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동염사/신라 선덕여왕

新羅 (신라) 善德 (선덕) 女王 (여왕)

선덕왕(善德王)은 신라의 최초 아니 조선 역사상에 처음으로 생긴 여왕이니 진평왕(眞平王)의 따님이다. 이름은 덕만(德曼)이요 그의 어머니는 마야 부인 김씨(摩耶 夫人 金氏)니 어려서부터 성질이 관인(寬仁)하고 총명하므로 진평왕이 아들이 없이 돌아가매 나라 사람들이 추대하여 왕을 삼고 성조황고(聖祖皇姑)라고 불렀다.

그는 원래에 지감이 특이하므로 평생에 세 가지 큰 일을 먼저 알았으니 그 하나는 왕이 아직 위에 오르시기 전 어릴 때에 당(唐)나라로부터 좋은 선물이 왔는데 그것은 목단꽃의 그림 한 장과 붉은 빛, 흰 빛 세 가지 목단 꽃씨 서 되(三升)이었다.

그 그림을 보고 모든 사람이 다 같이 아름답다고 떠드는데 오직 어리신 선덕왕께서만은

『그 꽃은 필시 향기가 없으리라』고 하였다.

진평왕은 그 말을 들으시고 놀라시며 『아기는 무엇을 보고 그런 말을 하느뇨』 하고 물으셨다. 그는 『네, 그 그림을 보소서. 나비가 없지 않습니까』 하고 대답하였더니 과연 대궐 뜰에 뿌린 씨가 후일에 꽃이 피고 보니 향기가 없는 것이었다.

또 한 가지는 선덕왕이 위에 오르신 지 五년째 되던 해(西紀 六三六) 五월에 대궐 서쪽 영묘사(靈廟寺) 앞 옥문지(玉門池)라는 못에 별안간 수없는 개고리들이 떼 지어 운다는 말을 듣고 왕은 각간(角干) 벼슬에 있는 알천 필탄(弼吞) 두 사람을 불러

『지금 날랜 군사 二千명을 거느리고 빨리 서교(西郊)로 나가서 여근곡(女根谷)이란 곳에 이르면 거기 적병이 있을 터이니 잡아 죽이라』 하였다.

그들은 二千명의 군병을 거느리고 왕의 명령대로 서교로 나가 부산(富山)이란 곳 산골짜기에 이르니 과연 거기 여근곡이란 마을이 있어 백제의 병정 五백명을 쳐 물리고 또 남산령(南山嶺)에서 백제 장군 우소(于召)란 자를 잡아 죽였다.

그리고 그 뒤로 오는 백제군사 一千二百명을 남김없이 다 죽이고 돌아왔다.

이 일이 있은 뒤에 하도 그 지혜가 신기하여 『어떻게 아셨나이까』 하고 묻는 이가 있었다. 왕은

『대개 옥문지 못에서 수많은 개고리들이 모여 울었다고 하므로 여근곡에 적병이 온 줄을 안 것이니 그것은 개고리의 형상이 성낸 놈 같으니 적병이 들어음이요, 옥문이라 함은 여근(女根)—곧 여자의 음문—이니 여근에 남근이 들어가면 곧 그 남근이 죽는 것이라 그 적병들을 쉬 잡을 수가 있을 줄 안 것이요』

하고 대답하였다.

또 다른 한 가지는 어느 때 왕은 여러 신하들을 모으고 『내가 몇 해 더 지나 十六년 정미(丁未) 정월 초여드렛날 세상을 떠날 것이니 내가 죽거든 경들은 나를 도리천(忉利天)에 묻어주오』 하였다.

신하들은 놀라며 『상감마마 어찌 그리 불길한 말씀을 말씀을 내리시오. 하명하시는 도리천이란 어디 있는 곳인지 일러 주소서』 하였다.

『그럴 것이요. 내가 말하는 그 도리천은 저 낭산(狼山) 남쪽이니 그리 아오』

과연 뒷날 예언한 그날 왕은 붕어하시었다. 그리하여 신하들은 그 명령대로 낭산 아래 묻기는 묻었으나 세상에 아무도 그곳을 일러 『도리천』이라 하신 그 뜻은 아는 이가 없었다.

十년이 지난 뒤에 문무대왕(文武大王)이 선덕왕의 무덤 아래에다 사천왕(四天王寺)라는 절을 지었다.

그 절이 생긴 뒤에야 사람들은 이런 말을 하였다.

『옳아! 선덕왕께서 그곳을 도리천이라 하신 말씀이 이제 와서야 맞았다. 불경에 사천왕천(四天王天)이란 하늘의 위에 도리천이란 하늘이 있다고 하였느니……』

이 말을 듣는 이마다 선덕여왕에게 과연 선명하신 눈이 계시었던 것을 다시금 느끼어 칭송하기를 말지 않았다.

왕은 이러한 지혜와 선견의명을 가진 여왕으로서 신라 역사상 내지 조선 역사상에 다만 세 분뿐인 여왕 중에서 진덕여왕(眞德女王) 진성여왕(眞聖女王) 보담도 가장 뛰어나고 유명한 여왕이심은 무론이다.

이 왕의 시대에 건설된 문화적 유물이 또한 적지 않으니 저 유명한 첨성대(瞻星臺)와 신라 삼보(三寶)의 하나인 분황사의 구층탑(芬篁寺 九層塔)도 다 이 여왕 시대에 생긴 것이다.

그러나 이 왕 시대에 실태된 일도 또한 적지 않았으니 그 중에 큰 례는 백제(百濟)에게 四十여 성을 빼앗기고 국경의 중요지인 대야성(大耶城)과 국제 교통지인 당황성(唐項城)을 빼앗긴 것과 비담(毘曇)의 반란이 일어난 것이다.

—(三國史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