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성공회대학교 교수 시국 선언

국정원 정치개입 사태에 관한 성명서

주지하다시피, 2012년 대선 직전 국정원 직원의 댓글 달기를 통한 정치개입 문제가 폭로되었다. 이때 국정원은 "대북 심리전의 일환으로서 정상적인 업무 수행"이라는 입장을 밝히면서 이를 무마하고자 했다. 대선의 당락이 갈릴 수 있는 첨예한 ‘정치적 대치’ 국면에서 이는 김용판 서울경찰청장 등의 일부 정치경찰에 의해 서둘러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대선 이후 ‘국정원의 정치개입’의 전모들이 드러나면서 우리들의 경각심과 국민들의 분노가 커지고 있다.그런데 우리가 더 문제로 느끼는 후속상황들도 많다.

이러한 국정원의 정치개입 사건 수사에 대해서, 황교안 법무부장관의 압력으로 원세훈 전 국정원장을 ‘불구속 기소’하는 것으로 봉합되었다. 그 명분으로 정치개입으로 확인된 것이 67건으로 대단히 적고 그러한 개입이 조직적·체계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이 거론되었다. 더구나 원세훈 전 국정원장을 구속수사하라는 요구가 거세어지고 이는 반(反)헌법적인 ‘국정원 정치개입’이라고 하는 국민적 사안으로 부상할 조짐을 보이자, 국정원이 2012년 10·4정상회담에서 노무현 대통령의 ‘NLL(서해북방한계선) 발언’을 갑작스럽게 들고 나와 일종의 ‘물타기’ 전략을 구사하였고, 이를 새누리당이 이에 공조하여 대대적으로 공론화하고 있다.

더 나아가 24일 국정원은 정상회담에 배석해서 속기한 전문을그것도 일부를 왜곡하면서 대통령기록물이 아닌 공개기록물이라고 하면서 전면 공개하였다. 대선 이전 및 대선 개입 이후의 ‘국정원의 정치개입’도 모자라, 이렇게 신종 정치개입을 하는 양상을 보면서 우리는 참담함을 금할 수 없다. 우리는 이러한 일련의 사태 전개과정이 87년 이후 확립된 한국민주주의, 그것을 확립해온 국민들의 인식에 비추어 볼 때 많은 문제가 있다고 판단되며, 그런 점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우리의 견해를 밝히고자 한다. 첫째, 우리는 ‘국정원의 정치개입’은 여야 간의 다른 정쟁(政爭)사안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국기문란’행위라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 이것은 87년 6월 민주항쟁으로 확립된 한국민주주의의 ‘마지노선’에 해당하는 사안이다.

이는 87년 이후의 민주주의에 대한 정면도전행위이다. 이를 어긴 행위에 대해서는 헌법적 차원에서 그 심각성을 인식하고 다루어야 할 사안이다. 이번 사태는 국가정보원 직원들의 개인적 일탈이 아니라 정권적 차원에서 국가정보원을 국내정치와 선거에 활용한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국기문란행위라고 하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박근혜정부는 스스로의 정통성이 도전받을 수 있는 심각한 사안이라고 하는 인식을 가질 필요가 있다. 둘째, 국정원이 2012년 남북정상회담 당시의 NLL발언의 공개여부를 가지고 ‘문민적(文民的) 정치과정’에 직접 개입하여 스스로의 범죄를 덮고자 하는 것 자체는 또다른 심각한 문제라고 하는 점이다. 우리는 국정원의 댓글달기나 일상적 정치개입이 ‘국정원의 1차 정치개입’ 사례라고 한다면, 국정원의 남북정상회담의 전문을 임의로 공개한 것은 명백히 ‘국정원의 2차 정치개입’이라고 규정하지 않을 수 없다. 셋째, 이번 사건을 다루는 과정에서의 여러 주체들의 태도이다. 먼저 법무부의 태도이다. 이 중대한 사안에 대해서 ‘불구속 기소’로 이를 처리했다. 이는 선거법 위반과 국정원법 위반 사안이며 87년 이후 민주주의의 기본합의인 ‘국정원의 정치개입’사안을 정원 안보의 차원에서 접근한다고 판단하지 않을 수 없는 행위라고 아니할 수 없다.

다음으로 일부 보수단체들의 발언이다. 즉 67건이라고 하는 규모가 적다고 해서 이를 정당화하는 것이다. 그러나 엄밀하게 이야기하면 증거인멸 등으로 인멸된 경우를 제외하고 그리고 확인된 것만이 67건이다. 이것은 수의 과소(寡少)로 접근할 사안이 아니다. 절도 행위를 1-2번 했으니 그것은 크게 문제가 않된다고 하겠는가. 이것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행위라고 아니할 수 없다. 넷째, 국정원이 갑작스럽게 2012년 남북정상회담 당시 노무현 대통령의 ‘NLL발언’ 문제를 제기하고 그와 관련된 대화록 전문을 공개하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심히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이런 중대한 문제를 ‘꼼수’나 정략적으로 제기하고 풀려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국정원의 정치개입이라고 하는 중대사안이 제기된 마당에, NLL 발언을 의도적으로 부각시켜 이를 우회하려고 하는 것 자체가 그 민주성을 의심케하는 행태이다. 청와대는 이 문제는 국정원이나 새누리당 문제이고 우리와는 관계없다는 식으로 ‘분업’적 공조를 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다섯째, 국회는 이번 사건을 계기로 어떻게 범죄적인 국정원의 정치개입을 근절하도록 할 것인가, 그것을 위한 법제도적 보완사항은 무엇인가를 위해 전면적으로 나서야 한다. 검찰에 의하여 밝혀진, 그리고 발혀질 진상의 토대위에서 국회와 정부는 국가정보원의 정치개입을 근본적으로 근절시킬 수 있는 정책대안을 마련하고 집행하여야 한다.

국정원의 정치개입이 이루어지게 된 데에는 국정원법의 미비에도 기인한다. 명백한 범죄인 국정원의 정치 개입이 반복되는 것은 국정원의 권한이 여전히 과도하게 집중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국정원의 업무에 관한 민주적 통제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번 댓글 사건에서도 ‘대북심리전’이라는 이름으로 국내정치에 대한 개입을 확대하였다. 그리고 대북관계에서의 이른바 ‘종북프레임’을 활용하여 국내정치에 개입하는 방식으로 범죄가 이루어졌다.

결국 현재 국정원법의 모호성은, 언제라도 종북세력의 범위를 임의로 넓게 잡아 ‘대북사업’을 ‘국내사업’으로 확대할 개연성을 가지고 있다. 이런 점에서도 국정원을 철저하게 대북 및 해외 정보의 수집으로 직무범위를 한정하고 이에 따라 해외정보 업무를 다루는 기관과 국내 보안정보를 다루는 기관을 분리하는 등의 개혁이 필요하다.

국정원의 수사 권한을 폐지하고 정보 수집 권한을 분산시키는 방향에서의 새로운 개혁을 국회가 시도해야 한다.우리는 국정원과 박근혜정부가 이번 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을 두려운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다. 이 두려운 마음은 이 사안을 어떻게 처리하는 가하는 것이 박근혜정부의 민주적 정통성 자체를 심각하게 훼손할 수도 있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박근혜정부가 국정원의 선거개입이 국민적 분노로 파급될 조짐을 보이자 오히려 이를 정면으로 해결하려 하지 않고 국정원과 새누리당이 NLL발언까지 들고 나오는 것을 방치하고 정치개입의 당사자인 국정원이 2차적인 파행적 행태를 보이는 것을 용인하고 있다고 판단된다.

이것이 두려운 것은, 이렇게 된다면 정확히 이명박 정부의 전철을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2013. 7. 3. 성공회대학교 교수 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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