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지방법원 2008. 11. 28. 선고 2008재고합1 판결 [강간치사·살인] 피 고 인 피고인 검 사 홍석기 변 호 인 법무법인 두라 담당변호사 임영화 외 1인 재심대상판결 춘천지방법원 1973. 3. 30. 선고 72고합131 판결 주 문 피고인은 무죄. 피고인에 대한 무죄판결의 요지를 공시한다. 이 유 1. 이 사건 공소사실 가. 피고인은 1972. 9. 27. 19:00경부터 막걸리 1되 가량을 마시고 상당히 취한 상태에서 같은 날 20:30경 ○○시 우두동 2구 (지번 생략) 소재 피고인 경영의 △△만화가게 앞에서 평소 동 만화가게의 단골로서 피고인을 곧잘 따르던 피해자 공소외 2(여, 10세)를 만나 귀여운 생각이 들어서 동인을 데리고 같은 동 2구 186의6 소재 강원도 농촌진흥원 제초제 시험답 논둑길을 거닐다가 같은 날 20:50경 피해자가 무섭다고 하면서 오른팔로 피해자의 상체를 감싸고 걸어가게 되었는바 이 때 순간적인 열정을 일으켜 피해자를 강간할 것을 결의하고 옆 논둑으로 데리고 가서 갑자기 피해자를 강제로 안아 논둑에 눕힌 다음 피해자의 하의를 벗겨 던져버리고 소리를 지르지 못하도록 손바닥으로 입과 코를 덮어 누름과 동시에 피해자의 배 위에 엎드려 간음을 하려고 하다가 그곳은 사람이 통행하는 길에서 들여다보이는 지점이고 피해자도 실신상태에 빠져 반항이 없으므로 피해자를 약 18미터 떨어진 옆 논둑으로 안아 눕힌 다음 그 위에 엎드려 자신의 음경을 피해자의 음부에 삽입하던 중 그 때까지 실신상태에 있던 피해자가 갑자기 소리를 지르자 손으로 입을 덮어 누르고 위 삽입행위를 계속하다가 피해자가 또 다시 소리를 지르자 이를 제지하기 위하여 피해자의 목을 눌러 경동맥 혈류의 정지 및 질식으로 사망에 이르게 한 것이다. 나. 피고인은 가.항의 일시, 장소에서 피해자를 가.항과 같이 간음을 하던 중 그때까지 실신상태에 있던 피해자가 갑자기 소리를 지르자 손으로 입을 덮어 누르고 위 삽입행위를 계속하다가 피해자가 또 다시 소리를 지르자 피해자를 살해하기로 마음먹고 피해자의 목을 눌러 피해자를 경동맥 혈류의 정지 및 질식으로 살해한 것이다. 2. 판단 가. 피고인은 위 각 공소사실을 전면 부인하고 있는바, 먼저 검사가 제출한 증거들 중 일부 증거들의 증거능력에 관하여 본다. ⑴ 피고인에 대한 각 경찰피의자신문조서의 각 진술기재는 피고인이 이 법정에서 그 내용을 부인하므로 모두 그 증거능력이 없다. ⑵ 피고인에 대한 제1회 검찰피의자신문조서에는 피고인이 이 사건 공소사실을 자백하는 취지로 기재되어 있기는 하나, 피고인은 제3회 검찰피의자신문 이후 이 법정에 이르기까지 일관하여 위 검찰피의자신문시의 자백은 고문, 가혹행위 등으로 인하여 임의성이 없는 상태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주장하므로 이에 관하여 보건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과거사위’라 한다)의 조사기록 등 관련 기록과 이 사건 재심개시를 위한 사실조사절차 및 이 사건 공판 과정을 종합하여 확인할 수 있는 아래의 ① 내지 ⑧과 같은 사정에 비추어 보면, 당시 수사경찰관들은 일단 피고인이 범인으로 의심되자 적법절차에 반하는 무리한 수단을 동원하여 관련 참고인 진술 등을 확보하였고, 이를 토대로 피고인에게 자백을 강요하는 와중에 상당한 정도의 폭행·협박 내지 가혹행위를 동원하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되는바, 피고인의 경찰에서의 자백은 임의성이 없는 상태에서 이루어졌고 그 후 검사 작성의 피고인에 대한 제1회 피의자신문조서는 경찰이 피고인의 신병을 검찰에 송치한 당일 작성된 것으로서 피고인의 검찰 자백 역시 위와 같은 임의성 없는 상태가 계속되는 가운데 이루어진 것으로 볼 여지가 많다고 판단된다( 대법원 1992.11.24. 선고 92도2409 판결 등 참조, 특히 피고인이 경찰에서 자백한 바로 다음날 담당검사가 경찰서로 피고인을 찾아와 면담하며 직접 피고인으로부터 경찰 자백의 진위 여부를 확인한 이상, 피고인이 검찰에 송치된 직후 그 담당검사의 면전에서 이전의 자백을 번복하기는 매우 곤란하였을 것으로 봄이 상당하다). 따라서 이 사건 공소사실을 자백하는 취지의 검사의 피고인에 대한 제1회 피의자신문조서의 진술기재는, 자백이 고문·폭행·협박·신체구속의 부당한 장기화 또는 기망 기타의 방법으로 임의로 진술한 것이 아니라고 의심할 만한 이유가 있는 때에 해당하므로 형사소송법 제309조에 의하여 그 증거능력이 없다고 할 것이다. ① 이 사건은 당시 파출소장의 딸인 초등학생 여아에 대한 강간살인 사건으로서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켰는데, 사건 발생 후 상당한 기간이 지나도록 범인이 검거되지 아니하자, 당시 내무부장관이 범인 검거시한을 1972. 10. 10.로 지정하고 위 시한까지 범인을 검거하지 못할 경우 관계자를 문책하겠다는 내용의 시한부검거령까지 내렸고 이는 매우 이례적인 일로서, 당시 담당경찰관들로서는 위 시한까지 범인을 검거하기 위하여 상당한 심리적 압박을 받을 수밖에 없었고, 그로 인하여 수사 과정에서 무리한 수단을 동원할 가능성이 높았다고 판단된다. ② 한편 당시 ○○경찰서 소속 경찰관들은 피고인의 평소 여자관계가 불량하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피고인을 용의자선상에 올려 범인 여부를 조사하던 중(피고인은 이 사건 발생 직후인 1972. 9. 27. 자정 무렵부터 그 다음날 새벽까지 사이에 인근 주점에서 여종업원인 공소외 3과 윤락행위를 하였다는 혐의로 1972. 9. 29. ○○지방법원에서 즉결심판에 회부되어 5일간의 구류처분을 받아 구금되었고 그 동안 경찰관들은 구류 중 피고인을 상대로 이 사건에 관하여 조사한 것으로 보인다) 피고인과 피고인이 운영하는 만화가게의 여종업원인 공소외 4(당시 만 17세)가 상당 기간 동안 내연 관계를 맺어 왔다는 사실을 알아내었고 이에 관하여 피고인을 추궁하였다. ③ 특히 당시 경찰관들은, 피고인과 공소외 4가 내연 관계로서 서로 합의 하에 성관계를 맺어 온 것임을 알면서도 공소외 4의 모친( 공소외 23)으로 하여금 피고인을 업무상 위력에 의한 간음으로 고소하도록 유도하고 이를 문제삼아 피고인을 압박하였으며(그러나 피고인이 이 사건 공소사실을 자백한 이후, 이 부분 업무상 위력에 의한 간음은 결국 고소 취소에 따른 공소권 없음의 불기소처분으로 종결되었다), 더 나아가 피고인이 이 사건 공소사실을 부인할 경우 공소외 24(당시 만 14세)에 대한 미성년자의제강간 혐의까지 입건하여 기소할 것이라고 압박하였다(그러나 과거사위 조사기록상 공소외 24의 진술 등을 종합하면, 피고인과 공소외 24가 간음한 사실은 없음이 명백하다). ④ 한편 1972. 10. 10. 피고인과 담당검사와의 면담 내용을 비밀 녹음한 기록에 의하면, 담당검사가 피고인을 상대로, 공소외 24에 대한 미성년자의제강간 혐의에 관하여 언급하면서 피고인이 자백하고 뉘우친다면 미성년자의제강간 혐의는 굳이 입건하지 않겠다는 취지로 말한 사실도 확인된다. ⑤ 공소외 4는 검찰 이래 재심대상판결의 공판절차, 과거사위의 조사절차 및 이 법원이 실시한 사실조사절차에서 일관하여, “이 사건 당시 ▽▽여관에서 여러 명의 경찰관들로부터 조사받았는데, 처음에는 경찰관들이 제시한 빗이 처음 보는 빗이라고 사실대로 진술하였으나, 그 후 수일간 위 여관에 감금당한 채 공소외 9 등의 경찰관들로부터 머리채를 잡히거나 뺨을 맞는 등으로 폭행을 당하고 이를 견디다 못해 결국 위 빗은 평소 피고인이 소지하고 있던 빗이라고 거짓말할 수밖에 없었다”는 취지로 진술했고, 위 진술 내용은 신빙성이 매우 높다고 판단된다(이는 뒤에서 보는 바와도 같다). ⑥ 담당 경찰관들은, 당시 만 17세의 소녀에 불과한 공소외 4를 여관방에서 조사하거나 만 13세의 소녀에 불과한 공소외 24도 밤늦게 여관으로 데리고 가 조사를 하기도 하는 등 수사과정에서 무리하고 강압적인 수단을 동원하였다. ⑦ 피고인은 경찰에서 1972. 10. 9. 이 사건 공소사실을 처음으로 자백하여 이에 대한 경찰피의자신문조서가 작성되었고{이는 내무부장관이 내린 시한부검거령 최종기한(1972. 10. 10.)의 하루 전날이다. 그리고 경찰은 1972. 10. 10. 피고인이 이 사건의 범인이라는 수사결과를 발표하였다}, 그 다음날 담당검사가 ○○경찰서 후평동파출소 숙직실로 와서 직접 피고인을 면담하며 자백의 진위 여부를 확인하였는데, 피고인을 조사한 경찰관들이 위 면담장소 주변을 지키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공소외 25 등의 경찰관들은 검사와 피고인 간의 위 대화 내용을 비밀녹음하기까지 하였다(그 후 피고인이 검사에게 이 사건 공소사실을 부인하였을 때 검사가 위 비밀녹음 내용을 피고인에게 들려주기도 한 것으로 보인다). ⑧ 그 후 1972. 10. 19. 이 사건이 검찰로 송치되었는데 그 송치 당일 피고인은 담당검사의 피의자신문시 경찰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사건 공소사실을 자백하였고, 그 다음날에도 마찬가지로 자백하였으나, 1972. 10. 23. 제3차 검사피의자신문시에는 그 때까지의 자백은 사실이 아니라는 취지로 부인한 이래 검찰 수사과정 및 공판과정에서 일관하여 이 사건 공소사실을 부인하였다. 나. 검사가 제출한 나머지 증거들 중 이 사건 각 공소사실을 뒷받침하는 결정적인 증거로는, ① 공소외 5(피고인의 아들, 당시 초등학교 3학년생)에 대한 경찰 작성의 1972. 10. 7.자 진술조서 및 검사 작성의 1972. 11. 4.자 진술조서 중, 경찰관들로부터 제시받은 연필이 그 무렵 자신이 소지하였다가 분실한 연필과 일치한다는 취지의 각 진술기재, ② 공소외 4에 대한 경찰 작성의 1972. 10. 7.자 진술조서 중, 경찰관들로부터 제시받은 빗이 그 무렵 피고인이 소지하고 있던 빗과 일치한다는 취지의 진술기재, ③ 공소외 11에 대한 경찰진술조서, 검찰진술조서 및 재심대상판결 공판절차에서의 법정진술 중, 공소외 11이 1972. 10. 5. 10:00경 소양강에서 피고인 가족의 옷을 세탁할 당시 피고인의 팬티 앞부분에 불그스레한 것이 묻어 있었다는 취지의 진술 및 1972. 9. 27. 저녁에 ☆☆국민학교 앞 국수가게로 가는 도중 피고인이 ◎◎식당 가로등 건너편 조금 지난 곳에서 소변보는 장면을 목격하였다는 취지의 진술을 들 수 있는바, 위 각 진술의 신빙성에 관하여 본다. ⑴ 먼저 공소외 5의 위 각 진술에 관하여 보건대, 공소외 5가 피고인의 아들로서 거짓말까지 하면서 피고인에게 불리한 진술을 할 이유가 별로 없고, 경찰진술조서 및 검찰진술조서상 압수된 연필이 자신이 소지하였다가 분실한 연필과 일치한다고 판단한 이유에 대해서 상당히 구체적으로 진술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기는 하나, 다른 한편 기록에 의하여 확인할 수 있는 다음과 같은 점, 즉 ① 당시 공소외 5는 만 9 내지 10세의 어린 소년으로서 수사기관에 대한 진술이 가지는 의미에 대하여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은 채 담당경찰관의 질문에 이끌려 대답할 가능성이 높고, 따라서 공소외 5에 대한 위 경찰진술조서에는 그 진술 경위 내지 실제 진술한 전체 내용이 아니라 조사 경찰관이 이끌어낸 대답만이 기재되어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으며 이는 검찰진술조서 역시 마찬가지라고 할 것인 점, ② 또한 공소외 5는 위 경찰조사시 “며칠 전에 파출소에서 어떤 아저씨가 이 연필을 보이면서 이것이 네 것이냐고 묻는데 언뜻 보고 잘 몰라서 모르겠다고 하였으나, 그 후 생각해 보니 맞는 것 같았다”는 취지로 진술하기도 하였고, 재심대상판결의 공판절차에서는 “경찰들이 제시한 연필이 자신이 소지하였다가 분실한 연필과 일치한다는 취지의 경찰, 검찰에서의 각 진술은 사실이 아니며, 이는 담당 수사관들이 바른대로 말하라고 자꾸 다그치거나 꾀는 바람에 잘못 진술한 것이다”, “자신은 사실대로 말하였음에도 경찰들이 자꾸 바른말을 하라고 해서 잘못 진술하게 되었다”, “경찰들이 조사 당시 제시하였던 연필은 법정에서 제시받은 연필이 아니다”, “수사기록상의 진술서는 형사가 불러주는 대로 썼다”는 취지로 진술하는 등 압수된 연필이 공소외 5 자신의 연필이 맞는지 여부에 관한 진술 내용에 일관성이 없는 점, ③ 경찰이 현장에서 압수한 연필은 당시 학생들이 흔히 사용하던 종류의 연필이었는데, 위 연필과 공소외 5가 이전에 분실하였던 연필 간의 동일성 여부를 판단함에 있어, 단순히 연필의 크기, 모양 내지 연필에 나 있는 이빨 자국 등만으로 그 판단의 정확성을 담보하기는 어렵다고도 할 것인 점 등에 비추어 보면, 공소외 5의 경찰 및 검찰에서의 연필 관련 진술은 이를 믿기 어렵고 이 사건 공소사실을 뒷받침하기에는 부족한 측면도 많다. ⑵ 다음으로 공소외 4의 경찰진술에 관하여 보건대, 공소외 4는 1972. 10. 7. 경찰조사를 받으면서 “경찰관으로부터 제시받은 머리빗이 그 무렵 피고인이 소지하고 있었던 빗과 동일하다”는 취지로 진술하였고 1972. 10. 11. 무렵 실시된 증거보전절차에서도 같은 취지로 진술하기는 하였으나, 다른 한편 관련 기록들을 종합하여 인정되는 다음과 같은 점, 즉 ① 공소외 4가 위와 같이 경찰조사를 받은 장소는 ○○시 우두동 2구 소재 ▽▽여관 2호실이었고(이는 공소외 4에 대한 1972. 10. 7.자 경찰진술조서의 기재에 의해서도 확인된다), 공소외 4는 상당 기간 동안 경찰들에 의하여 위 여관방에 감금된 채 조사를 받았다가 증거보전절차가 실시될 무렵에서야 비로소 풀려난 것으로 보이는 점, ② 또한 공소외 4는 1972. 10. 23. ○○지방검찰청에서 조사를 받으면서 “머리빗과 관련한 종전의 경찰진술 내용은 사실과 다르며 이는 이전 경찰조사시 경찰관 여러명으로부터 계속하여 추궁당한 끝에 이를 견디지 못하고 사실과 다르게 말한 것”이라는 취지로 진술한 점, ③ 그 후 공소외 4는 1973. 1. 12. ○○지방법원 공판기일에서, “경찰들이 자신에게 계속적으로 욕을 하며 폭행까지 하여 이를 견디기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피고인이 자신보다도 어린 공소외 24와도 성관계를 맺었다고 하여 질투심까지 나게 되어 결국 거짓진술할 수밖에 없었다”, “법원의 증거보전절차가 있기까지 거의 7일간 여관에 감금당한 채 경찰들로부터 조사받았는데, 자신이 자꾸 내보내달라고 하니까 경찰들이 증거보전절차 당일 자신에게 ‘오늘 증거보전할 때 잘 이야기하면 나갈 수 있다’고 하여 증거보전절차시 허위로 진술하게 되었다”, “검사 앞에서 처음에는 피고인의 빗이 맞다는 취지로 진술하였는데, 이는 그렇게 말하지 않으면 또 경찰들에게 불려갈까 두려웠기 때문이며, 검찰에서 조사받는 동안에도 경찰들에 대한 무서운 감정은 사라지지 않았다”고 증언한 점, ④ 한편 공소외 4는 위 법정 증언 이후 ○○지방법원에서, 공소외 4가 검찰조사시 검사에게 경찰들로부터 가혹행위를 당하였다고 진술한 사실이 없음에도 법정에서는 검사에게 위와 같이 진술하였다고 거짓 증언하였다는 위증의 범죄사실로 징역 8월을 선고받고(한편 공소외 4는 피고인이 압수된 머리빗을 소지하여 사용하는 것을 목격한 적이 있음에도 법정에서는 이를 목격한 적이 없다는 취지로 거짓 증언하였다는 혐의로도 기소되었으나 ○○지방법원은 이 부분 혐의에 대해서는 무죄로 판단하였다) 수감생활을 하던 중 ○○지방법원에 진정서를 제출하였는데, 위 진정서에는 공소외 4가 그 동안 살아온 과정, 당시 공소외 4와 피고인 간의 관계, 이 사건과 관련하여 경찰관들로부터 조사받은 경위(경찰관들이 자신에게 폭행·협박을 가한 방법, 경찰관들이, 피고인이 술집 여자와 동침하였다거나 열세살의 공소외 24와도 성관계를 맺었다고 말하였을 뿐만 아니라 피고인이 공소외 2를 살해하는 과정을 자백하는 내용의 녹음테이프를 들려주면서 빗 관련 진술을 강요한 경위 등), 처음에 거짓 진술을 할 때의 심정 및 그 후 거짓 진술을 번복하고 사실대로 진술하게 된 경위 등이 포함되어 있는데, 그 내용이 구체적이고도 자연스러우며 합리적인 점, ⑤ 그 후 공소외 4가 이 사건 발생 후 오랜 시간이 경과한 시점인 2007. 8. 3.과 2007. 9. 13.에 과거사위 조사관으로부터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나 이 법원이 실시한 사실조사절차에서, “당시 공소외 9 등의 경찰관이 자신의 머리채를 잡거나 발로 차고 뺨을 때렸다”, “도대체 보지도 않은 빗을 보았다고 이야기한 것이 마음에 항상 맺혀 있었다, 양심까지 버릴 수는 없었다, 안 본 빗을 봤다고 한 사람이 아무 때나 기회만 있으면 하고 싶은 말이 아니냐”라고 진술하는 등 당시 경찰에서에의 빗 관련 진술이 경찰들의 강압에 의하여 허위로 이루어진 것임을 분명히 밝혔고, 한편 이 사건 발생 후 오랜 시간이 경과한 현재 시점에서 공소외 4가 피고인을 위하여 특별히 거짓으로 진술할 이유도 없다고 보이는 점 등을 종합하여 보면, 이 사건 압수된 빗이 당시 피고인이 소지하고 있던 빗과 동일하다는 취지의 공소외 4의 경찰 진술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 ⑶ 마지막으로 공소외 11에 대한 경찰진술조서, 검찰진술조서 및 재심대상판결 공판절차에서의 법정진술에 관하여 본다. ㈎ 팬티 혈흔에 관한 공소외 11의 진술을 보면, 공소외 11은 ① 1972. 10. 9. 경찰조사시 “피고인의 옷을 빨다가 팬티에 불그스레한 것이 묻어 있는 것을 보았으나 그것이 혈흔인지 여부는 자세히 모르겠다”는 취지로 진술하였다가, ② 1972. 11. 7. 검찰조사시 “피고인의 옷을 빨 때는 몰랐는데 널 때 보니 팬티 앞에 피 같은 것이 묻어 완전히 지워지지 않는 것을 보았다”는 취지로 진술하였고, ③ 1973. 1. 12. 법정에서는 “피고인의 옷들을 빨았는데 빨 때에는 혈흔 자국을 발견하지 못하였고 팬티를 널 때에 팬티 앞 쪽에 불그스레한 흔적이 있었는데 그것이 혈흔이라고 생각하지는 못하고 ‘여기에 어떻게 아이들이 과일물을 떨어뜨렸을까’라고만 생각하였다”는 취지로 진술하였는바, 피고인의 팬티에 혈흔 자국을 발견한 경위 등에 관한 진술 내용이 일관되지 못할 뿐만 아니라, 특히 공소외 11은 서울고등법원 99재노17 사건의 사실조사절차에서 “피고인의 팬티를 빨래할 때에 혈흔 같은 것을 본 적은 없으나, 경찰조사시 다소 무서운 분위기에서 경찰관들이 붉은 얼룩이 묻어 있는 팬티를 제시하길래 경찰관들에 이끌려 사실과 다르게 진술하게 되었고, 그 후 주변 사람들로부터 수사기관에서의 진술을 번복하면 처벌받는다는 말을 듣고 겁이 나고 남편과 자식 생각도 나서 결국 법정에서도 피고인의 팬티에서 불그스레한 자국을 보았다고 거짓 증언하였는데, 차마 피를 보았다고까지 거짓말할 수는 없어 그 불그스레한 자국이 과일물이 떨어진 자국으로 생각하였다는 변명조로 증언하였다”는 취지로 진술하였다. 이상의 사정을 종합하면, 피고인의 팬티에 묻은 혈흔에 관한 공소외 11의 진술 내용은 이를 믿기 어렵다. ㈏ 사건 당일 저녁 피고인을 목격하였다는 취지의 공소외 11의 진술에 관하여 보건대, 공소외 11은 검찰 및 재심대상판결 공판절차에서 “1972. 9. 27. 저녁 8시가 조금 지난 무렵 ☆☆국민학교 앞 국수가게로 가는 도중 ◎◎식당 건너편에서 피고인이 소변을 보고 있는 것을 목격하였다”는 취지로 진술하기는 하였으나, 다른 한편 서울고등법원 99재노17 사건의 사실조사절차에서는 “당시 자신이 ☆☆국민학교 앞 국수가게로 가는 도중 ◎◎식당 가로등 건너편에서 소변을 보는 것 같은 사람을 목격하기는 하였으나 당시 가로등 불빛만 있는 어두운 밤이라 그 사람이 피고인인지 아닌지를 알 수는 없었다”, “검찰 조사 당시 겁이 나고 무서웠으며, 주위 사람들로부터 수사기관에서의 진술을 번복하면 쇠고랑을 찬다는 말을 많이 들어 법정에서도 거짓으로 증언할 수밖에 없었다”는 취지로 진술하였는바, 이에 비추어 보면 ◎◎식당 건너편에서 피고인의 소변보는 모습을 목격하였다는 취지의 공소외 11의 진술 내용 역시 그 신빙성이 의심스럽다. 다. 그 밖에 검사가 제출한 증거들은 피고인이 이 사건의 범인이라는 확신을 주기에는 부족하고 달리 이를 인정할 증거가 없다. 3. 결론 대한민국 헌법과 형사소송법 등 법률은, 만에 하나라도 무고한 사람이 처벌되는 일을 방지하기 위하여 피의자나 피고인에게 다양한 권리를 부여함과 아울러 수많은 적법절차원칙들을 규정하고 있다. 이러한 권리와 원칙들은 문명시민사회의 너무나 당연한 원리들로 인식되고 있고, 수사를 담당하는 사람들이나 재판을 담당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권리와 원칙들을 늘 입버릇처럼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이러한 권리와 원칙들이 단순한 구호에 그칠 위험성 또한 상존한다고도 할 것이다. 따라서 수사기관과 사법기관은 위 권리와 원칙들이 실질적으로 철저히 보장·준수될 수 있도록 늘 빈틈없는 주의를 기울이고 엄정한 잣대로 자신을 성찰해야 할 것이다. 신의 눈을 갖지 못한 재판부로서는 감히 이 사건의 진실에 도달하였다고 자신할 수는 없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대한민국 헌법과 법률이 규정하고 있는 적법절차원칙에 따르면 검사가 제출한 증거들은 증거로 사용될 수 없거나 믿을 수 없는 것이어서, 그것들만으로는 피고인의 유죄를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사건 수사 과정에서 자신이 마땅히 누려야 할 최소한의 권리와 적법절차를 보장받지 못한 채 고통을 겪었던 피고인이 마지막 희망으로 기대었던 법원마저 적법절차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고민이 부족하였고 그 결과 피고인의 호소를 충분히 경청할 수 없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어떠한 변명의 여지도 없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이 사건 각 공소사실은 모두 범죄의 증명이 없는 때에 해당하므로, 형사소송법 제325조 후단에 의하여 무죄를 선고하고, 형법 제58조 제2항에 의하여 이 사건 판결의 요지를 공시한다. 재판장 판사 정성태

 판사 

오규성

 판사 

김은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