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후한서/권85

1 (《예기》(禮記)) 〈왕제〉(王制)편에 이르기를, “동방(東方)을 이(夷)라 한다”하였다. [1] 이(夷)란 근본이란 것이고, (이는 곧) 어지니〔仁〕 생명을 좋아하고, 만물이 땅에 근본을 두고 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夷)는) 천성(天性)이 유순(柔順)하고, 도(道)로써 다스리기가 쉬워, 至有君子、不死之國焉。 이(夷)는 아홉 종(種)이 있으니, 이르되, 견이(畎夷)·어이(於夷)·방이(方夷)·황이(黃夷)·백이(白夷)·적이(赤夷)·현이(玄夷)·풍이(風夷)·양이(陽夷)이다. 그러므로 공자(孔子)는 구이(九夷)의 땅에 살고 싶어 하였다.

2 昔堯命羲仲宅嵎夷,曰暘谷,蓋日之所出也。夏後氏太康失德,夷人始畔。自少康已後,世服王化,遂賓於王門,獻其樂舞。桀為暴虐,諸夷內侵,殷湯革命,伐而定之。至於仲丁,藍夷作寇。自是或服或畔,三百餘年。武乙衰敝,東夷浸盛,遂分遷淮、岱,漸居中土。

3 及武王滅紂,肅慎來獻石砮、楛矢。管、蔡畔周,乃招誘夷狄,周公征之,遂定東夷。康王之時,肅慎復至。後徐夷僭號,乃率九夷以伐宗周,西至河上。穆王畏其方熾,乃分東方諸侯,命徐偃王主之。偃王處潢池東,地方五百里,行仁義,陸地而朝者三十有六國。穆王後得驥騄之乘,乃使造父御以告楚,令伐徐,一日而至。於是楚文王大舉兵而滅之。偃王仁而無權,不忍斗其人,故致於敗。乃北走彭城武原縣東山下,百姓隨之者以萬數,因名其山為徐山。厲王無道,淮夷入寇,王命虢仲征之,不克,宣王復命召分伐而平之。及幽王淫亂,四夷交侵,至齊桓修霸,攘而卻焉。及楚靈會申,亦來豫盟。後越遷琅邪,與共征戰,遂陵暴諸夏,侵滅小邦。

4 秦並六國,其淮、泗夷皆散為民戶。陳涉起兵,天下崩潰,燕人衛滿避地朝鮮,因王其國。百有餘歲,武帝滅之,於是東夷始通上京。王莽篡位,貊人寇邊。建武之初,復來朝貢。時遼東太守祭肜威讋北方,聲行海表,於是濊、貊、倭、韓,萬里朝獻,故章、和已後,使聘流通。逮永初多難,始入寇鈔;桓、靈失政,漸滋曼焉。

5 自中興之後,四夷來賓,雖時有乖畔,而使驛不絕,故國俗風土,可得略記。東夷率皆土著,憙飲酒歌舞,或寇弁衣錦,器用俎豆。所謂中國失禮,求之四夷者也。幾蠻、夷、戎、狄總名四夷者,猶公、侯、伯、子、男皆號諸侯雲。

6 부여국(夫餘國)[2]현도(玄菟)[3] 북쪽 천리에 있다. 남쪽으로는 고구려와, 동쪽으로는 읍루(挹婁)[4]와 서쪽으로는 선비(鮮卑)[5]와 접해 있고, 북쪽에는 약수(弱水)[6]가 있다. 지방(地方)이 이천(二千)리로서 본래 (濊)[7]의 땅이다.

7 初,北夷索離國王出行,其待兒於後妊身,王還,欲殺之。侍兒曰:「전에 천상의 어떤 기운을 보았는데 계자(雞子)처럼 컸습니다. (이 기운이) 저에게 내려와 이로 인하여 임신하였습니다. 」王囚之,後遂生男。王令置於豕牢,豕以口氣噓之,不死。復徙於馬蘭,馬亦如之。王以為神,乃聽母收養,名曰東明。東明長而善射,王忌其猛,復欲殺之。東明奔走,南至掩淲水,以弓擊水,魚鱉皆聚浮水上,東明乘之得度,因至夫余而王之焉。 동이(東夷) 땅 중에서 가장 평평하고 탁 트였다. 땅에서는 오곡(五穀)이 잘 자란다. 훌륭한 말·붉은 옥·담비·원숭이·멧대추만한 큰 구슬이 난다. 둥그런 목책〔柵〕으로서 성(城)을 만든다. 궁실과 창고와 감옥이 있다. 그 사람들은 거칠고 (덩치가) 크며, (성품은) 강하고 용감하며 조심스럽고 중후하다. 약탈하지도 노략질하지도 않는다. 무기로는 활·화살·칼·창이 있다. 모두 여섯 종류의 짐승 이름으로 벼슬아치 이름을 삼는다. 마가(馬加)‧우가(牛加)‧구가(狗加)가 있고, 그 읍락의 모든 우두머리는 제가(諸加)에 속한다. 食飲用俎豆,會同拜爵洗爵,揖讓升降。以臘月祭天,大會連日,飲食歌舞,名曰「迎鼓」。是時斷刑獄,解囚徒。有軍事亦祭天,殺牛,以蹄占其吉凶。行人無晝夜,好歌吟,音聲不絕。其俗用刑嚴急,被誅者皆沒其家人為奴婢。盜一責十二。男女淫,皆殺之,尤治惡妒婦,既殺,復屍于山上。兄死妻嫂。死則有槨無棺。殺人殉葬,多者以百數。其王葬用玉匣,漢朝常豫以玉匣付玄菟郡,王死則迎取以葬焉。

8 建武中,東夷諸國皆來獻見。二十五年,夫余王遣使奉貢,光武厚答報之,於是使命歲通。至安帝永初五年,夫余王始將步騎七八千人寇抄樂浪,殺傷吏民,後復歸附。영녕(永寧) 원년(120년), 사자(嗣子) 위구태(尉仇台)를 보내 예궐하고 공헌하니, 천자는 위구태에게 인수(印綬)와 금채(金彩)를 내렸다. 順帝永和元年,其王來朝京師,帝作黃門鼓吹、角牴戲以遣之。桓帝延熹四年,遣使朝賀貢獻。永康元年,王夫台將二萬餘人寇玄菟,玄菟太守公孫域擊破之,斬首千餘級。至靈帝熹平三年,復奉章貢獻。夫餘本屬玄菟,獻帝時,其王求屬遼東雲。

9 읍루(挹婁)는 옛 숙신(肅慎)의 나라이다. 부여(夫餘)의 동북쪽으로 천여리(千餘里)에 있고, 동쪽으로는 대해에 닿아 있고, 남쪽으로는 북옥저(北沃沮)와 접하며, 그 북쪽으로 다하는 바는 알지 못한다. 토지가 많고 산이 험하다. 사람의 모습이 부여 사람과 닮았으나, 언어는 각기 다르다. 有五穀、麻布,出赤玉、好貂。無君長,其邑落各有大人。處於山林之間,土氣極寒,常為穴居,以深為貴,大家至接九梯。好養豕,食其肉,衣其皮。冬以豕膏塗身,厚數分,以御風寒。夏則裸袒,以尺布蔽其前後。其人臭穢不潔,作廁於中,圜之而居。自漢興以後,臣屬夫餘。種眾雖少,而多勇力,處山險,又善射,發能入人目。弓長四尺,力如弩。矢用枯,長一尺八寸,青石為鏃,鏃皆施毒,中人即死。便乘船,好寇盜,鄰國畏患,而卒不能服。東夷夫余飲食類皆用俎豆,唯挹婁獨無,法俗最無綱紀者也。

10 高句驪,在遼東之東千里,南與朝鮮、濊貊,東與沃沮,北與夫余接。地方二千里,多大山深谷,人隨而為居。少田業,力作不足以自資,故其俗節於飲食,而好修宮室。東夷相傳以為夫余別種,故言語法則多同,而跪拜曳一腳,行步皆走。凡有五族,有消奴部、絕奴部、順奴部、灌奴部、桂婁部。本消奴部為王,稍微弱,後桂婁部代之。其置官,有相加、對盧、沛者、古鄒大加、主簿、優台、使者、帛衣先人。武帝滅朝鮮,以高句驪為縣,使屬玄菟,賜鼓吹伎人。其俗淫,皆潔淨自熹,暮夜輒男女群聚為倡樂。好祠鬼神、社稷、零星,以十月祭天大會,名曰「東盟」。其國東有大穴,號禭神,亦以十月迎而祭之。其公會衣服皆錦繡,金銀以自飾。大加、主簿皆著幘,如冠幘而無後;其小加著折風,形如弁。無牢獄,有罪,諸加評議便殺之,沒入妻子為奴婢。其昏姻皆就婦家,生子長大,然後將還,便稍營送終之具。金銀財幣盡於厚葬,積石為封,亦種松柏。其人性凶急,有氣力,習戰鬥,好寇鈔,沃沮、東濊皆屬焉。

11 句驪一名貊,有別種,依小水為居,因名曰小水貊。出好弓,所謂「貊弓」是也。

12 왕망(王莽)[8] (재위) 초기에 고구려의 군사를 징발하여 흉노(匈奴)[9]를 정벌하려 하였으나 그들이 (흉노를 정벌하러) 가지 않으려 하여 강압적으로 보냈더니, 모두 도망하여 변방을 넘어가 (중국의 군현을) 노략질하였다. 요서대윤(遼西大尹) 전담(田譚)이 그들을 추격하다가 전사하자, 왕망이 장수 엄우(嚴尤)를 시켜 치게 하였다. (엄우는) 고구려의 후(候) 추(騶)를 꼬여 국경 안으로 들어오게 한 뒤 목을 베어 그 머리를 장안(長安)에 보내었다. 왕망은 크게 기뻐하면서, 고구려왕(高句驪王)의 칭호를 고쳐서 하구려후(下句驪侯)라 하였다. 이에 맥인(貊人)이 변방을 노략질하는 일은 더욱 심하여졌다. 建武八年,高句驪遣使朝貢,光武復其王號。二十三年冬,句驪蠶支落大加戴升等萬餘口詣樂浪內屬。二十五年春,句驪寇右北平、漁陽、上谷、太原,而遼東太守祭肜以恩信招之,皆復款塞。

13 後句驪王宮生而開目能視,國人懷之,及長勇壯,數犯邊境。和帝元興元年春,復入遼東,寇略六縣,太守耿夔擊破之,斬其渠帥。安帝永初五年,宮遣使貢獻,求屬玄菟。元初五年,復與濊貊寇玄菟,攻華麗城。建光元年春,幽州刺史馮煥、玄菟太守姚光、遼東太守蔡諷等,將兵出塞擊之,捕斬濊貊渠帥,獲兵馬財物。宮乃遣嗣子遂成將二千餘人逆光等,遣使詐降;光等信之,遂成因據險厄以遮大軍,而潛遣三千人攻玄菟、遼東,焚城郭,殺傷二千餘人。於是發廣陽、漁陽、右北平、涿郡屬國三千餘騎同救之,而貊人已去。夏,復與遼東鮮卑八千餘人攻遼隊,殺略吏人。蔡諷等追擊於新昌,戰歿,功曹耿耗、兵曹掾龍端、兵馬掾公孫酺以身扞諷,俱歿於陣,死者百餘人。秋,宮遂率馬韓、濊貊數千騎圍玄菟。夫余王遣子尉仇台將二萬餘人,與州郡並力討破之。斬首五百餘級。

14 是歲宮死,子遂成立。姚光上言欲因其喪發兵擊之,議者皆以為可許。尚書陳忠曰:「宮前桀黠,光不能討,死而擊之,非義也。宜遣弔問,因責讓前罪,赦不加誅,取其後善。」安帝從之。明年,遂成還漢生口,詣玄菟降。詔曰:「遂成等桀逆無狀,當斬斷D1 73醢,以示百姓,幸會赦令,乞罪請降。鮮卑、 濊貊連年寇鈔,驅略小民,動以千數,而裁送數十百人,非向化之心也。自今已後,不與縣官戰鬥而自以親附送生口者,皆與贖直,縑人四十匹,小口半之。」

15 遂成死,子伯固立。其後濊貊率服,東垂少事。順帝陽嘉元年,置玄菟郡屯田六部。質、桓之間,復犯遼東西安平,殺帶方令,掠得樂浪太守妻子。建寧二年,玄菟太守耿臨討之,斬首數百級,伯固降服,乞屬玄菟雲。

16 동옥저(東沃沮)는 고구려(高句驪) 개마대산(蓋馬大山)[10] 동쪽에 있다. 동쪽으로 대해에 임한다. 북쪽으로 읍루(挹婁)·부여(夫余)가 있고 남으로 예맥(濊貊)에 접하고 그 땅은 동서가 좁고 남북은 길다. 가히 천리이다. 흙은 비옥하고 좋으며 산을 등지고 바다를 향하고 오곡이 마땅히 잘 되며 밭농사에 좋다. 읍락에는 우두머리가 있다. 인성이 곧고 강직하고 용맹스러워 창을 가지고 보병전을 한다. 언어·음식·거처·의복은 고구려와 닮았다. 장사는 큰 목곽를 만드는데, 길이가 십여장이나 되고 한쪽에 개구부를 만든다. 새로 죽은 자는 이를 임시로 묻었다가, 피부와 살이 썩어지면 이에 뼈만을 취하여 넣는다. 가족이 모두 하나의 곽을 쓴다. 나무에 '生'자를 새기어 죽은 자의 수를 헤아렸다.

17 무제(武帝)가 조선(朝鮮)을 멸망시키고 옥저 땅으로 현도군(玄菟郡)을 삼았다. 뒤에 이맥(夷貊)의 침략을 받아 (현도)군(郡)을 고구려의 서북쪽으로 옮기고는 옥저를 현(縣)으로 고치어 낙랑(樂浪)의 동부도위(東部都尉)에 속하게 했다. 광무제(光武帝)에 이르러 도위관(都尉官)을 혁파하고, 後皆以封其渠帥,為沃沮侯。 그 땅이 궁핍하고 작으며, 큰 나라 사이에 끼여 있어서, 마침내 고구려에 신하 나라로서 복속하였다. 句驪復置其中大人為使者,以相監領,責其租稅,貂、布、魚、鹽、海中食物,發美女為婢妾焉。

18 又有北沃沮,一名置溝婁,去南沃沮八百餘里。其俗皆與南同。界南接挹婁。挹婁人憙乘船寇抄,北沃沮畏之,每夏輒臧於巖穴,至冬船道不通,乃下居邑落。其耆老言,嘗於海中得一布衣,其形如中人衣,而兩袖長三丈。又於岸際見一人乘破船,頂中復有面,與語不通,不食而死。又說海中有女國,無男人。或傳其國有神井,闚之輒生子云

19 濊北與高句驪、沃沮,南與辰韓接,東窮大海,西至樂浪。濊及沃沮、句驪,本皆朝鮮之地也。昔武王封箕子於朝鮮,箕子教以禮義田蠶,又制八條之教。其人終不相益,無門戶之閉。婦人貞信。飲食以籩豆。其後四十餘世,至朝鮮侯准自稱王。漢初大亂,燕、齊、趙人往避地者數萬口,而燕人衛滿擊破准,而自王朝鮮,傳國至孫右渠。元朔元年,濊君南閭等畔右渠,率二十八萬口詣遼東內屬,武帝以其地為蒼海郡,數年乃罷。至元封三年,滅朝鮮,分置樂浪、臨屯、玄菟、真番四郡。至昭帝始元五年,罷臨屯、真番,以並樂浪、玄菟。玄菟復徙居句驪。自單單大領已東,沃沮、濊貊悉屬樂浪。後以境土廣遠,復分領東七縣,置樂浪東部都尉。自內屬已後,風俗稍薄,法禁亦浸多,至有六十餘條。建武六年,省都尉官,遂棄領東地,悉封其渠帥為縣侯,皆歲時朝賀。

20 無大君長,其官有侯、邑君、三老。耆舊自謂與句驪同種,言語法俗大抵相類。其人性愚愨,少嗜欲,不請丐。男女皆衣曲領。其俗重山川,山川各有部界,不得妄相干涉。同姓不昏。多所忌諱,疾病死亡,輒捐棄舊宅,更造新居。知種麻,養蠶,作綿布。曉候星宿,豫知年歲豐約。常用十月祭天,晝夜飲酒歌舞,名之為「舞天」。又祠虎以為神。邑落有相侵犯者,輒相罰,責生口牛馬,名之為「責禍」。殺人者償死。少寇盜。能步戰,作矛長三丈,或數人共持之。樂浪檀弓出其地。又多文豹,有果下馬,海出班魚,使來皆獻之。

21 한(韓)에는 세 종류가 있는데, 첫째 마한(馬韓)·둘째 진한(辰韓) 셋째 변진(弁辰)이다. 마한은 서쪽에 있고, 54국(國)이 있다. 북쪽으로는 낙랑(樂浪)과, 남쪽으로는 왜(倭)와 접한다. 진한은 동쪽에 있고, 12개국(國)이 있다. 북쪽으로는 예맥(濊貊)과 접한다. 변진은 진한(辰韓)의 남쪽이며 역시 2개국(國)이 있다. 남쪽으로는 역시 왜(倭)와 접한다. 무릇 78국인데, 백제(伯濟)는 그 중 한 나라이다. (나라의 규모가) 큰 것은 만여호(萬餘戶)이고, 작은 것은 수천가(數千家)인데, 각각은 산과 바다 사이에 있고, 地合方四千餘里,東西以海為限,皆古之辰國也。馬韓最大,共立其種為辰王,都目支國,盡王三韓之地。其諸國王先皆是馬韓種人焉。

22 馬韓人知田蠶,作綿布。出大栗如梨。有長尾雞,尾長五尺。邑落雜居,亦無城郭。作土室,形如冢,開戶在上。不知跪拜。無長幼男女之別。不貴金寶錦罽,不知騎乘牛馬,唯重瓔珠,以綴衣為飾,及縣頸垂耳。大率皆魁頭露糹介,布袍草履。其人壯勇,少年有築室作力者,輒以繩貫脊皮,縋以大木,歡呼為健。常以五月田竟祭鬼神,晝夜酒會,群聚歌舞,舞輒數十人相隨,蹋地為節。十月農功畢,亦復如之。諸國邑各以一人主祭天神,號為「天君」。又立蘇塗,建大木以縣鈴鼓,事鬼神。其南界近倭,亦有文身者。

23 辰韓,耆老自言秦之亡人,避苦役,適韓國,馬韓割東界地與之。其名國為邦,弓為弧,賊為寇,行酒為行觴,相呼為徒,有似秦語,故或名之為秦韓。有城柵屋室。諸小別邑,各有渠帥,大者名臣智,次有儉側,次有樊秖,次有殺奚,次有邑借。土地肥美,宜五穀。知蠶桑,作縑布。乘駕牛馬。嫁娶以禮。行者讓路。國出鐵,濊、倭、馬韓並從市之。凡諸貿易,皆以鐵為貨。俗喜歌舞、飲酒、鼓瑟。兒生欲令其頭扁,皆押之以石。

24 弁辰與辰韓雜居,城郭衣服皆同,語言風俗有異。其人形皆長大,美發,衣服潔清。而刑法嚴峻。其國近倭,故頗有文身者。

25 初,朝鮮王准為衛滿所破,乃將其餘眾數千人走入海,攻馬韓,破之,自立為韓王。准後滅絕,馬韓人復自立為辰王。建武二十年,韓人廉斯人蘇馬諟等,詣樂浪貢獻。光武封蘇馬諟為漢廉斯邑君,使屬樂浪郡,四時朝謁。靈帝末,韓、濊並盛,郡縣不能制,百姓苦亂,多流亡入韓者。

26 馬韓之西,海島上有州胡國。其人短小,髡頭,衣韋衣,有上無下。好養牛豕。乘船往來,貨市韓中。

27 倭在韓東南大海中,依山島為居,凡百餘國。自武帝滅朝鮮,使驛通於漢者三十許國,國皆稱王,世世傳統。其大倭王居邪馬台國。樂浪郡徼,去其國萬二千里,去其西北界拘邪韓國七千餘里。其地大較在會稽東冶之東,與硃崖、儋耳相近,故其法俗多同。

28 土宜禾稻、麻紵、蠶桑,知織績為縑布。出白珠、青玉。其山有丹土。氣溫暖,冬夏生菜茹。無牛、馬、虎、豹、羊、 鵲。 其兵有矛、楯、木弓、竹矢,或以骨為鏃。男子皆黥面文身,以其文左右大小別尊卑之差。其男衣皆橫幅,結束相連。女人被發屈糹介,衣如單被,貫頭而着之;並以丹硃坌身,如中國之用粉也。有城柵屋室。父母兄弟異處,唯會同男女無別。飲食以手,而用籩豆。俗皆徒跣,以蹲踞為恭敬。人性嗜酒。多壽考,至百餘歲者甚眾。國多女子,大人皆有四五妻,其餘或兩或三。女人不淫不妒。又俗不盜竊,少爭訟。犯法者沒其妻子,重者滅其門族。其死停喪十餘日,家人哭泣,不進酒食,而等類就歌舞為樂。灼骨以卜,用決吉凶。行來度海,令一人不櫛沐,不食肉,不近婦人,名曰「持衰」。若在塗吉利,則雇以財物;如病疾遭害,以為持衰不謹,便共殺之。

29 建武中元二年,倭奴國奉貢朝賀,使人自稱大夫,倭國之極南界也。光武賜以印綬。安帝永初元年,倭國王帥升等獻生口百六十人,願請見。

30 桓、靈間,倭國大亂,更相攻伐,歷年無主。有一女子各曰卑彌呼,年長不嫁,事鬼神道,能以妖惑眾,於是共立為王。侍婢千人,少有見者,唯有男子一人給飲食,傳辭語。居處宮室、樓觀城柵,皆持兵守衛。法俗嚴峻。

31 自女王國東度海千餘里至拘奴國,雖皆倭種,而不屬女王。自女王國南四千餘里至朱儒國,人長三四尺。自朱儒東南行船一年,至裸國、黑齒國,使驛所傳,極於此矣。

32 會稽海外有東鯷人,分為二十餘國。又有夷洲及澶洲。傳言秦始皇遣方士徐福將童男女數千人入海,求蓬萊神仙不得,徐福畏誅不敢還,遂止此洲,世世相承,有數萬家。人民時至會稽市。會稽東治縣人有入海行遭風,流移至澶洲者。所在絕遠,不可往來。

33 論曰:「昔箕子違衰殷之運,避地朝鮮。始其國俗未有聞也,及施八條之約,使人知禁,遂乃邑無淫盜,門不夜扃,回頑薄之俗,就寬略之法,行數百千年,故東夷通以柔謹為風,異乎三方者也。苟政之所暢,則道義存焉。仲尼懷憤,以為九夷可居。或疑其陋。子曰:「君子居之,何陋之有!」亦徒有以焉爾。其後遂通接商賈,漸交上國。而燕人衛滿擾雜其風,於是從而澆異焉。《老子》曰:「法令滋章,盜賊多有。」若箕子之省簡文條而用信義,其得聖賢作法之原矣!

34 贊曰:宅是嵎夷,曰乃暘谷。巢山潛海,厥區九族。嬴末紛亂,燕人違難。雜華澆本,遂通有漢。眇眇偏譯,或從或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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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예기(禮記)》〈왕제 제오(王制 第五)〉 “동방(東方)을 이(夷)라 하고,[...]”/“東方曰夷,[...]”
  2. 부여(기원전 2세기 ~ 494년)는 한민족의 고대국가로 여겨지는 초기 국가(연맹 왕국)들 중 하나로, 지금의 쑹화강 유역을 중심으로 지금의 만주 일대를 지배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3. 현도군은 전한(前漢)의 무제(武帝)가 기원전 107년에 세운 한사군(漢四郡) 중 하나이다.
  4. 읍루는 숙신(肅愼)의 후예이자 말갈(靺鞨)의 전신이다.
  5. 선비(기원전 1세기 ~ 6세기)는 남만주과 몽골지방에서 산 튀르크족과 몽골족의 혼혈 유목 민족이다.
  6. 아무르 강으로 비정된다. 상세한 것은 아무르 강 참조.
  7. 동예(東濊)는 기원전 3세기 이전 ~ 3세기경에 한반도 동해안 일대에 자리잡았던 한민족의 초기 고대국가의 하나이다.
  8. 왕망(기원전 45년 ~ 기원후 25년 10월 6일)은 중국 전한(前漢)의 관료이자 신(新)나라의 황제이다.
  9. 흉노는 기원전 3세기부터 5세기까지 몽골 및 중국 북부 지역에 존재한 유목제국이다.
  10. 개마는 현의 이름으로 현도군에 속한다. 그 성은 평양성 서쪽에 있다. 평양은 즉 왕검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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