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헌 세계일주 기행(2회)
샌프란시스코의 번화
편집7월 8일에 하와이를 떠난 우리 배는 일주일이 지난 7월 14일에 이르러야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제36호 부두에 그 허리를 닿이게 되엇다. 그러자 그곳 △△회 총회장이며 OO민보 사장인 백일규(白一奎)씨가 선실에까지 마중 나와 주셨는데 남들이 말하는 모양으로 그 분은 안창호파였던 관계인지 처음에는 다소 냉담한 태도를 보이더니 차츰 지낼수록 온후(溫厚)하고도 신뢰할 만한 좋은 분임을 스스로 깨닫게 하더라.
그이는 미국에 온지 벌서 20여년에 미쳐서 그동안에 유명한 캘리포니아 대학의 경제과까지 마친 뒤 이렇게 북미대륙의 관문을 지키고 계시면서 사회적 또는 정치적으로 놀랄만한 활약을 보이고 있을 뿐더러 본국에서 오는 우리 동포의 상륙에 대하여는 일일이 미국관헌에 교섭을 하여 주어서 반송을 피하게 하며 또 그 외에도 유학생이면 대학입학을 주선하고 고학생이면 세탁, 이발 등 온갖 노동의 주선까지 하여 주어서 실로 아버지와 같은 공경한 대접을 받고 있던 터였다.
그런데 샌프란시스코의 재류동포수(在留同胞數)는 모두 200여명이 있는데 그 중에 대하고루(大厦高樓:큰 문간방, 높은 다락)에다가 서양인에 못지 않게 대규모의 공장을 경영도 하며 상점을 경영하는 분도 있으며 또 정치, 경제, 문학 등 각 방면의 유학생과 더러는 노동자가 되어 이발소와 세탁소와 남의 집에 고용살이도 하는 분이 있었다.
이제는 샌프란시스코 시가(市街)를 소개할 차례에 이르렀다. 그러나 나는 이것을 피하려 한다. 여러분이 상상하시던 모양으로 20층, 30층의 석조(石造), 벽돌(煉瓦), 철근 콘크리트 등 대건축물이 하늘과 해(天日)를 가리게 또 어디까지 갔는지 모르게 기막히게 늘어졌으니 그를 「가옥(家屋)의 대삼림지대(大森林地帶)」라고나 설명할까, 그 외에 다른 해설의 말을 나는 못 찾겠고 또 각국 인종이 가로(街路)마다 웍작웍작 따라 가다가는 웍작웍작 따라 오며 자동차가 까만 개미 떼 같이 늘어선 것과 해륙(海陸)에서 울리는 쇠망치, 기적(汽笛)소리 등 동원령(動員令)이 내린 전쟁시대(戰爭地帶)가 아니면 상상도 못하리만치 복잡 다단(多端)한 품이 옹졸(拙)한 내 붓끝으로 그려낼 재주(才操)가 없는 것을 잘 아는 까닭이다.
다만 움직이는 도시요, 크고 기운 센 거리거니 하면 별로 틀림이 없으리라.
그렇더라도 우리는 이 샌프란시스코란 북아메리카의 관문에 서서 「청권(請願)의 때는 이미 지났다. 우리에게 자유를 달라, 그렇지 않으면... ...」 하고 부르짖으면서 내닫던 1775년 3월의 이 나라 민중의 장렬한 그 활동을 돌이켜 추억(回憶)하는 것은 당연한 의무이리라. 그 위에 또 식민지인 미국에서 본국인 영국에 배화운동(排貨運動:특정 국가 또는 특정 기업의 물건이나 상품 따위를 배척하여 거래하지 않는 운동)을 일으켜 매년 237만 파운드의 수입이 있던 것을 일격(一擊)에 163만 파운드에까지 하락시키었으며 이어서 동인도회사의 차(茶)를 상륙거절한 일과, 이어서 인지판매사건(印紙販賣事件)과 대륙회의(大陸會議) 등 온갖 역사적 비장한 기억도 첨가하여 좋은 것이나 최후에 의장 존 핸콕(John Hancock)을 선두로 한 13주 대표 56명이 서명하던 그 옛날의 어느 광경은 누구나 없이 분명히 와 보고 지나야 할 줄 안다. 이것이 이방인으로 미국에 대해 지킬 예의가 될 것임으로.
영화(映畵)의 왕국 할리우드
편집그 뒤 수일 후에 나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아침 차를 타고 저녁해질 무렵에 임박하여서 「로스앤젤레스」에 도착했다. 아마 캘리포니아에서 정말 우리 동포의 활동하는 지대는 이 로스앤젤레스인 모양으로 남녀 약 600명이 거류하고 있는데 도산파(島山派)의 세력이 상당하더라. 왕년에 도산이 머물렀다던 집도 구경했는데 크고 깨끗했으며, 단체로는 △△회와 OO단이 있어서 꾸준한 활동을 보이고 있었으며 동포의 생활 정도도 모두 여유작작(餘裕綽綽: 아주 넉넉하다)하게 보였다.
그런데 나는 이 로스앤젤레스에서 수십만 팬들이 동경하는 영화의 성지 「할리우드」를 보앗다. 「황금광시대」에 나오던 채플린, 「바그다드의 도적」에 나오는 더글라스, 선라이즈의 케너-등 모든 유명한 남녀배우들과 「유니버설」, 「폭스」, 「메트로골드윈」 등 온갖 대규모의 영화 회사가 빡빡하게 들어선 순전한 활동사진(活動寫眞)의 천국이리.
그 「스튜디오」의 웅대한 것이 실로 놀랄만 하였으니 비행기격납고같이 굉장히 큰 집채가 10여개 이어서 있었다. 이 속에서 릴리안 기시, 클라라 보! 로이드, 구-간(?), 등 모든 천재들이 밤낮 울고 부는 흉내를 내면 그것이 수 천 권(數千卷)의 필름이 되어서 전미의 상설관(常設館)과 유럽, 아시아에 일시에 개봉이 되며 심지어 우리 조선 서울친구들도 조선극장이나 단성사(團成社)를 통해 그를 구경하고는 흉내 내던 배우들 모양으로 정말 울고불고 야단이다. 실로 황동사진은 세계를 축소하여 놓았다 할 것이요, 만국인의 정서를 통일하여 놓았다 할 기관임에 틀림없다.
어쨌든 꽃의 「할리우드」에 영화회사가 300여개가 있어서 전세계의 영화사업의 8할을 점하는 아메리카에서도 그 중 9할까지「할리우드」 손으로 제작되어 나온다 하니 어찌나 놀라운 활동인지 알 것이 아닐까.
이렇게 「할리우드」가 유독 영화의 성지로 온 세계의 총애를 받게 된 까닭이 없는 바 아니니, 첫째 그곳은 춘하추동(春夏秋冬) 사시(四時)가 마치 봄철같이 모두 따뜻하고 비나 눈 오는 날이라고는 적으며 산천도 아름다운 품이 미국에서는 드문 터이다.
우리 부녀(父女)는 안내인을 따라 온종일 장내(場內)를 돌아다니며 포복절도(抱腹絶倒)할 희극(喜劇)박이는 마당도 구경하였고, 눈물이 비오듯 하는 초특작 대비극(超特作大悲劇)이라 할 장면도 보았고 러브씬의 광경도 보았는데 들은즉 그네들이 세계에서 모두 굴지(屈指)의 유명한 배우들이라 한다.
나올 때에 카페에 들렀더니 가장 모던식의 차림차림을 한 여러 영화배우들이 잡담하며 아이스크림을 먹는 것이 희귀(稀貴)하더라. 아마 세계의 모든 최신유행과 담화(談話)재료는 여기에서 나오는 듯.
과실(果實)과 석유(石油)의 풍부(豊富)
편집낙원같은 꽃의 「할리우드」를 떠나서 우리는 다시 시카고(市俄古)로 향했다. 그런데 그 중간에 약 10리 평방되는 크나큰 포도밭이 있었다. 한 시간 54리 씩 가는 그 빠른 기차로도 5,6시간을 순전히 포도밭 속으로 갔으니 매우 굉장하였던 것을 알 수 있으리라. 이곳에서 1년 동안에 건포도가 60만 톤(頓)이 난다. 그뿐인가. 「오렌지」라고 조선에서 「네불(Navel orange:네이블 오렌지)」 하는 과일이 또 어찌나 많이 나오는지 빨갛게 네불만 연 과일 밭 속을 기차를 타고 역시 한 시간씩을 달아났다. 그놈의 과일은 누가 다 없애는지. 생산도 거대하려니와 미상불 소비도 거창한 셈이었다. 그 과수원에서 일하는 노동자는 조선사람과 중국사람과 일본사람 등 동양인이 대부분이었는데 임금도 높고 모두 상당한 저축을 하고 있다고 들었다.
이와 같이 과수(果樹)에 있어서도 풍부하기로 세계인의 가슴을 놀래이거니와 더구나 석유에 있어서는 여행자를 기절하게 할 지경으로 그 산출(産出)의 풍부를 자랑한다. 나도 시카고가는 길가에 잇는 유전(油田)을 보았는데, 산꼭대기든지, 평야든지, 바다 가운데(海中)든지 그 넓은 벌판에 서울 종로판 안에 세운 철주(鐵柱)의 10배나 되는 큰 쇠기둥을 수 백주(數百柱) 세우고 있었는데, 그것이 모두 석유를 뽑는 기계라 한다. 연간 생산량(年額)이 수 억 만「배럴」에 달하는 그 많은 석유를 이전에는 기차에 싣고 운반하더니, 이제는 그래서는 다 공급할 수 없다 하여 필라델피아 (거리 60리), 뉴욕(紐育)(거리 60리)과, 보스턴(합쳐서 5000리)의 그 먼길에 수도(水道)를 놓고서 그냥 부어서 냇물 모양으로 땅 속으로 운반하는데, 그리하면 앞에서 서술한 3대항구(三大港口)에서 배에 실어서 동서양 각국에 보낸다하는 바 전세계의 석유 중 7할까지는 미국에서 난다 하니, 황금의 나라됨이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이렇게 기막히는 부의 원천(富源)에 대한 소개는 끝이 없겠음으로 이만하거니와 농업도 거저 먹기요, 또한 대규모의 작농(作農)들이었다. 실로 끝 간 데를 모른다할 그 너른 벌판에 기계로 땅을 갈아놓고 기계로 씨를 휘휘 뿌리고, 그리고는 기계로 또 수도(水道)를 끌어 넣었다가 가을에 또 기계로 와락와락 추수(秋收)하여버리면 그만이다. 농작은 대개 수도(水稻:논에 물을 대어 심는 벼)인데, 그것은 재미 동양인의 식료(食料)가 되며, 서양인들도 가끔 「카레라이스」를 하여 먹기에 쌀을 구한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 개발 회사통에 함남 정평(咸南 定平) 살던 김씨가 들어가서 농사짓기를 하여 한 때는 백 여 만 원을 벌어서 백미대왕(白米大王)이라고 미국에 그 이름이 짱짱 울리던 거농(巨農)이 있었는데 그만 1차 세계대전(歐洲戰亂)을 친 뒤 3,4년에 더 크게 하려다가 그 해의 유명한 수해(水害)로 대패(大敗)한 이가 있다. 그 외에도 조선사람으로 상당히 큰 농작을 하고 있는 분이 꽤 많았다. 이렇게 허허벌판(處處)에서 동포의 건투하는 모양을 보면 알 수 없는 감격에 가슴이 차더라.
여관에서 대실패(大失敗)
편집나는 시카고에 와서 여관일로 큰 실패를 하였다. 우스운 일이나 그 이야기를 해보건대 내가 20년 가까운 예전에 그때 서울 중교동(中橋洞)에서 교회학교의 교사일을 맡아보고 있던 염광섭(廉光爕)이란 청년에게 돈 500원을 주어 미국 가는 노비(路費)를 보조하여 준 일이 있는데, 그분이 그동안에 시카고 대학을 마치고 그 곳 대학도서관 간사로 있었다. 그래서 염군이 나를 맞아보려 나와서 기차에 내리자 곧 자동차로 받아 싣고서 여관을 안내한다고 시중을 지나 「미시간」호수가 까지 자꾸 대리고 간다. 그래서 교외를 한참 질주(疾走)하더니, 얼마만에 호수를 매축(埋築:바닷가나 강가를 메워서 뭍으로 만드는 일)한 우에다가 화려우미(華麗優美)하게 지은 집 앞에 내려 놓는다.
들은 즉 그곳이 「비치 호텔」 이라 하여 세계에서 굴지의 국제적 호텔로 구미의 유명한 부호나 정치가들이 의례히 이곳에 와 머문다 하는 바 과거에 우리 명사들 중에도, 이승만씨나 서재필씨 같은 분이 수 차례 투숙한 일이 있다 한다. 아마 염군은 그 동안 본국사정을 잘 모르고, 나를 백만장자나 된 줄 알고 여기에다가 붙잡어 온 모양이다.
기왕 온 것을 어쩌라고 숙박을 청하며 하룻밤 방 값을 물으니 놀라지 마라. 그리 좋지도 않은 방이 100원(그곳 돈 50달러)이라 한다. (서양여관은 방 값만 내고 음식은 제 마음대로 따로 돈을 내고 사먹는 법이니까) 부녀(父女)가 각각 방 하나씩 점령할 터이니, 하룻밤에 200원이 달아난다. 아뿔싸! 하고 뉘우쳤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할 수 없어서 제일 싼 방을 달라하여 1박 36원식 둘이 72원식 돈을 물처럼 써서(用錢如水) 울며 겨자 먹기로 숙박하였으니 어쨌든 그 여관에서 나흘동안 묵는 사이에 수백원 돈을 써버렸다. 이렇게 기막히고도 우스운 봉변이 또 다시 있을까. 그곳에서 떠나서 며칠 뒤에 뉴욕에 와서 장덕수(張德秀)와 그 외의 여러 사람들을 만났다. 여기에는 민단 사람들이 많더라.
우리 사람들이 돈을 모아 건축 하였다는 X인기독교 예배당도 보았는데, 아주 당당하였다. 정치적 기타의 활동은 빼거니와 어쨌든 뉴욕에는 우리 사람으로 요리, 양복, 세탁, 이발하는 노동자와 유학생들이 약 60명 있는데, 장덕수군이 정치학일 따름으로 다른 분들은 대개 경제학 방면의 전공이었다.
그런데 뉴욕에 약 30만 달러 (60만원) 가는 조선인 부자가 있으니, 그는 안정수(安正洙)씨리. 그가 부자된 역사를 들으면, 처음에 동양에서 향나무 원료를 가져다가 향을 만들어 팔았는데, 그것은 서양가정에서도 마치 우리들이 만수향(萬壽香)을 항상 방 안에 피워 두듯이 향불을 피워놓는 습관이 있는 것에 주목하고서 그가 제일 먼저 이 사업을 경영하기 시작하여서 크게 호평을 받았다는데, 지금도 큰 공장을 짓고 흑인 노동자를 사용하여 가면서 크게 장사하고 있었다. 그의 사업은 먼 장래까지 매우 유망하게 보이더라. 뉴욕에서는 이밖에 독립 50년기념 만국박람회를 보았다. 동양의 공진회 박람회의 류(類)가 아니었다.
대통령을 만나다
편집워싱턴에 갔을 때는 백악관에 가서 「쿨리지」 대통령을 만났다. 풍채는 윌슨같이 그렇게는 훌륭하지 못 했으나 경쾌하면서도, 중후한 맛이 있는 분이더라. 악수할 때에 힘을 어찌나 주어 꼭 쥐는지 그것도 모두 동양의 먼 곳에서 온 손님에 대한 특별한 친근을 표함인가 하면 한끝 상쾌하였다. (略-원문-)
그리고 미국의회도 구경했다. 거기서는 일본의회 모양으로 방청권의 여부도 없이 누구든지 자유로 들어가서 방청하기로 되었는데, 하원보다 상원이 훨씬 재미가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미국의 의회조직은 하원은 조세안같은 것을 토의하는 것에 불과하고, 정작 외교라거나 전쟁, 비준 등 모든 일은 상원에서 하기로 되었으므로 그곳은 세계의 눈과 귀가 항상 집중되어 있을 뿐더러 의장도 늘 긴장하고 있었다.
상원의원의 조직은 각주대표 94명으로 되어있는데, 나는 주장 상원의 의사(議事)를 참관하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외교위원장 「보-라」씨도 회견하였는데 (10행削(삭제)-원문-)
그리고 그곳에서 영광의 제1대 대통령 「워싱턴」의 기념탑을 보았는데, 높이는 550척의 사각탑으로 그 건축석재는 각국의 기증으로 된 것이라 한다. 「엘레베이터」로 승강하기로 된 것인바 정상에 올라가니, 워싱턴시의 전경이 보이더라. 총 공사비는 260만원이요, 제막식은 1884년 2월에 거행하였다 한다.
딴말이나 「워싱턴」의 고적(古跡)은 「보스턴」 시에도 있는데, 그곳에는 1776년 7월 3일에 「워싱턴」장군이 칼을 빼어 들고 혁명을 부르짖던 유목(楡木)터가 그냥 남아 있어서 천대후의 사람(千代后人)의 가슴을 칠 만 하였다.
감격을 받기는 워싱턴의 고적에서도 그리 했지만 뉴욕에 돌아왔을 때 시청 부근에 있는 「네이던 헤일(Nathan Hale)」동상을 보고 한 층 더하였다. 그 동상에는 미국독립전쟁 때에 미군의 밀정이라 해서 영국군에게 잡히어 최후를 마칠 때에 부르짖은 유명한 그의 명구가
I regret that have only one life to lose for my Country
(원문:I only regret, that I have but one life to lose for my country)
1776. 9. 22
그대로 쓰여 있는데 그 뜻을 번역하면 「나는 내 나라에 바치는 목숨을 오직 하나밖에 가지지 못한 것을 원통하게 생각한다.」함이라. 이 동상은 실로 전 아메리카 민중의 정신을 항상 긴장시켜 놓는 효과를 가지고 있다 할 것이다.
이밖에 각지의 대학, 도서관, 재판소, 신문사, 공장, 회사 등 모든 시설에 놀라운 것이 많았으나 미국에 대한 기행문 분량이 너무 많아졌기로 모두 생략하기로 하며 또 「나이아가라」 그 밖의 폭포, 하소(河沼), 산악 등 명승(名勝)도 대개는 구경하였으나 같은 의미로 딴 기회에 말하려 하며 좌우간 나는 미국 와서 물질문명의 절대한 위력을 깨달았다. 어쨌든 뉴욕에는 두 사람에 한 대 씩의 자동차가 있다 하니 그네의 부와 활동력을 넉넉히 짐작할 것이 아닐까.
나는 뉴욕에서 차 타고 두 시간을 가는 「팍스킬」 피서지에 가서 약 두 달 동안을 어학공부를 하다가 1927년 1월 15일에 다시 뉴욕 부두를 출발하여 태평양을 건너 영국과 아일랜드로 향하는 길에 올랐다. (차호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