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도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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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 2011. 10. 27. 선고 2009도1603 판결 [강간치사·살인]
판시사항
[1] 재심이 개시된 사건에서 재심대상판결 당시 법령이 변경된 경우, 법원이 범죄사실에 대하여 적용하여야 할 법령(=재심판결 당시의 법령) 및 법령 해석 기준 시기(=재심판결 당시)
[2] 피고인이 피의자신문조서에 기재된 진술의 임의성을 다투면서 허위 자백이라고 주장하는 경우, 진술의 임의성 및 신빙성 유무 판단 방법
[3] 피고인이 검사 이전 수사기관에서 가혹행위로 인하여 임의성 없는 자백을 한 후 검사 조사단계에서도 임의성 없는 심리상태가 계속되어 자백 강요행위 없이 동일한 내용의 자백을 한 경우, 검사 앞에서의 자백의 임의성 유무(소극)
[4] 피고인의 초등학생(여, 10세) 강간치사 공소사실을 유죄로 인정한 재심대상판결에 대하여 재심이 개시된 사안에서, 피고인은 경찰 조사단계에서 가혹행위로 임의성 없는 자백을 한 후 검사 조사단계에서도 임의성 없는 심리상태가 계속되어 동일 내용의 자백을 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이유로, 공소사실을 자백하는 내용의 검사 작성 제1, 2회 피의자신문조서가 증거능력이 없다고 본 원심판단을 수긍한 사례.
[5] 피고인의 초등학생(여, 10세) 강간치사 공소사실을 유죄로 인정한 재심대상판결에 대하여 재심이 개시된 사안에서, 피고인의 자백 등 공소사실에 부합하는 주된 증거는 증거능력이 없거나 신빙성이 없고, 나머지 증거들은 모두 공소사실에 대한 직접적인 증거가 될 만한 내용이 아니라는 이유로, 공소사실에 부합하는 증거들을 모두 배척하고 무죄를 인정한 원심판단을 수긍한 사례
판결요지
[1] 재심이 개시된 사건에서 범죄사실에 대하여 적용하여야 할 법령은 재심판결 당시의 법령이고, 재심대상판결 당시의 법령이 변경된 경우 법원은 범죄사실에 대하여 재심판결 당시의 법령을 적용하여야 하며, 법령을 해석할 때에도 재심판결 당시를 기준으로 하여야 한다.
[2] 피고인이 피의자신문조서에 기재된 피고인 진술의 임의성을 다투면서 그것이 허위 자백이라고 주장하는 경우, 법원은 구체적인 사건에 따라 피고인의 학력, 경력, 직업, 사회적 지위, 지능 정도, 진술 내용, 피의자신문조서의 경우 조서 형식 등 제반 사정을 참작하여 자유로운 심증으로 진술이 임의로 된 것인지를 판단하되, 자백의 진술 내용 자체가 객관적인 합리성을 띠고 있는가, 자백의 동기나 이유 및 자백에 이르게 된 경위는 어떠한가, 자백 외 정황증거 중 자백과 저촉되거나 모순되는 것이 없는가 하는 점 등을 고려하여 신빙성 유무를 판단하여야 한다.
[3] 피고인이 검사 이전 수사기관에서 고문 등 가혹행위로 인하여 임의성 없는 자백을 하고 그 후 검사 조사단계에서도 임의성 없는 심리상태가 계속되어 동일한 내용의 자백을 하였다면, 검사 조사단계에서 고문 등 자백 강요행위가 없었다고 하여도 검사 앞에서의 자백도 임의성 없는 자백이라고 보아야 한다.
[4] 피고인의 초등학생(여, 10세) 강간치사 공소사실을 유죄로 인정한 재심대상판결에 대하여 재심이 개시된 사안에서, 피고인이 검찰에서 피의자신문을 받을 당시 공소사실에 대하여 자백을 하였으나, 자백에 이르게 된 경위와 검찰 자백의 내용 등 제반 사정을 모두 종합할 때, 피고인은 경찰 조사단계에서 고문 등 가혹행위로 인하여 임의성 없는 자백을 하고 그 후 검사 조사단계에서도 임의성 없는 심리상태가 계속되어 동일한 내용의 자백을 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이유로, 공소사실을 자백하는 내용의 검사 작성 제1, 2회 피의자신문조서는 증거능력이 없다고 본 원심판단을 수긍한 사례.
[5] 피고인의 초등학생(여, 10세) 강간치사 공소사실을 유죄로 인정한 재심대상판결에 대하여 재심이 개시된 사안에서, 공소사실에 부합하는 주된 증거인 공소사실을 자백하는 내용의 검사 작성 제1, 2회 피의자신문조서는 증거능력이 없고, ‘범행현장에서 발견된 연필과 머리빗이 피고인의 것이고, 피고인의 팬티에 혈흔이 있었다’는 관련자들 각 진술은 신빙성이 없는 것으로 보아야 하며, 나머지 관련자들의 경찰 진술, 검찰 진술 또는 증언이나 나머지 증거들은 모두 공소사실에 대한 직접적인 증거가 될 만한 내용이 아니라는 이유로, 공소사실에 부합하는 증거들을 모두 배척하고 무죄를 인정한 원심판단을 수긍한 사례.
피 고 인
피고인
상 고 인
검사
변 호 인
법무법인 정률 외 1인
원심판결 서울고법 2009. 2. 6. 선고 2008노3293 판결
주 문
상고를 기각한다.
이 유
상고이유를 판단한다.
1. 자백의 임의성에 관한 법리오해의 점에 대하여
가. 재심이 개시된 사건에서 범죄사실에 대하여 적용하여야 할 법령은 재심판결 당시의 법령이고, 재심대상판결 당시의 법령이 변경된 경우 법원은 그 범죄사실에 대하여 재심판결 당시의 법령을 적용하여야 하며( 대법원 2011. 1. 20. 선고 2008재도11 전원합의체 판결 참조), 법령을 해석함에 있어서도 재심판결 당시를 기준으로 하여야 하는 것이다. 한편 피고인이 피의자신문조서에 기재된 피고인 진술의 임의성을 다투면서 그것이 허위 자백이라고 주장하는 경우, 법원은 구체적인 사건에 따라 피고인의 학력, 경력, 직업, 사회적 지위, 지능 정도, 진술의 내용, 피의자신문조서의 경우 그 조서의 형식 등 제반 사정을 참작하여 자유로운 심증으로 위 진술이 임의로 된 것인지의 여부를 판단하되, 자백의 진술 내용 자체가 객관적인 합리성을 띠고 있는가, 자백의 동기나 이유 및 자백에 이르게 된 경위는 어떠한가, 자백 외의 정황증거 중 자백과 저촉되거나 모순되는 것이 없는가 하는 점 등을 고려하여 그 신빙성 유무를 판단하여야 하고( 대법원 1999. 11. 12. 선고 99도3801 판결 참조), 피고인이 검사 이전의 수사기관에서 고문 등 가혹행위로 인하여 임의성 없는 자백을 하고 그 후 검사의 조사단계에서도 임의성 없는 심리상태가 계속되어 동일한 내용의 자백을 하였다면 검사의 조사단계에서 고문 등 자백의 강요행위가 없었다고 하여도 검사 앞에서의 자백도 임의성 없는 자백이라고 보아야 한다( 대법원 1992. 11. 24. 선고 92도2409 판결 참조).
나. 원심이 인용한 제1심판결 이유와 기록에 의하면, 피고인이 검찰 1, 2회 피의자신문을 받을 당시에 이 사건 공소사실에 대하여 아래와 같은 경위로 자백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1) 1972년 당시 ○○경찰서 역전파출소장이었던 공소외 1의 딸인 피해자 공소외 2(여, 10세)가 1972. 9. 28. 09:40경 ○○시 우두동 소재 논둑길에서 사체로 발견되었는데, 피해자에 대한 부검 결과 피해자는 강간당한 것으로 밝혀졌다.
(2) 이 사건이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불러일으키자, 내무부장관은 1972. 10. 10.까지 범인을 검거하도록 지시하고 위 시한까지 범인을 검거하지 못할 경우 관계자들을 문책하겠다는 시한부 검거령을 내렸다.
(3) ○○경찰서 소속 경찰관들은 30여 명의 용의자들을 소환하여 수사를 벌이는 한편 일부 용의자들에 대하여는 즉결심판에 회부하여 구류처분을 받아 구금을 한 다음 이 사건에 대한 수사를 하기도 하였다. 그 과정에서 ○○시 우두동 2구 (번지 생략) 소재 점포를 임차하여 △△만화가게를 운영하던 피고인이 평소 여자관계가 불량하다는 등의 정보가 입수되자, 위 경찰관들은 1972. 9. 29. 피고인을 연행한 다음 주점 종업원인 공소외 3과의 윤락행위를 이유로 즉결심판에 회부하였고, 이어 피고인에 대하여 5일간의 구류처분을 받게 되자 피고인을 구금한 상태에서 이 사건에 대한 수사를 진행하였으나 별다른 혐의점을 찾지 못한 채 1972. 10. 4. 구류기간 만료로 피고인을 석방하였다.
(4) 이후 피고인은 1972. 10. 7. 11:00경 ○○경찰서로 다시 연행되었는데, 1972. 10. 9. 오전 무렵 피고인은 자신이 범인이라는 취지로 범행 일체를 자백하였고(다만 피고인은 자백 직후 ○○경찰서 수사과장을 만난 자리에서는 범행을 부인하였다), 이에 ○○경찰서 소속 경찰관들은 1972. 10. 10. ○○경찰서장에게 검거보고서를 제출함으로써 시한부 검거령에서 정한 시한 내에 범인을 검거하는 성과를 올릴 수 있었다.
(5) 한편 1972. 10. 10. 18:30경 이 사건의 담당 검사가 ○○경찰서 후평동 파출소 숙직실로 찾아가 피고인을 면담하며 자백의 진위 여부를 확인하였는데, 피고인을 조사한 경찰관들은 위 면담장소 주변을 지키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검사와 피고인 간의 대화 내용을 비밀리에 녹음하기까지 하였다.
(6) 그 후 1972. 10. 19. 이 사건이 검찰로 송치되었는데, 송치 당일과 그 이튿날 피고인은 담당 검사로부터 피의자신문을 받으면서 경찰에서와 마찬가지로 범행을 자백하였으나, 1972. 10. 23. 공소외 4와 대질신문을 할 당시부터 범행을 부인하기 시작한 이래 검찰 수사과정 및 공판과정에서 일관하여 자신이 범행을 자백한 것은 경찰에서 받은 고문 등 가혹행위 때문이었다고 주장하였다.
다. 앞서 든 사실관계와 기록에 의하여 알 수 있는 다음과 같은 사정들, 즉 ① 이 사건은 당시 파출소장의 딸인 초등학생 여아에 대한 강간치사 사건으로서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켰는데, 내무부장관이 1972. 10. 10.까지 범인을 검거하지 못할 경우 관계자들을 문책하겠다는 내용의 시한부 검거령까지 내린 상태였으므로, 담당 경찰관들로서는 위 시한까지 범인을 검거하기 위하여 무리한 수단을 동원하였을 가능성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점, ② 경찰관들은 이 사건 범행현장에서 발견된 연필과 머리빗이 피고인의 것인지를 확인하기 위하여 피고인의 주변 인물들을 상대로 수사를 하였는데, △△만화가게의 종업원이었던 공소외 4를 상대로 참고인 조사를 하는 과정에서도 공소외 4를 ▽▽여관으로 소환하여 위 여관에서 머리채를 잡아 흔들거나 뺨을 때리는 등의 폭행을 가하였던 점, ③ 피고인은 내무부장관이 정한 범인검거시한 하루 전인 1972. 10. 9. 경찰에서 범행을 자백하였으나 자백 직후 ○○경찰서 수사과장을 만난 자리에서는 범행을 부인하였고, 그 다음날 ○○경찰서 후평동 파출소 숙직실에서 담당 검사를 만나 다시 범행을 자백하였으나 당시에는 피고인을 조사한 경찰관들이 면담장소 주변을 지키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검사와 피고인 간의 대화 내용을 비밀리에 녹음하기까지 하였던 점, ④ 피고인은 검찰 송치 당일과 그 이튿날 담당 검사로부터 피의자신문을 받으면서 범행 일체를 자백하였으나 그로부터 3일 후인 1972. 10. 23.부터 범행을 부인하기 시작한 이래 일관하여 자신이 범행을 자백한 것은 경찰에서 받은 고문 등 가혹행위 때문이었다고 주장하였던 점, ⑤ 피고인은 검찰 수사과정, 재심대상판결의 공판과정,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과거사위원회’라 한다)의 조사절차 등에서 경찰 조사 당시 있었던 고문과 그로 인해 자백에 이르게 된 경위를 매우 구체적으로 진술하였던 점, ⑥ 피고인은 검찰에서 자백을 할 당시에 사건 당일 피해자를 만난 경위와 관련하여서는 “피해자가 △△만화가게 TV를 보러 왔다면서 인사를 하였다.”는 취지로 진술하였으나, 정작 피해자의 바지 주머니에서는 △△만화가게의 TV 시청권은 발견되지 않았고 오히려 □□만화가게의 TV 시청권이 발견되었으며, 위 검찰 자백 당시에 피해자를 만난 다음 범행현장까지 이동한 이유를 설명하면서는 “피해자와 함께 지름길을 이용하여 □□만화가게로 이동하던 중 범행현장에 이르게 되었다.”는 취지로 진술하였으나, 정작 △△만화가게에서 지름길을 이용하여 □□만화가게로 이동할 경우에는 이 사건 범행현장을 지나갈 수 없는 것이어서(피해자의 집을 기준으로 △△만화가게는 북서쪽으로 약 200m 정도 떨어져 있고, □□만화가게는 북쪽으로 약 4~500m 정도 떨어져 있으며, 이 사건 범행현장은 □□만화가게에서 다시 3~400m 정도 더 북쪽에 있는 논둑이다) 이와 같은 피고인의 검찰 진술은 그 자체로 허위로 보일 뿐만 아니라, 위 검찰 자백 당시에 피고인이 압수물과 관련하여 한 진술 즉, “압수된 연필과 머리빗은 자신이 사용하던 것이다. 범행 다음날 아침에 피가 묻은 팬티를 벗어서 부엌에 던져두었다.”는 진술 역시 아래에서 보는 바와 같이 허위 진술로 보이는 점 등을 모두 종합하여 보면, 피고인은 경찰 조사단계에서 고문 등 가혹행위로 인하여 임의성 없는 자백을 하고 그 후 검사의 조사단계에서도 임의성 없는 심리상태가 계속되어 동일한 내용의 자백을 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원심은 이와 같은 취지에서, 이 사건 공소사실을 자백하는 내용의 검사 작성의 1, 2회 피의자신문조서는 그 증거능력이 없다고 판단하였는바, 원심의 이와 같은 판단은 앞서 본 법리에 따른 것으로서 정당하고, 거기에 상고이유에서 주장하는 바와 같이 자백의 임의성에 관한 법리를 오해한 위법이 있다고 할 수 없다.
2. 자유심증주의 위반의 점에 대하여
가. 자유심증주의를 규정한 형사소송법 제308조가 증거의 증명력을 법관의 자유판단에 의하도록 한 것은 그것이 실체적 진실발견에 적합하기 때문이라 할 것이므로, 증거판단에 관한 전권을 가지고 있는 사실심 법관은 사실인정에 있어 공판절차에서 획득된 인식과 조사된 증거를 남김없이 고려하여야 한다. 또한, 증거의 증명력에 대한 법관의 판단은 논리와 경험칙에 합치하여야 하고, 형사재판에 있어서 유죄로 인정하기 위한 심증 형성의 정도는 합리적인 의심을 할 여지가 없을 정도여야 한다( 대법원 2004. 6. 25. 선고 2004도2221 판결, 대법원 2007. 5. 10. 선고 2007도1950 판결 등 참조).
나. 이 사건 공소사실에 부합하는 주요한 증거는 ‘범행현장에서 발견된 연필과 머리빗이 피고인의 것이고, 피고인의 팬티에 혈흔이 있었다’는 관련자들의 진술이다. 이에 대하여 순차로 살펴본다.
(1) 공소외 5, 4의 진술에 대하여
(가) 현장검증조서와 공소외 5, 4의 진술
원심 및 제1심이 적법하게 채택한 증거들과 기록에 의하면 다음과 같은 사실, 즉 이 사건 범행현장에 관한 현장검증조서에는 ‘범행현장에서 하늘색 동아연필 1자루(길이 15.8㎝)와 접는 머리빗 1개가 발견되었다’는 취지로 기재되어 있는 사실, 피고인의 아들인 공소외 5(당시 초등학교 3학년)는 1972. 10. 7. 경찰에서 조사를 받으면서 “경찰관들이 제시한 연필은 자신이 쓰다가 분실한 연필이다.”라는 취지로 진술하였고, 1972. 11. 4. 검찰에서도 같은 취지로 진술한 사실, △△만화가게의 종업원인 공소외 4는 1972. 10. 7. 경찰에서 조사를 받으면서 “경찰관들이 제시한 머리빗은 피고인이 사용하던 머리빗이다.”라는 취지로 진술한 사실을 알 수 있다.
(나) 공소외 5의 진술에 대하여
앞서 든 각 증거들과 기록에 의하여 알 수 있는 다음과 같은 사정들, 즉 ① 공소외 5는 재심대상판결의 제1심법원에 증인으로 출석하여 “경찰관들이 자신에게 보여준 연필과 압수된 연필은 다른 것이다.”라는 취지로 증언하였던 점, ② 피고인의 처인 공소외 6은 재심대상판결의 제1심법원에 증인으로 출석하여 “피고인이 두 번째로 연행된 날 아침에 경찰관들이 공소외 5를 데려갔는데 공소외 5의 필통을 가져오라고 해서 가져간 일이 있다.”는 취지로 증언하였던 점, ③ 피해자의 사체를 발견한 공소외 7은 최초 증언시에는 “범행현장에서 목격한 연필은 노란색이었다.”는 취지로 증언하였다가 위증혐의로 구속되자 “범행현장에서 목격한 연필과 압수된 연필은 동일한 것이다.”라는 취지로 이 사건 공소사실에 부합되게 그 증언을 번복하였던 점, ④ 이 사건 범행을 경찰에 신고한 공소외 8은 과거사위원회에 출석하여 “범행현장에서 목격한 연필은 노란색이었다.”는 취지로 진술하였던 점, ⑤ ○○경찰서 소속 경찰관이었던 공소외 9도 과거사위원회에 출석하여 “범행현장에서 발견된 연필은 노란색이었고, 그 길이는 중간 정도였다.”는 취지로 진술하였던 점( 공소외 9는 이 사건 범행의 범인을 검거한 공적을 인정받아 1계급 특진을 한 바 있다), ⑥ 이 사건 수사 당시 강원일보 기자로 근무하였던 공소외 10은 과거사위원회에 출석하여 “수사본부에 취재하러 갔을 당시에 경찰관들이 보여준 연필은 반 이상 사용한 연필이었다.”는 취지로 진술하였던 점 등을 모두 종합하여 보면, 이 사건 범행현장에서 발견되어 압수되었다는 하늘색 연필(길이 15.8㎝)은 실제로 이 사건 범행현장에 유류되어 있던 연필과 동일한 것이라고 볼 수 없고, 오히려 위 하늘색 연필은 이 사건 수사과정에서 증거물로 조작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경찰서 소속 경찰관이 작성한 현장검증조서는 그 작성일자가 피해자의 사체가 발견된 1972. 9. 28.로 되어 있으나, 정작 피고인의 집을 표시하면서 “피의자”라는 기재를 덧붙이고 있고 △△만화가게를 표시하면서 “피의자 경영”이라는 기재를 덧붙이고 있을 뿐만 아니라 현장에서 발견된 인분 약 200g이 피해자의 인분으로 감정되었다는 내용까지 기재되어 있다. 그런데 1972. 9. 28. 당시에는 피고인이 피의자로 특정되지도 않은 상태였을 뿐만 아니라 현장에서 발견된 인분에 대한 감정결과는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서 1972. 10. 11.자로 수사기관에 통보한 것인 점 등에 비추어 보면, 위 현장검증조서는 피고인이 1972. 10. 9. 범행을 자백한 이후 그 일자를 소급하여 작성된 것임이 분명하다). 따라서 공소외 5의 경찰 및 검찰 진술을 들어 이 사건 범행현장에서 발견된 연필이 피고인의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다) 공소외 4의 진술에 대하여
앞서 든 각 증거들과 기록에 의하여 알 수 있는 다음과 같은 사정들, 즉 ① △△만화가게의 종업원인 공소외 4는 1972. 10. 7. 경찰관들로부터 ▽▽여관 2호실에서 참고인 조사를 받을 당시에는 “ △△만화가게의 청소를 하다가 접는 머리빗을 발견하고 자신이 이를 사용하던 중 없어졌는데, 며칠 후에 피고인이 그 머리빗으로 머리를 빗는 것을 보았다.”고 진술하였으나 1972. 10. 23. 검찰에서 조사를 받을 당시에는 “경찰에서의 진술은 허위진술이었다.”라고 그 진술을 번복한 이래 재심대상판결의 제1심법원과 과거사위원회의 조사절차 및 이 사건 제1심법원에서 일관하여 “피고인이 머리빗을 사용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여관에서 여러 명의 경찰관들로부터 폭행을 당하여 허위 진술을 하였다.”는 취지로 진술하였던 점, ② 공소외 7은 최초 증언시에는 “범행현장에서 목격한 머리빗은 접는 것이 아니다.”라는 취지로 증언하였다가 위증혐의로 구속되자 “범행현장에서 발견된 머리빗은 접는 것이었다.”는 취지로 이 사건 공소사실에 부합되게 그 증언을 번복하였던 점, ③ 공소외 10도 과거사위원회에 출석하여 “수사본부에 취재하러 갔을 당시에 경찰관들이 보여준 머리빗은 흔히 통빗이라고 부르던 기다란 빗이었고, 접는 빗이 아니었다.”는 취지로 진술하였던 점 등을 모두 종합하여 보면, 공소외 4의 경찰 진술을 들어 이 사건 범행현장에서 발견된 머리빗이 피고인의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2) 공소외 11의 진술에 대하여
원심이 인용한 제1심판결 이유와 기록에 의하면, 피고인의 이웃에 살던 공소외 11은 1972. 10. 5. 피고인의 집에서 옷가지 등을 가져와 빨래를 하였는데, 이와 관련하여 공소외 11은 ① 1972. 10. 9. 경찰에서 참고인으로 조사를 받으면서 “피고인의 옷을 빨다가 팬티에 불그스레한 것이 묻어 있는 것을 보았으나 그것이 혈흔인지 여부는 자세히 모르겠다.”는 취지로 진술하였다가, ② 1972. 11. 7. 검찰에서 참고인으로 조사를 받으면서 “피고인의 옷을 빨 때는 몰랐는데 널 때 보니까 팬티 앞에 피 같은 것이 묻어 완전히 지워지지 않는 것을 보았다.”는 취지로 진술하였고, ③ 1973. 1. 12. 재심대상판결의 제1심법원에 증인으로 출석하여 “팬티를 널 때에 팬티 앞 쪽에 불그스레한 흔적이 있었으나 그것이 혈흔이라고 생각하지는 못하고 ‘여기에 어떻게 아이들이 과일물을 떨어뜨렸을까’라고만 생각하였다.”는 취지로 증언하였으나(이하 위 ①, ②, ③ 진술을 통틀어 ‘ 공소외 11의 최초 진술’이라 한다), ④ 2001. 7. 13. 서울고등법원 99재노17 사건의 참고인으로 출석하여 “피고인의 팬티를 빨래할 때에 혈흔 같은 것을 본 적은 없으나, 경찰조사 시 다소 무서운 분위기에서 경찰관들이 붉은 얼룩이 묻어 있는 팬티를 제시하길래 경찰관들에 이끌려 사실과 다르게 진술하게 되었고, 그 후 주변 사람들로부터 수사기관에서의 진술을 번복하면 처벌받는다는 말을 듣고 겁이 나서 결국 법정에서도 피고인의 팬티에서 불그스레한 자국을 보았다고 거짓 증언하였다.”라고 진술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피고인은 검찰 송치 당일 이 사건 공소사실에 대한 자백진술을 하면서 “범행 다음날 아침에 피가 묻은 팬티를 벗어서 부엌에 던져두었다.”는 취지로 진술(이하 ‘피고인의 최초 진술’이라 한다)하였음은 앞서 본 바와 같은데, 이러한 피고인의 최초 진술과 공소외 11의 최초 진술을 합쳐보면, 피고인은 1972. 9. 28. 아침에 피가 묻은 팬티를 벗어 부엌에 던져두었고, 공소외 11은 그로부터 일주일 가량 지난 1972. 10. 5. 위 팬티를 세탁하였다는 셈이 된다.
그런데 앞서 든 각 증거들과 기록에 의하여 알 수 있는 다음과 같은 사정들, 즉 ① 피고인은 이 사건 범행에 대한 자백이 경찰 고문에 의한 허위 자백이라고 주장하기 시작하면서부터 팬티에 관한 피고인의 최초 진술 역시 이를 번복하여 “추석(1972. 9. 22.) 전부터 입고 있던 팬티를 구류 집행이 끝난 1972. 10. 4. 벗어놓았다.”는 취지로 진술하였던 점, ② 공소외 9는 1973. 2. 9. 재심대상판결의 제1심법원에 증인으로 출석하여 “1972. 9. 29. 17시경 ○○시 사농동 파출소 숙직실에서 피고인의 팬티를 조사한 사실이 있다. 7일간 입은 것으로 더러웠다. 혈흔 같은 것은 발견하지 못하였고 오래 세탁 안 한 것이다.”라는 취지로 증언함으로써 1972. 9. 28. 팬티를 갈아입었다는 피고인의 최초 진술과 명백하게 배치되는 증언을 하였던 점, ③ ○○경찰서 소속 경찰관들은 1972. 9. 29. 피고인의 집을 수색하는 과정에서 물에 젖었다가 아직 채 마르지 않은 백조담배 5개비를 서랍 안에서 발견하고 이를 압수한 바 있었는데, 이와 같이 1972. 9. 29.에 서랍 속을 뒤져 백조담배 5개비까지 압수하였던 경찰관들이 그 전날 벗어 놓은 피고인의 피 묻은 팬티를 부엌에서 발견하지 못하였다는 것은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운 점 등을 모두 종합하여 보면, 피고인의 팬티에 혈흔이 있었다는 취지의 공소외 11의 최초 진술은 신빙성이 전혀 없는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다. 앞서 본 바와 같이 이 사건 공소사실에 부합하는 주된 증거인 공소외 5, 4, 11의 각 일부 진술은 그 신빙성이 없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한편 나머지 관련자들의 경찰 진술, 검찰 진술 또는 증언이나 나머지 증거들은 모두 이 사건 공소사실에 대한 직접적인 증거가 될 만한 내용이 아니다.
원심은 이와 같은 취지에서, 이 사건 공소사실에 부합하는 증거들을 모두 배척한 다음, 이 사건 공소사실에 대하여 범죄의 증명이 없다고 하여 무죄를 선고한 제1심판결을 그대로 유지하였는바, 원심의 이와 같은 판단은 앞서 본 법리에 따른 것으로서 정당하고, 거기에 상고이유에서 주장하는 바와 같이 논리와 경험의 법칙에 위반하여 자유심증주의의 한계를 벗어난 위법이 있다고 할 수 없다.
3. 결론
그러므로 상고를 기각하기로 하여 관여 대법관의 일치된 의견으로 주문과 같이 판결한다.
재판장 대법관
이인복
대법관
김능환
주심 대법관
안대희
대법관
민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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