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동염사/서약봉 모친 이씨

徐藥峯 (서약봉) 母親 (모친) 盲寡婦 (맹과부) 李氏 (이씨)

경성역(京城驛)에서 북으로 향하여 조금 가면 봉래교(蓬萊橋=전날 염천교)라는 다리가 있고 그 다리에서 서편으로 바라보면 높다란 언덕 위에 뾰족히 솟아 있는 천주교당(天主敎堂)이 있으니 그 교당은 옛날 선조 때(宣祖)의 명신 서약봉 선생 성(徐藥峰 先生 渻)의 구기(舊基)였다. 약봉 선생은 대구 서씨(大邱 徐氏)의 명문귀벌로 이조 초엽(李朝 初葉)에 유명하던 문신 서거정의 종현손(徐居正의 從玄孫)이요 자는 현기(字 玄紀)니 호(號)를 약봉이라 한 것은 위에 말한 그의 기지가 약현(藥峴)의 동륵에 있는 까닭에 그리 지은 것이었다. 그는 서씨의 중시조로 다사다손하고 세세부귀를 겸전한 행복다운 인물이지마는 초년시대에는 신세가 매우 고독하고 불행하였다. 그의 부친 서해(徐解)는 비록 재행이 있었으나 二十三세에 불행 요사하고 그의 어머니 이씨(李氏)는 또한 두 눈을 실명한 가련한 청춘의 과부였다. 보통의 가정 같으면 그가 어렸을 때에 벌써 판산을 하고 어찌 되었을는지 몰랐지마는 그의 어머니는 비록 불구 폐질의 여자이나 의지가 남다르게 견고하고 경제의 관념이 또한 남보다 특이하여 파멸에 당한 그 집을 다시 일으키고 약봉으로 하여금 유명한 인물을 만들었다. 그는 불구지인으로 청춘에 과부가 되면서도 조금도 낙심을 하지 않고 고아 약봉을 다리고 이러한 결심을 하였다.

내가 불구한 몸으로 남과 같이 남의 아내가 될 자격이 없으나 부모가 이것을 속이고 서씨 집에 출가를 시켰으니 우리 남편이 보통의 남자 같으면 우리 부모를 원망하고 나를 당장에 파혼 출처할 터이나 조금도 그러한 생각이 없고 도리어 나를 불쌍히 여기고 남보다 더 사랑하여 다행히 아들까지 낳고 남과 같이 인처인모(人妻人母)의 자격을 가지게까지 되었으니 그 높은 의리와 두터운 정은 골수에까지 깊이 감명되어 죽어도 잊혀지지 않는 터이다 이제 남편이 불행히 일찍 세상을 떠나고 고아가 아직 젖꼭지를 면하지 못하여 그 장래가 어찌 될 것을 알 수 없으니 남편의 가운이 극히 위경에 빠지었다. 내가 비록 폐인이나 온갖 정성과 힘을 다하여 이 집을 재흥시키는 것이 남편의 은혜를 갚는 것이다.

이씨 부인은 이러한 비장한 결심을 하고 십 년을 하루와 같이 계속하여 집 살림을 부즈런히 하였다. 그러나 가산이 원래 빈핍한 까닭에 호구할 도리가 막연하고 눈도 또한 보지 못하므로 바누질 품도 팔 수 없고 하여 친정에서 얻어온 약간의 자금으로 청주 제조(淸酒 製造)와 유밀과 제조(油蜜果 製造)에 착수하여 여러 가지로 가공 연구한 결과 그 집의 산품이 남의 것보다 특이하게 좋다는 평판을 듣게 되고 따라서 술에는 약주(藥酒) 유밀과에는 약식(藥食) 약과(藥果)의 이름이 높았다. 藥은 藥峴집을 의미한 것이니 지금에 소위 약주, 약과, 약식이라는 이름이 그로부터 난 것이다. 그 집의 술과 과물이 이렇게 세상에 천명을 하게 되니 자연히 돈의 수입도 상당하게 되어 一년 二년을 지나는 동안에 그 맹인 과부의 수중에는 몇천 몇만의 돈이 왔다 갔다 하고 따라서 가장, 전답, 노비 등이 해마다 늘기 시작하여 불과 몇해 이내에 거부가 되고 그의 아들 약봉은 무병히 무럭무럭 잘 자라서 몇 해 전까지 빈한하던 유소 고아는 오늘에 부유한 가정의 소년이 되어 당시에 유명한 학자들에게 공부하여 문무의 학을 겸비한 큰 인물이 되었다. 진소위 어진 어머니 밑에는 악한 자식이 없다고 약봉은 원래 천질도 출중하게 잘 타고 낳았지마는 현숙한 그 어머니의 교육을 받은 까닭에 유명한 인물이 된 것이었다.

약봉는 二十三세에 과거를 하니 어머니는 눈으로 그의 얼굴은 보지 못하나 손으로 그의 등을 어루만지고 감격한 눈물을 흘리며 말하되 너의 오늘 일을 보니 나의 二十년 적공이 헛되지 않았고 내가 어느 때에 죽든지 지하에 가서 남편을 만날 면목이 생겼다 하고 또 일변으로 혼연한 웃음을 웃었다. 그러나 그 부인은 그것으로 결코 만족하게 여기지 않고 여전히 그 영업을 하고 허다한 자손의 교훈을 계을리 하지 않았다.

이씨는 성가한 뒤에 집을 새로 짓는데 특히 마루를 넓게 하여 수십간에 달하게 하며 말하되 『나 죽은 뒤 수십 년을 불과하여 제를 지낼 때이면 이 마루가 협착할 만치 제관이 많으리라』 하니 그의 말이 과연 부합되어 약봉은 아들 육형제에 손자 三十여 인을 두고 그의 자손은 모두 현달하였으며 약봉 자신도 보국판서(輔國判書)까지 하고 장자 경우(長子 景雨)는 영의정 차자 경소(次子 景霄)는 달성위(達城尉)의 귀인이 되어 모두 일대의 명벌가가 되고 그 맹과부 부인은 八十여 세의 고령으로 모든 복을 받다가 돌아가셨다. 서씨 집이 그렇게 흥왕하게 된 것은 물론 그 부인의 공덕이라 하겠지마는 약봉의 부친 서서방이 비록 일찌기 죽었으나 그 맹부인을 박대하지 않은 은덕이 또한 많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