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동염사/고구려 녹족 부인의 기화

第六編. 女性에 關한 傳說 民謠•怪談•漫談•戱談[제6편. 여성에 관한 전설 민요, 괴담, 만담, 희담
高句麗 (고구려) 鹿足夫人 (녹족부인)奇話 (기화)
—平原郡 十二•三千坪의 傳說—

요새에 소위 신여성들이 모양을 내다 못하여 발모양까지 한껏 내느라고 볼이 좁을 대로 좁고 끝이 송곳 끝보다도 더 뾰죽한 굽 높은 구두를 신고 얼음강판에 뛰어가는 오리걸음 모양으로 뒤뚱뒤뚱하고 걸어가는 것을 보면 고 몹실고도 얄미운 거리의 아이놈들이 뒤로 쫓아가며 이크 염생이발 미인(羊足 美人) 보아라 노루발 미인(獐足 美人) 보아라 하고 떠든다. 그러나 그것은 다만 구두의 모양이 염생이 발이나 노루발 같다는 말이요 실상 여자의 발가락이나 또는 발톱이 노루나 염생이처럼 생겨서 그리는 말은 아니지마는 옛날 고구려(高句麗) 나라의 궁녀(宮女) 중에는 사실로 발이 사슴의 발같이 이상하게 생겨서 별명을 녹족부인(鹿足夫人)이라고 하는 여자가 있었다. 그 여자는 발만 그렇게 이상하게 생겼을 뿐 아니라 젖(乳房)이 또한 열둘씩이나 있어서 누구나 기괴하게 생각하였는데 그중에 그는 또 한 태(一胎)에 열두 형제를 낳으니 고구려 왕이 큰 괴변으로 생각하고 그 아이를 거둬 기르지 않고 목함(木函) 속에다 넣어서 서해 바다에 띄워버렸다.

그런지 수십 년 후였다. 고구려와 국토가 상접하여 여러 해를 두고 피차에 충돌이 많던 지나의 당나라는 탐탐한 야심을 또 발휘하여 고구려의 영토를 침범하는데 열두 장군(十二將 軍)이 각각 삼천 명씩을 거느리고 풍우같이 몰아서 이르는 곳마다 고구려 군사를 쳐서 피하니 그 형세가 자못 위급하여졌다. 그때 고구려왕은 그 위급한 정보를 듣고 급히 문무백관을 모아 어전회의를 열고 적군의 방비할 것을 논의하니 누구나 특별한 방책이 없고 얼굴빛이 모두 흙빛이 되어 서로 돌아다만 볼 뿐이더니 그때에 마침 궁중으로부터 녹족부인이 뛰어나와 왕께 아뢰우되 첩신(妾臣)이 듣사온즉 적군의 열두 장정은 모두 동복형제(同腹兄弟)로서 발이 사슴의 발과 같이 생겼다 하니 생각건대 전날에 첩이 낳서 버린 자식이 죽지 않고 자라서 적국의 장수가 되었는지도 알 수 없아온 즉 첩신이 시험으로 한번 가서 친해 보고 만일 사실이 부합한다면 군사의 큰 힘을 드리지 않고 일을 무사하게 해결하겠다고 하니 왕이 듣고 크게 기뻐하여 즉시 녹족부인을 적진(敵陣)에 보내었다. 녹족부인은 그길로 전지(戰地)에 가서 노루대(櫓樓臺=地名)라는 높은 곳에 자리를 정하고 글로 열두 장군을 불러 대하에 세우고 말하되 나는 고구려의 녹족부인이란 여자인데 전날에 일찌기 한 태에 十二 형제를 낳서 불행히 기르지 못하고 바다에 버린 뒤로 생사를 알지 못하여 항상 궁금 답답하게 지냈더니 이제 들은즉 장군들의 발이 모두 사슴의 발과 같다 하니 나의 아들인 것이 분명하다 하고 가슴을 헤치고 젖을 내서 짜니 열두 젖이 일시에 뽐뿌의 물 나오듯이 쏟아져 나와서 十二 장군의 입으로 들어가고 또 부인이 지어 두었던 버선 열두 켜레를 품속에서 꺼내어 주니 신통하게도 그 열두 켜레의 버선이 十二 장수의 발에 꼭꼭 들어맞고 하나도 틀림이 없었다. 그 十二 장군은 크게 놀라서 절하며 말하되 저희 여러 형제가 바다에서 정처 없는 표박 생활을 하다가 외국에 가서 장성하게 되매 부모의 있는 곳을 알지 못하여 항상 철천의 원한으로 생각하였더니 이제 뜻밖에 고구려에 와서 당신의 말씀을 듣고 또 젖을 먹어보며 버선을 신어본즉 우리의 어머니신 것이 분명하다 하고 이어서 또 눈물을 흘리며 사죄하되 불초한 자식들이 알지 못한 탓으로 감히 부모의 나라를 침략하였다 하니 녹족부인이 또한 눈물을 흘리며 十二 장군의 손을 잡고 등을 어루만지며 말하되 너희를 낳은 것도 하늘이요 너희를 버리게 된 것도 하늘이요 너희를 만나게 된 것도 또한 하늘이니 어찌 천의를 위반하여 다른 뜻을 두리요 하니, 十二 장군이 또 일시에 땅에 엎디어 절하며 말하되 저희들을 낳은 이도 어머니요 저희를 버린 이도 어머니요 저희들을 버선 신기시고 젖 주신 이 또한 어머니인즉 어찌 어머니 명령을 추호라도 감히 거역하겠읍니까 하고 즉시 군사를 헤쳐버리고 바다가에 집을 짓고 성도 쌓은 다음에 열심으로 농사를 하여 그 어머니를 봉양하게 되니 고구려의 난리도 그럭저럭 평정되고 그의 열두 형제와 녹족부인의 모자가 하루 한날같이 자미스럽고 화락하게 잘 살았다. 그러므로 그 들(野)을 세상 사람들이 이름하여 열두 삼천평(十二, 三千坪)이라 하였으니 지금 평안남도 평원군 숙천 구읍(平南 平原郡 肅川 舊邑)에서 서으로 약 오십리 되는 서해 연안에 있는 열두 삼천평이란 큰 들이 바로 그것이라 한다. 그리고 그 동내(洞里) 이름을 또 열귀리(悅歸里)라고 하였으니 그것은 녹족부인의 모자가 서로 만나 기쁘게 돌아갔다는 의미였다.

지금에 그들은 평남에서 유명한 옥야로 봄과 여름에 여러 농부들이 당시 三千 군사 모양으로 이곳저곳 헤어져서 농사를 짓고 푸른 풀 맑은 물을 쫓아서 이 언덕 저 언덕으로 뛰놀며 돌아다니는 송아지의 발자국은 옛날 녹족부인의 발자취일까 의심하게 된다. 그리고 부인의 고국인 고구려도 벌써 망한 지 수천 년에 무정한 방초만 옛터에 가득하고 부인의 애자인 十二 장군의 역사조차 찾을 곳이 전혀 없으며 다만 장군 형제들의 쌓은 옛 성(古城里의 將軍城 古址가 있다)이 바다가에 의연히 있어서 아침 저녁으로 조수(潮水)가 처서 들어올 뿐이니 비록 일종기화에 불과하는 옛이야기나마 누가 또한 감개의 회포를 금할 수 있으랴.