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천여명의 박수소리

'첫 무대의 회상'을 쓰라시는 부탁을 받으니 지나간 거 옛날의 모든 것이 새록새록 회상되어 바이올린의 줄을 올려 온 이십여년의 기나긴 세월이 덧 없기도 합니다.

바이올린을 시작하기는 지금으로부터 이십이년 전, 즉 14세때부터 인데 그 때만 해도 세상이 어두운 때라, 음악에 대한 이해가 적었다기 보다는 차라 리 없었다고 하는 것이 옳은 말일 것입니다. 그러나 바이올린을 보기만 해 도 그 때 사람들은 신기하게 여겼으며, 이해는 하지 않으면서도 그래도 그 묘한 리듬에 많은 호기심이 쏠렸던 모양입니다.

그 때 처음으로 바이올린을 배우기는 지금 배재고보에 계신 김인식씨에게 배웠는데 무슨 동기에서 시작을 했는지는 확실히 모르겠느나, 어쨌든 매일 같이 김선생을 찾아다니며 열심으로 공부를 했는데 그 때 나이가 열네살이 었습니다. 물론 김선생도 시작하기를 독습으로 했으니까 특별한 기술이라는 것이 없었으므로 일년을 같이 하고나니까 피차의 기술이 같아져서 더 배우 려고 해도 별로 배울 것이 없을 만큼 되었습니다.

그렇게 일년을 배우고나서 그래도 내 깐에는 무슨 자신이 있었던 지 그 해 겨울, 그러니까 열다섯 살 때에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에서 크리 스마스 축하회를 한다고 하는 거기에 가서 독주회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악기 생김생김이 우습게 생긴 것과 또 소리가 묘해서 그랬는지 일반 청중들에게 대환영을 받았으며, 그 때는 음악에 대한 이해고 무엇이고 없었던 때이라, 반주 같은 것은 물론 없었으며 있는 줄도 몰랐습니다.

그 때 무대에 나서서 첫번으로 데뷔하던 때의 곡목은 (작자는 잊었으나) <샴페인 원무곡>으로 경쾌한 것이어서 그랬던지 재청을 받은 일이 생각나 며, 그 후 본격적으로 바이올린을 전공하러 동경으로 갔을 때(아마 그것이 대정8년 가을이었던 것 같습니다), 폴란드에 대기근이 생겨서 동경 각 단체 에서는 구제금을 모아 보냈습니다.

그래서 그 때 간다(新田) 청년회관(지금은 없으나 그 당시에는 동경 제일 의 홀)에서 구제금 모집음악회가 개최되었을 때 이시가와(石川義一)라는 명 수와 함께 출연한 일이 있습니다.

그 때만 해도 바이올린에 대한 대가라고 할 만한 이가 없었던 관계로 이시 가와씨와 함께 독주를 했는데 그 때 입장자가 삼천여명이나 되었으며, 외국 의 기근을 위하여 개최된 음악회라 출연하는 나 자신도 열과 성의와 긴장과 감격을 가지고 했기 때문에 삼청(三請)까지 받았는데 그 때의 나이가 스물 하나였습니다.

그 때의 나의 출연은 아직까지 머리에서 그 장면이 사라지지 않고 늘 생각 에 떠도는 만큼 감격에 넘쳤으며, 삼천여명의 박수성(拍手聲)이 아직도 귀 에서 울리는 것만 같습니다. 지금이라고 바이올린을 안하는 것은 아니나 그 때 만큼 긴장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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