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동염사/고려 문창왕후

西海 (서해) 龍女 (용녀) 高麗 (고려) 文昌 (문창)王后 (왕후)

작제건(作帝建)은 고려 태조 왕건의 조부였다(高麗 太祖 王建之 祖父). 그의 외조 보육(外祖 寶育)이 일찌기 그 형의 딸 덕주(兄女 德周)와 결혼하여 두 딸을 낳았으니 큰 딸은 응명(應命)이요 작은 딸은 진의(辰義)였다. 진의는 어려서부터 자색이 출중하고 재지가 비상하니 보육이 특별히 사랑하여 그야말로 장중보옥과 같이 애지중지하였다. 진의 형 응명은 어느 날 밤에 우연히 꿈을 꾼즉 자기가 오산 꼭대기(五冠山頂)에 올라가서 소변(小便)을 보았는데 그 소변이 천하로 흘러서 호호양양한 큰 바다를 이루었다. 꿈을 꾸고 난 응명은 퍽도 이상하게 생각하고 아우 진의에게 이야기하였더니 원래에 영리하기로 유명한 진의는 자기가 그 꿈을 사겠다 하고 비단 치마 한 채를 가지고 응명에게 간청하니 응명은 그것을 허락하고 진의를 향하여 마치 무당(巫堂)의 신(神) 내리듯이 二三차 그 꿈의 설몽을 하니 진의의 몸이 부르르 떨리며 무슨 소득이 있은 것 같아서 그때부터 자부(自負)하는 마음이 적지 않게 생기고 항상 장래의 큰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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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에 지나 당나라 무종의 황태자(支那 唐武宗의 皇太子=後爲宣宗)는 천하의 명산대천을 두루 구경하고 해동 고려국의 금수강산을 또 한 번 구경고자 하여 수행 몇 사람과 갖은 보물을 배에다 가득히 싣고 창파만리의 바다를 건너서 평양의 패강서포(浿江西浦)까지 이르니 때는 마침 조수가 물러가고 진흙이 강가에 가득 덮어서 상륙하기가 매우 곤난하였다. 왕자의 수행원들은 수중에 있는 돈(錢)을 펴서 상륙하니 그 땅은 뒤의 사람들이 이름하여 전포(錢浦)라고 불렀다. 왕자는 그 길로 송악군(松嶽郡)까지 와서 곡령(鵠嶽=松嶽의 別名)에 올라 산천 구경을 하다가 남방을 바라보고 말하되 이곳은 왕도지지(王都之地)라 하고 무한한 칭찬을 하더니 다시 발을 옮겨 마하갑(摩訶岬) 양자동(養子洞)에 이르니 해가 이미 저물었다. 인가를 찾아 하루밤 자고 가기를 청하니 그 집은 바로 보육(寶育)의 집이었다. 왕자는 주인 보육의 자비하고 후덕한 것도 감심하였거니와 그의 두 딸을 보고 마음에 더욱 기뻐하여 자기의 의복 터진 것을 꼬매 주기를 청하니 보육은 지나의 귀인인 줄 알고 전날 어떤 술사(術士)가 그곳에 집을 짓고 살면 외국의 귀인이 오리라 하던 말과 부합되는 것을 마음에 기뻐하며 그가 큰 딸 응명(應命)을 보냈더니 응명은 겨우 문지방을 넘어가다가 별안간에 코피가 나서 가지 못하고 아우 진의(辰義)를 대신 보내서 서로 정을 통하게 되어 두어 달 동안을 유숙하니 진의는 드디어 임신을 하게 되었다. 왕자는 얼마 만에 고국으로 돌아가게 되매 진의와 작별하며 말하되 나는 대당의 귀인(大唐貴人)이라 하고 또 활과 화살(弓矢)을 주며 만일 아들을 낳거든 그것을 주라고 하였다. 그 뒤에 진의는 일개 옥동을 낳았으니 그가 곧 왕건의 조부 작제건이요 뒷날에 추존하여 의조 경강대왕(祖 景康大王)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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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제건은 어려서부터 신용(神勇)이 있고 총명하여 나이 겨우 五六세 때에 그의 어머니에게 자기 아버지가 누구냐고 물으니 그의 어머니는 그가 그저 당나라 사람인 줄만 알고 성명은 모르는 까닭에 그냥 당부(唐父)라고 대답하였다. 작제건은 차차 자라매 재주가 비상하여 육예를 겸하였으되 특히 글씨와 활이 절륵하니 어머니가 매우 사랑하여 十六세 때에 그 부친의 주고 가던 궁시(弓矢)를 주니 작제건이 크게 기뻐하여 그 활로 쏘니 백발백중으로 못 맞치는 것이 없어서 세상 사람들이 모두 신궁이라고 칭찬하였다. 그는 자기의 아버지를 찾아보려고 상선을 얻어 타고 서해 바다로 갔더니 배가 해중에 이르러서는 별안간에 운무가 끼고 천지가 아득하여 방향을 모르게 되니 배가 가지 못하고 중류에 떠 있었다. 배에 있는 사람들은 어찌할 줄을 모르고 당황한 중 한 사람이 점을 치니 고려 사람이 있어서 그러하다 하고 그를 잡아서 물속에 넣으려 하니 그는 활을 가지고 자 진하여 물속으로 뛰어드니 거기에는 뜻밖에 큰 바위가 있어서 다행히 빠져 죽지 않고 다시 운권천청하고 풍정랑식하여 그 배도 저 갈곳으로 가고 말았다. 그는 만리창파 중 외로운 바위 위에서 갈매기 모양으로 우두커니 혼자 앉아 있더니 홀연히 백발노인이 와서 절을 하며 말하되 자기는 본래 서해 용왕이었는데 밤마다 늙은 여우(老狐)가 광채찬란한 부처의 복색을 하고 일월성진(日月星辰)을 운무 속에다 버려 놓고 소라를 불고 북을 치며 주악을 하고 이 바위에 와서 옹종경(臃腫經)을 읽기 때문에 골치가 몹시 아파 견딜 수가 없는 지라 들은 즉 당신의 활이 천하명궁이라 하니 나를 위하여 그것을 없이 하여 주면 감사무지하겠다 하니 그가 쾌연히 승락하였다. 그는 그 노인의 말을 듣고 활을 잘 메워 가지고 시간을 등대하고 있었더니 그 시간이 되니 과연 공중에서 주악 소리가 나며 오색찬란한 부처의 형상이 서북으로부터 현신하였다. 그는 그것이 진짜 부처인 줄 알고 감히 쏘지 못하였더니 노인이 와서 하는 말이 그것은 틀림없는 노호이니 아무 염려 말고 마음대로 쏘라고 하였다. 그는 그제야 의심하지 않고 활을 들고 있다가 그 부처가 또 오는 것을 보고 공중을 향하여서 힘껏 쓰니 과연 큰 노호가 화살을 따라 떨어졌다. 노인이 크게 기뻐하며 그를 맞아 용궁으로 들어가서 치하하여 말하되 당신이 나의 원수를 없이 하여 주었으니 그 은덕이 여간 큰 것이 아니라 이제 내가 당신에게 보덕을 하고저 하니 당신이 만일 당나라에 가서 천자를 보시겠다면 천자를 보게 하겠고 칠보(七寶)를 가지고 부자가 되겠다면 부자 되게 하고 본국으로 가서 어머니를 뵙겠다면 본국으로 보내줄 터이니 소원대로 말하라고 하였다. 작제건은 말하되 아무것도 다 하고 싶지 않고 고려에 가서 왕이 되고 싶으니 그것을 하게 하여 달라고 하였다. 그 용왕은 말하되 동국의 왕은 당신의 자손 삼건(三建)이나 할 터이요 당신은 아직 운이 못 되었은즉 그 외 아무것이나 소원대로 청하라고 하였다. 그는 왕천하는 아직 시운이 멀었다는 말을 듣고 낙심한 듯이 아무 말도 대답을 하지 않고 그냥 있노라니까 등 뒤에 난데없는 노파(老婆)가 나타나서 조롱적으로 픽픽 웃으며 하는 말이 그러지 말고 용왕의 따님에게 장가를 가지…… 하였다. 그는 그제야 깨닫고 그 청을 하니 용왕은 자기의 맏딸 저문의(煮旻義)를 주었다. 그는 용왕의 딸과 같이 칠보(七寶)를 가지고 장차 고국으로 돌아오려 할 때 용녀가 말하되 우리 아버지에게는 양지(楊枝)와 도야지(豚)가 있으니 그것은 칠보보다 몇 배가 넘는 보물인즉 칠보와 그것을 바꾸어 달래 가지고 가자 하였다. 그는 용녀의 말을 듣고 용왕에게 그 청을 하니 용왕이 말하되 그것은 나의 귀중한 것이나 당신이 청하는 데야 어찌 안 들을 수 있으랴 하고 또 도야지를 마저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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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제건과 용녀는 칠보와 그 도야지를 칠선(漆船)에 싣고 바다로 떠오니 순식간에 육지에 도달하고 그곳은 바로 창능굴 앞 강 언덕이었다. (昌陵窟前 江岸) 그때에 백주 정조, 유상희(白州 正朝, 劉相喘) 등은 그 소문을 듣고 개, 정, 염, 등(開, 貞, 鹽, 登) 네 골과 강화(江華) 교동(喬洞) 하음(河陰) 세 골 사람을 지휘하여 영안성(永安城)을 쌓고 궁실을 또한 신축하여 그들을 거처하게 하였다. 용녀는 처음에 오는 길로 개주(開州) 동북 산록에 가서 은바리(銀盂)로 땅을 파고 물을 떠서 먹었으니 지금 개성에 있는 용우물이 곧 그것이라 한다. 그리고 一년 후에 그 도야지는 우리 속으로 들어가니 용녀가 도야지에게 말하되 네가 만일 이곳에서 살 수 없다면 너의 마음대로 가게 하고 나도 너 가는 데로 따라가겠다 하였더니 그 이튿날 아침에 도야지는 슬며시 나아가서 송악산 남록에 누워 있으므로 그곳에 터를 잡고 새로 집을 지으니 그곳은 곧 예전 날 보육(寶育)의 아버지 강충(康忠)의 옛날 살던 집터였다. 그들은 그곳과 영안성으로 넘나들며 범 삼십여 년을 살았다고 한다. 그리고 용녀는 일찌기 송악산 새 집 침실 창밖에다 우물을 파놓고 그 우물로 들어가서 항상 서해 용궁 출입을 하였으니 광명사 동상방북정(廣明寺 東上房北井)이 그 우물이라 한다. 용녀는 항상 작제건과 약조하기를 자기가 용궁으로 갈 때에는 절대로 보지를 말아 달라고 하더니 하루는 작제건이 가만히 엿본즉 용녀는 소녀(少女)와 같이 우물로 들어가서 용이 되고 오색구름이 일어나는지라 작제건은 그것을 이상하게 여겼으나 약조가 있기 때문에 감히 말을 못 하더니 뒤에 용녀가 돌아와서 노하여 말하되 부부의 도는 신의가 소중한 것이어늘 당신이 이제 배약하였으니 나는 다시 같이 살지 못 하겠다 하고 그만 소녀와 같이 용이 되어 우물로 들어가고 다시 오지 않고 작제건은 만년에 충청도 속리산 장갑사(報恩 俗離山 長岬寺)에 가서 불경만 읽다가 죽었다고 한다. 그의 아들은 용건(龍建)이니 곧 고려 세조 왕융(高麗 世祖 王隆)이요 손자는 바로 왕건 태조이고 용녀는 후에 추승하여 원창왕후(元昌王后)가 되었다. 그리고 고려 왕씨는 이 용녀의 자손이기 때문에 왕이 되는 이는 대개가 옆구리에 용의 비늘이 있어서 왕족을 용협(龍脇)이라고도 하였다.


—筆者 曰 이것은 高麗史, 高麗世系, 金寬毅 編年通錄에서 材料를 取한 것인데 말이 너무 虛誕한 것은 勿論이고 當時 事大主義가 너무 熱中하여 王建太祖를 唐種으로 만드느라고 억지로 附會하여 한 이야기인즉 史家의 足取할 바가 못 되나 한 參考로 이것을 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