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동염사/여참모 이후재 부인 조씨
- 閨中 女參謀 李厚載 夫人
완남군 이후원(完南君 李厚源=厚源은 廣平大君 七孫이요 黃廷彧 外孫이니 反正時 三等功臣으로 完南君을 封하였다)의 형 첨추 이후재(李厚載)의 부인 조씨(趙氏)는 풍옥헌 조수륜(風玉軒 趙守倫)의 딸이오 창강조속(滄江趙涑=涑의 一音은 수)의 누님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지개가 있어 름름한 여장부의 품이 있고 여러 경사(經史)를 능통하야 해박한 지식과 민첩한 행동이 유염남자(有髥男子)를 능히 압도하니 천성이 엄격하기로 유명한 그의 남편도 항상 감복하야 매사를 그에게 자문하고 시부모도 또한 크게 신임하야 일반 가정(家政)을 전부 그에게 위임하였었다.
그때에 포악하기로 유명한 광해군(光海君)은 일반국정을 그릇치고 무고한 신민을 함부로 죽였었는데 임자 무옥 사건(壬子 誣獄 事件) 때에 조부인의 부친 풍옥헌(風玉軒)이 또한 억울하게 죽으니 그는 그 아버지의 비명횡사한 것을 크게 원통하게 생각하야 일주일 동안이나 물 한 목음 장 한 술을 입에 대지 않고 불으지지며 통곡하다가 기절까지 하고 다시 살어 나니 보는 사람까지도 눈물을 흘리지 안는 사람이 없었다. 그는 그렇게 하루와 같이 삼년상을 치르고 그 아버지의 원수를 갚으랴고 절치부심하고 그의 아우 창강(滄江)과 여러 가지의 밀모를 하고 또 자기 남편의 아우 리후원(李厚源)을 지휘하야 김류(金瑬), 홍서봉(洪瑞鳳), 이서(李曙) 등 여러 사람과 결탁하야 반정운동을 이르키게 하고 모든 책모와 계획을 가르치며 자기는 또 자기 집 가묘(家廟) 속에 숨어 드러 앉어서 군복 수백 벌을 비밀이 제조하야 반정군에 제공하니 그는 그때 반정운동에 엄연한 여류 참모장이 되는 동시에 군수품 주계(主計)장 격이 되었다. 그 반정운동에는 물론 표면에 나슨 여러 남성 정객들의 공적이 많지만은 이면에는 이 숨은 여정객의 공적이 또한 많은 것을 잊어서 안 될 것이다. 그의 남편 형제와 친정 아우가 반정공신이 된 것도 또한 그의 충동과 지도를 받은 것이였다. 그러므로 계해(癸亥) 반정 이후에 여러 훈신들이 모여서 무슨 일을 의론할 때이면 반듯이 먼저 그에게 자문을 하고 또 그가 한 번 이리 저리 하라고 지도한 일이면 무엇이나 실패된 일이 없으니 일반이 모도 그를 흠모경복하고 따러서 평소에 여러 훈신들이 이후원(李厚源), 조창강(趙滄江)을 남다르게 대우하였었다.
그리고 그의 가로(家奴) 중에 은세(恩世)라 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위인이 간능(幹能)하고 사리가 명백하야 그가 무엇을 시키면 그보다도 더 한층 일을 잘 처리하니 그때 사람들이 모도 유시주 유시노(有是主, 有是奴)라고 층찬하였었다. 정묘호란(丁卯胡亂) 때에는 그가 가족을 다리고 호서(湖西=忠淸道)로 피란을 가고 병자호란(丙子胡亂) 때에는 또 호남(湖南=全羅道)으로 피란을 하였는데 모든 일을 그 하인에게 위탁하고 부인은 미리 그 하인을 불너서 산천의 험이(山川險易)한 것과 도로의 원근(道路遠近), 려관의 유무(旅館有無) 등을 일일이 가르처서 여사 여사이 하라고 지휘하고 그 하인은 또 그 부인의 지휘를 받아서 일호를 그릇됨이 없게 하니 란리 중 천리원정를 왕복하야도 조금도 군핍함과 랑패된 일이 없었다. 부인은 일즉이 한 아들을 낳었으니 이름은 형(逈)이였다.
그는 그의 아우 창강에게 뭇되 이 아이가 장래 자라서 집안을 수성할만즉 하냐 하였더니 창강은 대답하기를 비단 수성만 할 뿐만 아니라 후래에 복록이 무궁하리라 하니 부인은 그만 결심하야 단산(斷座)을 하고 지씨와 라씨(池氏, 羅氏)의 량가집 딸(良家女) 두 여자를 택하야 자기 남편의 첩을 삼었었다. 그 뒤에 그의 아들 이형(李逈)은 과연 아들 팔형제를 나어서 다 현달하고 또 손자 二十여 인을 낳었으니 지씨와 라씨가 그들을 보육하는데 또한 공이 많았었다. 그 후 그의 손자 록천 리유(鹿川 李濡) 시대에 이르러서 그의 비(碑)를 무덤 앞에 해 세우고 그 사실을 기록하니 세상 사람들이 그의 갸륵한 것을 잘 알게 되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