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7개 로스쿨 인권법학회 시국 선언


부끄러운 나라에 살고 싶지 않습니다


국정원의 선거개입에 관한 철저한 국정조사와 국정원 개혁, 그리고 대통령의 책임을 요구합니다.

1970년대 헌법 교수님들은 학생들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셨다고 합니다. 교과서나 칠판에만 시선을 둘 뿐, 학생들을 차마 응시하지 못하셨습니다. 유신헌법이라는, 법의 탈을 쓴 폭력을 헌법이라는 이름으로 강의하셔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2500명이 체육관에 모여서 대통령 후보 1명에 대한 찬반투표를 하던 그 시절에도 헌법 제1조 제1항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이었습니다. 교수와 학생 모두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지 못하고 이 조문을 읽어갔습니다.

2013년, 예비 법조인으로서 저희는 다행히도 유신헌법을 배우지 않습니다. 대신 체육관에서 대통령 뽑던 시대가 어떤 희생과 고통 속에서 지금으로 변해왔는지를 배웁니다. 아직 충분하진 않지만, 그래도 한국사회 민주주의가 이 정도는 와 있다며 선생님들은 저희의 눈을 보시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민주화입니다. 부끄럽지 않은 나라에 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가장 근간이 되는 제도는 선거입니다. 대한민국 헌법 제1조 제2항은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우리 헌법은 공정한 선거를 통해서 국가 권력 구성에 주권자가 자신의 의사를 직접 반영하고, 이를 통해 비로소 국가 권력은 정당성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 이유로 선거의 공정성과 투명성은 절대적으로 보장되어야 합니다. 선거 절차에 대한 의문이 제기될 때, 국가 권력의 정당성 역시 흔들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국정원의 조직적 여론조작과 선거 개입 의혹이 속속 검찰 수사와 언론을 통해 드러나고 있는 지금, 저희들은 참담한 심정입니다. 국가최고정보기관이 직원들을 동원해 “심리전”이라는 이름으로 문재인 후보 등 다른 야당 후보들에 대한 비방 댓글을 달고, 박근혜 후보 찬성 댓글을 달았다는 이야기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충격적이었습니다. 누가 명령했느냐, 누구까지 알았느냐를 밝히기 이전에 이러한 의혹이 등장했다는 것 자체에 대해서 모두가 절망해야 합니다. 우리 사회가 다시 부끄러운 사회로 돌아갔다는 증표이기 때문입니다.선거와 관련된 의혹은 가장 엄중하게 다루어져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저희가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사건을 축소하기에 급급한 경찰의 모습, 검찰 수사에 가해지는 노골적 압력이었습니다. 정부와 여당의 침묵과 물타기성 발언들이었습니다. 이 사안과 전혀 무관한 NLL을 느닷없이 전면에 등장시키면서 여론 왜곡을 시도하는 정치공작이었습니다. 조직의 위기를 모면하고자 국정원이 국가기밀을 임의로 공개해버리는 지금은 상황은 결코 정상적인 민주주의 국가라 할 수 없는 지경입니다.

1970년대 초반 미국을 떠들썩하게 달구었던 워터게이트 사건에서 핵심은 닉슨 대통령이 상대 진영의 선거 캠프를 도청했다는 사실 보다, 그 이후 증거 인멸을 시도하고 거짓말로 사건을 무마시키려 했다는 것입니다. CIA를 동원해 FBI의 수사를 방해하라는 지시가 드러나면서, 닉슨은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됩니다. 미국 사람들은 자기 나라 권력의 추악한 행위에 절망했지만, 그래도 살아있는 권력에 칼을 겨눌 수 있는 의회와 연방대법원 등을 통해서 민주주의의 전통이 이어져가고 있음에 절망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부끄럽지 않은 나라에 살고 싶습니다. 민주주의 근간인 국민 주권행사를 유린한 국가기관의 조직적인 범죄 의혹에 비통함을 느낍니다.이에 예비법조인으로서 저희는 간절한 마음을 담아 다음 세 가지를 요구합니다.

1. 철저하고 공정한 국정조사,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지 않길 바랍니다.국가기관의 선거개입이라는 초유의 사태는 민주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우리 사회를 송두리째 흔드는 것입니다. 그 과정을 철저하게 밝혀내고 다시는 이런 헌법질서의 유린행위가 벌어지지 않도록 우리 사회가 단호한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그 첫걸음은 여야가 합의한 국정조사가 온전하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이미 축소·은폐 수사로 기소까지 된 서울지방경찰청장, 검찰 조사에 가해지는 노골적인 외압, 수세에 몰릴 때마다 전가의 보도처럼 꺼내드는 NLL 논쟁 등을 보면서 우려는 현실이 되고 있습니다.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지 않길 바랍니다.

2. 국정원 개혁, 국민주권을 조롱하는 국가범죄 조직으로 전락했다면 그 뿌리부터 바꿔야 합니다.‘내부의 적’과 싸운다며 직원들에게 인터넷 댓글을 달게 하고, 야당과 시민사회단체를 종북좌파로 규정하는 국정원은 더 이상 존립할 근거를 잃었습니다. 더욱이 선거 개입 의혹이 뜨거운 쟁점이 되자, 범죄 핵심 주체로 지목된 국정원은 의회의 어떠한 결정도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국가 기밀인 남북 정상 간의 대화록을 임의로 공개해버렸습니다. 남재준 현 국정원장은 국정원의 명예를 위해 공개했다고 언급한 바 있는데, 자기 조직의 명예를 위해 국가기밀을 공개한다는 국정원장의 논리는 통제받지 않는 권력이 어떻게 민주주의를 해할 수 있는가를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이 문제의 핵심은 국정원이라는 국가기관의 조직적인 선거 개입입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헌법질서를 기만하고 국민의 주권을 조롱한 중대한 국가범죄입니다. 국민 위에서 무소불위의 힘을 휘둘러서 국민들의 의사를 조정할 수 있다는 초헌법적인 의식에 기한 행위입니다. 책임자를 징계하는 것을 넘어서서, 이후 이런 시도조차 일어나지 못하도록 그 구조 자체를 완전히 바꾸어내야 할 것입니다.

3. 박근혜 대통령의 분명한 책임, 부끄러운 나라의 대통령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국정원 대선개입 의혹은 이미 선거시기부터 쟁점이 되었던 사안이며, 박근혜 당시 대통령 후보 역시 직접 TV토론에서 이 사안을 언급한 바 있습니다. 이 사안의 전모를 알았다면 부정한 대통령일 것이며, 전모를 몰랐다 하더라도 당시 여당 대통령 후보이자 이후 대통령 당선자로서 책임을 피할 수 없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최근 “왜 그런 일이 생겼는지, 왜 그런 일을 했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라고 입장을 밝힌바 있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해 아무리 거리를 두려고 하더라도, 헌법 수호의 의무를 지는 대통령으로서 헌법질서를 파괴하는 중대한 행위에 대해 가장 단호히 대처해야해야 하는 의무에서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대통령의 분명한 책임을 요구합니다. “모른다”라는 한 마디로는 이 사안의 중대함과 대통령의 무게감이 결코 담기지 못합니다. 대통령 스스로가 국정원이라는 국가최고정보기관이 자신의 당선을 위해 동원된 의혹에 대해 유감을 표시하고, 성역 없는 조사를 실질적으로 보장해야 할 것입니다.


2013년 6월 26일
건국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공익인권법학회
동아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공익인권학회
서강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노동법학회
서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인권법학회
서울시립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인권법학회
아주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인권법학회
원광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인권법학회 동행
이화여자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공익인권법학회
인하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공익인권법학회
제주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인권법학회
전남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인권법연구회
전북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공익인권학회
중앙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공익인권법연구회
충남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공익인권법학회
충북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인권법학회
한국외국어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인권법학회 Hulight
한양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공익인권법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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