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해탄/안개 속
< 현해탄
하늘 땅 속속들이
먹 위에 먹을 갈아 부었다.
발부리조차 안 뵌다만,
나는 아직도 외롭지 않다.
비가 흩뿌리더니,
우뢰가 요란하고,
번개가 날카롭고,
드디어 내 잠자는 마을,
뭇 집 들창이 캄캄하다.
길 가 불들도 꺼졌다.
별도, 달도,…….
밀물처럼 네가 쓸어와,
다시는 불도
내일 낮도 없을 듯하더라만,
나의 마을 사람들은 대견하더라!
앞을 다투어 깜북 깜북
여러 들창이 환하니
흐득임을 보아,
오무러졌다 펴는 불촉이 분명타.
길 가는 나그네들이
나비떼처럼 불 가로 찾아든다.
볼이 패이고 뼛골이 드러났다.
별빛보다 희미한 들창이
그들에 역력한 고난을 비친다.
정녕 몇 사람을
너는 험한 길 위에 죽었을 게다.
네 손은 아귀가 세고 끈끈하다.
부썩 힘을 주어 움키면,
아무것이고 다 부여잡히리랴만,
모래알처럼
손가락 틈을 새는 것이 있으리라.
꼭 쥐면 쥘수록 틈이 번다.
안개 끼인 밤에는
호롱불이 보름달 같으니라.
물론 나그네들이야 집도 없고 길도 멀다.
그 대신 희망이 꽉 찼더라.
눈동자는 굴속 같아야,
한 점 불이 별 같고,
가슴은 한층 밝아,
밤새도록 환히 아름답더라.
내야 눈마저 흐리다만,
아직 외롭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