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혁명의 교훈

10 월 혁명을 연구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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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10월 혁명을 성공시켰다. 그러나 이 혁명은 출판의 영역에서는 좀처럼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있다. 10월 혁명의 격동을 포괄적으로 묘사하면서 동시에 이 혁명의 가장 중요한 정치적 조직적 측면들을 올바르게 부각시킨 저작은 아직까지 단 한 권도 출판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보다 더욱 불행한 사실이 있다. 혁명 준비작업 및 혁명 그 자체에 대한 세부 정보들을 담고 있는 1차 자료들 그리고 이중에서 가장 중요한 공식 문서들은 아직도 출판되지 못하고 있다. 10월 혁명 이전까지의 혁명사 및 당사(黨史)와 관련된 허다한 문서들과 자료들은 출판되었다. 10월 혁명 이후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정작 10월 혁명은 제대로 관심을 끌지 못하고 있다. 혁명을 성공시켰으므로 이것을 다시 반복할 필요가 없다고 결론 내린 것처럼 보인다. 10월 혁명에 대한 연구가 미룰 수 없는 사회주의 건설 과업에 직접적으로 그리고 즉시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10월 혁명의 직접적인 준비와 관련된 실제 조건들, 혁명의 실제 완수과정, 혁명 후 혁명 성과를 공고히 한 첫 몇 주일 등에 대한 연구가 아무런 이득이 되지 않는다고 이미 결론 내린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사고는 무의식적으로 잠재해 있다 하더라도 심각한 오류이다. 특히 편협하며 일국적인 사고의 일단을 보여줄 뿐이다. 10월 혁명의 경험은 다시 반복할 필요가 없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경험으로 배울 것이 없다는 결론은 결코 내릴 수 없다. 러시아는 제 3 인터내셔널의 일부이며 다른 나라 노동자들도 자신들의 “10월 혁명”을 성취해야할 과제를 안고 있다. 작년 우리는 이점을 말해주는 실례들을 충분히 접하였다. 서방의 가장 선진적인 공산당들조차 10월 혁명의 교훈들을 제대로 소화시키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이 혁명의 실제 사실들을 거의 알고 있지도 못했다.

필자의 이 주장에 대해 반대할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10월 혁명을 연구하거나 이와 관련된 문서들을 출판하는 것은 과거의 이견들을 다시 부추기는 꼴이 된다고 이들은 주장한다. 그러나 문제를 이런 식으로 접근하는 것은 아주 치졸하다. 1917년에 있었던 이견들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었으며 우연히 발생한 것도 아니다.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로부터 7년이나 지난 이 시점에서 그 당시 오류를 범했던 인사들을 공격하기 위해서 그때의 이견들을 들추는 것만큼 더럽고 치사스러운 행위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사소한 개인적 고려 때문에 10월 혁명의 가장 중요한 문제들에 대해 침묵을 지키는 것은 더욱 인정할 수 없다. 왜냐하면 10월 혁명이 제기한 문제들은 국제적 의의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작년 불가리아에서 혁명은 처참한 패배를 당했다. 무엇보다도 불가리아 공산당은 숙명론과 교조에 젖어 있다가 둘도 없는 혁명의 기회를 놓쳐버렸다. (6월 싼코프[Tsankov] 쿠데타에 뒤이은 농민 봉기는 혁명을 성공시킬 수 있었던 둘도 없는 기회였다.) 그리고는 오류를 만회하려고 서두른 나머지 필요한 정치적 조직적 준비도 없이 9월 봉기를 일으켰다. 불가리아 혁명은 독일 혁명의 전주곡이 되었어야 했다. 불행하게도 불가리아의 엉터리 전주곡은 독일에서 더 지독한 엉터리 혁명을 가져왔다. 작년 후반기 독일은 세계사적으로 중요하며 절대적으로 유리한 혁명의 기회가 찾아왔다. 그러나 공산당 지도부는 이것을 말아먹는 방식을 아주 모범적으로 보여주었다. 그러나 더욱 불행한 일이 있다: 작년 불가리아와 독일의 실패한 혁명은 그 중요성에 비추어 올바르게 또는 충분히 평가되지 못했다. 작년에 필자는 독일의 상황을 개괄적으로 묘사한 글을 쓴 바 있다. 그리고 필자의 묘사가 부분적으로나 전체적으로 올바르다는 것이 사태의 전개로 하나 하나 입증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어느 누구도 이와 다른 설명을 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우리에게는 개괄적인 묘사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 작년 독일의 상황을 하나 하나 구체적 사실에 입각해서 설명해야한다. 이 가장 참혹한 역사적 패배의 원인들을 구체적으로 해명해야한다.

그러나 10월 혁명을 정치적 전술적으로 자세히 분석하지 못한 상황에서 불가리아와 독일의 사건들을 분석하는 것은 전혀 불가능한 일이다. 10월 혁명의 성사 방법과 성과는 단 한 번도 명확히 정리되지 않았다. 10월 혁명의 승리에 열광하여 유럽에서도 자동적으로 혁명이 터져 이 혁명의 교훈을 이론적으로 되새길 시간이 없을 것으로 생각한 것 같았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사태들은 노동계급 혁명을 지도하는 정당이 없이는 혁명 그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입증하였다. 노동자들은 자생적인 봉기를 통해 국가권력을 장악할 수 없다. 고도로 공업화되었으며 고도로 문화적 수준을 누렸던 독일에서조차 1918년 11월 노동자들의 자생적 봉기는 권력을 자본가 계급에게 넘겨주었을 뿐이었다. 한 유산계급은 다른 유산계급으로부터 권력을 빼앗을 수 있다. 자신의 부와 문화적 수준 그리고 구 국가기구 내의 수많은 연줄들을 통해 정치적 행동으로 나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동계급은 자신의 혁명정당이 없이는 권력을 절대로 장악할 수 없다.

1921년 중반이 되어서야 “대중을 획득하라”, “공동전선을 수립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각국 공산당들을 조직할 수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10월 혁명이 제기한 문제들은 뒷전으로 밀렸고 동시에 10월 혁명에 대한 연구도 같은 처지에 놓였다. 그러나 작년 우리는 다시 한번 노동계급 혁명의 문제에 봉착하였다. 모든 관련 문서들을 수집하고 모든 가능한 자료들을 출판하고 연구에 몰두해야할 필요는 이제 절박해졌다!

모든 나라, 모든 계급, 심지어는 모든 당도 경험의 가혹한 매질로부터만 뭔가를 배운다. 이것을 우리는 물론 잘 알고있다. 그러나 다른 나라, 다른 계급, 다른 당의 경험이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뜻은 전혀 아니다. 1905년 혁명의 경험을 거치기는 했지만 프랑스 대혁명, 1848년 혁명, 빠리 꼬뮌 등을 연구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결코 10월 혁명을 성취할 수 없었을 것이다. 과거 혁명들이 제시한 교훈들을 연역하고 이로부터 혁명의 역사적 발전 논리를 확대 적용하면서 우리는 러시아 혁명들의 “일국적” 경험을 거쳤다. 10월 혁명 이후 닥친 반혁명 시기 전체를 우리는 1905년의 교훈과 의의를 연구하면서 견디어 나갔다.

그러나 승리한 10월 혁명에 대한 연구는 진행되지 않았다. 아니 그 동안 연구에 들인 노력의 10분의 1도 10월 혁명의 연구에 바쳐지지 않았다. 물론 우리는 지금 반동의 시기를 경과하고 있거나 망명객의 처지에 놓여 있지는 않다. 지금 우리가 동원할 수 있는 역량과 자원들은 과거 어려운 시기에 비하면 한없이 증대했다. 다만 지금 우리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당과 인터내셔널의 차원에서 명확하게 그리고 누구에게도 쉽게 이해되도록 10월 혁명 연구의 필요성을 제기하는 것이다. 당 전체와 특히 당내 젊은 세대들이 차례로 10월 혁명의 경험을 연구하여 자기 것으로 소화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왜냐하면 10월 혁명은 과거 존재했던 정치노선들에 대한 최상의 시험대가 되었으며 미래로 넓은 문을 활짝 열어 젖혔기 때문이다. 작년의 독일 혁명은 10월 혁명 연구의 중요성을 심각하게 제기했을 뿐만 아니라 절박하게 경고하였다.

그러나 10월 혁명 과정에 대한 가장 철저한 지식마저도 독일 공산당의 혁명 승리를 결코 보장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반론이 물론 제기될 것이다. 그러나 이런 류의 완전히 속물적인 논리는 우리에게 하등의 도움도 되지 못한다. 물론 10월 혁명을 연구만 한다고 해서 다른 나라 혁명의 승리가 확실하게 보장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혁명의 조건이 무르익었으나 혁명의 법칙과 방식들을 이해하고 있는 선지적이며 결연한 당지도부가 존재하지 않은 경우는 얼마든지 있다. 작년의 독일이 정확히 이런 경우였다. 이와 비슷한 상황이 다른 나라에서도 반복될 수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노동자 혁명의 법칙과 방법들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10월 혁명의 경험보다 더 중요하고 깊이 있는 연구대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유럽 공산당 지도자들은 비판적이고 아주 세세한 연구를 통해 10월 혁명의 역사를 소화하는 일을 아직까지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 이들은 제 1차 제국주의 세계전쟁이 보여준 전략적 전술적 기술적 경험들을 연구하지 못한 채 지금 새로운 전쟁을 준비하는 총사령관과 같다. 이런 총사령관은 군대를 반드시 패배로 이끈다.

당은 노동자 혁명의 필수적 도구이다. 1917년 2월부터 1918년 2월까지 단 1년의 경험을 통해 그리고 핀란드, 헝가리, 이탈리아, 불가리아, 독일의 보충적인 경험을 통해서 우리는 이렇게 결론 내릴 수 있다: 혁명 준비 작업에서 즉각적 권력 쟁취 투쟁으로 노선을 전환하는 과정에서 당은 필연적으로 위기를 겪을 수밖에 없다. 일반적으로 말해 당내 위기는 전환의 시초 또는 전환의 결과 심각한 국면이 조성될 때마다 일어나게 마련이다. 왜냐하면 당 발전의 모든 시기가 그 나름의 특징들을 가지고 있고 특수한 활동 방식과 습관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전술 전환은 이 습관과 방식들이 어느 정도 단절되는 것을 의미한다. 바로 이 때문에 당내의 모든 갈등과 위기가 직접 그리고 즉시 발생한다. 1917년 7월 레닌은 이렇게 말했다: “급격한 전환의 시기에 봉착하면 진보적 정당들도 당분간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지 못한다. 이 결과 과거에는 옳았으나 이제는 모든 의미를 상실한 구호들을 외치는 경우가 너무 자주 있었다. 과거의 구호들은 이 경우에 역사의 급격한 전환이 ‘갑자기’ 닥친 만큼이나 빨리 그 의미들을 ‘갑자기’ 상실했다.”(레닌 전집 제 25권 183쪽 ”구호에 대하여“[1917년 7월 중반]) 따라서 이러한 전환이 너무 갑자기 일어날 경우 그리고 지난 시기의 관성과 보수적인 활동 방식이 축적되어 당 주요 기구들을 지배할 경우, 수년 또는 수십 년 동안 준비해왔던 결정적인 혁명의 순간에 당은 자신의 지도력을 발휘할 수 없게 된다. 그리고 당은 위기에 의해 파괴되고 혁명운동은 당을 재끼고 멀리 앞으로 나아가 패배로 줄달음치게 된다.

혁명 정당은 다른 정치세력들로부터 압력을 받는다. 발전의 매 단계마다 당은 이 압력에 대해 반격하고 저항하는 방식들을 개발한다. 그런데 전술 전환의 시기에 당내에는 분파들이 모였다가 흩어지고 갈등이 생겨난다. 그리고 이 압력에 대처하는 당의 위력이 약화된다. 이로부터 다음과 같은 가능성이 항상 제기된다: 당내 분파들은 전술 전환의 필요성 속에 등장하지만 원래의 논란 수준을 넘어서서 다양한 계급들을 지지하는 버팀대로 발전할 수도 있다. 이것을 좀더 쉽게 표현하면 이렇다: 자기 계급의 역사적 과업에 부응하지 못하는 당은 다른 계급들의 간접적인 지배 도구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

지금까지 말한 바가 모든 심각한 전술 전환의 경우에 적용된다면 전략적 대전환의 시기에는 더욱더 그렇다. 군사학의 비유를 빌어 말하면 정치에서 전술이란 개개의 작전을 수행하는 기술을 의미한다. 전략은 정치권력 장악을 위한 기술이다. 제 1차 제국주의 세계전쟁이 일어나기 전에는 전술과 전략에 차이가 없었다. 제 2 인터내셔널 시기에 우리는 사회민주주의 전술 개념에 갇혀 있었다. 그런데 이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사회민주주의당은 의회 전술, 노동조합 전술, 시의회 전술, 협동조합 전술 등을 이용했다. 그러나 모든 역량과 자원을 결합하여 적에게 승리하는 문제는 권력 장악을 위한 투쟁을 실제로 조직하는 임무와 관련되어 있다. 따라서 제 2 인터내셔널 시기에는 이 문제가 결코 제기되지 않았다. 이로부터 오랜 시간이 흐른 후 노동계급의 권력 장악이라는 기본적 즉 전략적 문제를 처음으로 제기한 사건은 바로 1905년 혁명이었다. 이 때문에 1905년 혁명의 경험은 이후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자 즉 볼셰비키들에게 엄청난 강점이 되었다. 혁명전략의 거대한 시기는 1917년 러시아에서 먼저 그리고 이어서 유럽 전역에서 시작되었다. 물론 전략은 전술을 폐기하지 않는다. 노동조합운동, 의회활동 등의 문제들은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권력 장악을 위한 결집된 투쟁에 종속되는 하위 수단으로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는다. 전술은 전략에 종속된다.

전술 전환이 보통의 경우 당내 갈등을 유발한다면 전략 전환은 얼마나 깊고 치열한 갈등을 낳을 것인가! 그리고 노동계급 정당이 선전, 조직, 선동 등 혁명 준비 작업으로부터 즉각적 권력 장악 작업으로 들어갈 때 가장 급격한 전환이 이루어진다. 단호하지 못하며 냉소적이고 화해적이며 투항적인 당내의 모든 멘셰비키 분자들은 봉기에 반대하면서 공개적으로 자신들의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고 자신들을 합리화할 이론적 근거를 찾는다. 그리고 과거의 기회주의 조류들로부터 이미 완성된 무기를 찾아낸다. 우리는 이 현상을 미래에 최소한 한번 이상 보게될 것이다.

결정적 투쟁에 앞서 모든 역량들을 검토하고 선택하는 당의 마지막 작업은 1917년 2월부터 10월 사이에 이루어졌다. 이 작업은 대중에 대한 가장 넓은 선동과 조직 작업을 기초로 진행되었다. 10월과 그 이후 우리의 역량은 거대한 역사적 행위라는 용광로 속에서 시험을 거쳤다. 10월 혁명이 끝난 지 7년이 지난 지금 혁명 일반과 특히 러시아 혁명에 대해 제출된 상이한 견해들을 평가하면서 유독 1917년의 경험을 회피하는 것은 메마른 현학에 빠져드는 것과 같다. 이것은 맑스주의에 입각한 정치 분석이 결코 아니다. 이것은 수영을 해야할 사람들이 수영 방법을 시험할 강물에 시선을 두기를 끈질기게 거부하면서 여러 수영 방법들에 대해 말싸움하는 것과 같다. 수영방법들의 효력을 가장 잘 확인하는 방법은 직접 물에 뛰어드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실제 혁명이 전개될 당시 드러난 온갖 견해들이 실제로 어떻게 현실의 시험을 거쳤는지 확인하는 것보다 혁명이론을 검증하는 더 좋은 방법은 없다.

2월과 10월의 ‘노동자 농민 민주주의 독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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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혁명의 전개과정과 결과는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자들 사이에 매우 널리 퍼져있던 맑스주의에 대한 현학적이고 우스꽝스러운 해석을 여지없이 논파시켰다. 이런 식의 해석은 [노동해방] 그룹에서 부분적으로 시작되었으며 멘셰비키들에 의해서 최고로 완성되었다. 이 사이비 맑스주의자들은 “공업이 더 발전한 나라는 공업이 덜 발전한 나라의 미래상을 보여준다.”는 맑스의 조건적이고 제한된 개념을 절대적이고 (맑스 자신의 표현을 그대로 빌리면) 초역사적 법칙으로 왜곡하였다. 그리고 이 왜곡된 법칙에 근거하여 노동자 혁명정당의 전술을 확립하려하였다. 이 논리는 러시아보다 공업이 더 발전한 나라들이 사회주의 혁명의 “모범”을 먼저 보이기 전까지 러시아 노동자들은 정치권력 장악에 대해 어떤 말도 하면 안된다는 결론에 자연스럽게 도달했다.

모든 후진국이 선진국 역사에서 자신의 미래상을 일부 본다는 생각은 물론 논박될 수 없다. 그러나 후진국이 선진국의 발전과정을 전부 그대로 반복한다는 말은 전혀 성립될 수 없다. 이와 반대로 자본주의 경제가 세계적 성격을 가지면 가질수록 후진국의 발전과정은 더욱 독창적 모습을 띤다. 후진국은 자신의 후진성에 자본주의 발전의 최신 성과들을 반드시 결합시켜야 했다. [독일 농민전쟁](뉴욕, 인터내셔널 출판사, 1966) 서문에서 엥겔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자본주의 발전 단계의 특정 시점이 동시에 모든 곳에 나타날 수는 없다. 그런데 이 특정 시점에 자본가 계급은 자신의 분신인 노동자 계급이 자신을 추월하여 성장했다는 사실을 주목하기 시작한다.”(16쪽)

러시아의 자본가 계급은 다른 어떤 나라의 자본가 계급보다 엥겔스의 이 견해를 훨씬 일찍 그리고 좀더 완벽한 형태로 승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05년 이전에 이미 레닌은 러시아 혁명의 이 특수성을 “노동자 농민 민주주의 독재”라고 표현하였다. 이후 10월 혁명이 보여주었듯이 이 표현은 농민의 지지를 받는 노동자계급이 사회주의 독재로 나아가는 과정의 한 단계에서 그 의미가 있었다. 레닌의 철저하게 혁명적이며 역동적인 이 표현은 멘셰비키의 구도와는 완전히 그리고 화해할 수 없이 대립하였다. 멘셰비키의 구도에 따르면 러시아는 선진국 역사를 반복할 수밖에 없다. 즉 자본가 계급은 정치권력을 장악하고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야당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 당의 일부 인사들은 레닌의 표현 즉 노동자 농민 독재 가운데 사회주의 성격에 대비되는 민주주의 성격만 강조했다. 그런데 이것은 후진국 러시아에서 민주주의 혁명만이 가능하다는 주장에 지나지 않았다. 서유럽에서 사회주의혁명이 시작될 것이다. 그리고 러시아는 영국, 프랑스, 독일의 뒤를 이어서만 사회주의의 길로 나아갈 수 있다, 등등. 그리고 이 논리는 어쩔 수 없이 멘셰비키 노선으로 추락할 수밖에 없었다. 이 사실은 혁명의 임무가 단순한 전망이 아니라 단호한 행동의 문제로 다가온 1917년에 완전히 그 진실성을 드러냈다.

민주주의 지지 입장은 실제 혁명상황에서는 논리를 끝까지 밀어붙일 경우 사회주의를 “시기상조”라고 반대하는 노선이 된다. 이것은 노동계급의 노선에서 소자본가계급의 노선으로 옮아가는 것을 의미하였다. 이 노선은 민족민주주의 혁명의 좌익이 되겠다는 것이었다.

그 자체로만 본다면 2월 혁명은 부르주아 혁명이었다. 그러나 부르주아 혁명치고는 너무 늦게 찾아왔으며 안정된 기반을 전혀 갖지 못했다. 2월 혁명은 온갖 모순들에 의해 가리가리 찢겨져서 곧바로 이중권력을 등장시켰다. 그리고 노동자 혁명으로 넘어가는 직접적인 전주곡이 되던가 아니면 러시아를 부르주아 과두정부가 지배하는 반(半)식민지 상태로 다시 돌아가게 하던가 둘 중의 하나로 결말나게 되어 있었다. 물론 실제 과정은 전자로 결말이 났다. 이 결과 2월 혁명 이후의 시기는 두 관점 즉 “민주주의” 혁명을 강화-발전시키고 완성시키는 시기로 아니면 노동자 혁명의 준비기로 이해될 수 있었다. 전자는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 뿐 아니라 우리 당 지도부의 일각에 의해 주장되었다. 물론 차이점이 있었다. 우리 당 지도부는 이 민주주의 혁명을 가능한 왼쪽으로 밀어붙이기 위해 실제로 애를 썼다. 그러나 방법에 있어서는 양자가 근본적으로 같았다. 즉 자본가계급의 지배집단에게 “압력을 행사하는 것”이 방법으로 채택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체제 내에 남아있기 위한 계산된 “압력”이었다. 그런데 이 정책이 우리 당을 지배하였다면 결국 혁명은 우리 당 머리 위로 지나가 버렸을 것이고 결국 노동자 농민 대중의 봉기도 당 지도부의 도움 없이 일어났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7월 시기(역자 주: 뻬쩨르부르그에서 자생적 봉기가 일어나고 이어서 피비린내 나는 탄압이 있었던 때였다. 부르주아 임시정부는 볼셰비키당을 이 봉기의 배후로 지목한 후 당지도부를 체포, 구금시켰으며 당 신문을 강제로 폐간시켰다.)가 거대한 규모로 반복되어 일회적 사건이 아니라 혁명의 거대한 파멸로 결말이 났을 것이다.

거대한 파멸은 당연히 우리 당이 물리적으로 즉시 괴멸되는 것을 의미했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 당 내부의 견해 차이가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물론 혁명의 첫 시기에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이 누렸던 대중적 영향력은 우연한 것이 아니었다. 주로 농민으로 이루어진 소자본가 대중의 수가 전체 인구에서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사실 그리고 혁명 자체가 제대로 성숙하지 못했다는 점을 반영하고 있었다. 이 혁명의 미성숙 정도는 전쟁이라는 지극히 예외적인 상황에서 소자본가 혁명가들에게 혁명의 지도력 내지는 사이비 지도력을 부여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역사를 통해 그래왔듯이 자본가계급의 정치권력을 옹호하였다. 그러나 러시아 혁명이 실제와는 다른 과정을 밟았을 가능성이 없었다는 것은 전혀 아니다. 실제 과정은 계급역관계 뿐 아니라 전쟁에 의해 조성된 일시적 상황으로부터 도출되었다. 농민은 전쟁 때문에 수백만의 조직된 군대로 무장되어 있었다. 노동자들이 자신의 정치적 깃발을 가지고 스스로를 조직하고 농촌 대중에 대한 지도력을 확립하기 전에 소자본가 혁명가들은 전쟁을 반대하고 있던 농민 군대의 지지를 자연스럽게 얻고 있었다. 결국 모든 것을 결정하고 있던 수백만 군대의 엄청난 힘에 의해서 소자본가 혁명가들은 노동자들에게 압력을 가하고 이들을 자기 의도대로 몰아 갔다. 그런데 혁명이 같은 계급 역관계 속에서 다른 과정을 겪을 수도 있다는 사실은 전쟁 직전의 상황에 의해 가장 확실하게 증명되고 있다. 1914년 7월 뻬쩨르부르그는 혁명적 파업의 물결로 뒤덮였으며 공공연한 시가전이 벌어졌다. 이 운동의 절대적 지도력은 우리 당 휘하의 지하조직과 합법 신문의 손안에 있었다. 청산주의자 및 소자본가 정당들에 대항하는 투쟁에서 볼셰비키당은 자신의 영향력을 증대시키고 있었다. 이 운동이 좀더 발전했더라면 무엇보다도 볼셰비키당이 크게 성장했을 것이다. 이 당시 상황이 소비에트를 건설하는 수준까지 발전했다면 1914년의 노동자 소비에트는 처음부터 볼셰비키당의 편이었을 것이다. 볼셰비키가 주도하는 도시 소비에트의 직접적 또는 간접적 지도하에 각성하고 있던 농민들도 이들과 함께 움직였을 것이다. 그렇다고 사회혁명당이 즉시 농촌에서 사라졌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농민혁명의 1단계는 나로드니끼(인민주의자)들에 의해 주도되었을 가능성이 가장 많다. 그러나 지금까지 개괄한 과정으로 보았을 때 나로드니끼는 자기 좌파를 전면에 등장시켜 도시 소비에트를 장악한 볼셰비키와 동맹을 맺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물론 봉기의 즉각적 결과는 이런 경우에도 우선 농민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던 군대의 분위기와 행동에 달렸을 것이다. 만약 전쟁의 발발과 함께 새롭고 거대한 일련의 사건들이 촉발되지 않았다면 1914-1915년 운동이 혁명의 승리를 가져왔을까? 이 문제를 지금 추측하는 것은 불가능할 뿐 아니라 심지어 부질없는 짓일 것이다. 그러나 1914년 7월의 사건들로 시작된 일련의 과정으로 혁명이 승리하였다면 짜르 왕정의 타도와 함께 혁명 노동자 소비에트는 즉각 권력을 장악했을 가능성이 많았다. 그리고 노동자 소비에트는 나로드니키 좌파라는 매개를 통해 애초부터 농민 대중을 장악했을 것이다. 이 주장을 입증하는 증거들은 상당히 많다.

그러나 전쟁은 발전하고 있던 혁명운동을 교란시켰다. 처음에는 혁명을 지체시켰으나 나중에는 혁명에게 엄청난 가속도를 붙여주었다. 수백만 군대라는 매개를 통해 전쟁은 소자본가 정당들에게 사회적으로 조직적으로 아주 예외적인 권력 기반을 조성해 주었다. 왜냐하면 혁명적 기상으로 충만한 시기에도 그 거대한 숫자에 비해 농민 대중은 조직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이것이 농민의 정치적 특성이다. 이미 마련된 조직 즉 군대를 등에 업고 소자본가 정당들은 노동자들을 압도했고 이들을 조국방어라는 구호로 혼란시켰다. “노동자 농민 민주주의 독재”라는 낡은 표현을 레닌이 즉시 맹렬하게 반대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이 표현은 변화된 상황 속에서 볼셰비키당을 조국방어 정치연합의 좌익으로 변모시켰기 때문이었다. 노동자 전위를 조국방어의 늪에서 구하는 것이 당의 주요한 임무라고 레닌은 생각했다. 오직 이 조건 속에서만 노동계급은 다음 단계에서 농촌의 근로인민 대중을 결집시킬 중심 축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이 상황에서 민주주의 혁명이나 노동자 농민 민주주의 독재에 대한 우리는 태도는 어떠해야 했는가? 레닌은 “고참 볼셰비키들”을 가차없이 반박했다. 이들은 “새롭고 살아 움직이는 현실의 구체적인 특징들을 연구하는 대신 낡은 정식들을 단순히 암기하면서 당 역사에서 이미 한 번 이상 유감스러운 역할을 했다.” “그러나 우리는 낡은 정식이 아니라 눈앞에 전개되는 현실에 부응해야 한다. 이 현실은 카메네프 동지의 낡은 볼셰비키 정식 즉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에 잘 반영되어 있는가?”

자신의 이 질문에 레닌은 스스로 이렇게 대답했다: “그렇지 않다. 이 정식은 이미 시효가 지났다. 이제 전혀 쓸모가 없다. 이미 죽었다. 따라서 다시 그 의미를 재생시키려해도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레닌 전집 제 24권, “전술에 대한 편지”]

2월 혁명의 첫 시기에 노동자 병사 농민 소비에트가 어느 정도 노동자 농민의 혁명적 민주주의 독재를 확실히 구현했다고 레닌은 가끔 말한 적이 있다. 이러한 소비에트들이 대체로 권력을 구현했다는 면에서 이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2월 시기의 소비에트는 반쪽 권력을 구현했을 뿐이라고 레닌은 누차 설명했다. 소비에트는 부르주아 권력을 지지하면서도 반 정도는 야당 역할을 했다. 즉 부르주아 정부에게 “압력”을 가했다. 소비에트가 노동자 농민 병사의 민주주의 연합이라는 틀을 넘어서지 못한 것은 바로 이 애매한 중간적 입장 때문이었다. 통치 형태로서 이 연합은 정부의 통제를 받지 않았다. 오직 군대와 혁명대중에 의해 직접 통제되고 있었다. 따라서 독재의 경향을 띠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진짜 독재에는 한참 못 미쳤다. 화해주의적 소비에트의 불안정한 성격은 바로 반쪽 권력을 가진 노동자 농민 병사 연합의 애매한 민주주의적 성격 때문에 나타났다. 소비에트는 완전히 없어지지 않으면 자기 손안에 진짜 권력을 거머쥐어야 했다. 그러나 각기 다른 정당들에 의해 대표되는 노동자 농민의 민주주의 연합이 아니라 단일 정당에 의해서 지도되는 노동계급의 독재로서 그리고 농민의 반(半)노동자 부위를 위시하여 자신의 휘하에 농민 대중을 끌어들임으로서 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다. 다시 말하면 노동자 농민의 민주주의 연합은 진정한 권력을 장악할 수 없었던 미성숙한 형태로만 존재했다. 즉 명확한 사실이 아니라 하나의 경향으로만 존재할 수 있었다. 권력을 향한 어떠한 전진도 불가피하게 민주주의 외피를 찢어발기고 농민 다수에게 노동자계급의 뒤를 따를 것을 요구해야 했다. 그리고 노동계급에게 계급 독재를 실현할 기회를 제공하고 사회관계들을 가차없이 근본적이며 완전한 민주주의로 변화시켜야했다. 그리고 자본주의 소유체제 내에 사회주의적 노동자국가를 침투시켜야 했다. 이 상황에서 “민주주의 독재”라는 정식에 계속 매달린 자들은 실제로는 권력 장악을 포기하고 혁명을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가는 자들이었다. 모두의 관심을 집중시킨 근본적 쟁점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우리가 권력을 장악할 것인가 말 것인가? 당시 우리는 단순한 일회적 견해 차이가 아니라 가장 근본적 두 정치 경향들을 목격하고 있었다. 첫번째 경향은 원칙적으로 노동계급의 이해에 기초하여 세계혁명의 길로 나아갔다. 두번째 경향은 “민주주의” 즉 소자본가계급의 이해를 표현하였으며 결국 노동자 정당을 개혁 과정에 있는 부르주아 사회에 종속시키는 것으로 나아갔다. 이 두 경향은 1917년 내내 모든 핵심적 문제에 대해 언제나 적대적으로 대립했다. 당이 축적한 혁명적 자산은 혁명적 시기가 되어야 즉각 드러난다. 이때는 실제 행동을 통해 각 경향들 간의 성격과 차이점들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이 두 경향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든 나라의 혁명 상황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내게 마련이다. 핵심적인 측면만을 본다면 볼셰비키주의는 노동자 전위당이 손에 무기를 들고 권력을 장악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훈련, 단련, 조직을 의미한다. 그리고 사회민주주의는 부르주아 사회에서 개량주의 야당 역할을 자임하고 이 사회의 법에 스스로 적응하려는 시도 즉 대중을 부르주아 국가의 신성불가침 이데올로기로 가득 주입시키고 훈련시키는 경향이다. 그렇다면 역사의 무대에 완성되지 않은 모습으로 등장한 공산당이 그 내부에 사회민주주의 경향과 볼셰비키 경향을 동시에 갖는 것은 너무 당연하다. 그리고 이 두 경향들은 정치권력 장악 문제가 즉각 제기되는 혁명 시기에 가장 명확하고 공개적이며 가식 없는 형태로 모습을 드러낸다.

4월 4일 즉 레닌이 뻬쩨르부르그에 도착한 날이 되어서야 정치권력 장악 문제가 당내에 제기되었다. 그러나 이때 이후에도 당의 정치노선이 어느 누구의 도전도 받지 않을 정도로 통일된 것은 결코 아니었다. 1917년 4월 당 협의회(역자 주: 격렬한 토론 후에 레닌의 노선을 공식 채택한 회의)의 결정에도 불구하고 혁명 노선에 대한 반대는 어떤 때에는 숨겨진 채로 어떤 때에는 공공연하게 혁명을 준비하는 기간 내내 당내에 스며들었다.

2월부터 혁명이 최종 승리한 시기까지 드러났던 이견들의 경향을 연구하는 것은 이론적으로 대단히 중요하다. 그리고 실천적으로는 가장 중요하다. 1910년 레닌은 1903년의 제 2차 당대회에 드러났던 이견들을 “앞날을 예견해주는” 사전 경고라고 말한 바 있었다. 이 견해 차이들의 기원을 1903년 아니면 심지어 “경제주의” 태동 당시까지 거슬러 올라가 찾아내는 일은 중요하다. 그러나 이 연구는 논리를 끝까지 밀어붙여 다양한 이견들을 시험한 10월 시기를 포괄해야 진정 그 의의를 획득할 수 있다.

서문의 길이가 갖는 제약 때문에 우리는 이 투쟁의 모든 단계들을 낱낱이 살펴볼 수는 없다.(역자 주: 이 글은 원래 1917년부터 트로츠키가 작성한 글들과 연설문을 한데 모은 책자의 서문이었다.) 그러나 우리 당 발전의 가장 중요한 시기가 문서상으로 비어있다는 사실은 한탄할 만하다. 이 빈곳을 최소한 부분적으로나마 채우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미 말했듯이 이견은 권력 장악의 문제를 중심에 두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말해 이 문제는 혁명 정당과 기타 정당들의 성격을 결정하는 시금석이다.

이 시기에 제기되고 결정된 전쟁 문제와 권력 장악 문제는 서로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이 문제들을 주요한 이정표들을 들어가면서 시간의 순서대로 고찰할 것을 제안한다. 즉 짜르가 타도된 후 레닌이 뻬쩨르부르그로 돌아올 때까지의 당과 당 신문의 입장, 레닌이 주창한 4월 테제에 대한 반발, 4월 당 협의회, 7월 시기의 여파, 코르닐로프 쿠데타, 민주회의와 예비의회, 무장봉기와 권력 장악의 문제(9월부터 10월까지), “단일 계급으로 구성된” 사회주의 정부 등을 중심으로 논의를 진행해보자.

이 중요 지점들에 나타난 당내 이견들에 대한 연구는 코민테른 산하 각국 공산당들에게 대단히 중요한 새로운 교훈들을 제시할 것이라고 필자는 믿는다.

조국방위 및 전쟁 지속에 대한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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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2월 짜르를 타도한 혁명은 다시 말할 필요도 없이 거대한 역사적 도약이었다. 그러나 10월 혁명으로 가는 과정으로 보지 않고 그 자체로만 바라볼 경우 2월 혁명은 러시아가 프랑스와 같은 부르주아 공화국이 된다는 의미 밖에 없었다. 소자본가 혁명정당들은 언제나 2월 혁명을 부르주아 혁명도 아니고 사회주의 혁명을 향한 일보 전진도 아니라 그저 일종의 자족적인 “민주주의”혁명으로만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 사고를 바탕으로 혁명적 조국방어라는 이데올로기를 수립했다. 이들은 말하자면 어느 계급의 통치체제와도 무관한 “혁명”과 “민주주의”를 방어하고 있었다. 그러나 2월 혁명의 태풍은 우리 당 내부에조차 정치적 전망에 있어서 첫 번째 커다란 혼란을 가져왔다. 3월에 당 기관지 [프라우다]는 레닌의 입장보다는 혁명적 조국방어의 입장에 실제로 훨씬 가까운 논조를 보였다.

[프라우다]에 실린 어떤 글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군대가 서로 대치하고 있을 때 이들 중 한편이 무기를 놓고 집으로 돌아가게 만드는 것만큼 어리석은 정책은 없을 것이다. 이러한 정책은 평화정책이 아니라 예속의 정책이다. 따라서 자유를 추구하는 국민은 이 정책을 경멸하며 거부해야 한다. 그렇다. 러시아 국민은 용감히 자신의 진지를 지키며 총탄에는 총탄으로 포탄에는 포탄으로 응수해야 한다. 이것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 우리는 혁명군대의 대오가 해체되는 것을 허용할 수 없다.” (1917년 3월 15일 [프라우다] 제 9호, “비밀외교를 반대한다”) 이 글은 계급, 억압자, 피억압자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 대신에 “자유를 추구하는 국민”이라는 말이 있을 뿐이다. 정치권력을 위해 투쟁하는 계급들은 존재하지 않으며 그 대신에 “자신의 진지를 지키는” 자유로운 국민이 있을 뿐이다. 이 글은 분석 방법 뿐 아니라 생각 자체에도 철저한 조국방위주의 냄새를 풍기고 있다. 그리고 다음 글은 한술 더 뜨고 있다: “우리의 구호는 혁명군대 특히 더욱더 혁명적이 되고 있는 군대의 해체를 의미하는 공허한 ‘전쟁 반대!’가 아니라 임시정부에 압력(!)을 가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래서 세계 민주주의(!)가 보는 앞에서 임시정부가 반드시 공개적으로 모든 전쟁 당사국들이 세계대전을 끝내기 위한 즉각적인 협상에 들어가도록 유도하는(!) 시도(!)를 하도록 압력을 가해야한다. 이때가 될 때까지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진지(!)를 지켜야한다.” 제국주의 정부가 엄숙한 협상을 추구하도록 “유도하는” 압력을 넣는 정책은 독일의 카우츠키(Kautsky)와 레데부어(Ledebour), 프랑스의 장 롱게(Jean Longuet), 영국의 맥도널드(McDonald)의 정책이었다. 이것이 볼셰비키의 정책이 된 적은 한번도 없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지금까지 인용한 글은 “전세계 인민”에게 보내는 뻬쩨르부르그 소비에트의 악명 높은 선언문에 대해 “가장 애정 어린 찬사”를 보내고 있다. 그리고 뻬쩨르부르그 소비에트의 두 차례 회의에서 채택된 공공연한 조국방어주의 결의문들에 대한 [프라우다] 편집진의 연대를 “흔쾌히” 강조하고 있다. 뻬쩨르부르그 소비에트의 선언문은 처음부터 끝까지 혁명적 조국방어 정신에 충만해 있었다. 결의문 중 하나를 여기서 인용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민주 세력들이 우리의 목소리(저자 주: 즉 임시정부와 화해주의 소비에트의 “목소리”)를 귀담아 듣지 않는다면 우리는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우리의 조국을 방어할 것이다”(1917년 3월 15일 [프라우다] 제 9호)

위에서 인용한 글은 예외적인 글이 아니다. 레닌이 러시아에 돌아오기 전까지 [프라우다]의 입장을 아주 적절하게 대변하고 있다. 그래서 이 신문의 바로 다음 호에 실린 글 “전쟁에 대하여”는 “전세계 인민에게 보내는 선언문”에 대해 일부 비판하는 논조를 보이면서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어제 발표된 뻬쩨르부르그 노동자 병사 소비에트의 선언문에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이 선언문은 전세계 인민들이 자국 정부의 살육을 강제적으로 종식시킬 것을 호소하고 있다.” (1917년 3월 16일 [프라우다] 제 10호) 그렇다면 전쟁을 어떻게 끝낼 것인가? 위 글은 이렇게 대답한다: “즉각 협상을 선언하도록 임시정부에 압력을 넣어야 전쟁이 끝난다.”

조국방어주의와 화해주의를 은근히 주장하는 이러한 글들을 필자는 얼마든지 인용할 수 있다. 이 때 아니 이보다 몇 주전에 레닌은 아직도 스위스의 쮜리히에 묶여 있었다. 그러나 그는 “멀리서 온 편지들”을 통해 조국방어와 화해를 조금이라도 내비치는 노선 대해 맹렬하게 비판하였다. 그러나 이 편지들은 단 한번도 [프라우다]에 실리지 못했다. 자본주의 나라에 도달한 왜곡된 내용의 전보들을 통해 혁명의 상황을 파악하고 있던 그는 3월 9일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임시정부가 제국주의 전쟁을 계속하고 있으며, 영국 자본의 하수인이며, 왕정을 복귀시키고, 지주와 자본가들의 지배를 강화하기를 원한다는 사실을 우리 자신과 인민에게 숨기는 것은 절대 인정할 수 없다.” 그리고 며칠 뒤 3월 12일 그는 이렇게 말했다: “임시정부에게 민주적 평화협정을 체결하라고 촉구하는 것은 사창가 주인에게 미덕을 설교하는 것과 같다.” [프라우다]가 “세계 민주주의가 보는 앞에서” 임시정부가 평화를 위해 개입하도록 임시정부에게 “압력을 넣을 것”을 주창하고 있을 때, 레닌은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을 쓰고 있었다: “구츠코프-밀류코프 정부가 신속하고 정직하며 민주적이고 친선에 입각한 평화조약을 체결하라고 촉구하는 것은 시골 마을의 선량한 신부가 지주와 상인들에게 ‘하느님의 길을 걸으며’ 이웃을 사랑하고 나머지 뺨도 내밀라고 촉구하는 것과 같다.” (레닌 전집 제 23권, “멀리서 온 편지들” 1917년 3월 9일, 3월 12일 315-133쪽)

뻬쩨르부르그에 도착한 다음날인 4월 4일 레닌은 전쟁과 평화 문제에 대해 [프라우다]의 입장을 전격적으로 반대하는 글을 썼다: “임시정부를 지지할 수 없다. 특히 영토 병합을 포기하는 문제와 관련된 임시정부의 순전한 거짓말을 명확히 폭로해야 한다. 부르주아 임시정부가 제국주의 정부가 되기를 그만두라는 ‘요구’는 인정될 수 없다. 임시정부에 대한 환상을 부추기는 이 ‘요구’를 즉각 거두어야한다. 그리고 이 정부의 실체를 폭로해야 한다.” (레닌 전집 제 24권, “당면한 혁명에서 노동자의 임무” 1917년 4월 4일 22쪽) [프라우다]가 그렇게 찬사를 늘어놓은 화해주의자들의 3월 14일 선언문에 대해 레닌은 “악명 높은”, “혼동된” 등의 형용사를 사용했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자국 은행가들과 연립정부를 수립하는 동시에 타국 정부들에게 은행가들과의 관계를 단절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위선의 극치이다. “‘중앙파’는 자신이 맑스주의자이며 국제주의자라고 선언한다. 그리고 평화, 정부에 대한 모든 종류의 ‘압력 가하기’, 정부가 ‘평화에 대한 인민의 의지를 확실히 구현할 것’을 모든 방식으로 ‘요구할 것’ 등을 지지한다고 선언한다.” (레닌 전집 제 24권, “당면한 혁명에서 노동자의 임무 -- 노동자 정당의 강령 초안” 1917년 5월 28일 76쪽)

지금 즉시 누군가가 필자의 논지에 대해 이렇게 반대할지도 모른다: 혁명정당이 자본가 계급과 그 정부에게 “압력을 가하는 일”을 그만두어야 합니까? 물론 그렇지 않다. 자본가 정부에게 압력을 넣는 것은 개량을 이루기 위한 것이다. 혁명적 맑스주의 정당은 개량을 거부하지 않는다. 그러나 개량은 근본 문제가 아니라 부차적 문제에서나 유용하다. 국가권력은 개량으로 얻어질 수 없다. 부르주아가 자기 목숨이 걸린 문제에서 정책을 바꾸도록 유도하기 위해서 “압력”을 넣는 것은 불가능하다. 개량에 대한 “압력”의 여지를 조금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전쟁은 혁명 상황을 조성하였다. 부르주아 계급과 함께 끝까지 같이 가거나 아니면 그들의 손에서 권력을 빼앗기 위해 대중을 선동하던가 둘 중 하나의 길을 선택해야한다. 첫번의 길을 갈 경우 부르주아 계급의 제국주의 대외정책을 무조건 지지하는 조건으로 국내정책에서 국물 정도의 양보를 얻을 수는 있을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사회개량주의자(역자 주: 사회주의를 떠벌리면서 실제로는 개량주의를 추구하는 자)들은 전쟁이 발발하자 공공연히 사회제국주의자(역자 주: 사회주의를 떠벌리면서 실제로는 제국주의 정책을 지지하는 자)로 모습을 바꾸었다. 바로 이 때문에 진정한 혁명세력은 새로운 인터내셔널을 창립하지 않을 수 없었다.

[프라우다]의 입장은 노동자의 이익이나 혁명과는 무관하며 단순히 민주주의적 조국방어주의에 불과했다. 그리고 조국방어주의를 주창하면서 동요했다. 짜르를 타도했으므로 이제 우리 자신이 수립한 민주정부에게 압력을 가해야 한다. 민주정부는 세계 인민들에게 평화를 제안해야 한다. 독일의 민주세력이 자기 정부에 대해 응당한 압력을 가하지 못할 경우 우리는 마지막 피 한 방울을 흘리면서까지 우리의 “조국”을 방어할 것이다. 노동계급의 국가권력 장악은 실천적 혁명의 임무로 제기되지 않는다. 따라서 평화 실현은 노동계급이 임시정부를 뛰어넘어 성취해야할 노동계급의 독립적 임무로 제기되지 않는다. 그러나 평화 실현과 노동계급의 국가권력 장악은 당시 불가분의 관계로 결합되어 있었다.

4월 당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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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은 러시아로 귀환한 핀란드역에서 러시아혁명의 사회주의적 성격에 대해 연설했다. 당시 국내 볼셰비키당 지도부에게 이 연설은 맑은 하늘의 날벼락이었다. 레닌이 러시아로 귀국한 첫날부터 그와 “민주주의혁명의 완성”을 주장하는 인사들 사이에 논쟁이 벌어졌다.

우선 “임시정부를 타도하자!”는 구호를 내건 4월의 무장시위에 대한 날카로운 대립이 생겨났다. 이 사건은 우파가 레닌을 블랑끼주의자(역자 주: 프랑스의 루이 오귀스뜨 블랑끼(1805-81)는 훈련된 소수가 혁명을 일으킬 것을 주장했다. 이 엘리트주의적 모험주의를 블랑끼주의라고 한다. 이것은 대중 투쟁만이 혁명을 성공시킬 수 있다는 맑스주의 혁명관과 전혀 다르다.)로 매도할 구실을 제공하였다. 임시정부 타도 구호는 당시 소비에트 내에서 다수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그런데 근로대중 대다수는 임시정부의 타도를 원치 않는다는 주장이 볼셰비키당 우파에 의해 제기되었다.

형식의 측면에서 보면 이 비난은 근거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실의 측면에서 보면 당시 레닌의 정책에는 블랑끼주의가 털끝만큼도 없었다. 레닌은 이 문제를 “소비에트가 대중의 정서를 진정으로 반영하고 있으며 당이 소비에트 다수파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것이 실수가 아닌가”로 집약했다. 4월의 무장시위는 “극좌”로 치닫고 있었는데 대중의 정서 그리고 소비에트 다수파와 대중 사이의 상호관계를 측정하는 시험대가 되었다. 이 사건은 근로대중이 혁명으로 나서는 데에는 상당한 준비기간이 필요하다는 판정을 내렸다. 5월이 시작되었을 때 크론슈타트 수병들은 극좌로 치달으면서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레닌은 이 노선을 날카롭게 비판하여 저지시켰다.

그런데 노동계급의 권력장악을 반대했던 우파는 이 문제를 완전히 다른 각도에서 접근했다. 4월 당협의회에서 카메네프 동지는 다음과 같이 불평하였다: “[프라우다] 제 19호에 동지들(저자 주: 물론 레닌을 뜻한다.)은 임시정부 타도 결의안을 제출하였다. 이 결의안은 실제로 4월 무장시위 전에 제출되었다. 그런데 이 노선은 혼란을 초래한다는 이유로 나중에 거부되었으며 모험주의로 규정되었다. 이 사실은 우리 동지들이 이 위기를 통해 뭔가를 배웠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 (저자 주: 레닌이) 제출한 결의안은 이 오류를 반복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이렇게 문제를 제기하는 카메네프의 방식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레닌은 무장시위 사건 후 임시정부 즉각 타도 구호를 철회했다. 그러나 몇 주 또는 몇 달 동안 이 구호를 철회한다고 주장하지는 않았다. 화해주의자들에 대한 대중의 혐오감이 증대되는 정도에 정확히 맞추어 이 구호를 다시 제출할 수 있었다. 이와 반대로 우파는 구호 자체를 오류로 간주하였다. 레닌의 일시적인 전술적 후퇴는 정치노선의 전환이 아니었다. 그는 민주주의혁명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기초하지 않았다. 대중이 아직 임시정부를 타도할 능력이 없으며 따라서 임시정부 타도를 위한 준비가 지금 필요하다는 사고에 기초했다.

4월 당협의회는 다음과 같은 근본 문제에 모든 시간을 바쳤다: 우리는 사회주의혁명의 이름으로 권력 장악을 향해 전진하고 있는가 아니면 민주주의혁명의 완성을 위해 다른 세력에게 도움을 주고 있을 뿐인가? 불행하게도 아직까지 4월 당협의회 보고서는 출판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이 대회만큼 우리 혁명의 운명에 예외적이고 즉각적으로 영향을 미친 대회는 거의 없을 것이다.

레닌의 입장은 다음과 같았다: 조국방어 세력에 대한 가차없는 투쟁, 소비에트 다수파 획득, 임시정부 타도, 소비에트를 통한 권력 장악, 혁명적 평화정책, 국내 및 국제 사회주의혁명을 위한 강령. 이와 반대로 우파는 임시정부에 압력을 행사함으로서 민주주의혁명을 완성시켜야하며 이 과정에서 소비에트는 부르주아 국가권력을 “통제”하는 기관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이들의 입장은 조국방어주의에 대한 또 다른 형태의 좀더 화해적인 노선이었다.

4월 당협의회에서 레닌의 입장에 반대한 어느 인사는 이렇게 주장하였다: “우리는 노동자 병사 소비에트를 마치 우리 세력과 국가권력을 조직하는 중심인 것처럼 말하고 있다. ... 소비에트라는 이름 자체는 아직 달성되지 않은 민주주의혁명의 과제에 직면해 있는 소자본가와 노동자계급의 연합을 의미한다. 부르주아 민주주의혁명이 완성된다면 계급 연합체인 소비에트는 사라질 것이다. ... 그리고 노동계급은 이 연합에 대해 혁명적 투쟁을 벌이고 있을 것이다. ... 그런데도 우리는 소비에트를 우리 세력의 조직 중심부로 인정하고 있다. ... 결국 부르주아혁명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으며 이미 시효를 다한 것도 아니다. 이 혁명이 완성되면 국가권력은 노동계급의 손으로 넘어가 있을 것이다.” (카메네프 동지의 연설 가운데에서)

이 주장은 가망 없을 정도로 도식적이다. 왜냐하면 문제의 핵심은 바로 이것이기 때문이다: “부르주아 혁명의 완벽한 성취”는 국가권력을 장악하는 계급을 바꾸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위 연설은 혁명의 계급문제를 무시하고 있다. 이 연설은 실제 계급 관계를 고려하지 않은 채 형식적으로 혁명을 부르주아 또는 부르주아민주주의로 규정한 가운데 당의 임무를 도출하고 있다. 이 주장에 의하면 우리는 소자본가 계급과 연합하여 부르주아혁명이 완전히 성취될 때까지 부르주아 권력을 통제해야 한다. 이것은 명백히 멘셰비키주의이다. “부르주아”혁명이라는 이름에 우리의 과제를 도식적으로 한정하기 때문에 임시정부에 대한 통제력을 행사하고 임시정부가 병합 없는 평화조약을 체결하라고 요구할 수밖에 없다. 민주주의혁명의 완성이란 제헌의회를 통한 개혁의 성취에 불과하다! 더욱이 볼셰비키당은 제헌의회에서 좌파가 되어야 한다. 이런 식의 정치 전망은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구호의 실제 의미를 박탈했다. 이것이 4월 당협의회에서 우파의 노선이었는데 고인이 된 노긴이 최상의 방식으로 철저히 개진했다: “소비에트는 발전과정에서 자신의 가장 중요한 기능들을 소진시킬 것이다. 행정 기능들은 전부 시, 구 등의 행정기구로 이양될 것이다. 국가기구의 미래를 위해 제헌의회 그리고 이후 의회가 소집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 따라서 가장 중요한 소비에트의 기능은 점차 사멸될 것이다. 그렇다고 소비에트가 불명예로 자신의 존재를 마감한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자신의 기능들을 이양할 뿐이다. 지금의 소비에트로는 러시아에 공동체 공화국을 건설할 수 없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레닌의 노선을 반대한 세 번째 인사는 러시아가 사회주의를 실시할 준비를 아직 갖추지 못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노동자혁명의 구호를 제출할 경우 대중의 지지를 받을 수 있을까? 러시아는 유럽에서 소자본가가 가장 많은 나라이다. 이 소자본가 대중은 사회주의혁명을 지지하지 않을 것이다. 결국 당이 사회주의혁명 전망에 매달릴수록 대중적 지지를 상실한 선전 그룹으로 머물 것이다. 사회주의혁명의 물결은 서구에서 밀려와야 한다.” 그는 계속 주장한다: “사회주의혁명의 태양은 어디서 떠오를 것인가? 모든 상황과 러시아의 일반적 문화수준으로 보아 러시아는 사회주의혁명을 시작할 수 없다. 우리에게는 사회주의혁명을 수행할 역량이 없다. 객관적 상황이 이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러나 서구는 러시아가 짜르를 타도했듯이 사회주의 혁명을 성취할 수준에 도달했다.”

4월 당협의회에서 레닌의 노선을 반대한 모두가 노긴을 지지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들 전부는 몇 달 후 10월 혁명의 전야에 이와 동일한 논리적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노동계급 혁명을 지도하던가 부르주아 의회의 야당이 되던가 둘 중의 하나로 당내에서 입장이 형성되었다. 후자는 근본적으로 멘셰비키 노선임에 틀림없다. 아니 멘셰비키들이 2월 혁명 후 이 입장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하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사실 오랜 세월동안 멘셰비키들은 다가올 혁명이 부르주아혁명이며 이 혁명 정부는 오직 부르주아 민주주의 과제만을 성취할 수 있으며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과제를 떠맡아서는 안되면 “부르주아 계급을 좌로 밀어붙이면서” 야당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고 수많은 딱따구리처럼 쪼아대었다. 특히 마르티노프는 이 주제를 심오하게 발전시켰다. 1917년 부르주아혁명이 시작되자 멘셰비키들은 부르주아 정부의 장관이 되었다. 이들의 전적으로 “원칙적” 입장에 의하면 노동자는 감히 권력을 잡지 말아야한다. 그러나 멘셰비키들의 입각을 비난하면서 동시에 노동계급의 권력장악을 반대한 볼셰비키 우파는 혁명 이전 멘셰비키의 입장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혁명은 두 방향으로 정세를 변화시켰다. 반동들은 입헌민주당에 입당했다. 이 정당은 자신의 소망과는 반대로 공화주의 정당이 되었다. 즉 순전히 형식적으로만 좌로 움직였다.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는 부르주아 여당이 되었다. 즉 우로 움직였다. 이 정세 변화는 부르주아 사회가 국가권력, 사회안정, 질서 등 새로운 기반을 수립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멘셰비키가 형식적 사회주의 노선에서 속물적인 민주주의 노선으로 이동한 반면 볼셰비키 우파는 형식적 사회주의 노선 즉 멘셰비키의 옛날 노선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전쟁문제에서도 정세가 똑같이 재편되었다. 몇몇 교조적 인물을 제외하면 부르주아계급은 한결같이 싫증나게 외쳤다: 병합과 배상은 인정할 수 없다. 다른 나라를 병합할 가능성이 갈수록 희박했기 때문에 러시아 자본가들은 더욱더 맹렬하게 이 곡조를 읊었다. 짐머발트 반전 회의에 참가했던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은 제 1차 세계대전 발발 직후 조국방어에 나선 프랑스 사회주의자들을 비판했다. 그런데 이들은 이제 부르주아 공화국 정부의 일원이라고 자신의 존재를 자각하자 즉시 조국방어에 나섰다. 이들은 수동적 국제주의 입장에서 능동적 애국주의 입장으로 선회했다. 동시에 볼셰비키 우파는 “병합과 배상이 없는” 민주주의적 평화를 위해 임시정부에게 “압력”을 가하는 수동적 국제주의 입장으로 옮아갔다. 따라서 4월 당협의회에서 노동자 농민 민주주의 독재 노선은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 분쇄되었다. 그리고 이로부터 상반된 두 노선 즉 형식적 사회주의로 위장한 민주주의 노선과 진정한 볼셰비키-레닌주의의 혁명적 사회주의 노선이 등장했다.

7월 시기, 코르닐로프 쿠데타, 민주회의, 예비 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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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당협의회의 결정은 원칙적으로 올바른 방향을 당에 제시했다. 그러나 당 지도부 내의 이견을 해소하지는 못했다. 이와 반대로 사태가 진행되면서 이견들은 좀더 구체적 형태를 띠면서 혁명의 가장 결정적 순간인 7월에 가장 날카롭게 표현되었다.

레닌이 제안한 6월 10일 시위는 4월 무장시위에 대해 불만을 가졌던 바로 그 동지들에 의해 모험주의라고 비난받았다. 이 시위는 소비에트 대회에 의해 금지되었기 때문에 성사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6월 18일 당은 결국 소비에트에게 복수를 하고 자신의 의도를 실현시켰다. 즉 화해주의자들이 분별없이 제안했던 뻬쩨르부르그의 대대적인 시위는 거의 볼셰비키당의 구호를 들고 진행되었다. 그러나 임시정부는 자기 의도대로 사태를 몰고 가려했다. 즉 전선에 배치된 러시아군에게 경솔하게 공격을 명령했다. 이것은 바보짓이었다. 이때는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레닌은 신중을 기할 것을 당에게 계속 경고했다. 6월 21일 그는 [프라우다]에 이런 내용의 글을 실었다: “동지들, 이 상황에서 시위를 조직하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혁명의 완전히 새로운 단계에 돌입했다.” 그러나 7월이 곧 다가왔다. 당내 이견의 충돌 뿐 아니라 혁명 도정에서도 중요한 이정표가 될 순간이 다가왔다.

이 중요한 국면은 뻬쩨르부르그 대중의 자연발생적 공격으로 시작되었다. 이 순간 레닌은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던졌음에 틀림없다: 봉기의 시간이 다가왔는가? 혁명을 원하는 대중의 분위기가 소비에트라는 조직을 뛰어넘어 성숙했는가? 소비에트의 합법적 지위에 넋이 빠져 당이 대중의 분위기를 읽지 못하고 이들의 혁명적 분출을 파악하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고립분산적이며 순전히 군사적인 7월의 작업들은 레닌과 상황인식을 같이 한다고 스스로 느낀 동지들에 의해 주도되었을 가능성이 많다. 이후 레닌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7월에 어리석은 짓을 많이 저질렀다.” 그러나 7월 경험의 결과 우리는 혁명의 새롭고 더 높은 단계를 새로이 그리고 더 포괄적으로 파악하는 핵심 성과를 올렸다. 불리한 상황에서 우리는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봉기와 권력 장악을 준비하고 있는 점에서 당은 레닌과 생각이 같았다. 즉 7월 시위는 우리와 적의 힘을 파악하기 위해서 우리가 무거운 대가를 치른 하나의 사건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 사건이 우리의 전략을 변화시킬 수는 없었다. 반면 당의 권력 장악 투쟁을 반대했던 우파 동지들은 이 7월 시위를 해로운 모험이라고만 생각했다. 우파는 점점 치열하게 도전했다. 이들의 비판은 더욱 대담하게 표출되었다. 이럴수록 비판에 대한 반박도 그 치열함이 더해갔다. 레닌은 말했다: “완벽하게 합법적인 대중의 불만과 분노에 ‘평화적이고 조직된’ 성격을 부여하려는 시도에 우리가 참여해서는 ‘안되었는데’라는 요지의 모든 불평과 주장들을 볼셰비키들이 했다면 이것은 완전한 배신행위이다. 아니면 언제나 목격하는 소자본가 계급의 겁 많고 혼란된 상태의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레닌 전집 제 25권, “헌법에 대한 환상”, 1917년 7월 26일) 이 순간에 “배신”이라는 단어가 나온 것은 당내 이견에 비극적 색채마저 부여한다. 혁명이 진행될수록 이 불길한 단어는 더욱 자주 등장했다.

권력 장악 문제와 전쟁 문제에 대한 기회주의적 태도는 인터내셔널에 대한 태도에도 당연히 그대로 반영되었다. 우파는 볼셰비키당을 사회애국주의자들의 회합인 스톡홀름 회의(역자 주: 1917년 여름 스칸디나비아 사회당들은 소비에트 집행위원회를 스톡홀름 국제 평화회의에 참가하도록 초청했다.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은 이 초청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볼셰비키당의 4월 당협의회는 이 초청을 거절하였다. 독일 제국주의자들이 각국 사회당 정부들을 통해 가장 유리한 평화조건을 타진하기 위해 이 평화회의를 주최했다고 레닌이 주장했기 때문이었다. 카메네프 만이 초청을 받아들이자고 제안했다.)에 끌어들이려 했다. 8월 16일 레닌은 이렇게 말했다: “스톡홀름 회의를 논의한 8월 6일 중앙집행위원회에서 카메네프 동지가 행한 연설은 당과 혁명 원칙에 충실한 모든 볼셰비키들로부터 비판을 받아야 한다.” 위대한 혁명의 깃발이 스톡홀름 상공에 나부끼고 있다고 주장한 일부 발언들에 대해 레닌은 이렇게 말했다: “이것은 체르노프와 쩨레텔리의 정신에나 합당한 헛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은 노골적인 거짓이다. 스톡홀름 상공에 나부끼는 깃발은 혁명의 깃발이 아니라 사회애국주의자들의 술수, 합의, 사면을 알리는 깃발에 불과하다. 그리고 병합된 지역들을 분할하려는 은행가들 사이의 협상을 알리는 깃발일 뿐이다.” (레닌 전집 제 25권, “스톡홀름 회의를 논의한 중앙집행위원회에서의 카메네프 연설”, 1917년 8월 16일)

사실 스톡홀름으로 가는 길은 제 2 인터내셔널로 가는 길이었다. 마치 예비의회에 참여하는 것이 부르주아 공화국으로 가는 길인 것과 같았다. 레닌은 스톡홀름 회의 거부를 주장했다. 마치 이후에 그가 예비의회를 거부했던 것과 같았다. 이 혁명투쟁의 열기 속에서도 레닌은 새로운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창설의 임무를 한순간도 잊어버리지 않았다.

이미 4월 10일에 레닌은 당명을 바꿀 것을 제안하는 문서를 제출했다. 이 제안서에 대한 모든 반대 견해를 그는 다음과 같이 규정하였다: “판에 박힌 업무나 중시여기며 관성과 침체에 빠져있는 자들의 주장이다. ... 더러운 옷을 벗어 던지고 깨끗한 옷을 입을 때가 되었다.” (레닌 전집 제 24권, “당면한 혁명에 대한 노동자 계급의 임무 --- 노동자당 강령 초안”, 1917년 4월 10일) 그러나 우파의 반대가 너무도 맹렬해서 이로부터 일년 후에야 당은 맑스와 엥겔스의 전통으로 돌아가 새로운 당명을 정할 수 있었다. 물론 이 일년 동안 러시아는 부르주아 계급 지배라는 더러운 옷을 벗어 던졌다. 당명 개정과 관련하여 벌어졌던 일련의 사건들은 1917년 내내 레닌이 수행했던 역할을 상징적으로 표현했다: 역사상 가장 치열한 전환기에 그는 당의 과거에 대항해 새로 다가올 미래를 위해 치열하게 투쟁하고 있었다. “전통”이라는 깃발을 들고 행진하던 우파의 반대는 때때로 극단으로 치닫고 있었다.

코르닐로프 사건(역자 주: 코르닐로프 장군(1870-1918)은 1917년 7월 케렌스키 임시정부의 총사령관이 되었다. 그리고 1917년 9월 케렌스키에 대항하여 반혁명 봉기를 이끌었다. 뻬쩨르부르그의 무장 대중이 그를 패배시키면서 볼셰비키당의 권위가 높아졌다.)은 급격히 유리한 상황을 조성하면서 그간의 견해 차이를 일시적으로 가라앉혔다. 그러나 이것은 가라앉았을 뿐 소멸되지는 않았다. 이때 우파는 혁명을 방어하고 그리고 일부분 조국을 방어한다는 기조 하에 소비에트 다수파에 더 가까이 접근했다. 이 경향에 대한 레닌의 반응은 9월 초 중앙위원회에 보낸 그의 편지에 나타났다: “원칙에서 이탈하고 있는 자들은 조국방어주의로 미끄러져 들어가거나 다른 볼셰비키들처럼 사회혁명당과 연합하여 임시정부를 지지하는 자들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이들의 태도는 무조건 틀렸으며 무원칙하다. 노동계급에게 정치권력이 넘어간 후에야 우리는 조국방어주의자가 될 것이다. ... 지금 케렌스키 정부를 지지하는 것은 무원칙한 행위이다. 누가 이렇게 질문할지도 모른다: 코르닐로프에 대항해서 싸우지 않을 것인가? 물론 우리는 싸워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임시정부를 지지하는 것과는 다르다. 여기에는 분리선이 존재한다. 일부 볼셰비키들은 이 선을 넘어 타협하면서 사태 발전에 휩쓸려 들어가고 있다.” (레닌 전집 제 25권, “러시아사회민주주의노동당 중앙위원회에게”, 1917년 8월 30일)

이견 충돌의 다음 단계는 민주회의(9월 14-22일)와 예비의회(10월 7일)로 나타났다. (역자 주: 볼셰비키의 영향력 증대와 소비에트 권력을 향한 투쟁을 방해하고 소비에트 대체기관을 수립하기 위해 멘셰비키는 민주회의를 주창하였다. 이 회의는 제헌의회가 소집될 때까지 존속할 예비의회 의원들을 임명했다. 트로츠키는 예비의회 거부를 제안했으나 표결에서 패배했다. 레닌은 그와 견해를 같이 했으나 회의에 참석하지 못했다. 볼셰비키당 출신 의원들은 예비의회에서 선언문을 낭독하고 전원 퇴장했다.)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은 볼셰비키를 소비에트의 합법적 틀 안으로 묶어두고 소비에트를 부르주아의 합법적 의회로 전락시키려했다. 우파는 이 움직임을 환영할 태세였다. 이미 우리는 이들의 혁명 전망을 익히 알고 있다. 이들에 의하면 소비에트는 서서히 자신의 기능들을 두마(의회), 젬스트보(지방의회), 노동조합, 그리고 마침내 제헌의회에 넘기고 자동적으로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예비의회를 통해 대중의 정치의식은 “일시적이며” 사멸하고 있는 기관인 소비에트로부터 민주주의혁명의 절정인 제헌의회로 향할 것이다, 등등. 그러나 볼셰비키는 이미 뻬쩨르부르그와 모스크바 소비에트에서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군대 내의 영향력이 매일이 아니라 매시간 증대하고 있었다. 더 이상 후일을 전망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문자 그대로 바로 다음날 어떤 행동을 취할 것인지 결정해야했다.

민주회의에서 보인 완전히 화해주의적 정당들의 행동은 치사스러움 그 자체였다. 그러나 모든 대중이 보는 앞에서 민주회의가 저절로 소멸하도록 이것을 거부하자는 제안은 이 회의 상층 지도부 내에서 여전히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볼셰비키 프락션 우파의 결사적인 반대에 부딪혔다. 이 문제로 인한 충돌은 예비의회 거부 투쟁의 서막이었다. 9월 24일 즉 민주회의가 끝난 후 레닌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볼셰비키는 항의의 표시로 회의에서 퇴장해야 했다. 그래서 대중의 관심을 딴 곳으로 돌리려는 적의 계략에 놀아나지 말았어야 했다.” (레닌 전집 제 26권, “거짓 술수의 주인공들과 볼셰비키의 오류”, 1917년 9월 22일)

예비의회 거부를 둘러싸고 민주회의 볼셰비키 프락션 내에 진행된 논의는 사안 자체의 협소함에도 불구하고 매우 큰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사실 예비의회 참여는 당을 “민주주의혁명을 완성하는” 길로 인도하려는 우파의 가장 포괄적이며 가장 성공적인 시도인 것처럼 보였다. 이 문제에 대한 논의는 회의록에 기록되지 않은 것 같다. 어쨌든 이 논의와 관련된 기록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 필자가 알고 있기로는 회의 서기의 노트조차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1917년부터 필자가 행한 연설과 저작들을 지금 한 권의 책으로 편집하고 있는 동지들은 이 논의와 관련하여 필자의 노트에서 몇몇 짤막한 문서들을 찾아내었다. 이 문제에 대해 카메네프 동지는 견해를 제출했는데 이것은 나중에 그와 지노비에프 동지가 당에 보낸 잘 알려진 편지(10월 11일)에서 좀더 날카롭고 최종적인 형태로 구체화되었다. 이 문제에 대한 가장 원칙적 정식을 노긴이 작성했다. 그에 의하면 예비의회 거부는 봉기 재촉을 의미하는 것이며 7월 상황을 그대로 반복하는 것이었다. 다른 동지들은 사회민주주의 의회전술의 일반적 사고를 기초로 견해를 표명했다. 이들의 견해는 실제 이러했다: 어느 누구도 감히 예비의회의 내용을 거부하지는 못할 것이며 이름이 단순히 예비의회이기 때문에 이것을 거부하자고 제안하는 동지들이 있다.

우파의 핵심적 사고는 이러했다: 혁명은 필연적으로 소비에트에서 부르주아 의회로 진행해야한다; “예비의회”는 이 과정의 자연스러운 단계이다; 따라서 의회 내에서 좌익을 담당할 우리가 예비의회를 거부하는 것은 어리석다. 민주주의혁명을 완성하고 사회주의혁명을 “준비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 부르주아 의회라는 학교를 경과하면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선진국은 후진국의 미래상을 미리 보여주기 때문이다. 짜르 왕정의 몰락은 혁명으로 간주된다. 그리고 실제로 혁명이었다. 그러나 노동계급의 정치권력 장악은 완전히 성취된 민주주의에 기초할 경우에만 가능하다는 의회주의에 이들은 매몰되어있다. 부르주아 혁명과 사회주의혁명 사이에는 오랫동안 민주주의 체제가 지속되어야한다. 예비의회는 노동계급 운동을 “서구화”하고 될 수 있으면 빨리 민주주의 “권력투쟁” 즉 사회민주주의를 가져온다. 100명이 넘는 민주회의 내 볼셰비키당 프락션의 규모는 당시 당대회의 규모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프락션의 다수는 예비의회를 지지했다. 이 사실만으로도 당에 경고를 보내야할 이유는 충분했다. 그리고 이 순간부터 레닌은 끊임없이 경고를 보내고 있었다. 민주회의 진행과정 동안 레닌은 이렇게 말했다: “민주회의를 의회로 간주하는 것은 커다란 오류이며 이것은 우리의 의회 백치병을 드러낼 것이다. 왜냐하면 예비의회는 영구적이며 주권을 가진 혁명의회라고 스스로 선언하더라도 사태를 결정할 힘이 전혀 없다. 결정권은 이 의회와 따로 존재하는 뻬쩨르부르그 모스크바 노동자지구에게 있다.” (레닌 전집 26권, “맑스주의와 봉기 --- 러시아사회민주주의노동당 중앙위원회에 보내는 편지”, 1917년 9월 13-14일) 예비의회 참여 문제의 중요성에 대한 레닌의 판단은 그가 작성한 많은 선언문들과 특히 중앙위원회에 보낸 9월 29일 편지에서 읽을 수 있다. 이 편지는 “예비의회 참여라는 부끄러운 결정을 내린 볼셰비키당의 너무도 명백한 오류들”을 말하고 있다. (레닌 전집 제 26권, “위기는 성숙했다”, 1917년 9월 29일) 이 결정은 민주주의에 대한 환상과 소자본가적 동요의 표현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이 부정적 현상을 당내에서 제거하기 위해 그는 투쟁해왔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노동계급 혁명에 대한 개념을 발전시키고 완성시켜 왔다. 부르주아혁명과 노동자혁명 사이에는 많은 세월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데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의회주의 학교가 권력장악의 유일한 또는 필수적인 훈련소라는 것도 사실이 아니다. 권력으로 향한 길은 반드시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길로 통한다는 주장도 사실이 아니다. 이것들은 모두 앙상한 추상에 지나지 않으며 교조적 공식일 따름이다. 그리고 이 추상은 노동자 전위의 손과 발을 묶는 결과를 초래할 뿐이다. 그리고 “민주주의” 국가기구라는 이름 하에 노동자 전위를 사회민주주의 명찰을 단 부르주아 계급의 허깨비 야당으로 만들고 있다. 노동자의 정책은 학교 아동의 산수 공식이 아니라 계급투쟁의 살아있는 운동에 의해 도출되어야 한다. 우리의 임무는 예비의회 참여가 아니라 봉기를 조직하고 정치권력을 장악하는 것이었다. 나머지는 저절로 따라올 것이다. 심지어 레닌은 임시 당대회 소집을 제안했다. 그리고 예비의회 거부를 강령으로 제출하였다. 이때부터 그의 모든 편지들과 논문들은 단 하나의 사항을 집중적으로 강조하고 있었다: 화해주의자들의 “혁명적” 꽁무니가 되어 예비의회에 참여할 것이 아니라 거리로 나가 권력 장악 투쟁을 전개해야 한다!

10월 혁명 전야에; 이후의 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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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레닌이 제안한 임시 당대회는 불필요했다. 레닌의 압력으로 당중앙위원회와 예비의회 프락션에서 필요한 역량이 좌로 이동함으로서 우리가 충분한 세력을 확보했기 때문이었다. 볼셰비키당은 10월 10일 예비의회에서 철수하였다. 뻬쩨르부르그에서 볼셰비키를 지지하는 수비대 일부가 전선으로 이동하라는 정부의 명령을 거부했다. 이 명령 때문에 소비에트가 임시정부와 충돌하였다. 10월 16일에는 공개적이며 합법적인 소비에트 봉기기관인 혁명군사위원회가 수립되었다. 당내 우파는 사태 발전의 속도를 늦추려했다. 이제 러시아의 계급투쟁 뿐 아니라 당내 경향 사이의 투쟁도 결정적 국면에 돌입했다. 지노비에프와 카메네프가 서명한 편지 “지금 상황에 대해서”는 원칙 면에서 우파의 입장을 가장 잘 드러냈다. 이 편지는 무장봉기 2주전인 10월 11일에 작성되어 주요 당기구들에게 보내졌다. 이 편지는 중앙위원회가 채택한 무장봉기 결의문을 결연히 반대하였다. 10월 25일의 2주전에 쓴 이 편지는 적의 역량을 과소평가하지 말 것을 경고하면서 실제로는 혁명의 역량을 대단히 과소 평가하였다. 심지어 대중이 혁명을 위해 싸울 준비가 되어있다는 사실마저 부정하였다. “지금 무장봉기를 촉구하는 것은 당 뿐 아니라 러시아와 세계혁명의 운명을 단 한판 도박에 거는 것과 같다”고 이 편지는 쓰고 있다. 무장봉기와 권력장악이 불가능하다면 무엇을 해야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이 편지의 대답은 역시 대단히 명확하다: “군대와 노동자의 지지를 통해 우리는 부르조주 계급의 머리통에 권총을 겨누고 있다.” 그리고 이 권총 때문에 부르주아 계급은 제헌의회를 거부하지 못할 것이다. “제헌의회 선거에서 우리 당의 승리 가능성은 대단히 높다. ... 볼셰비키당의 영향력은 증대하고 있다. ... 올바른 전술을 구사하면 우리는 제헌의회 의석의 3분의 1 이상을 차지할 수 있다.”

따라서 이 편지는 부르주아 제헌의회에서 우리가 “영향력 있는” 야당이 되라고 말했다. 이 순전히 사민주의적 노선은 다음과 같이 자신을 표면적으로 위장했다: “대중의 삶에 뿌리내린 소비에트는 파괴될 수 없다. 제헌의회는 소비에트 내에서만 혁명적 임무에 대해 지지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제헌의회와 소비에트 -- 이것이 우리가 지향하는 국가기구의 결합체다.” “결합체” 국가형태 이론 즉 제헌의회와 소비에트의 상호관계는 1년 반 또는 2년 뒤에 루돌프 힐퍼딩에 의해 다시 언급되었다. 이 사실은 우파의 노선을 뚜렷하게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대단히 흥미롭다. 힐퍼딩 역시 노동계급의권력 장악을 반대했다. 이 오스트리아 출신 독일인은 자기 노선이 해적판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편지 “지금 상황에 대해서”는 순수하게 의회주의적으로 다수를 측정하고 있다. 그리고 러시아 인민 대다수가 이미 우리를 지지하고 있다는 주장을 일축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러시아 노동자의 대다수와 병사의 상당수는 우리편이다. 그러나 나머지는 어느 편인지 알 수 없다. 예를 들어 제헌의회 선거가 지금 실시된다면 농민의 대다수는 사회혁명당에게 표를 던질 것이라고 우리는 확신한다. 이것은 우연인가?”

이 논지는 다음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근본적이고 원칙적인 오류를 담고 있다: 농민은 혁명에 대해 강한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혁명을 실현하려는 강렬한 욕구를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독자적 정치노선이 없다. 부르주아계급의 하수인 역을 하는 사회혁명당에게 표를 던져 실제로 부르주아계급을 지지하거나 노동계급과 공동행동에 나서거나 양자택일을 할 수밖에 없다. 이들이 어느 쪽을 택할지는 우리의 정책에 달려 있었다. 제헌의회에서 “3분의 1 또는 그 이상의 의석”을 차지하여 영향력 있는 야당이 되려고 예비의회에 참여했을 경우 우리 당은 농민 대중에게 이렇게 강요한 셈이었을 것이다: 제헌의회를 통해 여러분의 이익을 도모하십시오. 이 결과 농민 대중은 소수 야당이 아니라 다수 여당에게 관심을 두었을 것이다. 반면에 노동계급이 권력을 장악할 경우 농민은 지주와 관료들에 대항해 혁명으로 나설 수 있을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 우리 사이에 유행한 표현을 빌린다면 이 편지는 농민을 과소 평가하면서 동시에 과대평가하고 있다. 즉 이 편지는 노동계급의 지도을 받는 농민의 혁명 잠재력을 과소 평가하는 한편 농민의 정치적 독립성을 과대 평가하고 있다. 그런데 이 이중적 오류는 노동계급과 볼셰비키당을 과소 평가하는 사민주의적 시각에서 나왔다. 이것은 전혀 놀랍지 않다. 결국 모든 종류의 기회주의는 노동계급의 혁명 역량과 잠재력을 과소평가하기 때문이다.

노동계급의 권력장악을 반대하는 이 편지는 혁명전쟁의 가능성을 주장하며 당의 투쟁의지를 위축시키려한다. “병사 대중은 전쟁 구호가 아니라 평화 구호 때문에 우리를 지지한다. ... 우리 혼자 권력을 잡은 후 국제정세에 따라 혁명전쟁을 벌여야 한다고 말하면 병사 대중은 우리로부터 달아날 것이다. 물론 청년 병사들의 최우수 분자들은 우리와 함께 할 것이다. 그러나 대중은 우리를 외면할 것이다.” 이 논리는 대단히 시사적이다. 브레스트-리토프스크 평화조약을 지지하는 논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논지는 지금 노동계급의 권력장악을 반대하기 위해 동원되고 있다. 이 편지의 견해를 지지한 동지들이 브레스트-리토프스크 평화조약을 지지했다는 사실은 충분히 이해가 간다. 레닌의 천재적 정치력은 브레스트-리토프스크의 일시적 항복을 분리된 하나의 사실이 아니라 10월 혁명과 연관시켰다는 점에 있다. 이것을 여기서 다시 강조할 필요가 있다.

노동계급은 적이 월등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한시도 잊지 않으면서 투쟁하고 성숙되어 간다. 적의 월등한 물리력은 매 순간 드러난다. 부르주아 계급은 부, 국가권력, 이데올로기 수단, 억압 기구 등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이 점을 너무 잘 알고 있다. 따라서 혁명 준비기에 혁명정당의 모든 삶과 행동은 이 점을 아주 필수적으로 고려하고 있다. 무분별하거나 미성숙한 행동의 결과는 적의 월등한 역량을 가장 잔인하게 우리의 뇌리에 인식시킨다.

그러나 적의 물리력이 월등하다는 사고의 습관이 혁명의 주요한 장애물이 되는 순간이 온다. 지금 부르주아 계급의 허약성은 이 계급이 어제까지 보유한 막강한 물리력의 그림자에 의해 감추어진 것처럼 보인다. “너는 적의 역량을 과소평가하고 있다!” 이 외침은 무장봉기에 반대하는 모든 분자들을 하나로 모으는 중심 구호가 된다. 우리가 승리하기 바로 2주전 무장봉기 반대자들은 말한다: “봉기를 말로만 할 생각이 없다면 그 가능성을 면밀하게 타진해야 한다. 현재 적의 역량을 과소평가하고 우리의 역량을 과대평가하는 것은 가장 해로운 행위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다. 적의 역량은 보기보다는 더 강하다. 뻬쩨르부르그는 사태를 결정짓는 요충지이다. 이곳에서 노동자 정당의 적들은 상당한 역량을 축적해왔다. 훌륭하게 무장되어 있고 조직되었으며 자신의 계급적 위치 때문에 긴장감을 느끼며 전투력을 갖춘 5천여 사관생도들, 국군 총사령부, 돌격대, 코사크 기병, 수비대의 상당 부분, 뻬쩨르부르그 주위를 부채처럼 에워싸고 있는 아주 상당한 규모의 포대 등을 적이 보유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은 전국소비에트 중앙집행위원회의 도움으로 군대를 전선에서 빼내어 틀림없이 이곳으로 진주시킬 것이다.” (“지금 상황에 대해서”)

내전이 벌어질 시점에서 사전에 병력을 계산하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 병사들의 의식상태를 파악하는 문제의 경우 계산은 완벽하거나 만족스러울 수가 결코 없을 것이다. 레닌조차 적이 뻬쩨르부르그에 강력한 세력을 구축하고 있다고 계산했다. 그래서 피를 거의 흘리지 않고 봉기가 성공할 수 있을 것으로 그가 생각한 모스크바에서 봉기를 시작하자고 제안했다. 예측 상의 이러한 부분적 오류들은 가장 유리한 상황에서도 불가피하다. 사실 별로 유리하지 않은 상황을 염두에 두고 계획을 수립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그러나 이 편지는 적의 역량을 엄청나게 과대평가하고 있으며 실제로 적이 군사력을 상실하고 있는 상황에서 사태를 균형을 잃고 왜곡하고 있다.

이 문제는 독일의 경험이 입증하고 있듯이 대단히 중요하다. 독일공산당 지도부는 봉기 구호를 주로 선동의 차원에서 제시했기 때문에 적이 동원할 수 있는 물리력(정규군, 파시스트 깡패조직, 경찰 등)의 문제를 간단히 무시해 버렸다. 끊임없이 상승하고 있는 혁명의 파도가 자동적으로 군사적 문제를 해결할 것으로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봉기의 임무가 목전에 닥치자 적의 물리력을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취급했던 바로 그 동지들이 즉시 정반대의 극단으로 치달았다. 이들은 부르주아 계급의 물리력에 대한 모든 통계를 암묵적으로 믿어버리고 여기에 꼼꼼하게 정규군과 경찰 병력을 덧붙여 계산했다. 그리고는 전체 숫자를 우수리가 없는 수로 계산하여 50만 명 이상이라고 결론 내렸다. 그리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무장하여 혁명 세력을 마비시킬 정도의 충분한 힘을 적이 가지고 있다고 상상했다.

물론 독일 반혁명 세력의 역량은 수적으로 훨씬 강력했으며 어쨌든 코르닐로프 일당보다는 잘 준비되고 조직되어 있었다. 그러나 독일혁명의 실제 역량도 만만치 않았다. 노동계급은 독일 인구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러시아에서 최소한 봉기의 초기 단계에서 사태는 뻬쩨르부르그와 모스크바에서 결정되었다. 독일에서도 노동계급의 아성에서 봉기는 즉시 터져 올랐을 것이다. 상황이 이렇다면 우수리 없는 수치로 계산된 적의 역량은 실제로 그리 대단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여간 독일의 10월이 대대적인 패배로 끝난 후에 이 패배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동원되었고 지금도 동원되고 있는 적의 물리력 수치는 무조건 거부되어야 한다. 이와 관련하여 러시아의 실제 상황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뻬쩨르부르그의 무혈 승리 2주전에 경험이 있는 당의 지도적 인사들은 긴장되어 있었다. 그리고 전투 능력을 갖춘 사관생도, 돌격대, 코사크 기병대, 수비대 병력의 상당 부분, 부채처럼 대오를 갖춘 채 조여 들어오는 포병부대, 전선에서 복귀하는 군대 등이 혁명 세력과 대치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사실 우리는 무장봉기 승리를 2주 더 앞당길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들이 그렇게 두렵게 바라보았던 적의 물리력은 우수리 없는 숫자로 계산하면 제로에 불과했다. 여기서 잠시 봉기의 반대자들이 당중앙위원회를 장악했다고 상상해보자. 내전 상황에서 이런 지도부가 할 역할은 너무도 뻔하다: 혁명은 싸움이 시작되기도 전에 패배했을 것이다. 물론 레닌이 중앙위원회에 대항하여 임시당대회를 열어 전 당원들에게 호소하지 않았을 경우를 생각하면 이런 결론이 나온다. 사실 평당원들에게 호소해야할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그는 투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투쟁이 실제 진행되었다면 그는 물론 승리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모든 혁명 정당이 레닌 같은 훌륭한 지도자를 보유할 수는 없을 것이다.

봉기 반대 노선이 당중앙위원회에서 승리했을 경우 이후의 사태 전개는 쉽게 상상할 수 있다. 물론 지배계급 역사가들은 1917년 10월 봉기를 완전히 미친 짓으로 규정했을 것이다. 그리고 독자들에게 사관생도, 코사크 기병대, 돌격대, 부채처럼 에워싼 포병대, 전선에서 도착한 군대 등 장엄한 통계 자료를 제시했을 것이다. 봉기라는 시험대를 거치지 않은 적의 물리력은 실제보다 훨씬 무시무시해 보인다. 이 교훈을 모든 혁명가들은 깊이 명심해야한다!

9월 내내 그리고 10월까지 레닌이 중앙위원회에 가했던 지속적이고도 지치지 않는 압력은 당이 혁명의 좋은 기회를 놓칠지도 모른다는 끊임없는 두려움에서 나왔다. 우파는 이에 대해 이렇게 대답했다: 웃기는 소리, 우리의 영향력은 계속 증대되고 있다. 누가 옳았는가? 그리고 절호의 기회를 놓쳤을 경우 어떤 결과가 빚어졌을까? 이것은 혁명의 수단과 관련하여 볼셰비키가 사민주의적 멘셰비키와 가장 날카롭고 극명하게 충돌하는 사안이다. 전자는 철저하게 적극적이며 전략적이며 실제적인 반면 후자는 완전히 숙명론에 빠진다.

절호의 기회를 놓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계급 역관계가 우리에게 최대한 유리하게 기울었을 때가 당연히 봉기의 가장 유리한 때이다. 물론 여기서 계급 역관계란 경제적 토대가 아니라 의식의 영역 즉 정치적 상부구조 내에서의 계급 역관계를 의미한다. 경제적 토대는 혁명기 내내 크게 변화를 보이지 않는다. 똑같은 경제적 토대 하에서 계급 구성이 동일할 경우 계급 역관계는 노동대중의 분위기에 달렸다. 이들의 환상이 깨지고 정치적 경험이 증대하고 이와 동시에 국가권력에 대한 중간계급의 신뢰가 깨지고 마침내 국가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지배계급이 자신감을 상실하면 계급 역관계는 변화한다. 혁명기에는 이 모든 과정들이 번개처럼 빨리 진행된다. 전술적 기예는 총체적 상황이 우리에게 가장 유리한 바로 그 순간을 포착하는 데에 있다. 코르닐로프 반동 쿠데타는 좋은 예가 된다. 대중은 소비에트 다수파 정당들에 대해 품었던 신뢰를 상실하고 반혁명의 위험을 직접 눈으로 보았다. 이 상황을 타개할 힘은 이제 볼셰비키당에게 있다고 대중은 결론 내렸다. 그러나 국가권력이 순식간에 무너지고 볼셰비키당에 대한 대중의 원초적 신뢰가 아무리 커도 이 상황은 오래 지속될 수가 없었다. 위기는 어떤 방향으로든 결말이 나야했다. 지금이 아니면 결코 기회가 오지 않는다! 레닌은 이 말을 계속 반복하고 있었다.

우파는 이에 대해 이렇게 반박했다: “지금이 아니면 결코 기회가 오지 않는다는 식으로 노동자 정당의 권력 문제를 바라보는 것은 심각한 역사적 거짓이 될 것이다. 아니다. 노동계급의 당은 성장할 것이다. 점점 더 많은 대중이 당 강령을 알게 될 것이다. ... 그리고 노동계급의 당이 자신의 성공을 가로막는 방법이 딱 하나 있다. 즉 현재와 같은 상황에서 스스로 봉기를 주도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 이 위험한 정책에 대해 우리는 경고의 목소리를 높일 수밖에 없다.” (“지금 상황에 대해서”)

이 숙명적 낙관론은 아주 면밀하게 연구될 필요가 있다. 이것은 민족이나 개인과는 무관하다. 바로 작년에 우리는 독일에서 이것을 목격했다. 이 수동적 숙명론은 우유부단과 무능의 은폐물에 불과하다. 우리가 점점 더 영향력을 증대하고 있다는 위로조의 전망으로 그럴듯하게 자신을 위장하고 있을 뿐이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우리의 역량은 계속 증대될 것이다.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환상인가! 혁명정당의 역량은 오직 일정 시점까지만 증대한다. 그리고 이 시점이 지나면 완전히 정반대로 역량이 급격히 감소한다. 당의 수동성이 대중의 희망을 실망으로 바꾸어 버린다. 반면에 부르주아 계급은 대혼란에서 회복되어 대중의 실망감을 이용한다. 1923년 10월 우리는 독일에서 이 결정적 전환점을 목격했다. 1917년 가을 러시아는 이와 비슷한 사태를 경험하기 직전이었다. 몇 주일만 봉기가 지연되었을 경우 독일과 같은 상황이 일어났을 것이다. 레닌은 옳았다. 지금이 아니면 기회는 결코 올 수 없다. 이때 이 문제에서 봉기 반대자들은 가장 최후의 그리고 가장 강력한 주장을 들고 나왔다: “그러나 결정적인 문제는 수도에 있는 노동자와 병사들의 정서이다. 이들은 성급하게 가두투쟁에만 의존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 이 정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 도시의 빈민 다수에게 가두투쟁을 부추기는 전투적 정서가 존재한다 치자. 그렇다 하더라도 이 전투적 정서는 가장 대규모 대중조직 즉 철도 노조, 우편-전신 노조 등이 봉기에 참여할 수 있을 것이라는 추측 때문에 존재하는 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가장 거대한 대중조직들에서 당의 영향력은 미약하다. 더욱이 공장이나 군대 막사 어디에서도 이 정서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이것에 기초하여 계획을 세우는 것은 자기기만이다.” (“지금 상황에 대하여”)

10월 11일에 작성된 이 편지는 바로 작년 독일에서 싸움도 하지 않고 후퇴한 정책을 설명하기 위해 독일 공산당 지도부가 강조한 내용과 흡사하다. 즉 대중의 투쟁 의지가 없다는 것이다. 이 유사성은 의미 심장하다. 그러나 문제의 핵심은 바로 이것이다: 저돌적으로 투쟁하는 대신 대중이 시기를 기다리면서 단호하고 능력 있는 전투적 지도력을 요구할 정도로 성숙했을 때 봉기는 일반적으로 가장 확실하게 성공할 수 있다. 1917년 10월 노동계급 대중 또는 최소한 이들의 지도적 부위는 4월 시위, 7월 시기, 코르닐로프 쿠데타 등을 통해 뚜렷하게 현실을 인식하고 있었다. 즉 고립적이고 초보적인 시위를 조직하거나 대중의 분위기를 파악하는 시도 등은 더 이상 필요가 없으며 권력 장악을 위한 결정적 봉기의 조직만이 지금 시점에서 필요하다는 인식을 이미 굳히고 있었다. 이 상황변화에 부응하듯 대중의 분위기는 좀더 집약되고 좀더 비판적이며 좀더 깊이가 있었다. 인상적이고 들뜬 원초적 분위기에서 좀더 비판적이고 의식적인 심리상태로 대중이 변화했다는 것은 혁명이 일시적으로 정지상태에 들어갔다는 것을 암시한다. 대중의 분위기가 이렇게 발전하면서 위기로 치달을 때에는 당의 올바른 정책만이 사태를 해결할 수 있다. 즉 무엇보다도 당이 노동계급의 봉기를 지도할 수 있는 진정한 태세와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반면에 대중을 화해주의자들로부터 단절시키기 위해 장기간 혁명 선동을 수행하다가 당에 대한 대중의 신뢰가 최고조로 오르자 동요하고, 요리조리 따지고, 변명을 하고 숨을 곳을 찾는 당은 대중의 행동을 마비시키고 이들 사이에 실망과 분열의 씨를 뿌리면서 결국 혁명을 말아먹는다. 그러나 대대적으로 패한 후 이런 당은 오히려 대중이 충분히 능동적이지 못했다고 즉시 변명한다. 이것이 편지 “지금 상황에 대해서”가 취하고 있는 노선이었다. 다행스럽게 레닌의 지도력 하에 우리 당은 일부 지도자들의 파멸적 경향을 결정적 순간에 청산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오직 이 때문에 혁명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

우리는 지금까지 10월 혁명의 준비와 밀접히 연관된 정치적 사안들의 성격을 묘사했다. 그리고 당시에 등장한 이견들의 차이를 핵심적으로 규명하려고 시도했다. 이제 10월 혁명 거사 직전의 마지막 결정적 몇 주 동안 진행된 당내 투쟁의 가장 중요한 순간들을 간략히 추적하는 일만 남아있다.

무장봉기 결의안은 10월 10일 중앙위원회에서 통과되었다. 10월 11일 지금까지 분석한 편지 “지금 상황에 대하여”가 주요 당기구들에게 보내졌다. 10월 18일 즉 봉기 1주일 전 [새 생활]은 카메네프의 편지를 실었다. 그의 편지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와 지노비에프 동지 뿐 아니라 현실 감각을 지닌 많은 동지들도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 지금의 계급 역관계 속에서 전국 소비에트 대회가 열리기 며칠 전에 당이 무장봉기를 주도한다는 것은 노동계급과 혁명을 파멸시키는 조치이므로 인정할 수 없다.” ([새 생활] 제 156호, 1917년 10월 18일) 10월 25일 뻬쩨르부르그에서 국가권력은 노동계급에 장악되었으며 소비에트 정부가 수립되었다. 11월 4일 상당수의 책임 있는 당원들이 중앙위원회와 인민위원회에서 사퇴했다. 그리고 소비에트 내 모든 정당들로 구성된 연립정부 수립을 촉구하는 최후통첩을 발표했다. 이들은 주장했다: “우리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볼셰비키당의 단독 정부가 정치테러를 통해 정권을 유지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발표된 다른 글은 이렇게 말했다: “노동자 병사 대다수의 의지에 반하여 채택된 중앙위원회의 파멸적인 정책에 대해서 우리는 어떤 책임도 질 수 없다. 민주주의 분파들 사이의 유혈사태가 가능하면 빨리 끝나기를 대다수 노동자와 병사들은 염원하고 있다. 이 이유로 우리의 솔직한 견해를 노동자와 병사 대중들에게 표현할 수 있는 권리를 행사하여 이들이 우리의 구호, ‘소비에트 내 모든 정당들로 구성되는 정부 만세’를 지지하도록 중앙위원회 직책을 사임한다. 우리의 견해에 기초하여 즉시 화해가 이루어져야 한다!”([혁명 문서, 1917년] “10월 혁명” 407-410쪽) 무장봉기와 권력장악을 모험으로 치부하면서 반대했던 동지들은 봉기가 성공한 후에도 국가권력이 노동계급의 적들에게 다시 넘겨져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그런데 혁명을 성공시킨 볼셰비키당이 왜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에게 권력을 되돌려 주어야 하는가? 여기서 확실히 문제가 되었던 것은 이들 정당에게 정권을 되돌려 주어야 한다는 반대파의 견해였다! 여기에 대해서 반대파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칼레딘 일당에 의한 더욱 악화되는 유혈사태, 임박한 기근, 혁명의 압살 등을 저지하고 전국 노동자 병사 소비에트대회에 의해 채택된 평화강령을 실현하고 제헌의회 소집을 보장하기 위해 연립정부가 필요하다.” (같은 문서) 다시 말하면 반대파는 소비에트라는 관문을 통해 부르주아 의회체제를 실현시키려하였다. 혁명은 예비의회를 거부하고 무장봉기를 통해 10월 당당히 국가권력을 장악했다. 반대파에 의하면 우리의 임무는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의 도움으로 혁명을 부르주아체제라는 늪에 빠뜨려 독재로부터 보호하는 것이었다. 결국 이것은 10월 혁명을 청산하자는 주장에 불과했다. 따라서 양자간에는 화해를 위한 어떤 대화도 불가능하였다.

다음날인 11월 5일 같은 입장을 가진 편지가 또 발표되었다: “대중의 상식과 원초적 운동에 직면하여 맑스주의자들이 객관적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있다. 따라서 당 규율을 준수하는 의미에서 침묵을 지킬 수 없다. 현재의 상황은 파멸의 위기에 처한 우리가 소비에트 내 모든 정당들과 화해할 것을 강요하고 있다. ... 나는 당 규율에 따라 개인숭배 행위에 굴복할 수 없으며 우리 당이 모든 사회주의 정당들과의 정치적 화해를 거부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 이 정당들은 내각에 특정 개인들이 포함될 경우 우리의 기본적 요구들을 받아들이겠다고 한다. 이 이유로 나는 단 1분도 유혈사태를 연장할 의향이 없다.” ([노동자 신문] 제 204호, 1917년 11월 5일) 이 편지를 쓴 로조프스키는 임시 당대회 소집 투쟁이 시급하다는 선언으로 편지를 끝맺고 있다. 그에 의하면 임시 당대회는 “볼셰비키당이 맑스주의 노동자정당으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혁명적 맑스주의와는 아무 공통점도 없는 노선을 채택할 것인 가의” (같은 글) 문제를 결정할 것이다.

상황은 전혀 가망이 없어 보였다. 부르주아 계급과 지주 그리고 대중조직의 주요 기구를 장악하고 있던 소위 “혁명적 민주주의” 세력 뿐 아니라 우리 당의 주요 당원들과 중앙위원, 인민위원들마저 강령 실현을 위한 당의 국가권력 장악을 공개적으로 소리지르며 반대하고 있었다. 다시 반복하면 사태의 표면만을 보면 상황은 희망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다면 아직 남아 있는 대안은 무엇이었는가? 반대파의 요구를 말없이 수용하는 것은 10월 혁명을 청산하는 행위였다. 이 길을 선택할 생각이었다면 애초에 혁명에 나설 이유가 없었다. 남아 있는 길은 하나 뿐이었다: 대중의 혁명 의지에 기초하여 혁명을 계속 전진시키는 것이었다. 11월 7일 [프라우다]는 레닌이 작성한 중앙위원회 명의의 단호한 선언문을 실었다. 이 선언문은 진정 혁명적 열정으로 가득했고 단순 명쾌하여 오해의 여지없이 일반당원들에게 호소했다. 이 선언문은 당과 당중앙위원회의 미래 노선에 대해서 일말의 의구심도 남겨놓지 않았다: “의지가 박약해 동요와 회의에 굴복한 모든 동지들이여, 부끄러워할 줄 알아라! 부르주아계급의 위협에 굴복하고 이들의 직접 간접 지지자들의 비명에 굴복하는 동지들이여, 부끄러워할 줄 알아라! 뻬쩨르부르그, 모스크바, 기타 여러 곳의 노동자 병사 대중은 권력장악을 조금도 주저하지 않는다. 우리 당은 일심동체가 되어 소비에트 권력을 수호하고 모든 근로인민 특히 무엇보다도 노동자와 빈농의 이익을 수호하기 위해서 한치의 흔들림도 없을 것이다.” (레닌 전집 제 26호, “당중앙위원회가 모든 당원과 러시아 근로계급들에게 보내는 편지”, 1917년 11월 5-6일)

이것으로 특히 위협적이었던 당내 위기는 극복되었다. 그러나 당내 투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주요 투쟁 노선들은 똑같았다. 그러나 이 투쟁의 정치적 의미는 이미 퇴색했다. 제헌의회 소집 문제 때문에 12월 12일 볼셰비키당 뻬쩨르부르그 당위원회에 유리츠키가 제출한 보고서는 이 점과 관련하여 아주 흥미로운 증거이다: “당내의 견해 차이는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봉기에 대한 이견을 드러낸 경향들은 아직 소멸되지 않았다. 지금 일부 동지들은 제헌의회가 혁명의 최대 성과라고 보고 있다. 이들은 예의범절을 논지의 기초로 삼고 있다. 이들은 우리가 솜씨 없게 행동하면 안된다는 등의 말을 한다. 또한 제헌의회의 일부 성원에 불과한 볼셰비키당이 제헌의회의 소집일자, 구성 등에 대해 결정하는 것을 반대한다. 이들은 문제를 순전히 형식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제헌의회에 대한 우리 당의 결정권이 제헌의회 바깥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의 반영에 지나지 않다는 사실을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 노동자와 빈농의 이익을 위해 투쟁하는 것이 우리의 입장이다. 반면 몇 명의 동지들은 제헌의회로 절정에 도달해야할 부르주아혁명을 우리가 수행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제헌의회 해산은 러시아 역사 뿐 아니라 우리 당의 역사에 있어서도 거대한 한 페이지를 마감하는 의미를 갖는다. 당내의 알력을 극복하면서 노동계급의 당은 국가권력을 장악했을 뿐 아니라 이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10월 봉기와 소비에트 ‘합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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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에 민주회의가 열리고 있을 때 레닌은 즉시 봉기를 추진할 것을 요구했다. “맑스주의자에게 봉기는 일종의 기예(art)이다. 따라서 진정한 맑스주의자라면 한순간도 허비하지 않은 채 봉기 특공대의 사령부를 수립하고 병력을 배치한 후 믿을만한 연대들을 가장 중요한 지점으로 이동시켜야 한다. 그리고 알렉산드린스키 극장을 포위하고 피터폴 요새를 점령하고 임시정부와 국군 총사령부를 체포해야 한다. 그리고 사관생도들과 야만사단에 대항하여 목숨을 걸고 도시의 전략 요충지를 방어할 부대들을 배치시켜야 한다. 무장 노동자들을 동원하여 이들이 목숨을 걸고 전투를 수행하여 전신전화국을 즉시 점령할 것을 촉구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봉기 사령부를 중앙전화국으로 옮기고 전화로 모든 공장, 모든 연대, 모든 전투 지점과 연결되어야 한다. 물론 이 모든 사항은 지금 이 순간 봉기를 하나의 기예로 처리하지 않으면 맑스주의와 혁명에 충성할 수 없음을 설명하는 하나의 예에 불과하다.” (레닌 전집 제 26권, “맑스주의와 봉기”, 1917년 9월 13-14일)

그리고 봉기 준비와 완성이 당기구를 통해 당의 이름으로 진행될 것이며 사후에 소비에트 대회가 봉기의 성공을 승인하는 형식을 취해야 한다고 레닌은 전제했다. 그러나 중앙위원회는 그의 봉기 제안서를 채택하지 않았다. 결국 봉기는 소비에트를 통해 주도되었고 전국 소비에트 제 2차대회의 선동과 연결되었다. 이 사안과 관련하여 제출된 이견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결국 봉기는 원칙의 문제가 아니라 커다란 실천적 의의를 가진 기술적 문제라는 것을 명확히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레닌이 봉기의 지체를 얼마나 크게 걱정했는지는 이미 지적한 바 있다. 당 지도부 내부의 동요를 고려하였을 때 임박한 봉기를 임박한 소비에트대회와 형식적으로 연결시킨 것은 혁명의 지연이며 단호함을 결여한 동지들에 대한 양보라고 그는 생각했다. 이것은 허용될 수 없었다. 그리고 이것은 동요로 인해 절호의 봉기 기회를 놓치는 것과 동시에 완전한 범죄행위라고 그는 생각했다. 레닌은 봉기에 대한 그의 생각을 9월말부터 계속 반복하여 표명하였다.

9월 29일 그는 이렇게 말했다: “당중앙위원들과 당 지도부 일부는 소비에트 대회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하며 즉시 봉기를 개시하는 것을 반대한다. 이것은 극복되어야 한다. (레닌 전집 제 26권, ”위기는 성숙했다“, 1917년 9월 29일)

10월초 레닌은 말했다: “봉기를 지연시키는 것은 범죄행위이다. 소비에트 제 2차 대회까지 봉기를 지연시키는 것은 유치하고 부끄러운 형식주의이며 혁명의 배반에 불과하다.” (레닌 전집 제 26권, “중앙위원회, 모스크바 및 뻬쩨르부르그 당위원회, 모스크바 및 뻬쩨르부르그 소비에트의 볼셰비키당원에게 보내는 편지”, 1917년 10월 1일)

10월 8일 뻬쩨르부르그 당협의회를 위해 작성한 테제에서 레닌은 말했다: “소비에트 대회에 대한 헌법적 환상과 기대에 대해 투쟁하고 절대적으로 때를 ‘기다려야 한다’는 전제를 버리는 것이 필요하다.” (레닌 전집 제 26권, “10월 8일 뻬쩨르부르그 당조직 협의회 보고서와 당대회에서 선출된 임원들에 대한 결의문 및 지시서를 위한 테제”, 1917년 9월 29일-10월 4일)

마침내 10월 24일 레닌은 말했다: “봉기 지체는 치명적으로 위험하다. 이 사실은 이제 너무 명백하다. ... 오늘 승리할 수 있고 확실히 승리할 상황에서 봉기를 질질 끄는 혁명가들을 역사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내일까지 기다릴 경우 우리는 패배할 위험 뿐 아니라 모든 것을 잃을 위험을 무릅써야 한다.” (레닌 전집 제 26권, “중앙위원들에게 보내는 편지”, 1917년 10월 24일)

이 편지들의 문장 하나 하나는 혁명의 열기 한가운데에서 탄생했는데 레닌의 성격과 당시 상황을 파악하는데 대단히 중요하다. 혁명이 끝없이 이어지는 영화인 것처럼 숙명적으로 시간을 벌기 위해 주저하는 사민주의적 멘셰비키주의에 대한 분노, 항의, 격분 등이 이 편지들 전체에 배어 있다. 일반적으로 시간은 정치에서 아주 중요한 요인이다. 그렇다면 전쟁과 혁명에서 시간의 중요성은 100배나 더 커진다. 오늘 성취할 수 있는 것 전부를 내일에도 성취할 수는 없다. 무기를 들고 적을 압도하여 권력을 장악하는 일이 오늘 가능하다면 내일은 불가능할 수도 있다. 노동계급의 권력장악이라는 역사적 사건이 24시간 내에 결정될 수 있다는 것이 정말 사실인가? 그렇다. 무장봉기를 기도할 상황이 오면 사건들은 정치라는 긴 자가 아니라 전쟁이라는 짧은 자로 측정된다. 몇 주, 몇 일, 어떤 경우에는 단 하루를 허비하는 것도 특정 상황에서는 혁명을 포기하고 적에게 항복하는 행위와 다를 바 없다. 레닌의 경고, 줄기찬 비판과 압력, 잘못된 노선에 대한 치열하고도 열정적인 혁명적 불신이 아니었다면 당은 아마 결정적 순간에 전선을 형성하여 적과 대치할 수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 당 지도자들은 무장봉기를 단호히 반대했으며 이들은 내전을 포함해서 모든 전쟁에서 대단히 주요한 역할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한편 소비에트 대회 준비는 봉기에 필요한 군사적 준비를 은폐시켰다. 또한 대회를 수호한다는 구호 하에 봉기를 준비하고 수행할 수 있었다. 이것은 우리에게 대단히 유리했다. 수비대 병력 3분의 2를 전선으로 이동시키라는 케렌스키의 명령을 뻬쩨르부르그 소비에트가 무력화시킨 순간부터 우리는 실제 무장봉기에 돌입했다. 당시 뻬쩨르부르그에 없었던 레닌은 이 사실의 중요성을 전부 이해하지는 못했다. 필자의 기억으로는 이 기간 그가 쓴 편지는 이 점을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뻬쩨르부르그 수비대의 전선 이동을 반대하고 10월 16일 혁명군사위원회를 구성하고 모든 사단과 군대 기구에 정치위원들을 파견하고 이를 통해 뻬쩨르부르그 뿐 아니라 정부의 총사령부를 완전히 고립시킨 순간에 10월 25일 무장봉기의 결과는 최소한 4분의 3이 이미 결정되었다. 사실 우리는 혁명군사위원회의 지도하에 그리고 전국 소비에트 제 2차 대회를 수호할 준비를 한다는 구호 하에 임시정부에 대항하여 무혈 무장봉기를 진행하고 있었다. 소비에트 대회는 국가권력의 최종 운명을 승인할 것이었다. 무혈 승리가 가능한 모스크바에서 봉기를 시작하자고 레닌은 제안했다. 그러나 이것은 그가 지하로 피신하여 실제 상황을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나왔다. 10월 중순 수도에서 수비대가 “평화적” 봉기를 일으킨 이후 군 지휘 계통 뿐 아니라 병사 대오에서도 정서와 조직 관계가 급변했다. 레닌은 이 변화를 올바르게 평가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혁명군사위원회의 지시에 따라 뻬쩨르부르그 수비 연대들이 임시정부의 명령을 거부하여 그대로 남아 있었던 순간 이미 우리는 수도에서 봉기를 성공시킨 셈이었다. 다만 부르주아 민주주의 개혁이라는 당시의 정치적 외양이 사태의 본질을 살짝 가리고 있었을 뿐이었다. 10월 25일의 봉기는 이미 부차적이었다. 바로 이 때문에 봉기는 피를 흘리지 않았다. 그러나 모스크바에서는 봉기가 오래 지속되었고 많은 피가 흘렀다. 뻬쩨르부르그에서는 인민위원회 권력이 이미 확립되었는데 모스크바에서는 아직도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뻬째르부르그보다 모스크바에서 봉기가 먼저 시작되었다면 봉기와 관련된 전투는 전체적으로 더 오래 끌었을 것이고 그 결과도 예측하기 힘들었을 것이 뻔하다. 그리고 모스크바 봉기의 실패는 뻬쩨르부르그 봉기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물론 이 상황에서도 봉기는 승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 사태는 우리에게 훨씬 경제적이고 유리하게 진행되었다.

우리가 전국 소비에트 제 2차 대회 개막과 대체로 맞추어 권력 장악에 성공한 이유는 최소한 뻬쩨르부르그에서 평화적이고 거의 “합법적인” 무장봉기가 10분의 9는 아니더라도 4분의 3이 이미 성취되었기 때문이었다. 봉기를 “합법적”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봉기가 이중권력이라는 당시의 “정상적” 상황에서 발전했기 때문이다. 화해주의자들이 뻬쩨르부르그 소비에트를 장악하고 있었으나 소비에트는 임시정부의 결정들을 수정하는 일이 빈번했다. “케렌스키 시기”라고 역사책에 쓰여진 당시 이 상황은 헌법적 정치과정의 일부였다. 볼셰비키들이 뻬쩨르부르그 소비에트에서 다수를 장악했을 때 우리는 이중권력의 상황에서나 가능한 방법들을 계속 유지, 심화시켰다. 우리는 군대를 전선으로 이동시키라는 임시정부의 명령을 직접 우리 손으로 수정했다. 바로 이 행위를 통해 우리는 뻬쩨르부르그 수비대의 실제 봉기를 이중권력의 합법적 관행으로 위장했다. 이것만이 아니었다. 소비에트 대회의 개막과 발맞추어 공식적으로 권력 문제를 선동 주제로 채택하면서 우리는 이미 존재하는 이중권력 상황을 심화-발전시켜 전국 차원의 봉기를 소비에트라는 합법적 틀 내에서 준비했다.

우리는 소비에트의 헌법적 환상으로 대중을 현혹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소비에트 대회 개최 투쟁이라는 구호 아래 혁명 군대를 우리편으로 획득했고 그간 우리의 성과들을 조직의 측면에서 확고히 다졌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우리는 예상했던 이상으로 적과 화해주의자들을 소비에트 합법성의 덫으로 몰아넣었다. 정치에서 속임수를 쓰는 것은 항상 위험하다. 특히 혁명에 있어서는 더욱 그렇다. 적은 속이지 못하면서 따르는 대중이 대신 속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의 “속임수”는 100% 성공했다. 내전을 피하기 위해 재간이 많은 전략가가 기묘한 술수를 고안했기 때문이 아니라 너무도 뻔한 모순을 가진 화해주의적 정권이 자연스럽게 붕괴했기 때문이었다. 임시정부는 뻬쩨르부르그 수비대를 제거하려했다. 그런데 병사들은 전선으로 가지 않았다. 우리는 이 자연스러운 저항에 정치적 표현과 혁명적 목표와 “합법적” 외양을 부여했을 뿐이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수비대와 유례없이 보조를 맞출 수 있었으며 수비대를 뻬쩨르부르그 노동자들과 밀접하게 결합시켰다. 이와 반대로 당내 반대파는 자신들의 가망 없는 정치노선과 흐릿한 정세 판단 때문에 소비에트의 합법적 외양을 순진하게 그대로 믿었다. 이들은 속기를 열망했으며 우리는 이들에게 자신들의 욕구를 맘껏 채우도록 기회를 듬뿍 제공했을 뿐이었다.

화해주의자들과 우리 사이에는 소비에트의 합법적 지위를 둘러싸고 투쟁이 전개되고 있었다. 대중이 보기에 소비에트는 모든 권력의 원천이었다. 소비에트를 통해 케렌스키, 쩨레텔리, 스코벨로프가 등장했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에게!”라는 우리의 기본적인 구호를 통해 소비에트와 밀접히 연계되어 있었다. 부르주아 계급은 의회를 통해 권력을 계승했다. 화해주의자들은 소비에트를 통해 권력을 계승했다. 우리도 역시 화해주의자들과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화해주의자들은 소비에트를 허깨비로 만들려고 했다. 그러나 우리는 권력을 소비에트로 이양시키고자 했다. 화해주의자들은 소비에트의 유산으로부터 스스로를 아직 단절시킬 수가 없었다. 그래서 소비에트와 의회 사이에 다리를 만들려고 서둘렀다. 이 의도가 민주회의와 예비의회로 나타났다. 소비에트는 예비의회에 참여함으로써 이들의 의회주의적 절차를 승인한 것처럼 보였다. 화해주의자들은 소비에트의 합법적 지위라는 미끼로 혁명의 전진을 막으려했다. 그리고 낚시 바늘로 혁명을 낚은 후 이것을 부르주아 의회체제 안으로 끌어들이려 했다.

그러나 우리 역시 소비에트의 합법적 지위를 이용하는데 관심이 있었다. 민주회의가 끝난 후 우리는 화해주의자들로부터 소비에트 대회를 개최하겠다는 약속을 끌어냈다. 소비에트 대회는 화해주의자들을 대단히 당혹스러운 입장으로 몰아넣었다. 이들은 한편으로는 소비에트의 합법적 지위 때문에 대회의 소집을 반대할 수 없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대회 참여자들의 구성 분포 때문에 대회가 자신들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뿐이라는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이 결과 우리는 소비에트 대회가 진정한 권력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더욱 강력하게 호소했다. 그리고 바로 이 때문에 우리는 혁명의 준비작업 전체를 반혁명의 불가피한 공격으로부터 소비에트 대회를 수호하는 데로 더욱더 맞추었다. 당이 권력을 장악해야 한다는 노골적인 구호 아래 무장봉기를 준비하는 것과 소비에트대회 수호라는 구호 아래에 봉기를 준비하고 수행하는 것은 그 성격이 전혀 달랐다. 따라서 우리는 소비에트 대회가 권력장악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는 소박한 환상을 가지고 이 문제를 소비에트 대회 개최 문제와 일치시킨 것은 전혀 아니었다. 소비에트를 절대적으로 숭배하는 것은 결코 우리의 입장이 아니었다. 정치적 측면 뿐 아니라 조직적 군사적 측면에서도 권력장악을 위한 모든 필요한 작업은 전속력으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이 작업은 임박한 소비에트 대회라는 합법적인 무기로 위장되었다. 우리는 적들에게 소비에트가 권력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고 짐짓 속였다. 모든 측면에서 공세를 취하면서도 우리는 수세적 입장에 있는 척 했다. 반면 임시정부가 진지하게 자기 권력을 방어할 결심을 할 수 있었다면 소비에트 대회를 공격하여 대회 소집을 금지시키고 자신에게 가장 치명적 결과를 가져올 무장봉기가 우리 때문에 일어날 것이라고 덮어씌울 수 있었다. 더욱이 우리는 정치적으로 임시정부를 꼼짝 못하게 만들지도 않았다. 다만 이들의 타성을 부추겨 안심하도록 만들었을 뿐이었다. 이들은 우리가 소비에트 의회체제에만 관심이 있는 것으로 진지하게 믿었다. 그리고 뻬쩨르부르그와 모스크바 소비에트가 채택했던 결의안의 스타일대로 권력문제에 대한 새로운 결의안을 채택할 소비에트 대회에만 관심이 있을 것으로 믿었다. 그리고 임시정부는 예비의회와 곧 성립할 제헌의회를 이유로 삼아 이 새로운 결의안을 무시하고 우리를 우습게 만들 수 있다고 진지하게 믿고 있었다. 가장 지혜로운 중간계급의 재사(才士)들이 정확히 이 방향으로 골몰해 있었다는 사실을 케렌스키의 반박할 수 없는 증언이 말해주고 있다. 회고록에서 케렌스키는 10월 25일 밤 12시 그의 서재에서 당시 전면적으로 준비되고 있던 무장봉기에 대해 단(Dan)을 비롯한 다른 인사들과 그가 어떻게 격렬한 논쟁을 벌였는지를 말하고 있다. 케렌스키는 이렇게 말한다: “무엇보다도 단은 나보다 자기가 사정을 더 잘 알고 있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내가 ‘반동적인 참모진’의 보고서에 영향을 받아 사태를 과정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소비에트 다수파가 채택한 결의안은 ‘정부의 자존심’을 지독하게 모독한 점에서 대단히 가치 있으며 ‘대중의 정서를 변화시키는데’ 필수적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것의 효과는 이미 ‘자명하게 드러나고 있으며’ 이제 볼셰비키들의 선전은 그 영향력을 ‘급속하게 상실할 것이라고’ 말했다. 반면 볼셰비키들은 소비에트 다수파 지도자들과의 협상에서 그의 말을 그대로 옮기면 ‘소비에트 다수파의 의지에 복종’할 준비가 되어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당장 내일이라도’ 모든 조치를 다 동원하여 자신들의 의지와 승인 없이 일어난 봉기를 진압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볼셰비키들이 말했다는 것이다! 결론을 말하면 볼셰비키들이 ‘내일’(언제나 내일!) 자신들의 봉기사령부를 해산할 것이라고 말한 후 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내가 취한 모든 조치들이 ‘대중을 불쾌하게 했을 뿐이며’ 나의 간섭은 대체적으로 ‘봉기의 청산을 위해 소비에트 다수파 대표들이 볼셰비키들과 성공적으로 협상을 마무리 짓는 것을 방해하고 있다고’ 말했다. ... 단이 나에게 이 놀라운 정보를 말하고 있는 그 순간 ‘적위군’의 무장병력이 정부 건물들을 하나 하나 점령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야 당시의 사태가 종합적으로 판단될 것이다. 단과 그의 동료들이 동궁(역자 주: 당시 임시정부의 청사)을 떠난 순간과 거의 동시에 카르타쉐프 장관은 임시정부 회의를 마치고 집으로 가는 길에 밀리오니 거리에서 체포되어 곧바로 스몰니 학원으로 끌려갔다. 그런데 바로 이곳으로 단은 볼셰비키들과의 평화로운 대화를 나누기 위해 돌아가고 있었다. 당시 볼셰비키들은 대단한 활력과 기술을 가지고 행동하고 있었다. 봉기가 본격적으로 진행되고 ‘적군’이 도시 전체에서 활동하고 있을 때 여러 명의 볼셰비키 지도자들은 ‘혁명적 민주주의’ 진영 대표들이 사태를 보고 있으나 못 본 것으로 그리고 정보를 들었으나 못들은 것으로 만드는데 성공하고 있었다. 그런데 밤새 혁명적 민주주의 재사들은 화해와 봉기 청산의 기초가 될 온갖 방법들에 대해 끝없이 다투고 있었다. 이 ‘협상’ 방법을 통해 볼셰비키들은 많은 시간을 벌었다. 그러나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의 군대는 제 시간에 동원되지 않았다. 물론 이 점은 이후에 증명되어야 했다!” (케렌스키, “멀리서” 197-98쪽)

정확한 표현이다! 이후 증명되어야 했다니! 위의 말이 증명하듯이 화해주의자들은 소비에트 합법성이라는 미끼에 완전히 걸려들었다.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을 속이기 위해 일부 볼셰비키들이 봉기의 청산을 특별히 위장했다는 케렌스키의 가정은 사실이 아니다. 사실을 말하자면 협상에 가장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볼셰비키들은 봉기 청산을 진정으로 원했으며 모든 정당들의 화해와 함께 구성될 사회주의 연립정부 노선을 믿고 있었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이 의회주의자들은 의심할 여지없이 봉기에 아주 긴요했다. 자신들의 환상을 통해 적의 환상을 부채질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당이 이들의 충고와 모든 경고에도 불구하고 꺾이지 않는 활력으로 봉기를 끝까지 계속 추진시켰기 때문에 이들은 그나마 혁명에 유용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다.

결국 크고 작은 예외적 상황들이 결합하여 이렇게 광범위하고 포괄적인 전술의 승리를 확보해 주었다. 무엇보다 더 이상 싸우기를 원치 않는 군대가 있었다. 2월부터 10월의 혁명기간 중 그리고 특히 초기에 수백만의 전열이 흐트러지고 불만을 가진 농민군대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혁명의 전체 과정은 전적으로 다른 모습을 보였을 것이다. 오직 이러한 상황이 있었기에 10월의 승리를 애초에 결정해버린 뻬쩨르부르그 수비대의 실험이 성공했다.

“무미건조하며” 거의 알아챌 수 없었던 봉기가 코르닐로프 일당에 대항해서 소비에트의 합법성을 수호한 투쟁과 기이하게 결합된 경우를 가지고 어떤 종류의 법칙을 도출할 수는 결코 없다. 이것은 완전히 불가능할 것이다. 이러한 종류의 경험은 어느 곳에서도 같은 형태로 반복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명백하다. 그러나 이 경험은 면밀하게 연구할 필요가 있다. 이 점은 대단히 중요하다. 혁명의 목표가 명확하고 상황이 올바르게 평가되고 투쟁을 끝까지 수행하겠다는 의지가 있다면 이 연구는 모든 혁명가들의 시야를 넓혀줄 것이다. 그리고 그의 앞에서 일어날 수 있는 사건들의 복잡성과 다양성을 보여줄 것이다.

모스크바 봉기는 훨씬 길었으며 따라서 훨씬 커다란 희생을 요구했다. 이 현상에 대해서는 한가지 설명이 가능하다. 즉 뻬쩨르부르그 수비대는 임시정부의 전선이동 명령을 거부하면서 봉기를 준비할 기회를 가졌다. 그러나 모스크바 수비대에게는 이런 기회가 없었다. 물론 이것은 부분적 요인일 것이다. 이미 말했지만 다시 되풀이해보자. 뻬쩨르부르그의 무장봉기는 두 부분으로 나누어졌다. 첫 번째로 10월초 뻬쩨르부르그 연대들이 자신들의 소망과 완전히 일치한 소비에트의 명령에 따라 임시정부의 명령을 거부했다. 그리고 둘째로 2월에 성립한 이중권력의 탯줄을 끊기 위해서 10월 25일 소규모의 보완적인 봉기가 수행되었다. 그러나 모스크바에서는 봉기가 일 단계로만 진행되었고 이것이 봉기가 길어진 주요한 이유가 될 것이다.

그러나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모스크바에서는 봉기 지도부가 충분히 단호하지 못했다. 군사행동이 협상으로 급격히 반전하더니 곧 이어서 협상이 곧바로 군사행동으로 급변했다. 지도부의 동요는 추종자들에게도 전달된다. 지도부의 동요가 정치에서 해로운 것이라면 무장봉기의 상황에서는 그야말로 치명적이다. 지배계급은 이미 자신의 힘에 대해 자신감을 상실했다. 그렇지 않다면 일반적으로 봉기가 승리할 희망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억압기구는 여전히 지배계급의 수중에 남아있었다. 혁명 계급의 임무는 국가기구를 장악하는 것이다. 이것을 위해서는 자신의 힘을 확신해야 한다. 당이 일단 노동자들을 봉기로 인도했다면 확실히 결말을 보아야한다. “전쟁은 전쟁답게.” 다른 어떤 때보다 전쟁에서는 동요와 지체가 허용될 수 없다. 전쟁의 잣대는 짧다. 단 몇 시간만 지체하면 지배계급은 어느 정도 자신감을 회복하고 봉기세력은 자신감을 상실한다. 그러나 이 사소한 변화는 계급 역관계를 결정하고 이것은 다시 봉기의 결과를 결정한다. 이 관점에서 모스크바 군사작전의 전개과정을 단계별로 정치 지도부의 행위와 연관시켜 연구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민족적 요인의 개입으로 더욱 복잡해진 특별 상황 속에서 내전이 발생한 다른 경우들을 살펴보는 것은 아주 큰 의미가 있을 것이다. 이러한 연구는 면밀하게 소화된 사실적 데이터에 기초할 경우 내전의 역학에 대한 우리의 지식을 대단히 풍성하게 할 것이다. 그리고 충분히 일반적 성격의 내전 수행 방식, 규칙, 내전 기구 등을 결론으로 제시할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내전” 교범으로 이용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 연구 결과의 일부분을 미리 말해보자. 농촌지역의 내전 과정은 모스크바의 지체에도 불구하고 크게 보면 뻬쩨르부르그의 결과에 의해 좌우되었다. 2월 혁명은 구 국가기구를 균열시켰다. 임시정부는 이 손상된 국가기구를 물려받았으나 이것을 재생하거나 강화시킬 수 없었다. 이 결과 임시정부의 국가기구는 2월에서 10월까지 관료적 타성의 유물로서만 존재했다. 농촌지역의 관료기구는 뻬쩨르부르그의 모범에 익숙해 있었다. 그래서 2월에도 10월에도 수도의 관료적 행위를 그대로 반복했다. 자신을 강화시킬 시간이 없었던 정권을 타도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큰 장점이었다. 임시정부의 극단적 불안정과 확신의 결여는 혁명 대중과 당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었다. 그리고 우리의 작업을 대단히 쉽게 만들었다.

1918년 11월 9일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도 이와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다. 그러나 이 두 나라에서는 사민주의 정당들이 국가기구의 깨진 틈새를 매워 부르주아 공화국 체제를 수립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물론 이것이 안정된 체제라고 말할 수는 없어도 이미 6년이나 지속하였다. 다른 나라의 혁명은 이 두 나라가 누렸던 유리한 조건들을 누릴 수 없을 것이다. 이 두 나라에서 부르주아혁명과 노동자혁명 사이의 거리는 아주 가까웠다. 이 두 나라를 제외한 곳에서는 부르주아 2월 혁명이 이미 먼 옛날의 이야기이다. 영국에는 봉건체제의 유물이 확실히 많이 남아있다. 그러나 독립적 부르주아혁명이 일어날 근거는 전혀 없다. 왕정과 상원 제도 같은 봉건 유물을 제거하는 작업은 영국 노동계급이 정치권력을 장악한 후 수행할 첫 번째 거대한 임무가 될 것이다. 서구의 노동자혁명은 완전히 확립된 부르주아체제를 대적해야한다. 그러나 언제나 안정된 국가기구에 맞서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노동자 봉기의 가능성 자체는 자본주의 국가의 붕괴가 대단히 진행된 상황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2월 혁명 이후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을 시간을 벌지 못한 국가기구와의 투쟁을 통해 10월 혁명이 전개되었다. 다른 나라의 봉기는 누진적으로 붕괴과정에 있는 국가기구에 대항할 것이다.

러시아보다 더 오랜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혁명에 대한 부르주아 계급의 저항은 러시아의 경우보다 더 거셀 것이다. 따라서 노동계급은 승리하기가 그만큼 더 어려울 것이다. 이것은 일반적 법칙일 것이다. 우리는 코민테른 제 4차 세계대회에서 이 점을 이미 지적한 바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 나라들에서 노동계급이 권력을 장악할 경우 러시아 10월의 경우보다 훨씬 더 안정된 확고한 권력을 즉시 수립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나라의 경우 내전은 노동계급이 주요 도시들과 공업중심지들을 장악하고 나서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그리고 이 내전은 소비에트 정권 수립 이후 첫 3년간 지속되었다. 중부 및 서부 유럽에서 노동계급이 권력을 장악하기는 러시아의 경우보다 훨씬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권력을 일단 잡게 되면 훨씬 자유롭게 통치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의 경험들은 이 결론을 가능하게 한다. 물론 혁명 전망에 대한 이 고려사항들은 가설에 지나지 않는다. 유럽 각국에서 혁명이 일어나는 순서, 외국에 의한 군사 개입의 가능성, 당시 소련의 경제적 군사적 힘 등에 대단히 많은 것이 달려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유럽과 미국에서 노동계급의 권력 장악 과정은 러시아의 경우보다 훨씬 진지하고 완고하며 준비정도가 높은 부르주아계급의 저항에 직면할 것이다. 이 기본적이며 반박할 수 없는 전제는 일반적으로 내전을 그리고 구체적으로 특히 무장봉기를 기예로 바라보아야 한다는 진리를 더욱더 힘차게 웅변하고 있다.

노동계급 혁명에서 소비에트와 당의 역할에 대해 다시 한번 검토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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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및 1917년의 러시아 혁명에서 노동자 소비에트는 투쟁의 특정 단계에서 자연스러운 조직 형태로 등장했다. 그러나 소비에트를 “교조” 내지 “원칙”으로 받아들인 유럽의 젊은 공산당들은 소비에트를 하나의 신주로 그리고 혁명의 필요충분조건으로 간주할 위험을 언제나 가지고 있다. 권력장악을 위한 투쟁 조직으로 소비에트는 엄청난 장점들을 보유하고 있다. 그러나 봉기가 공장위원회, 노동조합 등과 같은 조직 형태를 기반으로 전개되고 소비에트는 봉기의 순간에만 또는 봉기가 성공한 후 국가기구로 등장할 경우도 얼마든지 있다.

이 점과 관련하여 대단히 의미심장한 예가 하나 있다. 레닌은 7월 시기의 사건들을 겪은 후 소비에트를 절대시하는 경향에 대해 투쟁했다. 사회혁명당-멘셰비키가 장악하고 있던 소비에트가 7월에 병사들을 전선으로 내몰고 볼셰비키들을 탄압하고 있는 동안 노동대중의 혁명운동은 새로운 길을 찾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 레닌은 공장위원회를 권력장악의 투쟁조직으로 생각하였다. 이 점에 대해서는 오조니키즈 동지의 회고록을 참고할 수 있다. 코르닐로프 쿠데타가 아니었다면 혁명운동은 레닌이 생각한 방향으로 전진했을 가능성이 많다. 코르닐로프 반혁명 쿠데타는 화해주의자들의 소비에트에 볼셰비키들이 새로운 혁명 기운을 불어넣게 만들었다. 이 결과 소비에트 대중은 좌파인 볼셰비키당과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이 문제는 최근 독일의 경험이 보여주었듯이 커다란 국제적 의의를 가지고 있다. 바로 독일에서 봉기가 일어나지도 않았으나 소비에트가 여러 번 봉기 기관으로 수립되었고 국가권력을 장악하지도 않았으나 소비에트가 국가권력 기구로 수립되었다. 1923년 광범위한 노동계급과 반(半)노동계급 대중은 공장위원회를 중심으로 투쟁을 하기 시작했다. 즉 러시아에서 소비에트가 권력장악 직전까지 했던 모든 역할들을 주로 공장위원회가 담당했다. 그런데도 1923년 8월과 9월 여러 동지들은 독일에서 소비에트를 즉각 수립할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길고 열띤 토론 끝에 이 제안은 올바르게 기각되었다. 이미 공장위원회가 혁명대중의 투쟁 구심체가 되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소비에트는 혁명준비 기간동안 실제 내용은 하나도 없는 껍데기 조직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소비에트는 자족적인 조직 형태가 되어 대중의 관심을 봉기의 주요 대상인 군대, 경찰, 무장대, 철도 등으로부터 소비에트로 돌리는 결과만을 초래했을 것이다. 한편 봉기가 일어나기도 전에 봉기의 시급한 임무와는 별도로 소비에트를 수립했더라면 이것은 “우리는 너희들을 공격하겠다!”는 경고를 적에게 공공연하게 발하는 꼴이 되었을 것이다. 공장위원회가 다수 대중의 투쟁구심체였기 때문에 이것을 “아량으로 허용할” 수밖에 없었던 정부는 국가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시도”의 공식 기관인 소비에트를 즉시 탄압했을 것이다. 그리고 공산주의자들은 순전히 조직 형태에 불과한 소비에트를 방어하기 위해 투쟁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 경우 대중운동의 요구에 부응하여 우리가 봉기를 선택하기도 전에 그리고 혁명 승리를 위해 물리적 요충지들을 장악하거나 수호할 목적을 우리가 갖기도 전에 사태를 결정짓는 싸움이 돌발적으로 터졌을 것이다. 투쟁은 적들이 우리에게 강요한 순간에 그리고 소비에트라는 “깃발”을 수호하기 위해 불타 올랐을 것이다. 이와 반대로 봉기 준비작업은 전부 공장위원회의 권위를 통해 성공적으로 수행될 수도 있었다. 이 점은 너무도 명확하다. 왜냐하면 이 조직은 대중조직으로 이미 뿌리내렸고 그 수와 역량이 끊임없이 증대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 상황이라면 당은 봉기의 날짜를 자유롭게 정할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소비에트는 이 과정에서 언젠가는 등장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위와 같은 상황에서는 투쟁의 불길 속에 봉기의 직접적 기관으로 등장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혁명의 가장 결정적 순간에 혁명 중심부가 두 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영국의 속담에 의하면 물을 건너는 동안에는 말을 바꿔 타지 말아야 한다. 봉기가 성공한 후 전국의 중심지에서 소비에트가 수립되었을 가능성은 있다. 어쨌든 승리한 봉기는 반드시 국가권력 기관인 소비에트를 수립시켰을 것이다.

러시아에서는 소비에트가 혁명의 “민주주의” 단계에서 성장하였다. 그리고 이 단계에서 소위 합법성을 획득하고 이후 계승되어 사회주의 국가 건설에 이용되었다. 이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서구에서는 이 과정이 되풀이되지 않을 것이다. 차라리 공산주의자들의 촉구에 호응하여 대중이 수립하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그리고 노동자 봉기의 직접적 기관으로 수립될 것이다. 물론 노동계급이 국가권력을 장악하기 이전에 부르주아 국가기구가 상당히 심각하게 붕괴되었을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 수 없다. 이 경우 소비에트는 봉기 준비의 공개기관으로 등장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일반 법칙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차라리 혁명 대중의 직접적 기관으로 봉기의 최후 순간에 수립될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봉기의 결정적 단계가 지난 후 또는 봉기의 마지막 단계에서 새로운 권력기관으로 등장할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다. 특정 조직형태를 절대시하는 오류를 범하면 안된다. 소비에트를 유연한 살아있는 투쟁조직이 아니라 운동의 외부에서 강요되어 운동의 자연스러운 발전과정을 방해하는 “원칙”으로 바라보면 안된다. 이런 오류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모든 가능성들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

영국의 노동자혁명이 어떤 경로를 밟을 것인지에 대해 우리가 말할 위치에 있지 않다는 주장이 최근 우리 신문을 통해 개진되었다. 이 혁명은 공산당을 매개로 할 것인가 아니면 노동조합을 매개로 할 것인가? 그러나 문제를 이런 식으로 제기하는 것은 역사적 시야가 넓다는 것을 거짓으로 과시하는 것에 불과하다. 문제를 이렇게 설정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잘못되었으며 그 결과는 대단히 위험하다. 왜냐하면 지난 몇 년간 있었던 혁명들의 주요한 교훈들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독일이나 다른 나라의 경우 전쟁의 말기에 혁명이 성공하지 않은 이유는 지도력을 가진 당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 결론은 유럽 전체에 적용될 수 있다. 이 결론은 여러 나라 혁명운동의 운명을 통해 구체적으로 도출된다.

독일의 경우 이 점은 아주 명확하다. 올바른 당 지도부가 있었다면 1918년과 1919년 혁명은 전부 성공했을 것이다. 1917년 핀란드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이 나라의 경우 혁명운동은 대단히 유리한 상황을 맞이했다. 혁명을 성공시킨 러시아가 직접 군사적으로 지원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핀란드 공산당 지도부 대다수는 사민주의자들이어서 결국 혁명을 말아먹었다. 같은 교훈이 헝가리에도 적용된다. 이 나라에서 공산당은 사민당과 함께 권력을 장악한 것이 아니라 놀라 자빠진 부르주아 계급에 의해서 권력을 선물 받았다. 그런데 싸움 한번 제대로 하지 않고 따라서 승리 없이 성취된 헝가리 혁명은 애초부터 투쟁 지도부가 없었다. 공산당은 사민당과 통합하면서 사이비 공산당임을 스스로 입증했다. 이 결과 헝가리 노동자들의 투쟁적 기상에도 불구하고 헝가리 공산당은 그렇게 쉽게 얻은 권력을 유지할 능력이 없었다.

당이 없이 당과 분리되어 당의 머리 위에 놀면서 당과 다른 지도부를 가질 경우 노동계급 혁명은 권력을 장악할 수 없다. 이것이 지난 10년 동안 우리가 얻은 교훈이다. 영국의 노동조합은 노동계급 혁명의 강력한 지렛대가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특정 상황 및 특정 시기에 노동조합은 노동자 소비에트를 대체할 수도 있다. 그러나 공산당과 분리되어 공산당과 대항해서는 이 역할을 결코 수행할 수 없다. 노동조합 내에서 공산당의 영향력이 결정적일 경우에만 이것이 가능하다. 노동계급 혁명에서 당이 수행하는 역할과 그 중요성에 대한 이 결론은 너무도 많은 희생을 통해 도출되었다. 따라서 이 교훈을 가볍게 버리거나 최대한 경시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혁명 의식, 의도, 계획은 부르주아 혁명의 경우보다 노동자 혁명에서 훨씬 중요하며 실제로 그만큼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전자의 경우에도 혁명의 원동력은 대중에게 있었다. 그러나 혁명 대중의 조직과 의식 수준은 지금보다 훨씬 낮았다. 부르주아 계급의 여러 분파들이 혁명 지도력을 나누어 행사했다. 그리고 부르주아 계급은 도시, 대학, 언론계 등을 통해 모든 부, 교육, 조직들을 보유하고 있었다. 관료적 왕정은 겨우 연명하는 방식으로 자신을 방어했으며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어둠 속에서 헤매었다. 하층 계급들의 운동을 이용하여 자신의 사회적 힘을 던져 권력을 장악할 유리한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 부르주아 계급은 기다리고 기다렸다. 노동계급이 자신의 전위당을 통해 혁명의 원동력 뿐 아니라 지도력을 행사한다는 점에서 노동계급 혁명은 부르주아 혁명과 뚜렷이 구별된다. 부르주아 계급이 자신의 경제력, 교육, 자치단체와 대학 등을 통해 부르주아 혁명에서 지도력을 행사한 반면 노동계급 혁명에서는 노동계급의 당이 지도력을 행사한다.

부르주아 계급도 높은 계급의식으로 무장되어 있다는 점에서 노동계급 전위당의 역할은 더욱 중요하다. 수세기를 통치하면서 부르주아 계급은 관료적 왕정보다 훨씬 우수한 정치 훈련을 받았다. 부르주아 의회가 노동계급에게 어느 정도 정치 훈련을 시켜준 반면 부르주아 계급 역시 의회를 통해 반혁명 전략을 훨씬 더 많이 고안했다. 이제 부르주아 계급은 의회를 통해 사민주의자들을 사적 소유의 주요한 기둥으로 만들었다. 이 정도만 말해도 의회가 부르주아 계급에게 얼마나 많은 장점을 제공하는 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유럽의 사회주의혁명은 격렬하고 가차없을 뿐 아니라 치밀하게 계획되고 계산된 전투를 거치게 될 것이다. 그래서 1917년 러시아 혁명보다 훨씬 더 계획적인 혁명이 될 것이다.

내전 일반과 구체적 봉기의 방식이 지금과 완전히 달라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레닌의 가르침에 따라 우리 모두는 봉기가 하나의 기예라는 맑스의 말을 계속 반복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 몇 년간 축적된 많은 경험에 기초하여 내전술의 기본 요소들을 연구하여 맑스의 정식을 보완해야 한다. 이 실천이 뒤따르지 않을 경우 봉기에 대한 그의 사고는 공염불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무장봉기 문제에 대한 피상적 태도는 사민주의 전통이 아직 우리에게 남아 있음을 드러낸다. 이렇게 솔직히 말하는 것이 지금 시점에서 필요하다. 결정적 순간에 어쨌든 일이 잘 풀릴 것이라는 근거 없는 희망으로 내전 문제를 피상적으로 대처하는 당은 확실히 실패한다. 따라서 1917년에 시작된 노동계급 투쟁 경험을 집단적 방식으로 분석해야만 한다.

지금까지 1917년 당시 당내 경향들의 역사를 간략하게 설명하였다. 이 역사는 내전 경험의 아주 중요한 부분이며 전체적으로 코민테른 정책에 직접적으로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이미 말했지만 다시 한번 더 말한다. 당내 이견들에 대한 연구는 잘못된 정책을 추구한 동지들에 대한 공격이 될 수도 없고 되어서도 안된다. 그러나 일부 당원들이 노동자혁명의 과정을 제대로 따라잡지 못했다고 해서 우리 당 역사의 가장 위대한 장을 지워버릴 수는 없다. 이것은 절대적으로 인정될 수 없다. 당은 자신의 과거를 전부 알아야 한다. 역사를 정확하게 평가하고 개개 사건들의 위상을 올바로 세우기 위해서이다. 회피가 아닌 비판적 명확성을 통해 혁명정당의 전통이 수립된다.

역사는 우리 당에게 측정할 수 없이 소중한 혁명적 장점들을 확보해 주었다. 짜르 왕정에 대한 영웅적 투쟁의 전통, 지하활동의 조건과 밀접히 결부된 혁명적 자기희생의 습관화, 인류의 혁명 경험에 대한 폭넓은 이론 연구와 소화, 멘셰비키주의 인민주의 화해주의 등에 대한 투쟁, 1905년 혁명의 대단히 출중한 경험, 반혁명 기간에 진행된 이 혁명에 대한 이론 연구와 소화, 1905년 혁명 경험에 기초한 국제노동운동의 문제들에 대한 검토 --- 이것들은 모두 하나가 되어 우리 당에게 혁명적 기질, 출중한 이론적 통찰, 비교할 수 없는 혁명적 시야를 제공했다. 그러나 결정적 행동의 전야에 경험이 풍부한 고참 볼셰비키 혁명가들은 하나의 그룹을 형성했다. 그리고 1917년 2월부터 1918년 2월에 걸쳐 모든 기본 문제들에 대해 근본적으로 사민주의 노선을 채택했다. 당과 혁명을 이 엄청난 혼란 속에 지켜내기 위해서는 레닌의 존재 그리고 유례가 없었던 그의 예외적인 영향력이 필요했다. 다른 나라 공산당들이 우리로부터 배우기를 원한다면 이 점을 결코 잊지 말아야한다.

지도부를 선택하는 문제는 서구 공산당에게 매우 중요하다. 실패한 독일 혁명의 경험은 이 점을 충격적으로 증명하고 있다. 그러나 지도력은 혁명적 행동을 통해서 선택되어야 한다. 최근 몇 년간 직접 투쟁의 순간들은 독일 노동자들에게 지도부를 시험할 많은 기회를 제공했다. 이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면 지도부의 나머지 요건들은 아무 쓸모가 없다. 지난 몇 년간 프랑스에서는 부분적인 혁명적 격동조차 아주 빈약하게 진행되었다. 그러나 내전과 같은 상황이 가끔 번쩍거리며 등장하기도 했다. 즉 당중앙위원회와 노동조합 지도부가 시급하고 아주 중요한 문제들에 대해 해답을 제시해야 할 그런 순간들이 있었다. 1924년 1월 11일의 살벌한 회의가 하나의 예가 될 것이다. 이러한 일회적 사건들을 면밀히 연구할 경우 당의 지도력, 다양한 당기구의 행동, 개별 지도적 인사 등을 평가할 귀중한 자료가 된다. 이 교훈들을 무시하여 지도부 선택과 관련된 필요한 결론들을 이끌어 내지 못하면 패배를 자초한다. 왜냐하면 통찰력, 단호함, 용기 등을 갖춘 당 지도부가 없이 노동자 혁명의 승리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가장 혁명적 정당도 조직 보수주의를 드러내기 마련이다. 그렇지 않다면 당의 활동에 필요한 안정성을 갖출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은 전적으로 정도의 문제이다. 조직의 보존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보수주의는 노선의 혁신과 행동의 대담함을 통해 일상의 틀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 있는 운신의 자유와 결합되어야 한다. 이 자질들은 역사의 전환점에 가장 가혹한 시험에 처한다. 가장 혁명적 정당도 상황이 급변하여 새로운 임무가 제기될 경우 빈번히 과거의 정치노선을 답습하여 혁명의 장애물이 되거나 그럴 위험에 처한다. 레닌의 이 결론을 필자는 이미 인용한 바 있다. 당의 주요 기구들은 조직 보수주의와 혁명적 주도성을 가장 응축된 형태로 나타낸다. 한편 혁명 준비기에서 실제로 권력을 장악할 시기로의 가장 급격한 “전환기”를 유럽 공산당들은 아직 경험하지 못했다. 이 전환은 가장 힘겨우면서도 조금도 머뭇거릴 수 없으며 가장 책임이 무거우면서도 달성하기는 제일 힘들다. 전환의 결정적 순간을 놓치는 것은 가장 비참한 패배를 예비하는 것과 같다.

유럽 특히 독일의 경우를 러시아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당의 거대한 도약기에 장애물로 등장하는 지도자에는 두 유형이 있다. 하나는 혁명의 난관과 장애물만을 주로 보는 지도자이다. 이런 지도자는 의식하지는 못하지만 모든 종류의 행동을 회피하려는 경향을 항상 드러내며 정세를 평가한다. 이런 지도자에게 맑스주의는 혁명적 행동의 불가능성을 논증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러시아 멘셰비키들은 이런 유형의 가장 순수한 경우이다. 그러나 이런 유형은 멘셰비키 뿐 아니라 가장 혁명적인 정당의 지도부에서도 가장 결정적 순간에 나타난다.

두 번째 유형의 지도자는 피상적이고 선동적 방식을 뚜렷이 드러낸다. 그는 난관과 장애물에 정면 충돌하고 나서야 이것들을 인정한다. 진짜 장애물을 허풍으로 극복하는 능력, 모든 문제들에 대한 대단한 낙관주의(아무리 큰 바다도 무릎까지 밖에 차지 않는다) 등은 결정적 행동의 순간이 다가올 때 반드시 정반대의 편향으로 나타난다. 아무 것도 아닌 것을 커다랗게 과장하는 첫 번째 유형의 혁명가에게 권력장악의 문제는 자신이 경험한 모든 문제들을 무한히 쌓아 올리고 곱할 정도의 어려운 문제이다. 두 번째 유형의 혁명가인 피상적 낙관주의자에게는 혁명적 행동이 제기하는 난관은 언제나 놀라울 뿐이다. 혁명 준비기에 이 두 유형은 각기 다른 행동방식을 나타낸다: 전자는 신뢰할 수 없는 냉소주의자이며 후자는 광신도처럼 보인다. 그러나 결정적 순간에 이 두 유형은 손을 맞잡고 같이 행진한다. 이들은 모두 봉기를 반대한다. 한편 혁명 준비작업 전체는 당과 무엇보다도 주요 당기구에게 봉기의 순간을 결정하고 이것을 지도할 능력을 갖추게 하는 한에서만 가치가 있다. 왜냐하면 공산당의 임무는 사회를 다시 건설하기 위한 국가권력 장악에 있기 때문이다.

최근 코민테른의 “볼셰비키화” 필요성에 대해 많은 논의가 있었다. 이 임무는 반박되거나 지연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며 이미 1년 전에 불가리아와 독일의 잔인한 교훈들을 통해 특히 시급하게 제기되었다. 볼셰비키주의는 단순히 교의가 아니며 노동자 봉기를 혁명적으로 훈련시키는 체계이다. 공산당의 볼셰비키화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혁명의 순간이 다가왔을 때 혁명이 말아 먹히는 것을 막을 수 있게 혁명가들을 훈련시키고 올바른 지도부를 수립하는 능력을 당에게 부여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헤겔의 저서, 지혜서(books of wisdom) 그밖에 모든 철학이 보유한 의의이다 ...”

이 책에 대한 간략한 논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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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 혁명의 초기 단계는 2월 혁명에서 4월 위기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이 혁명은 5월 6일 멘셰비키와 인민주의자들이 참여한 연립정부의 수립으로 성취되었다. 이 기간동안 필자는 혁명과정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다. 임시 연립정부 수립 전야인 5월 5일이 되어서야 뻬쩨르부르그에 도착했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때 미국에서 혁명 첫 단계와 혁명 전망을 논문을 통해 다루었다. 이 논문들의 내용은 레닌이 “멀리서 온 편지”에서 제시한 혁명 분석과 완전히 일치한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뻬쩨르부르그에 도착한 첫날부터 필자의 혁명활동은 볼셰비키당 중앙위원회의 노선과 완전히 일치하였다. 노동계급의 권력 장악에 대한 레닌의 전략을 필자는 자연스럽게 전적으로 또 부분적으로 지지하였다. 농민문제에 대해서는 약간의 이견도 없었다. 당시 레닌은 당내 우파의 노선과 이들의 구호 “노동자 농민 민주주의 독재”에 대한 투쟁의 첫 단계를 끝내고 있었다. 공식적으로 볼셰비키당에 입당하기 전에도 필자는 당의 이름으로 발표된 많은 결의문과 문서들의 초안작성 작업에 참여했다. 3개월 동안 필자가 입당을 미룬 이유는 메주라욘치 그룹(역자 주: 제국주의 전쟁과 임시정부를 국제주의 관점에서 반대한 조직. 1917년 8월 볼셰비키당과 통합했다. 이 그룹의 신문 이름은 “전진”이었다.)과 혁명적 국제주의자들 중 최상의 분자들을 볼셰비키당에 입당시키려 했기 때문이었다. 이 정책도 레닌은 완전히 지지하였다.

필자가 통합을 지지하면서 당시에 쓴 어느 논문이 볼셰비키의 조직 “파벌주의”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고 이 책의 편집자들이 말한 적이 있다. 당연히 필자는 여기에 대해 대답해야할 것이다. 물론 소린 동지와 같은 심오한 학자는 이 말을 연역하여 당헌 제1항에 대해서 필자가 레닌과 견해를 달리한 점을 즉시 상기시킬 것이다. 그러나 이 점에 대해서는 토론의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 왜냐하면 과거 자신의 주요한 조직적 오류들을 필자는 이미 말과 행동으로 인정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좀더 덜 비뚤어진 독자는 좀더 간단하고 직접적인 설명을 원할 것이다. 필자의 이 발언은 당시의 구체적 상황 속에서 나왔다. 당시 메주라욘치 그룹의 일부 노동자들은 뻬쩨르부르그 소비에트의 조직 정책을 아주 강하게 불신했다. 볼셰비키당의 “파벌주의”에 대한 논쟁이 메주라욘치 조직원들 사이에 자주 있었다. 그리고 이 논쟁은 항상 그렇듯이 모든 “푸대접”에 대한 언급과 결합되면서 신빙성이 높아졌다. 필자는 이 논쟁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반박했다: 과거의 유물로 파벌주의는 실제하지만 메주라욘치 그룹이 독자적 존재를 청산해야 이것이 일소된다.

전국 소비에트 제 1차 대회에게 필자는 소비에트 정부가 12명의 페셰호노프들로 구성되어야 한다는 순전히 논쟁적인 “제안”을 한 적이 있다. 그런데 이 제안은 필자가 마치 페셰호노프 쪽으로 경사하고 있거나 혹은 레닌의 노선과는 다른 특별한 노선을 제출하고 있는 것으로 수하노프에 의해 해석되었다. 물론 이것은 말도 되지 않는다.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이 주도하는 소비에트가 권력을 잡아야 한다고 우리 당이 요구한 적이 있다. 페셰호노프들로 구성된 내각을 “요구한” 것이었다. 결국 페셰호노프, 체르노프, 단 사이에는 원칙적인 차이점이 없었다. 부르주아 계급으로부터 노동계급으로 권력이 이양되는 일을 촉진하는 데에 이들은 똑같은 정도로 유용했다. 페셰호노프가 통계에 더 익숙해서 체레텔리나 체르노프보다 약간 더 실제적인 인물로 인식되었는지도 모른다. 한 타스의 페셰호노프들은 연립정부가 아니라 소자본가 민주주의 진영의 충실한 12명의 대표들로 구성된 정부를 의미했다. 뻬쩨르부르그 대중이 당의 지도에 따라 “10명의 자본가 장관들을 타도하라!”라는 구호를 외쳤을 때 이들은 장관직이 멘셰비키와 인민주의자로 채워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부르주아 민주주의자 여러분들, 입헌민주당 놈들을 차버리시오! 그리고 권력을 직접 손에 넣으시오! 12명 또는 가지고 있는 수만큼 많은 페셰호노프들을 정부 각료로 입각시키시오. 그러면 때가 왔을 때 당신들을 장관직에서 ”평화적으로“ 몰아 내겠소. 그리고 이 때는 곧 다가올 것이오!” 여기에는 특별한 정치노선이 없었다. 레닌이 계속해서 주창해온 노선이었기 때문이다.

이 책의 편집자 렌쓰너 동지의 경고를 강력하게 강조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가 지적하고 있듯이 이 책에 실린 대개의 연설문들은 속기록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반은 무지하고 반은 악의에 찬 화해주의자 신문 기자들이 작성한 보도 내용들이다. 이런 문서들을 간략하게 검토한 후 필자는 이 연설문들을 어느 정도 교정하고 보강하자는 원래의 계획을 즉시 거부하기로 했다. 이 문서들은 그대로 놔두는 것이 낫다. 이 문서들이 비록 “저 편에서” 나왔지만 나름으로는 이 시대의 문서들임에 틀림없다.

렌쓰너 동지와 그의 조수들인 헬러, 크리자노프스키, 로벤스키, 루머 등의 면밀하고도 능력 있는 작업이 아니었다면 지금 이 책은 출판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렌쓰너 동지는 각주들을 모으고 정리하는 작업을 하였다.

이 기회를 빌어 이 동지들에게 동지적인 애정과 감사의 말을 전한다. 그리고 필자의 가장 가까운 협력자인 글라즈먼 동지가 필자의 다른 책들 뿐 아니라 이 책을 준비하는 데에도 엄청난 작업을 해준 것에 대해 특히 감사하고자 한다. 필자는 이 글을 마치면서 멋진 동지, 일꾼, 인간이었던 글라즈먼 동지의 대단히 비극적인 죽음에 대해 깊은 애도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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