것을 어떻게 눈치를 챘는지 하루에도 몇 번씩 김씨 하고 어디서 “ !” 배워먹은 김씨인지는 모르지만 문안을 드린다.
“김씨, 오늘은 좀 생각하셔야죠.”
“그저 조곰만 더 참으슈.”
한성이가 입에 익을 만큼 되풀이해온 대답이었다.
“글쎄, 김씨두 염치가 있지… 사리가 분명한 양반이 하루 이틀 밀리는 것도 면구스러울 텐데! 이것 벌서 몇 달쨉니까?”
“글쎄, 없는 걸 그런다구 나옵니까? 남같이 맘두 모지지 못해서 강도질도 못하고 말할 만한 데는 다 구멍이 막혔으니 어쩝니까? 신문사에서 그 소설을 산다니까 며칠만 더 참으슈!”
소경이 제 닭 잡아먹는 줄 모른다는 격으로 그 막연하게 며칠이라는 바람에 호랑감투를 써온 마누라는 그의 고의춤이나 움켜잡듯이 달구쳤다.
“시굴년 보리마당질 내세우듯 며칠만 내세우지 말고 똑떨어지게 날짜를 말하구려.”
“그믐! 아니 그날두 안 되겠군. 새달 초닷새로 하지요. 그날은 때도 안 묻은 시퍼런 딱지로만 갖다드리리다요.”
이렇게 확확 불어넘긴 그였다.
그러나 닷샛날도 지났다. 닷샛날만 지나면 그만이겠는데 마누라쟁이는 엿샛날도 이렛날도 닷샛날처럼 볶아댄다. 이 닷새가 벌써 몇 번이나 지나갔는지 알 길조차 없는 지금의 그다.
이러한 판에 운수 불길한 돈십원이 주머니 속으로 들어오자 돈내를 맡기나 한 듯이 그날 저녁때에 A한테서 편지가 온 것이다.
A의 편지를 받자 그의 마음은 다시 H시에로 쏠리었다. 북쪽이라고는 의정부밖에 가보지 못한 그라 북국의 신흥도시라는 그것만으로도 그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한 조건이었다. 그리고 오래간만에 친구를 만난다는 것이, 아니 그보다도 자기의 작품을 꾸준히 애독해준 한 여성이 자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 A의 말마따나 타협만 하면 결혼할 것까지도 생각하고 있다느니 만큼 근래에 와서 유달리 고독감을 느끼고 있던 그가 솔깃하게 들었다는 데 그렇게 부자연한 구석은 없을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조건이 그를 H시에로 이끈 것도 사실이나, 그보다도 사오십 원이나 밥값이 밀린 터고 보니 십원만 준다면 또 얼마 참아줌직도 한 일이지마는 하늘의 별이나 따듯 노심초사한 이 십원을 고스란히 갖다바치고 난다면 인제 언제 또 돈푼 구경을 할지 모르는 그였다. 어차피 다 끊지 못할 바에야 가고 싶은 데나 가서 며칠 마음 편하게 놀다 오리라는 엉뚱한 배짱도 앞섰던 것이다.
어쨌든 그는 하늘의 별 따듯 한 십원 한 장을 시계 주머니에 꼬기꼬기 접어 넣고는 살짝 몸을 빼치어 역으로 나왔다. 으수이 두 시간이나 남은 시간을 맥없이 앉았기도 무엇해서 우선 A에게 전보를 띄워놓고 삼십분 후에는 며칠 전에 시작된 진고개 어귀의 조그만 찻집에서 향락이나 하듯이 찻잔 모서리를 쪽쪽 빨았다.
2
편집온 후에야 멱살을 잡힌 채 종로 네거리에서 혼돌림을 받는 한이 있더라도 비지도 째지도 않은 찻간에 자리를 잡고 나니 숨이 다 내쉬이는 것 같았다.
차가 용산역을 빠져서 한강을 끼고 돌자 뒷덜미를 잡히는 것 같던 불안에서 해방된 듯 가슴이 다 벌어진다.
몇 달째 별러온 여행이지마는 짐이라고는 뚜껑 깨진 만년필 한 개뿐이다.
거뜬하기는 해도 어쩐지 허전했다. 차창에 기대어 얼마 전부터 짜다 둔 장편을 마물러보리라는 기대도 한 여행이지마는 당하고 보니 그렇지도 못했다. 그는 찻간 넷을 더듬어 「주간 조일」을 한 권 사들고 그것을 뒤적이며 시간을 보냈다.
의정부에 차가 닿자 찻간은 호젓할 만큼 사람이 내렸다. 동저고릿바람과 어울리지 않는 중절모자는 거의 다 내리다시피 했다.
그의 맞은편에 커다란 부댓짐을 메고 출구를 찾던 까무족족한 얼굴에 야무지게 보이는 여덟팔자 수염을 기른 사십이 될락말락한 사나이도 역부가 의정부를 외치니까 줄달음을 쳐 나간다.
박박 깎은 머리, 날선 콧날, 얄따라한 입술, 코밑에서부터 시작된 고랑은 아랫입술까지 연달았다. 얼굴 요량해서는 격에 안 맞을 만큼 쫑긋한 귓바퀴. 비록 부댓짐을 지기는 했을망정 균형된 얼굴이었다.
그는 그 얼굴을 지금 쓰려는 소설의 여주인공 찬영의 아버지를 삼으리라 하였다.
그것은 그리 흔한 얼굴이 아니었다. 그러나 어딘지 조선 사람의 전형적인 일면을 보이고 있다고 생각되었다. 더욱이 그 얼굴은 소위 양반의 얼굴이었다. 그는 상투를 찌우리라 했다. 수염을 조금만 더 붙이게 하고 흰털을 반쯤 섞고 고동색 마고자에다 뿔관을 씌우고 삼팔바지를 입히고 까만 편리화를 신기리라 했다.
십 년간 이것이 「 」. 장편의 제목명이었다. 병규라는 아버지와 찬조, 찬식, 찬영, 이 삼남매를 중심으로 기미년 전후의 십 년간 조선이 밟아온 길을 그려보자는 것이었다. 찬영은 과도기에 있는 조선의 전형적 여성이었다.
눈앞에 가로타고 앉은 싸늘한 현실이 그의 현실을 떠난 허영과 합치되지 못하고 비극으로 끝나게 되는 그 경로를 쓰려는 것이다.
찬영은 일찍이 그의 약혼자이던 현순을 모델로 한 것이다. 아직도 남부럽지 않게 지낼 만한 대대로 전해오던 재산 끄트러기가 남았던 시절에 약혼했다가 그의 파산과 함께 깨어진 너무나 가슴 쓰린 기억이다. 팔 년 전 일이었다.
‘찬영이란 년을 음탕하고 잔인하고 혀영투성이를 만들리라. 못된 구렁에 빠져서 숨이 넘어갈 때까지 하닥하닥하는 불행한 계집을 만들리라!’
값싼 소설가인 그는 현순에게서 받은 굴욕을 소설 속에서 복수하려 하였다.
‘이것이 장부의 할 짓이냐?’
스스로 타이르지 않은 바도 아니었지마는,
“나는 파산이기 전의 김한성 씨와 약혼한 것이지 불쏘시개도 못하는 인텔리 룸펜하고 약혼한 기억은 없습니다.”
하고 문을 탁 닫고 나가던 현순의 그 마지막 밤 일은 생각만 하여도 가라앉았던 복수욕이 뻐근하게 가슴을 채우는 것이었다.
이러한 굴욕을 남기고 간 현순이건마는 오히려 잊어버리지 못하는 그였다.
미워하면 미워할수록에 그리웠다. 살점을 싹싹 저미고 싶을 만큼 미워하는 현순이면서도 품안에 꼭 끼고 아스러지게 안아주고 싶은 현순이었다. 현순이라는 그 이름자를 보기만 해도 치가 떨리는 현순이면서도 그 글자도 못보면 삶이라는 것까지 무의미한 것 같았다. 탄력이 없었다.
현순은 이뻤다. 그러나 한성이가 그의 미에만 끌린 것은 아니었다. 미에 끌리기도 했지마는 미보다 그의 맺고 끊는 듯한 성격에 사로잡힌 것이다.
다른 여성과 같이 우물쭈물 꾸미어대지를 않고 맺고 끊는 듯 칼로 친 듯 “인제 너는 돈이 없어졌으니까 그만 미끄러져라.”하는 태도에 끌린 것이다.
만약 현순이가 자기의 파산을 보고 마음이 변하여 슬슬 피하고 딴 남자와 거리를 싸다니고 하여서 은연중에 자기의 마음 변한 것을 나타내서 이쪽이 제풀에 꼭지가 물러 떨어지게 했다면 그는 그 자리서 단념해버릴 수도 있었겠고 또 그러한 현순이었다면 , 저쪽에서 아무리 목이 말라 덤빈다 하더라도 눈도 거들떠볼 그가 아니었다.
“그러면 당신은 김한성과 약혼한 것이 아니라 김한성의 재산과 약혼한 것이었던가요?”
하고 서슬이 퍼렇게 덤벼들었을 때도 가늘게 뜬 눈에 웃음까지 띠고 방정식이나 외듯이 더듬지도 않고 이렇게 말한 현순이었다.
“처음부터 한성 씨의 재산과만 약혼한 것이 아니지요. 허지만 한성 씨에게 그만한 재산이 없었다면 약혼하지 않았을는지 모르지요. 아니 애당초에 그런 한성 씨였다면야 오늘날과 같은 환멸은 안 느꼈을 것입니다.”
이렇게 내차는 계집을 미워하기는커녕 담씬 안아주고 싶을 만큼 귀엽게 본 그였다.
그러나 한번 자기를 박차고 간 계집의 치마끈을 잡고 늘어질 한성은 아니었다. 그는 깨어진 가슴을 안위키 위하여 있는 정열을 문학에 바쳤다. 그는 읽고 썼다. 읽음으로 해서 바삭바삭 소리가 나도록 건조해진 머릿속에 새로운 끈기가 생기는 것을 느끼었다. 쓰면 쓸수록에 한 걸음 앞으로 나가는 자기 자신의 붓끝을 바라보고는 홀로 기뻐하였다.
그런 지 얼마 후에 그는 현순이가 전라도 어떤 과부의 아들과 결혼한다는 소문을 들었을 뿐이다. 이 소식을 그에게 전한 평론가 R은,
“하여튼 귀여운 여자야. 현순이는 자기 자신을 ‘거미줄을 타고 세상을 건너려는 계집’이라고 부르데나그려. 거미줄을 타고 세상을 건너려는 계집! 잘한 말이지? 잘한 말은 못 된다더라도 어쨌든 평범한 여자로서는 못할 말이야, 하하…”
그리고 R은 “거미줄을 타고 세상을 건너려는 계집”이라는 말을 몇 번이나 마치 입에 맞는 시구나 되뇌듯 하였다.
“거미줄을 타고 세상을 건너려는 여자!”
한성은 이렇게 한번 입 속으로 중얼거려보았다.
차는 새벽을 향하여 세차게 달리고 있다. 웬만한 정거장은 기별만 전하고 휙휙 지나간다. 세상에 나서 처음 대하는 북국의 자연을 어둠 속에 지나게된 것을 아까이 여기며 그는 잠이 들고 말았다.
3
편집신흥하는 북국의 도시 H에서 내린 것은 아홉시 반을 조금 지났을까말까 한 때였다. 예측대로 A가 나와 있었다. 그가 장꾼들한테 길을 빼앗기고 엉거주춤하게 내리는 것을 모르고 적이 실망한 낯으로 승강대를 바라보고 섰던 A는 쫓아오며 짐이나 받을 듯이 팔을 내밀었다.
그는 짐 대신 팔을 내밀었다.
“치웠지?”
“아니.”
“참 H에 한번 오기 어렵기도 하이.”
“미안하이.”
이러한 대화를 주고받으면서도, 이것이 삼 년 만에 만난 친구간의 할 이야긴가 하고 생각하니 자기네만큼 멋멋한 사람들도 없을 것 같았다.
시골 역으로 해서는 역전도 넓다.
“어떡할까? 뻐스? 걸을까?”
“맘대로. 내야 절에 간 색시지.”
“뭘, 철장 같은 다리를 가졌는데 걸어가세나그려, 이야기도 할 겸.”
북국서도 봄은 온 성싶었다. 삼십년형(型) 구식 포드가 내로라 하고 거리를 질주하는 것도 시골의 도시 맛이 났다.
얽빼기 아스팔트 위를 그들은 천천히 걸어갔다.
시골 도시라고는 하지마는 봄치장한 것이 조금도 어색스럽지 않다. 쇼윈도 에 채비하고 있는 봄거리도 다 제자리를 차지하였다. 오히려 북국의 미인을 대하는 듯한 청초한 맛까지 났다.
“요새 며칠내로 바람이 불고 하더니 자네 오는 날 마침 날씨가 이렇게 좋네그려.”
“말이 되나. 서울의 귀빈이 ─ 그나마도 이렇다는 문인이 오는데 잘 보여야 좋은 인상을 주잖겠나? 허허허.”
한성은 깨어진 양철 두드리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A는 한성이가 얼떨떨했을 만큼 좁다란 골목을 이리저리 끌고 다녔다. 그러더니 싸리 울타리에 밋밋하게 달린 높다란 대문 안으로 끌고 들어간다.
책상 한 개에 책 몇 권, 이불 한 채뿐인 살풍경인 A의 하숙방에서 아침을 먹고 A는 반룡산으로 그를 끌고 나선다.
누에 머리 형상으로 된 산모퉁이를 타고 올라가니 백여 년씩은 다 돼보이는 노송이 애송이 잔솔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멀리 H평야에 무르녹는 봄기운을 노송답지 않게 마시고 섰다. 주홍빛 흙은 비단 보료나 디디는 듯 포근포근하다.
“저것이 성천강일세. 이것이 여어 보이는 다리 말일세, 저것이 만세교고. 사흘만 더 일찍 왔더면 좋은 구경을 했을 것을. 참 볼만하이. 정월 보름날이면 다리 밟기라고 해서 H사람들은 모두 한 번씩 저 다리를 건너보는 풍속이 있다네.”
A는 눈에 뜨이는 대로 가리키고 설명하고 하였다. 영생고보니 우편국이니 병원이니 눈에 스치는 큼지막한 집을 일일이 설명해준다.
한성도 시야에 새로운 것이면 무엇이나 자진해서 물었다. 연대 병사며, 감옥, 넓은 거리가 보이면 그 동명까지 일일이 물어서 웬만한 것이면 머릿속에 적어넣었다.
“저긴 어딘가? 저긴 참 한적해 보이는데.”
그는 총(叢)자 형상으로 숲이 우거지고 그 앞에 가느다란 강물이 반월을 그리고 있는 H 시외의 한 동리를 가리키다가 가슴이 성큼해서 섰었다.
“B동.”
하고 A가 대답한 까닭이었다.
“B동?”
그것은 A의 말을 빌린다면 저녁놀에 홀로 핀 백장미같이 청초한 미인이 ─ 그의 애독자가 살고 있다던 바로 그 동리였다.
“저기가 B동이라?”
“왜 가슴이 울렁울렁하나?”
“미친 사람! 가슴이 울렁거릴 거야…”
말은 하면서도 한성은 얼굴을 붉히었다.
‘대관절 뭘하는 여잔가?’
한성은 무엇보다도 그것이 궁금하였다. 그러지 않아도 이때껏 “가네, 가네.”하고는 초라니 대상 물려오듯 한 이번 길을 이 계집이 있다니까 이렇게 갑자기 서둔 것이나 아닌가 하는 의심을 받을지도 모를 것 같아서 자진해서는 말을 꺼내지 않으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이 한 번 보지도 못한 애독자가 이번 그의 결심을 촉진한 것만은 그 자신도 부인치 않았다. 상호간의 의사만 상합하면 화촉지전을 이루리라 는 그 말에만은 적이 불쾌한 인상까지 받았지마는 어쨌든 한번 대하고 싶다는 정도의 호기심이 자기의 결심을 재촉한 것만은 사실이었다. A 자신은,
‘한성이란 놈이 단단히 마음에 든 게야’하고 생각할지 모르지마는, 그리고, 하기야 나이 삼십이 넘은 노총각이 그만한 미와 그만한 교양을 갖추었고 더욱이 자기 작품의 가장 열렬한 애독자인 여자를 아내로 삼는다는 것을 거부할 사람도 없기는 하겠지마는 한성 자신은 되레 제 녀석이 고르고 고르다 남은 찌꺼기라 못 먹는 떡 개나 준다는 셈치고 내게다 떠맡겨보려고 하는 그 태도에 모욕감까지 느끼는 것이었다.
만약에 그가 기혼자이고 , ‘이러이러한 사람이 있으니 안 만나보려는가’
한다면 물론 이런 델리컷한 감정은 안 들었을지도 모른다.
“한번 만나보지 않으려나?”
A는 들여다보듯이 재차 물었다.
“글쎄, 만나봐도 좋기야 하겠지마는 ─ 나 자신이야 물론, 그렇지마는 자네두 자네 친구를 왔던 차에 소개한다는 그런 정도라면 만나본대도 좋지.”
“무척 뒬 까네. 어련하리, 가보세나.”
A는 한성이가 한 말의 뜻을 다 이해치 못하는 것 같아 보였는데도 대답만은 이렇게 선선하였다.
“갈까.”
“염려 없나?”
“염려라니?”
“공연히 또 한 번 보고 나자빠지리?”
“제발.”
그들은 멀리 평야를 바라보고 커다랗게 웃어붙였다.
“천천히 가도 좋겠지!”
“웬걸, 바루 가야지!”
“안 왔으면 모를까! 온 김이니 장 군의 무덤이라도 보고 가야 하잖겠나?”
“장 군의 무덤?”
한성은 가슴이 서먹하였다.
“왜, 장을 모르나? 저 K사건으로 옥사한 장 군 말일세.”
“아네! 아네!”
한성은 고함을 치듯 소리를 질렀다.
“장 군을 내가 모르고 누가 알겠나!”
그렇다! 장 군을 속속들이 아는 사람은 한성이었다.
조선에 신경향문학이 들어오던 초기에 있어서 살인 주사침 같은 붓끝으로 우리의 슬픔을 노래하고 돌진하라고 고함치던 장 군. 잡지 「화성」을 활무대로 대중을… 부쩍부쩍 투쟁 속으로 이끌고 가던 장 군!
그러나 그는 붓끝에 매인 사람이 아니었다. 가느다란 붓끝만으로는 펄펄 끓는 정열을 쏟을 길이 없는 장 군이었다.
하루아침 그는 붓을 꺾어버렸다. 활활 타는 화로 속에다 붓 동강이를 살랐 다. 그러고는 한성을 향하여 외쳤던 것이다.
“붓을 꺾어버려라!”
화성 을 둘러싸고 「 」 있던 일곱 사람의 동인 중에서 다섯 사람은 맹렬히 장 군과 보조를 맞추었다. 그리고 천륜이라는 억센 인연으로 맺어진바 부자의 의도, 형제의 혈연도 끊어버리고는 몸을 솟구쳐 불 속으로 뛰어갔었다.
“너 같은 인간은 몇 만 명이 있어도 일없다. 자, 우리가 꺾어버리는 붓이 아깝거든 그 동강이라도 주워가지고 가렴!”
가장 가깝고 가장 많은 이해를 가지고 사귀어 내려오던 장 군은 이 말 한마디를 계기로 그로부터 영원히 떠나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장 군으로부터 버림을 받은 한성은 몇 해 굴러다니는 동안에 다시는 추어보지 못할 인간 쓰레기가 되고 말았다. 비속하기 짝이 없는 조선의 저널리즘에 추파도 보내어 종이값도 못 되는 원고료로 그날그날을 연명해가는 그지없이 초라한 인간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장 군과 현순 ─ 그들은 좋은 대상이었다.”
그는 가벼이 한숨을 내쉬었다. 동앗줄처럼 믿고 있던 장 군이 간 지 일년이 못 되어 현순도 가고 말았던 것이다. 하나는 허영의 화염 속으로 뛰어들어갔고, 또 하나는 다른 화염 속으로 같은 정열과 같은 담력을 가지고 뛰어들어간 것이었다.
“장 군의 무덤은 여기서 먼가? 공동묘지였지?”
그는 간신히 물었다.
“응, 가보려는가?”
“가야지! 가볼 면목은 없지마는 그대로야 갈 수 있나. 여기서 먼가? 아니, 멀면 대순가. 가세.”
“웬걸, 이십분이면 족하이. 오던 길에 우리 자네 애독자한테도 다녀오세나그려. 마침 고 근처니까.”
A는 이렇게 권하였다.
“허지만 장 군의 무덤엘 간다면 우울해질 터인데 그 기분으로 모르는 사람을 대하는 것이야 실례 아닐까?”
한성은 이런 걱정까지 하였다.
“글쎄, 그편이 나으이. 누가 안다던가. 그 여자를 보는 것이 장 군의 무덤을 찾는 것보다도 더 우울한 일이 될지…”
“그건 왜?”
한성은 어쩐지 가슴이 서먹했던 것 같았다.
“왜냐고? 글쎄, 그럴 이유가 있지. 만나본다면 알 일이지마는…”
“그게 모두 무슨 소릴까?”
“허허허, 그렇게도 알고 싶은가?”
는 격에 맞지 A 않는 웃음을 한번 웃고는 머뭇머뭇하는 눈치더니,
“그만한 미인을 보고 우울해지지 않을 자가 누구야?”
하고 껄껄 웃는다.
“어어, 이 사람두…”
인류의 행복을 두 어깨에 짊어지고 싸워나가던 장 군의 큰 뜻과 그 의기는 한 평도 못 되는 반룡산 한구석에 동그마니 흙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장만억, 석 자 중 억자는 겨우 알아볼 만하게밖에 흔적이 안 남은 푯말을 보는 순간 한성은 소리를 내어 울고 말았다.
“너 같은 인간은 몇 만 명이 있어도 쓸데가 없다!”
하던 구 년 전의 그 말이 그를 울리고 울리고 하였다.
지나간 구 년 동안 자기가 밟아온 그 길, 커다란 검은손이 뚫어놓은 구멍을 눈등 간지러운 교활과 밥알로 새를 잡으려는 것과 같은 간사하기 짝이 없는 이지로 교묘히 피해온 장 군을 싸고도는 지나간 그때의 장면을 추억하며 한성은 울고 울고 하였다.
그러나 지하의 장은 그에게서 눈물이 아니라 새로운 출발을 바라고 있다는 것을 한성은 깨우쳤어야 할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너무나 초라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비라도 하나 해 세울 수 있었으면…”
4
편집그들은 구장터로 내려와서 H시의 명물이라는 국수를 한그릇 시켜 먹었다.
엿이니, 돗자리, 오지그릇 따위를 벌여놓고 앉았는 부인네들을 국수집 이층에서 한동안 구경하다가 가벼운 기분으로 A의 뒤를 따라섰다.
“H란 살기 좋은 곳, 란란란란…”
A는 가끔 편지할 때마다 창작 노래라던 H예찬가를 쉴새없이 불러서 그를 웃기려고 애쓴다.
H고보를 옆으로 보며 영생고보 턱밑을 빠져서 다시 대통 같은 골목으로 한동안 들어가던 A는 그를 우물가에다 세워놓는다. 그러고는 다짐이나 받듯이,
“어떠한 일이 있든지 우울해서는 안 되네. 약속하겠지?”
“암.”
한성은 웃음까지 섞어서 쾌쾌히 대답하였던 것이다.
다짐을 받은 A는 다시 걷기를 시작하였다. 그러더니 우물가에서 여남은 집 떨어진 단출한 대문 앞에 서더니,
“여기 잠깐 섰게나.”
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문패에는 ‘박우순’이라고 씌어진 것이, 말하던 예의 그 여자와는 성만이 같았다.
안에서 문 여닫는 소리가 난다. 그러고는 다시 한동안 잠잠하더니 다시 문여는 소리가 나고 구두 뒤꿈치만 딛고 걸어오는 발소리가 났다. 한성은 마치 아주 오래간만의 연인을 만나기나 하는 것 같은 가슴의 동요에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자, 들어오게. 지금 감기로 누워 있는데, 뭘 어떤가. 당자가 좋다는 데야 ─ 자네만 해두 그이의 병 낫기를 기다릴 수도 없을 게고.”
머뭇머뭇하는 한성을 이렇게 달구쳐서 A는 먼저 앞을 섰다. 그는 A가 시키는 대로 할밖에 없었다.
마당 안으로 들어서니 흐너진 조그만 화단 자취가 있다. 그 옆에 가는 철사로 얽은 으수이 한 평이나 되는 닭도 없는 닭집이 있다.
보기만도 이 집 주인은 순결하고 고상한 취미를 가졌으리라는 것이 추측되었다.
미닫이가 다르륵 열린다. 그 다르륵 소리에 맞추어 그의 가슴도 다르륵 떨렸으나 나타난 얼굴은 조그만 소녀였다.
“자, 들어가세.”
A는 또다시 앞장을 섰다. 손이 왔음에도 불구하고 주인이 낯바대기도 안 보인다는 것이 적지않게 불쾌했으나 그는 A를 따라 방으로 들어갔다. 방은 텅 비었었다. 아랫목에 꽃 놓은 돗자리가 한 닢 깔리고 재떨이에 은하 한 갑이 놓였을 뿐이다.
A의 지시대로 그는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이 방에 들어와서부터 도무지 마음을 진정치 못하는 듯한 A의 태도가 한성의 눈을 벗어나지는 못하였다. 한동안 담배를 피우다 일어났다 하더니 정색을 하고,
“저 방에 있는데 문을 열더라두 자빠지지 말게.”
하고 또 한번 다지는 바람에야 한성은 ‘킥’하고 웃음을 터뜨리었다. 그러고는 A의 손등을 꼬집었다.
“A 선생님, 문 좀 열어주세요.”
하는 소리가 옆방에서 났다. 그는 그 말소리에서 너무나 파리한 여주인을 보았다. A는 흘끗 한성의 눈치를 훔쳐보고는 가만히 몸을 일으키었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연극을 꾸미는 것 같은 A를 간지러운 듯한 감정으로 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미닫이가 열리며 이쪽을 내려다보는 그 얼굴을 보고야 한성은 A가 연극을 꾸미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연극은 연극이었다. 그러나 그가 연극이라고 생각한 것은 A의 동작을 의미한 것에 멈췄던 것이다.
“김 선생님!”
그 얼굴의 주인공은 이렇게 자기를 불렀다고 한성은 생각하였다. 그러나 기실은 문이 열리기 전부터 가득하게 눈물 괸 눈으로 그 여인은 아랫목을 내려다보고만 있었을 뿐이었다.
잣쪽만해진 얼굴, 바스러진 머리, 샛문 틀을 붙잡아서 겨우 몸을 가누고 있는 그 여인, 그것은 팔 년 전의 현순 바로 그 사람이었던 것이다.
“오오, 현순!”
이밖에 그는 말을 못했다. 그는 A의 존재도 잊어버렸다. 그리고는 현순의 앞으로 썩 나서서 이불을 싸고 앉은 현순이를 들여다보았던 것이다.
“선생님, 놀라셨지요?”
그는 대답을 못했다.
그 대신 A를 쳐다보고 물었다.
“A군, 나는 아무것도 모르겠네. 자네가 대답해주게나.”
“날더러 대답을 하란 말인가?”
하고 그는 앉았다.
“그전에 난 자네한테 사과를 해야겠지. 그러나 놀라지 않는다는 약속이었으니까. 지금까지의 모든 것은 현순 씨가 한 일일세. 나는 다만 시키는 대로 좇았을 뿐이야. 평범한 말로 이것을 표현한다면 운명이겠지, 운명. 그러나 이 이상 나는 더 말할 수가 없네. 현순 씨의 입에서 자기의 과거를 들을 수도 인제는 없겠지. 지난 팔 년간 한 여성이 걸어온 길은 그 여성의 기록이 설명해줄 것일세.”
A가 이렇게 말을 마치기도 전에 현순은 한성의 무릎에 엎드려 울음을 터뜨렸다. 벌써 울 기운조차 없이 된 현순이건만 한성의 무릎이 흥건하게 젖도록 울고 울고 했던 것이다.
과거 팔 년간 그만큼 울어본 현순이었건마는 울어도 울어도 끝이 없었다.
설움은 설움을 낳고 눈물은 눈물을 자아냈다.
그러나 운 것은 현순만이 아니었다. 한 불행한 여성의 설움은 한성의 눈물줄기를 이끌었다. 그리고 한 여성과 친구의 설움은 또한 A를 울렸던 것이다.
5
편집에게 끌리다시피 하여 A 현순의 집을 나온 한성은 싸우듯 A를 집으로 보내고 혼자서 밤거리를 헤매었다. 일찍이 수백 편의 소설을 읽어오고 수십 편의 소설을 써온 그였지마는 이러한 현실은 본 적도 없었거니와 써볼 생각도 못했던 것이다. 믿어도 믿어도 믿어지지 않는 사실! 믿어서는 안 될 것이로되 오히려 사실로 존재해 있는 이 사실, 한성은 오직 아연했을 따름이었다.
현순이가 시킨 노릇이라고는 하지마는 이러한 연극을 꾸며놓은 A가 원망스러울 뿐이었다.
그날 밤 세시까지 그는 거리를 헤매었다. 왜 헤매는지 이 현실의 그 어느구석이 자기를 괴롭게 하는지조차 그는 몰랐다. 다만 뻐개질 듯이 괴로운 가슴의 고통을 깨달을 뿐이었다.
이 괴로움을 가슴에 안은 채로 잠이 올 리는 만무하였다. 그보다도 아직도 서먹서먹한 사이인 A의 동료인 J에게 그 꼴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 그는 그날 밤을 여관에서 새우고 이튿날도 정오나 되어서 A의 하숙으로 돌아갔다.
“아이구, 인제 오시는군!”
주인마님이 덤벼들듯 반가워한다.
알고 보니 새벽에 수색원을 내려다가 ‘함창여관’에서 유한다는 말을 A에게서 듣고 그만두었다고 한다.
“A가 그래요?”
하고 그는 좀 의아했다. 그러고 보면 간밤에 밤새도록 자기의 뒤를 따라다닌 것이로구나 생각하니 그의 우정에 새삼스러이 감사하는 마음이 생겼다.
방에 들어가기도 싫고 해서 퇴에 앉았으려니까 A도 친구 집에서 자고서 그제서야 돌아왔다.
그날 밤 A와 함께 또 현순을 찾았다.
현순을 본다는 것은 ─ 더욱이 오늘날과 같은 비참하게 된 현순을 본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현순 ─ 아무리 제 잘못으로 제 몸을 그르친 현순이라고는 하더라도 이미 죽음을 며칠밖에 남기지 않은, 그나마 도 모든 사람이 기피하는 병이라고는 하지마는 그러한 현순을 보고도 못 본체한다는 것은 그에게는 더 괴로운 일이었다. 벌써 그를 구해줄 힘은 그에 게는 없었다. 아니 이 세상의 그 누구에게도 없을 것이었다. 그 앞날도 며칠 안 남은 한 여성을 마음껏 안위시키어 최후의 마지막 시간이나마 행복스 러운 마음으로 죽어가게 하자는 것이 그의 위안이었던 것이다.
“오셨어요?”
갈 때마다 현순은 눈물을 머금었다. 그것을 보는 것은 그에게는 너무나 괴로운 일이었다.
“현순이, 왜 나만 보면 우오? 만약 그런다면 나는 내일이라도 서울로 가고 말 겁니다. 자, 약속해 주시오.”
현순은 순진하게 고개를 숙이었다. 그러고는 갈퀴발같이 된 손으로 그의 손을 자그시 쥐는 것이었다.
이튿날은 혼자서 오전에 갔다. 마침 의사가 와 있어서 사생 여부만을 가만히 물었다.
“글쎄요, 병자한테는 못할 말이지마는 어렵겠지요. 폐란 제삼기를 넘는다면 그만이니까. 혹 산다면 그것은 기적이겠지요. 그러나 병자에게는 절대 그런 말을 말도록 하시는 것이 좋을 겁니다. 워낙 하르빈에서 여기 왔을 때 부터 절망이었습네다.”
그러나 할빈에서 어떠한 생활을 하였는지는 의사도 모르는 모양이었다. 아니 의사 뿐이 아니라 A까지도 현순이가 하르빈에서 왔다는 것만을 알 뿐이요, 하르빈에서의 그의 생활에 대하여는 아무런 지식도 갖고 있지 못했었다.
그것은 오직 그의 기록만이 알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 기록은 일찍이 A가 첫장을 한 번 보았을 뿐, 아직도 그것을 읽어본 사람은 없었다.
뜻하지 않은 현순과의 해후(邂逅)로 한성의 상경은 하루하루 밀리어 갔다.
그는 현순의 병석을 떠나지 못했다. 그는 붙박이로 밤낮을 꼬박 새기도 했다.
잠이나 좀 푹 자리라고 A의 하숙으로 온 어떤 날 새벽이었다. A가 허둥지둥 쫓아왔다. A와 그가 병실을 나온 지 세 시간이 못 되어 사람이 왔다는 그것만으로도 그는 모든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웬일인가?”
그는 바지를 꿰며 물었다.
“아마 몰핀을 먹은 모양이야, 나무랄 수도 없는 일이지만…”
그들이 간 때는 의사도 다녀간 후였다. “현순!”하고 한성의 부르는 소리에 현순은 겨우 눈을 떠서 한동안 쳐다보더니 다시 눈을 감는다. 그래도 미진했던지 커다란 눈물이 눈물 자신보다도 섧게 천천히 천천히 볼을 흘러내리고 있다.
“선생님, 저언 거미줄을 타고 세상을 건너려던 어리석기 짝이 없는 계집입니다. 그러나 하늘이 도우사 선생님의 품안에서 죽게 된 것만으로도 그지 없는 행복감을 느낍니다…”
혀도 굳어진 지 오래였었다. 현순은 가슴속에 서리고 서린 하소연을 제 입으로 전할 길 없이 간단한, 그러나 너무나 침통한 A와 한성에게 남기는 편지 한 장씩을 남기고 영원히 가고 말았던 것이다 ─
“이놈! 이놈아! 이 되놈아!”
“아이구머니! 저놈!”
가끔 이렇게 되뇌는 헛소리! 이것만으로도 이 기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짐작되는 것이었다.
“죽여라! 죽여!”
이렇게 부르짖을 때마다 현순의 얼굴은 추할 만큼 일그러졌다. 열이 사십도까지 올라간 후로는 전혀 의식을 잃고 “한성 씨! 한성 씨!”를 되풀이하던 현순은 그 한성이를 옆에 놓고는 그대로 가버리었다.
그러나 공포와 환희의 연쇄인 그의 일생은 끝났다.
가고 만 현순. 저의 말마따나 거미줄을 타고 세상을 건너려다 떨어진 한 여성의 오백 페이지나 되는 그 참회록(懺悔錄)은 장차 소설가인 한성의 주선으로 발표될 것이겠기에 작자는 이 이야기는 여기서 끝맺으려는 것이다.
오직 작자가 바라는 것은 한성과 같은 먹기 위해서 글을 쓰는 작가의 붓끝이 그 여성의 생생한 기록에 너무 많이 그어지기를 기뻐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에게 충고해둘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