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해탄/나는 못 믿겠노라

지금 나는 멀리 남쪽 시골서 온 자네의 봉함편지를 접어 머리맡에 놓고,
눈을 감아 생각하려 잠을 멈추고 자리에 누웠다.
풋내의 밀물이
짙어가는 여름 드높은 하늘의 깊은 어둠을 헤여,
고기떼처럼 춤출 듯 꼬리를 접어 이슬ㅅ발을 끊어 던지고,
내 마음의 적은 배가 어젯날의 거칠은 바다 항로에서
풍파가 준 깊다란 상처를 다스리려,
헌 뱃등을 비스듬히 언덕에 누이고 있는 내 아늑한 굴강인 좁은
방으로
얼싸안는 듯 덮치는 듯 듬뿍이 스며든다.


지나간 황혼의 포구와의 별리(別離)가 오래되어 낡아갈수록
산악의 푸른 눈썹은 기억의 쓰라림에 젖어,
하늘을 나는 새들도 날개를 접고,
젊은 식물들이 네 활개 저으며 가쁘게 호흡하는 저 위
눈동자 맑은 밤하늘이 호올로 어둠에 슬픈 옷자락을 길게 끄을면서,
정강이 허리가 묻혀 곧 머리까지도 보이지 않을
시커먼 수렁으로 비척비척 걸어간다.

어둠
오랜 사공인 별들조차 갈 길을 잃어 구름 속에 헤매는 어둠,
돌 바위의 굳은 마음이나 산악의 큰 정신도
이 속에서는 넋을 잃고 쓰러질 무겁고 진한 풋내,
아무리 길고 억센 생명도 재 되어 쓰러질 흙의 독한 냄새,
영원히 건강한 태양도 지금엔 다리를 절어 멀리 산 뒤에 숨은
이 두렵고 미운 모든 것이 한데 어우러진 구렁 속에서,
밤의 몸집은 한없이 크고 넓게 성장하며,
나는 새벽 항구를 멀리 남긴 채 나이 먹고 늙어서 죽어갈 것일가?

우뢰의 큰 소리로 부름도 아니련만,
썰물의 굳센 손이 이끎도 아니련만,
무엇이 부르는 듯, 이끄는 듯,
내 몸과 마음은 밤의 깊은 바다 속으로 가라앉고 있다.
아마도 밤은
이 두텁고 무거운 이불을 덮어
주검의 검은 자리 우에 나를 누이지 않고는
이곳으로부터 내내 물러가지 않으려나보다.

마치 내 즐기는 산이나 들의 고운 색깔을 걷지 않고는
이놈의 여름철이 달아올 수 없는 것처럼, 정말로 밤은
의상 없는 심술 사나운 악령인가보다.

그러나 밤
이 두렵고 고단한 오늘날의 긴 밤을 헛되이 달려보고,
허위대는 어리석음이라든가
내일을 옳게 살으려 고요히 잠자는 것의 중함이라든가를,
이 사람, 낸들 어찌 분간하지 못하고 알지 못하겠는가?

말없이 움직임 없이 오직
죽은 듯 하룻밤을 꿀꺽 참아
선뜻 개는 아침,
두 팔을 걷어 어지러운 들길을 열어나갈 오늘날의 용력(勇力)일 나는,
대망(待望)의 아득한 잠자리의 값을
나는 허덕이는 가슴 위에 두 손길을 얹고 눈을 감아 금쳐 본다.

“밤의 굳은 손이 우리의 몸과 마음을 사로잡아 누일 때,
그저 운명에 종용(從容)함이 오는 아침을 위(爲)하여 가장 현명(賢明)할 것이다.”
어찌 자네뿐이겠는가!
일찍이 선배인 어느 비평가의 논문도
이 ‘냉정한 이성의 지혜로운 길’을
우리들이 걸어갈 유일의 길이라고 지시했음을,
나는 다시 한 번 새롭게 기억한다.

정말로 가시덤불은 무성하여 좁은 앞길을 덮고,
깊은 밤 날씨는 언짢아, 두터운 암흑이
그 위에 자욱 누르고 있다.
이미
자네는 부상한 채 사로잡히고, 나는 병들어 누워,
벌써 몇 사람의 진실로 존귀한 목숨이
고난에 찬 그 험한 길 위에 넘어졌는가?
이제 우리들의 긴 대오는 허물어지고 ‘전선’은 어지럽다.

그러나 이 사람!
이 괴로운 밤이 다시 우리들을 찬란한 들판으로 나르는 대신
이름도 없는 세월의 헛된 제물로
번쩍 잡초 우거진 엉구렁 아래 메어치고 달아나지나 않을지?
나는 벌레 먹어 무너져 가는 내 가슴이 맞이할 운명과 더불어
몇 번 고단한 몸을 뒤척이고,
몇 번 괘종의 우는 소리를 들으면서,
이 시커먼 파도 가운데서 대답을 찾으며 생각하였을까?
내 수척한 육신은 기름땀내 잠기고,
돌멩이처럼 머리는 침묵의 괴로운 바다 속으로 가라앉는다.

순간
나는 주위를 둘러싼 두터운 침묵이 무너지는 날카로운 소리에,
비로소 보이지도 않게 방안 가득 진 친 셀 수도 없는 모기떼의
무수한 입추리 가운데
참담히 누워있는 내 육신의 전모를
나는 모진 아픔과 몸서리를 같이 발견했다.

오오, 이 밤의 어두운 꿀이
그들의 온갖 활동에 얼마나 크고 넓은 자유를 주는 것일까?
암석까지도 진땀을 내뿜는 이 계절의 진한 입김이
그들의 엷은 두 날개를 얼마나 가볍고 굳세게 만들어 주는 것일까?
그러나 우리는
이 가운데서 보고 아는 모든 자유를 죽여가고,
‘습격자’를 향하여 몸을 일으킬 육신의 적은 힘까지도 잃어간다.

앵! 아우성소리 치며 눈 위를 감돌고,
소리개처럼 탁 귓전을 후려,
이 밤의 아픔의 가장 혹독한 전초(前帩)들은 꽉 뒷다리를 버티고,
우리들의 몸에 입추리를 꽂아,
밤이 주고 그들이 탐내는 모든 것을
우리들의 전신에서 약탈한 참혹한 자유를 향락하고 있다.

오, 지금은 육촉 전등 흐릿한 좁다란 마루판자,
굵은 창살이 네모진 하늘을 두부같이 저며 놓은 높다란 들창 아래,
내 자네의 여윈 몸은
고된 일에 넘어진 마소처럼 쓰러져 있지 않은가?
얼마나 이 밤의 죄악의 통렬한 집행자들은
무참하고 아프게 그 입추리를 박았을까?
비비여 죽여도, 눌러 죽여도,
벗아, 내 분함이 어찌 풀리겠는가?

자네, 이 모진 아픔에 잠들 수 있겠는가?
자네, 이 무거운 더위에 숨쉴 수 있겠는가? 그리고 아직도
오는 아침 우리는 정말 건전할 수 있겠는가?

오오, 몸을 일으키어 두 팔을 걷어라.
그리하여 네 손에 닿는 모든 것을 잡아,
이 졸음과 생각을 다 한데 깨치고,
바로 우리 병들고 수척한 육신을 쥐어뜯는
밤의 미운 초병단(哨兵團)을 향하여,
주검으로써 야격(夜擊)에 일어서라.

만일 우리가
자네와 그 아류(亞流)들이 말하는 거룩한 철리(哲理)를 좇는다면,
닭이 홰를 치고 바자 밑에 울며
이놈의 일족(一族)이 밤과 더불어 숲속에 물러갈 그 때,
우리들은 두엄이 되어 굴욕의 들판에 넘어졌을 것이다.

나는
우리들의 육신을 뜯기지도 않고
우리들을 헛되이 늙히지도 않는
그렇게 착한 여름밤이 있다는 신화와 함께
내일을 위하여 맘의 아픔에 종용(從容)하라는
그 거룩한 철리를 믿을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