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6개 로스쿨 인권법학회 시국 선언
부끄러운 나라에 살지 않게 해 주십시오.
국정원의 선거개입에 관한 국정조사와 대통령 책임,
그리고 국정원 개혁을 요구합니다.
1970년대 헌법 교수님들은 학생들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셨다고 합니다. 교과서나 칠판에만 시선을 둘 뿐, 학생들을 차마 응시하지 못하셨습니다. 유신헌법이라는, 법의 탈을 쓴 폭력을 헌법이라는 이름으로 강의하셔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2500명이 체육관에 모여서 대통령 후보 1명에 대한 투표를 하던 그 시절에도 헌법 제1조 제1항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이었습니다. 교수와 학생 모두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지 못하고 이 조문을 읽어갔습니다.
2013년, 예비 법조인으로서 저희는 다행히도 유신헌법을 배우지 않습니다. 대신 체육관에서 대통령 뽑던 시대가 어떤 희생과 고통 속에서 지금으로 변해왔는지를 배웁니다. 아직 충분하진 않지만, 그래도 한국사회 민주주의가 이 정도는 와 있다며 선생님들은 저희의 눈을 보시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민주화입니다. 부끄럽지 않은 나라에 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가장 근간이 되는 제도는 선거입니다. 대한민국 헌법 제1조 제2항은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우리 헌법은 공정한 선거를 통해서 국가 권력 구성에 주권자가 자신의 의사를 직접 반영하고, 이를 통해 비로소 국가 권력에게 정당성을 부여하고 있습니다.
선거는 특히 그 과정에서 공정성과 투명성이 절대적으로 보장되어야 합니다. ‘개입’이라는 단어가 결코 허용되어서는 안 될 선거에서 국정원의 조직적 여론조작과 선거 개입 의혹이 속속 검찰 수사와 언론을 통해 드러나고 있는 지금, 저희들은 참담한 심정입니다. 국가최고정보기관이 직원들을 동원해 “심리전”이라는 이름으로 문재인 후보 등 다른 야당 후보들에 대한 비방 댓글을 달고, 박근혜 후보 찬성 댓글을 달았다는 이야기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충격적이었습니다. 누가 명령했느냐, 누구까지 알았느냐를 밝히기 이전에 이러한 의혹이 등장했다는 것 자체에 대해서 모두가 절망해야 합니다. 우리 사회가 다시 부끄러운 사회로 돌아갔다는 증표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의혹은 가장 엄중하게 다루어져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저희가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사건을 축소하기에 급급한 경찰의 모습, 검찰 수사에 가해지는 노골적 압력이었습니다. 정부와 여당의 침묵과 물타기성 발언들이었습니다. 심지어 새누리당은 이 사건과 전혀 무관한 NLL까지 꺼내들어 문제의 본질을 흐리고 있습니다.
1970년대 초반 미국을 떠들썩하게 달구었던 워터게이트 사건에서 핵심은 닉슨 대통령이 상대 진영의 선거 캠프를 도청했다는 사실 보다, 그 이후 증거 인멸을 시도하고 거짓말로 사건을 무마시키려 했다는 것입니다. CIA를 동원해 FBI의 수사를 방해하라는 지시가 드러나면서, 닉슨은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됩니다. 미국 사람들은 자기 나라 권력의 추악한 행위에 절망했지만, 그래도 살아있는 권력에 칼을 겨눌 수 있는 의회와 최고재판소 등을 통해서 민주주의의 전통이 이어져가고 있음에 절망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부끄럽지 않은 나라에 살고 싶습니다. 간절한 마음을 담아 다음 세 가지를 요구합니다.
1. 철저하고, 공정한 국정조사를 요구합니다.
국가기관의 선거개입이라는 초유의 사태는 민주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우리 사회를 송두리째 흔드는 것입니다. 그 과정을 철저하게 밝혀내고 책임자들에게 엄중한 책임을 묻고, 다시는 이런 헌법질서의 유린행위가 벌어지지 않도록 우리 사회가 단호한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그 첫걸음은 국정조사입니다. 어떠한 외압으로부터도 자유로운 조사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국가기관과 각 정당들 역시 존립의 근거는 헌법과 민주주의입니다. 자신들의 당리당략에 따라 이 문제에 대응하려 한다면, 결국 자신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이미 부실한 경찰 조사와 검찰에 가해지는 외압을 보며, 여야가 합의한 국정조사를 여당이 일방적으로 파기하려는 모습을 보면서 이러한 우려는 현실이 되고 있습니다.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지 않길 바랍니다.
2. 박근혜 대통령의 분명한 책임을 요구합니다.
국정원 대선개입 의혹은 이미 선거시기부터 쟁점이 되었던 사안이며, 박근혜 당시 대통령 후보 역시 직접 TV토론에서 이 사안을 언급한 바 있습니다. 이 사안의 전모를 알았다면 부정한 대통령일 것이며, 전모를 몰랐다 하더라도 여당 대통령 후보이자, 당선자로서 책임을 피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이 문제에 대해 거리를 두려고 하더라도, 국정원이라는 국가최고정보기관이 자신의 당선을 위해 동원된 의혹을 외면할 수는 없습니다. 헌법 수호의 의무를 지는 대통령으로서, 헌법질서를 파괴하는 행위에 대해 가장 단호히 대처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대통령의 분명한 책임을 촉구합니다. 그 시작은 대통령 본인 스스로가 성역 없는 수사를 촉구하는 것입니다.
3. 국정원 개혁을 요구합니다.
“종북세력들이 선거정국을 틈타 트위터 등을 통한 허위사실 유포로 국론분열을 조장하므로 선제적 대처해야함.” 2011년 11월 18일 원세훈 전 국정원장의 ‘지시·강조 말씀’이었습니다. 그 선제적 대처라는 것이 직원들에게 아이디 돌려가며 조직적으로 댓글을 달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대한민국 국가최고정보기관의 실체였습니다. ‘내부의 적’과 싸운다며 직원들에게 인터넷 댓글을 달게 하고, 야당과 시민사회단체를 종북좌파로 규정하는 국정원은 더 이상 존립할 근거를 잃었습니다.
국정원이 선거에 개입하였다면, 이는 헌법질서를 기만하고 국민의 주권을 조롱한 것입니다. 국민 위에서 무소불위의 힘을 휘둘러서 국민들의 의사를 조정하고 왜곡할 수 있다는 초헌법적인 의식에 기한 행위입니다. 책임자를 징계하는 것을 넘어서서, 이후 이런 시도조차 일어나지 못하도록 그 구조 자체를 완전히 바꾸어내야 할 것입니다.
▲서강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노동법학회
▲서울시립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인권법학회
▲인하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공익인권법학회
▲전남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인권법연구회
▲한국외국어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인권법학회 Hulight
▲한양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공익인권법연구회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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