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 뜨는 지평선

一[일]. 신 문 기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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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회사 사장 박병래(朴秉來) 씨의 부부 사이에는 여러 가지 로맨스가 많았다. 이만 석 가까이 추수를 하는 그는 제 손으로 그 회사를 맨들어 가지고 그곳에 사장 노릇을 할 뿐인가, ××중학교까지 단독으로 경영하며 역시 그 학교의 교주가 되었다. 이것만으로도 하잘것없는 우리 사회에는 그의 이름이 햇발과 같이 빛났다. 그만큼 그의 한 노릇이요 그에게 관련된 일이라면 옳고 그르고 할 것 없이 말 좋아하는 세상 사람의 입길에 오르고 나리었다. 그로 말미암아 신문의 사회면이 혼잡해지기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더구나 시방 안해 윤애경(尹愛卿) 씨와 첫날밤에 일어난 불상사는 오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오히려 우리의 기억에 새로우리라. 그 때의 사실을 윤곽(輪廓)만이라도 알아둠은 내가 지금 쓰려는 이 긴 이야기에 많은 참고가 되겠기로 그 때 내가 틈틈이 모아두었던 ××신문 쪽지를 독자 여러분 앞에 공개하려 한다.

이 사건에 대한 첫날 ― 곧 기미(己未)년 이듬해 경신년 사월 십삼일 ― 의 기사는 다음과 같다.

“박 사장 결혼야의 혈극, 괴청년 신랑 난자”(朴社長 結婚夜의 血劇, 怪靑年 新郞을 亂刺)란 초호 삼단의 큼직한 제목 밑에, ××제사회사 사장이요 ××중학교 교주인 박병래 씨의 결혼식은 재작 십일에 거행되었는데, 그 식장인 종현 천주교당에 모인 손님과 구경꾼은 안으로 넘치고 밖으로 밀리어 왼 서울이 다 끓어 나온 듯한 성황을 이루었으며 식을 마치고 조선호텔로 그 피로연이 벌어지자 여러 십대 자동차와 여러 백대 인력거가 꼬리를 맞물고 그야말로 장사진(長蛇陳)을 쳤고, 초대 받은 손님으로 말해도 우리 사회의 일류 명사들이 거진 망라되었으며 귀족 측으로 박 후작을 비롯하여 김 자작·조 남작, 당국 측으로 정무총감·경무국장까지 출석하였으니 그 굉장하고 성대한 품이란 왕자의 혼례로도 따를 수 없었다. 가정의 번잡함을 피하고 새로운 정과 기쁨을 알뜰살뜰히 향락하게 위함이던지, 첫날밤을 호텔에서 치르게 되었는데, 그 날 밤 새로 한 점 가량 되어 이 행복에 싸인 신방의 문을 박차고 난데없는 청년 한 명이 뛰어들어와 섬섬한 비수로 신랑을 난자하여 원앙금침이 피투성이가 되는 불상사가 돌발하였더라.

그 다음에 다시 칼럼을 나누어 “범인 부지거처”(犯人不知去處)란 작은 제목 밑에는, 박 사장이 혼례식 당야에 어떤 청년의 칼을 맞았다 함은 별항 보도와 같거니와 피해자는 왼편 팔에 길이 오촌, 깊이 삼분의 상처를 입었을 뿐이요 생명에는 별조가 없다 하며, 이 급보를 접한 소관 서대문서에서는 아닌 밤중이건만 서장까지 출동하는 일변으로 강전(岡田) 사법계 주임이 경찰의와 십여 명의 정사복 경관을 대동하고 현장을 검사하였으며 또 한 번으로 즉시 비상소집을 하여 범인 체포에 노력하였으나 범인은 어느 결엔지 벌써 엄중한 경계망을 돌파하고 자최를 감췄으므로 작일 정오까지 아모런 단서를 얻지 못하였다더라.

그리고 또 ‘호텔 지배인의 말’로 다음과 같은 기사도 있었다.

이 사건의 진상을 알고자 조선 호텔로 피해자인 박병래 씨를 방문한즉 상처는 그리 대단치 않으나 사건이 사건이므로 정신이 수란하여 면회를 할 수가 없다고 거절하였고 그 대신 호텔 지배인의 말을 들으매,

“무에라고 미안한 말씀을 여쭐 길이 없습니다. 손님에 대한 미안도 미안이려니와 사회에 대해서도 면목이 없는 일입니다. 워낙 성대한 혼례식이고 축하오시는 손님도 연락 부절하였기 때문에 호텔 문을 잠그지 않았으며 주무시는 방문도 아직 방문객이 다 가시지 않았기 때문에 호텔 문을 잠그지 않았으며 주무시는 방문도 아직 방문객이 다 가시지 않았기 때문에 열쇠를 드리기는 하였으나 밖으로 걸어두지는 않았던 모양입니다. 아마도 흉한이 번잡한데 휩쓸리어 미리 호텔 안에 들어와서 배회하다가 마지막 방문객이 돌아간 틈을 타서 그런 흉행을 저지른 듯합니다. 요란하게 우는 초인종 소리를 듣고 뽀이를 보내 보았더니 그 때엔 범인이 벌써 달아난 뒤였습니다.”

하더라.

그 이튿날 십사일 신문에는 “범행 동기는 치정관계?”(犯行動機는 痴情關係?)란 제목으로 또 이런 기사가 실리었다.

××제사회사 사장 박병래 씨의 결혼 당야에 어떤 청년이 칼로 신랑을 찌르고 달아났다는 것은 작일 기보와 같거니와 사건 발생 이래로 소관 서대문서에서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활동한 결과 재작일 밤에 이르러 의주통(義州通) 방면에서 혐의자 두 명을 체포하였고 또 작일 아침 남대문역에서 혐의자 한 명을 검거하였다는데 그 자들 중에 과연 진범이 섞이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으되 동서의 공기는 매우 긴장하여 호텔 뽀이 수 명도 호출 취초중인 바 사건 내용은 절대 비밀에 부치므로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신부인 윤애경 여사로 말하면 일찍이 삼일운동에 참가하여 얼마 동안 철창 고생한 일도 있었고, 또 음악에 조예가 깊어 독창회(獨唱會)도 연 일이 있으므로 박병래 씨와 결혼하기 전에도 남자와 교제가 적지 않았다 하며, 그 아름다운 태도에 남 모르게 가슴을 태운 청년도 한둘이 아니라 한즉, 혹은 그 중의 불량배가 불 같은 질투를 걷잡지 못하여 첫날밤을 타서 사랑의 원수를 찌른지도 모른다는데 또 한편으로 들으면 박병래 씨는 조선 전국을 털어놓고 손꼽는 부호이기 때문에 상해가정부와 만주에 있는 ○○ 운동단체로부터 여러 번 협박장을 받았으나 도모지 응치 않은 일이 있다는 바 혹은 직접 담판을 하려고 해외에서 자객이 들어왔다가 굉장한 혼례식을 보고 더욱 분함을 참지 못하여 행복에 넘노는 그를 놀래게 했는지도 모른다는데 인물이 인물이요, 시절이 시절이므로 사건의 전개는 매우 주목된다더라.

그후 이틀동안 뚝 끊이고 아모 보도가 없다가, 사흘 되는 십칠일에야 “범인 오리무중”(犯人 五里霧中)이란 제목으로 짤막하게, 박병래 씨 상해 사건의 혐의자로 체포된 청년 삼명은 그동안 취조해 본 결과 그 사건에는 아모 관련이 없는 것이 판명되었으므로 작일 오전에 모두 방면하고 또다시 시내 모처에서 청년 두 명을 인치했으나 증인에 지나지 못하는 모양이며 사건 발생 이래 일주일이 가까운 오늘날 활동한 보람도 없이 범인의 단서조차 잡기가 망연하여 경찰은 머리를 앓는 중이며 범인은 벌써 국경을 넘어 멀리 달아난 듯하다더라.

그후 하로가 지났다 이틀이 , 지났다, 사흘이 지나고 나흘이 지났건만 범인의 소식은 감감해지고 말았다. 그 사건에 대한 물 끓듯 하던 흥미도 차차 가라앉으려 할 임물이었다. 나는,“박 사장 상해범, 돌연 서서에 자수!”

(朴社長 傷害犯, 突然 西署에 自首!)란 초호 삼단의 제목을 보고 놀래었다.

박병래 씨의 결혼 당야에 일어난 불상사는 본지에 누보한 바어니와 사건 발생 이래 경찰은 각 방면으로 수색을 거듭하였으나 범인의 종적이 묘연하던 중, 작 이십일일 오전 십일시경에 청년 한 명이 돌연히 서대문서에 나타나서, 강전(岡田) 사법계 주임을 면회하고, 자기야말로 박병래 씨를 칼로 찌른 진정한 범인이니 법대로 처벌해 달라 하였는데 동서에서는 정신병자나 아닌가 하여 여러 가지로 취조해 보았더니 과연 사건의 진범인인 듯한 점을 발견하였다는데 그 범인은 이십세 남짓한 김활해(金活海)란 청년으로 일정한 주소가 없으며 기골이 매우 장대하다는데 그가 자현하게 된 것은 자기 때문에 애매한 사람들이 혐의를 입어 까닭 없이 고생함을 분개한 데서 나온 것이라 하여 대기염을 토하였다더라.

진범이 나타난 이후로 이 사건에 대한 흥미는 더욱 높아져서 매일 신문을 기다리기에 초조할 지경이었고 모든 신문도 그 사건의 진전을 보도하기에 골몰하였는데 이십삼일에는, ……기보와 같거니와 범인은 아모리 취조하여도 범행 동기에 대하여는 입을 굳이 닫고 발설을 하지 않으며 “내가 그 진범인인 것을 이미 자백한 이상에 굳이 그 동기를 물을 필요가 어데 있느냐?”고 도리어 반박하여 취조 경관을 괴롭게 한다는데 경찰은 각처로 형사를 파견하여 범인의 뒷조사에 분주한 모양이며 범인의 연령으로 보아 혹은 한때의 호기심과 의협심으로 자현한 것이나 아닌가 하는 의심조차 또다시 되풀이한다는데 작일 오전 구시경에는 형사 수명이 다시 박병래 씨의 집에 출장하여 아직도 병상에 신음하는 피해자와 그 부인을 면회하고 범행 당시의 경과와 범인의 모습 같은 것을 세밀히 조사해 갔다더라.

그리고 이십사일에는, 기보와 같거니와 …… 암만해도 자칭 진범인 김활해가 과연 적실한지 않은지 알 길이 없었던지 작일에는 박병래 씨의 부인 윤애경 여사를 사법실로 호출하였는데 그 어여쁜 모양은 음침한 사법실 공기에도 한 줄기 봄기운을 돌게 하였으며 결혼 당야에 그런 끔찍한 변을 겪은 까닭인지 얼골은 매우 파리하였고 양 미간에는 수운이 어리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한 조각 동정을 금할 수 없게 하더라.

이십오일에는, …… 진범인지 아닌지 판단하기 위하여 박병래 씨의 부인이 서대문서에 몸소 호출되었다 함은 기보한 바어니와 그 부인과 자칭 진범인 김활해와의 오후 다섯시 가량 되어 사법계 밀실에서 청하였다는데 그때 범인은 부인을 바라보며 대담스럽게 “내가 조선호텔에서 당신 남편을 죽이려던 사람이 아니냐?”하고 얼골을 번쩍 들어보이매 부인은 당장에 새파랗게 질리며 “아녜요, 아녜요, 당신이 아녜요”하고 두어 걸음 물러섰다 한다. 이 기괴한 광경에 입회한 경관도 눈이 호동그래졌다 하며 얼마 만에 부인은 정신을 수습하는 듯하더니 입회 경관에게 “이 사람은 그 때의 범인과 얼골 모습이 아주 틀립니다. 이 사람을 놓아 주세요”라고 단언하였으므로 단서가 잡힐 듯하던 그 사건은 또다시 한 겹의 수수께끼를 더하게 되었다더라.

그리고 그 밑에 사법주임 말로,

“피해자의 부인이 진범이 아니라고 부인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첫날밤에 그와 같은 불의의 변을 당하였으니 피해자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신부인들 무슨 정황이 있었겠습니까? 창황 중에 범인의 얼골을 똑똑이 기억했을지는 의심입니다. 여러 가지로 보아 진적한 범인인 것은 사실이나 그래도 조곰 미흡한 점이 있기에 형식상으로 대면을 시켰을 따름이니 부인이 부인한다고 곧 진범이 아니라고 단언할 수는 없습니다. 위선 전번에 내가 현장에 갔을 때 그 부인을 보고 범인이 복면을 하고 들어왔더냐고 물은즉 자세히 알 수 없다고 대답합디다. 복면을 하고 안 하고는 모르는 터이니까 범인의 얼골을 분명히 기억했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면 부인은 어째 아니라고 단언을 했느냐고요 글쎄올시다. 그것은 조금 생각해 볼 문제겠지요. 그러나 내 생각 같애서는 인정 많은 여자의 마음이라 범인의 처지에 동정하여 그런 말을 한 줄 압니다.”

하더라.

그후 일주일 가량 기사는 또 뚝 끈치었다가 오월 삼일에 이르러 “범인 김활해는 가정부원(假政府員)으로 판명”이란 큰 제목 아래 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리었다.

한동안 세상의 주목을 끌던 ××회사 사장 박병래 씨를 첫날밤에 습격한 범인 김활해는 작 이일로 취조를 마치고 마츰내 일건 서류와 함께 검사국으로 넘기었는데 그는 경북 태생으로 일찍이 독립사상을 품고 작년 삼월에 삼일운동이 일어나자 각 방면으로 출몰하여 많은 활동을 하다가 그 해 구월에 거미줄 같은 경계망을 벗어나 중국 상해로 건너가서 활동을 계속하던 중 이번에 군자금을 모집할 계획을 세우고 경성에 잠입하였다가 몇 번 박병래 씨를 방문하고 군자금 제공을 강청하였으나 종시 응하지 않으므로 필경 단도를 품고 결혼 당야에 박병래 씨를 습격한 것이라더라.

그 후 한 달이나 지난 유월 십일일 신문에 또 김활해에 관한 조그마한 기사를 발견하였다.

××제사회사 사장 박병래 씨를 첫날밤에 단도로 찔러 일시 세상을 놀래인 상해 가정부원 김활해는 필경 예심이 종결되어 공갈 살인미수 제령 위반의 죄목으로 경성지방법원 합의부 공판에 부치게 되었는데 오는 이십오륙일 경에 그 제일회 공판이 개정되리라더라.

이십사일 신문에, 기보와 같거니와 …… 그 공판은 마츰내 이십칠일 오전 십시부터 대원(大原) 검사의 입회와 복전(福田) 재판장의 심리로 제칠호 법정에서 열게 되었는데 피고는 본대 가세가 구차한 터 서울에는 친척도 없으므로 일생의 운명을 결정할 법정에 서는 몸이 되었건만 변호사 대일 능력도 없던 바 이것을 안 피해자 박병래 씨는 스스로 비용 전부를 담당하고 변호사계에 이름이 높은 윤대영(尹大榮), 이인창(李仁昌) 양 씨 에게 피고의 변호를 의뢰하였다는데 첫날밤의 살같은 행복을 부수고 자기를 죽이려던 원수이어늘 도리어 그를 위하여 변호사까지 대어줌은 사람의 감정으로 매우 하기 어려운 일이라 하여 한 아름다운 이야기거리가 되었다더라.

공판이 있던 그 이튿날 곧 이십팔일 신문의 사회면은 거의 전부가 그 공판 기사로 들어찼는 바 그 제목은 일일이 기록하기에 매우 번잡하므로 그 기사만 초하면 다음과 같다.

……이미 보도하였거니와 이 소문이 한 번 퍼지자 당대의 명사요 실업가인 박병래 씨의 첫날밤에 일어난 사건이요 또 그 사건의 경과가 자못 세상의 흥미를 끈 탓인지 개정 전부터 법정으로 몰려드는 군중은 거의 천으로 헤아릴 지경이었다. 그 공판이 열리는 칠호 법정 앞에는 그야말로 사람의 산이요 사람의 물결을 이루어 번잡하기가 이를 데 없었으며 종로서에서는 경관 십여 명을 파견하여 방청객 정리와 군중 헤치기에 전력을 하였고 이로 말미암아 개정 시간에까지 지장을 주었으며 더욱 우스운 것은 칠호 법정의 바루 옆에 있는 팔호 법정문이 열리자 멋모르는 군중은 덮어놓고 그리로 몰려들어 일시는 공판을 중지하는 법석을 이루었으며 마츰내 칠호 법정 문이 열리매 제각기 앞을 다투어 엎어지고 자빠지는 둥 마치 싸움판과 같았는데 이렇듯이 번잡한 가운데 어떻게 비비고 들어갔는지 박병래 씨의 부인이 새파랗게 질려 방청석 한구석에 참예한 것은 자못 이채를 발하였다.

예정보담 한 시간이나 늦어 오전 십일시 삼십분에야 강본(岡本), 영도(永島) 두 판사의 배심과 복전(福田) 재판장의 주심 아래 대원(大原) 검사의 입회와 윤대영(尹大榮), 이인창(李仁昌) 양 변호사의 참석으로 마츰내 공판은 열리었다. 재판장으로부터 피고의 이름을 부르자, 피고는 곧 자리에서 일어나 종용자약한 태도로 재판장 앞 가까이 걸어갔는데 그 훤출한 키와 떡 벌어진 어깨판은 이십 세의 청년으로는 매우 숙성한 편이었으며 달포의 철창 생활로 말미암아 안색은 비록 창백하나마 먹으로 그은 듯한 시커먼 눈썹에는 자못 꿋꿋한 기운이 넘치었다.

예에 따라 피고의 원적, 현주와 성명, 직업, 전과 유무를 물은 다음, 곧 사실심리에 들어가서, 피고는 일찍이 조선 통치에 불만을 느끼고 독립을 희망하던 중 작년 삼월 일일에 삼일운동이 일어나자 당시 배재 학교(學校) 사학년에 수업하다가 책을 집어던지고 곧 그 운동에 참가하야 인산 당일 물 끓듯 하는 군중의 행렬을 따르며 ‘만세’를 고창하였고 그후엔 『독립신문』의 배달에 전력하였으며 경계가 엄중한 탓으로 만사가 뜻같이 되지 않으매 작년 구월 경에 표연히 국경을 넘어 중국으로 건너가서 만주에서 표랑 생활을 하다가 김좌진 (金左鎭)의 부하가 되어 군자금 모집에 종사하던 중 금년 이월 경에 또다시 국경의 경계망을 돌파하고 경성에까지 잠입하여 무교정(武橋町) 십칠번지 자기 누이되는 한성권번 기생 김화옥(金花玉)의 집에 잠복하였었다.

그후 피고는 박병래 씨가 명망가요 또 재산가란 말을 듣고 군자금을 모집할 목적으로 이월 십육일 오후 십시 경에 박 씨를 자택에 방문하였으나 만나지 못하고 또 십팔일 역시 동시각에 찾아갔으되 또한 면회의 거절을 당하였으므로 이에 반감을 품고 그를 살해하고자 이십이 일에 본정통(本町通) 삼모(森某)의 철물전에서 길이 오촌 가량 되는 단도를 사 가지고 박 씨의 문전을 배회하며 기회를 엿보았건만 역시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도로 숙소로 돌아갔으며 삼월 십일 박병래 씨와 윤애경 씨의 결혼식날이 당도하자 피고는 단도를 품은 채로 식장에도 참예하였고 필경 많은 손님이 들락날락하는 조선호텔에까지 어렵지 않게 잠입한 것이다.

피고는 마치 재판장을 비웃는 듯이 눈에 미소를 띠워 가며 사실 하나도 부인치 않고 묻는 대로 오직 “그렇소”란 한 마디 답변을 되풀이한 까닭에 공판은 착착히 진행되었는데 심리는 박병래 씨를 칼질하던 광경에 들어가, 재판장 : 침실문을 어떻게 열고 들어갔는가?

피 고: 손으로 밀치니 저절로 열리었소.

재판장: 그 때 신랑과 신부는 무엇을 하고 있던가?

피 고: 침대 위에 나란히 앉아 있었소.

재판장: 그 때 피고는 박병래에게 대하야 군자금을 청구하였는가?

피고는 이 말을 듣자 웬일인지 복받치는 웃음을 참지 못하며 잠시 입을 가리웠다가 간신히 “그렇소”라고 답변하매, 재판장 : 얼마를 청구하였는가?

피고는 또다시 웃음을 띠우고 한동안 무엇을 생각하는 듯하더니 마치 재판장의 말을 흉내는 듯이 “글쎄요, 얼마를 청구하였던가?”

재판장: 제가 청구한 금액도 잊었단 말인가? 피고가 경찰에 와 검사국과 예심정에서 공술한 바에 의하면 삼만 원을 청구하였다니 그 액수에 틀림이 없는가?

피 고: 오 올치, 참 삼만 원을 청구하였소.

재판장: 청구할 그 때에 피고는 품에서 칼을 빼었는가?

피 고: 아니오, 칼은 침실에 들어갈 때부터 손에 들고 있었소.

재판장: 그래 박병래는 피고의 청구를 거절하던가?

피 고: 그렇소.

재판장: 거절을 당하자 피고는 박병래를 찔렀는가?

피 고: 그렇소.

재판장: 몇 번이나 찔렀는가?

피 고: 팔을 한 번 찌르매 피가 쏟아지므로 그대로 물러섰소.

그때 문득 방청석으로부터 가슴을 찌르는 듯한 울음 소리가 터져 나왔다. 방청객은 물론이요 변호사며 재판장과 피고까지 놀라 그리로 시선을 돌리었는데 거기에는 한 오십 세 가량 되어 보이는 노파 하나가 제 손으로 제 가슴을 뚜드리며 “아이구, 이 일을 어찌하나!”하고 방성통곡한다. 원정이며 간수며 경관이 때를 옮기지 않고 방청석을 헤치며 그 노파를 끌어내노라고 법정은 한동안 야단법석을 이루었는데 이 광경을 바라보던 피고는 물인지 불인지 모르고 그 노파에게로 뛰어 달려들며 “어머니! 어머니!”하고 부르짖어 법정은 한층 더 물 끓듯 하였으며 울던 노파는 마츰내 원정에게 꺼들리어 문 밖으로 내치게 될 제 몸부림을 치며 “활해야! 활해야! 언제나 다시 만나볼까!” 하고 느껴우는 한편으로, 피고 또한 간수의 손길 발길에 차이고 쥐어질리면서도 어머니에게로 향한 고개를 돌리지 않고 목 메인 소리로 “어머니! 어머니! 용서해 주십시오.”하고 외우치는 광경은 목석이라도 한줌 동정의 눈물을 금하기 어려웠다.

잠시 질서를 정돈한 후 다시 공판을 속행할 제 피고는 피를 보고 무서움을 참지 못하여 그대로 뛰어나와 전기 누이의 집에 은신하고 있던 중 양심의 가책에 견디다 못하던 차에 나날이 신문지상으로 보도되는 것을 보면 자기로 말미암아 애매한 딴 사람이 까닭 없이 고통을 받는 듯하므로 마츰내 뜻을 결단하고 스스로 서대문서에 자현한 것인 바 이로써 사실심리는 끝내고 잠시 휴정한 후 오후에는 검사의 구형과 변호사의 변론이 있을 터이라더라. (오후 일시 삼십분기)

이십구일 신문에도 그 공판의 속보가 낫다.

……작지 보도와 같거니와 예정과 같이 동일 오후 두시 경에 다시 개정되자
대원(大原) 검사는 일어나 곧 논고에 들어갔는데 피고는 만세
소요(萬歲騷擾) 당시에도 그 주모자의 하나로 자기가 다니는 학교 학생을
선동하였으며 그후 계속하여 교묘히 경찰의 눈을 피해가며
『독립신문』이란 불온문서를 배달하였고 또다시 만주 방면에 건너가서
군자 모집중 강도 범행을 하였을 뿐인가, 다시금 경계망을 돌파하고
경성에 잠입하여 박병래를 협박하였으며 나종에는 죽일 뜻을 품고 칼까지
준비한 후 다른 때와 다른 날도 많겠거늘 인생의 가장 기쁜 결혼
당야에 흉행을 감행한 것은 그 잔인포학한 데 놀랄 밖에 없다.
비록 전과를 뉘우치고 경찰에 자현하였다 하나 그 죄악은 도저히 삭칠
수 없는 바인즉 제령 위반과 강도미수와 살인미수죄로 징역 오년에
처함이 상당하다고 가혹한 논고가 있었더라.

검사의 구형이 끝나자마자 그 때까지 방청을 하고 있던 박병래 씨의 부인 윤애경 여사는 별안간 “으악”외마디 소리를 치고 그 자리에서 기절하고 말았다 . 전번 피고의 어머니로 말미암아 소란하던 법정은 두 차례로 다시금 요란하였는데 경관과 원정의 협력으로 그 부인을 법정 밖으로 엇메어나가자 방청석은 총기립이 되어 그 부인의 뒤를 좇아 나오는 이가 많아 제지하기에 매우 곤란하였으며 그 부인은 경관의 주선으로 재판소 근처 종로 병원에 즉시 입원시켰다는데 첫날밤에 자기 남편을 찌른 흉한의 공판을 방청하는 것부터 이상한 일이요 그 구형을 듣고 기절까지 한 것은 더한층 사람의 호기심을 끈다 하겠더라.

검사로부터 오년 구형이 있었다 함은 별항 보도와 같거니와, 윤 변호사는 일어나 피고의 죄상은 비록 가증하다 하겠으나 아직 만 이십 세도 못 된 미성년자의 일이요 또 이미 번연히 전과를 뉘우치고 경찰에 자현하였으니 그 정상엔 많은 참작을 하여 될 수 있는 대로 경하게 처벌함을 바란다 하였으며, 그 뒤를 이어 이 변호사는 일어나 법률의 근본 뜻은 사람을 처벌함에 있지 아니라고 징계함으로써 개과천선시킴에 있나니 그러면 이 피고로 말할진댄 이미 제 양심의 가책으로 말미암아 지난 날의 죄악을 절절이 느끼는 터이어늘 징벌할 필요가 어데 있느냐, 무죄 판결을 나림이 법의 정신에 적당한 줄 믿으며 또 피고가 피해자와는 하등 개인적 감정이 있는 것이 아니요 옳든 그르든 민족을 위한다는 정신 밑에 한 노릇이며 협박의 무기로 칼을 준비한 것이지 결코 살의를 품은 것은 아니다, 만일 살의가 있었다면 피해자는 저항도 아니 하였고 그 곁에는 잔약한 여자 하나이 있을 뿐이어늘 한 번 찌르고 그대로 돌아갈 까닭이 없지 않으냐, 살인미수란 천부당 만부당한 말이요 상해(傷害)로 볼 수밖에 없다고 열변을 토하였으며, 끝으로 재판장은 피고에게 향하여 무슨 할 말이 없느냐 물었으나 피고는 별로 할 말이 없다 하매 즉시 폐정을 선언하였는데 판결 언도는 오늘 칠월 오일이라더라.

삼십일 신문에는 윤애경 여사에 대한 기사가 조금 났다.

박병래 씨의 부인 윤애경 여사가 김활해의 공판을 방청하던 중 돌연히 혼절되어 종로 병원에 입원하였다 함은 작일 보도한 바어니와 이 급보를 듣고 그 남편 되는 박병래 씨는 곧 현장으로 달려와서 병원을 옮겨 세브란스 의원에 입원 치료 중인데 그후 경과가 불량하여 열이 사십 도 대를 왕래하므로 그의 가족들은 근심과 걱정으로 지내는 터이나 일시의 흥분으로 생긴 것인즉 생명에까지는 관계가 없으리라더라.

그후 칠월 육일부 신문에, 기보와 같거니와 …… 예정대로 작 오일 오전 십일시 경에 복전(福田) 재판장으로부터 사년의 징역 언도가 있었는데 피고 김활해는 조금도 슬퍼하거나 원통해 하는 기색이 없이 다시 공소치 않겠다고 단언하였다더라.

내가 모아둔 신문쪽지는 여기서 끝나고 말았다. 이것만 보시면 현명하신 독자는 사건의 윤곽만은 짐작하실 것이다. 나는 어서 바삐 이 긴 이야기의 원대문으로 들어가야 되겠다. 그러나 한 마디 말해둘 것은 신문기사란 결코 사건의 이면을 들추어내는 것이 아니요 오직 사실을 사실대로 보도함에 그칠 따름이다. 다시 말하면 사건의 드러난 외면을 수박 겉 핥기로 보는 대로 듣는 대로 기록할 따름이다. 기자도 귀신이 아닌 다음에야 드러난 사실 밑에 또 숨은 사실이 있는 있고 그 숨은 사실의 열 번 벗기고 백 번을 벗겨도 그 속에도 숨은 사실이 있는 것이야 어찌 낱낱이 알아 내일 수 있으랴. 그러므로 사실의 껍데기만 가지고 ‘오직 이것이 사실이어니’하고 튼튼히 믿었다가는 도리어 참 사실을 오해하기 쉬운 일이다. 위선 여기 모아 놓은 기사를 유심히 훑어보더라도 의심되는 점이 한 두가지가 아닐 줄 안다.

그것은 현명하신 독자의 판단에 맡기려니와 그렇다고 이 기사 전부가 거짓이냐 하면 또한 그런 것도 아니니 사실의 진상과 벗어나고 혹은 전연히 배치되는 일이 없지 않다 하더라도 그 중에 얼마쯤 참다운 사실도 버들잎 새로 새어흐르는 햇발처럼 여기저기 번쩍번쩍할 것이다. 다른 것은 다 어디로 갔든지, 어떤 청년 하나이 박병래와 윤애경이가 혼인하던 첫날밤에 신랑 박병래를 칼로 찌른 것과, 얼마 후에 김활해란 청년이 그 진범인으로 서대문서에 자현한 것과, 경찰 사법에서는 그를 진범인으로 인정하였건만 윤애경 홀로 부인한것과, 김활해를 검사가 오년 구형하는 소리를 듣고 윤애경이가 기절한 것과, 김활해란 청년이 사년 언도를 받아 복역하게 된 것만은 엄연한 사실이다. 이것만 독자가 기억해 주신다면 내가 신문 쪽지를 초한 수고는 삭쳐질 것 같다.

二[이]. 출 옥 하 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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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 아츰이다. 하늘은 말갛게 개었으되 그래도 사라진 듯 만 듯한 구름 흔적으로 말미암아 꿈꾸는 처녀의 눈동자 모양으로 게슴츠레하게 조으는 듯. 내 끼인 공중을 도금칠하며 투명한 햇발이 나리매, 그 닿는 곳마다 부드럽게 녹여서 우단결같이 포근포근한 느낌을 자아낸다. 포플러 나뭇가지에 깃들인 새들은, 제 발 밑에 움직이는 푸른 싹을 축복이나 하는 듯이, 제깔제깔 갖은 노래를 부르다가 이 세상이 얼마나 넓고 자유로운 것을 시험하려는 것처럼 푸드득 날아오른다. 빛물결을 짓치며 헤엄치는 그 이슬 젖은 나래는 사금을 뿌린 듯이 점점이 번쩍인다.

모악재를 넘어오는 바람도 개나리 향기를 실었건만 서대문감옥 부근에 엉기인 음산한 기운은 헤쳐질 줄 몰랐다. 흉물스럽고 엄청난 우리, 이 세상의 기쁨과 행복과 자유를 한입에 집어 삼키는 그 주홍 같은 아가리가 밝고 따스하고 즐거운 봄 입김조차 들이마셔 버린 것이다. 그 대신, 마치 맑은 물에 묵즙(墨汁)을 흘리는 오징어 모양으로 싸늘하고 음울하고 캄캄한 안개와 냄새를 무럭무럭 피우는 것이다. 그것은 길이 넘는 번들번들하고 어마어마한 벽돌담으로부터, 사나운 짐승의 이빨 모양으로 뻐드러진 쇠창살로부터, 서려 나오는 김이다. 거기는 갇힌 이의 한숨과 눈물과 살과 피로 켜켜이 때가 앉았고, 스러진 희망의 헐떡임, 속절없이 가슴만 미여지는 원한의 울음, 하늘도 무너지란 저주의 중얼거림으로 곰팡이 슬었던 것이다. 이 몸에서 저 몸으로 열 번 스무 번 임자를 갈았건만 그래도 헤어지지 않는 제 목숨을 자랑하는 옥의의 냄새, 식당과 침실과 변소가 한테 뒤섞인 냄새, 온기에 녹고 살에 썩은 널쪼각 냄새도 여기 품긴 것이다. 그나 그뿐인가. 사람의 기름으로 반들반들해진 손자물쇠와 발꼬락의 살을 씹으면서 자그륵자그륵 하는 울림과, 유리로 맨든 듯한 눈을 흘기는 간수들의 철걱철걱하는 칼 소리를 들으면 거기는 언제든지 얼음 위를 거쳐 오는 소소리바람이 불 뿐이다.

이 흉물스럽고 어마어마한 괴물 앞에 펼쳐진 광경은 또 얼마나 참담하냐.

거기는 물오른 백양목 하나 푸른 가지를 뻗지 않는다. 나는 새조차 이 이승의 지옥 가까이 오기를 꺼리는 것처럼 그 자유로운 나래를 펴지 않는다. 송장의 살빛 모양으로 검누른 길만 쓸쓸하게 뻗쳐 있어 바람을 따라 일어나는 몬지는 마치 저승길을 재촉하는 귀신의 무리인 듯싶었다.

길 건너 늘어선 집들에도 또한 이 흉물의 품은 먹즙이 묻었다. 그 몬지와 그을음으로 범벅이 된 ‘변도 차입소’(弁当 差入所)란 형형색색의 간판이 어수선 산란하게 걸린 것만 보아도 흉측한 느낌을 일으킨다. 더구나 기둥 하나 추녀 하나 바르고 번쩍한 것이란 찾기에 힘들고, 낱낱이 굽어들고 찌그러지고 검정이 앉은 꼴이란 지옥의 가마솥을 상상하게 한다. 이따금 바람이 일면 집집이 피우는 연기와 함께 더불엉더불엉 하는 그 간판은 춤추는 해골도 이러할 듯.

문득, 뿡뿡 하고 고함을 치며 화려한 자동차 한 채가 쏜살같이 달려온다.

햇발을 받아 번쩍이는 ‘헤드라이트’며, 윤이 지르르 흐르는 듯한 그 검은 몸뚱아리가 얼마쯤 이 음산한 공기를 헤치는 듯하였다. 감옥 정문 앞 언덕 아래 스르르 걸음을 멈추려 할 제, 그 창경 안으로 개나리 한 가지가 아른아른이 내다보일 때는 이 자동차야말로 이 쓸쓸한 지옥에 ‘봄’을 싣고 온 듯하였다.

자동차가 닿자, 세비로 웃막이에 아랫도리엔 기마복을 차린 갈걍갈걍한 운전수는 운전대에서 선득 나려와 읍하는 듯이 고개를 숙이고 공손히 문을 열었다. 그 안으로부터 귀부인 한 분이 나타났다. 까마귀 대가리만한 칠피 구두코 하나가 조심스럽게 땅을 밟자 팽팽한 검정 비단양말 위로 힌 ‘하부다에’ 치마가 조금 치켜 올라가는 듯하더니 구두 하나가 마저 나려서며 치마는 사르륵하고 나부꼈다. 그 아름다운 모양과 그윽한 향기로 말미암아 지금껏 음침하고 퀴퀴하던 그곳 공기는 별안간 향기롭고 밝아지는 듯하였다.

그 부인은 자동차를 배경으로 감옥문을 향해 섰다. 나이는 스물을 얼마 지냈을까. 키가 조금 큰 듯함은 몸이 가냘픈 탓인 듯. 그 얼골은 검정 물위에 떠오른 백련 모양으로 희다. 몹시 희다. 중병 치르고 난 이에게나 볼 수 있는 흰 빛이다. ‘희’다느니보담 ‘할쑥’하다는 것이 적당할는지 모르리라. 귀를 살짝 덮어서 뒤로 넘긴 트레머리는 몇 올이가 풀려서 번듯한 이마 위에 하늘하늘 나부끼다가, 호박빗으로 번쩍이는 두어 카락이 상아로 깎은 듯한 귀골스러운 오똑한 코 끝에 남실남실 춤을 춘다. 앵두물을 들인 듯한 예쁜 손톱 끝으로 귀치 않은 듯이 걷어올리면서, 큼직하고 게슴츠레한 눈을 잠깐 감는 듯하다가 다시금 맥맥히 감옥문을 바라본다.

일 분! 이 분! 입술을 몇 번 물어뜯더니 그 부인은 다시 자동차에 오른다.

앞길을 거닐고 있던 운전수는 황급하게 앞으로 오며,

“돌아가시랍시오?”

라고 물었다.

“아니야!”

그 부인은 별안간 얼골빛을 변하며 한 마디를 쏘았다. 가느나마 노기를 띤 소리다.

내가 이러고 어물어물하다가 “ 그대로 갈 줄 알고. 자동차를 다시 탔기로 가잔 말이 뭐야! 남의 마음을 몰라도 분수가 있지!”

그 한 마디 속에는 이런 뜻까지 품겨 있은 줄이야 멀쑥한 운전수는 꿈에도 몰랐으리라.

자동차에 오른 뒤에도 그의 눈은 감옥문을 떠나지 않았다. 초조한 듯이 몇 번이나 팔목에 낀 돈짝만큼 백금 시계를 나려다보며 안절부절못하였다.

십 분 가량 지냈으리라. 감옥 정문 옆 조그만한 나무문이 덜컥 하고 열리며 흰 옥양목 두루막에 캡을 눌러쓴 장대한 청년 하나이 짚세기를 신고 쫓기는 듯이 뛰어나왔다.

감옥에서 나오는 청년을 알아보자 그 부인은 마치 무엇에 튕기는 듯이 몸을 일으켜 천방지축으로 자동차를 뛰어나렸다. 앞으로 꺼꾸러질 듯 질 듯하면서 비틀비틀 그 청년을 향해 종종걸음을 쳤다.

그 부인은 다짜고짜로 어리둥절하고 서있는 그 청년의 손을 잡았다. 할쑥한 그 얼골이 파랗게 질리는 듯하였다. 왼 몸은 사시나뭇잎 모양으로 떨었다. 소나기를 만나 파란 꽃잎처럼 갈기갈기 찢어질 듯하던 입술은 간신히 말 한 마디를 맨들어내었다.

“활해 씨!”

이 부르짖음이 군호를 친 것같이 그의 눈으로부터 우박 같은 눈물이 쏟아졌다. 그 푸르게 떠는 두 뺨은 뒤를 이어 구을러나리는 눈물 방울에 놀라기나 한 듯이 한층 더 흔들리었다.

그 청년은 조금도 감동되는 빛이 없고 떡벌어진 어깨판으로 숙인 여자의 고개를 눌르는 듯이 서 있을 뿐이다.

여자는 더욱 느껴 울며 눈물 젖은 얼골을 그 청년의 가슴에 비비대자 또한 번 부르짖었다.

“활해 씨”

그 청년은 또 아모런 대꾸가 없었다. 오랫동안 햇빛 못 보는 감방살이로 말미암아 뜨고 시여진 보송보송한 얼골엔 표정 하나 떠오르지 않았다. 여자의 우는 모양도 부르짖은 꼬리도 도모지 모르는 듯하였다.

이 여자야말로 지난날 자기의 가슴에 첫사랑의 꽃을 피게 한 윤애경이가 아니냐. 이 여자야말로 쓰리고 아픈 신련(辛戀)의 못을 심장 속 깊이 박아 준 윤애경이가 아니냐 턱없는 . 사실로 사년 동안이나 기나긴 세월을 쇠창살 안에서 보낸 것도 이 여자 때문이 아니냐. 그 애닯은 모양이 선연히 감방문을 열고 나타날 제 몇 번이나 불안한 죄수의 새벽잠을 소소라쳐 깨었던고.

활해는 이를 잊었는가. 붉은 옷을 벗을 제 지난날의 기억이란 기억도 머리로부터 벗어던졌는가.

생지옥 문밖을 내치게 될 제 그의 앞에는 ‘여자’가 나타났다. ‘여자’!

‘여자’! 독사와 같이 젊은 죄수의 몸에 감기고 가슴을 물어뜯던 ‘여자’의 환영이 참으로 제 앞에 나타났다. 향기로운 냄새와 어여쁜 얼골과 부드러운 손과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지고 ‘여자’가 제 코앞에 나타났다.

주린 감각은 염치도 코치도 차릴 줄 몰랐다. 숨 쉬는 대로 그 짜릿짜릿한 향기는 핏방울 핏방울에 샅샅이 퍼지고 스미고 녹였다. 조그만한 새 모양으로 제 손아귀 속에서 파닥거리는 그 손의 보들보들한 움직임, 발갛게 달은 쇠와 같이 두루막을 태우고 저고리를 태우고 살가슴까지 파고 들어오는 듯한 뜨거운 그 얼골의 비비적거림! 활해는 황홀한 공작 같은 꿈길을 헤매는 듯하였다. 회오리바람에 타오르는 불길과 같이 그의 몸은 끓었다. 달고 쓴 지난날의 기억도 사라지고 말았다. 말문도 닫히고 말았다. 육식조(肉食鳥)의 그것같이 번쩍이는 그의 눈엔 ‘윤애경’이가 보이지 않고 오직 고개 숙인 ‘여자’의 보얀 목덜미가 보일 뿐이다.

한동안 북받쳐 나오는 눈물을 걷잡지 못하던 애경은 간신히 울음을 거두었다. 어룽진 얼골을 들어 활해를 쳐다보며,

“활해 씨! 용서해 주세요.”

“…….”

활해의 입술은 여전히 잠긴 옥문과 같이 꿋꿋이 닫히었다.

자기의 뿌린 눈물과 던진 말이 방위나 때린 듯이 아모 보람이 없는 것을 느끼자 애경은 저 혼자 울고 부르짖고 한 것이 조금 겸연쩍었다. 한 번 주위를 둘러보고 여기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 것을 갑자기 깨달은 것처럼,

“가세요.”

하고 활해를 끌었다. 이 말만은 효과가 있었다. 마치 자석에 끄을리는 쇠끝 모양으로 활해는 애경을 따라 걸음을 옮기었다. 이 때에 애경은 활해가 짚신 신은 것을 발견하였다. 그 얼골은 새빨개졌다.

“저런, 구두를 잊었구먼.”

애경은 출옥하는 활해를 위해 의복 일습을 차입하였건만 미처 구두 생각을 못하였던 것이다. 그를 위하는 정성이 첫걸음에 주밀치 못한 제 자신이 얼마나 원망스러운지 몰랐다.

“저를 어째? 짚신을 신으시고…….”

하고, 그는 울 듯이 또 한 번 뇌였다.

활해와 애경은 자동차를 탔다.

자동차는 움직이었다. 폭포수와 같이 나리퍼붓은 시원한 봄바람, 넓고 넓게 전개된 빛과 밝음의 세계! 마른 물꼬에서 퍼덕거리는 고기가 푸른 바다에 놓여 꼬리를 치며 달아날 때의 느낌도 이러할 듯. 널조각에 배기고 굳은 몸에 푹신푹신한 자리는 얼마나 부드러운가. 눈앞에 드리워진 반쯤 피고 반쯤 맺은 개나리 가지는 얼마나 풍정이 있는가. 활해는 이것이 생시가 아니고 꿈인듯싶었다. 꿈이라면 꿈인지도 모르리라. 지난날의 사랑, 오늘날의 원수 애경과 만난 것부터 벌써 꿈이다. 그와 한 자동차에 실리는 몸이 되고 그와 어깨를 겨누고 앉은 것은 암만해도 꿈 아닌 생시에는 있을 수 없는 일이리라. 그의 인도를 받아 가는 길도 또한 꿈길이리라.

복잡한 감정이 납덩이처럼 그의 가슴을 누르려 할 제 문득 차체는 흔들리었다. 옆에 앉은 애경의 몰씬몰씬한 팔이 무너지는 듯이 실리었다. 그의 몸은 화끈 하고 달았다. 코를 찌르는 향기, 보얀 손목, 숨길을 따라 불룩거리는 젖가슴의 윤곽이 새삼스럽게 눈에 띄이었다. 한 순간에 ‘여자’의 매력은 또다시 모든 기억, 모든 감정을 사로잡고 말았다.

“되는 대로 되어라.”

활해는 몇 번이나 뱃속으로 외우친지 몰랐다.

애경은 애경으로 가지가지 생각의 물 끓듯이 치밀리었다. 활해에게 할 말이 겹겹으로 쌓이었다. 이 어두운 굴속에서 별안간 세상에 뛰어나온 사람에게 알려줄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이 앞으로 전개될 그와 저와의 관계도 이 자동차 안에서 작정할 필요가 있었다.

자동차는 달아난다. 애경은 안절부절못하며 몇 번이나 말부리를 따려 하였건만 좀처럼 입은 벌어지지 않았다.

“활해 씨!”

애경은 우선 또 한 번 불러 보았다. 활해는 놀랜 듯한 얼골을 돌리었다.

“활해 씨! 용서해 주시겠어요?”

하고, 활해의 얼골을 쳐다보았다. 그 얼골은 나무나 돌로 생긴 듯이 육 하나 움직이지 않는다. 애경은 죽을 힘을 다해 말끝을 이었다.

“물론, 용서하실래야 용서할 수 없는 죄인 줄도 알아요. 당신의 사랑을 저버린 저의 입으로 용서를 빈다는 것부터 너무 비위 좋은 수작인 줄도 알아요 저의 명예를 위하여 . 저의 행복을 위하여 사년 동안이나 사년 동안이나 무서운 고통을 받으신 당신 앞에 죽음으로 용서를 빌어도 시원찮을 줄 알아요…….”

애경의 눈에는 또 서리가 맺히었다.

“……저도 사람이에요, 짐승보담 못한 짓을 한 년이지만 저에게도 실낱 같은 양심이 있었나 봐요. 저도 사년 동안 무서운 번민과 가책에 몸 둘 곳을 몰랐어요…….”

애경의 얼골엔 열이 올랐다. 그 입술은 떨린다.

“……저도 결심을 하였습니다. 이 조그마한 몸뚱아리와 썩어진 마음이나마 당신을 위해 바치겠다고 이 모진 목숨이 끊어질 때까지 당신을 위해 물에라도 뛰어들고 불에라도 뛰어들겠다고. 당신이 받아 주셔도 좋고 아니 받아 주셔도 좋고 앞날의 제 생활을 선물로 드리겠다고…….”

애경은 제 말에 스스로 흥분되어 잠깐 가쁜 숨을 돌리었다. 그제야 살기를 띤 듯한 활해의 눈동자가 뚫을 듯이 제 얼골에 박힌 것을 보았다. 어쩌면 다정과 웃음에 번쩍이는 그 눈동자가 저렇게 험상궂게 변하였는가. 애경은 그 눈초리가 무서웠다. 올랐던 열이 갑자기 식어지며 으쓱하고 등에 찬 소름이 끼치는 듯하였다.

애경은 그 눈초리를 피하는 듯이 고개를 숙였다. 그의 가슴은 아팠다.

자동차는 닫는다. 욍욍 하는 전차 소리, 와글와글하는 사람 소리, 자동차는 어느 결엔지 시가에 들어선 모양이다.

애경은 무슨 결심을 한 듯이 얼골을 들었다.

“활해 씨! 우리 남매가 됩시다. 승낙하시겠어요?”

하고, 불쑥 이런 말을 하고, 애원하는 듯이 아첨하는 듯이 활해를 쳐다본다.

활해도,

“이것은 웬 소리냐?” 하는 것처럼 애경의 얼골을 마주 보았다.

“제 오빠가 되어 주셔요, 네?”

“…….”

“인제 저도 활해 씨를 오빠라고 부를 테니 활해 씨도 저를 누이라고 불러 주세요.”

하기 어렵단 말도 꺼내 놓고 보니 그리 못할 말도 아닌 듯하였다. 애경은 벌써 남매나 된 듯이 그 얼골은 번쩍이고 목소리도 아까와 같이 서름서름한 점이 없어졌다.

“자, 인제부터 불러요, 오빠!”

할쑥한 그 얼골엔 어색하나마 오래간만에 웃음의 잔물결이 구비쳤다.

“왜 대답을 않으셔요? 자, 또 부릅니다, 오빠!”

하고, 이번에는 제법 소리를 내어 웃었다. 옥을 바수는 듯한 그 웃음소리!

옛날에 듣던 그 쾌활한 웃음소리! 활해의 머리 속에는 지난날의 ‘애경’이 가 역력히 살아왔다.

“흥, 오빠!”

활해는 무거운 입을 열어 탄식하는 듯이 중얼거렸다. 시방껏 굳게 잠기었던 활해의 말문이 터진 것만 애경에게는 얼마나 반가운지 몰랐다. 그는 두 손뼉을 마주 칠 듯이 기뻐하며,

“그래요, 오빠예요, 제 오빠예요. 저를 누이라고 불러 주세요, 자아 누이라고 불러 주어요.”

하고 어린애 같이 졸랐다.

“흥, 누이!”

“예! 오빠!”

애경은 신기한 듯이 또 한 번 웃었다.

어느 결에 자동차는 닿을 데 닿았다.

재동 꼭대기를 거진 올라와 취운정에서 얼마 나려오지 않은데, 두 길이 넘을 듯한 벽돌담이 머리에 비쭉한 유리 조각을 꽂고 철옹성같이 에워쌌는데 어마어마한 솟을대문이 높다랗게 솟아 있다. 큼직한 사기 문패에 뚜렷이 ‘박병래’(朴秉來)라고 쓰인 세 글자가 위협하는 듯이 활해의 눈을 쏘았다. 그 문패를 노리는 듯이 쳐다보는 활해의 가슴은 이상스럽게 뛰놀았다.

애경에게 꺼들리어, 아니 ‘여자’의 매력에 꺼들리어 황홀한 가운데 허턱대 놓고 자동차를 탔으되 혈마 여기 오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하였다.

자기로부터 사랑을 뺏은 원수, 자기의 서리 같은 칼날에 첫날밤의 기쁨과 행복이 부서진 피해자! 그의 집에 올 줄이야. 감옥 나오는 첫걸음이 이 집 일 줄이야. 세상에 기괴한 인연도 있고는 볼 일이다.

자동차가 뿡뿡 하며 몇 번 군호를 치매 닫히었던 솟을대문은 좌우면으로 훨씬 열리었다. 자동차는 흥청하며 한 번 춤을 추는 듯하더니, 돌로 밀어놓은 것같이 누그러운 구배(勾配)를 지은 문턱을 넘어 쑥 문 안에 들어서자 가장 힘드는 고역이나 치르는 것처럼 털털쇄쇄 하며 찬 숨을 내어쉰다.

자동차 양옆에 웅긋쭝긋 늘어선 하인들에게 눈으로 인사를 받으며 애경은 나려섰다. 머뭇머뭇하는 활해를 향하여,

“어서 나리셔요.”

하고, 씽긋 웃어 보였다.

활해는 지금 와서 망설일 형편이 못 되는 것을 잘 알았다. 시커먼 눈썹을 조금 찡기며 입을 다물고 나려서는 그의 몸에는 이상한 힘이 넘치었다. 홑몸으로 적진에 들어서는 기사 모양으로.

큰 대문을 지났건만 또 대문 둘이 있었다. 왼편 손대문 위로 소쇄한 사기 벽돌로 지은 양옥 이층이 내다보이고 잇달아 조선식 기와집이 늘어선 것은 주인의 서재와 사랑이 있는 곳이리라. 앞선 애경은 오른편 대문을 열었다.

활해의 눈앞에는 서울 뜰로는 끔찍이 넓은 광장이 훤하게 열리었다.

광장이라고는 하였지만 물론 쓸쓸한 터전만이 아니다. 사랑을 격한 담 밑 가까이 총총히 늘어선 개나리와 진달래는 벌써 이른 봄을 자랑하는 것처럼 옹기종기 붙은 노란 방울 빨간 방울이 군데군데 터져 방싯방싯 웃는다. 구불구불 푸른 잔디로 W자 모양을 그린 꽃밭에도 이루 헤아릴 수 없는 화초가 봄바람의 무르녹기를 기다리며 파릇파릇 새싹이 피어오른다. 저편 포도넌출이 뻗으면 감아올린 작사리 옆엔 난쟁이 매화의 묵은 뭉걸에도 흰 봉오리가 맺히었다. 평지보담 조금 높게 석자 가랑 넓이로 돌을 깔고 그 양 가를 역시 푸른 풀로 선을 둘러 대뜰까지 이어 놓은 두어 갈래 흰 길은 넓은 뜰 앞에 서투른 손님을 위하여 갈 곳을 지시하는 듯하였다.

그 흰 길을 반쯤 걸어오자 애경은 잠깐 걸음을 멈추며 어느 곁엔지 뒤를 따라선 한 사십 남짓한 어멈을 돌아보고 넌지시 물었다.

“그 방은 치워 두었지?”

“예, 말갛게 치우고 보료까지 깔아 놓았습니다.”

하며, 무엇이 기쁜지 그 검붉은 상판에 신들신들한 웃음을 흘리다가,

“그런데요, 저어, 아씨! 그 방이 워낙 아귀차서 아직 덥지를 않았어요.”

한다. 애경은 잠깐 눈썹을 찌푸리더니,

“왜, 일찍이 불을 지피라고 일렀는데……덥지 않았으면 어쩌나……?”

조금 망설이다가 문득 생각난 것같이,

“저……아가씨는 학교에 가셨니?”

어멈은 벌써 주인의 눈치를 알아챈 듯이,

“예, 가셨어요. 참 그 방이면 매우 더워요. 오늘은 일요일이라 일찍이 오신다고 해서 아츰 군불도 넣었어요.”

하고, 부리나케 앞장을 서서 감은 제가 먼저 들어가서 그 방을 치울 작정임이라.

대뜰도 석자 높이로 벽돌로 쌓아올렸다. 신방돌도 화강석인데 길이가 넉 자는 될 듯. 분합문을 열고 서매, 마루에도 양탄자를 깔았다. 큰 뒤주가 놓일 자리엔 으리으리한 피아노 한 대가 놓였고 그 위에는 반간통이 넘은 체경이 걸려 있다. 찬장 대신으론 양탁자가 섰는데 위아래 다섯 층으로 갈라 가지 가지 유리그릇, 사기그릇이 혹은 희게 혹은 푸르게, 혹은 투명한 무늬로 혹은 찬란한 광채로 보는 사람의 눈을 어리게 하였다. 저편 구석엔 둥근 테이블 위에 큰 파초 화분 하나가 엄전하게 올라앉았다.

모든 것이 황금에 번쩍인다. 녹내 식을 취미(臭味)가 여기저기서 코를 찔렀다.

황금으로 지은 으리으리한 사랑의 궁전!

활해는 적진을 둘러보는 격으로 이 모든 것에 불 같은 눈동자를 부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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