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원행
76. 깊은 잠 깨니
편집경찰부 수사본부에 애저녁에 졸립다는 형사과장을 돌아가게 한 후 모였던 형사들은 뿔뿔이 제 경계구역을 따라 헤어지고 그 중에도 가장 민완을 자랑하는 형사 몇몇만 처졌다. 무슨 사건이 생기면 손가락을 깨물고 잠을 못 자는 성미요 잡을 범인을 잡을 때까지 잡힌 범인보담도 더 조맛증을 내는 홍 과장이라, 그들의 생각에는 오늘밤에도 집에서 잔다고 가기는 갔지마는 단 두 시간이 못 되어 자던 잠을 집어치우고 후닥닥 뛰어 날아들 줄 믿었다.
더구나 그가 없는 사이 요처요처마다 널어놓은 경계망에서 혹은 의외의 큰 고기가 걸려들런지도 모르는 법이니 잘못 서둘렀다가는 그야말로 경을 팥다발처럼 칠 판이다.
남은 형사들은 더욱 신경을 날카롭게 하고 긴장한 가운데 일초이초를 보냈다.
그러나 한 시가 지나고 두 시가 지나도 형사과장은 나타나지 않았다.
자정이 지나고 새벽이 되어도 어리친 개 한 마리 걸려들지도 않고 올 듯 올 듯하던 형사과장도 그림자를 보이지 않았다. 경계하던 형사들도 떡심이 풀렸다.
길고도 지리한 여름밤, 헛물켜기에 지친 고달픈 몸과 신경들, 단정하게 걸터앉은 교의가 문득 뒤로 넘어가며 벽에 뒤통수를 치는 작자, 걸상에 뻗친 다리가 상 밑으로 떨어지며 반 남아 땅바닥으로 쓰러지려는 작자, 책상에 이마를 문지르며 게(蟹) 거품을 흘리는 꼴. 꿈 가운데 괴청년을 만났는지 두 팔로 공중을 휘젓다가 필경 제 뺨을 치는 꼴, 구슬로 쏟는 땀방울! 잡으려는 고통도 여간이 아니다.
새벽 다섯 시쯤 되매, 기지개를 켜는 축, 눈을 부비는 축, 누가 무슨 군호나 부른 듯이 일제히 몸을 굼틀거린다. 겨우 떨어진 눈들은 놀랜 듯이 사면을 휘휘 돌아보다가 피차에 눈길이 서로 마주치자 아모 일도 없다는 듯이 열없이 씩 웃고는 다시금 제자리에 쓰러진다. 그들에겐 새벽 네다섯 시가 가장 맹렬하게 활동할 시각이다. 보통 사람으론 가장 고단하게 잠이 어릿어릿할 그 때가 찾고 잡기에 영락이 없는 까닭으로 이 시각이 되면 저절로 곤한 잠도 깨는 듯.
불 같은 볕은 어느덧 동창을 쪼이기 시작한다.
그때까지도 홍 과장은 얼씬도 않는다.
늙은 원숭이 같은 낯짝 , 반쪽이 책상에 눌려 넙쭉 들어간 오 형사는 솔잎을 떼어다 붙여 놓은 듯한 웃수염을 보고,
“과장 영감이 웬일인가? 왼밤을 고소란히 자다니?”
“과장은 돌인가? 여러 밤을 새웠으니 곤하기도 하겠지.”
“허나! 굉장한 잠인데, 이런 대사건을 앞에 두고 그도 잠이 올 때가 있던가?”
선잠 깬 축이 이렇게 중얼거릴 때에 과장실 전화는 불이 붙는 듯이 운다.
“에키! 무슨 일 생기나 보다.”하며 솔잎 수염은 냉큼 전화소리 나는 데로 뛰어갔다. 다른 군들도 그의 뒤를 따라섰다.
“모시! 모시!”(여보시오, 여보시오!)
“응? 어데? 신의주 경찰서!”
“신의주 경찰서!”
하고 옆에 있는 군의 얼굴빛도 별안간에 긴장해진다. 그들을 못살게 구는 설교 강도가 국경 방면으로 튀었는지도 모르고, 그렇다고 신의주를 거칠 것이므로 신의주 경찰서란 말만 듣고도 그들의 신경은 칼날같이 날카로워진다.
“과장 안 계시느냐고요? 네, 지금 댁에 계신데 급한 일이거든 그대로 말하슈?”
“안 돼요? 꼭 과장이라야 말을 해요? 지금 안 계신데 어떻게 합니까? 그냥 말을 하시구려.”
“뭐요? 비밀? 지급한 비밀이라고? 글쎄…… 정 그렇거든 나중에 걸구려.
아즉 과장이 출근을 안 하셨는데…….”
“시각을 다투는 일이라고? 암만 시각을 다투지만 과장은 안 계시고 말은 할 수 없다면서! 그러면 어쩌란 말요?”
“뭐요? 다른 게 아니라, 응 거동이 수상한 청년이 가는데 그의 지갑에서 과장의 명함이 나왔다고? 그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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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과장 명함이 나와? 까닭 붙은 일인데.”
원숭이 낯짝은 벌써 무엇을 알아차렸다는 듯이 동료를 돌아본다.
“원! 좀 떠들지 말아요.” 솔잎 웃수염은 한번 꽥하게 소리를 지르고 나서 다시 전화를 받는다.
그래서 명함이 나와서 “ ? ? 그래 그 명함은 분명히 홍 과장의 명함이란 말요? 물론 분명하고 도장까지 찍혔다? 그럼 고만이지 왜 전화를 걸었단 말요? 명함은 분명한 듯하지마는 명함 가진 사람이 이상스럽다? 뭣이 이상스럽단 말요? 뭐요 뭐, 글쎄 과장은 안 계시다고 안 했소?”
솔잎 수염은 선뜻 자기에게 말을 하지 않고 망설이는 저편의 태도에 얼마쯤 불쾌한 감정이 난 데다가 너무 추근추근하게 과장을 찾는 데 버럭 화를 낸다.
“뭣이 어떻게 이상스럽단 말요? 코가 비뚤어졌소, 눈이 애꾸눈이요? 대관절 어떻단 말요? 원 사람 갑갑해 죽겠네, 글쎄 과장이 안 계시니 나종에 걸란 밖에, 그런 게 아니라 어떻단 말요? 뭐요 돈을 가졌다고, 얼마나 가졌단 말요? 현금으로 이천원 가까이 가졌다? 그래서? 사람이 돈 가지기도 예사지!.”
아까부터 화가 난 전화 받는 이는 이렇게 비쭉거린다.
“그래, 돈을 가졌는데 어쩌란 말요, 뭐요? 자세한 이야기는 과장이라야 말하겠다? 곧 전화를 다시 걸게 해 달라고, 건방진!”
저편에서도 화가 나서 전화를 탁 끊은 모양이다. 솔잎 수염은 전화통을 부술 듯이 걸어 버렸다.
“젠장 건방지게, 말을 할 테면 하고 말 테면 말지. 꼭 과장이라야 멋인가? 그래 나는 경관이 아니란 말인가? 시골뜨기는 더 건방지더라니.”
하고 화를 더럭더럭 낸다.
“여보게 현금 이천원! 그게 대관절 웬 돈인가? 허리띠 끌러지겠네그려.”
하며 원숭이 낯짝은 입을 헤 벌린다.
“그까짓 돈 이천원쯤 가졌다기로니 하상대사라고 과장을 대라, 누구를 대라, 지급 비밀이다. 흥.”
솔잎 수염은 아까 성미가 아직도 가라앉지 않은 듯,
“여보게, 그렇게 말할 것은 아닐세, 이 삐삐 마른 판에 돈을 이천원씩 넣고 다니니 누가 의심을 안 하겠나? 혹은 설교 강도인지도 모르지!.”
“설교 강도! 이 사람이 설교 강도에 미쳤네그려. 그런 짓을 하고 다니는 놈이 그만큼이야 똑똑하겠지. 그래 뭐를 믿고 현금을 지니고 국경을 넘나든단 말인가? 어림도 없지.”
“과장은 명함을 믿었겠지!”
하고, 원숭이 낯짝은 불쑥 나온 제 말에 번개같이 무슨 단서를 잡은 것처럼,
“옳지 옳지, 그래 그래.”
혼자 고개를 끄덕끄덕하다가,
“여 여보게, 크 큰일 났네.”
란 말을 남기자마자 달음박질로 문을 차고 나갔다.
그가 불현듯이 뛰어온 곳은 물론 홍면후 집이다.
그는 급한 맘에 대문에서 ‘이리 오너라!’를 찾을 겨를도 없이 안마당으로 뛰어들었다.
“과장 영감! 큰일 났습니다.”
그는 물에 빠진 사람과 같이 헐떡거리며 외쳤다.
제 집에 ‘큰일’보담도 남의 집에‘큰일’을 내려고 가끔‘큰일’을 겪은 그 집안 식구는 이 외침에 ‘또 경찰서에 무슨 일이 있나 부다.’하고 그리 놀래지도 않았다.
어멈은 인도로 그는 쉽사리 홍면후가 자는 안방에 들어갈 수 있었다.
방안에 들어서면서 그는 또 한번,
“과장 영감! 큰일 났습니다.”
하고 외쳤다. 그러나 아모 대답이 없다. 면후는 이불도 차 던지고 웃통만 벗은 채 방바닥과 요 바닥 어름에 배를 걸치고 깊은 잠이 들었다. 드렁드렁 코 고는 소리는 황급히 제 부하의 부르짖음을 비웃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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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과장 영감! 과장 영감!”
처음에는 부르기만 하다가 나중엔 부름과 아울러 팔도 흔들고 다리도 흔들고 어깨도 흔들어 보았지만, 깊이 든 과장의 잠은 좀처럼 깨어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두 팔을 가슴패기에 밀어넣어 잡아 일으켜 보았으되, 잠자는 이의 팔과 고개가 마치 녹아 나리는 엿가락 모양으로 일으키는 이의 머리 위에 늘어질 뿐이다. 오 형사는 진력이 나고 구슬같은 땀이 맺히도록 죽을 애를 썼으되, 아모런 보람이 없었다.
깨우기에 절망한 그는 다시금 부산하게 일어섰다. ‘큰일’하나를 발견하고 제 상관에게 급보를 하러 왔다가 ‘큰일’또 하나를 발견하고 또 다시 총총히 뛰어나왔다.
면후는 그 날 오정 때가 넘어서야 겨우 깊은 잠을 깨었다. 어젯밤 맥주의 빌미인지 골치가 띵하며 잠은 깨었지만 머릿속은 안개가 열 겹 스무 겹 가린 듯하다. 그는 몇 번이나 정신을 모아 보았지만 물결 위에 그리는 글씨처럼 이내 흐려지고 스러진다. 어젯밤 일을 생각하려고 애를 썼지만 마치 뒤숭숭한 꿈속을 지내오듯이 연맥을 찾을 수 없었다.
애라의 모양 김순태라는 , 청년의 모양, 백마정, 수사본부 등 여러 사람과 여러 광경이 한데 뒤섞이고 반죽이 되고 가물가물 사라진다.
‘애라에게 돈 이천원을 주어것다.’생각하고 뒤미처 ‘왜 주었노?’ 재우치면 웬 셈인지 알 수 없다.
‘설교 강도를 잡아 오란 기밀비로 주었지.’ 한참 만에야 그는 저 할 일에 이렇게 경위를 따져 보았다.
‘김순태란 청년에게 내 명함을 주었것다.’ ‘왜 주었노?’ ‘국경을 무사히 넘어 가라고.’ ‘그것은 또 무슨 까닭으로?’ ‘글쎄!’ 다시금 그는 생각의 실마리를 잃어 버린다.
‘오 옳지! 애라가 그 청년을 소개하였고 나는 애라를 믿고 한 일이지. 애라는 귀여운 계집애다, 영리한 계집애다. 내 일이라면 무엇이라도 잘 보아 주겠지. 아모렴 그야 물론이지. 그런 대로 빨린 년이 돈 생기는 일 마다하고 오랏줄 지기를 좋아할라구…… 혈마…….’ ‘그런데 저는 왜 안 갔노? 그 청년과 같이 갔으면 일하기가 수월할 텐데.’ 하고, 고개를 기웃거리다가 문득 황연대각한 것같이, ‘그야 안 될 말이지, 내가 있는데 그 청년하고 같이 가? 젊은 것들끼리 맞붙으면 죽이고 밥이고 다 들리지. 그러면 어찌 되는 일인구?’ ‘같이 가면 맞붙을 연놈이 여기 있을 적엔 맞붙지 말란 법 있나.’ ‘그야 의남매간이라는데 아모리 그런 것들이라도 그렇지야 않겠지.’ ‘그러면 같이 가도 좋지 않나?’ 면후는 암만해도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내가 머리가 아파.’하고, 스스로 이불 속에서 궁글궁글하다가 문득 무슨 생각이 번쩍 도는 듯이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는 미닫이에 비친 볕발을 바라보고 놀랜 듯이 괘종을 쳐다보았다. 그는 또 다시 깜짝 놀래며 제 눈을 의심하는 것처럼 괘종 가까이 걸어가 보고 또 한번 놀래었다.
‘응! 두 시!’ 하고 무슨 무서운 것이나 본 것처럼 두어 걸음 뒤로 물러섰다.
‘내가 이게 웬 잠인고? 지금이 어는 때라고!’ 그의 대야머리엔 땀방울이 맺히고 포달스러운 눈은 번쩍이기 시작한다. 아모리 여러 날 지친 몸이요 또 맥주잔에나 취했기로 스무 시간 가까이 인사 정신을 모르다니. 그는 제 잠을 물어 뜯어 죽일 듯이 ‘엑엑엑’ 소리를 치며 이를 빠드득 빠드득 갈다가, 별안간에 목소리를 가다듬어
“한경아!”
하고, 제 누이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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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한경아!”
면후는 연거푸 또 한번 소리를 높여 부르다가, 설사 한경이가 마츰 등대하고 섰다 하더라도 미처 대답할 여유를 남겨 두지도 않고 그는 불현듯 한경의 거처하는 뜰 아랫방으로 뛰어나려갔다.
한경의 방문은 면후의 황황한 손길에 열렸다. 그러나 방안은 텅 비었다.
아모 구석에도 사람의 그림자는 볼 수 없다. 한경의 모양은 찾을 수 없다!
한 발을 방안에 들여놓은 채 제 눈을 의심하는 것처럼 한참 어리둥절하고 서 있던 오라비는, 무슨 결심을 한 듯이 신도 벗지 않고 성큼 방안으로 뛰어들었다. 그 독사와 같은 눈방울은 이모저모로 구를수록 더욱 반들반들하게 빛난다. 마치 어느 구석에 숨어 있는 제 누이를 그예 찾아내고야 말려는 것처럼 독오른 그 눈알맹이엔 한경이 대신 책상 위에 바늘로 꽂아둔 편지쪽 한 개를 발견하였다. 틀림없는 누이의 필적, 아니 일찍이 자기에게 횃불 같은 분을 돋우는 평양에서 보낸 범인의 필적.
오라버님께!
저는 저 갈 데로 갑니다. 오늘날까지 길러 주시고 가르쳐 주신 은혜는 무엇으로 갚사올지 생각하면 아득합니다마는 밟는 길이 다른 다음에야 일찍이 갈리는 것이 좋지 않아요? 오라버님께서 저를 동기로 여기신다면 저의 간 곳을 캐지 말아 주셔요. 저도 동기의 정으로 마지막 한 마디 여쭐 것은 제발 지금 하시는 일을 고만두시고 아름답고 씩씩하게 살아나가실 길을 손수 개척하십시오.
한경은 올림 ‘앙!’하는 소리가 오라비의 입술로 새며 빠드득 이를 갈아 부쳤다.
“괘씸한 년!”
이를 악문 채 배앝는 듯이 한 마디 뇌이자, 앙상하게 뼈만 드러난 그의 손아귀에 든 편지쪽은 박박 찢어졌다.
“죽일 년!”
그는 또 한번 뇌고 후닥닥 뛰어나왔다.
그는 제 방으로 돌아와 부리나케 경찰부로 전화를 걸려다가 말고 모자도 쓰지 않은 채 대문 밖으로 뛰어나가다가 또 다시 급히 집안으로 뛰어들어와 행랑어멈을 보고 인력거 한 대를 급히 부르라고 하였다. 아범이 인력거를 불러온 때는 벌써 그가 다시 자동차부에 전화를 걸어 자동차 한 대를 지 급히 보내라고 명령하고 있었다. 자동차가 문밖에서 뿡뿡 소리를 지를 때엔 그는 처음 걸려 하던 경찰부에 다시 전화를 걸고 있었다. 그는 마치 미친 사람 모양으로 쩔쩔매고 날뛰고 서둘렀다.
“여보, 여보, 여보, 여보!”
그는 ‘여보’소리를 전화 받는 저편에서 미처 대답할 사이도 없이 사태가 나도록 불러 제치고 제풀에 성이 나서 콩 튀듯이 튄다.
“여보, 여보, 여보, 여보, 경찰부 고등과요! 뭐, 뭐, 뭐, 오오 - 오 형사요? 아까 집에 왔더라고! 내가 암만 깨워도 자더라고! 가만 있어, 가만 있어! 내말 들어, 내 말 들어요, 뭐뭐, 신의주 경찰서에서 전화가 왔었어. 그래, 그래, 어떤 청년이 내 명함을 가지고 가더라고. 그래, 왜 내게 직통 전화를 걸지 안 했어? 내가 잤어? 응, 응, 오 군이 다시 전화를 걸어보니까 뭣이 어째? 그대로 놓아 보냈다? 내 명함을 믿고? 여기서 아모런 반전(返 電)이 없으니까 의심 없는 사람인 줄 알았다고. 바가! 바가! 오우 바가!”
하고 형사과장은 집어던지는 듯이 전화를 꽂아 버렸다.
그리고 나는 듯이 대문간을 나가서 선뜻 자동차에 올랐다.
자동차 문을 냉큼 아니 열어 준다고 하마터면 운전수의 뺨을 쥐어지를 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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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면후가 자동차를 몰고 온 곳은 물론 경찰부다. 그는 들이닥치면서 경부선과 경의선 방면에 인상(人相)을 자세하게 그리어 홍한경을 잡아 보내라는 전보 수배를 하고 부산과 신의주 두 관문에는 자기가 직접 전화를 걸어 보았다.
한경이가 그 따위 편지를 남기고 달아난다면 물론 국경으로 빠져 나갈 것이요 그렇다면 육로로 압록강을 , 건너든지 수로로는 부산으로 장기를 거쳐 상해로 가는 두 길밖엔 없으리라고 추측한 것이다. 그리고 혹은 몰라서 인천에까지 전화를 걸어 두었다.
부산과 인천의 화답은 시원치 않았고 오직 신의주의 회답만 귀가 번쩍 뜨이었다. 분명히 한경이란 여자가 아츰 첫차에 있었고 조금 수상한 눈치도 없지 않아 짐까지 검사해 보았으나 자기가 홍 형사과장의 친누이라고도 할 뿐더러 짐 속에는 경기도 경찰부라 인쇄한 봉투에 홍 과장의 함자가 뚜렷이 있으므로 신지무의하고 그대로 보냈으니 지금쯤은 벌써 봉천도 통과했으리라 한다. 홍 과장은 얼굴이 파랗게 질리며 발을 동동 굴렀다. 그 대야머리의 숨구녕 맥에서까지 펄펄 뛰노는 것이 곁의 사람에게도 보였다. 아모리 크고 어려운 사건을 만나도, 어데까지 침착하고 냉정하던 그이어늘, 오늘처럼 펄펄 뛰고 수선을 피고 안절부절을 못하는 것은 십여 년을 같이 있는 오 형사도 처음 보았다.
전번 필적 사단으로 면후가 얼마쯤 한경을 의심한 것은 사실이다. 영락없이 같은 글씨는 치의(致疑)를 않으랴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냉혹하기 돌과 같고 날카롭기 칼날과 같은 그이언만 실낱만한 동기의 정이 없지 않았다. 막내둥이 어린 누이! 어버이를 일찍이 여의고 제 손으로 길러내고 제 힘으로 공부를 시켜 놓은 귀여운 누이! 사십이 넘어 슬하에 일점 혈육이 없고 사막같이 쓸쓸한 그의 가정에 오직 한 송이 꽃인 어여쁜 누이! 그의 가슴에 오라비의 사랑과 아비의 정을 한꺼번에 갈아치게 하는 한경이! 그렇다! 한경이야말로 겨울같이 싸늘한 그의 성격에 오직 한 줄기 봄바람이요, 한 그믐밤 빛같이 캄캄한 그의 감정에 오직 한 개의 빛나는 별이었다. 이러한 한경이를 자기의 가장 미워하는 설교 강도의 공범으로 믿기는 정말 싫었다. 귀신이 울 만큼 같은 필적이 이따금 그의 가슴을 어둡게 하였으되 ‘혈마 그럴 리야 있냐! 치의하는 내가 미친놈이지!’하고 호의있는 의심을 던질 뿐이었다. 애라의 정을 들어주는 체하고 춘천으로 보내면서 뒷구멍으로 춘천경찰서를 시켜 그 일거일동을 감시케 한 것도 결국은 한경이를 어찌하자는 것이 아니라, 갈피 못 잡는 제 의심을 제삼자로 하여금 명명백백하게 풀어 보려 한 것이었다. 더구나 백마정의 일막에 이르러서는 제 의심을 결정적으로 풀어 버리자고 꾸민 놀음이다. 자기는 맨 나종에 들어갔고 역시 제삼자인 다른 형사들로 철호와 한경과의 대면하는 찰나의 표정을 보살피게 한 것도 또한 그런 뜻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만일 면후로 하여금 한경이를 의심하면서 믿는 한구석이 없었던들 그는 결코 제 누이를 아모 거리낌없이 고민 없이 남의 손에 내어 맡기지 않았으리라. 한경이와 철호 두 사이에 아모런 의심점을 발견치 못하고 아슬아슬한 이 고비를 무사히 지냈을 때 철호 한경 애라의 안심의 , , 숨길보담도 실상인즉 면후의 기쁨이 더 컸던 것이다. 그 바람에 그는 철호에게 선선히 제 도장 찍은 제 명함을 내어 주었고 애라의 따르는 술에 무엇이든지도 맛볼 새 없이 들이킨 것이다.
그런데! 한경이는 보기 좋게 달아나 버렸다. 더구나 마뜩치 않은 충고 비스름한 소리와 비웃고 조롱하는 글발(그의 눈에는 그 글 사연이 그렇게밖에 보이지 않았다.)을 남기고 의기양양하게 자최를 감추고 말았다!
면후는 눈이 아려서 배길 수 없었다.
81. 떨어진 편지쪽
편집그 이튿날 아츰 오정 때가 지나도 애라 또한 잠이 어릿어릿하였다. 분홍망사 모기장 안으로 햇발은 영롱하게 비치건만 꿈길은 아즉도 그를 끄는 듯.
푸른 물결을 짓쳐 나가는 인어 모양으로 그는 연두빛 숙고사 겹이불 자락에서 헤어 나와 포동포동한 젖가슴을 아낌없이 드러내 놓고 갸름하고도 토실토실한 종아리는 이불 위에 되는 대로 얹혔다. 오똑한 코 끝에 땀방울이 송송 솟았는데 하느적거리는 머리칼 몇 올이 파레처럼 걸렸다.
몸이 허물어지고 바수어 드는 듯한 철호와 같이 겪는 그 순간순간. 조마조마하고 아실아실하게 지나치는 고비고비. 터질 듯이 긴장한 가슴 밑으로 흘러나리는 달착지근한 사랑의 꿀물. 귀신 모르는 비밀을 제 손가락 끝에 걸어 두고 맘대로 멋대로 휘휘 내적는 상쾌한 맛. 무지개같이 떠오르는 허영심. 화려한 봄을 약속하는 앞날의 공상. 남산장 으늑한 구석방에서 철호와 마지막 순간을 잡은 아래로 애라를 기다리는 밤과 낮은 공작의 나래처럼 찬란하였던 것이다. 어젯밤에 뜻대로 깜쪽같이 철호를 떠나보내고 안심의 숨길을 내어쉴 때, 몇 날 몇 밤을 두고 그의 곁에는 얼씬도 하지 않던 잠의 나래가 따뜻하게, 노곤하게 그를 덮었던 것이다.
애라의 꽃잎 같은 입술엔 웃음의 그림자가 그윽이 움직였다. 은어 같은 흰 팔뚝이 굼실하고 벌어지며 모로 돌아눕는 그는, 더듬더듬하면서 제가 베고 자다가 내버린 베게를 얼싸안았다. 그러자 그는 조금 놀랜 듯이 눈을 반 남아 떴다. 제 가슴속에 참따랗게 안긴 베게를 보고, 그는 방그레 웃었다. 아모리 자던 잠결에라도 제 손으로 멀리 떠나 보낸 철호를 제 옆에서 더듬고 그 대신 베개를 추켜 안은 것이 우스웠던 것이다.
눈부신 햇발을 피하는 것처럼 벽을 향해 다시 돌아 누우며 그는 또 한번 방싯 웃었다.
어젯일을 생각하면 그는 자아치는 웃음을 참을래야 참을 수 없었다. 그 반들반들한 대야머리가 제 손에 기름이나 묻은 것처럼 매끈하게 넘어간 것이 아모리 생각해 보아도 이렇게 신통방통하고 깨가 쏟아지는 듯이 고소한지 몰랐다. 자기가 밤낮으로 잡으려고 노리는 범인을 제 코앞에 놓고 손끝 한번 건드리지 못할 뿐인가. 제 명함을 제 손으로 꺼내어 제 글씨로 소개장을 쓰고 제 손으로 제 도장을 찍던 광경은 생각할수록 재미가 난다.
“그 따위가 형사과장! 하느님 맙소사! 흥.”
하고, 애라는 또 한번 코웃음을 쳤다. 세상에서는 독사보담도 더 영독하다는 그 인물을 그처럼 못난이를 맨들고 엿가락같이 늘어지게 하고 콩고물같이 고분고분하게 하고, 녹초가 되게 한 것은 누구의 힘이냐? 애라의 힘이 아니냐, 나의 힘이 아니냐? 눈썹 한 올만 꼿꼿이 세웠다가 살짝 뉘었다가 하기만 하면, 홍면후쯤은 마치 일기 고르지 않은 첫봄의 얼음장 모양으로 얼고 녹고 한다.
애라는 새삼스럽게 신통한 자기의 힘을 느낄 제 더할 나위 없는 만족이 가슴에 차고 머리에 차고 왼 몸에 넘쳐 올랐다.
“그따위 형사과장이야 백명 천명이 있은들 내 비밀의 냄새인들 맡아도 못 보지!”
하고, 애라는 또 한번 쌕 웃었다.
“그런데 철호 씨는 지금 어데까지나 가셨소?”
지금쯤은 국경도 곱다랗게 넘어섰을 것이요, 그 능란한 솜씨에 벌써 안전 지대에 들어누워 코웃음을 치고 있을 것이다.
홍면후가 더할 나위 없이 못난 정비례로, 철호는 마치 태양과 같이 그의 눈앞에 번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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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어쩌면 그렇게 대담하고 침착할까? 시치미도 청승맞게 떼던걸!”
애라는 제 덜미를 짚은 위험에도 눈썹 끝 하나 움직이지 않고 태연자약하던 철호의 태도를 생각하고 다시금 탄복하였다. 이런 인물이야말로 칼날 위에서 춤을 추어도 발 한번 빗디딜 이가 아니다. 믿어서 믿는 보람이 있고 존경해서 존경할 값이 있는 사람이란 철호 같은 인물을 가리켜 한 말이리라. 이십반생을 두고 그리고 찾던 그이를 인제야 만났고나. 붉은 등과 푸른 술에 속절없는 청춘을 늙히며 값없이 허덕이는 사내들의 속 없이 벌린 팔뚝의 수풀을 벗어나서, 철호의 뜨거운 가슴에서 비로소 아늑한 주막을 발견한 듯싶었다.
흥미에서 의혹에, 의혹에서 탄복에, 탄복에서 정열에!
그의 철호에 대한 감정의 경로는 이렇게 바뀌었던 것이다. 별같이 번쩍이는 철호의 두 눈은 그의 생명의 꽃이요, 불길이요, 햇발이다. 뼈가 휘고, 살이 가루가 되고, 왼 몸의 피가 마지막 한 방울까지 뿌지직뿌지직 타는 한이 있더라도, 이 꽃이, 불길이, 햇발만은 잃지 않으리라고, 그는 몇 번이나 스스로 맹서를 하였던고! 문득 애틋한 어젯밤 이별 광경이 눈앞에 떠나왔다.
일분 일초가 천년 같은 면후와의 땀나는 교섭이 끝나자 애라는 먼저 자기 집으로 돌아오고 대강대강 떠나 준비를 마친 뒤에 철호도 뒤미처 따라왔다.
바루 이 방에서 두 사랑의 짝은 차 시간을 기다렸다. 언제든지 쾌활하고 수다하던 자기건마는 이 때만은 목이 메었는지 말 한 마디 지껄일 수가 없었다.
뻐근하게 차오르는 가슴. 멋없이 스멀스멀하는 눈시울. 되풀이하는 으스러지는 듯한 포옹. 금방 떨어졌다가 또 다시 피어오르는 키스의 꽃. 일초가 한 시 되는 시계의 요술.
“차 시간이 거진 된 모양인데, 인제는 떠나야겠군.”
하고, 말없이 일어서는 철호.
“뭘요! 아직도 여섯 시 삼십 분밖에 안 됐는데, 일곱 시니 반시나 남지 안 했어요?”
나는 듯이 몸을 일으켜 철호의 앞을 막는 애라.
“정거장엘 좀 일찌거니 가야지 놓치면 어쩌나!”
“오래간만에 시골뜨기 티를 보이는구려. 시간 전에 가면 남 먼저 떠나나?”
애라는 금시로 떨어지려는 눈물 방울 고인 눈동자를 흘겨 보인다.
“나종 가는 것보담은 낫지.”
철호도 식은 웃음을 짓는다.
“내 곁이 그렇게 싫어요? 그럼 안녕히 행차합쇼.”
하고, 애라는 앵돌아진다. 철호는 다시 주저앉는다.
오분! 십분! 아니 떠나 보내고는 못 배길 시각은 필경 닥쳐오고 말았다!
철호의 목에 꼭 매달리는 애라의 손길. 얼굴과 비비는 얼굴.
정거장까지 물론 전송을 할 것이로되, 감정에 겨워 혹은 자기네의 뒤를 따르는지도 모르는 형사들에게 눈치를 채일지도 몰라서 정거장 송별은 하지 않기로 작정하였던 것이다.
철호가 방문을 열고 나갈 제.
“안녕히 가셔요.”
하고, 애라는 고개를 숙였다.
“애라 씨도 얼른 오구려.”
철호의 남긴 말.
대문을 나갈 때,
“안녕히 가셔요.”
하고, 애라는 또 고개를 숙였다.
애라 씨도 얼른 오구려.”
철호의 또 한번 부탁.
골목 안을 나설 때,
“안녕히 가셔요.”
하고, 애라는 또 새삼스럽게 고개를 숙였다.
“애라 씨도 얼른 오구려.”
철호의 재우치는 부탁.
훤출한 어깨가 골목 밖까지 사라질 때까지 애라는 우두머니 서 있다가 쏜살같이 제 방으로 뛰어들매 참았던 눈물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사내 이별을 밥 먹듯이 해 제친 애라이건만, 이번 이별에야말로 처음 이별의 맛을 알았다. 이렇게 맑고도 쓸쓸한 슬픔을 겪어보기는 난생 처음이었다.
다시금 옆으로 돌아누우며 멍하게 천장을 쳐다보다가,
“철호 씨! 철호 씨! 잠깐만 기달려 줍소. 나도 곧 가겠어요.”
라고 혼자 중얼거렸다.
83
편집철호 없이 단 하롯밤을 지내 보고 애라는 철호와 같이 떠나지 않은 것을 몹시 뉘우쳤다. 일분 일초라도 철호를 떠나 견디기 어려운 줄 애라는 절실하게 깨달았다. 그러면 애라는 무슨 까닭으로 철호와 같이 가지 안 했던고?
면후가 그들의 같이 가는 것을 꺼리고 싫어하는 것은 사실이라 할지라도, 그 대야머리가 송두리째 애라에게 빠진 오늘날이니 그럴 듯하게 주물르고 꾸며대면야 깜쪽같이 못 빠져 갈 것도 아니다. 더구나 비상수단을 쓰려면야하로이틀쯤 애라를 아니 찾게 맨들기는 손바닥 뒤치기보담도 더 쉬운 일이 아니냐.
애라의 떠나지 못한 원인은 온전히 다른 데 있었다. 그것은 한경이가 맡아 가지고 있는 철호의 돈을 빼앗아 가지고 달아나려는 불덩이 같은 욕심이다.
철호가 대담하게 위험하게 빼앗은 돈이 칠팔천원은 넘을 듯하다. 자기가 철호에게 주어 보낸 돈 이천원과 이 돈을 합하면, 돈 만원이나 착실히 되는 셈폭이요, 이것만 가지면 철호와 화려한 생활, 꿀 같은 그날 그날을 보내는 밑천은 넉넉할 듯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철호와 한경의 사이를 베어 놓자면 무엇보담도 이 돈을 한경의 손아귀에서 빼어내어야만 한다. 돈을 웅켜낸 뒤에야 넌즈시 면후에게 일러주어 제 누이를 잡아먹게 하든지 뜯어먹게 하든지 한경을 처치할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다. 그러한 뒤에 자기도 철호의 따라 자유로운 만주 벌판에서 사랑의 마지막 승리를 자랑하려는 것이 애라의 배짱이다. 그래 한경이가 춘천에서 멋모르고 백마정에 들어닥칠 때 망우리 고개에 여학생 모양으로 차린 제 ‘병정’ 하나를 보내어, 만일 백마정에 오게 되거든 철호나 누구나 만나더라도 모른 체할 일, 또 돈은 애라에게 전할 일.
이라는 철호의 위조 편지를 전하게 한 것이다.
일간 그는 무슨 수단으로든지 한경이와 직접 만나든지 또는 전인을 놓든지 기어이 그 돈을 받아 쥘 작정이었다.
애라는 아직도 이불 속에서 몸을 궁그리며 돈 찾아낼 궁리에 머리를 짰다.
제 아모리 어엿한 학교를 졸업하고 지식이 도고하다 하더라도 아즉 세상 물정 모르는 계집애다. 내 솜씨에 아니 엮어 가지는 못하리라 하였다.
“철호 씨가 시방 어떤 곤경을 겪고 계시는지 아슈? 내가 안 가지고 가면 목숨을 내어 놓고 벌은 그 돈을 누가 전할 데요? 나도 여기 일이 바쁘니까 돈만 전해 드리고는 하로바삐 돌아올 터예요. 철호 씨와 나와는 남매지의 밖에 아모 것도 없지마는…….”
애라는 한경이와 맞닥뜨려 교섭할 말까지 준비해 놓았다. 그 승겁게 생긴 한 경의 눈에 스르르 눈물이 맺히며 ‘부디 잘 전해 주셔요’하고 돈 싼 보퉁이를 끌르는 광경까지 눈앞에 선하였다.
‘그런데 한경이는 어찌 되었을까?’ 애라는 문득 이런 생각을 해 보았다. 백마정에서 돌아간 뒤 단단히 제 오라비의 감금을 받고 그 애지중지하는 철호 씨와 한 마디 작별도 못하고 애꿎은 눈물만 짜고 있을 광경을 생각하매 애라는 깨가 쏟아질 듯이 재미가 났다.
그런데 가만 있거라 ‘ !’하고 독한 웃음이 흐르던 애라의 눈은 별안간 동그래 진다. 그 멍텅구리 면후가 철호에 대한 의심을 푸는 동시에 한경에 대한 의심도 풀었으면! 아니다, 그럴 수는 없을 것이다. 아모리 철호가 범인이 아닌 줄은 깨달았지만 그렇다고 범인의 필적과 한경의 필적이 꼭 같다는 수수께끼가 풀린 것은 아니다. 면후는 아즉도 빈틈 없이 한경을 감시할 것이다.
‘그런데 면후가 참 어떻게 되었노?’ 하고, 애라의 눈은 더욱 호동그래진다. 그는 소스라쳐 일어났다.
면후의 맥주 곱보에 최면제 ‘아달린’을 넣어 주던 광경이 불현듯 머리에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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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백마정의 일막은 면후에게 마지막 수단인 모양으로 철호, 애라, 한경에게도 끝가는 단편이었다. 잡히느냐, 빠져 나가느냐, 가장 위험한 두 갈래 어름에 그들은 서게 된 것이다. 분화산 위에서 추는 춤이요, 서리 같은 비수를 물고 부리는 재조이었다. 죽고 살고 하는 이 마당에 이렇다 할 준비도 없이 다다르는 것은 무모한 노릇이요 어리석은 짓이다.
철호는 애라에게 이런 주의를 시키며 애라의 방에 제 변장 기구를 숨겨 놓고 하고 면후의 먹는 맥주에 ‘아달린’을 타서 먹이도록 한 것이다. 무사하게 이 아슬아슬한 고비를 넘어서면 물론 좋고, 그렇지 못하면 변장을 한 다음에 면후가 먹은 최면제가 효력을 발생할 때를 타서 달아나자는 것이 철호와 애라의 계획이었다.
그들의 계획은 예정보담도 더 쉽게 안전하게 실행되었다. 철호는 멀리 뛰었다. 면후는 세상 모르는 잠에 뒷덜미를 잡혔으리라.
‘그러면 한경이는 어찌 되었을까? 달아나지 안 했을까?’ 애라의 머리엔 선뜩하고 날카로운 칼날이 지나가는 듯하였다. 면후가 깊이 잠들었다면 한경이도 가만히 있을 것 같지 않다. 자기의 가장 사랑하는 애인을 위하여 그 파수병을 먹인 최면제가 천만뜻밖에 자기의 가장 미워하는 사랑의 적을 지키는 감시인을 잠들게 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애인을 빼내는 수단이 사랑의 적에게도 달아날 기회를 준 듯하였다.
애라는 안절부절못하였다.
‘설마 한경이가 달아났을라구. 저는 제 오라비가 잠든 줄도 모를 테니 그렇게 만만하게 빠져 나갈라구.’ 애라는 이렇게 돌이켜 생각하고 겨우 맘을 놓았다. 모기장을 걷고 이불과 요를, 한군데로 밀치고 난 뒤에 철호가 벗어 던지고 간 헌털뱅이 양복때기가 웃목에 그대로 널려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저 케케 낡은 검둥 양복을 걸치고 헙수록한 꼴로 백마정에 나타나던 철호의 옛 모양을 그리며, 애라는 거듬거듬 그런 옷을 거두었다. 옷에 밴 철호의 냄새가 제 코 안으로 기어들 제, 다시금 가슴이 뻐근해진다. 몬지가 케케 앉은 것을 더러운 줄도 모르는 듯이 제 가슴에 비비고 얼굴에 비비다가 자기네의 사랑의 기념으로 이런 털뱅이 옷을 간직해 두려 하였다. 밀창을 열어 제치고 몬지를 털 때에, 바지와 저고리 주머니를 뒤집고 털었다. 그 때 바지 왼편 주머니에서 꾸기꾸기 한 종이쪽 하나가 떨어졌다. 애라는 무심코 그 종이쪽을 집어 들었다. 구김살을 펴 보니 연필로 날려 쓴 글발이 보인다. 희미하나마 그 자체(字體)를 보고 애라의 가슴은 어지러웠다. 그것은 한경의 글씨가 분명하다. 그러나 그의 가슴을 쥐어뜯게 한 것은 글씨보담도 그 사연이었다.
춘천을 떠나기 전에 고 선생을 경찰서에서 제게로 찾아왔어요. 눈치가 수상합니다. 고 선생을 피하게 하십쇼. 또 돈은 제가 어떻게든지 가지고 가겠습니다. 애라 씨에게는 아니 드리겠습니다. 곧 떠나 주십쇼.
이 편지 쪽은 백마정에서 한경이가 슬쩍 철호에게 전한 것이요, 철호도 창졸간에 얼핏 사연을 보았지만 찢어 내버릴 여유가 없어서 그대로 포켓에 넣어 두고 틈 보아 없애자던 것이 총총히 떠나노라고 잊어 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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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그 편지를 읽고난 애라는 샛별같이 흡뜬 눈에 핏발이 어렸다. 박속같이 흰 이빨이 입술이 터지는 줄도 모르고 앙 나리 물었다. 왼 몸이 사시나무 떨리듯이 떨렸다. 얼굴빛은 다홍을 친 듯이 새빨개졌다가 다시 해쓱해지고 뒤미처 새파랗게 질렸다. 된 꼴 안 된 꼴을 다 보고 궂은 변 몹쓸 노릇을 겪을 대로 다 겪었다는 애라이건만, 이런 분한 꼴, 애닮은 변은 처음 당하는 일이다.
‘돈은 어떻게든지 제가 가져가겠다! 애라는 안 주겠다! 앙큼스러운 년도 있지!’ 애라는 또 한번 이를 갈았다. 만일 한경이가 곁에 있다면 머리채를 꺼들고 매암을 돌리고 그 흰 기름같이 엉긴 살덩이를 팍팍 물어뜯어도 시원치 않을 듯.
곧 떠나 달라 흥 ‘ ! ! 철호 씨를 떠나게 한 것은 누구의 힘인가. 제년이 주제넘게 바루 떠나라 말아라, 얌치없는 년!’ 하고, 애라는 또 한번 몸을 부르르 떨었다.
머리끝까지 치밀린 분심이 시간을 따라 잠깐 가라앉자, 한경의 밉살맞고 괘씸한 것보담도 사내의 야속한 맘이 더할 수 없이 슬펐다.
‘철호 씨도 철호 씨도! 그런 편지 쪽을 넌즈시 받아 보고 시치미를 뚝 따 다니!’ 모든 것을 다 바친 사내! 제 가슴에 희망의 꽃구름을 돌게 하고 햇발과 같이 번쩍이는 앞날을 약속한 사내! 그 사내가 요만한 비밀이라도 자기에게 숨긴 것이 얼마나 원망스러운지를 몰랐다. 더구나 제 사랑의 적과 저 몰래 편지 쪽을 나이나마 주고 받은 것이 치가 떨렸다.
그러나 다시 한번 돌이켜 생각할 때 이번 일은 결코 철호의 죄가 아닌 것은 분명히 깨달을 수 있었다. 한경이에게 외수전갈을 한 것은 애라 자신이 아니냐. 두 사이에 황홀한 최후의 순간을 찾은 이래로 이것의 첫걸음을 밟은 사람은 애라 자신이 아니냐. 철호도 자기 모르는 한경의 편지 사연을 보고 스스로 놀래었는지 모르리라. 총명한 그는 벌써 애라의 얕은 꾀를 속을 알아차리고 속으로 괘씸하게 여겼는지 모르리라.
‘철호씨! 용서해 주셔요!’ 하고, 애라는 먼 구름을 향해 두 팔을 벌리며 하염없는 눈물을 흘렀다. 방울 방울 흰 눈물이 제 무릎 위로 구을러 떨어질 때 그의 마음은 아늑하게 가라 앉았다.
실상은 그런 짓을 한 것도 철호를 위한 충정에서 나온 것이다. 그의 행복을 위하여 그를 속인 것이 무슨 큰 죄이랴. 철호가 그 비밀을 발견하였으면 선선히 말을 할 것이지, 가깝지도 않은 길을 떠나면서 꽁하고 떠난 것이 생각할수록 야속하였다. 더구나 그 꽁한 속이 궁금하였다. 철호가 가까이 있으면 달음박질로 뛰어가서 그 사정을 저저이 말하고 제 잘못을 빌며, 그의 사내답지 않게 앵돌아신 속을 얼마든지 나무라고 퍼붓고 싶었다.
‘이것저것이 모두 한경이 그년 때문이다. 그년만 그런 편지를 철호 씨에게 드리지 안 했으면 아모 일도 없을 것을! 어데 두고 보자!’ 그는 또 한번 한경이를 잡아먹을 듯이 별렀다. 만일 만나 보아서 선선히 그 돈을 내어놓지 않거든 마지막 수단으로 면후에게 일러 주어 쇠창살 맛을 보게 하리라고 그는 스스로 결심하였다.
이 때였다. 애라는 제 등뒤에 사람의 그림자가 움직이는 것을 느끼었다.
무심코 고개를 돌려 보니 어는 틈에 왔는지 홍면후가 돌로 깎아 세운 모양으로 제 등뒤에 서 있었다.
“에그머니!”
애라는 너무 의외에 일에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86. 애라의 후회
편집“그렇게 놀랠건 없어, 나는 애라의 집에 못 올 사람인가?”
면후는 이런 소리를 하며 능글능글하게 웃어 보인다.
애라의 어지럽고 놀랜 가슴은 일 찰나에 가라앉았다. 그는 제 코 앞까지 짓쳐 들어온 대적을 보고 모든 감정을 잊을 만큼 기민한 여자였다.
“올 사람이고 못 올 사람이고, 이게 무슨 짓에요? 신사답지 않게 남의 집에 왔으면 이리 오너라 한 마디쯤은 불러도 좋지 안 해요?”
제법 얼굴빛을 바루고 꾸지람을 하다가,
“에그머니! 이를 어쩌나? 남 옷도 입지 안 했는데.”
하고 헤벌룸하고 벌어진 유카다(일본 침의) 자락으로 아낌없이 드러난 제 보얀 젖가슴을 부둥켜 안으며 교태를 부린다.
“걸친 것은 옷이 아니고 뭐야? 그렇게 아양을 떨지 안 해도 반할 사람은 반하겠지.”
면후도 오늘은 웬일인지 한 손도 접히려 들지 안 했다. 입가에 떠도는 웃음의 그림자도 전같이 개개풀리지 않고 맺힌 데가 있었다.
“에그머니나! 옷 벗은 게 아양으로 보이시거든 벌거벗고 사는 야만 부락에 나 가슈! 영감 대야머리를 보고 아양 필 년은 아직 생겨나지도 않았답니다.”
애라도 한 마디를 지지 않았다.
“그야 대야머리가 젊은 놈의 하이칼라만이야 못하겠지.”
하고 면후는 그 포달스러운 눈을 깔아메치며 의미있게 한 마디 뇐다.
“잘도 알아먹었소. 그렇게 잘말면서도 누구더러 아양를 피네 마네…….”
애라는 한술을 더 뜨며 짐짓 뽀로통해진다.
“아양 판다는 게 그렇게 비위에 거슬렸담?”
“그럼 귀부인께 못할 말인지!”
하고 애라는 녹아나리는 듯이 방그레 웃으며,
“제발 잠깐만 나가 주어요, 남 옷 좀 입게.”
하고 애라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찾아온 맡에 나가 달라! 그게 겨우 손님 대접이야?”
면후의 눈 가장자리는 조금 풀렸다.
“요걸! 요걸! 죽여 줄까, 살려 줄까!”
하는 안타까운 표정.
“내가 당신께 ‘도어’를 가리킵니다.”
하고 애라는 터질 듯 터질 듯하는 웃음을 앞니와 아랫입술로 지긋이 멈추며 가슴에 붙었던 팔을 떼어 앞문을 가리킨다. 은어같이 공중에 헤엄치는 팔뚝의 곡선미. 환하게 드러난 가슴에 흰달 모양으로 은은히 내다보이는 젖통, 웃음을 멈추노라고 적이 떨리는 꽃잎 같은 입술, 허리와 허북지의 둥글고 조붓한 윤곽, 느슨한 아래 옷자락 안으로 뛰어나올 듯 뛰어나올 듯한 토실토실한 종아리!
면후는 오늘날까지 애라의 육체의 비밀을 이렇게 노골적으로 본 적은 없었다. 이 새로운 유혹, 새로운 마력에 그는 애라를 찾아온 목적도 잠깐 잊어 버렸다. 애라의 살의 향기는 그의 아까 먹은 결심을 질식시키기에 넉넉하였다.
눈부신 이 살덩어리는 한 걸음 면후에게로 다가들었다.
“나가 주어요!”
꽃구름을 거쳐 오는 꾀꼬리 소리다. 면후는 얼떨떨하게 정신을 잃었다. 문득 제 눈앞에 서렸던 무지개는 서기를 뿜으면서 쏜살같이 움직이었다. 애라는 채 개키지 않은 이불 위에 쓰러지며 발을 토닥토닥한다.
“좀 나가 주어요! 좀 나가!”
애라는 어린애 모양으로 어리광을 피며 졸라댔다.
“응, 응, 나가 주지, 나가 주지.”
면후는 물에 빠진 사람의 소리를 내며 여왕의 명하는 대로 문밖으로 나왔다.
87
편집“인제 들어오셔요.”
애라의 소리가 날 때까지 면후는 문밖에 얼없이 서 있었다.
애라는 어느 틈에 방을 말갛게 치워놓고 참따랗게 양장을 하고 날아갈 듯이 도사리고 앉아 있었다. 손님이 주인의 권하는 대로 방석에 주저앉으매 애라는 새삼스럽게 나붓이 절을 하며,
“이런 누옥에 왕림하신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옵니다.”
하였다.
면후도 덩달아,
“천만의 말씀이올시다.”
하고 머리를 숙였다.
“아이구, 싱거워라.”
애라는 별안간 딱대글 웃으며 꿇었던 다리 하나를 옆으로 내어던진다. 면 후도 다리를 풀어 평좌를 했다.
한동안 어설픈 침묵. 면호의 애라에게 묻고자 하는 것도 한경이 사단이요, 애라의 제일 궁금한 것도 한경이 소식이다. 피차에 제 속은 안 보이고 저편 속을 떠볼 궁리를 하노라고 잠깐 말문이 막혔던 것이다.
면후가 먼저 입을 벌렸다.
“순태라든가 하는 청년은 무사히 갔겠지?”
“무사히 가다니요? 떠먹듯이 일렀는데 그럼 옆길로 샜을라구?”
“아니, 잘 갔겠느냐 말야.”
“그럼 잘 가지 않고? 영감 명함까지 지니고 갔는데.”
하고 애라는 그런 걱정을 하는 것이 쑥스럽다는 듯이 핀잔을 준다.
“그래, 일을 잘할까?”
“잘할 줄 알고 보내 놓고 저더러 또 다짐이오?”
애라는 예쁘게 생긴 눈을 흘긴다. 면후는 어색한 듯이 잠깐 말을 끊었다가,
“글쎄, 일이야 잘하겠지만, 희뜩희뜩한 젊은 사람의 일을 누가 아냐? 대관절 애라하고는 어떤 관계야?”
애라는 별 것을 다 묻는다는 듯이 말끄러미 면후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의오빠란밖에! 그렇게 의심이 많아서야 죽도 밥도 다 안 되지. 믿는 사람은 턱 좀 믿어 보아요.”
“못 믿는 게 아니라 의오빠라면 언제부터 의오빠란 말인가? 젊은 것들 일을 누가 아냐?”
하고 면후는 지어서 껄껄 웃었다.
“뭣이 어째요? 그것도 말이라고 하슈? 귀신 같은 영감 모르는 일을 내가 어찌 알아요?”
하고 애라는 발끈하고 성을 낸다.
“아니 언제부터 의오빠가 되었단 말야? 애라의 말을 들으면 순태는 다년 해외로 돌아다니고 나온 지도 얼마 안 된다면서!”
“난 몰라요!”
애라는 한 마디 톡 쏘고 다시 대꾸도 않으려는 것처럼 입술을 꼭 다문다.
제 일로 제가 모르고 “ 누가 안담? 오라비니 뭐니 하면서 언제부터 안 것도 모른담?”
“작년에 그럭저럭 알았단 밖에!”
“그 그러저럭이 수상탄 말야!”
“수상하다면 수상한 대로 하구려. 누가 어쩌냐?”
하고 애라는 그 보얀 목덜미를 보이며 슬쩍 벽을 향해 돌아앉아 버렸다.
“저, 저, 애라, 그러지 말고 내 말을 좀 들어요. 애라 일신에도 관계되는 중대 사건이니!”
“멋대로 하구려. 난 몰라요, 몰라.”
하고, 도리도리 도리질을 친다.
“자아, 그럼 순태 말은 고만두세.”
면후는 제 말을 굽혔다.
“이왕 떠나 보낸 사람을 이러니 저러니 하면 쓸데 있나?”
하고 혼잣말같이 중얼거린다.
“떠나 보낸 사람이라고 고만둔다, 매우 관대합신걸. 지금이라도 의심이 나거든 안동현에나 봉천 영사관에 전보 한 장이면 당장 잡아올걸. 지금쯤은 그 명함을 믿고 영사관에서 후원을 받고 있을 테니 좀 잘 잡히리. 전보 치기가 귀찮거든 당장 애라 이년이라도 잡아 넣구려. 알토란같은 공범이 형사 과장님 코앞에 있지 않소!”
하고, 애라는 홀저에 다시 돌아앉으며 얼굴을 면후에게 바씩 들이대었다.
웃수염에 닿일 듯 말 듯한 그 입술은 못견디리 만큼 붉다.
88
편집“요런 독살이…….”
하고 형사과장은 어여쁜 범인의 뺨을 가볍게 튀기었다.
“독살이 아니면! 벌레라도 밟아보아도 꿈틀거리지 않나? 언제는 살이나 베어 먹일 듯이 정답게 굴고 할 말 못할 말을 꿀을 담아 붓듯이 늘어놓아서 남의 비위를 동해 놓고 인제 와서는 죽일 년 족치듯이 수상하다, 어쩌다 별 소리를 다하니!”
하다가 불꽃이 이는 듯하던 애라의 눈이 스르르 흐려지며 단박에 구슬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진다. 원통하고 야속해서 못 견디는 모양으로 그의 목소리는 껄떡거린다.
고만두어요 다 고만두어요 “ , . 범인을 잡거나 말거나 누가 알아요? 주제넘게 팔을 걷고 나선 내가 미친 년이지. 참 장하슈. 형사과장이 장하슈. 의심이 나거든 지금 당장이라도 잡아 넣구려.”
애라는 꼿꼿이 세웠던 몸을 다시금 파다버리며 엉엉 울기 시작한다.
“네가 또 연극을 꾸미는고나!”
형사과장은 속으로 생각하면서도 기름한 속눈썹이 은가루를 뿌린 듯이 번쩍이며 덜덜 떨리는 어여쁜 턱의 파동(波動), 탈아맨 고개와 늘어진 어깨의 가련한 꼴이 또 다른 유혹이 되어 그의 동정을 자아내게 한다. 그는 또 다른 유혹이 되어 그의 동정을 자아내게 한다. 그는 또 다시 참인지 거짓인지 분간하기가 아리숭아리숭해진다. 도리어 자기를 위해 일하고 애쓴 것을 믿어 주고 싶었다.
“그러나 한경이 사단은 어찌된 노릇이냐? 한경을 속히 시집 보내라는 것도 애라요, 춘천으로 쫓으란 것도 애라가 아니냐? 그의 비밀이 열쇠는 오직 애라가 쥔 것이 아니냐? 설혹 내가 애라를 믿는다 하더라도 한경이 일만은 세상없이도 따져야 될 것이 아니냐!”
애라의 눈물에 사라지는 듯한 감정을 맛본 면후의 가슴에도 이 소리만은 더욱 날카롭고 높았다.
“글쎄, 순태 얘기는 고만두잔 밖에. 날 좀 봐요. 누가 의심을 한다는 것도 아니요, 고만 일에 울 것이야 뭔가?”
면후는 두 손으로 빠흘린 애라의 턱을 괴어 올랐다.
“아까 말은 다 실없는 소리고!”
“아까 말은 실없고 인제는 정말 족치겠다는 수작이구려. 듣기 싫어요. 다 듣기 싫어!”
하고, 애라는 눈물이 글썽글썽한 눈으로 흘겨보면 고 예쁜 새끼손가락으로 두 귀를 막는다.
“아냐, 아냐. 이건 참 정말 농담이 아냐.”
면후는 빌며 귀 가리운 두 팔을 잡아 나리었다. 손아귀에 물씬하는 부드러운 촉감에 면후의 맘은 도 한겹 풀렸다.
“다른 것은 다 고만두고 이 말만은 꼭 들어 주게.”
하고, 면후는 제 입을 애라의 귀 가까이 댔다. 애라도 어느 결엔지 눈물을 거두고 정신을 귀로 모으는 듯하였다.
“저! 저! 왜 요전에 애라가 한경이를 멀리 보내라고 했지!”
“난 또 무슨 소리라구?”
하고, 애라는 시들하다는 듯이 펄썩 물러 앉는다.
“그건 무슨 까닭이야?”
“그걸 또 새삼스럽게 물으셔요? ‘ 기껏해야 그 잘난 소리를 묻느냐는 듯이 애라는 경멸하는 눈치를 보인다.
“애라가 무슨 까닭으로 한경이를 시골로 쫓으라 했을까? 암만해도 궁금한데!”
“그렇게 궁금하거든 한경 씨 당자께 들어 보시구려.”
애라는 배앝는 듯이 한 마디 하고 고 작은 입을 삐쭉한다.
“흥, 한경이가 있어야 물어라도 보지.”
“그럼 한경 씨가 어데로 가셨단 말예요?”
하고, 애라의 눈은 호동그레진다.
“어젯밤에 달아난 모양이야!”
하고, 오라비는 긴 한숨을 쉰다.
89
편집한경은 달아났다!
제 친오라비의 입으로 새어나온 확실한 이 소식은 애라의 머리를 바수는 철퇴요, 가슴을 오려내는 비수이었다. 찡! 하고 소리를 내며 심장의 고동도 일시에 끈친 듯. 벌컥 머리에 올라온 피는 소용돌이를 치는 듯.
아까 한경의 편지를 발견할 때 분하고 원통하던 것은 여기 대면 깨소금이다. 그 때는 오히려 사태를 바루잡으려면 바루잡을 여유가 아즉도 남은 듯 싶었다. 실낱 같으나마 희망이 있었다. 안타까우나마 달착지근한 감상(感傷)이 있었다. 그러나 이 소식은 절대적이요 결정적이다. 그때보담 몇 백 곱절 몇 천 곱절 더 분하고 더 원통하였다. 두 연놈! 그렇다. 이번에는 한 경이만이 아니다. 한경이가 어젯밤에 갔다면 철호와 한차를 탄 것이 분명한 사실이다…… 그 두 연놈을 그야말로 뼈를 갈아 마시고 간을 내어 씹어도 시원치 안 했다.
그는 울고 싶었다. 그러나 타오르는 분통의 불길은 그의 눈물조차 말려 버렸다. 그는 웃고 싶었다. 그러나 물어 뜯긴 입술의 따끈따끈한 핏방울만 잇몸을 스며들 뿐이다.
그러나 이 분노가 한고비 숙자, 가을바람같이 쓸쓸한 적막이 거기 있었다.
이렇듯이 아구락스럽게도 만발했던 희망의 꽃이 뿌리채 쥐어 뜯길 줄이야!
순풍에 돛을 달고 술렁술렁 떠나가던 사랑의 배가, 봄을 약속하는 항구를 눈앞에 두고 악착하게도 산산조각이 될 줄이야! 그나 그 뿐이냐, 오늘날까지 피가 마르도록 살이 으스러지도록 죽을 애를 다 써서 지어 놓은 제 사랑의 배가 다른 사람 아닌 제 사랑의 적을 꽃동산으로 실어다 주고 말았다.
또 그나 그 뿐이냐 그 , 배에는 자기의 오직 하나 앞날의 희망이요 생명의 불길인 애인조차 제 사랑의 적과 나란히 앉아 같이 가지 안 했느냐. 거기는 희망의 파랑새가 어여쁜 노래를 부르리라, 그러나 여기는 절망의 독사가 가슴을 물어 뜯을 뿐이다. 거기는 찬란한 봄 아침이 기쁘게 웃으리라. 그러나 여기는 캄캄한 그믐밤이 검은 나래를 펼칠 뿐이다.
만일 홍면후 ― 현직 경찰과장이 제 턱을 받치고 있다는 엄연한 현실이 그의 의식을 제재하지 않았던들 그는 미쳐났을지도 모르리라.
면후는 너무도 돌변한 애라의 기색에 속으로 놀래면서 기뻐하였다.
“옳다, 인제야 본색을 드러내는고나. 이 계집애가 한경의 비밀도 알거니와 그 비밀에는 제 생사까지 달린 모양이로고나.”
하면서, 안경 너무도 돌변한 애라의 머리칼 하나 근육 하나 움직이는 것도 놓치지 않으려고 눈독을 들였다.
“그래, 한경이 달아난 데 대해서 애라는 무슨 짐작이 없나?”
슬슬 애라의 기색을 살펴가며 능청스럽게 물어 보았다.
“짐작이 무슨 짐작요?”
애라는 팍 물어 뗄 듯이 한 마디 쏜다. 그는 이 멍텅구리한테나 화풀이를 하려는 듯하였다.
“그래, 애라가 모르고 누가 안단 말야?”
형사과장은 한번 넘겨짚으며 반쯤 얼른다.
“애라가 알아요? 내 일도 잘 모르는 년이 남의 일을 어째 안단 말요? 영감은 허수아비요, 바지저고리요? 자기 누이가 달아나는지 어쩌는지도 모르고 있었단 말요? 뻔뻔도 스럽소. 자기가 놓치고서 남더러 아느냐 모르느냐.
난 영감 같은 멍텅구리는 보기도 싫고 말도 하기 싫어요. 자아, 얼른 가 주셔요. 영감이 안가시면 내가 달아나겠소.”
애라는 눈이 불이 나도록 면후를 집어 세우다가 정말 나는 듯이 몸을 일으키더니만, 걷잡을 새 없이 문을 차고 나가 버렸다.
90
편집회호리바람에 휘날리는 사람 모양으로 허둥허둥 달음질을 치던 애라는, 자기 집 골목을 헤어 나와 큰길가에 이르자 멈칫하고 발을 멈췄다.
‘내가 이러고 어델 갈 작정인고?’ 두 방망이질을 하는 가슴, 모닥불을 퍼붓는 듯한 머리, 소용돌이를 치는 감정에도 싸늘한 냉수를 끼얹으며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내가 이렇게 허둥거리는 것을 보고 그 능구렁이 같은 면후가 모든 것을 알아차리지나 않았을까?’ 애라는 앞뒤 생각 없이 면후를 몰아세우고 집을 튀어나온 것을 차차 뉘우치기 시작하였다. 좀더 시치미를 떼고 좀더 냉정하게 몸을 가지고 좀더 솜씨를 부릴 것을 이렇게 방정맞게 경솔하게 서두른 제 자신이 얼마나 원망스러운지 몰랐다.
사랑을 잃은 슬픔, 사랑을 빼앗긴 원한, 불기둥 같은 질투심도 인제 와서는 오히려 뒷전이다. 첫째 제 발부터 빼어 놓고 보아야 할 일이 아니냐. 철호도 가고 한경이마저 갔으니 일이 만일 탄로가 난다면 십자가를 질 이는 오직 애라 자신뿐인 아니냐!
감정의 폭퐁우가 적이 가라앉자 명민한 애라의 이지는 이 사실을 꿰뚫어볼 수 있었다.
지금 당정이라도 집으로 돌아가서 면후를 구슬리고 눅혀 볼까도 싶었다.
그러나 오늘날까지 언제든지 한 손을 접어준 면후 앞에 백기를 꽂는다는 것은 첫째 그의 자존심이 허락치도 않거니와 아즉 제 감정이 가라앉기도 전에 서뿔리 아양을 떨다가는 도리어 제 발목을 잡힐런지도 모른다. 이러기도 어렵고, 저러기도 어렵다.
종로 길거리에 홀로 우두머니 서 있는 애라는 난생 처음으로 어쩔 줄을 모르며 울고 싶었다.
얼마 만에 그는 백마정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지금 새삼스럽게 면후에게 사과를 한다는 것도 쑥스러운 일이요, 차라리 아모 일도 없었던 것처럼 참다랗게 낯익은 곳에나 얼굴을 내어놓고 설레는 가슴을 진정한 다음에 차차 무슨 궁리를 하는 것이 온당할 것 같았다.
그러나 백마정에서 애라를 기다리는 것도 또한 놀랠 만하 사실이었다. 자기만 보면 언제든지 웃는 낯을 보이던 주인의 눈치도 쌀쌀하다. 철철 돈을 뿌린 덕으로 마치 여왕같이 위해 올리던 동무들도 입을 삐죽하고 슬슬 베돈다.
다만 자기 외에는 오직 하나 조선 여자인 란 짱이 눈짓으로 애라를 으늑한데로 넌지시 불렀다.
“애라 짱, 큰일 났소.”
‘소’자를 길게 빼는 것이 란 장의 말버릇이다.
“아까 경찰부에서 형사가 나와서 애라 짱 방을 샅샅이 뒤졌다오.”
하고, 란 짱은 그 큼직한 눈을 더욱 크게 뜬다.
“내 방을 뒤지다니? 그래 무엇을 더러 가져 갔나요?”
“가져간 건 몰라도 그 방에 쇠통을 채우고 당분간 아모도 출입을 말라더래. 또 그뿐이 아니요, 어젯저녁에 애라 짱이 쓰던 맥주병과 곱보를 내놓으라고 주인을 들볶지요.”
“그래, 내 쓰던 것을 찾아냈나?”
애라는 파랗게 질리며 숨이 가쁜 듯이 채친다.
“어데 알 수야 있소? 그래서 어젯밤에 쓴 맥주 빈병과 곱보를 모조리 거두어 갔다우.”
하다가 문득 뒤를 돌아보며 란 짱은,
“에그머니!”
하고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애라의 핑핑 내어돌리는 눈길에 원숭이 낯짝의 오 형사와 뽀로퉁한 입술에 앙상하게 앞니를 다문 가끔 보는 일본인 형사가 자기네들보담도 두 자도 안 떨어지게 서 있지 않은가?
오 형사는 한 걸음 애라 앞으로 다가들며,
“애라, 잠깐만 같이 가세.”
“어델 가잔 말예요?”
반사적으로 대꾸를 하고 애라는 흠칫하고 한 걸음 물러서며 눈을 홉떴다.
“왜 알지?”
하고 오 형사는 능구리같이 한번 씩 웃는다.
91. 어여쁜 범인
편집애라는 마츰내 오 형사를 따라오고야 말았다. 형사과장이나 같으면 그래도 모르지만 뒈질 날이 며츨 남지도 않을 늙은 것과 실랑이를 하는 것도 창피한 일이요, 설령 이러니 저러니 따져 보았자 그 벽창호가 알아먹을 리도 없을 듯하였던 것이다.
애라 일평생을 통하여 오늘 같은 액날은 또 다시 없으리라. 한한 변(變), 설운 골, 창피한 노릇이 꼬리를 맞물고 뒷덜미를 잡다가, 인제 와서는 다시 꼼짝달싹할 수 없는 기막힌 단대목에 다다르매 그의 마음은 도리어 이상스럽게 가라앉았다.
‘되는 대로 되어라’ 그는 속으로 몇 번이나 재우친지 몰랐다.
‘잡아먹든지 뜯어먹든지 할 대로 해 보렴.’ 하고 코웃음까지 치게 되었다. 이왕 이 지경을 당할진덴 면후를 보거든 실컷 퍼부어나 주고 살든지 죽든지 할 밖에.
고렇게 안녕하게 제 누이를 지켜 필경 달아나게 맨들고 악풀이로 자기를 잡아가는 면후의 심사를 생각할수록 이가 갈리고 치가 떨렸다. 한경이나 철호 보담도 면후가 몇 백 곱절 더 밉고 괘씸하였다.
원풀이, 한풀이, 독풀이, 화풀이를 만나던 맡에 그 대야머리를 아주 묵사발이 되도록 실컷 맘껏 해 제치리라고 그는 도리어 분연히 오만하게 오 형사의 앞장을 섰다.
면후를 퍼부을 모든 말이 거의 준비되었을 때 그들은 경찰부에 다다랐다.
그런데 제 생각과는 아주 딴판으로 면후는 코빼기도 내다뵈지 않고 바른 길로 유치장에 집어 넣으려 든다.
“형사과장이 부르신다 해 놓고 한 마디 말도 없이 사람을 잡아넣는단 말요?”
하릴없이 동물원 짐승우리같이 꾸며 놓은 유치장 목책 앞에 늘어섰을 제 애라는 몸을 빼치며 소리를 질렀다.
“무슨 말이야!”
그 못난이 오 형사가 별안간에 딴 사람이 된 것같이 오늘 딴은 추상 같은 호령을 뒤집어 씌우며 왼손으로 힘껏 팔목을 나꾸어서 오른손으로 철컥 하고 열은 쇠창살 문안으로 집어던진다.
애라가 다시 앙탈할 겨를도 없이 무거운 나무 창살문은 제 잔등을 휘어갈기는 듯이 쾅 소리를 내고 잠기었다.
등뒤에 쿵하는 문 닫는 소리를 듣자, 애라의 눈앞은 금시로 한 그믐밤 빛 같이 캄캄해졌다. 제가 서있는 사바세계가 별안간에 아가리를 벌리고 지옥에 거꾸러 떨어질 때의 느낌이나 이러할 듯. 아모리 모로 뛰고 세로 뛰고 버둥거려도 한 번 닫힌 문은 그 길을 기름하게 뻐드러진 나무 이빨은 벌릴 것 같지도 안 했다.
핑핑 내어둘리는 눈길에도 살과 옷으로 닦아낸 듯한 반들반들한 널조각 바닥과, 모르히네를 찌르다가 잡혀온 듯한 기생퇴물 같은 여자들이 쪼그리고 앉은 것이 보였다. 남감과 달라서 여자 유치간은 별로 붐비지 않았다. 왼편도 판장, 오른 편도 판장, 뒤판장 위에만 쇠창살 창이 터졌을 뿐이다.
약오른 배암 모양으로 독이 치받친 애라는 더운 줄도 몰랐다. 그 사람의 비위를 거슬러 틀어 올리는 퀴퀴한 냄새도 몰랐다. 일구월심에 홍면후가 나타나기만 기다렸다.
‘사람을 가두었으니 혈마 한번 물어라도 보겠지!’ 하는 것이 애라의 오직 하나 희망이요 기대이었다.
일분 일초가 피가 마르도록 지리하다. 그러나 그 긴긴 해가 지고 전깃불이 번쩍거리건만 아모 이렇다 할 소식이 없었다. 밤이 다 되었다. 아홉 시를 지내고 열 시를 지내고 자정이 지낼수록 지나치는 담당의 구둣발 소리나마 점점 드물어진 뿐이다.
‘나를 말려 죽일 작정인가? 어데 얼마나 잘 죽이는지 두고 보자!’ 애라는 속으로 뇌이며 입술을 또 한번 깨물었다.
새벽 두 점이나 지냈으리라. 뚜벅뚜벅하는 구둣소리에 일 찰나전에 어릿어릿하는 애라의 잠은 번쩍 깨었다. 과연 그 발소리는 제 방 앞에 와서 멈추어지며, 일본인 담당이 창살 너머로 들여다보며 혀가 잘 안 도는 조선말로,
“애 애라기 누구……?”
한다.
“내요!”
하고 애라는 영채 도는 눈을 홉떴다.
92
편집애라는 그 일본인 담당을 따라나왔다. 복도를 몇 구비 돌고 층층대를 거쳐 으슥하고 음침한 취조실로 들어오게 되었다. 한복판에 엉성한 나무 책상과 교의 한 개와 걸상 한 개, 다다미를 곤두세워 막아 놓은 앞창과 뒤창, 여기저기 흩어 놓은 흉물스러운 취조 기구들.
담당도 나가 버리고 애리 혼자 걸상에 앉았노라니 까닭 없이 무시무시한 생각이 뒷덜미 짚는다. 음침한 방 가운데 오즉 한게의 광명인 전등도 거물거물 조으는 듯. 어훙한 이 구석 저 구석에서 도깨비가 튀어나올 듯 나올 듯하다. 애라의 간은 콩만해졌다.
‘얼른 누가 와 주었으면!’ 속으로 몇 번이나 중얼거렸다. 그러나 십분이 지나고 이십분이 지나도 사람의 그림자 하나 얼씬거리지도 않는다. 밖에는 소낙비가 쏟아지는 우 하는 바람소리와 함께 촬촬거리는 빗소리가 요란하다. 다다미로 가리워 창이 절컥절컥 흔들리며 불길한 소리를 낸다. 애라는 전신이 오그라붙는 듯하였다.
지리한 시간이 한 시간 가량이나 지냈으리라. 마츰내 앞문이 찌그덩 하고 열리며 면후가 나타난다. 애라는 처음엔 하도 반가워서 선득 몸을 일으키려다가 말고 그대로 주저앉았다.
애라는 오늘에야말로 비로소 형사과장을 보았다. 반들반들한 대야머리와 배암같이 번쩍이는 조그마한 눈과 앙상하게 다문 입에는 찬바람이 도는 듯하다.
“네가 백마정 카페에 있는 애라지?”
형사과장은 다문 이빨 새로 새삼스럽게 이렇게 묻는다. 애라는 얼떨떨해서 미처 대답도 못하였다. 이 사람은 전일에 자기가 잘 알던 홍면후와는 아주 딴 사람 인 듯하였다.
“전일에 알던 것은 사삿정분이요, 오늘은 설교 강도의 공범으로 너를 취조할 테다. 일호 반점도 기이지 말고 바른 대로 아뢰어야 된다. 알았지?”
하고, 형사과장은 안경 너머로 어여쁜 범인을 노려본다.
이 말에도 애라는 뭐라고 대꾸를 해야 좋을지 몰랐다.
“만일 네가 모든 것을 자백하면 이어니와 다 아는 일을 되잖게 거짓말을 꾸며대었다가는 십년 징역이다. 응!”
형사과장은 또 한번 얼른다.
“제 지은 죄가 뭐예요?”
애라는 핼쓱한 입술을 겨우 벌려 이렇게 한번 반문을 해 보았으나 자신은 조금도 없었다.
“네 지은 죄를 네가 모른단 말이냐?”
형사과장은 불같이 성을 낸다.
“너는 설교 강도 김순태의 정부로 그놈이 세상에도 무서운 큰 죄인인 줄 번연히 알면서 그놈을 너의 집에 숨겼고, 또 그놈의 앞잽이가 되어 경찰의 비밀을 염탐하지 않았느냐? 그래도 네 죄를 모른단 말이냐?”
하고, 형사과장은 발을 한번 구른다.
애라는 으쓱하고 몸에 찬 소름이 끼치는 듯하였다.
“제가 벌써 다 알고 앉았구나!”
속으로 탄복하다가, ‘얼러대는 수작이지, 정말 제가 알았으면 나를 오늘날까지 가만히 두었을 리가 없지!’ 하고 딴전을 부릴 용기가 났다.
“김순태 씨가 설교 강도예요? 제 의오빠가……?”
하고, 살그머니 눈을 뜨며 어여쁜 범인은 어이없다는 듯이 쌍긋 웃었다.
“그래도 바른 대로 말을 못하느냐. 그림 내가 증거를 보여 주마.”
하고, 포케트를 훔칫훔칫하더니 봉투 한 장을 꺼낸다.
애라는 그 속에서 나타나는 물건을 보고 깜짝 놀래었다.
93
편집애라가 놀랜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것은 철호와 최후의 순간을 삼던 찰나에 둘이 주고 받은 혈서이었다. 철호와 맺은 영원한 사랑의 기념으로 장 속 깊이 감춰둔 이 혈서가 면후의 손에 들어온 것을 보아, 애라가 집을 나온 뒤에 백마정과 같이 엄밀한 가택 수색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 혈서는 군데군데 번져서 글자의 형용의 분명치 않았으되 애라의 눈에는 ‘단심 무이 심(丹心無二心)’ ‘이혈보혈(以血報血)’이란 글자가 뚜렷이 보이었다. 처음 쓸 때엔 새빨간 빛이 듣는 듯하였건만 오늘날엔 스러진 사랑의 상징처럼 핏빛이 담갈색으로 변해져서 흉물스럽고 칙칙해 보인다.
이 지난날의 사랑의 흔적에, 애라는 무서운 줄도 잊어 버리고 다시금 분노와 원한이 머리를 쳐들었다. 피로써 피를 갚는다는 그의 애인은 제 붉은 마음을 칼로 갚을 줄이야, 영원한 사랑을 맹서한 이 표적이 도야지에게 던진 진주가 될 줄이야! 그나 그뿐도 아니다. 인제 와서는 자기를 옭아넣는 무서운 쇠사슬로, 증거품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이것도 저것도 모두 내 코앞에 앉아 있는 이 형사과장 때문이다. 철호를 달아나게 한 것도 이 놈팽이요 한 경이가 뺑소니를 치게 된 것도 이 멍텅구리 덕택이다. 그래 놓고 시방 와서 사람을 얽어넣고 얼러대는 것은 되잖기도 분수가 있지 않느냐.
“그게 뭐요?”
애라는 찬바람을 뿜으며 한 마디 쏘았다. 이 한 마디는, ‘내가 네놈한테 넘겨갈 줄 알았느냐, 죽을 때까지 싸워보자.’하는 선전포고이었다. 증거품을 보이면 더욱 숙어질 줄 알았던 범인이 도리어 공세를 취하는데 형사과장은 저으기 놀래었다.
“뭐라니! 네 것을 네가 모르냐? 김순태 놈과 사랑을 맹서한 혈서인 것을 모르느냐?”
“뭐요, 사랑을 맹서한 혈서! 흥!”
애라는 어이없다는 듯이 코웃음을 친다.
“종시 그래도 바른 말을 못할까!”
“바른 말이 무슨 바른 말이우? 마뜩찮게 사람을 왜 이리 얼르시우? 잠자코 듣고 있노라니 아모 소리나 함부로 하시는구려. 사랑을 맹세하는 데 꼭 핏걸레가 있어야 말이랍디까? 맙시사 말아요, 누구를 세 살 먹은 어린애인 줄 아슈?”
애라의 눈에는 취조실도 없었다. 형사과장도 없었다. 그의 얼굴은 다홍을 뿌린 듯이 새빨개지고 눈은 샛별같이 번쩍인다. 부들부들 떠는 조그마한 손은 금시로 형사과장의 뺨이라도 후려갈길 듯하다.
어여쁜 범인의 무지개 같은 기염에 형사과장도 얼마 동안 말문이 막혔다.
“김순태를 보낸 놈은 누구요? 한경이를 달아나게 한 놈은 누구요? 제 손으로 제 일을 잡쳐 놓고 왜 애매한 사람을 옭아넣고 어르딱딱거린단 말요?”
저편이 서먹서먹하는 기색을 보자 이편을 더욱 기세를 올린다.
“요년, 시끄럽다! 여기가 어덴 줄 알고 함부로 떠드느냐? 좀 거꾸로 매달려 보련?”
형사과장은 필경인 성을 내고 말았다.
“요년! 말씀 좀 낮춰 함슈. 호령만 하면 누가 벌떡 떨 줄 아나베. 세상에 사내가 김순태 하나뿐이라서 남의 핏걸레를 가지고 증거니 뭐니 하고 떠드시우?”
“증거품뿐인 줄 아느냐? 증인도 있다. 좀 불러 볼까?”
형사과장은 득의양양하게 부르짖고 초인종을 불렀다. 순사 하나이 들어서며 경례를 한다. 형사과장은 눈짓으로 순사를 자기 가까이 불러서 귓속에 대고 무에라고 몇 마디 일러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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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면후가 증인을 보여 주마고 큰소리를 하고 불러온 사람은 고순일이다. 고 순일은 한경의 소식을 철호에게 전해 주고 철호의 말을 또 한경에게 전하고자 사람의 눈을 피하면서 몸소 춘천으로 나려갔다가 한경이가 불시에 백마정으로 끌려오는 바람에 길이 어긋나서 춘천 경찰서의 경계망에 걸리고 만 것이다.
고순일 검거는 의심의 구름만 겹겹이 쌓이고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설교 강도 사선에 오직 한 개의 광명이었다. 서울에 올라온 것과 백마정에서 철호와 애라를 만나본 것과 다시 한경을 찾아간 순일은 설사 진범인이 아니라도 공범인 것만은 갈데없는 사실이다. 여기 용기를 얻은 면후는 갑자기 대활동을 개시하여 형사 한 대는 백마정으로 보내고 한 대는 자기가 거느리고 애라의 집을 습격하였던 것이다. 그 날 지나치게 늦잠을 잔 것은 분명히 그 최면제를 먹은 까닭인 상싶고 그렇다면 백마정에서 애라의 부은 맥주에 그 최면제가 들었던 것도 짐작할 수 있었다. 맥주병과 곱보를 검사한 것은 이 까닭이요, 애라의 집에서는 처음 애라의 속을 떠보려 하였으나 그 능란한 말솜씨에 한 손을 접히고 기연가 미연가 하다가, 한경이 달아났다는 말에 애라가 허둥지둥 뛰어 나가는 것을 보고, 무슨 까닭인지 분명히 몰랐으되, 어떻든지 한경이 달아난 사건에 애라가, 중대한 관계를 가진 것은 벌써,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미리 매복해 두었던 형사대의 한 패는 애라의 뒤를 밟아 쉽사리 검거하게 되었고, 또 한 패는 애라의 집을 샅샅이 뒤져서, 혈서까지 발견한 것이다.
애라의 검거에 면후의 고민이 없지도 안 했다. 사십이 넘은 오늘날에 뒤늦게 타오르는 정열의 대상인 그를 우그려 넣은 것도 차마 못할 일이어니와 기밀비를 이천원 템이나 들여 놓고 아모도 몰래 저 혼자 한 노릇이 만일 드러난다면 세상은 얼마나 비웃을까. 치정에 사로잡힌 형사과장! 카페 계집에게 돈을 이천원씩이나 쓰고 갈팡질팡하는 못난이 형사과장!
그러나 한경이 사단에 눈이 뒤집히었고, 오늘날까지 귀애하고 믿어준 애라가 저를 속이고 범인과 부동이 된 것을 어슴프레하나마 깨달은 오늘날에 그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그네들의 항용 쓰는 문자를 빌리면, 그야말로 직무를 위하여 눈물을 머금고 애라를 체포한 것이다.
잡아온 길로 곧 취조를 해 보려 하였지만 낮에는 남의 이목도 번다하거니와, 애라의 마력에 대한 충분한 준비를 하노라고 해를 지우고 밤을 밝힌 것이다. 다른 경관으로 취조를 시키려면 이런 경위에 가장 좋은 일이로되 제 비밀이 탄로될까 무서워서 입술을 깨물고 제 손으로 취조를 해 보려 한 것이다. 애라는 고순일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도 눈썹 하나 꼼짝하지 안 했다.
“애라! 이분을 모르느냐? 이래도 또 거짓말을 할 텐가?”
형사과장은 호령한다. 애라는 그 맑은 눈을 말똥말똥하게 뜨고 이윽히 순일을 바라보다가,
“난 몰라요.”
“모르다니! 백마정에서 만나본 적이 없단 말이냐?”
“흥, 백마정에서 만나본 사람! 종로 네거리에서 아모나 줏어 오시구려.
백마정에서 다 나를 봤다고 할 테니. 그 숱한 손님을 어떻게 다 기억하란 말요?”
“순태와 네가 만나보고 춘천 한경에게로 보낸 고순일을 네가 모른단 말이냐?”
“뭣이 어쩌고 어째요?”
애라는 이 말에 발끈 증을 낸다.
“춘천 한경 씨에게 보낸 사람이구요. 내 얼굴을 좀 똑똑히 보시고 물어보구려. 내가 한경이오? 내가 영감의 애지중지하는 누이님이오? 내 얼굴을 좀 자세 보시오 내가 홍한경이오 , ? 난 카페로나 놀아먹는 이애라라는 천한 계집애예요. 서슬 푸른 형사과장 누이님은 죽었다가 다시 깨어나도 못 되지요! 한경 씨 아는 사람에게 제가 무슨 상관이오?”
95
편집애라의 숨길은 씨근벌떡거리고 그 눈에는 핏발이 섰다. 날름거리는 입술과 혓바닥에서는 불꽃이 주렁주렁 흩어지는 듯하다.
“이분이 누구인지 알으켜 드리리까? 제 누이의 일이라고 야속하게도 모르시니 내가 아는 대로 말하지요. 이분은 한경 씨의 병정이요, 또는 애인인지도 모르지요. 저 헙수록한 꼴과 점잔을 빼고 다녀도 계집이라면 밑이라도 씻어 준다오. 영감이 찾는 설교 강도인가 개망나닌가 한 놈팽이에 한경 씨의 말을 전갈하러 다니는 분도 저분이요, 그 강도의 말을 한경 씨에게 전갈다니는 분도 저분이랍니다. 좀 훌륭한 일이오? 의리도 있지요, 믿음성도 있지요…….”
책상 한옆에 쭈그리고 섰던 고순일 이 때에 애라의 말을 끊으며 무거운 입을 벌렸다.
“여보시오. 누구신지는 모르지만 말을 너무 지망지망히 하시는구려. 나를 언제 보셨다구 그런 모욕을 하시오?”
어여쁜 범인의 기염에 한동안 말문이 막혔던 형사과장은 제법 위엄을 보이는 듯이 그 앙상한 손으로 책상을 한번 쳤다.
“시끄럽다. 하여간 너희들이 말을 들으면 공범이 분명하구나.”
애라는 다시금 말을 가루챈다.
“공범이 분명하다? 어떻게 하시는 말요? 누가 애라 이년과 저 점잖으신고 선생님과 공범이랍디까. 공범이라면 홍한경 씨와 고순일 씨가 공범이겠지요. 그 갸륵한 한경 씨 설레에 나 같은 년이야 공범 차례인들 참례할 줄 아슈? 대관절 한경 씨는 왜 아니 잡아 오슈? 영감도 동기의 정이 있나 보구려. 핏줄이 켕켜서 놓쳤수? 강도 애인 노릇도 형사과장의 누이라야 꼭 해먹겠구려. 어떻게 하는 셈이오? 제 누이가 아니면 죄 없는 년을 옭아 넣어도 좋고, 제 누이는 강도를 대신해서 편지질로 경찰을 놀려도 일이 없단 말요?”
“무슨 잔소리야?”
형사과장은 두 손으로 귀를 막는 듯이 뺨을 괴고 부르짖었다.
“왜 듣기 싫소? 참, 바른 소리는 상피라든가. 내 목을 잘라 보구려. 이 소리만은 어데 가던지 할 테요. 제 집에서 강도를 길러내어 슬그머니 빼어 돌리고 애매한 사람만 잡아 우그리면 다 무시할 줄 아슈?”
형사과장은 무슨 생각에 잠긴 듯이 눈을 딱 감고 있다가 문득 초인종을 눌렀다. 아까 그 일본순사가 또 나타났다. 눈짓으로 고순일만을 더려 가라고 명령하였다.
면후와 애라는 단둘이 남았다. 형사과장은 목소리를 한층 떨어뜨리며,
“여보게 애라! 그게 다 무슨 종잡을 수 없는 소리야? 없는 자네 죄를 억지로 얽을 낸 줄을 아나? 자네 당자보담도 자네 죄 없기를 바라는 사람은 나일세. 순리로 말하면 나도 좋고 자네도 좋을 것 아닌가? 백마정에서 밤마다 만나도 좋고 들여앉추고 나와 살림을 해도 좋지 않은가? 암만해도 자네가 빗길로 나가는 모양일세. 광명한 세상을 등지고 이승의 지옥이라는 감옥에서 썩으면 좋을 것이 무엇이람?”
면후의 말낱은 무거웠다. 진국으로 애리를 위하는 듯하였다.
자기와 철호 사이를 뻐개고 한경을 들어오게 한 고순일의 의외 출현으로 말미암아 혈서로 흥분된 애라의 가슴에 더 한층을 불을 질렀던 것이나, 면후의 사정 비슷한 소리에는 얼마큼 귀가 솔깃하지 않음도 아니다.
“시장했겠지?”
면후는 또 한번 자상스럽게 물었다. 그 말을 듣고 보니 어제 왼 종일 굶은 것이 생각하며 별안간에 배가 고팠다. 애라도 기가 죽은 듯이 스르르 눈을 감으며 맥없이 중얼거렸다.
“배가 고파요.”
96. 악마의 발원
편집형사과장은 덴뿌라 소바 두 그릇을 시켜 왔다. 경관과 범인은 마주 앉아서 이 새벽녘의 간단한 식탁으로 얼마쯤 구순해졌다. 따끈따끈한 국물이 보송보송한 빈 창자 속으로 흘러나릴 제 애라는 얼마나 맛난지 몰랐다. 그것은 단순한 음식물이 아니고 마치 서약과 같은 효력이 있었다. 쓰라리던 가슴이 대번에 풀리고 조 비비던 맘이 너누룩해졌다. 그야말로 식후의 제일미로 면 후는 담배까지 권하였다. 평일에는 개떡같이 보이던 ‘해태’이어늘 지금엔 그 푸른 갑만 보아도 눈이 뒤집힐 만큼 반가웠다. 황황한 손길로 한 개를 빼어물 제 입에만 닿아도 향긋한 냄새가 비위를 움직인다. 후하고 한 모금을 뿜는 맛이란 천금을 주어도 바꾸지 않으리라. 푸른 연기가 가물가물 하고 사라질 때, 애라도 사라지는 듯한 느낌을 맛보았다.
사람이 모든 자유를 잃을 때엔 흔히 본능으로 돌아가기가 쉬운 법이다. 제 아모리 절기있는 사람이라도 한번 갇히는 몸이 되고 보면 한 술의 보담 더 맛난 음식과 한 모금 담배를 그리워한다. 이 조그마한 식욕과 편의를 채우게 될 때 그 쾌미와 만족은 갇힌 경험 없는 이의 상상 밖이다.
애라도 오늘같이 면후가 고마운 적은 없었다. 돈 이천원을 아귀를 맞추어 제 손에 쥐어줄 때보담도 이 국물과 담배가 더 반갑고 고마웠다.
면후도 담배 연기만 후후 뿜어내고 한동안은 말이 없다가,
“애라, 좀 생각해 보게. 아까도 말했지만 애라가 암만해도 길을 비뚜로든 모양이야. 나하고 떠먹듯이 약속을 해 놓고 그게 무슨 방정이람? 그야 반주그레한 사내를 보면 젊은 맘이 동하기도 쉽고 또 보통 사람과 다르니까 얼마큼 호기심도 있겠지만, 후환이 걱정이란 말야!”
면후는 애라를 위해 개탄하는 듯이 애석해 하는 듯이 다시금 말을 이었다.
“그런 놈이란 제가 필요할 때 사랑이니 뭐니 하다가도 휙 돌아서면 도리어 앙물을 하는 걸세. 곱다랗게 남의 비위만 슬슬 긁적거려 놓고는 그야말로 떴다봐라야!”
제 폐부를 꿰뚫어보는 듯한 형사과장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애라의 고개는 절로 숙어졌다. 인제 와서는 앙탈을 하고 버티어 볼 아모런 용기도 없었다.
“제 속으론 딴 배짱 차린 노모에게 속을 준 애라면 불쌍치 않아. 적이 의리가 있고 정이 있는 놈 같으면 제 몸만 살짝 빼어나가고 애라를 떨어 트리고 갈것인가? 영리한 사람이 왜 그렇게도 생각을 못한담? 그리고 저 혼자나갔으면 차라리 좋지. 남의 집 처녀까지 꾀어내 가지고 달아나지 안 했느냐 말야! 세상에 죽일 놈 같으니.”
중얼거리는 듯이 종용종용히 이르던 면후는 마츰내 스스로 흥분 된 듯이 소리를 높인다.
“그럼, 한경 씨는 어떻게 하실 작정이예요?”
시방껏 잠자코 있던 애라는 한 마디 가루채어 보았다.
“어떻게 하다니? 오라비를 배반하고 집을 나간 그년을 가만히 둘 줄 아나? 강도놈과 배가 맞아 다니는 그런 년은 내 누이가 아니다, 내 원수다.
세상없어도 그년은 잡고 볼 터이다.”
하고, 면후는 목에 핏대를 세운다.
“참 그래요, 동기가 아니라 원수예요.”
애라는 맞방망이를 쳤다.
“애라, 우리 같이 일을 해 보지 않으랴나?”
면후는 저 먹은 뜻대로 애라가 움직이는 것을 보고 맨 마지막으로 한 마디 따져 보았다.
“난 죄수가 아니예요.”
하고 애라는 고개를 갸웃이 들어 면후를 쳐다본다. 면후는 그 뜻을 얼른 알아 차리고,
“지금 당장이라도 내놓으면 그만이지!”
하고, 의미있게 눈을 끔쩍한다.
97
편집면후는 그 날 새벽으로 애라를 내어보냈다. 어제까지도 이런가 저런가 하는 의심이 없지 않았으되, 한 시간 남아 애라의 취조와 고순일과의 대면으로 모든 사단을 분명히 깨달을 수 있었다. 한경이 말이라면 애라가 펄펄 뛰는 것으로 보아 두 사이가 사랑의 원수인 것은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 비밀의 열쇠가 한 번 열리매 한경이를 춘천으로 쫓으라던 수수께끼도 풀리고 한경이 달아났다는 소식에 미친 듯이 흥분한 까닭도 연맥이 닿았다. 범인의 필적과 한경의 필적이 같고, 김순태란 청년이 떠나던 밤에 한 경이가 그림자를 감춘 사실을 맞춰 보면, 설교 강도 사건의 진범인은 김순태란 청년이요, 그 청년은 곧 애라와 혈서를 주고받은 사내와 같은 인물이며 또 한경의 애인인 것이 틀림이 없었다. 애라가 고순일을 무여지하게 몰아세운 것은, 순태와 한경이 사이에 비밀 연락을 해 준 탓으로 자기가 실연의 화살을 맞게 된 분풀이임이 갈데없는 사실이다.
이 사건을 싸고 도는 한 조각 구름장은 오직 김순태란 청년의 정체다. 김순태란 것은 물론 엉터리없는 가명일 듯하고 고순일이가 연락을 취한 것을 보면 처음부터 의심하던 이창이가 곧 김순태인 듯도 싶었다. 만일 그렇다면 이창을 잡으라고 김순태를 보낸 것이 마치 장량이 소식을 장량에게 묻는 격과 진배없는 멍텅구리 수작을 한 것이다.
그러면 애라가 왜 김순태와 같이 가지 안 했느냐, 하는 것이 아즉도 남은 의문이다. 그러나 이 두가지 비밀의 자물쇠는 애라의 손이면 어렵지 않게 열어볼 수 있고 애라는 인제 제 손아귀에 들었으니, 그런 허접쓰레기 수수께끼쯤은 당장에라도 알아낼 듯싶었다.
그는 확실히 애라가 제 수중에 든 것으로 알았다. 그가 애라를 선선히 내어놓은 것도 반분은 이 신념 때문이다. 물론 얼뜬 치정이 백분의 일쯤 애라의 고생하는 것이 아차랍기도 하였다. 그러나 가장 큰 이유는 너무 배심을 샀다가는 눈 딱 감고 덤비는 그 성미에 무슨 소리를 해 내뜨릴지 모르겠고, 만일 그 입으로 자기의 비밀이 탄로되는 날이면 제 코앞에까지 나타난 설교 강도를 그대로 놓아보내고 그를 위해 편의까지 도와준 직책은 벗기 어려울 듯하였다 형사과장도 물론 . 미역국이어니와 세상의 비난도 귀가 아플 모양이다. 애라를 덧들이느니보담 무슨 수로든지 구슬리는 것이 시방 와서 상책인 줄을 애라를 취조해 보면서 절실하게 깨달았다. 애라의 환심 사기는 그리 어려운 노릇이 아님도 알았다. 사랑을 잃고 날뛰는 그 질투심만 이용하면 인제야말로 제 뜻대로 움직일 줄 잘 알았다. 그리고 미행만 톡톡한 형사 한명을 붙여 놓으면 내어놓아도 제 손바닥 위에서 춤추는 것보담 더 안전할 듯싶었던 것이다.
면후는 그 이튿날 저녁때가 되어도 이런 생각이 머리에 매암을 돌며 형사 과장실을 떠나지 않았다. 어젯밤을 통으로 새운 탓에 얼마큼 졸리지 않음은 아니로되, 한번 혼이 나 본 뒤라 집에 돌아가 누울 것은 생의도 못하였다.
따르릉 하고 불사에 전화가 왔다. 고운 애라의 목소리다.
“어젯밤에 고단치나 않으셨어요?”
첫 인사로 묻는다. 어젯밤 취조실에서 지낸 것도 마치 하롯밤 유흥으로밖에 생각지 않은 말씨다.
“참 고단하지?”
면후의 눈 가장자리도 풀리며 정부를 위로하는 듯.
“그런데 나 좀 여쭈어 볼 일이 있어요. 고순일 씨가 어떻게 되었어요?”
“어떻게 되다니? 그대로 있지.”
“난 내놓으신 줄 알고 불야불야 전화를 걸었어요. 왼종일 생각해 보니까 한 경 씨의 간 곳은 고씨가 잘 알 듯해요. 좀 욱대겨 보시구려.”
“그래, 그러지!”
하고, 면후는 만족한 듯이 전화를 꽂았다. 애라가 제 사람이 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98
편집애라는 훤할 녘에야 집에 돌아와 집안 사람의 놀랜 이야기에 대강대강 대답하고, 곧 제 방으로 들어가 요이부자리를 깔고 누웠다. 도톰하고 폭신폭신한 욧바닥, 부드러운 생고사 겹이불이 얼마나 몸에 편한 것을 절절이 느끼었다. 지긋지긋한 유치간은 생각만 해도 몸서리가 치이었다. 짓이겨 놓은 듯한 팔과 다리를 흠씬 펴고 늘어지게 기지개를 한번 켜보매 협착하다던 제방이 얼마나 넓고 자유로운 것을 알 수 있었다.
‘면후가 싹싹은 해!’ 하고 선선히 자기를 내어보낸 면후에게는 또 한번 고마운 생각이 났다.
면후가 고마운 대신으로 철호가 어떻게 밉고 원망스러운지 몰랐다. 어떤 때의 여자의 맘이란 바람에 날리는 수숫잎보다도 더 가볍다.
“그런 놈이란 제가 필요할 때만 남을 이용하는 법이다.”
하던 면후의 말이 다시금 생각히었다. 그렇다! 그 말이 참으로 옳다. 철호는 일종의 흡혈귀다. 내 피를 마지막 방울까지 빨아먹고 빈 껩데기만 남기자, 헌신짝 버리듯 툭 차 던지고 말았다. 손톱만한 불쌍한 생각과 가엾은 정도 없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떴다봐라다. 그러다가 찌부러진 여덟 달 등이 한경이를 달고 달아나는 녀석이 이상이 있으면 얼마나 고상하며 사상이 있으면 얼마나 놀라우랴.
이 때까지 가장 신성하고 순결하다고 생각하던 최후의 순간도 지금 와서는 그런 쑥스러운 일이 세상에는 또 다시 없을 듯하였다. 쪽쪽 울던 자기, 손가락을 깨물던 자기에게 침이라도 배앝고 싶었다. 새빨간 제 정열을 새빨간 제 피로 점점이 물들인 혈서도 시방 보면 휴지 쪽의 가치도 없는 듯하였다.
불쌍한 애라는 아름답고 깨끗하던 지난날의 제 감정까지 스스로 짓밟아 버렸다.
‘원수를 갚아라! 원수를 갚아라! 네가 지긋지긋하게 생각하는 그 유치간에 두 연놈을 잡아넣고 그 쇠창살 속에서 썩게 하려무나, 두 연놈이 주리난장을 틀리고 악착한 비명을 칠 때에 보기 좋게 웃어 주려무나.’ 질투의 피에 주린 악마는 애라의 귀에 그 독한 입술을 대고 속살거렸다.
‘어찌하면 한시바삐, 아니 일초라도 빠르게 저 연놈을 옭아올꼬!
애라는 돌아누우며 입술을 깨물고 생각해 보았다. 철호가 떠날 때에 제가 어데 가 있을 주소조차 똑똑히 일러 주지 않은 것이 새삼스럽게 생각히었다. 워낙 큰일이 꼬리를 맞물고 닥치는 날이라 엄벙덤벙하는 바람에 그 주소까지 분명히 알아두지 않은 것이 지금 와서도 뼈가 아프도록 후회가 났다.
‘있는 데를 알았으면 시방 당장이라도 잡아올걸 갖다가!’ 하고 애라는 중얼거렸다.
“봉천까지 빠져 나오기만 하면 어데서든지 만나겠지.”
하는 흐리마리한 말을, 자기를 경계하는 말인 줄도 모르고서, 도리어 일꾼의 조밀한 주의에서 나온 소리인 주로 곧이들어, 어림없이 탄복하던 일을 생각하면 제 자신의 얼마나 미운지 몰랐다.
“세상에 얼빠진 년도 있지.”
하고, 제 몸을 물어뜯어도 시원치 않을 듯싶었다. 저녁 때까지 궁리를 하던 판에 문득 번개같이 고순일의 생각이 났다. 그놈이 한경이와 철호 사이에 비밀 연락을 해주었으니 두 연놈이 어데서 어떻게 만나자는 약속도 분명히 있었을 듯싶었다. 별안간에 이불자락을 걷어치고 뛰어나와 면후에게 그런 전화를 걸었던 것이다.
99
편집그 다음날 오정 때가 조금 지나서 면후는 애라를 찾아왔다.
“이리 오너라.”
하는 소리에 애라는 벌써 면후의 목청을 알아듣고 부리나케 마루를 뛰어나려 슬리퍼를 짝짝거리고 대문간까지 나와 맞았다.
“오늘은 제법 신사다우신데. ‘이리오너라’를 다 찾으시고.”
하면서 애라는 간드러지게 웃어 보이었다.
“그럼, 언제는 신사가 아니던가?”
하고, 면후도 반가운 얼굴이다.
“접때는 남 옷도 안 입었는데 그냥 뛰어들지 않으셨어요?”
“그야 범인을 잡으러 온 날이니 그렇지.”
하고 면후는 웃는다.
“에그머니! 오늘도 무시무시한걸. 또 뒷구녕으로 잡아넣을지 누가 아냐?”
하고, 애라는 땍때글 웃었다.
“그럴런지도 모르지. 수상한 기색만 보이면 또 집어챌는지 모르지.”
“에그, 그런 불길한 소리는 좀 말아요. 남의 간담이 서늘하게.”
하고, 애라는 웃음 담은 눈을 흘겼다.
둘은 방안으로 들어왔다.
“오늘은 절도 않나?”
“절한 뒤끝이 좋잖던걸.”
하고, 애라가 살짝 웃다가 진국으로,
“참 고순일을 취조해 보셨어요?”
하고, 초초한 듯이 묻는다.
면후의 얼굴은 잠깐 흐려지며,
“글쎄, 그게 걱정이야. 놈이 분명히 아는 눈치인데 워낙 황소같이 생겨 먹어서 세상 자백을 해야지 . 세 번이나 혼떨음을 시켜도 그저 모른다고만 우기네 그려.”
“그럼 무슨 일로 백마정에는 왔다고 해요?”
“어허, 누가 백마정에 나왔다고 해야 말이지. 경찰에서는 분명히 아는 일이라고 떠먹듯이 일러듣겨도 백마정이 어데 붙은지도 모른다나. 김순태도 모르고.”
“가만히 계셔요, 김순태라면 정말 모르겠지요. 본명은 이철호니까요.”
“응, 이철호! 안성 이 참판 집 아들 아닌가?”
“누가 안 그렇데요. 그 집 서자예요. 동경에서는 한동안 이창이라고 행세를 했대요.”
“오 옳지! 그래 암만해도 이창이 간 데가 없어져서 내가 찾았더니만 …….”
“그래요, 고순일도 아마 동경 있을 때 알았겠지요. 한경 씨도 물론 그 때 친구이구요.”
“그것을 내가 모르다니…….”
하고, 면후는 머리를 긁적긁적한다.
“그러니 고순일이가 철호도 알고 한경 씨도 알고 두 사이에 조방꾸니 노릇 한 것도 분명한데 시침을 떼면 될 말이오?”
애라는 취조하다가 자백을 못 받은 형사과장보담도 더 펄펄 뛴다.
“놈이 하릴없는 뻣대야! 어떻게 고집이 센지 아모도 모른다고만 버티니 기막힐 노릇이지. 서울에 잠깐 볼일이 있어 왔다가 돌아가는 사람을 왜 이렇게 고생을 시키느냐고 제가 도리어 마뜩찮게 인권 유린이니 뭐니 하고 대드는 판일세.”
“그런 놈을 그대로 두셔요?”
애라는 더욱 분해 한다.
“그야 죽일 수도 없는 일이지. 그 외에 한경이가 간 곳을 알아낼 도리는 없나?”
애라는 이윽히 무엇을 생각하는 듯하더니 별안간에 손벽을 친다.
“무슨 좋은 생각이 났나?”
면후도 기뻐한다.
애라는 무슨 중대한 사건을 밀고하는 사람 모양으로 면후의 귀에 대고 속살거렸다.
“형사과장 댁을 수색해 봐야 될 일이 있소.”
100
편집“우리 집을 수색하다니?”
면후는 의외라는 듯이 채쳐 물었다.
“한경 씨 거처하던 방을 샅샅이 뒤져보셨어요?”
“참 그도 그렇구먼.”
하고, 면후는 뒤를 이어 일어나는 사변에 평상시의 냉정을 잃어 버리고 한 경의 방을 검사해 볼 생각이 아즉까지 안 난 것을 깨우치게 되었다.
“허나, 찬찬한 그 애의 일이라 무슨 증거될 만한 것을 남겨 놓았을라구.”
면후는 애라의 명안이 의외로 신통치 못하다는 듯이 시들하게 중얼거린다.
애라는 화를 내며,
“누이라고 너무 믿는구려. 어쨌든지 뒤져나 보아요. 돈 쌌던 보자기라도 나올 테니.”
“돈 쌌던 보자기?”
하고, 면후는 귀가 쭝긋해진다.
“설교 강도의 훔친 돈을 누가 맡을 줄 아슈? 형사과장 누이가 맡으셨다오. 그 돈 숨긴 곳도 물론 형사과장님 댁이라오.”
애라는 여태 그것도 몰랐느냐는 듯이 핀잔을 준다.
“그렇던가! 괘씸한 년 같으니.”
형사과장은 황연대각하면서도 일은 썩 재미나게 된 일이로고나 하였다. 현직 형사과장의 집에 설교 강도의 훔친 돈이 감춰진 줄이야. 귀신 아닌 사람으로는 알 도리가 없기도 할 것이다.
“그러기에 등하불명이랍니다. 좌우간 댁부터 수색을 해 보아야 돼요. 어때요, 명탐정이지요?”
애라는 자랑하는 듯이 빵긋 웃었다.
“과연인걸, 참 여자 명탐정이라 다르구먼.”
“수색하는 데는 내가 꼭 입회를 해야 됩니다.”
“그야 그럴 일이지.”
면후는 애라를 데리고 자기 집으로 왔다. 한경의 방을 이 잡듯이 뒤져 보았으되, 옷가지, 책 나부랭이, 편지 허접쓰레기밖에 별로 이렇다 할 증거품이 없었다.
“별것이 없구먼.”
형사과장은 실망한 듯 중얼거린다.
“그래도 자세자세 좀 보시구려.”
편지 꾸러미를 일일이 검사하며 애라가 한층 더 골똘한다. 편지도 대개 동경이나 조선 안에 있는 전일 동창생에게서 온 것이요 수상한 것은 발견을 하지 못하였다.
애라는 얼마쯤 떡심이 풀렸으되 그예 무슨 증거든지 잡아내려고 애를 부등부등 켰다. 증거품보담도 제 사랑의 원수의 세간을 맘대로 뒤흔들고 뒤적거리는 데 더욱 흥미와 만족을 느꼈다. 옷가지 하나도 성하게 안 두고 뒤털어 본 뒤에 편지 봉투를 쪽쪽 찢어가며 편지를 끄집어내어 함부로 흩었다.
맨 나종에 그의 손길은 책까지 낱낱이 들추어보기 시작하였다. 책장이 상하도록 털어 보고 방바닥에 되는 대로 툭툭 구울렸다.
일본말 번역된 ‘앙리 바르비스’의 「클라르테」란 소설 책장을 뒤적뒤적 하던 애라는 ‘콜럼버스’가 미주 대륙을 발견할 때보담도 더 기쁘게 부르짖었다.
“이것 좀 보셔요. 이런 데 써 두었구려.”
면후도 그 말에 귀가 번쩍 띄어 애라의 내어민 책장을 보았다.
그것도 책 한복판 틈어리에 가느다란 연필 글씨로 ‘봉천(奉天) 가무정(加 茂町) ××번지’라고 적어둔 것이었다.
“이 주소가 분명히 까닭 붙은 주소예요. 철호도 봉천에 있겠다는 말은 귓결에 들은 법해요. 여기가 그들의 비밀 은신처인 것은 틀림이 없어요.”
하고, 애라는 손벽을 치며 기뻐한다. 그 주소는 독자도 다 아시려니와 한경의 절친한 동무 봉천 부영사 작은집의 주소로 한경이가 철호와 마나자고 약속한 비밀 장소다.
〈계속〉(연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