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보담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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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로로 숯재 탄현(炭峴[ ])를 지나 황산벌로 해서 짓쳐 들어온 신라군 오만 명과, 수로로 기벌포(伎伐浦)를 거쳐 사자수(泗.水[사차수])를 거슬러 올라온 13만 당병(唐兵)은 서로 합세하여 물밀듯 소부리(所夫里) 서울을 에워싸고 어렵지 않게 사자성을 무찔렀다. 26세 성왕이 웅진(熊津)에서 도읍을 옮긴 지 123년 동안 금성탕지(金城湯池)를 자랑하던 사자성도 당(唐). 라(羅)연합군 앞에 낙성이 되고 만 것이다.

웅진으로 파천했던 마지막 임금 의자왕(義慈王)도 대세가 글러진 것을 깨 닫고, 당장 소정방(蘇定方)의 군문에 나아가 항복하고 말았다.

때는 신라 무열왕 6년, 고구려 보장왕(寶藏王) 18년, 백제 의자왕 19년 경신년 가을.

한창 당년에는 고구려와 두 손길을 마주잡고 승병백만(勝兵百萬)을 몰아 북으로 만리장성을 넘어 유연(幽燕)을 들부수고, 서로 황해를 건너 오. 월(吳越)을 짓밟던 크고 강하던 나라가 하루아침에 풀끝의 이슬보담도 더 하잘것없이 스러졌다. 시조 온조왕(溫祚王)이 고구려에서 따로 떨어져 나와 나라를 일으킨 후 678년, 역대(歷代)는 의자왕까지 31왕.

당나라 군사의 발굽은 사나운 이리떼 모양으로 호기롭게 오만하게 잔인하게 백제의 산과 강과 들과 집을 자욱자욱이 피로 물들였다.

한 나라가 망할 제 빚어내는 크고 작은 비극. 그 가운데는 드러난 비극보 담 숨은 비극이 더 많을 것은 다시 이렁성거릴 필요도 없으리라. 이 숨은 비극에야말로 사람의 뼈를 저며내는 듯한 물기 한 방울 없이 보송보송하게 메마른 슬픔과, 숨이 막히고 피가 끓어오를 원한과, 차마 바루 보지 못할 악착함이 겹겹이 접히고 쌓인 것이다. 드러나기엔 너무도 지긋지긋한 비극 이었기 때문인지 모른다. 숨은 비극을 그리기 전에 위선 가장 드러난 비극 두어 개를 적어 보자.

주색에 미친 왕을 간(諫)하고 또 간하다가 필경엔 좌평(佐平)이란 높고 귀한 지위로 마치 흉칙한 도적놈과 같이 옥에 갇히 는 몸이 되어 식음을 전폐하고 말라 죽은 성충(成忠). 그래도 나라와 임금을 걱정하는 나머지에 숨이 거의거의 지면서 상소를 올리어,

“충신은 죽어도 임금을 잊지 않나니 원컨대 한 마디만 더 아뢰고 죽어지 이다. 신이 일찍이 세상의 형세를 살피오매 난리는 반드시 일어날 줄 아옵니다 무릇 군사를 쓰자면 . 반드시 지세를 잘 알고 골라야 하나니, 상류에서 적을 막아야 보전할 수 있으리라. 만일 다른 나라 군사가 쳐들어오거든 뭍으론 숯재를 못 넘게 하시고, 물길로는 기벌포까지 들이지 마소서.”하는 뜻을 아뢰었건만 임금은 들은 체도 아니하여, 그의 피눈물이 얽힌 마지막 경륜도 물거품에 돌아갔으니, 애닯은 비극은 비극이로되, 뒤늦게나마 그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을 임금은 발을 굴러 뉘우쳤고, 더구나 그의 앞을 내다보는 밝음과 갸륵한 정성은 만고에 빛을 발하게 되었다.

“한 나라의 적은 군사로 두 나라의 전군을 대적하게 되었으니 존망을 뉘 알리요. 살아서 욕보느니 차라리 죽음의 쾌함만 같지 못하다.”

비장한 부르짖음을 남기고 처자 귄속(妻子眷屬)을 한칼에 베어 버린 계백(階伯) 장군. 오천 정병을 이끌고 신라의 오만 대병을 맞아 일당백(一當百) 의 의기로 네 번 싸워 네 번 이겼으나 중과부적(衆寡不敵)에 그의 몸은 황산벌판의 저녁 노을과 같이 사라졌으나, 그 무쇠 덩이 같은 결심과 하늘에 사무치는 절개는 지금도 늠름히 살아 있지 않은가! 낙화암 머리에서 떨어진 무수한 애젊은 궁녀들! 환락과 영화에 지치던 생활도 한바탕 봄꿈! 적병이 뿌리는 피비린내가 아직도 식지 않은 술잔에 풍기자 아닌 밤중에 임을 따라 버선발로 궁중을 뛰쳐나오긴 나왔으나 생사관두(生死關頭)에 오른 임은 그들을 거느리고 돌보아줄 힘도 경황도 없었다. 바쁘고 빠른 임의 옥보는 그들의 연약하고 허둥거리는 발길을 기다리고 머뭇거리지 않았다.

캄캄한 어둠 속에 임의 자최는 벌써 아득하게 멀어지고 적병의 함성은 한 시각 한 시각 가까워 온다. 갈 곳을 몰라질팡갈팡하다가 매운 결심으로 죽을 자리를 찾았다. 어둠 속에서 넘실거리는 강물을 바라보고 큰 바위 위로 몰리었다.

물보라에 비단 치맛자락을 날리며 금비녀 옥비녀가 우수수 떨어지자 풀어진 머리칼이 흰 얼굴에 휘감긴 채, 너도 나도 앞을 다투어 몸을 던지는 광경은 생각만 해도 창자가 오그라 붙을 노릇이지만, 그래도 그들은 임 향한 붉은 마음과 깨끗한 몸을 끝까지 지킬 수가 있었다. 미친 바람에 휘날리는 꽃잎처럼 애처로우나 아름답게 흩어질 수 있었다.

죽음이란 인생의 한끝 가는 슬픔이긴 하지만 그러나! 그러나! 드러난 죽음의 비극은 오히려 빛나고 향기로웠다.

숨은 삶의 비극은 너무도 악독한 희생을 요구하였다. 고량부리(古良夫里)큰거리로 지나가는 저 당병의 한 떼와 잡혀 가는 백제의 관원과 백성을 보라!

고량부리라면 백강을 건너 서울 소부리와 마주보는 고을. 큰 강이 갈리었다 뿐이지 이수로(里數) 말하면 오십리 안팎, 멀다면 멀고 가깝다면 가까운 거리였다.

이 고을은 그 지리상 관계로 용하게 혹독한 병화는 입지 않았다. 서울과 동안이 뜬 탓에 사자성이 함락이 될 때에도 직접 싸움터가 되지 않아 도륙(屠戮)을 면하였고, 또 가까운 탓에 이 고을을 지키던 장수와 병정들이 모조리 서울로 몰려가고 이렇다 할 딴 방비가 없었다. 더구나 백성들까지도 소문을 빨리 듣고 묵직묵직한 가장집물(家藏什物)들을 꾸려 가지고 피란을 할 수가 있었다. 그러니 끔찍스럽게 길가에 가루누운 즐비한 송장도 없고 또 코를 찌르는 피비린내와 노릿한 사기황 냄새도 없었다.

이 거리의 공기는 오히려 맑고 깨끗하였다.

늦은 가을, 구름 한 점 없이 갠 하늘은 너무도 청청하다. 잎사귀는 거의 다 떨어지고, 따다가 남긴 감들이 앙상한 가지에 대롱대롱 매달려 쨍쨍한 햇발을 받고, 그 농익은 붉은 뺨이 아늘아늘 곧 터질 듯하다.

양가에 늘어선 텅 빈 집들엔 어리친 개아미 한 마리 얼씬거리지 않고 허둥지둥 도망질을 치느라고 흘리고 버리고 빠뜨리고 간 허접쓰레기 피륙 오래기와 수지쪽들이 이따금 바람을 따라 더부렁더부렁 춤을 출 뿐…….

지나치게 조용하다.

자빠진 사립문과 어훙하게 열린 대문과 풍풍 뚫리고 찢어진 창호 구녕에서 도깨비라도 날 것 같다.

이 으스스하고 무시무시한 적막은 별안간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흐르렁거리는 우렁차고 사나운 말 소리, 둔하고 무딘 소 울음, 고래고래 꾸짖고 호령하는 사이로 꿀꺽꿀꺽 눈물을 삼키는 그윽한 떨림, 잉잉하고 채 쪽이 울자 찢어지는 듯한 비명, 쟁그랑 철렁 쇠붙이의 울림, 요란한 인마의 자국이 와글와글 물 끓듯 일어났다.

당병의 한 떼가 노략질을 마치고 돌아오는 것이다.

당나라 장수 소정방은 마지막 승전을 하자 군사들에게 며칠 말미를 주었다. 이 말미란 것이 싸움 이긴 뒤에 있어서의 무엇보담도 큰 상이었다. 곧 저희들 멋대로 마음대로 노략질을 하라고 군율의 굴레를 벗겨 주는 셈이다.

그 말미야말로 병정들에겐 다시 없는 기회였다. 지금까지 군율에 얽히어 굶주리고 참고 죽음도 무릅쓰고 더구나 불같은 수욕(獸慾)도 눌렀지만, 한 번 말미를 얻은 다음에야 저희들 판이요, 저희들 세상이었다.

그들이 병정에 뽑히기는 이름이 좋아 간선이지 실상인즉은 나라를 위하는 마음은 털끝만큼도 없었다. 요행수로 공을 세워 입신양명(立身揚名) 하자는 마음도 아주 없지는 않았지만, 그것은 하늘에 별을 따기보담 더 어려운 것, 노략질이야말로 병정된 가장 큰 목적이요 보람이었다.

우리를 박차고 뛰어나온 사나운 짐승의 떼와 같이 그들은 방방곡곡으로 눈에 불을 켜고 쏘다녔다.

본래부터 욕심 많은 그들, 더구나 남의 나라 남의 땅 다른 백성, 실낱만한 인정사정을 보고 염치코치를 차릴 까닭이 없었다.

눈에 뜨이는 어느 것 하나 그들의 구미를 당기고 탐나지 않는 것이 없었다.

금은보화는 말할 것도 없지만 심지어는 의복 나부랭이 같은 것조차 그들의 호기심을 끌었다.

소와 돼지와 양과 닭은 그들의 입에 한결 기름지고 달았다. 별스러운 술 맛은 그들의 창자까지 향기롭게 스며들었다.

더구나 여자 ─ 이국 계집의 살은 더욱 미끄럽고 보드라웠다. 얼굴은 개 개이 절색이요, 늙은 것, 젊은 것까지 구별조차 할 수 없었다. 앙탈을 하고 항거를 하고 버르적거리며 자반뒤집기를 하는 것이 도리어 욕심의 불길에 기름을 치는 것 같았다.

가는 날짜는 번개같이 빠르다. 말미의 기한은 오늘로 끊어졌다.

그들은 본영으로 돌아가야 한다. 산같이 쌓인 사냥한 물건을 잡아먹고 남은 소에게 바리바리 실리었다.

그런데 사냥한 것은 물건과 짐승만이 아니었다. 그들에게 더 소중하고 귀한 것은 사람 사냥이었다. 그중에 젊은 어여쁜 여인이 으뜸인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아주 꼬부라진 늙은이나 젖먹이 어린애가 아니면 계집 명색 치고는 버리지 않았다.

그 다음에는 사내라고 기운 꼴이나 쓸 만한 장정과 부리기 좋을 만한 애놈들까지 주워 모았다.

가지고 가기에는 거추장은 스러웠지만, 종으로 팔면 사람값이 변변하지 않은 보물보담 나은 까닭이다.

백제의 서북쪽에서 소부리 서울을 가려면 대개 이 고량부리 거리를 거치기 때문에 시방 노략질을 마친 당병의 한 떼가 이리로 지나가는 것이었다.

명색이 군사의 행진이지 옳은 항오(行伍)조차 차리지 않았다. 혹은 서넛, 혹은 대여섯씩 무더기 무더기 덩치를 지었다. 가뜩이나 호들갑스럽고 야단스러운 그 족속들의 수작인 데다가 호기가 날 대로 났으니, 꺼덕대고 떠드는 품이 산이라도 떠나갈 듯하다. 눈을 희번덕거리며 손바닥에 침을 칵칵 배앝아 보이기도 하고, 화타(華陀)에게 활촉을 빼는 관운장(關雲長) 모양으로 팔을 부르걷어 뽐내기도 한다. 장비(張飛)의 본을 받아 눈을 고리처럼 부릅뜨고 잡아먹을 듯이 동료를 노려보다가 너털웃음을 내어놓고 손짓 발짓으로 무슨 시늉을 그려보이기도 한다.

남은 얘기에 신이 나서 야단법석인데 곤드레만드레한 대강이를 친구의 어깨에 비스듬히 기대인 채 천하태평으로 꾸벅꾸벅 졸며 다리를 질질 끌어가는 자도 있었다.

홍달모 달린 벙거지를 뒤로 벌렁 젖힌 채 허리띠를 느슨하게 끌러서 허벅지까지 흘러 나린 고의를 끌어올리려고도 아니하고, 발길로 제 바짓가랑이를 지근지근 밟으면서 자욱을 옳게 못 떼어놓는 위인은 과식과음(過食過飮) 한 탓에 제 배를 추스를 수 없는 까닭이리라.

헐개 빠진 허리를 잘 가누지 못하고 외따로 떨어져서 먼 산만 바라보며 그 몽총한 얼굴에 혼자 어울리지 않는 웃음을 빙글빙글 흘리는 것은 지나간 음탕한 꿈을 새김질하는 것이리라.

이 군정들은 그래도 앞장을 선 축들이다. 바루 그 뒤에는 노략질한 물품을 실은 소바리가 꼬리를 물고 잇달았다. 이 약탈품을 앞에도 안 세우고 뒤에도 안 세우고 한복판쯤 실린 것을 보아도, 그들이 재물이라면 사죽을 못 쓰고 얼마나 끔찍이 아는 것을 짐작할 수가 있다.

이 소를 몰고 가는 이는 모두 백제 백성들로 사 오십 세 되는 중늙은이와 열 서너 살 되는 소년들이었다. 나이를 먹을 만큼 먹은 탓에 항거하는 것이 쓸데없는 줄 알아 고분고분히 그들의 말을 잘 듣고, 또 나이 어려서 자기들 이라면 기급을 하는 것을 골라 뽑은 셈이었다.

그래도 미심다웠는지 소바리 양 가에는 가죽 채쪽과 창대를 든 당병들이 늘어섰다.

소몰이들은 고개를 틀어메고 땅바닥만나려다보며 푸줏간에 끌려가는 양 과 같이 풀기 하나 없이 걸어가건만, 양 가에 늘어선 당병의 성난 눈초리는 그들의 일거일동에 번쩍였다. 아무 까닭도 없이 이따금 채찍은 그들의 등줄기와 종아리에 떨어졌다. 맞은 사람이 웬 영문인지 모르고 깜짝 놀라 힐끗 돌아다보는 날이면 큰일이다. 그 사정없는 채찍은 얼굴에 정강이에 홱홱 바람을 날리며 수없이 떨어진다. 맞으면 맞는 대로 아까 몸 자세를 그대로 지키고 갈 길을 가야 한다. 사람은 소를 몰고 당병은 사람을 몰았다. 소 모는 사람은 아무 까닭 없이 소를 때리지 않았지만, 사람을 모는 당병은 아무런 이유 없이 실상인즉 자기들의 심심풀이로 사람을 후려갈기는 것이었다.

짐승만도 못한 학대받는 목숨들!

소년들 중에는 참고 참았던 울음이 복받쳐 나와 제법 엉엉 소리를 내다가 제 스스로 질겁을 하고 울음을 물어 멈춘다.

소바리 뒤에는 백제 장정들이 묶여간다. 더러는 쇠사슬로 혹은 오랏줄 참 밧줄 있는 대로 마주 묶였다. 초벌로 셋씩 손과 손을 단단히 결박을 지은 다음에 다시 세 줄을 세워 아홉 사람을 한 덩치로 만들어 가지고 그 사이를 두 자쯤 띄워서 다시 기다란 줄로 가장자리에 선 사람들의 팔을 떠꿰어서 전후 좌우로 두 벌로 결박을 돌려놓았다. 이 큰 결박의 무더기가 댓 개는 넘었다. 장정들의 좌우에는 당병들이 더 엄하게 더 촘촘하게 에워쌌다.

이 장정들은 성한 사람이 별로 없었다. 이마에 칼자국이 시뻘겋게 남은 이도 있고, 머리통 한복판이 쩍 갈라져서 골이 허옇게 내다 비치는 이도 있었다. 귀가 반이나 찢어져 피딱지가 덕지덕지 앉은 것, 두 뺨이 퉁퉁 부어 오르고, 한 눈이 튕겨 나온 것, 절름절름 저는 다리, 옳게 못 쓰는 고개 들들…….

고름이 떨어지고 갈기갈기 찢어진 옷자락이 펄렁거리는 대로 드러나는 맨 살엔 모두 멍든 자리요 피 흐른 흔적이었다. 그들은 끝까지 저항을 하다가 모진 목숨이 붙은 탓으로 잡혀오는 것이다. 아주 죽은 송장이야 들메고 오 지도 않겠지만 너무 맞아서 병신이 된 것은 내어버리고, 그러고 성한 장정 이라고 골라 잡아온 것이 이 꼴이었다.

그들은 결박한 줄 때문에 앞뒤로 당기고 또 옆으로 켕기어 걸음을 걸을래야 걸을 수도 없었건만, 창대와 칼등은 다친 다리와 멍든 자국 위에 또다시 새로운 살을 묻혀 내었다.

악에 받치어 아픈 줄도 모르는지 그들의 뻘겋게 핏발선 눈은 아무리 모진 매를 맞아도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한 벌도 아니요, 두 벌씩 엮어 놓고도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던지 백제 장정 뒤에는 서리 같은 창검을 번쩍이며 말 탄 당병이 여남은 따랐다.

그들에겐 사람 잡는 병상기는 풍성풍성하였지만 사람 얽는 기구는 동이 났던지 이 말꼬리조차 이용하기를 잊지 않았다.

언감생심 자기네들에게 대항거리를 한 포로 중에도 제일 밉고 거센 놈은 그 머리를 풀어서 이 말꼬리에다가 친친 매어달았다. 이것은 가장 편리한 방법이었다. 첫째로 얽는 데 귀한 사슬과 줄이 들지 않았고, 둘째는 벌을 주사면 힘들여 매질할 것도 없이 말만 달리면 고만이기 때문에.

그 뒤에는 못 당할 욕을 당하고 끌려가는 백제 부녀들. 사내 포로와 달라 대우는 자못 융숭하다. 손과 발을 묶지도 않았고, 붉고 푸른 피륙을 찢어서 띠처럼 허리들을 날씬하게 졸라매었다. ‘세류(細柳)같이 가는 허리’의 풍정을 이런 판에도 맛보려는 것이리라. 둘씩 둘씩 짝을 지어 한데 얽기는 얽었으나 얽은 고를 느슨하게 늦추어서 몸 놀리는데 그리 거북지 않게 맨들어 놓았다.

머리를 풀어 산발한 이, 입술을 깨물어 앙다문 흰 이빨에 피가 고인이, 젖먹이를 업고 아이가 보챌 적마다 홉뜬 눈으로 당병의 기색을 살피는 어머니, 아귀적아귀적 부서진 엉치를 못 쓰는 처녀, 짚쑤세미가 다 된 치마를 밝은 날을 보기가 부끄럽다는 듯이 얼굴을 가린 안해, 들들…….

그들은 죽은 듯이 종용하게 고개를 수그리고 발길을 옮기었다. 그러나 어디선지 꿀꺽꿀꺽 눈물 삼키는 소리가 흘러들면 체했던 울음이 흑흑 터져 나 오고, 가슴이 메어지는 한숨이 회호리바람처럼 일어났다.

장탄(長歎)과 홍루(紅淚)는 미인에게 붙어 다니는 것인 줄 알았음이리라.

당병은 이 여인들의 눈물에 대해도 매우 관대하였다. 사나운 호령과 불 같은 채 쪽이 좀처럼 나려지지는 않았다.

걸어가는 부녀 뒤에는 말 탄 여자가 몇몇 있었다. 대개는 너울너울하는 긴 소맷자락으로 얼굴들을 가렸기 때문에 자세히는 알 수 없지만, 그맨두리와 차림차림과 소매에서 빠져 나온 가늘게 떠는 분결 같은 손을 보면 좌평(佐平)이나 달솔(達率) 따위의 백제 귀인의 집 부인이나 딸들임에 틀림이 없었다.

그런데 그 귀부인들의 말을 몰고 가는 마부는 물론 백제 사람이지만 어떤 자는 치장이 자못 혼란하다.

수놓은 비단 대수삼(大袖衫)을 떨쳐 입고 버젓하게 은화(銀花) 붙은 관을 쓰고 자줏빛 허리띠에 가죽 목화를 신었다.

아무리 짓궂은 당병이기로 높고 아름다운 여자의 탄 말을 어거한다 하여 그 마부까지 이대도록 굉장한 치장을 해놓을 수 없으리니, 그렇다면 바루 어제까지도 호기를 부릴 대로 부리던 고관대작이 오늘날 여자의 말몰이로 신세를 바꾼 모양이다. 더구나 그가 끌고 말 위에 탄 사람이 바로 그의 안 해나 딸인지도 모른다.

이 여자들 중에는 제 남편이나 아버지가 군사를 뿔뿔이 흩어지고 홀로 외로운 성을 지키다가 무참한 당병의 칼날에 쓰러지고 자결할 겨를도 없이 사로잡혀 오는 충신의 가속도 없지 않아 있었다. 그러나 대개는 도성이 함락될 때, 또는 함락될 것을 미리 짐작하고 임금도 버리고 나라도 버리고 제 한 목숨 살겠다고 가족을 데리고 피란을 한다고 한 것이 어찌어찌 당병의 눈에 띄어 끌려나온 화상들이었다.

백명의 여느 백성을 잡는 것보담 한 명의 관장을 잡는 것이 당병에겐 더 큰 소득이 아닐 수 없었다.

“우리 사냥엔 이런 큰 것도 잡혔네.”

하고 자랑삼아서 일부러 관복을 뒤져내어 입혀 가지고 마부를 맨든 것이었다.

백제 귀부인은 곱고 어여쁘다. 이들을 병정의 손에 맡길 수 없다. 말까지 태워놓고 도위(都尉) 따위의 당장 두셋이 역시 말을 타고 갑옷 투구에 위의를 갖추고 아름다운 포로의 곁을 지싯지싯대어섰다.

모든 사람들이 우는 빛이요 풀이 죽은 가운데, 마상의 귀부인 하나만 수색이란 찾으랴 찾을 수 없고 그 아름답고 번화한 얼굴에 오히려 방글방글 웃음살을 퍼뜨린다. 나이는 이십 남짓, 꽃잎 같은 입술이 유난히 붉고 간 잔 주런한 눈썹이 그린 듯이 반달 모양을 지은 것을 보면 이 난장판에도 그 귀부인만 새로 단장한 지가 오래지 않은 것을 알으킨다.

그는 저와 말고삐를 나란히 한 얼굴 긴 당장에게 살금살금 추파까지 보내었다.

말상 지은 당장은 그 귀부인의 눈웃음을 알아보자, 시방 막 꿈을 깬 듯한 부루퉁한 상판에 벙긋이 웃음을 띠우다가 늘어지게 하품을 한 번 하였다.

“고단도 하실 테지, 어규! 입도 크기도 해라.”

거진 귀밑까지 찢어져 올라간 떡 벌린 당장의 아가리를 바라보며 그 귀부인은 혼자 시시덕거린다.

눈물이 글썽글썽하도록 하품을 하고 난 당장은 제 귀 뒤에 손을 대고 아래턱을 번쩍번쩍 쳐들며,

“뭐? 뭐?”

하고 묻는 눈치다.

“입도 크단 말씀이에요. 원 세상에 알아들어야지.”

귀부인은 깔깔대었다.

“응? 응?”

이번에는 귀를 한 치라도 더 가깝게 당겨 가려고 고개를 기우뚱하게 귀부인의 남실거리는 입술 위에 기울이며 채쳐 묻다가 당어(唐語)로,

“천연 꾀꼬리가 지저귀는 것 같구나. 이거야 어디 알아들을 수 있나.”

혼자 흥얼거리고 한판을 벌렸다가오그리며 그 음흉스러운 콧등을 찡긋찡긋해 보였다. 껴안아 주려 하는 뜻이리라.

“아이 망측스러워라.”

귀부인은 살짝 눈을 흘겨 보이었다.

당장은 그 예쁘장한 눈매를 꼴딱 집어삼킬 듯이 마주보다가 바싹 말을 채 쳐 부치고 그 기름한 손가락으로 분빛 새로운 귀부인의 뺨을 가볍게 튀기었다.

귀부인은 매우 아픈 듯이,

“아얏!”

외마디 소리를 지르고 보얀 목덜미를 길게 빼어 달아나며 앵돌아진 양을 한다. 당장은 눈을 감는 듯이 지긋이 뜨고 히히 웃다가 털이 숭숭 난 손등으로 계집의 아른아른한 볼을 문질러 준다.

“어휴, 가엾어라. 그렇게 아프단 말이냐? 쉬쉬.”

하고 달래는 셈이리라.

“몰라요, 난 몰라.”

계집은 또 한 마디 톡 쏘기는 쏘았으나, 머금었던 웃음을 픽픽 터뜨리고 만다.

어느새 사내의 늘인 팔은 계집의 날씬한 허리가 휘청하도록 안아 당기었다. 계집의 몸이 이쪽으로 홱 돌아오는 서슬에 비뚝하며 몸이 쏠리어 말 등에서 미끄러지게 되었다. 엉겁결에 사내는 또 한 팔로 떨어지려는 계집의 몸을 잡아 멈추어서 낙마는 면하였으나, 그 사품에 사내는 제가 잡았던 제 말고삐를 놓치고 말았다.

귀부인의 팔딱거리는 젖가슴은 아직도 비스듬히 당장의 팔 안에 안겨 있는데, 당장은 그 귀부인의 말을 몰고 가는 한다하게 채린 마부를 나려다보고 고래고래 뇌까리었다.

“이놈아, 눈이 멀었느냐! 그 떨어진 말고삐를 어서 집어 올리지 못하고 지근지근 밟고 가느냐?”

귀인 마부는 힐끗 돌아다보고 말은 분명히 못 알아들었으나마, 눈치로 당장의 뜻을 짐작하고 불야불야 말고삐를 주워서 두 손으로 바치었다.

그 백제 귀인마부는 오십을 지나 육십을 바라보는 듯 귀밑털이 희끗희끗 세었지만 아주 눈이 어두워서 앞을 못 볼 낫세는 아니었다.

당나라 장수와 백제 귀부인 이해 가지고 있는 꼴이 그 마부의 눈에 아니 뜨일 수 없었다. 눈에 뜨이다 뿐이냐. 그 해참한 광경이 이글이글다는 쇠끝 모양으로 그의 눈시울 속 깊이 들어와 박히었으리라.

귀부인은 되우 놀랬던지 하하 가쁘게 숨을 쉬고 제 말구종이 돌아다볼 때 나, 고삐를 집어 바칠 때나 눈은 감은 채 거들떠보지도 안 하였다.

“장군이 아니더면 말께 떨어져 죽을 뻔했지. 아이 고마워라.”

아직도 제 어깨 위에 얹힌 당장의 손을 두 손으로 움켜나려 만지작만지작 한다.

당장은 가려운 데를 긁어 줄 때처럼 눈을 스르르 감았다.

“왜 주무셔요? 저런, 저런, 눈을 못 뜨시네. 호호.”

당장은 그 말귀를 알아들었던지 말이 가는 대로 몸을 흔들흔들하며 졸립다는 듯이 정말 고개를 끄덕거린다.

“아이 정말 조시네.”

하고 쇳조각이 생선 비늘처럼 덕지덕지 붙은 갑옷 자락을 제법 소리가 나도록 퐁퐁 두들겼다.

“아야야!”

이번에는 당장이 엄살을 하고 또다시 귀부인을 얼싸안는다. 비단 옷자락에 갑옷 닿는 소리가 버석버석 났다.

“에그머니! 또 말께 떨어지면 어떻게 해요오!”

귀부인의 아양은 말끝을 길게 빼는 데에도 흐뭇이 풍기었다.

“후우!”

귀인 말구종의 입에서는 마츰내 가슴을 쥐어짜는 한숨이 터져 나오고 말았다.

“내가 이 꼴을 보다니! 이 꼴을……후우.”

귀부인과 말구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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엊그제까지도 서슬 푸르던 고관대작의 귀한 몸으로 말구종 노릇을 하는 것만 해도 기막힌 수치요 모욕이거든, 하물며 계집이 탄 말, 더구나 적장의 사랑을 받는 제 나라 계집이 탄 말을 몰고 가는 신세…….

“내가 이 꼴을 보다니!”

하는 탄식이 아니 나올 수 없으리라. 말을 모는 백제 귀인의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자 당장과 노닥거리던 말 탄 백제 귀부인은 입을 비쭉하였다.

“흥, 누구 때문에 이 꼴을 보기에.”

귀부인의 비웃는 듯한 말가락은 귀인 마부의 잔뜩 오른 골을 더 돋군 것 같았다. 앞만 바라보고 꾸벅꾸벅 말을 몰면서도 그 젊지 않은 몸은 부르르 떨리었다.

“누구 때문에 이 꼴을 보느냐? 그러면 내 때문이란 말이냐? 죽일 년 같으니!”

귀인 마부는 안간힘을 쓰며 잇새로 말을 배앝았다.

“그래도 입청만은 살았구료. 그럼 대감이 처사를 잘못한 탓에 이 지경이 지 뉘 때문이오? 내 때문이란 말예요? 맙시다.”

“이년아! 남편의 등뒤에서 당나라 오랑캐놈과 그게 무슨 짓이냐! 이 천참만륙을 해도 시원하지 않을 년!”

그러면 말 몰고 가는 구종이 바루 남편이요, 말 탄 여자가 다른 사람 아닌 그의 안해이었던가.

“아스세요. 욕설을랑 잠깐 접어 넣어 두시구료. 이 다음 후일에 다시 좌평이 세도를 하시거든 나를 잡아다가 찢어 죽이든지 갈아마시든지 마음대로 하시구료. 지금은 다 같이 따라지 목숨, 욕보기는 매일반인데 욕설은 왜 하시오? 점잖지 않게.”

아주 의젓하게 남편을 타이르고 나서 바루 그 입으로 당장에게 너스레를 쳤다.

“그렇지 응? 장군님, 우리 목숨을 맡으신 장군님. 지금 요 모양에 자기가 죽일 년 살릴 년 하면 소용이 무엇이람? 그렇지. 응, 응, 응.”

안해는 흥얼흥얼 콧소리까지 내고 들어보라는 듯이 당장의 곰 같은 등을 또닥또닥 두드렸다.

귀인 말구종은 기색을 하고 말았는지 대꾸조차 없었다.

“왜 말이 없으시오? 입이 붙어 버렸소? 여보 대감 마부님!”

“도대체 네가 내게 무슨 함원이 있었더냐? 끝까지 내 비위를 뒤집으니.”

악에 오른 남편은 아까보담 오히려 순하게 나왔다.

“함원이야 무슨 함원?”

“네가 그럴 줄은 참으로 몰랐구나, 후후…… 무슨 지독한 함원이 없으면 야 일부러 남편이 들으라고 그 몹쓸 시늉을 하겠느냐? 응, 무슨 함원이냐?

알아나 두자. 말을 해라.”

“흥, 이 계제에 웬 또 삼십리 강짜시오? 남이야 무슨 시늉을 어떻게 하든 또박또박이 말이나 잘 몰아요. 오호호, 아이 우스워 죽겠네.”

귀부인은 땍때굴 웃었다.

“장군님 우스워 죽겠지? 저 마부가 우리 시늉이 눈꼴이 틀린다오. 아이 가소로워라. 번번이 뒤 한 번도 옳게 못 돌아다보면서. 자아 장군님, 우리 뺨이나 한번 대어 볼까! 응.”

하고 귀부인은 정말 제 뺨을 당장의 퉁퉁 부은 듯한 뺨에 철썩하고 갖다 대었다.

당장은 계집의 태도가 점점 대담해지는 것을 멋모르고 좋아라고 헤벌린 입을 다무릴 줄 몰랐다.

“무슨 함원이냐? 말을 해라. 말을 해! 호강도 시킬 만큼 시켰겠다. 첩년으로 있는 것을 정실부인으로 승적까지 시켰겠다…….”

귀인 마부는 귀부인 말마따나 뒤 한번을 못 돌아보고 눈망울만 속절없이 뒤로 구을리며 혼자 되풀이를 하였다.

“어규 장해라. 그 알량한 정실부인!”

정실부인이란 말이 무엇보담도 그 귀인의 부아를 찌른 모양이었다.

“그 말라 비틀어진 정실부인! 이건 명색이 정실부인이랍시고 백주에 귀 밑이 새파란 년을 그 휘넓은 안방에다 집어넣고 생으로 날밤을 밝히게 하는 것. 지금 생각해도 몸서리가 치는군.”

하고 말 탄 안해는 참으로 오싹 몸을 떨고 당장에게서 일순간 눈을 떼어 말모는 남편을 노려보았다. 그 눈에는 미움에 타는 불길이 반짝 흩어졌다.

“귀밑털이 허연 것이 뭇 년을 데리고 밤새도록 뚱땅거리고, 마지막엔 이년 끼고 저년 끼고 뒹굴고……. 밤뿐인가 한낮에도 아무 년이나 끼고 들어가고. 말을 할려면 흉장이 막혀서 으호오!”

귀부인은 가쁜 듯이 숨을 모두 꾸려 쉬고 잠깐 말을 끊었다.

“새 날이 밝고 새 밤이 새어도 날마다 밤마다 그 날이 그 날, 그 밤이 그 밤. 좌평대감 부인이란 빈 이름뿐, 생판으로 홀과수를 맨들어 놓으니 이 젊은 년이 허구한 날, 어떻게 견디란 말이오? 방문 앞에 발자국 소리가 나는 듯 나는 듯하여서 몇 번 설 든 잠을 소스라쳐 깨고 울었는지 아시기나 하오? 더구나 달 밝은 밤 새벽잠 한잠 못 이루고 울화가 치받치어 뜰을 거닐라치면 어느 첩년 방에서 들려오는 그 음탕한 소리! 살이 떨렸소. 살이 실룩거리는 내 허벅지를 내 손으로 수도 없이 꼬집었소. 지금도 그 자리가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소. 그 생각을 하면 요까짓 짓거리쯤 가지고 그런 시늉을 하느냐 마느냐, 흥. 말귀도 못 알아듣는 오랑캐하고 희희낙락거리자니 오죽하오? 흥.”

지금까지 무슨 노래나 듣는 듯이 제 아름다운 포로의 나불거리는 입만 멀거니 바라보고 있던 당장은 얼굴빛이 별안간 시무룩해진다. 무딘 그의 귀에 도 그 귀부인의 말조가 아까와 달라졌음인가. 귀부인 저도 모르는 사이에 그 곱게 다스린 이마가 쌀쌀하게 일어서고, 두 뺨에 살짝 살기가 도는 것을 알아보았음인가. 아무튼 시방 재빠르게 주워 섬기는 귀부인의 말이 자기를 향해 어리광을 피고 아양을 떠는 것이 아닌 것만은 어렴풋이 깨달은 모양이었다.

귀부인은 잽싸게 당장의 눈치를 알아차리고 얼른 얼굴빛을 곤치었다.

“왜 성이 잔뜩 나시었소? 네, 네?”

하고 갸웃이 그 얼굴을 데밀다보며 간이 녹아들 웃음을 보내었다.

그러나 당장의 틀린 눈꼴은 좀처럼 바루잡히지 않았다. 이윽고 마부와 귀부인을 번갈아 보다가 손가락을 말구종을 가리키며 귀부인을 향해 노발대발 한다.

“저놈, 저놈이 무슨 말을 하지 않았느냐?”

종주먹을 대는 눈치다.

“아녜요. 아녜요. 그 마부 대감이 말이 무슨 말이에요.”

하고 귀부인은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어 보였다. 원래 와글와글하는 인마의 소음 때문에 바루 곁이라도 귀담아 듣지 않으면 누가 무슨 말을 하는지 꼭 지목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당장은 반신반의하면서도 치켜올렸던 눈꼬리를 쳐뜨렸다.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군. 이것도 내 덕인 줄 알기나 해요.”

귀부인은 당장의 눈앞에 놓인 제 얼굴을 될 수 있는 대로 화하고 어여쁘게 꾸미며 말을 나리뜨렸다.

“인제야 네 속을 알았다. 한 남편을 섬기다가 청춘에 과부가 되어도 홀로 늙는 열녀도 있거든, 고 동안에 춘정을 못 참았더람. 에이 더러운 년!”

말구종된 남편은 먼 산만 파며시 침을 뚝 따고 말 어깨 너머로 말을 올려 보았다.

“흥, 열녀, 찾을 것은 다 찾는구려. 열녀의 남편은 저마다 되는 줄 아시오? 열녀 못되는 것도 대감 탓인 줄 모르시오?”

“내가 언제 너더러 오랑캐놈에게 몸을 허락하라더냐?”

“흥, 몸을 허락한다? 말은 바루 비단결 같구려. 언제 몸을 허락하고 말 고 할 겨를이나 있습디까?”

“남이라고 절개를 지킬라고, 왜 죽기를 한사하고 항거를 못했느냐? 에이 더러운 년, 튀튀!”

귀인 마부는 땅바닥에 침을 여러 번 배앝았다.

“왜침은 애꿎은 땅바닥에 뱉으시오? 그렇게 결기가 놀라운 이가 왜 한 번 홱 돌아서서 내 낯바닥에 침을 못 배앝소? 여보 ‘죽기 한사’ 잘하는 양반, 그렇게 죽음을 겁 안 내는 절개 있는 어른이 서울도 함몰이 되기 전에 왜 임금을 내버리고 도망질을 하였소? 허둥지둥 산속으로 달아났소? 사내의 절개란 그런 거요? 오호호…… 에구 또 이 장군님이 눈치를 챌라. 등이나 또 한번 쓰다듬어 줄까……. 달아나도 옳게나 달아났으면 제법 좋게.

괜히 겁을 집어먹고, 한 군데 부접을 못하고 이리 갔다가 저리 갔다가, 말 경엔 이 호랑이 떼에게 걸려들어서 요지경이지. 어느 입으로 누구더러 죽기 한사하고 항거를 해라. 오라! 자기 목숨은 그렇게 아깝고 대견해도 남의 목숨은 파리 목숨이란 말이지. 흥.”

“이년아, 내 혼자만 살려고 그랬느냐? 네년의 목숨도 살리려고 그 애를 썼지.”

나도 이 오랑캐놈을 “얼러맞추는 게 내 혼자만 살려고 이러오? 대감 목숨까지 붙여 드리려고 이러는 게라오.”

“네년의 덕에 내가 살아. 차라리 죽어 버리지!”

“죽을 때 다 놓치고 인제 와서 새삼스럽게 죽어요? 아스세요. 조곰만 더 참으세요. 그 신라 장수 김유신(金庾信)인가 하는 작자를 만날 때까지.”

“김유신이 얘기는 왜 또 꺼내느냐!”

남편은 김유신이란 말에 가슴이 뜨끔하고 마치는 것이 있는 모양이었다.

“언제는 잠꼬대에도 김유신이 사설만 하시더니 왜 인제는 듣기가 싫으세요?”

귀부인은 비웃는 말끝을 이었다.

“우리가 오늘날 이 고생을 해도 김유신을 만나기만 하면 다시 부귀와 영화를 누릴 수가 있다고 열 번 스무 번 이렁성거리지 않으셨소. 내가 그 험한 길을 걷다가 걷다가 발이 통통히 붓고 댓 자욱을 옮겨 놓지 못할 때에도 그 원수엣놈의 신라 장수 김유신의 말을 뇌고 또 뇌시며 나를 달래지 않으셨소? 만날 도리가 없지마는 난리가 웬만큼 평정이 되고 그의 있는 곳만 알아 찾아가 볼작시면 혈마 나를 저버리지 않을 게라고…….”

귀인 말구종의 고개는 더욱 수그러졌다.

“뭐라든가? 뭐 국가의 흥망은 알 수 없는 일, 만일 신라가 망하면 그는 내게 몸을 의탁할 게고, 백제가 망하면 그는 나를 거두어 주기로 바루 사내 계집끼리의 백년가약 맺듯 단단 맹서를 해 두었다고…….”

“듣기 싫다, 듣기 싫어!”

귀인 말구종은 손을 내저으며 귀라도 막고 싶어한다.

“듣기 싫기는 왜? 그 신라 놈 염탐꾼을 사랑 골방에다가 깍듯이 위해 놓고 끼니 끼니마다 고 배대상을 해 먹이고 밤낮으로 쑥덕거리고 무슨 쪽지인 지 한 보따리씩 적어서 주어 김유신에게 보내지 않으셨소? 그렇게 공을 들이고도 오늘날 요 꼴이니 참 기가 막혀 죽을 노릇이지. 그나 그뿐인가 …….”

“아직도 뒷일을 누가 아느냐?”

귀인 말구종은 그래도 실낱 같은 희망을 잃지 않는 모양이었다.

“맙시사, 믿고 바라기는 퍽도 믿고 바라시오. 위선 잡혀올 때만 해도 김 유신이라면 이 당나라 놈들이 행여나 사정을 보아줄 줄 알고 필담으로 내가 신라 장수 김유신을 잘 아노라고 까바쳤다가, 웬걸 이 당나라 장수가 천길 만길 더 뛰고, 제 계집 탄 말을 제가 끌고 가는 해참한 욕을 보지 않소? 그래도 아직 뒷일은 모른다고, 배포가 유하기는…….”

제 남편과 이런 수작을 주고받으면서도 귀부인은 연방 당장을 호려내기에 갖은 재조를 다 부렸다. 기름 같은 제 팔로 그 절구통 같은 목덜미를 휘감기도 하고, 말씬말씬한 제 다리를 놀려 쇳덩이 같은 저 편의 다리를 자근자근 누르기도 한다.

“세상에 음흉하고 안팎 다르기는 신라 놈. 저의 일을 그만큼 봐 주었으면 당나라 장수들에게 연통이 있어야 될 것 아니오? 백제에 쳐들어가거든 아무개 아무개는 그렇지 않게 대접을 하라고 넌지시 일러 놓아야 할 것 아니오? 부려먹을 적엔 꿀을 담아 붓는 듯이 죽고 살기를 같이 하자고 맹서를 해놓고, 정말 곤경을 당할 때는 본체 만체하니…….”

“죽일 놈들!”

귀인 말구종도 매우 분해한다.

“대감도 이제야 분한 줄 아시오? 말을 하자면 그렇단 말이지. 지금 와서 남을 탓하면 무엇하오? 그야 내숭스럽기야 대감이 신라 놈 뺨치게 더 내숭스러웠지. 한 나라의 좌평으로 있으면서, 적국과 내통을 해 놓고 시치밀 뚝 떼었으니. 흥.”

“아가리를 닫치지 못하느냐!”

귀인 말구종은 소리를 제법 질렀다.

“왜 남 듣기 부끄럽소? 오, 참 나더러 절개를 지키지 않았다더라. 그래 절개 있는 양반은 남의 나라와 내통을 하는 거요? 나는 이래 뵈도 대감과 살 적에는 딴 서방질한 일은 없었소. 대감은 백제 벼슬을 살면서 신라 일을 봐 주었으니, 한 방에서 두 사내를 끼고 노는 년과 다를 게 뭐요? 오늘날 이 고생도 싸지 싸. 에이 더러워라!”

“이년! 뭣이 어쩌고 어째.”

분이 머리끝까지 치민 귀인 말구종은 앞뒤를 생각할 것 없이 성난 눈초리를 흘겨 뒤를 돌아다보았다. 그 눈길은 불행히 당장의 눈과 마주치고 말았다.

당장은 계집이 아무리 너스레를 놓아도 말하는 눈치가 수상스러워서 기연 가비연가하며, 귀인 말구종의 행동을 살피고 있는 판이었다.

당장은 불같이 성을 내었다. 등자를 구르며 산이 떠나가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이 놈! 언감생신 누구를 흘겨보느냐! 죽을 것을 살려 놓으니 은혜도 모르고.”

당장의 호통에 귀부인은 경풍을 하고 또다시 웃음꽃을 피워 보였으나 소용이 없었다. 당장은 성난 목소리로 말 탄 당병 한 명을 불렀다.

당장이 고래고래 뇌까리며 말 탄 당병을 부르자, 명령을 들은 당병이 말 머리를 홱 돌려서 이리로 오는 바람에 그 말꼬리에 매였던 백제 장정은 회술레를 돌리며 꺼들린 머리칼이 더러는 뽑히어 피가 맺히었다.

“에구 따가워. 에구 죽겠네!”

고꾸라진 다리를 일으켜 세우지도 못하고 그 장정은 비명을 쳤다.

잡혀 가는 사람들의 놀램에 흰 눈들은 이리로 몰렸다. 그 퀭하게 홉뜬 눈들은,

“또 무슨 악착한 일이 벌어지려누?”

하고 서로 묻는 듯하다.

바루 그 백제 귀부인 등뒤에는 말을 타고 가는 어린 남매가 있었다. 누이는 열 두어 살 되었고 동생은 네댓 살밖에 되지 않았다.

그 어린애는 이 광경을 보자 불이 붙는 듯이 울어 제친다.

성난 당장은 당병에게 무에라고 명령을 하다가 애 우는 소리에 당병이 얼른 말귀를 못 알아듣는다고 화를 버럭 내었다.

“저런 애를 뭣하러 데리고 왔어? 요절을 못 내 버리고.”

남매를 넘겨다보고 고함을 쳤다.

“얘, 얘, 울지 말아. 울면 큰일 나.”

누이는 어쩔 줄을 모르고 쩔쩔매며 제 손으로 우는 동생의 입을 틀어막고 부들부들 떤다. 다행히 동생은 꿀꺽꿀꺽 울음을 그친다.

당장은 잠깐 남매를 노려보다가 다시 당병을 향하여, 귀인 말구종을 손가락질하며,

“너, 네 말꼬리에 매어 단 놈하고 저 놈하고 바꾸어라. 그래 가지고 활한 바탕쯤 말을 달려갔다가 오게 해라.”

당병은 선뜩 말에서 나려섰다. 어떻게 단단히 미끄러매었던지 끌려 놓는 데도 한동안이 걸리었다. 어리둥절한 백제 장정을 발길로 툭툭 차서 그 귀인의 말고삐를 잡게 하고, 그 백제 귀인 말구종을 끌어내었다.

“에구 인제는 죽이려나 부다. 이 몹쓸 년아. 아무리 환장을 하였기로 예까지 끌고 와서 네 남편을 죽이느냐!”

그 버젓하던 은 화관은 땅바닥에 떨어지고, 머리채는 풀려 덤썩 꺼들리고, 당병의 말 궁둥이 뒤로 끌려가면서 그 귀인 말구종은 그 귀부인을 원망하였다.

“죽기는 왜 죽는담? 남이라고 말꼬리에 매달려 가도 살기만 하라고.”

그 백제 귀부인은 이런 판에도 말 한 수를 지려 들지 않았다. 아마 당장의 명령 켯속을 자세히 모르고 그저 말꼬리에나 매달고 가라는 뜻인 줄 짐작한 것이리라.

애구애구나 “!! 죽네. 다 늦게야 이런 죽음을 당할 줄이야. 이년, 창화(昌化)야, 내 죽은 다음에 네년은 잘 살 줄 아느냐?”

창화라는 것은 아마 그 백제 귀부인의 이름이리라.

“해갈을 작작 떨어요. 죽기는 왜 죽소? 고분고분히 말이나 잘 들어요.

괜스리 방정을 떨다가 정말 목숨을 잃지 말고 은화관 벗고 머리 좀 풀었다고 죽기야 하오?”

창화 부인은 끝끝내 제 남편을 비웃었다.

“이런 죽일 놈들, 무도한 오랑캐놈들! 그래 백제의 내두좌평(內頭佐平) 임자(任子)임을 몰라보고 머리를 풀어 말꼬리에 매어?”

임자라는 것은 그 귀인 말구종의 제 이름을 제가 뽐내어 부르는 양이다.

“애구 장하시오. 고만두어요. 지금 와서 흰소리를 하면 누가 알아주오?

창피만 하지.”

“애구 따가워라. 이년 창화야. 내가 죽어 귀신이 되어도 네년의 원수를 갚을 테다. 네년을 잡아갈 테다.”

“어휴 무서워라. 기겁을 하겠네. 도대체 내 탓은 왜 하시오? 자기가 뒤를 돌아다보다가 저 지경을 당하면서 내가 무슨 계관이란 말이오?”

“이년아, 네가 남의 부애를 뒤집어 놓지 않았느냐.”

이때 임자의 머리를 말꼬리에 매느라고 낑낑거리고 있던 당병은 그 입정 놀리는 게 듣기 싫다는 듯이 그 검센 주먹으로 입과 볼을 걸쳐 쥐어질렀다.

‘에쿠, 이놈이 벌써 사람을 잡는구나.“임자의 입술과 잇몸에서는 대번에 피가 뚝뚝 떨어졌다.

“에쿠 에쿠, 이놈들이 이렇게 무도하고 무지스러운 줄 알았더면 배성 일 전(一戰)에 한 번 겨뤄나 볼걸. 단 한 놈이라도 찔러 죽이고 죽을 것을. 에 이 분해라, 에이 원통해라.”

임자는 피를 버글버글 흘리며 후회하였다.

당병은 비끄러매기를 마치자 말께 올랐다. 타기가 무섭게 당병의 채찍은 소리를 내며 말을 후려갈겼다.

말은 별안간 모진 매에 꿈틀하고 왼 몸을 털더니만, 앞발을 번쩍 들고 흐르렁 소리를 치자 쏜살같이 닫기 시작하였다.

칼과 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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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사람들의 입에서는 자기들도 모르는 사이에,

“앗!”

소리가 저절로 흘러 나왔다.

그들의 눈앞에는 비호같이 닫는 말 꽁무니에 매어 달려 대굴대굴 굴러가는 백제 귀인의 참혹한 꼴이 지나갔다. 그것도 한 순간이요, 나종엔 말과 사람의 모양은 알아볼 수 없게 되고, 풀씬풀씬 연기처럼 떠오르는 티끌을 보아 말이 시방 어디만큼 달려가는 자최를 지점할 수 있을 뿐.

“저런, 저런! 저런 악착한 일이 또 어디 있을까?”

“말이 저렇게 빨리 달아나니 저이가 살 수 있을까?”

“여보, 살기는 어떻게 살겠소? 벌써 목숨이 끊어졌겠지.”

“그래도 사람의 목숨이란 모진 것. 간대로 죽기야 하겠소?”

“아무튼 가엾은 일. 한다하는 백제 재상이 당병의 말꼬리에 매달려 죽게 되다니.”

“오늘날 당해서야 재상이면 별수 있소?”

“그자가 좌평으로 거드럭거릴 제 우리네 백성의 고혈을 얼마나 긁어 갔겠소? 오늘날 저 지경을 당하는 것도 천벌이야, 천벌.”

“참 그래, 그 사람은 그래도 호강을 할 대로 했으니 오늘날 죽어도 여한 이 없겠지만, 우리네야 여태까지 고생살이, 고생 끝에 또 이 욕이니…….”

“대관절 저 사람은 무슨 일로 저 몹쓸 벌을 받는다오?”

“누가 아나? 이 오랑캐놈들이 무슨 까닭 있어 벌을 줍디까?”

“아니어, 저 뒤에 웬 말 탄 부인네가 있지 않소? 그 부인네가 바루 저 사람의 여편넨데. 저 사람이 제 여편네 탄 말을 몰고 가다가 뒤를 돌아본 탓이라오.”

“옳아, 옳아, 그 여우 같이 생긴 계집 말이지.”

“그래, 그 낯싸대기에 분을 보얗게 바른 년 말이야.”

“그년이 벌써 당장과 정분이 났다지? 세상에 죽일 년 같으니.”

묶여 가는 장정들 사이에 이런 수작이 오고 갔다. 이들은 동안이 좀 떨어 졌기 때문에 사단(事端)의 켯속을 잘 모르면서도 먼 빛으로 본 그 백제 귀 부인의 태도가 눈에 거슬리었던 것이다.

“에구! 저분이 죽겠구만. 아이 가엾어라.”

“세상에 몹쓸 년도 있지. 어쩌면 제 남편 등뒤에서 그런 해참한 짓을 한담?”

“당장(唐將)하고 노니는 꼴이란 정말 두 눈 뜨고 볼 수가 없구먼.”

“대매에 쳐 죽여도 시원치 않을 년.”

어쩌면 “제 남편을 끝끝내 골을 올려 저 지경을 맨들게 한담?”

“그분이 참기도 많이 참았지. 그 자리에 설령 죽기로서니 그 년을 가만 둔담!”

“저런 년이 재상가 부인이랍시고 곤댓짓을 하였으니, 나라가 안 망할 수가 있나?”

“글쎄 원, 이 판이 어느 판이라고 제 남편에게 원정을 한단 말이오?”

“독사보담도 모진 년. 제 남편이 끌려가는 걸 봐도 어쩌면 눈 한번을 깜짝하지 않는구료.”

“무슨 좋은 수가 났는지 생글생글 웃는 저 꼴이란!”

웃기는 웃어도 그 웃음엔 찬바람이 나더군요.

“사람 여럿 잡아먹을 년이야.”

“저 당장 놈도 멋모르고 좋아라고 입을 헤벌리고 있지만 아마 저 년의 손에 녹아나고는 말 거야.”

“그렇다면 제 남편의 원수를 갚는 폭이 되고, 그년이 바루 열녀가 되게, 맙시사.”

“여보, 열녀란 소리는 이렁성거리지도 말아요. 아까 그년이 길길이 뛰는 소리를 못 들었소?”

“사내도 적악은 하기는 했습니다그려. 젊은 년을 공방살이를 시켜 놓으니.”

“아니 여보. 백년을 홀로 늙힌들 그래 저 오랑캐놈들하고 정분이 난단 말이오?”

“저년 좀 봐요. 인제는 당장 놈의 수염을 쓰담고 있구려. 짐승만도 못한 년.”

“여보, 어디를 돌아다보오? 큰일 나게.”

“내야 어디 그년의 사냅니까? 혈마 어떨라고.”

“여보, 혈마가 사람 죽이는 줄 모르오? 아예 돌아다보지는 말아요.”

“저년 좀 봐요. 당장 놈의 어깨에 고개를 비스듬히 누이고 아주 눈을 스르르 감았구려.”

“돌아다보지 말래도 왜 이러오? 글쎄 원.”

이것은 바루 그 귀부인 앞에서 얽혀가는 부녀자들의 수작이다.

날리는 티끌조차 안 보이고 가뭇없이 사라졌던 말이 별안간 나타나자, 이리로 향하고 쏜살같이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아마 당장이 명령한 활한 바탕 거리를 벌써 돌았음이리라.

“에그, 저 말이 되돌아오는구먼.”

쇄하고 회호리바람이 이는 듯 멀리 몬지가 자욱히 떠오는 것을 재빠르게 알아본 부인네 하나가 수근거렸다.

참 그렇구만 저 몬지 “ . 좀 보아. 말도 기승스럽게도 돌아오는구먼, 맙시사.”

“몬지가 저렇게 일어날 적에는 여간 급히 달리는 게 아니겠지요?”

모듬 중에 가장 나 어린 부인네가 어림없이 물었다.

“여보, 그것도 말이라고 하오? 그야 말할 나위도 없지 않소?”

나이 좀 찬 부인이 핀잔을 주었다.

“좀 천천히 몰아오면 어떻담?”

“여보, 그 당병이 보살님이나 되는 줄 아시오? 그렇게 사정을 보아 주게.”

“그러면 그 말꼬리에 매달린 사람은 어떻게 되란 말예요?”

“어떻게 되기는, 죽으라는 게지.”

나이 찬 부인은 나이 어린 부인을 철딱서니 없다는 듯이 구박을 주었다.

“아이 끔찍스러워라!”

나이 어린 부인은 소매로 눈을 가리었다.

말은 어느 결에 그들의 앞에 들이닥치었다. 말도 기가 났던지 두 발씩 모두 꿇어 뛰며 흐르렁 소리를 벽력같이 질르는 바람에 어른 부인네들도 몸을 흠칫하고 고개를 숙이었다.

꽁무니에 매달린 사람은 사람 같지도 않았다. 말꼬리에 매달린 머리도 몬지가 켜켜이 앉아 그양 흙투성이이지 사람의 검은 머리칼로는 보이지 않았다. 어디가 얼굴인지 어디가 팔다리인지 분간조차 할 수 없고, 다만 시뻘건 핏덩어리가 질질 끌려 왔다. 만일 사람을 매달고 가는 것을 보지를 않았던들, 개를 잡아서 가죽을 홀랑 벗겨 버리고 끌고 오는 줄 알았으리라.

그 몬지를 그렇게 쏘여도 핏빛이 그대로 붉은 것을 보면 몬지가 앉는 대로 피가 스며 나와 두루마리를 하고, 지금도 왼 몸에서 피가 솟아 나오는 탓이리라.

말은 펄쩍펄쩍 널 뛰듯 하며 당장과 백제 귀부인의 말고삐를 나란히 해 가지고 있는 데로 달겨들었다. 말 탄 당병은 제 장수에게 복명을 하려는 것 이리라.

바루 그 부인 등뒤에서 말을 안 타고 있던 남매는 이 끔찍스러운 광경을 보고 누이는 고개를 외우서고, 동생은 볼이 붓는 듯이 울기 시작하였다.

아까도 질겁을 하고 우는 것을 제 누이가 가까스로 달래놓았는데, 바루 제게로나 뛰어 달겨들 듯한 말을 또 보아 놓았으니 이번에 터진 울음은 여 간해서 그치기 어려웠다.

“얘가 왜 이래? 울지 말아. 울지 말이.”

하며, 누이는 그 총명한 눈으로 힐끔힐끔 당장의 기색을 살피며, 또 아까 모양으로 제 동생의 입을 틀어막으려 하였다.

동생은 고개를 도리질을 하며 제 누이의 손아귀에서 빠져 나와,

“나 무서! 나 무서워!”

악을 쓰고, 저도 말 모양으로 펄떠 꿍질을 하며 울어 재친다.

“얘가 왜 이래? 울면 큰일, 울면 큰일 나요.”

누이는 목메인 소리로 아무리 달래었건만, 동생은 좀처럼 울음을 참으려 들지 않았다.

“집에 가. 우리 집에 가!”

“얘가 또 이러네……. 그래 그래. 집에 가자. 울지 말아요. 안 울어야 얼핏 집으로 가게 되는 거야 응.”

“아냐, 아냐, 아까부터 집에 간다고……. 거짓말야.”

하고 동생은 더욱 펄펄 뛴다.

“엄마한테 가. 아빠한테 가!”

“아버지, 어머니가…….”

하고 누이도 쏟아지는 눈물을 걷잡지 못하다가 꺽꺽 울음을 삼키고,

“제발 빕시다. 울지 말아요. 울지 말아.”

우는 동생을 휩싸 안으며, 곁눈으로 당장과 당병을 보살폈다.

당병은 당장에게 무에라고 복명을 하는 모양이었으나, 당장이 고개를 기우뚱기우뚱하는 것은 애 우는 소리에 말낱을 잘 알아듣지 못하는 눈치다.

“엄마한테 가! 엄마, 엄마!”

동생은 미친 듯이 어머니를 부르다가 숨이 꺼뿍 넘어가며 울었다.

“글쎄 울지 말아요. 글쎄 큰일 나. 큰일난대도.”

누이도 하다하다못해 짜증을 내며 근두박질이라도 할 것 같다.

당장의 성난 눈꼴은 마츰내 이 이린 남매에게로 쏘여온다.

누이는 지릅뜬 당장의 눈깔을 보고 벌써 무서운 운명이 제 동생의 뒷덜미를 짚은 줄 알아차리었다. 그 자들은 어린애를 제일 싫어하였다. 그 어머니를 잡아오면서도 젖먹이 같은 것은 마구잡이로 동댕이를 치기가 일쑤였다.

그 무지하고 검센 손길에 한번 걸리면 그 애들의 운명은 물을 것도 없다.

손이 발이 되도록 비는 어머니의 사정을 혹 보아주어 데리고 가기를 눈감아 주었다가도, 성가시게 보채기만 하면 그 자들은 어머니의 등에서 애를 무 뽑듯 쑥 뽑아 내어 길바닥에다가 메다붙이를 예사로 하였다. 어린애란 그들에게는 아무 소용도 닿지 않고, 오히려 그 짐승 같은 쾌락에 방해가 되는 탓인지 모른다. 혹은 그자들에게도 실낱같이 남아 있는 사람다운 감정이 애들의 울음으로 말미암아 고개를 쳐드는 것이 아찔한지 모른다.

어린 동생 데린 누이는 오는 도중에도 여러 번이 지긋지긋한 광경을 목도하였고, 그럴 적마다 제 동생의 신상을 염려하며, 그 콩만한 간을 오들오들오그라 붙이었던 것이다.

그 무서운 운명이 정말 제 동생 머리 위에 떨어질 줄이야!

누이는 부들부들 떨면서 왼 몸으로 우는 동생을 막았다. 아니나 다를까, 당장은 제 동생을 손가락질하며, 그 말 탄 당병에게 뭐라고 호령하였다. 그 당병은 야차(夜叉) 같은 상파대기를 이리로 향해 번쩍 쳐들고 달겨들었다.

그 핏발 선 눈은 찢어진 것 같고, 무에라고 외치는 입은 삐뚤어졌다.

“에구구!”

누이는 외마디 소리를 치고, 팔과 몸뚱이로 제 동생의 숨이 막히도록 얼싸 안았다.

시커먼 손은 과연 제 동생의 새새끼 같은 손을 부여잡았다.

“안 울어요. 얘는 안 울어요.”

동생도 겁결에 질식이 되었는지 과연 울지는 않았다.

“안 돼! 안 돼!”

당병은 누런 이빨 사이로 뇌까렸다.

“한번만 용서! 한번만 용서!”

누이는 껴안은 동생을 놓치지 않으려고 죽을 힘을 다하였다.

누이의 열정에 그 사정 없던 검은 손도 한 순간 주저하였다. 그러나 그 다음 순간에는 우는 애가 우쩍 들려 올라갔다.

“에구구! 나를 죽여요. 나를 죽여요.”

누이는 동생의 몸에 딸려 말 위에서 같이 일어서며 악을 썼다.

당병은 한 손으로는 동생을 껴들고, 한 손으로는 동생의 몸에 휘감긴 누이의 팔을 비틀고 떨어뜨리려고 한동안 애를 썼다. 아무리 연약하고 어린 소녀의 팔뚝일망정 죽기 한사하는 힘은 뜻밖에 매서웠다.

“나를 죽여요! 나를. 아버지 어머니도 네 놈들 칼끝에 돌아가시고, 내가 살기는 오직 이 동생 하나 때문. 동생을 뺏아갈 테면 나를 죽여요, 나를…….”

동생을 죽으라고 껴안은 채로 누이는 말 위에서 엎어지며 자빠지며 모지락을 썼다.

그러나 누이의 필사의 저항도 소용이 없었다. 동생은 필경 당병의 손에 번쩍 뽑혀 들리고야 말았다.

“엄마!”

어린애의 마지막 비명이 사라지기도 전에 당병은 제 손에 들린 그 애를 힘껏 매어다붙이고 말았다.

“에그머니!”

외마디 소리를 남긴 채, 그 누이도 그대로 제 말 위에서 구을러 떨어지고 말았다.

이때였다. 어디선지,

“으악!”

우렁찬 호통이 일어났다.

호랭이가 으르렁거리는 듯한 무서운 그 소리에 여럿의 귀는 찡하고 울렸다. 그러자 난데없는 백제 장정 하나가 나는 범보담도 더 빠르게 짓쳐 왔다. 그의 손에는 서리 같은 환도가 번쩍였다.

몸을 한번 솟구치듯 하더니 그 장정은 어느새 그 당장(唐將) 탄 말 위에 선뜩 올라섰다. 당장은 미처 칼집에 손도 대기 전에 그의 목은 벌써 피를 뿜으며 땅바닥에 구을렀다.

당장의 말을 뺏아 탄 그 장정은 시퍼런 한 줄기 무지개 같은 칼날을 휘두르며, 말을 번개같이 몰아가자, 놀랜 빛이 채 사라지지 아니한 당장과 당병의 목은 수없이 떨어졌다.

잡혀 가는 백제 사람들도 웬 영문인지 정신도 차리기 전에 그런 장정이 둘도 되고, 셋도 되고, 별안간 여남은이나 되어, 시방까지 호기를 부릴 대로 부리던 당병을 이리 쫓고 저리 찔렀다.

실상인즉 그런 장정이 하나가 아니요, 앞선 장정의 뒤를 이어 꼭같은 복색을 차린 장정 여럿이 달겨든 것이었다.

그들의 겉옷은 백제 농군 복색을 차렸으나, 옷자락이 펄렁거릴 때 보면 갑옷을 단단히 차린 장사들이었다. 당병이 수효로는 열 곱 스무 곱 더 되었지마는, 워낙 마음을 턱 놓고, 거드럭거리며 돌아가는 판이라 이런 변이 생기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다. 더구나 술에 곯고 색에 곯아 헐개들이 빠져 놓았으니 대항할 만한 기운도 힘도 없었다.

여러 장사들 중에도 먼저 나타난 장사의 활동이 역시 놀라웠다. 그 후리후리한 큰 키와 어마어마한 몸집은 마치 산이 움직이는 듯하였으나, 그 동작의 빠르기란 샛바람과 같았다.

옻빛 같은 구레나룻이 그 희고 넓은 두 볼에 선을 둘렀고, 한 자가 넘을 듯한 긴 수염을 거스렸는데, 그 부릅뜬 두 눈에서는 번갯불이 번쩍번쩍 흩어지며, 우렁찬 호통은 벼락이 떨어지는 듯하다.

그 늠름한 위품과 세찬 기세에 당나라 장수와 병정들은 벌써 반남아 혼이 떴다.

더구나 한 번 당장의 말을 뺏아 탄 그 장사는 그야말로 범이 나래를 얻은 셈이었다. 말발굽이 땅에 붙지도 않고 그대로 휙휙 나는 것 같다. 더구나 그 능란한 검술, 수없는 흰 뱀이 공중에 넘노는 듯하며 싸아! 하고 찬바람을 몰아온다.

아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던 당나라 병정들은 어리둥절해 하고만 있을 때가 아닌 것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그들은 죽을 판 살 판 삼십육계의 줄행랑을 놓았다.

그래도 한 번은 빼어 들었던 청룡도를 집어던지는 놈에, 전통을 떨어뜨리는 놈에, 채찍과 깃대를 내 버리는 놈에, 애지중지 가슴에 품었던 남 몰래 훔쳐 넣은 노략물 뭉치까지를 흘리는 놈에…….

벙거지도 무겁다는 듯이 벗어 던지고, 제 목이 붙어 있는가 알아보려는 것처럼 잔뜩 제목을 틀어안고 달아나는 놈도 있었다. 땅바닥에 그대로 배를 깔고 넙죽 엎드려 두 주먹을 한데 잡아 쳐들고 벌벌 떠는 것은, 아마 살려줍시사하고 애걸복걸하는 뜻이리라.

당병이 달아나기 시작하자 와 하고 사람들의 함성이 뒤미처 일어났다.

“당나라 놈은 모조리 때려 죽여라!”

높이 외치는 소리가 들리자 수 없는 돌멩이는 당병의 뒤통수를 향해 떨어 졌다.

사람의 그림자 하나 없이 텅텅 빈집인 줄 알았던 길가의 집들에서 어느 결에 모였는지 백제의 백성들이 뭉게뭉게 몰려 나왔다.

그들은 모두 손에 돌들을 들었다. 다 꼬부라진 늙은 할머니도 낑낑 하며 힘에 벅찬 돌멩이를 주워 들고 힘껏 집어 던지다가 그 자리에 쓰러지는 이 도 있었다.

원한과 분노에 타고 맺힌 돌팔매! 당병의 뒷꼭지에 비오듯 쏟아졌다. 몇 놈은 대가리를 깨고, 몇 놈은 다릴 얻어맞아 절름절름절기는 절었으나, 그 자들의 도망질치는 발길은 재발라서, 벌써 돌팔매가 닿지 않을 만큼 저 멀리 아득히 사라지고 말았다.

별안간에 나타난 이 백제 남녀노소는 혹은 아버지 어머니 혹은 안해와 남편을 잃고 산 기슭과 숲 속에서 밤을 밝히며, 당병의 눈에 안띄도록 천신 만고를 하면서 잡혀가는 제 가족의 뒤를 밟아 예까지 따라온 것이었다.

뿔뿔이 제각기 제 몸을 숨겨 가지고 이 행렬이 지나가는 것을 엿보고 치를 떨고 있다가 마침 장사패가, 나타나서 당나라 장수와 병졸들을 휘몰고 쫓는 것을 보고 용기를 얻어 내달은 것이었다.

당병을 얼마큼 쫓고 나서 다시 돌쳐 달려온 장사의 일행은 묶어 놓은 백제 장정과 부인네의 결박을 끌러 놓기에 한동안 애를 썼다.

몰려든 가족들은 채 매듭을 끌르지 못한 남편의 가슴에 몸을 던지고 몸부림쳐 우는 이도 있었다. 여러 사람 보는 앞이건만 체모를 돌아볼 겨를도 없이 제 안해를 껴안으며 엉엉 목을 놓고 통곡하는 사내도 있었다. 몇 번 제 아들의 이름을 부르고 머리를 쓰다듬다가 그대로 그 자리에 기절하는 늙은 어머니도 있었다.

한동안 낭자한 곡성이 일대의 공기를 슬프게 뒤흔들었다.

아슬아슬한 고비에 서로 만나는 기쁨보담도, 지극한 설움이 먼저 복받쳐 나온 것이다.

먼저 나타났던 그 키 큰 장사는 묶여 가는 사람들을 끌러 놓자, 아까 제 동생을 빼앗기고 말께서 떨어진 소녀 앞으로 달겨왔다.

부리나케 말께서 나린 그 장사는 땅바닥에 자빠져 있는 그 소녀를 안아 일으켰다.

앙다문 입술은 터져서 피 흐른 자최가 아직 붉으나마 백지장같이 해쓱한 얼굴엔 핏기 하나 없었다.

그 장사는 가냘픈 사지를 늘어뜨린 소녀를 고이 안아제 무릎 위에 올려 놓고 코 위에다가 손을 대어 보았다. 숨기는 있는 둥 만 둥하다.

“월 영아, 월영아!”

그 장사는 자상스럽게 불렀다. 월영(月英)이라 함은 그 소녀의 이름이리라.

“월 영아, 월영아! 정신을 차려라.”

가늘게 떠는 은행 껍질 같은 눈시울을 데미다보며 그 장사는 또 한 번 부르짖었다. 소녀는 그 가느스름한 몸을 잠깐 트는 듯하더니 그 아늘아늘한 피 묻은 입술을 달싹달싹한다. 목이 마른 모양이다.

“물, 물!”

장사는 덮어놓고 외쳤다.

제 할 일을 마치고, 그 장사 곁에 모여 섰던 장사 가운데 제일 키 작은 장사가 구으는 듯 달겨갔다.

얼마 안 되어 어디서 구하였는지 그 키 작은 장사는 호로병에 물 한 병을 들고 왔다.

안고 있던 장사가 소녀의 입을 벌리고, 키 작은 장사가 물을 몇 방울 떨구었다.

꼴깍하는 소리가 두어 번 일어나더니 그 소녀는 샛별 같은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 이상한 듯이. 저를 안고 있는 장사와 저를 에워싼 장사들을 두리번두리번 번갈아 보았다.

“월 영아, 월영아! 나를 모르느냐?”

깨어난 것이 신통한 듯이 안고 있던 장사는 제 얼굴을 그 소녀에게 대다시피 하고 잼처 물었다. 소녀는 눈을 빤히 떠서 쳐다보다가,

“아이 아저씨! 아저씨가 어째 여길 오셨어요?”

하고 제법 정신이 돌아나는 모양이었다. 그러자 고개를 가까스로 쳐들어 제 곁을 살펴보더니,

“내 동생 귀복(貴福)이는 어디 있어요?”

하고 급하게 묻는다.

“귀복이는…….”

안고 있던 장사는 차마 대답을 못한다.

“참, 그 몹쓸 당병 놈이 귀복이를 매다 붙였는데…… 귀복이가 어떻게 되었어요?”

하고는 금방 까무라쳤던 사람 같지도 않게 몸을 발딱 일으켰다.

“저기 있군!”

한 마디 뇔 겨를도 없이 월영이란 소녀는 비칠비칠 제 동생의 곁으로 종종걸음을 쳤다.

“귀복아! 귀복아!”

땅바닥에 해삼처럼 늘어진 동생의 머리를 틀어 안으며 또다시 쓰러진다.

벌써 숨이 떨어진 지 오랜 조고마한 육체도 제 누이의 느껴 우는 소리를 들었는지, 고사리 같은 손이 바둥바둥 떤다.

“아빠 엄마한테 어서 가자고 그렇게 졸르더니만.”

월영은 흐느껴 울었다.

“너는 아버지 어머니를 인제는 뵈옵겠구나. 너는…… 너는…….”

장사들도 한동안은 고개를 돌리고 숨소리를 죽이었다.

월영을 안아 일으킨 장사가 마츰네 월영에게로 왔다.

“월영아, 일어나거라. 암만 울면 죽은 동생이 살아오느냐? 어서 가자.

여기 이러고 한만히 있을 수 있느냐?”

타이르는 장사의 목도 눈물에 젖었다.

월영은 죽은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고 또 쓰다듬으며, 차마 손을 떼지 못하다가 별안간 울음을 뚝 그치고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 애띠디 애띤 눈썹 가장자리에도 매운 기운이 돌았다.

귀복아귀복아 “, . 네 원수는 내가 갚아 주마. 내 몸이 가루가 되어도 당나라 놈의 원수를 갚아 주마.”

이 매섭고 눈물겨운 넋두리가 끝나기 전에 별안간 여럿의 떠드는 소리가 와글와글 일어났다.

“저년을 죽여라!”

“제 남편을 죽인 저 년을 죽여라!”

굵은 남성(男聲)에 섞이어 새된 여성(女聲)도 흘러왔다.

“저런 년을 살려두면 우리 백제 부녀들의 수치.”

“우리 낯을 깎인 더러운 년.”

“죽여라 죽여!”

“우리 저년을 돌무더기 속에 장사를 지내 줍시다.”

“옳소! 옳소!”

잉잉 하는 돌팔매가 날아들기 시작하였다.

죽은 동생과 산 누이가 차마 서로 못 떼치는 자리에도 돌멩이는 사정 없이 떨어졌다.

이 남매 사별(死別)의 애닯은 비극이 벌어진 곳에서 멀지 않게 아까 당장과 노닥이던 그 백제 귀부인이 입때 말을 탄 채로 호올로 오뚝 서 있었던 것이다. 돌멩이가 자기를 향해 비 오듯 날아오건만 그 귀부인은 눈 한번 깜짝이지 않고, 고개 한 번 외우서는 일 없이 말 위에 덩그렇게 올라앉은 채 나려서려고도 하지 않았다.

“죽일 테면 죽여라. 내가 그렇게 죽기를 서러워하는 줄 아느냐.”

하는 태도였다.

“저년 좀 봐라. 눈도 깜빡을 않는구나.”

“어이, 모진 년.”

“괴악한 년.”

“방자스러운 년.”

“어디 이년 견디어 봐라.”

돌멩이는 다시금 우박 쏟아지듯 하였으나, 사람이 피하지를 않으니 돌멩이 자신이 피하는 양. 그 숱한 돌멩이가 하나도 정통으로 그 귀부인을 맞히는 것은 없었다.

돌멩이가 제대로 들어가 맞지 않는 데 군중의 분노는 극도로 타올랐다.

“자아, 우리가 멀리서 돌질을 할 게 아니라, 저년을 잡아 나꿔 칩시다."

깨어진 머릿골을 한 손으로 잔뜩 움켜쥐고도, 기를 쓰고 돌팔매질을 하던 장정 하나가 핏발 선 눈을 부라리며 이런 제의를 하였다.

아까 장사들이 나타나서 당장과 당병을 한바탕 해낼 적에도, 그 귀부인은 저 있는 그 자리에서 몸을 꼼짝도 아니하였고, 다른 군중들은 비록 자유스럽지 못한 몸이나마 신들이 나서 얼마쯤 당병의 뒤를 쫓아 나갔기 때문에 그 귀부인과 군중의 사이는 상당히 동안이 뜨게 되었던 것이다.

“좋소. 그 말 좋소. 잡아 나꿔채도 그년이 말께서 나려오지를 않나 어디 봅시다.”

“옳소! 옳소!”

“그 당나라 장수 놈에게 대었던 뺨을 도려냅시다.”

“그놈과 노닥거리던 혓바닥을 잘라 놓읍시다.”

“그 방글방글 음탕한 시늉을 하던 눈알맹이를 뽑아 놓읍시다.”

“그놈을 껴안던 팔죽지를 부러뜨려 놓아라.!”

“그 곤댓짓하던 대강이를 바수어 놓아라.”

“그까짓 년 손대기도 더럽지. 발로 지근지근 밟아 줍시다.”

“그 더러운 간과 창자를 밟아 줍시다.”

“자아!”

“와아!”

군중들은 그 귀부인을 향해 아귀성을 치며 달겨들었다.

죽은 동생을 부둥켜안고 차마 놓지 못하는 소녀를 달래고 있던 그 키 큰 장사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군중의 앞을 막아섰다.

“여러분, 이게 무슨 짓들이오?”

그 웅장한 음성은 큰 쇠북을 두들기듯 처렁처렁 울려나왔다.

자기네를 구해낸 은인이 앞을 가루 막는 데는 흥분된 군중도움씰하고 걸음을 멈추었다.

그중에 가장 앞장을 섰던 장정 하나가 그 뻘겋게 상기된 얼굴을 번쩍 쳐들었으나, 그 말씨는 자못 공손하였다.

“장군님은 목도를 하지 않으셔서 잘 모르실 겝니다. 저년이…… 저 말을 타고 있는 저년이 그 무도한 당나라 장수 놈하고 정분이 나서 제 남편을 말 꼬리에 매달게 하여 죽이고 말았습니다. 그래 저런 년을 어떻게 살려둡니까? 저걸 보십시오. 저 피투성이가 지금도 말꼬리에 매달려 질질 끌리는 저 꼴을 보십시오!”

당병의 시체가 여기저기 가루누운 사이에, 주인을 잃고 갈 바를 모르는 말이 스스로 놀라 뛰는 대로 꼬리에서 크다란 핏덩어리가 꿈틀꿈틀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아무리 “임자의 최후라고 하지만은 너무 끔찍스럽군.”

그 장사도 말소리를 떨어뜨리었다. 장정은 그 장사의 말속을 잘 몰라듣고 제 말만 하였다.

“저희들도 그 참혹한 꼴을 보다가 못해 분심이 일어났습니다. 아무리 이런 판이라도 저런 악독한 년을 살려야 줄 수 있겠습니까?”

“암 죽여야 됩니다.”

“죽여야 되고 말고.”

“저런 년은 사지를 찢어 놓아도 시원치가 않습니다.”

한 풀이 꺾이었던 군중은 그 장사도 그 참혹한 꼴을 마음이 움직이는 듯한 기색임을 알아차리자 새 기운을 얻어 제각기 지껄였다.

그 장사의 얼굴에는 비창한 빛이 떠올랐다.

“여러분, 안 되오, 안 될 말이오…….”

하고 장사가 무슨 말을 다시 계속하려고 할 제, 지금까지 돌로 새긴 것처럼 얼굴의 근육 하나 움직이지 않던 그 귀부인이 문득 입을 열었다.

“죽어도 아깝지 않은 이 목숨. 이 몸이 죽어서 여러분의 분이 풀린다면 열 번 죽음도 마다할 내가 아니오.”

“죽기를 마다할 내가 아니오.”

울근불근하는 군중을 앞에 놓고 이 얼마나 대담하고 위험한 말인가!

“저 말뽄을 좀 들어봐요.”

“지독한 년!”

“안차고 다라진 년!”

“그년의 조동아리를 훑어 놓아라.”

“자아! 제 소원대로 죽여 줍시다.”

“죽여라! 죽여라!”

군중의 분노는 한층 더 부채질 되듯 다시금 그 귀부인에게로 덤벼들었다.

그러나 그 귀부인은 제 말마따나 죽음도 두리지 않는 듯, 당돌하게 군중을 나려다보고 눈썹 하나 까딱을 하지 않는다. 약간 비뚤게 열린 그 입귀에는 쌀쌀한 웃음조차 흘렀다.

흥분된 군중은 더욱 골이 올랐다. 두엇은 앞을 막아 선 그 장사의 뒤를 돌아 그 귀부인의 등자 밟은 발목을 잡아당기었다.

그 장사는 한 걸음 성큼 귀부인 곁으로 다가서자, 그 귀부인에게 덤벼든 몇 사람을 한 손으로 잡아 뿌리치며,

“이게 무슨 거조(擧措)란 말이오?”

소리를 벽력같이 질렀다.

조금 아까까지도 “ 이 부인과 같이 잡혀가던 당신들이 아니오? 다 같은 비참한 운명에 헤매던 당신들이 아니오?”

장사의 말소리는 점점 침통한 가락을 띠어온다.

“그 흉악한 당나라 병정들에게 다같이 못 당할 욕을 당하던 당신들이 아니오? 그 당병의 채찍에서 말꼬리에서 벗어나자마자 곧 제 나라 사람을 해치려고 드니…….”

장사는 기가 막힌다는 듯이 잠깐 말을 끊었다.

“저년이 우리 백제 사람이 아니고 다른 나라 계집, 즉 당나라 년 같으면 우리가 이렇게 분해 않을 겁니다. 제야 무슨 짓을 하든지 우리가 상관을 하 지 않을 겁니다. 저런 년이 있어서 우리 백제 부녀의 얼굴에 똥칠을 하게 되었으니, 어찌 밉지가 않습니까! 분하지가 않습니까?”

이마에 칼자국 흉터가 있는 장정 하나가 앞을 나서며 그 장사의 말을 되받았다.

“당신 말이 그럴 듯도 하지만, 저 부인네도 다같이 불쌍한 백제 사람이 아니오? 비록 말을 타서 손발은 묶이지 않았더라도 역시 잡혀 가는 사람이 아니오? 당장과 무슨 짓을 어떻게 하였다 하더라도 어디 그게 본심에서야 나왔을 게요? 당신네들도 꾸벅꾸벅 당병을 쫓아가는 것이 어디 당신네들이 가고 싶어 가는 거요? 그 무지한 매에 못 이겨서, 죽으랴 죽을 수 없어서 따라가는 것 아니겠소? 그런데 하필 이 부인네만 미워할 게 뭐란 말이오?”

“어쩌면 그 흉측한 당장놈과 부동(符同)이 되어서 제 남편을 죽게 해요?”

열기 있는 부인네 하나가 그 새까만 눈썹을 꼿꼿이 세우며 이를 득 갈아 붙이었다.

“그야 이 부인이 죽이고 싶어 죽였겠소? 당장(唐將)놈이 괜히 골을 내어 죽인 것 아니오? 설령 이 부인이 죽이라 한들 그 놈들이 죽이고 싶지 않아 보시오. 죽일 리가 만무할 것 아니오? 더구나…….”

하고 그 장사는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더구나 그자로 말하면 죽어 마땅한 위인이오. 그자가 내두 좌평으로 있 으면서 신라 놈들과 짜고, 이 나라를 망쳐 버린 놈이오. 우리 나라의 산천 지리와 군사 형편을 일일이 적어서 신라 장수 김유신에게 보낸 놈이오. 그런 자는 만 번 죽여도 오히려 죄가 남을 놈이오. 천도가 무심하지 않아 당병의 손을 빌려 그자를 죽이게 한 것이오.”

군중들의 흥분은 이 장사의 설명에 점점 식어갔다.

“그런 나쁜 짓을 한 놈이라면 죽어도 싸지.”

그러면 그렇지 무슨 “. 까닭이라도 있기에 저 부인도 제 남편을 개 꾸짖듯 하였지.”

“옳아. 그렇다면 저 부인을 우리가 미워할 까닭이 도모지 없지 않소?”

여럿은 손바닥을 뒤집는 듯이 도리어 그 귀부인에게 동정을 하기 시작하였다.

장사는 한층 소리를 가다듬어,

“여러분, 다같이 불쌍한 백제 사람이란 걸 잊지 마시오. 여러분에게 이 부인을 죽일 힘과 기운이 있거든, 그 조고만한 힘이나마 한데 어울러서 다 같은 적인 당나라와 신라를 때려 부숩시다.”

하고 부르짖었다.

“옳소! 옳소!”

“그 말씀이 옳소.”

군중들은 그 귀부인 앞에서 한 걸음 두 걸음 물러 나섰다.

자기의 말에 군중들이 숙지는 걸 보자, 그 장사는 나는 듯이 다시 그 소녀의 곁으로 왔다.

“월영아, 월영아! 어서 일어나거라. 네 동생은 내 손으로 묻어 주마.”

하고 그 장사는 월영의 품에서 죽은 아이를 빼내어 번쩍 안고 길가의 단양 한 밭둑을 찾아갔다. 칼끝으로 땅을 헤적거린 다음에 맨손으로 흙을 후벼내어, 울부짖는 누이가 미처 오기도 전에 어린 영을 곱다랗게 땅 속에 누이고 말았다.

“자 여러분, 아무리 갈길이 바쁜 우리지만 이 송장을 이렇게 길바닥에 내버려 오작의 밥을 맨들 수야 있소? 이왕 그네들의 목숨이 끊어진 이상 그들에 대한 우리의 원한도 사라진 것, 저희들도 만리타국에 왔다가 나라 일에 죽은 셈이니 어찌 한 줌 흙을 아낄 수 있소? 자아 이리들 오셔서 칼끝 창끝으로나마 땅에 파묻어 줍시다.”

그 장사는 제 동료들과 여러 사람에게 타이르듯 명령하였다.

여러 장정은 당병의 버리고 간 병장기를 닥치는 대로 줏어 들고 그 장사를 따라 땅을 팠다.

여럿의 운력으로 순식간에 깊이 한 길이 넘고, 넓이 두어 간통되는 큰 구덩이를 팠다.

스무 개도 넘는 당나라 장수와 병정의 송장을 엇매어다가 한자리에 묻었다.

“여러분, 수고스럽지마는 한구덩이만 더 파십시다. 저기 저 말꼬리에 매달려 죽은 좌평 임자도 묻어 줍시다. 그 소위를 생각하면 적장과 정병보담 몇 백 갑절 밉지마는 저도 그 몹쓸 죽음을 하였으니 송장까지야 아니 거두어 줄 수 있소?”

쓸쓸한 가을볕 아래 갑자기 이루어진 크고 작은 세 무덤.

대강 대강 흙 덮기를 마치자, 그 장사는 발버둥치며 우는 소녀를 두리쳐 안아 말 위에 올려 태우고 자기도 그 말에 올라탔다.

여러 장사들도 당병이 버리고 간 말들을 얻어 탔다.

“자아 여러분, 인제는 우리 할 일이 대강 끝이 났으니 어서들 돌아들 가십시오.”

이 장사는 작별 인사는, 말은 비록 평범하였으나 자못 비창하였다.

여러 사람들은 차마 떠나기 어려운 듯이 머뭇머뭇 발길을 옮기지 않는다.

“일시를 지체할 때가 아닙니다. 앞에 달아난 당병들이 제 영에 돌아가면 이 사연을 알릴 터이니 오래지 않아 당나라나 신라의 병정들이 들이닥칠지 모릅니다. 각기 몸들을 조심하시고 어서들 피신을 하셔야 됩니다.”

병정들이 또 들이닥친다는 말에 몇몇은 겁을 집어먹고 달아날 거조(擧措)를 차리었으나, 군중들은 제 은인의 얼굴을 다시 한 번 더 보고, 그 든든하고 자상한 말 한 마디라도 더 들어보려는 것처럼, 수풀같이 고요한 채 움직이려는 기색조차 보이지 않는다.

“자아, 우리는 갑시다. 부디 몸조심들…….”

그 장사의 마지막 인사는 분명히 눈물에 젖은 것 같았다.

“흑! 흑!”

군중 가운데는 느끼는 울음소리가 일어났다.

여태까지 그린 듯이 말을 타고 있던 그 귀부인이 말을 채쳐 그 장사의 앞으로 왔다.

“장군님, 저희들을 버리고 가시면 어떡하십니까? 의지가지 없는 저희를.

저희들이 지금 돌아들 간다 한들 어디로 돌아갑니까?”

그 귀부인의 말에 여럿의 귀는 번쩍 뜨이는 듯하였다. 조곰 아까까지도 원수같이 죽이려 들던 감정도 씻은 듯이 없어진 양.

“그 부인의 말씀이 옳소, 옳아.”

“저희들을 데려가 주십시오.”

“장군님 가시는 데로 저희들도 따라가겠습니다.”

그 장사는 매우 난처한 듯이 한동안 말이 없다가,

“여러분을 버리고 가는 우리의 발길도 차마 돌아서지를 않습니다마는, 우리 역시 지접할 곳이 없는 사람들…… 여러분이 따라오신대도 고생만 하실 것…….”

하고 말을 맺지 못한다.

장군님이 아니었더라면 “저희들은 벌써 죽은 목숨, 장군님을 모시고 가다가 설령 죽는다 하온들 무슨 여한이 있겠습니까?”

그 귀부인은 아까의 돌올하던 태도와는 딴판으로 그 장사의 앞에서는 고 개조차 옳게 들지를 못하였다.

칼날같이 싸늘하고 매서운 줄로만 알았던 그 귀부인이 이대도록 풋솜처럼 부드럽고 공순해지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할 노릇이었다.

더구나 그 말씨는 얼마나 아름답고 씩씩한가.

군중은 첫째로 그 귀부인의 불면 꺼질 듯한 가련한 태도에 호감을 가지게 되었고, 둘째로 자기네의 흉중을 꿰뚫어 보는 듯이 대변해 주는 것이 고마웠다. 부인네들 사이에서는 감탄의 속살거림이 일어났다.

“저렇게 얌전한 이를 우리는 몰라보았구려.”

“그 장군님이 말리지를 않았던들 저런 아까운 이를 까닭 없이 죽일 뻔을 하였지. 아이 아슬아슬도 해라.”

“어쩌문 말을 그렇게 잘해요? 그야말짝으로 청산유수 같구료.”

군중은 침을 삼키며 그 장사의 입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그 장사는 무엇을 골똘히 생각하는 듯하며, 그 광채 도는 눈을 떴다 감았다 하였다. 자기에게 매어 달리는 이 불쌍한 백성들을 데리고 가자기도 어 렵고, 그렇다고 떼치고 가기는 더욱 어려운 모양이었다.

“장군님이 살려 놓으신 저희들의 목숨, 장군님을 위해 바치는 것도 저희들의 소원입니다.”

그 귀부인은 머리를 다소곳한 채 또 한 번 그 장사를 졸르고 나서 군중을 돌아보며,

“여러분들, 그렇지 않습니까?”

하고 동의를 구하였다.

“다 이를 말씀이오?”

“옳소, 옳소.”

“죽는 것도 소원이오.”

“우리들의 목숨은 장군님께 올립니다.”

감격에 겨운 군중은 한꺼번에 외쳤다.

이윽고 그 장사는 무거운 입을 열었다.

“여러분, 여러분의 뜨거운 정은 뼈에 사모칩니다. 그러나 칼도 없고 활도 없는 우리, 갑옷도 없는 우리, 군량조차 없는 우리가 아닙니까? 이런 우 리로서 어떻게 당나라 신라 두 나라의 많은 군사와 좋은 기구를 당해 낼 수가 있겠습니까 여러분이 ? 굳이 우리를 따르신다면 당장 부모 처자를 한자리에 만나시어 그 기쁨도 푸시기 전에 또다시 비참한 운명과 싸워야 되실 것 아닙니까? 이야말로 섶을 지고 불로 뛰어드는 것. 나로서는 차마 여러분께 같이 가시자고 장담을 못해 드리겠습니다.”

말끝을 맺기 전에 그 장사의 두 눈에서 눈물이 글썽글썽 괴이었다.

장사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것을 보자 군중은 감격의 회호리바람에 싸이고 말았다.

“장군님의 말씀이라면 불에라도 뛰어들고 물에도 뛰어들겠습니다.”

“칼과 활이 없으니 어떡하오?”

“맨주먹으로라도 싸우겠습니다.”

“돌팔매로라도 그 적국 놈들을 쳐 죽이겠습니다.”

“겨울은 닥쳐오는데 갑옷도 없으니…….”

“얼어 죽어도 좋습니다.”

“군량이 없으니…….”

“굶어 죽어도 좋습니다.”

장사는 눈물을 거두었다.

“여러분이 정 그러시다면 우리를 따라 오시오. 우리네에게 아무 다른 것 이 없다 해도, 불 같은 충성만 있다면야 천하에 두려울 것이 무엇이오? 그 까짓 당나라 신라 연합군이래야 오합지졸, 우리의 힘과 뜻과 죽기를 겁내지 않는 용기를 뭉친 다음에야 도탄 중에 든 우리 불쌍한 백제 백성들을 구해 낼 수 있을 줄 아오.”

힘차게 부르짖는 그 장사의 두 눈에는 불꽃이 주렁주렁 흩어지는 듯하였다.

새 기운을 얻은 군중의 함성은 천지를 뒤흔들었다.

“자아, 여러분, 인제 시각을 지체할 수 없소. 지금 우리가 가던 길은 버리고 오던 길을 되짚어서 빨리 갑시다.”

장사들은 말머리를 돌리고, 군중은 겅정겅정 뛰고 구르며 그 뒤를 따랐다.

유독 그 귀부인만 말머리를 돌리지 않고,

“저는 이리로 가오. 부디 여러분, 안녕히들…….”

도거리로 인사를 하고 여러 사람과 반대 방향으로 충충 말을 놓아 간다.

“부인은 어디로 가시오?”

그 장사도 돌아다보며 놀라 부르짖었다.

“저는, 저는 제 갈 길이 따로 있어요.”

“이 난 군중에 단신 홑몸으로 어디를 가신단 말이오?”

“홑몸은 더 가벼운 것. 저는 제 할 일이 따로 있어요.”

뜻깊은 말 한 마디를 남기자 매정스럽게 말을 채쳐 가려다가 말고 다시 고개를 돌려 그 장사를 바라보며,

“여쭙기는 황송하오나 존함을 알아지이다.”

“이 사람은 흑치상지(黑齒常之)…….”

그 장사가 선뜻 대답을 하고 다시 붙들 겨를도 없이, 그 귀부인은 말을 달려 흐르는 별보담도 더 빠르게 사라졌다.

총각과 동행 내외

편집

고량부리에서 맡있산(任存山[임존산])으로 가는 노정은 아홉 봉재(峰嶺 [봉령])를 휘어넘고 평지길로 한 십 리쯤 걷다가 또다시 산길로 접어들어, 굉이산 고개 하나만 타고 나려서면 탄탄대로로 가까운 삼십 리 길이다.

굉이산에도 가을은 깊었다.

밤나무 참나무의 누른 잎사귀는 거의 다 떨어졌고, 푸른 소나무 사이사이에 멋대로 자란 이름 모를 풀들이 쥐면 바싹바싹할 듯한 메마른 담갈색 진 몸을 꼿꼿이 세웠는데, 어떤 놈들은 천연 갈대 모양으로 솜같은 허연꽃을 삐죽이 빼어문 것도 쓸쓸하였다.

여느 때에도 행인의 발자최가 드문 산길, 가뜩이나 요새 같은 난리 통에 지나가는 나그네가 많을 리 없었다. 잔디 위에 꼬불꼬불 실낱 같이 난 길도 희미해져서 알아볼 둥 말 등하게 되었다. 이따금 청승맞은 바람이 낙엽을 구을리며 뿌시럭뿌시럭 지나갈 뿐.

밤은 술시나 겨웠다.

보름 지난 이지러진 달이 슬며시 떠올랐다.

그 으릿한 흰 빛을 띠고 웬 젊은 남녀가 가만가만히 발소리를 죽이며 산길을 더듬어 올라온다.

남자는 거무트레한 얼굴과 떡 벌어진 어깨판이 기운 꼴이나 세어 보이나, 인중(人中)이 좀 긴 듯한 입모습 언저리는 애티가 나고, 뚱그런 눈은 자못 양순해 보이었다.

여자는 둥글넓적한 얼굴에 살결이 희고, 쌍꺼풀 진 눈매에 귀염성이 뚝뚝 듣는 듯하다.

남자는 괴나리 보따리를 해 짊어지고 감발을 하였고, 여자도 짚세기를 신은 꼴이 행장은 자못 초초하였으나 입성은 그 행장에 걸맞지가 않았다. 아랫두리는 흙이 묻고, 몬지가 앉고, 어룽이 지고, 말이 못 되었으나마 웃막이는 비록 구김살은 졌을망정, 달빛에도 지르르 윤이 나는 것을 보면 명주나 비단 일시 분명하였다.

여자는 남자의 걸음을 따라오느라고 진둥한둥 종종걸음을 치면서도 째기 발을 디디고, 이따금씩 뒤를 돌아보고 또 돌아보았다.

거진 산 중허리쯤 다다랐을 제 두리번두리번 사면을 살피고 있던 여자는 남자에게 소리를 낮추어 물었다.

“이게 무슨 소리예요?”

남자는 발길을 멈추고 힐끗 여자를 돌아다보며,

“무슨 소리?”

“어디선지 무슨 소리가 자꾸 나지 않아요?”

둘은 나란히 서서 한동안 귀를 기울였다.

바람도 자고 적적한 주위는 죽은 듯이 종용하다. 벌레 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소리가 무슨 소리요? 얼들은 게지.”

“아까는 분명히 나던데. 수럭수럭, 버썩버썩 하는 소리가…….”

하고 여자는 무안한 듯이 고개를 수그렸다.

또한동안 걸었다.

“저것 봐요. 여보, 저 소리……. 여보.”

여자는 참다못해 또 걸음을 멈추고 앞에 가는 남자를 불렀다.

“소리가 무슨 소리여?”

하고 남자가 다시금 발길을 멈추자,

“아이 무서!”

하고 여자는 예닐곱 걸음쯤 떨어진 남자에게로 뛰어갔다.

과연 소리는 났다.

수럭수럭, 버썩버썩!

여자가 남자 옆에 와서 서자 또 이상한 소리는 사라졌다.

남자는 여자의 뒤를 살펴보다가 웃어대었다.

“어허 여보! 소리는 임자한테서 나는구려.”

“네?”

하고 여자도 제 뒤를 돌아보았다.

제 뒤에 기다란 피륙이 꼬리처럼 달려서 늘어진 것이 보이었다.

여자의 얼굴은 대번에 새빨개졌다. 그는 질팡갈팡 오느라고 제 허리띠가 끌러진 것을 몰랐던 것이다.

덴겁을 하고 잡아 올려 보매, 넓은 허리띠 끄트머리가 땅에 구을면서 낙엽을 둘둘 말아 제법 불룩하게 싸 놓았다. 이것이 낙엽 위를 걷는 대로 끌려오고, 또 발부리에 밟히는 낙엽 소리가 한데 어우러져서 그 이상한 소리를 낸 것이었다.

“어허허, 이거야말로 제 발소리에 제가 놀라는 격이구료. 어허허.”

남자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으며 너털웃음을 내어놓았다.

주고받는 말씨로 보아 그 젊은 남녀는 애송이 부부간임에 틀림이 없었다.

애송이 안해는 귀밑까지 빨갛게 물을 들이며, 옷 매무새를 곤치고 섰다가 남편이 마음놓고 웃는 것을 보고 질색을 하였다.

“어디라고 그렇게 웃으세요?”

“왜 웃으면 어떤가 머? 어허허.”

남편은 한번 터뜨린 웃음을 좀처럼 걷잡지 못하였다.

“또 그 흉악한 당병 놈들이 웃는 소리를 듣고 쫓아오면 어떡해요?”

“어디 그 당병 놈들이 쫓아오는 소리를 듣고 놀랬어야 말이지. 우리 발 자최를 우리가 듣고 놀랬으니 우습지 않아, 어허허.”

“그렇지만두…….”

“그렇지만두는 또 머야?”

“혹시나 오면 어떻게 해요!”

안해는 아직 놀랜 증이 가라앉지 않아, 그 조그마한 가슴을 팔딱거리었다.

“이 밤에 그 놈들이 오기는 어디로 온단 말이오? 나도 인제 병정이 되면 그 놈들을 마구 때려잡을 텐데……. 어디 이 놈들 왔담봐라.”

남편은 당병이 제 눈앞에 나온 것같이 팔을 불끈 걷고, 한바탕 해 내는 시늉을 하다가 또다시 웃어 제친다.

“해낼 때 해내시더라도 제발 웃지 마세요.”

“제발 좀 웃지 마라. 으흐흐”

남편은 짓궂게 더 소리를 높여 웃는다.

“웃지 마시래도 또 저러시네, 원 내.”

안해는 남편을 말리면서도 그 쾌활한 웃음소리에 적이 마음이 놓인 듯 저도 해죽이 웃는다.

“여보, 좀 앉구료. 다리나 쉬어 갑시다.”

앉은 남편은 아직도 서 있는 안해를 쳐다보았다. 달빛 안은 안해의 얼굴은 더 어여뻐 보이었다.

“언제 앉고 있어요? 어서 가셔야지.”

“갈 때 가더래도 좀 쉬어 갑시다그려.”

“한 시가 바쁘시다고 내동 밤을 도와 가신다더니.”

“가기는 빨리 가야겠지만 다리가 아프니 어떡하오?”

“아무리 다리가 아파도 갈 데를 가서 마음놓고 쉬어야 될 것 아녜요?”

“여보, 임자 다리는 무쇠 다리요? 그래 다리가 아프지를 않단 말이오?

어서 앉아요.”

입을 방싯방싯 여는 대로 달빛이 앵두 같은 입술 속으로 넘나들어, 하얀 이빨이 살금살금 숨바꼭질을 하는 양에 홀린 듯이 쳐다보며, 남편은 제법 늦장을 부리었다.

안해는 마지못해 남편의 곁에 쪼그리고 앉았다.

남편은 안해의 어깨를 가볍게 밀치며,

“여보, 펄썩 좀 주저앉구려. 그렇게 쪼그리고 앉아서야 어디 다리를 쉬는 거요? 곡경을 치르는 게지.”

하고 저는 두 다리를 어린애 쭉쭉이 하듯 쭈욱 뻗었다.

“그래, 임자는 정말 다리가 아프지 않소?”

“아프기야 왜 아프지를 않아요?”

안해도 다리를 펴며, 조그만한 주먹으로 제 다리를 토닥토닥 쳐 보였다.

“좀 아프겠소.”

하고 남편은 안해의 다리를 슬슬 만져 주다가,

“발도 많이 부르텄지?”

하고 묻는다.

“그러먼요.”

“그럼 발을 좀 벗어 봐요.”

“왜 발은 벗으래요?”

“얼마나 부르텄나 어디 보게.”

“난 싫어요.”

“싫기는 왜?”

“벌써 몇 날 며칠은 걸은걸.”

“그러니 얼마나 부르텄나 보자는 것 아니오?”

“그 발꼴이 오죽해요?”

안해는 상그레 웃었다.

“오죽하면 부부간에 머 어떤가?”

“그래두…….”

“그래두는 뭐람?”

남편은 부득부득 안해의 발목을 잡아당기어 짚신을 벗겨 보고 또다시 웃는다.

이 짚신이 이렇게 “ 헐거워졌으니 끄는 대로 소리가 좀 났겠소? 허.”

아까 안해가 놀란 또 한 가지 원인을 발견하고, 남편은 또 웃다가,

“발이 왜 그렇게 작았더람? 몇 번을 졸라매었는데 또 그 모양이니.”

“남정네 신발이 어떻게 여편네한테 맞기를 바래요?”

“신까지 안 맞는 걸 신었으니 발이 좀 아팠을까? 어서 버선을 벗구려.”

그래도 안해가 망실망실하고 있을 제, 남편은 제 손으로 흙과 먼지가 켜켜이 앉아서 몬지투성이가 된 안해의 버선을 벗겨내었다.

옥 같은 발이 드러났다.

남편은 안해의 발바닥을 만져보고 놀래었다.

“이거 대단하구려. 사뭇 꽈리같이 부르튼 것이 여러 군델세.”

안해는 수줍은 듯이 발을 끌어들였다.

“괜찮아요. 괜찮아요.”

“괜찮다니, 이거 큰일 났네. 그 발을 가지고 어떻게 길을 걸어?”

남편은 한걱정을 한다.

“발 좀 부르튼 거야 어때요? 그 당병 놈들한테 안 붙들린 것만 다행이지요.”

“원, 흉악한 놈들, 하필 남의 첫날밤에 달겨든담?”

“참 아슬아슬도 했지요. 하마터면…….”

안해는 지긋지긋한 추억에 진절머리를 쳤다.

“그 애를 쓰며 막 큰 낭자를 끌르고 난 판에…….”

남편도 어이없이 웃었다.

난리가 났다 하여 왼 동리가 피란을 간다고 발칵 뒤집히었지만, 내일 모레로 날짜까지 받은 혼인을 물릴 수도 없었다. 당병이 쳐들어 온다기로서니 혈마 이 두메에야 그렇게 속히 닥치랴 하고 술렁술렁하면서도 두 집은 그대로 쳐져 있었던 것이다. 다행히 혼인날 낮이 겨워도 아무 일이 없었다. 사 람이 오고, 행례를 하고 저녁이 되었다. 텅 빈 동네라 손님도 없고, 일가친척들도 모인 이가 적어서 애저녁부터 불야불야 신방을 차리었다. 내일이라도 피란길을 떠나야겠으니 하룻밤이라도 왼 밤을 지내도록 일찌감치 자게 한 것이었다.

병풍을 철옹성같이 둘러싼 신방에 벌써 원앙금침이 펼쳐 있고, 유복한 부인네를 따라 들어오는 새색시의 긴 치맛자락에 화촉이 벌룽벌룽 춤을 출 때도 채 유시말(酉時末)이 되지 못하였다.

나이 찬 신랑의 마음은 바쁘다.

눈을 나리깔고 그린 듯이 앉은 신부에게 보아 주지도 않는 웃음을 벙글벙글 두어 번 보내자마자, 신랑의 떨리는 손은 어느새 다소곳한 큰 낭자로 올라갔다. 어디를 어떻게 끌러야 좋을지 몰라 한동안 애를 쓰는 판에 봉잠이 빠지자, 낭자는 저절로 떨어졌다. 쏟아지는 듯이 나려진 긴 머리를 다시 틀어 올리느라고 고 비끼었을 제, 별안간 개들이 동네가 떠나가도록 사납게 짖었다. 주인은 도망을 갔지만 개들은 남아 있었던 것이다.

“당병이 온다!”

누구인지 외쳤다.

혼인집은 벅적거렸다. 장모가 신방 문을 박차고 뛰어 들어와서 어리둥절 하며 일어선 신랑 신부에게 숨찬 소리로 부르짖었다.

“어서 달아나거라, 어서 달아나거라!”

신부가 머뭇머뭇하니까 장모는 그 앙탈하는 손을 사위 손아귀에 넣어 주었다.

“어서 네 남편과 달아나거라. 그 놈들은 새색시만 보면 날로 잡아먹는단다. 어서 어서! 냉큼냉큼!

작별 인사 여부도 없이 신랑 신부는 등채를 밀리어 뒷문으로 쫓겨 나왔다.

우둥우둥, 뚜벅뚜벅, 산란한 사람 자최와 말 발굽소리를 등뒤에 들으면서 갓 만난 내외는 천방지축으로 달아났던 것이다.

“여보, 그 판이 어느 판이라고 얼핏 따라나서지를 않고 얼무적얼무적했단 말이오?”

남편은 안해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놀리었다.

“부끄러우니 그랬지요.”

안해는 지금도 얼굴을 붉힌다.

“그래도 집 문밖을 나서니 곧잘 따라오던걸.”

“그럼 어떡해요?”

“아마 그때가 활 서너 바탕쯤은 되었지?”

“어느 때가 말씀예요?”

“왜 한창 달아나다가 숨이 턱에 닿아서 잠깐 내가 걸음을 멈추고, 임자를 돌아볼 때 말이오.”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요?”

“그 때 말이야. 내가 자세히 보니까 임자가 내 손을 꼭 쥐고 있더구려.

임자의 손에서 땀이 촉촉이 나서 내 손에도 땀이 배지를 않았겠소.”

안해는 고개를 푹 숙인다.

“그랬소? 안 그랬소? 그래도 내 말이 거짓말이오?”

“…….”

“왜 대답을 못하오? 고개를 좀 들구료.”

남편은 안해의 턱에다가 제 손을 괴이어 숙인 얼굴을 일으켜 세웠다.

안해는 발그스름한 뺨을 주체를 못하며 첫날밤 모양으로 눈을 나리깔았다.

남편은 다짜고짜로 안해를 얼싸안고야 말았다.

그 따끈따끈하게 부끄럼에 타는 뺨에 제 뺨을 비비대며 입술을 찾았다.

안해는 도래도래 고개를 돌리며,

“누가 보면 어떡해요?”

하고 앙탈을 한다.

“이 밤중에, 이 산골에서 보기는 누가 본단 말이오?”

“그래도 길가가 아녜요?”

“길가면 어떤가?”

남편은 끝끝내 입을 맞추고야 말았다.

“킥킥!”

별안간 바루 자기들 등뒤에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으슥한 산골에 난데없는 웃음소리! 정열에 겨웠던 애송이 부부는 질겁을 하고 떨어지며, 호동그래진 눈으로 소리나는 곳을 돌아보았다.

거기는 늙은 소나무가 어둑하게 들어선 데다가, 더구나 달 그늘이 져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게, 그게 무슨 소리예요?”

안해는 눈에 띄도록 가슴을 발랑거리며 허전허전하는 소리를 떨었다.

“또 아까 모양으로 헛들은 것 아니오?”

남편도 무슨 소리를 들은 법하였으나, 한창 안해를 시달리느라고 안해처럼 똑똑히 듣지는 못한 모양이다.

“아녜요. 이건 분명 사람의 웃는 소리예요.”

“이 산중에 웬 사람이 있어 웃는단 말이오?”

“내 귀에는 정녕코 들렸는데…….”

“무슨 새 소리인지 모르지.”

“아닌 밤중에 무슨 새가 울어요?”

“왜 밤이라고 새가 안 우나? 올빼미도 울고, 부엉이도 울고…….”

“아녜요, 새 소리는 아녜요.”

“그럼, 무슨 소릴까? 도깨비가 나왔나 봐.”

“아이 무서워라. 그런 말씀을 왜 하세요? 혹시 당병이 어디 으슥한 곳에 숨어 있는 게나 아닐까요?”

“그놈들이야 무엇이 겁이 나서 숨어 있겠소?”

“그럼, 정말 당신 말마따나 도깨빈가 봐. 우리 어서 가요. 자 어서 일어 나셔요.”

안해는 몸을 도사리고 일어나려고 할 제,

“어허헛.”

하는 너털웃음소리가 바루 뒤꼭지 위에서 떨어졌다.

안해는 벼락이나 맞은 듯이 그 자리에 푹 고꾸라지고 말았다.

“어허허, 사람 우스워 죽겠네.”

자배기가 깨어지는 듯한 턱 갈라진 목소리가 뒤미처 일어났다.

남편도 등골에 찬 소름을 끼치면서 소리나는 곳을 쳐다보았다.

자기네가 앉은 뒷산 꼭대기 소나무 틈바구니에서 허여스름한 무엇이 뻐꿈 히 넘겨다보는 것 같아서였다.

“두 분이 재미있게 노시는데 이것 안되었구려. 그러나 너무 놀라지를 마시겨오. 허허.”

“게 누구시오?”

남편은 용기를 내어 물었다.

“누구라 한들 당신들이 아실 거요? 하지만 난 당신들이 겁내는 당병도 아니요, 또 도깨비도 아닌즉 안심을 하시겨오.”

그러면 부부간에 주고 받은 수작조차 말끔히 다 들은 모양이다.

“무엇 하는 사람이오?”

남편은 이 별안간 나타난 방해자에게 화증을 더럭 내었다.

“뭣 하는 사람? 나도 길 가는 사람이오.”

“어디로 가는 사람이오?”

“압다, 이건 힐난이 과하구료. 나도 당신네들 가는 데로 가는가 보오.”

“우리 가는 데가 어디란 말이오?”

“시방 당신이 병정이 되려 간다고 하지 안 했소? 그렇다면 가는 곳이야 뻔하지 않소?”

“그러면 맡있산(任存山[ 임존산])으로 간다는 말이오?”

남편은 불쾌하여 채쳐 물었다.

“그렇다는 밖에.”

그 방해자도 퉁명스럽게 대꾸를 하다가,

“여보, 길동무!”

하고 척 돌라붙으며,

“내외가 동행을 하시는데 염치는 없소마는 나는 심심해서 죽을 지경이오. 우리 같이 동행을 좀 합시다. 당신네가 이리로 올라오실 테요? 내가 그리로 나려갈까?”

하고 묻더니 부부가 대답도 하기 전에 제 혼잣말로,

“에라, 길을 좀 밑지면 어떤가. 내가 나려가지.”

중얼중얼하자마자 쿵하는 소리가 났다. 아마 나무 위에 나 올라앉았다가 뛰어나려오는 것이리라.

엉큼성큼 가까이 오는 것을 보니 떠꺼머리 총각이었다.

“놀라셨지요?”

싱글벙글 남편에게보다 안해에게 더 많이, 제법 깍듯이 인사를 하고, 앉기는 남편 곁에 와서 앉는다.

시꺼먼 얼굴에 코허리는 죽고, 콧구녕은 벌렁 위로 쳐들렸으나, 싱글벙글 웃는 넙죽한 입은 작난꾸러기로 보이었다.

이 난데없이 억지 길동무가 헤치고 달겨들자, 안해는 두어 자 간격이나 남편의 곁을 더 떨어져 앉았으나 정작 당자를 보니 우스웠으면 우스웠지, 아까 소리만 들을 때처럼 무섭지는 아니하였다.

“뉘 댁이시오?”

그 총각은 들어닥드미로 남편에게 인사를 청하였다.

“내 이름은 거북이라 하오.”

“이 사람은 쾌돌이라 하오.”

총각은 아주 의젓하게 제 이름을 대고 나서 안해를 건너다보며,

“저 아주먼네께도 인사를 드려야 할 텐데…….”

하고 납청장(納淸場)이 된 콧잔등을 찡긋하였다.

안해는 그 하는 양이 우스워서 고개를 돌리며 웃었다.

“말이 말 같지를 않소? 아주먼네는 왜 웃기만 하시는 거요.”

하고 총각은 얼굴빛을 바루고 시비를 걸다가,

“자, 인사 절이나 받으시오.”

하며, 앉은 채 코가 땅에 닿도록 절한 주기를 하고,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이 사람은 쾌돌이라고 합니다.”

안해는 쩔쩔매며 맞절을 하고 나서,

“저는 참꽃이라고 불러요.”

하고 웃으며, 실룩거리는 얼굴을 제 무릎팍 위에 비비대었다.

“네 그러셔요? 참꽃, 참꽃, 이름도 좋기도 해라. 허허.”

한 번 껄껄 웃고는 총각은 다시 남편을 향하였다.

“여보, 거북님. 그래 살기는 어디 사오?”

거북은 자청 길동무가 얼레발치는 것을 무슨 큰 구경거리나 생긴 듯이 바라보고 있다가,

“새촌 산다오.”

“어규 새촌, 새촌이라면 예까지도 오륙십리는 더 되는데, 혼잣몸도 아니고 아주먼네를 데리시고 꽤 먼 길을 걸었구려.”

거북은 고개만 끄덕여 보였다.

“그런데 여보. 내 한 가지 물어볼 말이 있소. 어떻게는 아시지 마오마는…….”

총각은 말을 이었다.

“병정이 되려 갈작시면 홑몸으로 갈 일이지 아주먼네는 왜 데리고 가는 거요? 고 동안이라도 서로 그리워 못 견딜 지경이면은 애당초에 병정 될 생각을 말든지…….”

말을 잠깐 끊고 내외의 기색을 살피었다. 너무 제 말이 과하지나 안 했나 염려를 하는 모양이었으나, 동행들이 노여워하는 빛이 없는 것을 알아보자 또 철철거리었다.

“넨장 나 같은 놈이야 무 밑둥 같은 놈. 혈혈단신 홑몸이라 마음이 싱숭생숭해서 병정 노릇이나 하려 간다지만, 당신 같은 이야 꽃 같은 댁네가 있겠다, 뭣이 답답해서 병정 노릇을 하려 간단 말이오? 후우.”

하고 제 신세를 생각하는지 그 벌룸한 콧구녕으로 긴 한숨을 뿜어내었다.

“원 저런 말 좀 보았나. 당나라 신라 놈 등살에 살 데가 어디 있단 말이오? 아무래도 그놈들을 몰살을 시켜 버리든지 쫓아 버리든지 해야 될 것 아니오? 안해를 두고 가자니 맡길 데도 없고, 그놈들한테 붙들리기만 하면 못 당할 욕이나 당하고 잡아먹힐 것 아니오?”

거북은 뿌옇게 변명을 하였다.

“그러면 새촌 같은 두메에도 그놈들이 쳐들어왔단 말이오?”

“여보, 쳐들어오다 뿐이오? 우리는 첫날밤에 그놈들에게 쫓기어 이 길을 나섰다오.”

“저런 원수엣놈들! 하필 남의 첫날밤에 쳐들어갔더람. 그래 당신네들 행색을 보고 나도 필유곡절인 줄은 알았소마는 어디 자세한 얘기를 좀 들려 주구려.”

거북은 그때 광경을 대강 이 얘기하였다.

그러면 그 좋은 화촉동방은 “ 못 치뤘겠구려. 육시를 할 놈들! 그놈들을 모조리 때려잡아야…….”

하고 팔을 부르걷으며 분해하다가,

“그래, 그 뒤엔 어떻게 되었단 말이오?”

궁금한 듯이 채쳐 물었다.

“그래, 산으로 산으로 죽을 판 살 판 기어 올라가니까 거기 떠들렁바위라는 큰 바위가 있는데, 그 밑은 아주 어웅하게 굴이 되어서 사람 여남은 숨어 있기에 맞춤이었소. 우리 둘도 거기 사흘이나 숨어 있었다오.”

“그럼 꼬박이 굶었겠구려.”

“밥이야 못 먹었지만, 장모님이 허둥지둥 싸 주신 떡 조각으로 연명을 하였소.”

“그러면 신방은 원앙금침도 못 깔고 돌 위에서 치뤘겠구려. 히히.”

총각은 시큰둥하게 웃었다.

“그래, 사흘을 숨어 있다가 인제는 그놈들이 다 갔으려니 하고 집에를 나려가 보니, 두 집 식구들은 어디로 다 피란을 갔는지 어리친 개아미 한 마리 없구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내외 동행으로 이 길을 떠났구려.”

“그렇다오. 그런데 총각은 어디서 오는 길이오?”

“나는 붉은 놀에서 오는 길이오.”

“붉은 놀이라면 바루 이 고량부리 고을의 붉은 동네 아니오? 그래 총각 도 당병에게 쫓겨 나왔소?”

“당병에게 쫓겨 나왔으면 좋게. 나는 내 주인에게 손도(損徒)를 맞았다 오.”

“주인에게 손도를 맞다니?”

“하룻밤을 늘어지게 자고 나서 어슬렁어슬렁 마당을 쓸려 나가니까, 주인집 식구란 밤새에 피란을 가고 하나도 없구려. 나 하나만 개새끼 모양으로 내버려두고…….”

“그까짓 주인이야 달아났으면 대순가? 그런데 여보 총각. 고량부리에 산다면 지금 맡있산에 계시는 흑치 장군님이 어떻게 당병들을 해내시는지 소식을 들어 자세히 알겠구려.”

거북은 새 화제를 꺼내었다.

“암, 그 장군님 성식(聲息)이야 잘 아다 뿐이오?”

처량한 제 신세 타령을 하다가 한 풀이 꺾이었던 쾌돌은, 흑치 장군이란 말에 새 정신이 번쩍 나는 것처럼 주저앉으며 큰 연설이나 할 듯한 너스레를 차리었다.

그래 그 장군님이 두 “, 겨드랑이에 비늘이 돋혀서 훨훨 날아다녔다니 정말이오?”

거북은 어디에서 주워 들은 허황한 소문을 따져 보았다.

“여보, 비늘이 다 뭐요? 비늘을 가지고서야 어떻게 난단 말이오? 바루 나래가 돋혔다오.”

“나래가?”

거북과 참꽃은 일시에 경탄의 소리를 쳤다.

“그럼, 나래가 나도 여간 큰 나래가 아니라오. 아마 독수리 나래보담도 여러 곱 더 크던걸.”

쾌돌은 제 눈으로 흑치 장군 겨드랑이 밑을 보고 온 듯이 말을 하였다.

“그렇게 큰 나래가 났으면 옷을 어떻게 입어요?”

참꽃이 못 믿겠다는 듯이 한 마디 티를 넣었다.

“나래가 있다고 왜 옷을 못 입는단 말이오?”

쾌돌은 펄쩍 뛰었다.

“나래 위에 옷을 입으면 나래가 옷에 걸려서 어떻게 펼 수가 있어야지요.”

“글쎄, 그러나 머, 그 나래는, 그 나래가…….”

쾌돌은 허풍을 때리다가 참꽃의 영리한 반박을 만나 한동안 말을 떠듬거리다가,

“그 나래는 보통 나래가 아니라…….”

기를 쓰고 변명을 해 보려고 하였으나, 제 귀에도 조리가 잘 닿지 않는 것을 깨닫고 다시 말을 곤치었다.

“그 장군님 입으신 옷이 어디 보통 우리네가 입는 옷 같은 줄 아시오?

갑옷이란 대개 겨드랑이 밑은 터진 게거든.”

하고 내 말이 어떠냐 하는 듯이 동행 내외를 둘러보았다.

“바루 그렇다면 몰라도…….”

“그러면 참말로 날으셨겠구려.”

부부는 적이 의심을 푸는 눈치였다.

쾌돌은 더욱 신이 나서,

“날으셨다 뿐이오? 그 날 당병을 휘몰아 때려잡으실 적만 해도 반공중에 둥둥 떠서 ‘이놈들 게 있거라!’ 소리를 벽력같이 지르시고, 당장과 당병 놈들이 얼떨떨해서 정신을 못 차리는 판에 나지막하게 날아 나려오셔서 서리 같은 환도를 휘둘러 놓으니…….”

“그놈들이 혼띔을 했겠구려.”

거북이도 기운을 우쩍 내었다.

“여보, 혼띔만 했겠소? 그 칼끝 지나는 곳마다 목숨이 달아나는데 혼띔만 하고 말았겠소? 그리고 나래도 나래려니와, 그 검술이 더 굉장벅쩍하였단 말이오. 칼 한 자루가 천 개도 되고, 만 개도 되어 가지고 왼 천지가 도모지 칼빛뿐이란 말이오. 당병 놈들이 땅 속으로나 기어 들어간다면 모르지만 그렇지 않고서야 무슨 재조로 이 칼을 피해 낸단 말이오? 동으로 달아나면, 동에도 칼이 번쩍, 서로 달아나면 서에도 칼이 번쩍, 뭐 그놈들 모가 지 팔다리가 된내기에 나뭇잎 떨어지듯 우수수 떨어지고, 피가 흘러 강이 되었다는 밖에.”

쾌돌은 입에 침이 말라서 잠깐 말을 끊었다.

“그래 그래, 당장과 당병이 몇 명이나 죽었더란 말이오?”

거북은 넋 잃은 사람 모양으로 한창 주워대는 총각의 입을 바라보다가 물어보았다.

“수도 없지, 수도 없어. 그놈들 뒈진 걸 누가 세어 보았겠소마는 아마 여러 천 명이 거꾸러졌다오.”

“단 한 사람 손에 여러 천명!”

거북은 혀를 내어 둘렀다.

“그러니 하늘이 내신 장수란 말이오.”

“딴은 그래. 우리 백제 사람을 구하시려고 하느님이 나려보내신 거야.”

“우리도 그 장군님 밑에만 가 있으면 그까짓 당나라 놈, 신라 놈이야 몇 만 명이 몰려와도 조금도 겁낼 것이 없단 말이거든.”

쾌돌은 제가 바루 그 장사나 되는 듯이 의기충천이다.

“나도 그놈들이야 몇 백 명 맨주먹으로라도 때려잡을 테요.”

하고 거북이도 팔을 어루만지며 용을 썼다.

“첫날밤에 신방도 못 치르고 쫓겨난 원수를 갚아보겠단 말이구려. 허 허!”

“갚다 뿐이오? 그놈들을 회를 쳐 먹어도 시원하지가 않을 텐데.”

“여보, 당신도 그놈들 뽄을 뜬단 말이오? 사람을 어떻게 회를 쳐 먹는단 말이오?”

“그래, 그놈들은 사람을 날로 잡아먹는다니 참말이오?”

“참말이다 뿐이오? 우선 그 장군님 나타나신 그 날만 해도…….”

“참, 그 날은 그 장군님이 어떻게 나타나셨더람?”

하고 거북은 그 장군 얘기를 더 듣고 싶어하였다.

그 날 그 장군님이 “어떻게 해서 나타났느냐고? 흥, 그 내력을 말하자면 정말 기가 막히지.”

하고 쾌돌은 동행 부부를 바라보며 눈을 끔벅끔벅한다. 이 굉장한 얘기를 어디서부터 허두를 내어야 옳을지 몰라 잠깐 생각을 모으는 모양이었다.

동행의 눈과 귀는 총각의 입술 위에 몰리었다.

뻗어 버리고 앉았던 쾌돌은 날아나갈 듯이 몸을 꼿꼿이 세우고 입을 열었다.

“그놈들이, 그 흉측하고 무도한 당병 놈들이 노략질한 물건을 바리바리 실리고, 우리 백제 사람을 남정네 여인네 할 것 없이 쇠줄 밧줄로 불알 까 려는 돼지 새끼처럼 묶어 가지고…….”

“돼지 새끼처럼! 저런 죽일 놈들이…….”

거북은 이를 갈았다.

“여보, 그양 묶기만 하면 좋게, 어떤 사람은 말꼬리에 매달아 가지고, 그 양 달고 치면 머리가 박살이 나고, 왼 몸 가죽이 벗겨졌다오.”

“천하에 무도한 놈들!”

거북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나 그뿐인 줄 아시오? 가다가 심심하거나 배때기가 출출하면 사람을 살려놓은 채 가죽을 벗겨내고 숭덩숭덩 썰어서 화톳불에 구어 먹었다는 밖에.”

“에구머니나!”

참꽃은 기겁을 하였다.

“그놈들이 사람을 날로 잡아먹는다더니 그러면 그게 참말이구려.”

거북도 눈을 호동그랗게 떴다.

“참말이고 말구. 더더구나 젊은 아주먼네나 어린애를 보면 사죽을 못 쓰고 게 눈 감추듯 한대.”

“그래 그놈들도 인형을 뒤집어 쓴 사람일까!”

“그러기에 오랑캐라 하지 않소? 오랑캐야 어디 사람이오? 말하자면 털만 없단뿐이지, 짐승이거든.”

“개나 소도 많은데, 그놈들이 왜 하필 사람을 잡아먹어요?”

참꽃은 몸을 오들오들 떨면서 물었다.

“그게 별민게지요.”

“더구나 불쌍한 아주먼네와 어린애를…….”

“그놈들의 구미에는 아주먼네와 어린애의 살이 더 보드랍고 연한 탓이겠지요.”

쾌돌은 참꽃을 건너다보며 코끝을 실룩실룩하며, 아주머니도 참 용하게 “ 모면을 하셨소. 만일 그놈들 눈에 띄기만 했던 날이면 저렇게 어여쁘고 고운 살이…….”

“왜 자꾸만 그런 무서운 얘기만 하셔요? 난 인제 듣기 싫어요.”

참꽃은 샐쭉하며 손으로 제 귀를 막았다.

“사람 잡아먹는다는 논란은 고만두고 어서 얘기나 끝을 내구려.”

거북이도 증을 내었다.

“이런 젠장맞을…… 기껏 남에게 얘기를 하라고 졸라 놓고, 정작 얘기를 내놓으니 듣기 싫다. 고만두지, 고만둬! 누가 얘기를 못 해서 걸신이 들린 줄 아나베.”

쾌돌은 한창 신이 났다가 실룩해지며 게두덜거리었다.

“여보, 하던 얘기를 끝을 내어야 될 것 아니오?”

그래도 거북은 얘기의 뒤끝이 궁금한 눈치였다.

“그 장군님이 나타나신 곡절을 말하자면 자연 사람 잡아먹는 얘기가 들어야 되는데, 그건 듣기 싫다면 무슨 얘기를 하란 말이오?”

쾌돌은 아주 퉁명을 부리었다.

“자아, 그러지 말고 어서 하구려. 그래, 장군님이 뛰어드신 내력을…….”

“이걸 또 얘기를 해.”

하고 쾌돌은 싱글 웃고 나서,

“그날도 그놈들이 아주먼네 하나를 벗겨먹고, 또 식성이 당기었던지 네댓 살 된 어린애 하나를 날로 아싹아 싹 베어 먹으려는 판에 그 장군님이 뛰어 드셨다오.”

“그럼, 그 장군님이 어디 숨어 계셔서 그 참혹한 광경을 보신 게로구려.”

“그 장군님이 그놈들이 무슨 짓을 하나 하시고, 슬슬 뒤를 따라오셨더라 오. 그놈들이 그 장군님이 엿보시는 줄은 꿈에도 모르고 그 어린애를 잡아 먹으려다가 그 장군님이 짓쳐 드셨단 말이오.”

“그러면 그 아이는 어떻게 됐어요?”

“당장 한 놈이 막 그 아이를 아싹 한 입 베어 물자고 입을 벌렸다가 그 놈의 모가지가 그 아이보담 먼저 떨어졌다니까.”

“그러면 그 아이는 살았겠군요?”

참꽃은 그 불쌍한 아이의 운명이 종시 마음에 켕기었다.

“그 아이 말이오? 그 아이 말이지…….”

쾌돌은 어물어물하였다. 실상인즉 그도 그 아이가 어떻게 되었단 소문은 잘 듣지 못한 까닭에 무에라고 거짓말을 꾸며댈까 궁리를 한 것이다.

“그 장군님이 한 손으로 그 당장을 쳐 죽이시고, 또 한 손으로는 선뜩 그 아이를 받아 자기 품에 넣으시고, 그놈들을 휘몰아 쫓아 버렸다오.” 하고 내 말이 어떠냐 하는 듯이 눈을 크게 떠 보이었다.

“아이, 고마워라!”

참꽃은 꽉 채었던 숨을 ‘호!’ 내어쉬었다.

“묶여가던 백제 사람도 다 살아났겠구려.”

“그야 여부가 있소? 그 장군님이 묶은 것을 일일이 끌러 주어 부모 처자 가 안고, 뒹굴고, 울고불고…….”

거북이도 제 일같이 기뻐하였다.

“꼭 죽은 줄 알았던 목숨이 살아났으니 그 사람들이야 좀 좋았겠소? 그래 그 장군님이 돌아서시려니까 그 사람들이 부모를 따르는 자식들같이 장군님께 매어달려서 맡있산으로 갔다오. 당신들도 그리로 간다는 걸 보면, 그 소식쯤은 들어 알겠구려.”

“대강이야 들었지마는 어디 이렇게 자세한 이야기야 들었소? 아무튼 그 장군님한테만 가면 부모님의 슬하보담 더 든든할 줄 믿었을 뿐이지.”

“여보, 지금도 젖을 자실 테요? 부모님은 해서 무엇 한단 말이오? 그 장군님을 모시고, 당나라 신라를 때려부수고 우리 백제 망친 원수를 갚아야…….”

쾌돌은 아주 점잖게 뽐내었다.

“다 이를 말이겠소? 든든하고 미쁘기가 부모를 찾아가는 것 같단 말이지.”

거북이도 되받았다.

“그런데 걱정은 저 아주머니야. 그 사내들 틈바구니에 가서 어떻게 지내 시나?”

쾌돌은 제법 의젓하게 걱정을 한다.

“왜요? 남정네가 많으시면 그 빨래랑 서름질이랑 누가 해요?”

“그러면 아주머니가 그걸 다 하실 작정이오?”

“하구 말고요. 내 힘 자라는 데까지야 왜 몸을 사려요? 남정네같이 칼과 활을 못 잡을망정…….”

아까 무서움만 탈 때와는 딴판으로 참꽃의 결심도 씩씩하였다.

밤은 깊었다.

세 동행의 옷자락에 이슬이 축축히 나리었다.

“어서 가요.”

늦장을 부리고 있는 남편과 동행에게 참꽃이 먼저 길을 재촉하였다. 그는 그렇게 든든한 자리에 한시바삐 들어가고 싶었던 것이다. 공연히 중로에서 바람소리에도 놀랠 필요가 조금도 없었던 것이다.

“밤새기 전에 가기는 가야 돼.”

거북이도 안해를 따라 몸을 털고 일어났다.

“혹시나 낱마리 당병들이 쏘다닐지도 모르니 밤을 도와 가야지.”

하고 쾌돌이도 선선히 몸을 일으킨다.

굉이산 마루터기를 넘어 한길로 나려서서 달내 줄기를 건네니, 벌써 밤을 허여스름하게 새기 시작하였다.

이 새벽의 행인은 자기네들뿐인 줄 알았더니, 앞에 가는 사람의 그림자가 푸떡푸떡 보이었다.

처음에는 당병이나 아닌가 하고 길옆 숲 속으로 몸을 숨기고 가다가, 멀리 들리는 말낱으로 보아 백제 사람인 줄 알고야 비로소 마음을 놓았다.

범근 내가 으렷이 보일 때, 그 강가에는 사람이 장꾼처럼 둘러선 것이 보였다.

이 내만 건너서면 맡있산이 바루 코앞이다.

강가에 다다르니 사람은 백절 친 것 같다. 자기네만 몰래몰래 맡있산으로 찾아가는 줄 알았더니, 자기네와 같은 뜻과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 엄청나게도 많은 것을 보고 일변으로 든든하고 일변으로 놀라웠다.

스물도 넘는 나룻배가 사람을 건네기에 눈코를 못 뜬다. 배마다 손들을 가뜩 가뜩 넘치도록 태웠다.

사공들의 배 젓는 소리도 우렁차다.

강을 건너고 보니 사람은 더욱 많아 발길이 서로 밟힐 지경이었다.

맡있산 밑 맡있성은 성문을 활짝 열어놓은 것이 보이었다.

그 성문으로 꾸역꾸역 들어가는 사람이 장사진처럼 꼬리를 맞물고 잇대였다.

“백제 왼 나라 백성들이 이리로만 다 모이는가베.”

앞뒤 사람들에게 몸이 끼어 꼼짝을 못 하면서도 쾌돌은 거북이 부부를 돌아다보며 유쾌한 듯이 웃었다.

총각과 동행 내외는 사람의 물결에 휩쓸리어 마츰내 맡있성 안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메아리

편집

맡있성 고을은 맡있산 줄기인 새머리산을 비스듬히 등지고, 동북으로 범근 내 하류를 건너 가차산이 어긋나게 두 나래를 벌린 듯, 에둘린 데다가 남으 로 남으로 뻗어 나려간 밝달산의 길고 장찬 준령이 깎아지른 듯이 서남방의 장벽을 이루었다.

후면과 좌우 양면이 험준한 산악으로 어마어마한 병풍을 펼쳐 놓은 듯 빈틈 없이 둘러막히었고, 전면만 비록 터졌다 하나, 평원광야가 허허벌판으로 멋없이 열린 것이 아니요, 큰 내가 지로 세로 여러 갈래를 누비질한 것 같다. 이 누벼 놓은 듯한 냇줄기마다 크고 작은 산들이 또다시 우긋하게 기어 들어와서 서로 부둥켜안을 듯이 가루누웠다.

막기에 쉽고 치기에 어려운 요험지대(要險地帶), 이른바 지키는 사람이 한 사람만 있어도 쳐들어오는 사람 만 사람을 능히 당해낼 수 있다 함은 이런 지형을 두고 이름이리라.

밝달산, 맡있산, 새머리산, 세 산 줄기가 서로 어우러진 펑퍼짐한 산기슭에 돌로 쌓아 올린 맡있성이 아늑하게 튼튼하게 들어앉았다.

지금 이 성 안팎에는 큰 공사가 벌어졌다.

지세도 이렇듯 험준하거니와 당나라 신라 연합군이 침입한 지점과는 반대 방향인 서북쪽 변방에 치우친, 말하자면 두메에 가까운 곳인 탓에 사나운 당병의 파괴의 손도 이 성까지는 미치지 못하였었다. 그러나 오랫동안 다스리지 않고 그대로 내버려 둔 까닭으로 천연의 요지에 인공을 다한 이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좋은 성도 풍마우세(風磨雨洗)에 성돌이 빠져 달아나 군데군데 무너지고 허술해진 데가 많았었다.

천으로 헤아릴 역군들이 이 성의 외벽에 개미떼처럼 둘러붙어서 수장(修粧)에 눈코를 못 뜬다. 큼직큼직한 바위를 이엿사이엿사 메어 오고, 메와 겨누와 마치와 정으로 돌을 짜개고 쪼고 다듬고, 아귀를 맞춰 쌓아올리고, 땜질을 하고 보공을 괴고 잡석을 져 내고…….

늦은 가을 바람이 쌀쌀하게 헐벗은 옷 안으로 기어들건만 역군들의 얼굴과 잔등엔 땀이 주욱주욱 흘러나렸다. 일하기에 고비끼인 그들은 이 땀방울을 옳게 씻을 겨를조차 없는 모양이었다.

이따금 주먹으로, 또는 앞섶자락으로, 쓱 한번 문지르고 일손을 쉬지 않았다. 그러나 조금도 고된 빛이란 찾으랴 찾을 수 없었다. 불콰하게 상기된 얼굴엔 긴장과 감흥이 넘쳐흘렀다. 그들의 손길은 번개같이 빠르고, 올리고 나리는 팔뚝엔 새 힘이 샘솟는 것 같다. 신이 저절로 나는지 어깨가 우쭐우쭐하며 잽싸게 놀리는 발길도 춤추는 듯하다.

그들은 불 같은 적개심(敵愾心)에 타오르고 있는 것이다.

적병이 오기 전에 이 공사를 마쳐야 한다. 오밀조밀하게 쩍 말없이 이 수장(修粧)을 끝내어야 한다. 아무쪼록 우리 군사는 한 명도 다치지 않고, 적군은 함몰을 시키도록 화살 나갈 구멍과, 끓는 물을 내어 쏟을 자리를 공교하게 단단하게 맨들어야 한다.

이 이글이글 끓는 정성 앞에는 귀찮음도 없었다. 괴로움도 없었다. 성밖에 지지 않게 성안도 야단법석이다.

병화를 면한 병영과 관아의 여느 집들이 더러는 남아 있었지마는, 그것쯤 가지고는 시시각각으로 조수처럼 밀려드는 이 숱한 사람을 수용하기엔 어림도 없었다. 널찍한 병영도 여러 채 지어야 하고, 피란민이 위선 거접(居接)이라도 할 울막도 마련해야 하고 만일의 경우를 생각하여 성안까지 짓쳐오는 적병을 막아낼 목책(木柵)도 세워야 한다.

다행히 밝달산에는 굵고 잔 재목감이 들이 쌓이었다.

수백 수천의 도끼질 소리는 산과 골(谷[곡])을 울리었다.

아름드리 소나무가 여기저기서 와지끈하고 우람한 비명을 지르면 역부들의 환성도 골짜기를 뒤흔들었다.

공사가 벌어진 한 편에 군사의 조련도 밤늦도록 끊이지 않았다.

잉잉 하며 활시위와 화살 나르는 소리는 여러 만 마리 벌떼가 우는 듯, 이따금 화포 놓는 소리는 하늘을 뒤흔들고, 검은 연기는 아득히 구름과 같 이 사라진다. “으악!”하는 호통이 벽력같이 일어나고, 창빛과 칼빛이 언덕과 들판을 뒤덮으며, 짓쳐오고 짓쳐 가는 것은 백병전(白兵戰)을 연습하는 것이었다.

백제 왼 나라가 웅진(雄鎭), 마한(馬韓), 동명(東明), 금련(金蓮), 덕안(德安) 다섯 군데 도독부의 말발굽 아래 짓밟히어 굴욕과 비참에 울고 떨었으되, 이 서북의 한 모서리에는 거듭 나는 기쁨과 감격에 싸이어 새로운 힘과 기운을 길르고 있었다.

이 맡있성을 웅거한 장수는 묻지 않아 흑치상지 그 사람이었다.

그 날 고량부리거리에서 당병을 쫓아버리고 잡혀 가던 백제의 장정과 부녀를 구해 낸 그는, 매어 달리는 백성들을 떼치기 어려워 그대로 데불고, 바른길로 이 맡있성을 찾아 들어온 것이었다.

그는 당나라 신라 연합군이 부소리 서울을 짓쳐 들어올 때에는 풍달군(風 達郡)의 장수로 있었다.

도성이 위급하다는 급보를 듣고, 수하 정병을 이끌어 막 구원의 길을 떠나려 할 제 때는 벌써 늦었다. 뒤미처 서울은 함락이 되고, 임금은 곰나루로 파천(播遷)하셨다는 슬픈 소식이 들이닥치었던 것이다.

서울이 이렇게 속히 적군의 손에 떨어질 줄은 몰랐다.

그는 발을 굴러 통분했으나, 혼돈한 형세에 방향도 없이 군사를 움직일 수도 없었다.

더 자세한 소식을 듣고자 며칠을 머뭇거리지 않아서, 파천하셨던 왕이 다시 돌아오시어, 태자와 대관들을 거느리시고 굴욕의 항복을 하셨다는 비보가 다시금 날아 들어왔다.

대세는 이미 기울어지고 말았다. 큰 집이 넘어지는데 나무 한 개로 지탱할 바 아니다. 미친 물결이 곤두섰으니 무슨 수로 돌릴 수 있을 것이냐!

사자성도 부지를 못하였거든, 이 손바닥만한 작은 성으로 대적을 항거한 다 함은 연가시가 수레바퀴를 떠미는 것보담 더 하염없는 노릇이었다. 애꿎은 인명만을 해할 뿐 무슨 도움이 있으며 보람이 있을 것인가.

설령 흑치상지 제 자신이나, 몇몇 충의가 끓는 동료와 두목들이 들고 일어선다 하여도 사기는 벌써 저상(沮喪)이 되었다. 임금이 사로잡히고 서울 이 함몰되었다는 소문에 병정들의 마음은 술렁거렸다. 기운은 죽었다. 이런 군사로 여러 번 승전에 기가 날 대로 난 당병과 신라병의 날카로운 칼끝을 막는다는 것은 무모한 부질없은 짓이었다.

그러면 그에게 남은 길은 단 두 가지밖에 없었다.

달아날까? 항복할까?

울분과 번민 가운데 밤과 낮은 새고 밝았다.

들어오는 소문은 갈수록 악착하고 참혹한 것뿐이었다.

당장(唐將) 소정방이 항복한 왕을 꿇어 앉히고 쇠채 쪽으로 후려 갈겼다는 둥, 신라왕과 함께 전승 축하연을 굉장히 배설해 놓고 의자왕을 첩이나 하인처럼 푸른 옷을 입혀 술을 따르게 하였다는 둥, 왕과 비빈과 왕자 왕손과 공경대부(公卿大夫)를 옥에 나려 가두었다는 둥, 항복한 백제 장수와 병정을 모조리 잡아다가 도륙을 해서 그 흐르는 피로 사자강물이 발갛게 되었 다는 둥, 당병과 신라병의 노략질이 어떻게 지독하였던지 사내는 보는 대로 잡아죽이고, 부녀는 욕보인 다음에 찢어 죽이고 거치는 곳마다 쑥밭이 된다는 둥…….

이 가운데 믿지 못할 거짓말도 있고, 또는 참말도 있는 것 같았으나 아무튼 송구스러워서 바늘 방석에 앉은 것 같았다.

마츰내 흑치는 피신하기를 결단하였다. 잡히어 욕을 보느니 차라리 잠시 피신을 하여 형세를 보아 다시 거사하기로 작정을 하였다.

자기와 동료 요 절친한 친구인 지수신(遲受信), 사질상여(沙叱相如)와, 가장 믿는 두목 십여 명을 데리고 몰래 풍달군을 빠져 나왔다.

큰 뜻을 품은 그에게 요충지대인 맡있산이 눈에 아니 뜨 일리 없었다.

위선 처자권속들을 그리로 안돈을 시키고, 그는 몇몇 동지와 부하를 데리고, 교묘하게 변장을 차린 다음에 당병의 동정을 살피려 나왔던 것이다.

마츰 고량부리 거리에서 당병의 해참한 행악을 보고 용솟음치는 의분을 걷잡다가 못하여 필경 환도를 빼어 들고 달겨든 것이었다. 더구나 잡혀 가는 사람들 중에는 못하여 필경 환도를 빼어 들고 달겨든 것이었다. 더구나 잡혀 가는 사람들 중에는 자기와 결의 형제를 맺고 사생을 같이하자던 아술 성주(牙.城主) 사반(沙絆)의 딸 달아기(月英)와 그 어린 아들 귀복(貴福) 이가 끼어 있는 것을 보고 눈에 불이 일어났는데, 귀복이가 당병의 손에 무참한 죽음을 당하는 것을 보자 앞뒤를 헤아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한 번 내친 걸음은 다시 옴츠릴 수도 없었다.

얼마 동안 더 형세를 보살피고 준비를 단단히 한 뒤 의병을 일으켜야 할 것이었으나 이왕지사 일은 벌어진 것, 지금 와서 어름어름하고 있을 수도 없었다.

백 명도 못 되는 잡혀 가던 백제 장정을 골라서 군사 조련을 시키며, 거의(擧義)의 깃발을 날리었다.

그 메아리는 흑치 자신이 생각한 이상으로 매우 굉장하였다.

발 없는 말은 천리 만리를 간다.

흑치상지가 맡있성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이 소문은 의엿한 격서(檄書)가 돌기도 전에 한 입 건너 두 입 건너 울끈불끈한 공기에 싸이어 변을 기다리는 백제의 방방곡곡에 퍼졌다.

하루아츰에 나라와 임금을 잃고, 갈 바를 모르던 관원과 선비들, 외로운 손바닥이 울기 어려워 산 속으로 숲 속으로 몸을 피해 다니며 칼과 활을 어루만지고 속절없이 끓는 피를 걷잡지 못하던 충성 있는 장수와 군사들, 무도한 당병의 노략질과 박해에 안해를 빼앗기고 자식을 빼앗기고 가장집물을 빼앗기고 뼛골에까지 원한이 사모친 백성들…….

약속이나 한 것같이 맡있성으로 맡있성으로 모여들었다.

단 열흘이 못 되어 삼만 명이 넘는 군사와 역군을 뽑을 수 있었다. 인원은 이만해도 넉넉하였다. 오히려 좁은 성안이 터져 나갈 지경이었다.

제일 걱정은 군량과 무기이었으나 이것도 거두어들이기에 그렇게 어렵지 는 아니하였다.

아무리 당병 몇 만 명이 들끓어 나와서 샅샅이 뒤져가기는 갔지마는, 짧은 시일이요 또 지리에 밝지 못한 그들이라, 한길가의 큰 고을에만 그 사정 없고 욕심 많은 손이 닿았을 뿐이요, 외딴 데와 변두리 고을에는 곱다랗게 그대로 남은 군기창(軍器廠)과 군량고(軍糧庫)가 얼마든지 있었다. 맡있성 근읍만 해도 사시량(沙尸良)이라든지 까마귀산(烏山)이라든지 하는 대읍의 창고조차 고스란히 다치지 않았었다.

더구나 가을이다. 일 년 동안 피땀 흘려 지어 놓은 농사건만 별안간 난리 만나 피란하기에 바쁘던 탓으로 미처 수확할 경황이 없었다. 논과 밭에는 누렇게 익은 곡식들이 베어 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리 욕심꾸러기 당 병이지만 워낙 배가 불러 놓으니 제 손으로 추수까지 하기엔 성이 가시었던 모양이다.

남아 있는 창고와 들판의 곡식만으로도 얼마 동안 군량은 그럭저럭 부지를 할 수가 있었다.

흑치상지는 모든 일이 제 뜻같이, 오히려 제가 생각하는 것보담 더 순조롭게 되어가는 데 매우 만족하였다.

단백병이 될락말락한 군사, 더구나채훈련도 안 된 군사를 거느리고 맡있성을 웅거하였을 때엔, 아무리 천부의 험을 자랑하는 맡있성으로도 마음이 빈 듯이 허전허전 않을 수가 없었다.

당나라의 대병이 인제나 저제나 닥칠 듯 닥칠 듯해서 오마조마하였다. 밤 잠을 옳게 이루지 못하고 밝달산을 불어 넘어오는 바람소리에도 몇 번을 소스라쳐 몸을 일으켰는지 모른다.

그러나 인제 와서는 얼마쯤 마음이 놓이었다. 이만한 군사와 이만한 군량과 병장기를 가졌으니, 당병이 어느 때 달겨든다 해도 요험한 성을 지키기에는 충분한 자신이 있었다.

그는 몸소 군사를 교란시키는 한편으로 몰려들어오는 사람을 일일이 점고를 시키고, 이력과 장기(長技)를 따라 장수와 병정될 재목을 골르고, 또 석수 일과 목수 일에 능란한 사람을 뽑아내고, 또 이렇다 할 별 재능이 없는 사람은 역군으로 돌리고, 성 외벽을 수장(修粧)하는 공사와 성안의 공사를 어떻게 진행시킬 대두리를 꾸미고, 감독하고, 분별하고, 여러 군데로 염탐꾼을 보내고, 격서를 올리고……. 제 한 몸을 백 쪽을 내고 천 쪽을 내고 싶도록 눈코 뜰 새가 없이 바빴다.

이렇게 바쁜 중에도 바늘 만한 틈을 얻으면, 그는 문루에 높이 올라 성안과 성밖을 둘러 살피기를 좋아하였다.

사람들이 저렇게 많이 모이고, 저렇게 열을 내어 일들을 하고, 저렇게 기운차게 교련을 하는구나 생각하면 그는 회호리바람 같은 감격에 사로잡히었다.

불쌍한 백제의 유민(遺民)들, 나를 이대도록 믿고 따르는 저들!

저들을 위하여는 내 있는 힘과 정성을 다 바치리라. 이 살과 뼈가 가루가 되더라도 저들을 위하여는 아끼지 않으리라. 내 핏줄 속에 뛰는 피가 마지막 한 방울이 남을 때까지 저들을 돌보고 보호하리라.

제 호올로 마음속으로 이런 맹세를 몇 번 재우치고 뜨거운 눈물을 좌악좌악 흘리었다. 아무도 보아 주는 이 없는 감격의 눈물을!

흑치상지는 금년에 서른 아홉 살이다. 사물에 대한 분별성도 갖출 대로 갖추었거니와, 아직 청춘의 감격이 송두리째 사라지지 않은 낫세였다.

하루는 상지가 문루에 앉아 홀로 감격에 잠겼을 때였다.

문 지키는 두목의 한 사람이 웬 젊은 사람을 데리고 와서, 문루 밑에서 길게 읍하고 아뢰었다.

“장군님께 아룁니다.”

상지는 성안 성밖을 굽어살피고 가슴이 찌르르하면서도, 확 열리어 한량 없이 넓어지고 커지는 이 감동의 순간을 깨치기 싫었으나,

“무슨 말이오?”

하고 서서히 몸을 일으키는 수밖에 없었다. 여러 사람이 자기를 대장으로 우러러보고 높이었으나, 그는 부하에게 언제든지 겸손하고 존대하였다.

“지금 저희가 성안으로 들어오는 여러 군정을 점고하고 있사온 중에 이 사람이 들어오기에…….”

두목은 제가 데리고 온 젊은 사람을 가리킨다.

“그래, 오늘도 사람이 많이 들어왔소?”

상지에게는 들어오는 사람의 수효가 느는 것이 무엇보담도 큰 흥미였다.

“새벽부터 들어온 사람이 아직 사시도 안 되었삽는데 이천 팔백 명 가량이 나 되옵니다.”

간단한 보고를 마치고 나서 그 두목은 제 할 말을 잇대었다.

“사람이 처밀리어 눈코 뜰 새가 없사온데 이 사람은 도모지 제 근지(根地)와 성명을 대지 않삽고 굳이 장군님을 뵈어야 여쭐 말씀이 있다고 말썽을 부리옵니다.”

두목은 남이 몹시 바쁜 판에 성을 가시게 한다고 매우 못마땅한 듯이 그 젊은 사람을 노려본다.

“응, 꼭 나를 안 보면 어떠하오?”

하고 상지도 그 문제의 인물을 나려다보았다.

갈걍갈걍한 키에 해끔한 얼굴이 매우 생명해 보이나 그 대추나무같이 꼿꼿한 몸자세가 여간 악지가 셀 것 같지 않았다.

글쎄 말씀이올시다 “ . 장군님을 뵈옵고 사뢸 말씀이면 저희들을 보고 말을 해도 상관이 없다고 아무리 타일러도 도모지 듣지 않고 악지를 빠득빠득 부리옵니다.”

“그분들이나 내나 다 같소 그분들께 말을 하는 것이 내게 하는 거나 진배 없는 것이오.”

상지는 제 부하를 두둔하며 한편으로 그 말썽꾸러기를 타일렀다.

“그래서 저희들도 처음에는 혹시나 우리의 허실을 알려는 적군의 염탐꾼이나 아닌가 하고…….”

두목은 말을 이었다.

“적군의 염탐꾼이면 겁낼 거야 있소? 제 두 눈으로 우리의 실력과 기세가 어떠마한 것을 똑똑히 보고 가도 좋지, 허허.”

상지는 옆누르는 듯 한 마디하고 껄껄 웃었다. 인심이 이러하고, 준비가 이만한 다음에야 적군이 안다 해도 두려워할 까닭이 없었던 것이다.

“또 혹시나 그 흉측한 놈들이 보낸 자객(刺客)이나 아닌가 하고 왼 몸을 대강 뒤져보았으나 비수 같은 흉기도 없삽기로 데리고 왔습니다.”

“자객? 그까짓 자객쯤이야 몇 백 명이 오기로서니 어떨 거요?”

상지는 같잖은 듯이 또 한 번 허허 웃다가 그 말썽꾼을 바라보며,

“저 사람도 보아 하니 당당한 백제 사람인데 혈마당나라 오랑캐의 개 노릇이나 할 리 있소? 그건 다 지나친 생각이이지. 우리네 사람을 너무 의심을랑하지 마시오.”

상지의 입에서 이 말이 떨어지자 그 젊은 사람은 그 자리에 꿇어 엎드리었다.

“장군님의 말씀이 과연 지당하십니다. 한 나라 사람을 믿지 않사옵고 성 문에서 힐난이 심하와 적지 않은 불쾌를 느꼈사온데, 장군님께서는 이렇게 믿어주시니…….”

그 젊은 사람은 감동이 지나서 말끝도 맺지 못하였다.

“우리끼리 믿지 않으면 누구를 믿는단 말이오? 그런데 대관절 무슨 말이오? 할말이 있거든 이리로 올라오구려.”

상지도 그 말썽꾼이 제 말 한 마디에 감동되는 것을 보고 적지 않게 만족한 모양이었다.

그 젊은 사람은 불현듯 제 소임을 생각하였던지 재바르게 몸을 일으켜 사 면을 둘레둘레 살펴보다가,

“여쭙기는 황송하오나 문루는 이목이 번다하온즉 어디 종용한 처소에 가서 뵈옵고 은밀히 사뢸 말슴을 사뢰이지다.”

‘과연 말썽꾼은 큰 말썽꾼이로군.’ 상지도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면서 적이 성이 가시었다.

“여기도 아무가 없지 않소?”

“네 네, 그렇기는 합니다마는 실상인즉 여쭐 말씀보담도 드릴 물건이 있습니다.”

“물건!”

하고 두목은 놀래었다. 아까 자기네가 그렇게 뒤짐질을 하여도 아무것도 발견을 못하였거늘, 물건이란 말이 웬 말인가.

“물건이 있다?”

상지도 이상스럽게 생각하고 마지못해 문루를 나려와서 그 젊은 사람을 데리고 자기 혼자서 쓰는 종용한 방으로 왔다.

방안에 들어오자마자 상지는 궁금한 듯이 다짜고짜 물었다.

“그래, 가지고 온 물건이 무엇이란 말이오?”

그 젊은 사람은 방문을 꼭꼭 닫고 나서 제품 속에 손을 넣어 흠칫흠칫하며 옷자락을 뜯는 것 같더니, 차곡차곡 접힌 무슨 피륙을 끄집어내어 두 손으로 공순히 받들어 올리었다.

상지가 받아보니 혼란한 당나라 비단 겉바탕에 안은 백제 토주(吐紬)로 받힌, 귀부인들이 흔히 허리에 둘르고 뒤에 늘어뜨리는 허리띠였다. 나비는 한 자쯤 될까, 꾸겨 쥐면 줌안에 들 듯한 것이 펼쳐본즉 길이는 열 자도 더 될 듯, 손에 보들보들한 촉감을 남기고 말씬말씬 향기를 풍긴다.

딴은 전할 사람을 꼭 만나보고 은근히 전하기는 해야 할 물건이었으나, 이 살풍경의 진중에 걸맞지 않은 진기한 선물이었다.

“이게 뭐요?”

상지는 어리둥절하며 가져온 사람에게 물었다.

“보시는 바와 같습니다.”

젊은 사람의 대답은 간단하다.

“누가 보냅디까?”

“자세히만 보시면 자연 아시게 된다고 합디다.”

가져온 사람의 말도 수수께끼다.

상지는 다시금 이 이상한 선물을 이리저리 뒤적거려 보았건만, 나긋나긋 아양스럽게 손바닥과 손등에 휘감기어 보낸 이의 아리알심을 알으켜 줄 뿐.

상지는 암만 생각을 해 보아도 오늘날 자기에게 이런 선물을 넌지시 보낼 만한 대상이 머리에 떠오르지 안 했다.

그도 한 나이나 젊었을 땐 (지금도 결코 늙지는 않았지만) 그 헌걸차게 생긴 풍채로 말미암아 죽네 사네하고 따르던 이성이 한둘이 아니었다.

첫째로 자기의 정실인 아한(阿汗) 부인만 해도 애끊는 사랑을 주고받다가 갖은 위험을 무릅쓴 끝에 어엿하게 결혼을 하였고, 지금은 그의 소실이 된 실애기(線娘[선낭])와 향매(香梅)도 혹은 대갓집 딸로 혹은 붉은 다락(紅樓 [홍누])의 큰 애기로 그에게 쏟는 불 같은 정을 떼치기 어려웠던 것이다.

이 외에도 그를 따르던 여자를 주워 섬기자면 열 손가락을 꼽고도 모자라는 터이니 몰리알리 향기롭고 알뜰한 선물을 받아보기도 여러 번이었으되, 남자에게는 아무 소용이 닿지 않는 허리띠 선사를 받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상지는 호방하던 자기의 청춘 시절로 돌아가서, ‘이인가 그인가?’ 하고 지나간 기억을 더듬어 보다가 혼자 픽 웃고 말았다.

인제는 아들 하나, 딸 둘의 어버이로 단란한 가정생활에 파묻힌 지 오래다. 시방 기억에 떠오르는 아름다운 그림자들도 벌써 십 년 이십 년 옛날옛적의 아득한 과거 속에 스러진 지 오래였다.

피차에 생사존망도 모르는 오늘날이어늘 지금 와서 더구나 이 난리통에 이런 선물을 보낼 까닭이 도모지 없지 않은가.

그러고 보니 이 진귀한 선물은 더욱 풀기 어려운 수수께끼였다. 그렇다고 보기만 하면 자연히 알리라고 한다 하는 저편의 체모를 돌아본들 그 심바람 꾼에게 다심스럽게 미주알고주알 캐고 파기도 어려운 노릇이었다.

“그러면 저는 물러갑니다.”

상지가 그 이상한 선물을 들고 이렇듯 망단하고 있을 제, 그 심바람꾼은 선선히 몸을 일으키었다.

“가기는 어디를 간단 말이오? 그대로 여기 처져 있는 것이 어떠하오?”

상지는 그 심바람꾼도 여러 피란민 모양으로 으레 이 성안에 남을 줄 지레 짐작을 하였던 것이다.

“사람이 그렇게 무신(無信)해서야 되겠습니까? 그 어른께 잘 갖다가 전 하고 왔다고 복명을 해야 될 것 아닙니까?”

“그 어른이 누구란 말이오?”

상지는 말긑에 또 한번 물었다.

그 젊은 사람은 문을 열고 나서며,

“한 마디로 누구라고 여쭈어도 잘 모르시리라 하십디다.”

하고 벌써 대뜰 아래에 나려선다.

“누구라고 해도 모른다?…… 그러면 노형은 누구시오?”

전한 사람의 이름이나마 알고 싶었다.

더구나 저 같은 놈이야 “ 성명이 있겠습니까? 그저 듣바위라고 부릅니다.”

“듣바위, 듣바위.”

상지가 뇔 겨를도 없이 그 선물을 전한 사람은 힝허니 가 버렸다.

상지가 다시 부르려 하였지만 그가 늘고 꼿꼿한 몸이 어떻게 날쌘지 순식간에 제 눈앞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허리띠의 글발

편집

듣바위가 붙들 사이도 없이 달아나듯 가고 없어지자, 상지는 다시 문을 닫고 들어와서 그 이상한 선물을 들고 보고 놓고 보고 하였다. 몇 번을 뒤집어 보고 털어도 보았다. 기다랗게 늘어진 자락이 너울너울 춤을 추고 쏘 르럭 싸르럭 매끄럽고 그윽한 속살거림을 낼 따름,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다가 한 모서리에 유표하게 붉은 실로 꿰맨 자리가 눈에 뜨이었다.

시험 삼아 그 꿰맨 어름을 뜯어보매 머리 올같이 가는 실이 쉽사리 터졌다.

그 터진 자리를 양가로 잡고 빵긋이 벌리니, 실밥은 재미가 나도록 조루룩 일어났다.

터진 데를 제치니 비단 위에 노다지로 적은 글발이 은은히 내다보이었다.

밖으로 내어 비칠까 염려한 탓이리라. 그 글자는 진하지 않은 수먹(繡墨 [수묵])으로 거무스름하게 적기는 적었으되, 자형을 몰라볼 만큼 희미하지 는 않았다.

그 허리띠 안이 온통 일폭 서신이다. 그야말로만지장서.

깨알같이 가는 글씨가 달필은 달필이나, 해정(楷正)하고 노숙한 가운데 군데군데 애티가 나는 것이 얼른 보아도 여필이 분명하였다.

문체는 순한문이 더러는 섞이었으나, 교묘하게 한자의 뜻과 음을 이용하여 백제 방언을 취음한 것이었다.

그 사연은 대개 이러한 뜻이었다.


흑치 장군 휘하 별안간 글월을 올리어 놀라시고 괴이쩍어하실 듯.

그러하오나 부끄러움과 당돌함을 무릅쓰고 이 글을 올리옴은 이 몸의 간 절하온 마음을 걷잡을 수 없는 탓이오니 굽어살피시고 천만 용서해 주시기 바랄 뿐입니다.

그 날 이 몸은 장군님의 구원해 주심을 입사와 만사(萬死)에 일생을 얻었사오니, 그 하해 같으신 은혜야 무엇으로 그 만분지일, 만만분지일이라도 갚사올지 주소몽매(晝宵夢寐)에 잊을 길이 없습니다.

만일 그때 장군님이 아니 계시었던들, 이 몸은 백 조각 천 조각 돌무더기 속에 속절없이 장사를 지내고 말았을 것이 아니오니까?


상지는 예까지 보고 나서 무릎을 쳤다.

‘옳지, 그렇구나. 그 날 고량부리에서 같이 가자 해도 아니 오고 말을 채쳐 달아나고 만 그 귀부인이구나.’ 그제야 상지는 그 이상한 선물을 보낸 임자를 분명히 깨달을 수 있었다.

원광(遠光)으로 보았지만, 그 이슬을 촉촉이 머금은 해당화 한 송이 같은 얼굴과 한없이 곱고 맑으면서도 어딘지 사람을 잡아끄는 듯한 그 열기 있는 눈매가 생생하게 기억에 살아온다. 더구나 간드러지고도 여무진 그 카랑카랑한 목청이 시방도 귓가에서 잉잉 도는 듯하다.

‘내가 왜 진작 그 부인인 줄 짐작을 못하였던고.’ 한 번 생각하면 이대도록 또렷또렷하게 나타나는 인상을 지금까지 까맣게 잊어버린 제 자신이 오히려 멍청이인 것도 같았다.

그러하오나 바른 대로 말씀을 사뢰오면 이 몸이 그때 살아난 것이 그대도록 달갑지는 않습니다.

언제 죽어도 섭섭할 것 없고 아까울 것 없는 더러운 이 목숨입니다. 그 사정을 자세히 아뢰자면 가뜩이나 긴 이 사연이 이보담 열 곱절, 스무 곱절 더 길어져도 소상하지 않겠삽기로 다 접어두거니와 아무튼 이 몸이란 이 몸은 죽는 것보담 사는 것이 더 괴로운 몸입니다. 차라리 그때의 분에 떠오르는 여러분의 뭇매에 맞아 죽는 것이 이 몸에겐 다시 없는 기회요 다행이었을는지 모릅니다. 그때 길이 눈을 감아 버리었던들 원도 잊고 한 도 잊었을 것을. 이 좁고 좁은 가슴속에 서리고 맺힌 슬픔도 설움도 다 잊어 버렸을 것을.

꼭 죽었을 이 목숨이 또다시 살아나서 다시금 악착한 세상 시름에 부대끼게 되었으니 이 몸의 운명은 어찌 이다지도 기구합니까! 그러므로 장군님께서도 이 몸을 구해 주신 것은, 황송하옵고 하늘 무서운 말이오나, 이 몸에겐 원망이 될지언정 은혜가 되올 것은 털끝만큼도 없습니다.

장군님께서 이 몸에게 베푸신 은혜는 실상인즉 이 몸을 구하신 데 있지 않사옵고, 이 몸이 죽어 마땅하다는 것을 가르쳐 주신 데 있습니다.

‘이것은 또 무슨 말인가?’ 상지는 혼자 중얼거리고 고개를 기울여 또 그 밑을 읽어 나려갔다.


대체 이 몸이 무엇이오니까? 간신의 계집이 아니오니까? 장군님께서도 통분해 하시는, 나라를 좀먹게 하고 백성의 피와 기름을 빨아먹던 좌평 임자의 가속이 아니오니까? 이번에 당나라 신라 군사가 그렇게 쉽게 물밀듯 짓쳐 들어 온 것도 이 몸의 남편이 적국과 연통한 까닭이 아니오니까?

아무것도 모르는 백성들은 고만둔다 하더라도 이런 줄을 밝히 살피시는 장군님께서, 이 몸이 개죽음을 하는 것을 고소해 하실지언정 오히려 두둔하시고 두호하실 줄이야 꿈에도 생각지 못한 노릇이 아니오니까?

그러나 그뿐이오니까? 오랑캐놈에게 버린 이 몸이 아니오니까? 구구한 목숨을 살아지이다 하고 그 원수엣놈에게 아양을 팔고 웃음을 팔고도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더러운 줄도 모르는 해괴망측한 계집년이 아니오니까?

더더군다나 까닭 없는 말질로 제 남편을 무참하게 죽게 맨든 년이 아니오니까? 순전히 이 몸의 탓이라고는 못할망정 아무튼 같이 피란해 가는 남편을 원수의 칼을 빌려 죽인 것이나 같사오니, 이런 인륜에 벗어나고 불외천 불외지한 천참만륙을 당해도 오히려 죄가 남을 이년이 아니오니까?

이러한 이 몸이어늘 오직 백제 사람이라 하여 건져주심을 받을 때, 이 몸의 눈앞에는 이때까지 보지 못하던 다른 세계가 갑자기 열려졌습니다.

장군님!

“다같이 불쌍한 백제 사람을 해하지 말라!”

눈물 섞어 부르짖으신 그 말씀은 우레와 같이 이 몸의 귀에 울리었습니 다. 벽력과 같이 이 몸의 정수리에 떨어졌습니다. 이 몸의 잠자던 넋을 뒤 흔들고 말았습니다. 이 더러운 창자를 뒤집어놓고 말았습니다.

한 순간, 눈앞이 캄캄해지다가 문득 바위 같은 불덩어리가 디굴디굴 구으는 듯한 광명을 알아보았습니다.

장군님의 이 말씀을 듣기 전에는 워낙 악독한 바탕이라 비록 입으로는 죽음을 두려워할 이 몸이 아니라고 희떠운 입정을 놀렸으되, 간이 콩만하게 오그라 붙고 살이 떨리었습니다.

욕지거리를 하고, 돌팔매질을 하고 달겨드는 여러 사람이 겁도 나고 미웁기도 하였습니다.

그러하오나 장군님의 그 말씀을 듣고 나매 그네들을 미웁게 생각한 것이 도리어 죄송스럽고 그네들의 손에 맞아 거꾸러지는 것이 얼마나 정답고 떳 떳할까 하는 생각이 불현듯 일어났습니다. 이 몸은 이 마당에 꼭 죽어야 마땅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끊어져야 할 이 목숨이 끊어지지 않았으니 이 남은 목숨을 어디다가 쓸까, 어찌하면 이 많은 죄를 몇 백분지일이라도 삭칠 수 있으까, 이 거룩한 은혜를 갚을 수 있을까, 곰곰 생각하던 나머지에 이 몸의 갈 길이 훤하게 앞에 열린 것 같아서였습니다.

그 길이란 험난하고 고생스러운 길, 칼을 물고 뜀을 뛰는 것 같은 길이 었습니다. 그러하오나 이 목숨은 벌써 죽은 것이니 이 몸이란 송장이거니 생각하오면 험난하다고 모피하고 앙탈할 줄이 있사오리까? 목숨을 떼어놓고 보니 어쩌면 마음이 이렇게도 든든하고 수월할까요?

장군님!

실상인즉 그 날, 장군님을 모시고 같이 가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았습니다. 말은 줄달음질을 치는데 까닭 없는 눈물이 앞을 가리어 몇 번이나 길 을 헛들었는지 모릅니다.

필경 이 몸은 찾아올 데를 찾아오고야 말았습니다.

거기가 어디인 줄 아십니까? 다른 데가 아닙니다. 그 지긋지긋한 당나라 군사가 둔취(屯聚)하고 잇는 사자성 안입니다.

이 몸은 당돌하게도 필마단기로 적병이 구데게떼보담 더 많이 우글우글거리는 적진 중으로 뛰어들었습니다.


상지는 단숨에 예까지 보고 나서 아물아물해지는 눈을 스르르 감고 잠깐 편지를 놓았다.

‘세상에 기이한 여자도 있고는 볼 일이다. 저 갈 데가 따로 있다 하고 가더니만 필경에는 적진 중으로 뛰어들었구나.’ 속으로 생각하매 그 날 매정스럽게 말을 채쳐 달아나던 그 뒷모양이 눈앞에 밟히었다.

얼른 보기에도 보통 여자는 아닌 상 싶었으되, 이렇게 결심이 매서울 줄은 미처 짐작을 못하였다. 더구나 제 말 한 마디가 이렇게까지 그 여자를 감동시킬 줄은 몰랐다.

‘일은 되었다!’ 그는 허리를 휠씬 펴며 혼자 기뻐하였다. 이런 여자가 적의 심장 속에 들어박혀 있다는 것은 백만의 응원병을 얻은 것보담 못하지 아니하였다.

‘잔약한 여자의 혈혈단신으로 적진 중에 뛰어들다니! 대담도 하거니와 기절묘절할 일이 아닌가.’ 상지는 뜻깊게 몇 번 고개를 끄덕거리고 감탄을 마지않다가, 다시금 그 첩첩사연을 적어 넣은 비단 허리띠를 집어 들었다.


오랑캐들은 멋모르고 이 몸을 여간 위해 올리지 않습니다. 잡혀 가던 사람 여럿 가운데 이 몸 혼자만 달아나지 않고, 제 발로 꾸벅꾸벅 걸어온 것이 무척 신통하고 좋은 모양입니다. 의리를 지키는 사람이라고까지 추켜세우는데는 코웃음이 저절로 나옵니다.

이렇듯 대우가 자못 융숭한 탓으로도원수 격인 소위 신구도 행군 대총관(神丘道行軍 大總管) 소정방(蘇定方)이나 좌위 장군(左衛將軍) 유백영(劉伯 英)이나 우무위 장군(右武衛將軍) 풍사귀(馮士貴) 같은 우두머리 가는 당장 들의 장막 속에 임의로 드나들게 되었습니다.

고량부리에서 생긴 사단은 그야말로 출기불의(出其不意)로 그자들에게 여간 큰 두통거리가 아닌 모양입니다. 무인지경같이 짓쳐 들어와서 대번에도성을 두려빼고 임금을 사로잡은 그 자들은 백제 사람이란 순하기 어린 양 같고 하잘것없기 개새끼 같은 줄 알고 교만방자하게 꺼떡대며 망유기극(罔有紀極)으로 못할 노릇이 없다가, 한 번 그 일이 탁 벌어지고 보니, 창황망조 어찌할 줄을 몰랐던 눈치였습니다. 그야 장수 몇 녀석, 졸아치 몇 개 없어진 것쯤으로 자칭 수십 만 대군을 거느렸다는 그자들이 눈이나 깜짝할 노릇이리까마는 그래도 그렇지 않은 켯속이 또 있는 것 같습니다.

첫째로 그자들은 인제 와서는 호랑이보담 더 무서워합니다.

단 한 달이 못 되 크나큰 나라 하나를 집어삼키고 공성명수(攻城名遂)한 오늘날, 임금과 비빈과 왕자 왕손과 공경대부며 수많은 장졸과 백성의 부로(.虜)들을 앞세우고 뒤세우고, 금은주백(金銀紬帛)과 진보기화(珍寶 奇貨)를 수레마다 가득가득 싣고 거드럭거려 개선하기만 한시가 바쁜 터입니다. 장수이고 군사이고 마음으로는 벌써 칼자루 창자루를 놓은 지가 오래입니다. 그 귀찮고 위험한 싸움을 또 할 생각은 꿈에도 염에도 없는 모양입니다.

이런 계제에 고량부리에서 죽고 남은 군사가 헐레벌떡 도망질해 와서 그 연유를 보하자 당진(唐陣)은 발칵 뒤집히었습니다. 우두머리 당장들이 왔다갔다 하며 머리를 모아 수근숙덕 의론이 분분한 듯하더니 마츰내 일 지병마(一枝兵馬)를 고량부리로 보내 보았으나 그럭저럭 수삼 일이 지낸 뒤이 니 장군님 일행이야 저희가 어디 가서 구경인들 할 노릇이리까? 나갔던 군사들은 그대로 바람을 잡고, 거기 오래 지체도 못하고 돌아와 버리었습니다. 그 후로는 그런 일이 생겼다는 것은 입 밖에도 내지 말라고 쉬쉬하며 저희 군사들을 저희가 단속하는 꼴은 참으로 절도할 노릇입니다. 그 일쯤은 고만 눈감아 버리자는 수작이겠지요.

그런데 그자들에겐 눈감아 버리랴 버릴 수 없는 큰 일이 또 생겼습니다.

그것은 장군님이 맡있성을 웅거하시고 기세가 놀랍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이 맡있성에 들어앉으신 장군님이야말로 고량부리에서 그 끔찍한 일을 일으키신 어른인 줄 알자, 그자들의 얼굴은 푸르락 누르락 하였습니다.

맡있산으로 구름같이 모여드는 사람이 천이 되네만이 되네, 성을 곤치느니 영을 짓느니 하는 발쇠꾼의 첩보(諜報)가 빗발치듯 날아 들어옵니다.

장군님이 기세가 나날이 호대해 간다는 바람에 그자들은 밤잠도 옳게 이루지 못합니다. 밤마다 당장의 장막 속에서 일어나던 요란스러운 풍악 소리도 끊어지고 산해진미를 갖추어 벌어지는 낭자한 배반도 그림자를 감추고 말았습니다. 이럴 때에 만만한 신라병이나 좀 풀어 보내기가 일쑤 좋으련만, 그자들이 신라와 두 손길을 마주잡고 백제를 쳐 멸했지만 백제를 넘어뜨린 다음에는 다시 신라를 넘보았기 때문에 약삭빠른 신라의 군신들은 이 기미를 알아차리고 제 나라의 방비를 튼튼히 하려고 잔뜩 군사를 모아 놓고 안병부동(按兵不動)하여 좀처럼 그자들의 말을 듣고 독담(獨擔)으로 싸우러 나갈 상싶지가 않습니다.

‘옳지 옳아, 그 의뭉한 놈들이 백제를 먹고 신라를 가만둘 리가 만무하지, 만무해. 기걸한 줄만 알았던 그 부인이 이런 점까지 똑바로 보는 것을 보면 그 식견도 놀랍구나.’ 상지는 편지에서 눈을 떼지 않으며 구절구절에 탄복하였다.

그 편지는 인제 정작 중요한 대문으로 들어서는 듯, 그 글씨까지 또박또박히 더 안상(安詳)하고 더 해정(楷正)하였다.


신라 말이 난 김에 좀 더 소상하게 말씀을 드릴 것은, 위에도 몇 줄 적었사오나, 두 나라 사이가 결코 좋기만 한 것 같지 않은 점입니다. 겉으로는 신라편에서는 우리네의 대대로 맺힌 원수 백제를 멸해 주셨으니 이런 고마울 데가 없다고 당나라를 발라맞추고, 또 당나라에서도 그대네의 군사들은 묘략도 장하고 용맹도 대단하여 잘 싸웠으니 그 공로는 잊을 수 없노라고 칭찬을 하는 터이오나, 속살로는 조그마한 트집과 흔단만 있으면 서로 잡아먹으려고 으르렁거리는 판입니다. 위선 사자성 싸움 때만 해도 신라 군사가 약조한 시각보담 늦게 왔다는 것을 핑계 삼아 소정방이가 개골을 내고, 신라 독군(督軍) 김문영(金文潁)을 군령 시행으로 목을 버히라고 호령하였더랍니다 이 소식을. 들은 김유신은 길길이 뛰고 분이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꽂았던 칼을 빼어 들고 백제를 치기 전에 위선 의리부동한 이 놈들부터 먼저 요절을 내야 되겠다고 호랭이같이 고래고래 응컬거리고 호통을 쳤답니다. 이 서슬에 소정방은 자중지란이 일어날까 보아 슬며시 김문영을 놓아주었다는 얘기가 파다합니다. 이것 한 가지만 보아도 그들의 사이를 짐작할 수 있는데, 이 밖에도 신라왕 김춘추가 당장들을 대접할 제 그 술에다가 짐독(.毒)을 쳤다는 둥, 또는 당장이 신라왕과 김유신에게 은근하게 보낸 제 나라 음식 가운데 슬쩍 독을 묻혀 보낸 것을 개를 주었더니 개가 먹고 그 자리에 토혈 즉사하였다는 둥 별별 풍문이 다 많습니다. 일일이 믿을 것은 못 되오나 아무튼 그 자들의 사이가 본래부터 물 부어 샐 틈 없이 합해진 것은 아닌 듯합니다.

더구나 우리 나라를 자기네들깐으로는 다 먹고 보니 고깃덩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로 뜯어먹으려는 두 마리 개의 형상이 되었습니다. 당나라는 당나라대로 도독부를 두네, 뭣을 두네 제 손아귀에 넣으려 하고, 신라는 신라대로 수령방백을 두어 슬근슬근 인심을 수습해 보려는 기세를 보입니 다.

장군님께서 어련히 다 짐작하시리까만 아녀자의 좁은 소견에 그자들의 하는 꼬락서니가 일변으로 괴이쩍고 일변으로 얄궂기로 이런 말씀까지 알 리오니, 여벌일 같지마는 장군님 마음속에 새겨 두시게 하옵소서.


‘마음에 새겨 두고 말고.’ 상지는 마치 그 귀부인이 제 옆에나 있는 듯이 중얼거리고 고개를 수없이 끄덕였다. 자기도 두나라가 겉으로 합했지 속속들이 합하지 않았다는 것쯤은 대강 짐작을 하였지만, 벌써부터 이다지 알력이 생기고 이해가 충돌되는 줄을 생각지 못하였던 것이다.


아뢸 말씀이 하도 많사와 사연이 갈팡질팡 두서를 못 차리고 딴 길로 나갔습니다마는, 워낙 이 글월은 한숨에 쓰는 것이 아니옵고 행여나 남에게 들킬세라 사람의 눈을 피해 가며 몰래몰래 틈틈이 새로운 소문을 듣는 대로 몇 줄씩 끄적거리는 것임을 통촉하소서.

오늘 아츰부터 우두머리 당장들의 서두는 품이 대단합니다. 입에 게거품 들을 튀기면서 격론하는 것을 가만히 엿듣자 하니, 말은 잘 알아들을 수 없으나마 저희들도 어쩔 수 없이 군사 움직이기를 결단한 모양입니다.

군사를 움직이기로 하였으나, 누구를 그 대장으로 보낼까가 큰 말썽인 것 같습니다 . 모두들 슬근슬근 제 꽁무니를 빼는가 봅니다.

대총관 소정방으로 말하면, 갈 길이 바쁜데 몸소 치러 갈 수도 없는 노릇이요, 그의 굵직굵직한 장수들도 다들 자원 출전하기를 꺼리는 모양입입니다. 섣불리 출전을 하였다가 단숨에 이겼으면 좋으면만 군사(軍事)란 위사(危事)라 뉘 있어 꼭 이긴다 장담을 하올 것이며, 설령 승전을 한다 해도 조그마한 외로운 성 하나를 무찌른 것이 그리 끔찍한 공이 못 될 것이옵고, 만일 삐끗하는 날이면 지금까지 세운 큰 공에 누가 될 것이 아니오니까? 승전했자 큰 생색 없고, 패한다면 큰일 나는 이 싸움을 가루맡고 나설 사람이 없는 것 같습니다.

암만 그래도 그자들의 위신과 체모를 보아도 가만히 있을 수 없는 형편 이라, 이러쿵저러쿵 의론이 서로 합하지 않고 동병을 결정해 놓고도 또 대장 감이 없어서 그 잘 떠드는 성미들에 입에 게거품을 흘리며 야단들인가 합니다.


‘의론이 백출하고 합심이 잘 되지 않는 것은 우리 백제 사람뿐만이 아니로구나.’ 하고 상지는 빙그레 웃었다.

그 편지의 깨알 같은 글자는 다시 계속되었다.


적세가 이러하오니 비록 작은 성과 외로운 군사라 할지라도 조금도 두리 실 것은 없을 줄로 아옵니다. 단열 명이 안 되는 수하를 데리시고도 수백 명 당장과 당병을 추풍낙엽같이 무찌르신 장군님이아든, 이까짓 싸울 뜻을 잃은 군사야 몇 천 몇몇 만 명을 끌어 가온들 무엇을 하오리까? 지금 생각 해 보아도 간담이 서늘한 장군님의 칼머리에 제물 감밖에 더 되오리까? 그것을 생각하오면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한입니다. 장군님 곁에 모시었던들 그 속시원한 구경을 또 하올 것을 우렁차신 꾸지람은 산천을 울리시고 긴 수염은 바람결에 나부끼시며 반공에 넘노는 칼빛은 여러 줄기 무지개인 양적장의 머리가 북풍에 우박 흩어지듯 어지럽게 떨어지는 광경을 뵈올 것을. 납덩어리를 먹은 듯 멍클하고 답답한 이 가슴이 얼음 녹듯 풀릴 것을.

장군님! 버릇없는 말을 용서하소서.


상지는 이 대문을 보면서, 저도 모르는 사이에 자가 넘는 제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또 한번 빙그레 웃었다.


옥신각신하던 끝에 이번 싸움의 대장은 낭장(郎將) 유인원(劉仁願)이가 뽑힌 모양입니다. 지금까지 명색도 없던 그자이지만 우두머리 장수로는 가 기를 꺼리는 판에 이자가 올라선 것인가 합니다. 나이 젊은 탓에 기운은 제법 팔팔합니다마는 이자인들 이 생색 없는 싸움을 즐겨하리까. 대총관 명령이요 지체가 올라 뛰는 바람에 덮어놓고 맡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신라군에는 향도(嚮導) 겸 선봉장(先鋒將)을 내놔라 했는데 이것은 물론 신라군으로 하여금 저희들 군사의 방패 삼아 앞장을 세웠다가 이 기면 좋고 패하면 패전의 책임을 신라군에게 뒤집어씌우려는 수작입니다.

약고 슬기로운 신라군이 이만 꾀야 모를 리 있으리까.? 이 핑계 저 핑계로 원자기네 사람인 장수는 하나도 내어 놓지 않고 항복한 전 백제 좌평 충 상영(忠常永)을 선봉장으로 내세웠다 합니다. 그리고 모르면 몰라도 군사들은 거의 전부가 백제의 항졸로 채워졌다 합니다. 제 손으로 제 나라 사람을 죽이든지, 그렇지 않으면 제 나라 사람 손에 제가 맞아 죽든지 두 길 밖에 없는 비참한 운명, 세상에 이런 지원극통한 일이 또 어디 있사오리까?

그런데 이 자들의 서두는 꼴이란 정말 눈꼴이 사나워서 볼 수가 없습니다. 당나라나 신라 군사보담도 저희들이 먼저 칼을 갈고 창을 닦고 활을 도지개로 곤치고 야단법석들입니다. 더구나 충상영의 꺼떡대는 꼴이 가관입니다. 몇 번 당영(唐營)에도 불려 왔는데 어디로 해서 어떻게 군사를 몰아가고, 어느 모를 어떻게 치면 그까짓 맡있성쯤이야 후군을 기다리지 않 고 제 선봉대만 가지고도 손에 침 배앝고 두려뺀다고 호언장담이 놀랍습니다. 저렇듯 훌륭한 인물이 있으면서 백제가 망한 것은 운수소관이라 할까 요 기막히고 요절할 일입니다.

요즈음은 군사들에 대한 호궤(.饋)가 대단합니다. 하루에 소 백 마리, 돼지 오백 마리씩 잡던 것을 요새는 그 갑절 소 이백 마리, 돼지 천 마리씩 잡고 술도 여러 천 동이씩 걸러서만 판 먹이는 판입니다. 아마 모레 글피로는 진군을 할 눈치가 보입니다.

그리고 이 글발 끝에 그린 명색(名色) 지도(地圖)는 이 몸이 무진 애를 쓰로 소정방의 장막 속에 들어가 그 벽에 붙여 놓은 것을 보고 그린다고 그린 것입니다마는 좀된 솜씨에 잘 알아보시게 되올지 당병과 신라병이 둔 취해 있는 수효와 지점을 기록한 것입니다.

장군님! 글월 부치기가 급하와 이만적사오나 부디 경적(輕敵)은 마시옵고, 돌아갈 길이 급한 그자들의 뜻이 속히 싸우는 데 있사온즉 방비를 단단히 하옵고 질질 끌기만 하오면 초조함에 못 견디어 저절로 물러갈 듯도 하오니 깊이 살피소서.

끝으로 한 말씀드릴 것은 이 몸에 감고 있던 허리띠를 올라옴이 예에 어 그러진 줄 아오나 진중에 , 지필묵을 구하기 어렵삽고, 또 종이에 썼다가 혹시 전인이 실수하여 들키거나 하면 큰일이겠기로, 설령 들킨다 해도 무방할 듯한 이 허리띠 안에다가 적어 넣었습니다.

장군님! 나라를 위하여 이 불쌍한 백성을 위하여 만 금옥체를 보중하소서.

고량부리 길가에서 뵈온 백제 여자 창화는 올림.

첫 싸움

편집

차근차근하고도 오밀조밀한 편지 사연, 어디까지 냉정하면서도 군데군데 불같은 정열의 입김이 서린 듯하다.

한 발이 넘는 길고 긴 사설이건마는 편지가 끊어진 것이 오히려 안타깝고 미협한 듯이 상지는 다 읽고 난 그 편지를 다시 보고 또다시 보고 차마 놓지를 못하며 깊은 생각에 잠기었다.

한 개 여자의 매서운 결심으로도 이만한 대담하고 중요한 일을 할 수 있거든 하물며 수미 대장부로 이만큼 인심이 돌아오고, 군사와 병장기와 양초를 얻은 다음에야 하늘을 돌이키는 큰 업을 세우고 큰 공을 이루는 것도 무엇이 어려우랴 하였다.

이 불쌍하고 가련한 백제 백성으로 하여금 해와 달을 바루 보게 하고, 적 병의 발굽 아래 점점이 피로 어룽진 이 도성과 산하(山河)로 하여금 새로운 빛을 발하게 못하면 무슨 얼굴로 이 여인을 대하랴 하였다.

‘두고 보십시오. 그 나라를 배반한 충상영이란 놈과 그까짓 소정방의 수 하편장인 유인원 따위야 한칼에 목을 베어 그대의 성의를 저버리지 않으리 다.’ 상지는 감격과 호기에 떨면서 그 귀부인에게 답장이나 하는 듯이 호올로 속살거리었다.

더구나 편지 끝에 정성들여 그려 보낸 그 지도(地圖)는 만금의 보화보담 더 유용한 것이었다.

한 번 그 지도를 들여다보면 당병과 신라병이 어디어디 얼마 얼마씩 배치되었다는 것을 환하게 알 수 있게 되었다. 손바닥을 가리키는 듯이 분명하고 자세하다.

상지는 마츰내 그 편지를 무릎 아래 나려놓고 벌떡 일어나 팔짱을 끼고 방안을 왔다 갔다 하였다. 왼 몸에 용솟음치는 힘을 가만히 앉아서 배기기 어려웠던 것이다.

한동안 감격의 회호리바람에 둥둥 뜨는 몸과 마음을 걷잡지 못하다가 당 병과 신라병이 내일 모레로 이 맡있성에 들이닥칠지 모른다는 편지 구절을 생각하고 자기 혼자만 알고 있을 일이 아닌 것을 깨달았다.

그는 자기의 동지요, 막하의 제일 맹장인 지수신(遲受信)과 사질상여(沙 叱相如)를 불러 같이 의론해 보기로 하였다.

두 사람은 상지의 처소로 불려왔다.

“일은 되었소. 적진 중에 이런 기이한 여자가 있어 연통을 하였구려.”

하고 상지는 두 사람에게 그 편지를 내어 보이었다.

두 사람의 눈도 한동안 어린 듯 그 편지에 붙고 떨어지지 않았다.

“참 훌륭한 여인도 있습니다그려. 그러면 그 기급을 할 당병과 신라병이 싸울 뜻도 없으면서 체면 수습으로 쉬이 꾸벅꾸벅 올 모양이군요. 그래도 그렇지 않으니까 오늘부터라도 일층 더 각별 방비를 해야 될 것 아닙니 까?”

사질상여가 먼저 입을 열었다. 흑치상지보담 못하지 않게 훤츨한 키에 떡 벌어진 어깨판, 두툼한 입술과 쏘는 듯한 안광(眼光)이 믿음직스러우면서도 기운차 보이었다.

“이런 죽일 놈이! 그 늙은 여우 같은 놈이 어디 가서 뒈졌나 했더니만, 이놈이 신라군에게 항복을 해 가지고 무슨 낯싸대기를 쳐들고 선봉장이 되어 온다! 이런 죽일 놈, 이놈이 내 눈앞에 얼씬만 했단 봐라. 이런 놈은 칼에 피를 묻히는 것도 더러우니 그대로 잡아다가 사지를 찢어 죽여야…….”

지수신은 그 다섯 자도 넘지 않는 짤막한 몸을 벌벌 떨며 분해한다. 그는 백제 좌평 충상영이가 선봉이 되어 온다는 소식에 치를 떠는 것이다. 그 작은 몸이 왼통 그대로 담 덩어리고 용맹 덩어리인 듯 날쌔고 다부지게 생겼는데, 아래턱과 웃입술에 침같이 숭숭 솟은 새까만 수염에도 충성과 의분이 칼날같이 뻗친 것 같다.

“지 장군, 고정하시오. 늙은 몸이 제 발로 죽으러 꾸벅꾸벅 오는 것이 우습지 않소? 허허.”

사질상여는 가소로운 듯이 웃는다.

“그놈은 세상없어도 놓치지 말고 짓이겨 죽여야!”

지수신은 그래도 분기가 가라앉지 않은 듯이 몸둘 곳을 모른다.

“두 분 장군의 의견은 어떠하오? 저들이 돌아갈 길이 바빠서 속히 싸우는 데 뜻이 있다 하였은즉, 그 말대로 지구전을 하는 것이 어떨는지?”

흑치상지가 의견을 내었다.

“우리 군사들의 의기가 충천한 오늘날, 여러 날 두고 갈아놓은 칼과 창이 적군의 피에 주려 우는 오늘날, 지구전까지 할 것은 없을 것 같소 그 허수아비 같은 군사야 갑옷 투구가 한 번 부딪기만 하면 풍비박산쥐구멍을 찾을 것 아니겠소?”

지수신은 대번에 맞아 싸울 것을 주장하였다.

“일격지하에 적병의 예기를 꺾고, 선봉대를 무찔러 버리자는 지 장군의 의견도 물론 당당한 정론이지만, 그 편지로 말하면 여간 적정을 잘 살핀 것 이 아닌즉, 아무튼 방비를 굳게 하고, 싸울 뜻 없는 적병으로 하여금 더욱 피로하고 진력이 나게 하는 것이 만전지책일까 하오.”

사질상여는 어디까지 그 편지의 의견을 존중하여 정중한 지구전을 주장하였다.

“충상영이가 온다 하니 더더구나 살이 떨리는구료. 피가 끓는구료.”

지수신은 비분강개한 나머지에 주먹으로 방바닥을 쳤다.

“그놈이 임가 놈과 서로 짜고 나라를 병들게 만들고, 마지막엔 적병까지 불러들인 놈 아니오? 임금과 나라의 은혜가 태산같이 융숭하였거늘, 도성이 깨어지기 전에 먼저 밤을 타서 신라진으로 달아난 놈 아니오? 임가 놈으로 말하면 워낙 겁쟁이라서 간악한 꾀와 용맹이 그렇게까지는 나지를 못하여 산중으로 도망질을 쳤다가 제가 불러 들인 적병에게 제가 잡히어 말경엔 그런 개죽음을 하였으니 하늘이 나리신 벌이지마는, 이 충상영이란 놈만 오늘 날까지 더러운 목숨을 보전하여 감히 선봉장이 되어 우리를 치러 온다 하니 어지 통분하지 아니하오?”

지수신의 뜨거운 입술로 뿜어내는 말 한 마디 한 마디는 충분(忠憤)의 불길이 활활 타오르는 것 같다.

상지와 상여도 말을 끊고 간신이요 역적이요 지금은 적장인 충상영을 노리는 듯 눈을 부릅뜨고, 한동안 앞을 흘겨보며 드윽하고 이를 갈았다.

방안의 공기도 미움과 분함에 떠는 것 같았다.

지수신은 다시 제 말끝을 이었다.

“그리고 이건 물론 지나친 말 같으나 그 편지의 사연이 아무리 곡진해도 나는 그대로 믿을 수는 없소. 왜 그러냐 하면 그 창화란 여자가 본디 임가의 계집이었더라 하지 않소? 그런 역적 놈의 가속의 말을 어떻게 일일이 준신할 수야 있소? 아무리 제가 개과천선하였노라, 인제는 백제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겠노라 하지마는, 흉측하고 의뭉스러운 당나라 놈들이 무슨 수단으로 그 계집을 어떻게 꾀어 이런 편지질까지 하게 하는지 누가 안단 말이오?”

“그럴 리야 만무할 것 같소.”

상지가 말을 막았다.

“아무리 간특한 여자라 할지라도 제 본마음이 아니고선 이렇게 구구절절 이제 폐부에서 우러나는 소리는 하지 못할 것이오. 그런 의심을 하시는 걸 보면 지 장군이 그 편지를 잘못 보신 게지.”

“나도 그 여자의 말을 전수이 아니 믿는다는 것은 아니오. 다만 일개 아녀자의 말을 그대로 취신하기가 어렵단 말이지.”

수신은 간신과 역적에 대한 분격이 심한 끝에 창화 부인의 심사에까지 의심이 간 것이었다.

“이 사연을 자세히 볼 것 같으면 제 남편 임가와도 무슨 깊은 곡절이 있는 듯 싶소. 그 자세한 사정을 말하자면 그 긴 사연이 몇 갑절이나 더 길어진다 하였을 적에는…….”

상지는 제품속으로 날아든 귀엽고 영리한 파랑새와 같은 창화 부인을 두둔 안 할 수 없었다.

“필유곡절인 것 같소.”

상여도 상지의 말에 찬성을 하였다.

“임가와 살기는 살았지만 깊은 원한이 맺혔던 것 같소. 전후 사정은 자세히 모르지만 고량부리에서도 당장을 호려서 제 남편을 죽여 놓았다고 까닭 모르는 백성들이 길길이 뛰고 그 여자를 죽이려 하던 것은 우리가 목도 한 것 아니오. 그것만 보아도 그 여자가 임가 같은 위인을 사람같이 보지 않은 것만은 사실인 듯하오.”

“간신과 음녀의 창자란 천 겹 만 겹, 우리네 여느 사람으론 요량도 할 수 없는 거요.”

수신은 끝끝내 외곬으로 나가는 제 의견을 곤치려 들지 않았다.

“아무튼 기(奇)여자는 기(奇)여자요.”

상여가 다시 입을 열었다.

“임가란 놈이 한창 거드럭거릴 제, 얼굴만 반반하면 남의 집 양가(良家) 여자도 함부로 뺏아 왔으니, 아마 그 불쌍한 희생의 하나인지도 모르지.”

“옳소, 옳아. 사실 장군의 말이 근리(近理)하오. 그 여자의 말을 믿고 안 믿는 건 두 번째요. 첫째 우리의 준비와 방비를 굳게 하는 것만 같지 못할 줄 아오. 성외 성내의 수장은 거의 끝이 났으니 내 생각엔 성밖에 다시 목책을 박고, 성 주위를 둘러 파서 그 밑에 엉구렁을 만들고 그 위를 거짓 다리로 덮기로 합시다. 적병의 형세를 보아 치게 되면 치고 막게 되면 막으면 고만 아니겠소? 자아, 지 장군은 성 밑 파는 것을 막고 사질 장군은 성 밖 모책을 감독하도록 하시오. 나는 하루라도 더 군사를 조련시켜 놓아야겠소.”

상지는 마츰내 단안을 나리었다.

흑치상지. 사질상여 . 지수신 세 장수가 허리띠의 글발을 가운데 놓고 난상토의로 치고 막을 꾀를 정한 지 사흘이 지나자, 사방으로 떠내어 보내었던 보발꾼으로부터 과연 당병이 쳐들어온다는 첩보가 빗발치듯 들어왔다.

굉이산을 지나느니, 범근내 줄기를 건네느니, 각각으로 적병이 가까이 온다는 것을 알리었다.

맡있성 망루에 올라 보아도 기치창검을 번득이며 개미떼 같은 적병이 산과 들판에 깔리어 곰실곰실 움직이는 꼴이 보이게 되었다.

그러나 성안은 조금도 놀라지 않고 당황치 아니하였다.

성의 주위를 둘러 파는 공사도 마츰 끝이 났고, 성밖에는 굼튼튼한 목책을 박은 지도 벌써 오래다. 어느 때 적병이 밀려와도 아무런 걱정이 없었던 것이다.

군사들은 적병이 오는 것을 보고, 오랫동안 기다리고 기다렸던 것이 인제야 오는구나, 하는 듯이 오히려 반가워하는 눈치였다. 창과 칼과 활을 어루만지며 인제야 쓸 날이 온 것을 자못 기뻐하였다.

그러나 흑치상지는 성문과 목책 문을 굳이 닫고 깃대를 누이고 북과 쟁(錚)치기를 그치고, 군사에게 망령되이 움직이기를 절금하였다.

당병은 성 앞 백 보쯤 되는 지점에 진을 치고 성안의 동정을 살폈으나, 성안은 죽은 듯이 고요하다.

하루가 지났다. 이틀이 지났다. 닷새가 지났다. 엿새가 지났다.

당진(唐陳)에서 아무리 싸움을 청하여도성 안에서는 도모지 응하지 아니 하였다.

유인원은 충상영의 선봉대를 명령하여 성 밖의 목책을 두려빼고 성벽으로 짓쳐들라 하였다.

그러나 당병이 목책 가까이 짓쳐가면 난데없는 화살이 비오듯 쏟아져서 제 군사만 죽일 뿐이요, 목책을 빼기는 용이치 아니하였다. 가까스로 목책 한 머리를 뚫고 나간 당병들이 성 밑 가까이 와서 운제(雲梯)를 곤두세우고 성벽에 기어오르면, 성안에서는 뜨물과 굵은 바위를 구을러 나리어 당병들 이 성벽에서 미끄러 떨어지면 별안간 화포 소리가 천지를 뒤흔들자, 거짓 다리가 일제히 아가리를 벌려 무수한 당병은 구렁텅이 속으로 떨어지고 만다.

성벽을 쳐 무너뜨리고 성안에 짓쳐든다는 일은 단념하는 수밖에 없었다.

열흘이 지났다. 보름이 지났다.

당진은 날이 갈수록 초조해졌다.

승전고를 울리고 돌아갈 마음이 살 같은 오늘날, 조그만한 성 하나에 이렇게 날짜를 허비하고 군사를 잃은 것은 무의미한 노릇이었다. 기막힐 노릇이었다.

여러 번 예기를 꺾인 당병은 인제 겁부터 먼저 집어먹고 목책 가까이 가는 것조차 꺼리고 모피(謀避)하게 되었다.

유인원은 화풀이로 날마다 충상영을 불러다가 꾸지람 꾸지람하게 되었다.

충상영은 출전할 때 호언장담한 깐이 있어서 더욱 면목이 없었다.

나아갈 수도 없고 물러갈 수도 없는 막다른 골목! 충상영 제 자신도 그 늙은 목숨이나마 내어놓고 싸울 뜻은 처음부터 없었다. 손바닥만한 맡있성쯤이야 당병이 쳐들어온다는 소문만들어도 저절로 항복을 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그대로 달아날 줄 알았다. 돌아가는 백성과 군사가 아무리 많고 성벽은 아무리 튼튼하게 수장을 하였다 해도 애당초에 믿지를 않았었다.

어째 어름어름해서 뒷전만 보다가 공을 세워서 당장에게 긴하게 보이려 한 것이었다. 그런데 정작 와 보니 그 물샐틈없는 방비에 혀를 내어 두를 수밖에 없었다.

몇 번 쳐들어가 보니, 그 군사들의 용맹스럽고 씩씩한 품이 백제 사람 같지가 아니하였다. 자칫 잘못하면 그 죽을 애를 쓰고 간신히 보전한 이 목숨이 위태할 지경이었다.

‘내가 왜 방정맞게 자원출전을 하였던고!’ 몇 번이나 자기의 입이 너무 가벼웠던 것을 후회하였는지 모른다.

그러나 오늘날 와서 슬며시 달아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에라! 이왕이면 흑치상지란 놈에게 항복을 해 버릴까?’ 하는 생각도 가끔 일어났으나 그럴 만한 기회도 잡을 수 없거니와 지금 한창 적개심에 불타는 그들이 설령 항복을 한댔자 저를 살려둘 리가 만무할 듯도 하였다.

충상영은 마츰내 일대 결심을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내일은 제 자신이 진두에 서서 흑치상지를 불러내어 좌우 양단간 귀정을 내어보리라 하였다.

충상영은 백발을 흩날리며 손톱으로 찍어놓은 듯한 조그마한 눈을 반짝거리고 무서운 결심으로 밑 아래 바싹 다가섰다. 그 옆에는 ‘대당 선봉장 충 상영(大唐先鋒將 忠常永)’이라고, 굵은 글자 여덟 자를 뚜렷이 쓴 깃발이 펄렁거리었다.

그에겐 이 여덟 자가 얼마나 귀중한지 모른다. 이 여덟 자를 머리 위에 내어 걸기 위하여 그 대견한 늙은 목숨을 태웠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광영과 위풍으로 한 번 흑치상지를 얼러 보려는 것이다.

“너희 주장 흑치상지에게 빨리 보하라. 대당(大唐) 선봉장 충상영이 옛 정을 생각하여 일러듣길 말이 있으니 빨리 나와 명을 받으라 해라.”

수문장을 치어다보며 호기 있게 고함을 질렀다. 제 목소리가 이만큼 크고 카랑카랑할 줄은 제 자신도 몰라 들을 지경이었다.

수문장은 이 사연을 급히 보하였다.

흑치상지, 사질상여, 지수신의 세 장수는 한 자리에 모여 적병의 피로하고 겁내는 빛이 현저한즉, 오늘쯤 성문을 열고 공격을 개시하는 것이 어떠냐고 거의 의론이 작정된 때에, 이 소리를 듣고 세 장수는 일제히 몸을 일으켰다.

“충상영이란 놈이 할말이 있노라고? 이놈을 오늘일랑 한칼에 목을 뎅겅 베어 버립시다.”

지수신은 충상영이란 말만 들어도 욕지기가 나서 발을 동동 굴렀다.

“제가 무슨 말을 하는가 내가 가서 들어볼 터이니, 사질 장군과 지 장군은 마츰 준비를 하고 있다가 오늘쯤은 기틀을 보아 나리 무찔러보는 것도 무방할 듯하오.”

흑치상지는 문루에 나타났다. 과연 충상영이가 그 꼬챙이 같은 몸이 부러질 듯이 꼿꼿이 세우고, 오초마를 탄 꼴같잖은 풍신이 눈 아래 보였다.

“오오! 흑치상지냐! 오래간만이로군.”

충상영이도 성 밑에서 재바르게 상지의 모양을 알아보고 점잔을 빼며 부르짖었다.

“별래(別來) 무사한가? 내 듣기에 그대가 이 성중에 있다 하였지만 믿지를 않았더니 과연 있기는 있구나. 시무(時務)를 아는 자 영웅이라 함은 그 대도 응당 짐작할 듯, 대세가 이미 기울어진 오늘날 손바닥만한 외로운 성을 지킨들 무슨 소용이 있을 것인가? 대병이 한 번 무찌르면 애꿎은 인명만 해할 것이 아닌가?

내 소정방 대총관의 명을 받아 그대를 치러 왔으나, 옛날 한 조정에 섰던 정의를 생각하여 그대에게 일르노니 순천자는 흥이요 역천자는 망이라, 그 대가 이 성을 가지고 빨리 항복하면 부귀와 영화를 같이 누리게 될 것이요, 만일 굳이 저항하면 신수이처(身首異處)에 후회한들 어찌 미치리오……?"

충상영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성 위에서는 우레같은 호통이 떨어졌다.

이놈 상영아 네 “ ! 듣거라. 너 이놈, 한 나라의 좌평으로 있으면서 적군이 쳐들어오거든 맞아 싸워 적군을 물리치고 종묘사직을 태산반석 위에 놓이게 하는 것이 재상으로 마땅한 일이요, 만일 힘이 거기 미치지 못하거든 배성일전(背成一戰)에 목숨을 바쳐 망극한 국은을 답할 것이어늘, 구구한 목숨을 살리고자 임금과 나라를 배반하고 밤을 타서 적진으로 달아났으니, 그것만 해도 그 미천 죄악(彌天罪惡)은 만 번 죽어도 씻을 길이 없지 않느냐. 또 한번 항복을 하였거든 아는 듯 모르는 듯 숨어 있어 구구한 목숨이 나 보전할 것이지, 인제 감히 진상에 나타나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더러운 줄도 모르고 아가리를 놀리니 네 죄야말로 절절가통하구나. 이 성으로 말하 면 나라를 바루 잡으려는 십만 충의지사가 한 마음 한 뜻으로 철석같이 굳게 맹서하고 있으니 백만 당병이 쳐들어온다 해도 몰살을 면치 못하려든, 하물며 그까짓 유인원 따위의 소정방 수하 편장이 거느린 오합지졸이리요.

내 들으매 네 군사 중에는 백제 사람이 많다기로 차마 한 나라 사람을 해치기 어려워 오늘날까지 은인자중하였을 뿐이다. 너 같은 늙은 여우의 고기는 비단 우리 성안의 장졸이 찢어먹으려 할 뿐만 아니라 직접 네가 거느리고 있는 백제 군사들도 네 간을 내어 씹기를 원할 것이요, 그나 그뿐인가, 지하에 있는 네 조상까지도 한시바삐 네 피를 마시지 못하여 몸부림쳐 울 것이다!”

상지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충상영의 얼굴은 각각으로 흙빛이 되어갔다.

상지는 한층 더 소리를 가다듬어,

“이 충상영을 따라온 백제 군사들 듣거라. 너희야 무슨 죄가 있으랴! 이 간신적자의 꾀에 한때 빠졌을 뿐, 이 역적을 좇다가는 너희들도 죽어 너희 조상을 볼 낯이 없을 것이다. 한시바삐 이 역적의 머리를 베어 이 성 안으로 돌아오라!”

말이 떨어지기 전에 당진 중에서는 별안간 ‘와!’하는 함성이 일어났다.

당진에서 일어난 함성은 백제의 항졸 한 떼가 문득 항오를 벗어나서 성밖의 목책을 향하고 내닫기 시작한 것이었다.

“우리가 우리 원수를 위하여 싸운다는 것은 뒤쪽이오.”

“역적 놈에게 속아서 한 나라 사람을 치러 온 우리가 매친 놈들이오.”

“흑치 장군님의 말씀마따나 우리는 성안으로 돌아갑시다.”

“성안으로 돌아가기만 하면 우리 죄를 사해 주실 테지.”

“그야 여부가 있소! 너희들이 무슨 죄가 있느냐고 흑치 장군님이 바루 그러지 않으셨소!”

“옳소! 옳소!”

제각기 떠들면서도 목책을 넘어 성문으로 몰려들었다.

말이 서로 통하지 않는 까닭에 당병들은 처음에는 백제 항졸들이 충상영 의 명령을 듣고 성을 돌격이나 하는 줄 알았다가, 나종에야 눈치를 알아차리고 달아나는 항졸의 뒤통수에 대고 활을 쏘아 제치었다.

맨 뒤에 따르던 군사가 ‘에쿠! 에쿠!’ 외마디 소리를 질르고 더러 넘어졌다.

“자아! 원수의 당병 놈들을 먼저 해냅시다.”

누가 소리를 지르자 닫던 항졸들은 다시 돌쳐 섰다. 그들은 당진을 향하고 활을 맞쏘기 시작하였다.

얼굴빛이 샛노래진 충상영은 그때까지도 성 밑에 오똑 말을 놓고 있다가, 제 등뒤에서 야단법석이 일어나매 어쩔 줄을 모르고 쩔쩔 매다가 말머리를 돌려 난군(亂軍)을 제지하려 하였지마는, 지금 와서 누가 그 영을 들을 씨알머리는 없었다.

“저놈부터 죽여라!”

“저 역적 놈의 목부터 베어라.”

화살은 충상영의 머리꼭지 위로 잉잉하고 소리를 내며 날아들었다.

충상영은 개고리 모양으로 말 등에 납작 엎드려서 말을 채질하여 당진으로 내뺐다.

상지는 문루에서 이 광경을 바라보다가 각 성문을 열고 적진을 짓치라고 명령을 발하였다.

원수를 눈앞에 두고 살이 떨리고 피가 뛰었으나, 망동을 말라는 군령의 굴레에 얽매어 이를 갈고 있던 성안 군사들은 명령 일하에 사자처럼 날뛰며, 굳게 닫히었던 성문을 열고 물밀듯 밀려나왔다.

지수신의 거느린 일대는 동문으로 나오고, 사질상여의 거느린 일대는 서 문으로 나왔다.

상지도 급급히 문루에서 뛰어나려 남문을 열고 주력 병마를 몰아 짓쳐 나갔다.

함성과 화포 소리는 천지가 뒤눕는 듯하고 벌떼 같은 화살은 폭풍우를 몰아가듯 당진에 퍼부었다.

자중지란에 창황망조하던 당병들은 불시에 총공격을 만나, 수각이 황란하여 이리 밀리고 저리 몰리는 바람에 서로 부딪고 엎더지고 자빠져서 죽는 자도 수가 없었다.

의기충천한 성안 군사들은 창과 칼을 번득이며 호통을 치며 세찬 기세로 당진으로 짓쳐들자 싸움이 채 어울려지기도 전에 당병은 겁을 집어먹고 물러나기 비롯하였다.

후진에 있던 유인원이 아무리 군사를 동독(董督)하여도 한 번 도망하기 시작한 군사의 발길을 멈출 수가 없었다.

지수신은 선봉 깃발만 바라보고 충상영의 뒤를 쫓아갔다.

워낙 벅적거리는 난 군중이라 한 사람의 뒤만 밟기가 용이한 노릇이 아니었다.

앞을 막는 적병을 헤치고 나가 보면 이따금 깃발이 온 곳 간 곳 없기도 여러 번이었다. 몇 번을 놓치고, 몇 번을 찾고…….

마츰내 그 깃발은 자기의 눈앞에서 서너 간통 밖에 떨어지지 않았다.

“이놈 충상영아, 게 있거라!”

벽력같이 호통을 치고 껑충 말을 채쳐 뛰어들며 미움에 서린 칼을 냅다 질렀으나 그 칼에 맞아 나둥그러진 장수의 얼굴을 보니 충상영이가 아니요, 낯모르는 다른 당장이었다.

지수신의 눈에서는 불길이 일어났다. 입때까지 죽을 애를 쓴 것도 헛일이 었던가.

깃대 쥔 졸아치를 사로잡아 충상영의 간 곳을 물으려 한즉, 그 졸아치는 이 백제 장군이 저를 쫓아오는 것이 제가 쥔 깃대 탓인 줄 깨닫자 그제야 그 깃대를 동댕이를 치고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달아나 버렸다.

지수신은 그 깃대를 뺏아 칼로 북북 그어서 겨우 분풀이를 하였다.

기실 충상영은 지수신이 자기를 쫓는 눈치를 채고 말에서 나려 졸아치 옷으로 변장하고 쥐새끼처럼 빠져나간 것이었다.

겨울 해는 짧았다. 미시에 시작된 싸움이 신시가 지나고 유시로 접어들자 날은 벌써 우둑어둑하게 되었다.

밑있성 밖으로 한 이십 리 가량이나 당병을 물리치고 상지는 쟁을 쳐 군사를 거두었다.

이 날 싸움에 당병을 여러 천 명 죽은 모양이나, 성안 군사는 단열 명이 상하지 않았다.

그 이튿날 날이 밝자 노획물(鹵獲物)을 거두어들이기에 백제 군사들은 한동안 고 비 끼이었다.

당병이 어떻게 황황급급하게 뺑소니를 쳤던지 길바닥 논두렁 밭둑에 깔린 것이 칼일세 창일세 활일세 화살일세. 다급한 김에 투구도 집어던지고 벙거지를 동댕이치고 심지어 군 복위 아랫마기를 홀랑 벗어놓은 것까지 무수하였다.

흩어진 병장기와 갑옷 등속을 줏어 모은 것만 해도 산더미 같았지만 고스란히 버리고 간 군량만 해도 천 석이 넘고 게다가 소가 수천 필이요, 말만 삼백 필을 헤아리게 되었다. 그 외에 술과 마른 고기와 육포도 끔찍 끔찍하게 남아 있었다.

싸움을 하러 온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고기수풀(肉林[육림])과 술못(酒池 [주지])에 진창만창 먹고 마시고 노라리질 하러 온 것이나 진배없었다. 그중에도 마소가 이렇게 많은 것은 아마 이 성을 두려뺀 다음에 노략질한 물건을 바리로 실어 가려고 미리 준비한 노릇인지도 모른다.

더구나 뒈져 넘어진 당병을 검사해 보매, 호주머니란 호주머니는 말할 것 도 없거니와 바짓가랑이까지 묵직묵직하게 늘어진 것을 보면 그 속에까지 노략질한 물건이 들어 있는 것이다.

“이런 육시를 할 놈 좀 보아. 이 바짓가랑이 속에 이 가락지를 넣었네 그려.”

하고 어떤 군사는 부연은가락지를 꺼내들고 동료들에게 보이는 이도 있었다.

“이놈 좀 보아. 이 허리춤에는 은장도 금장도며 새색시 노리개를 그대로 뽑아 넣었구먼.”

“뭐! 은장도? 내 딸도은장도를 차고 있었는데……. 그러면 그 몹쓸 놈이 내 딸을 죽이고 그것을 뽑지나 않았을까?”

늙은 군사 하나가 그 노리개를 눈에 데미다보며 이런 탄식도 하였다.

아무튼 노략 물품을 너무 많이 집어 넣은 탓으로 몸이 둔해져서, 다리를 잘못 놀려 제 명을 재촉한 놈도 더러는 있었던 모양이다.

상지는 노획 물품을 정돈시키고 당병의 죽은 송장은 여러 구덩이를 파고 묻어 준 다음에 크게 군사를 호궤하고 굳이 당병을 추격하지 않았다.

하루 이틀 군사가 예기를 기르는 것도 필요하였지만, 너무 적병의 뒤를 쫓는 것이 적지 않은 위험성이 있기 때문이었다.

당병도 백제 군사가 진(陣)친 자리에서 한 오리 가량 떨어진 자리에서 진 을 치고 다시 대오를 정제하는 모양이었으나, 더 물러가지도 않거니와 그렇다고 쳐들어오는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양군이 대치한 채로 하루이틀 지내었다.

이따금 당진에서는 북과 징과 꽹과리를 울리며 야단스럽게 함성을 올리었으되 헛기세뿐이고 싸움을 청하러 들이덤비지는 아니하였다.

백제진에서는 당진에서 함성이 일어날 때마다 군사들은 팔을 부르걷고, 이 번 한 번만 더 맞닥뜨리기만 하면 당나라 군사를 모조리 도륙을 시켜 놓 는다고 서둘렀으나, 좀처럼 싸우라는 명령이 나리지 아니하였다.

밤은 깊었다. 장막중에는 상지와 상여와 수신 등 백제군의 우두머리 장수들이 머리를 맞대고 앉아서 전략을 의론하고 있었다.

다혈질인 지수신은 오늘밤에라도 당진을 무찌르자고 주장하였으나, 상지는 종시 응낙을 하지 않았다.

“그야 지금 짓쳐 들어가면 우리가 이길 줄은 나도 모르는 바가 아니오.

그러나 우리 군사가 한 명이라도 상하는 것이 아깝지 아니하오? 적군은 몇 십만 명이나 된다 하니 더러 죽어도 얼마든지 더 보충할 수가 있지마는 우리 군사야 어디 또 있고, 또 있단 말이오? 한 번이라도 패전을 하든지, 설령 승전을 한다 해도 우리 군사가 축이 많이 나서는 안 된단 말이오.”

지수신도 상지의 곡진한 이 말에는 경의를 표하였지만 끝끝내 자기 주장을 굽히지 안 했다.

“흑치 장군의 말씀이 옳기야 옳소마는 하잘것없는 적을 눈앞에 두고 가만히 있으면 어떡하오? 언제나 도탄 중에 든 백제 유민들로 하여금 다시 천 일을 보게 한단 말씀이오?”

“지 장군의 무지개 같은 충의야 감복하는 바이지만 서둔다고 해서 일이 뜻대로 어디 되오? 며칠만 더 형세를 관망하는 것이 좋을까 하오. 적이 이따금 고각을 울리는 것이 허장성세하는 것인즉, 오래지 않아 싸우지 않고 물러갈 조짐인가 하오. 그때를 타서 시살(.殺)을 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인가 하오.”

서로 의론이 한창 분분할 때에 문득 파수 보던 군사가 장막 안에 나타났다.

“흑지 장군님께 여쭙니다. 웬 부인네 한 분이 말을 타고 와서 기어이 흑치 장군을 뵈옵겠다고 하옵니다.”

“웬 부인네가?”

하고 세 장수는 서로 돌아보았다. 그들의 머리 속에는 비단 허리띠에 글발을 적어 보낸 창화 부인이 한결같이 떠올랐다.

상지는 몸을 일으켜 장막 밖으로 나왔다.

깨어진 첫사랑

편집

그믐 가까운 밤이라 달은 없었으나 군데군데 하늘을 태울 듯한 화톳불과 횃불로 말미암아 바깥은 낮같이 밝았다.

파수병을 따라나온 상지는 저만큼 말을 타고 있는 부인이 첫눈에도 고량 부리 길거리에서 만난 그 귀부인이란 것을 대번에 알아볼 수가 있었다.

상지는 어떻게 반가운지 몰랐다. 그리고 그리던 고운 님을 무망중(無妄 中)에 만난들 이렇게 반가우랴.

상지는 거의 체모를 돌아볼 겨를도 없이 허둥지둥 달음박질을 하다시피 그 귀부인의 말머리로 달겨들었다. 손이라도 쥘 듯이.

그 귀부인도 자기에게 가까이 오는 이가 다른 사람 아닌 흑치상지인 줄로 알아보자 선뜻 말에서 나려선다. 그 휘청하는 가는 허리가 간드러지게 부러질 듯했으나, 가볍게 땅을 디디는 발을 사뿐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그 귀부인도 반가운 충동을 걷잡지 못한 탓이리라. 줄달음치듯 몇 걸음 마주 나오다가 두 사이가 너무 가까운 것이 혐의쩍다는 듯이 주춤 발길을 멈추었다.

“창화 부인이 아니시오니까? 이 밤에 어떻게……?”

천군만마를 호령하는 흑치상지였건만 웬일인지 목이 꽉 잠기는 듯하며 선선히 말이 나오지 않았다.

“흑치 장군님! 그 그동안 안 안녕하셨습니까? 제가 제가, 당돌히 여기 온 뜻은…….”

그렇게 돌올한 기상을 가졌던 창화 부인이었건만, 어쩐지 말을 잘 얼버무리지 못한다.

“부인의 나라를 위하고 백성을 사랑하시는 그 뜨거운 정성에는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습니다. 일신의 위험하심도 돌아보시지 않으시고 적진 중에 뛰어드시다니…….”

상지는 한순간 까닭 없는 흥분을 스스로 누르고, 제대로 인사말을 늘어놓기 시작하였다.

거물거물하는 불빛에 발그스름하게 타는 듯하던 창화 부인의 두 뺨도 새 하얀 상아빛으로 돌아갔다.

“천만에 말씀, 저 같은 것이 무슨 갸륵한 정성이 있사오리? 다만 천한 목숨이 살아있는 동안 장군님의 재생지은(再生之恩)의 만분지일이라도 갚사올까하고.”

“그 편지를 쓰기기에 얼마나 애를 쓰시고 위험을 무릅썼을지 이루 생각도 못할 바인 줄 생각합니다.”

“도리어 부끄럽습니다. 참 이번에 대공을 세우시고 당병을 혼띔을 주신 것을 생각하오면 어떻게 시원하온지.”

“아직도 앞일이 창창하온데 그까짓 조그마한 승전이 무엇이 장하리까?

그것을 전수이 부인께서 지시해 주신 덕택이 아니오니까? 어떻게 그렇게도 적정을 영절스럽게 살피셨는지 그저 감복 감복할 따름입니다.”

상지는 빙그레 웃으며 창화 부인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생겼길래 이 부인 이 그렇도록 영리하고 여무지고 자세할까…… 하는 것을 얼굴 어느 모습에서 찾아보려는 것처럼.

“아녀자의 소견으로 적정을 살핀다 하온들 오죽하리까? 그저 제가 아는 대로 허둥지둥 적었으니 알아보시기에 얼마나 지리하셨을지.”

맑은 눈이 샛별같이 번쩍이어 정기는 있어 보이지만 그 다소곳한 머리와 어둠 속에 떠오른 꽃잎 같은 입술이 그저 얌전하고 어여쁜 한낱 여인네로밖에 보이지 아니하였다.

“누추하나마 장막 속으로 들어가십시다. 밤 기운이 너무 냉랭해집니다.”

상지는 단둘이 얘기를 주고받는 것이 저도 모르게 즐거워서 부인네를 한 데 너무 오래 세워둔 것을 깨닫고 미안해 하였다.

“아닙니다. 제가 한만히 장막 속에 들어갈 겨를이 없을까 합니다. 아까 곧 말씀을 드리려 한 것이 쓸데없는 사설 때문에 늦어졌습니다. 제가 여기 온 뜻은 다름이 아니라 오늘 내일로 소정방이 떠나게 된다는 눈치를 채고 온 것입니다. 유인원이가 군사를 끌고 나갔다가 여러 날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는다고 소정방은 노발대발을 하였습니다. 그까짓 조그만한 성을 입때 무찌르지 못하고 무얼 하느냐고 날마다 첩보만 기다렸는데, 웬걸 어제는 도리 어 패전하였다는 급보를 듣고, 발을 구르며 유인원에게 이곳 치기를 고만두고 빨리 군사를 거두어 돌아오라고 명령을 나린 모양입니다. 오늘쯤은 유인 원이가 몰래 달아날지도 모릅니다. 이 기틀을 타서 한 번 시살을 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참으로 귀중한 소식입니다. 그는 그렇다 해도 잠깐 들어가시는 게 어떠 하십니까? 이 밤중에 더구나 난군 중에 어디를 또 가시려고 하십니까?”

“그렇게 말씀하시니 잠깐 머물까요? 이번에야말로 장군님의 쾌히 승전하시는 광경을 좀 구경할까요?”

하고 창화 부인은 어둠 속에서 방그레 웃었다.

당병이 오늘밤쯤 슬그머니 영을 빼어 달아날지 모른다는, 창화 부인의 정보에 상지는 급급히 장막 속으로 돌아와 창화부인을 여러 장수들에게 소개를 하는 둥 마는 둥, 일변으로 적정을 살필 두목 몇몇을 당진으로 띄워 보낸다, 일변으로 잠든 군사를 깨워 일으킨다, 한동안 야단법석을 쳤다. 이런 준비에도 떡 두어 시루 찔 시각을 지내었으리라. 급기야 졸리운 눈을 비비는 군사들 휘몰아 폭풍우같이 당진에 짓쳐들고 보니 당진 속에는 횃불과 화톳불만 거물거리고 기치창검을 야단스럽게 꽂아둔 허수아비가 즐비하게 늘어섰을 뿐, 산 물건이라고는 어리친 개아미 한 마리 없었다.

“ 이 오랑캐들이 벌써 도망질을 쳐 버렸군요. 아이 분해라. 제가 하루만 더 일찍이 왔던들…….”

상지를 따라 말을 채쳐 달려온 창화 부인이 누구보담도 더 애통해 하였다.

“내가 다 불명한 탓입니다. 저기 저 지 장군께서는 벌써부터 진군하기를 주장하셨지만, 내가 쓸데없이 은인자중하다가 필경 긴 배암을 놓치고 말았소이다.”

침 같은 수염이 꼿꼿이 일어선 지수신이 눈을 흘기다시피 하여 상지를 바라보는 눈초리에 마주치자, 상지는 면목 없는 듯이 이런 사과 비슷한 말을 하였다.

“그 원수엣놈들을 좀 더 시살을 못한 것이 유감은 유감이오마는 제출물에 달아난 것이 그리 해롭지는 않은 것인즉, 어디 흑치 장군의 불명한 탓으로 야돌릴 수 있소?”

안상한 사질상여는 은근히 상지를 위로해 주었다.

“나는 그까짓 당병 몇 놈을 더 죽이고 덜 죽인 게 분하다는 말이 아니오. 그 충상영이란 놈, 하루라도 한시라도 하늘을 같이 못 일 충상영이란 놈을 곱다랗게 놓쳐버린 것이 분해서 견딜 수가 없구려.”

하고 수신은 제 주먹으로 제 가슴을 쳤다.

“그놈을 놓친 것은 참 분하오마는 그 쥐새끼 같은 놈이야 한두 놈쯤 살아 있다기로 대세에 그리 큰 상관이야 있을 거요? 지 장군 고정하시오.”

상여의 이 말에 수신은 더욱 천길 만길 뛰었다.

“사질 장군! 그게 무슨 말이오? 어느 것은 일어탁수(一魚濁水)라고 고기 한 마리가 맑은 큰 강물을 흐려놓는단 말이 있지 않소? 고까짓 충상영이 한 놈이라고 하지마는 고따위 놈이 무참한 죽음을 죽지 않고 어엿한 부귀를 누려 보시오. 고놈의 뽄을 따라 몇 백 명 몇 천 명 충상영이란 놈이 생겨날지 모를 것 아니오?

바른 말이지 나는 당장과 당병은 그렇게 밉지 않소. 저희들도 저희 나라를 위하여 피를 흘리는 것이니, 우리에게 적은 될지언정 원수야 될 것 있소? 그런데 이 충상영이란 놈은 우리의 원수가 아니오? 원수를 눈앞에 두고 갚지 못하니 어찌 통분하지 않단 말이오? 고놈이 대당(大唐) 선봉장이란 깃발을 앞세우고 머 ‘순천자는 흥이요, 역천자는 망이라’ 고놈을, 고놈을!

수신의 입길에는 불길이 활활 일어나는 듯하였다.

글쎄 지 장군 고만두시구려 “ , . 고놈이 고런 소리를 암만한들 대세에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이오? 흑치 장군의 한 번 호통에 고놈의 얼굴이 흙빛이 되지 않았소?”

“대세, 대세, 장군들은 걸핏하면 대세를 내어세웁디다마는 대세가 기울어진다면 장군들은 하던 일을 고만 집어치울 터요!”

지수신의 말낱엔 칼날이 울었다.

“지 장군, 그것은 너무 과하실 말씀……. 어디 우리가 대세를 따라 마음이 변한단 말이오?”

입때까지 입을 닫치고 있던 상지가 벌컥 화를 내었다.

“그런 말로 괜히 때를 보낼 것이 아니라 횃불이 아직도 남아있는 걸 보면 당병이 달아나도 멀리 달아나지는 않았을 것인즉, 이대로 추격을 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오늘밤은 군사를 쉬이고 다시 방략을 생각하든지…….”

“물론, 추격의 손을 늦추지 말고 사자성까지라도 짓쳐 들어가야지요.”

지수신은 상지의 말을 받았다.

“당병의 의병(疑兵)을 꾸미고 횃불까지 잡혀 놓은 것을 보면 단단히 준비를 차리고 달아난 것인즉, 중도에 복병(伏兵)이 없지 않을 것이매, 이 어두운 밤에 눈 딱 감고 그 뒤를 추격한다는 건 위태로운 일일 듯하오.”

상여는 언제든지 자중론을 주창하였다. 이때까지 세 장수의 수작을 들으면서 무엇을 골똘히 생각하고 있던 창화 부인이 입을 열었다.

“제가 당돌히 한 말씀 여쭐까 합니다. 이런 좋은 기회에 사자성까지 짓쳐 들어가 보는 것도 물론 좋을 줄로 압니다. 중도에 복병이 있다 하온들 무에 신신하리까? 그러하오나 시방 적군을 함몰을 시키오면 소정방이 회군을 않을 줄 압니다. 제 알기로는 소정방이 내일 모레쯤은 돌아갈 터이온즉 그때를 기다리시는 것이 가장 상책일까 합니다.”

이 적세에 밝고 사리에 맞은 창화 부인의 말에 세 장수는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창화 부인의 말을 좇아 지나친 추격은 고만두고 그 날 밤은 뺏은 당영(唐 營)에서 쉬기로 하였다. 급살량으로 지은 영이긴 하지마는 물자가 넉넉하고 규모가 큰 그네들의 솜씨라 장수와 두목들의 장막 치장이 자못 구비하였다.

값진 비단 장막을 곱다랗게 남긴 것을 보면 계획적으로 물러는 갔다 해도 여간 다급하고 창황하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상지는 유인원이가 거처하였을 듯한 장막 속으로 창화 부인을 데리고 들어왔다.

은촛대에 팔뚝만한 밀초가 거물거물 춤을 춘다.

그놈들이 숭하게 도망질을 “ 쳤으나 매우 황급은 했던 모양입니다그려.

은촛대를 그대로 내버려두었으니.”

상지는 촛농이 많이 녹아 나려서 한 쪽으로 기우뚱해진 초를 바루잡으며 창화 부인을 돌아보고 빙그레 웃었다.

“참 그렇구먼요. 별일은 별일입니다. 그 욕심꾸러기가 촛대를 잊고 가다니요.”

창화 부인도 방싯 웃고, 그 아름다운 입술을 삐쭉하였다.

“당진 중에 계실 적에 그자들에게 곤욕도 많이 받으셨지요?”

상지는 창화 부인의 동그스름한 어깨판과 바람에 나부끼는 듯한 가느스름한 허리를 바라보며 동정을 억제치 못하였다. 저렇듯 연약한 여자의 몸으로 호랭이 같은 오랑캐들 틈바구니에서 어떻게 배겨났을까? 나라와 백성을 위 하는 한 조각 붉은 마음이 아무리 불같이 탄다 해도 여간 고되고 어려운 노릇이 아니었으리라.

“뭘요. 그자들도 웃두리 장수들은 제법 체모를 알더군요.”

하고 창화 부인은 부끄러운 듯이 고개를 숙이었다. 쥐면 꺼질 듯한 저 풍 정! 그 어디에 그런 매서운 용기가 숨어 있을까?

상지는 수수께끼 같은 이 아름다운 여인을 흥미 깊게 한동안 이모저모를 뜯어보다가, 깊은 밤 호젓한 장막 속에 젊은 부인과 단둘이 오래 앉았기가 예에 어그러진 짓인 줄 깨닫자 상지는 몸을 일으켰다.

“고단하실 텐데 잠깐이라도 눈을 붙이시지.”

“무에 고단할 거야 있어요? 휘젓해서 어디 잠이 올 것 같지도 않구요.”

창화 부인은 상지가 몸을 일으키는 걸 보고 질색을 하며 발버둥이라도 치고 부여잡을 눈치를 보이고서, 다시 말을 잇대었다.

“제 걱정을랑 말아 주세요. 장군님께서 정 고단하시다면 몰라도…….”

말씨는 매우 나긋나긋하고 서운한 울림이 역력하다.

상지는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내야 뭐 고단하지는 않습니다마는…….”

“그러시다면 더 앉아 계시는 게 어떠하실지? 오래지 않아서 밤이 밝을 것을.”

“그렇기는 합니다. 벌써 축시가 지나 인시로 들어가게 되었을 테니 …….”

상지도 굳이 돌아갈 생각은 물론 없었다. 체모를 돌보아 몸을 일으킨 것이지만, 이런 어여쁜 젊은 여성과 하룻밤을 얘기로 밝혀도 조금도 싫지는 않았다 임자 의 . (任子) 안해인 줄 알았지만, 또 그 전신이 무엇이었는지 궁금과 흥미를 한꺼번에 느끼었다.

상지는 도루 앉았다.

상지가 도루 앉는 것을 보고 창화 부인은 매우 반색을 하였다.

“저, 이 조그마한 가슴속에 첩첩이 쌓인 원과 한을 들어 주실지?…….”

“참, 그 편지에도 긴 사연은 접어둔다 하셨지. 그 사연을 알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이야기를 다하자면 이 밤이 다 밝아도 끝이 안 나겠습니다마는…… 호호.”

창화 부인은 한숨을 길게 쉬었다.

상지는 창화 부인 앞으로 몇 뼘 다가앉으면,

“그러면 얘기를 시작하시지.”

간단하게 재촉을 하였다.

“들려 드렸자 신신치 않은 아녀자의 신세타령, 장군님의 귀를 더럽힐까 저어합니다마는 어디다가 호소할 데도 없는 야릇한 운명에 번롱된 이 몸입니다.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벙어리 냉가슴 앓듯 제 가슴속 깊이 감추어 둔 비밀, 장군님께는 꼭 한 번 이 비밀을 호소할까 벼르고 별렀던 차입니 다. 이야기를 하자니 흉격이 막혀서…….”

그 호수같이 맑은 눈에 어른어른 눈물 안개가 끼이었다.

“저의 집은 바루 사자 강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답니다. 저의 아버지는 장덕(將德)이란 벼슬을 다니시다가 연만하시어 고만두시고 오랍동생도 없이 외톨이로 자라났답니다.”

창화 부인은 마츰내 신세타령의 허두를 내어놓았다.

🙝 🙟

얘기는 십 년 전으로 돌아간다.

그때 창화의 나이는 열여섯.

봄날 꼭두식전의 사자강은 적막하도록 종용하다. 젖빛 안개에 휩싸 안긴 물결은 밤새도록 울어예다가 샐녘에야 고달픈 잠에 떨어진, 수멸수멸 졸음 오는 눈을 깜박이는 듯 실바람조차 일지 않는다.

창화는 연년 묵은 수양버드나무 밑에서 물을 풍풍 펐다. 그 나무는 반 아름이나 되도록 굵었지만 중허린 껍질이 벗겨지고 드러난 속고갱이가 우글쭈글 울퉁불퉁, 더러는 시꺼멓게 썩고 여기 저기 구멍조차 움푹움푹 뚫리어 겪은 풍상이 얼마나 오래고 고된 것을 일러준다. 그러나 밑둥과는 딴판으로 윗줄기는 씽씽하게 뻗을 대로 뻗어 새파랗게 물오른 품이 연연할 지경인데 휘어진 가지는 천 가닥 만 가닥 늘어져서 두어 간통이나 어란을 잡았다.

창화가 철철 넘도록 물 한 동이를 길어 놓고 할 일을 다 마쳤을 때, 돌리는 숨을 호오 내쉬고 정겨운 물결을 떼치기 어려운 듯이 손으로 몇 번 물을 움켜 보다가 물동이를 이려고 들여다보니 이게 웬일인가? 분명히 수정같이 맑고 정한 물을 길러 놓았는데 웬 버들 잎사귀가 한 줌이나 동이 위에 둥둥 뜨지 않는가. 이상도 스러운 일, 바람도 불지 않거늘 어디서 버들잎이 이렇 게 많이 날아들어 왔을까? 아마도 물 위에 뜬 버들잎을 몰라보고 그대로 퍼부은 듯.

창화는 하는 수 없이 한 동이 물을 그대로 쏟아 버리는 수밖에 없었다.

창화는 다시 물을 펐다.

이번에는 눈을 닦고 티꺼풀 하나 들어가지 않도록 바가지로 물을 여러번 저어 가며 한 바가지 두 바가지 정성스럽게 퍼넣었다.

물을 골라 뜨노라고 정신이 쏠리어 정작 제 물동이 속을 보살피지 못하였다.

이번에도 거의 치면하게 길었을 때, 아까보담도 더 많은 버들 잎사귀가 넘실넘실 동이 물을 덮었다.

이것은 정말 속이 조화 붙을 일이다.

창화는 등뒤의 버드나무를 돌아다보았다. 가지는 척척 늘어지기는 하였지만 간댕도 하지 않는다. 갸름갸름한 잎사귀들이다. 소곳하게 고개를 숙이 고, ‘난 안 그랬어요, 난 안 그랬어요.’ 변명하는 것 같다.

“참 속상해 죽겠네!”

창화는 짜증을 내었다.

‘혹시나 도깨비 장난이나 아닌가?’ 창화는 불현듯 이런 생각이 들었다.

휘젓한 강가, 몽실몽실 물 얼굴에서 피어오르는 실안개도 어쩐지 무시무시 한 생각을 자아낸다.

머리끝이 쭈뼛쭈뼛해지자 그의 손에서는 바가지가 저절로 떨어졌다.

집으로 줄달음을 칠까?

막 한 걸음을 내어 디디려 할 제 문득 버드나무 뒤에서 ‘카악!’ 하는 사람 기침 소리가 났다.

창화는 왼몸이 오그라 붙었다.

어슬렁어슬렁 둔덕을 나려오는 걸 보면 바루 옆집에 사는 총각 수진(守眞)이었다.

“에그 깜짝이야! 난 누구라고.”

창화는 놀라는 중에도 아는 사람을 만난 것이 반가웠다.

“왜 사람을 보고 놀래기는!”

수진은 싱글벙글 웃으며 창화의 곁으로 가까이 왔다. 수진은 창화보담 한 살 더한 열일곱, 어릴 때의 한 살은 어른의 십 년 맞잡이다. 더구나 사내꼭지, 수진은 창화보담 제법 의젓하고 점잖고 의뭉스러웠다.

“이것 좀 봐요. 물을 길어 놓으니 자꾸 잎사귀가 들어가는구만.”

창화는 곧이곧대로 원정(原情)을 하였다.

“그것 참 귀신이 곡할 노릇이군. 어디?”

하고 수진은 물동이를 이윽이 굽어보다,

“그것두, 바람도 자는데 웬 버들잎이 이렇게 많이 날아올까? 참 이상도 스럽군. 아마 도깨비 장난인 게지.”

“에구, 어마!”

창화는 질색을 하면서도 수진이 생각이 자기와 꼭 같은 것이 속으로 신통하였다.

“여기서 어머니를 불르면 그렇게 냉큼 오셔서 젖을 물려 주실 테야? 히히.”

“남 무서워 죽겠는데 웃기는.”

창화는 톡 쏘았다.

“어디 내가 물을 한 번 퍼 볼까? 버들잎이 또 떨어지나 아니 떨어지나, 허허.”

수진은 면구스럽도록 창화의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한번 너털웃음을 웃고, 동이 물을 쏟고서 제가 펑펑 물을 푸니 대번에 한 동이가 되었다.

“버들잎은커녕 티꺼풀 하나 없지 않아. 물을 푸면 나같이 퍼야 되는 거야.”

수진은 흰소리를 하고 창화에게 물을 이워 주고 허위허위 강둑길을 올라 갔다.

창화는 수진 총각의 신세를 여간 많이 지지 않았다.

창화의 아버지는 늙은 병객(病客)이다.

무슨 병인지 의원에 따라 병명은 다 달랐지만 이따금 쿨룩쿨룩 기침도 하고 먹는 것이 도모지 소생이 되지를 아니하였다. 껄껄 트림을 하며 일 년 열 두 달 자리를 떠나는 날이 별로 드물었다.

재취댁인 그의 어머니도 나이는 아버지보담 십 년이나 젊었으나, 정수리 머리칼이 다 빠지고 부족증 같은 증세가 있어서 개신개신 몸을 추스르지 못하는 탓에 나이보담 엄청나게 더 늙어서 누가 얼른 보면 아주 걸맞은 부부로 속게쯤 되었다.

장남한 아들이 없으니 벌어들이는 사람은 하나도 없고, 벼슬 다닐 제 근사를 모아 놓은 논밭 몇 뙈기와 얼마 안 되는 전량을 곶감꼬치 빼먹듯 하고만 보니 살림살이는 나날이 구간해질 밖에 없었다.

그리고 떠나지 않는 우환. 집 안은 언제든지 밝은 햇살이란 비치지 않고 잿빛 안개가 우중충하게 졸 듯.

집안 형편이 괜찮을 때에는 남종 여종이 두셋씩은 있었지만 상전의 집이 간구해지고 보니 종들이 뿔뿔이 달아나 버린 것이다. 종을 찾을 근력도 없었거니와 설령 찾는다 해도 먹이고 입힐 것이 걱정이 되어 흐지부지 그대로 내어 버려 두고 만 것이다.

그러니 힘찬 일은 자연 수진이가 보아주게 되었다. 수진은 여러 형제 중에 막내둥이라, 자기 집에는 손보가 갖아서 하필 수진의 손을 빌리지 않아도 무방하였던 것이다.

앞뒷집에 사는 탓으로 수진과 창화는 어릴 적부터 소꿉동무이었다.

나이 찬 뒤에도 그들은 새삼스럽게 내외를 할 필요도 없었다.

창화가 수진의 집에 놀러를 가도 수진의 부모도 심상히 보고, 수진이가 창화의 집에 놀러를 와도 창화의 부모가 고이쩍게 알지 않았다. 고이쩍게 알지만 않을 뿐인가, 오히려 반색을 할 지경이었다. 장작을 쪼갠다든가, 쌀 가마니를 들만진다든가 하는 힘든 일을 수진이 아니고는 누가 해 준단 말인가.

그나 그뿐도 아니다. 마음씨 좋은 수진은 나무를 한 짐 잔뜩 해 가지고는 자기 집으로는 가져가지 않고 쉰길로 창화의 집으로 가져오기가 일쑤이었다.

어떤 때는 고기매나 생선 마리를 사 가지고 와서 창화 어머니를 주며,

“옛소, 아주머니, 이것 해 잡슈.”

하는 때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수진은 자기 집 살림보담도 창화의집살림살이 켯속을 더 잘 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는 창화가 반찬 없는 밥을 목고개를 타라매고 먹는 것을 차마 볼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이런 선물을 받을 적마다 창화의 어머니는,

“이것 염치 없구나.”

뭘 그러셔요해 잡수셔요 “?. 저 오늘 품팔이를 해서 돈푼이나 벌었답니다.”

수진은 대답하고, 그대로 휭하니 달아나 버렸다.

그래도 벼슬깨나 살던 집안에서 외동딸을 농군 집안에 시집보내긴 가당부당한 노릇이로되, 기실 수진이 집안도 웃대에는 좌평, 달솔 같은 높은 벼슬을 산 이가 없지도 않으니 바이 상사람이라 할 수도 없거니와 수진이가 사람이 그만큼 착실도 하고 얌전하니 데릴사위로 만들어 노래(老來)를 의탁하자는 생각도 아주 없지는 않았던 것이다.

‘아직은 저것들이 나이 어리니 어디 장래를 두고 보자.’ 하는 것이 창화 부모의 생각이었다. 더구나 오늘날 수진이를 떼치고는 아쉬워서 견딜 수가 없는 형편이었다.

수진의 집안에서는 장덕(將德)이라면 칠품 벼슬이니 그렇게 놀라울 것은 없었지만 그래도 자기네들보담은 양반 명색이니 말하자면 양혼(良婚)이요, 또 많은 아들들 가운데 하나쯤 데릴사위로 주어도 그리 원통할 것은 조금도 없었다. 넉넉지는 않다고 하지마는 그래도 박토(薄土) 마지기나 있는 모양 이니 설마 한 거리야 되지 않으랴고 셈속을 빨리 따지었던 것이다.

두 집 부모의 묵허 아래 그들의 풋사랑은 봉오리를 맺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요즈막 해서는 창화는 수진을 만나면 웬일인지 부끄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이날 이때까지 조석으로 만나다시피하던 사람이 왜 갑자기 이렇게 부끄럽단 말인가. 밤 사이에 제 코나 비뚤어졌단 말인가.

밖에서 자기 어머니에게 웅얼웅얼 중얼거리는 수진의 목소리를 들어도 창 화는 아예 문을 닫고 내다보지 않았다. 내다보지 않았으면 고만이겠으되, 까닭 없이 마음이 오마조마해지며 바늘방석에 나 앉은 듯.

“왜 얼른 가지를 않구. 괜스레.”

창화야말로 괜스레 짜증을 내었다.

얼굴이 확확 달아오른다. 그러나 막상 수진이가 대문 밖을 휭하니 자가는 기색을 차리면 창화는 안절부절을 못한다.

쿵덕쿵덕 골목 밖을 걸어나가는 발소리를 들으면 가슴을 쥐어짜고 싶다.

인제 한 번 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사람을 영영 놓친 것처럼 눈물이라도 펑펑 쏟아질 것 같다.

“어쩌면 그새 벌써 달아났담!”

창화는 제가 일부러 내다보지 않은 것을 잊어버리고 혼자 야속한 듯이 중얼거렸다.

줄달음이라도 쳐서 뛰어나가고 싶었으나 봉당에 나려선 발길이 얼어붙은 듯 꼼짝을 못하는 창화이었다. 그의 귀에는 어디만큼 걸어가는 수진의 발소리만 우레같이 들리었다. 발자욱뿐만 아니라 자기가 내다도 보지 않았다 하 여 그 골이 팅팅 오른 숨소리가지 씨근씨근 들려왔다.

그러나 부엌에서 서름질을 하거나 또는 마당에서 빨래가지를 널 때에 수진이가 무망중에 쑥 들어와서 딱 마주치면 가슴속에서 무엇이 뚝딱 하고 부러지는 듯하며 머리골까지 힝힝 내어둘린다.

수진이가 쓸데없는 말을 건네고 지싯지싯할수록 창화는 땅이라도 파고 들어가고 싶다.

그렇다고 해서 창화가 수진을 피하고 절대로 만나지 않는 것은 물론 아니다. 열 번에 한 번쯤 안 보고 돌려보내도 염통이 발랑발랑 터질 지경이거늘 어찌 만나지 않고서야 하루인들 배길 수 있을 것이냐!

더구나 아니 만나랴 아니 만날 수가 없기도 하다. 수진은 창화의 집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창화가 빨래하는 데나 물 긷는 강둑에나 나무 캐는 밭두렁 산기슭에도 언제든지 수진의 그림자는 나타나고야 말았다.

하루는 부소산으로 산나물을 캐러 갔다.

수진은 사람 먹지도 못할 풀을 나물이랍시고 뜯어다가 여러 번창화에게 구박을 맞는 탓으로 인제 와서는 나물을 곧잘 알아보고 그 어수선한 이름들도 곧잘 알아 맞추게 되었다. 뚝갈이. 야 부둥이 . 이역취풀…….

누가 많이 뜯는가 내기까지 한다.

“이것 봐. 난 이렇게 많이 뜯은걸.”

수진은 제 옷섶 자락에 가득해진 나물을 창화의 보구니에 툭툭 털어 넣으며 자랑하였다.

“고까짓 것. 난 이만큼 많은데.”

창화도 지지 않았다.

“어디 허허. 참 사람 기막혀 죽겠네. 눈에 면화씨가 배겼기로 그래, 그걸 이것보다 많다고 한담?”

사실 창화의 뜯은 분량이 그 난 따라 수진이 것만 어림없이 적었다.

창화는 골이 올랐다.

“사내 대장부가 나물 많이 뜯은 게 머 자랑인가.”

하고 입을 배씻하며 쏘아붙인다.

“이럴 때만 사내 대장부를 찾거든 흥, 계집애 솜씨가 그렇게 맵짜하더라. 흥.”

수진은 창화의 얼굴을 뚫어질 듯이 들여다보며 빙글빙글 웃어댄다.

“남의 얼굴은 왜 그렇게 들여다본담?”

하고 창화는 통통 부은 뺨을 앵돌린다.

다 익은 앵두처럼 아늘아늘한 뺨이 봄볕을 안고 터질 것 같다.

“하하, 할말이 없으니깐.”

하고 수진은 그 고운 뺨에 악마디 센 제 손끝을 대기가 황송쩍다는 듯이 가볍게 튀기었다.

“왜 사람을 쳐요?”

창화는 악을 쓰고 더욱 앵돌아진다.

수진은 뒤로 벌렁 자빠지며,

“에이, 무서워라. 사람 경풍하겠네.”

잔디는 보들보들 몸이 폭 잠드는 것 같다.

그들의 눈위와 눈앞에는 아지랑이가 춤을 춘다.

창화도 골이 잔뜩 난 듯이 먼 산만 파고 있었다.

“그렇게 성낼 게 뭐여? 내 튀긴 게 그렇게 몹시 아프더람?”

수진은 손깍지를 껴서 빌며 혼잣말같이 중얼거린다.

“그럼, 아프지 않고…….”

하면서도 갸웃이 수진을 나려다본다.

“어휴, 가엾어. 쉬쉬.”

하고 수진은 벌떡 몸을 일으켜 창화의 뺨을 쓰담으려 하였다.

“에구머니!”

창화는 외마디 소리를 치고 내뺐다.

창화는 뺑소니를 치자 수진이도 몸을 일으켰다.

“별안간 살매가 들렸나? 달아나기는 왜 달아나?”

달음박질쳐 내빼는 창화를 느싯느싯 쫓아가며 수진은 소리를 질렀다.

창화는 저만큼 떨어져서 새빨간 얼굴을 돌이키며,

“왜 남의 얼굴에 손을 대려 들어?”

“손을 대기는 누가 손을 대어?”

“저런, 금새 거짓부리야. 누웠다가 벌떡 일어나며 남의 뺨을…….”

하다가 창화는 고개를 푹 숙이고 다시 달음박질을 치기 시작하였다.

“내 안 그럴게. 내 다시는 안 그럴게.”

수진은 미두발괄하며 뒤를 따랐다.

창화는 들은 체도 아니하고 닫기만 한다. 수진의 걸음도 빨라졌다.

숨바꼭질이 되고 술래잡기가 되었다.

아름드리 소나무를 새에 두고 뺑뺑이도 돌았다. 골로 나려 뛰고 메 등으로 기어올랐다.

그들은 나물 보구니가 어디 있다는 줄은 잊어버리고, 즐거운 장난에 발 닿는 곳으로 마구 닫고 마구 쫓았다.

“어, 이게 웬 야단이야!”

수진에게 잡힐 듯 잡힐 듯하여 엎드러지며 고꾸라지며 앞뒤 분간도 없이 줄달음을 치는 창화의 귓결에 점잖고 꺽꺽한 소리가 떨어졌다.

창화는 걸음을 주춤 멈추고 소리나는 곳을 돌아다보았다. 이게 운명적 순간일 줄이야.

거기는 젊도 늙도 않은 한 축이 모이어 술상을 벌여 놓고 봄놀이에 한창 흥이 겨운 모양이었다.

여럿의 시선은 창화에게로 쏠리었다.

일순간 술잔도 멈춰지고 말소리도 끊어졌다. 그들은 창화의 뛰어나게 아름다운 얼굴에 넋을 잃었던 것이다.

“고것 참 예쁘구나!”

술 묻은 수염을 쓱 닦고 시뻘건 얼굴을 앞으로 내밀어 좌중에 제일 낫살이나 먹은 듯한 위인이 입을 열었다.

“과연 절색인데…….”

“우리는 이 날까지 괜히 헛돌아다녔구려.”

“아주 됐는데 됐어.”

“고것 그대로 꼴딱 집어삼켜도 목구녕에 걸리지도 않을 것 같은데.”

창화는 무안해서 주춤 걸음을 멈추었다가 다시 몸을 돌려 가려고 할 제, 그 맨 처음에 말을 꺼낸 ‘시뻘건 얼굴’이 벌떡 일어나서 창화 가까이 왔다.

“얘 아가, 거기 잠깐 있거라. 내 좀 물어볼 말이 있으니.”

창화는 어른 대접으로도 그대로 내빼자는 수도 없었다.

수진은 머쓱하여 저만큼 떨어져서 이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얘, 아가! 너의 집이 어디냐?”

그 시뻘건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웃음을 벙글벙글 흘리며 꽤 부드러운 목소리를 내었다.

“그건 알아 뭘 하셔요?”

창화는 그 위인의 기색을 살피며 쌀쌀하게 대꾸를 하였다.

“아니 저, 아니 저, 그런 게 아니라…….”

그 위인은 꾸며대노라고 잠깐 애를 쓰는 듯하더니,

“그런 게 아니라, 너 아버지 계시지?”

“네 계셔요.”

“오옳지, 그러면 그렇지. 그런 게 아니라 내가 오래 못 만난 친구 하나 가 있는데, 그 친구에게 꼭 너 같은 딸이 있었단 말이야. 알아듣니? 그래서 말이야. 네가 어디 사는 걸 알면 내가 좀 따라가 보겠단 말이야.”

창화는 자기 아버지에게 별로 친구라고 찾아오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 염량세태(炎凉世態)에 벼슬도 떨어지고, 병들고 가난한 친구를 찾는 사람이 쉽지 않은 탓이리라.

“그 친구 어른의 함자가 누구신데요?”

영리한 창화는 이 위인의 어물어물하는 수작이 암만해도 수상쩍어서 한번 따져보았다.

“함자, 함자? 글쎄, 함자고 뭐고 만나보면 자연 알 테니까, 너의 집이 어디있다는 어림만 알으키라누나.”

창화는 의심이 더럭 났으나, 구태여 제사는 데를 아니 가르쳐 줄 까닭도 없었다. 아무리 총명한 창화이었지만, 제 집을 알리는 게 어떻게 무서운 결과를 맺을지는 꿈에도 생각지 못하였던 것이다.

“사자 강둑에서 얼마 들어오지 않는 버들골에 살아요.”

마츰내 순순히 대답을 하고 말았다.

“오! 그러냐. 그렇다면 바루 그 친구가 적실하구나.”

‘시뻘건 얼굴’은 덩실덩실 첨이라도 출 듯이 기뻐하다가 수진을 힐끗 바라다보며,

“저 총각은 누구냐? 너 오라비냐?”

넌지시 묻는다.

“…….”

창화는 다시 더 대꾸할 필요가 없다는 듯이 몸을 홱 돌리어 종종걸음을 쳐서 나물 보구니 둔 데를 찾아갔다.


창화는 얘기가 예까지 이르자 목에 메이는 듯이 잠깐 말을 끊었다.

새벽 바람이 일어나는지 장막이 펄렁펄렁하고 켜켜이 촛농 앉은 촛불이 거물거물 꺼지려 한다.

창화는 다시 심지 끄트머리를 떼어내었다.

“그러면 그 부소산에서 술을 먹던 자들이 임자(任子)네 집 구종들이었나요?”

흑치상지는 의외의 애틋한 얘기에 끌려들어 뒤끝을 재촉하는 의미로 무거운 입을 열었다.

창화는 한 번 길게 한숨을 쉬고 나서 말끝을 이었다.

그렇습니다 구종은 “ . 아니라도 임자의 문객들이었습니다. 주인 대감의 은밀한 명을 받고 미색을 찾으려고 산지사방 싸지르는 작자들이었습니다.

이자들의 눈에 띄고 말았으니 저의 운명은 벌써 작정이 되고 만 것이었습니다. 만일 그날, 부소산으로 나물만 캐러 가지 않고, 그 방정만 떨지를 않았던들 저의 운명은 또 어떻게 변했을지 모르지요. 그자가 능청을 부리는 바람에 혹시 정말 아버지 친구나 되는 줄 알고, 사는 동네 이름까지 꼬박이 대어 주고도 신지무의(信之無疑)하고 사흘을 지냈습니다. 사흘 되던 날 아닌 밤중에 별안간 문간이 들레며 문을 열라고 야단야단을 칩디다. 가까운 일가친척이 없으니 밤중에 찾아올 이도 없었지만, 열라는 문을 아니 열자는 수도 없어서 저와 저의 어머니가 진둥한둥 일어나서 대문 빗장을 벗기고 말았습니다. 저를 잡으러 오리라고는 꿈엔들 생각을 하였겠습니까!

창화는 지금 생각해도 분한 듯이 몸을 바르르 떨었다.

“벙치 쓴 놈에, 패랭이 쓴 놈에, 십여 명이 거침없이 문 안으로 쑥 달겨 들었습니다. 종놈에게 횃불을 잡히고 앞장을 서서 들어온 놈이 바루 그 날 부소산에서 본 얼굴 시뻘건 작자이었습니다. 그자는 대번에 저를 알아보고, ‘이 색시다, 이 색시다! 곱게 모시어라.’하고 여러 놈에게 명령하였습니 다. 그제야 어린 맹추 같은 소견에도 이자들이 나를 잡으러 왔구나 생각을 하고 겁결에 마루로 뛰어올라 안방으로 숨으려 하였으나, 안방 문을 채 열 기도 전에 그 자들의 쇠깍지 같은 손은 벌써 저를 붙들고 말았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쿨룩쿨룩 기침을 하시고 방에서 뛰어나오시며, ‘이놈들이 웬놈들이냐? 이게 무슨 해괴한 짓이냐!’ 호통을 치셨으나 그자들이 들은 척이나 하겠습니까? 어머니께서도 울며불며 저를 잡아가는 놈에게 몸부림을 치시고 매어 달렸으나 수많은 장정을 잔약한 부인네의 혼자 손으로 어떻게 당해낼 수가 있겠습니까. 저는 등채를 밀리어 어느 결에 골목 밖을 나오게 되고, 거기 마츰 등대해 놓았던 교군에 태이어 풍우같이 몰려갔습니다. 아무리 발버둥을 치고 몸부림을 하였지만 무슨 소용이 있었겠습니까?……”

“저런, 죽일 놈들이……”

상지도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분해 하였다.

“화적떼도 못할 짓, 그것이 일국의 재상이 할 노릇일까? 천참만륙을 해도 죄상이 남을 놈 같으니!”

“교군 속에서 바둥거리고 있을 제 ‘창화야! 창화야!’ 세차게 부르짖는 귀에 익은 소리를 듣고 정신이 번쩍 나서 교군 휘장을 뜯고 뛰어나오려고 하였으나, 여러 놈에게 붙잡히어 옴치고 뛸 수도 없이 몰려가는데, 등뒤에 서는 연송 아얏 ‘ ’ 소리가 나고 ‘창화야! 창화야!’ 부르는 애닯은 목청 도 나중에는 실낱같이 들려왔습니다.

수진 총각이 잠결에도 저의 집에 무슨 야료가 생긴 중 알고 뛰쳐나와 이 광경을 보고 달겨들다가 무지한 그놈들에게 무진 매를 맞고 쓰러진 것이 분명하였습니다. 그때 제 마음이 어떠하였겠습니까?

창화의 눈에는 눈물이 핑하고 고이었다. 그때 가슴이 갈기갈기 찢기었던 추억이 지금도 새삼스럽게 비감한 생각을 자아내는 듯.

“그래서 저는 천만 가지 원한을 품은 채로 임자의 집사람이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절곡(絶穀)이라도 하고 기어이 죽으려 하였으나 며칠 후에는 어머니께서 오셔서, 이왕지사 팔자가 기구하여 이렇게 된 받자에야 악지를 부리면 무엇 하느냐, 대감이 그다지 인후하시니 혈마 너 하나야 거두어 주시지 못할 테냐, 아무 염려 말고 밥 발 먹고 잘 있으라고 달래시겠지요. 아마 임자가 사람을 보내어 어머님을 불러오고, 꾀음꾀음한 모양 같더군요. 어머님의 권에 못 이기어 필경 밥을 뜨게 되고, 세월이 약이라 그럭저럭 모진 목숨을 부지는 해 왔지마는, 구곡간장에 맺히고 서린 원한이야 어느 때인들 잊을 수가 있겠습니까?”

창화는 흐른 때 모르는 눈물을 다시 닦았다.

“아버지 어머니 생활은 제가 모시고 있을 때보담 얼마쯤 나아진 것 같았습니다. 저의 어머니께서는 번번이 들어오시지는 못하였지만, 꽤 반반한 차림차림을 한 계집종이 저의 집에서 왔노라 하고, 아버지 어머니의 전갈을 전해 주었습니다. 우정 전갈이 아닐진댄 제 있을 때 없던 종이 있는 걸 보아도 혹시 집에서 데렸거나, 그렇지 않으면 임자가 계집종 중에서 뽑아 보낸지도 모릅니다. 그년의 입으로 오늘은 피륙을 얼마를 들여왔네 어제는 돈을 몇 바리를 실어오고, 그저께는 쌀을 몇 섬을 가져왔네 하고, 임자의 후덕한 것과 인자한 것을 입에 침이 없이 칭찬을 하였습니다. 물론 제 멋대로 하는 말이 아니요, 아버지의 전갈일세, 어머니의 부탁일세 하고 이런 소식 을 전해 주었습니다. 처음에는 도모지 곧이 들리지 않았으나, 그년이 생판으로 거짓만 주워댈 리도 없겠으니 임자가 뒷구녕으로 전곡간 저의 집에 보내주는 것은 참말 같기도 하였습니다. 벌어들이는 이 없는 간구한살림이 풍성풍성해진 것이 어린 소견에 적이 위로가 되지 않음이 아니었지만, 이 몸을 겁탈해 온 별미로 내 부모에게 쌀 말이라도 대어 주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 임자에게 대한 감사한 생각은커녕 배심은 더욱 심해갈 뿐이었습니다. 딸년은 옥살이보담 더 못할 노릇을 하는데 빼어내 올 생각도 않으시고, 그 흉한 자의 돈과 쌀을 받아 자시는가 생각하면 황송한 말이나 부모님에게까지 배심이 들었습니다(背心). 이래 마음을 도사려 먹어도 원통하고, 저래 생각을 돌려보아도 분 덩이만 치밀어서 거의 눈물로 세월을 보냈습니다.”

창화는 가쁜 듯이 잠깐 숨을 돌리었다.

“그러하시겠지. 그러하시겠지. 그 노릇이야 어디 사람으로 차마 당할 노릇인가!”

상지는 고개를 떨어뜨리고 괴탄(愧歎) 괴탄하였다.

“이것은 부끄러운 말씀입니다마는 장군님께 야 무엇을 기이리까?”

하고 살짝 얼굴을 붉히고 나서 창화는 다시 제 신세타령으로 돌아갔다.

“부모님에게까지 배심이 들면 들수록 일구월심에 잊혀지지 않는 것은 수 진 총각이었습니다. 앞뒷집에 같이 살고 신세도 많이 진 탓에 바이 모르는 사람이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무슨 이렇다 할 아무 까닭이 없었거든 이렇게 떠나고 보니, 이렇게 다시 만나랴 만날 수 없게 되고 보니 그런지 여간 마음이 쓰이고 간절하지가 않습디다그려. 그 시꺼먼 눈썹과 어글어글한 눈매가 자나깨나 눈앞에 밟히어 견딜 수가 없습디다그려. 어느 때는 밖에서 ‘창화야!’하고 부르는 소리가 정녕 난 듯하여 버선발로 뛰어나가 본 적도 있었습니다. 어쩌면 사람이 그다지도 달뜰까요? 호!”

창화는 제 자신이 어이없다는 듯이 방싯 웃고 고개를 숙이었다. 그럴싸해서 그런지는 모르나 그 보얀 목덜미도 살짝 붉어지는 것 같다. 천군만마와 검극이 서리 같은 데를 필마단기로 드나드는 이 여장부도 이런 교태는 아주 숫색시다.

흑치상지의 머리에는, 고량부리거리에서 뭇사람들의 돌팔매 앞에도 굽히지 않다가 자기에게만 고개를 다소곳하고 수줍어하던 정경이 불현듯 떠올랐다.

상지는 이상한 충동을 느끼었다. 그러나, 그 다음 순간에는 어느 결엔지 창화는 다시 몸을 바루잡고 그 범하지 못할 돌올한 기상을 회복하고 말았다.

“참 별말씀을 다 여쭙니다마는 그럴 적마다 저의 마음은 야릇하게도 군 성거리었습니다. 세상에 모든 일이 같잖고 시들해지고, 되는 대로 되어라 하는 되지 못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임자(任子)가 권하는 대로 술을 몇 잔씩이라도 받아먹고, 어려서 배우지 못한 춤도 추라는 대로 제치고, 할 줄 모르는 노래를 흥겨운 듯이 부르기도 하였습니다. 아주 참 화냥년이 되어 버렸지요.” 하고 창화는 그 유난히 붉은 입술을 빼쭉하였다. 그 얼굴은 한 없이 번화해지면서도 쌀쌀한 찬 기운이 도는 것 같다.

“이런 말씀을 하면 저의 발뺌 같지만서도 짐작하시다시피 소위 백제 재 상가의 생활이란 (宰相家) 오죽 난잡합니까. 그중에도 임자가 우두머리였으니 말할 것도 없지요. 정실은 고만두고라도 첩만 저 알기 열일곱이었으니까요. 개중에는 별의별 잡년이 다 있었습니다. 자연 저도 물이 든 것이겠지요. 밤마다 놀이요, 날마다 모꼬지가 벌어졌습니다. 술타령에 노래 타령에, 나중에는 음탕한 꿈이 꼬리를 맞물고 이어나갈 뿐이었지요. 이런 난잡한 생활을 얼마쯤하고 나니 제가 오늘날까지 배우고 들은 것이 모두 거짓이요 헛 것 같았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제가 외동딸이라 남의 아들 부럽지 않게 학문을 가르칠 생각이시던지, 제가 철을 알 만한 때부터 우리 나라의 충신 의사의 얘기도 해서 들리시고, 구멍 틈틈이 당서(唐書)도 알으켜 주셨습니다.

소위 그 나라의 성경현전(聖經賢傳)이라는 것도 많이 뜯어 배웠습니다. 물론 그야 개 머레 먹듯 하였고 그 참된 뜻이야 알았겠습니까마는, 그러나 신하가 임금을 어떻게 섬겨야 하고, 자식이 어버이를 어떻게 받들어야 효도 요, 또 안해가 어떻게 남편을 공경하여야 열녀가 된다는 것을 어렴풋이 짐작은 하였습니다. 그런데 여기 와서 겪어 보니 그것이 백주에 빈말일 뿐 아 니라, 차라리 그 정반대의 길을 밟는 것이 한 세상을 즐겁게 유쾌하게 살아 나가는 길인 줄 깨닫게 되었습니다. 고요한 새벽, 잠이 깨이어 저의 더럽고 요망스런 마음을 들여다볼 제 내가 어찌하면 이렇게 변했나 하고 스스로 놀래기도 하였지마는 그 생각은 잠시 잠깐이요, 눈만 뜨면 환락을 일삼고 투기와 시기에 몸둘 곳을 몰랐습니다. 이런 못된 년이 어디 또 있을까요?”

하고 창화는 상지 앞에 차마 얼굴을 들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수그렸다.

“먹에 가까우면 검어진다는 옛말도 있지 않습니까? 보고 들으시는 것이 그러하니 아무리 좋은 바탕인들 어찌 변하지를 않을 수 있겠습니까?”

상지는 위로하듯 말하였다.

“이럴 수가 있을까, 이럴 리가 있을까? 하면서도 저의 마음은 타락의 구렁텅이로 굴러 떨어져갈 뿐이었습니다. 나종에는 그렇게 그립고 그립던 부모님 생각조차 잊어버렸습니다. 이따금 수진 총각의 생각을 하면 가슴 한 모서리가 멍하고 우는 듯하였으나 그것도 그때뿐이고, 에라 지난 일을 생 각하면 무엇하느냐, 사람이란 옳든 그르든 한 세상을 떵떵거리고 지내면 고만이라, 의리를 찾으면 무엇 하며, 인정을 차리면 무엇 하느냐 하고, 고개를 쳐들려는 실낱 같은 본마음을 눌러 버렸습니다. 수진 총각만 해도 그때는 나이 어려서 그렇게 순진했지 저도 임자만큼 나이 먹고 임자만큼 지위만 얻으면 무슨 짓을 어떻게 저지를지 누가 아느냐, 세상에 남자란…….”

하다가 창화는 말을 끊고 상지의 기색을 살피듯 쳐다보며,

“장군님도 남자신데 이런 말씀을 여쭈면 여간 노하지 않으실걸요.”

하며 그 예쁘장한 눈매를 살짝 깔아 메치었다.

괜찮습니다 나도 분명 “ . 남자는 남자입니다마는 남자 앞이라고 남자 흉을 못 보실 거야 조금도 없습니다.”

상지도 말눈치를 알아차리고 빙글빙글 웃어 보였다.

“그러면 말을 마구 합니다. 눌러 들어 주세요. 호호, 세상에 남자란 의 리부동한 것, 제 쾌락을 위하여는 양가집 처녀도 함부로 뺏아오고, 제 지위를 위하여는 아무리 절친한 친구라도 심지어 제 친족이라도 파리 목숨같이 죽이는 것, 제 부귀와 영화를 누리자면 제 임금도 헌신짝같이 버리고 적국과 내통도 하는 것…….”

창화의 입가에는 찬바람이 솔솔 일어나는 듯하다.

“이따위 짐승에게 몸을 바치고 정을 쏟고 정절을 지킨다는 것은 우스꽝스러운 일로 생각을 하였습니다. 내 몸만 살아나고, 다시 영화를 본다면야 남편이고 뭐고 돌아볼 것도 없이 적장에게 교태를 부린들 어떠하랴…….”

“허!”

상지도 어이없다는 듯이 뜻도 없는 말이 아니요 웃음소리도 아닌 감탄사를 발하고 말았다.

창화는 갑자기 몸을 도사리었다.

“제가 참으로 매친 년입니다. 장군님 앞에 버릇없이 무엄하게 이 무슨 말 따위예요?”

“괜찮습니다. 괜찮습니다.”

“그런데 고량부리에서 장군님을 뵈옵고, 저의 매친 생각은 벼락을 맞은 듯 부서지고 말았습니다. 그야말로 저에게는 천변지이(天變地異)였습니다.

세상에는 남자 중에도 남자, 참으로 참으로 백성을 사랑하고 나라를 위하는 의인이 있구나…….”

예까지 말하고 창화는 입을 담쳐 버렸다.

“잘못 알아보신 게지. 어서 얘기나 뒤를 이으시지요.”

상지는 면구한 듯 만족한 듯 빙그레 웃었다.

창화는 부끄러워서 한동안 몸을 가누지 못하는 듯하였다. 무릎 위에 질척 미끄러진 듯한 은어 같은 손이 가늘게 떨린다. 한참 만에야,

“인제 제 얘기는 끝이 났어요.”

모기 같은 가는 소리로 속살거리었다.

<未完[미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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