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의 건강은 날이 갈수록 회복되었다. 정선은 서울을 떠나기 전 사흘 동안 비로소 남편과 한자리에서 잤다. 그들은 마치 신혼한 내외 모양으로 새로운 정을 느꼈다. 정선은 숭에게 서울까지 동행하기를 청했으나 숭은 듣지 아니하였다. 정선은 혼자 식전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왔다. 숭은 앓고 나서 처음 정거장까지 먼 길을 걸었다.

"이렇게 걸음을 걸어도 괜찮을까."

하고 정선은 정거장까지 가는 동안에도 퍽 여러 번 걱정을 하였다.

"괜찮지."

하고 장담은 하면서도 숭의 이마와 등에는 식은땀이 흘렀다.

정거장에는 한갑 어머니와 유순이와 기타 동네 사람 남녀 십여 명이나 전송을 나왔다.

"내 아버지더러 집이랑 다 팔아 달래 가지구 오리다."

하고 정선은 남편의 싸늘한 손을 꼭 쥐면서 맹세하였다. 정선의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코와 눈과 입의 근육이 씰룩거렸다. 어쩐 일인지 정선은 참을 수 없이 슬펐다.

차가 떠날 때에 정선은 창을 열고 내다보려 하였으나 겹창이 열리지를 아니하였다. 정선은 앉아서 울었다.

정 선은 지나간 오십 일이 십 년이나 되는 것 같았다. 그 동안에 숭이가 죽을 뻔한 일도 두어 번 당하고 감정과 의견의 충돌도 무수하였다. 그러나 그러는 동안에 정선은 숭을 좀더 알았다. 숭은 뜻이 굳고, 맘에 그리는 생활이 자기의 것과는 달라서 적어도 전조선을 목표로 삼고, 정은 있으면서도 정에 움직이지 아니하려고 애를 쓰고, 이런 모든 점을 발견하였다. 그 결과로는 숭이가 결코 못생긴 시골뜨기만이 아니요, 존경할 여러 가지, 정선으로는 및지 못할 여러 가지가 있는 것도 발견했지마는, 또한 숭은 정선이가 맘으로 원하는 남편의 자격이 아닌 것도 발견하였다. 정선이가 맘으로 원하는 남편은 이 세상 많은 사람, 상류계급의 많은 사람과 같이 이기적이요, 아내만 알아주는 사람(정선 자신은 이렇게 이름을 짓지 아니한다 하더라도 그 생각을 사정없이 해부한다면)이었다. 숭은 위인이 될는지 모르거니와, 좋은 남편은 될 것 같지 아니하였다. 정선은 어떤 날 달냇가에서 하던 이야기를 생각했다.

"그래, 당신이 혼자서 그러면 조선이 건져질 것 같소?"

이렇게 정선이가 물을 때에,

"글쎄, 나 혼자 힘으로 온 조선을 어떻게 건지겠소? 나는 살여울 동네 하나나 건져 볼까 하고 그러지. 살여울 동넨들 꼭 건져질 줄 어떻게 믿소. 그저 내 힘껏 해보는 게지. 그 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지 아니하오?"

이렇게 숭은 대답하였다.

"그러니깐 말요, 그렇게 될뚱말뚱한 일을 하느라고 어떻게 일생을 바치오? 그것은 어리석은 일 아니오?"

하고 정선이가 항의할 때에, 숭은,

"정선이 말과 같이 어리석은 일이겠지. 그러니까 약은 사람들은 이런 일은 아니 하지요."

하고 숭은 웃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숭이가 하려는 일은 공상이었다. 어리석은 공상이었다.

"왜 당신 배운 재주론들."

하고 정선은 다시 숭의 어리석은 생각을 돌리려고 애를 써보았다.

"변호사론들 조선 사람을 위하여 얼마든 좋은 일을 할 수가 있지 아니하오. 이런 시골 구석에서 고생 아니 하고도, 돈벌어 가면서 일류 명사 노릇 해가면서도 좋은 일 얼마든지 할 수 있지 않소?"

할 때에도, 숭은,

"변 호사 노릇을 아무리 잘하기로 굶어 죽는 농민을 도와 줄 수야 없지 않소? 기껏 부잣집 비리 송사 대리인밖에 할 것이 무엇이오. 차라리 불쌍한 농민들의 대서를 해주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일이오? 면소나 경찰서 심부름을 해주는 것이 얼마나 그들에게 도움이 되겠소?"

하고 듣지 아니하였다.

정 선의 귀에도, 아니 양심에도 숭의 말은 진리에 가까운 듯하고, 종교적 거룩함까지도 있는 듯하였다. 정선도 이 진리감과 정의감을 학교에서 배양을 받기는 받았다. 그러나 지금 세상에 누가 그런 케케묵은 진리와 정의를 따른담. 베드로와 바울이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나더라도 그들은 정선과 뜻을 같이할 것같이 생각되었다. 숭은 분명히 어리석은 공상가였다. 남편으로 일생을 믿고 살기에는 너무도 맘놓이지 아니하는 사내였다.

기차가 숭이가 있는 곳에서 차차 멀어 갈수록, 서울이 가까워 갈수록 정선은 숭의 모양이 자기의 가슴속에서 점점 희미하게 됨을 깨달았다.

'인생의 향락!'

이 절대 명령이 정선에게 저항할 수 없는 압력을 주었다. 정선은 그 아버지, 오빠, 모든 일가 사람들, 또 모든 동무들, 그들의 가정, 어느 곳에서나 숭과 같이 어리석은 공상가의 본을 찾아낼 수가 없었다. 정선은 한선생을 안다. 정선의 삼종숙 한은 선생이 이 한민교라는 선생을 위인처럼 칭찬하는 것을 여러 번 들었다. 그러나 한선생이 다 무엇이냐. 그 궁하게 생긴 얼굴, 초라한 의복. 만일 숭이가 한선생과 같이 된다면? 싫어 싫어! 누가 그 아내 노릇을 해! 나이 오십이 넘도록 셋방살이가 아니냐. 한 달에 백 원 내외의 월급을 받아 가지고. 아아,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쳤다. 그것이 사람 사는 거야?

신촌역을 지나서, 굴을 지나서 서울의 전깃불 바다가 전개될 때에 정선은 마치 지옥 속에서 밝은 천당에 갑자기 뛰어나온 듯한 시원함을 깨달았다. 기쁨을 깨달았다.

경성역의 잡답, 역두에 늘어서서 손님을 기다리는 수없는 택시들. 그들은 손님을 얻어 싣고는 커단 두 눈을 부릅뜨고 소리를 지르며 달아났다.

이것이 인생이었다. 살여울, 달내, 초가집, 농부들―---그들은 정선에게는 마치 딴나라 사람들이었다. 도무지 공통된 점을 못 찾을 듯한 딴나라 사람들이었다. 무의미를 지나쳐서 불쾌한 존재였다.

"아이, 아씨!"

하고 집에서는 어멈, 유모, 침모, 유월이(계집애)가 나와 반갑게 맞았다.

"어쩌면 이렇게 오래 계셔요? 그래, 영감마님은 아주 나으셨어요? 그런데 어째 같이 아니 오시고?"

하고 정선에게 물었다.

정 선은 반가운 내 집을 돌아보았다. 이것들이 집을 어떻게나 거두는고 하고, 남편의 병구완을 하면서도 그것이 맘에 잊히지는 아니하였다. 비록 믿고 믿는 유모가 있지만도. 방에 있는 모든 세간들―---장, 의걸이, 양복장, 체경, 이불장, 이불, 책상, 전화, 모든 것이 다 반가웠다. 남편보다도 더 반갑고 소중한 듯하였다. 정선은 마치 무엇이 없어지지나 아니했나 하는 듯이 옷을 갈아입기도 전에 한번 장문들을 열어 보았다. 그 속에는 자기의 옷도 있고 남편의 옷도 있었다. 마침내 그는 피곤한 듯이 남편의 방인 안사랑의 책상 앞 교의에 앉았다. 그 방에는 담뱃내가 있고 책상 위에는 궐련 끝이 재떨이에 수없이 있었다.

"이 방에 누가 왔던가."

하고 정선은 의심스러운 듯이 따라온 하인들을 향하여 물었다.

"저 잿골 김서방님이 가끔 오신답니다."

하고 유월이가 대답하였다.

"잿골 김서방님이?"

하고 정선은 눈을 크게 뜨며,

"김서방님이 왜?"

하고 정선은 놀란다.

"지나가다가 들어오시는 게죠. '아직 안들 오셨니?' 하시고 '사랑문 열어라' 하시고는 들어오셔서 놀다가 가시지요."

하고 명복 어멈이 설명을 한다. 이 어멈은 얼굴도 깨끗하고 말재주도 있는 어멈이다.

"어떤 때에는 친구들 죽 끌고 오신답니다."

하고 유월이가,

"오셔서는 청요리를 시켜라, 술상을 보아라, 귀찮아서 죽겠어요."

하고 입을 비쭉한다.

"조것이!"

하고 명복 어멈은 유월을 흘겨보며,

"한 번 그리셨지, 무얼 가끔 그리셨어?"

하고 꾸짖는다.

"무엇이 한 번요. 접때는 자정이 넘도록 지랄들을 아니 했수?"

하고 유월이는 명복 어멈을 책망하는 눈짓을 한다.

정선은 자기도 없고, 더구나 남편도 없는 빈집에 갑진이가 사람들을 끌고 와서 밤이 깊도록 놀았다는 것이, 그것도 한두 번만이 아니었다는 것이 심히 불쾌하였다. 큰 모욕을 당한 것 같았다.

그 날 밤 정선은 남편과 같이 자던 자리에 혼자 누워 보았다. 그리고 시골에 있는 남편을 그립게 생각해 보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웬일인지 애를 쓰면 쓸수록 남편이 점점 멀어 가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도리어 갑진의 소탈한 모양이 눈에 어른거리고, 그뿐만 아니라 갑진에게 대하여 억제할 수 없는 어떤 유혹을 깨달았다.

정 선은 갑진과 숭을 비교할 때에 숭의 인격의 가치가 갑진의 그것보다 높은 것을 의심 없이 인식한다. 그렇지마는 숭이 정선에게―---아무 일반적으로 젊은, 사랑에 주린, 취할 듯한 애욕에 주린 여성에게 만족을 주는 남편이 아닌 것같이도 인식되었다. 정선은 숭의 인격을 노상 사모하지 아니함은 아니나 그것만으로 만족할 수 없는 가슴의 비임을 깨닫는다. 그 비임은, 정선이가 아는 한에서는 갑진일 것 같았다. 갑진은 무척 재미있는 남편―---적어도 성적으로는―---일 것 같았다. 이것은 정선이 그 아버지의 호색하는 피를 받음일는지는 모르나, 어느 젊은 여자든 다 그러하리라고 정선은 스스로 변호하였다.

하루 종일 차 속의 피곤과 자리 속의 번민과 공상과 오뇌로 정선은 퍽 늦게야 잠이 들었다가, 늦게야 잠이 깨었다.

이튿날 정선이 친정에를 다녀서 저녁을 먹고 밤 아홉시나 되어서 집에 돌아온 때에 유월은 대문에 마주 나와서,

"마님, 저 잿골 서방님이 또 오셨어요. 안방에 떡 들어가 드러누웠겠지요."

하였다. 정선이가 돌아오는 것을 보고 갑진은 마루 끝에 나서며 동네방네 다 들어라 하는 듯이,

"아, 돌아오셨어요? 나는 어떻게 기다렸는지요. 또 정선 씨도 숭이놈과 같이 미쳐서 시골 무지렁이가 되어 버리셨나 했지요. 그렇다 하면 그것은 서울을 위하여 슬퍼할 것이요, 전인류를 위하여 슬퍼할 것이란 말야요. 더구나 이 갑진을 위해서는 통곡할 일이란 말씀야요."

아주 갑진은 무대 배우의 말 모양으로, 농담 같기도 하고 진담 같기도 한, 아마도 농담 속에 진담을 섞은 말이었다.

정선은 불쾌한 듯이 새침하고 고개를 숙여서 인사를 하고는 갑진을 뒤에 두고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갑진은 좀 무안한 듯이 이번에는 점잖게,

"숭이는 아니 온대요?"

하고 정당하게 물었다.

"안 온대요."

하고 정선은 시들하게 대답을 하였다.

"아 그놈이 시골에 웬 때묻은 계집애 하나를 고이를 한다니, 정말야요? 어디 유력한 증거를 잡으셨어요?"

하고 갑진은 다시 기운을 얻었다.

"모르지요, 누가 알아요?"

하고 정선은 여전히 뾰로통했다.

"그런 쑥이. 글쎄, 뭣 하러 시골 구석에 가 자빠졌어. 그놈이 그 무에라든가 하는 계집애의 때 냄새에 취하지 아니하면 무얼 하고 거기 가 있어요? 미친 자식, 그 자식 암만해도 쑥이라니까."

하고는 정선이가 멍하니 앉았는 안방에 들어가서 모자와 스프링을 집어 들고,

"갑니다, 실례했습니다."

하고 나와 구두를 신는다.

갑진이가 무안하게 나가는 것을 보고 정선은 미안함을 깨달았다. 그래 따라서 마루 끝까지 나가며,

"왜 어느새 가세요?"

하고 어성을 부드럽게 하였다. 갑진은 구두 끈을 매다 말고 벌떡 일어서면서 마치 얼빠진 사람과 같은 표정으로,

"미워하시니까 가지요."

하고 물끄러미 정선을 바라본다.

"미워는요?"

하고 정선은 웃어 보였다.

"그럼 가지 말고 도로 올라가요?"

하고 갑진은 외투를 마루에 놓는다.

정선은 소리를 내어 웃어 버렸다. 어멈과 유월이도 웃어 버렸다. 갑진은 마루 끝에 걸터앉았다. 정선은 올라오란 말은 하지 않는다.

"글쎄, 그 쑥이 왜 아니 온대요?"

하고 갑진은 마치 숭에게 흥미가 있는 것같이 말한다.

"글쎄, 농촌운동한다고, 날더러도 내려오라고 그러는걸요."

하고 정선도 문지방에 팔을 걸고 앉는다. 갑진은 신이 나서,

"농 촌운동이라는 게 무어야요? 무지렁이놈들 데리고 엇둘엇둘 한단 말야요? 원, 원, 요새 직업 못 얻은 놈들이 걸핏하면 농촌운동, 농촌운동 하지마는, 그래 그깟놈들이 운동 아니라 곤두를 서보시오, 척척, 경제학의 원리원칙대로 되어 가는 세상이 그깟놈들이 지랄을 하기로 눈이 깜짝하나. 다 쓸데없어요. 숭이놈도 변호사나 해먹지 국으로, 괜히 꼽살스럽게, 오, 깐디 좀 돼볼 양으로. 깐디 노릇도 수월치 않던걸요. 요새도 또 밥을 굶는다나. 밥을 굶으면 잡아 가두었다가도 내놓아 주는가 봅디다마는, 그놈의 노릇을 해먹어. 세 끼 더운밥을 먹고도 눈에 불이 확확 나서 못살놈의 세상에 감옥이 아니면 밥 굶기, 그리고 궁상스럽게 물레질을 왜? 아니, 숭이녀석 물레질은 아니 해요? 이렇게, 이렇게 붕붕붕 하고."

하고 오른편 팔을 두르고 왼편 팔을 뒤로 당기어 물레질하는 시늉을 한다.

"하하하하."

하고 정선은 유쾌하게 웃었다.

"아니, 물레질하는 건 어디서 다 보시었어. 아이, 서방님두."

하고 명복 어멈이 뚱뚱한 몸을 주체할 수가 없는 듯이 허리를 굽히락펴락하고 웃는다. 정선은 엄정하게,

"그럼 농촌운동을 아니 하면, 오늘날 조선에서 또 무얼 할 일이 있어요?"

하고 남편의 역성을 들려고 한다.

"돈벌지요."

하고 갑진은 말할 것도 없다는 듯이 눈을 크게 뜬다.

"돈은 벌어서?"

하고 정선은 다시 농담 어조로 변한다.

"우리처럼 술 먹고 카페 댕기구요."

"또?"

"또 할 일 많지요. 남자 같은 양이면 계집애들도 후려 내고, 맘나면 아편쟁이 아편도 사주고, 아따 참, 이렇게 인단도 사먹구요."

이 런 소리를 하다가 열시나 되어서 갑진은 정선의 집에서 나왔다. 갑진을 보낸 정선은 갑자기 텅 빈 듯한 생각을 가지지 아니할 수 없었다. 갑진이라는 생각은 정선을 못 견디게 괴롭게 하였다. 그는 마치 갑진이가 정선에게 무슨 마취약을 먹여서 갑진만을 그리워하도록 술을 피운 것 같았다.

집 처분, 재산 처분을 해가지고 살여울 남편에게로 가려는 생각은 자꾸 스러져 버리려고도 들었다. 정선은 이에 반항하려고 했으나 그 반항은 도무지 힘이 없는 반항이었다. 정선의 몸과 맘은 보이지 않는 동아줄에 얽히어 더욱더욱 갑진에게로만 끌리어가는 듯하였다.

정 선의 집에는 밤마다 여자들이 모여서 놀았다. 그들은 대개는 정선의 동창이나 동무들이었다. 혹 직업을 가진 이도 있지마는 대개는 이것이라고 내어놓을 만한 직업이 없는 여자들이었다. 나이로 말하면 이십이삼으로부터 삼십 세 안팎, 간혹 삼십사오 세 된 여자도 있었다. 정선이 모양으로 혼인한 이도 있으나 대개는 혼인 아니 한 여자들이요, 그 중에는 소박데기, 이혼당한 이도 한둘은 있었다.

먹을 걱정은 없고 별로 바쁜 일도 없는 그들은, 정선의 집 같은 데를 좋은 놀이터, 이야기터로 알아서 모여들었다. 정선도 마음의 적막과 괴로움을 이것으로 잊으려 하였다.

그 들이 모여서 하는 말은 잡담이었다. 가장 많이 나오는 화제는 가십과 연애 이야기였으나, 가끔 직업 이야기도 나왔다. 이를테면 일본말에 이른바 에로, 그로, 넌센스에 사는 종교는 조선의 인텔리겐치아 여성까지도 완전히 정복하고 말았다.

십 년 전 여성들의 입에 오르내리던 애국이니 이상이니 하는 도덕적 말들은 긴 치마, 자주 댕기와 같이 영원한 과거의 쓰레기통에 집어던지고 말았다. 가끔 이 자리에 오는 심순례까지도 이러한 에로, 그로, 넌센스에 한마디 두마디 대꾸를 하게 되었다. 그것이 현대인의 비위에 맞는지도 모른다. 또는 이것이 병균이라고 하면, 현대인은 현대의 시골인 조선 여성도 거기 대한 저항력을 잃어버렸나 보다.

이 여자들의 가십거리에 나오는 인물은 교사, 의사, 신문기자, 총각, 여자 꽁무니 따라다니는 사람, 첩으로 간 여자, 사내들과 같이 다니는 여자, 이러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무슨 서적이나 학술이나 예술에 관한 화제는 나오는 일이 없었다. 그들이 말하는 연애도 십 년 전의 '연애 신성'이라던 연애와는 딴판이었다. 그들이 문제삼는 연애는 모든 봉건시대적 의식, 예절과 떼어 버린 악수, 포옹, 키스, 랑데부, 동거, 별거 등등을 프로세스로 하는 단도직입적인 연애였다. 실로 과학적이요 비즈니스적인 연애였다.

"혼인?"

하 고 입을 삐쭉하는 그들인 듯하였다. 만일 혼인을 한다면 시부모는 재산만 남겨 놓고 죽고, 돈 있고, 몸 건강하고, 이야기 재미있게 하고, 누구 하면 사람이 알아줄 만하고, 그리고 총각이요, 이러한 신랑이 소원인 듯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신랑은 현모양처식 여자가 드문 모양으로 드물었다. 그러하기 때문에 그들은 시집을 못 가고, 아마 아니 가고 소위 남자 교제라는 방법으로 이 남자에서는 얌전의 맛을 보고, 저 남자에서는 시원시원의 내를 맡고, 또 다른 남자에서는 육체의 미를 감상하고, 그리고 또 다른 남자에서는 자동찻값과 저녁값의 재원을 찾았다. 이렇게 여러 남자에게서 분업적으로, 부분적으로 이성에 대한 만족을 찾았다. 남자들도 그러한 이가 많았다. 이렇게 여러 남성에게서 조각조각, 부스럭부스럭의 만족을 얻는 오늘날 조선의 여성은 자연히 마음이 가라앉을 날이 없었다. 그들의 맘은 네온사인의 불줄기 모양으로 늘 흔들리고 늘 움직이고 있다. 밤이 늦도록 무엇을 구하고 헤매던 그들은 새로 한시나, 두시에 자리에 누워도 꿈이 편안치 못하고, 이것저것 불규칙하게 집어먹은 그들의 장위는 마치 산란한 그들의 머릿속, 가슴속 모양으로 편안치를 못하다. 이리 뒤척 저리 뒤척 아침 늦게야 잠을 깨는 그들의 입은 쓰고, 눈은 텁텁하고, 입술은 마르고, 그리고 수없이 하품이 나온다.

정선의 집에 모이는 여자들은 대개 이러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심 순례의 가슴에 박힌 못은 갈수록 더욱 깊이 박히는 것만 같았다. 그는 맘에는 없으면서도 동무들과 같이 밀려다니면서 시름을 잊으려는 생각을 내었다. 더구나 이건영 박사 이 여자를 따라다닌다, 저 여자와 약혼을 한다 할 때마다 맘에 폭풍우가 일어남을 금할 수가 없었다. 순례는 스스로 이 맘이 옳지 아니한 맘이라 하여 누르려 하였으나 그것이 잘 눌러지지를 아니하였다. 그럴 때마다 순례는 자기의 맘이 착하지 못함을 한탄하였다.

'내가 이를 사랑할 양이면 왜 진심으로 그의 행복을 빌지 못할까.'

이렇게 순례는 혼자 애를 썼다.

'질투는 추한 것.'

이란 말을 순례는 어느 책에서 보고, 그 말이 순례의 맘을 몹시 괴롭게 하였다. 순례는 이 추한 맘을 뽑아 버리려고 많이 애를 썼으나, 그는 마침내 자기의 약한 것에 절망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순례는 실연의 슬픔과 질투의 불길이 일어날 때마다 피아노의 건반을 아무렇게나 힘있게 두들겼다. 그것이 버릇이 되어 마침내 한 곡조를 이루게 되었다.

"듣기 싫다!"

하고 어머니가 역정을 낼 때에는, 순례는 어린애 모양으로 하하 웃었다. 그런 뒤부터는 어머니의,

"듣기 싫다!"

하는 소리가 아니 나면 섭섭해서 그 소리가 들릴 때까지 두들겼다.

한 번은 학교에서 동무들에게 불쾌한 소리를 듣고는 피아노 연습하는 방에 혼자 돌아와 앉아서 화날 때에 치는 곡조를 쳤다. 학교 피아노는 집 피아노보다 좋은 것이기 때문에 소리가 심히 웅장하였다. 어머니의 듣기 싫다는 소리도 아니 들리는 곳이라 몇 번을 되풀이하여 어깻짓, 몸짓도 하여 가면서 건반을 부서져라 하고 두들겼다.

이때에 문이 열렸다. 순례는 깜짝 놀라 피아노를 그치고 돌아보았다. 그것은 미스 엠이라는 음악 선생이었다.

"지금 피아노 순례 쳤소?"

하고 미스 엠이 순례를 바라보고 물었다. 순례는 무슨 죄나 지은 것같이 낯을 붉히며,

"네!"

하고 고개를 숙였다. 미스 엠은 구두 소리를 내고 순례의 곁으로 걸어와 손가락으로 순례의 어깨를 누르며,

"내 딸! 그거 무슨 곡조요? 어느 책에서 보고 배웠소?"

하고 물었다. 미스 엠의 부드러운 음성은 순례의 죄 지은 무서움을 얼마쯤 완화하였다.

"아냐요, 장난으로 함부로 쳤어요."

하고 순례는 잠깐 눈을 들어 엠을 우러러보았다.

"아니오."

하고 미스 엠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나 순례 잘못했다고 책망하는 것 아니오. 지금 친 그 곡조, 대단히 힘있고, 열정 많소. 어떤 때, 어떤 곳 좀 규칙 아니 맞는 것 있어도, 그 곡조 베리 나이스(대단히 좋소)."

하고 어깨에 놓았던 손으로 순례의 턱을 만졌다. 귀엽다는 뜻이다. 순례는 눈물이 쏟아짐을 금할 수 없었다. 얼른 고개를 돌리고 소매 속에 있던 손수건으로 코를 푸는 체 눈물을 씻었다.

미스 엠은 손을 순례의 어깨 위로 넘겨서 순례의 눈물에 젖은 뺨을 만지며 순례의 머리에 자기의 뺨을 대고,

"내 딸, 순례, 내 말이 순례를 슬프게 했소? 나 그런 생각 조금도 없소."

하고 미안한 뜻을 표하였다.

순 례가 우는 것이 미스 엠의 말에 노여워서 하는 것이 아님은 말할 것도 없다. 미스 엠은 순례가 사모하는 선생이요, 또 순례를 사랑하는 선생이다. 미스 엠은 과년한 여자들만 모여 있는 학교에서 가장 젊은 여성들의 고민과 몽상을 동정하는 선생이다. 순례는 일찍이 이 선생에게 자기의 가슴속의 고민을 하소연한 일은 없지마는(순례가 어느 사람에게도 그러한 일이 없는 것과 같이) 미스 엠은 홀 부인(저번 순례를 평양으로 데리고 가던)을 통하여 순례의 슬픔을 대강은 짐작할는지도 모른다. 왜 그런고 하면, 홀 부인과 미스 엠은 한집에 사는 의좋은 벗이기 때문에.

그 러면 순례가 우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맘을 깎고 저미는 슬픔을 잊자고 함부로 치는 피아노가 어느덧에 한 곡조를 이룬 것만 해도 설운 일이거든 그것이 잘 지어진 곡조라고, 마치 무슨 명곡이나 같이 칭찬받은 것이 아니 설울 수가 없지 아니하냐.

"아냐요."

하고 순례는 강잉하여 웃는 낯을 지어 가지고 일어나며,

"선생님 말씀으로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공연히 딴생각을 하고……."

하며 피아노를 덮었다.

"으흥, 내 아오, 내 아오."

하 고 미스 엠은 가슴에 매어달린 금만년필을 들어, 피아노 위에 얹힌 보표 종이에 'An angel's lamentation(천사의 슬픈 가락)', 'The morning storm(아침의 폭풍우)', 'Virgin's sorrow(처녀의 설움)', 이러한 것을 적어서 순례에게 보이며,

"아까 그 곡조, 순례 지은 곡조 이름 무엇이오?"

하고 물었다.

"이름 없어요. 아무렇게나 친 것이에요, 장난으로."

하고 웃음을 지었다.

"그러면 내 그 곡조 이름 짓겠소. 이 세 가지 중에 가장 순례 맘에 맞는 것 고르시오."

하였다. 순례는 그 종이를 받아 이윽히 들여다보다가 'sorrow'라는 글자만에 줄을 그었다. 미스 엠은,

"소로, 소로."

하 고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순례의 등을 두어 번 가볍게 두드리고, 그 곡조 이름 적은 종이를 들고 나가 버렸다. 순례는 방에서 나왔다. 포플러 잎사귀들이 늦은 가을 바람에 버석버석 소리를 내며 학교 구내의 잔디판과 길과 돌층층대에 굴렀다. 테니스를 치던 학생들도 배고픔과 가을 석양의 엷은 빛에 불안을 깨달은 듯이 라켓을 들고 기숙사로 들어왔다.

순례는 교문을 나서 집을 향하고 걸어나왔다. 가슴의 슬픔은 약간 흩어졌으나, 묵직하고 얼얼한 것은 잊을 수가 없었다.

순례는 바로 집으로 가려다가 아직 밥도 아니 되었을 것 같고, 또 심사도 산란하여 이야기나 좀 하고 가려고 정선의 집을 찾았다.

"안 계신데요."

하는 유월의 말을 듣고, 순례는,

"어디 가셨니?"

하고 물었다.

"저 잿골 서방님하고 경성운동장에 야구구경 가셨어요."

하고 유월은 앞서서 길을 인도하며,

"들어오시지요. 인제 곧 돌아오실걸요, 머."

하고 시계를 바라본다. 대청에 걸린 시계는 여섯시를 가리키고 있다.

순 례는 유월의 말대로 마루 끝에 앉아서 정선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기로 하였다. 그리고 마치 하늘이 일어나는 구름에 자리를 맡기는 모양으로 순례는 지나가는 생각에서 머리를 내어맡겼다. 동무들 중에 행복된 이가 누구냐. 더구나 시집가서 잘 사는 이가 누구냐. 정선도 자기 말을 듣건댄 불행한 사람이었다. 정선의 집에 모이는 시집간 여자들도 자기들의 사정을 듣건댄 다 잘 살지는 못하였다. 혹은 남편이 직업이 없고, 혹은 남편이 몸이 약하여 부부의 낙이 없고, 혹은 남편이 돈과 건강은 있으나 지식과 교양이 부족하고, 혹은 다른 부족은 없으나 맘이 허랑하여 다른 여자를 따르고, 혹은 점점 애정이 줄고, 혹은 돈을 잘 안 주고, 또 혹은 시부모가 좋지 못하고 도무지 가지각색의 이유로 행복된 사람은 하나도 없는 모양이다.

'행복은 오직 남자를 사랑해 보지 아니한 숫처녀의 것인가.'

하고 순례는 한숨을 지었다.

이때에 전화가 왔다. 유월이가 뛰어가 수화기를 떼어 들었다.

"어디세요? 네, 마님이세요? 네, 유월입니다. 네, 네, 손님 오셨어요. 네, 저― 저녁 잡수시고 오세요? 네, 이박사도 네시에 오셨다가, 저녁에 오신다고요. 그리고 또 저 심순례 아씨께서도 오셔서 기다리시는데, 네."

하고 유월은 수화기를 순례에게 주며,

"아씨, 전화 받으시라고요."

한다.

"아니 나 일 없다고. 어서 저녁 잡수시고 오시라고. 나는 나는 간다고."

하고 순례는 속으로,

'오, 정선이가 김갑진이하고 베이스볼 구경하고 어디 밥 먹고 놀러 가는구나. 남의 아내가 그래도 좋은가.'

하고,

"나 간다."

하 고는 대문으로 걸어나갔다. 이박사가 저녁에 정선의 집에 온다는 말이 겁이 났다. 이박사가 무엇 하러 또 정선의 집에를 올까. 인제는 또 남의 유부녀를 후리기로 작정인가 하고 순례는 일종의 분노를 깨달았다. 순례는 대문까지 갔다가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마침 유월이가 전화를 다 받고 순례를 전송하러 나오는 것을 만나,

"얘, 이박사가 가끔 오니?"

하고 물었다. 순례는 이 말을 묻는 것이 천착스러운 것 같아서 스스로 부끄러웠다. 낯이 후끈함을 깨달았다.

"요새 가끔 오셔요. 오셨다가도 잿골 서방님이 오시면 곧 가시겠죠."

하고 자기가 영리해서 모든 관계를 다 아는 것을 자랑하는 듯이,

"잿골 서방님이 이박사를 여간 놀려먹어야죠. 그건 차마 못 들을 말씀을 다 하시죠."

하고 재잘대었다.

순례는 그들의 화제에 자기도 올랐을 것을 생각하고, 이 유월이라는 계집애가 자기가 이박사라는 빤질빤질한 색마에게 버림받은 것을 들어 알 것을 생각하매 머리로 피가 몰려 올라와서 앞이 아뜩아뜩함을 깨달았다.

'아아, 왜 내가 그 악마의 기억을 완전히 떼어 버리지 못하는고? 이 악마가 나를 버린 것과 같이 이 악마의 그림자는 왜 나를 버리지 아니하는가. 내 영혼을 죽여 버리고도 부족하여 내 육체까지 빼빼 말려서 죽이고야 말려는가.'

하고 순례는 견딜 수 없이 괴로워 대문을 나섰다. 대문을 나서서 고개를 숙이고 몇 걸음을 걸어가다가 딱 마주친 사람이 있었다. 순례는 깜짝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그것은 이건영이었다.

이건영 박사도 한순간은 멈칫하였으나 곧 방그레 웃으며 모자를 벗고,

"아, 순례 씨, 오래간만입니다. 어디 댕겨오세요? 댁도 다 안녕하세요?"

하고 아주 아무 특별한 과거의 관계 없는 친구 모양으로 냉정하게 인사를 한다. 털끝만치도 미안해하는 양도, 겸연쩍어하는 빛도 없다.

그 와 반대로 순례는 마치 몸과 맘의 관절이 다 찌그러지고 머리는 큰 바위에 부딪친 것같이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다음 순간, 순례가 의식을 회복할 만한 때에는 순례의 전신은 분노의 불길로 탔다. 그는 벌써 이박사를 보고 기절하여 한민교의 팔에 붙들리던 계집애는 아니었다. 그 동안의 괴로움과 슬픔―---처녀로서 순례가 처음 당하는 이 시련은 순례를 얼마큼 굳세게 하였다. 저항력이 있게 하였다. 이를테면 이건영은 순례를 슬프게 하였으나 동시에 굳세게 하였다. 순례는,

"좀 부끄러울 줄을 아시오! 회개할 줄을 모르고, 미안해할 줄을 모르더라도 좀 부끄러워할 줄은 알으시오! 여러 계집애들을 후리고 돌아다니다가 이제 또 남의 혼자 있는 유부녀를 엿보고 다녀요? 학자는 그렇소? 인격 높은 사람은 그렇소? 당신이 미국까지 가서 배워 온 재주가 그것뿐이오? 그렇게 뻔뻔스러운 것뿐이오? 그 빨간 넥타이는 다 무엇이오? 그 빤질빤질한 머리는 다 무엇이오? 다른 모든 것보다도 죄를 짓고도, 부끄러운 일을 저지르고도 붉힐 줄을 모르는 그 뻔뻔한 상바닥은 다 무엇이오?"

하고 막 윽박질렀다.

이박사는 조금도 불쾌한 빛도 없이, 그렇다고 빈정대는 웃음도 없이, 마치 무슨 사무적 보고나 듣고 있는 모양으로, 극히 침착하게, 냉정하게 듣고 있었다. 그곳에 이박사의 영웅적 기상이 있는 것도 같았다.

이 박사는 순례의 말이 다 끝나기를 기다려서 다 끝난 뒤에도 마치 지금까지 들은 말을 한번 더 요량하고 해석하는 듯이, 또 마치 순례가 더 할 남은 말이 없도록 다 해버리기를 기다리는 듯이 잠깐 간격을 둔 후에야 극히 평정한 어조로,

"좀 잘못 생각하고 하시는 말씀이십니다. 나는 어느 여자를 후려 낸 일은 없고, 하물며 어떤 유부녀를 엿본 일도 없습니다. 지금 하신 말씀은 아마 무엇을 잘못 생각하시고 하신 말씀인 듯합니다. 순례 씨는 너무 흥분되셨습니다. 댁에 가셔서 좀 드러누우시지요."

하고 순례를 두고 걸어가려는 기색을 보였다.

순 례는 지금 듣는 이박사의 말에 분명히 궤변이 있고 허위가 있고 가식이 있고 악마적인 악의가 있는 것까지도 잘 알았다. 그러나 유치한 순례의 논리적 숙련은 그 중에 어떤 점을 집어내어서 박격을 하여야 이박사의 악마적 심장을 꿰뚫을지를 몰랐다. 그리고 다만 가슴만 터질 듯이 아팠다. 발을 동동 구르고 가슴을 쥐어뜯고 싶도록 안타까웠다.

'이놈을 칼로 찔러 죽여 버릴까. 그리고 그 빤빤한 낯가죽을 벗기고, 그 빤빤한 소리를 하는 주둥이를 찢어 버리고, 그 이기적이요 음욕이 꽉찬 배때기를 찢어 버릴까.'

이런 무서운 생각까지도 지나갔다. 순례는 제 생각에 저 스스로 놀랐다. 그리고 순례 편이 먼저 걸음을 빨리하여 가버렸다.

이박사는 눈을 감고 고개를 숙이고 이윽히 생각하다가 정선의 집으로 향하던 발을 돌려 순례의 뒤를 따라 섰다.

순례는 빨리 걸었다. 그의 검은 치마는 어둠에 사라지고 지붕을 넘어서 흘러오는 전등불빛에 그 흰 저고리와 목과 어깨의 선이 걸음을 걷는 대로 빠른 리듬을 이루었다.

순 례가 자기를 바라보지 아니하게 된 순간에 이건영의 몸은 갑자기 떨리기를 시작하였다. 마치 전신의 피가 다 분통으로 모여들고 사지와 피부에는 한 방울도 남지 아니한 것 같았다. 손발이 식고, 눈에서만은 불이 나올 듯하였다. 만일 밝은 데서 본다고 하면 그의 입술은 파랗게 질렸을 것이다. 바짝 마른 입술을 축이려 하여도 입 안에 도무지 침이 없었다.

"흥, 고약한 계집년이!"

하고 건영은 두 주먹을 한번 불끈 쥐었다. 어떻게 이 분함을 참고 순례의 앞에서는 태연하고 평정함을 꾸몄던고?

그 러나 다음 순간에 건영은 순례가 그리움을 깨달았다. 그의 부드러운 음성, 포근포근한 손, 따뜻한 입김, 이런 것을 회억하면 순례를 놓쳐 버린 것이 아까웠다. 그렇게 유순하게, 마치 목자에게 맡기는 양 모양으로 자기에게 전신과 전심을 주던 순례를 아주 놓쳐 버린 것이 아깝기도 하였다. 그때에는 비록 부잣집 딸 은경에게 맘이 쏠린 때문이었지마는 인제는 그 은경도 없지 아니하냐. 그 뒤에도 누구, 누구 돈 있는 집 딸을 삼사 인이나 따라다녔으나 다 놓쳐 버리지를 아니하였느냐. 인제는 친구의 아내로서 혹시 이혼을 할 듯도 싶은 정선을 따라다니지마는 정선에게는 벌써 김갑진이 있지 아니하냐. 차라리 순례나 그냥 가지고 있었더면―---건영은 이런 생각을 하였다.

건 영의 눈에는 오직 돈이 있었다. 아무리 해서라도 돈이 있고 싶었다. 그렇지마는 건영의 재주로는 돈을 모을 가망이 없었고, 또 자기가 여러 해, 아마 여러 십 년을 두고 돈을 모으기에 각고면려할 생각도 끈기도 없었다. 그에게 있는 것은 오직, 그가 호적상으로 독신인 것과, 박사인 것과, 외양이 여자의 맘을 끌게 생긴 것을 밑천으로, 아니 미끼로 재산과 아름다운 아내를 한꺼번에 낚아올리는 것뿐이었다. 이박사가 미국서부터 태평양을 건너올 때에는 그의 일편단심은 돈 있는 미인한테 장가를 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불행히 이 소원은 이뤄지지 못하고 간 데마다 망신만 하고 인제는 좋지 못한 소문―---계집애들 궁둥이를 따라다니는 놈이라는―---이 퍼져서 다시는 따라올 여자는 없었던 판에 오늘은 천만의외에도 순례한테 이렇게 톡톡한 망신을 한 것이다. 이건영 박사의 운수도 인제는 다하였는가 하매 분한 중에 일종의 실망을 느끼고, 다음 순간에는 순례를 다시 제 것을 만들어 볼 욕망을 일으킨 것이다.

'순례는 어리석은(순례의 순진한 성품이 이건영에게는 어리석음으로 보였다) 계집애니까 내가 다시 귀여 주기만 하면 따라오리라.'

이렇게 생각하매 건영은 적이 맘이 편안해져서 그 바짝 마른 파랗게 질린 입술에는 웃음조차 떠돌았다.

'어떻게 할까. 무슨 물건을 사가지고 순례의 집에를 찾아가 볼까. 찾아가서 과거에 잘못한 것을 말하고 정식으로 혼인을 청할까. 그러기만 하면 대번에 되기는 되겠지마는.'

건영은 이렇게 생각하였다.

'그러나 순례의 집에는 돈이 없다는데, 순례에게 장가를 들기로니 무엇으로 양옥을 짓고 피아노를 사나. 그것도 없는 살림도 살림인가. 이것이 나의 일생의 이상이 아닌가.

그렇고말고. 순례와 혼인을 해버리면 어느 부잣집에서 나를 사위를 삼으려 하더라도 못 삼을 것이 아닌가. 그리 되면, 나는 영영 일생의 이상을 버리는 것이 아닌가.

그 나 그뿐인가. 인제는 나는 직업도 잃어버리고, 무엇으로 생활을 하나. 다시 한선생한테 가서 과거의 잘못을 회개하고 직업을 주선해 달랄까. 순례와 혼인을 하고, 한선생께 회개를 하면 어디 취직이 될 듯도 싶지마는. 비록 본래 소원인 여자전문학교의 선생은 못 된다 하더라도 남자학교라도…… 그것이 바른 길이 아닐까. 이 꼴을 하고 돌아다니면 장차는 무엇이 될 것인고?'

하고 건영은 어디를 어떻게 걷는지도 모르고 망연히 발을 옮겼다. 눈을 들어 보니 순례는 어디로 스러지고 말았다.

'순례의 맘이나 돌리기야.'

하고 쉽게 생각하니 맘이 약간 만족하였다.

'정선이나 찾아가 보고.'

하고 이박사는 발을 돌려 다시 정선의 집으로 향하였다.

'순 례가 나오는 것을 보니 정선이가 집에 있는 듯도 하다. 갑진이만 아니 와 있으면, 정선의 아름다운 모양을 실컷 즐기기로니 순례와 혼인하는 데 무슨 방해가 되랴. 내일은 순례 집에를 가기로 하고 오늘 밤에는 정선의 집에서 놀자. 만일 정선이가 있고 갑진이만 없으면 공회당 무용구경을 데리고 가보자.'

이러한 분홍빛 생각을 하며 정선의 집 골목으로 걸어들어갔다. 이박사는 정선을 곁에 놓고 벌거벗은 젊은 여자들이 춤을 추는 양을 그려 볼 때에 순례에게 받은 모욕도 다 잊어버렸다. 오직 유쾌하기만 하였다.

"이리 오너라."

하 고 이박사는 정선의 집 대문에 섰다. 전등불빛에 '許崇'이라고 하얀 나무패에 써붙인 문패가 보였다. 그 문패는 아직 때도 묻지 아니하였건마는 이 부부는 벌써 낡아빠져서 틈이 났구나 하였다. 그러나 자기는 계집애들의 입술을 따라서 이 꼴을 하고 돌아다닐 때에 허숭이가 '돈 있는 어여쁜 아내'도 다 내던지고 농촌에 들어가 농민들과 함께 고락을 같이하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그의 히로익한 것이 더욱 숭고해 보이는 대신에 자기의 생활이 너무도 무가치함을 느끼지 아니할 수 없었다.

이 박사는 역사를 배우고 사회학을 배우고 윤리학까지 배우고 성경까지도 배웠다. 무엇이 사람의 일로서 숭고한 것인지 비천한 것인지를 스스로 분별할 지식의 힘이 있을 뿐더러, 청년 남녀로 하여금 그것을 깨닫게 할 만한 능력을 얻기 위하여 논리학과 수사학과 웅변학과 심리학까지도 배웠고 또 문학도 배웠다. 그렇지마는 그의 타고난 이기적이요 향락적인 천성은 이 모든 공부 때문에 그리 큰 영향을 받지 못하였다. 그는 이 모든 값비싼 지식과 수양과 능력을 오직 돈 있는 미인을 후리기에만 이용하였다. 만일 조선이 그에게 돈 있는 미인을 아내로 주기만 하면, 그 담에는 이 능력을, 그가 노 말하는 바와 같이, 조선과 조선 민족을 위하여 쓸는지도 모를 것이다. 그렇다 하면, 진실로 그렇다 하면 조선의 미인 딸 둔 부자는 다 조선의 죄인이다. 이박사로 하여금 위대한 민족적 사업을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그들이니까. 은경을 이박사에게 주지 아니한 한은 선생도 죄인이다.

"누구세요?"

하고 문을 여는 것은 유월이었다.

"시골서 올라오셨니?"

하고 이박사는 허숭을 찾아온 모양을 보이려 하였다.

"영감마님입시오? 안 올라오셨습니다."

하 고 유월이는 터지려는 웃음을 참았다. 그것은 이박사가 올 때마다 그렇게 묻는 까닭도 있거니와, 네시에 다녀가고 아직 경의선 찻시간도 아니 되었는데 어떻게 그 동안에 허숭이가 올라올 수가 있으리라고 빤히 속이 보이는 소리를 하는 것이 우스웠던 것이다.

"거, 원, 어째 안 올까. 아씨는 계시냐."

하고 이박사는 있다는 대답을 기다렸다.

"아씨…… 우리 댁 마님입시오?"

하고 유월이는 이박사의 말을 교정한다. 영감의 부인이 아씨실 리가 있나, 유월이는 괘씸스럽게 생각하였다.

"어디 젊으신 어른을 마님이라고 부르려니까 말이 잘 아니 나오는구나, 미안스러워서."

하 고 유월의 뺨을 만지려 하는 것을 유월이는 뽀로통하고 고개를 돌린다. '이 뻔뻔스럽고 추근추근한 녀석이' 하고 유월이는 속으로 침을 뱉었다. 갑진이, 이박사, 곽의사, 그 밖에도 몇 녀석, 정선을 찾아와서 시시덕거리는 사람들이 모두 개와 같이 미웠다. 유월이는 개를 싫어한다.

"마님 아직 안 들어오셨어요. 늦게나 들어오신다고 전화가 왔던 걸요."

하고 유월이는 이박사가 다시 오지 못할 예방선을 쳤다.

"얘 유월아, 내 돈 주랴."

하고 이건영은 돈지갑을 꺼내었다.

"싫여요. 제가 왜 돈 달랬어요?"

하고 대문 그늘로 몸을 비키며,

"모르시는 양반헌테 제가 왜 돈을 받아요?"

하는 유월이의 소리는 퍽 야멸찼다. 이박사는 오십 전박이 은전 한 푼을 내어서 유월이의 손에 쥐어 주며,

"얘 아씨가, 아니 너이 마님이 누구허고 나가든? 어디로 가신다든?"

하고 겨우 들릴락말락한 음성으로 물었다. 유월이는 이박사가 쥐어 주는 돈을 내어던지지는 아니하였다. 그리고,

'옳지, 어멈도 잿골 서방님에게 이렇게 돈을 받았구면. 그래서 잿골 서방님이라면 사죽을 못 쓰는구면.'

하였다.

"응, 누구허구 나가셨니?"

하고 이박사는 또 한번 물었다.

"저 잿골 서방님허구 나가셨어요. 훈련원 나가셨다가 어디 저녁 잡수시러 가셨어요. 늦게 들어오신다고요."

오십 전 은화의 효과는 당장에 났다. 그러나 그 효과가 정선의 집에 혼자 있게는 못 하였다.

이박사는 낙심하고 돌아섰다. 인제는 어디로 가나. 순례의 집으로 갈까. 정서분의 집이나 찾아갈까.

정 서분은 독자도 기억하실는지 모르거니와 체육 교사다. 뚱뚱하고, 얼굴빛이 푸르고, 목소리가 좀 쉰 여자다. 그는 정선에게도 선생이요, 순례에게도 선생이다. 그리고 이박사를 짝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이박사는 싫어하는 사람이다. 싫어하면서도 자기를 따르는 여자에게 달콤한 말 한마디와 한 번 껴안아 주는 것쯤의 적선을 아낄 이박사는 아니다. 그 때문에 정서분은 행여나 하고 이박사의 사랑을 바라고 있는 것이다. 이박사는 하릴없이 정서분의 집을 찾았다.

정 서분은 이박사를 반가이 맞았다. 그리고 허겁지겁으로 과일을 사오고 차를 준비하였다. 그 정경은 차마 볼 수 없으리만큼 애처로웠다. 돈 없고 인물 없는 정서분, 그리고 나이 많은 정서분에게는 이박사에게 대한 사랑이 첫사랑이었다. 아마 이박사가 그의 사랑을 알아주지 아니한다면 그는 다시 남자를 사랑하지 못할 것이다. 또는 그의 굳은, 그리스도교적 도덕관은 그가 이박사 이외의 다른 남자를 사랑하기를 허치 아니할 것이다.

아 무리 정서분이라도 밤 전기등 밑에 단둘이 마주 앉아서 보면 여성적인 점, 여성적인 아름다움이 없지도 아니하였다. 이박사의 예민한 눈, 여성에게 예민한 눈이 이것을 못 발견했을 리가 없었다. 더구나 정선을 찾아서 실패하고 순례에게 창피를 당하고 근래에 도무지 여성의 부드러운 맛을 못 본 이박사는 '정서분이라도' 하는 가엾은 생각을 아니할 수 없이 되었다.

정서분이 사과를 벗겨 쪼개어서 삼지창에 꿰어,

"잡수세요."

하고 이박사에게 줄 때에, 이박사는 웃으면서 손을 아니 내어밀고 입을 내어밀었다. 정서분은 잠시 주저하였으나 얼른 사과쪽을 이박사의 입에 넣어 주고는 마치 십육칠 세의 어린 처녀 모양으로 수삽하여 고개를 숙여 버렸다.

그 순간에 이박사의 팔은 정서분의 목으로 돌아, 서분의 몸이 이박사의 가슴에 안겼다. 물론 서분은 반항하지 아니하였다. 서분의 숨결은 높고 가슴은 뛰었다. 서분은 지극한 기쁨과 감격에 거의 어린 듯 정신이 몽롱함을 깨달았다.

이 날 서분은 삼십삼 년 만에 처녀를 잃었다. 그는 혼인 예식 없는 남녀의 관계를 죄로는 알았으나, 그러나 서분에게 있어서는 사랑하는 남자―---일생의 남편에게 몸을 허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누구, 누구 말이 많던 여자들 중에서 자기만이 이박사를 자기 것을 만들었다고 기뻐하였다.

"이박사!"

하고 서분은 흐트러진 머리와 매무새로, 가려는 이박사를 붙들고 불렀다.

"이박사! 인제 나는 당신의 아내입니다. 영원히, 부활한 뒤까지도 당신의 아내입니다."

"……"

이박사는 말이 없었다.

정 선의 집 앞에 택시 하나가 와 닿은 것은 밤 새로 한시쯤이었다. 그 자동차 속에서 나온 것은 물을 것도 없이 정선과 갑진이었다. 그들은 오류장에서 목욕을 하고, 저녁을 먹고, 그리고 놀다가 막차도 놓쳐 버리고 자동차를 불러 타고 경인가도를 올리몰아 이때에야 집에 돌아온 것이었다. 두 사람의 입에서는 술 냄새가 나고 걸음걸이조차 확실하지를 못하였다. 갑진은 다시 자동차에 올랐으나 운전수가 보는 것도 꺼리지 아니하고 정선의 목을 껴안고 소리가 나도록 입을 맞추기를 잊지 아니하였다. 갑진은,

"재동으로 가!"

하고 운전수에게 명령을 하고는 눈을 감고 쿠션에 몸을 던지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자동차가 가는 대로 고개를 꺼떡거리다가 미친 사람 모양으로 깔깔 웃었다. 운전수는 깜짝 놀라는 듯이 뒤를 돌아보았다.

"예가 어덴가."

하고 갑진은 운전수에게 물었다.

"안동 네거리요."

하고 운전수는 귀찮은 듯이 대답하였다.

"안동 네거리라―--- 종로로 가!"

하고 갑진은 바깥을 내다보았다.

"재동으로 가자 하셨지요."

하고 운전수는 차의 속력을 줄인다.

"하하하하, 이 좋은 날 집으로 가? 어디로 갈까. 어디 카페로 가자."

차는 섰다.

"어느 카페로 가세요?"

"아따, 어느 카페로나 가! 어디나 우리 정선이 같은 미인 있는 데로. 어여쁘고 살 부드럽고 말 잘 듣는 계집애 있는 데로만 가!"

하고 갑진은 뽐내었다. 네거리 파출소 순사는,

'이놈 웬놈인가.'

하는 듯이 차를 흘겨보며 걸어나왔다. 운전수는 겁이 나서 차머리를 돌려 경복궁 앞을 향하고 달렸다.

"이건, 대관절 어디로 가는 게야?"

하고 갑진은 눈을 떴다.

"어디 가실 데를 말씀을 하셔야지요. 카페라고만 하시니 서울 장안에 카페가 몇인데 그러시오? 어디로든지 가실 데를 말씀하세요."

하는 동안에 차는 도청 앞을 나섰다.

갑진은 눈을 멀뚱멀뚱하며 몽롱한 머리로 생각하였다. 그의 머릿속에는 여러 카페의 여러 계집애들이 떠올랐다. 조선 계집애, 일본 계집애, 이 애, 저 애.

"아리랑으로 가자."

하고 갑진은 길게 트림을 하며,

"조선 계집애 맛은 보았으니까 인제는 일본 계집애로 입가심을 해야지, 어으."

하고 또 트림을 한다. 운전수는 명령대로 차를 몰아 장충단으로 향하였다. 아리랑에는 손님이 거의 다 가고 술취한 사람 두엇, 카페 계집애에 미친 중늙은이 하나가 있을 뿐이었다. 갑진은 이층으로 비틀거리고 올라가며,

"오―이, 아이코쿠―웅."

하고 불렀다.

"마 긴상."

하고 여자들은 갑진을 에워쌌다. 쾌활하고, 말 잘하고, 팁 잘 주고, 그리고 '앗사리'하다기로 이 카페의 웨이트리스간에 이름난 김갑진이다.

"마아, 한지산나노(아, 판사 영감이시어)?"

하고 아이코상이라는 키 작고 토실토실한 계집애가 갑진의 손을 잡아끌었다. 갑진은 얼른 아이코상의 입을 맞추었다.

"이야! 손나 고도 이야(싫여! 그런 짓 싫여)!"

하고 아이코상은 수건으로 입을 씻고 손을 뿌리치고 달아났다. 달아나서 갑진이가 앉을 테이블을 치웠다.

"오이, 위스키이."

하고 소리를 질렀다. 갑진은 위스키를 단숨에 들이켰다.

"마아."

하고 옆에 앉은 계집애들이 놀랐다.

"얘, 위스키 병으로 가져와!"

하 고 갑진 좌우에 앉았는 계집애들의 어깨에 한 팔씩을 걸치고 잘 돌아가지도 아니하는 가락으로 '사케와 나미다카, 다메이키카'라는 일본 속요를 소리껏 불렀다. 다른 애들도 따라서 부른다. 계집애들은 제 어깨너머로 늘어진 갑진의 손을 잡고 갑진이가 몸을 흔드는 대로 함께 끌려 좌우로 흔들었다. 저쪽 병풍 너머서 낯이 동그스름한 열칠팔 세나 되었을 듯한 계집애를 끼고 귀찮게도 조르고 있던 머리 벗어진 중늙은이 손님이 고개를 돌려 병풍 너머로 갑진이 편을 바라본다. 그는 낯이 넓적하고 눈이 떨어져 붙은 싱겁게 생긴 작자였다. 아마 큰 부자나 높은 지위는 없고 어찌어찌하다가 돈푼이나 모은 사람인 듯하였다.

"아, 영감님."

하고 갑진은 물론 일본말로,

"영감님 벗어진 머리에 털이 나고 희끗희끗한 머리가 검어집소사고 축배를 듭니다. 자, 얘들아, 너희들도 들려무나."

하고 위스키 잔을 높이 들었다. 그러나 그 중늙은이는 면괴한 듯이 목을 움츠러뜨렸다. 그리고 그 벗어진 머리만이 원망스러운 듯이 이쪽을 향하였다.

"영감님, 여보 영감님!"

하고 갑진은 술을 흘리면서 불렀다.

"축배를 든다는데 왜 사람 본 자라 모양으로 목을 움츠러뜨리시오?"

"아스세요! 노여십니다."

하고 한 계집애가 갑진의 옆구리를 지르며 귓속을 한다.

"노여기는."

하고 갑진은 술잔을 테이블에 놓으며,

"누가 뭐랬길래 노해. 늙은이가 손녀 같은 계집애를 끼고 앉어서 무엇을 장시간 두고 졸라 대는 것이, 보기에 장히 거북하니까 좀 젊어지라는데 노해?"

하고 아주 엄숙한 어조다.

"어따, 그만두어라. 자 우리끼리나 축배를 들자."

하고 갑진은 또 잔을 쳐든다.

"무슨 축배?"

하고 한 계집애가 잔에 손을 대며,

"영감이 판사 된 축배?"

하고 아양을 떤다.

"판사는……."

하고 갑진은 으으 하고 땅을 내려다보며 트림을 한다.

"그럼, 무엇?"

"검사야, 검사."

하고 갑진은 점점 더 취한 태를 보이며,

"검사가 되어서 너희 같은 계집애들을 모조리 잡아간단 말이다, 하하하하."

하고 귀여운 듯이 몽롱한 눈으로 계집애들을 둘러보다가,

"무섭지?"

하고 무서운 눈을 해보인다.

"조금도 무서울 것 없지. 우리가 무슨 죄 있던가."

하고 한 계집애가 입을 삐쭉한다.

"참, 그래."

하고 다른 애들이 대꾸를 한다.

"너희들이 죄가 없어?"

"어디 무슨 죄요?"

하고 한 애가 대든다.

"너희들의 죄를 들어 보련?"

하고 갑진은 한잔을 죽 들이켜고,

"없는 정도 있는 듯이 사내들을 호려 내고, 우리네 같은 서생의 돈을 빨아먹고, 또 있지, 또 있어. 어, 머리가 벗어진 늙은이 무릎에 앉어서 아양을 떨고, 어, 형법 이천이백이십조에 의하여……."

머리 벗어진 중늙은이는 불쾌한 듯이 일어나서 갑진이 쪽을 한번 흘겨보고 나가 버리고 만다.

이 튿날 아침 아홉시나 되어서 갑진은 신마치 이태리 계집의 집에서 나왔다. 정선에게서 어저께 얻은 돈 오십 원 중에서 지전은 한 장도 아니 남고 은전과 백동전과 동전만이 이 주머니 저 주머니에서 절렁거렸다. 아리랑에서 셈을 얼마를 치르고 계집애들에게 얼마를 주었는지도 기억이 없었다. 이태리 계집에게도 얼마를 주었는지 도무지 기억이 없었다. 머리만 아프고 목만 말랐다. 이태리 계집애 집에서 멀건 홍차 한잔을 얻어먹고 밖에를 나서니 햇볕이 천지에 찼으나 갑진의 맘은 좀 어두웠다.

갑진은 늦은 가을 아침 바람에 으스스한 것을 깨달으면서 누가 볼까 두려워 달음질로 샛골목으로 들어 장춘단 전차 종점으로 갔다.

갑진은 서대문 노리카에(환승표)를 받았다. 정선의 집으로 가려는 것이다.

갑 진이가 정선의 집에 왔을 때에는 정선은 아직 자리에 누워 일지 아니하고 있었다. 한시에 갑진과 작별하고 집에 들어온 정선은 곧 양심의 가책을 당하였다. 정선이가 갑진에게 안겨서 입맞춤을 당하고 나자 곧 대문이 열리고 어멈과 유월이가 뛰어나온 것을 생각하니, 자기가 갑진이와 하던 모든 모양을 다 보았으리라고 생각하매 그들의 낯을 대하는 것이 대단히 부끄러웠다. 만일 술기운이 없었다고 하면 그는 밤 동안에 괴로움으로 죽어 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술김이라,

'그럼 어때, 그랬기로 어때?'

하 고 정선은 스스로 제게 대해서 뽐내었다. 그래서 항의를 제출하는 양심의 입을 틀어막아 버렸다. 또 만일 술김이 아니었다면 남의 아내인 정선이가 오류장에서 갑진에게 몸을 허하지도 아니하였을 것이다. 정선은 한잔 두잔 받아 먹는 술이, 모든 도덕적 속박을 끊어 주는 것이 재미있어서 더욱 한잔 두잔 받아 먹었다. 그래서 술이 양심의 옷을 다 벗겨 버린 뒤에 정선은 남의 사내 앞에서 제 옷을 벗어 버린 것이다.

정 선이 잠이 깨매 술도 깨었다. 술과 잠이 한꺼번에 깬 정선은 열두 방망이로 몰아치는 듯한 뉘우침의 아픔을 당하였다. 하필 이때에 마침 우편이 남편의 편지를 전하였다. 정선은 자리 속에서 유월의 손에 허숭의 편지를 받았다. 겉봉에 씌인,

'尹貞善 氏.'

라는 글씨를 보고 정선은 편지를 이불 위에 내어던지고 두 손으로 눈을 가리었다. 그리고는 몸을 뒤쳐 베개에다가 낯을 대고 울었다. 정선은 혼자 몸부림을 하였다.

유월은 정선의 하는 양을 보고 정선의 옷을 요 밑에 묻어 놓고는 살그머니 나가 버렸다.

마루 끝에 어멈이 가만히 와서 울음 소리를 엿듣다가, 유월이가 나오는 문 소리를 듣고 깜짝 놀라 고양이걸음으로 뒤로 물러서다가 유월이를 향하여 손짓을 하며 부엌으로 간다.

유월이는 어멈을 따라갔다. 부엌에는 벌써 상이 다 보아 있고 찌개만이 화로에서 보글보글 소리를 내며 주인이 일어나기를 기다렸다.

"얘, 왜 우시든?"

하고 어멈이 유월이의 어깨를 손으로 누르며 묻는다.

"모르겄어. 편지 겉봉을 보시더니 두 손으로 낯을 가리고 우시는걸."

하고 유월이는 부뚜막에 놓인 누룽지를 집어먹는다.

"응, 아마 시골서 편지가 온 게지."

하고 다 알았다는 듯이 큰 소리로,

"에그, 찌개가 다 조네."

하고 픽 웃는다. 그리고는 또 고양이걸음으로 부엌문 밖에 나서서 안방으로 귀를 기울이고 엿듣는다.

정선은 얼마를 혼자 몸부림을 하고 발버둥질을 하고 울다가 이불 위에 떨어진 허숭의 편지를 찾아서 들고 일어나 앉았다. 그리고 편지 겉봉을 한번 더 앞뒤로 보았다. 뒤 옆에는,

'夫書(남편은 쓰노라).'

라고 이름이 씌어 있다. 그 지아비부자의 모든 획이 날카로운 칼이 되어서 정선의 온몸을 찌르는 것 같았다.

정선은 그 편지를 떼었다. 거기는 이렇게 써 있다.

사랑하는 내 아내여.

를 허두로 하고 허숭의 습관으로 순한글로,

올라가신 뒤에 도무지 소식 없어 궁금하오. 내가 한 두 편지는 받았을 줄 아오. 나는 정선이 갈 때에 비겨 훨씬 건강해졌소. 요새는 동네 일도 대단히 바쁘오. 동네 여러분이 다 내 말을 잘 믿어 주셔서 이번 추수한 것으로 조그마한 협동조합 하나를 만들었소. 내게 남았던 돈 팔백 원도 전부 이 조합 기금으로 부쳤소. 나는 이 협동조합이 살여울 동네 백성들에게 밥과 옷을 넉넉히 주게만 되면 내가 났던 보람은 하는 것이오.

그러나 일은 이제 겨우 시초요. 시작이 절반이라고도 하지마는 다 잦힌 밥도 입에 넣어야 먹어지는 것이오. 아직 시작할 것도 많고, 할 일도 많고, 또 겪어 내어야만 할 어려운 일도 많소.

그 렇지마는 나의 사랑하는 아내 정선! 정선이 나와 같이 이 일을 한다고 약속해 준 말을 믿고 나는 큰 힘과 큰 기쁨을 얻소. 나는 정선에게 부족한 것이 많은 남편이지마는 정선은 내게 사랑이 많은 아내가 되어 줄 것을 믿소. 정선은 혹 나와 순이와 사이에 무슨 애정관계가 있는 것같이 의심하신 모양이지마는 절대로 그런 일은 없소. 예전에 순을 귀엽게 생각한 일도 있는 것은 사실이나 내 아내는 오직 정선뿐이오. 정선 이외에 아무러한 여자도 나를 사랑하지 못하고 또 내 눈이나 맘이 가지 아니할 것을 믿소. 정선도 그리 믿으시오.

비록 정선이 나보다 먼저 죽는다 하더라도 나는 다시 다른 여자를 사랑하지 아니할 것이오. 내가 만일 정선보다 먼저 죽는다 하더라도 정선은 나밖에 다른 남자를 사랑하지 아니할 것을 나는 믿소. 또 믿으려 하오.

정 선! 이런 생각을 세상은 구식이라고 할는지 모르나 모든 배반과 모든 의리 없는 것을 미워하오. 나는 천하 사람을 다 사랑하고 용서할 수 있지마는 의리를 저버리는 사람을 용서할 수는 없소. 만일 내 아내가 내게 대하여 변심하는 일이 있다 하면 나는 어찌할까. 그러나 만일 내가 남편으로서 아내인 정선을 배반한다 하면, 그런 일이 있거든 정선은 내 심장을 칼로 찌르시오. 나는 거기 합당한 죄를 지은 것이니까.

모 두 부질없는 소리를 하였소. 나는 요새 대단히 정선이 그립소. 마치 새로 연애하는 사람과 같이 맘둘 곳이 없이 정선이 그립소. 왜 편지를 아니 하시오? 요새에 날마다 무엇을 하고 있소? 아마 어서 내게로 오고 싶어서 재산정리를 하기에 바쁜 줄 아오. 너무 애쓰지는 마시오. 아니 팔리거든 그냥 장인께 맡기고 내려오시오. 내가 기다리는 것은 정선의 몸뿐이요, 맘뿐이오.

만일 일주일 안에 정선이 아니 오면 나하고 같이 내려올 수 있소. 내가 우리 동네 사람들 상고사건으로 내월 중순에는 상경하게 되겠소.

이 동네 여러 부인네들이 다 정선을 보고 싶어하오.

부디 몸 조심하고 교제를 삼가시오.

하고는 끝에,

시월 이십팔일 밤, 정선의 숭.

이라고 썼다.

편지를 보는 동안에도 몇 번이나 정선은 손으로 낯을 가리고 엎드렸다. 차마 그 다음에 쓴 글귀를 읽을 수 없는 까닭이었다. 마치 남편이 어젯밤 자기가 한 일을 다 보고 가서 자기를 책망하느라고 쓴 편지인 것 같았다.

편지를 다 보고 나서 정선은 이불 위에 폭 엎드려 버렸다. 그러나 이때에는 정선에게는 뉘우침보다도 무서움이 힘이 있었다.

'내가 만일 정선을 배반하거든 정선은 칼로 내 심장을 찌르시오!'

하는 것을 생각할 때에, 정선의 눈앞에는 시퍼런 칼을 들고 선 숭의 모양이 보인 것이다. 바로 이때다. 이때에 유월이가,

"마님, 잿골 서방님이 오셨어요."

하였다.

"아직 안 일어났다고 그래!"

하고 고개도 들지 아니하고 화를 내어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유월이가 나가기도 전에,

"아직 안 일어났소?"

하고 반말지거리를 하며 영창을 홱 열고 들어왔다.

"들어오지 말아요! 나가요!"

하고 정선은 이불 위에 엎더진 대로 몸을 흔들며 부르짖었다. 갑진은 그런 소리는 들은체만체,

"어, 이건 왜 이러오? 허기는 정선 씨 그 포즈도 어여쁜데. 미인이란 아무렇게 해도 어여쁜 법이야. 아, 코닥을 가지고 올 걸 그랬는 걸. 얘, 유월아, 너는 나가! 왜 거기 버티고 섰어?"

하고 유월을 향하여 눈을 흘긴다.

"나가요! 왜 남이 일어나지도 않었는데 남의 방에를 들어오시오? 어서 나가라면 나가시오!"

하고 정선은 눈물과 흥분으로 어룽어룽한 낯을 번쩍 뒤로 돌려 갑진을 노려보며 물어뜯기라도 할 듯이 화를 낸다.

갑진은 비로소 정선이가 울고 있는 것을 알고 참으로 성낸 것을 알았다. 그래서 의외로다 하는 듯이 잠깐 눈을 둥그렇게 뜨고 정선의 심상치 아니한 양을 바라보고 섰더니,

"하하하하."

하고 갑진은 무슨 크게 우스운 일이나 보는 듯이 껄껄 웃고는,

"오, 알았소. 예수교당에서 그 쑥들이 무에라, 무에라 하는 양심이란 것이 발작했구려. 응, 옳지. 하느님의 딸이 회개의 눈물을 흘리는 판이로구려. 어, 우리 정선 씨 천당 가겠는걸. 허지마는 천당에는 고이라는 것이 없다던걸. 모두 쑥들만 모여서 주여, 주여 하고 정선이 모양으로 물보다도 싱거운 눈물이나 짜고……."

하고 웃음 절반 말 절반으로 지절대는 것을, 정선은,

"무엇이 어찌고 어째요? 그런 말법 어디서 배웠소? 이 악마 같으니!"

하고 몸을 부르르 떤다.

"악마? 거 좋은 말이오. 나는 원래 악마니까, 허지만 남편이 있는 여편네가 서방질하는 것도 천사라는 쑥들은 아니 하던 모양인데."

하고 또 한번 갑진은 껄껄 웃는다.

유월이는 갑진이가 전에 없이 마님에게 버릇없이 구는 것을 보고, 또 정선이가 분해서 치가 떨리는 것을 보고,

"그게 다 무슨 말씀이셔요?"

하 고 쇳소리 같은 소리를 빽 지르며 갑진을 흘겨본다. 유월이는 평소에 갑진이가 정선을 엿보고 추근추근하게 다니는 것이 절치부심하게 미웠었고, 더구나 유월이가 가장 미워하는 어멈이 갑진의 편이 되는 것이 미웠던 판이라 갑진을 칼로 찔러 죽이고도 싶었다.

"요년! 요 발길년 같으니."

하고 갑진은 주먹을 들어 유월을 위협하고,

"흥, 악마. 하룻밤 서방도 서방이거든 날더러 악마."

하고 빈정대기를 계속한다.

"아이구, 저런 악마가―--- 저런 사람 잡아먹을 악마가."

하고 정선은 말이 꺽꺽 막히며,

"저 악마가 나를 유혹해서 몸을 버려 놓고는…… 아니 저 악마가…… 에끼…… 저 악마가."

하고 기색하려 한다.

"유혹? 아니 누가 누구를 유혹했단 말야?"

하고 갑진은 정선의 곁으로 한 걸음 대들며,

"제가 살려주 하고 매달렸지, 누가 강○을 했단 말야, 웬 말야?"

하는 것을, 유월이가 갑진의 뒤로 가서 그 외투 자락을 잡아 끌며 우는 소리로,

"나가세요! 아이, 큰일나겠네, 나가세요!"

하고 매어달린다.

"요년은 왜 요 모양이야."

하고 갑진은 유월의 머리 꽁지를 끌어 내어두른다. 유월이는 방바닥에 쓰러진다.

"아이구, 저 뻔뻔한 악마가."

하고 정선은 입으로 거품을 뿜으며,

"당 신이 날더러 야구구경 가자고 안 했소? 구경하고 집으로 오려니까 저녁 먹으러 가자고 안 했소? 저녁 먹고는 집으로 오려니까 택시로 바래다주마고 안 했소? 택시를 태워 놓고는 한강까지 드라이브나 하자고 안 했소? 한강 갔다가, 내가 늦었으니 가얀다니까 좀더 가자고 안 했소? 요렁조렁 오리꼴까지 끌고 가서는 이왕 왔으니 오류장 구경이나 하고 가자고 안 했소? 내가 거기서 얼마나 싫다고 했소? 그러니까 한 시간만 있으면 인천서 오는 막차가 있으니, 자동차는 추우니 자동차는 돌려보내고 기차로 오자고 안 했소? 그리고는 막차 시간이 되었으니 정거장으로 내가 나가자고 암만 졸라도 듣지 아니하고 나를 꼭 붙들고 막차를 놓쳐 버리게 아니 했소? 그리고는 내가 앙탈을 하니까, 그러면 자동차를 부른다고 안 했소? 자동차 오는 동안에 자동차에서는 추울 테니 위스키를 몇 잔 먹자고 안 했소? 그리구는 내가 안 먹는다는 것을 억지로 먹여 놓고는, 나를 취하게 해놓고는…… 그리고는 인제 와서는 나를 유혹하지 아니했다고. 응 그러면 내가……."

하고 정선은 '아으 아으' 하기만 하고 기색하여 쓰러진다. 갑진은 지금까지 부리던 호기도 어디 갔느냐 하는 듯이,

"유월아, 냉수 떠와, 냉수."

하 고 정선을 일으켜 안는다. 그리고 숨이 막히는 정선의 입에 제 입을 대어 거품 나온 것을 핥아먹고, 뺨을 비비고, 만지고, 젖을 만지고, 발을 만지고, 마치 귀여운 어린애나 만지는 듯이 갖은 짓을 다 한다. 그러다가 유월이와 어멈과 기타 하인들이 들어온 때에야 그 짓을 그친다.

이윽고 정선이 다시 정신을 차린 때에 정선은 주먹으로 갑진의 안경 쓴 상판을 갈기고 몸을 뿌리쳐 갑진의 품에서 나왔다. 갑진의 안경이 깨어지며, 그 깨어진 유릿조각에 갑진의 양미간에 상채기가 나서 피가 조금 흐른다.

"나가! 나가!"

정선은 두 팔에 경련을 일으키며,

"나가아아!"

하고 책장 위의 책을 집어 갑진을 향하여 던졌다. 갑진은 몸을 비켜서 피하고, 그 책은 쌍창을 뚫고 마루로 나가자빠졌다.

"오, 가마."

하고 갑진은 모자를 들고 일어나며,

"허지마는, 네 뱃속에 내 자식이 들었는지 몰라. 그 애가 나거든 날 찾어라. 그 전에라도 보고 싶거든 만나 주지."

하고 나와 버린다.

갑진이가 대문 소리를 요란히 내고 나가 버린 뒤에 정선은 정신없이 쓰러져 버리고 말았다. 우는 유월이는 정선의 머리에 베개를 베이고 이불로 정선을 덮어 주었다. 정선은 그것도 모르는 듯하였다.

정선이 일어나 세수를 하고 밥 한술을 뜬 것은 오후 네시가 넘어서였다.

정 선은 그래도 밖에 나가는 단장을 할 정신은 있었다. 그것은 여자의 본능으로였다. 머리도 빗고 분도 발랐다. 그리고 옷도 갈아입었다. 그가 양복장을 열고 갈아입을 옷을 고르려 할 때에 어젯밤에 입었던 자주 저고리와 고동색 치마를 보고는 그것을 찢어 버리고 싶었다. 정선은 양복을 입을까 하다가 그것도 귀찮다고 해서 그만두고 검정 세루 치마에 흰 저고리, 눈에 아니 띄는 옷을 입고, 게다가 검정 나단 두루마기를 꺼내 입었다. 옷을 입고 체경에 비추어 볼 적에 자기의 얼굴의 아름다움이나 의복의 아름다움이나 모두 허사요, 귀찮은 것만 같이 생각되었다.

정선은 이 모양을 하고 집에서 나와서 정동 성공회 앞을 걸어서 다방골 현○○이라는 여의의 병원으로 향하였다.

성 공회 교당 꼭대기에 선 십자가가 석양의 하늘에 파스텔로 그린 그림 모양으로 정선의 눈에 보였다. 정선은 성공회 속에 사는 검은 장삼 입고 흰 고깔 쓴 수녀들을 생각하였다. 그 싸늘하고 적막한 생활로 일생을 보내는 수녀들의 심정이 좀 알아지는 것같이도 생각히었다. 그 수녀들도 다 자기와 같은 과거를 가진 사람들이 아닌가 하였다.

'聖公會'라고 흰 글자로 크게 쓴 문패, 문 안으로 엿보이는 조용한 마당과 집들, 모두 죽음의 고요함을 연상시키는 것 같았다. 저러한 속에서 찬미와 기도와 회개의 눈물로 일생을 보내는 수녀들이 그립기도 하여 들어가 보고도 싶었다. 예전 같으면 수녀원 같은 것은 거들떠보지도 않던 것, '피이' 하고 비웃던 것, 그런 것이 자기의 흥미를 끌고 관심을 끄는 것을 정선은 스스로 놀라지 아니할 수 없었다.

"죄인에게 종교."

라는 어디서 들은 구절이 가슴을 찌른다.

"아이, 정선이로고나."

하고 힘없이 걸어가는 정선의 어깨를 치는 사람이 있었다.

"응."

하고 정선은 돌아섰다. 그들은 자기와 동반 동창인 석○○, 여○○ 두

여자였다.

"아머니나."

하고 석이 정선의 차림차림을 보고 놀라는 듯이,

"너 이 꼴을 하고 어딜 가니? 꼭 자다가 쫓겨난 며느리 같고나. 어디 남의 집 살러 가는 침모도 같고. 글쎄, 부자댁 마님이 이게 웬일이냐."

하고 혼자 웃어 댔다. 정선이도 부득이하여 빙그레 웃기는 하면서도 석의 농담엣말이 모두 맘에 찔렸다.

"어딜 가우?"

하고 여도 반가운 듯이 손을 잡으며 물었다. 그는 방글방글 웃는, 수줍어하는 여자다. 정선은 힘없이,

"나, 저, 다방골."

하고 아무리 불편한 빛을 안 보이려 하여도 정신이 땅 밑으로만 가라앉았다.

"너 어디 아프냐?"

하고 석이 정선을 껴안으면서 걱정스럽게 묻는다.

"아니."

하고 정선은 상긋 웃었다.

"허선생은 언제나 오시오?"

하 고 여가 묻는다. 여와 석은 바로 전에 정선의 이야기를 하던 끝이었다. 정선이가 허숭과 이혼을 한다는 둥 하였다는 둥, 갑진이와 관계가 있다는 둥, 같이 산다는 둥, 동무들간에는 이야깃거리가 되어 있는 까닭이었다. 그런 이야기를 듣던 끝에 정선의 모양이 수상한 것을 보니 두 동무는 의심과 호기심을 일으키게 된 것이었다.

정선은 여의 묻는 말에,

"모르지요."

하고 웃음 섞어 대답할 뿐이었다.

"얘, 저어."

하고 석은 농담도 다 제쳐 놓고 말을 내기가 어려운 듯이,

"저 어, 세상에는 이야기가 많더라. 네가 이혼을 한다느니, 또 머 별말 다 많지. 우리야 그런 소리를 다 믿겠니마는, 그야 안 믿지, 안 믿기는 하지만두, 저어, 그이 말이다, 그 저 김갑진인가 한 이하고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더라. 말없는 것만은 못하거든. 그 말이 허선생 귀에라도 들어가면 안 됐지."

하고 정선의 눈치를 보았다.

정선은 석, 여 두 동무가 자기의 비밀을 죄다 알고 못 견디게 구는 것만 같았다. 그 둘의 눈이 무섭고 입이 무서웠다. 정선이 두 동무의,

"우리 저녁에 가마."

하는 작별의 말을 듣고 부청 앞을 향하고 걸어갈 때에는 그 두 동무가 뒤에서 자기를 향하여 손가락질하고 비웃는 것만 같았다. 그래 힐끗 뒤를 돌아볼 때에는 두 동무의 모양은 벌써 어디론지 사라지고 말았다.

정 선은 감시하는 눈을 벗어난 죄인 모양으로 걸음을 빨리 걸었다. 정선은 아직 혼인 아니 한 두 처녀의 순결함, 자유로움이 부러웠다. 자기는 거기 비기면 마치 때묻은 옷, 부스럼 난 몸, 더러운 오라로 얽힌 꼴같이 생각히었다. 내가 세상에 제일 잘나고 제일 행복된 사람이라고 자긍하던 것이 어제 같건마는.

다 방골 천변으로 들어서 소광교를 향하고 천변으로 내려가노라면 조선집을 반 양제로 꾸민 집이 있고, 거기는 '婦人科, 小兒科'를 두 줄로 갈라 쓰고, 그 밑에 큰 글자로 '○○醫院'이라고 쓰고, 또 곁에는 '院長 ○○醫學士 玄○○'라고 좀 작은 글자로 쓴 현판이 걸렸다. 그 현판의 중간 이하의 물이 난 것이 이 병원이 선 지 여러 해 된 것을 보였다.

대문 안에는 인력거 하나가 서 있었다.

정선은 사랑채인 병원으로 아니 들어가고, 안대문으로 따라오는 사람이나 피하려는 듯이 빠른 걸음으로 들어갔다.

"언니!"

하고 정선은 안마루 유리분합 앞에서 불렀다.

마당도 넓고 깨끗도 하고 꽤 큰 집이건마는 식구가 없어서 조용하였다. 정선의 소리에 건넌방 문이 열리며 열댓 살 된 계집애가 내다보고,

"아이 오셔겝쇼? 선생님 지금 병자 보십니다."

하고 분합을 열고 맞아 준다. 여의 현○○는 하인들로 하여금 아씨니 마님이니 하는 말을 못 쓰게 한다. 그러므로 하인들은 현을 선생님이라고 부른다.

정선이 구두를 끄르고 올라오는 동안에, 계집애는 사랑으로 통하는 일각문으로 댕기 꼬리를 나풀거리며 쪼르르 뛰어나간다. 정선은 마루에 놓인 등교의에 몸을 던졌다.

"아이, 그 말을 어떻게 묻나?"

하고 집에서 몇 시간이나 두고 한 생각을 또 되풀이한다. 정선이가 현의사에게 물으려는 것이 무엇인가.

계집애가 나간 지 얼마 되지 아니하여 현이 들어온다. 현은 머리를 물결이 지게 지지고 자줏빛 좀 짙은 듯한 양복을 입었다. 얼른 보기에는 이십이 될락말락한 쳐녀 같지마는 가까이 보면 얼굴에 삼십 넘은 빛이 보였다. 현은,

"어 정선 군 왔나?"

하고 사내가 사내에게 대해 하는 어조를 흉내낸다. 현에게는 이런 버릇이 있었다.

"하우 두 유 두?"

하고 현은 역시 사내 모양으로 정선의 손을 잡아 흔들고, 그리고는 남자가 제 애인에게나 하는 모양으로 정선을 한번 껴안고, 그 이마에 키스를 하고, 그리고는 담요를 덮어 놓고 눕는 교의에 턱 드러누워,

"복아, 담배 가져온!"

하고 명령한다. 그 어조는 여자다.

"그래."

하고 현은 청지연 한 대를 피워 맛나는 듯이 연기를 내어뿜으며,

"에니 뉴스(무슨 새 소식 있나)? 그 어른 아직 안 올라오셨나. 대관절 우리 정선이같이 꽃 같은 마누라를 두고서 무얼 하고 안 올까. 나 같으면 산보를 나가도 꼭 데리고 다니겠네."

하고 뚫어지게, 귀여운 듯이 정선을 바라보며, 스며드는 연기를 피하느라고 눈을 한쪽씩 감았다 떴다 하며,

"참, 내 동생이 예뻐. 언제 보아도 예쁘지마는 오늘은 특별히 더 예뻐. 무슨 좋은 일이 있었나 봐. 네 남편 올라오셨구나, 그렇지?"

하고 담배 연기를 일부러 정선에게로 불어 보낸다. 정선은 코에 그 부드러운 향기가 들어오는 것이 싫지 아니하였다.

"나도 담배나 한 대 먹을까."

하고 정선은 파란 레테르로 싼 동그란 드리캐슬(청지연) 통을 물끄러미 보고 앉았다. '좋은 일이 있었느냐, 남편이 왔느냐' 하는 현의 말에 가슴이 뜨끔하였다. 현도 내 속의 비밀을 들여다보는가 하여 무서웠다.

그러나 정선은 얼른 대답하였다.

"응, 그이가 왔다 갔어."

하고 정선은 빙그레 웃었다. 그리고 수났다 하는 생각과, 아아 거짓말쟁이 하는 생각이 풀숲에서 나오는 양두사 모양으로 일시에 고개를 들었다.

"왔다 가셨어?"

하고 현은 놀라는 표정을 하며,

"아 그래, 나도 한번 안 보고 갔어? 오, 나헌테 네 남편 뺏길까 봐서 네가 나를 따돌리는구나."

하고 깔깔 웃더니,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내가 네 남편헌테 물어 볼 말이 있었는데. 다른 변호사헌테는 가기 싫고."

하고 유감이라는 듯이 고개를 살레살레 흔든다.

"또 온대."

하고 정선은,

"고등법원에 무슨 소송사건이 있다나 해서 또 수이 온답데다. 그때도 늦지 않거든, 그때에 물어 보시구려."

하고 아침에 받은 남편의 편지, 그것을 읽을 때 광경 등등을 생각하고 휘유 한숨을 쉬었다.

현 은 무엇을 생각하는지 가만히 눈을 감고 있다가, 정선의 한숨 소리에 눈을 번쩍 떠서 그 맑은 눈으로 정선의 고부슴히 숙인 낯을 힐끗 본다. 그리고 두어 번 눈을 감았다 떴다 한다. 정선의 한숨과, 낯빛과, 자세와, 이 모든 낱낱의 재료에서 무엇을 귀납하려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혼자 다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끄덕하고는 담배 한 모금을 길게 빨아들이고 식지 끝을 들어서 궐련에 생긴 재를 톡톡 떨어버린다. 하얀 에나멜 재떨이에 재가 떨어져 흩어진다. 현은 마치 여름 하늘이 금시에 소낙비 구름에 흐리는 듯이 멜랑콜리하게 변한다.

두 사람 새에는 말이 없고 현이 빨기를 잊어버린 궐련 연기만이 여러 가지 파란 모형을 그리면서 올라서 스러진다.

복이가 쟁반에 김나는 차 두 잔을 들고 들어온다. 빨그레한 홍차다. 쟁반 위에는 모사탕 그릇과 크림 그릇과 은 찻숟가락이 놓였다. 순 서양식 차 제구다. 현은 벌떡 일어나면서 삼분지 일이나 남은 궐련을 재떨이에 비벼서 꺼버리고,

"정선이, 자 차나 먹어."

하고 자기가 먼저 자기 잔에 사탕과 크림을 타서 저어서 한 입을 마신다.

"정선이 무슨 걱정이 생겼어?"

하고 현은 한 팔을 테이블 위에 세워서 턱을 괴고 물끄러미 정선을 쳐다본다. 그러나 그 눈은 아까 보던 맑은 눈이 아니라 슬픔이 찬, 젖은 듯한 눈이었다.

"아니!"

하 고 정선은 분명히 부인하고, 그 부인한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상긋 웃었다. 현은 정선의 부정을 믿지는 아니하면서도 남의 속을 억지로 알아내려고는 아니 하였다. 다만 정선의 가슴에 근심과 슬픔의 새로운 그림자가 있는 것만은 아니 볼 수 없었다.

"언니이."

하고 정선은 교의를 현의 옆으로 바싹 잡아당기고,

"언니, 내가 애를 낳기가 싫은데, 어저께 남편이 다녀갔으니 어떡하면 애를 안 배게 할 수가 있을까."

하고 주홍빛이 되도록 낯을 붉혔다.

"아 하하하."

하고 현은 사내 너털웃음을 웃었다. 정선은 더욱 부끄러워서 현의 다리를 꼬집으며,

"응, 왜 웃어."

하고 항의하는 어리광을 부렸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다 정선의 맘을 폭폭 찌르는 듯하였다.

"아야, 아야."

하고 현은 여전히 웃으며,

"네 말에 웃는 것이 아니라, 오늘 왔던 환자 생각이 나서 웃는 거야. 네 말을 들으니까 꼭 그 사람 생각이 나는구나, 아하하 허허."

하고 유쾌하게 웃는다. 현에게서는 멜랑콜리의 구름이 걷혀 버렸다.

"무슨 환자야? 응 어떤 환잔데 그렇게 웃으시우?"

하고 정선이 역시 멋없이 따라 웃는다.

"내 말 들어 봐라."

하고 현이,

"바루 아까 어떤 젊은 병자 하나가 왔단 말이다."

"나 올 그때에?"

"응, 그게 그 사람인데, 인물도 잘생겼어요. 살갗이 희고, 몸이 좀 육감적이지마는. 허기야 사내들의 맘에 들게 생겼길래 문제가 일어날 것이지마는. 그래 무슨 병이오 하니까 꼭 네 병과 같은 병이거든. 글쎄, 그렇게 신통방통한 일이 어디 있니? 내 웃어."

정선은 외면한다.

"아, 그래 어찌 된 일이냐고 물었지."

하고 현은 말을 잇는다.

"처음에는 무에라고 부득요령한 소리를 주워 댄단 말야. 시도로모도로(일본말로 어름어름이라는 뜻)지. 그렇지만 내게 걸려서야 제가 배기나. 그만 울고 실토를 해버린단 말이다."

하고 침을 한번 삼키고,

"어 떤 교사의 아낸데 남편이 한 달 전에 어느 시골을 갔대. 그런데 어떤 남자의 유혹으로―---저는 강제라더라마는 무에 그럴라구―---어쨌든 어젯밤에 훼절을 했다거든. 그러니 애기가 들었으면 어쩌느냐 말야, 제발 날더러 애기를 아니 배게 해달라는구면. 그래 밉살스런 양해서는 '여보, 남편 있는 이가 한 달 동안을 못 참아서 남의 사내허구 애밸 짓을 해놓고는 누구더러 애기를 아니 배게 해달라오' 하고 싶었지마는, 거기는 또 의사의 도덕이 있단 말이다. 도적놈이거나 서방질한 년이거나 그것은 물을 것이 없단 말야, 내 원."

하고 현은 남은 차를 마신다.

"그래서? 언니는 무에라고 했소?"

하고 정선은 중요한 점을 아니 놓치려고 물었다.

"그래서?"

하고 현은 담배를 새로 붙이며,

"그거 아니 배지게 할 수 없습니다, 해놓고는 하도 가엾길래, 오늘로 남편헌테로 가시구려 했지, 하하하하. 내가 죄지, 잘못했지?"

하고 또 웃는다.

"그래 어떡허셨소?"

하고 정선은 그 여자가 어떠한 치료를 받았는가가 알고 싶었다.

"그랬더니 말야."

하고 현의사는,

"글 쎄, 그 남편이 폐병으로 어느 요양원에를 가 있다는구나. 폐병으로 요양원 가 있는 남편을 따라가기로니 같이 잘 수가 있느냐 말이지. 글쎄, 정선아, 이런 딱한 일이 어디 있니? 어떻게 우순지. 그러니까 그도 못 한단 말이지. 그러면 어쩌면 좋으냐고 그러길래, 글쎄, 제일 확실하려면 자궁을 긁어 내거나 떼어 내는 수밖에 없다고 그랬지. 벌써 이십 시간이나 지났으니 인제는 벌써 정충이 자궁 벽에다가 뿌리를 박고 어머니 피를 빨아먹으면서 분열하기를 시작했으리라, 벌써 그 정충은 남의 것이 아니라, 당신의 아들이나 딸로 인연이 맺혔다고. 이제 그것을 떼어 버리는 것은 자식을 죽이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의사법에도 어머니의 생명이 위태한 때에만 한하여서 의사가 유산 수술을 하는 것을 허한다고. 그런데 당신은 건강한 사람이니까 유산 수술을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그러니깐 이러겠지. 그렇지만 만일 아이가 나온다 하면 남편의 꼴은 무엇이 되고 자기 꼴은 무엇이 되느냐고, 그리고는 어떻게 해서라도 아이를 떼어 달라고 운단 말야, 눈물을 흘리고. 글쎄, 정선아, 나도 그런 경우를 당하면 그리 될는지 모르지마는 어떻게 제 몸에 붙은 생명을 뗄 생각이 나니? 그렇거든 서방질을 말 게지. 그렇게도 서방이 없으면 못 사니? 난 그까짓 사내 생각 안 나더구나. 또 서방질을 하면 책임질 생각을 하고 하든지. 그게 무에야, 해놓고는 애꿎은 어린애만 떼러 들어. 망할년들 같으니. 안 그러냐, 정선아."

하고 현의사는 혼자 좋아한다.

정선은 현의 말을 차마 더 들을 수가 없었다. 말 마디마디가 모두 자기를 두고 하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곧 이 집에서 나가고 싶었지마는 그러기도 안 되었고, 화제를 돌리려 하여,

"언니는 그래, 남자란 영 싫소?"

하고 웃었다.

"그럼, 싫지 않어?"

하고 현은 반농담으로,

"이렇게 나처럼 혼자 살면 참 자유롭다. 난 그 시집간 동무들 하나도 행복되다는 사람은 없더라. 정선이 너는 안 그러냐. 그까짓 사내들 냄새만 피우고……."

하고 당장 불쾌한 냄새나 맡는 듯이 낯을 찡긴다. 찡길 때에 현의 태도는 더 어여뻤다.

"냄새? 무슨 냄새?"

하고 정선은 웃었다.

"입 구린내, 발 고린내, 머리 때내, 맨 냄새지. 그리고 되지못하게 아니꼬운 내, 왜 넌 사내 냄새 없든?"

하고 현도 웃는다.

정선은 갑진의 겨드랑 냄새를 연상하였다. 그러나 정선의 기억에 그 냄새는 도리어 흥분을 시키는 듯한 쾌미가 있었다. 허숭도 생각하였다. 허숭은 파, 마늘을 절대로 아니 먹어서 그런지, 입에서도 몸에서도 냄새가 나지 아니하였다.

"언니두, 언니는 아마 사내 싫어하는 병이 있나 보구려. 어쩌면 언니는 도무지 혼인할 생각을 아니 하시우? 도무지 남자 교제를 한단 말조차 없으니. 그리고 적막하지 않으우?"

하 고 정선은 동정하는 듯이 물었다. 정선은 현의 과거를 생각한 것이었다. 현은 그렇게 얌전하게 생기고, 또 모양을 내기로 유명하고, 또 재산 있는 처녀로 유명하면서도 도무지 남녀 문제에 관하여 한 번도 남의 입에 오른 일이 없는 것을 생각한 것이었다.

"그야 적막한 때도 있지. 나도 여자 아니냐. 허지만 쓸데없이 이사내 저사내 교제나 하면 남의 이야깃거리나 되지 무엇 하니. 또 혼인을 하자니 맘에 맞는 남편도 없고. 글쎄 있다면 한 사람쯤 있을까."

하고 의미 있게 웃는다.

"그게 누구요? 언니, 그게 누구요?"

하고 정선은 현에게 졸랐다.

"그게?"

하고 현은 장히 말하기 어려운 듯이 한참이나 정선의 애를 먹이다가,

"정말 일러 주랴."

하고 현은 한 손으로 테이블전을 턱턱 치면서,

"그래도 놀라선 안 돼, 성내선 더구나 안 되고……."

"그래, 아이구, 그만 애먹이고."

하고 정선은 지금까지의 불쾌한 무거운 짐에서 벗어난 듯한 가벼움을 느끼면서 짜증내는 양을 보였다.

"가만있어. 그렇게 쉽사리 비밀을 알으켜 줄 줄 알구? 안 되지, 흥."

하고 현은 벌떡 일어나서 안방으로 들어가더니 함 하나를 들고 나온다. 그 함을 정선의 앞에 놓으며,

"자, 이걸 좀 보아. 그리구 그 중에서 누가 나를 가장 사랑하는가, 또 누가 제일 내 맘에 드는가 알으켜 내어."

하고 뚜껑을 열어제친다.

정선은 호기심 있는 눈으로 그 속을 들여다보았다. 거기는 수없어 보이는 편지들이 들어 있었다. 양봉투, 조선 봉투, 철필로 쓴 것, 먹으로 쓴 것, 잘 쓴 것, 못 쓴 것, 흘려 쓴 것, 해자로 쓴 것 등 가지각색이었다.

그 글씨가 가지각색으로 다른 것을 보아, 이것들이 다 여러 사람에게서 온 것을 알 것이다.

"아머니나."

하고 정선은 무서운 것이나 보는 듯이 눈을 크게 떴다.

"이게 다 웬 편지요? 다 언니헌테 온 러브 레터요?"

"그 렇다네. 그것만 흥, 같은 사람헌테서 온 여러 장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만 하나씩 골라서 표본으로 모아 둔 것이란 말야. 처음에는 오는 대로 뒤지도 하고 불쏘시개도 했지마는, 차차 생각해 보니깐 표본만은 모아 두는 것이 후일에 참고될 것도 있을 듯하단 말이지. 또 재미도 있고. 그래서 작년부터 이렇게 모으기를 시작한 것이란 말야. 내가 이렇게 받았으니깐 정선이도 퍽 많이 받았을 테지. 나보다 어여쁘고 젊고 부자요, 귀한 집 따님이니깐 오죽 할라고."

"아니야, 언니. 나도 더러 받기는 했지마는 모두 합해야 스무남은 장 될까. 난 그리 많지 않아요, 언니. 언니가 미인이지 내가 머 미인이오?"

"암 그렇지. 정선이야 미인인가…… 그런데, 정선아, 너 교제 좀 삼가라. 이박사랑, 김남작의 아들이랑 너무 자주 너의 집에 댕긴다고 말들 하더라. 무슨 일이 있을 리야 없겠지마는 그래도 네 남편한테 그런 말이 굴러 들어가면 재미가 없거든. 또 젊은 여자가, 그도 처녀도 아니요 남의 아내가 왜 남의 시비 들을 남자 교제를 하느냐 말이다. 남자들이 너를 따라올 때에야 네 지식을 따라오겠니? 인격을 따라오겠니? 세력을 따라오겠니? 입으로는 무슨 꿀 바른 소리를 할는지 모르지마는, 결국은 네 자색을 따라오는 것이거든. 나도 그렇지, 이 작자들이 내게 반해서 이런 편지를 하고, 선물을 하고, 별짓을 다 하지마는 그 속은 내 몸을 한번 가지고 놀아 보자는 것이지. 그 중에는 내가 부모도 없고 형제도 없고 홀몸이니깐 이 집간이나 있는 것을 탐내는 놈도 있을 것이고. 그것을 몰라, 빤히 다 알고 있지. 그리고 속아 미쳤나 왜."

하고 픽 비웃는다.

"그럼."

하고 정선은 현의 말에 부득이한 찬성의 뜻을 아니 표할 수 없었다.

"요새 조선 사내들은 모두 계집 후릴 생각밖에는 다른 생각은 없나 보더라. 그것이 요샛말로 모던인지도 모르지. 자 이것 보아요."

하고 현은 편지들은 테이블 위에 쏟아 놓고 찾아내기 쉽도록 골패 젓듯 뒤저어서 테이블의 면적이 허하는 한에서 널따랗게 벌여 놓고, 그 중에서 옥색 양봉투에 영문으로 겉봉을 쓴 편지 하나를 골라서,

"자, 이거 뉘 글씬지 알어?"

하고 정선의 눈앞에 든다.

"응, 그거 이박사 글씨 같구려."

하고 정선도 놀란다. 정선도 꼭 이런 봉투에, 이런 글씨의 편지를 가끔 받는 까닭이다.

"올라잇."

하고 현은 그 봉투 속에 있는 편지를 꺼내어서 읽는다.

"오 나의 존경하고 사랑하는 닥터 미스 현이시어!

전 에 드린 수차 편지에 한 번도 답장을 받지 못한 것을 조금도 원망치 아니하옵니다. 그것은 이유가 없지 아니하오니, 대개 첫째는 소생의 전심령을 다 바치는 지극한 사랑은 미스 현에게 향하여 사랑 이외의 아무러한 감정도 일어나지 못하게 함이옵고, 둘째는 미스 현께서 아직 소생의 인격과 성의를 바로 이해하지 못하심입니다.

세 상에는 소생에 관하와 여러 가지 풍설이 있사오나 그것은 전연 무근지설이오며, 소생의 명예를 해하려고 시기하는 자들이 조작한 것입니다. 소생은 지금까지에 여성 친구를 여러 사람 가진 일은 있사오나 어떤 여성에 대하여 사랑을 바친 것은, 오 하느님이시어, 오직 미스 현 한 분뿐이오며, 과거와 현재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미래와 영원에도……."

여기까지 읽다가 현은,

"자, 이 작자 하는 소리 보아요. 다른 여자는 다 친구요, 애인만은 나 하나뿐이라나, 허허. 아마 이런 소리는 누구에게나 했을 소린 줄을 내가 모르는 줄 알고. 순례, 서분이헌테도 이 소리는 했을 게다. 네게는 안 했든. 허기는 이 작자만은 아니야. 여기 있는 편지들을 보면 대개는 내게 대한 것이 첫사랑이라지. 사랑에 거짓말을 하는 놈들이니 다른 일에야 더 말할 것 있나. 그러니깐 나는 이 작자들을 안 믿는단 말야. 누구누구 하는 놈들이 다 거짓에 껍데기 씌운 놈들이거든 셀피시하고. 대체 별소리가 다 많아요. 저는 아직 정남이라는 둥, 상처를 했다는 둥, 가문이 양반이라는 둥 귀여운 소리를 하는 애숭이도 있고, 어떤 것은 사뭇 살려 달라고 애걸하는 작자도 있고, 또 어떤 작자는 내가 혼자 사는 것이 가엾으니 자기가 나를 보호하고 위로하는 사람이 되마 하는 자선가도 있고, 대체 없는 소리가 없지. 또 이것 하나 보련?"

하고 현은 기름한 흰 봉투에 먹으로 썩 잘 쓴 편지 한 장을 골라 들고,

"이것 보아요? 이게 누군데?"

하고 편지 끝에 있는 서명을 보인다.

그것은 모 교육자요, 종교가다.

"이 어른도 그런 편지요?"

하고 정선은 더 크게 놀랐다.

"자, 이거 또 하나 보아. 이건 누군데?"

하고 또 한 편지를 보인다. 그것을 본 정선은 어안이 벙벙하였다. 그것은 어떤 이름난 교육자였다.

"또, 이건."

하고 굉장히 큰 봉투 하나를 집어 든다.

정선은 웃지 아니할 수 없었다. 그것은 나 많은 어떤 재산가였다. 현도 깔깔 웃었다.

현은 특색 있는 여러 편지를 정선에게 보인 뒤에,

"얘, 복아, 난로 좀 피워라."

하여 전기 난로에 불을 피우게 하고,

"정선아, 너 썩 재미있는 편지 하나 보련?"

하 고 두 손가락을 빳빳하게 뻗쳐 가지고 편지를 위로 몇 번 들다가, 그 중에서 황지 봉투에 철필로 되는 대로 갈긴 편지를 다른 커다란 편지 밑에서 찾아내었다. 다른 사람들은 다 상등 편지지에 극히 정성스러운 필적으로 썼지마는, 황지 외겹 봉투에다가 철필로 막 내갈긴 것이 눈에 띈다. 그 글씨조차도 아주 유치하였다.

"너, 이 글씨 아니? 잘 알겠구나."

하고 현은 정선을 놀려먹는 듯이 눈을 끔쩍하였다. 정선은 그 글씨는 본 적이 없었으나, 현의 말 눈치로 그것이 갑진인 것을 짐작하였다. 그러나 정선은 맘에도 없이,

"잘 모르겠는데."

하였다.

"좀 보아요. 네 애인이 내게 보낸 연애편지니 좀 보아요. 나는 지금까지 본 편지 중에 이 사람 편지가 제일 스키(일본말로 좋아한다는 뜻)야. 다른 사람들은 무에라고 짓고 꾸미지. 그렇지만 이 작자는 그것은 없거든. 자 보아요, 내 읽을게."

하고 현은 웃음 절반으로 갑진의 편지를 들고 읽는다. 그 편지지도 편전을 막 뜯어서 머리가 들쑹날쑹이다.

"현의사, 나 당신 속 모르겠소. 당신같이 젊고 아름다운 사람이 왜 남자를 모르시오? 인생의 낙 가운데 남녀의 낙같이 좋은 것이 또 있소? 나하고 사랑합시다. 내 인생의 새로운 방면을 가르쳐 주리다."

까지 읽고 현은,

"어때, 이 작자의 수작이?"

하고 읽기를 계속하여,

"나는 지금 조선에서는 제일 잘난 사내요, 젖비린내 나고 문화 정도가 낮은 조선 계집애는 도무지 아이데(일본말로 짝)가 아니 되오. 오직 현의사만이 내 짝이 될 것 같소."

하고 현은 또,

"자, 이 작자 하는 소리 보아요."

하고 깔깔 웃는다.

그러나 정선은 웃을지 울지 어찌할 바를 몰랐다. 다만 잇새만 빨았다.

"또 봐요. 끝이 더 장관이니."

하고 현은 또 읽는다.

"나 는 여태껏 어떤 여자든지 맘에 두고는 내 것을 못 만들어 본 일이 없소. 오직 세 사람이 있을 뿐이오. 그것은 현의사와, 현의사가 사랑하신다는 윤정선과, 또 하나, 이것은 이름을 말하더라도 현의사는 모르시리다. 맘에 두고 아직 손에 넣지 못한 것이 이 세 사람뿐이오. 그런데 윤정선은 내 친구의 아내요. 그렇지마는 이 애는 아직 시집가기 전부터 내가 눈독을 들였는데, 고만 허숭이놈헌테 빼앗겨 버리고 말았소. 그러나 사내가 한번 맘을 먹었다가 흐지부지하고 어떻게 산단 말요. 내 일주일 안에 그 계집애를 내 손에 넣기로 작정을 하였으니, 그 일이 끝나면, 또 한 계집애에게 분풀이를 하고 나서 그 뒤에는 과거의 복잡한 생활을 청산하고, 당신을 참으로 사랑해 볼까 하오."

여기까지 읽고 현은,

"인제는 날더러 당신이라고."

하고는 또 읽는다.

"내 들으니, 당신은 도무지 사내를 접촉하지 아니하고 아무리 후려도 넘어가지 아니한다 하니, 조선에도 이런 여자가 있는가 탄복함을 마지 아니합니다."

여기 와서 현은,

"후후, 인제는 탄복하오가 아니라 합니다래."

하고 자못 만족한 모양이었다. 현은 또 갑진의 편지를 읽는다.

"내 가 건드려서 휘지 아니하는 여자가 있다 하면 나는 그 여자를 숭배하거나 죽이거나 둘 중에 하나를 하려 하오. 그러나 불행히 나는 아직 그러한 여자를 만나지 못하였소. 원컨대 현의사여! 당신이 나로 하여금 당신을 숭배케 하거나 죽이게 하소서."

현은 편지를 다 읽고 나서,

"자, 어떠냐?"

하고 편지를 봉투에 넣어 테이블 위에 내어던지며,

"아마 이런 연애편지는 세계에 드물 것이다. 굉장하지?"

하고 혼자 좋아한다.

그러나 정선은 이 편지를 듣는 동안에 분함, 부끄러움, 울렁거림이 모두 뒤섞여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언니는 그 사람을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시우?"

하는 것이 가까스로 정선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었다.

"좋 은 사람? 그야 김갑진이가 좋은 사람은 아니겠지. 색마겠지. 그렇지마는 같은 색마라고 하더라도 이건영이보다는 여러 등 높단 말이다. 첫째는 힘이 있거든. 여자에게 애걸을 하는 것이 아니라 명령을 한단 말이다. 도무지 젊은 여자 앞에 오면 발바닥이라도 핥을 듯이 귀축축한 남자와는 다르단 말이다. 또 하나는 이 작자의 정직한 것이 좋단 말이다. 얼마나 프랭크하냐 말야. 속에는 이것을 생각하면서 입으로 저것을 말하는 작자들보다는 통쾌하거든. 얘, 난 참, 조선 남자들헌테는 낙망하였다. 어디 사내답게 씩씩하고 정직한 사내가 있더냐. 모두 돈에, 세력에, 계집에 코를 줄줄 끌고 다니는 꼴을 보니 기가 막힌단 말이다. 이 갑진이란 작자는, 젊은 녀석이 대학까지 마친 녀석이 좋은 일 하나 할 생각 아니 하고 밤낮 여자들만 따라댕기니 죽일놈인 것이야 말할 것 없지마는, 저 지사의 탈을 쓰고, 도덕가 예수교인의 탈을 쓰고 그 짓을 하는 작자들보다는 되레 통쾌하고 가와이이(일본말로 귀엽다)하단 말이다. 또 김갑진의 말도 옳지 아니하냐. 계집애들이 싯카리(단단)하기만 하면야 사내들이 어떻게 덤비나 못하지. 요새 계집애들이 헤프니깐 사내들이 넘보고 그러는 게다. 어디 정선이 네나 순례 같은 애야 무슨 말 들었니? 순례는 건영이 때문에 그렇게 되었지마는, 그야 순례 잘못이냐. 또 정선이 너도 김갑진이와 이러쿵저러쿵 말이 있지마는, 그야 남들이 정선이를 몰라서 하는 소리지. 아무러기로 우리 정선이가 김갑진헌테 넘어가겠니? 그러니까 걱정이란 말이다. 숭배를 하거나 죽인다고 했으니, 네나 내나 숭배를 받거나 죽을 판이로고나. 또 한 계집애란 누구야. 거 원, 순례나 아닌가. 이 김갑진인가 한 작자가 헤픈 계집애들은 다 주워 먹고 인제는 좀 단단한 축을 노리는가 봐, 하하하하. 또 한 여자라는 게 순례만 같으면야 어림이나 있니? 그러해서 조선 여자란 어떤 것인가를 따끔하게 그런 녀석에게는 알려 주어야 한다, 하하하하."

하고 현의사는 유쾌하게 웃는다. 정선도 어찌할 수 없이 따라 웃었다. 그러나 등골에서는 찬땀이 흘렀다.

"언니 난 가우."

하고 정선은 일어났다.

"왜 저녁 먹고 놀다 가."

하고 현은 정선을 붙든다.

"가보아야지."

하고 정선은 옷의 구김살을 편다.

"애기 뗄 생각은 말어."

하고 현은 훈계하는 듯이,

"그런 비겁하고 무책임한 짓이 어디 있니? 또 남편에 대한 정보다 자식에 대한 정이 더 깊다더라. 어서 낳아 길러. 아버지 어머니가 다 착하고 재주 있는 사람들이니 애긴들 오죽할라고. 내 아주머니 노릇 잘 해주께."

하고 정선의 등을 두드렸다.

정선은 현의사한테로부터 집에 돌아오는 길로 짐을 싸가지고 오후 일곱시 특급을 타고 남편 허숭이 있는 살여울을 향하였다. 정선은 현이 어떤 여자더러 '남편헌테로 가구려' 하던 말대로 실행하려 한 것이었다.

정 선은 한잠도 이루지 못하고 살여울 가는 정거장에서 하나 더 가서 읍내 정거장에서 내렸다. 아직 캄캄하였다. 특급차는 작은 정거장에 정거를 아니 하는 까닭이었다. 정선은 아직도 자고 있는 자동차부를 깨워 일으켜서 아니 간다는 것을 제발 빌어서 이십 리 남짓한 살여울을 십 원이라는 엄청난 값으로 자동차를 세내어 타고 살여울로 향하였다.

살 여울을 다 가도 아직 해가 뜨지 아니하였다. 칠백 리나 서북으로 온 이 지방은 서울보다 대단히 추웠다. 정선은 슈트케이스를 이 손에서 저 손으로 옮겨 들어 가면서 촌락 가운데 길을 피하여 달내강가로 더듬어 바로 남편의 집―---허숭의 집으로 걸어갔다. 그래도 저 밝은 동네 개들은 정선의 구둣자국 소리를 알아듣고 한두 마디 짖었다.

정선은 남편과 작별하기 전에 가끔 나와 앉았던 강 언덕에 짐을 놓고 좌우 가에 반이나 살얼음이 잡힌 강을 들여다보면서 그때 일을 회상하였다.

남 편의 집은 새벽빛에 싸여 남빛에 가까운 자줏빛으로 보였다. 정선은 죄 짓고 쫓겨났다가 빌러 들어오는 며느리 모양으로 짐을 들고 언덕길을 추어 올랐다. 새로 판 우물가에는 오지자배기에 두부와 고비가 맑은 물에 담기어 놓인 것이 보였다. 정선에겐 그런 것이 다 다른 세계 것같이 보였다. 정선은 무심코 우물을 들여다보았다. 컴컴한 우물 속에는 손바닥만한 빛 받은 물이 수은빛으로 흔들렸다. 마치 정선의 입김에 물결이 지는 것 같았다. 정선은 그것이 형언할 수 없이 신비한 것 같고 무서운 것 같았다. 서울 생장인 정선은 우물을 들여다본 일이 없었거니와, 우물이 정선에게 주는 비상한 감동은 오직 이 '처음 봄'만은 아니었다. 마치 예수교의 세례에 사람의 머리에 떨구는 물 몇 방울이 그 사람에게 큰 정신적 감동을 주는 것과 같은, 지금 당장은 설명할 수 없는 감동을 주었다.

정선은 차마 여기서 더 갈 용기는 없었다.

'내가 아무 일 없이 남편을 찾아왔다 하면 얼마나 호기스럽고 자랑스러울까.'

이렇게 생각하면 앞이 캄캄하였다.

'내가 무엇 하러 여기 왔나? 내 죄를 숨기려고, 남편과 세상을 속이려고 온 것이 아니냐.'

하면 땅에 스러질 것 같았다. 정선은 우물 기둥을 붙들고 몸을 지탱하였다.

불끈 솟는 해―---먼지와 연기 없는 깨끗한 대기 중에 해는 잠깐, 혈색 좋은 어린애가 고개를 번쩍 드는 것 같았다. 누런, 신선한 햇볕이 우물 기둥에 기대어 괴로워하는 정선의 몸을 비추었다. 그것은 한 폭 그림이었다.

우물에서도 수십 척이나 되는 언덕을 올라가야 '남편의 집'이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남편의 집은 보이지 아니한다.

정선은 또 우물을 들여다보았다. 손바닥만하던 흰 점은 커져서 환하게 열린 수면이 정선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정선은 제 그림자를 무서워하는 듯이 흠칫하고 뒤로 물러섰다.

딸그락딸그락하는 소리에 고개를 돌린 정선은 물동이를 들고 내려오는 순이를 보았다.

"아이그머니!"

하고 유순은 화석과 같이 우뚝 섰다. 그는 하도 놀라서 그 이상 더 말이 나오지를 아니하였다. 정선도 숨만 씨근거릴 뿐이요, 말이 나오지 아니하였다. 억함인가. 질투인가.

정선에게나 유순에게나 이 자리는 유쾌한 신(장면)은 아니었다. 미움, 분함에 가까운 감정이 거진 같은 날카로움으로 마주 선 두 여자의 가슴을 폭폭 찔렀다. 겨울 아침다운 싸늘한 광경이었다.

"아이그, 너 얼마나 애를 썼니?"

먼저 이 괴로운 적막을 깨뜨릴 소임은 정선이가 할 수밖에 없었다. 정선은 어른, 주인아씨, 교육과 지위 높은 사람이라는 우월감을 억지로 회복해서 입을 연 것이다.

"그 동안 아무 일 없었니?"

하고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언제 오셨어요?"

시골 계집애인 유순의 입에서는 이 이상 예절다운 말은 나올 수가 없었다. 그리고 물동이를 발 앞에 내려놓았다.

"선생님 안녕하시냐. 아직 주무시니?"

하고 물을 때에 자기가 남편을 찾은 목적이 얄미운 짐승 모양으로 자기와 유순의 앞으로 날름거렸다.

"에그, 못 만나셨네."

하고 유순은 다시 놀라는 표정을 하였다.

"응?"

하는 정선의 가슴은 쌍방망이질하는 듯하였다.

"그저께 아침차로 서울로 올라가셨는데."

하고 유순은 가여워하는 듯이 정선을 보았다.

"무어? 그저께 아침차?"

"네, 그저께 아침차요."

"어제 아침차 아니구?"

"아냐요, 그저께가 장날인데, 장날 아침차로 떠나셨는데."

하고 순은 '알 수 없는 일이다' 하는 눈을 짓는다.

정선은 그만 슈트케이스 위에 쓰러져 울었다. 몸부림이라도 할 듯이 울었다.

"무어요, 선생님 내려오신 줄 아시면 곧 돌따서서 오실걸요."

하 고 정선이가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아니하는 남편을 찾아 허위단심으로 밤차를 타고 왔다가 남편을 못 만나서 우는 것으로만 생각하고, 유순은 눈물이 쏟아지도록 동정하는 맘이 생겼다. 지금까지 가슴에 있던 질투의 그림자조차 다 스러지고 말았다.

"들어가세요, 추운데."

하고 유순은 가만히 정선의 팔을 잡아 끌었다.

정 선은 반항하지 아니하고 유순에게 끌려 일어났다. 유순은 물동이를 우물가 물동이 자리에 놓고, 정선의 짐을 들고 앞을 서서 언덕길을 걸어올라갔다. 정선도 그 뒤를 따랐다. 장쾌한 아침 햇빛이 잎 떨린 나무 사이로 걸어가는 두 여자를 고동색 언덕빛과 조선에서만 보는 쪽빛 하늘 배경 앞에 그려 내었다. 그러나 어두운 정선의 가슴에서 솟는 검은 눈물은 막을 수 없이 앞을 가리웠다.

한갑 어머니가 부엌에서 새벽동자를 하다가 반색을 하고 나와서 정선을 맞는다. 정선은 괴로움으로 찌그러지고 눈물로 젖은 낯에 억지 웃음을 지어서 한갑 어머니의 인사에 대답하였다.

아 아 남편의 방! 정선은 남편의 방에 들어간 아내다! 칠도 아니 한 책상, 책장, 미투리 삼는 신틀, 벽에 걸린 옥수수, 조이삭, 허울 좋은 수수이삭, 탐스러운 벼이삭, 입다가 둔 광목 옷들. 서울 집의 허숭 내외의 침실과는 이상한 대조다.

정선의 눈은 방 안을 두루 돌다가 책상머리에 붙여 놓은 사진을 보았다. 그것은 정선의 사진이었다. 자기가 남편을 잊고 있던 동안에 남편은 날마다 이 사진을 보고 자기를 생각하던 것을 생각하니 슬펐다.

정선은 책상 위에 놓인 공책을 열었다. 그것은 시골 보통학교 아이들이나 쓰는 연필 공책이었다.

시월 ○일. 오늘도 아내에게서 편지가 안 온다.

시월 ○일. 오늘은 동네 길 역사를 하였다. 다들 재미를 내고 열심하는 것이 기뻤다. 내일은 우물을 치고, 우물 길을 수축하기로 작정하였다. 이 모양으로 살여울은 날로 새로워 가고 힘있어 가는 것이다. 살여울은 곧 조선이다.

그런데 왜 우리 정선에게서 편지가 없을까.

이러한 구절도 있었다. 정선은 남편의 일기책을 더 뒤져 보았다.

십일월 ○일. 춥다. 쌀값이 오른다고 기뻐들 한다. 협동조합 저리 자금이 있었기에망정, 그것이 아니더면 이 동네 사람들도 싼 시세에 다 팔아 버렸을 뻔하였다. 이 동네 부자들도 조합에 들어 주기만 하였으면 좋으련마는, 자금 부족도 없으련마는. 그렇지마는 최후의 승리는 우리에게 있다.

도무지 웬일인가. 정선이가 병이 났나. 퍽 그립다.

또 얼마를 지나가서는,

그럴 리가 없다. 그의 말은 못 믿을 말이다. 남의 아내를 의심케 하려는 비루한 반간이다!

라고 쓴 것이 있다. 글씨도 크게 함부로 갈기고 또 어느 날이라는 날짜도 아니 적혔다.

정 선은 놀랐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의 말이라는 '그'란 누구요, '말'이란 무슨 말일까. 아내를 의심케 하는 말이라고 하니, 또 그 말에 매우 흥분된 것을 보니 정선의 정조에 관한 문제일 것이다. 그러면 자기와 갑진과의 관계에 대한 누구의 밀고인가. 그것이 대체 누구일까?

'오, 이건영이!'

하고 정선은 혼자 대답하였다. 갑진에게 대한 질투로 이런 일을 하염직도 한 일이다 하였다.

'그렇기만 하면야 변명할 길도 없지 않지―---전혀 무근지설이라고 그러지.'

이렇게 속으로 작정하고 정선의 혼은 둘로 갈려서 한 혼은 안심하고 한 혼은 부끄러웠다.

'인제야 속일 수밖에 있나.'

하고 정선은 남편을 대하게 될 때에 할 변명거리를 생각한다.

'그 럼, 무어 속이는 건가. 말을 아니 하는 게지. 그대로 실토를 했다가는 큰일나게. 아이 부끄러워, 아이 부끄러워! 입 꼭 다물고 있으면 고만일 걸 왜 실토를 해? 시골 사람은 무섭다던데, 남편이 어찌할 줄 알고. 그 말을 왜 해? 가만있지. 남편을 속이는 것이 미안이야 하지마는. 누가 어땠나? 무어 단 한 번, 그도 잠깐, 그것도 유혹을 받아서 그런 걸. 그래, 말 안 하기로 해!'

하고 정선은 마치 경매에 낙가하듯이 말 아니 하기로 손바닥을 딱 쳤다.

'실토만 말아. 그리고 후젤랑은 다시는 그런 일은 없을걸.'

그 렇지마는 풀리지 아니하는 것은 뱃속에 들었는지 모를, 자꾸만 들어 있는 것만 같은 아이 문제다. '단 한 번, 그도 잠깐'이라고 정선은 갑진이와 새에 지어진 자기의 허물이 바늘 끝으로 한 번 따짝한 자국에 지나지 않게 작게 보려고 하지마는, 그 단 한 번이라는 것이 생리적으로 심리적으로 영원히 소멸할 수 없는 자취를 남겼을 뿐더러, 만일 잉태한 것이 사실이라 하면 새로 생긴 생명을 통하여 아버지, 어머니, 아들, 딸 하는 인륜관계까지 발생하게 할 것이다.

'자궁을 긁어 내어 달랠걸.'

하고 정선은 후회한다.

밤 차로라도 곧 서울로 올라가려고도 했지마는, 그랬다가 또 차에서 길이 서로 어긋나도 안 되겠고, 여기서 남편이 내려오기를 기다리자니 그랬다가 늦도록 아니 내려와도 걱정이었다. 문제는 하루라도 바삐 남편을 만나도록 하는 것이다. 보고 싶어서보다도 죄의 흔적을 소멸하기 위하여서 시각이 바쁘게 남편을 만나지 아니하면 아니 되었다.

"상 들여요?"

하고 유순이 문을 방싯 열었다. 그 동안에 아침을 지은 것이다.

밥은 방아에 찧은 쌀, 방아에 찧은 쌀은 생명을 가진 쌀이다. 도회의 돌가루 섞은, 배아와 단 껍질 다 벗겨진 쌀과는 다르다. 그리고 토장국, 무나물, 김치, 두부, 고기.

정선은 밥을 먹어 가며 순이에게 이말 저말 물었다. 무심코 묻는 듯하면서도 묻는 정선에게는 여자에게 특유한 은미한 계획이 있었다.

"내가 안 온다고 걱정하시든?"

하고 정선은 유순을 통하여 남편의 속을 떠보려 하였다.

"그럼요."

하고 대답은 해놓고도 유순은 어떤 대답을 해야 옳을까고 두 가지 중에서 한 가지를 고르되, 정선의 눈치를 보아서 하려는 듯이 심히 날카로운 눈으로, 그러나 그 날카로움을 웃음으로 싸서 정선을 살펴보다가,

"날마당 기다리셨답니다. 찻시간만 되면 저 등성이에, 저기 저 등성이 말씀야요(하고 창을 열고 가리키며), 저 등성이에 올라가시어서 정거장 쪽을 바라보시구는 오늘도 안 오는군, 그러신답니다."

"편지도 기다리시든?"

하고 정선은 물을 필요도 없는 말을 묻는다.

"그럼요, 우체 사령이 왔다 가면 퍽으나 섭섭해하시는걸요."

하 고 유순은 허숭이가 길게 한숨을 내어쉬고 무슨 생각에 잠기던 것을 생각하고 그 모양을 정선에게 더 자세히 그리려 하였으나, 자기가 허숭에게 너무 많이, 너무 깊이 관심하는 것을 정선이가 되레 이상히 알까 보아 고만하고 입을 다물었다.

"서울 가시기 전에 무슨 말씀 없든?"

하고 정선은 무심코 돌아오는 듯이 목적한 정통에 맞는 살을 쏘았다.

유순은 이 말에 대답하기 전에, 그저께 식전차를 타러 떠날 적에 가방을 들고 주재소 앞 큰길까지 나아간 자기를 숭이가 어깨를 껴서 정답게 한번 안아 주며,

"내 갔다 오께."

하 고 손을 꼭 쥐어 주던 것이 생각히어서 낯이 붉게 됨을 깨달았다. 이것은 처음 되는 일이었다. 그 아내 정선에게 충실하여 유순의 손길 하나 건드린 일이 없던 허숭이가 어찌하여 유순에게 이만한 친절을 보였을까. 그것은 다만 먼 길을 떠나는 작별일까. 또는 아내 되는 정선에게 대한 의심과 불만이 숭에게 남편으로서 받는 도덕적 제한을 늦추어 준 것일까. 또는 진정으로, 다만 털끝만한 발표도 없이 숭에게 바치는 순의 뜨거운 사랑에 대한 대답을 작별의 순간, 춥고 어둡고 감회 많은 순간에 잠깐 드러낸 것일까.

"별말씀 없으셔요. 어디 무슨 말씀 하시나요."

하고 유순은 정선에게 속 뽑히지 아니할 차비를 하였다.

"그 전날 무슨 편지 안 왔어?"

하고 정선은 숭늉에 밥을 만다.

"편지가 왔던가 보아요."

하고 순은 대수롭지 아니한 것같이 대답한다.

"무슨 봉투? 서양 봉투, 일본 봉투?"

하고 정선은 중요한 단서나 잡은 듯이 밥술을 대접에 걸쳐 놓고 묻는다.

"서양 봉툰가 보아요."

"그래 선생님이 그 편지를 보시고 무에라데?"

"전 자세히는 못 보았에요. 허지만 나중 보니깐 그 봉투가 온통 조각조각 찢어졌어요."

"그래, 그 찢어진 것 어디 있니?"

"아궁이에 넣어서 태워 버렸죠. 태워 버리라고 하시는걸요."

"한 조각도 없어, 요만큼도? 글자 한 자라도 붙어 있으면 좋으니."

하고 정선은 애가 탔다. 그것이 뉘 편지인가, 아무렇게 해서도 알고 싶었다.

"없습니다. 다 탠걸이오."

하고 순은 똑 잡아뗀다.

"그래두으, 나가 찾아보우, 혹시 한 조각 남았나, 어여."

하고 정선은 정답게 유순을 졸랐다.

유순은 부엌에 나가서 종잇조각을 찾아보았다. 있을 리가 있나? 하고 유순은 다시 방으로 들어와서,

"없어요."

하고 보고하였다.

"잘 찾아보아."

하고 정선은 유순이가 마치 찾을 수 있는 것을 일부러 아니 찾기나 하는 듯이 좀 화를 내었다. 그는 오래간만에 남편의 집에 오는 맡에 웬 찢어진 종잇조각을 찾느라고 안달하는 것이 어떻게 우스운 것인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하였다.

유 순은 정선의 행동이 좀 불쾌하였다. 우물가에서 쓰러져 울 때에 솟았던 동정이 다 스러지고 말았다. 우선 남편은 서울 간 지가 이틀이 넘도록 정신도 없이 있다가 터덜거리고 내려온 것이 싱겁게 보였다. 그런데 그 편지는 대관절 무슨 편지길래로 그리 애조를 하는가. 아마 정선이가 서울서 무슨 죄를 지었는데, 그 편지는 그 죄를 허선생에게 일러바치는 것인가. 하기는 그 편지를 받자마자 허숭이 그것을 박박 찢어 버리는 양이 수상도 하였다―---유순은 이렇게 생각하면서 그 편지 조각을 찾아내어서 정선에게 보이고, 정선이가 그것을 보고 어떤 모양을 하는가 보고 싶었다.

유순은 다시 부엌으로 내려가서 나뭇단을 들어 내고 부엌 구석을 뒤진다.

"넌 아까부터 무얼 그리 찾니?"

하고 아궁이 앞에서 감자를 깎던 한갑 어머니가 순을 돌아본다.

"편지 찢은 조각요."

하고 순은,

"참 할머니, 편지 찢은 조각 못 보셨어요?"

하고 입에 손을 대고 웃는다.

"편지면 편지지, 편지 찢은 조각은 다 무엇이야?"

하고 한갑 어머니는 호기심을 일으킨다.

"그런 큰일낼 편지가 있답니다. 어째 한 조각도 안 남었어. 죄다 아궁이에 들어갔나요. 이런 데 한 조각 남아 있으면 작히나 좋아. 옳다, 여기 하나 있다!"

하고 순이가 종잇조각 하나를 얻고 후후 먼지를 분다.

"찾았니?"

하고 한갑 어머니도 염려가 놓이는 듯이,

"어디 나 좀 보자."

하고 고개를 내민다.

"자요."

하고 순은 불규칙한 사각형으로 찢어진 종잇조각 하나를 한갑 어머니 눈앞에 갖다 댄다.

"거 기 무에라고 썼는데 그렇게 야단이냐. 어디 좀 읽어 보아라. 넌 글 알지, 내가 아니, 눈이 발바닥이지. 아무리 야학을 해도 모르겠더라. 바뱌버벼까지밖에는 더 안 들어가는 것을 어떡허니? 우리 아인 알지―---그럼, 한갑인 진서도 알지. 아이구 이번 고등법원에서나 우리 아들이 무사히 될라나."

하고 한갑 어머니는 우연히 일어난 아들 생각에 종잇조각 문제는 잊어버리고 감자 껍질만 득득 긁는다. 순은,

"여기 한 조각 있습니다."

하고 부엌에서 얻은 종잇조각을 정선에게 갖다 주었다. 정선은 숟가락을 소반 위에 내동댕이를 치고,

"어디, 어디."

하고 그 종잇조각을 받았다. 그 조각에는 어느 글자의 변인 듯한 '言'자, '眞'자, '令'자, '閨'자의 한편 귀퉁이 같은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 글씨가 누구의 것임을 정선은 곧 알았다.

"순아, 여기도 한 조각 있다."

하고 부엌에서 한갑 어머니가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한갑 어머니는 이 종잇조각이 허선생의 부인에게 무슨 필요가 있는지 모르나, 은인의 부인이 애써서 찾는 것이니까 자기도 찾은 것이었다.

순은 속으로 우스운 것을 참고 밖으로 나갔다. 허선생은 일찍 이렇게 필요없는 심부름을 시킨 일이 없었다. 대관절 이 종잇조각이, 그것을 찾는 것이 세상을 위해서 무슨 필요가 있느냐 말이다.

"자, 이것도 쓸 거냐."

하고 한갑 어머니는 부엌문을 열고 마주 나오며 순에게 손톱만한 종잇조각 둘을 주며,

"내야 아나. 눈이 곰의 발바닥인걸."

하고 소매로 눈을 비빈다. 아무리 비비더라도 밝아질 수는 없을 것이 분명한 눈을.

'風聞', '戀愛', '永弟'

이 러한 글자가 한갑 어머니 찾은 조각에 보이는 것을 보고 순도 사건의 대강을 짐작하였다. '풍문'에 들은즉 부인이 어떤 사람과 '연애'를 한다고 하여서, 그 편지를 보고 허선생이 화가 나서 편지를 찢고 서울로 뛰어올라가신 것이다―---이렇게 순은 상상하였다. 그리하면 정선이의 허둥지둥하는 양이 비로소 설명이 되었다. 그렇다 하면 우물가에서 울던 것도 헛울음이 아닌가. 그렇구말구. 무슨 일이 있길래로 올라간 지 석 달이나 되도록 소식이 없지.

'그렇기로 고렇게 얌전한 정선이가?'

하고 순은 혼자 고개를 살랑살랑 흔들어 보았다.

"어디?"

하고 정선이가, 순이가 방에 들어오는 동안이 바빠서 쌍창을 열며 팔을 내민다.

"두 조각밖에 없어요."

하고 순은 의식적으로 다소 악의를 품고 아주 담대하게,

"풍문, 연애, 머 그런 소리가 있어요. 그리고 영이라고 하는 것이 편지한 이의 이름자인가 보아요. 그만하면 더 찾지 아니해도 괜찮습니까."

하였다.

순의 말에 정선은 낯이 빨개지며 쌍창을 빨리 닫았다. 너무 빨리 잡아당기는 바람에 문이 비뚜로 걸려서 닫혀지지를 아니하였다.

정선은 순이가 노상 어린애가 아닌 것을 발견하였다. 맹랑한 것이라고 하였다. 순이가 어린애가 아닌 것을 발견하매 정선의 가슴에는 불쾌한 물결이 이는 것을 금할 수가 없었다.

"순아, 이리 들어와."

하여 정선은 순을 불러 놓고 바늘 박은 솜방망이로 문초를 시작하였다.

"선생님 빨래는 누가 하니, 네가 하지?"

"저도 하고 할머니도 하고 그러죠."

"뜯기는? 빨래 뜯기는?"

"뜯기도 그렇지요."

"아이, 참 퍽들 애들 썼고나."

"……"

"선생님 상은 누가 들이니?"

"상은 제가 들이죠."

"늘?"

"네."

"그럴 테지. 너밖에 들일 사람이 있니?"

"……"

"선생님 자리는 누가 깔고 걷고 하니?"

"……"

"그도 너밖에 할 사람 있니?"

"그런 말씀은 왜 물으세요?"

하고 순은 좀 불쾌한 빛을 보였다.

"아니, 그저 알고 싶어서 하는 말이지. 너 노했니?"

하고 정선은 미안한 빛을 보인다.

"노하긴요."

하고 순은 슬픈 표정을 보이며,

"선생님은 자리 까는 것, 개는 것, 방 치는 것, 세숫물, 진짓상 내놓는 것, 방에 군불 넣는 것까지 다 손수 하신답니다. 어디 누구를 시키시나요. 해드려도 마다시지요."

순의 대답에 정선은 면목을 잃었다. 그래서 화제를 돌리려고,

"선생님은 하루 종일 무얼 하시든? 밖에 나가시든? 집에 계시든?"

하고 딴 문제를 물었다. 그래도 그 문제 속에도 남편과 순과의 관계를 염탐하려는 경계선은 눈에 안 보이게 늘어놓았다.

"잠 시도 쉬실 새가 있으신가요. 식전 일찍 일어나시면 방 치우시고, 마당 쓰시고, 나무 가꾸시고, 그러시고도 강가으로 나가시지요. 강에 나가셔서 체조하시고, 그리고는 목욕하시고, 그리고 들어오셔야 해가 뜨는걸요. 처음에는 혼자 그러시더니 차차 동네 사람들이 하나 둘 따라와서, 한 달 전부터는 새벽이면 앞 등성이에 모여서 정말 체조하고, 그리고는 동네 길 쓸고, 그리고는 목욕하고, 달음질도 하고, 돌도 굴려 오고, 나무도 날라 오고, 또 땅 얼기 전까지는 저 토끼 우물 앞에 논을 풀었지요. 그래도 아무 때나 그것은 해뜨기 전이야요. 그리고는 해뜬 뒤에는 다 저마다 제 일 하구요. 요새는 한 오십 명씩 모였답니다. 와와와와 소리를 지르고, 또 아침 일찍 일어나, 해뜨기까지 동무 일하세, 우리 일하세 하고 노래도 부르고 하는 것을 보면 우리들도 뛰어나가고 싶어요. 오는 봄부터는 부인네들도 그렇게 한다고요. 남정들이 식전마다 일어 놓은 논이랑 밭이랑, 그거를 아낙네들이 공동 경작을 해서 동네 아이들 월사금, 책값, 점심값을 삼는다구요. 교육비로 세워서."

하 고 허숭의 사업을 설명하는 데는 유순은 문뜩 유쾌해지고 기운이 난다. 그놈의 종잇조각 문제에 뭉클했던 가슴이 뚫리는 듯하였다. 그뿐 아니라 도무지 쓸데 있는 생각이라고는 아니 하는 듯한 정선에게는 이런 이야기를 좀 들려 보고 싶었다.

"아 까 들어오실 때에 동네로 안 들어오시고 저 여울 모룻길로 돌아 들어오셨지요. 그리셨길래 그리 오셨지. 동네에는 선생님이 오셔서 변한 것이 많답니다. 새로 생긴 것도 많고요. 타작 마당 만들었지요. 큰 광 짓고, 외양간 짓고, 돼지우리 짓고. 타작 마당은 부잣집 몇 집 내놓고는 다 한 마당에 낟가리를 가리고 한 마당에서 타작을 하게 되었지요. 그리고 그 마당가에는 소외양간과 돼지우리와 닭장이 있고, 거기다는 집 한 채를 짓고 그 모든 것을 지키는 사람이 있거든요. 쌍동이네라고. 그러니깐 동네 집 마당은 아주 깨끗하단 말야요. 아직도 제 집에 외양간 두고 닭 놓는 사람도 있지마는 인제 다 없어질걸요. 선생님은 아침만 잡수시면 동네를 한 번 도시지요. 어디 병난 사람이나 없나, 무슨 걱정 난 집이나 없나 돌아보지요. 그러면 선생님 우리 젖먹이가 젖을 토해요, 오늘이 월사금 가져갈 날인데요 하고들 나선답니다. 그리고도 타작 마당으로 소, 돼지, 닭, 다 돌아보시고 그리고 밤에는 또 야학 있고, 또 조합 사무 보시고, 어디 요만큼이나 편히 쉬실 새가 있나요, 없답니다. 그나 그뿐인가요, 선생님이 변호사시래서 사방에서들 송사 물으러들 오지요. 어떤 사람은 닭 한 마리를 들고, 어떤 사람은 술병을 사 차고. 그러면 선생님이 받으시나요. 굳이 받으려면 그 닭은 병 없는 동네에서 온 것인가 알아보아서 동네 닭에 넣지요. 그러시답니다."

하 고 유순은 두 뺨이 불그레 상기가 되면서 허숭의 이야기를 열이 나서 한다. 그것을 듣는 정선은 한끝 자기가 일찍 보지 못하던 숭을 보는 데 대하여 일종의 두려움을 깨닫는 동시에 순이가 아주 숭을 제 것인 듯이 여겨서 흥분하여 말하는 것, 마땅히 주인이어야 할 아내인 자기가 도리어 순에게 설명을 듣고 앉았는 사람이 된 것이 불쾌하였다.

순 이가 말하는 숭의 일상생활을 듣고 보면 과연 숭은 바쁜 생활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다 제게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일, 다시 말하면 밥도 안 나오고 옷도 안 나오는 일에 공연히 숭은 분주한 것이었다. 서비스―---세상을 위하는 일, 이런 것을 정선도 관념적으로는 모르는 것이 아니지마는, 그것은 오직 수신 교과서에나 예배당 강도대에서나 들을 소리요, 몸소 행할 것이라고는 생각혀지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바로 눈앞에, 바로 자기의 남편이 그러한 일을 실지로 하고 있는 것을 보고 정선은 놀랐다.

과연 이렇게 바쁜 생활을 하는 사람에게는 연애니 무엇이니 할 한가한 틈이 없을 것이다.

더구나 그날 낮에 순이와 함께 동네 집에 인사를 다닐 때에 비로소 농촌생활이 어떻게 바쁜 것인지, 또 그 바쁜 모양이 도회의 그것과는 어떻게 다른 것인지를 맛볼 수가 있었다.

가 장 정선에게 신기한 것은 '마당질'이라는 것이었다. 마당에 밤에 물을 뿌려서 얼려 놓고 한가운데는 커다랗고 기름한 돌이나 절구통이나 통나무 토막(이런 것을 마당돌이라고 한다)을 놓고, 그것들이 고정하여 굴지 아니하도록 바둑돌로 괴어 놓고, 그리고는 건장한 남성들이 굵다란 새꼬락으로 북두를 질끈 조르고, 머리에는 하얀 수건을 쓰고 바지통 행전 친 모양으로 졸라매고, 그리고는 볏단을 풀어서 알맞추 갈라서 뿌리를 바오라기로 옭아서, 발로 꼭 졸라서 두 손으로 번쩍 들어 머리 위로 올렸다가 '치!' 하고 '마당돌'에 메어치면 우수수 하는 힘있는 소리를 내며 벼알갱이가 떨어진다. 이 모양으로 몇 번을 치면 알갱이를 잃은 볏단은 숙였던 목을 펴고 마치 일생의 무거운 책임을 인제 벗어 놓았다 하는 듯이 마당 한편 가녘, 그들을 위해 예비한 자리에 내어던짐이 된다. 그때에는 그들은 벼라는 이름을 갈고 짚이라는 새 이름을 받게 된다.

그 리하면 또 늙은이, 어린이 들은 물푸레 휘추리를 들고 짚 끝에 있는 벼알을 톡톡 떨어 버리고, 그러고 난 짚은 벼알갱이 달렸던 끝을 잡히고 활활 뿌리어 검불을 다 떨우고는 깨끗한 짚이 되어 아름이 넘는 단으로 묶인다. 이것은 겨우내 새끼로 꼬이고, 가마니로 째우고, 짚세기로 삼기고, 그런 일에 쓰이기 전이라도 무 구덩이를 덮고, 아이들 볕쪼이기터에 바람 막는 성이 되고, 그 금빛보다도 부드럽고 따뜻한 빛은 덤으로서 동네의 아름다움이 되고, 그리고 봄이 되면 영이 되어 농가의 지붕을 장식하고 비를 막아 주는 것이다.

"체! 씨르륵."

"체! 쑤와!"

"수루룩, 시르룩."

하는 소리가 들리는 동안에 마당돌은 빛깔, 생김생김이 탐스럽고 먹음직스러운 벼알갱이 속에 묻히게 된다. 그리 되면 과팡이로 나락을 긁어 한편으로 모아 금빛 원추탑을 쌓는다.

"한 대 먹구 하지."

"조골 남기고."

이 렇게 기운찬 장정들이 유쾌하게 일하고 있는 곁에 두르막에 팔짱 끼고 구두 신고 서 있는 지주나 마름의 모양은 도무지 어울리지를 아니하였다. 그들은 작인의 집 아랫목에서 술 먹고 고기 먹고 자빠져 있다가 가끔 감독한다고 나와 보는 것이었다. 그들의 모양이 보일 때면 이 유쾌한 장정들의 양미간에는 검은 기운이 돌았다.

그 들은 여기 쌓아 놓은 원추탑을 반이나 갉아 가지고, 그것도 작인의 등에 지워 가지고, 또 장릿벼, 다른 빚 다 받아 가지고 석양에 의기양양하게 돌아가고 만다. 농민들의 땀과 기쁨을 반 이상이나 갉아 가지고. 만일 이 벼를 다 이 장정들의 식구가 먹게 되었으면 작히나 좋을까. 그리하게 하자는 것이 허숭의 뜻인 것을 정선을 알지 못하였다. 다만 이것이 한 신기한 구경이었다.

허 숭은 어찌하여 공판 기일도 되기 전에 갑자기 서울로 올라갔나? 그것은 바로 정선이가 갑진이와 같이 오류동으로 가던 날 전날 아침이었다. 허숭은 여덟시경에 이건영의 편지를 받았다. 그것은 정선이가 갑진이와 너무 가까이한다는 소문이 있으니 주의하라는 것이었다.

숭 은 건영을 믿지 아니하기 때문에 그 말을 한 모함으로 알았다. 더구나 남의 말을 듣고 제 아내를 의심하는 것은 옳지 아니한 일이었기 때문에 숭은 남의 아내의 말을 하는 건영에게 대하여서 반감까지 가졌다. 정선이가 본 숭의 일기의 문구는 그것을 표하는 것이었다.

그렇 지마는 숭의 맘은 의리의 해석만으로 만족할 수는 없었다. 그의 맘은 무척 괴로웠다. 정선과 갑진과―---라는 관념은, 새 잡는 약 모양으로 끈적끈적하게도 숭의 맘에 달라붙어서 도무지 떨어지지를 아니하였다. 허숭은 하루 온종일 괴로워하였다. 아내를 의심하는 것은 옳지 아니하였다. 그렇지마는 아내에게로 의심은 갔다.

허숭은 마침내 서울로 가기로 결심하였다. 그래서 정선이가 갑진과 함께 야구구경을 가던 날 식전차로 허숭은 심히 괴로운 가슴을 안고 서울을 향하였다.

허숭은 미리는 아무 기별도 아니 하고 불의에 집에 뛰어들어 정선이가 누구와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보려고 하였다.

'아니다, 그것은 옳지 않다. 사랑하는 아내를 의심하는 것은 옳지 않다. 미리 기별을 하는 것이 옳다.'

이렇게 생각하고 숭은 신안주에서도, 평양에서도 서울로 전보를 치려고,

'금야착경. 숭.'

이라는 전보문까지 지어 가지고 플랫폼에 여러 번 내렸지마는, 그때마다 치가 떨리도록 분한 것이 치밀어 올라와서,

'응 그대로 가자.'

하고는 중지하였다. 허숭은 자기의 감정을 눌러 평정하게 만들려고 여러 가지로 애를 썼다. 그러나 아무리 애를 써도 벌벌 떨리는 전신의 근육은 진정할 줄을 몰랐다. 그러나 마침내 숭의 이성은 감정을 이겼다. 숭은 황주에 이르러,

'밤에 가오. 남편.'

이 라고 전보문을 특별히 정답게 지어서 치고, 황주 사과를 세 바구니나 샀다. 이런 일을 마치고 차실에 돌아오니 맘에 일종의 유쾌함을 깨달았다. 그가 사랑하는 대동강의 경치도 본듯만듯 지나 버린 허숭은 나무릿벌, 정방산성의 경치를 바라볼 맘의 여유를 얻었다. 아무리 볕이 청명해도 음침한 빛을 띠는 회색의 산들은 숭의 맘과도 같았다.

경성역에 내린 것이 밤 열시 좀 못미처였다. 열차가 스르르 플랫폼에 들어가 닿을 때에 숭은 과히 남의 눈에 띄지 아니하리만치 창 밖으로 낯을 향하여 사람들 틈에 정선을 찾으려 하였다.

'아마 정선은 나를 일이등차에서 찾을는지 모른다. 나는 이제부터는 우리 농부들로 더불어 삼등차 객인데.'

하였다. 그리고 짐을 들고 숭은 차에서 내려서 연해 사랑하는 아내의 모양을 찾으면서 사람 새를 헤어서 일이등 앞으로 갔으나 거기도 정선은 없었다. 숭은 약간의 실망과 분노를 느끼면서 층층대를 오르려 할 적에,

"할로우!"

하고 어깨를 치는 사람을 만났다. 허숭은 짐을 놓고 그 사람의 손을 잡았다. 그 사람은 박사 이건영이었다.

허숭은 아내를 만나지 못하고 이건영을 만난 것을 불길하게 생각하였다. 그뿐더러 아내가 나와 맞지 않는 양을 건영에게 보이는 것이 창피도 하였다.

"아, 이박사, 편지는 고맙습니다."

하고 숭은 얼른 자기의 감정을 통일하여 가지고 당연히 할 인사를 하였다.

"아임 소리."

하고 건영은 숭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동생이나 후배를 위로하는 은근한 어조로, 참 유창한 영어로, 귓속말로,

"당 신의 가정에 관한 일에 대해서 이러니저러니 말을 하는 것이 예의에 어그러지는 일인 줄 잘 압니다. 그렇지마는 나는 허변호사를 깊이 사랑하고 존경하기 때문에, 허변호사의 명예에 관계되는 일이라면 내 맘이 심히 괴로워서 그래서 편지한 것입니다."

하고는 인제는 비밀히 말할 필요가 없다는 듯이 큰 소리로,

"댁에는 올라오신다고 기별하셨어요?"

하고 묻는다. 숭은 건영의 입에서 담배 내와 술 냄새가 나는 것을 느꼈다. 그것이 다 불길하게 생각히었다.

"전보를 했지요, 그런데 좀 늦어서."

하고 숭은 심히 거북한 것을 차마 거짓말을 못 해서 바로 대답하였다.

"전보는 몇 시쯤?"

하고 건영은 일부러 숭에게 무슨 내막이 있다는 것을, 또 그 내막을 자기가 잘 안다는 것을 알리려기나 하는 것같이 물었다.

"다섯시나 되어서, 황주서 쳤지요."

하고 숭은 사실대로 대답하였다.

"오우, 아이 시이."

하고 건영은 서양식으로 어깨를 으쓱하며,

"그러면 그 전보 못 받으셨겠소, 정선 씨가."

하고 건영은 남의 부인을 남편 앞에서 이름으로 부른 것을 후회하고,

"부 인께서는 오늘 오후에 김갑진 군허구 베이스볼 구경을 가셨다가 아마 어디로 저녁을 자시러 갔을 것입니다. 요새 거진 날마다 그러시는 모양이니까. 지금 댁에 들어가시더라도 아마 부인은 안 계실걸요. 부인을 보시려거든 청목당이나 경성호텔이나…… 응 벌써 시간이 되었군, 난 갑니다. 굿바이. 부인 조심 잘 하시오!"

하 고 단장을 흔들며 건너편 폼으로 가려는지 층층대로 뛰어오른다. 건영은 서분의 집에서 나와서 정거장 식당에서 위스키를 한잔 사서 날뛰는 양심을 어지러뜨려 놓고는 인천으로 가는 길에 우선 경의선으로 혹시 아는 여자나 올라오면 만날까 하고 서성거리다가, 숭을 만나서 갑진과 정선에게 대한 원혐을 풀고는 맘이 흡족하여 가는 것이었다.

건 영이는 왜 인천에를 가는가. 그가 하는 행동에 하나라도 헛된 것이 있을 리가 없다. 그가 인천을 가는 데는 두 가지 목적이 있다. 하나는 인천에 개업하고 있는 어떤 여의를 찾으려 함이요, 또 하나는 만일 후일에 정서분으로부터 무슨 문제가 일어난다 하더라도 자기가 이날 밤에 서울에 있지 아니하였다는 증명을 얻고자 함이었다. 정거장에서 허숭과 같이 거짓말 아니 한다는 신용이 있는 사람을 만난 것은 이건영 박사를 위하여 큰 소득이었다.

건 영의 말을 들은 숭은 큰 모욕이나 당한 사람 모양으로 맘둘 곳을 몰라 허둥지둥 짐을 한 손에 들고 전차 정류장을 향하여 나왔다. 바다와 같이 넓은 마당을 흐르는 얼음덩어리와 같은 자동차를 피하여 나가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맘에 산란한 심서를 가진 사람으로 그러하였다. 숭은 버스 정류장 가까이 왔을 때에 갑자기 몰아오는 어떤 자동차에 하마터면 스칠 뻔하고 뒤로 물러섰다. 그 자동차는 요란하게 사이렌을 불고 숭에게 먼지와 가솔린 연기를 끼얹고 청파를 향하여 달아났다.

자 동차를 피하느라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선 숭은 아까보다 더한 놀람으로 두어 걸음 지나간 자동차의 뒤를 따랐다. 왜? 숭은 그 자동차 속에 아내 정선과 갑진이 타고 있는 것을 본 까닭이었다. 갑진은 왼편에 앉고 정선은 오른편에 앉아 갑진의 오른편 팔이 정선의 어깨 뒤로 돌아와 있고, 마침 무슨 말을 한 끝인지는 모르나 두 사람이 유쾌하게 웃으며 서로 마주 고개를 돌리는 장면까지 분명히 보았다.

숭은 자기의 눈을 의심하려 하였다. 그러나 의심하기에는 이것은 너무도 분명한 사실이었다. 밖은 어둡고 자동차 안은 밝지 아니하냐. 제 아내를 잘못 볼 숭도 아니요, 또 다른 사람하고 혼동될 갑진도 아니다.

숭은 건영의 말의 확실성을 불행히도 승인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그리고 숭은 맘의 모든 평형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가슴이 높이 뛰고 손발이 식고 무릎이 마주치는 것을 스스로 의식할 때에는 숭의 혼은 질투와 분노로 타올랐다.

"다꾸시!"

하고 숭은 손을 들고 소리를 쳤다. 정거장 앞에 모여 섰던 자동차 속에서 차 한 대가 굴러 나왔다. 운전수는 문을 열고 뛰어내려서 숭의 짐을 차에 올려 싣고 숭을 태웠다.

"어디로 가랍시오?"

하고 운전수는 숭을 돌아보았다.

"인도교를 향하고 속력을 빨리 내주시오!"

하고 숭은 당황한 빛을 억지로 눌러 감추며,

"지금, 바로 두어 자동차 앞에 지나간 자동차를 따라만 잡으면 돈 십 원 주리다. 자 어서!"

하 고 숭은 자기의 몸으로 자동차를 끌기나 하려는 듯이 몸을 앞으로 숙인다. 운전수는 활동사진에서 보던 자동차가 자동차를 따르는 광경을 연상하며 한끝 호기심도 나나 또 한끝 무시무시도 하였다. 그러나 십 원 상금이 노상 비위를 당기지 아니함이 아니므로 마일표가 이십오를 넘기지 아니할 정도에서 속력을 내었다.

그러나 이 차는 낡은 차였다. 겉은 제법 고급차 모양으로 이드를하게 발라 놓았지마는 속력을 내려면 내렬수록 터드럭터드럭 소리와 가솔린 냄새만 나고 도무지 속력은 나지 아니하였다.

뒤에서 뿡 하고 오던 자동차가 숭의 차를 떨구고 지나가는 것을 보고도 숭은 더욱 초조하였다.

"더 속력을 못 내우?"

하는 숭의 어조에는 노여운 빛조차 띠어 있었다.

"시내에서는 이십오 마일 이상은 못 냅니다. 취체당합니다."

하고 운전수는 도리어 속력을 줄였다. 아무리 터드럭거려도 더 빨리는 못 갈 것이니 어차피 십 원 상금은 틀린 바에는 가솔린만 낭비할 필요는 없다는 배짱이다.

숭은 더욱 화가 남을 깨달았으나 어찌할 수가 없었다. 뒤따르던 몇 자동차를 앞세우고는 고만 기운이 빠져서 쿠션에 몸을 던지고 가는 대로 내버려두었다.

터드럭거리는 헌 자동차도 한강 인도교에 다다를 때가 있었다.

"철교를 건너가요?"

하 고 운전수는 임검 구역에서 잠깐 차를 세우고 물었다. 숭은 턱을 들어서 가자는 뜻을 표하였다. 맘 같아서는 운전수를 두들겨패고도 싶었다. 어차피 아내의 자동차를 따라잡지 못할 줄을 알지마는, 그래도 혹시나 인도교에서나 만날까 하고 따라가는 것이었다.

'만나면 어쩔 테야?'

하고 숭은 스스로 물었다.

열시가 넘은 겨울의 한강 인도교에는 짐마차와 노동자, 늦게 집으로 돌아가는 농부들밖에 별로 다니는 사람이 없었다. 용산, 삼개에 반짝거리는 전등, 행주산성인가 싶은 산머리에 걸린 반달, 그것이 모두 쓸쓸한 경치를 이루었다.

자동차가 노들을 향하고 철교를 건너가는 동안에, 또 서울을 향하고 다시 건너오는 동안에 숭은 바쁘게 이쪽 저쪽을 돌아보았으나 정선인 듯한 사람은 없었다.

"문안으로 들어갑시다."

하 고 숭은 운전수에게 명을 내렸다. 그 자동차의 속력이 느려서 정선의 자동차를 잃어버린 것을 생각하면 당장에 뛰어내려서 한바탕 분풀이라도 하고 싶은 맘이 났으나, 숭은 일찍 한선생이 하던 것을 생각하고 꾹 참았다. 어떤 손해를 다시 회복할 수 없는 일에 말썽을 부리는 것이 조선 사람의 통폐거니와, 이것은 피차에 받은 손해를 더 크게 할 뿐이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설렁탕 그릇을 목판에 담아서 어깨에 메고 자전거를 타고 달리던 사람이 다른 자전거와 충돌하여 둘이 다 나가넘어져서 설렁탕 그릇을 깨뜨리고는 끝이 없이 둘이서 네가 잘못이니, 내가 잘못이니 하고 경우 캐고 욕하고 쥐어박고 하는 것을 보고 한선생이 하던 말이다.

"우리 동포들의 싸움은 개인싸움이나 당파싸움이나 이런 것이 많다. 증이파의(甑已破矣)라 앞에 할 일을 하면 고만일 것을 지난 일의 책임을 남에게 밀려고 아무리 힘을 쓰기로 무슨 효과가 있나."

하고 충돌된 두 자전거더러,

"파출소에를 가든지, 그렇지 아니하면 집으로 가라."

는 제의를 하였으나, 한선생의 제의는 두 싸움꾼에게 통치 아니하였다.

숭은 자동차 운전수에게 대해서 시비를 하고 싶은 맘이 억제하기 어려울 지경이었으나 한선생의 말을 생각하고 꾹 참았다.

숭은 전동 어느 여관에 들었다. 집을 서울에 두고 여관에 드는 것이 스스로 부끄러웠으나, 지금 집을 집이라고 들어갈 면목은 없었다. 언젠가 한번 아는 사람이 들었던 여관을 찾아 든 것이었다. 시계는 열한시를 쳤다.

숭은 자기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나온 것은 분명 유월이었다. 정선은 아직 안 들어왔다고 한다. 숭이가 멀거니 앉았는 것을 본체만체 보이는 자리를 폈다. 초록 바탕에 다홍 깃을 단 인조견 이불의 색채는 찬란하였다.

방 은 하 그리 숭하지 않지마는 책상 하나, 옷장 하나, 그림 한 폭 없는 휑뎅그렁한 방―---이것이 서울 복판의 일류 여관인가 하면 슬펐다. 이러한 빈약한 문화를 가지고 조선 사람은 남보다 더 노라리생활을 한다고 하던 한선생의 말이 생각히었다. 무슨 괴로운 일이 있으면 한선생의 말은 새로운 뜻과 힘을 가지고 생각에 떠오르는 버릇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이러한 생각을 오래 계속할 여유가 없었다. 지금 아내가 어디 가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 하는 것은 팔방으로 날이 달린 송곳으로 가슴을 휘젓는 것 같았다.

'질투는 낮은 감정이다.'

하고 스스로 책망하나 그것은 눌러지지를 아니하였다.

숭은 잠깐 다녀온다 하고 종로로 뛰어나왔다. 자정 가까운 종로에는 주정꾼과 인력거꾼들이 마치 밤에만 나오는 짐승들같이 돌아다닐 뿐이었다.

'어디 가서 무엇을 좀 먹자.'

하고 숭은 출출함을 느끼면서 걸었다. 생각하면 저녁을 아니 먹었다. 집에 가면 아내가 저녁을 차려 놓고 마중 나왔으리라고 믿는 남편이 약간 시간이 늦는다고 차에서 저녁을 먹을 까닭이 없었다.

겨울밤의 종로 네거리. 붉은 이맛불을 단 동대문행 전차가 호기 있게 소리를 내고 달아난 뒤에는 고요해졌다. 가끔 술취한 손님을 실은 택시가 밤바닷가에 나와 도는 갈게 모양으로 스르륵 나왔다가는 스르륵 어디로 스러져 버리고 만다.

'어디를 간담.'

하고 숭은 화신상회 앞에 멀거니 섰다. 어디 가서 무엇을 사먹을는지 모르는 것이다. 숭은 아직도 요릿집에는 길이 익지 못하였던 까닭이다.

이 때에 태서관 모퉁이로서 왁자지껄하고 떠들고 나오는 이가 있었다. 그 어성은 숭이가 잘 아는 강변호사였다. 그리고 그 뒤를 따르는 이는 임변호사였다. 둘이 다 변호사 중에 호걸 변호사로 돈은 잘 번다 하지마는 밤낮 궁상을 떼어 놓지 못하는 변호사들이었다. 그들은 술을 좋아하고, 떠들기를 좋아하고, 그리고 의리를 좋아하는 옛날 동양식 호걸들이었다. 무척 거만하여 안하무인이지마는 또 노소동락하는 풍도도 있었다.

"하하! 내가 몰라? 다 알어, 다 알어!"

하고 뽐내는 것이 강변호사였다.

"어, 그놈 후레아들놈 같으니."

하고 무엇에 하던 분개가 아직도 풀리지 못한 것이 임변호사였다.

숭은 존경하는 선배들에게 대하여 공손하게 모자를 벗었다.

"누구요? 어 허군이야. 누구라고, 하하하하."

하고 강은 숭의 손을 잡아 흔든다. 이것은 강이 숭을 후배 변호사지마는 내심 존경하여서만 그런 것이 아니요, 숭의 겸손과 공손이 강의 호걸적 의협심을 움직인 것이었다.

"응, 노형이던가."

하고 임변호사가 또 허숭의 손을 잡아 흔든다.

"그런데 웬일이오? 어디 시골 가서 농촌사업하신다고?"

하고 임이 숭에게 묻는다.

"네, 농촌사업이랄 것이 있나요, 아직 공부지요."

"아따, 그런 소리는 다 다음에 하고."

하고 강은 새로 흥이 나는 듯이,

"자, 허군도 만났으니 새로 어디 가서 한잔 먹지에."

하더니 단장을 들어 내어 두르며,

"얘, 택시야."

하고 종로 네거리를 향하고 고래고래 부른다. 인력거들이 모여든다.

"영감, 어디로 모시랍시오?"

하고 한 인력거꾼이 인력거를 놓고 어깨에 덮었던 담요를 팔에 걸고 세 사람의 앞으로 다가온다.

"이건, 자동차 부르는데 인력거가 왜 덤벼?"

하고 강은 아주 장히 노엽기나 한 듯이 눈을 부릅뜬다.

"저희도 좀 벌어 먹어얍지요, 자 타십쇼."

하고 인력거꾼은 인력거 채를 끌어서 바로 강변호사 앞에다 대고 팔에 걸었던 담요를 다시 어깨에 걸고, 그리고는 앉을 자리를 잘 펴고 기대는 쿠션을 한 손으로 누르고,

"영감, 자 타십쇼."

하고 허리를 굽신굽신한다.

다른 인력거들은 어찌 되는 것인가 하고 반은 이해관계로, 반은 호기심으로 하회를 보고 있다가 뱃심 있는 인력거꾼이 하는 양을 보고는 저희들도 인력거를 내려놓고 선다.

강변호사는 취한 눈으로 여러 인력거꾼(채를 놓은 세 인력거꾼과 밖으로 둘러선 서너 인력거꾼들)을 둘러보더니 자기 앞에 놓인 인력거에 올라앉으며,

"나 노형의 직무에 대한 충실과 열성에 감복하였소(이것은 자기가 타는 인력거꾼에게 하는 말이나, 그 인력거꾼은 자기에게 하는 말인 줄을 모르는 모양이다)."

하고 다른 인력거꾼들을 돌아보며,

"글쎄, 이 못생긴 놈들아, 이 사람 모양으로 손님 앞에 바싹 대들든지, 그렇지 아니하면 다른 손님을 구하러 가든지 하지그려, 그래 눈치만 보고 엉거주춤하고, 에끼 굶어 죽을 놈들 같으니."

하고 단장을 둘러메니 인력거꾼들이 닭들 모양으로 꼬리를 젓고 달아난다.

"하하하하."

하고 강은 웃는다.

숭 도 강변호사, 임변호사를 따라 인력거를 타고 ○○관으로 갔다. ○○관은 서울에 가장 큰 요리점이요, 조선에도 가장 큰 요리점이다. 전등빛이 휘황한 현관에는 머리 벗어진 늙은 보이 하나가 어떤 인버네스 입고 안경 쓴 손님 하나의 주정을 받고 있고, 그 옆에는 기생 둘이 얼빠진 것 모양으로 우두커니 서 있었다. 마치 그 주정뱅이 신사에게 가지가지 아양을 다 부려도 효과 없는 것을 보고 지쳐서 무심해진 것 같았다.

"아이, 아버지 오십쇼?"

하고 둘 중에 한 기생이 갑자기 생기를 띠며 강변호사의 손을 잡아 끈다.

"이년은 아버지는 왜 아버지래. 내가 네 어미가 누군지 알지도 못하는데."

하고 강변호사는 구두도 벗지 아니하고 시비를 건다.

"아이구, 그렇게 노여실 거 무어 있소. 애기 아버지란 말로만 들으시구려."

하고 곁에 섰던 좀 나 많은 기생이 농친다.

"그러까, 하하."

하고 강변호사는 웃고,

"오, 내 딸년 착하지."

하고 어린 기생의 어깨를 두드린다.

"옳지, 아버지라면 마다구선 또 딸이라네."

하고 어린 기생이 입을 빼쭉한다.

"딸이란 말이 노여냐."

하고 임변호사가 곁에서,

"노엽거든 장모의 딸이란 말로만 들으려무나."

하고 어깨 뒤로서 손을 넘겨 그 어린 기생의 뺨을 꼬집는다.

"아야!"

하고 어린 기생이 소리를 지른다.

늙은 보이를 보고 주정하고 있던 신사는 마치 이 세 사람의 일행의 위풍에 눌린 듯이 소리도 없이 빠져 달아나고 말았다.

일 행은 보이를 따라 복도를 굽이 돌아 어떤 구석방으로 들어갔다. 이런 곳에 와본 경험이 적은 숭은 호기심을 가지고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고붓고붓이 걸린 귀족들의 글씨, 굽이굽이에서 만나는 취한 손님들과 하얀 얼굴에 눈만 반짝거리고 치마폭을 질질 끌고 가는 기생들. 그 기생들은 모두 강변호사와 임변호사를 아는 모양이어서 다 인사를 하고 버릇없는 말을 하고 스치고 가는 서슬에 꼬집고 꼬집히고, 안고 안기고 손잡고, 그러고야 지나갔다. 그러나 숭을 아는 이도 없고 숭이가 아는 이도 없었다.

방 들은 더러는 비었으나 더러는 불이 환하고 그 속으로서 장고, 가야금, 노랫소리가 흘러나오고, 어떤 방에서는 아마 흥에 겨운 손님의 소리인 듯한 가락이 잘 꺾이지도 않는 소리도 들리고, 또 어떤 방에서는 싸움 싸우는 소리도 들리나 아마 농담인 듯하였다. 방이 여러 백 개나 되는 것같이 숭에게는 보였다.

숭이 안내된 방은 제일 조용한 방인 듯하였다. 옷 벗어 거는 방까지도 방바닥이 양말을 통하여 뜨뜻함을 느낀다.

이 간 폭 삼 간 길이나 되는 방은 백 촉광은 될 듯한 두 전등으로 비추어져 있고, 아랫목과 발치에는 길이 넘는 십이 폭 화병풍을 셋이나 연폭해서 두르고, 방바닥에는 자주 바탕에 남으로 솔기한 모본단 보료를 깔고, 박쥐 수놓은 사방침, 안석을 벌여 놓고, 옷 벗어 놓는 방으로 향한 구석에는 야츠데(일본말로 사귀가 아주까리 같이 생긴 것)와 소철 분이 놓여 있다. 그리고 방 한가운데는 하얀 상보를 덮은 장방형의 교자상이 놓여 있다.

"외투 벗으세요."

하고 현관에서부터 따라 들어온 기생들은 강변호사와 임변호사의 인버네스라고 하는 외투를 벗긴다. 숭은 제 손으로 외투를 벗어 걸었다.

보이는 차를 가져왔다. 차맛이 흉했다. 숭은 이렇게 화려하게 차린 집에 어떻게 이렇게 차맛이 흉할까 하였다.

그리고 자세히 살펴보면 병풍의 그림이나 사벽에 걸린 그림이나 다 변변치 못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이 집의 허물이 아닐는지 모른다. 우리 조선의 정도가 이만밖에 못한 것일는지 모른다 하고 숭은 또 한선생의 말을 생각하였다.

'이슬 한 방울에 온 우주의 모든 법칙이 품겨 있는 것과 같이 마루청 널 한쪽에도 조선 문화 전체가 품겨 있다.'

하는 것이었다.

마루청 널 한쪽만 있어도 당시 조선의 공업, 미술의 정도를 알 수 있을 뿐더러 만일 거기 묻은 때를 분석한다 하면 그 이상 더 자세한 상황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어 디서 일본 노래가 들려 온다. 요새에는 일본 사람들도 조선 요릿집에를 많이 오고 조선 사람들도 일본 요릿집에를 더러 간다고 한다. 일본 사람이 이 방에를 와본다면 이 방에 걸린 그림, 이 방에 놓인 가구로 조선의 문화를 판단하는 것이라고 숭은 생각하였다.

"얘, 그 배부를 것은 가져오지 말고, 응, 그 배는 아니 부르고 맛만 있는 안주를 좀 가져오너라."

하는 것이 강변호사가 보이에게 대한 명령이었다.

"배 안 부른 음식이 어디 있단 말요? 물도 배가 부르지."

하고 한 기생이 빈정댄다.

"요 녀석, 네가 무얼 안다고."

하고 강변호사는 어린애를 위협하는 모양으로 눈을 흘긴다.

"음식이란 요리를 잘한 것일수록 목구멍만 넘어가면 남는 것이 없어야 되는 것이거든."

하고 임변호사가 아는 체를 한다.

"암 그렇지. 미인도 마찬가지거든."

하고 강변호사가 웃으며,

"원체 미인이란 곁에 있어도 있는 것 같지 아니하고, 무릎에 앉혀도 있는 것 같지 아니하고, 품에 넣어도 있는 것 같지 아니하고, 그래야 되는 것이거든."

"그럼 죽어서 귀신이 되어야겠구려."

하고 한 기생이 톡 쏜다.

술과 안주가 들어왔다. 기생들은 세 사람의 앞에 놓인 조그마한 일본 술잔에다 일본 술을 따른다. 강변호사는 술잔을 들고,

"자, 허군."

하고 숭을 바라본다. 숭은 학교에서 강변호사의 강의를 들은 일도 있으므로 무릎 꿇고 두 손으로 잔을 들었다. 세 사람은 한 모금씩 먹고 잔을 놓았다.

"얘들아, 너 이 양반 누구신지 아니?"

하고 강변호사는 숭을 가리켜 보이며 기생들에게 묻는다.

"몰라요."

"언제 뵈었던가요?"

하고 두 기생은 몰라보는 것이 미안한 듯이 숭을 바라본다.

"에끼 년들, 이 양반을 몰라?"

"첨 뵙는 걸 어떻게 알아요?"

"글쎄나 말이지."

"네 어디 알아맞춰 보아라."

"글쎄."

"글쎄, 선생님, 학교 선생님?"

하고 세 사람의 눈치를 엿보더니,

"아이고, 난 몰라요."

하고 몸을 흔든다.

"너 허변호사 영감 말씀 못 들었니? 이년들 도무지 무식하고나."

하고 임변호사가 말을 낸다.

"오, 저, 윤참판……."

하는 것을 한 기생이 눈질을 하니까 쑥 들어간다. 어쨌으나 두 기생은 숭이가 윤참판의 사위라는 자격으로 누구인지를 알았다.

"잡지에서랑 사진 난 것 뵈었어요. 부인께서 참 미인이셔."

하고 나이먹은 기생이 말한다.

"술 따라라."

하고 강변호사는,

"어디 이거 도무지 실차지 아니해서 먹겠니? 원청강 영웅에겐 요런 조그마한 술잔이 맞지 아니하거든. 술을 동이로 마시고 돼지 다리를 검으로 떼어 먹어야 쓰는 것이거든. 요게 다 무에냐, 좀스럽게."

하고 잔을 내어던진다.

"곱뿌 가져오래요?"

하고 한 기생이 묻는 것을, 강은,

"그 래, 곱뿌허구 위스키 가져오래라. 한잔 사내답게 먹고 때 못 만난 영웅의 만객수를 잊자. 안 그런가. 남들은 국제연맹이니 군비축소니 무에니 무에니 하고 떠들지마는, 우리네야 술이나 먹지 무어 할 일 있나. 남아가 한번, 제길 아깝구나. 이년들 너희년들이야 ○이나 알지 무얼 안다고 웃어, 하하하하. 아니꼬운년들 같으니."

위스키가 왔다. 흰 말을 그린 위스키 한 병에 대 달린 유리잔이 세 개.

"뽕뽕뽕뽕."

하는 소리를 내고 기생의 손에 들린 까무스름한 병에서는 노르스름한 술이 나와서 수정과 같은 잔에 찬다.

"됐다, 자 허군."

하고 강변호사는 또 아까 모양으로 술잔을 들어서 권한다.

"그렇게 못 먹습니다."

하고 숭은 사양하였다.

"무얼 그래. 자, 자시우. 남아란 안 먹을 때엔 안 먹고 먹을 때에는 또 먹는 것이거든. 그렇게 교주고슬을 해서는 못쓰는 게어."

"어서 드시우. 사내가 술 한잔은 해야지."

하고 임변호사도 곁에서 말한다.

"잡수세요!"

하고 어린 기생이 정답게 술을 들어 권한다.

"부인께서 무서우셔서 못 잡수셔요?"

하고 또 한 기생이 놀린다.

몇 잔 먹은 일본 술만 해도 벌써 낯이 화끈거리는 판이다. 더 먹어서 될 수 있나 하고 한편으로 꺼리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이미 먹은 술과 가슴에 북받치는 홧덩어리가 에라 좀 먹고 취하여라 하고 술을 부르기도 하였다. 그래서 숭은 강변호사가 권하는 대로 위스키를 들이켰다.

강변호사는 기생이 두 년이 다 허변호사의 눈에 들지 아니하고, 허변호사에게 술을 권할 능력이 없다고 하여 다른 썩 얌전한 놈을 하나 부르라고 호령호령하였다.

숭의 뱃속에 들어간 위스키는 신비한 힘을 내었다. 차차 맘이 유쾌해지고 말하기가 힘이 들지 아니하였다. 마치 시간의 흐름이 정지되고 공간의 제한이 느슨해지는 것 같았다.

강변호사, 임변호사에게 술을 권하기도 하고 기생에게까지 술을 권하였다.

새로 온 기생은 산월이라고 불렀다. 그는 분홍 저고리에 흰 치마를 입었다. 그것이 그 기생을 퍽 점잖게 보였다. 산월은 문지방을 넘어서며 한 손으로 땅을 짚고 쭈그려 인사하고 약간 고개를 숙이는 듯하였다. 그의 눈은 빛났다.

숭 은 놀랐다. 그것은 산월이라는 기생이 어디서 본 사람 같기 때문이다. 산월도 숭을 보고는 우뚝 섰다. 그리고 그 눈이 더욱 빛이 났다. 그러나 아는 체하는 것이 옳은지 옳지 아니한지를 의심하는 듯이 다른 손님들에게로 눈을 돌렸다.

"오 산월이, 너 요새 서방질 잘하니?"

하고 강변호사가 산월의 손을 잡아서 숭의 곁에 앉히며,

"네 오늘 저녁에는 이 손님께 술을 권한단 말이다. 어디 명기 될 만한 자격이 있나 보자. 이 두 년들은 다 낙제다, 하하하하."

한다. 그제야 산월은 자기가 섬겨야 할 손님이 허숭인 줄을 알고, 허숭의 잔에 술을 따르려고 병을 들고 허숭이가 잔을 들기를 기다린다.

"양주는 그냥 따라 놓는 법야."

하고 임변호사가 또 아는 체를 한다.

숭은 잔을 들었다. 산월은 따랐다. 숭은 술을 받아서는 도로 놓았다. 산월이란 누군가. 여러 번 보던 여자다. 숭과 산월이 서로 의아해하는 양을 보고 강변호사는,

"허, 재자가인이 벌써 의기가 서로 합하였군. 자 허군, 감빠이(건배) 축하하오, 하하하하. 산월아, 너 이 허변호사 영감 잘 섬겨라. 그러기로 이놈아, 고만 한 번 보고 반한단 말이냐, 하하하하."

하고 좋아라고 손에 든 술을 흘리고 앉았다.

"원래 재자가인이란 천정한 연분이 있거든."

하고 임변호사가 아주 시치미를 떼고 설명을 한다.

"아냐요."

하고 산월은 수삽한 빛을 보이며,

"내 이 영감을 여러 번 뵈었답니다. 학생복 입으신 때에 뵙고는 처음이 되어서 누구신가 했지요."

하고는 비로소 기생의 직업적 태를 내어서 숭을 향하여 방끗 웃으며,

"영감, 저를 모르셔요. 제가 학교에 다닐 적에 가끔 부인헌테 놀러 갔었답니다. 영감 뵙고 인사한 적은 없지만두."

하는 것은 상냥스러운 서울말이었다.

숭은 고개를 끄덕끄덕하였다. 기억이 살아나온 것이었다. 말을 듣고 보니 산월은 윤참판 집에서 여러 번 본 여자다. 그때로 말하면 숭은 행랑에 있는 허서방이다. 상전 댁 작은아씨 찾아오는 아가씨를 감히 거들떠보지도 못할 때였다.

"허 산월이, 그런 줄은 몰랐더니 양반 기생이로고나. 학교에 댕겨서 학식이 갸륵한 줄은 알았다마는, 게다가 문벌까지 금지옥엽인 줄은 몰랐단 말야."

하고 강변호사는 연해 잔에 술을 흘리면서 유쾌하게 지껄였다.

"자 산월아, 어따, 술이나 한잔 받아 먹어라."

하고 강변호사가 잔을 준다.

"황송합니다."

하고 산월은 술잔을 받는다. 강변호사는 손수 산월의 잔에 술을 쳤다. 산월은 그 술을 죽 들이켰다.

"아마니! 언니, 웬일이오?"

하고 어린 기생이 산월이 술 먹는 것을 보고 놀란다. 산월은 위스키 한잔을 다 마시고 나서 잔을 강변호사에게 돌리며,

"얘, 나도 좀 취해야겠다."

하고 갑자기 취한 모양을 보였다.

"산월이가 기생 나온 지 불과 반년이지마는 당대 명길세."

하고 강변호사가 임변호사를 보고 하는 말인지, 허변호사를 보고 하는 말인지, 또는 기생들을 보고 하는 말인지 모르리만큼 한마디는 이 사람에게 주고, 다음 마디는 다음 사람에게 주어 가며 산월이 선전을 한다.

"산월이 얘는 본대 서장로라고 하는 유명한 장로님의 딸이거든. 보통학교, 고등보통학교 고이 마치고, ○○학교에도 이태나 다니다가 깨달은 바 있어서 기생이 되었단 말이다. 이년들, 너희들과는 다르단 말이다."

이제 와서는 마침 말끝이 기생들에게로 간 것이었다. 강변호사는 다음에는 숭을 향하고,

"일 본말 잘하고, 영어 잘하고, 글씨 잘 쓰고, 피아노 잘 치고, 노래 잘하고 얘들아, 산월이가 또 무얼 잘하니? 옳지 옳지, 인물 잘나고, 말 잘하고, 맘 매섭고, 또 산월이 흠은 무에더라, 응? 오옳지, 안차고 세차고, 하하하하. 고놈 묘하게 생겼지."

밤은 더욱 깊어 가고 술은 더욱 취하여 간다. 산월이가 화제의 중심이 되어 버리는 것을 본 다른 두 기생은 뒤로 물러앉았다.

숭 은 차차 머릿속이 혼미해 오는 것을 깨달았다. 자기의 사상과 행동의 자유를 절제하던 모든 줄이 끌러진 것같이 생각되었다. 똑바로 앉던 것을 사방침에 기대기도 하였다. 다리도 뻗어 보았다. 기생의 손도 쥐어 보았다. 산월이도 술이 취하여 숭의 어깨에 머리를 놓고 기댈 때에 숭은 고개를 돌려서 산월의 머리 냄새도 맡아 보았다. 그 등도 한번 쓸어 보았다. 숭은 비로소 술의 힘이란 것을 깨달았다.

강변 호사와 임변호사가 권하는 대로 숭은 술을 받아 먹었다. 위스키가 둘째 병이 거진 다 없어졌다. 손님들도 취하고 기생들도 취하였다. 사람들이 취하니 전기등도 취하고 술잔도 술병도 취한 듯하였다. 숭이 보기에 조선만 아니라 전세계가, 전세계만 아니라 전우주가 모두 취해 버린 것 같았다.

'壺襄乾坤(술병 속 세상).'

이라는 문자의 뜻을 숭도 깨달았다.

'아뿔싸, 내가 이렇게 술이 취해 될 수가 있나.'

하고 숭은 가끔 반성하였다. 그러나 반성하려면 양심의 세포는 위스키의 독한 마취성으로 끊임없이 마취함을 당하였다.

숭 의 어릿한 머릿속에는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이 두서없이 내왕하였다. 아내 생각, 처갓집 생각, 농촌사업 생각, 한선생 생각, 산월이 생각 등등. 취중에 나는 생각은 현실성이 없이 모두 꿈같고, 아무리 중대한 일이라도 우스운 빛을 띠었다. 다 희극적이었다.

정선이와 갑진과 어디서 어떠한 희롱을 하는지 모르지마는 그것이 다 우스웠다.

"네버 마인!"

하고 숭은 밑도끝도없는 말 한마디를 던졌다.

"네버 마인?"

하 고 산월이가 이상한 듯이 숭을 바라본다. 산월의 눈은 모든 것을 다 내어던지고 애원하는 듯한 눈이었다. 그의 속에도 거푸 들어가는 위스키 몇 잔이 큰 변화를 일으켜서 처음 가지고 있던 점잖음은 어느덧 스러지고 이성에게 아양떠는 여자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오우 예스, 네버 마인!"

하고 숭은 한번 더 눈앞에 아내와 갑진과의 음탕한 희롱의 장면을 그리고는 산월의 허리를 끊어져라 하고 껴안았다. 산월도 마치 첫사랑의 어린 처녀 모양으로 숭을 껴안고 발발 떨었다.

강변호사는 임변호사를 붙들고 무슨 고담준론을 하고 있고, 임변호사는 어린 기생을 무릎 위에 끌어 올리려고 강변호사의 말도 들은체만체다.

"아임 해피."

하고 산월이가 숭의 가슴에 낯을 비비고 조끼 겨드랑이에 매어달리면서 심히 흥분된, 그러나 들릴락말락한 음성으로,

"행복은 순간적이야."

하고 우는 모양으로 숭의 허벅다리에 낯을 비빈다.

'열정적인 여자다.'

하고 숭은 물끄러미 산월의 목덜미를 들여다보았다. 그렇게 생각하면 정선도 열정적이다. 자기가 정선에게 대한 것이 너무 점잖은 것이 아니었던가. 모든 여자는 다 열정적인 것이 아닌가 하였다.

"오, 잘들 하는구나."

하고 딴 방에 개평떼어 갔던 나 많은 기생이 들어와서 산월의 볼기짝을 쥐어박는다.

"아이 언니두."

하고 산월은 벌떡 일어나서 눈을 흘겼다. 인제는 산월도 처음에 가졌던 자존심 다 집어치우고 다른 기생들과 똑같이 언니 동생 하고 지내었다.

숭은 무슨 생각이 나는지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영감, 어디 가세요?"

하고 산월도 따라 나갔다.

"흥, 홀딱 반했구나."

하고 나 많은 기생은 반쯤 남은 위스키 잔을 화나는 듯이 들이켰다.

"누가 반해?"

하고 어린 기생도 기회를 얻어서 임변호사의 팔을 뿌리치고 나와서 나 많은 기생 곁에 앉는다.

"아이 배고파."

하고 늙은 기생이 손뼉을 딱딱 때린다.

"그래 무어 갖다 먹어라."

하고 강변호사는 술잔을 내밀며,

"망할년들, 먹을 것만 알지."

하고 술 달라는 빛을 보인다.

"아이, 그만 잡수."

하고 늙은 기생은 술병을 감추려다가 부득이하다는 듯이 술을 따른다. 강변호사는 술 먹기는 잊어버리고,

"술이 좋기는 좋거든. 세상에 남아가 먹을 것이라고는 술밖에 또 있던가. 하하하하, 안 그러냐, 이놈?"

하고 입을 우물거린다.

"술 엎질러져요!"

하고 늙은 기생은 흔들거리는 강의 팔을 붙들어 진정을 시키다가, 그래도 강의 팔이 말을 아니 들으매 그는 술잔을 빼앗아서 강의 입에 갖다 대어 준다. 강은 떠들다 말고 술을 들이켠다.

"어 좋다."

하고 강은 눈을 꿈적하고 무릎을 턱 친다.

"술이 참 좋기는 하오."

하는 늙은 기생이,

"그 고리탑탑한 샌님이 단박에 놀아나고, 또 대단히 도고하던 산월이도 아주 허변호사 영감께 홀딱 반했는데. 글쎄 뒷간에 가는 데를 다 따라가는구면."

하고 샘이나 내는 듯한 표정을 보인다.

"재자가인이라니. 재자가인이라니. 재……자……가……인이란 말이다, 이놈들, 하하하하. 얘들아, 요새 기생년들은 돈밖에 모르지, 응, 옳지 돈밖에 몰라. 돈만 준다면 개허고라도 잔댔것다. 이놈, 네가 그랬지. 이놈, 죽일놈 같으니."

"아냐요, 내가 그랬나 머. ○○이가 그랬지."

"○○이가 그 말을 잘못했어. 어디 그렇게 말하는 법이 있나."

"그래 너희년들은 돈만 알지 않구? 도적년들 같으니."

"왜 도적년이오? 우리가 왜 도적년이오? 변호사는 어떤데? 에미, 애비 걸어 송사하는 자식이라도 돈만 주면 변호 안 하시오."

하고 어린 기생이 칼끝 같은 소리를 지른다.

"옳아, 옳아! 하하."

하고 늙은 기생도 박장을 하고 웃는다.

"엑 이년들!"

하고 임변호사가 정말 성을 낸다. 임변호사는 맘에 질리는 것이 있은 것이다.

"아 서, 이 사람, 걔들 말이 옳지 아니한가. 우리네 변호사들도 쟤들과 별로 다를 것 없지. 돈을 목적삼고서 아무러한 송사라도 맡으니까…… 그런데 말이다, 옛날 기생은 말야, 옛날에는 기생 중에는 의기도 있고 문장도 있고 잘난 사람도 있었더란 말이다. 진주 논개만이 의기가 아니라 옛날 송도에 황진이(黃眞伊)라는 기생도 용했거든. 인물 잘나고 글 잘하고, 황진사의 딸이야. 왜 기생이 됐는고 하니, 잘난 남아를 한번 만나 보자고 되었단 말이다. 자칭해 말하기를 말야, 송도에 삼절이 있다고 박연 폭포, 서화담, 황진이라고 뽐내었거든. 기생이라도 이만한 포부와 자존심이 있으면사 그야 대접받지. 그야말로 길 아래 초동의 접낫이야 걸어 볼 수가 있나. 어디 너희들도 좀 그래 보렴, 하하하하."

하고 술도 없는 술잔을 술이 있는 줄 알고 들이마신다.

숭이 뛰어나간 것은 불현듯 정선을 생각한 까닭이었다. 술에 취하고 곁에 다른 여자가 아른거리더라도 정선이란 생각은 무시로 쿡쿡 가슴을 쑤셨다.

'도무지 이게 무슨 꼴이람.'

하고 속으로 생각하고는,

'그럼 어때?'

하는 식으로 잊어버리려 하였다.

"어딜 가세요?"

하고 복도에서 산월이가 숭을 따라잡았다. 숭은 팔에 매어달리는 산월의 가련한 눈찌를 돌아보았다.

"난 집으로 가."

하고 숭은 산월의 손을 찾아 작별의 악수를 하였다.

안 먹던 술을 많이 먹은 숭은 아직 정신을 잃어버릴 지경은 아니었지마는 가끔 아뜩아뜩함을 깨달았다. 그리고 가슴은 뛰고 머리는 아프고 눈은 감겨졌다. 게다가 마치 배멀미가 난 것처럼 속이 느글느글해서 금시에 쏟아져 나올 것만 같았다.

"좀더 놀다 가세요, 네. 내 바래다드리께, 네."

하 고 산월은 숭에게 매달려 가면서 붙들었다. 숭은 여자의 술취한 얼굴을 처음 보았다. 빨갛게 된 뺨과 눈자위, 커다랗게 확대된 눈동자, 흘러내린 매무시, 이런 것을 숭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더구나 그러한 젊은 여자가 팔에 와서 매달리는 양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하였던 것이었다. 그런데 그러한 정경은 숭의 맘을 괴롭게 하는 것이었다.

숭 은 아무리 정신을 차리려 하여도 다리가 이리 놓이고 저리 놓이는 것을 어찌할 수 없었다. 숭은 한 팔에 외투를 걸고 한 팔에 산월을 걸고 모자를 비뚜름하게 쓰고 복도로 비틀거리는 양은 부랑자와 다름이 없었다. 숭은 자기의 꼴이 어떠한 것에 대하여 맘으로 반성할 정신은 있지마는 몸으로 평형을 보전할 기운은 없었다.

"이렇게 비틀거리고 어디를 가시우?"

하고 산월은 현관이 가까워질수록 걱정을 하였다.

"더 먹으면 더 비틀거리지."

하고 숭은 혀가 맘대로 아니 돌아가는 것에 성화가 났다. 거의 현관에 다 나온 때에 뒤에서 쿵쿵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방에 있던 기생 둘이 나와서,

"들어오세요! 어딜 몰래 두 분이 달아나세요?"

하고 하나는 숭의 외투를 빼앗고 또 하나는 숭의 모자를 빼앗아 가지고 들어가 버린다.

"자, 인제 들어가세요. 강변호사랑 임변호사랑 섭섭해하시지 않아요?"

하고 산월도 발을 벋디디고 숭을 잡아 끈다.

"그래라, 내 어디 집 있드냐."

하 고 숭은 발을 돌려서 산월보다 앞서서 방으로 돌아왔다. 아내가 남편인 자기를 기다리고 있지 아니함을 생각하면 산월이가 붙들어 주는 것이 도리어 정답고 고맙기도 하였다. 그야 산월은 날마다 딴 사내를, 하루에도 몇 사내를 이 모양으로 정답게 붙잡기는 하겠지마는 그러면 어떠냐. 누구는 안 그렇던가. 이렇게 생각하고 숭은 활발하게 비틀거리며 방에 들어가,

"선생님, 두 분 선생님, 제가 취했습니다. 취했는데, 이렇게 취하게 한 책임이 어디 있느냐 하면 두 분 선생님께 있단 말씀입니다, 어으."

하고 트림을 한다.

"허군, 이봐, 허군."

하고 강변호사가,

"허군, 허군 술취하게 한 책임은 다른 누구, 나말고 다른 누구에게 있는 듯한데."

하고 웃는다.

'다른 누구'란 말이 숭의 귀에는 '네 아내'라는 뜻같이 들려서 불쾌했다. 그것을 감추느라고,

"네, 이 산월이 때문입니다. 산월이 안 그렇소?"

"네, 네, 그렇습니다."

하고 산월이가 숭의 잔에 술을 친다.

숭 은 잔이 돌아오는 대로 술을 받아 먹었다. 하늘에 별들이 모두 궤도를 잃어버려서 어지러이 돌고, 인생이 모두 악마와 같은 빛과 소리를 가지고 함부로 날뛰었다. 도덕, 이상, 분투, 의무, 인격의 위신, 이런 것들은 모두 알코올에는 녹아 버리는 소금붙이었다.

얼마나 떠들었는지 모른다. 어떻게 떠들었는지도 모른다. 아마 새벽 세시는 되어서 숭은 비틀거리며 그 방에서 나왔다. 산월은 여전히 숭의 곁을 떠나지 아니하였다.

숭은 뒷간에를 가는 심인지, 여관을 가는 심인지 비틀거리고 걸어 나오다가 문 밖에 슬리퍼가 많이 놓인 방 앞에 우뚝 서며,

"어 이거, 웬 사람들이 밤이 새도록 술을 먹고 야단들야. 이러고 나라가 아니 망할 수가 있나."

하고 산월이가 애를 써서 붙잡아 끄는 것도 뿌리치고 쌍창을 드르륵 열었다. 그 안에는 칠팔 인의 술취한 얼굴들이 얼빠진 듯이 이 난데없는 침입자를 바라보았다. 그 얼빠진 얼굴들 틈에는 거의 동수나 되는 기생들이 끼여 앉아 있었다.

"여보, 누구신지 모르겠소마는 암 것도 없는 조선 사람으로 태어나서 이것들이 다 무슨 짓이란 말요? 다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서 좋은 사업을 하는 것이 아니라, 술을 먹어 밤을 새다니, 어 그게 무슨 짓이란 말요?"

하고 숭은 잘 돌아가지 않는 혀로 일장 연설을 하였다.

"이 어른 취하셨습니다."

하고 산월이가 허숭을 위해서 여러 사람에게 사죄를 하였다.

"이놈아."

하고 좌중에서 어떤 사람 하나가,

"그런 소리를 하겠거든 제나 정신이 말짱해 가지고 해야지, 글쎄, 백제 저부텀 눈깔에서 무주가 나오는 놈이 무에라고 지껄여, 이놈아."

하고 일어나 대들려고 한다.

숭은 주먹으로 대드는 데는 취중이라도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취중에라도 놀라지 아니할 수 없는 일이 있었다. 그것은 이 자리에, 이런 술과 계집 있는 자리에 있을 수 없는 사람들이 이 자리에 있는 것을 본 것이었다.

일, ○○학교 선생

이, ○○학교 선생

삼, ○○신문에 있는 사람

사, ○○신문에 있는 사람

모두 선생 달아 부르는 점잖은 사람들이다. 숭은 취중에도 놀랐다. 술이 갑자기 깨는 것 같았다. 숭은 뽐내던 호기도 다 없어지고 무엇을 생각하는 사람 모양으로 문지방 위에서 고개를 숙였다.

이때에 강변호사, 임변호사도 왁자지껄하는 소리를 듣고 따라 나오다가,

"허군, 허군."

하고 숭의 팔을 잡아 끌었다.

"아, 선생이시오?"

"오, 누구라고."

이 모양으로 방에 있던 패들은 대개 강변호사나 임변호사를 아는 사람들이어서 긴장하던 시국은 전환이 되고 말았다.

"허군이야, 허숭 변호사."

하고 강변호사는 좌중에 숭을 소개하였다. 다시 술자리가 벌어질 모양이다. 숭은 고개를 끄떡끄떡하여 인사를 하고 비틀거리며 현관으로 나왔다.

보이와 산월은 쓰러지려는 숭을 부축하여 자동차에 태우고 산월도 같이 올라앉았다. 자동차에 오른 숭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였다.

숭이 눈을 떴을 때에 숭의 눈에 띈 것은 눈에 익지 아니한 방 모양이다. 찬란한 화류 장롱, 양복장, 책장, 문갑, 책상, 교의 등 도무지 꿈도 꾸지 못한 것이다.

고개를 돌려 보니 곁에 누운 사람이 있다. 두어 자쯤 새를 떼어서 자리를 깔고 누운 젊은 여자가 있다. 숭은 깜짝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내가 어딜 와 있어?'

하고 숭은 눈을 크게 떴다. 목이 마르다, 입이 쓰다, 머리가 띵하다, 눈은 텁텁하다, 속은 쓰리다, 그리고 맘은 찜찜하다.

숭이가 벌떡 일어나는 바람에 가엾게 코를 골고 잠이 들었던 그 여자도 눈을 떴다. 그 눈은 처음에는 반가운 웃음으로 가늘게 빛났으나, 숭의 얼빠진 모양을 보고는 놀람으로 크게 둥글게 떴다. 그리고 그 여자도 벌떡 일어났다.

"난 여태껏 앉었다가 금시 잠이 들었어."

하고 제가 제게 잠든 것을 변명한다.

숭 은 그 소리의 임자가 산월인 것과 자기가 허숭인 것을 비로소 인식하고 어젯밤 강변호사와 술 먹던 생각이 대강대강 생각이 난다. 그렇지마는 술 안 먹던 이가 술취한 때에 흔히 그러한 모양으로 술이 어떤 정도까지 취한 뒤엣일은 도무지 기억에 떠오르지를 아니하였다. 다만 한 십 년 전, 한 만 리 밖에서 무슨 일이 생겼던 것 같다는 것만이, 마치 글자를 지워 버린 칠판에 글자는 없으나 씌었던 자국은 남은 것과 같았다. 무엇인지 모르나 결코 좋은 일은 아닌 상싶었다. 무엇으로 그것을 아나. 입맛이 쓰고, 머리가 띵하고, 맘이 찜찜한 것으로.

산월은 친절하게 준비하였던 밀수(蜜水)를 숭에게 권하였다.

"댁으로는 아니 가신다고 그러시고, 도무지 정신을 못 차리시길래 할 수 없이 우리집으로 뫼셔 왔죠."

하고 산월은 전기 난로의 스위치를 틀고 이불을 들어 숭의 앉은 몸을 둘러싸 주고 자기는 손을 요 밑에 넣고 앉으며,

"취 중이나 아니시면 선생님이 우리집에를 오실 리가 있겠어요? 창기의 집에를. 선생 같으신 좋은 뜻 가지신 이가 우리집에 오셔서 몇 시간이라도 계셨다는 것은 나 같은 사람에게는 일생에 다시 있지 못할 귀한 사건이고 기억이겠지요. 그러니까 과히 불쾌하게 생각 마세요."

하고 숭의 눈치를 엿보며 머리를 만진다.

숭이가 말없이 점잖게 앉았는 것을 보고 산월은,

"인 제 다 밝았으니 세수나 하시고 아침이나 잡수시고 가실 데로 가세요, 그렇게 무서운 얼굴 마시고. 제 집에서 나가실 때까지는 취한 대로 계셔요, 깨셨더라도 깬 체 마셔요. 사내 양반들은 술취한 때에만 참 저로 보이더군요. 선생님도 어젯밤에는 참당신을 보이셨지요, 꾸미지 아니한 적나라한…… 그래서 나는 술취한 사람이 제일 좋아요. 나는 술취한 사람들 보는 맛에 이 기생 노릇을 하고 살아간답니다. 도무지 그 술 안 취하고 도덕적인 젠틀맨들한테는 멀미가 났거든요. 에 그 거짓! 그 거짓! 오우 아보미네이션(가증스러움), 아보미네이션."

하고 목전에 가증한 것을 보는 것같이 몸을 떨었다.

산월의 말에는 열이 있었다. 크게 가증한 꼴을 당한 사람이 아니고는 이렇게 남자의 거짓에 대해서 깊이 불쾌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그 열이 숭의 말을 끌었다.

"왜 그렇게 남자를 저주하고 술주정꾼을 찬미하시오?"

하고 숭도 맘이 좀 풀렸다. 아직도 술이 다 깨지는 아니하였다.

"왜 남자를 저주하느냐고요? 아니오, 나는 남자를 저주하지 않습니다. 남자를 왜 저주해요? 남자가 없으면 여자들이 심심해서 어떻게 이 세상을 살아가요? 남자가 밥을 벌어 준다든지, 여러 가지 힘드는 일을 하여 준다든지 그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만 것은 소와 말을 부리고 또 기계를 이용해서라도 보충할 수가 있지마는 장난감으로 본 남자는 무엇으로도 리플레이스(대신)할 수가 없단 말야요. 그러니까 남자를 사랑하고 찬미하지요, 저주할 리가 있어요? 절대로 아니지요. 사랑하고 찬미하길래로 나 같은 년도 사내헌테 반해서 허덕이다가 속고 발길로 채어서 떨어졌지요―---아냐요, 아냐요, 하하하하, 고만 속에도 없는 소리를 해버렸네."

하고 산월은 분명히 술이 깬 것 같건마는 취한 체를 한다.

숭은 산월의 말과 태도에 얼마쯤 끌려들어서 굳어졌던 맘이 약간 누긋누긋하게 됨을 깨달을 뿐더러 도리어 일종의 유쾌함까지도 깨닫게 되었다.

"내 말이 무례한 말이거든 용서하시오."

하고 숭은,

"어찌해서 기생이 되셨나요?"

하고 물었다.

"그런 쑥스러운 문제는 집어치우구……."

하고 산월은 좀더 취한 태를 보이며,

"점 잖다는 사내들헌테 멀미가 났으니깐, 예배당이나 학교에서 만나는 신사들헌테 멀미가 났으니깐 부랑자 주정뱅이를 따라서 기생으로 나왔죠. 부랑자에게는 사랑과 용기와 의기가 있고 주정뱅이는 거짓이 없어요, 가작이 없구요. 참과 사랑과 용기와 의기―---이것은 조선서는 부랑자와 주정꾼에게서밖에는 얻어 볼 수 없는 것 같드군요. 저 여러 가지 체를 쓴 신사들은 ○○과에 잡아다 놓고 잔뜩 취하게만 해보오, 비로소 참 사람들이 될 것이니. 그야 그 작자들이 그 가식을 떼어 버리면, 그 회칠한 무덤 껍질을 벗겨 버리면 구려서 못 견디겠죠, 하하하하. 어디 껍질을 벗겨서 향내 날 사람이 몇 되던가, 하하하하, 선생님 안 그렇소? 왜 나오시다가 그 ○○○○선생님 축들 노는 방문을 활짝 열어제치셨지, 생각나셔요? 그 사람들이 ○○ 중에서는 제일 그래도 사람다운 사람들이오. 그래도 술을 먹어도 요릿집에 와서 먹거든. 안 그래요, 선생님. 아이 그렇게 점잔빼지 말구, 술 깨지 말아요, 내가 무어랬어요! 그렇게 가작 마시고 속에 있는 대로만 하셔요. 내 말이 듣기 싫으면 싫다고, 내가 귀여우면 귀여운 모양을 하셔요, 어젯밤 취하셨을 때 모양으로, 아, 이!"

하고 산월은 어리광 몸부림을 한다. 그러나 그 몸부림은 비통한 눈물에 젖은 것 같았다.

"난 가식하고 있는 것이 아니오. 본성이 이렇지. 난 지금 산월 씨 하는 말을 정신차려 듣고 있는데요."

하고 숭이 한마디하였다.

"그 러신 줄 알아요. 선생님은 정선이 집―---아니 참 처가댁에 계실 때부터 우리들 중에 문제가 되었더랍니다. 재주 있고 정직한 시골고라리로, 하하하하, 정말야요. 정선이도, 아이 용서하세요, 나 같은 년이 부인의 이름을 불러서, 그러니 무에라고 불러요? 아따 우리 취한 것으로 작정했으니깐 상관없지요. 정선이도―---부인께서도 선생님을 '우리 고라리'라고 했답니다, 정말야요. 그때에는 나는 분개했지요. 나도 선생님을 퍽으나, 아이구 무에라고 할까, 존경이라고 할까 했거든요, 지금도 그렇지만. 그래도 나는 소원 성취했어, 내가 좋아하는 양반을 이렇게 잠시라도 집에 뫼셔다 놓았으니깐 호호호호, 하하하하."

"그러기로 주정꾼 만나기 위해서 기생 된다는 데가 어디 있어요?"

하고 숭은 말하지 아니할 수 없는 의무를 느끼면서,

"그 것은 첫째로 저를 학대하는 것이요, 둘째로는 커뮤니티(단체)에 대한 빚과 구실을 잊어버린 것이란 말이지요. 어떠한 불평이 있다고 하더라도, 어떠한 핑계가 있다고 하더라도 당신과 같이 재주와 교육과 사회적 지위를 가진 이가 기생이 된다는 것은 용서할 수 없지요. 기생이란 사회에 무슨 유익을 준단 말요? 왜 간호부가 안 되시오? 왜 유치원 보모가 안 되시오? 왜 농촌 야학에 선생이 안 되시오? 당신만한 재주와 교육을 받은 이가 어디를 가기로 굶어 죽는단 말요? 간호부, 보모, 교사, 다 어떻게 사회에 봉사하는 직업이오? 그런데 기생이라면 부랑자와 술주정꾼, 사회에 아무 소용 없는 계급의 장난감밖에 더 되는 것이 무엇이오? 그도 원체 재산도 없고, 교육도 없고, 밑천이라고 몸 하나밖에 없는 여자면, 혹 부모헌테 팔려서, 혹 부모를 벌어 먹이느라고 기생이 되는 것도 할 수 없는 일이겠지요. 하지마는 당신 같은 이는 무슨 이유가 있단 말요?"

하고 열심으로 공박을 하였다. 산월은 가만히 듣고 앉았더니,

"그 렇지요. 기생이 맡은 파트라는 것이야 사회에 이로울 것 아무것도 없지요. 허지만 선생님, 세상이란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랍니다. 누가 기생 되고 싶어 된 사람 어디 있나요. 황진이 말도 있지마는 나는 다 믿지 아니합니다. 그렇지마는 서울 사오백 명 기생이, 물어 보면 다 부득이한 사정이 있답니다. 기생이 아니 되면 아니 될 사정이 있답니다. 누가 되고 싶어 된 것이었던가요? 마르크시스트의 말을 빌리면 제도의 죄라고도 하겠지요. 운명론자의 말을 빌리면 막비천명이라고도 하겠지요. 그러나 그렇게 일원적으로 깨끗하게 설명되는 것만도 아닌가 합니다. 어떤 기생은 어미 애비를 잘못 얻어 만난 탓도 있겠지요. 어떤 기생은 부모에게 대한 효성이라는 동기도 있겠지요. 또 어떤 기생은 에라 빌어먹을 것 하고 의식적으로 세상을 저주하고 술과 사내 속에서 아무렇게나 놀다 죽자 해서 된 이도 있겠지요. 또 나 모양으로 신사들에게 멀미가 나서 부랑자와 주정꾼의 참됨, 의기, 담대한 사랑 같은 것을 바라고 기생이 된 년도 있겠죠, 하하하하. 그러니까 인생이란 그렇게 단순하게 설명이 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선생님이 좋은 지위, 좋은 재산, 어여쁜 부인 다 내버리고 시골 구석에 가서 농촌사업을 하시는 것도 우리네가 기생 된 것과 같아서 단순하게 마르크시즘이나 운명론이나 이상론만 가지고도 설명이 안 될 것입니다. 그러니깐 나는 아무도 원망을 아니 합니다. 이건영에게 짓밟혔다고 원망을 아니 합니다. 아이고머니, 또 내가 속에도 없는 소리를 했네. 아뿔싸, 내가 이렇게 사설을 하다가는 선생님께 속 다 뒤집어 보이겠네. 아이 그런 소리는 다 해 무엇 해요. 아무려나 난 이건영이를 한번 술을 먹여서 그 가식을 다 벗겨 놓고 싶어요. 어떻게 하나 좀 보게."

숭 은 세수를 하고 산월이가 솔질해 주는 옷을 받아 입고 산월의 집 문 밖을 나서 전동 자기 여관으로 돌아왔다. 때는 오정이 지나고 새로 한시. 숭은 여관에 돌아온 길로 자리를 펴고 드러누워서 멀거니 어젯밤과 오늘 아침 일을 생각하였다. 분명히 숭은 인생의 아직 보지 못한 한 방면을 본 것 같았다. 그러나 아내 정선은 어찌 되었는가 하고 생각하는 동안에 숭은 노곤히 잠이 들어 버렸다.

숭은 아무리 하여도 집에 들어갈 생각이 없었다. 그것을 집이라고 생각하는 것부터 제게 대한 큰 욕인 것만 같았다.

숭 은 도리어 산월이가 그리움을 깨달았다. 그 믿지 못할 정선보다는 도리어 산월이가 미덥고 그리웠다. 다시 산월을 찾아갈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차라리 산월과 연애관계를 맺어서 정선에게 대한 원수를 갚을까 하는 생각도 났다. 에라, 또 어디 가서 술이나 먹을까, 산월을 불러 가지고 술이나 먹을까. 그러다가 취하거든 또 산월의 집으로 갈까, 이러한 생각도 났다.

산월은 미인이었다. 재주도 있었다. 더구나 기생으로 닦여 난 그의 친절하게 감기는 맛이 숭에게는 잊힐 수가 없었다. 숭은 여관에서 물끄러미 이런 생각을 하고 앉았을 때에 전등이 들어왔다.

'아뿔싸, 내가 타락한다.'

하고 숭은 머리를 흔들었다. 거기 붙은 부정한 무엇을 떨어 버리기나 하려는 듯이.

'내가 내 몸의 향락을 생각하느냐.'

하고 숭은 벌떡 일어나 몸을 흔들었다.

이러한 때에 숭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한선생이었다. 낙심되려 할 때에, 타락하려 할 때에 한선생은 항상 어떤 힘을 주었다. 숭이 생각하기에 한민교 선생은 큰 힘의 샘이었다.

숭은 모자를 벗어 들고 여관에서 뛰어나와 익선동 한선생의 집을 찾았다. 한참 못 보던 그 조그마한 대문, 꺼멓게 그을은 문패, 모두 숭이가 오륙 년 동안 눈익게 보아 오던 것이다.

대문을 열어 주는 것은 한선생의 딸이었다. 한 반년 못 본 동안에 퍽 자란 것 같았다. 그는 숭을 친형과 같이 반갑게 맞았다.

"선생님 계시오?"

"네."

"손님 오셨소?"

"네, 그저 늘 같은 손님이지요."

하는 동안에 마루 앞에 다다랐다. 이것이 양실이라는 마루다.

"양실 안 쓰시오?"

하고 숭은 구두 끈을 끄르며 물었다.

"안 써요."

하고 정란은 부끄러운 듯이 고개를 숙였다. 한선생의 생활이 더욱 고난해져서 겨울에 석탄값 들고 전등값 드는 양실을 폐지하고 안방 하나만을 쓰는 것이었다.

안방에는 아랫목에 한선생이 앉고 발치에 부인이 앉고 그리고도 청년 사오 인이 둘러앉았다. 발치 부인 곁 빈틈은 필시 정란이가 앉았던 자리라고 숭은 추측하였다.

"아, 허변호사!"

하고 한선생은 벌떡 일어나서 숭의 손을 잡아 흔들며,

"언제 왔소?"

하 고 반갑게 벙글벙글 웃었다. 그 얼굴은 더욱 수척하여서 뺨의 우묵어리에 그림자가 생기고 눈가죽과 입술에 늙은이 빛이 완연하게 보였다. 더구나 이가 여러 개가 빠진 것이 한선생을 더욱 늙게 보였다. 그것이 숭의 가슴을 아프게 하였다.

"어젯저녁에 왔습니다."

하고 숭은 늦게 찾아온 것이 미안하다는 것을 표정으로 보였다.

"지금도 우리는 농촌사업 이야기를 하고 또 허변호사 말을 하고 있었소.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고, 하하하하. 자, 여기 앉으우. 손이 차구려. 그 동안 중병을 하신 데도 내가 가보지도 못 하고, 자 이리 와 앉으우."

하고 자기가 앉았던 자리를 숭에게 내어주고 자기는 문 밑으로 나앉는다.

숭은 한선생의 성격을 잘 알므로 사양하지 아니하고 한선생이 내어주는 아랫목 자리에 앉았다. 거기는 딸 정란이 짠 얇단 방석이 깔리고 퍽 따뜻하였다.

"부인 안녕하시오?"

하고 한선생은 아직도 반가운 웃음이 스러지지를 아니하였다.

"네."

하고 숭은 힘없는 대답을 하였다.

"재판소에 일이 있다고? 내 일전 부인을 만나서 들었소."

하고 한선생은 인사하는 것도 어디까지든지 정성을 다하였다.

"아이그, 허변호사가 병이 중하시니 어찌하느냐고, 가신다고 그리셨지요. 그러니 노자가 있어야 가시지. 가엾으셔요."

하고 부인은 한선생을 보고 웃는다.

한 선생은 교원 자격이 없다는 이유로 금년까지에는 학교에서 보던 모든 시간을 다 내어놓았다. 학무과에서 보기에는, 또 젊은 학감이나 교무주임이 보기에는 교원 자격이 없는 한선생은 서 푼 어치 가치도 없었다. 그래서 인제는 한선생은 그나마 양식값이나 들어오던 수입도 다 없어지고 말았다. 선생의 세계이던 양실을 폐지한 것도 이 때문이다. 선생의 필생의 사업인 청년 교제를 할 자리가 없어졌다. 그래서 안방을 청년 교제하는 처소로 쓰게 된 것이다.

앞 으로 한선생의 생활을 보장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가 집과 세간과 있는 것을 다 팔면 이태 동안을 굶어 죽지 아니하고 살아갈는지 모른다. 한선생은 그것으로 만족할 것이다. 그는 앞으로 이 년간 청년 중에서 동지를 구하고, 청년을 조직하고 훈련하는 일의 준비를 하다가 더 먹을 것이 없이 되는 날, 그는 행랑살이나 하인으로 들어갈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런 생각도 할 여유가 없다. 그는 낮이나 밤이나 참된 젊은이를 만나서 조선의 이상을 말하고, 조선 사람이 앞으로 해나갈 일의 계획을 말하고, 청년의 사명을 말하고, 조선의 희망과 자신을 말하고, 이리하여 한사람 한사람 조선의 힘있고 미쁜 아들을 구하는 것으로 일을 삼고 의무를 삼고 낙을 삼았다. 이렇게 하는 것이 조선에 대한 은혜 갚음의 오직 한 길이요, 또 조선을 건짐의 오직 한 길이요, 자기의 일생을 값있게 하는 것의 오직 한 길이었다. 아니 지금에는 이 일은 의식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요, 고만 천성을 잃어버린 것이었다.

그 러나 청년들은 반드시 한선생의 뜻대로만 되지 아니하였다. 한선생의 집에 자주 다니는 동안 그들은 다 한선생의 뜻을 따르는 제자라면 제자요, 동지라면 동지지마는 학교를 졸업하고 혹은 직업전선으로, 혹은 해외 유학으로 이태, 삼 년 떠나 있으면 아주 배반까지 아니한다 하더라도 대부분 맘이 식어 버렸다. 어찌하여 조선 사람의 맘은 이렇게 속히 식는고, 어찌하여 한번 작정하면 일생을 변치 아니하고, 한번 허락하면 죽어도 고치지 아니하는 사람이 많지 못한고 하고 사람들은 한탄하였다. 이것이 조선이 쇠하여진 까닭인가고 낙담하는 이도 있었다.

이 날 밤 화제는 신라의 화랑도에 이르렀다. 신라 진흥왕 때에 민기가 점점 쇠잔하고 백제와 고구려의 침노가 쉴 날이 없을 때에 왕은 욕흥방국(나라를 일으키고자)의 목표로 인재배양, 인재등용의 기관을 삼기 위하여 단군의 옛날로부터 내려오는 정신을 기초로 하여 아름다운 여자를 골라 원화(源花)를 삼고 삼백여 명의 청년을 모아 옳음으로 서로 갈고, 노래와 풍악으로 서로 기꺼하게 하며, 산과 물에 노닐어 즐기어 인재를 고르고 인재를 훈련하게 하여 어질고 충성된 신하와 재주 있고 용기 있는 장졸이 여기서 나게 하였으니, 그들은,

일, 임금을 충성으로 섬기고

이, 어버이를 효도로 섬기고

삼, 벗을 미쁨으로 사귀고

사, 싸움에 나아가 물러감이 없고

오, 산 것을 죽이되 가리어 한다

는 다섯 가지 계를 가져 의를 위하여는 목숨을 털같이 여기고, 한번 허락하면 죽기까지 변함이 없었다. 충간의 담이 그들의 본색이요, 의를 무겁게 이름과 이와 죽기를 가볍게 여긴 것, 사다함(斯多含), 무관(武官), 부례(夫禮), 관창(官昌), 해론(奚論), 소나(素那), 귀산(貴山) 등의 의기 있는 이야기를 들으매 청년들은 조상의 갸륵함이 고맙고 저마다 그 정신을 배우기를 속으로 작정하였다.

"선생님, 저는 오늘 맘에 괴로움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힘을 얻으려 선생님을 찾았습니다. 인제 힘을 얻었으니 저는 갑니다."

하고 숭은 사람들이 이상히 생각함도 관계 않고 인사하고 나왔다. 그의 맘에는 기쁨과 용기가 있었다.

숭 이가 기쁨과 힘을 얻은 것은 반드시 화랑 이야기에서만 아니다. 화랑 이야기는 당연히 조선의 젊은 사람의 기운을 돋울 일이지마는 그것보다도 힘이 있는 것은 한선생의 쉼 없는 노력과 떨어짐 없는 희망이었다. 잘되어 가는 일에 재미를 붙이고 희망을 붙이는 것이 아니라, 도무지 잘되지 아니하는 일에 그리하는 것이 더욱 감격되는 것이었다. 그의 일생의 노력의 결과가 무엇이냐 하면, 그것을 화폐 가치로 환산할 것이 없음은 물론이지마는 화폐말고라도 무슨 숫자로 표현할 성적이 별로 없었다. 그는 매일 사오 인의 청년을 만나니 일년에 천여 명 청년을 만나는 것이다. 그것이 비록 다 새사람이 아니라 하더라도 대단히 큰일이라고 아니 할 수 없다. 그러나 이 일의 뜻을 알아주는 사람이 몇이나 되나. 진실로 알아준다면야 의식이 걱정될 까닭은 없을 것이다. 이렇게 심 안 맞는 노릇이 또 어디 있을까.

숭 이가 하는 노릇도 심 안 맞는 노릇이다. 그렇지마는 조선이 오늘날에 가장 크게 요구하는 것이 이 심 안 맞는 노릇이 아닌가. 심 안 맞는 이 노릇을 하는 사람이 많아야 할 터인데 적어서 걱정이다. 모두들 이해관계가 분명하고 너무들 똑똑해서 저 한몸에 이로움이 없는 일을 매달고 쳐도 아니 하려 드는 이때다. 조선은 똑똑하지 못한 사람을 기다린다. 어리석어서 저 한몸의 이해를 돌아볼 줄 모르는 사람을 구한다. '제 앞 쓸이'는 정돈된 사회에서만 쓰는 처세술이다. 어떤 민족이 다른 민족보다 대단히 많이 떨어져서 모든 것을 새로 설시하고 부리나케 따라가려 하는 때에는 남의 앞까지 쓸어 주는 사람이 많지 아니하면 아니 된다. 마치 아이들을 많이 데리고 다니는 어른 모양으로. 그러므로 그런 사람은 밤낮 고생이다. 남에게 고맙다는 소리 못 듣고, 도리어 미친 사람이라는 비웃음 받고, 약빠른 사람들에게 조롱거리가 되는 것이다. 한선생이 그러한 사람이 아니냐. 숭이도 장차 그러한 사람이 되려고 하는 것이다. 돈도 없고, 세력도 없고, 명예도 없는 사람이. 땅 속에 묻히는 사람이. 만일 이러한 운동이 공을 이루어 큰 집이 지어지는 날이 있다고 하면 한선생이나 숭 자신이나 다 수십 척 깊이깊이 묻히는 기초공사에 쓰이는 한 덩이 벽돌이다. 한선생은 이 조금도 빛나지 않는 소임을 만족히 여기고 파멸되어 가는 개인생활을 도무지 염두에 두지 아니하는 것이 숭에게는 더할 수 없이 부러웠다.

'오냐, 나는 가정을 파괴해 버리자.'

이렇게 숭은 교동 골목을 내려오면서 결심하였다.

'원래 나는 혼인을 아니 해야 옳은 사람이다!'

하고 숭은 혼인이라는 것이 어떻게 사람을 속박하고(특별히 사람의 정신을) 사람의 정력을 허비하는 일인 것을 알았다.

'수천만 동포로 하여금 행복된 가정을 가지게 하기 위하여 우리는 가정을 가지지 말자.'

하는 것이 어떤 작가의 말이다.

'장가를 아니 든 이는 장가를 들지 말고, 시집을 아니 간 사람은 시집을 가지 말라.'

한 예수의 사도 바울의 말의 뜻이 새삼스럽게 알려지는 것 같았다.

'옳다, 나는 가정을 깨뜨려 버리자. 나는 일생을 혼자 살면서 농촌 일을 하자. 농촌으로 내 애인을 삼고 아내를 삼자. 정선은 맘대로 뜻 맞는 남편과 다시 혼인해서 살라고 하자.'

이렇게 생각하고 숭은 아내 정선에게 대한 모든 미움을 쓸어 버리고 집―---정선의 집으로 빨리 걸었다.

숭은 거의 반년 만에 내 집 문 앞에 섰다. '許崇'이라고 쓴 그의 문패가 그를 조롱하는 것 같았다.

숭 은 문 앞에 서서 눈을 감고 감시 생각에 빠졌다. 첫째로 생각나는 것은 장인이 이 집을 마련해 준 뒤에 저와 정선과 두 사람이 날마다 와서 몸소 목수와 도배장이를 감독하여 집을 수리하던 일이다. 스위트홈을 그리고 꿈을 꾸던 그때 일이 그립기도 부끄럽기도 하였다.

숭은 그때에 유순에게 대한 미안이 염통 속에 박힌 철환 모양으로 행복된 맘을 아프게 하던 것을 기억한다. 정선은 유순보다 교육이 높고, 돈이 많고, 세력이 있기 때문에 제가 그리로 끌리는 것이 아닌가 하고 스스로 부끄럽던 것을 기억한다.

만 일 정선과의 혼인을 아니 하였더면, 유순과 혼인을 하였더면 이런 불행은 없었을 것이다. '저놈 돈 따라 장가든다' 하는 명예롭지 못한 소문만 남기고 이 꼴이 아니냐. 숭은 마치 양심이 허락지 아니한 행위, 사욕에 끌린 행위에서 오는 면치 못할 벌을 받는 것같이 생각하였다.

아 내가 미인이라고 스위트홈이 되는 것이 아니었다. 고등한 교육을 받았다고 스위트홈이 되는 것도 아니었다. 좋은 집이 있고 돈이 있고 지위가 있고 건강이 있고 사람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다 있다고 스위트홈이 되는 것이 아니었다. 숭이란 남편, 정선이란 아내, 이들이 어디가 부족하냐. 누가 보더라도 어느 모로 보더라도 맞는 짝이 아닐 수 없건마는 그들은 불행하지 아니하냐.

그러면 그 불행은 어디서 오는 것이냐. 성미가 맞지 아니함? 성미란 무엇이냐, 숭은 얼른 대답할 수가 없었다.

숭은 뒤숭숭한 생각을 잊어버리기나 하려는 듯이,

"문 열어라!"

하고 크게 소리를 쳤다. 안에서는 주인 없는 집에 하인들만 안방에 모여 앉아서 지껄이고 있었다. 이때에는 정선은 봉천 가는 차를 타고 떠난 뒤였었다.

"에그머니, 영감마님 목소리야!"

하고 유월이가 눈이 똥그래졌다.

"에라, 얘 미친년 소리 마라, 영감마님이 어디를 온단 말이야. 잿골 서방님이 오시면 오시지."

하고 어멈이 유월을 오금을 박는다. 그는 영감마님에는 경어를 아니 쓰고 잿골 서방님에는 경어를 썼다. 이때에 또,

"문 열어라."

하고 소리가 첫번보다는 좀 크게 들렸다.

"자, 아냐?"

하고 유월은 이긴 자랑으로 어멈을 한번 흘겨보고,

"네에."

하고 일어나 뛰어나간다. 유월이가 나간 뒤에 어멈, 침모, 차집의 무리는 황겁하여 모두 주섬주섬 거두어 가지고 방바닥을 쓸고 뛰어나간다.

"삐걱."

하고 문이 열리며 유월의 얼굴의 쏙 보여졌다.

"에그머니, 영감마님 오셨네."

하고 유월은 너무나 반가워서 숭에게 매어달릴 듯하였다. 그러다가 신분이 다른 것을 깨닫고 중지하는 것 같았다.

이 집에서 진실로 숭을 그리워하는 것은 유월이뿐이었다. 온 집안 식구가 다 숭을 업신여기니깐 그 반감으로 그런지도 모르지마는 유월은 진정으로 숭을 그리워하였다.

숭은 유월의 머리를 만지며,

"잘 있었니?"

하고 문지방 안에 한 발을 들여놓았다.

"마님은 시골 가셨는데, 아까 차로."

하고 유월이가 곁붙어 들어오면서 걱정하였다.

"시골 갔어?"

하고 숭은 아내가 시골 갔다는 유월의 말에 아니 놀랄 수가 없었다.

"시골? 어느 시골?"

"영감마님 계신 시골 가셨어요."

하고 유월은 적당한 말을 발견하기 어려운 듯이 몸을 꼰다.

방 에 들어오니 그래도 낯익은 곳이었다. 비록 길지는 아니하나 새로운 젊은 부부의 기억을 담은 방이었다. 벽에 걸린 그림들, 책상, 의장 모두 예나 다름이 없었다. 벽 옷걸이에 걸린 정선의 입던 치마, 두루마기도 예와 같은 모양이었다. 하나 다른 것은 방 안에 담배 냄새가 나는 것이었다. 재떨이에는 반씩 남은 궐련 끝이 여러 개가 있었다. 정선이가 담배를 먹는가, 정선을 찾아온 남자, 또는 남자들이 먹은 것인가, 잠깐 그것이 숭을 불쾌하게 하였다.

"시골 가셨어?"

하고 숭은 외투도 아니 벗은 채 아랫목에 다리를 뻗고 앉으며 대문간에서 유월에게 금시 들은 말이 미덥지 아니한 듯이 잼처 물었다.

"네에."

"아까 차에?"

"네에."

"어느 시골?"

아무리 해도 정선이가 저 있는 곳에 갈 것 같지는 숭에게는 생각히지 아니하였다. 만일 진실로 정선이가 남편을 따라서 살여울로 갔다고 하면 숭이 지금까지 아내에게 대해서 가졌던 생각을 다 교정하지 아니하면 아니 될 것이다.

"영감마님 계신 시골이죠."

하고 유월은 제가 무슨 잘못된 말이나 한 것이 아닌가 하고 방 치우던 손을 쉬고 물끄러미 숭을 쳐다본다.

숭은 눈을 감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어젯밤에는 몇 시에 돌아오셨든?"

하고 얼마 있다가 숭은 눈을 떠서 유월을 보며 물었다.

"네?"

하고 유월은 어찌 대답할 바를 몰랐다.

"자정에도 아니 돌아오셨다고 했지?"

하고 숭은 증인을 심문하는 법관 모양으로 차게, 사정없게 물었다.

"자정에요?"

하 고 유월은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을 본 사람같이 눈을 둥그렇게 뜬다. 그리고 어젯밤 자정에 받은 난데없는 전화, '글쎄, 음성이 이상하게 귀에 익더라니' 하였던 그 전화가 그러면 주인의 전화였던가. 그러면 주인은 마님이란 이가 잿골 서방님이란 사내하고 밤중까지 바람이 나서 돌아다니던 일을 다 알고 있는 모양인가 하고 유월은 숭의 눈이 무서운 것 같았다. 저도 숭에게 무슨 큰 죄를 지은 것 같았다.

"몇 신지 모르겠어요."

하고 유월은 대답하였다. 한시 반이나 되어서 들어왔단 말은 차마 나오지 아니하였던 것이다.

숭은 더 묻고 싶은 말이 많았으나 묻는 것이 도리어 제 위신에 관계하는 것 같아서 입을 다물었다. 백 가지 말 다 듣지 아니하여도 정선이가 왜 저를 찾아갔는지 그것만 알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은 알 도리가 없었다.

"진지 잡수셨어요?"

하고 유월이가 슬쩍슬쩍 눈치를 보아 가며 물었다.

"나가 먹고 올 테니 자리 펴놓아라."

하고 숭은 그대로 일어나 나왔다.

열 시나 되어서 숭은 저녁을 사먹고 짐을 가지고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방에는 숭이 정선과 혼인할 때에 덮던 금침이 깔려 있었다. 이것은 정선의 유모가 특별한 생각으로 꺼내어 깐 듯싶었다. 정선과 숭과의 애정이 이로부터 회복되리라는 뜻으로.

숭은 자리에 누워서 멀거니 눈을 뜨고 이생각 저생각 하였다.

부부의 관계란 그렇게 끊기 쉬운 것일까.

'Free love, free divorce(사랑도 자유, 이혼도 자유).'

이 러한 문자도 들었고, 문명했다는 여러 외국에서는 실지로 그것이 실행된다는 말도 들었다. 그러나 숭에게는 혼인이란 그렇게 가르기 쉬운 매듭 같지 아니하였다. 그것이 묵은 동양사상일까. 또는 예수교의 사상일까. 그럴는지 모르지마는 어느 남자가 어느 여자를 한번 사랑했다 하면, 그것이 정신적인 데 그친다 하더라도 벌써 피차의 정신에서 지워 버릴 수 없는 자국을 남기는 것이 아니냐. 숭은 그것을 저와 유순과의 관계에서 본다. 유순에게 대한, 발표는 아니 한 사랑이 숭의 지금까지의 생활에 끊임없는 양심의 찌름을 주지 아니하는가. 숭의 생각에는 이로부터 백 년을 살더라도 제가 유순에게 가졌던 사랑의 흔적은 스러질 것 같지가 아니하였다.

그 러하거든 하물며 혼인이라는 중대한 맹약을 통하여 이뤄진 부부의 관계랴. 정신과 육체가 다 하나로 합하여진 부부의 관계랴. 설사 정선과 일생을 서로 떠나 있기로 숭의 가슴에서 정선의 그림자가 떠날 줄이 있으랴. 설사 정선이가 죽어 버린다 하더라도 그가 숭에게 주던 기쁨의, 슬픔의, 사랑의, 아니 이 모든 것을 합해 놓아도 꼭 그것이 되지 아니할 그 어떤 무엇은 영원히 숭의 몸과 맘에 배고 스며서 빠지지를 아니할 것 같았다. 하물며 여자 편에서는 남자의 정액을 흡수하여 체질에 일대 변혁을 일으킨다 함에랴. 정선의 몸과 맘에는 영원히 지워지지 아니할 숭의 낙인(단 쇠로 지져서 박은 인)이 찍힌 것이 아니냐.

숭 에게 있어서는 혼인은 다만 법률적 계약행위만은 아니었다. 법률이 규정하는 것은 혼인의 법률적 일면뿐이다. 도덕이 규정하는 것은 혼인의 도덕적 일면뿐이다. 혼인에는 예술적 일면도 있고 생물학적 일면이 있는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종교적 일면도 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다 모아 놓더라도 그것이 혼인이란 것이 가진 모든 뜻을 다 설명하지는 못할 것이다.

'무슨 신비한 것.'

이 렇게 숭은 생각하였다. 인생에 신비한 것이 있다고 하면 그것은 부부관계일 것이다. 전연 아무 관계 없는(불교에서 말하는 모양으로 전생 타생의 인연이란 것이 있다면 몰라도) 두 생명이 서로 누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자라나서 일생의 운명을 같이한다는 것은 참으로 신비한 일이 아니냐.

'두 몸이 한 몸이 된다.'

는 우리 조선의 생각이나 불교의 다생인연설이나 다 이 부부의 신비성을 말한 것이 아닐까 하고 숭은 길게 한숨을 쉬었다.

'내 생각이 구식이어서 이런가. 남들은 이 시대에는 정말 사랑도 자유, 이혼도 자유라는 주의로 가는데 나 혼자만 혼인이란 것을 이렇게 신비하게, 신성하게 생각하는가. 만일 우리 다를 위해서 나 하나를 희생하는 경우면 몰라도 나 하나의 향락을 위해서 혼인의 신성을 깨뜨릴 수가 있을까. 내가 톨스토이 모양으로 도덕에 너무 엄숙성을 많이 가진 때문일까.'

숭은 이러한 생각을 하였다.

'그 러나 우리 가정은 벌써 파괴된 것이 아닌가. 파괴되었다고 보는 것은 내 잘못된 생각인가. 이박사의 말을 잘못 믿은 것이 아닌가. 경성역 앞에서 번뜩 본 자동차, 그 속에 앉은 두 남녀, 정선과 갑진, 그것도 잘못 본 것이었던가. 밤에 늦게 돌아온 것이 반드시 실행의 증거가 될 수 있을까. 모두 내 잘못된 판단이 아닐까.'

숭의 눈에는 고운 때묻은 아내의 치마와 저고리가 띄었다.

아 침에 눈이 뜬 때에는 아직 방은 캄캄한데(그것은 겹창을 굳게 닫은 탓이었다) 전기 난로의 마찰음이 들릴 뿐이었다. 유월이가 새벽에 들어와서 피워 놓은 것이다. 방은 마치 이른 여름과 같이 유쾌하리만큼 온화한 기후다. 이 공기를 뉘라서 대소한 서풍의 아침 공기라 하랴.

숭 은 베개 밑을 손으로 더듬어 전기등 스위치를 꼭 눌렀다. 그것은 조그마한 가지 모양으로 생긴 것으로 하얀 뼈 꼭지가 달린 것이다. 불이 꺼졌을 때에 그 꼭지를 누르면 켜지고, 켜졌을 때에 그 꼭지를 누르면 꺼지는 것을 길단 코드라는 줄에 매어 베개 밑에 넣고 자면서 자유자재로 등을 켰다 껐다 하게 생긴 매우 편리한 기계다.

'이거를 조선 집집에 맨다면.'

하고 숭은 그 황송스럽게도 편리하게 만들어 놓은 스위치로 불을 켜고 나서도 손에 든 채로 한탄하였다. 책상에 놓인 옥시계의 바늘은 여덟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밖 에는 해도 떴을 것이다. 혹은 바람이 불고 눈이 올 것이다. 그러나 겹겹이 닫은 이 방 안에는 그러한 불필요한 바깥 소식은 아니 들린다. 만일 필요한 소식이 있다고 하면 문 열지 아니하고도, 찬바람 들이지 아니하고도 통할 수 있는 전화로 올 것이다. 일어날 필요도 없는 살림, 가만히 누워 있다가, 버둥거리다가, 또는 희롱하다가 하도 그것이 지루하면 일어나는 것이다.

네 벽에 늘인 모본단 방장. 그 모본단은 결코 인조는 아니다. 대부분이 정자 비단실로 된 교직이다. 이것은 다 혼인 예물들이다.

숭이 만일 전등 스위치 곁에 놓인 초인종을 꼭 한번 누른다 하면 유월이가 세숫물과 빵과 과일과 우유를 들고 뛰어들어올 것이다. 이것은 숭이 신가정을 이룬 뒤로부터 습관이 된 아침밥이다.

숭 이가 세수를 끝내면 유월은 빨아 다린 크고 부드러운 타월을 팔에 걸고 있다가 두 손으로 받들어 드릴 것이다. 그리고 숭이나 정선이가 머리를 빗거나 면도를 하거든 그 동안에 유월은 갈아입을 내복 기타 새옷을 자리 밑에 묻을 것이다. 그것도 꾸김살이 안 지도록, 고르게 녹도록 조심을 하여서. 그리고 숭이나 정선이가 옷을 갈아입을 때에는 유월이가 곁에 서서 한가지씩 한가지씩 집어 섬길 것이다. 혹 차례를 잘못 아는 일이 있으면 그는 정선에게,

"왜 정신을 못 차려!"

하고 단단한 꾸중을 한마디 얻어들을 것이다.

옷 을 다 갈아입으면 숭과 정선은 팔을 끼고 웨딩마치를 휘파람과 입으로 부르면서 건넌방으로 간다. 건넌방은 식당으로도 쓰고 숭의 서재로도 쓰는 양식 세간을 놓은 방이다. 방 한가운데 놓인 둥근 테이블에는 붉은 테이블보 위에 하얗게 빨아 다린 식탁보를 깔고 토스트 브레드, 우유, 삶은 달걀, 과일, 냉수, 커피 등속이 다 상등 제 기명에 담겨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여기서 숭과 정선은 의분이 좋은 때면 서로 껴안고 행복된 키스와 축복을 하고 아침을 먹을 것이다. 밤에 잘 자고 아침 세수와 단장을 마친 그 프레시한 아름다움은 오직 내외간에만 보고 보일 특권을 가진 것이었다.

"어린애가 하나 있었으면."

하고 정선은 찻숟가락 자루로 식탁보를 긁으면서 말할 것이다.

"당신같이 생긴 어린애가 요기 요렇게 앉었으면."

하고 정선은 낯을 붉힐 것이다.

"정선이 같은 딸을 나우."

하고 숭은 일어나 정선의 머리를 만지며 위로하였을 것이다.

정선은 아침 목욕과 샤워 배스를 퍽 좋아해서 집에다가 그 설비를 한다고 날마다 말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 건물에 서양식 욕실을 만드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놈의 것 팔아 버리고 양옥을 하나 지읍시다."

하고 정선은 목욕탕 이야기가 날 때마다 화나는 듯이 이러한 한탄을 하였다.

"조 선집에야 글쎄 방이 작아서 살 수가 있나. 피아노 하나를 들여 놓으면 꼭 차지, 테이블 하나를 놓으면 꼭 차지, 침대 하나를 놓아도 꼭 차지. WC를 가자면 십 리나 되지, 안방에서 사랑에를 나가자면 외투, 목도리까지 해야 하지, 글쎄 우리 조상은 왜 집을 이렇게 망하게 짓고 살았어, 어."

하고 정선은 짜증을 내었다.

"터는 괜찮어, 우리집도."

하고 정선은,

"이걸 헐어 버리고 양옥을 지읍시다."

하고 남편을 보고 보채었다. 숭은 이러한 정선의 말을 들을 때마다 어떤 때에는 제가 아내의 뜻대로 활활 해줄 힘이 없는 것이 이롭기도 하였고, 어떤 때에는 이때 조선 형편에 나 한몸의 안락만 생각하는 아내의 맘보가 밉기도 하였다.

그 러나 정선의 생각은 어떻게 하면 하루바삐 맘에 드는 양옥이 실현될까, 맘에 드는 세간이 장만되고, 한번 모든 것이 다 맘에 들게 해놓고 살아 볼까 하는 데만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남편 되는 숭이 정선의 이 뜻, 이 간절한 뜻, 이 마땅한 뜻을 알아주지 못하는 것이 기가 막힐 일이었다. 남편이란 것은 아내의 이러한 정당한 생각을 알아차려서 속히 실현해 줄 능력과 성의를 가지는 것이 정선의 부부관이었다. 남편이란 무엇에 쓰는 것이냐, 그것은 아내를 기쁘게 하기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냐. 남편으로서 아내를 기쁘게 하는 능력을 잃는다 하면 그것은, 정선이 보기에는 짠맛을 잃은 소금이 아니냐. 짠맛을 잃은 소금 같은 남편은 정선에게는 이상적 남편이 될 수는 없었다.

게 다가 남편으로서 아내를 기쁘게 하는 기술이 숭에게는 없었다. 정선은 먼저 혼인한 동무들에게서와 지나가는 이야기로 내외생활―---일반 남녀생활의 깊은 재미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으나 숭에게서는 그러한 것을 얻어 볼 수가 없었다. 숭은 너무 점잖았다. 너무 아내인 저를 존경하였다. 너무 엄숙하였다. 정선은 기교적인 것이 소원이었으나 숭에게는 그런 것을 바랄 수가 없었다.

숭은 아내의 이 요구를 노상 모르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숭은 인격의 존엄으로 보아서 아내의 그 요구에 응할 수는 없었다. 숭은 아내의 도덕적 수준을 제가 가지고 있는 곳까지 끌어올리려고 해보았다. 그래서 한선생을 집으로 청하기도 하고, 또 성경, 기타 정선이가 체면상으로라도 홀대할 수 없는 책에 있는 말도 인용하여,

일, 섬김.

이, 구실.

삼, 맡은 일.

사, 금욕.

오, 우리를 위한 나의 희생.

육, 구실과 맡은 일을 위한 나 한 사람, 또는 내 한 집의 향락의 희생.

칠, 주되는 일은 민족의 일, 개인이나 나 가정의 일은 남은 틈에 할 둘째로 가는 일.

팔, 평등, 무저항.

이러한 제목으로 많이 토론도 해보았다.

정 선은 이러한 말을 잘 알아들었다. 그 말에 해당한 영어까지도 잘 알았다. 그래서 숭이가 조선말로 말하는 데는 곧 그것을 영문으로 번역을 하고는 '오우케이', '올라잇', '굿', '언더스탠드' 하고 어리광삼아 장난삼아 농쳐 버리는 것이 예사였다. 그러면 숭도 하릴없이 웃어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혼자 해석하는,

'물 론 정선이도 이러한 생각을 잘 안다. 잘 알뿐더러 그러한 주의를 가지고 있다. 정선과 같이 영리하고, 고등교육을 받고, 또 얌전한 사람이 아니 그럴 리가 없다. 그는 조선이 요구하는 새로운 딸의 하나일 것이다―---그렇지 아니해서는 아니 된다.'

이렇게 생각하고 혼자 위로하였다. 그리고 장난꾼이 모양으로 제 앞에서 응석을 부리는 정선을 정답게 생각하였던 것이었다―---이런 생각을 하며 숭은 자리옷을 입은 채로 자리 위에 일어나 앉아서 방 안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불 현듯 정선이가 그리웠다. 그의 상긋상긋 웃는 모양이, 또는 시무룩한 모양이, 또는 자다가 깨어서 눈도 잘 아니 떨어지던 모양이, 그의 발끈하던 모양이, 남편이 아니고는 가질 수 없는 정선에게 관한 여러 가지 포즈와 태도의 기억이 벽에, 장에, 눈을 돌리는 대로, 눈을 감으면 눈 속에 어른거렸다. 정선의 입김이 숭의 뺨에 닿는 것도 같고, 팔이 목덜미에 스치는 것도 같았다. 정선의 향기가 코에 맡겨지는 것도 같았다. 숭은,

'정선이란 내게서 뗄 수 없는 존재다. 정선은 내 조직 속에 스며든 존재다!'

하고 숭은 빗질 아니 해서 허트러진 머리를 흔들었다.

숭의 가슴속에는 정선에게 대한 그리운 생각이 못 견딜 압력으로 북받쳐 오름을 깨달았다. 숭의 의지력으로 거기 반항하여 내리누르려 하였으나 되지 아니하였다.

'맘 변한 계집을.'

하고 일부러 정선에게 대한 반감을 일으키려 하였으나 그러한 때에는 뉘우침의 눈물에 젖은 가련한 정선의 모양이 눈앞에 떠나와 더욱이 숭의 맘에 동정하는 생각이 넘치게 한다.

정 선은 귀여운 아내가 아니냐. 그를 버려 둔 것은 남편인 숭의 잘못이 아니냐. 귀여운 아내는 귀여운 아내로서 저 맡은 인생의 직분을 다하는 것이 아니냐. 어린애의 이기적인 것이 귀여움의 한 재료가 되는 것과 같이 귀여운 아내는 이기적이요, 아닌 것을 도무지 문제삼을 것이 없는 것이 아니냐. 귀여운 아내라는 것은 꽃이 아니냐. 열매 맺는 것은 치지하고도 꽃에는 꽃만으로의 값이 있지 아니하냐. 남편은 나를 잊고 우리만 알 때에 아내는 나를 생각하게 생긴 것도 조화의 묘가 아닐까. 만일 아내가, 어미가 저를 잊고 제 집, 제 자식, 제 서방을 잊고 다닌다면 집안이 꼴이 될 것인가―---이렇게 숭은 제가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여자관, 아내관을 정정도 해보았다.

이 렇게 제 생각을 다 정정해 놓고 보면 정선에게는 미워할 데는 없고 오직 그립고 사랑스럽기만 하였다. 그뿐더러,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정선을 제게서 독립한 다른 개체라고 생각하지 아니하고, 부부란 신비한 화학적인 작용으로 결합된 한몸이라는 숭 본래의 부부관과 일치하는 것 같았다.

숭은 미친 듯이 일어나서 정선의 베개를 내려 그 약간 때묻은 데에 코를 대고 정선의 향기를 맡았다. 그리고는 벽에 걸린 정선의 옷을 벗겨서 향기를 맡고 또 가슴에 안았다.

"영감마님 주무세요?"

하고 유월이가 문 밖에서 불렀다.

"오, 일어났다."

하고 숭은 안고 있던 아내의 옷을 얼른 한편 구석에 밀어 놓았다. 그리고 일어나서 문을 열었다. 찬 광선이 방 안으로 물결처럼 몰아 들어왔다.

유 월은 편지 두 장을 숭에게 주었다. 그리고 방에 들어와서 닫은 창을 다 열어 놓고 자리를 걷었다. 숭은 유월이가 주는 편지를 받아서 겉봉을 뒤적거려 보았다. 둘이 다 정선의 이름으로 온 것인데, 하나는 '玄'이라고 편지한 이의 이름을 써서 그것이 현의사에게서 온 것인 줄을 알 수 있으나, 하나는 뒤 옆에도 보낸 이의 이름이 없었다.

숭은 무슨 심히 불쾌한 예각을 가지고 보낸 이 이름 없는 편지부터 떼었다. 그것은 대단히 난잡한 글씨였고 말은 글씨보다도 더욱 난잡하였다. 그리고 끝에는 독일말로 다이너(네 것)라고 썼다. 그리고 그 내용은 이러하다.

내 정선이.

인 제는 내 정선이지. 나는 어젯밤 오류장 왕복에 감기가 들어서 앓고 누웠소. 열이 나오. 열이 나더라도 오늘 밤에는 꼭 가려고 했는데 하도 몸이 아파서 못 가오. 정선의 부드러운 살이 생각혀서 못 견디겠소. 이 편지 받는 대로 좀 와주시오. 숭이놈이 일간 올라온다니 좀 대책을 의논할 필요가 있소. 숭이놈을 죽여 버릴까. 그놈이 염병을 앓다가 죽지 않고 왜 살아났어! 꼭 와! 안 오면 내 정선이 아니야!

이런 편지였다.

숭은 앞이 캄캄해짐을 깨달았다.

'그러면 엊그제 밤 자동차로 가던 것은 분명히 갑진이와 정선이로고나! 그들은 그 길로 오류장에를 갔고나!'

숭의 가슴에 북받쳐 오르는 분노의 불길―---그것은 피를 보고야 말 것 같았다.

유월은 숭의 낯빛이 변하고 팔이 떨리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제가 숭에게 준 편지가 무슨 편지인 것을 짐작하고(그는 글을 모른다) 몸에 소름이 끼쳤다.

유월의 시선이 제게 있는 줄을 안 숭은 얼른 감정을 진정하려고 애를 썼다. 그래서 편지를 접어서 예사롭게 도로 봉투에 집어넣고, 현의사의 편지를 떼었다.

사랑하는 내 동생!

어제 네 태도와 묻던 말이, 너를 돌려보내 놓고 생각하니 심상치 아니하다. 내가 곧 따라가고도 싶었으나 환자 집에 불려서 밤늦게 돌아와서 못 보고 이 편지를 쓴다. 만일 난처한 일이 있거든 이 편지 보는 대로 곧 오너라.

숭은 이 편지도 접어서 도로 봉투에 넣었다. 숭은 아뜩아뜩해지는 것을 억지로 참으면서,

"세숫물 다오."

하고 유월을 시켰다.

숭 은 폭풍같이 설레는 제 정신을 진정하느라고 이를 닦고 면도를 하고 머리까지 감고 아무쪼록 세수하는 시간을 길게 끌었다. 잇솔은 몇 번이나 빗나가서 입천장을 찌르고 면도로 귀밑과 턱을 두 군데나 베었다. 칼라가 끼어지지 아니하고 넥타이를 세 번이나 다시 매었다.

억지로 식탁을 대하고 앉았을 때에 숭의 코에서는 갑자기 피가 쏟아졌다. 하얀 테이블보가 빨갛게 물이 들었다.

"코피 나셔요."

하고 유월이 어쩔 줄을 모르고 벌벌 떨었다. 그리고 속으로 정선을 원망하고 숭에게 무한한 동정을 주었다.

"아아."

하 고 숭은 참다못하여 크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코피도 막을 생각을 아니 하고 식탁 위에 엎드렸다. 찻잔이 팔굽이에 스쳐 엎질러졌다. 엎질러진 홍차의 연분홍빛이 숭의 피인 듯이 흰 테이블보를 적시며 퍼졌다. 유월은 구르는 차곱뿌를 붙들었다.

숭은 그날 하루를 전혀 혼란상태로 지내었다. 그 이튿날도 그러하였다. 숭의 맘속에는 '원수를 갚음'이라는 생각이 수없이 여러 번 들어왔다. 그래서 그는 원수 갚을 여러 가지 방도까지도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그는 두 가지 갈래 길을 발견하였다. 무엇이냐? 원수를 갚아 버리고 마느냐, 또는 모든 것을 참고 용서하는 것이냐 하는 것이었다.

만 일 원수를 갚는다면? 그러면 일시는 쾌할는지 모르거니와 저와 정선과 김갑진이 다 세상에서 버리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거기서 소득은 일시의 통쾌뿐이었다. 그렇지마는 참고 용서한다 하면 이 모든 여러 사람이 받을 손실은 아니 받고 말 것이다.

'용서하라!'

하는 예수의 가르침을 생각하였다.

그러나 간음한 아내는 내어보내도 좋다고 예수가 말씀하지 아니하였느냐 이렇게도 생각해 본다. 하지마는 그것은 내어보내도 좋다는 것이요, 꼭 내어보내라는 것은 아니다. 또 내어보내라는 말이지 원수를 갚으라는 말은 아니었다.

만일 한선생이라면 어떠한 태도를 이 경우에 취할까 이렇게도 생각해 보았다. 한선생 같으면,

일, 사랑과 의무의 무한성.

이, 섬기는 생활.

삼, 개인보다 나라.

이러한 근본조건에서 생각을 시작할 것이다. 사랑이란 무한하지 아니하냐. 의무도 무한하지 아니하냐. 아내나 남편이나 자식이나 동포나 나라나에 대한 사랑과 의무는 무한하지 아니하냐. 그렇다 하면 정선을 사랑해서 아내를 삼았으면 그가 어떠한 허물이 있더라도 끝까지 사랑하고, 따라서 그에게 대한 남편으로서의 의무를 끝까지, 아니 끝없이 지켜야 할 것이 아니냐.

또 섬기는 생활이라 하면, 숭이 제가 진실로 동포에 대하여 나라에 대하여 섬기는 생활을 해야 한다 하면 우선 아내에게 대하여 섬기는 생활을 하여야 할 것이 아니냐. 아내를 못 용서하고 아내를 못 섬기고 어떻게 누군지도 모르는 수많은 동포를 사랑하고 섬기고, 눈에 보이지도 아니하는 나라를 사랑하고 섬길 수가 있을 것이냐.

셋째로, 만일 숭이 제가 진실로 우리를 위하여 저를 버리는 사람이라 하면 그래 제가 해야 할 일생의 의무를 아니 돌아보고 이기적 개인주의자와 같은 행동을 하다가 저 한몸을 장사해 버릴 것이냐.

만일 한선생 모양으로 생각한다 하면 이러한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이렇게 숭은 생각하였다.

사흘 동안 고민한 결과로 이러한 결론에 다다랐다.

이에 그는 곧 김갑진에게 편지를 썼다.

김군, 나는 형이 내 아내에게 대해서 한 모든 허물을 용서합니다. 또 형으로 하여금 친구 의리를 저버리고 간통의 죄를 짓게 한 내 아내의 허물도 용서합니다. 형이 내 아내에게 보낸 그 옳지 못한 편지도 내가 이 편지를 쓰고는 불살라 버릴 터입니다. 그러니 다시는 내 아내에게 대하여 죄 되는 생각과 일을 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그리하고 형만한 재주와 포부를 가지고 지금의 생활을 버리고 동포를 위한, 나라를 위한 새생활을 하는 이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 편지를 써놓고 숭은 갑진의 편지를 불사르려 하였다. 그러나 갑진에는 일종의 유혹이 있었다. 그것은 이 편지를 정선에게 보이자는 것과, 또 후일에 힘있는 증거를 삼자는 것이었다. 숭은 성냥을 그어서는 끄고, 그어서는 끄기를 세 번이나 하였다. 그러다가 네 번 만에 숭은,

'나의 약함이여, 약함이여!'

하고 그 종잇조각을 태워 버렸다. 그 종잇조각이 타서 재가 되어 스러질 때에 숭의 맘은 흐렸다가 맑아지는 것 같았다.

갑 진의 편지를 불살라 버린 숭은 대단히 유쾌한 생각으로 저녁을 먹었다. 그리고 이발소에 가서 머리를 깎고 목욕을 하고 돌아와서 마치 몸과 맘의 때를 다 씻어 버린 듯이 기쁜 맘으로 자리에 누웠다. 맘 한편 구석에 뭉키어 있는 무엇을 숭은 아무쪼록 못 본 체하려 하였다. 숭은 여러 날의 노심과 피곤으로 잠이 들려 할 때에,

"전보 받으우."

하고 대문 두드리는 소리에 깨었다.

"명조 칠시 착전."

이라는 것이다. 정선이가 며칠 숭을 기다리다가 하릴없이 올라오는 것이었다.

이 튿날 숭이가 잠을 깬 것은 다섯시였다. 잠이 깨매 어제 갑진의 편지를 불사를 때에 맛보던 유쾌하던 생각은 훨씬 줄어 버렸다. 마치 목욕탕에서 깨끗이 씻은 몸에 밤새에 무슨 분비물이 생겨서 몸이 끈끈한 모양으로 맘에도, 영혼에도 무슨 분비물이 생겨서 텁텁해진 것만 같았다.

숭은 세수를 하고 뒤꼍에 나아가 운동을 함으로 이 흐릿한 기분을 고치려고 애를 썼다. 숭은 무엇에 내리눌리는 듯한 몸과 맘을 억지로 채찍질해서 정거장에를 걸어나갔다.

'무한한 사랑, 무한한 용서, 무한한 의무, 무한한 사랑, 무한한 용서, 무한한 의무, 섬김, 나를 죽임, 섬김, 나를 죽임…… 무한한 사랑, 무한한 의무.'

이렇게 숭은 걸음걸음 중얼거려서 맘을 덮으려는 질투의 구름, 미움의 안개를 쓸어 버리려 하였다.

아 직 전깃불이 반짝반짝하였다. 텅 빈 전차들이 잉잉잉 소리를 내며 빛나지 않는 머릿불을 내어두르며 달아났다. 까무스름한 안개가 희미하게 집과 길을 쌌다. 이러한 속으로 숭은 무거운 맘을 안고 아내를 맞으러 페이브먼트를 타박타박 울리면서 남대문을 향하였다. 입술은 마르고 혓바닥에는 바늘이 돋았다.

남 대문에서부터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것은 다만 남대문시장으로 들어가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일본으로서부터 만주로 싸우러 가는 군대가 통과하는 것을 송영하러 가는 학생 행렬과 단체들도 있었다. 정거장은 발 들여놓을 틈 없이 승객과 군대 송영객으로 차 있었다.

숭이가 정선을 기다리는 제일 플랫폼에서도 군대를 송영하는 제이 플랫폼 광경이 잘 건너다보였다. 정선이가 탄 열차가 경성역에 들어오기를 기다려서 북으로 향할 군대 열차는 정선의 열차보다 십 분 가량 먼저 정거장에 들어왔다.

열 차가 들어올 때에 송영 나온 군중은 깃발을 두르며 '반자이(만세)'를 부르고 중국 사람의 것과 비슷한 털모자를 쓴 장졸들은 차창으로 머리를 내어밀고 화답하였다. 송영하는 군중이나 송영 받는 장졸이나 다 피가 끓는 듯하였다. 이 긴장한 애국심의 극적 광경에 숭은 남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고향과 사랑하는 사람들을 두고 나라를 위하여 죽음의 싸움터로 가는 젊은이들, 그들을 맞고 보내며 열광하는 이들, 거기는 평시에 보지 못할 애국, 희생, 용감, 통쾌, 눈물겨움이 있었다. 감격이 있었다. 숭은 모든 조선 사람에게 이러한 감격의 기회를 주고 싶다고 생각하였다. 전장에 싸우러 나가는, 이러한 용장한 기회를 못 가진 제 신세가 지극히 힘없고 영광 없는 것같이도 생각히었다.

이러한 일생에 첫 기회가 되는 용장하고 감격에 찬 생활의 생각을 하고 섰을 때에 정선을 담은 차는 콧김을 불며 굴러 들어왔다. 차창에서 서서 내다보는 정선의 적막한 얼굴이 번뜻 보였다.

정 선은 플랫폼에 섰는 남편을 보고 곧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그것은 아내가 남편에게 대한 본능이라고 할 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소리를 지른대야 겹유리창을 통하여 밖에 들려질 리도 없겠지마는 겹유리창보다도 더 두꺼운 무엇이, 정선의 맘의 부르짖음이 숭의 귀에 들어가지 아니할 것같이 생각히었다. 더구나 남편은 제게 무슨 비밀이 그 동안에 있는지도 모르고 여전한 아내인 줄 알고 반갑게 마중 나온 것이라고 생각할 때에 몹시 맘이 아팠다. 숭은 아내의 얼굴을 찾고 곧 차에 올라갔다.

"침대 안 타고 왔소?"

하고 숭은 반가운 음성으로 물었다.

"안 탔어요."

하고 정선은 잠깐 남편의 낯을 바라보고는 가방을 찾는 체하고 고개를 숙여서 외면하였다. 낯이 후끈거리고 가슴이 울렁거림을 깨달았다. 숭은 정선의 짐을 두 손에 들고 앞서서 내려왔다.

"반자이" 하는 여러 천 명 사람의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고동 소리가 났다. 정선은 남편의 뒤를 따라서 나가는 데로 향하였다. 남편의 다리의 움직임, 구두의 움직임을 보는 눈도 가끔 아뜩아뜩하였다.

'남편이 내 비밀을 알고 저렇게 태연한가, 모르고 저렇게 태연한가.'

하고 정선은 마치 경관에게 끌려가는 죄인과 같은 생각으로 어디를 어떻게 가는지 모르게 위킷(개찰구)을 나섰다. 거기서 기다리고 섰던 유월이가 내달아 정선을 맞았다.

"무엇 자셨소?"

하고 숭은 짐을 놓고 정선을 돌아보며 물었다. 정선은 애원하는 눈찌로 남편을 바라보며 말없이 고개를 흔들었다.

숭은 택시를 불러 짐을 싣고 유월이더러 먼저 집으로 들어가라고 이르고,

"가서 차나 한잔 먹고 갑시다. 추워."

하고 앞섰다. 정선은 말없이 뒤를 따라 섰다.

"살여울 아무 일도 없었소?"

하고 숭은 아내의 외투를 벗겨서 걸면서 물었다.

"별일 없어요."

하고 정선은 자리에 앉는다. 숭도 자리에 앉아서 아내를 바라보았다. 정거장 앞에서 갑진과 함께 자동차를 타고, 갑진의 팔이 정선의 어깨 뒤로 돌아와 놓였던 그때 광경이 숭의 눈앞에 번쩍 보인다. 숭의 입에는 쓴침이 돌았다.

"쵸쇼쿠(아침밥)."

하여 보이에게 시키고, 숭은 일어나려는 맘의 물결을 억지로 진정하면서 무슨 말을 할 것인가를 찾았다.

"이번 가보니까 살여울이 맘에 듭디까."

하고 숭은 억지로 웃어 보였다.

"……"

정선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끄덕하였다. 목이 메어 말이 나오지를 아니하는 것이었다.

"살 여울 사람들은 다 좋은 사람들이오. 그 사람들은 다 제 손으로 벌어서 제 땀으로 벌어서 밥을 먹고 밤낮에 생각하는 일도 어떻게 하면 쌀을 많이 지을까, 어떻게 하면 거름을 많이 만들까, 어떻게 하면 가마를 많이 짜서 어린것들 설빔을 해줄까, 집에 먹이는 소가 밤에 춥지나 아니한가, 아침에는 콩을 좀 많이 두어서 맛나게 죽을 쑤어 먹어야겠다, 이런 생각들만 하고 있다오. 서울 사람들 모양으로 어떻게 하면 힘 안 들이고 돈을 많이 얻을까, 어떻게 하면 저 계집을 내 것을 만들까, 저 사내를 내 것을 만들까, 이런 생각은 할 새가 없지요. 나는 살여울이 그립소. 당신은 어떻소. 당신은 살여울 가서 정직하게, 부지런하게, 검박하며, 땀 흘리고 남을 위하는 생활을 할 생각이 아니 나오?"

하고 숭은 정선을 바라보고 한숨을 지었다.

"내가 살여울 가서 무엇을 하겠어요? 나 같은 것이 거기 가서 무어 할 게 있나?"

하고 정선도 한숨을 쉬었다.

"왜 할 게 없어? 밥도 짓고 빨래도 하고 김도 매고, 그리고 또 틈이 있으면 동네 부인들과 아이들 글도 가르치고. 또 당신 음악 알지 않소? 동네 사람들 음악도 들려 주고…… 왜 할 게 없소? 할 게 많아서 걱정이지, 할 게 없어? 서울서야말로 할 게 없소. 서울서 무얼 한단 말요? 당신 학교 졸업하고 나서 무어 한 것 있소? 당신만 아니지. 공연히 농민들이 애써 지은 밥 먹고, 여직공들이 애써 짠 옷 입고, 그리고 사람들 많이 부리고, 그리고는 하는 것이 무엇이란 말요? 서울에 있겠거든 무슨 좋은 일을 하든지 그렇지 아니하면 저 먹을 밥, 저 입을 옷이라도 제 손으로 지어 입는 것이 옳지 않소. 적어도 남의 신세는 아니 진단 말요. 남의 노동의 열매를 도적질은 아니 한단 말이오. 이건영이니 김갑진이니 하는 사람들이 다 호미 자루를 들고 농사만 짓게 되더라도 세상 죄악은 훨씬 줄고 농민 노동자의 고생도 훨씬 덜어질 것이오. 안 그렇소?"

하고 숭은 책망하는 듯한 눈으로 정선을 보았다.

"걱정 마세요!"

하고 정선은 양미간을 한번 찡그리면서,

"아무러기로 내가 당신 것 얻어먹지는 아니할 사람이니 염려 마세요. 나는 죽으면 죽었지, 밥 짓고 빨래하고 김매고 그런 일은 못 해요. 우리 조상은 오백 년래로 그런 천한 일은 해본 적이 없어요. 당신네 집과는 달라요."

하고 견딜 수 없는 모욕을 당하는 듯이 바르르 떨었다. 그리고 손에 들었던 면보를 접시에 내어던졌다.

숭도 정선의 이, 의외의 반응에 일변 놀라고 일변 분개하였다. 그래서 참으리라는 의지력이 발할 새 없이,

"당 신 집에서는 조상 적부터 김매고 밥 짓는 천한 일은 한 적이 없고, 남편을 배반하고 남편을 복종하지 아니하는 일은 한 적이 있소? 당신이 하는 일이 천한 일인지, 내가 당신더러 하라는 일이 천한 일인지 당신의 재주와 교양으로 한번 판단해 보시오!"

하고 주먹으로 식탁을 쳤다. 식탁 위에 놓인 그릇들이 떨그럭 하고 소리를 내고 떨었다.

숭의 이 말은 정선의 가슴에다가 큰 말뚝을 박는 것과 같았다. 정선은 잠시 숨이 막히고 눈이 아뜩하였다.

'그러면 남편은 내 비밀을 아나?'

하는 한 생각이 정선의 신경을 마비해 버리고 말았다. 식탁을 치는 소리에 보이가 뛰어와서 왜 부르는가 하고 명령을 기다렸다. 숭은,

"커피로 말고 홍차로."

하고 시키고, 남은 면보에다가 버터를 득득 발랐다.

'여자에게는 영혼이 없다. 여자에게는 이성이 없다.'

하는 옛사람의 말을 숭은 생각하였다. 정선의 추리작용의 움직임이 어떻게 비논리적이요, 도덕 관념의 연합되는 양이 어떻게도 열등임에 숭은 놀라지 아니할 수가 없었다.

'더불어 이치를 말할 수 없다.'

하는 반감까지도 일어나서 숭은 대단한 불쾌를 느꼈다.

고개를 숙이고 앉아서 햄언에그스의 달걀을 포크로 찍어서 입에 넣는 정선의 눈에서는 눈물이 떨어지는 것이 숭의 눈에 보였다.

정 선의 눈물은 숭의 가슴을 아프게 하였다. 숭에게 정선은 대단히 사랑스러웠다. 첫째 정선은 아름다웠다. 그의 얼굴, 그의 눈, 코, 입, 귀, 살갗, 몸맵시, 음성, 어느 것이나 하나도 숭의 맘에 들지 아니하는 것이 없었다. 정선의 손이 백랍으로 빚어 놓은 것 같고 그 손톱들이 연분홍빛으로 맑지게 빛나는 것도 아름다웠다. 원체로 말하면 숭은 이러한 손을 미워해야 옳을 것이다. 그것은 이러한 손은 놀고 먹는 계급의 손인 까닭이다. 그야말로 오백 년 놀고 먹은 씨가 아니고는 이러한 손은 가질 수 없을 것이다. 그 손은 거문고 줄을 고른다든가 피아노의 건반이나 누르기에 합당하고 바늘을 잡기도 맞지 아니할 것 같았다. 만일 그 손이 한 해 겨울만 진일을 한다고 하면, 한 해 여름만 김을 맨다고 하면 그 아름다움은 영영 잃어버리고 말 것이다.

숭에게 정선이 이렇게 아름다운 것이 괴로웠다. 그의 맘도 몸 모양으로 아름다웠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였다.

"이 앞에는 어떻게 할 테요? 살여울로 날 따라가려오? 서울 있으려오?"

하고 숭은 화두를 돌렸다.

정 선은 지금 제가 저지르고 있는 죄만 스러지고 나타나지 아니할 양이면 아무렇게 하여도 좋을 것 같았다. 만일 제 비밀이 숭에게 탄로가 되어서 숭이 그것을 들고나는 날이면 정선의 일생은 망쳐지는 것이 아니냐. 아버지에게도 버림을 받을 것이요, 세상에서도 버림을 받을 것이다.

정 선은 신마리아라는 여자의 일생을 생각한다. 그는 늙은 남편의 아내가 되었다가 젊은 남자와 예배당 찬양대에서 서로 사랑하게 되어서 마침내 그 남자의 씨를 배고 간통죄로 남편의 고소를 당하여 육 개월 징역을 지고 나와서는 그 친정에서까지 쫓겨 나와서 카페에 여급으로 다니는 것을 생각한다. 제 일생도 그와 같지 아니할까. 그것은 전혀 숭에게 달린 것이다. 정선은 숭의 인격을 믿는다. 만일 제가 회개만 하면 숭은 아마도 저를 용서하고 제 허물을 다 감추어 주고 아내로 사랑해 줄 것을 믿는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숭을 무서워한다. 그것은 숭에게는 무서운 의지력이 있고, 고구려 사람다운 무기가 있어서 한번 작정하면 물과 불을 가리지 아니하는 한 방면이 있는 것이다. 만일 숭이 실행한 아내인 제게 대하여 이 고구려 기운을 내는 날이면 저를 간통죄로 고소하기 전에 단박에 죽여 버릴는지도 모른다. 정선은 그것이 제일 무서웠다.

이 해관계를 따지면 정선은 아무리 하여서라도 숭에게 갑진과의 비밀을 알리지 아니하는 것이 상책이었다. 그러나 이 비밀을 남편이 알았는지 아니 알았는지 그것을 알 도리가 없었다. 만일 숭이 그 비밀을 알았다 하면 아무쪼록 제 태도를 부드럽게 해서 숭의 사랑과 인격에 하소할 길밖에 없었다.

그래서 남편과 같이 집에 돌아온 뒤에도 어떻게 하면 그 눈치를 알아낼까 하고 그것만 애를 썼다.

숭 은 집에 돌아온 뒤로는 도무지 정선에게 대해서 아무 말이 없었다. 살여울로 가겠느냔 말도 묻지 아니하였다. 그리고 고등법원에 제출할 상고 이유서를 쓴다 하고 사랑에 들어박혀서 나오지 아니하고 자리도 사랑에 깔게 하였다. 그리고 마치 정선에게 무슨 소리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과 같이 정선에게는 보였다.

이 래서 초조한 정선은 혹시나 갑진이가 찾아오지나 아니할까, 무슨 편지나 와서 숭의 눈에 띄지 아니할까 잠시도 맘이 놓이지 아니하여서 어떻게 틈을 내어서 갑진을 한번 만났으면 하고 애를 썼다. 그것은 보고 싶어 만나자는 것이 아니라 이 비밀이 탄로되지 않도록 대책을 의논하기 위한 것이었다.

정 선이 아무리 갑진과 서로 만날 기회를 엿보나 기회는 만만치 아니하였다. 그렇다고 갑진에게 편지를 보내어 갑진에게 필적을 남겨 놓을 용기도 없었다. 전화가 오면 혹시 갑진에게서 오나, 편지가 오면 혹시 갑진에게서 오나 정선은 맘을 졸였다.

숭 이 재판소에 가던 날 정선은 이것이 최후의 기회라 하고 옷을 떨쳐 입고 집을 나가서 길에서 호로 씌운 인력거 한 채를 집어타고 재동 김남작 댁을 찾아갔다. 번지도 모르고 김남작을 찾으나 아는 이가 없었다. 김갑진을 찾아도 아는 이가 없었다. 잿골이라고 부르지마는 정말 재동인지 가회동인지도 알 수가 없었다.

정선은 마침내 인력거를 보내고 걸어서 이집 저집 문패를 뒤지기 시작하였다. 그 꼴이 심히 창피하였으나 그것을 가릴 여유가 없다. 아무리 하여서라도 갑진을 만나지 아니하면 아니 된다.

정선은 마침내 파출소에 가서 김갑진의 주소를 물을 용기까지 내었다. 순사는 어떤 젊은 미인이 이 유명한 부랑자를 찾는가 하고 번지 적은 책을 뒤지면서,

"그 사람은 왜 찾으시오?"

하고 심술궂게 물었다. 정선은 얼김에,

"친척이야요."

하고 대답하고 낯을 붉혔다.

"친척? 친척인데 동네 이름도 몰라요?"

하고 흥미를 가지고 묻는다.

"시골서 와서 잿골이라고만 압니다."

하고 정선은 거짓말을 하였다.

"김갑진이란 사람은 ○동 ○○번지요. 이 사람 집에는 웬 이리 번지도 모르는 젊은 여자 친척이 많담."

하고 순사는 책을 덮어놓으면서 정선을 한번 더 훑어본다. 정선은 얼굴에 모닥불을 끼얹는 듯함을 깨달으면서,

"고맙습니다."

한 마디를 던지고 파출소에서 나와서 순사가 지시하는 번지를 찾았다. 그것은 남작 대감의 아들이 사는 집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이 초라한 집이었다. 그래도 양반집이라 대문 중문은 분명하고, 또 사랑 중문이라고 할 만한 문도 형적만은 있었다. 대문 안에를 들어서서 두리번거리니 행랑에서 어떤 어멈이 아이를 안고 문을 열고 내다본다.

"김갑진 씨 계시오?"

하고 아무쪼록 태연한 모양을 지으며 물었다.

"네, 사랑 서방님요?"

하고 어멈은 서양식 헌 문을 사다가 달아 놓은 문을 가리켰다.

"손님 아니 오셨소?"

하고 정선은 주밀하게 물었다.

"안 오셨나 본데요. 감기로 편찮아 누우셨나 보던데요. 들어가 보세요. 여자 손님들도 노 오시는걸요."

하고는 한번 더 이 이상한 손님을 훑어보고는 문을 닫고 우는 애를 달랜다. 정선은 사랑문을 열었다. 그것은 쉽게 안으로 열렸다.

무에라고 찾나?

"김선생 계셔요?"

하고 용기를 내어 불렀다.

"어, 거 누구? 용자야?"

하고 영창을 열어제치는 것은 갑진이었다. 금방 자리에서 일어나는 사람 모양으로 머리가 뿌시시하고 꾸깃꾸깃한 베드롭을 입었다.

"아, 이거 누구야?"

하고 제아무리 갑진이라도 이 의외의 방문객에는 놀라는 모양이었다.

정선이가 하도 쌀쌀하게 구는 데에 갑진은 좀 무안하였다. 그리고 다음 순간에는 아니꼬운 계집년이라고도 생각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정선의 심상치 아니한 태도에는 갑진도 염려가 아니 될 수 없었다. 갑진은,

'심 상치 않기로 무슨 상관야. 형편 따라서 잡아뗄 게면 떼고, 또 정선이를 좀더 가지고 놀 수 있으면 놀면 고만이지. 먹을 것을 가지고 온다면 데리고 살아도 해롭지 않고, 적더라도 오늘 심심한데 이왕 찾아온 정선이니 빨 수 있는 대로 단물을 빨아먹는 것이 유리하다. 물론 오류장 한 번에 벌써 김은 많이 빠졌지마는.'

이런 생각을 하며 갑진은 정선을 어떤 모양으로 취급할까를 연구하느라고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정선도 갑진을 찾아오기는 하였지마는 도무지 말이 나오지를 아니하였다. 남의 아내로서 간통한 김갑진을 찾아와서 본남편 속일 의논을 하게 된 것은 고등교육까지 받지 아니하더라도 여자로 그리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우리집에서 올라오셨어요."

하고 정선은 마침내 먼저 입을 열었다.

"우리집이라니?"

하고 갑진은 다 알아들으면서도 슬쩍 시치미를 뗐다.

"허변호사가 올라오셨어요. 오늘이 고등법원에 공판이 있는 날이 되어서."

하고 정선은 갑진이가 시치미떼는 것이 미우면서도 한번 더 설명하였다.

"어, 그거 잘됐구려. 축하합니다."

하고 갑진은,

"그래서 그 기쁜 말씀 하러 날 찾아왔소? 허변호사가 왔으면 어떡허란 말요?"

하고 정선을 힐난이나 하는 듯한 어조다.

"허변호사가 올라오셨으니 내게 편지를 하시거나 전화를 거시거나 찾아오시거나 하시지 말란 말씀야요."

하고 정선은 정색하고 말하였다. 이것으로 정선은 할 말을 다 한 것이었다. 인제는 돌아가리라 하고 일어서려는 것을 갑진은 치맛자락을 잡아당기어 앉힌다.

"노세요! 이게 무슨 짓야요?"

하고 정선은 큰 욕을 당하는 듯한 분함을 깨달았다.

"그렇게 노열 게 있소?"

하고 갑진은 유들유들한 태도를 지으며,

"치맛자락을 좀 잡아당기었기로 그렇게 노여실 것이야 있소. 정선이가 다른 사내 앞에서는 얌전을 빼는 것도 좋겠지마는 내게 대해서야―---내야 치맛자락 아니라 속곳자락을 끌었기로 노열 게 있소? 자 앉으우."

하고 기어이 치맛자락을 끌어 앉히고 나서,

"그래, 당신은 숭이녀석헌테 우리들의 연애를 감쪽같이 숨길 작정이오?"

하고 픽 웃는다.

"애고, 망칙해라. 연애란 또 무에야."

하고 정선은 악이 난 판에 모든 것을 다 잡아뗄 생각이다.

"허허, 아 이런 변 보았나."

하고 갑진은 세상이 들어라 하는 듯이 어성을 높이며,

"허 허, 요새 고등교육받은 현대 여성의 연애관 어디 좀 들어 보까. 우리네 무식한 구식 남성은 당신과 나와의 관계쯤 되면 연애로 아는데, 그럼 좀더 무슨 일이 있어야 연애가 되는 것이오? 당신네 이른바 영과 육과 둘로 갈라서 아무리 육이 합했더라도 영만 합하지 아니하면 연애가 아니란 논법이로구려. 허허, 자 어디 우리 정선이 연애 좀 받아 봅시다그려."

하고 갑진은 고개를 이리 기웃 저리 기웃 하고 정선을 놀려먹었다.

정선은 손을 들어서 이 악마 같은 사내의 뺨을 열 번이나 갈기고 싶었다. 정선이가 칼날 같은 눈으로 노려보는 것을 보고 갑진은,

"아 서, 서방질은 할지언정 남편을 속여서야 쓰나. 했으면 했노라고 하구려. 그래서 숭이녀석이 이혼하자고 하거든 얼씨구나 좋다 하고 해주어 버리지. 그리고 나하고 삽시다그려. 해먹을 것이 없거든 우리 카페나 하나 내까. 당신은 마담이 되고 나는, 나는 글쎄 무엇이 될까, 반토(지배인)가 될까, 아니 싫어, 반토가 되면 뒷방에서 치부나 하고 앉었게. 우리 정선이는 어떤 놈팽이허구 손을 잡는지, 입을 맞추는지 알지도 못하고, 하하하하. 그야 카페 해먹는 신세에 여편네 손과 입쯤이야 달라는 손님에게 아니 줄 수 없지마는, 도무지 우리 정선이가 한 번 서방을 배반한 버릇이 있는 우와키모노(바람둥이)가 되어서 내님이 장히 맘을 못 놓을걸, 하하하하, 안 그래?"

하고 번개같이 달겨들어서 정선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춘다.

정선은 거의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갑진의 뺨을 갈겼다. 그 소리가 절칵 하고 매우 컸다. 갑진은 전기에 반발되는 물체 모양으로 입을 벌리고 뒤로 물러앉았다. 베드롭 자락이 젖혀지며 털 많은 시커먼 다리가 나타난다.

"옳지, 사람을 때린다."

하고 갑진은 정선이가 손으로 때린 뜻을 정선의 눈에서 알아내려는 듯이 뚫어지도록 들여다보았다. 그는 그의 성격의 한 귀퉁이에 있는 천치스러운 일면을 나타내 보이고 있었다.

정선은 벌떡 일어나서 옷소매로 입을 수없이 씻었다. 마치 입술에 묻은 지극히 더러운 무엇이 씻어도 아니 씻기는 것 같았다.

"내가 어쩌다가 저런 악마에게 걸렸어!"

하고 정선은 발을 동동 구르고 울었다.

"옳지, 인제 와서."

하고 갑진은 정선에게 얻어맞은 뺨을 만지면서 빈정대었다.

"흥, 되지못하게 인제는 나까지 배반하러 들어! 허숭이를 배반하고, 김갑진이를 배반하고, 그 담에는 또 누구? 오 요, 이건영이란 놈이 자주 정동 근처로 다니더라니. 해도 안 될걸. 내나 하길래 저하고 카페라도 내자고 그러지, 건영이 따위야 어림이나 있나. 세상이 무서워서, 비겁해서―---대관절 숭이놈헌테 간통 고소를 당하더라도 눈썹 하나 까딱 안 할 나와는 다르거든. 싫건 고만두어, 가고 싶은 데로 가란 말야. 건영이놈허구 붙든지 호떡장사 호인놈허구 붙든지 내가 아랑곳할 게 아니란 말이다. 내란 사람은 어떤 계집이든지, 서시(西施), 양태진(楊太眞)이라도 말야, 꼭 한 번 건드리면 다시 돌아볼 생각도 없는 사람이란 말이다. 한 번 건드린 계집애에게 다 책임을 진다면 내 몸엣털을 다 뽑아서―---참 불경에서 나오는 말 같고나. 내 몸의 털을 다 뽑아서 책임을 수를 놓아도 다 못 놓는단 말이야. 이건 왜 이래, 괘니시리, 오 숭을 속이고 감쪽같이 허숭 부인입시오 하고 학교에도 가고 예배당에도 점잔을 빼보시게? 흥, 고런 소갈머리를 가지니깐 계집이란 하등동물이란 말이다. 허기야 학굡시오 예배당입쇼 하는 숙녀들도 정선이보다 나은 년이 몇이나 되는지 모르지마는, 어쨌으나 여자란 속임과 거짓으로 빚어 만들었단 말이다. 우리 같은 사람은 그런 줄을 알고 여자를 대하니깐 그렇지, 숭이 같은 시골뜨기 숫보기 녀석들은 여자를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나 같이 알고, 무릎을 꿇고 있다가 소금 오쟁이를 지는 것이거든. 그래도 여보 정선이, 숭이놈도 노상은 바지저고리만은 아니거든. 무어 하나 보여 주까, 내가 그걸 어디 두었더라, 그 쑥의 편지를."

하고 일어나서 무엇을 뒤진다.

갑 진은 책상 서랍을 빼어 동댕이를 치고 양복 저고리를 내려서 이주머니 저주머니 뒤져 보고는 홱 내던지고, 마치 가택 수색하는 순사 모양으로 한참 수선을 떨더니 마침내 제가 입고 있는 베드롭 주머니에서 옥색 봉투 하나를 꺼내어 무슨 훌륭한 것을 자랑이나 하는 듯이 알맹이를 빼어서 정선에게 내어던졌다.

정선은 봉투 뒤 옆에 '辯護士 許崇法律事務所'라고 박힌 것을 보았고, 또 편지 글씨가 숭의 것인 것을 알았다.

정 선은 무서운 것을 예기하는 맘으로 그 편지를 내려 읽었다. 정선이가 갑진이하고 오류장 갔던 것을 안다는 것, 갑진이더러 다시는 정선을 가까이하지 말라는 것, 갑진의 허물을 용서한다는 것, 갑진이가 정선에게 보낸 편지는 불살라 버리겠다는 것 등이었다. 정선은 오직 정신이 아뜩함을 깨달았다. 그 편지를 한 손에 든 채로 얼빠진 것같이 갑진을 바라보았다.

갑진은 정선이가 그 편지를 다 읽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정선이가 저를 바라보는 것을 보고,

"자, 보아요. 놈팽이가―---숭이놈이 노상 숙맥은 아니라니까. 허기야 그놈이 내가 정선에게 한 편지를 받아 보았단 말야. 어젯밤 오류장 생각은 참 못 잊히겠다고, 정선의 부드러운 살맛을 못 잊히겠다고 숭이녀석이 오기 전에 또 한번 만나자고 했던가, 원. 그날 말요, 오류장 댕겨온 이튿날 몸살이 나서 드러누웠으려니깐 우리 정선이 생각이 나서 못 견디겠더라고, 그래서 좀 오라고 한 편지란 말야. 아무리 기다리니 생전 와야지, 왜 안 왔어?"

하고 정선을 한번 흘겨보고,

"아 무려나 숭이녀석이 쑥은 쑥이거든. 그래, 제 계집 빼앗은 사내더러 용서해 주마는 다 무에야. 나 같으면 다른 놈이 내 계집의 손목만 한 번 건드려도 그놈을 당장에 물고를 내고 말 텐데, 글쎄 그런 못난이가 어디 있어. 꼭 오쟁이지기 안성맞춤이라. 흥, 게다가 또 시큰둥하게시리 내 죄는 다 용서할 테라고, 증거품 될 편지는 불살라 버리겠다고, 그게 다 쑥이거든. 그 편지를 왜 불을 살라 버려 글쎄. 제게 유리한 적의 증거품을 제 손으로 인멸을 해? 허 그리고 변호사 노릇을 해먹어, 똥이나 먹으라지 오쟁이나 지고, 하하."

하고 혼자 수없이 지껄이다가 문득 잊었던 무엇을 생각해 내는 듯이,

"아 참, 그래 그 쑥(숭을 가리키는 말)이 정선이 보고 무어라고 해?"

하고 그래도 얼마쯤 염려되는 표정.

"……"

"그 못난이가 암말도 못 하겠지?"

"……"

"그깟놈 무어라고 말썽 부리거든 내게로 와요."

"……"

"그 런데 그놈이 내 편지를 정말 불을 살랐는지 알 수 없거든. 제 말대로 정말 불을 살랐으면 땡이지마는 이놈이 그것을 움켜쥐고 있으면 걱정이란 말야. 그 편지 한 장으로 간통죄가 성립이 되거든. 까딱 잘못하면 우리 둘이 콩밥이오. 허기야 웬걸, 그 시골뜨기놈이 언감생심으로 간통 고소를 하겠소마는 정선이가 잘 좀 무마를 해요. 내가 과히 강짜는 아니 할 테니."

하고 또 갑진은 정선을 건드리려 한다. 정선은,

"글쎄 편지질은 왜 해?"

하고 갑진을 뿌리치고 목도리를 들고 나가려는 것을 갑진이 아니 놓칠 양으로 뒤로 팔을 둘러 정선을 껴안는다.

이때에 마당에서,

"김군, 갑진이."

하고 찾는 소리가 들린다. 두 사람은 장승 모양으로 우뚝 섰다. 그것은 숭의 음성이었다.

"얼른 저 반침 속으로 들어가!"

하고 갑진은 정선을 반침 있는 쪽으로 떠밀었다. 정선도 얼김에 갑진이가 시키는 대로 반침 속으로 들어갔다. 갑진은 정선을 반침 속에 감추고 나서 쌍창을 열었다. 거기에는 과연 숭이 엄숙한 얼굴로 서 있었다.

"손님 안 계신가."

하 고 숭은 마루 앞에 놓인 부인네 구두를 보고 물었다. 제 아내 구두를 모를 리가 없지마는 아내가 설마 여기 와 있으리라고는 숭은 꿈에도 생각하지 아니했기 때문에 그것을 아내의 구두로는 의심하지 아니하였다. 다만 갑진이가 또 어떤 여자를 후려다 놓았는가 할 뿐이었다.

"아니 손님 없어. 들어와, 언제 왔나?"

하고 갑진은 허둥지둥 인사를 하다가 마루 앞 보석 위에 놓인 정선의 구두를 보고는 제아무리 갑진이라도 가슴이 덜컥 내려앉지 아니할 수 없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에 갑진은 '머리 감추고 꼬리 못 감춘다'는 말을 생각하고 픽 웃었다.

방에 들어와 마주 앉은 두 사람은 한참 동안 서로 바라만 보고 말이 없었다. 서로 저편의 속을 탐지해 보려는 것이 아니라, 다만 피차에 말을 꺼내기가 거북한 것이었다.

"내가 자네허고 오래 말하고 싶지 아니하이. 다만 한마디 자네 말을 듣고 가려고 온 것일세. 허니까 분명한 대답을 해주게."

하고 숭이가 정색하고 입을 열었다.

"옳은 말일세."

하고 갑진이가 뻔뻔스럽게 대답한다.

" ? "

"나도 자네허구 길게 말하기를 도무지 원치 아니하네. 나도 자네헌테 꼭 한마디 물어 볼 말이 있으니 분명한 대답을 주게."

하고 갑진은 마치 숭의 말을 흉내내는 듯하였다.

숭은 갑진의 뻔뻔스러움이 불쾌하였으나 못 들은 체하고,

"첫째는 일전 편지로도 말했지마는 이로부터는 다시는 내 아내와 가까이 말라는 말일세. 이 첫째 문제에 대해서 분명한 대답을 주게."

하고 말을 끊고 갑진을 바라보았다.

"그러지."

하는 것이 갑진의 대답이었다.

"둘째는 만일 내 아내가 자네 아이를 배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내가 말없이 호적에 넣을 테니 그 아이에 관해서 자네가 일생에 아무 말도 아니 할 것을 약속해야 하네."

"그것도 그러지."

"나는 자네가 약속은 지켜 줄 사람으로 믿네."

"그렇게 믿게그려. 퍽 미안허이."

하고 갑진은 그래도 좀 무안한 모양을 보였다.

"그럼, 난 가네."

하고 숭은 일어나려 하였다.

"가만있게, 나도 자네게 할 말이 있다고 하지 않았나."

하고 갑진은 일어서려는 숭을 손을 들어 만류하며,

"나는 자네가 그 편지, 내가 보낸 편지를 불살라 버린 것으로 믿어 좋은가?"

"암 믿게."

"고마우이. 그 편지가 자네 손에 남아 있는 동안 내가 도무지 맘을 못 놓겠네. 고마우이. 인제 그만 하고 가게."

숭 은 아무 말 없이 일어나서 갑진의 방에서 나갔다. 나와서 구두를 신으면서 곁에 놓인 여자의 구두를 유심히 보았다. 그리고 구두끈 매던 손을 쉬고 잠깐 놀랐다. 이 칠피 구두는 분명히 혼인 때에 맞춘 두 켤레 구두 중에 하나였다. 어디가 그러냐고 특징을 물으면 대답하기가 어렵지마는 숭은 정선이가 이 구두를 신고 저와 함께 놀러 다니던 것을 기억한다. 끝이 너무 뾰족해서 보기 흉업다고 숭이가 한 번 말한 것을 기억하고 다시는 신지 아니하고 두었던 그 클로버 무늬 놓은 구두다.

숭은 다시 신 끈 매기를 시작하고 아무 일도 없는 듯이 뚜벅뚜벅 뒤도 아니 돌아보고 밖으로 나갔다.

"잘 가게. 못 나가네, 고마우이."

하는 갑진의 소리가 숭의 뒤를 따라 나왔다.

숭은 어떻게 어느 발로 오는지 모르게 재동 파출소 앞까지 단숨에 달려왔다. 그는 맘속에,

'정선이가 와 있고나. 나 재판소 간 틈을 타서. 가만두고 가? 가만두고 가?'

하는 소리를 들었다. 이 소리에 숭은 두 손으로 맘의 귀를 꽉 막고 달려온 것이다. 그것이 옳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믿었기 때문에. 그러나 파출소 앞까지 다다라서 숭은 잠깐 발을 멈추었다.

'이 계집이 곧 나오나 아니 나오나. 어떤 꼴을 하고 나오나. 나를 대하면 어떤 낯을 들려나. 그것만은 보아야 속이 풀리겠다.'

하는 생각에 진 것이다.

숭 은 아까 올 때보다도 더 급한 맘으로 재동 골목으로 달려올라갔다. 갑진의 집이, 대문이 바라보이는 데 몸을 숨기고 마치 사냥꾼이 몰려올 짐승을 기다리듯이 기다리고 있었다. 우두머니 섰기도 싱거워서 서성서성 오락가락하였다. 사람이 지나갈 때면 어떤 집을 찾는 듯한 모양을 하였다.

숭은 제 이 태도가 대단히 점잖지 못함을 깨닫는다. 그러나 숭의 뇌세포는 충혈이 되어서 평소의 냉정한 판단력과 굳은 의지력이 두툼한 반투명체의 헝겊으로 한 벌 싼 것과 같았다.

정 선의 편에서 어찌하였던가. 숭의 발자국 소리가 아니 들리게 된 뒤에도 한참 동안이나 갑진은 얼이 빠진 사람 모양으로 숭이가 나가던 문을 향하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러나 한참 뒤에는 갑진은 그의 독특한 기술로 제 맘에 서리었던 모든 불쾌한 것, 부끄러운 것을 쓸어 버리고 평상시와 같은 유쾌한 기분을 지을 수가 있었다.

갑진은 부러,

"하하하하."

하고 너덧 마디 너털웃음을 치고,

"놈팽이 갔어, 이리 나와."

하고 반침문을 열었다. 반침문을 연 갑진은 입과 눈과 팔을 한꺼번에 벌렸다. 그리고,

"정선이!"

하고 불렀다. 정선은 입술이 하얗게 되어서 기색해 있었다. 눈은 번히 떴으나 그것은 죽은 사람의 눈과 같았다. 정선은 경련을 일으킨 듯이 떨었다. 그리고 쪼그리고 앉아서 매를 피하는 어린애와 같이 몸을 쪼그리고 있었다.

시체를 몹시 무서워하는 버릇을 가진 갑진은 전후 불고하고 벼락같이 문을 차고 마루로 뛰어나가면서,

"누구 좀 와!"

하고 소리소리 질렀다.

갑진의 소리에 놀란 집 사람들은 우 몰려나왔다. 정선을 반침 속에서 끌어내어 사지를 주무르고 얼굴에 물을 뿜고 야단법석을 하였다. 그러나 정선의 정신은 들지 아니하고 경련은 그치지 아니하였다.

"정선이, 정선이, 정신차려!"

하 고 갑진은 황겁하여 정선의 몸을 힘껏 흔들었다. 다른 사람들이 곁에 있기 때문에 시체라는 무서움이 덜한 것이었다. 갑진은 정선이가 이대로 죽어 버린다 하면 그것이 경찰에 보고되어야 하고 제가 불려가서 취조를 받아야 하고, 갑진이가 원수같이 미워하는 신문기자들을 만나야 하고, 저와 정선과의 이야기가 신문에 올라야 하고 하는 법률 배운 사람에게 올 만한 모든 생각을 하매 도무지 귀찮기가 짝이 없었다.

'윤참판은 무슨 낯으로 보아?'

하는 생각도 나고,

'○○은행에 취직 문제 있던 것도 이 사건 때문에 흐지부지가 되지 아니할까.'

하는 생각이 나매 정선이가 더할 수 없이 미웠다. 갑진은 집 사람들이 모인 기회를 이용하여 제 변명을 하느라고,

"글쎄 웬일야. 무어 의논할 말이 있다고 와가지고는 말도 다 끝내기 전에 제 손으로 반침문을 열고 뛰어들어가서는 저 꼴이란 말야."

하고 알 수 없다는 듯이 머리를 흔들었다. 들을 뿐으로 있던 사람들 중에서 새로 들어온 어멈이,

"지랄병이 있나요?"

하고 유식한 양을 보였다.

"옳지 지랄이로군, 간질야."

하고 갑진은 좋은 말을 발견한 것을 기뻐하였다.

이러는 동안에 정선은 깨어났다. 정선은 눈을 떠서 휘 한번 둘러 보고는 벌떡 일어나서 두 손으로 낯을 가리고 벽을 향하고 돌아앉아서 울었다. 정선의 옷은 젖고 꾸겨지고 머리는 한바탕 끄들린 사람 모양으로 헙수룩하게 되었다.

"난 죽는 줄 알았구려."

하고 갑진이가 길게 한숨을 쉬었다. 갑진은 이번 통에 그만 모든 흥이 깨어지고 말았다. 여자라는 것이, 적어도 정선이란 여성 하나만은 그만 무서워지고 말았다. 그래서 갑진은,

"자동차 불러 주께 타고 가구려."

하고 차게 정선에게 말하였다. 그리고는,

"내가 나가야 전화를 걸지."

하고 베드롭 위에다가 외투를 입고 뛰어나갔다.

이때에 숭은 밖에서 아무리 기다려도 소식이 없어 아마 제가 파출소 앞까지 간 새에 정선이가 가버린 것이 아닌가 하고 돌아서려다가 그래도 단념이 아니 되어서 갑진의 집 대문까지 걸어왔던 때라 뛰어나오는 갑진과 딱 마주쳤다.

"앗."

하고 갑진은 한 걸음 뒤로 물러서다가,

"자네 여태껏 여기 있었나."

하고 잠깐 머뭇머뭇하다가,

"정 선 씨가 내 집에를 오셨다가 잠깐 기색을 했어. 그래 지금은 피어났네. 난 죽는 줄 알았는걸. 내가 오라고 청한 것도 아닌데 이를테면 나헌테 좀 할 말이 있다고 해서 왔다가 자네가 온 것을 보고 아마 기색을 한 모양이야. 아니 참 자네 간 뒤에 왔던가, 원. 아무려나 살아났으니 다행인데 내가 지금 자동차를 부르러 가니 자네 들어가 보게. 마침 자네가 잘 왔으니 자동차 타고 집으로 같이 가지."

하고는,

"경칠, 어느 놈의 집 전화를 빌려?"

하고 껑충껑충 뛰어나간다. 갑진이가 껑충껑충 뛰어서 모퉁이를 돌아서는 양을 보고 숭은 누를 수 없는 불쾌와 분노를 깨달았다.

'그러면 그것은 정말 정선이던가. 정선이가 무엇 하러 갑진의 집을 찾아왔으며, 내가 오는 것을 보고 숨었으며, 또 기색은 왜 하였는가.'

그 러나 숭은 '억제하는 것이 힘'이라고 생각하였다. 숭은 태연하기를 힘썼다. 이 경우에도 제가 들어가서 정선을 데리고 가는 것이 정선의 체면을 조금이라도 보전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숭은 용기를 내어서 사랑으로 들어갔다. 사랑 마루에는 아직도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있다가 숭이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모두 눈을 크게 떴다. 숭은 머리와 등에 얼음물을 끼얹는 듯함을 깨달았지마는 태연하게 쌍창을 열어제쳤다. 정선이가 혼자 우두커니 벽에 기대어 앉았다가 숭을 보고 두 손으로 낯을 가리었다.

"괜찮으니 다행이오."

하고 숭은 한마디를 던지고 다시 문을 닫아 버렸다.

마루 끝에 섰던 사람들은 숭이가 온 것을 보고 다 나가 버리고 말았다. 숭은 다시 쌍창을 열었다. 정선은 방바닥에 엎드려 어깨를 움직이며 울고 있었다.

밖에서 자동차의 사이렌이 들렸다.

"자동차 왔소. 나오시오."

하는 숭의 말은 부드러웠으나 떨렸다.

정선은 몸을 들어 눈물을 씻고 코를 풀고 머리를 만지고 손가방을 찾아 들고 목도리를 찾아 들고 일어나 나왔다. 그는 구두 끈을 매는 동안에도 땅만 들여다보고 구두를 신고 일어서서도 감히 숭을 우러러보지 못하였다.

숭은 정선을 한번 힐끗 보고는 앞을 서서 대문으로 나왔다. 정선이가 따라 나오는 구두 소리를 들으면서. 자동차가 섰는 큰 한길 모퉁이를 돌아서려 할 적에 갑진을 만났다.

"괜찮소?"

하고 갑진은 정선과 숭을 일시에 바라보았다. 정선의 눈물에 젖은 해쓱한 얼굴과 숭의 화석인 듯한 엄숙한 얼굴이 다 갑진에게는 차마 볼 수 없는 괴로운 것이었다.

'아, 내가 잘못했다.'

하고 갑진은 평생에 몇 번 아니 해본 후회를 하였다.

숭은 정선을 먼저 자동차에 앉히고 저도 올라앉았다. 갑진은 자동차에 가까이 오지 아니하고,

"허군, 잘 가게."

하 는 한마디를 자동차 바퀴가 두어 번 돌아간 뒤에야 던졌다. 자동차 속에서는 아무 대답도 없었다. 갑진은 자동차가 좁은 길로 연해 사이렌을 울리면서 내려가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숭이란 인물을 생각하였다. 동시에 눈을 내리떠 제 모양을 돌아보았다.

'아아, 초라한 내 꼴!'

하고 갑진은 눈을 감았다.

'술주정꾼, 계집애 궁둥이만 따라다니는 놈, 은인의 딸, 친구의 아내를 통한 놈, 직업도 없는 놈, 아무에게도 존경을 못 받는 놈, 그리고 도무지 세상에는 쓸데없는 놈!'

하 고 갑진은 길게 한숨을 쉬었다. 때묻고 꾸깃꾸깃한 자리옷, 세수도 아니 한 얼굴, 음란한 생각만 하는 맘, 이러한 초라한 제 모양이 분명히 눈에 띌 때에 갑진은 힘없이 고개를 숙이고 누구를 만날까 두려워하는 사람으로 제 집을 향하고 무거운 걸음을 옮겼다. 갑진은 그 길로 방에 들어와 눈을 감고 누워서 가만히 생각하였다.

갑 진에게는 밝은 도덕적 양심이 있었다. 그는 본래 둔탁한 기질이 아니다. 보통학교 이래의 수재다. 그는 오늘날 조선 사람이 받을 가장 높은 교육을 받았다. 다만 그에게는 조상 적부터 전해 오는 이기적인 피가 있고 여러 백 년 동안 게으른 생활과 술과 계집의 향락생활에 의지력이 마비되고 말았다. 그는 알지마는 행하지 못하고 행하지마는 계속하지 못한다. 그에게는 의리나 나라나 학문이나 주의나를 위하여 저를 희생해 버릴 만한 열도 없고 인내력도 없다. 오직 권력과 향락에 대한 욕심이 있다. 그것도 저 몸과 맘을 이쁘게 하지 아니하고 얻을 욕심이 있다. 이 점에 있어서 갑진은 유전의 희생자다. 운명의 아들이다.

정 선도 이 점에서는 갑진과 같다. 그는 밝은 지혜와 양심을 가졌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서는 저 한몸의 향락이 다른 모든 것보다 컸다. 갑진이나 정선에게는 나라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기를 기뻐하는 일본 사람의 심리를 깨달을 수가 없다. 그들은 도리어 일본 군인이 어리석어서 전장에 나아가 죽는 것같이 생각한다. 그들의 유전적인 자기 중심주의와 이기주의로 굳어진 뇌세포는 이와 다르게 생각할 자유를 잃어버렸다. 그들로 하여금 연설을 하게 한다면, 글을 쓰게 한다면 그들의 여러 대 동안 단련된 구변과 문리는 아무도 당할 수 없는 좋은 이론을 전개하게 하고, 그들의 비평안은 능히 아무러한 일, 아무러한 사람에게서도 흠점을 집어낼 만하게 날카롭다. 그러나 이기욕 중독, 향락 중독, 알코올 중독된 도덕적 의지는 말할 수 없이 약하다.

힘 드는 일은 남을 시키고서 가만히 보고 앉았다가 그 일이 잘 되면 제가 한 것이라 하고 못 되면 저 같으면 잘할 것이라 하는 그러한 약음을 가졌다. 이 모든 것이 거의 그들의 선천적 약점인 것으로 보아서 그들은 새 시대의 건설에 참례할 자격이 없는 동정할 존재다.

그 러나 개인의 새로운 결심과 감격은 그들에게 새 생명을 불어넣을 수가 있을는지 모른다. 만일 노쇠한 민족이 다시 젊어질 수 없다는 어떤 학자의 말이 옳다고 하면 노쇠한 계급, 노쇠한 혈통의 후예도 영영 다시 젊어질 수 없을는지 모른다.

갑 진도 중학교 이래로 여러 번 결심을 한 일이 있었다. 술, 담배를 아니 먹기로 결심한 일도 있고, 여자를 보고 음심을 아니 먹기로 결심한 일도 있고, 날마다 운동을 하기로, 또는 좋은 서적을 보기로, 또는 산에 오르기로, 또는 돈 쓰는 것을 일일이 적어 놓기로, 또는,

'나는 일생을 마르크스주의에 바치리라.'

고 결심한 일조차 있고, 또는,

'나는 변호사가 되어 농민, 노동자, 사회운동자를 위하여 몸을 바치리라.'

고 결심한 일도 있었다. 장담한 일도 있었다. 그러나 언제나 말뿐이요, 그것이 한 달을 계속한 일도 없었다. 오직,

'사내, 주색을 모르고 무엇을 하느냐. 대장부 마땅히 불구소절할 것이다.'

하는 결심(?)만이 언제까지나 계속하는 듯하였다. 그래서 갑진은,

'어떻게 하면 돈 십만 원이나 얻나. 어떻게 하면 저 계집애를 손에 넣나.'

하는 생각으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날마다 조금씩 조금씩 쌓아서 큰 것을 이룬다는 것 같은 일은 갑진과 같은 의지력 상실자에게는 바랄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것을 누가? 숭이 같은 못난 놈이나.'

하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이건영도 이 점에서는 갑진과 같은 부류다.

갑 진의 맘은 많이 괴로웠다. 못나게 보던 숭에게는 그가 일찍 생각하지 못한 무슨 무서운 힘이 있는 것 같았다. 그가 성낼 일에―---누구든지 성낼 일에 성을 내지 아니하는 숭의 태도가 못난 것이 아니라, 제가 지금까지 생각하지 못하던 무슨 높은 힘인 것 같았다. 갑진은 제가 숭보다 지혜 있고 힘있는 사람이라던 생각이 깨어지는 것을 눈앞에 보았다. 저는 숭이에게 비겨 '가치'가 떨어지는 사람이라는 것을 느꼈다. 그것이 슬프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였다.

'심기일전.'

하는 생각도 났다.

'방향전환.'

하 는 생각도 났다. 언젠가 아마 한선생에게 들은, 'Clean life(깨끗한 생활)'가 인격의 힘의 근원이라던 말도 생각히었다. 담배도 아니 먹고 술도 아니 먹고 계집 집에도 아니 가고 돈 욕심도 아니 내고 오직 청년을 지도하기에만 힘을 쓰고 있는 한선생의 생활은 분명히 깨끗한 생활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한선생에게 사람을 감복시키는 힘이 있음에 틀림없었다. 그 다음에 깨끗한 생활을 하는 이로는 분명히 허숭이었다. 허숭에게 무슨 힘이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으나 오늘은 분명히 그것을 느꼈다. 분명히 허숭은 제가 꿈도 못 꾸던 무슨 힘을 가졌다는 것을, 싫지마는 인식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나도 생활을 고칠까. 나도 술, 담배, 계집을 버리고 깨끗한 생활을 해볼까. 나도 세상을 위해서 몸바치는 일을 해볼까. 그렇게 깨끗한 일생을 보내어 볼까.'

이렇게 생각하면 갑진은 가슴이 뜀을 깨달았다.

그 러나 베드롭 주머니에 있는 해태갑을 만질 때에 한 대 피워 물고 싶었다. 갑진은 모든 생각 다 내버리고 벌떡 일어나 성냥을 찾아 한 대를 피워 물었다. 깊이 뱃속까지 들어가라 하고 연기를 들이마셨다. 정선이 야단통에 두어 시간이나 담배를 끊었다가 먹는 담배라 머리가 아뜩하는 것 같았다.

'요것이 의지력을 마비하는 것인가.'

하고 갑진은 한번 웃고, 그 담배를 재떨이에 북북 비벼 버리고, 그리고는 주머니에 든 해태갑을 꺼내어서 두 손으로 비틀어 두 동강에 끊어서 쌍창을 열고 마당에 홱 집어던졌다. 그리고 갑진은,

'난 담배를 끊는다. 다시는 담배를 입에 아니 댄다!'

하고 혼자 소리를 지르고, 그 결심을 더욱 굳게 하기 위하여 두 주먹을 불끈 쥐어서 허공에 내어둘렀다.

'그러나 술은?'

하 고 갑진은 생각한다. 갑진의 눈에는 대 달린 유리잔에 부어진 노란 위스키가 보인다. 그것은 갑진이가 가장 사랑하는 술이다. 그것을 몇 잔 마시고 얼근하게 취하게 된 때에 젊은 이성의 손을 잡고 허리를 안고 음란한 소리를 하는 저를 상상하였다. 그것은 진실로 버리기 어려운 유쾌한 일이었다. 그러나 갑진은 그러한 이성들에게서 전염한 매독과 임질을 생각하고 그것을 의사에게 보일 때에 부끄럽던 것을 생각한다. 그래서 ○○이라는 사람은 이 위험을 면하기 위하여 꼭 처녀와 유부녀를 따라다닌다는 것을 듣고 갑진이 저도 그것을 배우려 한 것을 생각한다. 그러나 갑진의 눈앞에는 봄날 암캐를 따라다니는 수캐의 떼가 보인다.

'사람이란 그보다 좀더 높은 것이 아닐까.'

하고 갑진은 타구에 침을 탁 뱉는다.

'빌어먹을 것, 마르크시스트나 될까.'

하고 갑진은 열 손가락으로 머리를 득득 긁었다.

'마르크시스트가 되더라도 요새 조선 마르크시스트들보다 백배나 낫게 되련만.'

하고 그는 제 학식과 재주를 생각한다.

'구라파에 한 새 괴물이 있으니……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이 모양으로 공산당 선언시의 문구를 생각해 본다. 그러나 법학을 배운 그에게는 치안유지법이 생각이 난다. 소유권이나 국체의 변혁을 목적으로 결사를 하는 자는 삼 년으로부터 사형…….

갑 진의 눈앞에는 감옥이 보인다. 그는 학생시대에 형법 선생에게 끌려 감옥구경을 한 일이 있다. 그 맨마룻바닥의 음침한 방, 그 미결수의 야청 옷과 복역수의 황토물 들인 옷, 그 쇠사슬, 더구나 머리에 쓰는 그 용수―---이런 것들은 갑진에게는 그렇게 유쾌한 광경은 아니었다. 더구나 그 사형집행장. 갑진은 일찍 저는 검사가 되리라, 검사가 되어 법정에서 논고를 하는 것도 유쾌한 일이지마는 사형집행을 임검하는 것이 더욱 재미롭게 생각한 일도 있다. 그 미운 신문기자놈을 한번 사형집행을 하였으면 하고 손뼉을 치고 웃은 일도 있었다. 그러나 제가 사형수가 되어서 그 자리에 서고 싶은 생각은 털끝만치도 없었다.

'나는 마르크시스트는 싫다. 무릇 감옥과 사형대와 관계 있는 것은 싫다!'

하고 갑진은 몸을 한번 흔들었다.

'빌어먹을 거, 나는 예수나 믿어 볼까. 목사가 되어 볼까.'

하고 갑진은 예배당을 눈에 그렸다.

'찬송합시다, 찬송합시다. 아아, 내 죄를 씻으신 주 이름 찬송합시다.'

그것도 남을 시켜서 부르게 하고 듣는 것은 괜찮지마는 제가 부르는 것은―---그 어리석은 무리들과 섞여서 부르는 것은 쑥스러웠다. 갑진은 원체 창가를 잘 못 하였고 또 음악은 싫었다.

"이놈아 그 빠, 빼 하는 것을 직업이라고 해."

하 고 그는 음악을 전문으로 하는 친구를 놀려먹었다. 갑진에게는 가장 가치 있는 학문은 법학이요, 가장 가치 있는 직업은 관리―---그 중에도 사법관이었다―---그 중에도 검사였다. 그 밖에는 대학 교수와 변호사뿐이 제 체면에 할 수 있는 유일한 직업이었다. 같은 대학 교수라도 사립말고, 조선에 있는 것말고, 동경제국대학 교수였다.

이렇게 도고한 갑진이가 예배당에 가서 어중이떠중이와 함께 찬미를 부르고 고개를 숙여 기도를 하는 것은 차마 못 할 일이었다.

갑 진은 물론 하느님의 존재를 믿지 아니한다. 그는 유물론자일 것이다. 하물며 유대인이 생각하는 하느님인 여호와라는 것은 한 신화 중의 픽션에 불과하였다. 예수는 갑진에게는 괜찮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갑진은 예수 모양으로 밥을 굶고 발을 벗고 돌팔매를 맞고 돌아다니다가 가시 면류관을 쓰고 십자가에 매달려서 옆구리를 찔려 죽고 싶지는 아니하였다. 편안히 살면서, 오래 살면서, 정말 면류관을 쓰면서 예수가 되라면 그것은 할 만한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렇게 하기 위하여 갑진은 돈 많고 아름다운 아내와 고등문관 시험 합격을 노리는 것이었다.

그 렇지마는 하느님이 있고 없고, 예수가 하느님의 외아들임을 믿고 아니 믿는 것은 예수를 믿는 데 별로 큰 지장이 없었다. 일요일마다 예배당에를 가고 남과 같이 찬미를 부르고 성부와 성자와 성신의 이름을 부르기만 하면 갑진은 일년 내에 능히 주일학교 성경 선생, 장로까지는 올라가리라고 생각한다.

'거 할 만하지마는 머 먹을 것이 있다구.'

하고 갑진은 담배 한 모금을 길게 들이마셨다가 입을 여러 모양을 지으며 내어뿜었다.

'무얼 해?'

하고 갑진은 정말 체조 모양으로 두 팔을 홰홰 내두르다가 책상 앞에 와서 꿇어앉으며,

'그렇다고 밤낮 이 모양으로 살다가는 전정이 전병이구.'

하고 눈을 껌벅껌벅하며 생각을 계속한다.

'제길, 나도 금광이나 나설까.'

하고 최창학이, 방응모를 생각한다.

'나 도 최창학이, 방응모 모양으로 금광만 한번 뜨면 백만 원, 이백만 원이 단박에 굴러 들어올 텐데. 오, 또 박용운이란 사람도 백만 원 부자가 되었다고. 내가 하면야 그깟놈들만큼만 해. 그래서는 그 돈은 떡 식산은행, 조선은행, 제일은행…… 일본은행에다가 예금을 해놓고는. 옳지, 요새 경제 봉쇄니, 만주 전쟁이니 하는 판에 그 백만 원, 아니 이백만 원을 가지고 한번 크게 투기사업을 해서 열 갑절만 만들어―---일년 내에. 그러면 이천만 원. 아유 이천만 원 생기면 굉장하겠네.'

하고 갑진은 바로 눈앞에 이천만 원의 현금이 놓이기나 한 듯이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본다.

'이 천만 원만 가지면야 무엇은 못 해. 제길 한번 정치운동을 해보까. 정우회 민정당을 온통으로 손에 넣어서…… 그보다도 조선의 토지를 살까. 아유 그 이천만 원만 있으면야. 아유 그걸 어떻게 다 써. 한번 서울 안에 있는 기생을 모조리 불러 놓고―---아차 또 이런 비루한 생각. 인왕산 밑 윤자작의 집을 사가지고, 어여쁜 여학생 첩을 스물만 얻어서…….'

갑진은 이천만 원이라는 생각에 일시적으로 과대망상광이 된 모양으로 이생각 저생각 하고 있을 때에, 점심상이 나와서 갑진의 공상의 사슬을 끊었다. 그러나 이천만 원 덕분에 정선이 문제로 생겼던 괴로움은 훨씬 가벼워졌다.

'요오시(오냐), 금광을 해보자. 그것도 자본이 드나?'

하고 금광을 해보리라는 생각은 깊이 갑진의 맘에 뿌리를 박았다.

그러나 금광에는 자본이 안 드는가. 새것을 찾으려면 고생이 안 될는가. 누가 찾아 놓은 것을 하나 얻었으면 좋으련마는, 좋은 것을 왜 내어놓을라고. 이렇게 생각하면 금광도 쉬운 것 같지는 아니하였다.

'에이, 귀찮어!'

하고 갑진은 담배 한 대를 또 피워 문다. 담배를 피워 무는 것이 가장 쉬운 일이었다. 밥상을 물린 뒤에도 다시 생각을 계속하였으나 신통한 결론이 없었다. 그는,

'에라, 금년 고문에나 꼭 패스하자.'

하고 책상에서 작년에 부족하였던『형법총론』을 꺼내었다.

'우선 검사가 되어 가지고…… 그래 그래, 검사가 제일이다.'

하고 책을 떠들어 보았다. 그러나 반년 이상이나 돌아보지 않던 책이라 글이 눈에 들어오지를 아니하였다.

'역시 부잣집 딸헌테 장가드는 것이 제일 속한 길이다!'

하고 책을 내동댕이를 쳤다.

'그러나 인제는 신용도 다 잃어버리지를 아니하였나. 그나 그뿐인가, 숭이놈이 그 편지를 불살라 버리지 아니하고 두었다 하면 언제 그것을 내대고 간통 고소를 할는지 아나. 글쎄 내가 미쳤지, 그 편지를 왜 해?'

하고 갑진은 이를 갈았다.

'어디 술 먹으러나 갈까.'

하고 갑진은 시계를 꺼내 보았다. 아직 오후 세시다.

'아직 카페도 안 열었겠고.'

하고 갑진은 대단히 불쾌하였다.

숭은 정선을 자동차에 태우고 오는 길에 혹시 독약이나 먹은 것이 아닌가 하여,

"병원으로 가려오?"

하고 물었다.

"아니오."

하고 정선은 숭을 쳐다보면서 애걸하는 듯이 대답하였다. 그럼 독약은 아니로구나 하고 숭은 잠잠하였다.

"어디로 모시랍시오?"

하고 재동 골목을 다 나서서 운전수가 백미러를 들여다보면서 물었다. 숭은 정선을 돌아보았다. 정선은 남편에게만 들릴 만한 소리로,

"집으로."

하였다. 숭은 아내의 말을 받아,

"정동으로, 방송국 가는 길로."

하 고 명령을 하였다. 정동까지 가는 동안에 두 사람은 아무 말이 없었다. 집에 가서 숭은 유월을 시켜 안방에 자리를 깔아 드리라고 명하고 저는 곧 집에서 나왔다. 정선은 자리에 누워서 앓았다. 몸과 맘을 다 앓았다. 이 몸이 어찌 될 것인지 향방을 알 수가 없었다.

남편은 필경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것이 아니냐. 제가 집에 온 지 수일을 두고 남편이 저와 자리를 같이하지 아니하는 뜻도 알았다. 그러나 정거장까지 저를 나와 맞아 준 뜻, 그 후에도 줄곧 비록 전과 같이 따뜻하지는 아니하다 하더라도 예사롭게 저를 대해 주는 뜻, 오늘도 보통 사람으로 말하면 비록 칼부림까지는 아니 난다 하더라도, 간음한 아내인 제게 대하여 온갖 모욕을 다 하여야 할 경우이건만도 도무지 성낸 빛도, 미워하는 빛도 보이지 아니하는 남편의 속을 도무지 알 도리가 없었다.

'무한한 사랑으로 나를 용서함일까. 남편으로서 이러한 아내를 용서할 수가 있을까. 만일 남편이 다른 여자와 간통을 하였다 하면 나는 이러할 수가 있을까.'

이렇게도 생각해 보았다.

'남편은 내게 대한 사랑이 아주 식어 버려서 치지도외하는 것일까.'

이렇게도 생각하고,

'속 으로는 견딜 수 없는 분함과 슬픔을 품으면서도 남성적인 의지력으로 그것을 꾹 눌러 두었음일까. 마치 단단하고 두터운 땅거죽이 땅 속의 지극히 뜨거운 불을 꾹 눌러 싸고 있는 모양으로, 숭의 강한 인격의 힘이 질투와 분노의 몇천 도인지 알 수 없는 불을 가슴속에 눌러 품고 있음이 아닐까.'

이렇게 생각하면 숭이란 사람이 천지에 꽉차도록 무섭고 큰 사람같이 보였다.

지 금까지 정선은 숭을 저보다 높은 사람, 더 좋은 사람, 더 힘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본 일이 없었다. 도리어 숭을 시골뜨기, 못난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참을 수 없는 것을 참는 것을 볼 때에, 보통 사람이 가지지 아니한 무슨 큰 힘을 가진 사람임을 승인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갑진이가 입버릇같이 말하는 모양으로 숭은 반드시 쑥도 아니요, 못난이도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그 러나 만일 숭이 보통 사람 이상의 분함과 슬픔을 가슴에 품고 꾹 눌러 참고 있다고 하면, 마치 땅 속의 불이 화산으로 터져 나오는 모양으로, 또 그것이 한번 터져 나오는 날이면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을 흔들고 태워 버릴 기세를 보이는 모양으로, 숭의 분통이 한번 터질 때에는 정선의 몸을 가루를 만들고 연기를 만들어 버릴 무서운 위력이 있지 아니할까―---이렇게도 정선은 생각해 보았다.

그처럼 숭이가 힘있고 높은 사람일진대, 저는 숭의 충실한 아내가 되었더면 좋았다고 생각하였다. 또 생각하면 저는 분명히 숭의 값을 잘못 친 것 같았다. 첫째 갑진을 비롯하여 여러 남자가 정선의 인물과 재산을 탐을 내었건마는 숭은 도리어 저와 혼인하기를 아버지에게 대하여 여러 번 거절한 줄을 잘 안다. 정선은 지금까지 이 거절은 숭이가 제 집 문벌과 또 제 인물이 도저히 감당치를 못하여, 이를테면 숭이가 못나서 그런 것으로만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하면 숭의 눈에는 더 큰 다른 것을 보기 때문에 그만한 재산이나 문벌이나 또 여자의 용모와 교육(정선은 제가 세상에 드문 미인이요, 귀족집 딸이요, 고등교육을 받았고, 또 십여 만 원의 재산이 있고 한 것을 세상에 비길 데가 드문 큰 자격이요, 자랑으로 믿고 있다)도 돌아보지 않은 것이라고 깨달아지는 것 같았다.

만일 정선이가 숭에게 대하여 애초부터 이만한 존경을 가졌다면 정선은 숭에게 이처럼 배반하는 아내는 되지 아니하였을 것이다, 이렇게도 생각하였다. 그러나 인제는 동이엣물은 모래 위에 엎질러지지 아니하였느냐. 영원히 다시 주워 담을 수는 없지 아니하냐. 정선의 맘은 슬펐다.

'내 눈이 삐었어. 이년의 눈이 삐었어.'

하고 정선은 울었다.

'어쩌면 갑진이를 그이보다 낫게 보아. 어쩌면 그이를 몰라보아.'

하고 혼자 애를 썼다.

"유월아!"

하고 정선은 소리를 쳤다.

"네에."

하고 유월이가 뛰어들어왔다. 유월의 처녀다운 낯을 보기가 부끄러워서 정선은 눈을 감았다.

"영감이 너 보고 내 말 아니 물으시든?"

"……"

"나 오기 전에?"

하고 정선은 눈을 떴다. 유월은 대단히 얌전하고 아름답게 보였다.

"아뇨, 암 말씀도 아니 하셔요."

하고 유월은 의아하면서도 사실대로 대답하였다.

"나 오기 전에는 어느 방에서 주무셨니?"

"안방에서요."

하고 유월은 웃음을 참느라고 고개를 숙이면서,

"식전에 제가 들어오니깐…… 아이, 우스워."

하고 유월은 우스워서 말이 막혔다. 정선은 유월의 웃는 까닭이 이상했다. 혹시 숭이가 유월을 건드리려고 한 것이나 아닌가 하여 갑자기 질투를 느꼈다.

"이년 말을 하지 않고 웃긴 왜 웃어? 바로 말을 해!"

하고 날카롭게 소리를 질렀다. 유월은 웃음을 걷고,

"영감마님께서 저 벽에 걸렸던 마님 치마를 안고 계시다가 제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내어던지시겠죠."

하고 겁내어하는 눈으로 정선을 바라본다. 유월의 말에 정선은 눈을 감았다. 어디까지든지 남편을 몰라보는 저로구나 하고 부끄러웠다.

"그 동안 잿골 서방님도 오셨든?"

하고 정선은 유월의 대답에서 무슨 재료를 얻으려고 물었다.

"그럼요, 밤낮 오셔서……."

하고 유월이는 잠깐 주저하였다.

"그래, 잿골 서방님이 오셔서 어떻게 하든?"

하고 정선은 무서운 대답을 기다리면서도 물었다.

"오시면 안방으로 들어오셔서……."

하고 말이 막힌다. 본 대로 다 말해도 옳은지 아닌지를 모르는 까닭이다. 정선은 유월이가 저를 바라보고 앉았는 것을 보고,

"어서 본 대로 다 말해."

하고 재촉하였다.

"안 방에 들어오셔서는 어멈더러 마님 자리를 깔라고 호령을 하고, 사루마다 바람으로 어멈을 껴안고―---그건 도무지 말이 아니랍니다. 그리고도 아침에 늦게 일어나셔서는 세숫물을 떠오라고, 술을 사오라고, 반찬이 없다고 소리소리 지르시지요. 남이 부끄러워!"

하고 유월이는 분개한 빛을 보였다.

정선은 또 눈을 감았다. 더 말하랄 용기가 없었다. 정선은 지금 제가 누운 자리가 갑진의 살이 닿았던 것을 생각할 때에 그 자리와 몸이 불결한 것을 깨달았다.

"이 자리 걷어라!"

하고 정선은 벌떡 일어났다. 유월은 명령대로 자리를 걷어 이불장에 얹었다. 정선은,

"그 홑이불, 욧잇, 베갯잇 다 뜯어 빨아라. 내가 또 그것을 덮어 볼는지 모르겠다마는."

하였다. 유월은 제가 한 말이 큰 화단이 되지나 않는가 하고 겁이 났다. 그러나 영감마님을 생각하고 마님과 김서방을 생각하면 그런 말을 제가 한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기운차게 이불과 요를 마루에 내다놓고,

"여보, 똥이 할머니, 이불 뜯으세요!"

하고 아랫방을 향하여 소리를 쳤다. 유월이는 제가 갑자기 중요 인물이 된 것같이 생각되었다.

'여편네가 그게 무슨 꼴이람.'

하고 유월이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여편네란 것은 물론 정선을 가리킨 것이었다.

정선은 이불을 내다놓고 들어오는 유월이를 보고,

"요년, 너 영감께 다 일러바쳤고나?"

하고 눈을 흘겼다. 정선은 저와 갑진에게 대한 모든 비밀이 유월의 입을 통하여 남편의 귀에 들어간 것같이 생각하고 유월이가 미워진 것이었다.

"아닙니다, 쇤네가 무얼 영감마님께 일러바칩니까."

하고 유월은 당황하여 쓰지 말라는 쇤네라는 말을 쓰다가,

"저는 암 말씀도 아니 여쭸습니다."

유월은 똑 잡아떼었다.

"내가 잿골 서방님허구 오류장 갔다가 밤에 늦게 온 이야기도 네가 했지, 요년?"

하고 정선의 말은 더욱 날카로웠다.

"전 오리장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합니다."

하고 유월은 속으로는 토라졌다.

정선은 얼른 책상에 돌아앉아서 편지 한 장을 써서 유월에게 주며,

"너 이것 가지고 다방골 병원댁에 갔다 온. 얼른 오시라고."

하고는 체경에 제 꼴을 비추어 보았다. 머리는 부하게 일어나고 옷은 유치장에서 나온 것같이 꾸겨지고 얼굴은 앓다가 뛰어나온 것 같았다.

'내가 어쩌다가 이 꼴이 되었나?'

하고 정선은 낙심이 되었다.

'이러다가 내가 어찌 될 것인가.'

하는 생각도 났다.

'산에 가서 승이나 될까.'

하 고 정선은 생각하였다. 이것은 조선 여자가 화날 때에 생각한 법이다. 정선은 금강산에 수학여행 갔을 때에 승에게 대한 종교적은 아니나 시적인 감흥을 느낀 일이 있었다. 그것이 생각났다. 그러나 여승의 차디차고 고적한 생활을 하기에는 정선은 너무도 번화하고 정욕적이었다.

'죽어 버릴까.'

하 는 생각도 났다. 이 생각은 팔자 좋게 자라난 정선으로는 도무지 생각해 본 일이 없었다. 오류동 철롯길에서 차에 치어 죽은 홍, 김 두 여자(그들은 정선과 동창이었다)를 정선은 비웃었었다. '죽기는 왜, 봄 같은 인생에 꽃 같은 청춘으로 죽기는 왜?' 이렇게 생각한 것이었다. 정선에게는 인생은 봄과 같고 청춘은 꽃과 같고 생활은 음악회와 같았다. 그는 스스로 저는 모든 괴로움과는 전혀 인연이 없는 선녀로 생각하였던 것이었다. 무엇이나 부족함이 있나, 가문이 좋것다, 재산이 있것다, 인물이 잘났것다, 재주가 있것다, 좋은 교육을 받았것다, 정선이가 일생에 할 일은 오직 즐기는 것뿐이요, 즐기는 것도 싫어지거든 자는 것뿐인 듯하였다. 아마 만물이 면치 못한다는 죽음도 정선 하나만에게는 오지 못할 것 같았다. 그는 여왕이요, 여왕이라도 mortal(죽을) 여왕이 아니라 immortal한(안 죽을) celestial한(천상의) 여왕이었다. 그러면서도 Diana(달)와 같이 영원한 아름다움과 사랑을 누리는 여왕이었다. 하지마는 이태도 다 못 되는 세월이 지나가는 동안에 정선은,

'죽었으면…….'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 망신, 이 욕.'

하 고 정선은 제 앞에 닥쳐오는 것이 망신과 욕뿐인 것을 보았다. 도무지 망신이나 욕을 맛보지 못한 정선에게는 망신과 욕은 죽기보다 싫은 것이었다. 정선은 세상이 저를 향하여 손가락질하고 비웃는 것을 보고는 살 수가 없는 것 같았다.

'죽어 버리자.'

하고 정선은 체경에서 물러나 방바닥에 펄썩 주저앉았다.

기 찻길, 양잿물, 칼모틴 등등 죽는 방법을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보았다. 물에 빠지는 것, 목을 매는 것, 칼로 동맥을 따는 것. 정선은 소설에서와 신문에서 본 자살의 여러 장면을 상상해 보았다. 물에 빠져 죽은 시체, 목매어 죽은 시체, 철도에 치어 사지가 산란한 시체―---이러한 것도 눈앞에 떠나왔다. 그 어느 것도 보기 좋은 꼴은 아니었다.

'남편을 따라가 농촌사업에 일생을 바칠까.'

하고 정선은 살여울도 눈앞에 그려 보았다. 농민 아동들에게 어머니와 같이 사모함을 받으면서 농민교육사업에 몸을 바치는 것―---그러한 것도 눈앞에 그려 보았다.

그러나 남편이 과연 저를 용서할까. 아니, 남편이 지금 저를 죽여 버리려고 칼이나 육혈포나를 사러 간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도 불현듯 나서 정선은 몸에 소름이 끼쳤다.

'남편은 맘만 나면 무슨 일이라도 할 사람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남편이 저를 죽일 확실성이 더하는 듯하였다.

'남편이 어디를 갔을까.'

하고 정선은 정신없는 눈으로 방 안을 둘러보았다. 방 안에는 구석구석 남편이 피 묻은 칼을 들고 저를 노려보는 것만 같았다. 정선은 아까 기색하였던 신경의 격동이 아직 가라앉지를 아니한 것이었다.

"유월아!"

하고 정선은 무서워서 불렀다. 그 소리에 놀라 유모가 뛰어들어왔다. 정선의 입술에는 핏기가 전혀 없었다.

현 의사는 환자를 보내고 수술복을 벗고 안마루인 양실에 들어와서 소파에 앉아 담배를 피워 물었다. 그는 남자 모양으로 한 다리 위에 한 다리를 얹고 고개를 교의 뒤에 기대고 시름없이 공상을 하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 놓인 홍차 잔에서는 연연한 김이 가늘게 올랐다.

역시 이성이 그리웠다. 큰소리는 하지마는 혼자 있는 것은 적적하였다. 나이 삼십이 넘으면 여자로서 앞날의 젊음이 많지 아니한 것이 느껴졌다.

'혼인을 할까.'

하 고 현의사는 요새에 가끔 생각하게 되었다. 정선이가 다녀간 뒤로 웬일인지 더욱 그런 생각이 났다. 봄의 꽃 같던 정선이가 내외 금실이 좋지 못하여 애를 쓰는 것을 보고는 혼인할 생각이 아니 남직도 하건마는 도리어 그와 반대였다. 젊은 아내로의 괴로움―---현은 그것이 도리어 그립고 가지고 싶었다. 어머니로의 괴로움도 가지고 싶었다.

'고생이 재미지.'

하 는 어떤 시집간 동무의 말이 결코 해학으로만 들리지 아니하였다. 내외 싸움, 앓는 자식을 위해 밤을 새우며 애졸함―---이런 것은 부인, 소아만 날마다 접하는 현의사로서는 이루 셀 수가 없이 듣는 이야기였다. 도무지 어떤 부인이든지 말을 아니 하면 몰라도 한번 두번 사귀어 말을 하면 저마다 고생이 없는 사람이 없었다. 있다면 그것은 허영심 많고 거짓말 잘하는 여자여서 제 집에는 돈도 많고 집도 좋고 남편도 잘나고 금실도 좋다는 사람뿐이었다.

'글쎄 뭣 허러들 시집들을 가?'

하고 현은 마치 본능과 인정을 다 태워 버린 식은 재나 되는 것같이 빈정대지마는, 그러나 겨울 시내의 굳은 얼음 밑에도 물은 여전히 울고 흘러가는 것과 같이 가슴의 속속 깊이는 젊은 여성의 애욕의 불길이 탔다.

'허지만 누구헌테 시집을 간담?'

하고 현의사는 혼자 탄식하였다. 눈이 너무 높았다. 그것을 현은,

'어디 조선에 사람이 있어야지.'

라고 설명하는 버릇이 있다.

현의사는 상자 속에 있는 여러 가지 편지들의 필자인 사내들을 생각해 본다. 이박사, 김두취, 문학 청년, 부랑자, 교사 등등. 그러나 현이 일생을 의탁하고자 하는 사람은 없었다.

"한 남자에게 어떻게 모든 것을 찾소. 갑에게서는 인물을 취하고 을에게서는 재주를 취하고 병에게서는 체격을 취하고 정에게서는 말을 취하고 또 돈을 취하고, 이 모양으로 해야지 한 남자가 모든 것을 구비할 수야 있소?"

하던 어떤 기생 친구의 말도 생각하였다. 콜론타이의 붉은 사랑 식 연애관도 생각하였다.

'허기는 일생을 같이 살자니 문제지, 남편을 고르기가 어렵지 하루 이틀의 남편이야 구하자면야 이박사나 편지질하는 무리들도 하루 이틀이라면야…….'

하고 현의사는 제 생각이 우스워서 깔깔 웃었다.

"네?"

하고 현의사가 웃는 소리에 혹시 무슨 일이나 있나 하고 계집애가 건넌방에서 뛰어나왔다.

"아니다, 나 혼자 웃었다."

하고, 도로 건넌방으로 들어가려는 것을,

"얘, 너 자라서 시집갈래?"

하고 물었다.

"싫여요, 시집을 누가 가요."

하고 계집애는 부끄러워서 몸을 비틀면서,

"언제든지 선생님 모시고 있을 테야요."

하였다.

"내가 시집을 가면?"

"네?"

하고 계집애는 못 들을 소리나 들었다는 듯이 눈을 크게 뜬다. 현의사가 이렇게 있을 때에 유월이가 정선의 편지를 가지고 왔다.

"오냐."

하고 현의사는 유월의 손에서 편지를 받으면서,

"너희 아씨 언제 오셨니? 시골 가셨더라지?"

하고 편지를 뜯는다.

"우리 마님요?"

하고 유월은 현의사의 아씨란 말을 정정한 뒤에,

"벌써 오셨습니다. 사흘 됐나 나흘 됐나?"

하고는,

"얼른 좀 오십시사고요."

하고는 동무의 손을 잡고 웃고 소곤거린다.

"너희 허선생도 오셨니?"

"네, 바로 마님 떠나신 날 오셨에요."

현의사는 고개를 끄덕끄덕한다.

"무슨 급히 의논할 일이 있단 말야?"

하 고 현의사는 담배 한 대를 더 붙이고 가만히 눈을 감는다. 마치 셜록 홈스가 무슨 큰 문제를 해결하려는 모양으로. 정선이가 낙태시키는 방법을 묻던 것, 정선이가 허둥허둥하던 것, 또 정선이가 왔다 가는 길로 시골로 내려간 것, 이 모든 것이 다 무슨 수수께끼를 싸고도는 사실인 듯하였다.

'역시 혼인이란 귀찮은 것인가. 혼자 사는 것이 제일 편한가.'

하고 현의사는 담배를 꺼버리고,

"택시 하나 불러라."

하고 명령하였다.

그로부터 십 분 후에는 현의사의 청초하고도 싸늘한 자태가 정선과 마주 앉아 있었다.

"결국 정선의 맘에 달렸지."

하고 현의사는 정선의 하소연을 다 들은 뒤에 하는 말이었다.

"정 선이가 지난 일을 다 뉘우치고, 앞으로 남편에게 충실하고 순종하는 아내가 될 결심이라면 허변호사와 그렇게 하는 것이요, 또 만일 정선이가 도저히 이 가정생활을 계속할 의사가 없다면, 또 그러하는 것이고―---그럴 것 아니냐. 잘못은 어차피 잘못이니까. 아마 붉은 사랑의 표준으로 보더라도 네 행위는 죄가 되겠지. 아무리 생각하더라도 네 행위를 변명할 길은 없을 것이다. 정조라는 문제를 차치한다 하더라도, 신의 문제거든. 정조에는 붉은 정조, 흰 정조가 있을는지 모르지마는, 신의라든가 의리라든가 하는 문제에 이르러서는 붉고 흰 것이 없으리란 말이다. 사람이 사회생활을 하는 동안 아마 영원성을 가진 것이겠지. 그런데 정선이 행위로 말하면 신의를 저버린 행위거든. 속이지 못할 사람을 속이고 하지 못할 일을 한 것이거든. 그러니까 말이야. 정선이 할 일은 우선 남편에게 모든 것을 자백하고, 또 사죄하고, 다음에는 아까 말한 것과 같이 정선이가 원하는 길, 가정의 계속이냐 파괴냐의 두 길 중에 하나를 택해서 남편에게 청할 것은 청하고 원할 것은 원할 것이란 말야. 그러니깐 지금 네 생각이 어떠냐 말이다. 가정을 계속하느냐 갈라서느냐―---그걸 먼첨 작정하란 말이다."

하고 현의사는 정선의 속을 꿰뚫어보려는 듯한 파는 눈으로 정선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정선의 초췌하고 어찌할 줄 모르는 얼굴이 가엾었다. 역시 혼인이란 어려운 것인가 하고 현은 제 몸이 단출하고 가벼움을 느꼈다.

"내가 어떡허면 좋수?"

하고 정선은 그만 울고 엎드렸다.

남편의 앞에서 갑진과의 관계를 자백하는 것, 그 다음에 올 남편의 말, 그 다음에 올 제 앞길 모두 캄캄하였다. 갑진과 둘이서 오류장으로 가던 그 용기는 어디서 나왔던 것인고. 정선은 제 일의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현은 우는 정선을 물끄러미 보고만 앉았다. 침묵 중에 시계바늘은 돌아갔다.

"우는 것으로 해결이 되나."

하고 현의사는 정선의 어깨를 만지며,

"인 제는 여자도 우는 것을 버릴 때가 아닌가. 우는 것은 약자의 무기다. 어려운 일을 해결하는 것은 뜨거운 감정이 아니거든, 찬 이지란 말이다. 맘을 식혀, 싸늘하게 얼음같이 식혀요. 그래야 바른 생각이 나오거든. 원래 네가 맘을 식혔더면야 이런 일이 나지를 아니했을 것이다. 열정이 너를 그르쳤고나…… 정선이, 무슨 엔진이든지 말이다, 다 냉각장치가 있단 말야, 식히는 장치가. 엔진이 돌기는 열로 돌지마는 식히지를 아니하면 아주 돌지 못하게 터지거나 병이 나고 말거든. 그래서 자동차든지, 비행기든지 다 냉각장치가 있단 말야―---공기로 식히는 것도 있고, 물로 식히는 것도 있지 아니하냐. 그 모양으로 열정가의 열정에도 냉각장치가 필요하단 말이다. 그래서 지금은 냉각을 시켜야 될 때라고 생각되거든 즉시 냉각시킬 수 있도록, 썩 기민하고 정확하게 작용이 되도록 조절해 놓을 필요가 있어. 그럼 그 열정의 냉각장치는 무에냐 하면 그거는 이지란 말이다, 인텔리전트란 말이다. 정선이도 인텔리전트하기는 하지마는 아직 이모션(정)과 인텔리전트가 잘 조화, 연락이 되지 못했단 말야. 하니깐 말이다, 잘 머리를 식혀 가지고 생각을 해보란 말이다."

정 선의 혼란한 의식 속에는 현의사의 말이 분명히 다 들어오지는 아니하였다. 그러나 제 행동이 인텔리전트하지 못한 것만은 의식하였다. 그것을 의식할 때에 정선은 한 가지 더 낙망을 느끼었다. 정선은 스스로 약은 사람으로 믿고 있었는데 제 약음이란 것이 몇 푼 어치 아니 되는 것을 깨달은 까닭이었다. 이만한 어려운 경우를 당하면 곧 파산이 되는 제 지혜라는 것이 가엾은 것이라 하였다.

이 렇게 저를 평가할수록 아무러한 일에도 도무지 업셋(쩔쩔매는 것)하지 아니하는 남편의 지력과 의지력이 가치가 높고 무서운 것같이 보였다. 현의사는 싸늘한 지혜의 사람만 되지마는, 남편에게는 싸늘한 지혜 외에도 굳은 의지의 힘과 불 같은 열정을 가진 것으로 보였다. 이렇게 정선이가 남편의 인격을 심리학적으로 분석해 보기는 이것이 처음이었다. 그것은 현의사의 도움이라고 아니 할 수 없다.

"내가 혼자 살아갈 수는 없겠수?"

하고 정선은 제게 힘이 없음을 느끼면서 물었다.

"혼자? 이혼하고?"

하고 현은 반문한다.

"이를테면 말이우."

"혼자 살아갈 수 있겠지. 정선이는 재산이 있으니까. 재산만 있으면 살기는 사는 게지. 먹고 입으면 사는 것이니까."

"교사 노릇이라도 못 할까?"

"그건 안 될걸. 간음하고 이혼당한 사람을 누가 선생으로 쓸라고."

하고 현의사는 사정없이 말하였다.

정선은 너무도 사정없는 말에 가슴이 뜨끔하였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그것은 사실이었다.

"그럼 내가 무얼 허구 사우?"

하고 정선은 눈에 새로운 눈물을 담으면서 물었다.

"무슨 일을 한단 말이지? 먹고 입지만 말고 무슨 일을 해본단 말이지?"

하고 현의사는 여전히 싸늘하였다.

"응, 내가 지금 어쩔 줄을 모르니 바로 말씀해 주어요. 나는 자살할 생각도 해보았어. 지금도 죽고만 싶어. 허지만 죽는 일밖에 없을까?"

하고 정선은 눈물에 젖은 눈으로 현의사를 바라본다.

"죽어 버리는 것도 한 해결책이지. 세상이란 죽음에 대해서는 턱없이 동정하는 법이니깐."

하고 현의사는 눈을 감고 무엇을 생각한다.

"허지만."

하고 현의사는 한 다리를 한 무릎에 바꾸어 얹으며,

"자 살이란 것은 무엇을 해결하는 수단 중에 제일 졸렬한 수단이다. 어떤 사람이 자살을 하는고 하니 책임감은 있으나 도무지 힘이 없는 사람이거나, 그렇지 아니하면 백가지 천가지로 있는 힘을 다해 보다가 그야말로 진퇴유곡이 되어서 한번 죽음으로써 이름이나 보전하자는 것이다. 그 밖에도 남녀의 정사라든지, 부랑자가 돈이 없어 죽는다든지, 또는 정신병적으로, 이름은 좋게 철학적으로 자살하는 사람도 있지마는 그것은 우리네 생각으로 보면 다 정신병적이야. 어느 자살이든지를 물론하고, 자살한다는 것은 약자의 일이라고 나는 믿는다. 세상에 제일 쉬운 것이 죽는 일이거든. 아무리 못난이라도 게름뱅이라도 가만히 있기만 하면 한번은 죽는 것이란 말이다. 사람이 나라를 위해서 전장에서 죽는다든지, 또 예수나 베드로, 바울 모양으로 세상을 위해서 인류를 구하노라고 죽는다든지, 또 교르다노 브루노 모양으로 진리를 위해서 죽는다든지 하는 것은 존경할 일이요, 저마다 못 할 일이지마는 제 맘이 좀 괴롭다고, 세상이 좀 부끄럽다고 죽어? 그건 약하다는 것보다도 죄악이란 말이다. 무슨 죄악이나 죄악은 필경 약한 데서 나오는 것이지마는, 가령 정선이로 보더라도 말이다. 간호부가 되어 앓는 사람을 위로하고 도와 줄 수도 있고 학교에 못 가는 애들에게 글자를 가르쳐 줄 수도 있겠고 돌아다니면서 남의 마루방에 걸레를 쳐주기로 세상에 무슨 할 일이 없어서 죽는단 말이냐. 또 네 남편에게 잘 말하면 용서함을 받아서 새로 각설로 행복된 가정을 이룰 수도 있을 것이고―---얘 조선에는 네 남편 같은 사람이 드물다. 다들 돈푼이나 따라다니고, 계집애 궁둥이나 따라다니고, 조그마한 문화주택이나 탐내고 하는 이때에 그이는 돈도 안 돌아보고 미인도 안 돌아보고 도회의 향락도 다 내버리고 세계적으로 빈약하고 세계적으로 살 재미 없는 조선 농촌에 뛰어들어간다는 것이 영웅적 행위다. 누구나 다 하는 일인 줄 아니? 나 같으면 그런 남편만 있으면 그야말로 날마다 머리를 풀어서 발을 씻고 발바닥에 입을 맞추겠다. 너는 무엇이 부족해서 그러는지 나는 도무지 네 속을 알 수가 없다."

하 고 현의사는 웃지도 아니하고 길게 한숨을 내어쉰다. 그것은 제가 한 말이 정성되고 참된 것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정선은 처음보다 냉정한 의식을 가지고 현의사의 말을 들었다. 그 말은 극히 이론이 정연하였다. 또 현의사의 말의 주지가,

일, 나를 중심으로 생각지 말 것.

이, 숭의 인격이 출중하다는 것.

인 것도 알아들었다. 알아들을 뿐 아니라 그 말이 모두 무거운 압력을 가지고 정선의 맘에 스며듦을 깨달았다.

"나도 선희 모양으로 기생이나 될까."

하고 정선은 말을 던졌다.

"무어?"

하고 현의사는 깜짝 놀랐다.

"기생이나 될까, 선희 모양으로―--- 선희가 산월이라던가, 기생 이름으로."

하고 정선은 빙그레 웃었다. 현의사는 정선의 맘이 좀 풀려서 웃는 것만이 기뻤다. 그래서 현의사도 사내 웃음 모양으로,

"하하하하."

하고 웃었다.

현의사가 가려고 일어설 때에 숭이가 돌아왔다. 숭은 사랑으로 들어가려는 것을 유월이가 다방골서 현의사가 왔다고 해서 안방으로 들어온 것이었다.

"오셨어요?"

하고 숭은 현이 내어미는 손을 잡아 흔들었다.

"그렇게 왔단 말씀도 아니 하세요? 전화라도 거시지."

하고 현은 숭의 손을 뿌리쳤다.

"참 미안합니다."

하고 숭도 웃었다. 다들 앉았다.

"그래, 농촌 재미가 어떠세요?"

하고 현은 일부러 좌석을 유쾌하게 하려고 하는 듯이,

"난 도무지 시골생활은 몰라. 석왕사 한 이 주일 가본 일이 있나. 제일 불편한 게 전등 없는 게야. 안 그래요?"

하고 말을 시킨다.

"왜 석왕사는 전등이 없소? 있다우."

하고 정선도 기운을 얻어 말대꾸를 한다.

"모두 불편하지요."

하고 숭도 유쾌하게,

"도 회에는 편리하도록 편리한 것을 다 만들어 놓았지마는, 농촌에는 아무것도 만들어 놓는 이가 없거든요. 도회 설비 십분지 일만 해 놓아 보세요. 도회에 와 살기보다 나을 테니. 푸른 하늘, 맑은 물, 산, 신선한 풀, 새들, 신선한 공기, 순박한 풍속, 이것이야 농촌 아니면 볼 수 있어요?"

하고 열심으로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직업이 의사니깐 천생 도회에서만 살게 생겼지요?"

"왜 농촌에는 의사가 쓸데없나요? 농촌에는 병이 없나요?"

"그야 그렇지요마는 가난한 농민들이 어떻게 의사를 부르겠어요?"

하고 현의사는 제 주장이 약한 것을 생각하고 픽 웃는다.

"자 동차 타고 불려 다닐 의사는 농촌에서는 쓸데없지요. 허지마는 제 발로 걸어다닐 의사는 한없이 필요합니다. 내가 처음 살여울을 가니까 살여울 동네에만 이질 환자, 장질부사 환자가 십여 명이나 되겠지요. 그래서 내가 읍내에 가서 의사를 불렀지요. 했더니 자동차비 외에 출장비, 왕진료 하고 사뭇 받아 낸단 말씀이야요. 그리고도 오라는 때 오지도 않거든요. 그래서 내가 검온기 하나 사고 또 약품도 좀 사다가 의사 겸 간호부 노릇을 했지요……."

"오, 그러시다가 장질부사를 붙들리셨습니다그려? 이를테면 순직이시로군, 하하하하."

하고 현의사는 말을 가로채어서 웃는다.

"그 러니 농민들이 전염이 무엇인지를 압니까, 격리가 무엇인지를 압니까, 소독이 무엇인지를 압니까. 의사들이 무엇 하러 도회에만 몰려요? 왜 서울에는 골목골목에 병원이 있는데도 의사들이 서울에만 있으려 들어요? 왜 만 명에 하나도 의사가 없는 시골에는 안 가려 들어요. 왜 부랑자나 남의 첩이나 이런 사람의 병이면 제 부모 병이나 같이 밤을 새워 가며 시탕을 하면서도, 왜 제 밥과 제 옷을 만들어 주고 제 민족의 주인인 농민들의 앓는 곳에는 안 가려 들어요. 현선생은 왜 불쌍한, 밤낮 쓸데 있는 일에 골몰한 농촌 부녀와 어린애들 병을 좀 안 보아 주시고, 대학병원일세 의전병원일세 세브란스일세 하고 큰 병원이 수두룩한 데 있어서 한가한 사람들의 병만 보고 계셔요? 돈벌어 보실 양으로? 농촌에 가시더라도 양식과 나무 걱정은 없으시리다. 현선생이 만일 우리 살여울에 와서 개업을 하신다면 집 한 채, 양식, 나무, 반찬거리 다 드리고, 그리고도 떡 한 집에서는 떡, 닭 잡은 집에서 닭고기 빠지지 않고 갖다가 드릴 것입니다. 그리고 농민들에게 어머니와 같은 사랑과 존경을 받으시면서 일생을 보내실 것입니다."

하는 숭의 눈은 열정으로 빛났다.

"어머니 소리 듣기는 싫여!"

하고 현의사는 웃었으나 곧 엄숙한 표정을 지어 숭의 말에 경의를 표하였다.

서 울의 밤은 깊어 간다. 서울의 밤에는 소리 없이 눈이 내린다. 덕수궁 빈 대궐의 궁장에 소복소복 밤눈이 덮인 열시 넘어가 될 때에는 이화학당의 피아노 소리도 그치고 소비에트 연방과 북미합중국 영사관도 삼림과 같이 고요한데 오직 마당에 나무들만이 하얗게 눈을 무릅쓰고 섰을 뿐이다.

서 울이 금년에는 눈이 적었으나 눈이 오면 반드시 아름다운 경치를 보였다. 오늘 밤 눈도 그러한 아름다운 눈 중의 하나였다. 음산한 찬바람에 날리는 부서진 눈이 아니라 거침없이 사뭇 내려오는 송이눈이었다. 성난 가루눈이 아니요 눈물과 웃음을 머금은 촉촉한 눈이었다. 그들은 사뿐사뿐 지붕과 나뭇가지와 바위와 길에 굴러다니던 쇠똥 위에까지도 내려와서 가만히 앉는다. 가는 가지 연한 잎이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하여 고개를 흔들면은 놀란 새 모양으로 땅에 떨어지지마는 그러하지 아니한 동안 그들은―---눈송이들은 하느님의 둘째 명령을 가만히 기다리고 앉아 있다―---언제까지든지.

땅 은 희고 하늘은 회색이다. 천지는 밤눈빛이라 할 특별한 빛에 싸인다. 고요하고 깨끗하고 부드러운 천지의 신(장면). 이것은 천지의 아름다운 신 중에도 가장 아름다운 것 중에 하나다. 누가 이것을 보나? 사람들은 잔다. 새들도 짐승들도 잔다. 달도 별들도 다 잠이 들었다. 이 평화로운 신을 보는 이는 오직 하느님 자신과 시인(詩人)의 꿈뿐이다. 그렇지 아니하면 잠을 못 이루고 헤매는 근심 품은 사람들이다. 혹은 몰래 만나는 사랑하는 젊은이들이다.

이렇게 평화로운 눈에 덮인 지붕 밑은 반드시 평화로운 단잠뿐은 아니다. 그 밑에 열락(悅樂)의 따뜻한 보금자리도 있겠지마는 눈물의 신, 쟁투의 신, 고통의 신도 없지 아니하다.

옛 날 같으면 정동 대궐과 서궐, 미국 공사관, 아라사 공사관과 연락하던 복도가 있던 고갯마루터기를 영성문 쪽으로부터 허둥지둥 올라오는 검은 그림자가 있다. 그는 마치 포수에게 쫓겨오는 어린 사슴과 같이 비틀거리며 뛰어온다. 그 그림자는 고개 위에 우뚝 섰다.

"내가 어디로 가는 것이야?"

하는 듯이 그는 사방을 둘러본다. 그의 머리와 어깨에는 촉촉한 눈송이가 사뿐사뿐 내려와 앉는다.

그 는 이윽히 주저하다가 정동 예배당 쪽으로 허둥거리고 걸어내려온다. 뒤에는 조그마한 발자국을 남기면서 그는 비탈을 뛰어내려오는 사람 모양으로 재판소 정문 앞까지 일직선으로 내려와 가지고는 또 이쪽 저쪽을 돌아보더니 무엇에 끌리는 모양으로 예배당 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예배당 앞에 다다라서는 그는 예배당 문설주를 붙들고 쓰러지는 몸을 겨우 붙드는 자세를 취한다. 그의 머리와 어깨는 희다. 회색 하늘에서는 배꽃 같은 눈이 점점 더욱 퍼부어 내린다. 그는 정선이다.

"하느님, 나는 어디로 가요?"

하고 정선은 예배당 뾰족지붕을 바라보았다.

정 선에게서는 하느님이나 예수에 대한 믿음이 스러진 지 오래였다. 아마 일찍 생겨 본 일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십오 년 학교생활에 꼭꼭 예배당에를 다니고 성경을 보고 기도를 하였다. 그러나 학교를 나온 날부터 그는 일찍 성경을 펴본 일도 없고 기도를 해본 일도 없었다. 졸업예배는 그에게는 마지막 예배였다. 그러나 정선은 어찌하여 이 깊은 밤에 허둥지둥 여기를 와서 예배당 문설주를 붙들고 우는가.

정선은 어찌하여 여기를 왔나?

현의사가 집에 환자 왔다는 기별을 듣고 돌아가 버린 뒤에 숭과 정선은 말없이 저녁상을 마주 받았다. 그 침묵은 참으로 견딜 수 없이 무겁고 괴로운 침묵이었다.

정 선은 남편이 말문을 열어 주기를 고대하였다. 남편은 반드시 말문을 열어서 이 무겁고 괴로운 침묵을 깨뜨리고 저를 위로해 주는 말을 하리라고 믿었다. 그리고 맛도 없는 밥을 퍼넣고 있었다. 그러나 숭의 입에서 도무지 말이 나오지 아니할 뿐더러 그 눈도 오직 밥 그릇과 반찬 그릇에서 돌 뿐이요, 한 번도 정선에게로 향하지 아니하였다.

정 선은 혹은 곁눈으로 혹은 치뜨는 눈으로 남편의 태도를 엿보았으나 그는 마치 바윗돌같이 태연하여 얼굴에는 아무 표정의 움직임도 없었다. 이따금 숭이가 밥술을 든 채로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는 것은 무슨 괴로운 생각을 보임인가 하였다.

이 모양으로 저녁도 끝이 났다. 상도 물리기 전에 숭은 사랑으로 나와 버렸다. 숭이 나아간 뒤에 정선은 누를 수 없는 슬픔이 북받쳐서 책상 위에 엎드려 울었다.

정 선은 현의사의 충고대로 남편에게 제 모든 잘못을 뉘우치고 그 용서함을 빌고 싶었다. 그리고 만일 남편이 허하기만 한다면 그를 따라서 어디까지라도 가고 싶었다. 살여울 가서 오라 같은 굵은 베 치마를 입고 물을 긷고 밥을 지어도 좋을 것 같았다. 그러나 밥을 먹는 동안에도 정선은 그 기회를 찾지 못하였다.

'한 없는 남편의 사랑'을 정선은 숭에게 기대하였다. 또 저는 남편에게 그만한 것을 기대할 권리가 있는 것같이 생각하였다. 거기는 숭이가 정선의 친정집 밥으로 공부를 한 것, 제가 십여 만 원의 재산을 가지고 온 것 등을 믿는 맘이 섞인 것이었다.

정 선은 이제나 남편이 들어오는가 저제나 들어오는가 하고 기다렸다. 마당에서 무슨 소리가 나도 그것이 남편의 발자취나 아닌가 하였다. 마치 애인을 기다리는 처녀의 맘과 같았다. 만일 지금 남편이 들어오기만 하면 울고 매어달리려고까지 생각하였다.

그러나 시계나 아홉시를 가리켜도 남편은 들어오지를 아니하였다. 정선은 초조하여 유월이를 불러 남편이 사랑에 있나 없나, 또는 무엇을 하는가 보고 오라고 하였다.

유월이의 보고에 의하건댄 남편은 사랑에서 짐을 싸더라고 한다. 그러면 남편은 살여울로 가려는 것인가. 저를 아주 버리고 살여울로 가려는 것인가 하였다.

정선은 일어나 사랑으로 나갔다. 일부러 발자국 소리를 내면서 마루에 올라서서 문 밖에서 잠깐 기다렸다. 방 안은 고요하였다. 정선은 서양식으로 문을 두어 번 두드렸다. 그리고 또 기다렸다.

십 초나 지냈을 만한 때에 숭은 일어나서 문을 열었다. 그리고 무심한 눈으로 정선을 바라보고 들어오라는 보통 인사로 하는 듯이 몸을 한편으로 비키고 섰다.

정선은 만나는 길로 남편에게 안기려 하였으나 남편의 이 무심한 태도를 보고는 그 용기도 다 없어졌다. 방 안에 가로놓인 가방들을 보고는 도리어 일종의 반감까지 일어났다.

정선은 가방을 둘러보면서,

"어디 가시우?"

하고 남편에게 말을 붙였다.

"살여울로 가우."

하는 것이 숭의 대답이었다.

"가시려거든 결말을 내고 가시우."

하고 정선은 떨리는 분개한 음성으로 톡 쏘았다. 정선이가 결말을 내고 가라고 대드는 바람에 숭은 잠깐 대답을 잃은 듯, 정선의 눈에서 말 밖엣뜻을 찾으려 하였다.

정선의 눈은 독기를 품고 입술은 떨었다. 그는 남편의 무한한 사랑을 믿던 반동으로 남편이 저를 버리고 달아나려는 것에 무한한 분개를 느낀 것이었다.

"결말?"

하고 숭은 정선의 맘에 대한 정탐이 끝이 났다는 듯이 다시 태안한 어조로 말을 하였다.

"그럼, 결말을 내야지. 흐지부지하고 가실 듯싶소?"

하고 정선은 방바닥에 모으로 세워 놓은 슈트케이스를 발로 차서 굴리고 해볼 테면 해보자 하는 모양으로 아랫목에 펄썩 주저앉았다. 분난 정선의 생각에는 이것도 다 내 집인데 하는 생각이 난 것이었다.

"결말이 다 나지 않았소? 결말이 다 났으니까 나는 나 갈 데로 가는 것이오. 아직 결말 아니 난 것은 여기 있소."

하고 숭은 양복 저고리 속주머니에서 봉투에 넣은 서류 한 장을 꺼내어,

"여 기는 당신과 나와의 이혼 수속이 들어 있고, 내 도장은 박아 놓았으니 언제나 당신이 하고 싶은 때에 당신 이름 밑에 도장을 찍고 당신 아버지 도장을 찍어서 경성부에 제출을 하시오그려. 그리고 내 이름으로 장인께서 주신 재산은 전부 장인 이름에로 양도한다는 공정 증서를 작성해서 아까 갔다가 드렸소. 이만하면 결말이 다 나지 않았소? 그 밖에 무슨 결말 안 난 것이 있단 말이오? 응, 그리구 이 집도 역시 당신 아버지께로 넘긴다고 공정 증서 속에 집어넣었소."

하고 쇳대 끈에서 금고 열쇠를 뽑아서 정선의 앞에 내어던진다.

정 선은 숭의 대답에 정신을 잃을 뻔하였다. 숭이가 낮에 밖에 나갔다 들어온 것이 모두 이러한 수속 때문이었던가. 남편은 아주 저를 끊어 버릴 결심을 다 하였는가 하매 전신이 매어달렸던 줄이 탁 끊어진 것 같아서, 그 서슬에 제 몸은 바윗돌에 탁 부딪친 것 같아서 정신이 희미해짐을 깨달았다.

"나는 살여울서 벌써 당신과 갑진과의 관계를 알았소."

하고 숭은 정선을 향하고 마주 앉아 얼마큼 태도를 부드럽게 풀며,

"어 느 친구가 내게 편지를 해주었소. 나는 그 편지를 아니 믿으려 했지마는, 그래도 맘이 괴로워서 예정보다 일찍 서울로 올라왔소. 내가 하루만 더 일찍 올라왔더면 우리 불행은 좀 덜했을는지 모를 것을, 아마 운명인가 보오. 나는 황주에서 집으로 당신에게 전보를 놓고 당신이 정거장에 나올 것을 기다렸으나, 물론 그때 내가 경성역에 내릴 때에는 당신은 갑진 군과 어느 요릿집에서 저녁을 막 마쳤을 때이었을 것이오. 그러니까 내 전보가 집에 올 때에는 당신은 갑진 군과 함께 훈련원 운동장에서 베이스볼 구경을 하고 있었을 것이오. 나는 차에서 내려서 혼자 나오다가 당신이 갑진이와 함께 택시를 타고 오류장을 향하고 달려가는 것을 보았소. 그리고 나는 집에 온 이튿날인가 갑진 군이 당신에게 한 편지를 받아 보았소. 그 편지로 나도 당신이 오류장 갔던 목적을 알았소. 그리고 오늘까지 나도 당신이 내게 무슨 말을 하는가 하고 기다렸고, 또 나를 찾아서 살여울 간 뜻도 추측은 하지마는 당신의 입으로 말을 들어 볼까 하였소. 나는 당신이 비록 일시의 잘못으로 그런 일을 저질렀다 하더라도 반드시 내 앞에서 뉘우치는 말을 할 것을 믿고 기다렸소. 그러나 내가 믿었던 것은 다 허사요. 나는 오늘에 이르러서 모든 일은 다 끝난 것을 깨달았소. 그래서 나는 오늘 하루로 당신의 말과 같이 우리 부부생활에 결말을 짓고 밤차로 내 일터로 가는 일밖에 남은 것이 무엇이오?"

하고 정선의 흙빛 얼굴을 바라보았다.

숭 은 짐을 싸면서도 최후의 일각까지 정선의 반성을 기다린 것이었다. 그러다가 정선이가 사랑으로 나오는 것을 보고 '지금이라도' 하고 정선의 자백과 회오를 예기하였던 것이, 정선이가 도리어 토라진 모양을 보이는 것을 보고는 최후의 희망조차 끊어지고 만 것이다.

"아버지헌테 내 말을 다 하셨소 그래?"

하고 정선은 숭에게 대들었다.

"……"

"아버지보고 무어라고 하셨소?"

하고 정선은 잼처 물었다. 정선의 맘에는 제 비밀을 아버지에게 옮긴 것에 대한 분한 맘이 가득 찼고, 또 숭의 말(정선의 죄상을 낱낱이 적발한)에서 받은 수치심이 회오의 눈물로 변하는 대신에 분노와 원망의 불길로 변한 것이었다.

숭은 정선의 이 반응을 불쾌하게 생각하였다. 그것은 숭의 맘에서 정선에게 대한 최후의 동정과 미련까지도 싹 씻어 버렸다. 그 불쾌함은 정선을 갑진의 집에서 발견한 때 이상이었다.

숭 은 윤참판을 보고 이혼 문제도 말하지 아니하고 정선의 간음 문제도 말하지 아니하였다. 다만 저는 농촌에서 농민과 같은 가난한 생활을 하는 것이 소원이니 받은 재산을 다 돌려드린다고 하였을 뿐이었다. 그러나 숭은 정선에게 이러한 자세한 말을 할 여유가 없었다. 그는 정선이라는 여자의 맘에 선악을 판단하는 능력이 있는가를 의심하지 아니할 수가 없었다.

숭은 전화를 떼어 들고 택시를 불렀다. 이 자리에 더 머물러 있을 필요를 보지 못한 것이었다.

정 선은 거의 본정신을 잃었다 하리만큼 숭을 향하여 온가지 욕설과 저주를 퍼부었다. 처음에는 못 가리라고 주장하였으나 나중에는 어서 나가라고 호령하였다. 처음에는 숭의 짐을 들어 문 밖에 내어놓았으나 나중에는 모두 다 제 것이니 몸만 나가라고 소리를 질렀다. 숭은 마침내 외투를 빼앗기고 양복 저고리를 빼앗기고 조끼를 찢기우고 짐도 하나도 들지 아니하고 하인들의 조소 속에 이 집 대문을 나섰다. 택시에 올라앉은 때에 유월이가 양복 저고리와 외투를 몰래 집어다 주었다. 그것은 숭이가 집에서 나온 뒤에 정선이가,

"이 더러운 놈이 입던 옷!"

하고 마당으로 집어내어 던지는 것을 유월이가 집어 가지고 따라 나온 것이었다.

"오, 고맙다."

하고 숭은 그 옷을 받아 입고 유월의 머리를 만져 주었다.

"자, 경성역으로."

하고 숭은 운전수에게 명하였다. 모터가 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영감마님, 저도 데리고 가주세요. 저도 따라가요."

하고 유월이가 자동차 창을 두드리면서 불렀다. 숭은 몇 번 거절하였으나, 마침내 문을 열고,

"어디를 간단 말이냐."

하고 물었다.

"저는 영감마님 따라갈 테야요. 무슨 일이든지 할 테니 저를 데리고 가세요."

하고 차 속으로 기어들어왔다.

"가자."

하고 숭은 곁에 자리를 내어 유월이를 앉혔다. 안으로서는 정선의 울음 섞인 성낸 소리가 들렸다.

차는 떠났다. 요란한 모터 소리를 내고 차가 떠나서 대한문을 향하고 달릴 때에 숭은 떨어진 칼라를 바로잡고 머리에 모자가 없는 것을 생각하였다. 그리고 앞에 앉은 운전수가 부끄러웠다.

정거장에 나오니 찻시간은 아직 한 시간이나 넘어 남았다. 숭은 유월이를 데리고 식당에 올라가 한구석 병풍 뒤에 몸을 숨기고 앉았다.

"유월아, 너는 집으로 들어가거라."

하고 숭은 감히 앉지 못하고 곁에 서 있는 유월이를 돌아보았다.

"싫여요, 전 영감마님 따라가요."

하 고 유월이는 몸을 한번 흔들고 치맛고리를 씹었다. 분홍 치마, 노랑 저고리, 흰 행주치마에 자주 댕기를 늘인 순조선식 계집애 복색이 식당에 앉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유월은 열여섯 살로는 퍽 졸자란 편이나 체격은 색시 꼴이 났다.

"네가 시골 가서 무얼 해?"

하고 숭은 엄숙하게 물었다.

"그래도 가요. 무엇이나 하라시는 대로 하지요."

하는 유월의 대답에는 결심의 굳음이 있었다.

밤 열시 사십분에 봉천을 향하는 열차는 눈이 퍼붓는 속을 헤치고 경성역을 떠났다.

삼 등실은 한 걸상에 셋씩이나 앉고도 서 있는 사람이 많도록 좁았다. 누워서 자는 체하는 사람과 짐을 올려놓고 기대고 앉은 사람이 있는 것은 늘 보는 일이다. 조선 사람보다 일본 사람, 무교육한 이보다도 교육 있어 보이는 이에게 많은 것도 어디서나 보는 일이었다. 숭은 간신히 한 자리를 얻어 유월이를 앉히고 저는 자리 넓은 곳을 찾느라고 이 찻간에서 저 찻간으로 여행을 하였다. 그러나 어디를 가도 앉을 만한 곳이 없었다.

숭은 좌석의 간막이에 기대어 무심코 다리를 쉬고 있었다. 이때에 등뒤에서,

"허변호사 영감이시지요?"

하는 젊은 여자의 음성이 들렸다.

숭은 깜짝 놀라 돌아보았다. 어떤 잘두루마기 입고 비취와 금으로 장식한 조바위를 쓴 젊은 여자였다.

"영감, 저를 모르세요. 산월이랍니다, 백산월이."

하고 말하는 이는 매어달릴 듯이 반갑게 바싹 다가섰다.

이름을 듣고 보니 그는 분명히 산월이었다.

"아!"

하고 숭은 끄덕임과 웃음으로써 인사를 대답하였다.

"어디로 가세요? 아, 용서하세요. 가시는 데를 여쭈어서."

하고 제 말을 취소한다.

"나는 시골로 가요."

하고 숭은 사실대로 대답한 뒤에,

"그런데 어디 가시오?"

하고 이번에 숭이가 물었다.

"네, 저, 잠깐."

하고 사방을 둘러보더니 차중의 시선이 다 제게로 모인 것을 보고 잠깐 창황하다가 곧 안정을 회복해 가지고,

"자리가 어디세요? 잠깐 여쭐 말씀이 있으니 우리 저리로 가세요."

하고 산월은 앞서서 한 걸음 걷고 뒤를 돌아보았다. 숭이 따라오는 것을 보고 안심하는 듯이 문을 열고 나갔다.

다음 칸은 식당이었다. 식당으로 들어가는 문 손잡이를 붙들고 선 채, 산월은 아양 부리는 눈으로 숭을 쳐다보고 숭의 조끼 가슴에 한 손을 대며,

"나하고 같이 식당에 가시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하시거든 고만두시까. 체면 손상이 되시지?"

"천만에."

하고 숭은 대답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고맙습니다."

하고 산월은 제 손에 잡았던 핸들을 숭에게 사양하고 저는 숭의 뒤에 따라 선다. 숭은 이 여자가 왜 여기를 탔으며, 무슨 할 말이 있는고 하고 문을 열고 앞서서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산 월은 잘두루마기를 벗어서 곁의 빈 교의 위에 놓았다. 두루마기 안은 짙은 자줏빛 하부다이였다. 두루마기 밑에는 연분홍 법단 치마에 남 끝동 자주 고름 단 하얀 저고리를 입은 양은, 마치 신방에서 나오는 신부와 같았다. 게다가 약간 술기운을 띤 불그레한 산월의 얼굴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어디를 가시오?"

하고 숭이 먼저 입을 열었다.

"선생님 따라가요."

하고 산월은 문득 기생 어조를 버리고 보통 여자의 태도로 말을 한다. 곁에 와서 명령을 기다리는 보이를 향하여 산월은,

"위스키 앤 소다."

하고 분명한 영어 악센트로 명령한 뒤에,

"무엇 잡수실 거?"

하고 숭을 향한다.

"무어나 잡수시오."

하고 숭은 남의 부인을 대한 모양으로 경어를 쓴다.

"햄 샐러드?"

하고 산월은 숭의 기색을 보다가,

"올라잇! 햄 샐러드!"

하고 보이에게 명하고 고개를 숭의 편으로 돌리려다가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움츠리며,

"이건영 박사가 저기 왔어요. 웬 여자 둘 데리고."

하고 영어로 말하고 혀끝을 날름 내민다.

숭은 돌아보지도 아니하고 고개만 끄덕거렸다.

"내 가서 좀 놀려먹고 오까."

하고 산월은 또 기생 어조다.

"이박사 아시오?"

하고 숭도 호기심으로 물었다.

"서울 장안에 이박사 모르는 여자 있나요? 얼굴 밴밴한 계집애로 이박사 편지 한두 장 안 받아 본 이 있고?"

하고 산월은 소리를 죽이고 웃느라고 얼굴과 목의 근육을 씰룩거린다.

"어디서 만나셨소?"

하고 숭이가 산월에게 물었다.

"어 느 좌석에서 한번 만났는데 주소를 적어 달라기에 적어 주었지요. 했더니 자꾸만 편지질이로구만. 나를 동정한다는 둥, 존경한다는 둥, 사랑한다는 둥, 그리고 서너 번이나 찾아왔겠지요. 누구시냐고 명함을 내라고 하면 가버린단 말야요. 그럴 걸 오긴 왜 오우?"

하고 고개를 들어 이박사 쪽을 바라보더니,

"일어나 가려고 들어, 날 보고 겁이 났나―---잠깐 계셔요, 내 가서 좀 놀려먹고 올 테니."

하고 산월은 기생식 걸음으로 이박사 쪽으로 간다.

숭은 반쯤 고개를 돌려서 그편을 바라보았다.

"하우 두 유 두 닥터 리이?"

하고 산월은 막 일어나려는 이박사의 앞에 손을 내어민다. 이박사는 낯이 빨개지며 하릴없이 산월의 손을 잡는다. 산월은 유창한 영어로,

"아임 베리 소리, 여러 번 편지 주신 걸 답장을 못 드려서 참 미안합니다. 또 세 번이나 찾아오신 것을 하인들이 몰라뵈서 미안해요. 용서하세요."

하고는 쩔쩔매는 이박사를 유쾌한 듯이 정면으로, 웃는 눈으로 바라보면서,

"이 양반들은 당신 매씨세요?"

하고 그것도 영어로 시스터스라는 시자에 가장 힘있는 악센트를 주어 말한 뒤에, 그 두 여자를 향하여,

"용서하세요. 난 백산월이라는 기생입니다. 노 이박사의 가르침을 받지요."

하고 악수를 청한다. 두 여자들도 부득이 하는 듯이 손을 내민다.

이박사는 두 손을 마주 비비고 섰다가 겨우 흩어진 부스러기 용기를 주워 모아서,

"난 댁에 찾아간 일은 없는데, 혹시 하인들이 잘못 본 게지요."

하고 어색한 변명을 한다.

"하하."

하고 이번에는 성악으로 닦은 분명하고도 높은 소리로,

"제가 안 할 말씀을 했습니까. 그러면 용서하세요."

하고 그 담에는 영어로,

"나는 이 부인네들이 매씨들이신 줄만 알았지요, 친구시거나. 이박사께서는 심순례 씨와 약혼하셨다는 말씀을 들은 지 오래길래, 호호호."

하고 웃었다.

"아니지요. 심순례 씨와 일시 교제는 있었으나 약혼했단 말은 허전이구요, 또 산월 씨 댁에 찾아갔다는 것도 아마 댁 하인들이 잘못 본 게지요."

하고 극히 엄중한 태도로 말을 한다.

"그런지도 모르지요. 제가 창 틈으로 내다보니까 이박사 같으시고, 또 음성이 이박사 같으시고, 허기는 명함을 줍시사 하니깐 명함은 아니 내시드구면요. 그러니깐 이박사와 똑같이 생긴 다른 양반이시든 게지. 하하하, 용서하세요."

하고 산월은 고개를 흔들면서 유쾌하게 웃었다. 그러는 동안에 여자들은 다 달아나고 말고 이박사도 산월에게 잠깐 서양식으로 고개를 숙이고는 나가 버리고 만다.

산월은 이박사가 스러진 뒤를 향하고 또 한번 웃고 나서는 숭의 곁으로 온다.

"어때요, 내가 언 엑설런트 액트리스(한 빼난 여배우)지요."

하고는 위스키를 단숨에 쭉 들이켜고는 한 손으로 이마를 받치고,

"흐흐흐흐, 하하하하."

하고 우스워서 죽으려고 든다.

숭도 따라서 웃었다. 숭이 웃으면 산월은 더욱 우스워서 어깨와 등을 들먹거린다. 산월은 실컷 웃고 나서,

"약주 잡수세요. 많이 말고, 꼭 석 잔만 잡수세요."

하고 산월은 잔을 들어 숭을 주며,

"한잔 잡수셔야 제가 할 말을 하지, 그렇게 점잖게 하시면 무서워요. 자, 잡수세요."

하고 권한다.

"술은 안 먹을랍니다."

하고 숭은 술잔을 받아 한편으로 밀어 놓으며,

"나는 살여울 사람들더러 술 먹지 말라고 권하는 처지에 있는 사람이야요. 술은 아니 먹더라도 하시는 말씀은 다 듣지요."

하고 준절한 거절을 눅이기 위하여 빙긋 웃어 보인다.

"한 잔이야 머. 권하던 제가 부끄럽지요."

하고 산월이가 다시 잔을 잡으려는 것을, 숭은 손을 들어 산월의 팔을 막으며,

"아니오! 권하시지 마세요. 내가 여러 번 호의를 거절하기는 참 거북한 일이니, 내게 호의를 가지시거든 나를 거북하게 마시오."

하고 술잔을 들어서 산월의 손이 닿지 아니할 곳에 놓는다. 산월은 잠깐 머쓱하였으나 곧 평상의 기분을 회복해 가지고,

"제가 어떻게 이 차를 탔는지 아세요?"

하는 것은 조금도 농담이 아니었다.

"……"

숭은 대답할 바를 몰랐다.

"아이구 벌써 수색이지?"

하고 밖을 내다본다. 차는 정거하였다. 과연 '스이쇼쿠(수색)' 하는 역부의 소리가 들렸다.

"수색이면 어떤가, 나는 영감 가시는 정거장까지라도 따라갈걸."

하고 산월은,

"오 늘 저녁에 어떤 손님에게 부름을 받았지요. 그 손님이라는 이는 이름을 말씀하면 아마 아시겠지마는 이름은 말씀할 필요가 없구요―---그 손님이 한 오륙 일 연해서 나를 불러 주셨지요. 그러자니깐 돈도 꽤 많이 쓰고요. 그리고는 자꾸 우리집에를 온다는 것을 별의별 핑계를 다 해서 모면했답니다. 내가 기생 노릇은 하지마는 내 집에 남자가 와서 자리에 누운 이는 선생님밖에는 없으십니다, 빌리브 미(나를 믿으세요). 내일 일은 모르지요. 그러나 오늘까지는 그렇게 해왔어요. 그런데 말야요, 그 손님이 오늘은 꼭 어디를 가자고 조른단 말씀야요. 배천 온천으로 가자는 둥, 평양을 가자는 둥, 오룡배를 가자는 둥, 내가 하얼빈 구경을 했으면 했더니 그럼 하얼빈을 가자는 둥, 만리장성을 보았으면 했더니 그러면 산해관, 열하로 두루 돌아 구경을 하자는 둥 아주 열심이야요. 나이는 한 오십 된 인데, 나이야 말할 것도 없지만. 그러는 것을 겨우 달래서 요 다음 기회로 밀고 정거장까지 전송을 나왔지요. 했더니 이거를 주는구려."

하고 왼손 무명지에 번쩍번쩍하는 금강석 반지를 보이며,

"이것이 인게이지먼트 링(약혼 반지)이라고요, 하하하하. 그리고 제가 먼저 가서 좋은 데를 자리를 잡고 오라고 전보를 하거든 곧 양복을 지어 입고 오라고 이거를 또 주겠지요. 참, 난 아직 그것이 무엇인지도 안 보았어."

하고 핸드백에서 양봉투 하나를 꺼낸다. 그 봉투는 ○○여관의 용지였다. 겉봉에는,

'白山月 君.'

이라고 썼다. 글씨도 상당하다. 산월은 그 봉투를 떼었다. 거기서는 소절수 한 장이 나왔다.

'金壹仟圓也.'

라고 액면에 씌어 있다. 그리고 '金○○'라고 서명이 있고 네모난 도장이 찍혀 있다. 이름자는 산월이가 얼른 손으로 가리었다.

산월은 그 소절수를 보고 혀끝을 한번 내밀더니 그리 중대한 일이 아니라는 듯이 그것을 접어 봉투에 넣어서 휴지 모양으로 그냥 테이블 위에 밀어 놓고 다시 웃으며,

"그 래 플랫폼에 서서 차 떠나기를 기다리고 있노라니깐 웬 계집애, 선생님 따라오던 계집애가 눈에 뜨인단 말씀이지요. 그래 보니깐 허선생님이란 말씀이야요. 그러니 그 손님을 내버리고 따라갈 수도 없고, 눈으로만 혹시 전송을 나오셨나, 차를 타시나 하고 그것만 바라보았에요. 허더니 차를 타신단 말씀야요. 일등차에서 선생님 타시던 찻간까지가 한참 아냐요? 하마터면 잃어버릴 뻔했어요. 그저 모자 안 쓰신 양반하고 분홍 치마 입은 색시하고만 잃어버리지 아니하려고 애를 썼습니다그려. 그랬더니 그 손님이 어디를 그쪽만 보느냐 그러겠지요. 아냐요, 사람구경해요, 그랬지요. 그래 퍽 섭섭해하든걸요. 그러자 선생님이 차를 타시는 것을 보았길래 나도 따라 타리라 하고 결심을 하고서, 그 손님 비위를 좀 맞추어 주고는 차가 떠나기를 기다려서 도비노리(뛰어오름)를 했답니다. 역부가 야단을 하지마는 이래 보여도 나도 테니스도 하고 바스켓볼도 한 솜씨랍니다. 이렇게 제가 영감을―---아니 선생님을 따라왔답니다."

하고는 추연한 기색을 보이며 휘유 한숨을 내어쉰다.

숭은 놀라지 아니할 수 없었다. 산월이가 저를 따라서 이 차를 탔다는 것이 참말 같지 아니하였다.

"차표는 어떡허고?"

하고 숭은 의심을 품으면서 물었다.

"안 샀어. 살 새가 있나요?"

하고 산월은 그제야 생각이 나는 듯이 웃었다.

"그럼, 부산서부터 오는 찻세를 물어야겠네. 그까짓 게 대수요?"

하고 산월은 숭이가 아니 먹고 남겨 둔 술잔을 당기어서 마신다.

"그럼, 어디까지 가시려우?"

하고 숭은 좀 걱정이 된다는 듯이 묻는다.

"귀 찮아하시면 다음 정거장에서 내리고, 귀애 주시면 선생님 가시는 데까지 따라가구. 귀찮으시지? 기생년허구 같이 다닌다고 체면 손상되시지? 그럼 어떻게 해요? 불길같이 일어나는 사랑을 죽입니까. 사랑을 죽이거나 몸을 죽이거나, 둘 중에 하나를 죽인다면 나는 몸을 죽일 테야요."

하고 말이 다 끝나기 전에 조선 사람의 골격과 상모를 가진 양복 입은 사람 셋이 들어와서 산월이 쪽을 바라본다.

"우리 나가요."

하고 산월이가 먼저 일어선다.

숭도 따라 일어나서 새로 들어온 패들에게 등을 향하고 보이를 불러 셈을 치르고 일이등 차실이 있는 방향으로 나갔다. 숭이나 산월이나 새로 들어온 사람들과 정면으로 마주 대하기를 원치 아니한 것이었다.

식당문을 열고 나서니 찬바람이 더운 낯에 불었다. 더 가야 이등실이요, 다음 일등이어서 거기 서서 다음 정거장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숭은 차 벽에 기대어서 무심히 허공을 바라보고 섰다. 밖에서 여전히 눈이 오는 모양이어서 유리창으로 내다보이는 것이 오직 흰빛뿐이었다.

산월은 비틀비틀 흔들리는 몸으로 억지로 평형을 잡으려다가 불의에 몸이 쏠리는 듯이 숭의 두 어깨에 손을 대고 숭의 가슴에 제 가슴을 꼭 마주 대면서 술 냄새가 나는 입김으로,

"선 생님 저를 한번 안아 주세요. 그리고 꼭 한 번만 키스를 해주세요. 부인께 대해서는 죄인 줄 알지마는, 저는 기생생활 몇 달에 아주 열정에 대한 억제를 잃어버렸습니다. 저는 선생님을 학생시대부터 잘 알아요. 정선이 집에 놀러 댕길 때부터 잘 알아요. 제가 이렇게 열정적으로 청해서 한 번 키스를 주셨다 하더라도 정선이는―---부인은 용서할 것입니다. 음탕한 기생년이라고만 생각지 마세요, 네? 네."

하고 두 팔을 숭의 목으로 끌어올려서 몸을 숭의 목에 단다.

숭 은 여전히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숭의 지금 생각에는 아내도 없고 여자도 없었다. 영원한 혼잣몸으로 살여울의 농부가 되는 것밖에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렇다고 산월이가 걱정하는 것과 같이 숭은 산월을 음탕한 기생이라고도, 밉다고도 생각지 아니하였다. 도리어 숭은 산월에게서, 정선에게서는 보지 못하던 무슨 깊은 것이 있는 것까지도 생각하였다. 그리고 평생에 어떤 여성에게서 사랑을 받아 보지 못한 숭으로서는, 평생에 접한 유일한 여성인 아내로부터 학대를 받는 숭으로서는 산월의 이 헌신적이요 열정적인 사랑이 고맙고 기쁘기까지도 하였다. 그러나 숭은 이제 다시 어느 여자에게 장가를 들거나 어느 여자를 사랑할 생각은 없었다.

"나는 아내까지도 떠나고 온 사람입니다. 나는 일생에 다시 혼인도 아니 하고 사랑도 아니 하기로 작정한 사람입니다."

하고 숭은 고개를 들어서 천장을 향하였다.

"부인과 떠나셔요?"

하고 산월은 놀라는 듯이 숭의 몸에서 떨어졌다.

"네."

하고 숭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산월은 그러나 다시 숭에게 매어 달렸다.

"한 번만, 한 번만입니다. 네, 꼭 한 번만 저를 안아 주세요. 그리고 꼭 한 번만 키스를 하여 주세요."

하고 산월은 마치 바스켓볼에서 하는 자세로 숭에게 뛰어올라서 숭의 입을 맞추었다.

이 때에 날카로운 고동 소리가 들렸다. 긴 고동 뒤에는 작은 고동이 몇 마디 연해 들리고 차는 급자기 정거하려고 애쓰는 격렬한 진동을 하였다. 산월은 마치 무서운 소리를 들은 어린애 모양으로 숭의 조끼 가슴에 낯을 파묻고 숭에게 매어달렸다. 차는 정거하였다.

숭은 가까스로 산월을 떼고 문을 열고 바깥을 내다보았다. 온통 눈이다. 바른손 편을 보니 거기는 산 옆을 깎은 비탈이다. 소나무들이 눈을 이고 있다.

승무원들이 등을 들고 기관차 편에서 뛰어온다.

"무슨 사고요?"

하고 숭은 차에 매어달리면서 물었다.

"레키시데스(치여 죽었소)."

한마디를 던지고 승무원은 달아났다.

"레키시?"

하고 숭은 차에서 뛰어내렸다. 산월이도 따라 내렸다. 다른 승객들도 많이 내렸다. 눈은 퍼붓는다.

"도코데스(어디쯤이오)?"

하고 숭은 뛰어가는 어떤 승무원에게 물었다.

"스구 소코데스(바로 저기요). 마다 신데와 이나이요우데스(아직 죽지는 아니한 모양이오)."

하고 그도 뒤로 달아나 버리고 말았다.

숭 은 이상하게 가슴이 설레는 것을 깨달으면서 기관차를 향하고 뛰어갔다. 기관차 앞에서 한 이 미터 되는 눈 위에 가로누운 시체 하나가 있고, 선로 눈 위에는 붉은 피가 점점이, 줄기줄기 무늬를 놓았다. 숭이 기관차 머리를 지나서 시체 곁으로 가려는 것을 뒤로서 어떤 승무원이 붙들면서,

"잇자 이케마센(가지 말아요)!"

하고 소리를 질렀다. 숭은 멈칫 섰다.

기관차의 이맛불빛에 그 시체는 양복 외투를 입은 여자인 것이 숭에게 보였다. 구두 끝의 까만 에나멜이 불빛에 반짝거렸다.

숭은 까닭 없이 흥분되어 맘을 진정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변호사라는 직업의식으로 이 사건의 법률적 의미를 알아보려는 것만이 아니었다.

"에그머니!"

하고 산월도 따라와서 숭의 팔을 붙들고 섰다.

열 차장인 전무차장이 좀 점잖은 걸음으로 걸어서 시체 곁으로 가서 경찰의 임무를 맡은 사람이라는 태도로 위선 시체의 주위를 둘러 보고, 피가 흐르는 시체의 머리를 들어 보고, 또 의사가 하는 모양으로 시체의 가슴을 헤치고 거기 귀를 대어 보고, 그리고는 손을 들어서 다른 승무원을 불렀다.

다른 승무원들은 장관의 명을 받은 군졸 모양으로 시체 곁으로 달려가서 열차장의 명대로 그 시체를 안아 들고 숭이가 섰는 앞으로 왔다.

"에!"

하고 숭은 승무원의 팔에 안기어 힘없이 목을 늘이고 있는 시체의 얼굴을 보고 소리를 쳤다.

"정선이야!"

하고 산월이도 소리를 쳤다.

"이 사람 아시오?"

하고 전무차장이 숭의 말을 듣고 숭을 돌아보면서 발을 멈추고 묻는다.

"내 아내요!"

하고 숭은 시체의 뒤를 따라 섰다.

'내 아내요!' 하는 말에 전무차장뿐 아니라, 곁에 있는 사람들이 다 숭과 그 곁에 따르는 산월을 호기심으로 바라보았다.

정 선의 시신을 차장실로 올리려는 것을 숭은 전무차장과 교섭하여 아직 생명이 붙었으니 시신이 아니라는 조건으로 일등 침대 하나를 얻기로 하여 그리로 정선을 옮겨 뉘었다. 개성에서 내린다는 조건이었다. 차는 약 십 분 임시 정거로 그 자리를 떠나서 여전히 달리기 시작했다.

숭 은 열차장에게 응급구호 재료를 얻어 우선 강심제를 주사하고 머리와 다리의 피 흐르는 곳을 가제와 붕대로 싸매고, 그리고 산월을 맡겨 놓고는 차실로 나아가 의사는 없는가 하고 물었다. 이등 이상을 탄 사람들은 다들 침대로 들어가고 남아 있는 사람이 모두 몇이 안 되는 중에 의사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삼등실에서 의사라고 자칭하는 사람 하나를 만났는데 그는 의사가 가지는 제구가 없었다. 숭은 의사라는 사람을 데리고 정선의 침실로 왔다. 그 의사라는 사람은 맥을 만져 보고 귀로 가슴을 들어 보고,

"아직 생명에는 관계가 없습니다."

하고 가버렸다.

차가 개성에 닿은 것은 새로 한시쯤, 숭은 정선을 외과 간호부가 수술받은 환자를 안는 모양으로 안고 내렸다. 뒤에는 산월과 유월이가 따랐다.

정선은 숭의 품에 안겨 남성병원으로 옮기었다. 먼저 전보를 받은 병원에서는 병실, 수술실, 의사, 간호부가 다 준비되어 정선이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정 선이는 우선 수술대 위에 누임이 되어 강심제의 주사와 외과적 치료를 받았다. 가장 중상은 머리와 다리였다. 머리에는 왼편 귀로부터 정수리를 향하여 길이 육 센티미터 깊이 골막에 달하는 상처가 있고, 오른편 무릎은 탈구가 되는 동시에 슬개골이 깨어졌고, 그 밖에도 어깨와 허리에 피하 일혈이 있고 찰과상도 있었다.

정선이가 치료를 받는 동안 숭과 산월과 유월은 수술실 문 밖에서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도무지 정선은 한마디도 소리를 발하지 아니하였다. 정선이가 병실로 옮아온 뒤에 김의사는 숭의 묻는 말에 대하여,

"오늘 밤을 지내 보아야 알겠습니다. 뇌진탕이 되셨으니까."

하고 의사에게 특유한 무신경을 가지고 대답하였다. 그리고는 간호부에게 몇 가지 명령을 하고 나갔다.

숭 은 따라가서 김의사를 붙들고 밤 동안을 병원에 있어 달라고 청하였다. 그리고 제가 몸소 환자 곁에서 간호하는 허락도 얻었다. 벌써 새로 세시, 정선은 마치 아무 시름 없이 자는 사람 모양으로 꼼짝 아니 하고 잤다. 이따금 전신이 약간 경련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간호부는 한 시간에 한 번씩 들어와 맥을 보고 주사를 놓았다.

숭 은 침대 곁에 앉아서 줄곧 정선의 맥을 짚고 있었다. 가끔 세기도 하였다. 어떤 때에는 맥이 일흔쯤으로 떨어지기도 하고, 어떤 때에는 일백이삼십까지 다시 올라가기도 하였다. 몸은 약간 더우나 열이 오르는 모양은 없었다. 맥도 점점 제자리를 잡아서 새벽 다섯시쯤에는 아흔과 백 사이에 있었다. 옆방에 있게 한 산월과 유월도 잠을 못 이루고 한 시간 두세 번이나 들여다보았다.

숭은 붕대로 감긴 정선의 머리를 바라보며 가끔 눈물을 흘렸다. 이따금 정선의 핏기 없는 입술이 말이나 하려는 듯이 전동할 때에는,

"여보, 여보, 내요."

하고 불러 보기도 하였다. 이따금 정선의 눈이 뜨일 듯 뜨일 듯할 때에는 숭은,

"정선이, 여보."

하고 목이 메었다.

그러나 해가 돋도록 정선은 눈을 뜨지 아니하였다.

아 침 아홉시. 눈은 개고 유난히 밝은 아침볕이 병실 창으로 비치어 들어왔다. 정선의 창백하던 얼굴은 점점 올라가는 체온으로, 또 점점 회복되는 피로 볼그레한 빛을 띠게 된다. 강심제 주사는 그치고 링게르 주사를 하였다. 의사는 삼십팔도쯤 되는 열은 염려없다고 숭을 위로하였다. 애초에는 웬 모자도 없는 사내가, 차에 치여 죽어 가는 시체를 끌고 웬 기생 같은 여자를 데리고 온 숭은 결코 이 병원에서 환영받을 손님은 아니었다. 그러다가 입원 수속을 할 때에 환자의 이름은 윤정선, 주소는 경성부 정동, 남편은 허숭, 직업은 변호사라고 쓴 데서 비로소 부랑자 아닌 줄을 알았고, 또 숭의 행동거지가 점잖은 것을 보고 비로소 의사 이하로 다소 안심하게 되었다. 그러나 아무도 웬일이냐, 정선이가 차에 치인 이유를 묻는 이는 없었다.

조 선에 이십 몇 년이나 있었다는 아이비 부인이라는 늙은 간호부가 정선의 병실에 들어와서 비로소 정선을 알아보고 깜짝 놀랐다. 아이비 부인이 세브란스 병원에 있을 때에, 정선이가 보통과에 다닐 때부터 알게 되었던 것이었다. 개성에 온 뒤에도 정선이가 학교에 있는 동안 아이비 부인은 서울에만 가면, 될 수만 있으면 정선을 찾아보았다. 남편도 없고 자식들은 다 조국인 미국으로 유학 보낸 아이비 부인은 이 병원에서 간호원장으로 있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무심코 한 병자로 정선을 보다가, 마침내 그것이 정선인 것을 발견하고,

"정선이―---"

하고 놀라며 숭을 돌아보았다.

"이이, 윤정선이 아니오? 내가 잘못 알았습니까."

하였다.

"네, 윤정선입니다."

하고 숭은 공손하게 대답하였다.

"당신이 윤정선이 남편 되십니까."

하고 아이비 부인은 정선과 숭을 번갈아 보며 묻는다.

"네, 내가 허숭입니다."

"허변호사?"

"네, 그렇습니다."

"그런데 부인, 이거 웬일입니까."

하고 대단히 놀라고 근심된 모양으로 물었다. 숭은 대답할 바를 몰랐다. 잠자코 있을 뿐이었다.

삼각관계라 하는 것이 누구나 이 광경을 본 사람이면 나는 생각이었다. 어젯밤 차에서 그러하였고 병원에서도 그러하였다. 산월이가 들어오는 것을 본 아이비 부인도 그렇게 생각하고 마땅치 못하다는 듯이 고개를 두어 번 흔들었다.

산월도 숭이가 불편하게 생각할 것을 짐작하고 곧 병원에서 떠나 버렸다. 떠날 때에도 맘에는 한량없는 생각을 가졌건마는 아무 말도 아니 하고 간다는 인사만 하고 가버렸다.

오 정 때나 되어서 정선은 의식을 회복하였다. 정선의 눈이 첫번으로 뜨일 때에 그 눈에 든 것은 물론 숭이었다. 정선의 눈은 숭을 보고 놀라는 듯하였다. 그러나 의식이 돌아오는 동시에 고통도 더하여 정선은 낯을 약간 찡그렸다. 그러다가 지금 본 것이 과연 남편인가 하고 또다시 눈을 떴다.

"내요, 내요."

하고 숭은 정선의 얼굴에 제 얼굴을 가까이 대었다. 정선은 알아보았다는 듯이 입을 벌렸으나 소리는 나오지 아니하였다. 그리고는 또 고통을 못 이기어 양미간을 찡긴다.

"여보, 괜찮다고 의사가 그러니 염려 마오."

하고 숭은 정선의 손을 더듬어 잡았다. 정선은 숭의 손을 잡고 떨었다.

정선은 용이하게 위험상태를 벗어나지 아니하였다. 머리를 부딪쳐 뇌진탕을 일으킨 것과 오른편 무릎의 뼈가 상한 것이 아울러 중증인 모양이었다. 정선의 의식은 가끔 분명하였으나 또 때로는 혼수상태를 계속하였다.

숭의 전보를 받은 윤참판은 병을 무릅쓰고 세브란스의 이박사를 대동하고 내려왔다가 하룻밤을 자고 올라가 버리고 병원에서는 숭과 유월이가 정선을 간호하고 있었다.

이 박사는 숭을 향하여 뇌진탕은 안정으로 하회를 기다릴 수밖에 없지마는, 다리 상한 것은 엑스광선 사진을 박아 보아야 뼈 상한 정도를 알겠고, 만일 뼈가 많이 상하여 화농할 염려가 있다고 하면 다리를 무릎 마디 위에서 절단하지 아니하면 아니 될는지도 모른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지금 상태로 병자를 천동할 수는 없으니 이삼 일간 기다릴 수밖에 없다고 말하였다.

숭은 날마다 밤을 새웠다. 정선이가 잠이 든 듯한 동안에 숭은 교의에 걸터앉은 대로 십 분이나 이십 분씩 졸았다.

밤 이면 정선의 고통은 더하는 듯하였다. 두통과 다리의 아픔을 이기지 못하여 정선은 앓는 소리를 하였다. 이것이 정선의 입에서 나오는 유일한 소리였다. 숭이 무슨 말을 붙이면 정선은 다만 눈을 한번 떠보고 입을 조금 벌릴 뿐이었다. 정선의 유일한 표정은 오직 고통을 못 이기어하는 표정뿐이었다.

일주일이 지났다. 서울서 이박사가 내려왔다. 정선의 오른편 다리는 마침내 끊어 버리기로 결정이 된 것이었다.

"나는 죽어요!"

하는 것이 정선의 첫 말이었다. 그가 처음 입을 열 만하게 된 날, 입원한 지 닷새째 되던 날, 정선은 남편을 보고,

"나는 죽어요!"

하였다.

"아니오, 아니 죽소. 의사도 괜찮다는데. 맘을 편안히 먹으시오."

하고 숭은 정선을 위로하였다.

"나는 죽어요. 내가 왜 안 죽었어? 꼭 죽을 양으로 기관차 앞에 뛰어들었는데, 내가 왜 안 죽었어? 기관차도 나를 더럽게 여겨서 차내 버렸나?"

하고 정선은 울었다.

"당 신이 살아야 세상에서 할 일이 많기 때문에 하느님이 당신을 구하신 것이오. 아무것도 아니 하는 생명은 천하지마는 일할 생명은 한 나라보다도 귀하다고 하지 아니했소? 그런 생각 말고 맘을 편안히 가지고 어서 나으시오. 인제는 생명의 위기는 벗어났다고 의사도 그러는데."

하고 숭은 가제 조각으로 정선의 눈물을 씻어 주었다.

그 후에도 정선은 정신만 들면 비관하는 소리를 하고는 울었다. 그러할 때마다 숭은 친절하게 위로해 주었다.

"내가 살아나면 당신은 나를 용서하시려오?"

이런 말도 하게 되었다.

"벌써 다 용서했소. 인제는 내가 당신에게서 받을 용서가 있을 뿐이오."

이렇게 숭은 대답하였다. 그럴 때에 숭의 맘에 거리낌이 없음이 아니나, 그 거리낌은 정선에게 대한 긍측한 정에게 눌려 버리고 말았다.

"이렇게 병신이 되고 웃음거리가 되고 살면 무엇 하오? 신문에 났지?"

이런 말도 하였다. 아직 죽고 살 것도 판정되지 아니한 이때에 병신 되는 것, 남이 흉보는 것, 신문에 난 것 등을 생각하는 여자의 심리가 신기도 하고 가련하기도 하여서,

"병 신이 되기로 무슨 상관요? 병신도 될 리 없지마는. 또 신문에 나거나 말거나 남이 흉을 보거나 말거나 그게 다 무슨 상관요? 내가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이 나를 사랑하고 서로 사랑하면서 일을 하면 그만 아뇨? 일은 모든 것을 이기오."

하고 위로하였다. 그렇게 말은 했으나 신문에 난 것은 숭에게도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

○○일보의 기사는 분명히 이박사의 입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것이 ○○지국 통신으로 온 것을 보아서 더욱 그러하였고, 숭과 정선의 사진을 낸 것으로 보아 더욱 그러하였고, 이 사건의 전말이란 것으로 보아서 더욱 그러하였다.

그 ○○일보의 기사에 의하건댄 허숭은 겉으로는 지사와 군자의 탈을 썼으나, 기실은 색마여서 윤참판 집에 식객으로 있는 동안에 정선을 후려 내었고, 정선과 혼인을 한 뒤에도 매양 남녀관계로 가정풍파가 끊이지 아니하였으며, 다방골 모 여의와도 관계가 있고, 마침내 일년이 못 하여 살여울에 농촌사업을 한다고 일컫고 간 것도 그 동네에 있는 유순(가명, 18)이라는 남의 집 처녀와 추한 관계를 맺은 때문이오, 유순의 부모가 죽은 것을 이용하여 공공연히 유순을 제 집에 데려다두고 머리 땋아 늘인 채로 첩을 삼았으며, 또 소송 일로 잠시 서울에 올라온 때에도 기생 산월과 정을 통하여 아내 정선을 돌아보지 아니하므로 정선은 그 반감으로 재동 모 남작의 아들이요 제대 법과 출신으로 역시 색마 이름이 높은 김모와 정을 통하였다. 이 모양으로 지사 허숭의 가정은 불의의 연애의 이중주로 추악한 형태를 이루었다. 정선이가 철도 자살을 하던 날도 허숭은 기생 산월을 데리고 같은 침대차를 타고 떠났으므로, 정선은 질투와 가정에 대한 비관으로 마침내 정부를 데리고 불의 향락의 길을 떠난 남편이 탄 차에 차라리 몸을 던져 죽을 양으로 ○○자동차부의 경(京)○○○○호 자동차를 타고 수색까지 따라가 몸을 기관차 앞에 던졌으나, 마침 궤도에 눈이 쌓이었으므로 수십 간을 밀려 나가고도 생명은 부지한 것이라고 하고, 또 목격자의 담이라 하여 허숭이가 정선을 데리고 병원으로 가는 것을 보고 기생 산월은 분개하여 개성 역두에서 일장의 희비 활극을 연출하였다고까지 하였다. 이 기사에 흥미와 의분을 느낀 편집자는 '志士假面 쓴 色魔'니, '不義戀愛四重奏'니 하는 표제를 붙였다.

숭 은 이 신문을 정선에게 보이지는 아니하였으나 신문에 났느냐고 정선이가 물을 때에 그렇다고 대답은 하였다. 아무려나 이 신문이 온 뒤로는 다소간 회복되었던 병원 내의 허숭 부처에게 대한 존경도 다 스러지고 사람들의 눈에서마다 조롱과 천대의 눈살이 흐르는 듯하였다.

그러 나 허숭에게는 이것이 별로 큰일은 아니었다. 그보다도 만일 이번 불행이 새 기원이 되어서 정선이가 다리 하나를 끊더라도, 머리에 흠이 나더라도 좋은 아내가 되어 주기만 하면 도리어 행복이라고 생각하였다. 오직 미안한 것은 유순이었다. 가명이라고 하면서 기실 본명을 쓴 것이 미웠다. 이것이 얼마나 유순의 일생에 큰 타격을 줄 것인가. 숭은 유순을 집에 데려다둔 것을 후회하였다. 살여울 동네 사람도 그런 생각을 할는지 모른다. 숭은 맹한갑이가 다행히 무죄가 되어 출옥을 하면 그와 유순과를 혼인시키려고 맘을 먹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번 상고가 기각될 줄을 잘 아는 숭은 유순을 어찌할까가 문제가 되지 아니할 수 없었다. 그러나 정선이가 병이 나아서 숭과 같이 살여울로 가면 문제는 해결될 것이라고 믿었다.

"염려 마오. 우리 둘이 일생에 서로 잘 사랑하고 좋은 가정을 이뤄 가면 지금 무슨 말을 듣기로 어떠오. 이것이 다 우리 행복의 거름으로만 압시다."

하고 위로하였다. 그러나 그 위로가 정선을 안심시키지는 못하는 모양이었다.

다 리를 자른단 말은 차마 숭의 입에서 나오지 아니하였다. 머리에 흠이 생기는 것만도 병신이 되는 것으로 아는 정선이다. 그만한 병신으로도 살기가 싫다는 정선이다. 만일 다리를 잘라 버린다면 어떻게나 놀랄까, 슬퍼할까 하면 차라리 알리지 말고 수술을 받게 하는 것이 나으리라고 생각하였다.

의사도 만일 정선을 좀더 존경하는 맘이 있다고 하면, 직접적으로 한번 의논을 하였을 법도 하지마는 아주 고약한 것들로 값을 쳐놓은 터이므로 다시 물어 보려고도 아니 하였다.

수 술실의 준비는 다 되었다. 신문 기사를 보고 화를 낸 윤참판은 수술한다는 숭의 편지를 받고도 답장도 하지 아니하고 죽어도 모른다고 집안 사람들을 보고 화를 내었다. 이리하여 한 사람의 천하에 오직 한 사람뿐의 동정을 받으면서 정선은 수레에 실려 수술실로 옮기어졌다.

정 선은 다친 무릎을 약간 째는 것으로만 알고 수술대 위에 가만히 누워 있었다. 그러나 수술대에 처음 오르는 정선에게는 여러 가지 무서움이 있었다. 간호부가 하얀 헝겊으로 눈을 싸매어 수술실의 흰 천장과 곁에 선 사람들이 안 보이게 될 때에 정선은 죽음의 그림자가 곁에 선 듯함을 깨달아 몸에 소름이 끼쳤다.

간호부들이 정선의 옷을 벗길 때에 정선은 본능적으로 다리를 굽히려 하였으나 물론 다리가 말을 듣지 아니하였다.

정 선의 몸은 아주 알몸이 되었다. 정선은 흰 옷을 입고 방수포 앞치마를 두른 의사들이 솔을 가지고 손을 씻고 있던 것을 기억하고 수치를 깨달았다. 그러나 어떤 손이 두 발목을 무엇으로 비끄러맬 때에는 그러한 수치의 정도 스러지고, 오직 절망의 둔한 슬픔이 판로폰 주사에 마취하고 남은 의식을 내리누를 뿐이었다.

전신에 무슨 선뜩선뜩하고 미끈미끈한 액체를 바르고 무엇으로 문지르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마치 냉혈동물의 몸이 살에 닿는 듯이 불쾌하였다.

'하느님!'

하 고 정선은 속으로 불렀다. 한없이 넓고 차고 어두운 허공에 저 한몸이 벌거숭이로 둥실둥실 떠서 지향없이 가는 듯한 저를 의식할 때에 정선의 정신은 '하느님!' 하고 부르는 것밖에 다른 힘이 없었다. 딸그락딸그락, 사르릉사르릉 하는 소리가 들린다. 아마 유리판 한 탁자 위에 수술에 쓰는 메스들을 늘어놓는 소리일 것이다. 그 백통빛 날들! 정선은 소름이 끼침을 깨달았다.

'이 사람들이 나를 어찌할 작정인가.'

하고 정선에게는 의심이 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제 몸을 어찌하든지 정선은 반항할 힘이 없음을 깨달았다.

머리맡에 사람이 가까이 오는 모양이더니 코 위에 무엇이 덮이고 온도 낮은 액체인지 기체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무엇이 입과 코와 목과 폐 속으로 흘러들어가는 듯한 감각이 생겼다. 그것은 일종의 향기를 가진 냄새였다.

'클로로포름? 에테르?'

하고 정선은 몽혼약의 이름을 생각하였다. 몽혼은 심히 무섭고 불쾌한 일이었으나 그렇다고 반항할 수는 없었다. 되는 대로 되어라 하고 정선은 맘놓고 숨을 들이쉬었다. 이대로 죽어 버리면 다행이다―---이렇게도 생각하였다.

"하나, 둘, 셋, 넷―--- 이렇게 세어 보시오."

하는 소리가 들린다. 그것은 김의사의 소리였다. 조금도 동정을 가지지 아니한 소리였다. 그러나 그런 것을 생각할 여지가 없었다. 정선은 하라는 대로,

"하나, 둘, 셋, 넷……."

하고 세었다. 정선은 맘이 괴롭고 슬펐다. 이런 때에 남편의 소리가 들리고 손이 만져졌으면 어떻게나 좋을까 하였으나 제 두 손을 잡은 이는 남편은 아니었다. 맥을 보는 의사의 손이었다.

"하나, 둘, 셋, 넷."

하는 정선의 소리가 숭의 가슴을 찔렀다. 그 떨리는 소리, 울음 섞인 소리는 숭으로 하여금 곧 수술실에 뛰어들어가서 정선을 안아 내오고 싶은 맘을 내게 하였다.

'사랑의 무한, 아니 왜 내가 그 같지 못하였던고?'

하고 숭은 후회하였다. 정선의 다리를 끊는 것이 저라고 숭은 가슴을 아프게 하였다.

그렇게 병신이 되기를 싫어하는 정선의 다리를 끊어. 끊인 줄을 아는 때의 정선의 슬픔. 끊인 다리로 남의 앞에 나설 때의 정선의 괴로움. 그것을 생각할 때에 숭은 뼈가 저렸다.

'극진히 사랑해 주자. 이제부터야말로 무한한 사랑으로 사랑해 주자.'

이렇게 숭은 다시금 맹세하였다.

"하나, 둘, 셋, 넷……."

하는 소리도 인제는 아니 들렸다. 다만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버스럭거리는 소리만이 들릴 뿐이었다.

정선의 하얀 다리 바로 무릎 위에는 이박사의 손에 들린 백통빛 나는 칼이 한번 득 건너갔다. 빨간 피가 주르르 흘러나와서 하얀 살 위로 흐르려는 것을 간호부의 손에 들린 가제가 쉴새없이 빨아들인다.

칼 로 베어진 살을 역시 백통빛 나는 집게로 집어 좌우로 벌려 놓고 혈관을 골라 졸라매고 그리고는 골막을 긁어 제치고, 또 그리고는 톱을 들어 다리뼈를 자른다. 스르륵스르륵하는 톱질 소리가 고요한 수술실 안에 꽉찬다. 톱이 왔다갔다 스르륵 소리를 낼 때마다 정선의 다리는 경련을 일으키는 모양으로 떨린다. 그리고 정선은 아프다는 뜻인지 싫다는 뜻인지 분명히 알 수 없는 소리를 중얼댄다.

이따금 소리를 버럭 지를 때도 있으나 특별히 아픈 줄을 아는 때문인 것 같지도 아니하였다.

맥을 보는 의사는 입술을 떨면서 맥을 세었다. 간호부들은 의사의 이마엣땀을 씻을라 가제를 주워섬길라 바빴다. 그러나 소리는 없었다.

의사들은 마치 눈과 손만 가진 사람인 듯하였고 간호부들은 마치 귀와 눈만 가진 사람인 듯하였다. 의사의 눈치와 외마디 소리에 기름 잘 바른 기계 모양으로 이리 움직이고 저리 움직였다.

"실수 없이 빨리빨리."

이 밖에 아무 생각이 없었다.

"떡."

하 는 이상한 소리를 내며 정선의 다리가 뚝 떨어졌다. 아직도 따뜻하고 아직도 말락말락한 다리다. 간호부는 무슨 나뭇조각이나 드는 것같이 그 떨어진 다리를 들어서 금속으로 된 커단 접시 같은 것 위에 올려놓았다. 끊어진 다리에 붙은 발가락들이 가끔 살고 싶다는 듯이 움직였다. 그러나 그들은 영원히 다시 살아나지는 못하게 된 것이다.

의사는 집게로 집어서 걷어올렸던 살과 가죽으로 끊어진 뼈를 싸고, 초생달 모양으로 생긴 바늘에 흰 명주실을 꿴 것으로 숭숭 꿰매었다. 그리고는 약을 바르고 가제로 싸고 솜으로 싸고 붕대로 감고 이에 수술은 끝났다.

"이것 보아!"

하 고 이박사는 정선의 다리(인제 끊겨 떨어진 죽은 다리를 이리저리 뒤집어 보다가) 무릎께서 칼로 푹 찔러 째어서 피고름이 쏟아지는 것을 보이면서 말하였다. 다른 의사들도 끊어진 다리를 이리 뒤적 저리 뒤적 만져 보았다. 마치 무슨 장난감이나 되는 듯이.

정선의 몸은 깨끗이 씻기우고 옷을 입히었다. 코에 대었던 마스크도 떼어졌다. 간호부는 정선의 이마에 돋은 땀방울을 씻어 내고 정선을 수레에 옮겨 싣고 홑이불과 담요를 덮었다.

삐걱 하고 수술실의 문이 열릴 때에 정선의 붕대로 동인 검은 머리가 수레 위에 누운 대로 쑥 나오는 것을 볼 때에 숭은 길을 비키면서 가슴이 몹시 울렁거림을 깨달았다. 그것은 형언하기 어려운 감정이었다.

숭은 정선이가 탄 수레를 제 손으로 끌었다. 그리고 눈이 아뜩아뜩하도록 흥분되는 것을 억지로 참았다.

병실에 들어가서 간호부가 정선을 안아 내릴 때에 한쪽 다리가 무릎으로부터 없는 것을 보고 숭은 놀랐다. 그럴 줄을 생각 못 하였던 것같이 놀랐다.

'정선은 한 다리를 잃었고나!'

하는 일은 결코 가벼운 일은 아니었다. 병실에 돌아온 지 얼마 아니하여 정선은 눈을 떴다.

"수술 다 했수?"

하고 정선은 곁에 앉은 남편을 보고 물었다.

"응."

하고 숭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쨌나?"

하고 정선은 다시 궁금한 듯이 물었다.

"응."

하고 숭은 길게 설명하기를 원치 아니하였다.

"아프지 않어."

하고 정선은 빙그레 웃었다.

"아프지 말라고 수술했지."

하고 숭도 웃어 보였다.

"그렇게 여러 날 못 주무셔서 어떡허우? 유월이더러 보라고, 당신은 좀 주무시구려."

하고 정선은 숭의 초췌한 얼굴을 보며 걱정하였다.

"염려 마오."

하고 숭은 네모나뎃병을 들어 정선의 입에 넣어 주었다. 정선은 가장 맛나는 듯이 그것을 두어 모금 마셨다.

정선은 그날 하루를 제 다리가 끊긴 줄을 모르고 지냈다. 그 이튿날도 그러하였다. 끊긴 쪽 무릎이 가렵다는 둥, 그쪽 발이 가렵다는 둥, 긁어 달라는 둥, 그쪽 다리가 아직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다리가 병신은 안 되우?"

하고 근심되는 듯이 남편에게 묻기까지 하였다. 그럴 때에는 숭은 긁는 모양도 해주고 만지는 모양도 해주었다. 그러면 정말 긁히운 듯이, 만지운 듯이 정선은 만족하게 가만히 있었다.

다리를 자른 뒤에는 열도 오르지 아니하고 고통도 덜려서 정선은 하루의 대부분을 눈을 뜨고 지내고 남편과 이야기도 하였다. 정선은 매우 명랑하게 지냈다.

사흘째 되던 날 아침에 의사가 다리 끊은 자리의 붕대 교환을 하게 될 때에 숭은 병실에서 나오지 아니하면 아니 되게 되었으므로 정선은 비로소 제 다리가 끊겨진 것을 보았다.

붕 대 교환이 끝나고 숭이 혹시 정선이가 다리 끊긴 것을 알지나 아니하였나 하는 근심을 가지고 병실에 들어갔을 때에는 정선은 울고 있었다. 그러다가 숭이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두 손으로 낯을 가리었다. 숭은 다 알았다. 그러나 무엇이라고 말할 수가 없어서 우두커니 서 있었다.

"아, 울지 마우. 인제는 살아났으니 울지 마우."

하고 숭은 낯을 가리운 정선의 팔목을 붙들어서 낯에서 떼려고 하였다. 그러나 정선은 떼쓰는 어린애 모양으로 더욱 꼭 누르고 손을 떼지 아니하였다. 그리고 달랠수록 더욱 머리를 흔들고 울었다.

"여보."

하고 숭은 정선을 한 팔로 안으면서,

"내가 끊으라고 해서 끊었는데 어떠오? 당신이 다리 하나가 없더라도 내가 일생에 전보다 더 잘 사랑해 줄 텐데 무슨 걱정요?"

하고 위로하였다.

"왜, 나헌테 말도 아니 하고 다리를 자르게 했소?"

하고 정선은 낯을 가리었던 손을 떼며 성을 내었다.

"그냥 두면 다리가 점점 썩어 들어가서 더 많이 자르게 될는지도 모르고, 또 더 심하면 생명에 관계될는지도 모른다고 하니, 당신이 고통을 받는 것도 차마 볼 수 없고, 또 죽기도 원치 아니하고 보면 자를 수밖에 없지 않소?"

하고 숭은 알아듣도록 설명을 하였다.

"싫어요, 싫어요, 죽는 게 낫지, 다리 병신이 되어 가지고 살면 무얼 해요?"

하고 정선은 더욱 흥분하였다.

"이렇게 정신을 격동하든지 몸이 움직이면 출혈이 될 염려가 있다고 합디다. 출혈이 되면 큰일나오."

하고 숭은 정선의 손을 만지며 애원하였다.

다리를 자른 데 대한 정선의 원망은 여간해서 가라앉지 아니하였다. 그래서 가끔 숭을 볶아 대었다. 그럴 때마다 숭은 침묵을 지키거나 위로하는 말을 하였다.

그 러나 일 주일 지나 이 주일 지나 병이 차차 나아가는 동안에 정선은 숭의 침식을 잊고 저를 위하여 애쓰는 정성에 감동이 되었다. 더구나 친정에서도 돌아보지 아니하고 세상이 다 저를 버려서 죽든지 살든지 상관을 아니 하는 이때에, 제일 저를 미워해야 옳을 남편이 이처럼 전심력을 다하여 저를 간호한다는 것을 뼈가 저리도록 고맙게 생각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용서하세요."

하고 정선은 가끔 자다가 깨어서는 저를 지키고 앉았는 남편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게 되었다.

"며칠 안이면 퇴원할 테니, 퇴원하거든 서울로 가서 의족을 만들어 가지고 살여울로 갑시다."

하는 것이 숭의 대답이었다.

"싫어요, 난 서울은 안 가요! 이 꼴을 하고 서울을 가?"

하고 정선은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 끝에는 얼굴이 검은빛으로 흐렸다.

"그럼 의족은 어떻게 하오?"

"여기 불러오지는 못하오?"

"불러오면 돈이 많이 들지. 인제는 당신이나 내나 다 몸뚱이 하나뿐이오. 인제부터는 우리 둘이 벌어먹어야 하오."

이 말은 정선에게는 무서운 말이었다. 참 그렇다. 돈이 없다. 십여만 원 가치 어치 재산은 숭이가 다 친정아버지에게 돌려보내고 말았다. 이 꼴이 된 정선을 아버지가 다시 돌아볼 것 같지 아니하였다.

그 뿐더러 벌어먹는다는 것, 제 손으로 제 옷과 밥을 번다는 것은 정선으로는 일찍 생각해 본 일도 없었다. 제 손으로 벌어먹는다는 것은 천한 사람이나 하는 일 같았다. 재산 없는 몸, 그것은 마치 젖 떨어진 젖먹이와 같이 헬프리스(무력)한 일이었다. 앞이 막막하였다. 그래서 정선은 말이 나오지 아니하였다.

"어떻게 벌어먹소?"

하고 한참 뒤에야 비로소 한마디를 하였다.

"왜 못 벌어먹어?"

하고 숭은 자신 있게 말하였다.

"그야, 당신이 변호사 노릇을 하면야 벌어도 먹지마는 살여울 가서야 어떻게 벌어먹소?"

하고 기막히는 듯이 천장을 바라보았다.

"땅 사놓은 것이 있어. 우리 두 식구 먹을 것은 나오우, 내가 혼자 농사를 지어두. 당신은 옷만 꿰매시구려."

하고 숭은 웃었다.

정 선은 아직 제 치맛주름 한번 잡아 본 일도 없었다. 집에는 으레 침모가 있는 법으로 생각하였다. 정동 집에는 침모도 찻집도 다 있지 아니하냐. 그러나 이 꼴 하고, 신문에 나고, 다리 하나 끊어지고 서울로 갈 면목은 없었다. 살여울 갈 면목도 있는 것은 아니지마는 그래도 이 세상에서 저를 돌아보아 주는 사람은 남편밖에 없지 아니하냐. 이 병신 된 몸이 의지할 곳은 남편밖에 없지 아니하냐. 이렇게 생각하면 눈물이 솟았다.

"내 낫거든 살여울로 가께. 옷도 꿰매고 반찬도 만드께."

하고 정선은 낯 근육을 씰룩거리며 울었다.

하루는 서울서 숭에게 전화가 왔다. 숭은 그것이 혹시 장인에게서 온 것이나 아닌가 하였다. 장인이나 처남에게서는 지금까지 엽서 한 장도 없었다.

전화에 나타난 것은 여자의 소리였다. 그가 누구라고 말하기 전에 그 소리의 주인은 산월인 것이 분명하였다. 그 목소리는 알토인 듯한 가라앉고도 다정스러운 목소리다.

"저 선희입니다. 백산월이라야 아시겠죠?"

하는 것이 허두다. 그 음성에서는 기생다운 것이 떨어지고 없다.

"네."

하고 숭은 무엇이라고 대답할 바를 찾지 못하였다.

"부인 어떠셔요? 일어나셨어요?"

"아직 누워 있습니다."

"괜찮으시지요?"

"인제 죽기는 면한 모양입니다."

"다리는?"

"다리는 잘라 버렸지요."

"네?"

하고 산월은 놀라는 모양이었다.

"잘랐어요. 그렇지만 살아났으니 고맙지요."

하고 숭은 하염없이 웃었다.

"저런, 그럼요. 살아나신 것만 다행하지요."

하고 산월은 한참 잠잠하다가,

"저, 병원으로 좀 찾아가도 좋아요?"

하고 묻는다.

"어떻게 여기를."

하고 숭은 좋다는 뜻도 좋지 않다는 뜻도 표하지 아니하였다. 산월이가 찾아오는 것이 아내에게 어떠한 영향을 줄는지 모르는 까닭이다.

"불편하시겠지마는 낮차로 찾아가겠습니다. 꼭 좀 의논할 말씀도 있구요―---선생께 걱정을 끼칠 말씀은 아닙니다. 그럼, 이따 가께요. 정선이 보시고 제가 온다더라고 그리셔요."

하고 이편의 대답은 듣기도 전에 산월은 전화를 끊어 버렸다.

숭은 방에 들어왔다.

"집에서 왔에요?"

하고 정선은 조급하게 물었다.

"아니, 백선희 씨헌테서 왔어. 낮차에 오마구."

하고 숭은 대수롭지 아니한 것같이 대답하였다. 그러나 속으로는 그렇게 편할 수는 없었다.

이 날 서울서 의족 만드는 사람이 왔다. 일전에는 그 사람이 석고를 가지고 와서 정선의 성한 쪽 다리를 본떠 갔더니, 이번에 그 본에 비치어서 다리를 만들어 가지고 왔다. 비단 양말을 신기고 구두를 신기고 보면 성한 다리와 다름이 없었다.

정선은 숭에게 겨드랑을 붙들려서 침대 위에 일어나 앉기까지는 하였지마는 고무다리 만드는 사람 있는 곳에서는 그것을 대어 보기를 원치 아니하였다. 그래서 숭은 그 사람을 내어보내고 맞춰 보았다.

아직 끊은 자리가 굳지를 아니하여 좀 아팠다. 그런 아픈 것 때문은 아니요, 고무다리를 대지 아니하면 안 되게 된 것 때문에 정선은 숭의 가슴에 매달려서 울었다.

"이게 다 무어야. 내다버려요!"

하고 정선은 그 고무다리가 보기 싫다고 이불을 쓰고 울었다. 숭은 고무다리를 잘 싸서 정선이가 보지 않는 곳에 가져다가 두었다.

"나는 고무다리 안 댈 테야."

하고 정선은 떼를 썼다.

"대고 싶을 때에만 대시구려."

하고 숭은 정선을 무마하였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정선은 하루에 한 번씩 고무다리를 대어 보았다. 그리고 한두 걸음씩 걸어도 보았다. 그리고 나서는 또 울었다. 마치 히스테리가 된 것 같았다.

자나깨나 정선의 머릿속에서는 고무다리가 떠나지 아니하였다. 눈을 감으나 뜨나 고무다리는 눈에 어른거렸다. 그러할 때마다 슬펐다.

산월이가 올 시간이 되었다. 숭은 산월이가 오기 전에 정선에게 산월과 저와의 관계를 말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런 델리킷(미묘)한 문제를 어디서부터 시작할까 하고 맘을 썼다.

"선희 씨가 당신이 병원에 입원하던 날 여기까지 와서 하룻밤을 자고 갔다우."

하는 것으로 길을 열었다.

"선희가 여기?"

하고 정선은 놀랐다.

"응, 내가 경성역에 차를 타고 자리를 찾으러 다니다가 그 사람을 만났어. 그래 여기까지 같이 와서 하루 묵어 갔지요."

정선은 아내다운 의아의 눈을 가지고 숭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정선은 선희가 학생시대에 집에 다닐 적에 숭을 알던 것과 또 숭이란 사람이 기생과 무슨 상관이 있으리라고 생각되지 아니하는 것으로 다시 안심하는 것 같았다.

"내 가 선희 집에 가서 하룻밤을 잔 일이 있지 않소? 강변호사헌테 붙들려서 술을 잔뜩 먹고는 인사 정신 못 차리고 있었는데, 자다가 깨어 보니까 웬 모르는 집인데 곁에서 자는 사람이 산월이란 말야. 산월은 강변호사가 부른 기생이거든. 그래서 그 집에서 하룻밤을 지내지 아니하였소?"

하는 숭의 말은 좀 어색하였다. 그렇지마는 해야 할 말을 해버린 것은 기뻤다.

정 선은 그 말을 듣고는 오장이 뒤집히는 듯함을 깨달았다. 지금까지 숭을 존경하던 생각이 다 스러지고 격렬한 질투를 깨달았다. 그러나 정선은 제가 숭을 나무랄 사람이 못 됨을 생각하고 다만 눈을 감고 사내발이 날 뿐이었다. 마치 전신의 피가 얼어붙는 듯하고 숨이 막히고 이가 떡떡 치우쳤다.

"저리 가요."

하고 한참이나 있다가 정선은 남편을 노려보고 소리를 질렀다. 숭은 아무 말도 아니 하고 곁방으로 가서 유월이를 정선의 병실로 들여보냈다.

"이년! 무엇 하러 왔어? 저리 가!"

하고 정선이가 외치는 소리가 곁방에 있는 숭의 귀에 들렸다.

유월이는 정선에게 쫓겨나서 숭에게로 왔다. 정선은 혼자서 울고 있었다.

"나는 고무다리, 선희는 성한 몸."

하고 정선은 선희가 제게 무서운 원수나 되는 것같이 생각히었다. 선희가 곁에 있으면 칼로 찔러 죽이고 싶었다.

이 때에 선희는 간호부를 따라 정선의 방문을 열고 들어섰다. 정선은 그것이 선희인 것을 직각적으로 알고 눈물을 씻고 눈을 감고 자는 모양을 하였다. 선희는 잠든 병인을 깨울까 저어하는 모양으로 발끝으로 걸어서 정선의 침대 곁으로 와서 우두커니 섰다.

이 렇게 침묵이 계속하기 이삼 분. 선희는 초췌한 벗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한숨을 짓고 서 있었다. 선희는 오늘은 산월이 아니었다. 머리도 학생 머리로 틀고 옷도 수수한 검은 세루 치마에 흰 삼팔 저고리, 학교에 다닐 때에 입던 외투와 핸드백을 손에 들고 모습을 감추기 위함인지 알에 검은빛 나는 인조 대모테 안경을 썼다. 산월을 본 병원 사람들도 그가 산월인 줄을 안 사람이 없었다.

선희는 언제까지든지 정선이가 잠을 깨기를 기다리는 듯하였다.

숭 은 마치 심판을 기다리는 죄인 모양으로 우두커니 옆엣방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선희가 온 때에 일어날 불쾌한 한 장면을 그려 보았다. 그러나 당할 일은 당할 일이었다. 비가 되거나 우박이 되거나 겪을 일은 겪을 일이었다. 다만 정선의 병에 해롭지 않기만 바랄 뿐이었다.

정 선은 자는 체를 하고 있으면서 선희에게 대하여 할 행동을 생각하였다. 처음에는 분하기만 하였으나 선희가 언제까지고 가만히 서 있는 것을 보고는 분한 마음이 좀 풀리고 동정하는 마음이 생겼다. 오는 길로 남편을 찾지 아니하고 저를 찾아서 언제까지든지(정선의 생각에는 반시간이나 된 것 같았다) 제가 눈을 뜨기를 기다리고 섰는 것이 선희가 제게 대한 성의인 것으로 해석하였다. 그래서 정선은 아무쪼록 선희에게 대하여 호감을 가져 볼 양으로 학생 적에 저와 선희와 의좋게 지내던 것을 생각하였다. 이 모양으로 맘을 준비해 가지고 정선은 자다가 깨는 모양으로 가볍게 기지개를 켜면서 눈을 떴다.

"정선이!"

하 고 선희는 눈을 뜨는 정선의 가슴 위에 엎더지는 듯이 몸을 던지며 제 뺨을 정선의 뺨에 비비고 최후에 입을 맞추었다. 이것은 두 사람이 동성연애 비슷한 것을 하면서 하던 버릇이었다. 그리고 선희는 코끝과 코끝이 서로 마주 닿을 만한 거리에서 정선의 눈을 들여다보며,

"네가 살아났구나. 네가 살아났어!"

하고 또 한번 뺨을 비비고 입을 맞추었다. 마치 어머니가 어린 딸에게 하는 모양으로.

"그래, 죽지 못하고 살아났단다."

하는 정선도 선희의 열정적인 포옹에 감격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왜 그런 소리를 하니?"

하고 선희는 그제야 정선에게서 물러나서 곁에 있는 교의에 앉으며,

"죽 기는 왜 죽어? 살아야지. 나는 우연히 미스터 허와 한 차를 탔다가 글쎄, 수색 정거장을 조금 지나서 차가 급작스러이 정거를 하지 않겠니? 그때에 미스터 허는 아마 맘에 무엇이 알렸나 봐. 벌써 무슨 일이 난 것을 다 아는 듯이 차에서 뛰어내린단 말이다. 눈이 펑펑 쏟아지는데. 그러자 사람들이 뛰어오면서 레키시라고, 웬 젊은 여자가 레키시를 하였다고 그리겠지, 그래 웬 여자라는 말을 들으니깐 나도 가슴이 설렌단 말야. 남자라고 하는 것보다 다르더라, 역시 여자에게는 여자가 가까운가 봐……."

"서로 미워하기도 여자끼리가 제일이고."

하고 정선은 빙그레 웃었다.

"그래. 그래 가보니깐―---너 그때 이야기 미스터 허헌테 다 들었니?"

하고 선희는 말을 끊고 묻는다.

"그 뚱딴지가 무슨 말을 하니? 또 내가 무에라고 그걸 물어 보아?"

하고 정선은 선희의 보고에 참으로 흥미를 느꼈다.

"아, 그래."

하고 선희는 말할 이유를 찾은 것을 만족하게 여기며 말을 계속한다.

"아, 그래 가까이 가보니까―---아주 가까이 가게는 아니 하지, 길을 막아요―---아 그래, 가만히 바라보니깐 기관차 이맛불빛에 웬 젊은 여자가 피투성이가 되어서 눈이 쌓인 철롯길에 가로누워 있단 말이야, 칠피 구두가 불빛에 반짝반짝하고. 그것을 보니까 나도 저렇게 죽을 몸이 아닌가 하고 맘이 슬퍼지더고나. 그러기로 그것이 정선일 줄이야 꿈엔들 생각하였을 리가 있나. 그런데 말야, 그 시체―---우리야 시첸 줄만 알았지. 살았으리라고야 생각할 수가 있나. 그래, 그 시체를 맞들고 차에 실으려고 앞으로 지나가는데 미스터 허가 깜짝 놀라서, '아이구 정선이!' 하고 시체를―---그러니깐 너지, 정선이지―---붙든단 말야. 그래서 보니깐 정선이 아니야. 얼굴이 반이나 피에 젖고, 치마가 모두―---아이구, 그 말을 어떻게 다 하니?"

하고 선희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린다.

선희가 우는 것을 보고 정선도 눈물을 흘렸다. 눈물은 두 사람의 맘에 걸렸던 모든 깨끗지 못한 관념과 감정을 녹여 버렸다.

"그래서."

하고 선희는 눈물을 흘린 것이 부끄러웠다는 것같이 일부러 소리를 내어 웃으며 손수건을 두 손가락 끝에 감아 가지고 안경 밑으로 눈물을 씻는다.

"그 래서, 미스터 허가 차장과 교섭을 해서 너를 일등 침대에다 태우고 다른 찻간으로 돌아다니면서 의사 하나를 불러왔지요. 모르지 정말인지 아닌지, 제가 의사라니깐 아니? 그래서 네가 여기를 오게 되고 나도 여기까지 따라와서 하루를 묵어서 갔단다. 그런 겐데 말야, 세상에서들은 무에라고 하는고 하니……."

하고 선희가 새로운 화제를 꺼내려 할 적에 숭이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오셨어요?"

하는 것이 숭의 인사.

"부인 병구완하시기에 얼마나 곤하셔요? 그래도 이렇게 나았으니깐 다행하시지."

하고 선희는 숭과 정선을 번갈아서 본다.

"낫기는 무어가 나았어? 다리 하나가 없어졌는데 나았어?"

하 는 정선에게 불쾌한 빛이 없음을 보고 숭은 맘을 놓았다. 숭은 기생 모양을 버리고 보통 여학생 모양을 차린 선희의 모양을 호기심으로 바라보았다. 그 모양에서 기생의 흔적이 어디 남았는지를 찾기가 어려웠다. 이맛전과 눈썹까지도 예사로웠다. 숭은 이것이 산월인가를 의심할 만하였다. 그렇다고 예전 정선의 집에 놀러 다닐 때 선희도 아니었다.

"왜 그렇게 보세요? 어디 기생 냄새가 나는가 하고 그러세요?"

하고 선희는 두 손으로 낯을 가리고 수삽한 빛을 보인다. 도무지 기생의 흔적이 없었다.

"정 선이는 내가 기생으로 차린 것을 본 일이 없지? 기생 스타일에도 일종의 미가 있다. 그것이 아마 조선의 가진 아름다운 것 중 하나일는지 몰라. 그 몸가짐, 걸음걸이 그것도 다 공부가 있어야 되어요. 아이, 내가 무어라고 이런 쓸데없는 소리를 하고 있어?"

하고 선희는 정선의 이불과 베개를 바로잡아 주고 나서,

"아이 참, 여기 앉으셔요."

하고 선희는 섰는 숭에게 교의를 권한다. 이 방에 교의는 하나밖에 없었다.

"앉으시오, 나도 여기 앉지요."

하고 숭은 아내의 침대 발치에 걸터앉는다.

"글쎄, 어째 기생이 됐어?"

하고 정선은 억지로 불쾌한 생각을 누르면서 물었다. 그것은 남편이 기생 산월의 집에서 잤다는 것이었다.

"기생 됐던 말은 해서 무얼 해?"

하고 선희는 다시 교의에 앉으며 숭을 향하여,

"저 기생 그만두었답니다. 여기서 올라간 날로 폐업하였어요. 그래 지금은 기생 아닙니다."

하고는 다음에는 정선을 향하여,

"나 기생 그만두었다. 인제부터는 어느 시골 유치원 보모 노릇이나 하고 싶어. 그리고 야학 같은 거 가르쳐도 좋고."

하고는 또 숭을 향하여,

"정말입니다. 저 어디 갈 데 하나 구해 주세요. 살여울은 유치원 없습니까. 정선이 살여울 안 가?"

"글쎄."

하고 정선은 맘에 없는 대답을 하였다.

"정선아, 난 너 가는 데로 갈 테야. 너 따라댕겨도 괜찮지."

선희는 퍽 흥분하여 허둥허둥하는 빛이 보인다.

정 선은 선희의 속맘을 꿰뚫어보려는 눈으로 싸늘한 독이 품긴 눈살을 선희의 일동 일정에 던졌다. 그리고 선희가 숭에게 맘을 두어 숭을 빼앗아가려는 것이나 아닌가 하고 맘에 자못 불쾌하였다. 그렇지 아니하면 무슨 까닭에 갑자기 기생을 그만두고 정선을 따라오려는 것일까.

"무얼 날 따라오는 게야?"

하고 정선은 빈정댔다. 그러나,

'네가 내 남편을 따라오려는 것 아니냐?'

이런 말은 정선의 입에서 나오지 아니하였다. 선희는 잠깐 정선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정선의 얼굴에서 유쾌한 웃음을 찾아보고는 안심하고,

"저 는 어려서부터 말 안 듣는 계집애로 유명했답니다. 아버지, 어머니 살아 계실 때에도 영 이르는 말씀은 안 들었지요. 때리면 얻어맞고 울고 밥을 굶을지언정 영 말은 안 들었답니다. 왜 그랬는지 내 모르지요. 학교에 가기 시작한 뒤에도 말을 잘 안 들었어요. 제 생각에는 어른들이 시키시는 말씀이 다 옳지 않아 보인단 말야요. 어른의 권력으로, 선생의 권위로 내리누르시지마는 옳지 않은 것이 옳게는 안 보이거든요. 옳게 안 보이는 것을 복종하기는 싫거든요. 안 그러냐 얘, 너도 내가 선생님헌테 벌 받는 것을 여러 번 보았지, 왜?"

하고 선희는 정선의 동의를 구할 겸 눈치를 떠본다.

"그럼, 고년 작두로 찍어도 안 찍힐 년이라구, 불에 태워두 안 타질 년이라구, 하하하하. 그 돌배라는 선생이 안 그랬니, 왜? 선희 널 보구."

하고 정선은 유쾌하게 깔깔대고 웃는다.

숭은 정선이가 유쾌하게 생각하는 것이 기뻤다. 선희도 그러하였다. 정선은 선희의 태도와 말이 그가 단순히 사내를 따르려는 계집이 아니요, 사내와 계집을 초월한 사람의 위신을 가졌음을 느끼고 안심하게 된 것이었다.

"그 렇게 저는 누구 말 안 듣는 계집애로 자라났단 말씀야요. 그러다가 아버지, 어머니 다 돌아가셔서, 삼촌 집에 가서도 말 안 듣는 버릇은 놓지 못했답니다. 더군다나 삼촌이라는 이가 내게 호의를 가진 사람이 아닌 줄을 안 담에야 내가 왜 그 말을 들어요? 심사로라도 안 듣지. 삼촌은 웬일인지 저를 미워하셨답니다. 작은어머니라는 이는 더하고요. 제게 제일 가까운 사람이 외조모와 이모들이지마는, 삼촌이 제가 외가에 가는 것은 대기거든요. 또 외가가 서울을 떠난 것도 한 이유는 되지만두. 삼촌의 목표는 제게 있은 것은 아니지요. 조카딸년이야 어찌 되었든지 아버지 두고 가신 재산만 가지면 그만이란 말씀야요. 제가 고등과를 졸업한 때에―---열여덟 살 적이지? 삼촌은 저를 어느 부랑자의 후실로 가라고 야단을 하셨지요. 저는 전문과에 간다고 떼를 쓰고. 전문과에 가? 전문과엔 무엇 하러? 전문과에 가면 학비를 안 줄걸. 이러시고 삼촌은 야단이시지요. 삼촌도 나만 못지않게 뉘 말 안 듣는 양반이시거든요. 그래 숙질간에 대충돌이 안 났습니까. 죽일년 살릴년이지요. 그러니 삼촌허구 열여덟 살 된 계집애허구 싸우자니 적수가 되어요. 그래 최후에 제가, 그럼 그까짓 재산 다 삼촌 가지우, 난 전문과만 졸업하도록 학비만 주시구―---이런 조건으로 타협이 되었지요. 재산요? 재산이래야 몇 푼 어치 되나요. 양주 논, 고양 논, 시흥 논과 산과 다 해야 한 육칠만 원 어치 될까. 그저 한 오백 석 하지요. 뒤에 생각하니깐 아깝기도 하지마는 한번 한 말을 어찌할 수도 없고, 그래 해달라는 대로 다 도장을 찍어 주었지요. 엇소, 엇소 다 가져가우 하구. 그러고 보니 어떻게 됩니까. 전문과를 졸업하고 나는 날 저는 쇠천 한푼 남은 것 없지요. 그렇다고 구질구질하게 삼촌더러 더 먹여 달랄 수도 없구요, 그래서 졸업식한 이튿날 저는 삼촌의 집에서 뛰어나왔지요."

하고는 선희는,

"제가 이런 말은 왜 합니까. 뉘 말 안 듣는다는 말 하다가 어느새에 신세타령이 나왔네, 아이 부끄러워."

하고 손으로 눈을 가린다.

"응, 그래서 네 재산을 모두 네 삼촌헌테 빼앗기고 말았구나?"

하고 정선은 동정하는 듯이,

"난 또 그런 줄까지는 몰랐어. 너 어디 나보고 그런 말 했니?"

"그런 말을 왜 하니? 넌 부잣집 작은아씨 아니야. 내가 알거지가 되었다면 너헌테 천대받게."

"그러기로, 설마 내가 너를."

하고 정선이가 소리를 내어 웃는다.

"암, 그렇지. 내가 기생이 되었다고 정선이가 나 찾아오는 것을 지긋지긋해하지 않어?"

하고 선희가 턱으로 정선을 가리킨다. 정선의 낯빛이 문득 변한다.

"그 런 말씀을 길게 할 것은 없구요, 어쨌으나 저는 인제는 기생은 그만두었습니다. 여기서 올라간 이튿날부터요. 신문에 무엇이라고 쓰인 것이 맘에 걸린 것도 아니구요. 왜 그런지 기생 노릇은 아니 하기로 결심을 했단 말씀야요. 세상에서들은 그 신문을 보고 마치 무슨 큰 변이나 생긴 것처럼 야단들이래요. 도무지 집에 앉었을 수가 있나. 굉장히 부르러 오고 찾아오지요. 권번에는 폐업한다고 다 말을 했건만도, 아니라고 아마 신문에 난 것 때문에 그런가 보다고, 내야 어떻겠느냐고, 위로해 줄 테니 오라고 이런 사람들도 있겠지요. 기가 막혀."

하고는 무슨 크게 재미있는 것이 생각이 난 듯이,

"그런데 말야요, 요전 허선생허구 차에서 이박사 안 만나셨어요?"

하고 숭에게로 몸을 돌린다.

"네, 만났지요."

하고 숭은 그때 광경을 그려 본다.

"그 때에 제가 이박사를 놀려먹었지요? 들으셨어요? 여러 번 주신 편지는 답장을 못 드려서 미안하다고, 또 세 번이나 찾아오신 것을 대문 밖에서 돌아가시게 해서 미안하다고, 글쎄 이랬답니다. 그랬더니 그 담에 알고 보니깐, 그 자리 있던 두 여자 속에 하나가 이박사와 약혼말이 있던 여자랍니다그려. 일본 어느 고등사범인가 졸업한 여자라는데, 그만 그 이튿날로 이박사를 탁 차버렸대요. 그리고는 이박사가 또다시 심순례를 꼬여 내려 든대, 얘."

하고 정선을 바라본다.

"미스 정은 어떻게 되었누?"

하고 정선이가 묻는다. 미스 정이라는 것은 정서분을 가리킴이다.

"정서분 씨?"

하고 선희는,

"어 림이나 있나, 이박사가 정서분 씨 생각이나 할 줄 아니? 인제 만일 순례헌테 퇴짜를 맞으면 하루 이틀 심심파적으로 미스 정 집에 갈는지도 모르지. 그러면 미스 정은 그만 고마워서 허겁지겁으로 이박사를 맞아들인단 말이다. 미스 정은 이박사 같은 사람에게는 알맞은 빅팀(희생물)이란 말이다. 우리 같은 것은 너무 닳아먹어서 잘 넘어가지를 않고, 순례는 또 너무 애숭이구. 아무려나 이박사도 인제는 볼일은 거의 다 보았어. 이번에 순례허구 틀어지면 이젠 마지막일걸. 응, 닥터 현헌테도 다니는 모양이지마는 현이 누구라구. 인제는 이박사도 청산할 때가 되었겠지."

숭 은 선희가 점점 흥분하여 말이 많아지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면서 듣고 있었다. 산월이라는 기생은 결코 수다스러운 기생은 아니었다. 도리어 산월이라는 기생의 특색은 그의 숙녀다운 얌전이었다. 그는 별로 말이 없고 말 한마디를 하려면 앞뒤를 재는 것 같았다. 이것이 사람들의 맘을 더욱 끈 것이었다. 이 점잖음이, 얌전함이. 그런데 오늘 이 자리에서는 선희는 마치 무슨 흥분제를 먹어서 발양상태에나 있는 것같이 말이 많았다. 그 알토 가락을 띤 어성은 대단히 아름답고 유쾌하였다.

"순례는 너무 말을 잘 들어서 걱정이요, 나는 너무 말을 안 들어서 걱정이라고 이박사가 그리겠지."

하고 선희는 말을 잇는다.

"말 안 듣는 데 미가 있다나. 들을 듯 들을 듯 안 듣는 데는 사내들이 죽는다고. 이건 사실인가 봐. 기생들도 이 수단을 쓴대요. 나는 그래서 남의 말 안 듣는 것은 아니지, 하하하하. 내야 나를 해치려는 사람들 틈에서만 살았으니깐 자연 남의 말을 안 듣게 된 게지. 남의 말을 들으면 제게 해로울 것만 같으니깐. 그렇지만 순례 모양으로 부모의 사랑 속에 자라난 사람이야 남의 말을 안 듣는 연습이 없단 말야. 안 그렇습니까. 남의 말 안 듣는 것이 자위책이거든요."

하고 숭을 바라본다.

숭은 그렇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려 보였다.

"남의 말 안 듣고 안 믿는 공부는 그 동안 기생 노릇에, 이를테면 대학을 마친 심이야."

하고 선희는 말을 잇는다.

"기 생으로 나서면 손님이란 손님이 다 내게 호의를 가지는 사람이구, 다 나를 위해서는 목숨이라도 바칠 것 같은 사람들이거든. 말을 들으면 말야. 그러니 그 말을 다 믿고 다 듣다가야 큰코가 백이 있기로 배겨나겠어요. 그러니깐 오냐 나는 네 말을 안 믿는다, 네 말을 안 듣는다 하고 속으로 선언을 해놓지요. 그리고는 네, 네 그렇습니다, 아이구 고마우셔라, 그럼요, 이런 대답을 하거든. 그것이 영업이란 말야. 안 그러냐. 그렇지 않습니까, 선생님? 호호호호."

"허 지만 이렇게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죽기보다 어려운 일이야요. 아무의 말도 믿지 아니하고 아무의 말도 듣지 아니하고, 그저 의심만 하고 뿌리치기만 하는 생활은 참 못 해먹을 것입니다. 참 그렇다, 정선아. 고양이라도 괜찮고 강아지라도 괜찮으니 누구 하나 안심하고 믿을 사람이 있고 싶다. 그렇지 아니하면 마치 광야에 혼자 사는 것 같거든. 곁에 사람이 백만 명이 있기로 믿지 못하는 사람이면 없으나 다름없지 않습니까. 믿지 못하는 사람이면 원수니깐 도리어 적국에 잡혀간 포로나 마찬가지지요. 안 그렇습니까. 남의 말 안 듣는 것을 자랑으로 아는 것도 잠시잠깐입니다. 참 못살겠어요. 그래서 기생을 그만두는 동시에 남의 말을 듣기로 작정을 했습니다. 웃지 말어라, 정선아. 너같이 팔자 좋은 아이야 나 같은 계집애 심리를 알겠니?"

"말을 듣기로 했다니, 뉘 말을 듣기로 했니?"

하고 정선이가 묻는다.

"글쎄, 허선생 말씀을 듣기로 작정을 했다. 허선생 말씀이면 듣기도 하고 믿기도 하기로. 그렇지마는 허선생은 정선이 남편이시니깐 네가 동의를 해야겠지. 너 반대 안 하지?"

하고 선희는 정선을 바라본다.

"내가 왜 반대를 해? 다 자유지."

하고 정선은 승낙하는 듯하면서도 말에도 바늘을 품겼다.

"제 가 지금 시골을 가면 농촌에서 무엇이든지 할 일이 있겠습니까. 유치원 보모든지, 소학교 교사든지, 기타 무엇이든지 말씀이야요. 저는 기생 노릇 해서 번 돈이 한 오천 원 됩니다. 그러니깐 월급은 안 받아도 괜찮아요. 다만 인제는 소원이 '쓸데 있는 일'을 해보는 것입니다. 노리개생활은 인제는 싫어요. 쓸데 있는 사람이 되어서 쓸데 있는 일을 좀 해보고 싶어요. 그렇다고 농사를 지을 줄은 모르고, 방직공장 여직공도 좋지마는 역시 아직도 야심이 남았어요. 제 주제에 누구를 가르친다는 것이 염치없는 일이지만두, 가갸거겨 하나 둘 셋이나 가르치는 것이야 어떨라고요. 만일 그것을 할 수가 없다고 하시면 방직 직공으로 가지요. 그것도 쓸데 있는 일인 것은 마찬가지니깐요. 네 선생님, 제가 그런 일을 할 수가 있을까요. 극단의 무용한 사람으로서 속속들이 유용한 사람이 한번 되어 보고 싶어요. 그렇게 되도록 저를 좀 도와 주세요. 성경엣말씀 마찬가지로 잃어버렸던 양이 목자에게 돌아온 것으로 보아 주세요."

하는 선희의 음성은 흥분상태로부터 벗어나서 침울에 가까운 상태로 들어갔다.

선 희는 제가 하려고 별렀던 말을 대강 다 한 것을 발견하고는 어째 텅텅 빈 것 같음을 깨달았다. 또 제 약점을, 제 부끄러움을 사람들의 웃음거리의 재료로 제공하지나 아니하였나 하는 싱거움까지도 깨달았다. 도무지 진정을 토설하지 않기로 작정한 생활을 해오던 선희가 벼르고 별러서 한바탕 진정을 토설하고 나니, 마치 아이를 낳고 난 부인과 같이 허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